참 하나님을 알라(요한복음 17:3)


참 하나님을 알라!(Know the true God!)
- 데움 베룸 꼬니오스(Deum verum cognosce)


참(228) 알레디노스(alēthinŏs)  ἀληθινός, ἡ, όν

1. 진실한.  2. 참된. 3. 진리에 부합하는  
Pronunciation [ alēthinŏs ]

Etymology(어원)  / 227에서 유래
  • 1. 진실한, 참된:
    • a. 참된, 의지할 만한, 요 7:28, 히 10:22, 계 6:10.
    • b. 진리에 부합하는, 진실한, 요 4:37, 계 19:9.
    • c. 순수한, 사실의, 눅 16:11, 요 1:9, 살전 1:9, 히 8:2, 요일 2:8.
  • 관련 성경 / 참된(눅 16:11), 옳은(요 4:37), 진실한(계 3:7). 
                      [명] 참(요 1:9), 진실(계 19:11).

영생은...아는 것이니이다 
- 십자가의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을 바라보며 예수는 '영생'에 대하여 정의를 내린다.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되어 왔었다(Bernard).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호 6:3)

예레미야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다'(렘 9:24)

'안다'(기노스코)는 것은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하며 본절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에 수식하는 말로 사용됨으로 예수와 하나님의 인격적 하나됨을 증거한다(Lenski). 

하나님의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인생들에게 가장 쉽게 그리고 충분하게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앎으로써 행복과 영생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주인으로서 영생의 주체(主體)가 되신다(11:35; 행 3:15). 
한편 기도중에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1. '저희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식하는 것'이란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Lenski) 그렇게 해석하면 헬라어 원문에 무리가 따르게 된다. 
2. 예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시기 위해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이와 같은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이 견해는 무난하게 채택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표현은 메시야의 자기 증거인 셈이다(Godet). 
3.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예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표현이라고 하는 주장이었다(Westcott, Hegnstenberg). 
예수께 대한 요한의 고백은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반복 기록되었다(요일 1:3; 2:22; 4:3; 5:20 등). 
그러나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그날밤의 기억들을 잊어버렸다고 구태여 가정할 필요는 없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 백성이 나를 알지 못하여 망한다; 표준새번역, 새번역
 (My people are being destroyed because they don’t know me; NLT)”라며 구약시대의 끝자락에 기록된 호세아 4장 6절을 통해 당신에 대한 백성들의 무지를 한탄하셨던 하나님은, 신약시대를 맞이하면서 주신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새번역 (Eternal life is to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to know Jesus Christ, the one you sent; CEV)”라는 요한복음 17장 3절과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지식과 그의 은혜 안에서 자라십시오; 새번역 (grow in the grace and knowledge of our Lord and Savior Jesus Christ)”라는 베드로후서 3장 18절의 말씀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망하는" 삶에서 탈피한,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성장하여 영생을 누리게 되는" 삶의 길을 소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안다"라는 표현에는 "너희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표준새번역 (Know therefore that the Lord your God is God, the faithful God; ESV),"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See now that I myself am he!)”라고 한 신명기 7장 9절, 32장 39절과 같이 "하나님이 '주()이심'을 안다"라는 - 지난 편의 주제였던 - 의미, 그리고 “너희는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알아라. 그가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의 것이요, 그의 백성이요, 그가 기르시는 양이다; 표준새번역, 새번역 (Know that the Lord is God. It is he who made us, and we are his; we are his people, the sheep of his pasture),” “산을 지으시고 바람을 일으키시고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여 알리시고 새벽빛을 어둡게 하시고 땅의 높은 곳을 밟고 다니시는 분, 그분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다; 우리말성경 (He who forms the mountains, who creates the wind, and who reveals his thoughts to mankind, who turns dawn to darkness, and treads on the heights of the earth – the Lord God Almighty is his name)”라는 시편 100편 3절과 아모스 4장 13절처럼 "하나님이 '창조자이심'을 안다"라는 의미 등이 포함되지만, "하나님을 알라"라는 표제의 이 글을 통해 나누려는 주 내용은 "하나님에 대해(about God) 안다"라는 측면의,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관련된 말씀들입니다.

위대한 설교자이자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의 거장으로 꼽히는 존 스토트(John Stott)는 지식을 두 종류, 즉 “Information(정보)”“Intimacy(친밀함)“로 구분한 후, 전자인 “정보로서의 지식”이 머리로 아는 지식인 반면 후자인 “친밀함을 통한 지식”은 인격적인 체험과 만남을 통해 아는 지식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실상 성경에서 "안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어떤 정보를 갖고 있다는 차원을 넘어 알고 있는 대상과의 인격적 교제를 능동적으로 즐긴다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는데, “여러분에게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인해 은혜와 평강이 더욱 풍성하기를 빕니다; 우리말성경 (May grace and peace be multiplied to you in the knowledge of God and of Jesus our Lord; ESV),"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신성한 능력을 따라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하심에로 우리를 부르신 그분을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말성경 
(His divine power has granted to us all things that pertain to life and godliness, through the knowledge of him who called us to his own glory and excellence; ESV)”라는 베드로후서 1장 2, 3절에서의 "하나님과 주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지칭된 개념이 그 대표적 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All I want is to know Christ and the power that raised him to life. I want to suffer and die as he did; CEV)”라며(빌 3:10) “그리스도를 아는" 일을 자신이 바라는 것들 중에서도 첫번째의 순위로 꼽았던 사도 바울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지식에 하나가 돼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께서 충만하신 정도에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우리말성경 (This will continue until we all come to such unity in our faith and knowledge of God’s Son that we will be mature in the Lord, measuring up to the full and complete standard of Christ)”라는 주장(엡 4:13)을 통해 언급했던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 역시, 지적이고 이성적인 '앎'이 아닌 경험적이고 인격적인 '앎'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철학자이자 교수인 폴 챔벌레인(Paul Chamberlain)의 저서, “왜 사람들은 믿음을 갖지 않는가(Why People Don’t Believe)” 서문에서 역자인 제가 지적한 바 있듯, 기독교인들이 추구하는 지식의 내용이 이성과 충돌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성에 앞서는 무언가여야 함은 분명하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지식 추구의 방식 역시 이성에 의한 이해만으로 수행하는 '지적 수고'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를 바탕으로 한 '영적 향유'여야 함 또한 확실합니다. 

수 세기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이성의 관계에 대한 심오한 깨달음을 제공해 왔던 중세 신학자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의 “나는 믿기 위해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 믿는 것이다(I do not seek to understand in order to believe, but I believe in order to understand)”라는 - 이해가 되어야만 믿을 수 있다고 고집하기에 앞서 먼저 믿고 난 다음 이해를 추구하겠다는 - 촌철살인적 선언이 보여 주듯,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온전한 믿음에 이르게 된 사람만이 그분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며, 또한 이 경지가 바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지식지혜최고 수준인 것입니다.

​위에서 소개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아는 지식하나가 돼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우리말성경 (This will continue until we all come to such unity in our faith and knowledge of God’s Son)”라는 에베소서 4장 13절이 믿음과 지식(신앙이성) 사이에 존재해야 할 가장 바람직한 관계, 즉 불가분의 형태로 서로 합력하는 관계에 대해 명쾌히 설명해 주는 말씀이라면,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은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 표준새번역 (I consider everything a loss because of the surpassing worth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whose sake I have lost all things. I consider them garbage)”라고 하는 빌립보서 3장 8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란 그 외의 모든 것을 오물처럼 여기도록 만들기에 충분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지식과 지혜임을 강하게 역설하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오라(Come to Papa)”라는 게리 윈스(Gary Wiens)의 책
“하나님의 영광의 한 부분은 그분께서 자신의 일들을 우리에게 감추시는 것" 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체성운명의 핵심 부분을 당신의 마음속에 감추셨고 그러한 ‘감추어짐'을 의도하신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과 운명을 알고자 추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더욱 잘 알아 가는 일 또한 가능하도록, 그리하여 우리를 당신 가까이로 이끄시며 그런 우리와의 친밀도를 심화하려는 주님의 본래 계획 때문이라는 설명도 덧붙이고 있습니다. 

잠언 25:2
“일을 감추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일을 밝히 드러내는 것은 왕의 영광이다; 우리말성경 
(It is the glory of God to conceal a matter; to search out a matter is the glory of kings)”

신명기 29:29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The secret things belong to the Lord our God, but the things revealed belong to us and to our children forever)”

전지하시며(All-Knowing) 영원무궁하신 하나님만 아실 뿐 유한하고 제약이 많은 우리 인간은 도저히 알 수 없을 하나님의 섭리와 신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여러 방법의 계시를 통해 당신에 대해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분을 알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는 것 또한 결코 부인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민수기 12:6
“너희 가운데 예언자가 있으면, 나 주가 환상으로 그에게 알리고, 그에게 꿈으로 말해 줄 것이다; 표준새번역, 새번역 
(When there is a prophet among you, I, the Lord, reveal myself to them in visions, I speak to them in dreams)”

사무엘상 2:27
“내가 네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바로의 억압 아래 있을 때 그들에게 나를 분명히 나타내지 않았느냐?; 우리말성경
 (Did I not clearly reveal myself to your ancestor’s family when they were in Egypt under Pharaoh?)"

로마서 1:19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표준새번역, 새번역 
(what may be known of God is manifest in them, for God has shown it to them; NKJV)”​

이 같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일을 깨닫는 데에는 그를 위해 열린 마음, 보고 듣는 눈과 귀가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하나님은 어둠 가운데서도 은밀한 것들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조차도 대낮처럼 밝히신다; 표준새번역, 새번역 (He uncovers mysteries hidden in darkness; he brings light to the deepest gloom; NKJV)”라는 욥기 12장 22절과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 준다. 낮은 낮에게 그의 말씀을 전해 주고, 밤은 밤에게 그의 지식을 알려 준다; 표준새번역, 새번역 (The heavens declare the glory of God, and the sky above proclaims his handiwork. Day to day pours out speech, and night to night reveals knowledge; ESV)”라고 한 시편 19편 1-2절, “세상이 창조된 이후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분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 명백히 보여 알게 됐으므로 그들은 변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말성경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God’s invisible qualities – his eternal power and divine nature – have been clearly seen, being understood from what has been made, so that people are without excuse)”라는 로마서 1장 20절 등에서 하나님의 영을 통해 우리에게 허락된, “감추어지고,“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해 열려진 눈과 귀, 마음의 실재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29:29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The secret things belong to the Lord our God, but the things revealed belong to us and to our children forever)

"감추어진 일""나타난 일"이라는 반의어는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양면에 대해 우리의 깊은 묵상을 요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나타내신 영원한 일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몫이자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6:3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Let us know, Let us pursue the knowledge of the Lord; NKJV)”

하나님을 아는 일에 우리의 노력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는바, 그러한 노력이란 곧 성실하고 부지런한 배움과 탐구로써 말씀 속에 감추어진 진리와 지혜를 발견해 내는 일일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을 바로 알라(고린도 후서 10:3-6)

“하나님을 바로 알라”(고린도후서 10:3-6)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적인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깨닫게 되어 영적인 눈이 점점 열리면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았던 사단의 영적인 공격을 늘 받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한 사단의 영적 공격을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본문 고린도후서 10:4 절에 “싸움에 쓰는 우리의 무기는 육체의 무기가 아니라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요새라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는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거짓으로 우리를 속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성도들 가운데 사단에게 늘 속아서 감격과 기쁨과 감사와 찬양과 사랑의 승리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늘 시험에 들고 쓰러져 원망과 불평, 좌절함 속에 살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가장 큰 이유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승리하는 신앙, 모든 일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참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바로 아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5 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 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 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라고 알려 줍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의 대한 지식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사단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 즉 권위적이고 실수를 용서하지 않고 엄격히 다스리는 아버지, 우리가 잘 못할 때 정죄하고 못마땅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라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사단이 주는 마음이고 견고한 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망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과거만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의 죄까지도 다 아시고 그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 예수를 대신 십자가에 대속의 제물로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죄는 미워하시지만 우리를 절대 미워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어떠한 죄와 잘못을 했을지라도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오기만 하시면 받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탕자의 비유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사단이 만들어 놓은 하나님에 대한 외곡된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쫒아 내십시오. 
그래야 우리가 주님을 향한 열정이 생기고 섬길 수 있습니다. 
잘못된 견고한 진들을 좇아내고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사랑으로 섬기고 기쁨과 자유함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을 알라(호세아 6:3, 6, 요한복음 8:55)

하나님은 계시의 하나님이시다.
만물과 아들을 통해 그 신성과 능력을 보여 알게 하시고(롬 1:19-20)
그를 아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다(요 17:3).

신앙은 계시로 그를 알게 됨이요(롬 1:20, 벧전 1:12),
신앙생활은 하나님 아는 것 보다 높아진 모든 이론을 파하며(고후 1:13,10:5).
하나님을 힘써 끝까지 알아가는 생활이다(호 6:3).

아는 것이 힘이라 사람은 교육과 정보를 통해 열심히 알려 하는데 

철학 :  인생과 세계의 궁극적인 근본원리를 탐구
           인간의사결정권을 추구하는바 신을 거부
과학 :  현재 관찰 실험이 가능한 자연의 비밀을 연구
           관찰 불가능한 신의 존재를 부정
신학 :   정경이나 이성을 통해 하나님 자체와 그 교리를 연구
           연구의 대상이 되는 순간, 신은 무한히 후퇴
종교 :  고행, 명상, 치성으로 궁극자를 접근—빗나간 화살.

성경은 하나님을 알게하는 책
그 경륜은 창조~이적~이스라엘~독생자~성령~증인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이 알만한 것을 보여주심으로라(롬 1:19)
히브리어 ‘야다’는 관념적이 아닌 경험적인 앎을 말하는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을 체험, 곧 하나님 앎을 의미한다(눅 1:34-38).

야다(yâdaʽ)  יָדַע Storng number 3045        

1. 보다.  2. 지각하다.  3. 삿 13:21  
Pronunciation [ yâdaʽ ]

Old Testament  / 940회 사용
관련 성경 / 동침하다(창 4:1, 왕상 1:4), 알다(창 4:9, 신 9:6), 가까이 하다(창19:8, 24:16), 깨닫다(창19:33,전2:14), 간섭하다(창39:6), 허락하다(출3:19), 알게 하다(출14:4, 삼하24:2), 분별하다(신1:39, 전8:5), 생각하다(신8:5, 삼하23:13), 기억하다(신11:2), 알리다(삼상22:17), 살피다(욥35:15, 잠27:23), 아뢰다(시56:9), 측량하다(시71:15), 보다(잠14:7), 모르다(전4:13), 무식하다(사29:12), 몰지각하다(사56:11), 알다(렘1:5), 부끄럽다(렘6:15), 인정하다(렘14:20), 알리다(겔6:13), 알고자하다(전7:25), 알아보다(삼상23:22), 정탐하다(삼상23:23), 자복하다(렘3:13), 상관하다(창19:5, 삿19:22), 기억하다(출2:25), 행음하다(삿19:25), 분간하다(삼하19:35), 헤아리다(욥37:5, 사47:11), 알아주다(사58:3), 자다(삿21:11), 익숙하다(창25:27,왕상9:27), 잘하다(대하2:8), 풍부하다(대하2:12), 돌보다(잠12:10), 인정받다(신1:15), 먹다(창41:21), 탄로되다(출2:14), 나타나다(삼상22:6, 사66:14), 교훈을 받다(렘31:19), 기억하다(창41:31), 보이다(룻3:3), 예고하다(사47:13), 드러나다(잠10:9), 나타내다(욥26:3, 잠12:16), 지시하다(출33:12), 가르치다(삼상10:8, 욥37:19), 배우다(삼상28:15), 대답하다(욥38:2, 40:7), 선포하다(사12:4), 징벌하다(삿8:16), 보여주다(사40:14), 분별하다(겔44:23),인도하다(대하23:13). [명] 총명한 자(단2:21), 감각(잠23:35), 지식(느10:28), 지식인(전9:11),친구(왕하10:11, 시31:11), 친족(룻2 : 1), 친우(시55:13). [부] 능히(대하2:14), 부지중(아6:12), 반드시(창15:13), 밝히(삼상20:3), 분명히(왕상2:37, 렘28:15), 순식간에(시35:8), 부지런히(잠27:23).

약속대로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낳음으로 그에게 나타나신 이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고(창 18:1-10)
430년 전 예언대로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창 15:13)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알라고 하셨으며(신 7:8-9),
가나안 정복도 여호와께서 그들 앞서 파하신 결과임을  이스라엘로 알게 하셨다(신9:3).

성소는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는 장치였고,
역사는 여호와는 범죄한 자를 징벌하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였으며(왕하10:10)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살 길은 오직 여호와를 알되, 힘써 알자고 하였으니
여호와는 번제보다 그를 아는 것을 원하심이다(호6:1-6).

예슈아께서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 하심은
성전 된 자기 육체의 죽음과 부활로(요2:19-21)
관념적인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경험적인 예슈아 아버지 하나님을 보이시려 함이요(요14:9),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성전이 아닌
아는 것을 예배하는 성전을 보이시려 하심이다(요4:22).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요1:10)
침례 요한은 계시로 그를 알고 세상에 나타냈고(요1:33),
그는 아들을 알아야 하나님 알 수 있음을 단언하셨다(요7:29,8:19,8:55)
그는 모세의 말은 알아들었으나
예슈아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바리새인들에 의해 죽음에 넘겨지셨다.

그가 죽으실 때, 성전 휘장 곧 신의 베일(veil)이 찢어지고(히10:20)
그는 다 이루었다 하셨으니(요19:30)
① 태초부터 함께 계신 아버지를 아심으로 그의 말씀대로
    목숨 다시 얻기 위해 목숨을 내려놓으심(요8:55, 10:17-18).
② 스스로 속은 마귀를 심판하심(사14:12-5, 창3:4-6).
③ 알지 못하고 범죄한 인류에게 구속의 피 뿌리사 죄사하심(눅23:34, 엡1:7).

부활하신 그의 손, 발을 만져 보고 그가 그인 줄 안 제자는(신32:39)
‘당신은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하였다(눅24:39, 요20:28)
성령은 계시의 영, 하나님 아는 것에 자라가게 하시는바(엡ㅈ:17-19, 골1:10)
부르심의 소망, 자녀의 기업의 영광, 하나님 이름의 능력을 알게 하심이라

그리스도인의 자부심은
① 예슈아의 피, 아들의 영으로 신의 소생(offspring)됨.
② 철학, 과학, 신학, 종교가 알 수 없는 바로 그것을 아는  가장 고상한 지식을 가짐.

오! 주여,
나와 내 지체, 내 가족에게 귀를 열어주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아듣고 순종함으로 말씀을 체험하게 하옵소서.
계시의 영이 끊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 오시는 날,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하옵소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을 알라(욥기 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우리가 적합하게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대로 그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거룩한 본질과 실재의 단일체로서의 하나님뿐만 아니라, 복수의 위격을 지닌 하나님을 또한 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세기 1: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그렇기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담겨진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알기 전까지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알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마음 속 깊은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가치조차 없는 나 자신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의 놀라운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는 영원토록 신실하심을 깨닫고, 그의 식탁에 앉아 그가 주신 은혜 가운데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의 영광 중에 빛나는 빛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알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본성에 있어 단일한 복합성을 지닌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면서도, 고난받는 유한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말입니다. 신성을 지니사 물 위를 걷는 하나님이시자, 인간으로서 피곤함을 느끼기에 쉬기 위해 우물가에 앉으시는 하나님을 당신은 따르는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친구, 형제이자 남편, 그리고 당신의 모든 것으로 알기 전까지는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성령을 잊지 마십시오. 성령의 본성과 특징, 그의 속성, 그리고 그의 사역을 명확하게 알기 위해 애써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의 성령을 바라보십시오. 그는 제일 먼저 혼동 가운데서 역사하시며 질서를 가져오셨으며, 당신 영혼의 혼동 상태에 찾아오셔서 거룩함의 질서를 창조하십니다. 성령을 주님으로, 영적인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깨우쳐주시는 분으로, 선생님으로, 위로자로, 그리고 당신을 성화시키시는 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 임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 안에 머물게 되심을 알아야 합니다.

성삼위일체에 대한 그러한 지적이고, 성경적이며, 경험적인 믿음은 당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게 될 때 당신의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은 참으로 당신에게 평안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을 누리기 위해 주님을 알기를 원합니다. 
자격이 없는 자희를 자녀 삼아 주시고,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십자가의 죽음으로 대속하시고, 주님께 임하신 성령을 저희에게 보내주셨음을 이해하고 또한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저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참 하나님과 거짓 신들의 차이 점

- 김영수 장로 / 고신대前사무처장 부산부평교회 

범신론 자들은 우주내의 각종 현상은 모두 하나의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본질의 여러 가지 형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신론 자들과 합리주의 자들은 신과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일련의 인과 관계의 시초가 될 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들은 신은 피조세계의 시초에서 접촉하실 뿐이며, 만물에 영구한 독립적인 존재를 주어 자기밖에 두시고, 그들 자체의 기능을 발휘하도록 버려두고, 아무런 변경을 가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A. A. Hodge,)

철학자들은 우주와 만물, 자연 현상들의 신비한 특이 사항들을 발견하고서는 신의 존재와 지배를 인정하면서 “추론과 가설의 신”을 설정한 것이었다. 이는 성경의 유일한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과는 다른 신이다. 그럼에도 기원전 철학자들의 사상은 이후 기독교 철학자들이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들로 나뉘어 기독교를 논증(argument )하고 변증(dialectic)하는 방법으로 그 논법(論法)을 적용하기도 하고 도입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 철학자들이 저들의 논리와 이론들을 도입, 인용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모든 학문은 반드시 철학적 기초 정립과 접근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대개의 논법 이론이나 원리 체계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립해 놓은 이론에 대입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라고 본다. 심지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철학 사상이나 이론들은 저들의 이론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과정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인데, 여기에는 기독교 철학자들 역시도 저들이 연구해 놓은 논법을 이용하여 기독교를 논증하고 변증했다는 점이다. 

1. 기원전 철학자들이 말하는 신 

플라톤 사상∣ 플라톤(BC 427~347)은 신(데미우르고스) 의 존재에 대한 “내재적 존재”의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았다. 오히려 “본체론적 세계”를 강조했다.

플라톤은 존재자와 생성 자를 구별함으로써 우주론을 제시한다. ⌈티마이오스-플라톤의 대화편⌋는 기원전 360년경 플라톤의 저작인데, 소크라테스와의 대화 상대자로 티마이오스, 크리티아스, 헤르모크라테스, 그리고 익명의 한 사람 사이의 이야기가 대화체로 쓰여 져 있는 우주와 인간, 혼과 몸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서 플라톤은 우주의 창시자를 “데미우르고스”라고도 하였고 “구성한 이” 라고도 한다. 이런 어휘들은 장인이나 목수를 뜻하는 말이다.

플라톤은 추론을 통해 물질세계와 완전히 분리된 형상의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는 이데아의 세계가“현실”이고 우리 주변의 세계는 그저 그 이데아의 세계를 본뜬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동굴의 비유(Allegory of the Gave)를 제시한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어둠속 뒷벽에 묶인 채 갇혀있는 한 동굴의 현상과 같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오직 앞쪽을 향해서만 쳐다 볼 수 있는데, 동굴 속에 갇힌 죄수들의 뒤쪽에는 밝은 불이 있어서 그들이 묶여 있는 벽 쪽으로 그림자가 생기게 된다. 불과 죄수들 사이에는 이따금씩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다양한 물체를 떠받칠 수 있는 성벽이 놓여 있어서 그 물체들의 그림자가 벽 위에 드리워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죄수들은 세상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중략) 플라톤의 이런 사상은 어거스틴, 안셀무스, 데카르트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플라톤과는 달리 신의 존재에 대한 모든“증명”은 “우주론적 논증”을 강조했다. 그에게 있어서 신은 제일운동자(Prime Mover)이며 목적인(目的因, Final Cause)으로서 필연적 존재(Necessary Being) 또는 최고의 존재(Highest Being)라고 보았다. 당시 우주는 하나의 시작점에서 생겨났다는 주장과 우주는 늘 존재했다는 이 두 주장으로 사람들은 나뉘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우주는 늘 존재하였으며 영원하다고 하였으며. 바위와 같은 무생물은 사람, 개, 말 등의 생물에 이르는 모든 것의 근원지가 되었다고 확신했다.”그리고 “우주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움직이며, 또한 이는 오직 변화와 운동에 의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사상을 아랍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인 철학자 아비센나(A.D. 980~1037)와 아베로에스(A.D. 1126~1198)는 비록 이슬람의 정통에 맞지 아니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 써 동료 이슬람교도들에게 배척을 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중세 유대교와 기독교 사상가들은 이 사상을 거부하면서 배격하려고 몸부림쳤다. 그 이유는 성경에서 “우주는 어떤 한 시점에서 발생했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무한성∣ 그에 따르면 “무한성은 한계가 없다.”고 한다. “각각의 수는 보다 높은 다른 수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수의 순서는 무한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도 마찬가지다.”고 하였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는“잠재적 무한”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런 각각의 날들이 동시에 공존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무한한 수의 사물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실재적 무한”은 불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과 날짜는 또 다른 시간과 날짜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우주가 무한하다고 믿었다. 그는 플라톤의 주장과는 달리 인간이 죽으면 영혼도 소멸한다고 믿었다.  

2. 로마 가톨릭 철학자들의 사상 

알셀무스의 존재론적 증명 ∣ 안셀무스(AD. 1033~1109, 대주교, 가톨릭철학자)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거부하는 한 어리석은 자와 자신이 논증 을 벌이는 “상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설명하였는데, 이를 안셀무스의“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Argument)”이라고 말한다. 그는 “첫째. 신은 그보다 더 위대한 존재를 상상할 수 없는 완전한 존재이고 둘째. 존재는 비존재 보다 더 월등하고 위대하다.”는 논리로서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논쟁이 끝날 무렵, 어리석은 자가 이 두 가지 논제를 받아들이는 것에 의거하고 있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모순적인 태도를 인정하고 논증자의 의견을 수용(accept) 하거나 신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에 대해 18세기 칸트는 신의 존재를 마치 사물의 속성인 것처럼 다룬다고 비난한다. 칸트는 “정신뿐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정신에만 존재하는 것보다 더 좋다는 안셀무스의 말은 잘못 되었다.”고 반박하였는데, 다른 철학자들은 칸트의 주장에 대해서 또 반대했다.

동일한 가톨릭 사제이며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증명을 신랄히 반박하기도 한다. 안셀무스의“존재론적 증명”사상은 주로 범신론자들인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수용하기도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과 이단성 논란∣ 이후 가톨릭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AD. 1225~1274)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지지한다. 그는 기독교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로 분류되는 사람인데 아리스토텔레스가“우주는 항상 존재했다.”는 주장에 대해 “성경에는 우주가 항상 존재한 것은 아니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말하면서도 “세상이 하나의 시작점에서 생겨났지만 신은 세상을 영원히 존재한 것처럼 창조했을 것이다.”라고 함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와 성경의 사상을 조합, 가미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아퀴나스는 끝까지“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정말일지도 모른다.”고 함으로서 그의 관점이 잘못되었으나 원칙이나 추론에서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므로 써 그의 철학을 존중했다. 무엇보다 아퀴나스는 생명체와 영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따랐으며 그의 주장을 왜곡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또한 인간은 “지성”이라는 하나의 “형상”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아퀴나스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곧 그의 사상은 “이단자”라는 비난을 모면하지를 못했다. 이후 세속 철학자들까지도 일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비판하게 되었고 아퀴나스의 관점을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신의 존재나 영혼의 불멸성과 같은 종교적 입장을 철학적 추론으로 입증할 수 있다고 믿는 철학자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개혁 또는 정통이라는 미명(美名) 아래 도입, 시도된 성경해석학에 추론이나 가설을 적용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연구에 관심을 가졌다. 반면 플라톤은 수평보다는 수직을 더 지향했으며, 원인적이기 보다는 직접적이었다. 그리고 논리적이기 보다는 수사학적인 면에 관심을 가졌다.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며 연역적인 연구에 관심을 가졌다.  

3. 성경의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 

칼빈의 삼위일체 교리∣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저술했는데, 1536년에 6장으로 구성된 라틴어 초판을 시작으로, 1543년에는 21장으로 늘어난 증보판을 출판한 후 1550년에는 약간의 내용을 보충한 증보판을 출판하였고, 결정판은 1559년판(라틴어)과 1560년판(프랑스어)이다. 기독교강요는 개혁신학의 지침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저서는 역대 신학자들의 사상과 신앙체계를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초안되고 다듬어진 것을, 비판과 검정 과정을 거치면서 이룩한 체계화된 것이다. 기독교강요는 오랜 동안 역대 신학자들의 신학과 사상체계를 재정리, 집대성한 개혁신학의 지침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저서는 한 순간에 이룩한 것이 아니다. 이 저서는 성경의 역사성과 일관성이 함께 깃들인 것으로서 오늘날 우리 개혁주의 교회들이 받아들인 칼빈 신학의 총괄 이론들이다. 칼빈의 삼위일체 교리를 요점만 정리해 보기로 한다. 

칼빈에 의하면, 참 하나님과 거짓 신들을 구분할 수 있는 결정적인 어떤 인위적인 방안은 별도로 없다고 보았다. 다만, 참 하나님은 오직 성경에서만 찾을 수 있고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유일신(the one and only God)이신 하나님은 두 가지 특징으로 우상들과는 구분된다. 첫째. 하나님은 무한한 영적 본질이시며, 세 위격으로 계신 한 분이신, 즉 삼위일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두 가지 특징으로 인간과 구분되신다. 하나님과 인간은 모두 불멸의 영적 본질이지만, 하나님은 무한한 본질(창조주) 이시고 인간은 유한한 영적 본질(피조물) 이다.

B. B. Warfield(1851~1921)는 칼빈의 삼위일체 교리가 이전 주장들과는 다른 “독창적이며 신기원을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 칼빈은 삼위 - 성부, 성자, 성신은 한분 하나님이시되 성부는 성자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서로가 다른 특성에 의해 구별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삼위일체는 믿음에 관한 것이지, 언어로 그것을 표현하기에는 충분치 않다고 이해하였다. 성부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성자는 구속 주 하나님이시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으로 초대하시고, 보존하시는 내적 사역과 외적 사역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부께로 서 나오는 것은 독생 하신 성자의 고유성과 성령의 고유성이다. 성부께로 서 나오는 것은 신적 본질이 아니라 서로를 구분하는 독특한 개성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가장 관심을 집중 시켰던 문제는 삼위일체의 세 위격에 관한 논의였는데, 여기에는 칼빈에 필적할 만한 신학자는 없었다. 그는 각 위격은 자존성과 충분한 신성을 가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세 위격의 각각은 자존성에 있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신이시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행위의 시작이자 만물의 원천이시며, 성자 하나님은 신적 지혜이자 만물의 통치자요 분배 자 이시고, 성령 하나님은 신적 행위의 권능 또는 효과이시다.

창세기 1:1의“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태초(In the beginning)의 시점은“영원으로부터 시간이 시작되는 첫 출발점”이며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의하여 비롯된“시점(a point in time)”이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천지 만물의 유일한 "근원(origin)" 이시다.

니케아 교부들과 그 신조는 주로 본질의 통일성이 아니라 개별성을 강조하였으나, 칼빈은 성자와 성령의 자존성과 세 위격이 본질상 지니고 계신 통일성을 주로 강조한 점이 다르다. 칼빈은 우리는 성경이 없었다면 오류에 빠지게 되며, 성경의 하나님(삼위일체)이 없다면 스스로 거짓 신들을 만들게 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우상들과 좀 더 정확하게 구분하실 때 기준으로 삼으시는 특성으로써 하나님의“무한성과 영원성”을 든다. 이는 이교도들의 거짓 신들과 성경의 참 하나님을 구분하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한 중요한 대목이다.

우리 기독인이 믿는 신은 하나님 안에 있는 피조 되지 아니한 무한한 영적 불멸의 본질이다. 그러나 인간 안에 있는 피조된 불멸의 본질은 유한하고 타락함으로써 죄악 된 본질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나아가 하나님은 무한한 영적 실재이고, 인간은 유한한 영적 실재라는 교리로 귀결된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동질성을 중시하는 것으로서 신적 존엄을 지닌“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으로서의 지음을 받은 인간임을 강조한 것이다.  

칼빈의 이런 사상에는 플라톤의 사고 영역 전체가 그의 목적에 유용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그것은 참여, 조명, 중재, 성령의 감동 등의 개념에 적용되기도 했다고 본다. 이런 사상은 인문주의 르네상스,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이런 노선을 따른다. 이후 후기 개혁주의 스콜라 신학(정통신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관점”을 보게 되는데, 이를테면 예정을 현세에 발생하는 모든 사건의 “원인”으로 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평적 정신”은 작정, 예정, 섭리 등의 교리에 영향을 준다. 이런 사상은 자연주의 르네상스, 개혁주의 스콜라 신학은 이런 노선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Philip C. Holtrop, 美 칼빈신학교) 

4. 전 세계의 종교인구 

세계의 도처,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나 무수한 토속 종교가 두루 산재해 있다. 칼빈은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아는, 실로 본능으로 타고난 지각(perception)이 있다고 한다. 인간이 본성에 의해 하나님을 지각하며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종교적 존재라고 본다. 인간 안에는 신에 대한 희미한 의식을 발견하며 인간은 이런 의식을 피할 수가 없다. 이것이 모든 인간 종교들의 기초가 된다.

인간이 신에 대한 지각을 보여 주는 증거들은 심지어 나무, 돌에게 라도 경배하려는 인간의 의지, 종교에 의존하고 영향을 받고 통제를 받으려고 하는 의지와 자세, 그리고 무신론자라도 느끼는 두려움 같은 것은 인간의 종교성을 말해주는 중요한 증거들이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인간이 신을 알 수 있는 지각은 배워서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날 때부터 지니는 것으로서, 완전히 지워 없앨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한다. 칼빈은 인간이 동물의 수준에서 끌어 올리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종교적 성향(性向)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知覺)은 다르다.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 

세계의 주요 종교

(아래 종파별 숫자는 adherents.com 에 의한 것이다)  

종파별

종파별

1.기독교 21억 명

천주교: 11억 명

개신교: 3.5억 명

정교회: 2.4억 명

성공회: 8400만 명

그 밖의 기독교 분파: 3.5억 명

2.이슬람교 13억 명

수니파: 9.4억 명

시아파 1.7억 명

3.무교무신론불가지론 11억 명

4.힌두교 9억 명

5.유교도교 등의 중국 전통 종교 3.94억 명

6.불교 3.76억 명

대승불교: 1.85억 명

소승불교: 1.24억 명

7.원시 토착 신앙 3억 명

샤머니즘 등

8.아프리카 토속 신앙 1억 명

하나의 종교가 아님

9.시크교 2300만 명

10.주체사상 1900만 명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에서 가르치는 정치사상이지만 일부는 이를 종교로 분류하기도 함.

11.정령 숭배 1500만 명

12.유대교 1400만 명

13.바하이 신앙 700만 명

14.자이나교 420만 명

15.신토 400만 명

16.카오다이교 400만 명

17.조로아스터교(배화교) 260만 명

18.텐리쿄(천리교) 200만 명

19.신이교주의 100만 명

20.유니테리안 유니버셜리즘 80만 명

21.라스타파리 운동 60만 명

하나의 종교가 아니다.

22.사이언톨로지교 50만 명

전세계 종교인구 분포

(종교인구 통계는 조사 기관과 조사 연도 등 기준에 따라 차이가 발생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태복음 7장에는 거짓 선지자에 대한 말씀도 있는데요.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이 말씀을 듣고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에 따라 법대로 하여 천국에 들어가느냐 불법자가 되어 천국에 가지 못하느냐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15-20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예수님께서는 천국 가는 길이 좁고 협착하다 말씀하신 후, 이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인데, 앞에 거짓이 붙었으니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참 목자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라고 하였듯 그가 있는 곳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장소임에는 틀림없는 것입니다.

선지자라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알고 전하며 가르치는 목자를 가리키는 말씀일 텐데요. 왜 앞에 거짓이 붙었을까요?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참 말이 아니라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단어를 생각할 때 그저 그 단어만 사용할 것이 아니라, 그 단어의 뜻까지 생각하며 말하고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 17장 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사람이 영생을 하기 위해서는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참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하나님이라니요? 이 말씀인즉 참하나님이 있다 함은 거짓 하나님도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거짓 하나님이 성경에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의문점이 있다면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좋지만 먼저는 하나님 성경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의 성경 말씀을 보신다면 '아, 진짜 그렇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4

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이사야 8:20-22

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21.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그 주릴 때에 번조하여 자기의 왕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22.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어떻습니까? 대적하는 사단 마귀가 다른 곳이 아닌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스스로 높이며 하나님이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목자들은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지자라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해야 할 터인데, 저는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물론 성경을 따로 열심히 읽거나 하지 않은 제 탓이 크지만 여하튼 성도를 지도하는 목자가 가르쳤다면 이런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의아했을 것입니다. 성경에 도대체 왜 이런 말이 있을까? 의문을 가지고 또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녕 들어본 적이 없으니 이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안타까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사야 8장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자라 하면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목자들이 전하는 말씀이 증거와 맞지 않는다면 그들은 아침 빛을 보지 못한다 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이라고도 하는 자신들의 목자를 저주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 증거를 받았으니 온전한 생명수 말씀을 얻지 못하였으니 주리고 번조하여 자신의 목자를 저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목자를 저주하여도 이미 늦었고 그들의 결과는 지옥인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은 거짓 목자를 따르는 사람들의 결과가 어떠한지 너무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마태복음 7장의 목자의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그들을 안다 하였으니 그 말씀을 들어보면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자기가 섬기는 교회 목사의 말만 들어보면 어떻게 좋은 열매인지 나쁜 열매인지 비교가 될까요? 그 목자가 좋은 나무인지, 못된 나무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비교 대상이 없는데 말입니다.

또한 자신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다면 자신의 목자가 양의 옷을 입은 이리인지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비교 대상을 만들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자기의 왕을 저주하면서 지옥으로 쫓겨 들어가는 그런 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