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제자(제자)

1. 배우는 사람
2. 실천하는 사람(요한복음 13:34-35)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 A new command I give you: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so you must love one another.
  • By this all men will know that you are my disciples, if you love one another.





  • μαθητής, οῆ, ὁ Storng number3101
    1.

    제자

    2.

    생도

    3.

    귀의자

    Pronunciation [ mathētēs ]
    Etymology
    3129에서 유래
    • 1.
      제자, 배우는 자, 생도.
      • a.
        [일반적으로] 생도, 견습자, 마10:24, 25, 눅6:40.
      • b.
        제자, 귀의자, 마9:14, 10:1, 11:1, 22:16, 막2:18, 5:31, 눅5:33, 6:17, 8:9, 19:37, 요1:35, 6:66, 9:28.

    Related Words

    • 관련 성경
      제자(마9:10, 막8:27, 요6:3), 형제(행1:15).





    신학의 종류와 특징


    전광훈목사 신학이란 무엇인가?


    신학의 종류와 특징

    신학이란 무엇인가?

    오늘은 신학에 대해 알아 봅시다. 말만 들어오 머리가 아픈 신학이지만 알고나면 어려울 것도 있습니다. 간략하게 알아보고 더 깊은 내용은 차근차근 알아가 봅시다.

    신학의 정의와 특징

    신학(神學, Theology)은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기독교 신앙과 성경을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적 활동입니다. 사전적으로 신학은 "하나님(神, Theos)과 말씀(學, Logos)"이라는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였으며, 하나님의 본질, 속성, 역사, 인간과의 관계 등을 연구합니다. 신학은 단순히 지식적 이해에 그치지 않고, 신앙의 실천과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신학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 중심성: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인간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탐구합니다.
    2. 성경 기반: 성경을 주요 자료로 삼으며, 이를 해석하고 체계화합니다.
    3. 다학문적 접근: 역사, 철학, 언어학 등 다양한 학문과 연계하여 연구합니다.
    4. 실천적 목표: 이론적 연구뿐 아니라 교회와 신앙 생활에 실제적 도움을 제공합니다.
    5. 구속사적 관점: 인간 구원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중심 주제로 삼습니다.

    이제 각 신학의 이름과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알아 봅니다.

    신학의 종류와 특징

    1. 주경신학 (Exegetical Theology)

    • 특징: 성경 본문을 언어적, 문법적, 역사적, 문맥적 분석을 통해 연구합니다. 성경의 원어(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와 문맥을 바탕으로 성경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 목표: 성경의 저자가 전달하려는 본래의 메시지를 파악하는 것.
    • 활용: 설교나 성경 연구의 기초 자료로 사용되며, 다른 신학 분야의 근본 토대를 제공합니다.

    주경신학과 성경신학은 같은 듯 다른 주제입니다. 주경 신학은 성경 자체의 문맥이나 단어 구절을 집중적으로 살피지만 성경 신학은 성경의 전체 흐름 안에서 역사적 관점으로 성경을 연구하기 때문에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 두 신학의 차이는 문서 하단에 따로 정리 했으니 참고 바랍니다. 

    2. 역사신학 (Historical Theology)

    • 특징: 기독교 교리와 신앙이 역사를 통해 어떻게 발전하고 변화했는지를 연구합니다. 초기 교회부터 현대까지의 신학적 흐름, 교회의 분열과 일치, 주요 신학자들의 사상 등을 다룹니다.
    • 목표: 신학적 발전 과정을 이해하고 현대 신학적 이슈의 뿌리를 탐구.
    • 활용: 교회의 전통을 존중하며, 현대 신학적 논쟁에 대한 이해를 돕습니다.

    3. 조직신학 (Systematic Theology)

    • 특징: 성경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신론, 인간론, 구원론, 종말론 등으로 나누어 연구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통합적으로 조망하며, 신앙 생활의 기초를 제공합니다.
    • 목표: 성경 전체에서 일관된 신학적 원칙과 교리를 도출.
    • 활용: 신학적 논리를 세우고 신앙의 기초를 명확히 하는 데 사용됩니다.

    4. 실천신학 (Practical Theology)

    • 특징: 신학적 지식을 실제적인 상황에 적용하여 교회 사역과 신앙 생활을 돕습니다. 설교학, 상담학, 선교학, 기독교 교육 등을 포함합니다.
    • 목표: 신학적 진리를 일상 생활과 교회 사역에 효과적으로 연결.
    • 활용: 목회자와 성도가 신앙을 실천하도록 돕는 실용적인 가이드 역할을 합니다.

    주경신학과 성경신학의 차이

    주경신학(Exegetical Theology)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은 성경을 연구하는 두 가지 주요 신학적 접근 방식으로, 유사한 점이 있지만 연구의 목적과 방법론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1. 주경신학 (Exegetical Theology)

    • 정의: 성경의 특정 본문을 깊이 분석하여 본문의 원래 의미를 이해하려는 학문입니다.
    • 방법:
      • 성경의 원어(히브리어, 헬라어)를 사용하여 문법적, 언어적, 문맥적 해석을 수행.
      • 본문이 기록된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고려.
    • 초점: 특정 구절이나 단락에 대한 상세한 해석과 의미를 도출.
    • : 요한복음 3:16의 원문 해석과 문맥 분석.
    • 목표: 설교, 교육, 신학 연구에서 성경 본문을 정확히 이해하고 전달.

    2. 성경신학 (Biblical Theology)

    • 정의: 성경의 전체적 흐름 속에서 특정 주제나 교리가 구속사적으로 어떻게 발전해 나가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 방법:
      • 성경을 기록된 시간적 순서역사적 맥락에 따라 연구.
      • 특정 주제(예: 언약, 구원, 성령)가 구약에서 신약까지 어떻게 발전되는지 탐구.
    • 초점: 성경 전체에서 발견되는 주제적, 신학적 흐름.
    • :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연구.
    • 목표: 성경의 일관성과 구속사의 연속성을 드러냄.

    차이점 요약

    구분 주경신학 성경신학
    연구 범위 특정 본문(구절, 단락) 성경 전체의 주제나 흐름
    방법 원문 분석, 문법적/문맥적 해석 역사적/구속사적 발전 연구
    초점 본문의 의미와 해석 성경의 신학적 일관성과 발전 이해
    목표 본문의 정확한 이해 구속사적 흐름과 주제적 연계 파악

    결론

    주경신학은 성경 본문을 "미시적"으로 분석하는 데 중점을 두고, 성경신학은 "거시적" 관점에서 성경의 전체적인 메시지와 흐름을 연구합니다. 두 신학은 서로 보완적이며, 함께 사용될 때 성경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신학이란 무엇인가

    NYSKC
    9–12 minutes

    신학(Theology, Theologia)이란 말은 어원적으로 보면 Theos(θεό󰐠)와 logia(λόγια)의 합성어로서 하나님에 관한 논술, 이야기(God-talk)를 말한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플라톤이었으며 이후 희랍 철학자들이 사용한 신학이라는 개념은 신들에 관한 서사시 내지는 설화들과 이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뜻하였다.

    어거스틴은 신학을 “신성에 관한 이론 내지 연설”(de divinitate ratio sive sermo)이라고 정의하여 신론 특히 삼위일체에 관한 것을 의미하였다. 중세기에 이르러 신학은 교의학의 모든 분야로 확대되어 창조론, 신론, 인간론, 그리스도론, 교회론 등을 모두 다루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은 기독교에 관한 진리의 전반을 다룬다. 13세기 이후 대학에 법학이나 의학 등 다른 학과가 설립되면서 신학은 하나의 다른 학과로서 존속하게 되었고 기독교의 진리 전체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루터는 신학을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그의 말씀으로 얻어진 그리스도에 관한 인식”이라고 하였다. 개신교 정통신학자의 하나인 요한 게하르트(1582-1637)는 신학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며 인간이 참된 신앙과 경건한 생활가운데 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지음을 받는 이론”(doctrina ex vervo Dei extracta, qua homines in fide vera et vita pia erudiuntur ad vitam aeternam)이라고 정의하였다. 신학이란 하나님에 관한 학문으로부터 출발하였으나 기독교 진리전반에 대한 학문으로 발전되어 교의학, 오늘날의 조직신학이 된 것이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은 인간과 그의 세계와의 관계 속에 있다. 인간 및 그 세계와 관계없는 하나님에 대해 성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신학은 인간및 그의 세계와 관계 속에 있는 하나님에 관하여 연구 할 수밖에 없다. 신학이 하나님과 인간을 그 주제로 하게되면 신-인학(The-anthropology)이 되며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세계를 그 주제로 하면 신-인-세계학(The-anthropo-kosmology)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과 그의 세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시금 변한다. 또한 신학은 인간의 제한된 언어와 논리와 사고방식을 사용한다. 그리고 세계의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정치적 상황들은 모두 다르다. 이와 같이 인간과 세계의 다양성과 신학을 연구하는 인간의 제한성 때문에 다양한 신학의 형성은 불가피하다.

    종교개혁자들의 정통주의 신학이나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 칼빈의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 바르트의 말씀과 계시의 신학,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 60년대 이후 남미에서의 해방신학 그리고 한국에서의 민중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새벽기도의 신학, 이중표목사의 별세의 신학, 배경식교수의 기다림의 신학 등은 시대와 상황이 만들어낸 성경해석에 대한 신학적 물음들이다.

    신학의 주제를 신과 인간 그리고 세계로 삼는 것은 타당한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비추어 볼 때에도 가능해 지며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영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도 포함되어야 한다(골 1:20). 신학은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연구하는 학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장로교와 제 신학들

    장로교회의 신학(prebyterian theology)은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을 말한다. 개혁신학은 종교개혁의 핵심 주장인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요약된다.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믿음으로’라고 강조한 구원관은 ‘행위는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구원을 얻기 위해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선행을 하는 것이란 말이다.

    신앙에서 ‘이신칭의’를 강조하는 루터교신학과 구원의 확신과 성화를 강조하는개혁신학은 균형있는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신학적 입장이기도 하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의지가 협력해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행하시는 일’이란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믿음이었다.

    이는 천주교가 구원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만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 협력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주장에 반대하는 것이다.

    또 장로교신학은 성경 외의 다른 것을 진리의 원천과 규범으로 삼는 것을 배격하였으며 오직 성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서 개혁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의 주권 및 영광에 큰 관심을 갖는 신학으로서 그 정립된다.

    감리교 신학의 고유한 특징은 성경 전통과 이성이라는 영국국교회의 신앙지침을 공유하면서 체험을 신학의 지침으로 수용한 존 웨슬리(John Wesley)의 유산에서 나왔다.

    웨슬리는 기독교를 ‘성경적 체험적 참 종교’라고 규정했다.

    감리교 신학은 한국 문화와 심성에 뿌리를 내리는 기독교 영성을 지향하며 한국 교회를 위한 건설적 실천적 신학을 수립하는 데 힘써왔다. 웨슬리는 본질적인 감리교를 원죄, 칭의, 성결로 요약했다.

    이것은 인간이 타락했으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죄인이 의롭다 여김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감리교회의 신학적 전통 중 하나는 복음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근본주의에 떨어지지 않으며 진보신학과 에큐메니칼 연대를 추구해왔다는 점이다.

    감리교회는 신학적으로 교리적 정통성보다는 성서적인 구원의 삶과 바른 실천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신학은 체험적 실천적 차원에 집중됐다. 웨슬리의 신학전통은 기독교의 참 종교성을 실천적인 신학에서 찾는다. 따라서 전통적인 감리교 신학의 강조점은 ‘바른 체험’ ‘정통 체험’이다.

    감리교 신학의 최우선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다.

    성결교회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교훈에 신앙적 토대를 두고 있다는 면에서는 개신교 복음주의에 속한 다른 교회와 입장을 같이한다.

    또 16세기 종교개혁 신학에 뿌리를 두고 18세기 존 웨슬리의 성경 해석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는 면에서 칼뱅의 입장을 따르는 개혁파 교회보다 감리교와 입장을 같이 한다.

    성결교회는 복음주의 흐름 가운데 경건주의 복음주의에 속한다.

    왜냐하면 성결교회는 바른 교리보다 바른 삶과 체험적 신앙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성결교회신학은 웨슬리 신학을 근간으로 하여 성결운동의 신앙 개조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19세기 미국의 성결운동, 특히 만국성결교회는 성결교회 신학의 가장 직접적인 근원이 된다. 특히 성결교회가 성결운동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대표적인 것은 사중복음이다. 따라서 웨슬리 신학과 사중복음은 성결교 신학의 두 축을 이룬다.

    성결교회는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사중복음으로 믿고 그것을 힘 있게 전하기 위해 창립됐다.

    사중복음은 성결교회라는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4개의 기둥과 같고 그 기둥이 서 있는 토대는 웨슬리 정신과 전통이다. 즉 성결교회 신학의 정체성과 근원은 개신교 복음주의, 웨슬리 신학, 그리고 사중복음으로 요약될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이란 19세기 유럽의 문화적 분위기에서 발생한 특정 시대의 신학사조 이름이다. 자유주의 신학이 지닌 핵심적 특징은 성경의 문자 무오설을 용납하지 않고 비평적 성경연구방법을 필수적인 것으로 주장한다는 것이다.

    또 현대 과학사상과 대립하는 보수적 전통 신학을 비판하고 진화론 등 자연과학 사상을 수용한다. 또 인간 본성과 역사의 발전에 대하여 매우 낙관적이며 초월대신에 내재 원리를 더 강조하는 인본주의적 신학, 혹은 인간 중심적 윤리적 기독교 해석, 문화적 개신교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녔다든지 정통 신학과 다른 진보적 신학이론을 말한다고 해서 그 신학을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실존주의신학, 민중신학, 종교문화신학, 여성신학을 자유주의 신학의 범주에 넣는 것은 오류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 연구의 방법론에 획기적 발전을 가져왔다. 계몽주의적 비판 정신을 가지고 신성불가침이라는 신성의 보자기에 싸인 종교적 권위들의 허구성을 비판함으로써 종교적 권위라는 우상에서 기독인들을 해방시켰다. 또 교리적 그리스도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려는 열정에 불을 붙였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 안에서 사랑과 도덕적 행위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완성시켜 가는 윤리적 왕국으로 보았다. 이를 대표하는 사람들은 리츨(A. Ritschl)과 하르낙(A. v. Harnack)이다.

    이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던 월등한 윤리의 교사로 보았다.

    이들은 십자가의 사건과 죄의 용서 심지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도 제자들 자신들의 신앙이었다라고 주장한다.

    성경은 결국 이들의 신앙고백이지 계시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을 참 종교의 표시로 보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성실한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 하였다.

    성경비판은 성경의 권위와 그 참된 신적 영감을 파괴하는 역기능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았고 자연과학 지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신앙적 증언들을 미신이나 신화로 경솔하게 처리하며 인간과 역사에 대한 낙관주의에 빠져 하나님의 초월성을 내재성을 바꾸어버린 과오를 범하기도 했다.

    한국 교회에는 개혁신학과 신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오해가 존재한다. 개혁신학을 종교개혁신학과 일치시키는 경향, 개혁신학의 전통을 옛 정통주의 신학과 근본주의 신학과 일치시키는 오해이다.

    개혁교회 신학의 두 거장은 칼뱅과 카알 바르트이다. 바르트는 오랫동안 자유주의 신학 사조에 휩쓸려 보이지 않던 종교개혁자들이 발견한 복음의 내용을 20세기의 언어로 재구성하여 표현했고 세계 신학계를 뒤흔들며 등장한 신학자이다.

    그를 통해 루터와 칼뱅 등 종교개혁의 신학은 다시 재조명되었으며 그를 통해 신학이 갖는 편협성과 오류는 크게 수정되고 발전됐다.

    바르트는 성서를 인간의 거룩한 종교적 체험을 기록한 문서라는 자유주의 신학의 성서관을 근본적으로 배격하고 성서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했다.

    신정통주의 신학의 특징은 성서 중심의 신학, 삼위일체 신학,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론이 존재하는 신학, 하나님 주권의 신학이다. 이런 면에서 바르트를 중심으로 하는 신정통주의 신학은 20세기의 대표적인 개혁신학이며 복음적인 신학이다.

    3. 신학의 근거와 규범

    신학의 근거와 규범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 자기의식 그리고 개인적 체험이 신학의 근거와 규범이 될 수 없다. 신앙의 모든 활동은 성경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하며 그 타당성도 성경에 비추어 검토되어야 한다.

    그 것이 참으로 기독교적인지 아닌지는 성경을 기본으로 제정된 “신앙의 규준”(regula fidei)에 의해 해석되어 져야 한다. 신앙의 규준은 성경과 사도적 전승 그리고 교회의 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루터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안에 참된 신학과 하나님 인식이 있다”(In Christo crucifixo est vera theologia et cognitio Dei)라고 한다.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예수 그리스도가 기독교 신학의 궁극적인 근거요 규범이다.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인하여 형성되고 성립된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고난 당하신 하나님, 이 고난을 통하여 인간이 당해야 할 모든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시며 인간과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하나님은 그의 영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이룩하고자 하신다.

    이러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신학의 근거와 규범이다. 교회와 신학은 이 근거와 규범을 따라야 한다.

    4. 신앙과 이성, 계시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관한 개인적인 응답에 의해 생겨난다. 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속죄주이시며 성령을 통해 구속주이심을 고백하게 된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믿고 믿기 위해서 아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역사이다. 신앙(fiducia)과 앎(notitia)의 문제를 대표적으로 다루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신앙 우위설: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젤름(Anselm 1033-1109)은 신앙의 우위성을 인정하였다. 그의 신앙은 “이해를 구하는 믿음”이다.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라는 그의 말은 매우 유명한 말이다.

    안젤름은 먼저 신앙으로 신앙의 교리들을 받아들이고 이성으로 그것들을 변호하려 하였다.

    하나님은 진리이기 때문에 모든 교의와 하나님의 존재까지도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신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을 내세운다. “하나님은 인간이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그러한 존재”라는 것이다.

    완전한 논리적 연역으로 볼 때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하나님이 안계시다면 우리는 존재하는 더 큰 것을 생각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가 갖고 있는 그분에 대한 개념의 필연적인 논리의 연역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이 이론을 받아들이는데 이는 인격적인 결단과 신뢰에서 얻어진 것 이라기 보다는 교회의 권위에 복종함으로서 생겨나는 아래로 부터의 신앙이다.

    초대교회는 희랍철학과 기독교신앙을 조화시키려고 하는 "포괄적인 신앙"(inklusive fides)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가 확산되고 조직화 됨에 따라 신앙의 개념이 신뢰보다는 지식(notitia)과 동의(assensus)로 바뀌어 졌다.

    이를 "배타적인 신앙"(exclusive fides)이라 한다. 대표적인 사람이 터툴리안이다. 그의 신앙 명제 “나는 불합리하기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라는 말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

    2) 상호 보충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이성과 신앙, 철학과 종교의 통합을 통해 중세 스콜라철학을 완성하였다. 신앙과 이성이 각자 자기 영역을 지키는 한 양자가 설 수 있는 자리가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이성은 자연적인 차원에 속하며 기독교 신앙을 가능케 하는 계시는 보다 높은 초자연적인(the supernatural) 차원으로부터 온다고 보았다. 계시는 인간의 이성을 보충하고 완전케 한다는 것이다.

    신학은 학문이라고 전제하고 산술, 기하학은 이성의 통찰을 통해 가능하며 신학은 상위학문으로서 하나님과 성현에게서 온 지식에서 출발한다고 보았다. 음악은 산술학자가 알려주는 원칙을 믿는 것처럼 신학에서는 하나님이 계시한 원칙을 믿어야 한다고 하였다.

    중세의 신앙은 이처럼 교회가 가르치는 신앙내용에 대한 지식과 지적인 승인으로 이해되어 신앙과 이성은 조화된 것으로 보았다. 정통주의 시대에는 신앙의 세 가지 요소인 앎(notitia)과 동의(assensus) 신뢰(fiducia)를 모두 중시 여겼으나 신앙의 지식인 앎에 비중을 두었다. 신앙은 무엇을 믿는지 알고 믿어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인격적인 신앙행위가 경시되기도 하였다.

    3) 종교개혁자들은 인격적인 신뢰의 신앙을 새롭게 주장하여 신뢰와 신앙은 이들에게서 동의어로 쓰였다. 루터의 대요리문답, 아우구스부르크의 신앙고백에 나오는 산 신앙(fide viva)은 이를 말해 준다. 믿음과 행위가 구원을 준다는 가톨릭신학을 산 믿음은 좋은 행위를 가져온다는 것으로 변화 시켰다. 이것을 수학적인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가톨릭: 구원 = 믿음(belief) + 행위 개신교: 구원 = 산 믿음(living faith)믿음은 지적인 의미를 갖는 belief와 행위에 가까운 faith가 있다.

    두 가지 모두 지적인 것을 전제로 한다. 산 믿음이란 행위를 포함하는 믿음이다. 이는 마치 율법과 복음의 관계와도 같다.

    율법 속에는 복음이 포함되어 있으며 복음 속에는 율법이 들어 있다. 복음은 새로운 율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즐겨 사용하신 “...라고 너희는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Ήκούσατε ὅτι έρρέθη, έγω δὲ λἐγω ὑμίν)에서 이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가톨릭 신앙은 제사장 적인 것이요 개신교 신앙은 예언자적이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차이는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 통일적인 것과 다원적인 것, 구심적인 것과 원심적인 것, 미사주의와 설교주의, 사제주의와 예언자의 종교 등으로서 역사적 변천에 따라 기독교의 이중구조를 갖게 하였다.

    경건운동은 이러한 정통주의의 객관적인 신앙을 극복하면서 나타난 경건한 삶을 강조하는 신앙 개혁운동이었다. "교회 안의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 운동을 전개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적인 영향력을 주었다.

    계몽주의 시대인 18세기 이후 기독교 사상가들은 역사성과 과학적 객관성의 이름으로 기독교의 교리와 제도 그리고 전통을 비판하였다.

    이는 교회와 성경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며 인간 이성의 밝은 빛에 비추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의 불합리한 요소를 제거하려는 사상운동이었다.

    이성에 의해 비판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것은 믿지 않았다. 이것은 인간 이해에 대한 새로운 태도인 휴머니즘(humanism)이 만들어 낸 결과이다.

    인간은 각자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자유스럽게 자연과 모든 지식을 이용하여 자신의 생을 인간의 이성으로 지배해 나간다는 것을 말한다.

    고전에 대한 언어학적 연구와 비판의 자유 및 학문의 연구는 전통적 교회의 교리와 의식에 커다란 도전이 되기도 하였다.

    이 운동의 근본정신은 인간의 사후에나 얻을 수 있다는 하늘나라를 지상에 건설하자는 데 있다. 이 시대는 분명 이성의 시대로서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것들을 부정하려든 시대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이러한 사상적인 영향 하에 살아가고 있다.

    쉴라이에어마허(Schleiermacher)는 “기독교는 교리나 규범, 인간적인 행동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마음속에 각성된 내적인 절대 의존의 감정”을 강조함으로서 관념적인 신학을 주장한다. 경건주의가 낳은 주관주의적인 신앙이다.

    헤겔(Hegel)을 대표로 하는 신-프로테스탄티즘(New-Protestantism)에서는 신앙과 정신적 사고를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철학과 신학은 신을 찾는 같은 학문이며 이성과 신앙은 동일한 정신적 사유로 간주되었다. 오늘날 유럽의 사변주의적인 신학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철학-신학적인 사고에 반기를 든 사람은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엘케고르(Kierkegaard)이다. 신앙과 사고는 보충적인 것이 아니라 적대적인 것임을 지적하면서 신학과 철학의 종합을 반대하였다.

    세계 제1차 대전이후 칼 바르트(Karl Barth)를 중심으로 시작된 변증법적 신학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그 출발점을 두는 배타적인 신학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입장을 같이하는 신학자들은 브룬너(E. Brunner), 고가르텐(F. Gogarten), 불트만(R. Bultmann) 등이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학은 시대적인 삶의 정황이라는 신앙을 체계화시키면서 나온 학문적인 작업이다. 신앙은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이고 우리의 앎이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요청된다.

    신앙은 우리가 믿는 근본적인 구원의 내용이면서도 행위이어야 임은 삶과 신앙을 분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신앙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사랑과 감사에서 나오는 경외심을 전제로 하여 우리의 이성과 사고와 전 인격이 수반될 때 온전한 신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신앙과 이성 그리고 계시는 신학적인 작업을 하는 한 긴밀한 연관성에서 상호 보완적이다. 계시의 신앙에서 시작되는 신학적 작업에 이성이라는 인간의 합리성이 신학적인 내용을 체계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올바른 것인가 라는 물음은 성경의 내용에 비추어 보면서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대체신학이란 무엇인가?

    대체신학 (혹은 교체신학)은 근본적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스라엘을 대체했다고 가르칩니다. 대체 신학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며,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구체적인 미래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고 믿습니다. 교회와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한 모든 견해는 두 개의 캠프로 나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이스라엘의 연장 (대체신학/언약신학)이라는 견해와 교회는 이스라엘과 완전히 다르며 구별된다는 견해입니다 (세대주의/전천년주의).

    대체 신학은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며, 성경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많은 약속들이 이스라엘이 아닌 기독교 교회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위한 복과 약속의 땅으로의 회복에 관한 성경의 예언들은 “영적으로” 혹은 “우화적으로” 해석되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견해에는 주요한 문제들이 있는데, 수세기 동안 유대 민족이 계속 존재하여 왔다는 사실과 특히 현대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과 같은 것들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저주하셨다면, 유대 민족에게는 장래가 없을 터인데, 그들을 파괴하려는 수 많은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지난 2천년 동안 초자연적으로 생존하여 온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1900년 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나라가 20세기에 국가로서 다시 등장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과 교회가 다르다는 것은 신약 성경에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교회는 이스라엘과 완전히 다른 별개이며, 이 둘을 절대로 혼동하거나 서로 바꾸어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교회는 오순절 날에 존재하게 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며, 휴거에 의해 하늘로 들어올려질 때까지 계속해서 이 땅에 존재할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9-11; 데살로니가전서 4:13-17) . 교회는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나 축복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언약들과 약속들과 경고는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유효합니다. 지난 2천년 동안 흩어져 있으면서 이스라엘은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에서 따로 있었습니다.

    대체신학과는 반대로, 세대주의는 휴거 이후에 (데살로니가전서 4:13-18) 하나님께서 그분 계획의 주요 촛점으로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때 있을 첫번째 사건이 휴거입니다 (요한계시록 6-19장). 세상은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은 대환란의 시기를 통해 메시아의 재림을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환란이 끝난 뒤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이스라엘은 그분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대환란에서 살아 남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며, 주님은 이 땅 위에 예루살렘에 수도를 둔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다스리며, 이스라엘은 지도 국가가 될 것이며, 모든 열방의 대표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돌아와 문자 그대로 천년 동안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1-5).

    구약과 신약 모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전천년적 또는 세대주의로 이해하는 것을 지지합니다. 전천년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지지는 계시록 20:1-7의 분명한 가르침에서 발견됩니다. 그 구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왕국이 천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여섯 번이나 말합니다. 대환난 후에 주님께서 돌아오셔서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온 땅을 다스릴 것이며, 이스라엘이 열국의 지도 국가가 될 것입니다. 교회는 문자 그대로 천년 동안 주님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대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시대에 교회에 주된 관심을 집중하실 것이지만,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셨으며, 어느 날 이스라엘을 회복하셔서 그분이 선택한 나라로서 원래 의도하셨던 역할을 맡기실 것입니다 (로마서 11 장).

    대체신학이란 무엇인가?

    대체신학 (혹은 교체신학)은 근본적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스라엘을 대체했다고 가르칩니다. 대체 신학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며,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구체적인 미래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고 믿습니다. 교회와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한 모든 견해는 두 개의 캠프로 나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이스라엘의 연장 (대체신학/언약신학)이라는 견해와 교회는 이스라엘과 완전히 다르며 구별된다는 견해입니다 (세대주의/전천년주의).

       대체 신학은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며, 성경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많은 약속들이 이스라엘이 아닌 기독교 교회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위한 복과 약속의 땅으로의 회복에 관한 성경의 예언들은 ‘영적으로’ 혹은 ‘우화적으로’ 해석되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견해에는 주요한 문제들이 있는데, 수세기 동안 유대 민족이 계속 존재하여 왔다는 사실과 특히 현대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과 같은 것들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저주하셨다면, 유대 민족에게는 장래가 없을 터인데, 그들을 파괴하려는 수많은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지난 2천 년 동안 초자연적으로 생존하여 온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1900년 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나라가 20세기에 국가로서 다시 등장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과 교회가 다르다는 것은 신약 성경에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교회는 이스라엘과 완전히 다른 별개이며, 이 둘을 절대로 혼동하거나 서로 바꾸어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교회는 오순절 날에 존재하게 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며, 휴거에 의해 하늘로 들어 올려질 때까지 계속해서 이 땅에 존재할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에베소서 1:9-11; 데살로니가전서 4:13-17). 교회는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나 축복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언약들과 약속들과 경고는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유효합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흩어져 있으면서 이스라엘은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에서 따로 있었습니다.

       대체신학과는 반대로, 세대주의는 휴거 이후에 (데살로니가전서 4:13-18) 하나님께서 그분 계획의 주요 초점으로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때 있을 첫 번째 사건이 휴거입니다(요한계시록 6-19장). 세상은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은 대환란의 시기를 통해 메시아의 재림을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환란이 끝난 뒤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이스라엘은 그분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대환란에서 살아남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며, 주님은 이 땅 위에 예루살렘에 수도를 둔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다스리며, 이스라엘은 지도 국가가 될 것이며, 모든 열방의 대표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돌아와 문자 그대로 천년 동안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0:1-5).

       구약과 신약 모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전천년적 또는 세대주의로 이해하는 것을 지지합니다. 전천년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지지는 계시록 20장 1-7절의 분명한 가르침에서 발견됩니다. 그 구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왕국이 천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여섯 번이나 말합니다. 대환난 후에 주님께서 돌아오셔서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온 땅을 다스릴 것이며, 이스라엘이 열국의 지도 국가가 될 것입니다. 교회는 문자 그대로 천년 동안 주님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대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시대에 교회에 주된 관심을 집중하실 것이지만,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셨으며, 어느 날 이스라엘을 회복하셔서 그분이 선택한 나라로서 원래 의도하셨던 역할을 맡기실 것입니다(로마서 11 장).







    현대 신학이란 무엇인가?

    로저 올슨(Roger E. Olson)은 미국과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라이스 대학교에서 “삼위일체와 종말론”(Trinity and Eschatology, 1984)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베일러 대학교의 조지 트루엣 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크리스천 스콜라스 리뷰」(Christian Scholar’s Review)의 편집자였으며, 미국신학회(American Theological Society)의 회장을 지냈고(Midwest Division), 「크리스천 센추리」(Christian Century),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 등에 많은 글을 기고해 왔다. 

    미국종교학회(American Academy of Religion)의 복음주의 신학 분과에서 2년간 공동 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다. 
    역사 신학 전문가로서 지역 교회들과 기관들에서 설교자, 교사, 강연자로 섬겨 왔다.

    저서 『이야기로 읽는 기독교신학』(대한기독교서회)은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 출판협회(Evangelical Christian Publishers Association)의 금메달을, 스탠리 그렌츠와 함께 쓴 『20세기 신학』(IVP)은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신학/성서학 분야 최우수 도서상을 받았다. 
    『신학 논쟁』(새물결플러스), 『복음주의 신학의 역사』(한들), 그리고 『이야기로 읽는 기독교신학』의 축약 개정판으로 애덤 잉글리쉬와 함께 쓴 『신학의 역사』(도서출판100)를 통해 역사 속에서 펼쳐진 다양한 신학적 갈등을 이해하고 평가하려는 관심을 이어 왔으며, 그 외에도 『삼위일체』(대한기독교서회), 『보수와 자유를 넘어 21세기 복음주의로』(죠이선교회), 『오두막에서 만난 하나님』(살림), 그리고 스탠리 그렌츠와 공저한 『신학으로의 초대』(IVP) 등의 저서가 있다.



    조직신학이란 무엇인가?

    조직신학은 기독교 신앙의 교리를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이해하려는 학문입니다. 이는 신학의 다양한 주제들을 서로 연결하고 통합하여 일관된 신앙 체계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조직신학은 하나님, 인간, 죄, 구원, 교회, 종말 등 신앙의 핵심 주제들을 다룹니다. 그렇다면 조직신학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어떻게 신앙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조직신학의 정의

    조직신학은 "systematic theology"를 한국어로 번역한 말로, 신앙의 여러 주제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하는 학문입니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교리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통합하여 하나의 일관된 신학 체계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2. 조직신학의 주요 영역

    조직신학은 여러 주제로 나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영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 신론(Theology Proper): 하나님의 존재, 본성, 속성, 삼위일체 등의 주제를 다룹니다.
    • 인간론(Anthropology): 인간의 본성, 창조, 타락, 죄 등의 주제를 다룹니다.
    • 기독론(Christology):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성육신, 속죄, 부활 등의 주제를 다룹니다.
    • 구원론(Soteriology): 구원의 본질, 성령의 역사, 칭의, 성화, 영화 등의 주제를 다룹니다.
    • 교회론(Ecclesiology): 교회의 본질, 조직, 성례, 사명 등의 주제를 다룹니다.
    • 종말론(Eschatology): 죽음, 부활, 최후의 심판, 새 하늘과 새 땅 등의 주제를 다룹니다.

    3. 조직신학의 중요성

    조직신학은 왜 중요한가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신앙의 이해를 돕는다: 조직신학은 성경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는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더 깊이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2. 신앙의 일관성을 유지한다: 체계적인 신학 연구는 신앙의 일관성을 유지하게 합니다. 이는 신앙의 여러 측면이 서로 모순되지 않도록 돕고, 신앙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합니다.
    3. 신앙의 실천을 인도한다: 조직신학은 신앙의 실천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는 신자들이 성경적인 원칙에 따라 삶을 살아가도록 안내합니다.

    4. 조직신학의 방법론

    조직신학은 다음과 같은 방법론을 사용하여 연구합니다:

    • 성경적 방법: 성경은 조직신학의 가장 중요한 자료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신앙의 교리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합니다.
    • 역사적 방법: 교회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교리와 신학적 논의를 연구합니다. 이는 신앙의 발전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 철학적 방법: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사고를 통해 신앙의 교리들을 분석하고 이해합니다. 이는 신앙의 합리성을 증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 실천적 방법: 신앙의 교리들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연구합니다. 이는 신앙의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합니다.

    5. 조직신학의 도전과 과제

    조직신학은 몇 가지 도전과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 성경과의 일치: 조직신학은 항상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해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거나 변질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 문화적 적용: 조직신학은 다양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신앙을 적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이는 신앙의 보편성과 문화적 특수성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합니다.
    • 신학적 다양성: 다양한 신학적 전통과 관점을 존중하면서도 일관된 신앙 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신학적 대화를 통해 해결될 수 있습니다.

    결론

    조직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중요한 학문입니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신앙의 교리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하여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조직신학은 신앙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신앙의 실천을 인도하며, 신앙의 이해를 돕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신자들은 조직신학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고, 성경적인 원칙에 따라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답변


    대체로 개혁주의 신학은 16 세기의 개신교 종교개혁에 뿌리를 두고 있는 모든 신앙 체계를 포함합니다. 물론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tura’ 라는 신조에 명시된 바와 같이, 그들의 교리의 근거를 성경에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개혁주의 신학은 “새로운” 신앙 체계가 아니라, 사도들의 교리를 따라 추구하는 신앙 체계입니다.

    일반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의 권위, 하나님의 주권,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에 의한 구원, 그리고 전도의 필요성을 주장합니다. 때로 개혁주의 신학이 언약신학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아담과 맺은 언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온 새 언약 (누가복음 22:20)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권위.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믿음과 실천의 모든 문제에 충분하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주권.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에 대한 절대적인 통제를 가지고 통치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분은 모든 사건을 예정하셨으며, 따라서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실망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피조물의 의지를 제한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만들지도 않습니다.

    은혜에 의한 구원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이 그분의 은혜와 자비에 따라 한 백성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고 구속하기로 택하셨다고 가르칩니다. 개혁주의 구원의 교리는 특정 단어인 TULIP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포인트라고도 알려져 있음)에 의해 자주 소개됩니다.

    T –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사람은 자신의 죄된 상태에서 완전히 무력하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전적 타락은 또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기 전까지 인간은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6:5; 예레미야 17:9, 로마서 3:10-18).

    U - 무조건적인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영원한 과거로부터 하나님은 아무도 셀 수 없는 수많은 죄인들을 구원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로마서 8:29-30, 9:11; 에베소서 1:4-6,11-12).

    L – 제한속죄 limited atonement. "특별한 구속"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택자들의 죄에 대한 형벌을 친히 담당하시고, 그들이 살 수 있도록 자신의 죽음으로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다시 말해, 그분은 단지 구원을 “가능하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분이 택하셨던 자들을 위해 실제로 구원을 얻어 내셨습니다 (마태복음 1:21; 요한복음 10:11, 17:9; 사도행전 20:28; 로마서 8:32; 에베소서 5:25).

    I – 불가항력적인 은혜 irresistible grace. 사람은 타락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마음 속에 역사하여, 그가 이전에 거부했던 것을 원하게 만드십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택자들을 구원하는 일을 반드시 성취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6: 37, 44, 10:16).

    P –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하나님은 그분의 성도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하십니다; 따라서 구원은 영원합니다 (요한복음 10: 27-29; 로마서 8:29-30; 에베소서 1:3-14).

    복음 전도의 필요성 개혁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인들이 전도를 통하여 영적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거룩한 삶과 인도주의를 통하여 사회적으로 이 세상에 변화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다른 특징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성례 (세례와 성찬), 영적 은사의 중지 견해 (은사는 교회로 더 이상 연장되지 않음), 성경의 무세대적 관점 등을 포함합니다. 존 칼뱅, 존 녹스, 울리히 츠빙글리, 마틴 루터의 저술들이 개혁주의 교회 내에서 귀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개혁주의 전통의 신학을 구체화한 것입니다. 개혁주의 전통에 뿌리를 둔 현대 교회로는 장로교, 회중 교회, 그리고 일부 침례교가 있습니다. 


    성경신학이란 무엇인가? 

    https://blog.naver.com/stchopeter/221259747871



    목회신학이란 무엇인가?

    Ⅰ. 교회의 본질과 의미 및 바람직한 교회 모델은 ?

    전통적인 교회론은 기독론에 종속되어 있다고 볼것이다. 즉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요 그 몸은 교회"라는 도식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교리적인 고백을 넘어서서 목회적 의미에서도 이러한 고백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수 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 고 강조하고 있다. 이 말씀은 결국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며 바람직한 교회의 모델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밝히는 중요한 말씀이 아닐수 없다.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에게서 출발한다.(엡4:14~16,골 2:19, 고전 12:12,27) 즉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터'요, '머리'요, 근거이다.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교회는 세워 졌다. 이는 마태복음 16:18, 18:17 에서 밝히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에서도 나타나 있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근거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며, 예수그리스도의 의지를 이 땅에 실현하는 귀한 공동체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살고, 그리스도 예수를 떠나면 죽게 되는 것이다. (골 2:9, 골 2:10, 골2:19, 요 1:4)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교회가 있으려면 교회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

    첫째 믿음을 지키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마태복음 16:18 절에서 진실한 교회의 터는 믿음을 떠나서 이해될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교회는 이러한 믿음이 없니는 어떠한 권세도 있을수 없음을 성경은 분명히 지적한다.(요 1:12) 따라서 교회는 이 믿음에 기초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여야 하며 또한 다른 이들로 하여금 이 믿음에 동참하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능력의 근원이었으며, 교회가 이 땅위에 든든히 서 있는 근거가 된다.

    둘째 성례전을 지키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믿음이 하나님과 나를 연결시켜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하는 내면적인 은혜의 통로라 하면 성례전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외적으로 연결시켜 흐르는 생명을 공급받게 하는 외면적인 은혜의 통로이다. 성례전은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신 '세례'와 '성만찬'으로 구체화 시킬수 있다. 세례는 내적인 믿음의 외적인 증거이다. 성찬예식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임을 확인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의 참여이다. 목사는 교회 공동체에게 성경과 전통에 합당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성례전을 제공하여야 할 것이다.( Calvin Inst. 4.4 등)

    세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하게 자기를 계시하셨다. 이러한 계시된 말씀은 기록된 말씀으로 우리에게 증거되어 지고 있으며, 이 말씀은 현재 선포되는 말씀으로 성령에 의하여 조명되어 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곳에 하나님의 창조적인 개입이 일어나고 있다. (Calvin, Insr.Ⅲ. 2.6)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말씀의 창조는 우리를 옛 세계에서 부터 새 세계로 인도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을 하는 빛에 참여 하게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말씀은 끊임없이 선포되어지고, 기억되어지며, 또한 적용되어 져야 할 것이다.

    네째 그리스도인의 훈련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성령님께 의지하여 끊임없이 성령의 열매를 심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을때,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소욕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뜻을 드러내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갈 6:8) 모든 그리스도인의 훈련에서 특별히 지켜져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덕을 세우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는 기본적인 목적이 있어야 하며, 교회의 가르침과 지도하에서만 참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과, 성령께서 시작하시며 완정하시는 성령님께 의존한 훈련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은 훈편하시는 곳에 성령님을 보새어 변화와 성숙을 일으키신다는것을 신뢰하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방향이 있을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그 뜻대로 온전히 사명을 감당할수 있게 될 것이다.

    Ⅱ. 교회에서 필요한 교역(목회)들은 ?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장성하게 하고 바로 세우는 교역이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먼저 교회 구성원을 바로 세우고, 교회 공동체를 바로 세우며, 교회가 있는 사회를 바로 세우는 교역이 있어야 할 것이다.

    첫째 교회 구성원을 바로 세우는 교역.

    마태는 9장 35절에서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것을 고치시니라."고 증거하고 있다. 즉 예수님의 중심 교역(Ministry)을 심방, 교육, 설교, 병고치심으로 요약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에서의 목회는 예수그리스도의 하신교역을 계승하며 발전 시켜야 할 것이다.

    둘째 교회 공동체를 바로 세우는 교역.

    예수께서는 교회에 대하여 분명히 증인의 역할을 할것을 명령 하셨다. 하지만 "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고 말씀하시며 부족한 것을 외면치 않으신다. 예수님의 교역(Minustry of God)은 약한 곳에 오시고, 부족한 것을 채우시고, 고난 가운데 영광의 샘을 만드시는 것이다. 이는 교회 공동체의 부족한 것을 향하여 채워 주시는 예수님의 교역의 전형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를 세우고 부족한 것을 채우려는 교역이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세째 교회가 있는 사회를 세우는 교역.

    요한복음 3: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땅에 관심을 가지셨고, 결국 이땅과 하나님 사이를 화해케 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교회도 사회와 하나님을 화해케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그 사명을 감당할수 있도록 목회자는 교역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뜻대로 나아가도록 하여야 하며, 이렇게 하도록 하는 교역은 바로 목회자의 중요한 책무중에 하나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최선을 다하여 교회를 세우고 교회가 옳바른 방향으로 교육하여야 하며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대처하여야 할 것이다.

    Ⅲ. 바람직한 목회자 상은 ?

    바람직한 목회자의 상은 너무나 많은 요구와 또한 내용일 있을수 있다. 그러나 몇가지로 정리하여 나름대로 제시하려 한다.

    첫째 믿음의 비전을 가진 자.

    비전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역사는 성경이나 세속적인 것들을 통하여 많은 예를 제시하고 있다. 모세는 애급에서 잔혹하에 압박 당하는 동족의 현실에 자극을 받아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전 생애를 약속의 땅에 대한 비전에 바쳤다. 비전 없이는 어떤 것도 이루어 지지않는다.

    둘째 사랑의 수고를 하는자(살전 1:3)

    비전없는 행동은 방향감각과 반응을 상실한 가능성이 높으며, 또한 열정적 노력과 실제적 계획이 결여된 꿈은, 옅은 공기 속으로 사라지기 마련이다. 지도자는 이같이 노력하고 수고하되, 이타적인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수고해야 한다. 사랑없는 수고는 가장 이기적이고 졸렬하며, 잔인한 지도자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세째 소망의 인내를 할수 있는자(살전1:3)

    모세는 불평하는 동족이 던지는 돌을 자기가 맞기로 결심을 했다. 위협, 비난, 원망, 시비, 불만, 시기, 멸시를 당할때, 모세는 편협한 마음을 갖고, 포기 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인내는 어리석은 고집과 다르다. 그르므로 진정한 지도자는 비판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반발이나 희생도 감수하면서 인내한다. 그에게는 확신있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네째 종으로 섬기는 겸손한자

    목회자는 주인되는 것이 아니고, 섬기는 것이며, 부리는 자가 아니라 충실한 종이 되는 것이다.(막10:42~45) 목회자들은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섬기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이익과, 무었보다도 하나님께 유익한 것을 우선적으로 섬겨야 한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주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길이다. 하나님앞에서 내가 무가치 함을 알때 낮아질때 하나님은 나를 높여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먼저 겸손의 덕을 쌓아야 한다.

    다섯째 끊임없이 연구하는 자

    정말 강한 사람일수록 약한 면이 늘 존재하듯, 인간이기에 지도자도 흔들리는 경우가 종종있다. 위대한 지도자에게도 치명적인 결함이 있기 때문에, 평범한 자기 훈련은 물론 그외에도 특별한 훈련을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 해야 할 것이다.. 목회자들은 영적 훈련을 해야 하며, 교회 구성원들의 심리 상태나 욕구, 동기, 등을 깊이 연구하여 대상의 문화에 맞는 적절한 리더쉽을 발휘해야 할것이다. 이러한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 그리고 자기 향상은 모범적인 목회를 위한 기초가 될 것이다.

    Ⅳ. 목회신학이란 ?

    Ministry는 diakonia에서 유래하였다. 이는 목회신학의 정체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면이라 할수 있다. 분명 '목회신학'이란 용어는 최근에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미 옛부터 '목회신학'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본이 바로 그것이라고 할수 있다. 베드로 전서 5장 4절에서는 이를 양치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T.M.Lindsay, B.H.Streeter, K.E.Kirk, 등 20세기 초반의 목회신학자들은 직제적 관점에서 목회신학을 교회의 본질과 형태, 특히 감독, 목사, 장로, 집사 등의 직제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주장하였다. T.C. Oden 은 목회자의 기능적 관점에서 목회신학을 목사의 직무와 기능들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E.Gibbs, L.Schaller 등은 교회의 경영과 목회 지도력의 관점에서 교회의 성장과 활성화 및 경영적인 부분을 크게 확대하였다. 또한 Seward Hiltner는 상담적 관점에서 목회상담을 목회신학과 동일시 하고 있다. 그리고 V.A.Demanr는 영성적 관점에서 목회신학은 기독교적 영성개발에 관심을 증폭시켰다. 이러한 학자들의 관점을 종합하여 통합적인 이해를 할때 다음과 같이 정리할수 있다.

    목회신학은 실천신학의 한 부분이면서도 실천신학의 핵심이 되는 분야이다. 목회신학의 주제는 예수그리스도의 모델에서 Ministry 이다. 이를 바탕으로 목회신학은 기독교신앙과 진리에 견고히 기초하여, 그것을 목회적 실천을 통하여 현장에 적용해 나가는 기독교 진리와, 기독교 실천간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을 포함한다. 또한 목회신학은 오늘 사회과학이 발견한 원리들과 방법, 그리고 통찰들을 어떻게 목회에 수용하여 활용할 수 있는가를 규명하며, 신학과 사회과학의 관계성을 밝혀 적용한다.

    결국 현대의 관련학문과의 대화를 통하여 기독교 교역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뜻대로 교회가 그 사명을 담당하도록 하는데 관련된 모든 노력들을 이해하고 계발하는 것이 목회신학의 영역이며 목적이라고 볼수 있을 것이다.
















    참 하나님을 알라(요한복음 17:3)


    참 하나님을 알라!(Know the true God!)
    - 데움 베룸 꼬니오스(Deum verum cognosce)


    참(228) 알레디노스(alēthinŏs)  ἀληθινός, ἡ, όν

    1. 진실한.  2. 참된. 3. 진리에 부합하는  
    Pronunciation [ alēthinŏs ]

    Etymology(어원)  / 227에서 유래
    • 1. 진실한, 참된:
      • a. 참된, 의지할 만한, 요 7:28, 히 10:22, 계 6:10.
      • b. 진리에 부합하는, 진실한, 요 4:37, 계 19:9.
      • c. 순수한, 사실의, 눅 16:11, 요 1:9, 살전 1:9, 히 8:2, 요일 2:8.
    • 관련 성경 / 참된(눅 16:11), 옳은(요 4:37), 진실한(계 3:7). 
                        [명] 참(요 1:9), 진실(계 19:11).

    영생은...아는 것이니이다 
    - 십자가의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을 바라보며 예수는 '영생'에 대하여 정의를 내린다.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되어 왔었다(Bernard).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호 6:3)

    예레미야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다'(렘 9:24)

    '안다'(기노스코)는 것은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하며 본절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에 수식하는 말로 사용됨으로 예수와 하나님의 인격적 하나됨을 증거한다(Lenski). 

    하나님의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인생들에게 가장 쉽게 그리고 충분하게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앎으로써 행복과 영생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주인으로서 영생의 주체(主體)가 되신다(11:35; 행 3:15). 
    한편 기도중에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1. '저희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식하는 것'이란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Lenski) 그렇게 해석하면 헬라어 원문에 무리가 따르게 된다. 
    2. 예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시기 위해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이와 같은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이 견해는 무난하게 채택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표현은 메시야의 자기 증거인 셈이다(Godet). 
    3.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예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표현이라고 하는 주장이었다(Westcott, Hegnstenberg). 
    예수께 대한 요한의 고백은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반복 기록되었다(요일 1:3; 2:22; 4:3; 5:20 등). 
    그러나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그날밤의 기억들을 잊어버렸다고 구태여 가정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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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백성이 나를 알지 못하여 망한다; 표준새번역, 새번역
     (My people are being destroyed because they don’t know me; NLT)”라며 구약시대의 끝자락에 기록된 호세아 4장 6절을 통해 당신에 대한 백성들의 무지를 한탄하셨던 하나님은, 신약시대를 맞이하면서 주신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새번역 (Eternal life is to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to know Jesus Christ, the one you sent; CEV)”라는 요한복음 17장 3절과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지식과 그의 은혜 안에서 자라십시오; 새번역 (grow in the grace and knowledge of our Lord and Savior Jesus Christ)”라는 베드로후서 3장 18절의 말씀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망하는" 삶에서 탈피한,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성장하여 영생을 누리게 되는" 삶의 길을 소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안다"라는 표현에는 "너희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표준새번역 (Know therefore that the Lord your God is God, the faithful God; ESV),"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See now that I myself am he!)”라고 한 신명기 7장 9절, 32장 39절과 같이 "하나님이 '주()이심'을 안다"라는 - 지난 편의 주제였던 - 의미, 그리고 “너희는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알아라. 그가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의 것이요, 그의 백성이요, 그가 기르시는 양이다; 표준새번역, 새번역 (Know that the Lord is God. It is he who made us, and we are his; we are his people, the sheep of his pasture),” “산을 지으시고 바람을 일으키시고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여 알리시고 새벽빛을 어둡게 하시고 땅의 높은 곳을 밟고 다니시는 분, 그분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다; 우리말성경 (He who forms the mountains, who creates the wind, and who reveals his thoughts to mankind, who turns dawn to darkness, and treads on the heights of the earth – the Lord God Almighty is his name)”라는 시편 100편 3절과 아모스 4장 13절처럼 "하나님이 '창조자이심'을 안다"라는 의미 등이 포함되지만, "하나님을 알라"라는 표제의 이 글을 통해 나누려는 주 내용은 "하나님에 대해(about God) 안다"라는 측면의,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관련된 말씀들입니다.

    위대한 설교자이자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의 거장으로 꼽히는 존 스토트(John Stott)는 지식을 두 종류, 즉 “Information(정보)”“Intimacy(친밀함)“로 구분한 후, 전자인 “정보로서의 지식”이 머리로 아는 지식인 반면 후자인 “친밀함을 통한 지식”은 인격적인 체험과 만남을 통해 아는 지식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실상 성경에서 "안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어떤 정보를 갖고 있다는 차원을 넘어 알고 있는 대상과의 인격적 교제를 능동적으로 즐긴다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는데, “여러분에게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인해 은혜와 평강이 더욱 풍성하기를 빕니다; 우리말성경 (May grace and peace be multiplied to you in the knowledge of God and of Jesus our Lord; ESV),"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신성한 능력을 따라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하심에로 우리를 부르신 그분을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말성경 
    (His divine power has granted to us all things that pertain to life and godliness, through the knowledge of him who called us to his own glory and excellence; ESV)”라는 베드로후서 1장 2, 3절에서의 "하나님과 주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지칭된 개념이 그 대표적 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All I want is to know Christ and the power that raised him to life. I want to suffer and die as he did; CEV)”라며(빌 3:10) “그리스도를 아는" 일을 자신이 바라는 것들 중에서도 첫번째의 순위로 꼽았던 사도 바울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지식에 하나가 돼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께서 충만하신 정도에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우리말성경 (This will continue until we all come to such unity in our faith and knowledge of God’s Son that we will be mature in the Lord, measuring up to the full and complete standard of Christ)”라는 주장(엡 4:13)을 통해 언급했던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 역시, 지적이고 이성적인 '앎'이 아닌 경험적이고 인격적인 '앎'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철학자이자 교수인 폴 챔벌레인(Paul Chamberlain)의 저서, “왜 사람들은 믿음을 갖지 않는가(Why People Don’t Believe)” 서문에서 역자인 제가 지적한 바 있듯, 기독교인들이 추구하는 지식의 내용이 이성과 충돌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성에 앞서는 무언가여야 함은 분명하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지식 추구의 방식 역시 이성에 의한 이해만으로 수행하는 '지적 수고'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를 바탕으로 한 '영적 향유'여야 함 또한 확실합니다. 

    수 세기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이성의 관계에 대한 심오한 깨달음을 제공해 왔던 중세 신학자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의 “나는 믿기 위해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 믿는 것이다(I do not seek to understand in order to believe, but I believe in order to understand)”라는 - 이해가 되어야만 믿을 수 있다고 고집하기에 앞서 먼저 믿고 난 다음 이해를 추구하겠다는 - 촌철살인적 선언이 보여 주듯,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온전한 믿음에 이르게 된 사람만이 그분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며, 또한 이 경지가 바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지식지혜최고 수준인 것입니다.

    ​위에서 소개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아는 지식하나가 돼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우리말성경 (This will continue until we all come to such unity in our faith and knowledge of God’s Son)”라는 에베소서 4장 13절이 믿음과 지식(신앙이성) 사이에 존재해야 할 가장 바람직한 관계, 즉 불가분의 형태로 서로 합력하는 관계에 대해 명쾌히 설명해 주는 말씀이라면,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은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 표준새번역 (I consider everything a loss because of the surpassing worth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whose sake I have lost all things. I consider them garbage)”라고 하는 빌립보서 3장 8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란 그 외의 모든 것을 오물처럼 여기도록 만들기에 충분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지식과 지혜임을 강하게 역설하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오라(Come to Papa)”라는 게리 윈스(Gary Wiens)의 책
    “하나님의 영광의 한 부분은 그분께서 자신의 일들을 우리에게 감추시는 것" 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체성운명의 핵심 부분을 당신의 마음속에 감추셨고 그러한 ‘감추어짐'을 의도하신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과 운명을 알고자 추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더욱 잘 알아 가는 일 또한 가능하도록, 그리하여 우리를 당신 가까이로 이끄시며 그런 우리와의 친밀도를 심화하려는 주님의 본래 계획 때문이라는 설명도 덧붙이고 있습니다. 

    잠언 25:2
    “일을 감추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일을 밝히 드러내는 것은 왕의 영광이다; 우리말성경 
    (It is the glory of God to conceal a matter; to search out a matter is the glory of kings)”

    신명기 29:29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The secret things belong to the Lord our God, but the things revealed belong to us and to our children forever)”

    전지하시며(All-Knowing) 영원무궁하신 하나님만 아실 뿐 유한하고 제약이 많은 우리 인간은 도저히 알 수 없을 하나님의 섭리와 신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여러 방법의 계시를 통해 당신에 대해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부분을 알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는 것 또한 결코 부인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민수기 12:6
    “너희 가운데 예언자가 있으면, 나 주가 환상으로 그에게 알리고, 그에게 꿈으로 말해 줄 것이다; 표준새번역, 새번역 
    (When there is a prophet among you, I, the Lord, reveal myself to them in visions, I speak to them in dreams)”

    사무엘상 2:27
    “내가 네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바로의 억압 아래 있을 때 그들에게 나를 분명히 나타내지 않았느냐?; 우리말성경
     (Did I not clearly reveal myself to your ancestor’s family when they were in Egypt under Pharaoh?)"

    로마서 1:19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표준새번역, 새번역 
    (what may be known of God is manifest in them, for God has shown it to them; NKJV)”​

    이 같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일을 깨닫는 데에는 그를 위해 열린 마음, 보고 듣는 눈과 귀가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하나님은 어둠 가운데서도 은밀한 것들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조차도 대낮처럼 밝히신다; 표준새번역, 새번역 (He uncovers mysteries hidden in darkness; he brings light to the deepest gloom; NKJV)”라는 욥기 12장 22절과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 준다. 낮은 낮에게 그의 말씀을 전해 주고, 밤은 밤에게 그의 지식을 알려 준다; 표준새번역, 새번역 (The heavens declare the glory of God, and the sky above proclaims his handiwork. Day to day pours out speech, and night to night reveals knowledge; ESV)”라고 한 시편 19편 1-2절, “세상이 창조된 이후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분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 명백히 보여 알게 됐으므로 그들은 변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말성경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God’s invisible qualities – his eternal power and divine nature – have been clearly seen, being understood from what has been made, so that people are without excuse)”라는 로마서 1장 20절 등에서 하나님의 영을 통해 우리에게 허락된, “감추어지고,“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해 열려진 눈과 귀, 마음의 실재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29:29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The secret things belong to the Lord our God, but the things revealed belong to us and to our children forever)

    "감추어진 일""나타난 일"이라는 반의어는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양면에 대해 우리의 깊은 묵상을 요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나타내신 영원한 일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몫이자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6:3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Let us know, Let us pursue the knowledge of the Lord; NKJV)”

    하나님을 아는 일에 우리의 노력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는바, 그러한 노력이란 곧 성실하고 부지런한 배움과 탐구로써 말씀 속에 감추어진 진리와 지혜를 발견해 내는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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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을 바로 알라(고린도 후서 10:3-6)

    “하나님을 바로 알라”(고린도후서 10:3-6)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적인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깨닫게 되어 영적인 눈이 점점 열리면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았던 사단의 영적인 공격을 늘 받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한 사단의 영적 공격을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본문 고린도후서 10:4 절에 “싸움에 쓰는 우리의 무기는 육체의 무기가 아니라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요새라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는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거짓으로 우리를 속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성도들 가운데 사단에게 늘 속아서 감격과 기쁨과 감사와 찬양과 사랑의 승리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늘 시험에 들고 쓰러져 원망과 불평, 좌절함 속에 살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가장 큰 이유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승리하는 신앙, 모든 일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참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바로 아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5 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 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 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라고 알려 줍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의 대한 지식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사단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 즉 권위적이고 실수를 용서하지 않고 엄격히 다스리는 아버지, 우리가 잘 못할 때 정죄하고 못마땅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라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사단이 주는 마음이고 견고한 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망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과거만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의 죄까지도 다 아시고 그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 예수를 대신 십자가에 대속의 제물로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죄는 미워하시지만 우리를 절대 미워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어떠한 죄와 잘못을 했을지라도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오기만 하시면 받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탕자의 비유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사단이 만들어 놓은 하나님에 대한 외곡된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쫒아 내십시오. 
    그래야 우리가 주님을 향한 열정이 생기고 섬길 수 있습니다. 
    잘못된 견고한 진들을 좇아내고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사랑으로 섬기고 기쁨과 자유함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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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을 알라(호세아 6:3, 6, 요한복음 8:55)

    하나님은 계시의 하나님이시다.
    만물과 아들을 통해 그 신성과 능력을 보여 알게 하시고(롬 1:19-20)
    그를 아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다(요 17:3).

    신앙은 계시로 그를 알게 됨이요(롬 1:20, 벧전 1:12),
    신앙생활은 하나님 아는 것 보다 높아진 모든 이론을 파하며(고후 1:13,10:5).
    하나님을 힘써 끝까지 알아가는 생활이다(호 6:3).

    아는 것이 힘이라 사람은 교육과 정보를 통해 열심히 알려 하는데 

    철학 :  인생과 세계의 궁극적인 근본원리를 탐구
               인간의사결정권을 추구하는바 신을 거부
    과학 :  현재 관찰 실험이 가능한 자연의 비밀을 연구
               관찰 불가능한 신의 존재를 부정
    신학 :   정경이나 이성을 통해 하나님 자체와 그 교리를 연구
               연구의 대상이 되는 순간, 신은 무한히 후퇴
    종교 :  고행, 명상, 치성으로 궁극자를 접근—빗나간 화살.

    성경은 하나님을 알게하는 책
    그 경륜은 창조~이적~이스라엘~독생자~성령~증인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이 알만한 것을 보여주심으로라(롬 1:19)
    히브리어 ‘야다’는 관념적이 아닌 경험적인 앎을 말하는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을 체험, 곧 하나님 앎을 의미한다(눅 1:34-38).

    야다(yâdaʽ)  יָדַע Storng number 3045        

    1. 보다.  2. 지각하다.  3. 삿 13:21  
    Pronunciation [ yâdaʽ ]

    Old Testament  / 940회 사용
    관련 성경 / 동침하다(창 4:1, 왕상 1:4), 알다(창 4:9, 신 9:6), 가까이 하다(창19:8, 24:16), 깨닫다(창19:33,전2:14), 간섭하다(창39:6), 허락하다(출3:19), 알게 하다(출14:4, 삼하24:2), 분별하다(신1:39, 전8:5), 생각하다(신8:5, 삼하23:13), 기억하다(신11:2), 알리다(삼상22:17), 살피다(욥35:15, 잠27:23), 아뢰다(시56:9), 측량하다(시71:15), 보다(잠14:7), 모르다(전4:13), 무식하다(사29:12), 몰지각하다(사56:11), 알다(렘1:5), 부끄럽다(렘6:15), 인정하다(렘14:20), 알리다(겔6:13), 알고자하다(전7:25), 알아보다(삼상23:22), 정탐하다(삼상23:23), 자복하다(렘3:13), 상관하다(창19:5, 삿19:22), 기억하다(출2:25), 행음하다(삿19:25), 분간하다(삼하19:35), 헤아리다(욥37:5, 사47:11), 알아주다(사58:3), 자다(삿21:11), 익숙하다(창25:27,왕상9:27), 잘하다(대하2:8), 풍부하다(대하2:12), 돌보다(잠12:10), 인정받다(신1:15), 먹다(창41:21), 탄로되다(출2:14), 나타나다(삼상22:6, 사66:14), 교훈을 받다(렘31:19), 기억하다(창41:31), 보이다(룻3:3), 예고하다(사47:13), 드러나다(잠10:9), 나타내다(욥26:3, 잠12:16), 지시하다(출33:12), 가르치다(삼상10:8, 욥37:19), 배우다(삼상28:15), 대답하다(욥38:2, 40:7), 선포하다(사12:4), 징벌하다(삿8:16), 보여주다(사40:14), 분별하다(겔44:23),인도하다(대하23:13). [명] 총명한 자(단2:21), 감각(잠23:35), 지식(느10:28), 지식인(전9:11),친구(왕하10:11, 시31:11), 친족(룻2 : 1), 친우(시55:13). [부] 능히(대하2:14), 부지중(아6:12), 반드시(창15:13), 밝히(삼상20:3), 분명히(왕상2:37, 렘28:15), 순식간에(시35:8), 부지런히(잠27:23).

    약속대로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낳음으로 그에게 나타나신 이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고(창 18:1-10)
    430년 전 예언대로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창 15:13)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알라고 하셨으며(신 7:8-9),
    가나안 정복도 여호와께서 그들 앞서 파하신 결과임을  이스라엘로 알게 하셨다(신9:3).

    성소는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는 장치였고,
    역사는 여호와는 범죄한 자를 징벌하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였으며(왕하10:10)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살 길은 오직 여호와를 알되, 힘써 알자고 하였으니
    여호와는 번제보다 그를 아는 것을 원하심이다(호6:1-6).

    예슈아께서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 하심은
    성전 된 자기 육체의 죽음과 부활로(요2:19-21)
    관념적인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경험적인 예슈아 아버지 하나님을 보이시려 함이요(요14:9),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성전이 아닌
    아는 것을 예배하는 성전을 보이시려 하심이다(요4:22).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요1:10)
    침례 요한은 계시로 그를 알고 세상에 나타냈고(요1:33),
    그는 아들을 알아야 하나님 알 수 있음을 단언하셨다(요7:29,8:19,8:55)
    그는 모세의 말은 알아들었으나
    예슈아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바리새인들에 의해 죽음에 넘겨지셨다.

    그가 죽으실 때, 성전 휘장 곧 신의 베일(veil)이 찢어지고(히10:20)
    그는 다 이루었다 하셨으니(요19:30)
    ① 태초부터 함께 계신 아버지를 아심으로 그의 말씀대로
        목숨 다시 얻기 위해 목숨을 내려놓으심(요8:55, 10:17-18).
    ② 스스로 속은 마귀를 심판하심(사14:12-5, 창3:4-6).
    ③ 알지 못하고 범죄한 인류에게 구속의 피 뿌리사 죄사하심(눅23:34, 엡1:7).

    부활하신 그의 손, 발을 만져 보고 그가 그인 줄 안 제자는(신32:39)
    ‘당신은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하였다(눅24:39, 요20:28)
    성령은 계시의 영, 하나님 아는 것에 자라가게 하시는바(엡ㅈ:17-19, 골1:10)
    부르심의 소망, 자녀의 기업의 영광, 하나님 이름의 능력을 알게 하심이라

    그리스도인의 자부심은
    ① 예슈아의 피, 아들의 영으로 신의 소생(offspring)됨.
    ② 철학, 과학, 신학, 종교가 알 수 없는 바로 그것을 아는  가장 고상한 지식을 가짐.

    오! 주여,
    나와 내 지체, 내 가족에게 귀를 열어주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아듣고 순종함으로 말씀을 체험하게 하옵소서.
    계시의 영이 끊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 오시는 날,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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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을 알라(욥기 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우리가 적합하게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대로 그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거룩한 본질과 실재의 단일체로서의 하나님뿐만 아니라, 복수의 위격을 지닌 하나님을 또한 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세기 1: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그렇기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담겨진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알기 전까지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알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마음 속 깊은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가치조차 없는 나 자신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의 놀라운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는 영원토록 신실하심을 깨닫고, 그의 식탁에 앉아 그가 주신 은혜 가운데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의 영광 중에 빛나는 빛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알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본성에 있어 단일한 복합성을 지닌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면서도, 고난받는 유한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말입니다. 신성을 지니사 물 위를 걷는 하나님이시자, 인간으로서 피곤함을 느끼기에 쉬기 위해 우물가에 앉으시는 하나님을 당신은 따르는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친구, 형제이자 남편, 그리고 당신의 모든 것으로 알기 전까지는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성령을 잊지 마십시오. 성령의 본성과 특징, 그의 속성, 그리고 그의 사역을 명확하게 알기 위해 애써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의 성령을 바라보십시오. 그는 제일 먼저 혼동 가운데서 역사하시며 질서를 가져오셨으며, 당신 영혼의 혼동 상태에 찾아오셔서 거룩함의 질서를 창조하십니다. 성령을 주님으로, 영적인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깨우쳐주시는 분으로, 선생님으로, 위로자로, 그리고 당신을 성화시키시는 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 임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 안에 머물게 되심을 알아야 합니다.

    성삼위일체에 대한 그러한 지적이고, 성경적이며, 경험적인 믿음은 당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게 될 때 당신의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은 참으로 당신에게 평안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을 누리기 위해 주님을 알기를 원합니다. 
    자격이 없는 자희를 자녀 삼아 주시고,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십자가의 죽음으로 대속하시고, 주님께 임하신 성령을 저희에게 보내주셨음을 이해하고 또한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저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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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하나님과 거짓 신들의 차이 점

    - 김영수 장로 / 고신대前사무처장 부산부평교회 

    범신론 자들은 우주내의 각종 현상은 모두 하나의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본질의 여러 가지 형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신론 자들과 합리주의 자들은 신과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일련의 인과 관계의 시초가 될 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들은 신은 피조세계의 시초에서 접촉하실 뿐이며, 만물에 영구한 독립적인 존재를 주어 자기밖에 두시고, 그들 자체의 기능을 발휘하도록 버려두고, 아무런 변경을 가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A. A. Hodge,)

    철학자들은 우주와 만물, 자연 현상들의 신비한 특이 사항들을 발견하고서는 신의 존재와 지배를 인정하면서 “추론과 가설의 신”을 설정한 것이었다. 이는 성경의 유일한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과는 다른 신이다. 그럼에도 기원전 철학자들의 사상은 이후 기독교 철학자들이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들로 나뉘어 기독교를 논증(argument )하고 변증(dialectic)하는 방법으로 그 논법(論法)을 적용하기도 하고 도입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 철학자들이 저들의 논리와 이론들을 도입, 인용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모든 학문은 반드시 철학적 기초 정립과 접근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대개의 논법 이론이나 원리 체계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립해 놓은 이론에 대입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라고 본다. 심지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철학 사상이나 이론들은 저들의 이론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과정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인데, 여기에는 기독교 철학자들 역시도 저들이 연구해 놓은 논법을 이용하여 기독교를 논증하고 변증했다는 점이다. 

    1. 기원전 철학자들이 말하는 신 

    플라톤 사상∣ 플라톤(BC 427~347)은 신(데미우르고스) 의 존재에 대한 “내재적 존재”의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았다. 오히려 “본체론적 세계”를 강조했다.

    플라톤은 존재자와 생성 자를 구별함으로써 우주론을 제시한다. ⌈티마이오스-플라톤의 대화편⌋는 기원전 360년경 플라톤의 저작인데, 소크라테스와의 대화 상대자로 티마이오스, 크리티아스, 헤르모크라테스, 그리고 익명의 한 사람 사이의 이야기가 대화체로 쓰여 져 있는 우주와 인간, 혼과 몸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서 플라톤은 우주의 창시자를 “데미우르고스”라고도 하였고 “구성한 이” 라고도 한다. 이런 어휘들은 장인이나 목수를 뜻하는 말이다.

    플라톤은 추론을 통해 물질세계와 완전히 분리된 형상의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는 이데아의 세계가“현실”이고 우리 주변의 세계는 그저 그 이데아의 세계를 본뜬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동굴의 비유(Allegory of the Gave)를 제시한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어둠속 뒷벽에 묶인 채 갇혀있는 한 동굴의 현상과 같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오직 앞쪽을 향해서만 쳐다 볼 수 있는데, 동굴 속에 갇힌 죄수들의 뒤쪽에는 밝은 불이 있어서 그들이 묶여 있는 벽 쪽으로 그림자가 생기게 된다. 불과 죄수들 사이에는 이따금씩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다양한 물체를 떠받칠 수 있는 성벽이 놓여 있어서 그 물체들의 그림자가 벽 위에 드리워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죄수들은 세상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중략) 플라톤의 이런 사상은 어거스틴, 안셀무스, 데카르트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플라톤과는 달리 신의 존재에 대한 모든“증명”은 “우주론적 논증”을 강조했다. 그에게 있어서 신은 제일운동자(Prime Mover)이며 목적인(目的因, Final Cause)으로서 필연적 존재(Necessary Being) 또는 최고의 존재(Highest Being)라고 보았다. 당시 우주는 하나의 시작점에서 생겨났다는 주장과 우주는 늘 존재했다는 이 두 주장으로 사람들은 나뉘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우주는 늘 존재하였으며 영원하다고 하였으며. 바위와 같은 무생물은 사람, 개, 말 등의 생물에 이르는 모든 것의 근원지가 되었다고 확신했다.”그리고 “우주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움직이며, 또한 이는 오직 변화와 운동에 의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사상을 아랍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인 철학자 아비센나(A.D. 980~1037)와 아베로에스(A.D. 1126~1198)는 비록 이슬람의 정통에 맞지 아니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 써 동료 이슬람교도들에게 배척을 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중세 유대교와 기독교 사상가들은 이 사상을 거부하면서 배격하려고 몸부림쳤다. 그 이유는 성경에서 “우주는 어떤 한 시점에서 발생했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무한성∣ 그에 따르면 “무한성은 한계가 없다.”고 한다. “각각의 수는 보다 높은 다른 수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수의 순서는 무한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도 마찬가지다.”고 하였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는“잠재적 무한”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런 각각의 날들이 동시에 공존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무한한 수의 사물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실재적 무한”은 불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과 날짜는 또 다른 시간과 날짜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우주가 무한하다고 믿었다. 그는 플라톤의 주장과는 달리 인간이 죽으면 영혼도 소멸한다고 믿었다.  

    2. 로마 가톨릭 철학자들의 사상 

    알셀무스의 존재론적 증명 ∣ 안셀무스(AD. 1033~1109, 대주교, 가톨릭철학자)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거부하는 한 어리석은 자와 자신이 논증 을 벌이는 “상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설명하였는데, 이를 안셀무스의“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Argument)”이라고 말한다. 그는 “첫째. 신은 그보다 더 위대한 존재를 상상할 수 없는 완전한 존재이고 둘째. 존재는 비존재 보다 더 월등하고 위대하다.”는 논리로서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논쟁이 끝날 무렵, 어리석은 자가 이 두 가지 논제를 받아들이는 것에 의거하고 있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모순적인 태도를 인정하고 논증자의 의견을 수용(accept) 하거나 신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에 대해 18세기 칸트는 신의 존재를 마치 사물의 속성인 것처럼 다룬다고 비난한다. 칸트는 “정신뿐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정신에만 존재하는 것보다 더 좋다는 안셀무스의 말은 잘못 되었다.”고 반박하였는데, 다른 철학자들은 칸트의 주장에 대해서 또 반대했다.

    동일한 가톨릭 사제이며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증명을 신랄히 반박하기도 한다. 안셀무스의“존재론적 증명”사상은 주로 범신론자들인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수용하기도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과 이단성 논란∣ 이후 가톨릭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AD. 1225~1274)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지지한다. 그는 기독교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로 분류되는 사람인데 아리스토텔레스가“우주는 항상 존재했다.”는 주장에 대해 “성경에는 우주가 항상 존재한 것은 아니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말하면서도 “세상이 하나의 시작점에서 생겨났지만 신은 세상을 영원히 존재한 것처럼 창조했을 것이다.”라고 함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와 성경의 사상을 조합, 가미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아퀴나스는 끝까지“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정말일지도 모른다.”고 함으로서 그의 관점이 잘못되었으나 원칙이나 추론에서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므로 써 그의 철학을 존중했다. 무엇보다 아퀴나스는 생명체와 영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따랐으며 그의 주장을 왜곡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또한 인간은 “지성”이라는 하나의 “형상”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아퀴나스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곧 그의 사상은 “이단자”라는 비난을 모면하지를 못했다. 이후 세속 철학자들까지도 일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비판하게 되었고 아퀴나스의 관점을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신의 존재나 영혼의 불멸성과 같은 종교적 입장을 철학적 추론으로 입증할 수 있다고 믿는 철학자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개혁 또는 정통이라는 미명(美名) 아래 도입, 시도된 성경해석학에 추론이나 가설을 적용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연구에 관심을 가졌다. 반면 플라톤은 수평보다는 수직을 더 지향했으며, 원인적이기 보다는 직접적이었다. 그리고 논리적이기 보다는 수사학적인 면에 관심을 가졌다.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며 연역적인 연구에 관심을 가졌다.  

    3. 성경의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 

    칼빈의 삼위일체 교리∣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저술했는데, 1536년에 6장으로 구성된 라틴어 초판을 시작으로, 1543년에는 21장으로 늘어난 증보판을 출판한 후 1550년에는 약간의 내용을 보충한 증보판을 출판하였고, 결정판은 1559년판(라틴어)과 1560년판(프랑스어)이다. 기독교강요는 개혁신학의 지침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저서는 역대 신학자들의 사상과 신앙체계를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초안되고 다듬어진 것을, 비판과 검정 과정을 거치면서 이룩한 체계화된 것이다. 기독교강요는 오랜 동안 역대 신학자들의 신학과 사상체계를 재정리, 집대성한 개혁신학의 지침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저서는 한 순간에 이룩한 것이 아니다. 이 저서는 성경의 역사성과 일관성이 함께 깃들인 것으로서 오늘날 우리 개혁주의 교회들이 받아들인 칼빈 신학의 총괄 이론들이다. 칼빈의 삼위일체 교리를 요점만 정리해 보기로 한다. 

    칼빈에 의하면, 참 하나님과 거짓 신들을 구분할 수 있는 결정적인 어떤 인위적인 방안은 별도로 없다고 보았다. 다만, 참 하나님은 오직 성경에서만 찾을 수 있고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유일신(the one and only God)이신 하나님은 두 가지 특징으로 우상들과는 구분된다. 첫째. 하나님은 무한한 영적 본질이시며, 세 위격으로 계신 한 분이신, 즉 삼위일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두 가지 특징으로 인간과 구분되신다. 하나님과 인간은 모두 불멸의 영적 본질이지만, 하나님은 무한한 본질(창조주) 이시고 인간은 유한한 영적 본질(피조물) 이다.

    B. B. Warfield(1851~1921)는 칼빈의 삼위일체 교리가 이전 주장들과는 다른 “독창적이며 신기원을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 칼빈은 삼위 - 성부, 성자, 성신은 한분 하나님이시되 성부는 성자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서로가 다른 특성에 의해 구별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삼위일체는 믿음에 관한 것이지, 언어로 그것을 표현하기에는 충분치 않다고 이해하였다. 성부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성자는 구속 주 하나님이시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으로 초대하시고, 보존하시는 내적 사역과 외적 사역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부께로 서 나오는 것은 독생 하신 성자의 고유성과 성령의 고유성이다. 성부께로 서 나오는 것은 신적 본질이 아니라 서로를 구분하는 독특한 개성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가장 관심을 집중 시켰던 문제는 삼위일체의 세 위격에 관한 논의였는데, 여기에는 칼빈에 필적할 만한 신학자는 없었다. 그는 각 위격은 자존성과 충분한 신성을 가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세 위격의 각각은 자존성에 있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신이시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행위의 시작이자 만물의 원천이시며, 성자 하나님은 신적 지혜이자 만물의 통치자요 분배 자 이시고, 성령 하나님은 신적 행위의 권능 또는 효과이시다.

    창세기 1:1의“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태초(In the beginning)의 시점은“영원으로부터 시간이 시작되는 첫 출발점”이며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의하여 비롯된“시점(a point in time)”이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천지 만물의 유일한 "근원(origin)" 이시다.

    니케아 교부들과 그 신조는 주로 본질의 통일성이 아니라 개별성을 강조하였으나, 칼빈은 성자와 성령의 자존성과 세 위격이 본질상 지니고 계신 통일성을 주로 강조한 점이 다르다. 칼빈은 우리는 성경이 없었다면 오류에 빠지게 되며, 성경의 하나님(삼위일체)이 없다면 스스로 거짓 신들을 만들게 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우상들과 좀 더 정확하게 구분하실 때 기준으로 삼으시는 특성으로써 하나님의“무한성과 영원성”을 든다. 이는 이교도들의 거짓 신들과 성경의 참 하나님을 구분하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한 중요한 대목이다.

    우리 기독인이 믿는 신은 하나님 안에 있는 피조 되지 아니한 무한한 영적 불멸의 본질이다. 그러나 인간 안에 있는 피조된 불멸의 본질은 유한하고 타락함으로써 죄악 된 본질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나아가 하나님은 무한한 영적 실재이고, 인간은 유한한 영적 실재라는 교리로 귀결된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동질성을 중시하는 것으로서 신적 존엄을 지닌“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으로서의 지음을 받은 인간임을 강조한 것이다.  

    칼빈의 이런 사상에는 플라톤의 사고 영역 전체가 그의 목적에 유용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그것은 참여, 조명, 중재, 성령의 감동 등의 개념에 적용되기도 했다고 본다. 이런 사상은 인문주의 르네상스,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이런 노선을 따른다. 이후 후기 개혁주의 스콜라 신학(정통신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관점”을 보게 되는데, 이를테면 예정을 현세에 발생하는 모든 사건의 “원인”으로 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평적 정신”은 작정, 예정, 섭리 등의 교리에 영향을 준다. 이런 사상은 자연주의 르네상스, 개혁주의 스콜라 신학은 이런 노선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Philip C. Holtrop, 美 칼빈신학교) 

    4. 전 세계의 종교인구 

    세계의 도처,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나 무수한 토속 종교가 두루 산재해 있다. 칼빈은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아는, 실로 본능으로 타고난 지각(perception)이 있다고 한다. 인간이 본성에 의해 하나님을 지각하며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종교적 존재라고 본다. 인간 안에는 신에 대한 희미한 의식을 발견하며 인간은 이런 의식을 피할 수가 없다. 이것이 모든 인간 종교들의 기초가 된다.

    인간이 신에 대한 지각을 보여 주는 증거들은 심지어 나무, 돌에게 라도 경배하려는 인간의 의지, 종교에 의존하고 영향을 받고 통제를 받으려고 하는 의지와 자세, 그리고 무신론자라도 느끼는 두려움 같은 것은 인간의 종교성을 말해주는 중요한 증거들이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인간이 신을 알 수 있는 지각은 배워서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날 때부터 지니는 것으로서, 완전히 지워 없앨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한다. 칼빈은 인간이 동물의 수준에서 끌어 올리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종교적 성향(性向)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知覺)은 다르다.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 

    세계의 주요 종교

    (아래 종파별 숫자는 adherents.com 에 의한 것이다)  

    종파별

    종파별

    1.기독교 21억 명

    천주교: 11억 명

    개신교: 3.5억 명

    정교회: 2.4억 명

    성공회: 8400만 명

    그 밖의 기독교 분파: 3.5억 명

    2.이슬람교 13억 명

    수니파: 9.4억 명

    시아파 1.7억 명

    3.무교무신론불가지론 11억 명

    4.힌두교 9억 명

    5.유교도교 등의 중국 전통 종교 3.94억 명

    6.불교 3.76억 명

    대승불교: 1.85억 명

    소승불교: 1.24억 명

    7.원시 토착 신앙 3억 명

    샤머니즘 등

    8.아프리카 토속 신앙 1억 명

    하나의 종교가 아님

    9.시크교 2300만 명

    10.주체사상 1900만 명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에서 가르치는 정치사상이지만 일부는 이를 종교로 분류하기도 함.

    11.정령 숭배 1500만 명

    12.유대교 1400만 명

    13.바하이 신앙 700만 명

    14.자이나교 420만 명

    15.신토 400만 명

    16.카오다이교 400만 명

    17.조로아스터교(배화교) 260만 명

    18.텐리쿄(천리교) 200만 명

    19.신이교주의 100만 명

    20.유니테리안 유니버셜리즘 80만 명

    21.라스타파리 운동 60만 명

    하나의 종교가 아니다.

    22.사이언톨로지교 50만 명

    전세계 종교인구 분포

    (종교인구 통계는 조사 기관과 조사 연도 등 기준에 따라 차이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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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7장에는 거짓 선지자에 대한 말씀도 있는데요.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이 말씀을 듣고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에 따라 법대로 하여 천국에 들어가느냐 불법자가 되어 천국에 가지 못하느냐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15-20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예수님께서는 천국 가는 길이 좁고 협착하다 말씀하신 후, 이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인데, 앞에 거짓이 붙었으니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참 목자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라고 하였듯 그가 있는 곳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장소임에는 틀림없는 것입니다.

    선지자라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알고 전하며 가르치는 목자를 가리키는 말씀일 텐데요. 왜 앞에 거짓이 붙었을까요?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참 말이 아니라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단어를 생각할 때 그저 그 단어만 사용할 것이 아니라, 그 단어의 뜻까지 생각하며 말하고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 17장 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사람이 영생을 하기 위해서는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참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하나님이라니요? 이 말씀인즉 참하나님이 있다 함은 거짓 하나님도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거짓 하나님이 성경에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의문점이 있다면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좋지만 먼저는 하나님 성경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의 성경 말씀을 보신다면 '아, 진짜 그렇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4

    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이사야 8:20-22

    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21.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그 주릴 때에 번조하여 자기의 왕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22.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어떻습니까? 대적하는 사단 마귀가 다른 곳이 아닌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스스로 높이며 하나님이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목자들은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지자라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해야 할 터인데, 저는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물론 성경을 따로 열심히 읽거나 하지 않은 제 탓이 크지만 여하튼 성도를 지도하는 목자가 가르쳤다면 이런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의아했을 것입니다. 성경에 도대체 왜 이런 말이 있을까? 의문을 가지고 또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녕 들어본 적이 없으니 이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안타까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사야 8장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자라 하면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목자들이 전하는 말씀이 증거와 맞지 않는다면 그들은 아침 빛을 보지 못한다 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이라고도 하는 자신들의 목자를 저주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 증거를 받았으니 온전한 생명수 말씀을 얻지 못하였으니 주리고 번조하여 자신의 목자를 저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목자를 저주하여도 이미 늦었고 그들의 결과는 지옥인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은 거짓 목자를 따르는 사람들의 결과가 어떠한지 너무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마태복음 7장의 목자의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그들을 안다 하였으니 그 말씀을 들어보면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자기가 섬기는 교회 목사의 말만 들어보면 어떻게 좋은 열매인지 나쁜 열매인지 비교가 될까요? 그 목자가 좋은 나무인지, 못된 나무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비교 대상이 없는데 말입니다.

    또한 자신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다면 자신의 목자가 양의 옷을 입은 이리인지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비교 대상을 만들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자기의 왕을 저주하면서 지옥으로 쫓겨 들어가는 그런 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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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을 옮겨 놓으라(요한복음 11:39)


    돌(리도스) 3037

    λίθος, ου, ὁ Storng number  3037

    1. 돌.   2. 마 3:9.  3. 마 24:2 
    Pronunciation [ lithŏs ]
    • I. 돌
      •  1. [문자적으로]
        •  a. [일반적인] 돌, 마3:9, 막5:5, 눅3: 8, 요8:7.
        •  b. [건축에 쓰이는] 돌, 마24:2, 막13:1, 눅19:44.
        •  c. 보석[금, 은, 진주 이외의 것], 고전3:12, 계17:4, 18:12.
        •  d. 맷돌, 눅17:2, 계18:21.
        •  e. 무덤을 막은 큰 돌, 막15:46, 마27: 60,66, 눅24:2, 요11:38, 고후3:7.
        •  f. 돌우상, 행17:29.
      •  2. [비유적] 그리스도, 그리스도인, 막12:10, 마21:42, 눅20:17, 롬9:32, 벧전2:4,5.
    • 관련 성경  / 
      돌(마3:9, 눅24:2, 계18:21), 벽옥(계21:11), 맷돌(막9:42), 아름다운 돌(눅21:5), 보석(고전3:12), 홍보석(계4:3), (건축)돌(막13:1), 산 돌(벧전2:4).



    옮겨놓으라(아이로) 142

    αἴρω Storng number142

    1. 들어올리다.  2. 돌을 올리다.  3. 뱀을 집어 올리다
    Pronunciation [ airō ]
    • I. 들어올리다, 높이다, 집어 올리다, 데리고 올라가다.
      • 1.  [문자적으로]
        • a.  돌을 올리다, 요8:59, 계18:21.
        • b.  뱀을 집어 올리다, 막16:18.
      • 2. [상징적으로]
        • a.  αἴτοὺς ὀ- φθαλμοὺς ἄνω: [기도 중에] 눈을 들어 우러러 보다, 요11:41.
        • b. 소리를 높여, 눅17:13.
    • II.  가지고 가다, 메고 가다, 마16:24, 막8:34, 눅9:23, 3. 들어올려서, 가져가 버리다, 옮기다, 치우다, 요2:16, 19:38.
    • III.  [들어올리지 않고] 치우다, 제거하다, 눅11:22, 23:18, 요19:15, 고전5:2, 6:15, 요일3:5.
    Grammar Explanation

    [기본형] 미래 ἀρῶ , 제1부정과거 ἦρα, 완료 ἦρκα[골2:14], 완료수동태 ἦρμαι [요20:1], 제1부정과거수동태 ἤρθην, 미래수동태, ἀρθήσομαι, 히브리어 5375 참조

    • 문법설명

      [기본형] 미래 ἀρῶ , 제1부정과거 ἦρα, 완료 ἦρκα[골2:14], 완료수동태 ἦρμαι [요20:1], 제1부정과거수동태 ἤρθην, 미래수동태, ἀρθήσομαι, 히브리어 5375 참조

    • 관련 성경  /  받들다(마4:6), 가지다(마20:14, 막2:11), 당기다(마9:16), 메다(마11:29), 빼앗다(마25:29), 가져가다(마14:12), 거두다(마15:37, 막8:8), 지다(마16:24, 요1:29), 던지다(막11:23), 깨닫다(마24:39), 뽑다(막15:24), 집다(막16:18), 높이다(눅17:13), 취하다(눅19: 21), 없이하다(눅23:18, 요19:15), 들다(요5:9), 끌어올리다(행27:17), 옮겨놓다(요11: 39), 제하다(요15:2), 데려가다(요17:15), 치우다(요19:31).



    Μαραναθα



    마라나타(Maranatha, 아람어: מרנא תא: maranâ thâ'  또는 מרן אתא: maran 'athâ' , 그리스: Μαραναθα, Our Lord has come,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2개의 아람어가 합쳐진 공식인데 신약성경에 두 번 나온다. 
    성경에서 "마라나타(מרנא תא, maranâ thâ)"라고 하는 용어

    고린도전서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If anyone does not love the Lord--a curse be on him. Come, O Lord.

    ει τις ου φιλει τον κυριον ιησουν χριστον ητω αναθεμα μαραν αθα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He who testifies to these things says, "Yes, I am coming soon." Amen. Come, Lord Jesus. 

    이것은 본래는 아람어로 기도문에 쓰인 것으로 헬라어로 표기한 것이다.
    이 용어는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디다케(가르침이라는 뜻)"의 예식문(10:14)에서도 발견되며,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우리 주여 오소서(Our Lord(10:14) 
    come Our Lord has come . 




    󰃨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 바울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저주'를 대비시켜 주님께 대한 사랑이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저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데마'(*)는 어떤 사건과 관련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노여움 아래 맡겨진 것'을 의미한다(Boice). 본절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르치는 바는 주님께 대한 사랑도 없이 자기 생각과 행동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주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할 것임을 경고하는 것이다(Lenski, Edwards).

    󰃨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 바울은 '저주'에 이어 곧바로 '소망'의 말을 잇는다.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라나다'(*)는 아랍어 '마라나타'(*)의 음역이며 어떤 사본에서는 '마란아다'(*)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랍어 '마란아타'(*)의 음역이다. 양자는 시제 상의 차이를 보이는데, 전자의 경우 '우리 주님이시여 오시옵소서'(our Lord, Come!)라고 번역할 수 있고, 후자의 경우는 '우리 주님께서 오셨다'(our Lord has come)라고 번역할 수 있다(Chrysostom). 계 22:20에 나오는 헬라어 번역 '에르쿠퀴리에'(*, '오소서 주여')는 명령형으로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본절에서는 두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한데 전자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역점을 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역점을 둔 것이다. 여기서 후자의 표기를 따라 완료형으로 해석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심판을 담당하러 오셨다는 사실을 담고 있고 예언적 과거(prophetic past)의 용법으로서 미래적 사건을 과거시제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명령형으로 사용된 경우는 주의 재림을 촉구하는 의미로 모든 분쟁과 불의를 종식(終熄)시켜 고난을 없애주실 것을 소원하는 의미가 된다(Godet, Lens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