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휨노스) ὕμνος



찬송(휨노스. hümnŏs)  ὕμνος, ου, ὁ   스트롱번호5215

1. 찬송.  2. 노래. 3. 엡 5:19
발음 [ hümnŏs ]
  • 1.  찬송, 노래, 엡 5:19, 골 3:16.

ὕδέω ‘찬양하다’의 축약형

  • 문법설명  /  ὕδέω ‘찬양하다’의 축약형
    관련 성경  찬송(엡5:19, 골3:16).


찬송(3034) 야다(yâdâh)  יָדָה   

1. 던지다.  2. 피엘형 : 미완료형  וַיַדּוּ
3. 히필형 미완료형 יְהוֹדֶה
발음 [ yâdâh ]
구약 성경  / 117회 사용
관련 성경  /  쏘다(렘 50:14), 떨어지다(슥 1:21), 던지다(애 3:53), 인정하다(왕상 8:33, 대하 6:24), 감사하다(시 75:1, 대상 16:4, 23:30, 느12:24), 찬송하다(창 29:35, 대하 7:6, 시 45:17), 자복하다(민 5:7, 시 32:5, 단 9:4), 찬양하다(시 43:4, 71:22, 사 38:18), 칭찬을 받다(시49:18), 아뢰다(레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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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있다면 단연 찬송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노래하기를 좋아한다.

그리스도인은 찬송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매주 예배에서 찬송을 몇 곡이나 부른다. 
무슨 모임을 시작하기 전과 중간에 수시로 노래를 부른다. 
기도회 때에도 찬송은 반드시 있다. 
가정예배에서도 찬송을 부른다. 개인적으로도 찬송을 수시로 부른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은 장례식에서도 찬송을 부른다.
불신자들이 볼 때 장례식의 노래는 경망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기독교 장례식은 그러려니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옥에서도 부르는 찬송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중 빌립보 감옥에 갇혔다. 
점치는 귀신들린 여자를 구해주었다는 것 때문에 억울하게 매를 맞고 쇠사슬에 묶였다. 
그런데 이런 암울하고 칙칙한 옥에서도 바울과 실라는 찬송을 불렀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바울은 또 다른 옥에서 찬송을 부른다. 
그것은 에베소서에서 잘 나타난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 기록한 편지다(기원후 60년 경, 엡 3:1; 4:1; 6:20). 
바울은 로마에 죄인의 신분으로 잡혀 있을 때 찬송을 한 것이다.

에베소서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그리스도인은 슬픔과 고통스런 환경 가운데서도 찬송을 하는 특별한 사람들이다. 그러면 찬송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이 자주 부르고 좋아하는 찬송은 무엇인가? 우리는 찬송이 좋아서 부르긴 하지만, 찬송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를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찬송의 의미를 살펴보자.

‘찬송’의 의미

     도대체 ‘찬송’이 무엇이기에 그리스도인은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노래할 수 있을까? 바울이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할 때 헬라어는 ‘유로게토스’(eulogetos)이다. ‘유로게토스’는 ‘좋은 것을 말하다’는 의미에서 온 단어이다. 한글로 번역하자면, ‘덕담’(德談) 같은 것이다. ‘유로게토스’에 해당되는 단어가 구약 히브리어에는 ‘바룩’(baruk)이다. 이 단어들이 하나님 편에서 사용될 때는 ‘복을 주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좋은 말을 하시는 것이니, 복을 주신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사람 편에게 하나님을 향해 사용될 때에는 ‘찬송하다’라는 뜻이 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좋은 것을 말하게 되니, 그것이 ‘찬양하다’라는 의미가 된다.

찬송은 감사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것이 뭐가 있을까? 인간은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 스스로 만든 뭔가를 드릴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드릴 뿐이다. 우리는 매 주일 모여 하나님께 예배한다. 그 때 우리가 드리는 것이 ‘찬송, 기도, 봉헌’이다. 그 가운데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이 드릴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여기 히브리서 13:15에 나오는 “찬송의 제사”는 레위기 7:11-15에 나오는 ‘화목 제사’와 ‘감사 제사’와 같은 말이다. ‘감사하다’는 ‘찬양하다’는 말이고, ‘찬양’은 ‘감사’이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감사와 찬양의 제사를 드렸을까?(레 7:11-15)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께 먼저 번제(희생 제사)를 드린다. 그 위에 감사제물의 일부를 태운다. 그러면서 감사제목을 말한다. 감사를 고백한다. 그렇게 희생 제사를 드릴 뿐만 아니라, 기름 섞은 무교병, 즉 이스트를 넣지 않은 딱딱한 빵도 드린다. 그리고 기름 바른 무교전병, 즉 이스트를 넣지 않고 기름을 발라 구운 맛있는 과자도 드린다. 마지막으로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구운 또 다른 종류의 과자를 함께 드린다(12절).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스트를 넣어 구운 빵도 감사 제사를 할 때 드린다(13절). 이 모든 것들을 ‘거제’로 하나님께 드린다. 곧 빵과 과자를 하나씩 좌우로 흔들어 하나님께 드린다. 그 후 그것을 제사장들에게 준다(14절). 이 맛난 것은 모두 제사장이 먹는다. 동시에 빠뜨리지 않고 했던 것이 있는데 그것은 ‘찬송을 부른 것’이다. 아마도 화목제사 가운데 감사 제사를 ‘찬양의 제사’라고 부른 것은 찬송이 포함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화목제사 가운데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송을 부른 것이 감사제사의 특징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통적으로 화목제사 가운데 감사 제사를 드릴 때 불렀던 찬양은 시편 42편 5절로 알려져 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또 한 편의 노래는 시편 100:4이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구약 시대의 ‘감사 제사’에서 잘 나타나고, 신약 시대에도 그런 의미를 살려 예배 가운데 실현하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 5:18-20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말씀에서 봐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의 증거로, 시와 찬송, 신령한 노래가 나타난다. ‘시’는 구약의 시편을 의미하고, ‘찬송’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새롭게 만들어 부른 노래인 것으로 보이며, ‘(신령한) 노래들’은 성경에 나오는 시편 이외의 여러 노래들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 세 가지는 모두 ‘찬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종합할 수 있다. 여하튼 그 찬양의 내용과 형식은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로 표현된다. 감사는 찬양이고, 찬양은 감사인 것이다. 그것은 구약의 감사 제사와도 연결되고 에베소서 5:20에 나타난 말씀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찬양은 삶으로

     그리스도인의 찬양은 베짱이처럼 일을 안 하고 노래만 부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일과 공부에는 게으르면서 노래하는 일은 좋아서 앞장서기도 한다. 노래를 인도하는 찬양 팀은 그런 점에서도 인기가 많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찬양은 단순히 노래를 즐긴다는 의미 이상이다. 물론 노래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하지만 칼빈이 ‘음악’을 ‘괴물’이라고까지 얘기할 정도로 위험한 요소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부르는 찬양은 온 회중이 함께 하는 것이어야 하고(엡 5:19), 또 교회의 찬양은 악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대상 16:6), 기교가 아니라 마음으로 노래해야 한다는 점을 종교 개혁가들은 분명히 했다.

     그러므로 찬양은 찬양 자체를 위한 것이면 안 된다. 찬양은 신앙인의 삶의 반영이며, 신앙과 삶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움이다. 찬양이 전체 삶과 연결되지 않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말 것이다. 찬양은 자연스럽게 삶으로 나아간다.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은 입술의 제사인 찬양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삶이 없는 찬양은 의미가 없다. 찬양은 감사와 복종과 순종으로 나아간다.



찬송의 정의 

1. 찬송이란 곡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또 곡이 찬송의 일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찬송 가사가 없는 곡만을 가지고는 찬송이라 할 수 없다. 
찬송가란 노래가 붙은 찬송일 뿐이지 찬송은 꼭 노래가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곡이 없는 찬송을 해본 일이 없고 찬송이라면 가사보다 곡을 중점적으로 생각해왔고 좋아하는 찬송이란 좋은 곡의 찬송이지 좋은 가사의 찬송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찬송이란 곡만 가지고서는 찬송인지 보통 노래인지를 구 분할 수가 없다. 
비록 찬송가책에 있는 어떤 것을 택하여 피아노나 다른 악기로 그 곡을 연주한다 하더라도, 아니 가사를 생각지 아니하고 곡만 허밍으로 부른 다해도 그 자체가 찬송이 될 수 없다. 
가사가 없이 곡만으로는 찬송이 존재할 수 없다. 
물론 어떤 이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한 곡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제 삼자가 이 곡만을 연주하거나 콧노래를 부른다고 해도 찬송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찬송가에 보면 명곡이나 민요나 국가에 찬송 가사를 붙여 놓고 찬송가책에 수록해 놓은 것들이 있다. 
그러므로 그 곡에 어떤 가사가 붙어 있느냐에 따라 명곡, 국가, 찬송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찬송가 79, 287, 245 참조)

2. 찬송이란 하나님의 속성(전능, 전지, 무소부재, 사랑, 자비)과 그가 하신 일(창조와 구원의 계획)을 알고 마음으로 부터 우러나온 감사와 찬양의 표현이다. 

그런 면에서 누구나 찬송 가사를 지을 수 있고, 찬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찬송가사란 특수인만이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 개인에 따라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지은 찬양의 가사를 마음으로 이해하고 공감하여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여 표현하므로 찬송이 될 수 있는 것 이다. 
즉 남이 지은 가사를 내가 그 뜻을 이해하고 마음으로 영으로 하나님을 향해 표현하므로 훌륭한 찬양이 가능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한 기도에 따라 아멘으로 동참하므로 다른 사람의 기도가 바로 내가 드린 기도가 될 수 있는 거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찬양이란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의 표현을 말하는 것으로 곡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즉 가사가 없는 찬송은 존재할 수 없지만 곡이 없는 찬양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3. 곡이란 전 교인이 함께 부를 수 있도록 하는 편의이고 필수는 아닌 것이다. 

혼자 부른다면 무곡이 가능하나 여러 명이 함께 부르기 위해 박자로, 또 쉼표를 통해 같은 템포로 시작하고 마칠 수 있는 약속이 주어진 것이다. 
같은 가사에 다른 곡을 붙여 더 느리게 부르거나 더 높게 불러도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으나 같은 곡이지만 가사를 바꾸어 준다면 전연 다른 내용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곡은 틀리게 부른다 해도 가사를 하나님께 전달하는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가사의 뜻을 이해 못하거나 가사를 틀리게 부른 다면 마음이 하나님께 전달되는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사는 성서적이어야 하고, 또 그 가사의 뜻을 명확히 이해하고 마음으로 불러야 하는 것이다. 곡이란 가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며 목적이 아닌 것이다. 곡이란 상품을 포장한 포장지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찬송가책 안에도 비 성서적인 가사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하고 비성서적인 가사는 고쳐 부르거나 피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하나님께는 음악적 요소가 전연 무시된 음치의 찬송이나 음악 전문가의 찬송이나 동질의 찬송으로 인정되어질 수 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4. 시, 찬미, 신령 란 노래(엡 5:19; 골 3:16), 찬송(약 5:13): 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글(시편이나 기타 시) 즉 곡이 붙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고, 찬미란 하나님을 찬양하는 글에 곡을 붙여 드려진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신령한 노래란 하나님을 찬양하는 글이 아닌 신앙적인 가사가 붙은 노래라고 구분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고전 14:26의 "찬송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로 위의 시(엡 5:19)과 동질의 것일 것이다.

5. 찬송에서의 사부 찬송의 의미는 남녀 그리고 높은 음과 낮음을 가진 성도들 각자가 노래하기 편한 음역에서 노래하도록 하는 편의이며, 또 자기의 목소리를 이웃 사람의 목소리 크기와 밸런스를 유지케 하므로 회중 예배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게 하여 주므로 좋은 점이 있다. 

통성 기도 시에 목소리 큰 자의 횡포를 생각하면 4부의 찬송의 장점이 많이 강조되리라 믿는다. 어떤 경우에도 사부의 찬송과 단음의 찬송이 찬송의 질을 구별해 주는 것은 아니다.

6. 성가대의 찬양과 중창, 독창자의 찬양이 위에서 언급한 정도의 수준이 된다면 찬송으로서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하겠으나 만일 합창이 곡을 중심해 있거나 사람의 귀를 위한 발표용(자랑)으로 된다면 찬송으로서의 수준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향한 기도와 찬송을 했던 거와 같은 수준으로 인간의 귀를 의식하지 말고 하는 찬양이어야 할 것이며, 악기의 도움을 전연 느끼지 않는 수준의 찬송을 할 수 있어야 하겠다.

7. 찬송은 가사에 있다고 강조한 대로 찬송에 있어서의 가사에 많은 사람들이 심혈을 기울여 가사 부문에 많은 진전이 있어야 마땅하며, 교계에서는 음악인 보다는 오히려 문인들이 더 존중 되어져야 마땅할 것 같으나 교회마다 음악인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문인들은 교회에서 전연 그들의 직무가 부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찬송은 바로 곡(음악)으로 오해 하고 있는 부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8. 기도를 문인들에게만 맡겨도 잘못이려니와 독창, 중창, 합창을 음악인들에게만 전담시키는 것은 찬송의 질을 점점 저하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며, 더욱 일반 성도들에게 넓게 보급 시켜야 할 찬송의 특권을 점점 빼앗고 목소리 나쁜 사람은 늘 찬송을 못한다고 사양케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결과를 낳게 할 것이다.

9. 교회 안에 음악이 치중되면 될수록 하나님이 받으실 몫은 줄어들고 인간들이 받을 양은 많아지게 될 가능성이 있어서 주님께서는 저희더러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실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10.훌륭한 반주자의 반주만으로는 본인이 입술로 또는 마음으로 가사를 생각하며 부를 수 없을 때는 찬송을 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일평생 반주자로 수고로운 봉사는 했지만 찬송면에 서는 게을리 한 결과가 될 것이다. 
지휘자도 훌륭한 합창을 창조해 냈다 하더라도 그 본인이 입술로 가사를 생각하며 부를 수 없었다면 성가대원에게는 찬송을 하도록 했을지 모르나 본인은 찬송을 했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는 모든 성도 각자에게 무엇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는데 가장 찬송을 위해 큰일을 한 지휘자나 반주자는 찬송을 개을리 했음을 시인하지 않으면 찬송의 의미도 모르고 찬양대를 이끌었다는 결론이 될 것이다. 
교회에서 흔히 듣게 되는 악기의 독주가 듣는 이의 마음에 와 닿았다 하더라도 곡조만 보고 곡만이 들려진 연주라면 찬양으로서는 가치가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수많은 지휘자, 반주자, 악기 연주가들이 음악에만 몰두해 있다고 한다면 찬송과는 거리가 먼 것이나 누가 그렇게 생각을 하겠는가? 
사실상 어려운 곡을 4부로 반주하는 반주자는 가사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 
성가대 지휘자는 사부 합창을 살리는 것이 목적이지 가사의 바른 이해와 바른 전달에 목적을 두고 있지 못 한다. 
합창에서는 부르는 이나 듣는 이가 화음이 잘 맞았으면 찬송을 잘 한 것으로 평가가 되고 혹시라도 화음에 차질이 났으면 잘못 했다고 평가를 받는 것이다. 
즉 찬송을 인간이 평가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찬송은 인간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임을 다시 강조한다.

성구

에베소서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 하며.

골로새서 3:16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고린도전서 14:15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히브리서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에베소서 1:5-6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 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로마서 15:11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야고보서 5: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 할지니라




알파벳 시 말씀 / 답관체(아크로스틱), 아합체



알파벳 시-예수님을 앙망하라(시 34:5)


시편 34편은 다윗의 시로서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알파벳 시입니다. 22절이 한 구절마다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5절은 히브리어 알파벳 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헤는 숨구멍을 상징하는 상형문자입니다. 다윗이 헤로 시작하는 의미를 살펴보면서 우리들도 하나님과 숨구멍이 열려서 교제가 일어나야 합니다. 영혼이 복음을 듣지 않으면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단절되어 영혼은 죽게 됩니다. 원죄의 죄인은 예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다윗은 예수님을 앙망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매일같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숨구멍이 열려서 항상 영혼이 숨을 쉬는 크리스천이 되어야 합니다.

알파벳 헤는 창문이라는 상형에서 온 글자입니다. 고대근동의 사람들은 장막을 짓고 살았기 때문에 숨구멍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장막의 꼭대기에 구멍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공기가 순환하여 장막 안에 공기를 정화시키는 작용을 했던 것입니다. 또한 이 헤라는 글자는 사람이 하늘을 향하여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모습을 하고 있는 글자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예배를 드려야 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헤는 죽었던 자들이 숨을 쉬고 살아나기 때문에 숨결, 호흡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난 자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계시하는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헤는 영원히 살아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나타내는 단어에 쓰이고 있습니다. (헤이칼 1964) 성전, 궁전,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곳인 성전도 헤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죄로 죽어서 숨을 쉬지 못했던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숨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시34:5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5절 히비투 엘라이브 베나하루 우페네헴 알 예흐파루

주를 앙망하라(5절)

♣명제: 주를 앙망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목적: 구원받은 백성들도 주님을 앙망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다윗은 주님의 십자가 문을 통과하여 들어와 안식을 누리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죄악의 두려움과 육체의 두려움에서 자신을 건져주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의 십자를 통과하면 죄악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이제 5절을 시작하면서 헤라는 알파벳으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 숨을 쉴 수가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주를 앙망하게 된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숨구멍이 열려 살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으로 인하여 영원히 죽었던 인생들이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호흡이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앙망하고’ (나바트 5027 VHACZP 동사, 히필, 완료, 공성, 3인칭, 복수) 보다, 바라보다, 우러러보다, 살펴보다, 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주변에 있었던 자들이 주를 앙망하면서 우러러보고 살펴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단어는 유심히 주목하여 보는 것을 나타낼 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심히 주목하여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민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 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원망 불평할 때에 불 뱀이 이들을 물어 죽이고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불 뱀을 달라고 명령하셨고 모세는 믿음으로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았습니다. 이 놋 뱀을 바라본 자들은 모두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쳐다본즉’ 이라는 단어가 (나바트)입니다. 이들은 놋 뱀을 유심히 관찰하여 쳐다봄으로 죽음에서 살아났습니다. 여기에서 놋 뱀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요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주를 앙망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게 하는 자가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구원은 아무나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들이 주님의 십자가 놋 뱀을 바라보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히필 사역 능동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라보게 한 자들만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광야에서 불 뱀에 물려 죽어가던 자들이 바라보았던 뱀도 히필형을 사용함으로 하나님께서 보게 한 자들이 놋 뱀을 바라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완료 시제를 사용함으로 이들은 확실하게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며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구원받은 자들이 주님을 앙망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숨구멍이 열린 자들이 숨을 쉬고 호흡하여 살아남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5절을 시작하면서 숨구멍의 상형에서 온 헤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원죄의 죽음에서 주님의 죽으심 때문에 숨구멍이 열려 주님을 앙망하면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들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자들로서 예수님을 모욕하고 핍박하게 됩니다.

‘광채를 내었으니’ (나하르 5102 VQACZP 동사, 칼, 완료, 공성, 3인칭, 복수) 모여 들다, 빛나다, 빛을 발하다, 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가 아닙니다. 또한 스스로 살아날 수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앙망하고 바라보는 자들은 주님의 빛이 임하여 빛을 발산하게 됩니다. 구원을 받아 영적으로 살아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을 발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빛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는 것입니다. 광채를 내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을 전할 때에 영혼이 죽었던 생명들이 빛을 보면서 몰려들게 되는 것입니다.

광채를 내는 자들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빛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에서도 빛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나오게 됩니다. 주님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전입니다. 성막에는 ‘메노라’라고 하는 금등대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성막의 기구입니다. 반면에 구원받은 백성들도 예표 하는 기구입니다. 이 등대는 올리브기름을 계속해서 공급받아야 만이 빛을 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름부음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공급받을 때에 계속해서 어둠을 밝히는 빛이 발산되는 것입니다.

금등대가 교만하여 자신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금 등대 자체로는 스스로 빛을 낼 수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기름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기름이 내 안에 공급되면 빛은 자연스럽게 발산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얼굴에서 광채가 날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도 두 번째 돌 판을 가슴에 품고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얼굴에서 빛이 났습니다. 두 번째 돌 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상징하고 있는 돌 판입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이 내 심비의 판에 새겨져 있으면 얼굴에서 빛이 나오는 것입니다.

‘부끄럽지’ (하페르 2659 VQIMZP 동사, 칼, 미완료, 남성, 3인칭, 복수) 무안을 당하다, 수치를 당하다, 낭패를 당하다, 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앙망하고 바라보는 자들은 얼굴에서 빛이 나와 무안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들은 사람이 많은 곳에서 실수를 하면 무안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창피를 당하여 수치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상태가 언제입니까? 죄악 가운데 있었을 때입니다.

롬10: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수치를 가져가셨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움을’ (카타이스퀴노 2617 VIFPS3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 단수, 3인칭) 모욕을 주다, 욕되게 하다, 부끄럽게 하다, 라는 뜻입니다. 원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사탄으로부터 정죄를 받아 모욕을 당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더 이상 모욕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모욕과 부끄러움을 십자가에서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확실히 예수님을 믿으면 부끄러움과 모욕받는 것이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직설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적 사건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믿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반드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믿었다면 앞으로 계속해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미래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내 힘으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 때문에 모욕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동태는 내 힘으로 부끄러운 수치를 씻을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지금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앙망하면 계속해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원죄의 고통과 부끄러움과 수치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을 통해서 숨을 쉬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마포 옷을 입어야 합니다. 어린양의 세마포 옷을 입은 자들은 더 이상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22:11-13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 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임금이 혼인잔치를 준비했는데 임금이 준비한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준비된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와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임금은 사환들에게 말하여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지옥의 불 못에 던져 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마포 옷을 입지 않은 자들은 이렇게 수치를 당하여 지옥의 불 못으로 던져지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숨구멍이 열려 호흡하는 자가 되었으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 주님만을 앙망하여 바라보아야 합니다. 호흡이 있는 자들은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계시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이제부터 주님과 호흡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답관체(踏冠體 acrostic/아크로스틱)

한국 이스라엘 학회/연구소
~2분

답관체(踏冠體 acrostic/아크로스틱)는 히브리 문학의 표현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답관체는 이렇습니다. 예로 우리나라의 글자순서는 ㄱ ㄴ ㄷ ㄹ라고 했을 때

가지 마세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싫어한다해도

내가있지 않습니까? 만일에 지금

당신이 나를 멀리 떠난다하면 우리가 날마다 보아왔던

라일락의 향기가 멀리 떠나버릴 것입니다.

글자순서대로 가(ㄱ), 내(ㄴ), 당(ㄷ), 라(ㄹ)처럼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대로 시편이 구성된 것입니다.

답관체는 히브리 문학의 표현 방법 중의 하나로서, 각 절의 첫 글자를 히브리 알파벳 순서를 따라 배열하는 형식을 말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우리 말로 표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절(ㄱ) 가장 높으신 주님을 찬양함이 마땅하도다!

2절(ㄴ)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찬양하리이다.

3절(ㄷ) 다함께 모여 성소에서 함께 주를 찬양하세!

.......

위의 경우 1절의 첫 글자는 우리 말 자음의 첫 글자인 (ㄱ)으로 시작하고 있으며(“가장”), 2절은 (ㄴ)으로 시작하고(“내가”), 3절은 (ㄷ)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다함께”). 이와 같이 히브리 알파벳 순서를 따라 시를 배열하는 것을 답관체 형식의 시라고 합니다.

이런 형식의 시편이 몇 편 있습니다. 25편 34편 37편 111편 112편 119편 145편 등입니다. 
히브리 시 중에는 이와 같이 각 절의 첫 글자를 히브리 알파벳 순서에 따라 배열한 시가 많이 있습니다. 시편 119편의 경우에는 각 알파벳 글자마다 8절씩 배열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8절)은 히브리 알파벳의 첫 글자인 “알렢”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9~16절)은 히브리 알파벳의 두 번째 글자인 “베트”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시를 배열하다 보니 시편 119편은 176절(22개의 알파벳 × 8절씩 = 총 176절)이나 되는 긴 시가 되었습니다.

시편 119편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마치 수를 놓는 사람이 색실로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한땀 한땀씩 수를 놓는 것처럼, 한 절 한 절을 매우 정교하고 신중하게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 형식은 시인이 표현하려는 내용을 보다 극적이고 효과적으로 만들어주며, 그 시의 의미를 더욱 깊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답관체”의 형식은 히브리어 알파벳을 가지고 썼기 때문에, 이것은 히브리 문학에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어나 한글 성경으로 번역할 경우에는 영어 알파벳이나 한글 자모음의 순서대로 시를 번역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의미만을 바꾸어 번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답관체 형식은 단지 첫 글자를 히브리 알파벳 순서대로 사용해서 쓰는 히브리 시의 형식이라고만 이해하면 됩니다. 여기에는 더 이상 깊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1장, 2장, 3장, 4장과 잠언 31장 “현숙한 여인”에 대한 말씀도 답관체(踏冠體 acrostic) 형식으로 기록된 문학적 표현입니다.

답관=머릿 장단을 맞추다  밟을 답, (장단을) 맞추다 답... 갓 관, 머리 관...그래서 머릿 장단을 맞추다...한글사전에 없어서요.


알파벳순으로 구성된 것들


  시111, 시112, 시119,  애1.2.3.4

  우리말에 가.나.다.라. 각행의 첫머리로 시작되는 시가 있다.

그런데 성경에도 알파벳 순서에 따라 각 행의 첫머리로 시작되는

답관체 시가 있다(단 히브리어 성경). 


   1.각 절의 첫 글자를 히브리 알파벳 순서를 따라 배열하는 형식을 답관체라 말한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우리 말로   표현해보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우리말에

   가-가난한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어도

   나-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서 이를 갈 것이라

   다-다른 복음에는 구원이 없나니

   라-라마에서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

   마-마른 땅과 같아 목말라 죽게 할 것이다. 등  이다.


1절(ㄱ) 가장 높으신 주님을 찬양함이 마땅하도다!
2절(ㄴ)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찬양하리이다.
3절(ㄷ) 다함께 모여 성소에서 함께 주를 찬양하세!


...........
위의 경우

1절의 첫 글자는 우리 말 자음의 첫 글자인 (ㄱ)으로 시작하고 있으며("가장"),

2절은 (ㄴ)으로 시작하고("내가),

3절은 (ㄷ)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다함께").

이와 같이 히브리 알파벳 순서를 따라 시를 배열하는 것을 답관체(踏冠體)

형식의 시라고 한다.


2. 그런데 성경가운데는  이와 같이 각 절의 첫 글자를 히브리 알파벳 순서에

따라 배열한 시가  답관체 형식으로 4권이 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시편에서 가장 긴 시편 119편이다.

시 119편의 경우에는 각 알파벳 글자마다 한연에 8절씩 배열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1-8절)은 히브리 알파벳의 첫 글자인 "알렢"(א)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9-16절)은 히브리 알파벳의 두 번째 글자인 "베트"(ב)로 시작하고

(17-24절)은 히브리 알파벳의 세 번째 글자인 "끼멜"(נ)로 시작하고있다.

이런 식으로 시를 배열하다 보니 시119편은 무려 176절 22연으로 되는 긴 시가 되었다.

시 119편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마치 수를 놓는 사람이 색실로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한땀 한땀씩 수를 놓는 것처럼, 한 절 한절을 매우 정교하고 신중하게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형식은 시인이 표현하려는 내용을 보다 극적이고 효과적으로 만들어주며,

그 시의 의미를 더욱 깊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예례미아 애가도 5장까지 됐는데 1장2장의 1절은 히브리어 알파벳 첫글자인 알렢(א)으로

시작하고 22절 끝절은 타우(ת)로 끝난다.

우리말 성경에는 평이하게 보일지라도 히브리어 원문에는 글자 하나하나에 자음하나하나에

까지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가 녹아있고 시적 표현과 음률이 잘 배합되어있는 것을 볼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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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벳순으로 구성된 시편  111편,  

112편,   119편,   애1.2.3.4

     시편 111편 내용

   הללו יה  

1  אודה יהוה בכל־לבב  A 알렢

       캅레     칼베   웨야       데오

   heart with-all-of Yahweh I-will-extol

     내가 전심으로 야웨를 높이리로다

          בסוד ישרים ועדה׃   B 뻬트 

       데에우      림사여      드소베

 and-assembly upright-ones in-council-of

   내가 정직한자의 회와 공회중에서

 2   גדלים מעשי יהוה  G 끼멜

       여호바     마아세   게도림

   Yahweh    works-of  great-ones

      여호와께서 하시는일이 크니

דרושים לכל־חפציהם׃  D 달렏

      헤페체헴    르칼      데루쉼

 delighters-of-them  by-all-of  

 ones-being-pondered

 이를 즐거워하는 모든자가 탐구하는구나

 3  הוד־והדר פעלו H헤

            로아포 달호여 드호

     deed-of him  and-majestic  glorious

          그 행사가 존귀하며 엄위하며

   וצדקתו עמדת לעד׃  W 와우

       드아라    트데메오  토카데치여

        to-forever  one-enduring  

        and-righteousness-of-him

     그의 의가 영원히 있도다.          

זכר עשה לנפלאתיו  Z 자인 

        우티로페니레  사아    켈제

for-deeds-being-wonders-of-him  

he-caused remembrance

그가 기이한 일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으니

    חנון ורחום יהוה׃  H 헤드 

    웨야     훔라여        눈한

Yahweh  and-compassionate  gracious

       야웨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도다.

5  טרף נתן ליראיו  T 테드

          우이아레리  탄나  프레테

  for-ones-fearing-him  he-provides  food

 야웨께서 자기를 경외하는자에게 양식을 주시며
  יזכר לעולם בריתו׃   Y 요드

   토리베     람오레      콜지이

covenant-of-him to-forever  he-remembers

        그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6  כח מעשיו הגיד    K 카프

        드닌히  우차아마  흐아코

    he-showed   works-of him   power-of

     그 행사의 능을 저희에게 보이셨도다.

לעמו לתת להם נחלת גוים׃   L 라멧

임고  트라하나  헴라  트테라      모암레

nations  land-of to-them to-give to-people-of him

       저가 자기 백성에게 열방을 기업으로 주사

מעשי ידיו אמת ומשפט M 멤

       트밧사미우  트멤에  우디야   쉐아마

    and-just   fathful   hands-of-him  works-of

         그 손의 행사는 진실과 공의이며 
       נאמנים כל־פקודיו׃    N 눈

         우이다쿠피   콜   님마에네

 precepts-of-him all-of ones-being-trustworthy

            그 법도는 다 확실하니

סמוכים לעד לעולם  S 싸멕

           람오레   드아레       킴무쎄

     to-forever for-ever one-being-steadfast

            영원  무궁히   정하신 바요
     עשוים באמת וישר׃  Y 아인

          살이여  트메에베    임수아

and-uprightness in-fathfulness one-being-done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פדות שלח לעמו   P 페

        모암레      라사   트두페

 for-people-of-him   he-provided  redemption

    야웨께서 그 백성에게 구속을 베푸시며
 צוה־לעולם בריתו   TS 차데

      토리베   람오레  아흐우치

covenant-of-him  to-forever  he-ordained

       그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קדוש ונורא שמ   Q 코프

     모세  라노여      쉬도카

 name-of-him  and-being-awesome holy

      그 이름이 거룩하시고 지존 하시도다

10 ראשית חכמה יראת יהו R 레쉬

        웨야   트아레이   마크호    트쉬레

  Yahweh  fear-of   wisdome    beginning-of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שכל טוב לכל־עשיהם S 신 

         헴쉐이  콜레  토브        켈쉐

ones-following-them  to-all-of   good  understading

    그 계명을 따르는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이                      

 תהלתו עמדת לעד׃  T 타우

드아라    트데메오  토라힐

to-eternity   one-enduring   praise-of-him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 

 

Psalms 119

אַשְׁרֵי תְמִימֵי־דָרֶךְ הַהֹלְכִים בְּתֹורַת יְהוָה׃

1

אַשְׁרֵי נֹצְרֵי עֵדֹתָיו בְּכָל־לֵב יִדְרְשׁוּהוּ׃

2

אַף לֹא־פָעֲלוּ עַוְלָה בִּדְרָכָיו הָלָכוּ׃

3

אַתָּה צִוִּיתָה פִקֻּדֶיךָ לִשְׁמֹר מְאֹד׃

4

אַחֲלַי יִכֹּנוּ דְרָכָי לִשְׁמֹר חֻקֶּיךָ׃

5

אָז לֹא־אֵבֹושׁ בְּהַבִּיטִי אֶל־כָּל־מִצְוֹתֶיךָ׃

6

אֹודְךָ בְּיֹשֶׁר לֵבָב בְּלָמְדִי מִשְׁפְּטֵי צִדְקֶךָ׃

7

אֶת־חֻקֶּיךָ אֶשְׁמֹר אַל־תַּעַזְבֵנִי עַד־מְאֹד׃

8

בַּמֶּה יְזַכֶּה־נַּעַר אֶת־אָרְחֹו לִשְׁמֹר כִּדְבָרֶךָ׃

9

בְּכָל־לִבִּי דְרַשְׁתִּיךָ אַל־תַּשְׁגֵּנִי מִמִּצְוֹתֶיךָ׃

10

בְּלִבִּי צָפַנְתִּי אִמְרָתֶךָ לְמַעַן לֹא אֶחֱטָא־לָךְ׃

11

בָּרוּךְ אַתָּה יְהוָה לַמְּדֵנִי חֻקֶּיךָ׃

12

בִּשְׂפָתַי סִפַּרְתִּי כֹּל מִשְׁפְּטֵי־פִיךָ׃

13

בְּדֶרֶךְ עֵדְוֹתֶיךָ שַׂשְׂתִּי כְּעַל כָּל־הֹון׃

14

בְּפִקֻּדֶיךָ אָשִׂיחָה וְאַבִּיטָה אֹרְחֹתֶיךָ׃

15

בְּחֻקֹּתֶיךָ אֶשְׁתַּעֲשָׁע לֹא אֶשְׁכַּח דְּבָרֶךָ׃

16

גְּמֹל עַל־עַבְדְּךָ אֶחְיֶה וְאֶשְׁמְרָה דְבָרֶךָ׃

17

גַּל־עֵינַי וְאַבִּיטָה נִפְלָאֹות מִתֹּורָתֶךָ׃

18

גֵּר אָנֹכִי בָאָרֶץ אַל־תַּסְתֵּר מִמֶּנִּי מִצְוֹתֶיךָ׃

19

גָּרְסָה נַפְשִׁי לְתַאֲבָה אֶל־מִשְׁפָּטֶיךָ בְכָל־עֵת׃

20

גָּעַרְתָּ זֵדִים אֲרוּרִים הַשֹּׁגִים מִמִּצְוֹתֶיךָ׃

21

גַּל מֵעָלַי חֶרְפָּה וָבוּז כִּי עֵדֹתֶיךָ נָצָרְתִּי׃

22

גַּם יָשְׁבוּ רִים בִּי נִדְבָּרוּ עַבְדְּךָ יָשִׂיחַ בְּחֻקֶּיךָ׃

23

גַּם־עֵדֹתֶיךָ שַׁעֲשֻׁעָי אַנְשֵׁי עֲצָתִי׃

24

דָּבְקָה לֶעָפָר נַפְשִׁי חַיֵּנִי כִּדְבָרֶךָ׃

25

דְּרָכַי סִפַּרְתִּי וַתַּעֲנֵנִי לַמְּדֵנִי חֻקֶּיךָ׃

26

דֶּרֶךְ־פִּקּוּדֶיךָ הֲבִינֵנִי וְאָשִׂיחָה בְּנִפְלְאֹותֶיךָ׃

27

דָּלְפָה נַפְשִׁי מִתּוּגָה קַיְּמֵנִי כִּדְבָרֶךָ׃

28

דֶּרֶךשְֶׁ־קֶר הָסֵר מִמֶּנִּי וְתֹורָתְךָ חָנֵּנִי׃

29

דֶּרֶךְ־אֱמוּנָה בָחָרְתִּי מִשְׁפָּטֶיךָ שִׁוִּיתִי׃

30

דָּבַקְתִּי בְעֵדְוֹתֶיךָ יְהוָה אַל־תְּבִישֵׁנִי׃

31

דֶּרֶךְ־מִצְוֹתֶיךָ אָרוּץ כִּי תַרְחִיב לִבִּי׃

32

הֹורֵנִי יְהוָה דֶּרֶךְ חֻקֶּיךָ וְאֶצְּרֶנָּה עֵקֶב׃

33

הֲבִינֵנִי וְאֶצְּרָה תֹורָתֶךָ וְאֶשְׁמְרֶנָּה בְכָל־לֵב׃

34

הַדְרִיכֵנִי בִּנְתִיב מִצְוֹתֶיךָ כִּי־בֹו חָפָצְתִּי׃

35

הַט־לִבִּי אֶל־עֵדְוֹתֶיךָ וְאַל אֶל־בָּצַע׃

36

הַעֲבֵר עֵינַי מֵרְאֹות שָׁוְא בִּדְרָכֶךָ חַיֵּנִי׃

37

הָקֵם לְעַבְדְּךָ אִמְרָתֶךָ אֲשֶׁר לְיִרְאָתֶךָ׃

38

הַעֲבֵר חֶרְפָּתִי אֲשֶׁר יָגֹרְתִּי כִּי מִשְׁפָּטֶיךָ טֹובִים׃

39

הִנֵּה תָּאַבְתִּי לְפִקֻּדֶיךָ בְּצִדְקָתְךָ חַיֵּנִי׃

40

וִיבֹאֻנִי חֲסָדֶךָ יְהוָה תְּשׁוּעָתְךָ כְּאִמְרָתֶךָ׃

41

וְאֶעֱנֶה חֹרְפִי דָבָר כִּי־בָטַחְתִּי בִּדְבָרֶךָ׃

42

וְאַל־תַּצֵּל מִפִּי דְבַר־אֱמֶת עַד־מְאֹד כִּי לְמִשְׁפָּטֶךָ יִחָלְתִּי׃

43

וְאֶשְׁמְרָה תֹורָתְךָ תָמִיד לְעֹולָם וָעֶד׃

44

וְאֶתְהַלְּכָה בָרְחָבָה כִּי פִקֻּדֶיךָ דָרָשְׁתִּי׃

45

וַאֲדַבְּרָה בְעֵדֹתֶיךָ נֶגֶד מְלָכִים וְלֹא אֵבֹושׁ׃

46

וְאֶשְׁתַּעֲשַׁע בְּמִצְוֹתֶיךָ אֲשֶׁר אָהָבְתִּי׃

47

וְאֶשָּׂא־כַפַּי אֶל־מִצְוֹתֶיךָ אֲשֶׁר אָהָבְתִּי וְאָשִׂיחָה בְחֻקֶּיךָ׃

48

זְכֹר־דָּבָר לְעַבְדֶּךָ עַל אֲשֶׁר יִחַלְתָּנִי׃

49

זֹאת נֶחָמָתִי בְעָנְיִי כִּי אִמְרָתְךָ חִיָּתְנִי׃

50

זֵדִים הֱלִיצֻנִי עַד־מְאֹד מִתֹּורָתְךָ לֹא נָטִיתִי׃

51

זָכַרְתִּי מִשְׁפָּטֶיךָ מֵעֹולָם ׀ יְהוָה וָאֶתְנֶחָם׃

52

זַלְעָפָה אֲחָזַתְנִי מֵרְשָׁעִים עֹזְבֵי תֹּורָתֶךָ׃

53

זְמִרֹות הָיוּ־לִי חֻקֶּיךָ בְּבֵית מְגוּרָי׃

54

זָכַרְתִּי בַלַּיְלָה שִׁמְךָ יְהוָה וָאֶשְׁמְרָה תֹּורָתֶךָ׃

55

זֹאת הָיְתָה־לִּי כִּי פִקֻּדֶיךָ נָצָרְתִּי׃

56

חֶלְקִי יְהוָה אָמַרְתִּי לִשְׁמֹר דְּבָרֶיךָ׃

57

חִלִּיתִי פָנֶיךָ בְכָל־לֵב חָנֵּנִי כְּאִמְרָתֶךָ׃

58

חִשַּׁבְתִּי דְרָכָי וָאָשִׁיבָה רַגְלַי אֶל־עֵדֹתֶיךָ׃

59

חַשְׁתִּי וְלֹא הִתְמַהְמָהְתִּי לִשְׁמֹר מִצְוֹתֶיךָ׃

60

חֶבְלֵי רְשָׁעִים עִוְּדֻנִי תֹּורָתְךָ לֹא שָׁכָחְתִּי׃

61

חֲצֹות־לַיְלָה אָקוּם לְהֹודֹות לָךְ עַל מִשְׁפְּטֵי צִדְקֶךָ׃

62

חָבֵר אָנִי לְכָל־אֲשֶׁר יְרֵאוּךָ וּלְשֹׁמְרֵי פִּקּוּדֶיךָ׃

63

חַסְדְּךָ יְהוָה מָלְאָה הָאָרֶץ חֻקֶּיךָ לַמְּדֵנִי׃

64

טֹוב עָשִׂיתָ עִם־עַבְדְּךָ יְהוָה כִּדְבָרֶךָ׃

65

טוּב טַעַם וָדַעַת לַמְּדֵנִי כִּי בְמִצְוֹתֶיךָ הֶאֱמָנְתִּי׃

66

טֶרֶם אֶעֱנֶה אֲנִי שֹׁגֵג וְעַתָּה אִמְרָתְךָ שָׁמָרְתִּי׃

67

טֹוב־אַתָּה וּמֵטִיב לַמְּדֵנִי חֻקֶּיךָ׃

68

טָפְלוּ עָלַי שֶׁקֶר זֵדִים אֲנִי בְּכָל־לֵב ׀ אֱצֹּר פִּקּוּדֶיךָ׃

69

טָפַשׁ כַּחֵלֶב לִבָּם אֲנִי תֹּורָתְךָ שִׁעֲשָׁעְתִּי׃

70

טֹוב־לִי כִי־עֻנֵּיתִי לְמַעַן אֶלְמַד חֻקֶּיךָ׃

71

טֹוב־לִי תֹורַת־פִּיךָ מֵאַלְפֵי זָהָב וָכָסֶף׃

72

יָדֶיךָ עָשׂוּנִי וַיְכֹונְנוּנִי הֲבִינֵנִי וְאֶלְמְדָה מִצְוֹתֶיךָ׃

73

יְרֵאֶיךָ יִרְאוּנִי וְיִשְׂמָחוּ כִּי לִדְבָרְךָ יִחָלְתִּי׃

74

יָדַעְתִּי יְהוָה כִּי־צֶדֶק מִשְׁפָּטֶיךָ וֶאֱמוּנָה עִנִּיתָנִי׃

75

יְהִי־נָא חַסְדְּךָ לְנַחֲמֵנִי כְּאִמְרָתְךָ לְעַבְדֶּךָ׃

76

יְבֹאוּנִי רַחֲמֶיךָ וְאֶחְיֶה כִּי־תֹורָתְךָ שַׁעֲשֻׁעָי׃

77

יֵבֹשׁוּ זֵדִים כִּי־שֶׁקֶר עִוְּתוּנִי אֲנִי אָשִׂיחַ בְּפִקּוּדֶיךָ׃

78

יָשׁוּבוּ לִי יְרֵאֶיךָ [וְיָדְעוּ כ] (וְיֹדְעֵי ק) עֵדֹתֶיךָ׃

79

יְהִי־לִבִּי תָמִים בְּחֻקֶּיךָ לְמַעַן לֹא אֵבֹושׁ׃

80

כָּלְתָה לִתְשׁוּעָתְךָ נַפְשִׁי לִדְבָרְךָ יִחָלְתִּי׃

81

כָּלוּ עֵינַי לְאִמְרָתֶךָ לֵאמֹר מָתַי תְּנַחֲמֵנִי׃

82

כִּי־הָיִיתִי כְּנֹאד בְּקִיטֹור חֻקֶּיךָ לֹא שָׁכָחְתִּי׃

83

כַּמָּה יְמֵי־עַבְדֶּךָ מָתַי תַּעֲשֶׂה בְרֹדְפַי מִשְׁפָּט׃

84

כָּרוּ־לִי זֵדִים שִׁיחֹות אֲשֶׁר לֹא כְתֹורָתֶךָ׃

85

כָּל־מִצְוֹתֶיךָ אֱמוּנָה שֶׁקֶר רְדָפוּנִי עָזְרֵנִי׃

86

כִּמְעַט כִּלּוּנִי בָאָרֶץ וַאֲנִי לֹא־עָזַבְתִּי פִקֻּודֶיךָ ׃

87

כְּחַסְדְּךָ חַיֵּנִי וְאֶשְׁמְרָה עֵדוּת פִּיךָ׃

88

לְעֹולָם יְהוָה דְּבָרְךָ נִצָּב בַּשָּׁמָיִם׃

89

לְדֹר וָדֹר אֱמוּנָתֶךָ כֹּונַנְתָּ אֶרֶץ וַתַּעֲמֹד׃

90

לְמִשְׁפָּטֶיךָ עָמְדוּ הַיֹּום כִּי הַכֹּל עֲבָדֶיךָ׃

91

לוּלֵי תֹורָתְךָ שַׁעֲשֻׁעָי אָז אָבַדְתִּי בְעָנְיִי׃

92

לְעֹולָם לֹא־אֶשְׁכַּח פִּקּוּדֶיךָ כִּי בָם חִיִּיתָנִי׃

93

לְךָ־אֲנִי הֹושִׁיעֵנִי כִּי פִקּוּדֶיךָ דָרָשְׁתִּי׃

94

לִי קִוּוּ רְשָׁעִים לְאַבְּדֵנִי עֵדֹתֶיךָ אֶתְבֹּונָן׃

95

לְכָל תִּכְלָה רָאִיתִי קֵץ רְחָבָה מִצְוָתְךָ מְאֹד׃

96

מָה־אָהַבְתִּי תֹורָתֶךָ כָּל־הַיֹּום הִיא שִׂיחָתִי׃

97

מֵאֹיְבַי תְּחַכְּמֵנִי מִצְוֹתֶךָ כִּי לְעֹולָם הִיא־לִי׃

98

מִכָּל־מְלַמְּדַי הִשְׂכַּלְתִּי כִּי עֵדְוֹתֶיךָ שִׂיחָה לִי׃

99

מִזְּקֵנִים אֶתְבֹּונָן כִּי פִקּוּדֶיךָ נָצָרְתִּי׃

100

מִכָּל־אֹרַח רָע כָּלִאתִי רַגְלָי לְמַעַן אֶשְׁמֹר דְּבָרֶךָ׃

101

מִמִּשְׁפָּטֶיךָ לֹא־סָרְתִּי כִּי־אַתָּה הֹורֵתָנִי׃

102

מַה־נִּמְלְצוּ לְחִכִּי אִמְרָתֶךָ מִדְּבַשׁ לְפִי׃

103

מִפִּקּוּדֶיךָ אֶתְבֹּונָן עַל־כֵּן שָׂנֵאתִי ׀ כָּל־אֹרַח שָׁקֶר׃

104

נֵר־לְרַגְלִי דְבָרֶךָ וְאֹור לִנְתִיבָתִי׃

105

נִשְׁבַּעְתִּי וָאֲקַיֵּמָה לִשְׁמֹר מִשְׁפְּטֵי צִדְקֶךָ׃

106

נַעֲנֵיתִי עַד־מְאֹד יְהוָה חַיֵּנִי כִדְבָרֶךָ׃

107

נִדְבֹות פִּי רְצֵה־נָא יְהוָה וּמִשְׁפָּטֶיךָ לַמְּדֵנִי׃

108

נַפְשִׁי בְכַפִּי תָמִיד וְתֹורָתְךָ לֹא שָׁכָחְתִּי׃

109

נָתְנוּ רְשָׁעִים פַּח לִי וּמִפִּקּוּדֶיךָ לֹא תָעִיתִי׃

110

נָחַלְתִּי עֵדְוֹתֶיךָ לְעֹולָם כִּי־שְׂשֹׂון לִבִּי הֵמָּה׃

111

נָטִיתִי לִבִּי לַעֲשֹׂות חֻקֶּיךָ לְעֹולָם עֵקֶב׃

112

סֵעֲפִים שָׂנֵאתִי וְתֹורָתְךָ אָהָבְתִּי׃

113

סִתְרִי וּמָגִנִּי אָתָּה לִדְבָרְךָ יִחָלְתִּי׃

114

סוּרוּ־מִמֶּנִּי מְרֵעִים וְאֶצְּרָה מִצְוֹת אֱלֹהָי׃

115

סָמְכֵנִי כְאִמְרָתְךָ וְאֶחְיֶה וְאַל־תְּבִישֵׁנִי מִשִּׂבְרִי׃

116

סְעָדֵנִי וְאִוָּשֵׁעָה וְאֶשְׁעָה בְחֻקֶּיךָ תָמִיד׃

117

סָלִיתָ כָּל־שֹׁוגִים מֵחֻקֶּיךָ כִּישֶׁ־קֶר תַּרְמִיתָם׃

118

סִגִים הִשְׁבַּתָּ כָל־רִשְׁעֵי־אָרֶץ לָכֵן אָהַבְתִּי עֵדֹתֶיךָ׃

119

סָמַר מִפַּחְדְּךָ בְשָׂרִי וּמִמִּשְׁפָּטֶיךָ יָרֵאתִי׃

120

עָשִׂיתִי מִשְׁפָּט וָצֶדֶק בַּל־תַּנִּיחֵנִי לְעֹשְׁקָי׃

121

עֲרֹב עַבְדְּךָ לְטֹוב אַל־יַעַשְׁקֻנִי זֵדִים׃

122

עֵינַי כָּלוּ לִישׁוּעָתֶךָ וּלְאִמְרַת צִדְקֶךָ׃

123

עֲשֵׂה עִם־עַבְדְּךָ כְחַסְדֶּךָ וְחֻקֶּיךָ לַמְּדֵנִי׃

124

עַבְדְּךָ־אָנִי הֲבִינֵנִי וְאֵדְעָה עֵדֹתֶיךָ׃

125

עֵת לַעֲשֹׂות לַיהוָה הֵפֵרוּ תֹּורָתֶךָ׃

126

עַל־כֵּן אָהַבְתִּי מִצְוֹתֶיךָ מִזָּהָב וּמִפָּז׃

127

עַל־כֵּן ׀ כָּל־פִּקּוּדֵי כֹל יִשָּׁרְתִּי כָּל־אֹרַח שֶׁקֶר שָׂנֵאתִי׃

128

פְּלָאֹות עֵדְוֹתֶיךָ עַל־כֵּן נְצָרָתַם נַפְשִׁי׃

129

פֵּתַח דְּבָרֶיךָ יָאִיר מֵבִין פְּתָיִים׃

130

פִּי־פָעַרְתִּי וָאֶשְׁאָפָה כִּי לְמִצְוֹתֶיךָ יָאָבְתִּי׃

131

פְּנֵה־אֵלַי וְחָנֵּנִי כְּמִשְׁפָּט לְאֹהֲבֵי שְׁמֶךָ׃

132

פְּעָמַי הָכֵן בְּאִמְרָתֶךָ וְאַל־תַּשְׁלֶט־בִּי כָל־אָוֶן׃

133

פְּדֵנִי מֵעֹשֶׁק אָדָם וְאֶשְׁמְרָה פִּקּוּדֶיךָ׃

134

פָּנֶיךָ הָאֵר בְּעַבְדֶּךָ וְלַמְּדֵנִי אֶת־חֻקֶּיךָ׃

135

פַּלְגֵי־מַיִם יָרְדוּ עֵינָי עַל לֹא־שָׁמְרוּ תֹורָתֶךָ׃

136

צַדִּיק אַתָּה יְהוָה וְיָשָׁר מִשְׁפָּטֶיךָ׃

137

צִוִּיתָ צֶדֶק עֵדֹתֶיךָ וֶאֱמוּנָה מְאֹד׃

138

צִמְּתַתְנִי קִנְאָתִי כִּי־שָׁכְחוּ דְבָרֶיךָ צָרָי׃

139

צְרוּפָה אִמְרָתְךָ מְאֹד וְעַבְדְּךָ אֲהֵבָהּ׃

140

צָעִיר אָנֹכִי וְנִבְזֶה פִּקֻּדֶיךָ לֹא שָׁכָחְתִּי׃

141

צִדְקָתְךָ צֶדֶק לְעֹולָם וְתֹורָתְךָ אֱמֶת׃

142

צַר־וּמָצֹוק מְצָאוּנִי מִצְוֹתֶיךָ שַׁעֲשֻׁעָי׃

143

צֶדֶק עֵדְוֹתֶיךָ לְעֹולָם הֲבִינֵנִי וְאֶחְיֶה׃

144

קָרָאתִי בְכָל־לֵב עֲנֵנִי יְהוָה חֻקֶּיךָ אֶצֹּרָה׃

145

קְרָאתִיךָ הֹושִׁיעֵנִי וְאֶשְׁמְרָה עֵדֹתֶיךָ׃

146

קִדַּמְתִּי בַנֶּשֶׁף וָאֲשַׁוֵּעָה [לִדְבָרֶיךָ כ] (לִדְבָרְךָ ק) יִחָלְתִּי׃

147

קִדְּמוּ עֵינַי אַשְׁמֻרֹות לָשִׂיחַ בְּאִמְרָתֶךָ׃

148

קֹולִי שִׁמְעָה כְחַסְדֶּךָ יְהוָה כְּמִשְׁפָּטֶךָ חַיֵּנִי׃

149

קָרְבוּ רֹדְפֵי זִמָּה מִתֹּורָתְךָ רָחָקוּ׃

150

קָרֹוב אַתָּה יְהוָה וְכָל־מִצְוֹתֶיךָ אֱמֶת׃

151

קֶדֶם יָדַעְתִּי מֵעֵדֹתֶיךָ כִּי לְעֹולָם יְסַדְתָּם׃

152

רְאֵה־עָנְיִי וְחַלְּצֵנִי כִּי־תֹורָתְךָ לֹא שָׁכָחְתִּי׃

153

רִיבָה רִיבִי וּגְאָלֵנִי לְאִמְרָתְךָ חַיֵּנִי׃

154

רָחֹוק מֵרְשָׁעִים יְשׁוּעָה כִּי־חֻקֶּיךָ לֹא דָרָשׁוּ׃

155

רַחֲמֶיךָ רַבִּים ׀ יְהוָה כְּמִשְׁפָּטֶיךָ חַיֵּנִי׃

156

רַבִּים רֹדְפַי וְצָרָי מֵעֵדְוֹתֶיךָ לֹא נָטִיתִי׃

157

רָאִיתִי בֹגְדִים וָאֶתְקֹוטָטָה אֲשֶׁר אִמְרָתְךָ לֹא שָׁמָרוּ׃

158

רְאֵה כִּי־פִקּוּדֶיךָ אָהָבְתִּי יְהוָה כְּחַסְדְּךָ חַיֵּנִי׃

159

רֹאשׁ־דְּבָרְךָ אֱמֶת וּלְעֹולָם כָּל־מִשְׁפַּט צִדְקֶךָ׃

160

רִים רְדָפוּנִי חִנָּם [וּמִדְּבָרֶיךָ כ] (וּמִדְּבָרְךָ ק) פָּחַד לִבִּי׃

161

שָׂשׂ אָנֹכִי עַל־אִמְרָתֶךָ כְּמֹוצֵא שָׁלָל רָב׃

162

שֶׁקֶר נֵאתִי וַאֲתַעֵבָה תֹּורָתְךָ אָהָבְתִּי׃

163

שֶׁבַע בַּיֹּום הִלַּלְתִּיךָ עַל מִשְׁפְּטֵי צִדְקֶךָ׃

164

שָׁלֹום רָב לְאֹהֲבֵי תֹורָתֶךָ וְאֵין־לָמֹו מִכְשֹׁול׃

165

שִׂבַּרְתִּי לִישׁוּעָתְךָ יְהוָה וּמִצְוֹתֶיךָ עָשִׂיתִי׃

166

שָׁמְרָה נַפְשִׁי עֵדֹתֶיךָ וָאֹהֲבֵם מְאֹד׃

167

שָׁמַרְתִּי פִקּוּדֶיךָ וְעֵדֹתֶיךָ כִּי כָל־דְּרָכַי נֶגְדֶּךָ׃

168

תִּקְרַב רִנָּתִי לְפָנֶיךָ יְהוָה כִּדְבָרְךָ הֲבִינֵנִי׃

169

תָּבֹוא תְּחִנָּתִי לְפָנֶיךָ כְּאִמְרָתְךָ הַצִּילֵנִי׃

170

תַּבַּעְנָה שְׂפָתַי תְּהִלָּה כִּי תְלַמְּדֵנִי חֻקֶּיךָ׃

171

תַּעַן לְשֹׁונִי אִמְרָתֶךָ כִּי כָל־מִצְוֹתֶיךָ צֶּדֶק׃

172

תְּהִי־יָדְךָ לְעָזְרֵנִי כִּי פִקּוּדֶיךָ בָחָרְתִּי׃

173

תָּאַבְתִּי לִישׁוּעָתְךָ יְהוָה וְתֹורָתְךָ שַׁעֲשֻׁעָי׃

174

תְּחִי־נַפְשִׁי וּתְהַלְלֶךָּ וּמִשְׁפָּטֶךָ יַעֲזְרֻנִי׃

175

תָּעִיתִי כְּשֶׂה אֹבֵד בַּקֵּשׁ עַבְדֶּךָ כִּי מִצְוֹתֶיךָ לֹא שָׁכָחְתִּי׃

176





이합체(離合體), 답관체(踏冠體), 알파벳 시

예레미야애가의 묵상을 시작하면서 많이 듣는 이야기가 이 책의 구조에 관한 것이다.

그 중에서 특히 Acrostics 구조는 히브리어를 모르는 나로서는 이런 구조를 알아채지 못하니 이렇게라도 찾아봄으로 시가서 형식의 글을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일명 알파벳 시라고도 하는 Acrostics는 구약 시가 지닌 또 다른 매혹적인 구조상의 특징으로 종종 사용된다는 점이다.
알파벳시란 하나의 시 안에 있는 연속되는 행들의 첫 글자가 모두 히브리어 알파벳의 순서대로 시작되는 시를 가리킨다.
구약에는 수많은 알파벳 시들이 존재한다. 시편 25, 34, 111, 112, 그리고 145편은 모두 알파벳 시다. 25편과 145편의 경우, 이 문학기법이 매 구절의 첫 글자에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이 두 시편은 모두 히브리어 알파벳의 22글자와 똑같이 22절로 되어 있다.
(실제로는 히브리어 알파벳은 23글자이지만, 알파벳 시의 경우 저자들은 "s"와 "sh"에 해당하는 글자를 한 글자로 결합시키고 있다.) 그러나 111편과 112편의 경우, 이 문학 기법은 매 행의 첫 글자에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이 두 시편 모두 22행으로 이루어진 알파벳 시형을 갖고 있는데, 각 행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연속적인 글자로 시작하고 있다.

아마도 구약에서 가장 흥미로운 알파벳 시는 시편 119편일 것이다.
처음 여덟 구절의 첫 단어는 모두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글자인 알렙(aleph)으로 시작된다. 마찬가지로 9절부터 16절까지는 모두 히브리어 알파벳의 둘째 글자인 베트(beth)로 시작된다. 이런 형태가 8행에 한 번씩 계속되어 119편 끝까지 그리고 히브리어 알파벳 끝 글자까지 이어진다. (성경해석/J.스코드 듀발; J.다니엘 헤이즈/성서유니온선교회 p571~572)

     예레미야애가의 경우 1장, 2장, 3장 그리고 4장은 알파벳 시이지만, 5장은 아니다.

애가의 Acrostics 구조는 이렇다.

1번시(22행시)                        2번시(22행시)                        3번시(22행시)                     4번시(22행시)

a........                                  a.........                                a..........                            a...........
  ........                                    ........                                a.........                                 .........
  ........                                    .........                               a..........                             b..........
b........                                  b........                                 b.........                                .........
  ........                                    .........                               b.........                              c..........
  ........                                    .........                               b..........                                .........   

애가에 있어서 Acrostics를 이룬 목적은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1) 암기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 시인은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기억을 Acrostics를 통하여 보존토록 하고 있다.
 (2) 시온의 멸망에 대한 애도의 완전한 표현을 전달한다. - 즉, "처음부터 끝까지" 정화(catharsis)의 효과를 가지게 한다.
 (3) Acrostics 형태의 엄격한 표현법은, 기교적 표현의 범위를 압축해 줌으로써 시인으로 하여금 해당 주제 혹은 제목에 보다 집
     중적이고 밀도 높은 표현을 하도록 해준다. (구약개론/앤드류 E.힐;존 H.월튼/은성 p479)








골방기도 / 손가락 기도(패트리셔 존)



골방이란 히브리 단어는 리쉬카라고 합니다.

לִשְׁכָּה 스트롱번호 3957

1. 방.  2. 성전 내의 방.  3. 식당
발음 [ lishkâh ]

어원/  복수 לְשָׁכוֹת, 복수 연계형 לִשְׁכוֹת, ‘넘어지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7회 사용
  • 1. 명사, 여성 방, 객실.
    • a. 명사, 여성 성전 내의 방, 대상9:26, 느10:38이하, 겔40:17,45, 42:1이하.
    • b. 명사, 여성 식당, 삼상9:22.
    • c. 명사, 여성 왕궁의 문서보관소, 렘36:12.
  • 관련 성경 / 객실(삼상9:22), 방(대상9:26, 느13:5, 겔46:19), 골방(대상9:33, 스8:29, 겔41:10), 마을(겔45:5).

골방이란 헬라 단어는 타마이온이라고 합니다.

ταμεῖ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5009


1. 창고.  2. 숨겨진 골방
발음 [ tamĕiŏn ]
어원 / ταμίας ‘조제자’의 파생어의 중성 압축형
  • 1. 창고, 곳간, 눅12:24.
  • 2. 숨겨진 골방, 밀실, 마6:6, 24:26, 눅 12:3.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골방(마 6:6, 24:26, 눅 12:24).

  • 1

    (회사의) 회계원, 회계 담당자, (은행의) 출납계

  • 2

    (호텔, 상점 따위의) 계산원


ταμίας?

1군 변화 명사; 남성 자동번역 로마알파벳 전사: tamias 고전 발음: [따미아스] 신약 발음: [따미아스]

기본형: ταμίας ταμίου

형태분석: ταμι (어간) + ας (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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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 τέμνω

  1. 승무원, 집사
  1. steward, dispenser


타마이온이란 헬라 단어는 "자르다(템노)"라는 동사와 "담아두다, 담다(타미아스)" 라는 동사가 합성하여 만든 단어입니다.
타마이온이란 속뜻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담아두는 것을 말합니다.

τέμνω?

비축약 동사; 자동번역 로마알파벳 전사: temnō 고전 발음: [뗌노:] 신약 발음: [땜노]

기본형: τέμνω τεμέω ἔτεμον τέτμηκα

형태분석: τέμν (어간) + ω (인칭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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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 Root ΤΕΜ, cf. τέμω

  1. 자르다, 베다, 가르다
  2. 아프게 하다, 손상시키다, 손상을 주다
  3. 제물로 바치다, 잡다, 희생하다
  4. 덜다, 잔디를 깎다, 자르다
  5. 전진하다, 나아가다, 행군하다, 행진하다, 가다
  1. I cut, hew
  2. I maim, wound
  3. I butcher, sacrifice
  4. I cut down, reap
  5. I cut through, advance, drive through, plow thr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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δέη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1162

1. 간구.  2. 기도.  3. 눅 1:13
발음 [ dĕēsis ]
어원 / 1189에서 유래
  •  1. 간구, [신약에서는 언제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눅1:13, 2:37, 행1:14, 롬10:1, 고후1:11, 9:14, 엡6:18, 빌1:4,19, 4:6, 딤전2:1, 5:5, 딤후1:3, 히5:7, 약5:16, 벧전3:12.
  • 관련 성경 /  간구함(눅1:13, 고후1:11, 빌1:4), 기도함(눅2:37), 구하는 바(롬10:1, 엡6:18), 간구(엡6:18, 딤전2:1, 벧전3:12), 기도(행1:14)

* 1189.  δέομαι  스트롱번호 1189

1. 구하다.  2. 눅 8:38.  3. δεόμε- νοι ἧμῶν τὴν χάριν : 우리에게서 호의를 구하여
발음 [ dĕŏmai ]
  • I. 구하다[인격명사의 속격이 뒤따른다].
    • 1.
      [부정사와 함께] 눅8:38, 9:38, 행26:3.
    • 2.
      [사물의 대격과 함께] δεόμε- νοι ἧμῶν τὴν χάριν: 우리에게서 호의를 구하여, 고후8:4. [인격 명사의 속격이 없이] 고후10:2.
    • 3.
      [직접화법이 뒤따르는 경우] 제발~ 부탁한다.
      • a.
        δέομαί σου, ἐπίτρεψόν μοι: 제발 허락해다오, 눅8:28, 행8:34, 21:39, 갈4:12.
      • b.
        [λέγων을 덧붙여] 눅5:12.
      • c.
        [인격의 속격은 없지만 ὑπὲρ Χρισ- τοῦ을 덧붙여] 고후5:20.
    • 4.
      [ἵνα과 함께] 눅9:40. 그 외, 마9:38, 눅10:2, 21:36, 22:32, 행4:31, 8:24, 10:2, 롬1:10, 살전3:10.
  • 문법설명 / 디포넌트. 제1부정과거 ἐδεήθην, 명령 δεήθητι, 복수 δεήθητε, 미완료3인칭 단수 ἐδεῖτο, 1210의 중간태
  • 관련 성경 /  청하다(마9:38, 눅10:2), 구하다(눅5:12, 롬1:10, 고후10:2), 간청하다(고후5:20, 살전3:10), 기도하다(눅21:36, 행8:22, 10:2), 빌다(행4:31), 바라다(행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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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리셔 존
유명한 아동문학가인 패트리셔 존은 선교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전쟁 중에 간호사로 일했고, 모로코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 북서부 탕헤르에 학교가 설립되기 전까지 산간 오지 마을에서 의료 사역에 헌신했다.
또한 글로벌 케어의 회장으로 일했으며, 전세계에 걸쳐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기독교 저선 사업을 했다.
존은 25권이 넘는 책을 썼는데, 그 중 어린이를 위한 책이 18권이나 된다.
그 가운데 `탱글우드의 비밀`과 `눈 속의 보물`은 장편특선영화로 제작, BBC 방송에서 방영되기까지 했다.

존은 어린이들의 영적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한번은 유명한 어린이 복음 전도자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어린아이에게는 어린아이의 구세주가 필요하다."
그녀가 전세계의 어린이들과 어른들을 위한 작가가 된 것은, 이야기를 통해 심오한 교훈을 가르치려는 열망 때문이다.

다섯 손가락의 기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섯 손가락을 주셨습니다.

엄지(Thumb)

엄지는 가장 높은 사람을 상징할 때 엄지라고 합니다.
따라서 엄지를 보면서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 가정에서 높은 사람, 학교에서, 직장에서 이렇게 내 주위에서 높은 사람을 생각하며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엄지(Thumb)는 심장에 가장 가깝게 있기에 엄지손가락을 꼽으며 나의 마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지혜입니다. 나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고,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위해, 혈육들과 형제 우애를 위해, 그리고 소중한 친구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합시다.

검지(Pointing Finger, Index Finger)

검지는 무엇을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나를 가르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검지(Index or pointing finger)는 무엇을 가리키는데 사용하는 손가락입니다.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내게 진리와 지식을 가르쳐주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지혜입니다.
학교 선생님, 직장 상사, 선배, 전문가, 주치의, 주일학교 교사, 또는 성경공부 인도자들 위해 기도합시다.
나를 바르고 선한 길로 이끌어주며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 주시는 분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중지(Middle Finger)

가장 가운데 있는 손가락은 가장 긴 손가락입니다.
가장 중심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중지(Middle finger)는 일반적으로 가장 긴 손가락입니다.
가운데 손가락을 세면서 각 분야에서 책임을 맡은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지혜입니다.
직장의 사장이나 회장이 회사를 지혜롭게 경영하도록,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인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겸손한 종들이 되도록, 그리고 대통령과 위정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바른 정책과 국정 운영을 할 수 있도록, 이 세상의 모든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약지(Ring Finger)


사회적인 약자들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또는 내가 도와야 할 대상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약지(Ring finger)는 결혼반지를 끼는 손가락입니다.
약지를 볼 때마다 하나님 안에서 맺은 약속을 기억하며 기도하라는 지혜입니다.
어떤 분이 엄지는 아버지, 검지는 어머니, 중지는 나, 약지는 배우자, 그리고 소지는 자식을 의미하기에 넷째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에 동반자가 되어준 배우자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맺은 언약을 기억하며 기도합시다.
또한 약지는 손가락 중에 제일 힘이 약한 손가락이기도 합니다.
약지를 세면서 육체적 질병이나 경제적 문제로 고통 중에 있는 이웃들, 어떤 이유에서든지 곤경에 처한 형제와 자매들,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여 소망이 없이 불안과 초조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애기지, 소지(Pinky)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을 생각합시다.
북한의 주민들, 남미 지역의 굶주린 아이들, 피난민들............

소지(Pinky)인 새끼손가락은 제일 작습니다.
이 세상에서 작고 보잘것없이 보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지혜입니다.
그늘진 곳에서 소외된 사람들, 배고픔과 학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리하는 탈북자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심한 종교적인 핍박을 받는 성도들, 또는 인권 침해를 당하지만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제 3세계의 어린이들, 사회의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장애우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섯 손가락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동심으로 돌아가 주께서 주신 손가락을 세면서 기도하면 어떨까요?
우리의 연약한 손이 기도의 손으로 바뀔 때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축복의 손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예레미야 29:12-13)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기도의 비결을 알고 싶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기술이나 법칙이 아닙니다. 기도에는 어떤 공식이나 비법이 없습니다. 기도는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정직하고 겸손한 응답입니다. 말씀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시편은 기도문입니다. 수많은 기도문이 있지만 여기서 기도의 공식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말씀 앞에서의 다양한 응답들이 있을 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느끼는 정직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 반응들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찬양, 감사, 소원, 간절한 간구, 기쁨과 같은 긍정적 반응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평, 투정, 분노, 안타까움,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 반응도 있습니다. 시편은 기도는 기술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우리의 정직한 응답이며 반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직한 반응을 들으십니다.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가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목을 정해서 조목조목 하나님께 아뢸 수도 있습니다. 여러 기도의 제목들을 다섯 손가락을 따라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다섯 손가락 기도입니다.


손바닥입니다.
손바닥은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동시에 나에게 가까이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나와 가까이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분께 나아갑니다. 주기도문도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며 나아가도록 가르칩니다.


다섯 손가락입니다.
엄지는 찬양기도입니다. 자연광경이나 최고의 예술품을 보면 자연스레 경탄이 생겨나는 것처럼,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분께 찬양이 생겨납니다. 하나님께 먼저 찬양과 영광을 돌리면서 가장 먼저 하나님을 주목해서 바라보십시오. 인지는 감사기도입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손가락을 보십시오. 내 삶에서 감사할 것을 찾아내십니다. 감사할 것을 보게 하시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십시오. 중지는 회개기도입니다.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범죄한 것을 찾아 회개하면서 기도합니다. 약지는 간구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삶의 여러 간구를 드립니다. 무엇이든지 염려하지 않고 다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습니다. 소지는 중보기도입니다. 기도가 필요한 구역식구들, 환우들과 선교사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손등입니다.
손등은 우리를 초월하시는 왕이신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 하나님께 우리의 기도제목을 다 맡기고 편안함과 확신으로 일어섭니다. 주기도문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있으신 하나님께 기도제목을 다 맡기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는 손과 다섯 손가락으로 말씀을 읽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먹습니다. 밖의 말씀을 안의 말씀이 됩니다.
다시 손과 다섯 손가락으로 기도합니다. 찬양, 감사, 회개, 간구,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오른손은 말씀의 손이고, 왼손은 기도의 손입니다.
두 손을 붙잡습니다.
말씀의 오른손과 기도의 왼손이 만납니다.
그러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도로 말씀을 먹고, 말씀으로 기도를 드립시다. 





말세(末世)


말세(末世)


대한성서공회 검색란에서 "말세"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여덟 구절을 소개합니다.

신명기 31:29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한 길을 떠나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케 하므로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 하니라.

사도행전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고린도전서 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디모데후서 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말세(에스카타이스 헤메라이스)  εσχαταις ημεραις 

말(2078)
세(2250)

ἔσχατος, η, ον 스트롱번호 2078

1. 마지막.  2. 장소에 대하여.  3. 지위나 서열에 있어서 마지막
발음 [ ĕschatŏs ]
어원 / 최상급, 2192에서 유래한 듯
  • I. 마지막, 최후의.
    • 1.  장소에 대하여, 눅14:9이하, [명사적으로] τὸ ἔρχατον: 끝, 행1:8, 13:47.
    • 2.  지위나 서열에 있어서 마지막, 맨 끝, 제일 보잘것없는, 마19:30, 20:16, 막9:35, 10:31, 눅13:30, 사도들에 대하여, 고전4:9.
    • 3.  [시간에 대하여] 제일 늦은, ~의 끝.
      • a.  [앞선 것과의 관계를 나타낼 때] 마20:12,14, 막12:6, 요8:9, τὰ ἔσχατα: 마지막 일, 마12:45, 눅11:26, 벧후2:20.
      • b.  [길 뒤에 아무 것도 뒤따라 올 것이 없는 정황을 나타낼 때] 마5:26, 눅 12:59등, ὁ πρῶτος καὶ ὁ ἔ.: 처음과 마지막, 계1:17, 2:8, 22:13, ἡ ἐ. ἡμέρα: 마지막 날, 요6:39, 11:24, 12:48등.
  • 관련 성경 / 가장 멀리(까지)의, 마지막의, 최후의, 가장 낮은, 가장 어려운 곤경[입장, 처지] 의.


ἡμέρα, ας, ἡ 스트롱번호 2250

1. 날.  2. 마 4:2.  3. ἡμέρα γίνε- ται: 날이 밝아온다
발음 [ hēmĕra ]
  •  I. 날.
  •  II. [해가 떠서 질 때까지의 자연적인] 날.
    •  1. [문자적으로] 마4:2.
      •  a. ἡμέρα γίνε- ται: 날이 밝아온다, 눅4:42, 6:13, 22:66, 행12:18, 16:35, 27:29,33.
      •  b. ἡμέρας μέσης: 대낮에, 정오에, 행26:13.
      •  c. ἡμέρας καὶ νυκτός: 낮과 밤, 막5:5, 눅18:7, 행9:24, 살전2:9, 3:10, 살후3:8.
      •  d. τάς ἡμέρας: 매일, 눅21:37.
      •  e. πᾶσαν ἡμέραν: 날마다, 행5:42.
      •  f. [개별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대격] συμφωνεῖν ἐκ δηναρίου τὴν ἡμέρα: 하루에 대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다, 마20:2.
    •  2. [상징적으로] 하룻길, 눅2:44, υἱοὶφωτὸς καὶ υἱοὶ ἡμὲ- ρας: 빛과 낮의 아들들, 살전5:5.
  •  III. [밤까지를 포함한] 하루, 마6:34, 15: 32, 막6:21, 눅13:14, [시간의 반대어] 마25:13, τεσσεράκοντα ἡμερῶν:40일 동안, 행1:3, μιᾷ ἡμέρᾳ : 하루에, 고전10:8, ὅλην τ. ἡμέραν; 하루 온종일, 롬10:21. [주] 전치사와 함께 쓰일 경우:
    •  1. [ἀπό와 함께] 마22:46, 요11:53, 행20:18.
    •  2. [διὰ와 함께] 막2:1, 14:58, 행1:3.
    •  3. [ἐν과 함께] 눅5:17, 8:22, 요5:9등.
    •  4. [ἐπί와 함께] 행13:31, 히11:30등.
    •  5. [κατὰ와 함께] 마26:55, 눅11:3, 히3:13등.
    •  6. [πρό와 함께] 요12:1등.
  •  IV. [매우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지정된] 날.
    •  1. τακτῇ ἡμέρᾳ, 행12:21, ἡ- μέραν τά ξασθαι, 행28:23, στῆσαι, 행17:31등.
    •  2. 심판의 날.
      •  a. ἀνθρωπί- νη ἡμ.: 인간의 법정이 지정한 날, 고전4:3.
      •  b.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의 날, 눅17:30, 벧후3:12, 계16:14등, 예수가 심판주로 나타남, 고전5:5, 살전5: 2, 살후2:2, 벧후3:10.
  •  V. [긴 시간을 가리킬 때] 시간, 시대.
    •  1. [단수로] ἐν τ. ἡμέρᾳ τ. πονηρᾷ: 악한 날에, 엡6:13, ἐν ἡμ. σωτηρίας: 구원의 때에, 고후6:2, 이집트로부터 구출되던 때, 히8:9.
    •  2. [주로 복수로 나타난다] ἐν ἡμέραις Ἡρῴδου: 헤롯의 통치시대에, 마2:1, 눅1:5, Νῶε: 노아의 때, 눅17:26, 벧전3:20, πάσας τὰς ἡμ έρας: 언제나, 마28:20, ἐν τ. ἡμέραις ἐκεί- ναις: 그때에, 마3:1, 24:29,38, 막1:9, 눅2:1, 4:2, 5:35, πρὸς ὀλ ίγας ἡμ.: 잠깐 동안, 히12:10, [특별히 생애를 나타냄] πάσαις τ. ἡμέραις ἡμῶν: 우리의 일생동안에, 눅1:75, μήτε ἀρ- χὴν ἡμερῶν μήτε ζωῆς τέλος ἔχων: 생애의 시작도 끝도 없는, 히7:3.
  • 문법설명 / ‘앉다’의 파생어의 여성형
  • 관련 성경 / 때(마2:1, 막1:9, 눅23:7), 날(마7:22, 막2: 20, 눅4:2), 하루(눅2:44, 8:22), 시대(눅4:25), 낮(요11:9, 살전5:5), 나이(눅1:7), 세(눅2:37), 오래(행15:7), 날짜(행28:23), 주(살후3:8), 무렵(막8:1).




󰃨 말세에 - 구약에서 '말세'는 메시야가 오시기 바로 직전의 때를 의미한다(창 49:1;민 24:14;사 2:2;렘 23:20;겔 38:16;단 2:28). 그러나 신약에서(행 2:17;약 5:3) 이 말이 갖는 의미에 대하여 학자들의 견해는 두가지로 나뉜다. (1)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의 시기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장래에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Scott). (2)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후의 시대, 즉 메시야의 도래(到來)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진 시대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그시대가 종료될 때까지를 의미한다(Lenski). 두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히 9:16;벧전 1:20).

󰃨 고통하는 때 - '고통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레포이(*)는 '위협하는'의 뜻으로서 이곳 외에 마 8:28에서만 나온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가다라 지방으로 가실 때 만난 귀신 들린 자 두 명의 사나운 모습을 표현할때 본 단어를 사용하였다.


야고보서 5: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베드로전서 1: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베드로전서 1: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베드로후서 3:3 /  자기 정욕을 좇아 행하는 시대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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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末世, end-time)는 세계 대부분의 종교 및 신화에 등장하는 종말론(終末論)이다.

기독교에서 "마지막 날"은 구원자이자 메시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우선되는 환난 시대를 언급하기도 한다. 이슬람에서는 부활의 날(Yawm al-Qiyāmah), 심판의 날(Yawm ad-Din)이 세상의 마지막 이전에 선행된다. 유다교에서 "마지막 날"이라는 용어는 타나크민수기 24장 4절에서 메시아 시대에 대한 언급과 메시아가 도래할 것이라는 유다인들의 믿음을 상징한다.[1] 이후 요엘이나 스바니야 등도 '야훼의 날, 또는 주님의 날(가톨릭) 등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심판의 날이 찾아올 것을 경고하였다. 다른 다양한 종교도 환생과 구속에 관한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출처 필요]

마태복음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말세에는 넘치는 성욕으로 말미암아 동성애를 한다고 한다. 동성애는 안된다.

그러므로 다니엘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 읽는 이는 알아들으라. ─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라. 옥상에 있는 이는 물건을 꺼내러 집 안으로 내려가지 말고, 들에 있는 이는 겉옷을 가지러 가려고 뒤로 돌아서지 마라.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너희가 달아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그때에 큰 환난이 닥칠 터인데, 그러한 환난은 세상 시초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 그 날수를 줄여 주지 않으시면 어떠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그 날수를 줄여 주실 것이다.

— 마태오 복음서(마태복음) 24장 15-22절

있어서는 안 될 곳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서 있는 것을 보거든 ─ 읽는 이는 알아들으라. ─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라. 옥상에 있는 이는 내려가지도 말고 무엇을 꺼내러 집 안으로 들어가지도 마라. 들에 있는 이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아서지 마라.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그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그 무렵에 환난이 닥칠 터인데, 그러한 환난은 하느님께서 이룩하신 창조 이래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그 날수를 줄여 주지 않으셨으면, 어떠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몸소 선택하신 이들을 위하여 그 날수를 줄여 주셨다.

— 마르코 복음서(마가복음) 13장 14-20절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루카 복음서(누가복음) 21장 20-33절


성경에서 말하는 말세

지구의 멸망, 말세, 지구의 마지막 날 이런 말들은 참 우리를 두렵게 만듭니다.
수많은 예언가들이 말세를 주장하기도 하니 언젠가는 마지막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성경에 나오는 말세에 대해 알아보고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말세를 맞이해야 할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기독교의 말세관 

(벧후 3:8-13, 개정)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계 6:12-14, 개정)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마 24:29-30, 개정)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성경에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 즉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해가 검어지고 달이 피같이 되고 별들이 떨어지고 불로 세상을 심판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런 근거로 말세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2. 과학적 입장의 말세관

과학자들은 전쟁으로 인한 핵폭발, 인구증가, 식량위기, 자원고갈, 환경파괴등으로 지구가 멸망할 것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과연 멸망으로 끝이 날까요?

성경을 통해 본 말세의 의미

성경을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전 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전 3:15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이 두 구절을 통해 볼 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역사는 돌고 돈다." 라는 얘기가 합당한 듯 합니다.
구약은 오래된 약속입니다.
내가 메시야를 땅에 보내 주겠다는 혹은 하나님이 심판하러 오신다는 약속의 말씀이 구약의 핵심입니다.
신약은 구약의 약속대로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의 예언을 다 이루고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리라 말씀하십니다. 
다시 오실 때 양과 염소를 가르듯 선과 악을 쪼개고 구원 받을 사람을 휴거시키고 세상은 심판하신다는 내용인 것 같아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구약의 약속 -> 예수님이 오심으로 약속의 성취
신약의 약속 ->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약속의 성취

역사는 돌고 돈다는 관점에서 볼 때 만약 구약의 약속과 신약의 약속이 같다면 구약의 성취와 신약의 성취도 같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오늘 살펴볼 말세에 관한 예언도 만약 구약에 말세에 관한 구절이 있고 신약에도 말세에 관한 구절이 비슷하게 있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신 말세에 관한 성취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도 동일한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럼 구약 성경에 말세에 관한 말씀이 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1.구약예언

(겔 7:3, 개정) 『이제는 네게 끝이 이르렀나니 내가 내 진노를 네게 나타내어 네 행위를 심판하고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보응하리라』


(겔 7:6-7, 개정) 『[6] 끝이 왔도다, 끝이 왔도다 끝이 너에게 왔도다 볼지어다 그것이 왔도다 
[7] 이 땅 주민아 정한 재앙이 네게 임하도다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웠으니 요란한 날이요 산에서 즐거이 부르는 날이 아니로다』


(창 6:13, 개정)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겔 38:16, 개정) 『구름이 땅을 덮음 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오리라 곡아 끝 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눈 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이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라』

(단 12:4, 개정)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단 12:13, 개정)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다니엘서, 에스겔서에 보면 끝이 이르렀다, 끝이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끝 즉, 말세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노아 때도 하나님은 끝날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셨고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아직도 우리 인간들이 지구에 살고 있는 것을 볼 때 말세는 완전한 지구의 멸망이 아니라 다른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신약성취

예수님이 오신 때가 말세였습니다.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과연 세상을 끝내버렸는가 성경을 통해서 알아볼까요?  
말세는 현세계의 마지막이 아니라 좀더 나은 세계로의 전환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구약이라는 시대의 말세를 보내고 신약이라는 새로운 이상세계로의 전환을 시켰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말세는 무섭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새롭게 변화되는 알고 보면 좋은 것입니다.

(히 1:2, 개정)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예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 즉, 말세에 우리에게 말씀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 9:26, 개정)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님이 세상 끝, 말세에 나타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전 1:20, 개정)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베드로전서에는 아예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예수님이 나타나신 바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일 2:18, 개정)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말세 때 적그리스도, 이단이 많이 나타난다고 하고 있고 예수님 당세 때 수많은 이단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계 1:17, 개정)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예수님은 처음이고 마지막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이 곧 신약의 시작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은 바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나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서기 2024년도 알고 보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카운트를 하고 있는 달력입니다.

(고후 5:17, 개정)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즉, 그리스도의 사람, 온전한 신앙인이 된다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육신이 바뀐 것이 아니라 그 마음, 정신, 생각, 영혼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새롭게 변화된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역사를 이해하는 방법

역사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크게 두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직선적 사고 방식(천동설적 입장)      

시작과 끝이 일직선으로 되어 있다는 관점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함으로 시작되었고 심판함으로 끝이 난다는 입장입니다.


*순환론적 사고방식(지동설적 입장)

봄이 끝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끝나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오면 겨울이 오고 또 겨울이 끝나면 다시 봄이 오는 것처럼 세상이 순환된다는 입장입니다.
        

유대교의 말세관

유대교는 문자그대로 이와 같은 천재지변적인 종말이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유대교는 아직도 초림주를 기다리고 있고 기독교는 신약때 이루어 지지 않았으니까 구약의 말세에 대한 예언은 모두 재림 때를 예언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재림때는 반드시 천재지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죠.

유대인은 그들의 고정관념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 들이지 못했습니다. 
맹목적인 이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직선적인 말세관에서 벗어 나야 합니다.

             봄 말세→여름시작↘            가을말세→겨울시작↘ 
     봄 시작↗              여름말세→가을시작↗             겨울말세

             국민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  ->  대학교 

말세의 진정한 의미

즉, 말세는 
① 구시대의 끝이자 신시대의 시작입니다.
② 말세는 순환적이며 보다 새로운 차원으로의 전환 되는 것입니다.
③ 말세는 죽음이 아니라 더 나은 세계로의 나아가는 변화입니다.
④ 말세는 실제로 하늘과 땅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변화됨으로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줍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한 때 삐삐라는 통신기기가 유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핸드폰이 발명이 되고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면서 삐삐는 말세를 맞이하게 됩니다.
지금은 2G로 대변되면 핸드폰도 말세를 맞이하고 스마트폰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스마트폰도 점점 AI폰으로 진화가 되고 있는데 언젠가 스마트폰도 말세를 맞이하고 AI폰의 시대를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봐도 성경을 봐도 근본적인 말세는 우리 인생들이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세상의 물질세계는 유한하니 언젠가는 지구가 사라질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세의 근본은 새로운 차원으로 거듭나는 것이 말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각자의 차원에서 말세를 맞이하시고 새로운 차원으로 거듭나는 귀한 날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말세란 무엇인가?

말세는 성경에서 마지막 시대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마지막 때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초림 이후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을 포함하며, 최종적인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시기를 포함한다. 성경은 말세에 대해 경고하면서도, 성도들이 가져야 할 믿음과 소망을 강조한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말세의 특징과 신앙인의 태도에 대해 살펴보자.


성경에서의 말세

성경에서는 말세를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첫째, 예수님의 초림 이후부터 재림까지의 시대이다. 히브리서 1장 2절에서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이미 말세 속에 살고 있다.

둘째,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지는 최종적인 종말의 시기이다. 디모데후서 3장 1절에서는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마태복음 24장 3절에서는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어떤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묻고 있다. 이처럼 성경은 마지막 때에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말세의 특징

성경에서는 말세의 주요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도덕적, 영적 타락이 심해진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서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라고 경고한다.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신과 세상을 더 사랑하며, 죄악이 만연한 시대가 될 것이다.

둘째, 거짓 교사와 미혹이 증가한다. 마태복음 24장 24절에서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적을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고 말한다. 말세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등장하여 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다.

셋째, 재난과 전쟁이 잦아진다. 마태복음 24장 6~7절에서는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겠으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말세에는 전쟁, 기근, 지진과 같은 재난이 증가할 것이다.

넷째, 복음이 세계적으로 전파된다. 마태복음 24장 14절에서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한다. 말세에는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다.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준비와 믿음의 삶이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명확하게 가르친다.

첫째, 깨어 기도해야 한다. 누가복음 21장 36절에서는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기록되어 있다.

둘째, 말씀에 굳게 서야 한다. 요한계시록 3장 10절에서는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고 말씀한다.

셋째,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명령한다.

넷째, 세속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말씀한다.


말세와 재림의 소망

말세는 단순히 두려운 시간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소망의 때이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서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서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도들은 그날에 영광스럽게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할 것이다.


결론

말세는 죄악과 심판의 때이지만, 동시에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는 시간이다. 성도들은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깨어 기도하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20)




한 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여러 날들’ 또는 ‘특정한 기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말세는 어떤 기간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 요엘서를 인용한 사도 베드로의 증언에 따르면, 오순절 성령강림 때 말세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로부터 시간이 좀 지나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기록할 때도,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말세’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순절 성령강림 때처럼 하나님의 성령이 디모데가 목회하던 에베소 교회에도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증언대로,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시는 때가 곧 말세라고 했으니,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셨으므로 그때에도 여전히 말세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께서 그때와 동일한 방식으로 거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도 말세에 살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말세는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전까지 처하게 되는 ‘모든 현재’를 뜻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 보면, 이 본문은 2천 년 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말세에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2절)라고 말씀합니다. 말세의 뜻을 잘 몰라도 사도가 증언하는 내용만 봐도,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당시처럼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합니다.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지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얼짱’과 ‘몸짱’이 되기 위해 자기 얼굴과 몸을 뜯어 고치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 완전히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돈을 사랑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돈이라면 완전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험금을 노리고 자기 가족을 죽이기도 하고, ‘목사’를 사칭하는 사기꾼들이 헌금을 횡령하는 어처구니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랑하고 교만하며 남을 비방하는 일에 능숙합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물론,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한 삶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사람들이 절제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스마트 기기를 사용하면서 즉흥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소셜 미디어(Social Media) 문화’가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절제하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점점 사나워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육신적 쾌락에 빠져 급기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망각해 버립니다. 

사랑하는 청년(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바울 당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경고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똑같이 “말세에” 살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말세의 특징을 보면서 오늘 한국 교회와 우리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게다가 더욱 충격적인 사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은 일차적으로 불신자들에 대한 묘사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거짓 교사 또는 거짓 신자들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는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라는 5절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따라서 “경건의 모양” 따위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경고는 일차적으로 교회 공동체를 겨냥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로 치면, 한국 교회와 그 밖의 모든 기독 단체 및 캠퍼스 기독 동아리를 향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 교회도 결코 예외일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참 신자인 척하면서 그냥 ‘가라지’로 앉아 있는 교인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단 한 번도 예수님과 만남의 경험이 없이 부모 또는 친구의 권유로 마지못해 교회당에 출입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리스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반면에 과거에 거듭난 체험은 있지만, 세상 가운데 불신자 친구들의 틈바구니에 살면서,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거의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칭의(의롭다 하심)의 은혜에서 결코 떨어져 나가지는 않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는 불신자와 거의 다를 바가 없이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굴복시키려는 선한 의지를 거의 소멸한 채, 언제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보다 육신적 쾌락에 매몰되어 온갖 욕심에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제가 볼 때 오늘 본문에 언급되는 사람들은 방금 말씀드린, 교회 안의 두 부류에 모두 해당됩니다. 다시 말해, 애초부터 거듭나지도 않았으면서 어릴 적부터 부모나 친구의 권유로 마지못해 종교 생활하는 자들과, 그리고 예전에 분명하게 거듭난 체험은 있지만 현재 세상의 영에 미혹되어 일시적으로 거의 불신자처럼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는 당시 디모데가 목회하던 에베소 교회 안의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이 앞서 말한 그 두 부류 모두에 해당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없으면서 참 신자인 척하는 부류, 또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이단자들에게 미혹되어 일시적으로 진리를 대적하게 된 부류를 가리킵니다. 

아무튼 이 두 부류의 특징은 우선 “경건의 모양”(μόρφωσιν εὐσεβείας)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애초부터 거듭난 체험이 없는 사람도 오랜 기간 동안 교회의 예배행위나 여러 의식에 노출되다 보면, 참 신자와 거의 동일한 모습으로 “경건의 모양”을 무의식중에 습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경건의 모양을 보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닥쳐오면, 항상 자신의 욕망을 위해 무언가를 선택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마저도 자신의 양심을 평안하게 해 주는 수단 정도로 생각해 버립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주님의 십자가가 자기 위안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역시 경건의 모양은 갖추고 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경건의 모양이 어떤 것인지 알며, 한때 경건의 능력을 가지고자 노력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거짓 교사들, 즉 이단자들의 거짓 가르침에 미혹되어 일시적으로, (물론 그 기간이 언제까지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불신자의 영적 상태와 거의 다를 바가 없이 살아갑니다. 자기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채, 자신의 욕망에 따라 무언가를 선택합니다. 말씀을 향한 선한 의지가 조금 살아 있을 때에는 양심의 가책이라도 받는데, 그 선한 의지가 거의 소멸된 상태가 되면, 신앙적 양심의 가책도 거의 받지 않습니다. 참으로 자기 양심에 화인 맞은 것처럼 살아갑니다. 

아무튼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6절에 나오듯이,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그런 부류에 속한 자들입니다. 여기에서 “어리석은 여자”(γυναικάρια)란, 거짓 교사들에게 ‘잘 속아 넘어가는 여인들’(gullible women, NKJV)을 가리킵니다(Thomas D. Lea, NAC: 1,2 Timothy, Titus).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남편이 밖에 일하러 나간 사이에, 거짓 교사들이 집요하게 집으로 침투해서 여인들을 교묘하게 미혹하는 행태가 있었습니다(존 스토트, 『BST 시리즈: 디모데후서 강해』). 그들의 이런 은밀한 수법은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를 미혹했던 뱀의 수법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사탄에 사로잡힌 멸망의 자식들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여인들은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긴 하지만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6-7절). 그렇기 때문에 이런 어리석은 여자들도 (일시적이면 좋겠지만) 같은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8절에 나오는 얀네와 얌브레 같은 사람들도 동일한 부류에 속합니다. 모세를 대적한 그들의 이름이 구약성경에 나오진 않지만, 바울은 유대인의 전통 문서들을 통해 그들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John Calvin, William Hendricksen).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대적하고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며, 또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입니다(8절). 오늘날로 치면, ‘ㅅㅊㅈ’와 같은 사악한 이단들을 가리킵니다.

놀랍게도(?) 본문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나타낼 때는 특별한 외적 형식을 가지게 됩니다. 외적 형식과 참된 경건의 관계는 몸과 영혼의 관계와 비슷합니다(Charles H. Spurgeon). 다시 말해, 참된 경건은 외적인 형식이 없이 표현될 수 없으며, 외적인 형식만 있는 참된 경건도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청년(성도) 여러분, 우리는 ‘교회 개혁’이라는 명분 아래, 형식을 무조건 좋지 않은 것이라 하여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형식적’이라는 말 자체를 굉장히 부정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우리의 신앙에는 ‘형식’이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신앙의 형식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3장과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화 있을진저”라는 강한 어조로 질책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11:42). 

여기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이것도 행하고”, 즉 경건을 표현하는 외적 형식인 “십일조”도 행하고, 또한 “저것도”, 즉 그 외적 형식에 담긴 경건의 의미인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경건을 담아내는 외적 형식(경건의 모양)이 필요 없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본질’이라는 명분 아래 ‘형식’ 자체를 거부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교회 개혁’이라고 생각하면 완전히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물론 성경에도 없는 온갖 외적 형식으로 경건의 능력과 전혀 상관없는 것들은 당연히 없애 버려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경건에 유익이 되는 외적 형식들을 모두 없애 버리면 참으로 곤란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한번 적용해 봅시다. 사랑하는 청년(성도)들이여, 여러분은 과연 경건의 능력을 드러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 다시 한 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내 삶에 과연 “경건의 모양”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거짓 교사들과 거짓 신자들은 경건의 모양이라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여러 규례들을 지켰고, 온갖 율법 조항들을 만들어 내어 금욕주의적 삶을 살았으며, 외적으로 볼 때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종교적 행위들은 철저히 자신들의 의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도 그들이 갖추었던 외적 형식, 즉 “경건의 모양”이라도 갖추고 있는지부터 한번 살펴봐야 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5절)라는 사도의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경건의 모양은 필요 없고 경건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경건의 능력을 담아내는 최소한의 경건의 모양이 당연히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당시 사도가 보기에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누구나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 속에 몰래 침투한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도 참 성도들과 동일하게(?)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음을 그가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는 경건의 모양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생활’에 열중하는 모습입니다. 매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고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헌금생활도 열심히 하는데, 이것들은 그들에게 신앙이 아니라 종교일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런 행위들을 다른 사람에게 ‘신실하게’ 보여 줌으로써 존경과 좋은 평판을 얻으려는 데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

바울 당시에도 그랬겠지만, 오늘날에도 몰래 침투한 거짓 교사들은 보통 더 뜨겁게 교회생활을 합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 저희 학교에 ‘대학교회’가 세워졌는데, 이곳을 섬기려고 찾아온 두 명의 청년이 처음부터 굉장히 뜨겁게 교회를 섬겼습니다. 여느 청년들과는 달리 찬양 팀 멤버로서 참 헌신적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몰래 침투한 ㅅㅊㅈ 추수꾼이었습니다. 이들은 본문에서 사도의 증언대로, 경건의 모양을 뚜렷하게 갖추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참 신자들과 비교해 봐도 전혀 차이가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관심사는 경건의 모양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행위에만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엇비슷한 모양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의 관심은 경건의 모양을 드러내게 하는, 기저(基底)에 깔린 경건의 능력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계신 청년(성도)들에게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과연 경건의 능력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경건의 능력이라고 해서 뭔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칼빈의 말대로, 경건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이 하나로 결합된 것입니다. 따라서 경건의 능력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일상생활 가운데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도 겉보기에는 참 신자들과 동일한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증언대로, 사람은 외모를 보기 때문에(삼상16:7) 그런 자들의 중심을 정확히 꿰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자들에게 속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추수 때까지 많은 경우에 그런 가라지들이 교회당에 나오도록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마13:29).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결정적인 한 가지 증상이 나타납니다. 일단 참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 없는 증상이 나타납니다. 이런 성도들은 주일 성수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마치 어린아이가 밥을 굶은 것처럼 영적 결핍에 허덕이게 됩니다. 그런데 경건의 능력이 없는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은 말씀을 듣지 않고 기도를 하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바른 말씀과 바른 교리와 참된 경건생활을 누리지 못하는데도 이들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증상을 보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안에서 결코 거듭난 적이 없기 때문에, 영적 양식을 공급 받지 못해도 자신이 굶어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항상 배우긴 하지만 자기 욕심대로 생활할 뿐이며,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처음부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이들은 우리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고 책망 받을 사악한 자들입니다.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계신 청년(성도)들이여, 여러분이 소유한 경건의 능력이 일상생활 가운데 더욱 드러나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날마다 살피며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또 자기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거짓 교사들처럼 경건의 능력을 부인한 채, 자기 욕심에 사로잡힌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일이면 또 다른 한 주가 세상 가운데 시작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경건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지, 이번 한 주간에 또다시 판가름 나게 될 것입니다. 매주 교회당에 있을 때는 경건의 모양으로 서로를 대하지만, 세상 가운데 여러분이 살아갈 때는 경건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대할 것입니다. 본문 8-9절에 나오듯이, 믿음에 관하여 버림받은 자처럼 살다가 자신의 어리석음이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폭로되지 않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겸손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적인 경건의 모양과 함께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경건의 능력을 아울러 겸비(兼備)하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잃어버린 시간 / 난제해설 - 여호수아서 10:12-14 태양 정지 명령의 과학성


NASA는 "잃어버린 하루"를 찾았는가?

NASA는 "잃어버린 하루"를 찾았는가?
Has NASA Discovered a "Missing Day"?

Bert Thomson
First published in : Reason & Revelation
(A Monthly Journal on Christian Evidence)
May 1991, 11(5):17-19
http://www.answersingenesis.org/docs/1117.asp
번역 : IT 사역위원회

Q. 태양이 "멈추었다" 라는 여호수아 이야기에 대한 근거가 나돌고 있다. 지구와 태양의 궤도를 컴퓨터를 사용하여 계산하던 NASA의 과학자들이 인류 역사에서 "잃어버린 하루"를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내가 이것을 추적해본 결과, NASA의 과학자들이 잃어버린 하루를 찾는데 사용한 컴퓨터가 성경의 기록이 옳았음을 증명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과연 그것은 정말일까?

A. 위의 내용과 같은 이야기들이 오가면 심심치않게 (통상 교회의 주보나 종교 출판물에) 실제 사건인양 나돌곤 한다. 이 정보의 최초 발언자는 신실한 의도에서 출발하였다는 것과, 불신자의 화살과 돌팔매로부터 성경을 지키고자 하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렇지만, 과학자들이 여호수아의 "긴 하루"를 찾아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 이야기를 조사해본 결과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밝혀졌다.

어쨌거나 엇비슷한 이야기들이 나돌고 있는지도 이럭저럭 반세기가 되었다. 해리 림머 (Harry Rimmer)는 1936년에 처음 출판된 자신의 저서 '과학과 성경의 조화 (Harmoney of Science and Scripture)' 의 마지막 장(章) 전부를 "현대과학과 여호수아의 긴 하루"에 관한 내용을 위하여 할애하였다. 림머는 이 장에서 하나님이 태양의 운행을 멈추게 하였다는 (여호수아 10장) 이야기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기적적인 그 하루에 대해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즉, "그 날의 기록은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라고 과학은 증언할 것이다. 시간이 엄연히 존속하는 이상, 그 날의 기록은 남는다.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증언한 저명한 과학자가 있다. 나는 이름이 알려진 두 사람의 증언을 여기서 인용하고자 한다." (1936, p280).

그리고 림마 박사는 영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볼 경(Sir Edwin Ball)과 예일 대학교의 토튼(C.A. Totten) 교수를 소개했다. 그는 "태양계의 시간 체계에서 24 시간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하였다는 볼 경의 말을 믿는다고 했다. 림마는 이어서 이렇게 묻는다.

"그 24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 이 불가사의한 시간이 사라진 원인은 무엇일까? 또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을까?" (p 280). 바로 다음 단락에서 그는,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확실히 있다. 현직에 있는 과학자가 증언한 내용이다. 예일 대학교의 토튼 교수는 1890에 출판한 책에서 이 사건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p 281)라는 말을 인용한 다음, 림마는 토튼의 책의 "요약"이라고 하며 제시한 글에서, 토튼이 "사라진" 날을 찾아낸 정확한 경로라는 것을 제시하였다. 림마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여호수아가 전투를 벌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정확한 달과 날이라고 하면서, 그 날을 7월 22일 화요일이라고 추정하였다. (p 266)!

여호수아의 잃어버린 하루를 찾아냈다는 이야기는 과연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우선 이 해묵은 이야기부터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그러면 새로운 이야기가 옛날의 이야기를 분명히 각색해 내놓은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림마 박사는 볼 경과 토튼 교수의 책을 인용한다는 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따옴표로 표시한 인용 구절은 하나도 없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림마 박사는 1890년에 토튼 교수가 저술하였다는 책의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 림마 박사는 자기 책의 한 장(章) 전체를 할애할 정도로 중요하게 다룬 주제임을 고려해보면, 이 것은 어딘가 좀 이상하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셋째로, 림마 박사는 볼 경과 토튼 교수의 책이라고 하면서, 그 책들에 관한 서지학적 정보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 학자들의 책들이 림마 박사의 논거일진대, 당연히 신빙성을 확실히 해야할 필요가 있을 텐데, 그의 모호한 주장이 여기서도 또 다시 비상식적이 아닐 수 없다.

넷째로, 볼 경이나 토튼 교수의 주장을 앞세운 림마 박사의 주장은 그 신빙성을 확실히 하려는 노력을 경주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그 한 예로, 버나드 람 (Bernard Ramm)은 The Christian View of Science and Scripture에서 림마의 주장과 토튼의 주장에 대한 림마의 해설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면서, 그들이 제시하였다는 "증거"에 대해 아주 정선(精選)한 어휘로 점잖게 결론을 이렇게 내리고 있다. "나는 이 증거를 확인할 수 없었다..... 쿨프 박사 (Dr. Kulp)는 예일 대학교에서는 토튼의 주장을, 그리고 영국에서는 에드윈 볼 경의 이론을 자세히 조사했으나 그 증거를 확인할 수 없었다." 라고 했다. (1954, pp 109,117)

림마 박사는 이 이야기를 말할 때 그 진실성을 확실히 믿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입증할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문서적 배경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런 이야기들의 발원지를 찾아내기란 떠돌고 있는 경로를 찾아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일단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믿을 만한 인사들과 관련된 사실들에 의해서 "보강되면", 선의의 사람들은 철저한 조사를 해보기도 전에 그것을 진실로 수용하기 쉽다. 일단 수용되고 나면,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옹호하는 데 쓰일 좋은 합리적 방패로 삼으려 한다. 현재 찾아볼 수 있는 관련된 모든 자료를 검토해 본 결과, 볼과 토튼의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이야기를 가지고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앞부분에서 NASA의 이야기에 관한 질문에서도 같은 대답 패턴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여기서도 이 이야기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림마 박사가 말하던 그 이야기가 처음 출판되었을 때, 모두 크게 흥분했었다. 그래서 성경의 진실성을 "간증"하는 과학을 고대해 마지않던 사람들은 무비판적으로 그의 말을 수용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애초의 흥분이 가라앉고 나서, 그 이야기는 곧 잊혀지고, 거들떠보는 이 없는 가운데 역사유물 창고에 처박히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그 상태로 처박혀있지는 않았다. 누군가 (이 순간까지도 그 사람이 누군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이야기를 다시 찾아내어 "먼지를 털고" (틀림없이 오늘날의 사회와 사람들의 마음에 더 호소력을 갖게 하기 위하여) 얼마쯤은 각색하여, (관련 있는 개개인들과 회사들, 그리고 도시들의) 이름을 연관시켜놓고는, 상당부분 의도적으로 일반 대중의 신임이 두터운 유명한 정부기관 (NASA)과 결부시켰다. 그 이야기의 "배경설명"은 언뜻 보기에 완전하리 만치 그럴싸하게 잘 짜여져서 의심하거나 미심쩍어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NASA에서 일하고 있는 과학자들이 우주선의 탄도궤적을 계산하기 위하여,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태양, 달, 그리고 별들의 위치를 추적하고는, 더 나아가 1000년 전의 것도 추적하고 있었다.
정부기관의 정교한 컴퓨터들이 입력된 데이터를 계산하다가, 전혀 예상 밖으로 갑자기 삐걱거리며 작동을 멈췄다. 하지만 달려온 정비기술자들은 아무런 기계적 하자를 찾아낼 수 없었다. 여기서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즉, 컴퓨터들은 하루에 해당하는 시간을 잃어버린 사실을 발견한 것이 알려졌다. 어느 누구도 컴퓨터가 왜 그렇게 멈춰야 했었던가, 또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과학자 팀에 소속했던 어느 과학자가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배웠던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특히 하나님이 하루 동안, 대강 그 정도의 시간 동안, 태양을 멈췄다는 이야기를 기억 속에 떠올렸다. 하나님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믿지 않는 나머지 NASA의 과학자들은 그 따위 "정보"를 가지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 그 자체를 비웃었다. 하지만 그 과학자는 여호수아 10장을 펴들고 성경을 읽었다. 그런 다음 정비기술자들이 컴퓨터의 입력 데이터 안에 여호수아의 잃어버린 하루를 입력하자 컴퓨터는 거의 완벽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컴퓨터가 또 다시 멈췄다. 컴퓨터가 찾아낸 잃어버린 시간은 만 하루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는 다시 이렇게 이어졌다) 컴퓨터가 찾아냈던 잃어버린 시간은 23시간 하고 20분이었다. 다시 말해서 40분이 모자랐었다는 것이다. 그 때, 성경을 참조해보자고 건의하였던 그 과학자는 이 수수께끼를 다시 한번 성경 안에서 찾아보자고 제의했다. 그는 주일학교에서 배웠던 내용 중에 뭔가 다른 내용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었다. 열왕기하 20장에 있는 이야기를 생각했던 것이다.
성경기록에 의하면, 히스기야 (Hezekiah) 왕이, 병이 나을 것이며 장수를 약속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약속의 징표를 요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해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가게 하였다는 이야기다. 해그림자의 10도 후퇴는 정확하게 40분에 해당한다고 그 과학자는 계산했다. 그래서 이 두 사건이 컴퓨터가 필요한 24시간을 채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이 컴퓨터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다 채웠다는 것이다!

위 이야기는 여러 정보통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예컨대,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 있는 커티스 엔진 회사 (Curtis Engine Company)의 사장 해롤드 힐 (Mr. Harold Hill) 씨는 그 정보가 정말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이 사건이 벌어졌다고 알려지고 있는 NASA 시험장이 위치하고 있는 도시 이름도 알고 있었다. 그는 잃어버린 하루를 찾아낸 곳이 메릴랜드의 그린벨트에 있는 NASA 시험장이라고 했다. 그밖에 다른 "사실들"도 알려지고 있으나 지면관계상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겠다. 어떤 설명에 의하면 힐 씨 자신이 어린 시절 주일학교엘 다녔다던 그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사람이 NASA의 컴퓨터가 여호수아의 잃어버린 하루를 찾아내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으리라고 하는 말은 재미있다. 다른 설명들도 없지는 않았는데, 대개 이렇게 이어지는 이야기들이다. 즉, 힐 씨는 NASA에서 그 사건들이 벌어졌을 때 그냥 그 곳에 참석한 것말고는 특별한 것은 없었다는 이야기다. 혼란스럽게도, 어떤 이야기 속에는 힐 씨의 이름을 전혀 거론되지도 않았으며, 또 그가 그 일에 아무런 참견도 한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어보려는 기도는 모두 실패했다. 19870년 4월에 Bible-Science Newsletter 지에 이 이야기가 출판된 이후 수많은 독자들이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 있다는 커티스 엔진 회사의 힐 씨 앞으로 편지를 띄웠다. 그런데 그 편지들은 우체국의 '수취인 불명'이라는 딱지를 달고 죄다 되돌아왔다. Bible-Science Newsletter 1989년 7월호에 실린 기사에 1970년 4월 호의 출판 이후 몇몇 독자들이 마침내 힐 씨로부터 회신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 내용인즉슨, 힐 씨는 자신이 그 이야기를 처음 쓰지 않았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직접 힐 씨와 연결이 된 적이 있다는 어느 독자는, 힐 씨가 자신이 그 이야기를 쓰지 않았음은 물론, 그 정보를 들은 기억조차 없다." (Bartz, 1989, p 12)고 했다.

1989년도 7월판 Bible-Science Newsletter는 이런 기사내용이 실었다. 즉, 볼튼 데이비다이샤 (Bolton Davidheiser) 박사가 메릴랜드 주 그린벨트에 있는 NASA 사무소에 편지를 보내어 이 이야기가 일어났다는 곳이 어딘 지를 물었다고 한다. NASA는 해롤드 힐 씨에 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으며, 또 '잃어버린 하루' 이야기를 전혀 확증할 수 없다는 회신을 보냈다고 했다.

그 NASA의 편지 결론 단락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비록 우리는 우주선의 궤도를 확정하기 위하여 컴퓨터를 사용하여 행성들의 위치를 계산하지만, 그린벨트의 우리 기관에서 일하는 그 어떤 우주비행사나 과학자도 힐 씨와 관련이 있는 그 "잃어버린 하루" 문제에 개입된 적이 없다."' (p12). 결국 이 이야기의 순수성을 확증하려하였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만 것이다. 어쨌거나 그 이야기의 출처가 의심스럽다. 이야기에서 거론된 사실들은 문제의 실질적인 진실에 부합되지 않는다. 여호수아 10절의 "잃어버린" 하루를 찾는 일에 개입돼 있을 법한 사람들은 NASA에서 있었다는 사건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컴퓨터가 잃어버린 하루를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다" 라고 하는 주장만 해도 믿을만한 사람들은 죄다 컴퓨터가 어떻게 작동하여야 하는가를 알지 못했다.


여기서 도출될 수 있는 단 하나의 결론은 이런 것이 될 것이다. 즉 이 이야기는 허위라는 것이다. 이 결론이 사실일진대 더 이상 이 이야기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상시적인 안목으로 조금만 깊이 조사해보면 전혀 현실적인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이런 이야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상케 할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킬 수 있으며, 지켜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하자. 즉, 하나님의 말씀을 "부러진 검"을 들고 지키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References

1. Bartz, Paul (1989), "Qustions and Answeres", Bible-Science Newsletter, 27(7):12

2. Ramm, Bernard (1954), The Christian View of Science and Scripture (Grand Rapids, MI: Eerdmans).

3. Rimmer, harry (1936), The Harmony of Science and Scripture (Grand Rapids, MI: Eerdmans).



잃어버린 23시간 20분과 40분 다시 찾다

성경의 기록이 전자계산기에 의해 입증된 놀라운 사실이 있다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시에 있는 커티스 기계회사 사장이며 우주계획 고문인 헤롤드힐씨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메릴랜드주의 그린벨트에서 연구하고 있는 우리회사 우주 관계과학자들에게 놀라운 사실을 알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전자계산기 앞에서 지금부터 10만년전까지 소급하여 올라가면서 그 사이의 태양과 달의 괘도 진행을 살폈습니다 인공위성이 가는 궤도상에 어떤일이 일어날찌 모르기 때문에 태양과 달의 궤도를 자세히 알지 못하면 인공위성을 발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태양 및 달과 그 주변의 혹성들의 궤도조사가 끝나야만 우리가 발사 할 인공위성의 궤도를 작성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조사를 하던 중에 갑자기 기계가 정지해 버렸습니다전자계산기의 동작이 정지되고 적신호가 켜졌습니다. 모든 기사들은 긴장되었습니다그것은 전자계산기에 제공한 정보에 이상이 있든지 기계에 이상이 생겼다는 신호였습니다. 과학자들은 곧 기계 기술자들을 불러서 조사를 의뢰하였습니다. 그 결과 기계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이 판명 되었습니다.


우주 과학자들은 전자계산기가 지시하는 적신호의 원인을 다시금 면밀히 조사했습니다. 결국 그 궤도 진행상에 꼭 하루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과학자들에 의해서 판명되었습니다. 하루가 없어진채 궤도가 진행되어도 별 문제거 없다는 사실을 알기는 하였으나 그 하루 즉 24시간이 어디로 가 버렸는지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아무리 계산해 보아도 하루가 모자라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의 머리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습니다.


며칠 후 교회에 다니는 청년이 일어나 여러분 제가 어렸을 때 교회에 다니면서 들은 이야기인데 옛날 여호수아 때에 태양이 하루동안 정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 웃어 넘겼습니다. 그러나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한 노련한 과학자가 자 우리가 이렇게 앉아 있기만 할게 아니라 성경책을 가져다 자세히 조사하여 그 시대의 궤도를 전자계산기로 조사해 봅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성경 여호수아 10장12-14절에서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는 내용을 찾았습니다.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한 이스라엘 민족과 아모리족속들간의 전쟁은 아주 치열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여호수아가 이끄는 군사에게는 매우 불리한 전쟁이었으므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물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 할지어다 라고 외쳤습니다. 정말 여호수아가 기도하고 외친대로 해와 달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거의 하루 동안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할렐루야!


우주 과학자들이 잃어버린 하루를 찾기 위해 전자 계산기를 그 당시로 돌려 여호수아시대의 궤도를 조사한 결과 23시간 20분이라는 계산은 정확한 것이기는 했으나 아직도 40분이라는 시간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바로 그 청년이 다시 말했습니다.내가 기억하기로는 성경 어딘가에 태양이 뒤로 물러 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주 과학자들은 곧 성경에서 열왕기하 20장3-10절의 히스기야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 냈습니다.거기에는 태양의 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 갔다는 내용이 기록 되어 있는데 10도를 시간으로 계산하면 40분에 해당합니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24시간의 행방을 찾아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천년전에 기록 된 성경의 기록을 신화처럼 여겼던 과학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시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참으로 천지창조를 이루시고 그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천국과 지옥을 만드시고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대속의 재물로 삼으시고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 주님을 통해 영생의 소망을 주시며 우리 안에 내재하셔서 우리를 항상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인하여 모든 찬양과 경배를 올려 드립니다. 



난제해설 - 여호수아서 10:12-14 태양 정지 명령의 과학성

본문에는 여호수아가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 할지어다'라고 명함으로써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내려가지 아니한' 이적이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태양을 멈추도록 명한 여호수아의 이러한 말은 극히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성경 비평가들은 지적했다. 즉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이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지구야 멈추어라'라고 말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 여호수아가 과학적 모순의 우를 범한 것이 아님을 살펴볼 수 있다.

1. 행성 운동의 과학적 이치

현대 과학은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으며, 이 운동이 태양의 중력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냈다. 그러므로 지구가 그 궤도 진행을 멈추기 위해서는 먼저 태양의 중력, 곧 인력(引力)이 중단되어야 한다. 즉 태양의 인력이 감소해야 만이 1초에 30만km 달리고 있는 지구의 자전이 감소되어져, 결과적으로 날 혹은 시간이 연장되는 것이다. 한편 당시의 여호수아는 지구의 30만km 저편에 태양이 있으며, 지구 스스로 자전을 하기 때문에 낮과 밤이 생긴다는 등의 정확한 과학적 사실을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승리를 주실 것을 약속하신 말씀만을 믿고(8절) 태양의 멈춤을 기도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말속에는, 성경 비판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오늘날의 과학이 인정하는 질서 체제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2. 과학적인 여호수아의 명령

먼저 여호수아가 명한바 '태양아 멈추어라'는 말은 원어적으로 볼 때 '태양아 일하기를 멈추어라'는 뜻이다. 이는 곧 태양이 멈춰 설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지구에 대한 태양의 인력을 중단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바로 그 때에 태양 인력이 멈추었고, 그래서 지구의 궤도 속도가 줄게 되어 시간이 지연된 것이다. 또한 태양도 지구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에 '태양아‥멈추어라'는 말은 전혀 어폐가 없다. 왜냐하면 태양이 실제로 어느 정도 움직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구에서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태양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여호수아가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라고 기록한 것도 위와 같은 관점에서 지구를 고정시킨 채 태양의 속도를 평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튼 달도 역시 멈추었다는 기록처럼(13절) 실상 그 날에는 전체 태양계가 그 궤도를 멈추어 모든 행성의 동작이 멈추게 되었다.

3. 교훈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여호수아의 긴 날'에 지구와 전체 태양계가 그 궤도에서 23시간 20분 동안(본장 자료노트 '태양의 정지' 참조) 회전을 중단한 사실은 참으로 경이로운 기적이다. 더욱이 긴 낮의 초자연적 현상으로 말미암아 파괴적 우박이 수반되었다(11절). 이에 대해서 성경 자체도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4절). 또한 이는 성경의 증거 외에도 고대 중국의 문헌과 페루의 잉카(Inca), 맥시코의 아즈텍(Aztecs) 및 고대 바벨론(Babilon)과 페르시아(Pelsia) 등의 문헌에도 분명히 기록되어져 있다. 이처럼 이 사건은 과학적으로도 모순이 없고, 역사적으로도 틀림없는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한편 본문과 같은 기적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느냐고 하면서 믿지 않으려는 자에게는 아무리 증거를 제시한다 해도 결코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과학적인 증명이 없다 해도 이 사건이 분명히 일어났음을 충분히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천지를 만드시고 회전 운동을 허락하신 창조주께서 원하시면 이를 멈추게도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창1:1). 또한 자연 현상을 과학적으로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어찌 그의 말씀이 비과학적일 수 있겠는가! 

또한 성경은 과학으로만 모두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과학으로만 세상이 만들어지고, 사람이 창조되고, 역사가 흘러왔다면 과학 자체가 신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일들을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처리하시지만, 때로는 신적 능력으로 기적을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의 신적 기적을 믿지 못한다면 성경은 맨 처음부터 믿을 수 없는 말로 기록되었으며, 그러한 기적을 행하실 수 없다면 완전한 신앙의 대상으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 - 여호수아서 10:12-14 태양의 정지

기브온과의 전투가 벌어진 날에 여호수아가 태양이 멈추도록 기도함으로써 하루가 연장되었다는 본장의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과 논란을 가져왔다. 왜냐하면 만약에 태양이 실제로 정지했다면 물리적 법칙에 따라 지구 전체와 그 위의 모든 생물에 상상할 수 없는 파국을 가져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비평가들은 '여호수아의 긴 날'을 한낱 전설로 인식하고자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수천 년이 지난 현대의 과학은 다음과 같이 성경의 기록과 완전 합치되는 수치를 계산해 냄으로써 성경 기록의 사실성을 확증하고 있다.

1. 지구 공전과정에서 없어진 하루

우주 개발 관계 과학자들인 해롤드 힐(Harold Hill)의 연구팀은 인공위성의 궤도를 작성하기 위하여. 전자계산기로 지금부터 10만 년 전까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 사이의 태양과 달의 궤도 진행을 살피던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 궤도 진행상에 '꼭 하루가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하루, 즉 24시간이 어디로 가버렸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아무리 계산을 해보아도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옛날 여호수아 때에 태양이 정지했다는 성경의 기록을 바탕으로 잃어버린 하루를 찾기 위해 전자계산기를 그 당시로 돌려 여호수아 시대의 궤도를 조사한 결과 정확히 23시간 20분 동안 궤도가 정지했었던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이는 없어진 하루와 완전히 일치하는 수치가 아니었다. 아직도 40분의 행방이 묘연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그들은 곧 성경에서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태양의 그림자를 10도 뒤로 물러가게 하신 사실을 찾아냈다(왕하20:8-17). 그런데 놀랍게도 그 10도는 시간으로 계산할 때 정확히 40분에 해당된다. 이로써 그들은 여호수아 때의 23시간 20분과 합하여 정확히 궤도 진행상에 없어진 하루의 원인을 알게 된 것이다.

2. 없어진 하루의 교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의 기록을 전설로만 여기던 과학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과학의 계산을 통해 태양의 궤도 진행상에 24시간이 비어있음을 보이셨고, 또 그 근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친히 증거하신 것이다. 아무튼 과학자들은 성경의 기록 가운데 잃어버린 하루를 발견함으로써 주권자 되신 하나님 앞에 경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여호수아의 긴 날'이 과학적으로 규명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는 몇 천 년이 지난 후대에 와서도 전혀 오류가 없는 과학적 사실로써 규명되고 있다. 우리 창조주 하나님은 실로 능치 못함이 없는 것이다(사4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