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ζωή, ψυχή, βίος)(루아흐, 하이, 네페쉬)



● ‘루아흐’<רוח> : 문자적 의미 - 바람, 숨, 입김 등

관념적 의미 – 생명, 영, 영혼, 혼, 마음, 정신 등

‘루아흐 하이임’<רוח חיים> : 살아 있는 숨, 살아 있는 영(생령) 등

참고: ‘프뉴마 조에스’<πνεῦμα ζωῆς> : 생명의 영. 히브리 성서 창세기 6: 17에 대한 고대 헬라어 성서(70인역) 번역

‘루하흐 페’<רוח פה> : 입김

‘루아흐 엘로힘’<רוח אלהים> : 하나님의 영

‘루아흐 예흐바’<רוח יהוה>: 야훼의 영

‘루아흐 하코데쉬’<רוח הקדש> : 거룩한 영(성령)

‘루아흐 얌’<רוח ים> : 바닷바람 또는 서풍

‘루아흐 미드바르’<רוח מדבר> : 사막 바람

● ‘하이’<חי> : 산, 생명, 삶, 살아있는, 생명 있는 등

‘하이임’<חיים 복수> : 살아있 는, 생명 있는 등

“하야”<חיה 동사>: 살아 있다

‘엘로임 하이’<אלהימ חי> : 살아계신 하나님

‘하이 예흐바’<חי־יהוה> : 야훼께서 살아 계신다.

‘하이 아니’<חי־אני> : 나의 삶 또는 나의 생명

‘오르 하이임’<אור חיים> : 생명의 빛 또는 삶의 빛

‘하예 올람’<חיי עולם> : 영원한 생명(다니엘서 12:2)

참고: 유대인 전통에서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개념이 없다. 다니엘서의 ‘영원한 생명’은 바벨론 포로 후기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네페쉬’<נפש> : 목구멍, 목숨, 사람, 생명, 생명체, 호흡, 입김, 혼 등등 동사로는 ‘숨을 쉬다’

‘네페쉬 하야’<נפש חיה> : 산 생명, 생명체

‘마레 네페쉬’<מרי נפש> : 분노한 사람들

‘나솨마’<נשמה> : 숨, 생명, 사람, 정신, 혼, 영혼 등

‘네체흐’<נצח> : 광채, 영광, 영예, 항상, 존속, 지속, 영원, 무궁 등

‘올람’<עולם> : 옛날, 영원 등

‘예메 올람’<ימי עולם> : 옛날 옛적

‘암 올람’<עמ עולם> : 고대 민족

‘셈 올람’<שם עולם> : 영원한 이름

‘아하바트 올람’<אהבת עול> : 영원한 사랑

‘아드 하올람’<עד־העולם> : 영원토록

‘도르’<דור> : 세대, 일생

‘도르 바도르’<דר ודר> : 대대로, 세세토록, 영원히

신약성서의 생명, 영, 영혼, 영원한 생명에 관련한 용어들

‘프뉴마’<πνεῦμα>: 문자적 의미 - 바람, 숨, 입김 등

관념적 의미 – 생명, 영, 영혼, 혼, 마음, 정신 등

‘프뉴마 조에스’<πνεῦμα ζωῆς> : 생명의 영

‘퓨뉴마토스 하기우’<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 : 거룩한 영, 성령

‘조에’<ζωή> : 생명, 살아 있는

‘프쉬케 조에’<ψυχὴ ζωής>: 살아있는 것들, 생명체, 생물

‘조엔 아이오니온’<ζωὴν αἰώνιον> : 영원한 생명

‘프쉬케’<ψυχή> : 숨, 목구멍(목숨), 생명, 사람, 마음, 영혼, 혼

‘사륵크스<σάρξ> : 살, 육체, 몸, 인간

‘파라크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 중보자(仲保者) -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화해를

시키는 이(예수그리도), 대언자 또는 위로자. 이 용어는 요한복음에만 나타나 있음 – 그래서 일부 신흥종교집단이 교주 신격화에 이 용어를 이용하고 있음.

* 보혜사(保惠師) - 공동번역성서는 ‘협조자’, 가톨릭성서는 ‘보호자’, 외국성서들에서는 ‘위로자’, ‘상담자’, ‘돕는 자’ 등 여러 가지로 번역하고 있음.

* 요한복음은 ‘파라크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에 대하여 ‘토 프뉴마 테스 알레테이아스’<τὸ πνεῦμα τῆς ἀληθείας - 진리의 영>이라고 설명한다. 이로써 ‘파라크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는 어떤 특정하고 특별한 영이 아니라, 성령의 여러 가지 역할 중 하나를 드러내는 용어이다.

* 이와 관련하여 ‘파라크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는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 = παρά전치사-곁으로 + καλέω부르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한다. 진리의 영이 사람을 불러서 곁으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설득하고 권고한다는 뜻이다. 또한 진리의 영이 사람을 곁으로 불러서 함께 하나님께 간청하고 탄원하고 요청한다는 뜻이다.

참고: 일부 신흥종교집단이 이단 이든 삼단이든 관계없이 성서를 왜곡하고 그를 통하여 교주를 신격화하는 무지와 맹신을 염려한다. 혹시라도 주변에 그런 사람들을 이해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명(ζωή, ψυχή, βίος)

신약성서에는 "생명"으로 번역할 수 있는 헬라어가 셋 나온다.
프쉬케(ψυχή), 비오스(βίος), 조에(ζωή)가 그 셋이다. 
이 셋은 넓게 말해서 "생명"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하나하나는 각각의 독특한 뜻을 지니고 있다. 프쉬케는 생물학적 목숨이다.
의학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육체적 목숨을 말한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마6:25)라고 말씀하시거나,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요10:11),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요10:15)라고 말씀하셨을 때,
"목숨"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쉬케이다. 비오스는 영어 바이오(bio)의 기원이 된 헬라어이다.
그러나 영어에서 바이오가 "생물" "생명" "생리"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과는 달리
헬라어 비오스는 생명이라기보다는 "생활"이나 "살림"에 가깝다.
요한1서는 우리가 조심해야 할 유혹으로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 2:16)을 꼽는다.
여기서 "이생"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새번역은 "세상 살림"으로 번역하여 이해를 돕는다.
헬라어로는 비오스이다.
살림살이 혹은 생활 수준으로 번역할 수 있다.
탕자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나누어 준 것도 비오스다(눅15:12).
"살림"을 미리 나누어 준 것이다. 조에는 프쉬케나 비오스와는 다른 생명이다.
프쉬케와 비오스는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생물학적 목숨이나 생활의 수준과 방식은 상당 부분 부모님이 내게 물려주신 것이다.
그러나 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숨겨두신 생명이다.
씨앗과 같다.
예수께서는 이 씨앗을 피우고 열매 맺어 풍성하게 사려고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10:10) 예수께서는 생명의 빵으로 우리에게 오셨다(요6:35).
ὁ ἄρτος τῆς ζωῆς!(호 아르토스 테스 조에스).
생명을 살리는 빵,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빵으로 오셨다는 말씀이다.
조에 생명은 예수를 만날 때 살아나 역동 친다.
이 생명이 있으면 비오스가 어려운 형편이라 할지라도 능히 이겨낼 수 있다.
그것이 조에의 힘이다.
이것이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전하는 바이다.
아래 성경말씀 7절의 "보물"을 "생명"(조에)로 바꾸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고린도후서 4:7-10
우리는 이 보물을(생명. 조에)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비오스 수준의 신앙생활이 있다.
기복신앙을 제외하고라도, 삶의 질을 높여주려는 일체의 계몽적 신앙 프로그램이 비오스를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 교실, 부부학교, 자녀교육교실 등등 말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전하는 신앙의 본질은 비오스에 있지 않고 조에에 있다.
조에를 살리고 풍성케 하는 신앙생활 어떤 모습일까 묵상해 봅시다.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 I.  생명.
  • II.  [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 1. [반] θάνατος, 롬8:38, 고전3:22, 빌1:20, [때]
      • a.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눅16:25, 행8:33, 약4:14.
      • b. ἐν τῇ ζ. ταύτῃ: 이생에, 고전15:19.
      • c. τέλος ζωῆς: 생의 마지막, 히7:3.
      • d. ζωὴ κ. πνοή: 생명과 숨, 행17:25.
      • e. πνεῦμα ζωῆς: 생기, 계11:11.
      • f. ψυχὴ ζωῆς; 살아있는 것, 계16:3. ㉠ [하늘의 몸으로 옷 입은 사람에 대하여] 고후5:4.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하여] 롬5:10, 고후4:10.
    • 2. 생의 도구, 생계.
  • III.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초자연적인 생명에 대하여]
    • 1. 하나님과 그리스도.
      • a.  하나님에 대하여] 요5:26, 12:50, 요일5:20.
      • b. [그리스도에 대하여] 요1:4, 5:26, 행3:15등, 요일5:11.
    • 2.
      • a.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ἐν καινότητι ζωῆς περιπατεῖν: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 롬6:4. ㉡ ἀπηλλοτριωμένοι τ. ζωῆς τ. θεοῦ: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 엡4:18. ㉢ ἡ ζωὴ τ. ἀνθρώπων [사랑의 생명, 구원과 영광의 생명에 대하여] 요6:68, 행5:20, 고후4:12, 빌2:16, 딤후1:1,10등.
      • b. [종말의 축복된 시기에 있을 생명에 대하여] ㉠ ἐν τῷ αἰῶνι τῷ ἐρχομένῳ ζ. αἰ: 내세에서의 영생, 마19:29등, 막10:30, 눅18:30. ㉡ ζ. ἐκ νεκρῶν: 죽은 상태로부터 벗 어난 사람의 생명, 롬11:15, 갈6:8, 딤전1:16등.
  • 관련 성경
    생명(마7:14), 이 세상의 삶(고전15:19), 생 기(계11:11).


ψ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 5590

1. 영혼.  2. 생명력.  3. 혼
발음 [ psüchē ]
어원 / 5594에서 유래
  • I.  영혼, 목숨, 생명:
    • 1.  [문자적으로]
      • a. [땅에서의 외면적이거나 육체적인 생에 대해서] 목숨, 생명력, 흙, 눅 12:20, 행2:27, 20:10, 계6:9, 20:4. [주] 세상의 목숨, 지상의 목숨, 마2:20, 막10:45, 빌2:30, 계12:11.
      • b. [사람의 내적 생활의 중심으로서의] 영혼, 혼, 마26:38, 막14:34, 눅12:19, 요12:27, 계18:14.
      • c. [지상의 생을 초월한 생의 중심이 되는] 영, 영혼, 마16:26, 막8:37, 고후1:23, 12:15, 약1:21, 벧전1:9.
    • 2. [환유적으로] 목숨을 가진 것, 생물, 생명체, 고전15:45, 계16:3.
  • 관련 성경
    목숨(마2:20, 막8:35, 롬11:3), 영혼(마10: 28, 눅12:20, 고후12:15), 마음(마11:29, 막14: 34, 행14:22), 생명(막3:4, 요12:25, 행20:10), 힘(막12:33), 뜻(행4:32), 인(행27:37), 영(고전15:45), 혼(살전5:23, 히4:12), 명(벧전3:20), 심령(벧후2:8), 사람(행7:14, 롬

βίος, ου, ὁ   

1. 생명.   2. 지상의 생활. 3. 삶의 유지 수단
발음 [ biŏs ]
  • 1. [기본형]: 생명, 삶.
    • a. [기능과 기간에 있어서] 지상의 생활, 눅8:14, 딤전2:2, 벧전4:3.
    • b. 삶의 유지 수단, 생활방편, 재산, 막12:44, 눅8:43, 15:12,30, 21:4, 요일2:16, 3:17.
  • 관련 성경
    생활비(막12:44, 눅21:4), 이생(눅8:14, 요일2:16), 생활(눅8:43, 딤전2:2, 벧전4:3), 살림(눅15:12,30), 재물(요일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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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life, 生命)이란 단어가 한국어, 영어, 일어로는 모두 하나의 글자로 쓰지만

헬라어로는 그 대상에 따라

*조에 ZOE : 하나님의 생명

*푸쉬케 PSYCHE : 혼의 생명, 사람이나 동물이 가진 생명

*비오스 BIOS : 육의 생명, 식물의 생명

조에 ZOE(ζωή) - 하나님의 생명

푸쉬케 PSYCHE (ψυχή) - 혼의 생명, 사람이나 동물이 가진 생명

비오스 BIOS (βίος) - 육의 생명, 식물의 생명



생명(조에)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조에(Homer 이래)는 '생명(life)'을 의미한다.

(a) 조에는 헬라에서 유기적 존재들, 동물, 사람, 식물의 물리적 생명력을 의미한다. 생명은 물건이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을 특징 지우는 생명성(vitality)이다.
그러므로 헬라인들에 있어서 생명은 자연과학의 범주에 속하며 기계적인 활동과 구별되는 자아 활동의 힘으로 특징 지워진다(플라톤, Leg. 10, 895c ff; phaedr. 245c ff; 아리스토텔레스 An. 2, 2p 422b, 16f.; p413a, 22ff.). 생명의 원인(the cause of life)은 프쉬케(yuchv, 5590: 영혼 Soul)에 있다고 간주한다. 아폴로니아의 디오게네스(Diogenes of Apollonia)는 프쉬케를 하나의 대기 같은 실체(an ethereal substance:아에르, ajhvr, 109)로 생각한 반면에 크세노파네스(Xenophanes)는 프쉬케를 약동하는 호흡(a fluttering breath: 프뉴마, pneu'ma, 4151)으로 생각하였다(H. Diels, Die Fragmente der Vorsokratiker, Ⅰ, 425, 42). 헬라어 사고에서 프쉬케(yuchv, 5590)와 조에(zwhv, 2222)가 매우 밀접하게 함께 속한 것과 똑같이 프쉬케(yuchv, 5590)와 소마(sw'ma, 4983: 몸, Body)도 그러하다(Plato, phaerd. 105c ff; Aristotle, An. 2, Ⅰ p412b, 7 ff.). 자연적 생명은 영혼과 육체라는 성분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각 개개인뿐만 아니라 전 우주까지도 살아있는 유기체(조온 엠프쉬콘, 플라톤, Tim. 30b) 또는 영혼을 갖고 있는 세계(코스모스 엠프쉬코스)로 생각되었다. 신들까지도 인간의 육체와 영혼에 유사한 두 부분으로 된 본성을 갖고 있는 생물(조아)로 상상되었다(아리스토텔레스, Metaph. 11, 7p 1072b, 28ff.). 따라서 플라톤은 드네타(thn?ta, 죽을 운명의 mortal 곧, 인간)인 생물과 아다나타(athanata: 불멸의 immortal 즉 신들 gods)사이를 구별한다(Tim. 38c ff.).

헬라인들은 세 번째의 성분, 곧 이성 Reason, 정신 mind, 이해력 understanding(nou'", 3563)이 인간의 생명을 특징 지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마(sw'ma, 4983)와 또한 다소간 프쉬케(yuchv, 5590)가 자연적 생명을 구성하는 반면 누스(nou'", 3563)는 외부로부터 인간 생명으로 들어가 이 생명을 자연적 생명, 즉 동물의 생명 이상으로 향상시키고 여러 가지 양자택일을 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의 유형을 생산해내는 신적 요소인 것이다.

(b) 만약 신의 조에가 누스와 관련되어 있다면, 이것은 조에가 자연의 생명력을 포함하면서동시에 초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최고 가능성은 또한 누스이며, 누스는 육체와 분리될 수는 없지만, 육체와 구별함으로써만이 그 목적을 성취할수 있다. 따라서, 참된 인간의 조에는 사람이 그것을 통해 몸과 혼을 결합함으로 조온이 되는 조에가 아니다. 프쉬케는 물질에 있어서 생명력의 원리이지만, 이것은 또한 물질과 대조되는 것인 인간의 자아(selfhood)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와마찬가지로 조에는 자연의 현상으로서의 생명이지만 또한 특별히 인간의 생명이기도 하다. 이 인간의 생명의 가능성은 유기적인 본질에서 성취되지 않으며 이것은 종(species)의 영속화를 넘어선 의미를 지닌다. 인간의 생명은 그 자체의 운명을 가지며, 행복과 불행을 알고, 그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은 그것에 고유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c) 스토아학파에 있어서 카타 휘신 젠(자연에 따라 살다)이라는 표어는 큰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본능적인 삶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고결한(카타아레텐) 생활, 또는 이성에 따라(카타 로곤) 사는 생활, 그리고 그렇지 않으면 "죽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실존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생활을 암시하는 것이다(유 젠: 잘 살다 to live well; 참조: Epictetus, Dissertationes, 1, 9, 19:2, 9, 7 f.; 3, 1, 25f.; 4, 11, 3). 비오스 카타 퓌신(자연을 따르는 생활)이라는 구절도 이와 같은 의미로 발견된다. 고대의 헬라인들이 자신들의 이상을 폴리스의 공적 업무에의 능동적인 참여로 보았던 반면에 헬레니즘 시대에 있어서 스토아학파는 세상의 외적인 소란으로부터의 완전한 도피와 자신의 내적 생활의 수양을 이상으로 삼았다.

(d) 스토아학파가 외적 생명과 내적 생명 사이를 구별함에 반하여 신플라톤주의는 이 세상의 생명과 내세의 생명 사이를 구별 지었다. 플로티누스(Plotinus)에 따르면 사람이 참으로 자연적인 생명을 소유하기는 했으나 완전하고(텔레이아), 참된(알레디네) 생명은 오직 유일자(the One; 헨[hen])의 유일한 신적 영역에서만 발견되어지는 것이다. 이 참된 생명으로 가는 길은 육체의 극기와 모든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깨끗게 되는 정화(카다르시스[katharsis])를 거쳐 통찰 또는 직관(데아[thea])의 순간에 도달하며, 이는 곧 인간이 참 생명을 얻고 그것과 일체가 될 때인 것이다(참조: Plotinus, Enneads 1, 4, 3; 6, 7, 31 등). 다른 말로 이야기해서 생명은 위로 올라가는 상승(上昇)으로 간주되었다..

(e) 대조적으로 영지주의자들은 생명을 하강으로 보았다. 종종 포스(fw'", 5457: 빛 light)와 연관되는 조에(예를 들어 Corp. Herm. 1, 12)는 본질적으로 신적인 것이며 신적 세계의 유형(有形)의 유동체이며 분명히 물질적 완전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파괴할 수 없는 것이며 생명을 주는 능력을 소유한 것, 곧 한마디로 말해서 불멸체(아다나시아: ajqanasiva, 110; Corp. Herm. 1, 28)인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이러한 순수 신적 생명은 물질과 혼합되어 육체 안에 갇혀 있다. 이 생명은 그 완전함으로 나타나지 않고 단지 생명의 작고 흩어지는 불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사람은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무아경의 환상(그노시스; →gnw'si", 1108, 지식 Knowledge)을 향유하기 위하여, 즉 생명의 내적 불꽃과 신적 세계의 초자연적 생명 사이에 존재하는 조화에 도달하기 위하여 육체라는 감옥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Corp. Herm. 1, 6). 이 참 생명은 이 땅에서는 무아경 ecstasy의 순간에서만 얻게 되는 것이다. 이 참 생명의 완전한 향유는 미래를 위하여예비되어야 하는 것이니 곧 현재 물질 속에 흩어져 있는 생명과 빛의 모든 입자들이 신적 세계에서 재결합하는 때이다(Corp. Herm. 12, 15:14, 10 등등).
그리하여 헬라 철학사에서 이 사상의 영역 내에는 두 가지 경향이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참 생명이 점진적으로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사건들과 분리되어 초자연적인 신적 세계로 옮겨간다는 것이며 둘째로 생명은 점점 실체적인, 즉 "과학적인" scientific 어떤 것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인간의 참 생명은 역사적 사건들의 연속에서보다는 오히려 역사 history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무아경의 환상의 순간들에 그 자체를 나타낸다.

2. 70인역본의 용법

조에는 70인역본에서 약 260회 나오며, 거의 대부분 히브리어 하이('살아있는' 것)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조에는 무엇보다도 생명의 길이나 질병, 죽음과 구별되는 생명력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때리시고 치료하시는 생명과 역사의 주인이시다. 후에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참조: 마카베오사서 18:18). 고대의 비문들은 지상의 생명에 대해언급을 한다.

(a)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인들은 생명을 자연적이고 생생한 것이며, 이 세상에 속한 어떤 것으로 간주하였다. 생명을 육체와, 영혼과 이성으로 나누는 헬라 사고는 그들에게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었다. 히브리어에서 네페쉬(혼, 예를 들어 수 10:28, 한글개역에는 "사람"으로 번역됨), 또는 바사르(육, 예를 들어 창 6:13)가 '하임'에 대신하여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단어가 나올 때에는 분석적인 헬라 사고의예로서가 아니라 통합적인 동양적 접근의 예로서이다. 동양적 접근에서 부분은 전체를 대표하며 여기에서 인간 생명 전체가 포함되나 주어진 관점에서 관찰되는 것이다. 생명이 → 피 Blood라고 말하는 구절들에서(레 1:14, 70인 역본, 헤...프쉬케 파세스 사르코 하이마 아우투 에스틴; 참조: 레 17:11; 창 9:4; 신 12:23), 이것은 과학적인 말로보다는 고대 동양적 의식의 배경에서 이루어진 가정(assumption)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출 12장에 나오는 유월절 의식을 참조하라). 그 목적은, 인간이 좌우할 수 있는 생명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생명이란 인간이 처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함인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은 생명을 자연적, 또는 과학적 현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주로 존속 기간, 즉 생명의 주인이신 여호와에 의해 사람에게 부여된 살아있는 날들로 생각하였다(창 25:7; 창 47:28; 신 32:39; → bios 구약성경). 장수는 순종에 대하여 약속된 신적 →(축)복 Blessing의 특별한 증거로 간주되었다(창 15:15; 창 25:8; 신 5:16; 신 30:19; 잠 3:1이하; 참조: 왕하 20:1이하.). 반면에 죽음의 권세는 질병, 증오, 또는 고독이라는 형태로 인간 생명을 침해한다(시 18:5이하; 시 33:19; 시 56:13; 시 116:8; → 죽음 Death 구약성경). 일반적으로 동양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이스라엘인들은 초연(무관심)하고 관조적인(데오레티코스; 참조: 비오스, 고전 헬라어 문헌) 생명에 대한 헬라적 이상에 대해 생소하였다. 오히려 이스라엘인들의 이상은 능동적인 참여의 생활이었고 → 굶주림 Hunger, 목마름(예를 들어 삿 15:18이하), → 증오 Hatred와 → 사랑 Love(예를 들어 창 24:27), → 욕망 Desires과 육욕(예를 들어 삼상 1장; 삼하 13장)에 의해 표현되는 생명이었다. 일반적인 동양인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도 생명의 순수한 활력과 구체성과 다양성을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이었다(왕상 3:11이하; 잠 3:16; 욥 2:4). 곧 생명은 건강, 복지, 성공의 동의어였다(말 2:5; 잠 2:19; 시 56:13; 전 9:9). 그러나 생명의 본질적인 특색은 성전에 출석이었다. 이곳에서 예배자들은 생명의 창조자이신 살아계신 여호와와 찬송가운데 교제 관계에 들어갔으며 또한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여호와를 바라보는 특권을 때때로 받기까지 하였던 것이다(출 33:18이하; 시 27:4; 시 65:5; 시 84:5; 시 142:7; 아래의 구약성경 5를 참조). 오직 극도의 절망 중에 있을 때 견딜 수 없게 된 생명에 종말을 내려줄 죽음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욥 20:14이하; 욥 3:11이하; 토빗 3:10).

(b) 이스라엘인들이면 누구나 다 여호와께서생명의 창시자로서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렘 17:13; 시 36:9; 시 139:13이하). 야훼문서기자(Yahwist)의, 생명의 기원에 관한 고찰은, 이 문제에 대한 저자특유의 몇 가지 진술을 담고 있는데, 여기를 제외하면 구약 중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곳은 없다. 창 2:7에 의하면 여호와께서는 땅의 흙으로 사람을 형성하시고 생명 없는 그 육체에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 넣으시자 그는 살아있는 존재(네페쉬 하이야)가 되었다. 이곳의 차이점은 70인역본의 프쉬케 조사(살아있는 혼, 한글개역 "성령")가 암시하는 바와 같은 육체와 영혼 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 몸 Body)와 생명 사이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적, 감정적, 지적 생명 전체는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의 숨결을 회수하신다면 인간은 힘없는 흙이 되어버리는 것이다(시 104:29이하; 욥 34:14이하; 참조: 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Ⅰ, 1962, 149; Genesis, 19632, 71-83).
인간에게 있어서 공통적인 시련과 환난들, 곧 수고와 실패, 수치와 두려움, 해산의 고통들은 인간의 태고에 있었던 죄에 빠진 타락에 의해 기인된 것이라고 야훼문서기자는 말하고 있다(창 3장). 야훼문서기자가 신적 형벌로 생각한 바는 죽음이라기 보다는(바벨론 포로 이전에 죽음은 인간적 상황의 주어진 요소들 중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참조: 창 2:17; 창 3:19) 오히려 수명의 단축(창 6:3)이며 또한 특별하게는 생활의 여러 가지 시련인 것이다. 이것들은 모든 인간적 실존을 망쳐놓은 불화로서 생명의 최초의 조화는 깨어져 버렸던 것이다(참조: von Rad, Genesis, 83-99).

(c) 특별히 생명에 대한 이스라엘의 견해는 신명기에서 가정 명확하게 표현된다. → 언약 Covenant의 갱신을 기념하는 → 절기 Feast에서 예배의 공동체는 생사 간의 선택을 수반한 하나님의 말씀과 직면하는 것이다(신 30:1-20). 순종하는 자들은 축복과 번영과 생명을 약속 받는 반면에 불순종하는 자들은 저주와 재난과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신 30:15; 신 30:19). 하나님의 말씀의 살아있는 능력은 인간의 육체적 존재에까지 이르른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신명기는 참 생명은 마술적 의식과 형식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지킴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가장 많이 주장하는 책이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허사가 아니라 너희의 생명"(신 32:47; 참조: 레 18:5)이기 때문이다.

(d) 동일한 식으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로 돌이킬 것을 요구한다. 곧 이것이 절박한재난으로 위협받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생존 기회임을 역설하는 것이다(암 5:4; 암 5:14). 이사야는 백성들 중에 사망과의 언약 관계에 들어간 조롱자들이 있음에 대해 애통한다(사 28:15). 예레미야는 생명의 원천을 버린 믿음 없는 이스라엘 앞에 다시 한번 생사의 길을 제시한다(렘 21:8; 렘 2:13; 렘 17:13). 에스겔은 의인은 살 것이며 불경건한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계속하여 강조한다(겔 3:18이하; 겔 14:20; 겔 18:4; 겔 18:9; 겔 18:13; 겔 18:17; 겔 18:20이하; 겔 33:11; 겔 37:5). 이곳에서 자연적 생명의 은사는 → 언약 Covenant의 필수불가결의 일부분이 되며, 이 언약에 대한 순종은 번영과 축복을 뜻하는 반면 위반자는 자신의 생존권을 박탈당한다. 에스겔의 환상 기사들은 종종 '루아흐 하하이야'(70인역본, 프뉴마 조에스)라는 구절을 담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적이며 생명을 주시는 권능을 뜻하는 의역적 표현(Paraphrase)이다(겔 1:20이하; 겔 10:17; 겔 37:5; 겔 37:10).
예레미야의 두 길의 구별은 지혜문학에서 사용된다. 지혜문학에서 → 지혜(Wisdom)는 사람들을 생명의 좁은 길을따라 인도하겠다고 제의한다. 반면에 → 어리석은 Folly 자의 길은 사망에 이른다(잠 2:18이하; 잠 3:2; 잠 3:18; 잠 4:4; 잠 4:10; 잠 4:22; 잠 5:6; 잠 6:23; 잠 8:35; 잠 9:11; 잠 9:18 등).

(e) 시편에서 여호와께서는 생명을 주시고 → 죽음 Death으로부터 건지시는 분으로 묘사된다(시 16:11; 시 27:1; 시 31:4이하 등). 그러나 시간의 경과에 따라 경건한 사람들은 장수와 번영에 대한 자신들의 기대가 매일 매일의 경험에 의해 완전히 모순된다는 것을 더욱더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후기 시편들에서 생명에 대한 이 전통적 견해는 상대적인 것이 되며 참 생명은 여호와의 교제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시 63:3). 생명은 이제 영성(spirituality)과 생명 신비주의(life-mysticism)의 관점에서 은유적으로 간주된다(G. von Rad, TheProblem of the Hexateuch and Other Essays, 1966, 258f.). 생명-신비주의는 여호와와 살아있는 교제 속에서 피난처를 구하고 만족을 찾는다(시 16:5; 시 16:9이하; 시 16:23; 시 36:8이하). 시 73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여호와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확신, 그리고 이로 말미암는 안도감은 예배자에게 죽음 저편에 대한 소망을 준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6).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길들을 정당화할 필요성에 직면하여, 또한 여호와의 언약적 약속들에 대한 신실함을 확신할 때, 구약의 신자는 무덤 저편의 더 나은 것들에 대한 소망으로 인도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즉 생명에 대한 그의 견해는 종말론적이 되는 것이다. "마술이나 신화와는 완전히 다르게, 단지 하나님과의, 부인할 수 없는 교제에 대한 확실성에근거한 확신이 성장했다"(G. von Rad, op. cit. 264; 참조. 시 49:16; 욥 19:25이하; → 죽음 Death, art. thanatos, 구약성경 2(e)).
지금까지는 개개인의 시편 기자들에 의해 점유되었던 내생에 대한 소망이 이제 묵시 가운데는 온 민족에 의해 소유되는 미래의 부활에 대한 기대가 되었다(사 29:19; 단 12:2; 참조: SB Ⅰ, 885f.; D. S. Russell, The Method and Massage of Jewish Apocaliptic 200 B.C.-A.D. -100, 1964, 353-90).

70인역본은 종종 헬라어'조에'의 관점에서 생명에 대한 구약적 견해를 재해석한다(참조: 70인역본 신 32:39; 시 55:14[시 56:13]; 시 118[119]; 삼 16:15; 욥 19:25; 욥 33:30).
후기 유대주의는 대부분 생명에 대한 구약적 견해를 받아들였다(Meg. 27b; Tann. 20b; Ber. 55a; 참조. SB Ⅳ 267, 275, 629). 그러나 헬레니즘의 영향하에서 참 생명은 점점 영생(조에 아이오니오스), 곧 끝 없는 생명이라는 은사로 나타났다(마카베오 사서 7:19; 15:3; 16:25; 17:12; 18:19 등) 따라서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와 같이 영생은 조에(유다의 유훈 25:1), 또는 '젠'(솔로몬의 시편 15:15)으로 단순하게 언급될 수 있었다. 마카베오시대 이후부터 내세에 대한 신앙 곧 → 부활 Resurrection과 영생은 유대 신학자들 중에 널리 퍼졌다(참조, SB Ⅲ 481 f.). 영지주의에 나오는 바와 같이 후기 유대주의에서도 조에는 종종 포스(빛) 및 그노시스(지식)와 관련하여 나온다(참조, 호 10:12, 70인역본).
헬레니즘 유대교에서 죽은 자의 → 부활 Resurrection에 대한 신앙은 → 영혼 Soul의 불멸성에 대한 교리로 주로 대체되었다(Wis. 8:19f.; Jose Phus, War 7, 8, 7). 세속적 생명은 중요성(Significance)를 상실하거나(Wis. 4:8f.), 또는 영혼의 감옥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Philo, Leg. All. 2, 57; 3, 21, 151). 죽는 행위는 점점 더 중요성을 획득하였고(마카베오 사서 15:12; 마카베오 이서 8:21; Josephus, War 7, 8, 7), 참 생명, 즉 아다나토스(불멸의) 생명은 내세로 옮겨지게 되었다(마카베오 사서 15:3; Pss. Sol. 3:16; Philo, Op. Mund 155f.).
반면에 쿰란 사본들에서 발견되는 용법은 구약의 용법과 현저하게 유사하다. 오직 새로운 특징은 생명과 구원의 축복들과의 약간 공식적인 관련인 것이다(1QS 3:7; 4:7; 1QH 2:20, 31; 9:66; 1QM 1:9; 12:3; CD 3:20).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조에는 신약성경에서 13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조에는 자연적 생명을 나타낸다.
① 조에는 자연적 죽음과 구별되는 자연적 생명을 가리킨다.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고전 3: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② 눅 16:25에서 '살아있는 동안'을 묘사한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눅 12:15; 행 8:33에서도 마찬가지이다.
③ 고전 15:19에서 이 세상에서 '삶을' 표현한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딤전 4:8에서도 같은 의미를 가지며, "내 생"과 대조되어 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④ 약 4:14에서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생명을 묘사한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⑤ 히 7:3에서 '생'의 끝을 묘사한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⑥ 계 11:11에서 '생'기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참조: 창 6:17; 창7:15).

(b) 조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초자연적 생명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이 생명은 신자들이 미래에 받을 것이지만, 이 땅에서 지금 향유하는 것이다.
① 요일 5:20에서 하나님은 참 생명, 곧 영생이시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요 5:26a에서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 12:50에 의하면 하나님의 명령은 영생이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② 요 5:26b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셨다.
요 1:14에서 "그 안에 생명이 있다". 요일 5:11에서도 이를 증거한다. 그는 "생명의 주"이시며(행 3:15), "생명의 말씀"이시다(요 1:1). "이 생명이 인간에게 나타내시게 된 것이다"(요일 1:2).그는 "생명의 떡"이다(요 6:35; 요 6:48; 요 6:33). 그는 단순히 "생명"이란 말로 표현되었다(요 11:25; 요 14:16). 그는 "우리의 생명"이시다(골 3:4). 그 안에 있는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며(요 1:4b) 따라서 사람들은 그를 따름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빛을 얻는다(요 8:12).

(c) 조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얻는 신자들의 생명을 나타낸다.
① 이 생명은 은혜와 거룩의 생명이다.
롬 6:4에서 우리는 "세례(침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된다.
엡 4:18에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들을 묘사한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② 이 생명은 구원과 영광의 생명이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며(딤후 1:1), 그의 말씀과 복음의 전도로 말미암아 효력을 발한다, 요 6:68; 요 6:63; 행 5:20; 빌 2:16; 딤후 1:10; 고후 4:12. 사도들은 복음의 전도로, 사람들을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게" 한다(고후 2:16).
③ 성령은 생명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신다, 롬 8:2; 롬 8:6; 롬 8:10; 요 6:63.
④ 그리스도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계명(엔톨레)도 생명에 이르게 한다, 롬 7:10.
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로 간주되었다, 딤후 1:1에서 "썩지 아니할 것"과 함께, 벧후 1:3에서 "경건"과 함께, 롬 8:6에서 "평안"과 함께 나타난다.
⑥진실로 생명의 에클레시아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생명, 곧 은혜의 선물의 상속자들이다, 벧전 3:7.
⑦ 이 생명은 그들이 육체로 거하는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 있다, 골 3:3.
⑧ 그의 생명을 상실 당한 자는 누구든지 영광의 생명에서 제외된다. 행 11:18; 행 13:46; 행 13:48.
⑨ 특별히 요한복음에 따르면, 하나님의 생명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자는 생명(요일 5:12), 곧 영생을(요 6:40; 요 6:47) 소유하였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4; 요일 3:14).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생은 사랑과(참조: 요 15:17), 기쁨(참조: 요 16:20-요 16:24) 안에서 그 모습을 나타낸다. 요일 3:14에 따르면 형제간의 사랑은 참 생명의 척도가 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에 들어간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비록 요한의 생명에 대한 견해에 많은 점들이 영지주의자들의 관점과 일치한다고 할지라도 요한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영생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거의 도달하기 어려운 세계로 옮겨 버린 반면에 요한은 영생을 바로 현재로 가져오며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과 계명과 인격에 굳게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요 17:3). 이 영생을 지금 이곳에서 소유하는 신자들은, 사망과 심판이 더 이상 생각할 요소들이 아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요 5:24; 요 11:25). 왜냐하면 영생은 그 안에 영원의 씨앗들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4:14; 요 6:27; 요 12:25).

(d) 조에는 종말의 복된 시대에서 누릴 생명에 대해 사용되었다: 요 3:15.
① 내세의 영생, 마 10:30; 눅 18:30; 막 19:29.
② 영생에 대한 질문, 막 10:17; 눅 18:18; 눅 10:25; 마 19:16이하.
③ 마지막 심판의 결과, 마 25:46; 롬 2:7; 마 7:14; 마 18:8이하; 막9:43, 막 9:45; 롬 5:17이하, 롬 5:21; 롬 6:22이하.
④ 죽은 상태에서 나온 자들의 생명, 롬 11:15; 갈 6:8; 딤전 1:16; 딤전 6:12, 딤전 6:19; 벧전 3:10.
⑤ 이 생명은 참 생명으로 불리워진다, 딤전 6:19; 딛 1:2; 딛 3:7.
⑥ 생명 책, 빌 4:3; 계 3:5; 계 13:8; 계 17:8; 계 20:12, 계 20:15; 계 21:27.
⑦ 생명의 나무, 계 2:7; 계 22:2; 계 22:14; 계 22:19.
⑧ 생명의 면류관, 계 2:10.
⑨ 생명수, 계 21:6; 계 22:1; 계 22:17; 계 7:17.
(참조: Walter Bauer; H.G.Link; R.Bultmann).

[참고 -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대로 신약성경의 모든 책들에 생명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언급들이 나온다. 생명의 교리가 가장 명백하게 표현된 곳은 바울과 요한의 신학이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가르침이 구약성경과 후기 유대와 헬라에서 유래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a) ① 생명에 대한 구약성경의 견해는 공관복음서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 자연적 생명은 값을 매길 수 없는 재산으로 간주된다(막 8:37). 예수님께서는 종종 병든 자들이나 죽어가는 자들을 소생시키기 위하여(막 5:23,부정과거 '제세', 그녀가 살도록 that she may live; 참조: 요 4:47이하), 또는 이미 죽은 자에게 이 세상의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능력을 행사하시라는 청을 받으셨다(막 5:35이하; 눅 7:11이하; 요 11:1이하). 구약성경에 나오는 바와 같이 시간적 범주들이 생명과 관련하여 사용된다(눅 1:75; 참조: 히 7:3; 롬 7:1이하). 그리고 이 생명은 동적(動的)인 어떤 것으로 간주되나 동시에 제한되고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창 17:28; 약 4:14). 이것은 단순한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성공하거나 또는 실패할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이다(눅 15:13, '아소토스 젠': 방탕하게 살다; 딤후 3:12, '유세보스젠':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을 살다). 참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마 4:4; 신 8:3의인용). 반면에 하나님과 떠나 사는 것은 죽은 것으로 묘사된다(눅 15:24; 눅 15:32). 음식과 의복 같은 생명의 기본적 필수품들은 절대로 멸시되지 않고 오히려 창조주의 은사로도 고맙게 받아들여진다(마 6:25이하; 눅 12:15). 죽이고 살릴 수 있으신 하나님(마 10:28; 롬 4:17)께서는 논의의 여지가 없는 창조주이시며(행 17:25), 주님이시며(눅 12:20; 행 10:42; 약 4:15), 생명의 구현이시니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요(마 16:16; 막 26:63),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마 22:32; 막 12:27; 눅 20:38).

② 현재의 생명 너머에 장차의 생명이 위치한다(막 10:30; 딤전 4:8,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조에스 테스 쉰 카이테스 멜루세스] 약속이 있느니라"). 이것을 "영생"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조에 아이오니오스; 마 19:16 병행구 막 10:17; 눅 18:18; 마 25:46; 참조: 딤후 1:10, 조에 카이 압흐다르시아: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 사람은 이 생명을 영혼의 불멸의 이성에 의하여 얻는 것이 아니다(이 헬라 사상은 신약에서 완전히 이질적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사이다(마 22:31이하; 병행구 막 12:26이하; 눅 20:36이하). 미래의 생명이 종종 '조에'의 단독적 사용으로 즉 어떤 수식어구 없이 언급된다는 사실은(위의 구약성경 6을 보라). 이러한 생명이 실제적이고 참된 하나님 자신의 생명으로 간주되는 것을 지적한다(마 18:18; 막 9:43; 막 9:45). 한편, 여기에서 후기 헬레니즘에서 발견되는 이 세상의 생명의 평가 절하에 대한 암시는 없다. 반대로 현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내생에 있어서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마 19:16 병행구 막 10:17; 눅 18:18; 눅 10:25). 마 7:13이하(참조: 눅 13:23이하)는, 신 30:19; 렘 21:8, 지혜문학과 신구약 중간기의 문헌, 쿰란과 후기 기독교문헌들에서 발견되는 두 길에 대한 사상을 사용한다(참조: 잠 8:20; 잠 9:6; 잠 12:15; 잠 16:25; 2Esd. 7:7ff.; Test Ash. 1:3, 5; Pirke Aboth 2:12f. 1QS 3:20; Did. 1:1; Barn. 18:1; → 걷다 Walk, art. hodos; 위의 구약성경 4도 보라). 현재의 생명과 미래의 생명 간의 밀접한 관계는최후의 → 심판 Judgment에 대한 비유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나타난다. 곧 불순종하는 자는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이며 의로운 자들은 영생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마 25:46).

(b) ① 생명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부활 → Resurrection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았다(고전 15:4). 그리스도의 부활은 완성된 사실로서, 사망을 능가하는 신적 생명의 권능을 증명하였다(롬 14:9).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살리시는 권능, 곧 사망을 정복하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권능의 구현으로 본다(고후 13:4).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생명, 무덤을 초월한 생명을 의미한다.
마지막 → 아담 Adam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을 통하여 인류를 위한 새 생명의 창시자가 되셨다(롬 5:12이하; 고전 15:20이하). 기독교인들의 생명은 자기 자신의 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니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안에 살고 계시며(갈 2:20; 빌 1:21), 그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고후 4:10). 그들의 생명은 그리스도에 의해 칭의되었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구원을 받았다(롬 5:10). 그리스도의 생명이 기독교인들에게 전달된 것은, (영지주의자들처럼) 하나의 능력으로서도 아니고 신비적 결합을 통한 것도 아니며 생명의 말씀(→ 말 Word, 빌 2:16; 참조: 딤후 1:10; 딛 1:2이하)과 살리시는 영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롬 8:2; 롬 8:6; 롬 8:10이하; 고전 15:45).

② 성령을 통해 행하는 신자들의 이 새 생명은(롬 6:4) 매일의 생활에서 스토아파나 영지주의적인 무관심과 금욕주의로 회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바울이 이 생명을 보는 바처럼 기독교인은 자신의 이웃을 책임 있게 섬겨야 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위한 생활을 더 이상 영위하지 않고(롬 14:7; 고후 5:15) 하나님과(롬 6:10이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고 있으므로(롬 14:8; 고후 5:15), 그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 그리스도의 → 십자가 Cross를 취할 때(고후 4:9이하) 그의 삶은 긍정적이며 구체적 결과를 나타낸다(갈 5:25-26). 그러므로 바울은 역설적인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고후 6:8이하). 이는 생명이 죽음을 통하여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의미는 타인에 대한 사랑의 자세를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다(롬 13:8-10; 롬 14:11이하). 바울이, "~를 위해 사는 것"(living for)과 ~와 함께 사는 것(living with)이 바로 생명의 구성요소에 속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자오(Zakcai'o", 2195)와 함께 사용하는 여격과 쉰(suvn, 4862-) 구문들을 주의해 보는 것은 중요하다.

③ 신자의 새 생명에는 현재와 미래, 직설법과 명령법 간에 하나의 긴장상태가 있다(갈 5:25). 신자의 새 생명은 이미 실존하는 것이지만 아직 완전히 명백하게 나타난 것은 아니다(골 3:3-4). 그리스도의 → 부활 Resurrection은 우리 자신의 미래에 있을 영생에 이르는 부활의 보증이다. 이 미래의 영생의 부활에서 사망과 또한 현 창조의 모든 불완전들은 과거의 일이 될 것이다(롬 8:18이하).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조오포이에데손타이, 고전 15:22; → 아담 Adam).
새 생명은 역사적인 시간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원수인 사망이 정복되는 때의 영생을 지향하는 것이다(고전 15:26; 고전 15:28; 롬 6:22; 갈 6:8). 바울은 우주적인 드라마, 곧 기적적인 변형(trans formation)과 휴거(rapture)에 의한, 현세적인 생명으로부터 영생으로의 변화를 묘사한다(살전 4:13-17; 고전 15:20이하; 고전 15:35이하; 고전 15:51이하). 여기에서 바울은 묵시적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묵시적 표현과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후기 유대주의의 추상적 사변을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생명이 취할 형태에 대한 비유적 암시에 스스로를 제한한다. 그것은 육체가 있는 생명이 될 것이며(고전 15:35이하; 참조: 고후 5:7; 유대인들은 육체가 없는 생명을 상상할 수 없었음에 유의하라; 몸 Body), → 얼굴 Face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과(고전 13:12; 참조, 고후 5:7)의 → 평화 Peace와 → 기쁨 Toy(롬 14:17)과 → 영광 Glory 독사(doxa, 고후 3:8이하), 또는 영화(榮化)(glorification 롬 8:17)의 충만에 들어가는 것을 수반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있게 될 것이다(살전 4:17; 고후 5:8; 빌 1:23).

(c) ① 요한은 말씀(the Word)이 성육신 전부터 영원한 생명이었다고 묘사한 이 말씀은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사 인간들의 유익을 위해 역사하셨으니(요 1:4; 요일 1:1이하), 곧 그는 과거의 창조와 새로운 창조에 있어서 모두 신적 생명과 권능의 근원이시다. 그는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되신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말씀으로 영생을 전달하시는 것만이 아니라(요 6:68; 요 10:28; 요 12:50; 요 17:2), 그 자신이 참 생명이시니(요일 5:20), 곧 그의 여러 가지 "나는 이다"(I am)라는 말씀들은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요 6:35; 요 6:48), "나는 세상의 빛이니"(요 8:12),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영원하신 성부의 선재하시는 아들은 자신의 말씀에 의해서, 또한 자신의 인격 안에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세상에 보내심을 받으셨다(요 6:33; 요 10:10; 요일 4:9).

② 하나님의 생명은 → 믿음 Faith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자는 생명(요일 5:12), 곧 영생을(요 6:40; 요 6:47) 소유하였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4; 요일 3:14).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생은 사랑과(요 15:9-17) 기쁨(요 16:20-24) 안에서 그 모습을 나타낸다. 요일 3:14에 따르면 형제 간의 사랑은 참 생명의 척도가 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에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③ 비록 요한의 생명에 대한 견해에 많은 점들이 영지주의자들의 관점과 일치한다고 할지라도 요한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영생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거의 도달하기 어려운 세계로 옮겨버린 반면에 요한은 영생을 바로 현재로 가져오며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과 계명과 인격에 굳게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요 17:3). 이 영생을 지금 이곳에서 소유하는 신자들은, 사망과 심판이 더 이상 생각할 요소들이 아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요 5:24; 요 11:25). 왜냐하면 영생은 그 안에 영원의 씨앗들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4:14; 요 6:27; 요 12:25).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남아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과(데오로신 텐 독산, 요 17:24) 자신들의 구원의 완성을 보는 것이다(참조: R. Bultmann, TDNT Ⅱ 870f.).

(d) 요한계시록은 → 인자(Son of man)의 전승을 죽임을 당한 → 어린 양 Lamb의 비유에 결합시킨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7이하; 참조: 계 1:13이하; 계 4:9이하). 요한복음이 헬라주의의 배경을 갖고 완전히 현재적 생명에 전념하는 반면에 계시록은 유대 전통들로 되돌아가 오직 내생에만 관계한다. 새 → 예루살렘 Jerusalem의 환상 가운데에서, 에덴 동산의 이야기(창 2:9-17)를 통해 낯익은 생명나무와 생명수에 대한 신화적이며 고대 동양적 묘사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도성에서의 충만한 생명의 상징들로 다시 나타난다(계 22:2-14; 계 22:19; 계 21:6; 계 22:1; 계 22:17). 새 → 하늘 Heaven과 새 땅에 대한 환상은, 마지막 원수인 사망이 멸망 받고(참조: 바울, 고전 15:26)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영생이 온전한 완성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약속에 있어서 가장 넓은 범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이하). - H. G. Link.]

성구사전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 18: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 18: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 19: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 25: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막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 9: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막 10: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눅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 12: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눅 16: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눅 18:18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 18:30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3: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 6: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요 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 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요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2: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 12: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행 2:28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행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행 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행 8:33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행 11:18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행 13: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롬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롬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7: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11: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고전 3: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고전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후 2: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고후 2: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고후 5: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엡 4: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빌 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빌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골 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딤전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 4: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 4: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딤전 6: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딤후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딤후 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딛 3: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히 7:3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히 7:16 그는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벧전 3: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벧후 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요일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 1: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요일 1: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요일 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요일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일 5: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요일 5: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요일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일 5: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요일 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유 1: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주어 먹게 하리라
계 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 7: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계 11:11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계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 16:3 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계 17: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
계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계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계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계 22: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계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 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계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계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에이레네(εἰρήνη) : 평안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

‘평안, 평강, 평화, 화평’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이레네’(εἰρήνη)는 ‘결합하다’라는 뜻의 ‘에이로’(eiro. εἴρω)에서 파생된 단어로 ‘평화, 번영, 하나가 됨, 고요, 안식, 다시 하나가 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에이로’(eiro. εἴρω) / 참여하다, 매다, 고정하다, 연결하다, 연합하다##넣다, 지르다

에이레네(εἰρήνη)의 좀더 깊은 성경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헬라어 에이레네(εἰρήνη)의 뜻을 가진 히브리어 샬롬(שלום)을 살표볼 필요가 있다.
샬롬(שלום)은 ‘완전, 건강함, 행복, 번영, 고요, 안전’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 단어는 ‘완전하다, 건전하다, 완성하다, 마치다, 회복하다, 보답하다’라는 뜻의 솨람(םלש : shaw-lam)을 기본어근으로 하고 있다.

에이레네(εἰρήνη)는 단순히 서로가 평화로운 관계(relationship)나 평화를 유지하려는 태도(attitude)를 말하기 보다는 오히려 평안 그 자체인 완성적 의미에서의 상태(state)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결합되어(eiro) 하나(μονογενης)가 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사야 9:6에 보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고 있는 ‘한 아기’가 바로 평강의 왕, 평강(샬롬 : שלום)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신약에서 그리스도 예수이신 ‘평안’ (εἰρήνη)을 우리에게 끼친다고 말씀하고 있다(요14:27).  여기서 ‘끼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압히에미(ἀφίημι)는 ‘쫓아내다, 용서하다, 성취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구원의 완성(텔레오 : τελέω – 끝마치다, 완전히 하다, 빚을 청산하다)을 이루기 위함이며, 하나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아들을 ‘쫓아냄’, 인간의 죄를 ‘청산함’ 그리고 죄인을 ‘용서함’의 의미가 모두 들어가 있다.

결국 ‘평안’(εἰρήνη)을 ‘끼친다’ (ἀφίημι)는 예수님의 선포 속에는 ‘너는 평안 아니다, 너에게는 평안이 없다’는 인간의 실존을 폭로하면서 ‘네가 생각하는 평안, 네가 원하는 세상이 주는 평안’인 ‘너’을 파괴해 버리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평안인 ‘그리스도’로 세우시겠다(union Christ)는 하나님의 창조(바라 : ברא)의 목적과 성취가 들어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평안(εἰρήνη) 그 자체인 것이다.

헬라어 <에이레네-εἰρήνη>는 “평안, 화평, 안식”을 의미합니다.
<에이레네-εἰρήνη>는 <에이로>에서 왔습니다.
“결합하다, 연합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평안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누릴 수 있는 것이 평안입니다.
하나님의 평안은 하나님을 소유할 때 누릴 수 있습니다.
그 평안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지식으로 아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예배 가운데 부어 주시는 은혜가 <에이레네-εἰρήνη>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과 영적인 깊은 연합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고, 제자들이 두려워하며 벌벌 떨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그리스도의 평안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다시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 20:20)

두려움과 불안을 이기는 하늘의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에이레네-εἰρήνη>의 은혜가 그 가운데 함께 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평안을 누리는 영혼은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평안의 열매가 곧 기쁨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는 평안과 기쁨일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εἰρήνη 스트롱번호1515
1.

평화.

2.

눅11:21

3.

평화

발음 [ ĕirēnē ]
  • 1.
    평화.
    • a.
      [πόλεμος의 반대말] 눅11:21, 14: 32, 행12:20, 24:2, 계6:4.
    • b.
      [비유적으로] 평화, 조화, 어우러짐, 마10:34, 눅12: 51, 행7:26, 엡4:3, 히7:2. ㉠ 평화의 길, 롬3:17. ㉡ 평안하게, 히11:31. ㉢ 평화하라, 엡2:15. ㉣ 화평하게 하는 자들, 약3:18. ㉤ 평화를 구하다, 갈5:22, 딤후2:22. ㉥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라, 히12:14. ㉦ 평안을 추구하다, 롬14:19, 벧전3:11. ㉧ 평화에 관한 것, 눅19:42.
    • c.
      질서,《반》ἀκαταστασία, 고전14: 33, [참조] 고전7:15.
  • 2.
    [히브리어 샬롬과 일치된 뜻으로] 안녕, 복지, 건강, 마10:13, 막5:34, 눅 7:50, 8:48, 10:5, 24:36, 요20:19, 20:26, 행15:33, 16:36, 고전16:11, 약2:16. [주] 새롭고 특징적인 발전으로 헬라의 편지 서두의 인사말인 ‘은혜’가 바울서신 등에서 ‘은혜와 평강’ 이란 인사형식으로 결합된 것이 있다, 롬1:7, 고전1:3, 고후1:2, 갈1:3, 엡1:2, 골1:2, 살전1:1, 딤후1:2, 딛1:4, 몬3, 계1:4.
  • 3.
    [선지자들에 따르면 평화는 메시아 왕국의 본질적 특성이다. 따라서 기독교 사상은 흔히 평화를 메시아적 구원과 동의어로 간주한다] 요14:27, 16:33, 행10:36, 롬5:1, 10:15, 15:33, 16:20, 고후13:11, 엡2:17, 6:15, 빌4:7,9, 골3:15, 살전5:23, 살후3:16, 히13:20. [기타] 눅2:14, 29, 롬8:6, 14:17, 15: 33, 벧후3:14.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평안(마10:13, 눅2:29, 행9:31), 화평(마10: 34, 눅12:51, 행10:36), 평강(눅1:79, 요20:19, 롬1:7), 평화(눅2:14, 19:42), 안전(눅11:21), 화친(눅14:32), 화해(행7:26), 태평(행24:3).








복(福)



구약의 복과 신약의 복은 어떻게 다른가?

구약과 신약이 ‘율법’과 ‘복음’으로 요약 구별되는 것과 유사하게 구약의 복과 신약의 복이 또한 다른 개념을 가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 구별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인 복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를 완전히 잘못하게 된다.
구약에서 말하는 복과 신약에서 말하는 복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1. 구약에서 말하는 복은 대체로 육신적인 복(예, 장수, 건강, 부귀 등)
   신약에서 말하는 복은 영적인 복(심령이 가난함, 애통함, 마음이 청결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 등)

   구약의 복사상은 동양의 5복사상(장수, 강녕, 부귀, 유호덕, 고종명)과 흡사하다.

2. 구약에서 말하는 복은 현세적인 것
   신약에서 말하는 복은 예수의 산상보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천국(내세적)의 복(마 5:3-12) 

3. 구약에서 말하는 복은 조건적인 복(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 신 28:1-14)
   신약에서 말하는 복은 무조건적인 복이다(롬 3:23-24, 엡 1:3-5).
   그리스도인은 구약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행위를 조건으로 해서 받는 복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값(=조건) 없이 복(=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그 전체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복 사상(창 12:1-3; 시 1:1 등)이 그 반대인 저주와 더불어 인과응보적인 논리로 선포되어 있으므로(신 28:1-19), 우리가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 할 때는 구약의 복이 아니고 신약의 복을 뜻하는 것이다.



복(福)

창세기 1:28

בָּרַךְ 스트롱번호1288

1. 무릎을 꿇다
2. 하나님께 기원하다
3. 피엘형 בֵּרֵךְ
발음 [ bârak ]
구약 성경  / 256회 사용
  • 1.  원형 무릎을 꿇다, 꿇어 엎드리다, 절하다, 대하6:13, 시95:6
  • 2.  원형 하나님께 기원하다, 복을 구하다, 창28:6, 수24:10, 삼상13:10, 삼하8:10, 대상18:10.
    • a.  원형 피엘형 בֵּרֵךְ, 미완료형 וַיְבָרֶךְ ,רְבָרֵךְ
    • b.  원형 하나님께 기원하다, 찬양하다, 대하6:13, 시95:6, 시104:1, 시26:12,34:2(1), 63:5(4), 66:8, 시103:1,2,104:35
    • c.  원형 축복하다, [인간들끼리], 복을 기원하다[하나님의 이름으로 어떤 사람에 대해] 창27:27. ㉠ [제사장이 백성을 축복하는 경우] 레9:23, 민6:23. ㉡ [백성이 백성에게 축복하는 경우] 신27:12.
    • d.  원형 축복하다, 번성하게 하다, 창1:22, 9:1, 12:2.
    • e.  원형 인사하다, 왕하4:29, 잠27:14, 삼상25:14. ㉠ [오는 사람에게] 창47:7, 삼하6:20. ㉡ [떠나는 사람에게] 창47:10, 왕상8:66. ㉢ [인사를 받는 사람에게] 삼상13:10. ㉣ [전송하는 사람에게] 창24:60, 수22:6,7.
    • f.  원형 저주하다, 왕상21:10, 시10:3, 욥1:5,11, 2:5.
    • g.  원형 푸알형 בֹּרַךְ, 분사 מְבֹרָךְ
    • h.  원형 축복받다, 찬양받다[하나님에 대해] 욥1:21
    • i.  원형 복받다 [하나님에 의해] 신33:13. 
    • j.  원형 히필형 הִבְרִיךְ: 낙타로 하여금 무릎을 꿇게 하다, 창24:11.

    • k. 원형 힛파엘형 הִתְבָּרֵךְ: 자신을 축복하다, 신29:18(19).
  • 문법설명  /  미완료형 יִבְרַךְ

  • 관련 성경  /  문안하다(삼상13:10), 무릎을 꿇다(대하6:13, 시95:6), 찬송하다(창9:26, 왕상1:48, 시113:2), 복을 받다(창24:31, 삼하2:5, 시72:17), 축복하다(창27:33, 민23:11, 왕상8: 66), 칭찬하다(삼상25:33), 복이 있다(삼상25:33, 룻2:19,20), 찬양하다(삼하18:28, 왕상5:7, 시106:48), 송축하다(왕상8:15, 스7: 27), 복되다(출20:11, 잠5:18), 복을 주다(사19:25, 출20:24, 신15:6), 복을 얻다(창12:3, 시128:4), 복을 내리다(출23:25, 신28:8), 은혜를 베풀다(신7:13), 저주하다(왕상21:10,13), 욕되게 하다(욥1:5), 복을 빌다(욥31:20), 자랑하다(시10:3), 욕하다(욥2:9), 풍부히 주다(신14:24), 축사하다(삼상9:13), 인사하다(왕하4:29), 축하하다(시49:18), 꿇리다(창24:11),[명] 찬송(신33:20, 시135:21, 욥1:21), 복된자(사65:23), 축복(민23:20), 복(대상4:10), 안부(왕하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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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구약BHS,28 וַיְבָרֶךְ אֹתָם אֱלֹהִים וַיֹּאמֶר לָהֶם אֱלֹהִים פְּרוּ וּרְבוּ וּמִלְאוּ אֶת־הָאָרֶץ וְכִבְשֻׁהָ וּרְדוּ בִּדְגַת הַיָּם וּבְעֹוף הַשָּׁמַיִם וּבְכָל־חַיָּה הָרֹמֶשֶׂת עַל־הָאָרֶץ׃

새번역,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우리말성경,28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해 땅에 가득하고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기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28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영어NIV,28 God blessed them and said to them, "Be fruitful and increase in number; fill the earth and subdue it. Rule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creature that moves on the ground."

영어NASB,28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to them, "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earth, and subdue it; and rule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birds of the sky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s on the earth." 

영어MSG,28  God blessed them: "Prosper! Reproduce! Fill Earth! Take charge! Be responsible for fish in the sea and birds in the air, fo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s on the face of Earth."

영어NRSV,28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birds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s upon the earth."

헬라어구약Septuagint,28 και ηυλογησεν αυτους ο θεος λεγων αυξανεσθε και πληθυνεσθε και πληρωσατε την γην και κατακυριευσατε αυτης και αρχετε των ιχθυων της θαλασσης και των πετεινων του ουρανου και παντων των κτηνων και πασης της γης και παντων των ερπετων των ερποντων επι της γης

라틴어Vulgate,28 benedixitque illis Deus et ait crescite et multiplicamini et replete terram et subicite eam et dominamini piscibus maris et volatilibus caeli et universis animantibus quae moventur super terram

개역개정,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복을 주시며(וַיְבָרֶךְ - 와예바레크)

하나님께서는 동물들에게 복을 주신 것과(22절)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도 복을 주셨다.
22절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우리 삶의 모든 상황 가운데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잘 되도록 인도하시는 것으로 주로 성공, 번영, 다산을 의미한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주셨는데 거기에 더 나아가 다른 존재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권한까지 주셨다.

* 정복하라...다스리라(וְכִבְשֻׁהָ וּרְדוּ - 웨키베슈하 우레두)

여기서 '정복하다'(카바쉬)는 '발로 밟다'(슥 9:15; 미 7:19), '복종케 하다'(민 32:22)라는 뜻으로 이 세상의 여러 곳을 다니며 그 곳을 자신의 발로 밟고 삶의 터전으로 삼는 것을 가리킨다.

'다스리다'(라다)는 26절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절대 주권을 행사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명령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것으로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역할을 부여받은 청지기이자 대리 통치자임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 세상을 잘 관리하고 개발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하고 아름답게 다스려야 한다.


생육하다(6509) 파라(pârâh) פָּרָה 스트롱번호 6509

1. 맺다.  2. 열매를 맺다. 3. 번창하다
발음 [ pârâh ]
구약 성경  / 29회 사용
  • 1. 원형 맺다.
    • a. 원형 열매를 맺다, 신29:17(18), 시128:3, 사11:1, [은유적으로] 사45:8.
    • b. 원형 번창하다, 많이 낳다[사람이나 동물에 사용], 창1:22, 출1:7, 23:30.
    • c. 원형 히필형 : 결실이 풍성하다, 창41:52, 증산하다, 창17:6,20, 48:4, 레26:9.
  • 관련 성경
    ☞생육하다(창8:17, 9:1, 28:3), 번성하다(창26:22, 출23:30, 렘3:16), 결실하다(시128:3,사11:1), 열리다(사11:1), 무성하다(창49:22),생기다(신29:18), 창대하다(레26:9). [명] 생육(출1:7, 렘23:3, 겔36:11), 열매(사32:12, 겔19:10).




번성하다(7235) 라바(râbâh) רָבָה 스트롱번호 7235

1. 증가하다.  2. 확대되다. 3. 위대해지다
발음 [ râbâh ]
구약 성경  /  176회 사용
  • 1.  원형 증가하다, 창1:22,28, 9:1,7, 출1:20, 많아지다, 시139:18
  • 2. 원형
    • a. 원형 확대되다, 능가하다, 삼상14:30, 번성하다, 신30:16, 성장하다, 창21:20.
    • b. 원형 위대해지다, 창43:34, 욥33:12, 잠29:2.
    • c. 원형 피엘형 רִבָּה
    • d. 원형 증가하다, 늘어나다, 삿9:29, 시44:13(12)
    • e. 원형 성장하다, 애2:22, 겔19:2.
    • f. 원형 히필형 הִרְבָּה, 미완료형 יַרְבֶּה, 부정사 절대형 הַרְבָּה, 부정사 연계형 הַרְבּוֹת
    • g. 원형 많게 하다, 창3:16, 사23:16. ㉠ [부사로] 많이, 출36:5, 삼상1:12,왕하21:6, 시78:38, 암4:4. ㉡ 많이 주다, 출30:15. ㉢ 많이 지우다, 부담시키다, 창34:12. ㉣ 많이 산출하다, 만들다, 레11:42, 대상7:4, 4:27, 8:40, 23:11
    • h. 원형 위대하게 만들다, 대상4:10, 시18:36(35),욥34:37.
  • 문법설명  /  미완료형 יִרְבֶּה, 명령형 וְבֵה
  • 관련 성경  /  ☞번성하다(창8:17, 신6:3, 대상5:23), 많다(삼상14:30, 삿16:24, 왕상10:10), 번식하다(대상5:9), 넘치다(스9:6), 더하다(출11:9, 전5:11, 시16:4), 많아지다(창7:17, 잠29:16), 멀다(신14:24, 19:6), 뛰어나다(왕상4:30), 중대하다(대하24:27), 크다(창3:6, 대하36:14,욥33:12), 강하다(욥39:4), 길다(잠4:10), 장성하다(창21:20), 기르다(겔19:2), 넓히다(대상4:10), 지극하다(대하32:27), 풍성하다(시130:7), 지나치다(전7:17), 많이 얻다(신17:16), 많이 두다(신7:17), 늘어가다(잠13:11),여러 밭을 가지다(레11:42), 많은 소산을 얻다(느9:37). [명] 권세(잠29:2), 이익(시44:12),무리(애2:22), 여러 번(느6:17, 시78:38), 계속(욥41:3). [부] 얼마(창38:12), 많이(창43:34, 대하31:5, 겔11:6), 오래(삼상7:2), 더욱(대하33:23), 대단히(삼상26:21), 무수히(삼하12:30, 대상20:2), 깊이(전5:20), 너그럽게(사55:7), 심히(겔16:25,29,51).



충만하다(4390) 마래(mâlêʼ) מָלֵא 스트롱번호 4390

1. 타동사 채우다.  2. 창 1:22.  3. 출 16:32
발음 [ mâlêʼ ]
구약 성경  /  250회 사용
  • 1. 원형  타동사 채우다, 가득하게 하다, 메우다, 만족시키다.
    • a. 원형 [빈 공간에] 창1:22,28, 9:1, 출40:34,왕상8:10,11, 렘51:11.
    • b. 원형 [한 장소를 어떤 것으로] 출16:32, 렘16:18, 19:4, 겔8:17, 28:16, 30:11.
    • c.원형 [채울 대상의 목적격이 뒤따른 경우]에7:5, 욥36:17
  • 2. 원형 자동사 : 차다, 충만하다, 가득하다, 창6:13, 삿16:27, 욥32:18, 시10:7, 26:10,33:5, 48:11(10), 65:10(9), 사11:9.
    • a. 원형 [앙갚음을 하는 것에 대해 사용] 출15:9.
    • b. 원형 성취되다, 완성되다, 때가 차다, 창25:24, 29:21, 레8:33, 12:4,6, 렘25:34,애4:18.
    • c. 원형
    • d. 원형 니팔형: 차다, 충만하다, 가득하다, 무장되다, 창6:11, 출1:7, 7:25, 삼하23:7, 왕상7:14, 왕하3:17, 욥15:32, 전6:7, 겔32:6, 합2:14.
    • e. 원형 피엘형 מִלָּא ,מִלֵּא 렘51:34, 부정사 מַלֹּאות ,מַלֵּא, 미래형 יִמַלֵּא, 욥8:21, 채우다, 가득하게 하다, 메우다
    • f. 원형 채워지는 것의 목적격이 수반되는 경우 ㉠ 위임하다, 넘겨주다, 출28:41, 29:9,레21:10. ㉡ 여호와께 제물을 바치다[‘손을 채우다’], 대상29:5, 대하13:9, 29:31. ㉢ 차다[때가], 끝나다, 창29:27, 욥39:2, 단9:2. ㉣ 채우다, 완성하다, 충족시키다, 출23:26, 삼상18:27. ㉤ 영혼을 채우다, 만족시키다, 흡족하게 하다, 충족시키다, 욥38:39, 잠6:30. ㉥ 이행하다, 이루다.㉠ [약속을] 왕상8:15.㉡ [맹세, 서약] 시20:6.㉢ [예언] 왕상2:27. ㉦ 어떤 것을 완전하게 하다, 어떤 일을철저하게 수행하다, 렘4:5
    • g. 원형 채우고자 하는 것의 목적격이 수반되는 경우: 퍼붓다, 놓다, 채우다, 삽입하다, 끼워넣다, 두다, 출28:17, 31:5,35:33, 대상12:15, 사65:11.
    • h. 원형 채워지는 것과 채우는 것의 목적격이 동시에 수반되는 경우: ~을 ~로 채우다, 출35:35, 욥3:15, 22:18, 사33:5.
    • i. 원형 푸알분사형 מְמֻלָּאִים: 채워진, 가득찬, 아5:14.

     부정사 מְלֹאת 레8:33, מְלֹאות 욥20:22, 미완료형 יִמְלָא

  • 문법설명 /  부정사 מְלֹאת 레8:33, מְלֹאות 욥20:22, 미완료형 יִמְלָא 

  • 관련 성경 /  가득하다(창6:13, 삿16:27, 사1:15), 차다(창29:21, 레12:4, 사30:27), 충만하다(출40:34, 시33:5, 사11:9), 넘치다(수3:15, 겔23: 33),품다(에7:5), 강장하다(욥20:11), 담대하다(전8:11), 채우다(출15:9, 사27:6, 렘19:4), 끝나다(사40:2), 다하다(왕하9:24, 에1:5, 애4:18), 마치다(레8:33, 에2:12, 렘25:12), 풍족하다(욥20:22), 헌신하다(출32:29), 걸리다(창50:3), 지나다(출7:25), 가지다(삼하23:7),구비하다(왕상7:14), 풍부하다(겔27:25), 물리다(출28:17, 31:5), 거룩하게 하다(출28:41), 위임되다(레21:10), 담다(수9:13), 확증하다(왕상1:14), 이루다(왕상8:15, 대하6:4), 드리다(대하29:31, 삼상18:27), 부요하다(사23:2), 만족하게 하다(렘31:25), 먹이다(슥9:13), 위임받다(출29:29), 위임하다(출29:33), 응하게 하다(왕상2:27), 받다(대하13:9), 지내다(대하36:21), 모이다(렘4:5), 움키다(겔10:2), 메우다(창26:15), 채우다(레9:17), 자원하다(왕상13:33), 찌르다(욥41:7), 가득하다(시80:9), 거룩하게 구별하다(민3:3, 삿17:12), 가득하게 하다(렘51:14), 위임식을행하다(출29: 35, 레8:33). [부] 매우(에3:5),온전히(민32: 12, 신1:36, 수14:14).



정복하다(3533) 카바쉬(kâbash) כָּבַשׁ 스트롱번호 3533

1. 발로 밟다.  2. 복종시키다.  3. 창 1:28.
발음 [ kâbash ]
구약 성경  / 14회 사용
  • 1. 원형 발로 밟다, 짓밟다, 발로 뭉개다, 미7:19
  • 2. 원형 복종시키다, 종속시키다, 강요하다, 속박하다, 정복하다.
    • a. 원형 [짐승에 대해] 창1:28.
    • b.원형 [적이나 노예나 적국에 대해] 민32:22,29, 대하28:10, 렘34:11, 느5:5.
  • 3. 원형 폭행을 가하다, 폭행하다, 강간하다[여자를], 에7:8.
    • a. 원형 피엘형 : 복종시키다, 강요하다, 정복하다, 종속시키다, 삼하8:11.
    • b. 원형 니팔형
    • c. 원형 복종하다, 강요되다, 정복되다, 민32:22,29, 수18:1
    • d. 원형 폭행당하다, 강간당하다, 느5:5.
  • 문법설명 /  미완료형 יִכְבּוֹשׁ

  • 관련 성경  /  밟다(슥9:15, 미7:19), 압제하다(대하28:10), 강간하다(에7:8), 정복하다(창1:28, 삼하8:11), 복종시키다(렘34:11, 수18:1), 복종하게 하다(민32:22, 대상22:18), 항복하다(민32:29).[명] 종(느5:5).



다스리다(7287) 라다(râdâh) רָדָה 스트롱번호 7287

1. 짓밟다.  2. 정복하다.   3. 소유
발음 [ râdâh ]
구약 성경  / 25회 사용
  • 1. 원형  짓밟다, 밟다, 욜4:13, [בְּ를 수반하여] 사람을 짓밟다, 시49:15(14)
  • 2. 원형 정복하다, 통치하다[בְּ를 수반하여], 창1:28, 레26:17, 시68:28(27), 사14:6, 겔34:4, [황폐하게 하는 불에 사용되어] 애1:13.
  • 3. 원형 [비유적으로] 소유, 취하다, 삿14:9.
  • 관련 성경 /  다스리다(레 26:17, 왕상 4:24, 사 41:2, 겔 29:15), 사로잡다(사 14:2), 물러가게 하다(애 1:13), 거느리다(왕상 5:16),
    억압하다(사 14:6), 치다(삿 5:13).
    [명] 고관(시 68:27), 주권자(민 24:19).


1. 환경을 다스리라
2. 가정을 다스리라
3. 나라를 다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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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산상수훈(山上垂訓)과 김교신의 팔복(八福) 해설

 

  과거 거의 2000 년간 서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책은 신약과 구약으로 이루어진 성경(聖經; bible)이다.

  다음에 성경 신약의 마태복음 5 장에서 7 장 첫 부분까지를 옮긴다. 이 부분은 산상수훈(山上垂訓; 산 위에서의 가르침)이라고 부르는 예수님의 가르침으로만 이루어진 유명한 부분이다. 힌두교도인 간디가 이 부분을 좋아하여 일생동안 삶의 규칙으로 삼았다(확인은 못하였으나)는 이야기도 있다.

  종교와 이념을 떠나서 평온한 마음으로 읽어보기 바란다. 가능한 한 주석을 달지 않았다. 마음으로 느끼기 바라기 때문이다.

  단지 과거에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라 어려운 한자어가 많아 영어 번역을 같이 첨부하였다. 이 영어는 현대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번역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산상수훈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Now when he saw the crowds, he went up on a mountainside and sat down. His disciples came to him,

[마 5: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and he began to teach them, saying:


[마 5:3] 심령(心靈)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임성삼의 생각; 첫 번째 복이면서 가장 귀중한 복이다.

겸손하며, 자만하지 않는 사람, 스스로를 과시하지 않는 사람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어 성경과 프랑스어 성경에 이 구절이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虛心的人 有福了, 因爲天國是他們的  허심적인 유복료, 인위천국시타문적(중국어 성경)

"마음이 비어 있는 사람"이 좋은 번역이라고 느껴진다.

Heureux les pauvres en esprit, car le royaume des cieux est a eux!(프랑스어 성경)]

프랑스어 성경은 영어 성경과 단어대 단어로 동일하다. 독일어 성경도 거의 완전히 같은 내용이다.]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임성삼의 생각; 두 번째 복이다.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슬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계시다.]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will inherit the earth.

 [임성삼의 생각; 세 번째의 복이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들이 이 땅의 주인일 것임을 확인하신 말씀이다.]


[마 5:6]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임성삼의 생각; 네 번째 복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의(義)에 갈구(渴求; 몹시 애타게 구함)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이 만족하게 될 날이 온다는 선포이시다. 아직 오래 살지는 않았으나 의(義)가 실현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will be shown mercy.

 [임성삼의 생각; 다섯 번째 복이다. 선을 베푸는 사람이 그대로 보답을 받는다는 것은 동양과 서양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그만큼 실제적인 사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will see God.

 [임성삼의 생각; 여섯 번째 복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복이다.]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임성삼의 생각; 일곱 번째 복이다. 신(神)의 아들은 사람들을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선언하셨다.]


[마 5:10] 의(義)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because of righteousness,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임성삼의 생각; 여덟 번째 복이다. 의(義)를 위하여 핍박 받은 사람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늘의 왕국을 자기의 것으로 할 수 있다.]

 [임성삼의 주(註); 이 여덟 가지 복 중 다섯 가지에 대한 "김교신"의 해설을 뒤에 붙인다.]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Blessed are you when people insult you, persecute you and falsely say all kinds of evil against you because of me.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Rejoice and be glad, because great is your reward in heaven, for in the same way they persecuted the prophets who were before you.

 [임성삼의 생각; 기독교도들이 핍박을 받을 때,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 상황을 넘은 사례는 역사상 적어도 수 백 번이 넘는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it be made salty again?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excep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by men.

 [임성삼의 생각; 본질을 잃지 말라는 준엄한 말씀이시다. 또한 세상을 썩지 않게 하며, 스스로도 결코 변하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on a hill cannot be hidden.

[마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Neither do people light a lamp and put it under a bowl. Instead they put it on its stand, and it gives light to everyone in the house.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In the same way, let your light shine before men, that they may see your good deeds and praise your Father in heaven.

 [임성삼의 생각; 착한 행실을 하는 것은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인하여 많은 기독교도들은 착한 행실을 할 의무가 있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Do not think that I have come to abolish the Law or the Prophets; I have not come to abolish them but to fulfill them.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I tell you the truth, until heaven and earth disappear, not the smallest letter, not the least stroke of a pen, will by any means disappear from the Law until everything is accomplished.

[마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Anyone who breaks one of the least of these commandments and teaches others to do the same will be called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but whoever practices and teaches these commands will be called great in the kingdom of heaven.

 [임성삼의 생각; 예수님은 개혁자이셨으나, 과거의 모든 규범을 완전히 인정하셨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義)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For I tell you that unless your righteousness surpasses that of the Pharisee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you will certainly not enter the kingdom of heaven.

 [임성삼의 생각; 여기의 서기관, 바리새인은 당시 율법을 신조로 살던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보다 더 철저해야 한다는 뜻으로 생각한다.]

 

[마 5: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o the people long ago, 'Do not murder, and anyone who murders will be subject to judgment.'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But I tell you that anyone who is angry with his brother will be subject to judgment. Again, anyone who says to his brother, 'Raca,' is answerable to the Sanhedrin. But anyone who says, 'You fool!' will be in danger of the fire of hell.

 [임성삼의 생각; 법률의 단계를 뛰어 넘는 매우 준엄한 개념이다.

"라가"는 유태인의 욕이다.]


[마 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Therefore, if you are offering your gift at the altar and there remember that your brother has something against you,

[마 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leave your gift there in front of the altar. First go and be reconciled to your brother; then come and offer your gift.

 [임성삼의 생각; 유태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형제와의 화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다.]


[마 5: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私和; 송사(訟事)를 화해함)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Settle matters quickly with your adversary who is taking you to court. Do it while you are still with him on the way, or he may hand you over to the judge, and the judge may hand you over to the officer, and you may be thrown into prison.

[마 5: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I tell you the truth, you will not get out until you have paid the last penny.

 [임성삼의 생각; 이 가르침을 거의 2천 년 동안 받은 서양의 그 많은 변호사 숫자를 보면, 그들이 이 말씀을 잘 받아들인 것 같지는 않다. 간디도 자서전에서 말했다. 예수님을 닮은 서양 사람들을 보지 못하였다고.] 

 

[마 5: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Do not commit adultery.'

[마 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But I tell you that anyone who looks at a woman lustfully has already committed adultery with her in his heart.

[마 5: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If your right eye causes you to sin, gouge it out and throw it away. It is better for you to lose one part of your body than for your whole body to be thrown into hell.

[마 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And if your right hand causes you to sin, cut it off and throw it away. It is better for you to lose one part of your body than for your whole body to go into hell.

 [임성삼의 생각; 매우 준엄한 말씀이어서 성직자들도 여러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마 5: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It has been said, 'Anyone who divorces his wife must give her a certificate of divorce.'

[마 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But I tell you that anyone who divorces his wife, except for marital unfaithfulness, causes her to become an adulteress, and anyone who marries the divorced woman commits adultery.

 

[마 5: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Again,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o the people long ago, 'Do not break your oath, but keep the oaths you have made to the Lord.'

[마 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But I tell you, Do not swear at all: either by heaven, for it is God's throne;

[마 5: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or by the earth, for it is his footstool; or by Jerusalem, for it is the city of the Great King.

[마 5: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And do not swear by your head, for you cannot make even one hair white or black.

[마 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Simply let your 'Yes' be 'Yes,' and your 'No,' 'No'; anything beyond this comes from the evil one.

[임성삼의 생각; 중요한 가르침이시다. 진리는 복잡하지 않다.

세상을 살면서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면 충분하다.

 

 다음의 공자의 말을 생각해보자.

子曰 由아 誨女知之乎인저 知之爲知之오 不知爲不知이 是知也니라 (논어 위정편 爲政十七)

 유(자로)야, 내 너에게 안다는 것을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다.]

 

[마 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Eye for eye, and tooth for tooth.'

[임성삼의 생각; 기원전 천 수백 년 전 모세가 전(傳)한 중요한 기준이다.]


[마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But I tell you, Do not resist an evil person.

If someone strikes you on the right cheek, turn to him the other also.

[마 5: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And if someone wants to sue you and take your tunic, let him have your cloak as well.

[마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If someone forces you to go one mile, go with him two miles.

[마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말라

Give to the one who asks you, and do not turn away from the one who wants to borrow from you.

[임성삼의 생각;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도 내밀어라"는 말씀이 나온 곳이다.]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Love your neighbor and hate your enemy.'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But I tell you: Love your enemies and pray for those who persecute you,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that you may be sons of your Father in heaven. He causes his sun to rise on the evil and the good, and sends rain on the righteous and the unrighteous.

 

[임성삼의 생각;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이 곳에서 시작되었다.]

 

[마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If you love those who love you, what reward will you get? Are not even the tax collectors doing that?

[마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And if you greet only your brothers, what are you doing more than others? Do not even pagans do that?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Be perfect, therefore,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임성삼의 생각; "완전해져라. Be perfect!" 이 말씀 속에 모든 내용이 있다.

"원수를 사랑하고", "오른 뺨을 맞거든, 왼 뺨을 돌려대"면 완전해진다.

 

대학(大學)의 다음의 구절이 "Be perfect!"와 일맥 상통한다.

 

君子 無所不用其極 군자 무소불용기극

군자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일이 없다 ]

 

[마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義)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Be careful not to do your 'acts of righteousness' before men, to be seen by them. If you do, you will have no reward from your Father in heaven.

[마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外飾; 겉을 꾸밈)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So when you give to the needy, do not announce it with trumpets, as the hypocrites(위선자; 가장(하기), 착한 체하는 사람) do in the synagogues and on the streets, to be honored by men. I tell you the truth, they have received their reward in full.

[마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But when you give to the needy, do not let your left hand know what your right hand is doing,

[마 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so that your giving may be in secret. Then your Father, who sees what is done in secret, will reward you.

 

[임성삼의 생각;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의 출전이다.]

 

[마 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外飾)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And when you pray, do not be like the hypocrites, for they love to pray standing in the synagogues and on the street corners to be seen by men. I tell you the truth, they have received their reward in full.

[마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But when you pray, go into your room, close the door and pray to your Father, who is unseen. Then your Father, who sees what is done in secret, will reward you.

[마 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And when you pray, do not keep on babbling like pagans, for they think they will be heard because of their many words.

[마 6: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Do not be like them, for your Father knows what you need before you ask him.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임성삼; 아래 부분은 기독교에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라는 뜻으로 "주기도문 主祈禱文"이라고 부른다. 신(神)께 인간이 기원하는 모범적인 내용(prototype; 수리학[水理學]에서 사용되는 protytype의 용법과는 다르다)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This, then, is how you should pray: "'Our Father in heaven, hallowed be your name,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日用)할 양식을 주옵시고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임성삼의 생각; 주기도문 끝. 우리가 신께 구해야 하는 것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자.

신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그날 먹을 음식을 바라고

우리가 잘 못한 일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내가 나쁜 일을 행하지 않도록 구해 주시기를 기원하는 것.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마 6: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For if you forgive men when they sin against you, your heavenly Father will also forgive you.

[마 6: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But if you do not forgive men their sins, your Father will not forgive your sins.

 

[마 6:16] 금식(禁食)할 때에 너희는 외식(外飾)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When you fast, do not look somber as the hypocrites do, for they disfigure their faces to show men they are fasting. I tell you the truth, they have received their reward in full.

[마 6: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But when you fast, put oil on your head and wash your face,

[마 6: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so that it will not be obvious to men that you are fasting, but only to your Father, who is unseen; and your Father, who sees what is done in secret, will reward you.

 

[임성삼의 생각; 겉으로 꾸미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다.] 

 

 

[마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Do not store up for yourselves treasures on earth, where moth and rust destroy, and where thieves break in and steal.

[마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But store up for yourselves treasures in heaven, where moth and rust do not destroy, and where thieves do not break in and steal.

[마 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For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your heart will be also.

 

 

[마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The eye is the lamp of the body. If your eyes are good, your whole body will be full of light.

[마 6: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But if your eyes are bad, your whole body will be full of darkness. If then the light within you is darkness, how great is that darkness!

 

[임성삼의 생각; 우리는 우리 정신의 빛을 밝게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임성삼; 아래 부분은 물질을 삶의 목적으로 여기는 사람에 대한 말씀이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No one can serve two masters. Either he will hate the one and love the other, or he will be devoted to the one and despise the other. You cannot serve both God and Money.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Therefore I tell you, do not worry about your life, what you will eat or drink; or about your body, what you will wear. Is not life more important than food, and the body more important than clothes?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Look at the birds of the air; they do not sow or reap or store away in barns, and yet your heavenly Father feeds them. Are you not much more valuable than they?

[마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Who of you by worrying can add a single hour to his life?

Qui de vous, par ses inquietudes, peut ajouter une coudee a la duree de sa vie?[불어 성경]

 

[임성삼의 생각; 우리말 성경과 다른 나라 성경이 차이가 나는 흔하지 않은 구절이다.

영어 성경은 "염려함으로 그의 생명을 단 한 시간이라도 연장할 수 있느냐?"이고,

불어 성경은 "염려함으로 그의 삶의 기간을 une coudee(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 약 50 cm)라도 더할 수가 있느냐?"이다.

원래의 언어로 하면 양쪽으로 모두 해석이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마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And why do you worry about clothes? See how the lilies of the field grow. They do not labor or spin.

[마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Yet I tell you that not even Solomon in all his splendor was dressed like one of these.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If that is how God clothes the grass of the field, which is here today and tomorrow is thrown into the fire, will he not much more clothe you, O you of little faith?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So do not worry, saying, 'What shall we eat?' or 'What shall we drink?' or 'What shall we wear?'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For the pagans run after all these things, and your heavenly Father knows that you need them.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But seek first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to you as well.

[임성삼의 생각; 하나님의 의(義)를 찾기 위해 물질적인 일에 마음을 쓰지 말라는 말씀이시다. 중요한 것과 부수적인 것의 차이를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Therefore do not worry about tomorrow, for tomorrow will worry about itself. Each day has enough trouble of its own.

[임성삼의 말; 나의 일생에 이 말씀이 매우 도움이 되었다. 살면서 큰 일을 만나 방황하게 되었을 때,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라는 말씀을 위안으로 삼고 그 날 할 일을 묵묵히 하느라고 노력하였다.

 

내가 힘든 때 선친께서는 일본의 덕천가강의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자면, 매 순간이 괴로우며 매 순간 무거운 짐을 내리고 싶다. 그러나 덕천가강은 70 세가 넘도록 무거운 짐을 지고 멀리까지 나아갔다. 그 결과 일본의 250 년 평화를 확립하였다.

 

바로 눈 앞에 있는 오늘의 일을 서두루지 않고 성실하게 하는 것이, 내일의 일을 걱정하고 있는 것보다 나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분명하다.]

 

[마 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Do not judge, or you too will be judged.

[마 7: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For in the same way you judge others, you will be judged, and with the measure you use, it will be measured to you.

 

[임성삼의 생각; 이런 자세가 필요한 것 같다. 논어에 다음의 이야기가 있다.

子曰 不在其位 不謨其政 부재기위 불모기정 (논어 태백편 泰伯十四)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서 함부로 정치를 계획하면 안된다]


[마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Why do you look at the speck of sawdust in your brother's eye and pay no attention to the plank in your own eye?

[마 7:4]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How can you say to your brother, 'Let me take the speck out of your eye,' when all the time there is a plank in your own eye?

[마 7:5] 외식(外飾)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You hypocrite, first take the plank out of your own eye, and then you will see clearly to remove the speck from your brother's eye.

 

[임성삼의 생각; 스스로의 허물을 모르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격렬한 꾸짖음이다. "먼저 네 눈속의 들보를 빼어라"

노자(老子)가 공자를 만났을 때 심하게 꾸짖은 것도 이런 개념에서였다고 생각된다.]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Do not give dogs what is sacred; do not throw your pearls to pigs. If you do, they may trample them under their feet, and then turn and tear you to pieces.

 

[임성삼의 생각; 아직 이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간혹 이 구절이 떠오르는 상황이 있다.]

 


[마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Ask and it will be given to you; seek and you will find; knock and the door will be opened to you.

[마 7: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For everyone who asks receives; he who seeks finds; and to him who knocks, the door will be opened.

[마 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Which of you, if his son asks for bread, will give him a stone?

[마 7: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Or if he asks for a fish, will give him a snake?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If you, then, though you are evil, know how to give good gifts to your children, how much more will your Father in heaven give good gifts to those who ask him!

 

[임성삼의 생각; 큰 약속이시다.]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So in everything, do to others what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 for this sums up the Law and the Prophets.

[임성삼의 생각; 대단히 중요한 행동 지침이다. 공자도 거의 동일한 말을 여러번 하였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 기소불욕 물시어인](논어 안연편 顔淵二)


子貢이 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잇가 子曰  其恕乎인저 己所不欲을 勿施於人이니라 (논어 위령공편 衛靈公二三)

자공이 물었다. 단 한마디말로 종신토록 행할수 있는 말이 있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바로 서(恕; 용서할 서, 밝게 알다)일 것이다. 자기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올 해에 많은 책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살아가는데는 위의 예수님 말씀 이상의 규범이나 책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Enter through the narrow gate. For wide is the gate and broad is the road that leads to destruction, and many enter through it.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But small is the gate and narrow the road that leads to life, and only a few find it.

[임성삼의 생각;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는 의롭다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원하신 길을 가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이 말씀을 하시던 때도 그렇고, 지금도 상황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진실된 길을 가기 위해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살아가는 방향과는 다른 길을 택해야 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고 생각한다.

 

위의 두 구절은 앙드레 지드의 소설 "좁은 문"의 제목이 나온 곳이다.]

 



"김교신 신앙저작집 제 4 권"의 팔복(八福) 해설

 

 (전체 양이 너무 많아 앞에서 5 가지 복에 대한 해설까지만 옮긴다.)

 

 백과사전 브리태니커에는 김교신에 대한 설명이 상당히 길다. 그러므로 한메 디지털 세계 대백과에 있는 내용을 옮긴다.

(브리태니커에서 김교신에 대한 개요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일제강점의 민족적 수난기에 종교적 구제와 사회적 구제의 더 높은 차원에서의 결합을 보여주는 실천적 차원의 구제신앙을 추구하였다.")

 

 김교신 金敎臣 1901∼1945   한메 디지털 세계대백과

 

 종교인·교육자. 함흥 출생. 일본의 종교사상가 우치무라 칸조[內村鑑三〕의 문하에 들어가 7년간 배운 후에 도쿄〔東京〕 고등사범학교 지리박물학과를 졸업했다. 도쿄에서 노방(路傍; 길가) 설교를 듣고 결심, 1920년 성결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귀국 후 함흥영생고보·양정고보 교사로 박물학을 가르쳤다.

 

 남강 이승훈(李昇薰; 1864∼1930)과 교유했고, 함석헌(咸錫憲; 1901∼1989)·송두용(宋斗用)·정상훈(鄭相薰)·유석동(柳錫東)·양인성(楊仁性) 등과 함께 잡지 《성서조선(聖書朝鮮)》을 창간, 그 주필이 되었다.

 

 저서 《산상수훈연구(山上垂訓硏究, 1933)》를 발간했고, 이어 함석헌과 공저로 일문(日文)으로 된 《우치무라 칸조와 조선(1940)》을 간행했다.

 경기중학 교사가 되었으나 불온분자라 하여 6개월 만에 물러났으며, 개성의 송도고보(松都高普) 교사로 부임하여 민족주의 교육을 실천하였다. 《성서조선》 158호 권두언에서 항일민족사상을 풍유적(諷喩的)으로 표현한 《조와(弔蛙)》가 검열에 걸려, 함석헌 등과 함께 투옥된 <성서조선사건>에 연루되었다. 노평구(盧平久) 편찬의 《김교신 저작집》이 있다.▣]

 

 

[이 책의 서문; 산상수훈에 대해 잘 정리된 간략한 이야기이다.]

 

 기독교를 알려면 성서 본문을 읽는 것이 기독교에 관한 아무런 유명한 문헌을 뒤지기보다 제일 빠른 길이다. 특히 신약성서에는 간결한 중에 기독교 전편의 진리가 구현되어 있으므로 방대한 경서를 자랑하는 타종교에 비하여 신자 혹은 연구자의 편익(便益)이 불소(不少)하다.

......

 

 예수는 교훈을 중요시하셨다. 예수의 전도생활에 기적이 없음이 아니었으나, 기적은 부득이한 경우에 한한 것이었고, 주요 목적은 하늘나라의 도(道)를 전함에 있었다.

 

 마가의 전한 바에 의하면,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가 갈릴리에 이르러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다."(1장 14 절)하였고, 악귀(惡鬼)를 축출하고 열병을 즉석에서 고쳤다는 등 소문을 듣고 갈릴리 사방에서 찾아온 군중을 대하였을 때 예수는 오히려 헛된 군중을 피하여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도를 전파하리니 내가 오기는 이를 위함이로다"(마가 1.31)하여 그 사명(使命)을 명쾌히 지적하였다.

 

 오천 명에게 떡 먹인 기적을 행한 후에, 예수는 군중을 피하여 혼자 산으로 물러가셨고, 가버나움까지 따라온 무리를 대하여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이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을 양식을 위하여 할지어다"(요한 6.15, 26.27)라고 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군중의 욕구하는 바와 예수가 주시려는 바와는 천양(天壤; 하늘과 땅)의 차가 있음을 알게 하였다.

 

 이 영생의 양식은 흔히 교훈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냉정한 정신으로써 예수의 교훈 중의 어느 하나라도 충실히 연구함으로써 기독교 전체를 대관(大觀)할 수도 있고 또 그가 전하려고 하여 마지 않으신 영생의 양식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산상수훈(山上垂訓)은 누가에는 30 절로 되어 간결하고, 마태에는 1백 7 절로 되어 좀더 충족하다.

양으로 보아도, 예수의 교훈 중 가장 길고 완비한 것이며, 특히 그 내용으로 보아 이는 교훈 중으로 보아도, 예수의 교훈 중 가장 길고 완비한 것이며, 특히 그 내용으로 보아 이는 교훈 중에서도 모범될 만한 것이다.

 

 ...이 설교에서는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가 유감없이 자기 인격을 약동케 하여 독자로 하여금 인간 예수에게 더욱 친근한 감을 갖게 한다.

 

 산상수훈의 명칭은 영어의 The Sermon on the Mount, 독일어의 Die Bergpredigt 등의 한역(漢譯)으로 된 것인 듯하나 이것은 모세의 율법보다 더 완전한 율법이 아닌 것은 물론 훈계나 설교도 아니다. 이를 천국의 가신(嘉信; 아름다운 편지) 혹은 "천국의 복음"이라 하는 것이 그 "사랑의 선언"인 내용을 전함에 부합한 명칭이 될 것이다.

 

 이 가신(嘉信)을 전파한 장소는 산이라 하였으나, 시나이산(山)과 같은 높고 험한 산이 아니었고, 갈릴리 해변의 한 작은 언덕이었었다. 산에 정관사가 붙어서 새 oros라 하였으니, 예수께서 자주 기도하시던 장소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작은 언덕에는 작은 새가 나무 사이와 숲 사이에서 노래하고, 백합화가 각하(脚下; 발 아래)에 만발하여 천국의 음신(音信)을 전파하기에 적합한 만춘(滿春)의 아름다운 경치였던 것도 산상수훈 중에서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다음으로 주의할 것은 "복스럽도다, 마음이 가난한 자(者)는"하여 발단(發端)의 초(初) 일성(一聲)으로부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나 칸트의 물(物)과 심(心)의 전환보다도 더 위대하게, 더 근본적으로 인생가치의 척도(尺度)를 전도한 이 혁명적 교훈의 배후에는 간밤의 기도가 있었던 사실이다(누가 6.12). 이것이 예수의 교훈에 항상 권위가 있고, 생명이 있어, 학자의 설교와는 다른 바 있었던 까닭이다. 개벽 이래의 최대설교에 접할 때에 우리도 마땅히 기도로써 응수(膺受)할 것이다. 은밀한 골방의 기도(6.6) 사적 기도로서의 성령의 교통만이 이 천래(天來)의 복음을 해득하는 데 최대 주석책이요, 또 유일의 열쇠 되는 것을 명심하면서 본문에 들어갈 것이다.  .......

 

[임성삼의 이야기; 이상이 서문이다.]

 


김교신의 팔복(八福) 해설

 

1. 심령(心靈)이 가난한 자(者)

마태복음 5 장 1 - 3 절(참조 누가 6.20)

 

1. 예수께서 무리들을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오거늘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마음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 산상수훈을 새로운 율법으로 해석하여

불신자(不信者)에게는 과도히 준엄한 것이나, 제자들에게는 감당할 만한 것인 것처럼 설명하려 함은 단지 기독교 신도의 편견에 불과한 것이다. 산상수훈이 불신자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엄(高嚴; 높고 엄함)한 것일진대, 또한 신도들에게도 같게 견딜 수 없는 무거운 율법이 되고야 말 것이다

 

 기독교도가 이교도에 대하여, 교회신자가 비교회신자에 대하여, 선교사배(輩)가 피선교민족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도덕상 차이가 있는 것처럼 우월감을 가지는 것은 마치 전년(前年)에 일인(日人) 의학박사 구보 아무게가 조선인의 두골을 재어 갖고 미개인종이라고 증명하려 하다가, 불행히 그 학설이 확립되기 전에 자기 자신이 정신병실에 수용을 당하여 요절(夭折)하였던 것처럼 다 허망한 생각이다. ...

[임성삼의 주(註); 독일 히틀러의 통치 시절, 독일에서도 여러 학자가 유태인, 슬라브인이나 흑인이 열등 민족이라는 학설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 결과 오히려 독일 민족이 열등하다는 것이 밝혀진 경우가 많아 이에 대한 연구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군중의 착석함을 기다려 예수는 입을 열어 가르치시기 시작하였다. 누가복음 6 장 20 절에는 "예수 눈을 들어 제자를 보시고" 시작하셨다고 했다. 평화로운 언덕 위에서 바늘이 떨어짐을 오히려 감각할 만한 정숙한 청중 위의 침묵의 공기가 깨뜨려졌을 때 "눈이 다시 보지 못하였고 귀가 아직 듣지 못하였던" 천지개벽 이래 초유(初有)의 새로운 음파가 산록(山麓)을 잔잔히 흘러 내리게 된 것이었다.

 

 개구(開口)의 처음 일성(一聲)은 축복의 8 회 연발이었다. 이것은 축사(祝辭), 지복(至福), 혹은 복언(福言 The Beatitudes)이라 하여 산상수훈 전체의 특질을 명확히 하는 것이므로 마태복음 5 장 제 3 - 10 절을 아래와 같이 원문의 순서대로 직역하여 해독(解讀)을 도울까 한다.

3. 복스럽도다, 가난한 자들은, 심령(心靈)에.

  까닭이다, 저희 것인, 천국(天國)은.

4. 복스럽도다, 애통하는 자들은.

  까닭이다,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5. 복스럽도다, 온유한 자들은.

  까닭이다, 저들이 땅을 차지할.

6. 복스럽도다,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의(義)에.

  까닭이다, 저들이 배부름을 받을.

7. 복스럽도다, 자비한 자들은.

  까닭이다, 저들이 자비함을 받을.

8. 복스럽도다, 결백한 자들은, 심정(心情)에.

  까닭이다, 저들이 하나님을 볼 것인.

9. 복스럽도다, 화목케 하는 자들은.

  까닭이다, 저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10. 복스럽도다, 핍박을 받는 자들은, 의(義)를 위하여.

  까닭이다, 저희 것인, 천국(天國)은.

 

 이처럼 산상수훈은 축복으로써 시작되었다. "복스럽도다"라는 말이 초두(初頭)에 8 회나 반복, 고조되었음에 주의할 것이다.

 

이 복스럽다는 원어 makarios는 영역(英譯)에 blessed로 되었으니, 흔히 행복이라고 번역하는 happy와는 그 의미하는 바에 작지 않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에 합당한 역어(譯語)를 발견하기 어려우나, 지금 blessedness를 "축복"이라 하고 happiness를 "행복"이라고 번역하면, 축복은 행복보다 더 높은 것이다.

 

 행복은 외계(外界)로서 오는 바 경우의 영향을 받는 것이고, 축복은 환경이 지배할 수 없는 영혼 속에서 용출(湧出)하는 내적 환희(歡喜)의 샘을 의미하는 것이다. 축복은 하나님과의 정당한 관계로써 사람된 자의 진정한 도(道)를 걷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세간에서 불행한 자로 일컫는 자 중에도 축복받은 자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행복"이 단지 인간적인 행복을 의미한다면, "축복"은 하나님 편에서 본 바 즉 천국적인 행복을 의미한다.

 

 그러면 하나님 편에서 보시는 바 "축복 받은 자". 진정한 의미의 행복자는 과연 누구인가? 여하한 의미로써든지 부자가 행복자라 함은 개벽이래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변할 수 없는 떳떳한 도리(道理)였다.

 

그런데 예수는 선언하였다.

 

 너희 빈자(貧者)가 복이 있도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요(누가 6.20)

...

 

 빈자라 함은 성(聖) 누가가 전한 바와 같이 단순한 물질적인 빈자로 해석할 수 도 있다. 즉 토지, 금은(金銀)을 소유함이 없고 가옥(家屋), 의류(衣類)에 유족(有足)치 못한 자가 행운자(幸運者)이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한다.

 

 빈자(貧者)의 고통은 빈자라야 안다. 이 일구(一句)가 궁중에 기거(起居)하는 법왕의 훈유(訓諭)가 아니고, 구유에서 나고 목공(木工)의 집에서 자란 나사렛 예수의 말씀인 것에 중량이 있는 것이다.

 

 가난한 그것이 곧 천국을 획득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빈자로 난 것이 부자로 난 것보다 일반적으로 유익한 결과를 낳는 것은 널리 역사상에서도 볼 수 있는 사실이다. 특히 천국(天國)에 들어감에는 부자보다 빈자가 유리함이 많다. 예수께 와서 영생(永生)의 도를 묻던 청년은 그 소유, 재산이 많음으로 인하여 "얼굴이 변하고 근심하며" 물러갔다(마가 10.17 - 22).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동(同) 25 절)는 것은 예수의 말씀이었다.

 

가난한 것은 방해됨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천국을 향하는 자극이 되는 것이니, 빈(貧)은 소원할 만한 처지요, 복스러운 은혜의 자리임을 알 것이다.

 

 이미 빈자가 축복받을 자일진대, 빈자 중에도 그 정도의 심한 자가 더 복스러울 것은 명확한 일이다. 빈자 중 가장 심한 빈자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외에 정신적으로 가난한 자이다. 물자(物資)에 빈핍(貧乏)한 자라도 소위 청빈을 즐기는 경우에 달하면 오히려 부자의 심리(心理)를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성(聖) 마태는 주도면밀하게 "심령(心靈)이 가난한 자"라 하였다.

 

심령(心靈, pneuma, spirit)이 가난하다 함은 공자의 이른바

德之不脩 덕지불수, 學之不講 학지불강, 聞義不能徙 문의 불능도, 不善不能改 불선 불개야, 是吾憂也 시오우야.

[임성삼의 주(註); 이 시절만 해도 위의 글을 한자로만 적어 놓아도 읽는 사람들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이 뜻은 아래와 같다.

덕을 닦지도 못하고, 배운 것을 가르치지도 못하였으며, 옳은 것을 듣고 따르지도 못하였고, 착하지 못한 것을 능히 고치지도 못한 것. 이것들이 나의 근심이다. 논어 제 7 편 술이]

라 하여 학식(學識)으로나 제반 덕행(德行)으로나 내심(內心)에 수긍(首肯)할 아무 것도 인식할 바가 없는 자를 이름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최대 빈자(貧者)의 하나는 사도(使徒) 바울임을 알 수 있다. 그는 고백하여 말하기를

 

 대개 내 속 곧 육체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아노니, 선행하기를 원하는 마음은 내게 있으나, 그대로 이루는 것은 없는지라. ......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死亡)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

 

고(로마서 7.18 - 24).

仰不愧於天 俯不恥於人 앙불괴어천 불치어인

[임성삼의 주(註); 자주 인용되는 글이다. 단지 부끄러울 "치"자를 부끄러워할 "작(여기서는 지원되지 않는 한자)"으로 적는 경우가 많다.

위를 보아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아래를 보아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다, 맹자의 진심장구 상편에 나오는 글.]

하는 동양적 군자(君子), 교리의 정통을 자랑하는 기독교 신도, 독특한 체험을 고집하여 신앙적 교만에 스스로 머무는 고등신자 등등은 몸은 비록 유형적으로 적빈(赤貧)에 처하였을지라도, 무형적 거부(巨富)를 장악하고 있는 자들이다. 부자인 점은 유형, 무형이 모두 일반이다.

 

심령상의 가난한 사람을 알기 위하여는 예수의 비유 중 제일 적확(的確)한 것이 있다.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할 새, 하나는 바리새 교인이요, 하나는 세리(稅吏)라.

 바리새 교인이 서서 스스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내가 감사하옵기는 나는 다른 사람과 같이 토색하고, 불의하고, 음란하지 아니하고 또한 이 세리(稅吏)와도 같지 아니함이니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하고, 다만 가슴을 쳐 가로되 "하나님이여, 이 죄인(罪人)을 불쌍히 보소서. 나는 죄인(罪人)이로소이다"하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은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얻어 집에 돌아갔느니라.

대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반드시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더라(누가 18.9 - 14). "심령이 가난한 자"란 것을 이보다 더 명백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이러한 빈자(貧者)가 복스럽다는 것이다.

 

 아래의 부분에 원어(原語)의 순서가 "저의 것인, 천국(天國)은 ..."이라고 된 데 주의하여야 한다. "누가 천국의 시민이 될까?"하는 문제는 당시 유대인에게는 중요문제였다. 누가 천국을 소유할까? 학자(學者), 도인(道人), 성현(聖賢), 군자(君子)가 아니요, 오히려 세리(稅吏), 창기(娼妓)일지라도 그 심령에 가난한 자가 소유할 것이라 한다.

 

 또한 "천국은 저의 것이다"는[의] 동사 estin은 3인칭 단수 현재형이니, 천국은 미래의 완성을 기다릴 것이 없이 지금 당장 겸비(謙卑; 겸손하고  비처함)한 자(者)의 개인적인 소유가 된다고 한다. 위대한 선언이 아닌가?

 

[임성삼의 주(註); 앞에도 있으나 다시 몇 나라의 말로 번역한 이 구절을 적는다.

심령(心靈)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虛心的人 有福了, 因爲天國是他們的  허심적인 유복료, 인위천국시타문적(중국어 성경)

마음이 비어 있는 사람

Heureux les pauvres en esprit, car le royaume des cieux est a eux!(프랑스어 성경)]

 

 

2. 애통(哀痛)의 축복

마태복음 5 장 4 절(참조; 누가 6.21)

 

복스럽도다, 애통하는 자들은. 까닭이다,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것인.

 

 누가 복음에는 "너희 이제 우는 자가 복이 있도다. 너희가 웃을 것이요. ...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6. 21, 25)하였는데 여기 애통이라 함은 아주 심각하고 절통(切痛; 몹시 원통함)한 비탄을 말하는 것이다.

 

 축복의 제 1 "심령이 가난한 자 복스럽다"는 일구(一句)에서, 그 인간가치의 척도가 전도됨이 심함에 놀랐던 자는 다시 제 2의 축복에 접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희락과 환소(歡笑)를 원함은 인간 세상의 통칙이다. 그런데 예수는 "애통하는 자, 통곡하는 자가 축복받은 자"라 선언하셨다. 그 생각의 차, 가치표준의 차가 심한 것이 마치 하늘과 땅, 동과 서가 상극함보다 더하도다.

 

 뿐만 아니라, 예수 자신도 이런 비애의 사람이었다. 허다한 예수의 성상(聖像) 중에서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作)이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은 예수의 이 중요한 성격을 전하는 까닭이라 한다. 가난의 곤궁을 체험한 자로서 가난의 축복을 말하고, 환난의 골짜기를 통과한 자가 비애의 행복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산상수훈의 일언(一言)일구(一句)가 모두 예수 자신의 인격과 체험을 통과한 것이어서, 교훈이 즉 그 자서전이라는 견해는 이 제 2의 축복에서도 명백히 나타났고, 또 우리로 하여금 교훈에 더욱 친근케 하고, 생생한 말씀을 눈 앞에 보게 한다.

 

 비애와 통곡! 이것은 만인이 다 꺼리는 것이요, 온 세상이 피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환소와 희락을 오히려 화 있다 하여 피하라 하셨고, 사도 야고보도 같게 말하였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며,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

고(야고보 4.9). 애통은 진실한 것이요, 희락은 부허(浮虛)한 것이다. 환소는 일시에 지나갈 것이요, 비애는 인생에 오래 머무를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며,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하였다. 그러나 비애와 통곡이 다 가(可)한 것이 아니다.

 

 대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요 후회할 것이 없거니와, 세상 근심은 죽는 것을 이루느니라.

는(고린도 후서 7.10) 바울의 말과 같이 근심에도 두 가지가 있다.

 

 정욕과 육을 본위로 하는 세상 근심과 걱정은 사람의 골수(骨髓)를 마르게 하며, 생혈(生血)을 고결(固結)케 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 이런 종류의 근심은 하루 하면 그만큼 검은 머리가 희게 될 것이요, 이틀을 계속한다면 그만큼 생명을 단축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즉 영(靈)을 본위로 한 비애, 자기의 학식부족, 덕성결핍, 외적 내적으로, 유형 무형으로 참말 심령에까지 빈자인 것을 통감하는 때의 비탄(悲嘆), 동포와 인류의 구원에 관한 근심, "창조함을 받은 우주만물이 썩어짐의 종됨을 장차 벗어나, 하나님의 뭇 자녀의 영광을 얻어 자유에 이를 것"(로마 8.21, 22)을 모두 애통해하는 우주적 비애, 이러한 애통은 전혀 고귀한 애통(noble sorrow)이다. 이 애통은 있을수록, 심각할수록 심령을 고결케 하고 생명을 소생케 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천로역정을 쓴) 번연이 눈물 많은 생애를 보냈고, 루터에게 비탄이 깊었고, 예레미야가 눈물을 먹고 자라서 눈물을 뿌리면서 예언하였었다. 누가 이 고귀한 비통의 골짜기를 통과하지 않고 진정한 "선지자"의 이름에 해당한 자 있었으며, "위대"라고 할 만한 생활을 한 자가 있었던가? 우리는 모른다. 취생몽사(醉生夢死)하는 하루살이와 같은 생활보다 애통에 각성한 자가 행복스러운 자라 함은 문자 그대로 진리이다.

 

[임성삼의 주(註); 이 분의 말씀에 틀린 점이 없으나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나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셨다고 생각한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는 이처럼 애통하는 자에 대하여 "위로함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이 "위로함을 받는다"는 뜻은 보통 인간사회에서 말하는 위로나 혹은 위안과는 무척 차이가 있는 것이다. 가령 창세기 37 장에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팔고서, 그 저고리에 피를 묻혀 부친 야곱에게 갖다 주고, 요셉이 죽었음을 전하였을 때 "모든 아들들과 딸들이 야곱을 위로하려 하였으나, 저는 위로 받기를 거절하고 말하기를 '나는 통곡하며 무덤으로 내 아들 있는 데까지 갈 터이다'하였다"(35 절). 이 같이 라헬도 그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를 받지 아니하였었다(마태 2.18). 입술로 하는 위로, 외적으로 하는 인간적인 위로는 도저히 진정한 위로를 주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가 선언하신 위로는 이 애통의 근원을 제거하는 위로였다. 그러므로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하였다(요한 14.27). 이 위로는 현재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까지 받을 수 있으나, 특히 고귀한 애통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충분히 된 자에 대하여 내세의 충족을 약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 1 축복이 현재 동사임에 반하여, 이 제 2 축복의 약속은 미래 동사로 되어 있다. "이제 고난 받는 것과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비교하면 족히 비교할 수 없느니라"(로마 8.15)는 바울의 말은 이것을 가르침이요, 요한 묵시록에

 

 내가 신천지(新天地)를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바다도 또한 다시 있지 않더라. 내가 또 보매 거룩한 성, ....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 저희의 하나님이 되고, 눈물을 눈에서 다 씻기시매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과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일이 다 지나감이라.

 

고 하였음은(21. 1 - 4) 그 구체적인 시현(示現)이다.

 

 기독교도에게 애통이 없지 않다. 도리어 심각한 비탄과 뜨거운 눈물이 많다. 의인에게 환난이 많고, 애자(愛子)에게 매가 잦은 법이다. 그러나 "눈물을 눈에서 다 씻기시는" 날을 기다리며, 우리는 "복스럽도다, 애통하는 자는 위로함을 받을 것임이라"는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 행복스러운 처지를 발견하여야 할 것이다.

3. 온유한 자

                                                                                                마태복음 5 장 5 절

복스럽도다, 온유한 자들은. 까닭이다, 저들이 땅을 차지할 것인.

 

...... 자연과학자는 말한다. 약육강식(弱肉强食)과 우승열패(優勝劣敗)는 천연(天然)의 법칙이라고. 또 정신과학자는 이에 응하여 힘은 정의다, 승즉관군, 패즉적이라고. 이를 갈고 발톱을 기르는 맹수나 완력, 금력, 지력(知力)을 측적하는 개인이나 육군, 해군, 공군을 확장하는 국가나 그 목적은 다 일반이다. 어떻게 하든지 타(他)를 배격하거나 위압하거나 회유하여 자기가 강자의 행복을 차지하려는 심사(心事)는 [새로 태어난] 뻐꾸기와 같은 것이다. 포악한 자가 강성하고 유순한 자가 쇠퇴하는 것은 밤낮으로 목도(目睹)하는 사실이다. 하늘이 높고 땅이 낮은 것처럼 변할 수 없는 철칙(鐵則)이다.

 

 그런데 예수는 선언하신다. 강폭한 자가 아니요, 온유한 자가 복스럽다고.

 

 온유의 원문 praus는 온화, 유순(柔順), 겸손, 온량(溫良), 참음 등을 의미한다. 성질이 관대하여 훼손(毁損), 경멸을 당할지라도 쉽게 격노하지 않고, 초급(樵汲), 역기(逆氣)함이 없고 오히려 악을 행하는 자에 대하여

出乎爾者 反乎爾哉 출호이자 반호이재

[임주(任註);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려보낸다]로 눈으로 눈을 갚고 이로써 이를 갚는다기 보다 차라리 피해 수욕(受辱)한 대로 참기에 능한 자 특히 하늘에 반역치 않는 것, 하나님이 내리신 모든 곤고(困苦), 환난을 달게 받는 성질을 이름이다. 이런 성질을 가진 자가 복스럽고 장차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사실과 멀기 심하다. 그러나 예수는 행복의 표준을 이처럼 전도시킨 것이다.

 

 온유한 자는 현세에 처하여 열패자(劣敗者)가 안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고래(古來)로 진정한 기독신자는 이 열패자의 지위에 자처하였다.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오물(汚物)과 만물의 때와 같으니라"(고린도 전서 4.13)는 것이 초대 신자의 처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 자신이 이대로 온유한 성격이었다.

 

 "저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휼도 없었느나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발악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자기를 부탁하셨다."(베드로 전서 2.22 이하). 또한 이사야의 예언한 바......

 

 이에 "온유"라 함은 단지 "유약(柔弱)"이라든가 "문약(文弱)"이라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한신이 불량배의 다리 밑으로 기어나갈 때에 저는 유약한 비겁자인 까닭이 아니었다. 오히려 저에게 영웅적 기개(氣槪)가 있었으므로 그처럼 온유할 수 있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나으며,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쳐서 빼앗기보다 나으니라"(잠언 16.32)

는 것은 알렉산더 대왕의 고백을 기다리지 않고라도 사실이다. 사람과 사회에 대한 온유한 자의 그 온유의 깊은 곳에는 "공의로 심판하는 자에게 부탁하는" 신뢰가 있다. 예수의 경우가 그것이었고(마가 15 장), 욥의 순종이 또한 이에서 발원한 것이었다. ......

 

 맹호와 사자는 종적을 끊게 된 때에 유순한 소와 양은 오히려 온 땅에 차게 하시는 이가 또한 이 천지와 그 안의 만물을 온유한 자에게 차지시킬 것을 약속하셨다.(창세기 1.26, 로마서 8.32). 일세의 영웅아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한가로운 세월을 보내게 된 때에 나사렛 예수의 약한 생애와 구주의 천지를 석권하던 자기 신세의 말로를 비교하여 장탄식(長歎息)을 마지 못하였다 한다. 과연 예수는 온유한 자의 모범이었고 또한 땅을 차지하여 완전히 만왕의 왕이 된 자다. 우리도 저와 같이 온유하여 학대에 견디면 또 저와 같이 될 것이다.(로마서 8.17)

 

[임성삼의 생각; 실제로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 예는 많이 있다.

또한 지금 온 지구상에서 강한 육식동물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멸종된 것이 사실이다.]

 

 

4.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태복음 5 장 6 절

복스럽도다, 기갈한 자들은, 의에.

까닭이다, 저들이 배부름을 받을 것인.

 

 정의를 동경하는 마음은 인류의 가장 절실하고 순진한 심정의 발로이다. 멀리 신화시대로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사실(史實)을 상고(詳考)하면서 듣는 자, 읽는 자가 혹은 눈물겨워하고 혹은 한숨지어 비탄을 나누는 것이라든가, 동화나 전설 중에 나오는 형된 자를 미워하고 아우된 자를 동정하는 심사(心事)는 그 어느 편에 친소(親疎)나 정실(情實)이 있어서 된 것이 아니고 다만 정의감의 충동이 발로된 것뿐이다.

 

 제갈공명의 출사표에 함루(含淚)하고 조자룡의 무운을 기구하는 자 위왕의 적군뿐이 아니요, 선죽교에 눈물 씻고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한 봉래산의 제일봉(第一峰)을 쳐다보고서 만장의 기염(氣焰)을 토하는 자가 필왈 이조 오백 년의 불우(不遇)의 신하들 뿐이 아니다.

 

 정의다, 정의다! 부당한 대우를 배격하고 당연한 도리가 통용되기를 희구(希求)하는 마음, 이는 어린이의 소원이요, 또한 어른의 욕망이다. 문화인의 창도(唱導; 앞장 서서 부르짖음)하는 바요, 또한 야만인의 사모하는 것이다. 아니 우주만물이 모두 완전한 정의의 현실을 대망하면서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로마 8:21, 22).

 

 정의(正義)는 우주의 법칙이요, 인류의 공도(公道)인 것 같다. 그러므로 아무런 폭군이라도 정의의 명분을 빌지 않고는 단기(單騎) 일병(一兵)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바로' 왕의 이스라엘 추격에서, 카이젤의 선전포고와 미국의 남북전쟁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이고 정의를 표방하지 않고 개전한 것은 없었다. 우주가 불의를 용납 안함을 이미 알고 있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정의는 우주의 원형리정(元亨利貞)이요, 제왕 후백(侯伯)으로부터 서민, 초부(樵夫)까지 공통으로 원하는 바라 하면 하필 그리스도는 이처럼 평범한 것으로써 제 4 축복을 선언하셨는가?

 

 정의(正義)는 만인, 만국이 다 요구하는 것이나 동시에 만인, 만국이 다 회피, 배격하는 것이다. 모순의 대(大)와 역설이 심함이 이보다 클 것이 없다. 그러나 사실이다. 사회가 인정하는 "어떤 정도까지"의 정의(正義)는 통용된다. 신축(伸縮) 변태(變態)가 자유자재한 정의는 세상이 환영한다. 각 계급의 정의가 있고 각 종파의 정의가 있고, 국민으로서의 정의가 있고, 민족으로서의 정의가 있고, 유년시대에 강요한느 정의가 있고, 장자(長者)된 후의 정의란 것이 따로 있어 각기 그 국한된 범위에 배회하면서 과(過)하지도 않고 불급(不及)함도 없고, 열(熱)하지도 않고 냉(冷)하지도 않고, 극악의 인(人)도 아니어서 다소의 선(善)과 의(義)도 행하는 자가 세상이 인정하는 소위 중용(中庸)의 인(人)이요, 정의의 인(人)이다.

 

 이에서 일보(一步)라도 초월하면 의를 행하는 것이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되고 위험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초등교육에서 정직하라고 가르침은 가(可)하나 현대의 성인을 향하여 정직하라 함은 마치 자살하라고 권함이나 마찬가지다. 유년시대에 정직한 것은 오히려 기특하다마는 성인이 정직한 것처럼 현세의 폐물인 것은 다시 없다.

 

 금주(禁酒) 단연(斷煙)은 유년시대로부터 미덕으로 장려하고 근일에 이르러는 교회나 구세군의 설교뿐 아니라 신문, 잡지까지도 통계상 수자를 열거하여 그 실행을 종용(慫慂)하건만 여전히 금주단연은 입신출세(立身出世)하려는 자에게 다른 아무런 덕성의 결함보다도 더 큰 장해를 주어 마지않는다. 타(他; 그대)는 추지(推知; 미루어 생각하여 앎)할 것이다.

 

 의(義)는 행할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의를 행하면 견딜 수 없다 한다. 의를 행하는 곳에 증오(憎惡)가 생기고 핍박이 따른다. 이것이 세상의 실상(實相)이다. 역시 공중(空中)의 권세 잡은 자가 지배하는 곳이다. 이 세상에서 사회가 칭찬하는 의인 됨으로써 만족치 않고 모든 인습과 제한을 초월하여 진실로 정의를 추궁하여 갈(渴)한 자가 물을 찾고, 주린 자가 식물(食物)을 찾는 것처럼 급박한 필요에 응하고자 돌진하는 순정(純情)과 지성(至誠)으로써 의를 행할 때에 훼손(毁損)과 압제(壓制)는 준비하였던 것처럼 주위를 포위한다. 악마와 세상의 자식들은 교묘한 술책과 감당할 수 없는 악독으로써 의를 행하는 자를 차질(蹉跌)케 하고 선을 조성케 하려는 것까지도 방해한다.

 

 이러므로 그리스도는 특히 의에 기갈(飢渴)한 자를 축복하신 것이다. 타산지석(他山之石)과 같은 입장에서 의를 찬양치 않는 이는 세상에 일인(一人)도 없다. 인생을 출발하는 청년기에는 매일 삼시(三時)의 식사를 욕구하는 정도로써 의에 준거(準據)하려는 자는 차라리 많다. 그러나 이런 정도로써 의를 행하려든 자는 세상이 의를 행함에 부적(不適)한 장소임을 발견할 때에 대다수는 세속에 항복하여 원활(圓滑)하게 타협하여 버리고 소수의 비교적 강한 자라야 소위 "탈속(脫俗)"하여 산중이나 광야에서 독선기신(獨善其身)하는 정도이다.

 

 이런 것은 의(義)에 대하여 주리고 갈(渴)한 것이 아니다. 기(飢)와 갈(渴)이라 함도 경험이 없이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저 하일(夏日)에 갈증이 심할 때는 우마(牛馬)의 발자국에 고인 물과 논의 물이라도 오예(汚穢)를 생각할 여지 없이 달게 마실 수 있고, 고산 위의 잔설(殘雪)과 사막에서 낙타의 위액(胃液)을 분배할 때며, 여러 날 단식한 후에 일시반(一匙飯; 숟가락 시)과 채소 한 잎을 얻었을 때의 경험, 체면도 없고 친우의 정의도 불고(不顧)하고서 일편(一片) 일적(一適)까지라도 섭취(攝取)하고야 말려는 그 기갈(飢渴)로써, 의를 행하여 백절불굴(百折不屈)하고 악과 싸우며, 만난(萬亂)을 배(排)하고라도 정의를 세워 완성하려고 애쓰며, 모든 조소와 압제와 훼손(毁損) 중에서도 정의를 단념하지 않는 자 이런 자를 향하여 그리스도는 특히 장려하시고 축복하셨다.

 

 정의를 사모하는 마음이 그 극에 달하면 즉 종교가 되는 것이다. 참으로 의에 갈급(渴急)한 자는 양심의 만족만으로써 족하지 못하다. 도덕상 정의가 극치에 달하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바른 관계에까지 미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마태 5: 48)고 지시하셨고 또 시인은 노래하기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주를 찾으려고 갈급함이

     사슴이 시냇물을 찾으려 갈급함과 같도다.

 내 마음이 하나님 사모하기를 목마름 같이 하니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

 내가 어느 때에 하나님 앞에 이르러 뵈오리이까.

 

하여(시 42 편) 인간의 의의 관념이 그 극도에 달하였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의에 달하려는 노력과 하나님의 완전에 일치하려는 욕구는 인류의 최대, 최고의 분투였다. 의를 행함에 배고파하고 갈(渴)하여 그 분투가 이까지 이르면 사람은 더욱 차질(蹉跌)하기 쉽고 실망에 떨어지게 된다. 루터는 에르플트 수도원에서 수양할 때 이 고투(苦鬪)에 견디지 못하여 종종 질식, 절도(絶倒)하였다고 한다. 기타 번연, 어거스틴, 크롬웰이 이 고투를 짊어지는 사람이었고 ......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

 

는(로마 7:24) 비명(悲鳴)을 절규한 사도 바울은 하루 삼시(三時)의 끼니를 요구하는 정도의 필요로 반냉반열(半冷半熱)의 태도로써 의를 구한 것이 아니었다. 먹으면 좋고 안 먹어도 견딜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저야말로 심히 기갈한 자처럼 수화(水火)도 가리지 않고 예절도 돌볼 겨를이 없이 급박한 요구에 지배되어 기(飢)를 포(飽; 물릴 포)하고 갈(渴)을 의(醫)하려고 돌격한 것이었다.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는 넋이다. 조문도이석사가의(朝聞道而夕死可矣;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 공자)라 하며, "주의 들에서 하루의 삶은 세상의 천년보다 낫다"한다. 의롭지 못할진대 차라리 살 수 없다는 심사다. 이 바울의 진지한 태도를 일컬어 의에 기갈하였다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도덕상 정의에 권태치 않을뿐더러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에 달하려 하여 기갈한 자를 향하여 주 그리스도 예수는 "복스럽도다 ..... 저들이 배부름을 얻을 것이다"라고 선언하셨다. 과연 천래(天來)의 가신(嘉信)이 아닌가. 정의(正義)가 행해지지 못하는 현세(現世)와 육(肉)의 권세가 오히려 강한 인생에 있어서 정의가 이길 것이요, 의에 배부를 것이라 한다. 어떻게 하여 배부름을 얻는 것인가? 신앙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불의의 세상과 정욕의 육신에 있어서 의는 완전히 행하여지지 못한다. 그러나 단테가 연옥(煉獄)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보라! 인간의 온갖 수단도 쓸 데 없고

 노도 없고, 돛도 단 것이 없을지라도

 천사의 날개(신앙)만이

 이처럼 머나 먼 길을 도달케 하도다.

 

즉, 의에 포만(飽滿)케 됨은 첫째 신앙으로써 의롭다고 일컬음을 받는 것(로마 5:19, 갈라디아 5:5), 나의 죄를 십자가 위에 처분한 의의 완전한 현현(顯現)인 자를 쳐다보면서 자기를 그 안에 두는 때에(로마 3:22, 고린도 전서 1:30) 우리는 의롭지 못한 중에 처하면서도 의에 포만함을 얻게 된다.

 

 

5. 자비한 자

                                                                                             마태복음 5 장 7 절

복스럽도다, 자비한 자들은. 까닭이다, 저들이 자비함을 받을 것인.

 

 자비(慈悲)라 함은 성경의 다른 데서 "불쌍히 여긴다"든가, 혹은 "긍휼"이라고 번역한 말 eleos, eleo로서 그 용례를 찾아 보면 대개 하나님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신다든가, 그리스도가 죄인을 긍휼히 보신다는 등에 사용되어 단지 지인(知人), 친척에 대한 동정, 인정이라기보다 매우 고급의 감정을 표시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같이(누가 10:37) 전에 친면(親面)이 없었던 과객(過客)에 불과할뿐더러 인습(因習)상 적대시(敵對視)되는 처지의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 당한 참경(慘景)을 목도하고서는 측은(惻隱)지심에 견디지 못하여 자기의 이해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간호하여 주었을 때, 실로 그런 때에 이 자비란 자가 사용되었다. 기타 비슷한 예를 들면 마태 9 장 27 절, 마가  5 장 19 절에 "불쌍히 여기소서" 한 것과 로마 9 장 15, 16, 18 절, 갈라디아 6 장 16 절, 디모데 전서 1 장 2 절 등에 "긍휼히"라고 번역한 것이 모두 같은 글자다.

 

[임성삼의 이야기; 이 분은 정신적으로 힘이 넘치신 분이다. 요즈음 같은 시기에 이런 힘있는 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위의 부분을 옮겨보았다. 나머지 세 복은 다음과 같다.]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will see God.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마 5:10] 의(義)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because of righteousness,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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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은 팔복, “복이 있나니”라는 말로 시작하는 여덟 번의 진술로 문을 연다.[1]이 단어는 이미 존재하던 복된 상태를 확증해 준다. 각 복은 일반적으로 고생하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자들이 실제로는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선포한다. 복 있는 자는 이런 복을 받기 위해서 자신이 해야할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예수님은 그냥 그들이 지금까지 복을 받아 온 사람이라고 선언하신다. 따라서 팔복은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선언한 것이다. 그것은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도 아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로드맵도 아니다.

 

   복 받은 각 무리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두 번째 복을 생각해 보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마 5:4).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애통하는 것을 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슬픔이다. 그러나 천국이 오면서 애통은 복이 된다. 애통하는 자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하나님이 친히 위로해 주시리라는 것이다. 애통하게 하는 그 역경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게 해 주는 복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복이다!

 

   팔복의 기본 목적이 하나님 나라가 주는 복을 선언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나라의 특징을 보여 주는 하나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2] 하나님 나라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우리는 복으로 명시된 것을 더욱 닮고 싶어진다. 즉 더 온유하고, 더 긍휼을 베풀고, 더 의에 주리고, 더 화평케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팔복에 도덕적 명령을 덧붙인다. 나중에 예수님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마 28:19)라고 말씀하셨을 때, 팔복은 이 제자들이 갖춰야 할 성품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준다.

 

   팔복은 하나님 나라의 성품을 묘사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들만 천국에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루기 불가능한 조건을 내걸지 않으셔서 참 다행이지 않은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이 말씀만 놓고 볼 때 과연 누가 ‘마음이 청결하다고’(마 5:8) 말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복을 받을 수가 없다. 팔복은 조사한 결과 실패로 판명된 사람 모두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천국이 가까이 오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 함께하기로 동의하는 사람에게는 그게 복인 것이다.

 

   팔복의 또 다른 은혜는, 팔복이 하나님께 속한 개개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도 축복한다는 점이다.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우리는 아직 하나님 같은 성품을 다 갖추지 못했는데도 하나님 나라가 임함으로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그 팔복이 말하는 특징의 일부나 전부를 이룰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변에 있는 전체 공동체의 모습에 의해 복을 받는다. 하나님 나라 시민권이 이제 시작된 것이다. 새로운 공동체의 성격은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마 24:30) 때 완전히 이루어진다.

 이런 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팔복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성격을 탐색하고, 그것을 어떻게 우리 일에 적용해야 할 것인지 준비를 갖춘 셈이 된다. 모든 복을 하나씩 철저하게 논의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 그 복을 받고, 그 팔복대로 살아가는 기초가 되기를 소망한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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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의 팔복이라는 글이 떠돌고 있어서 잡았습니다.
더글러스 파슨즈라는 분이 지었다고 되어 있는데, 아무리 검색해봐도 그 분이 어떤 사람인지 알 길이 없네요.
일단 신앙에 관심이 많은 분이고, 말을 재밌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며, 역설과 패러디에 능하다는 것을 글을 통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의 논조로 보아서 직업이 목사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구요.
하여간 더글러스 파슨즈라는 분이 아주 재밌는마태복음 5장의 팔복을 패러디한 글을 적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약점을 찌르는 글이네요. 이른 바 마귀의 팔복, 예수님의 팔복을 패러디해서 마귀의 팔복이라는 글을 적었습니다.



마귀의 팔복


첫째.  피곤하고 바쁘다는 핑게로 교회에 나가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가장 믿을만한 일꾼이 될 것임이요.

둘째.  목사의 과오나 흠을 보고 트집만 잡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설교를 들어도 은혜를 받지 못할 것임이요.

셋째. 자기 교회이면서도 나오라고 사정하여야만 나가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교회 안에서 말썽꾸러기가 될 것임이요.

넷째.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다툼과 분쟁을 일으킬 것임이요,

다섯째.  걸핏하면 삐죽이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교회를 그만 둘 것임이요.

여섯째. 하나님의 일에 인색하여 헌금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일을 가장 잘하는 자가 될 것임이요.

일곱째.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면서도 형제와 이웃을 미워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영원한 친구가 될 것임이요.

여덟째. 성경읽고 기도할 시간이 없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꾀임에 쉽게 넘어가 마침내 나의 조롱거리가 될 것임이니라.

* 자료  출처 : https://koinespirit.tistory.com/329 [코이네로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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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 그를 사람들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성자라고들 이야기한다.


영향력 있는 바흐의 오르간 해석과 앨범을 남긴 음악가이면서 오르간 제작자, <문화철학>을 저술한 저명한 철학자, 문명과 단절된 아프리카 오지에서 일평생을 봉사한 의료 선교사, 신약신학에 중요한 작품을 남긴 역사적 예수 문제에 정통한 신학자. 슈바이처는 다른 사람들이 일평생 노력해서 하나를 얻을까 말까 한 결실들을 자신의 생애를 통해 계속해서 수확해 냈다.


그렇다면 이러한 끊임없는 자기 성취가 그를 성자로 만든 것인가? 그렇게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앙인으로서 더 많은 성취를 일궈낼지라도 그것이 성자의 자격 요건이 되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성자의 칭호는 그것이 공식적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기희생이 뒤따른 사람에게만 붙어 다닌다. 그렇다. 슈바이처는 그의 모든 활동에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인류를 향한 불타는 사랑으로 그러한 결실을 일구어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진실성은 그의 자서전에 애틋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를 자유주의적 신학자요 교회의 대적자인 듯이 대하기도 한다. 2012년 현재 서점가에서 유통되고 있는 슈바이처의 저서만 보아도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유통되고 있는 책들은 슈바이처 자신의 자서전적 저서들이 대부분이며, 그의 가장 위대한 신학 저서인 <역사적 예수 연구사>는 절판된 상태이다. 다른 사람이 쓴 슈바이처의 전기도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위인전기 수준이다. 그의 생애에 대한 심도 있는 성찰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전무한 상태이다. 그의 철학 저서 또한 외면받고 있다.


사실 그의 사상을 연구하는 것도 그리 쉬운 작업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그토록 떠나기 싫어했던 대학 강단을 버리고 아프리카로 간 후로는 온 생애를 의료 봉사에 매진하느라 단지 몇 권의 저서만을 남겼으며, 자유주의적으로 오인당한 그의 신학 사상으로 말미암아 아프리카 의료 선교 중에도 단 몇 번의 설교만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슈바이처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의 몇 편의 저서와 그의 설교가 절실하다.


슈바이처의 설교집은 21세기가 되어서야 하나의 대작으로서 출판되었다. 그 대부분이 그가 신학교 수업과 목회자 교육을 받으며 했던 설교들이다.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설교하기를 무척 즐겼으며, 아프리카에 가서도 기독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매우 가슴 벅찬 일로 여겼다고 한다. 슈바이처를 자유주의자로 여기게 한 그의 신학사상과 그의 설교에의 열정은 서로 어떻게 조화가 될 수 있을까?


이번에 번역하여 출간한 슈바이처의 설교집은 그의 수백 편의 설교 중에서 마태복음 5장의 '팔복'에 대해 설교한 것만을 따로 모은 것이다. 그의 설교들 대부분은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의 것이므로 젊은 설교자의 열기를 설교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심지어 동물에 대한 그의 사랑은 슈바이처라는 한 인간이 이미 깊은 성숙의 단계에 도달해 있음을 느끼게 한다. 또한, 설교 곳곳에서 청중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통감하고 같이 고민하고 있는 슈바이처를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 강단에서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강조와 그에 관한 설교들이 최근에야 더욱 자주 다루어지고, 또 그렇게 다루려는 노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이제 하나님나라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나라와 연관하여 설교하지 않는다면 신학적인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를 연구했던 슈바이처는 100년 전의 그의 설교에서 이미 모든 해석을 하나님나라와 관련하여 해내고 있다. 예수의 팔복이 하나님 나라라는 예수의 선포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그는 진지하게 고려하며, 이 복된 선포를 통해 하나님나라가 어떻게 그들에게 임하고 있는지를 청중에게 제시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 팔복이라는 복된 선포가 단지 복을 내리려는 것이 아닌, 청중들의 강한 실천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단순한 위로가 아닌 하나님나라를 위해 고난에 직접 뛰어들 것을, 참고 인내해야 할 것을 하나하나 풀어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난에 대한 복된 선포를 장례식에서 장례 설교로 몇 번 사용하는데, 이를 통해 아무런 이유 없이 고난 속에서 죽어 간 자들의 고난에 의미를 부여하고 유족들을 깊이 위로하려 하고 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한 시대의 거인이었던 슈바이처! 그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 속에 빠져 보기를 권해 본다.

 


     <목차>

 

일러두기

복되도다! 평화를 이루는 이여!(1900.5.20)

복되도다! 영이 가난한 이여!(1900.6.10)

복되도다! 고난 중에 있는 이여!(1900.6.24)

복되도다! 자비로운 이여!(1900.8.26)

복되도다! 온유한 이여!(1900.9.2)

복되도다! 고난 중에 있는 이여!(1900.9.9)

복되도다! 마음이 깨끗한 이여!(1900.9.23)

복되도다! 고난 중에 있는 이여!(1901.5.14)

복되도다! 고난 중에 있는 이여!(1901.6.3)

복되도다! 평화를 이루는 이여!(1907.1.27)

복되도다! 온유한 이여!(1911.9.3)

역자 후기 

 

<저자 :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965)는 교회 오르가니스트인 할아버지와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음악과 신앙의 영향 속에서 자랐다.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1899년 칸트의 종교철학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 1900년 성만찬 연구로 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신학부 강사로 활동하다 1904년 의료 선교에 대한 뜻을 정하고 1905년부터 의학 공부를 시작, 1913년 예수의 정신질환 이론에 대한 비판 논문으로 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곧바로 아프리카 가봉의 랑바레네로 떠나 의료 선교를 시작했다. 의학 공부 중 1906년에는 <예수 생애 연구사>를 출판하여 역사적 예수에 대한 신학 연구에 위대한 공헌을 하였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독일인이었던 슈바이처는 1917년 프랑스령이었던 랑바레네에서 포로로 잡혀 프랑스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으나 의사로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18년에 석방되어 연주, 강연 등으로 모금 활동을 하고 1924년 아프리카로 돌아가 생을 다할 때까지 의료 선교에 힘썼다. 1952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그는 1965년 91세에 랑바레네에서 딸의 바흐 연주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출처: 뉴스앤조이]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의 팔복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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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가 이 땅위에 펼쳐야 할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목적은 무엇인가?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5-7장까지의 산상설교는 현대교회에게는 별로 관심없는 성경구절입니다.  이 본문을 강조하고 가르치는 목사도 적습니다.  승리지상주의와 성공주의, 현세적 기복신앙, 영웅지상주의, 적극적사고, 긍정적상고, 믿는데로 다 이루어진다 등의  편향된 가르침으로,  기름기가 가득차 살이 통통하게 오른 현대교회에게 산상설교는 화학조미료가 빠진 음식처럼 별로 흥미를 주지 못하고, 행위구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의문을 가지면서 장롱의 한 구석에 고이 모셔져 있는 옛 말씀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마5-7장의 산상설교는 이 땅위에 임재한 지금 천국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이 하늘에서 펼쳤고, 이제는 이 땅위에서 펼치고자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목적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목적을 실현해 나가야 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하나님나라의 영적혁명이며 하나님 나라의 통치 규범입니다.

 

 

 

1.예수님은 본문에 앞서 마4장에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신 후, 제자들을 부르기 전에 천국이 가까왔다고 전파하셨습니다.

 

마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주님은 <회개하고 믿으면 죽어서 내세-천당에 간다>고 전파하지 않고, 회개하고 믿으면 <가까이에 임한,이 땅위에 임한 천국-하나님나라> 안에 들어가, 천국 백성이 되어, 천국의 다스림과 통치를 받고, 천국의 열매맺는 백성이 되어서, 천국의 가치와 목적을 이 땅위에서, 너희의 삶 속에서 실현해 나가라고 전파하십니다(그렇다고 신자의 사후 영광된 신분으로 하나님의 존전에 거하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님을 오해하지 말 것​).

 

 

 

2.예수님이 천국을 전파하면서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는데, 이렇게 행하신 기적과 치료는 단순히 사람의 호기심과 관심을 끌기 위한 신비적 체험과 기적이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예언되어 오던 여호와의 은혜의 해가 성취되었음을 나타내는 징표이며 (주의 성령의 임재하여 아름다운 소식이 전파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희년)를 전파하기 위함이며), 예수님의 사역과 함께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성령의 권능으로 임하여 사탄을 결박하고, 점차적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다는 강한 표징이었습니다.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 4: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사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 61: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심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예수님은 마5-7장의 산상설교에서 천국 안에 들어와, 천국의 통치를 받기 시작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목적의 기준은 무엇이며, 하나님 나라의 통치 규범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가르칩니다. 

이러한 산상설교는 출애굽기에서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십계명과 율법을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공포하시는 장면을 모티브로 합니다.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즉 

여호와 ----->주님

시내산---->산에 올라가

십계명과 율법------>마5-7장의 천국의 통치규범

이스라엘백성----->제자들

 

따라서 산상설교에서 주님은 시내산 언약을 체결한 구약의 여호와이시며, 구약의 십계명과 율법을, 마태복음 5-7장의 천국의 통치규범을 통해서 완전(성취)하게 하러 오신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성취)하게 하려 함이라

[KJV] Think not that I am come to destroy the law, or the prophets: I am not come to destroy, but to fulfil

 

 

4.마5장의 팔복은 마5-7장에 있는 천국의 통치 규범의 서론이고, 요약본이고, 모범답안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목적을 요약한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통치 규범의 모범 답안이라서, 이러한 삶을 추구하는 제자들은  하나님 앞에 A+ 를 받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산상설교가 지킬 수는 없지만 이상적인 모습이라거나, 소수의 특별한 사람만이 지킬 수 있는 계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팔복은 지켜서 구원받기 위한 행위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와 믿음, 무한한 은혜로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 구원을 유지하지 위한 언약적 의무이고, 팔복에 따라 사는 것은 구원을 현재에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며, 이 땅에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목적을 실현하여 부패와 죄악과 타락한 문화와 세속적 가치관 즉 사탄의 세력을 결박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5.마5장의 팔복은 천국으로 시작해서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천국으로 끝나는데 (마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것은 팔복이 천국의 가치와 목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는 현재시제로, <지금 천국이 저희 것이다>의 의미인데, 죽으면 간다는 내세-천당이 아니라(그렇다고 신자의 사후 영광된 신분으로 하나님의 존전에 거하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님을 오해하지 말 것​), 지금 이 땅위에 임하여 하나님 말씀과 성령의 권능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지금 천국이 너희에게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팔복에 따라 사는 제자들에게 돈으로 살수 없는 천국의 소유권을 부여하시며, 천국의 능력과 천국의 은혜와 보호하심이 제자들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6.마5장의 팔복은 세상이 추구하는 복과 전혀 다른,  복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면서, 천국에서는 <이런 자가 복있는 사람이다> 라고 선포합니다.   이러한 사람(팔복에 따라 사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팔복의 가치를 진정한 복의 가치로 받들어 따라야 합니다.   팔복에 따라 사는 자는 하늘에서 복이 있다고 정한 기분에 합격점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위에 임한 지금 천국에서 주님의 제자들이 실현해야 할 중요한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목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의 내용과 기준이 현대교회가 믿고 따르는 기복적인 복과는 내용과 질적으로 전혀 다릅니다.   본문을 원문적으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여

복이 있도다 애통하는 자여

복이 있도다 온유한 자여   

복이 있도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여

복이 있도다 긍휼이 여기는 자여

복이 있도다 마음이 청결한 자여

복이 있도다 화평하게 하는 자여

복이 있도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여

 

 

 

팔복말고 더 좋은 복을 주세요 

 

오늘날 현대 교인들이 추구하는 복은 권력과 재물과 성공이기에 팔복의 이러한 복을 달라고 하지도 않으며, 이것이 복인지 의아해 하며, 이것은 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나 심판일 것이라 생각하고, 만약 주님이 이러한 복을 주겠다 하면, <주님!  아닙니다.  됐습니다.  그만 하시지요.  저를 시험하시는 겁니까?  저에게 강요는 하지 말아주세요,  저에게 이딴 복은 필요없으니, 다른 사람에게나 주시지요> 라고 하면서 사양할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고, 죽으면 내세-천당(성경에서 가르치는 천국-하나님나라-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가 아님, 그렇다고 신자의 사후 영광된 신분으로 하나님의 존전에 거하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님을 오해하지 말 것) 간다고 믿는 자들에게 주님의 입장에서 어떻게 천국의 가치와 목적과 규범을 어필할 수 가 있겠습니까? 

 

이제 현대교회는 복에 대한 거짓된 가르침을 배격하고, 마5-7장에 나타난 천국의 가치와 목적이 무엇인가를 다시 살펴서, 믿으면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받고, 죽으면 내세-천당간다가 아니라 , 이 땅에 임재한 천국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을 향유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이 하늘에서 처럼 이 땅위에서 그의 뜻을 펼치기 원하는 천국의 가치와 목적이 무엇이고  천국 백성이 실현해야 할 천국의 통치 규범이 무엇인지를 살펴서, 성경에서 가르치는 천국-하나님나라-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확장해 가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마 6:10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NIV]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결론


팔복과 산상설교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이 땅위에 임한 천국, 하나님나라,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의 성격과 실체를 보여준다.  천국의 본질은 꽃밭에 나비가 날아다니며 100평짜리 맨션에서 호위호식하는 무릉도원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에 복종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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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八福)

팔복의 첫 번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이다. 여기서 ‘가난한 자’로 번역된 말이 헬라어로 ‘프토코스’다. 이 말은 ‘극빈자, 산산이 부서진 자’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은 물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음과 영혼이 가난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고 그를 의지하는 사람을 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난하다는 말 자체가 실제적으로 돈과 그다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부자와 가난을 구분하는 액수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둘의 구분은 물질의 소유 여부에 있지 않다. 그것은 마음에 있다.


현재 물질의 소유 여부와 상관없이 지금 가진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부자다. 반면에 가진 것이 아무리 많아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로 인해 비교되고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자아가 부서진 상태를 의미한다. 자신의 존재 한계와 불가능을 깨달은 자다. 이 땅을 살면서 자신이 가진 물질로도, 명예로도, 사람으로도, 권세로도 행복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심령의 가난은 내가 무엇을 행함으로 행복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나 자신에 대하여 깊은 영혼의 탄식을 하는 상태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무(無) 사상이나 유교에서 말하는 덕(德)과는 완전히 다른 얘기다.


내 안에 있는 것이 죄 밖에 없기에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임을 확실히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다. 이것은 내가 무언가를 결심하고 노력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내 안에 계신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 이룰 수 없다.


왜냐하면, 팔복에서 말하는 ‘심령의 가난함’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겸손, 인간이 이룰 수 있는 도덕적 겸양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 터져 나오는 자기 부정이기 때문이다.


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가. 여기까지, 바로 이 끝을 경험한 자만이 내 영혼의 깊숙한 외침으로 ‘나에게는 예수가 필요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고백은 단순히 ‘나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읊조림이 아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 때문에 정말 나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음을 잘 아는 사람이 외치는 간절함이다.


사실 당시 사람들은 이미 심령이 가난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이 말씀이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는 다르다. 그들에 비하면 물질적 풍요로움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령이 가난하지 않다.


그럼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이 되는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서 우리를 심령이 가난한 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 복을 온전히 누리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이 자리로 끌고 가겠다는 선언이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서 만이 우리에게 주신 복을 온전히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싸움에서 빨리 항복해야 한다. 그것이 팔복의 복을 온전히 누리는 열쇠다.


이수용 목사(미국 버지니아 한몸교회)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34067&code=23111515&sid1=f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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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김 선교사 설교

(팔복설교)

 

복-기뻐하라. (원어로 표현하면)

 

크리스챤과 바리새인의 차이

 

바리새인도, 이세상 모든 사람도 잘못한 이상 벌이 올 차례기 때문에 회개기도한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회개한다.

그러나 크리스챤의 특징은 내가 예수님 없어도 천국문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것 회개해야한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 수 있는 두가지 방법.

 

1. 하나님 필요없습니다. 내 맘대로 사는걳 

2. 내가 최대한 하나님 아버지 맘에 합당할 만큼 잘 살아서 아버지가 나에게 복을 주시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잘 살아보리라. 

 

첫번쨰 두번째 다 회개해야한다.

내가 잘사는것도 내가 못사는것도 회개해야한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의자리로 돌아가야하는것이다.

 

하나님꼐서는 애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데 

 

애통하면 하나님이 위로주신다.

그 위로를 경험한 사람들은 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온유한 자로 설수밖에없다는것..

 

온유한 자. 사회의 모든 것이 성품을 요구한다. 

이거하면 잘된다는 공식.. 율법의 법에서 아직도 우리가 헤어나오지 못한다.

 

성경적인 온유는 우리 말로는 번역을 할 수가 없다. 

그래도 그나마 가장 비슷한 단어를 하나 선택한다면.. 충성이란 단어이다.

온유- 진돗개 생각하면 가장 좋다.

주인이 들어오면 꼬랑지 흔들고 쓰다듬어주면 벌렁 눕고. 

원수가 들어오면 으르렁 거리고 물고 생명걸고 안 놔준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이다. 

대표적인 사람은 비느하스이다.

이 사람을 온유하다고 한다.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우유부단하다.

나쁜것도 좋다고 말할 수 있기 떄문이다. 불의. 저울을 속이는 자. 

 

온유한 자 . 하나님 나에게 주신 모든것 내가 주님께 바칩니다.

내가 주님을 배반하는 모든것 다 거둬가 주십시오. 

이것은 애통하는 자만이 할 수 있다.

주님의 위로를 받아 본 자들은 한가지 고백을 공통으로 하고 잇다.

"주 밖에 없네..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2000년전 누가 죄를 짓고 송사당하게 되면 그사람은 쇠사슬에 묶여 회당으로 끌려간다.

심판자 앞에 나오게 된다. 끌려갈때 군중들은 외치고 있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드디어 심판자가 나온다. 그래서 엄지손가락을 심판자가 내리면 죽이고 엄지손가락 올리면 살게된다.

하나님 의에 주리고 목마른것은 

하나님 엄지손가락 내리시고 드시는것. 

하나님꼐서 저희를 배부르게 하실것임이요.

 

하나님 오늘 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주님이 바라보시며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끊임없이 인정하며 우리를 일으켜세우신다. 

 

세계적으로 이스라엘 교회의 붐이다.

이것이 오래는 안간다.

어느순간 되면 온세계가 반유대. 반이스라엘 정서로 일어설 때 

그것이 크리스쳔까지 쫓기게된다.

우리조차도 이스라엘 편을 드는 순간 우리가 설자리가 없다.

하나님 나에 대해서 열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괜찮아 잘 하고 있어.. 

라고 배불림 받는다.

 

하나님의 거저 용서하심을 긍휼히 여기심을 받은 자는 기뻐하라

니가 정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경험하였다면 너도 남을 긍휼히 여길 것이다.

니안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경험되었음이 확증되었음이라.

 

주님 한분 원합니다.

.. 마음이 청결한자. 

성경적으로 말하는 마음이라는 단어는 우리말로는 없다.

가장 비슷한 단어는 동기란 단어다.

너는 무엇보다 너의 동기를 지켜라.

모든 너의 행위가 너의 동기에서부터 나온다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하여.

이제 내가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느한순간 우리 삶에 침투하신다.

하나님이 거저 은혜 주신 만큼 내가 사랑해드릴게요.

 

무엇을 위해 신앙생활 할래

새롭게 탄생되는 신학생들이여

너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 전하지 말아라

라고 교수님께서 말했다.

 

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사역할수있다.

단기선교 갔다오면? .. 

내 인생의 무의미함에서 탈출하고 있다

율법의 사람 복음의 사람 둘다 똑같이 찬양 선교 회개 다 한다

겉으로 보기엔 누가 누군지 모른다. 같은 교회안에 다 모여있다.

왜하냐는 것이다. 와이.

율법의 사람은 give and take.

복음의 사람은 많이 용서받았으니 많이 사랑해드릴게요.

 

겉으로 보기엔 똑같다.

 똑같이 눈물 흘리며 회개한ㄷ.ㅏ

율법의 사람은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내가 죄를지었나이다. 죄로 인해 엄청난 대가가 오고 있습니다.

내 사역과 사업 가족이 산산조각났습니다. 죄의 대가가 무섭사오니 다시한번주의 영광 드러내게 해주십쇼.

 

복음의 사람은

죄의 대가로 인해서 엄청난 대가가 오고 있습니다

사역 사업 가정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괜찮습니다.

많이 아플만큼 아파서 이제는 두번다시 주님과 나와의 교제가 금가지 않게 해주세요. 

 

정말 복음이라면

똑같은 죄 10년 20년 짓지 않는다.

알곡이냐 쭉정이냐 양이냐 염소냐. 

주님오시는 그날까진 모른다.

 

나는 구원받은 줄 알았는데 아닐수 있다.

본질확인. 내가 정말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살아가고 있다면 내가 왜 살아가고 있는가

나를 채우기 위함인가 아니면 내가 더 사랑하기 위해서 그래서인가.

 

마음이 한가지를 원하는 자는 기뻐하라 

너희가 그토록 원하는 하나님을 볼것이다

 

 

니가 나를 사랑하니 

아니면 나 때문에 가는 천국을 원하니. 

 

화평케 하는 자는 기뻐하라.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을 것이다

주님의 방식으로 삶을 살기 시작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샬롬은 .. 우리나라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길이 없다.

그래도 비슷한 단어는 공의이다.

참된 평화는 깨진 공의가 회복되기 전까지는 이뤄지지 않는다.

참된 평화라는 것은 공의가 설립되야지 돌아오는것인데

공의라는 것은 한번 깨진이상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한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왜 꼭 누군가의 피를 흘려야하세요?

공의라는 것 깨져버리고 죄 저질러져버리고. 문제는 해결되어져야한다.

 

가해자가 책임지던지 피해자가 책임지던지.

누군가가 희생 치르지 않으면 깨진 공의가 회복되지 않는다.

용서한다는 것은 피해자 본인께서 공의를 회복하기 위해 그 값을 치르셨다는것이다.

성경은 용서에 대해 감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법적인 것이다.

이세상의 깨진 모든 공의를 재설립하라는 주님의 부르심.

정신적인 공의도 회복이 안된다. 

공의를 회복하는 방법 하나는 희생이고 또하나는 전쟁이다.

온세계의 75프로는 우리가 상상을 초월하는 악을 매일매일 경험하고 있다.

지구의 75프로의 인구는 ..

3년전 인도에서 핍박이 있었다. 100명의 크리스쳔이 순교당하고 600가정이 불탔다. 

힌두교 과격분자들이 들어가서 

 

참된 복음의 완성

니가 당한대로 갚으실거야

그분이 오시게 되면 갚으실거야

한 복음은 어린양 예수다.

다른 복음은 다시오실 왕유다의 사자 예수그리스도이다.

 

우리에게 어린양 예수는 있는데

다시오실 왕 유다의 사자 예수는 별로 없다. 

 

유대인에게는 어린양 예수가 적다. 

 

유대인들에게는 다시오실 왕으로 들어가서 어린양 예쑤로 결론이 난다.

이것이 순서가 다르다.

 

깨진 공의 회복시키시고

당한 자 위로하시고

악한 자 심판하시는 .. 

나의 인생에 이런것들이 초점이 맞춰지길. 

 

한사람의 성도가 심령이 가난한 자의 자리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자리까지를 그려놓은 모습이다.

나는 어디있는가?

1. 심령이 가난한 자의 자리로 돌아가야한다.

2.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리까지 성장해야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크리스쳔의 삶은 어떤것인가

예쑤님 만나고 교회 가고 기도하다가 응답받고 간증하고 단기선교 다녀오고

또 열심히 사는것 크리스쳔 가정으로 자식 시집장가 보내고..그런인생..

 

한번 사는 인생 결국은 의를 위해 핍박 받는 자리까지 돌파하여서

최고로 영광스럽게 떨어지는 것,,

 

사무라이 칼에 벚꽃이 그려져있다

다른 꽃들은 확 피고 시든다. 

벚꽃은 확 핀다. 아름답다 하는데 다 날라가 버린다.

이것이 크리스쳔의 삶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자리에서 주님 만나고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의 자리에서 마감하신다.

영광에서 영광으로. 

한번 사는 나의 인생 

칼을 갈듯이. 

한번 사는 삶. 나의 육신을 갈아도 나의 지성을 갈아도

칼을 갈듯 갈아서. 한번 쓰임 받고 이세상 떠나는 날 그렇게 살다가 가겠습니다.

 

그런 삶이라면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을 줄 안다.

 

심령 가난한 자의자리에 돌아가는것.

 

그래서 주님이 필요합니다..... 

다시한번 주님을 경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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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연구

서 론

예수님의 산상 설교 전반부에 나오는 팔복(八福)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대한 그리스도인의 성격과 행동의 8가지 주요 특징과 이러한 특징을 나타내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여덟개의 축복 선언에 대한 기록이다.

예수님은 이 팔복을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거하는 인생의 궁극, 영속적인 지복의 상태를 나타내셨다. 한편 팔복은 여덟 개의 서로 다른 교훈들의 집단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백성들의 균형잡힌 다채로운 특성을 의미한다.


Ⅰ. 배경 이해

1. 마태복음의 특징

①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위한 유대적인 복음이다. 특히 왕과 왕국에 대한 언급이 있다.

② 마태복음에는 여섯개의 대(大) 강론이 있다. 산상설교(5-7장), 12 제자에게 교훈(10장), 천국에 대한 일곱가지 비유(13장), 겸손에 대한 설교(18장), 이것은 교회 진리의 원리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고발(23장), 감람산의 교훈(24-25장), 이것은 끝날에 관한 설교이다.

③ 메시야 왕국에 대한 관심이 다른 복음서 보다 많이 기록되어 있다.

2 산상 수훈

마태복음 5:3-7:27절은 '산상 수훈'으로 불린다. 이는 예수님의 여러 교훈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압축 요약하고 있어,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구속사의 새 시대를 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산상 수훈을 통하여 천국의 본질을 나타내는 삶의 원리와 특징들을 가르치셨다.

1) 의미

'산상 수훈'이란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에 갈릴리 호수 주변 어느 한 산에서 유대인 무리에게 행하신 설교(눅6:20-49)를 말한다. 특별히 '수훈(垂訓)'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 내용이 후세에도 길이 전수되어 많은 사람들이 교훈을 받을 수 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마태는 산상수훈 기사에서 모세가 시내산으로부터 구약 율법을 전해준 것처럼 예수를 새로운 율법을 공포하기 위하여 산에 오르신 제2의 모세로 묘사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는 모세의 규정에서 이미 구체화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율법의 원리를 영적으로 해석했다.

2) 구조

내용에 따라 크게 다섯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내 용

마 태 복 음

누 가 복 음

팔 복

5: 3-12

6:20-26

성도의 생활과 구약

5:13-48

6:27-36

구제, 기도, 금식

 

6: 1-34

순전한 삶의 원리

7: 1-12

6:37-42

결론적 교훈

7:13-27

6:43-49

서론 - 새시대에 참여하는 자의 자질과 특권 (5:1-16)

본론 - 구약에 나타난 주제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해석 적용된 새 계명 (5:17-7:12)

결론 - 천국 시민이 갖추어야 할 자세 - 회개와 순종 (7:13-27)

3) 주제

A. 산상 수훈을 하나로 묶는 주제의 첫번째는 '천국'이다.

a. 팔복 -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b. 5:17-20 -

c. 주기도문 - 하늘에 계신 아버지,

d. 6:33 -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e. 7:21-23 - 성도의 궁극적 종착지로서의 천국따라서,

①산상 수훈은 인간(성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삶의 수준을 원하시는지 보여준다.

②산상 수훈의 가르침은 하늘나라가 현재적이듯이 현재적 실천 윤리이다.

③산상수훈은 인간의 전 인격과 전 삶에 관계된 역동적인 윤리이다.

④산상수훈은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와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의 사이에서 성도가 항상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자기 인식을 요구한다.

B. 두번째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산상수훈은 현재와 미래 가운데 도덕적이고 영적인 천국의 본질을 드러내는 원리이다. 그 원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왜냐하면 산상 수훈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국시민인 성도는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핍박을 받으며(5:11),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와 그의 가르침의 응답 여부에 따라 그들의 운명을 결정한다(7:21-27).

3. 팔 복

산상 수훈의 서론격인 팔복은 천국시민으로서 부름 받은 성도들의 삶의 원리와 그 특징을 보여준다. 본문은 일관되게 '복이 있나니'라는 구절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위대하고 부유한 축복을 주시기 위해 팔복을 주신 것이다. 팔복에 묘사된 '복'들은 일시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복은 오늘날 영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그리고 필연적으로 향유하여야 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1) 의미

팔복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베풀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에 나타나는 여러 특성들을 모두 드러내야 한다. 여기에 열거된 그리스도인다운 특성들은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만 나타날수 있다. 이 특성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 생명의 열매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2) 배경

팔복은 양식적으로 구약의 지혜 문학, 특히 시편과 관계한다. 그런데 팔복과 지혜문학의 차이점은 지혜문학에서는 시84:4,5에서 나타난 것처럼 축복선언이 둘 이상 짝지어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팔복의 양식을 'B하려면 A하라'의 형태로 바꾸어 보면 팔복이 축복의 선언인 동시에 명령이요, 훈계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팔복을 교훈하신 배경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군중들의 상태였다.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의 이적과 말씀을 듣고, 보고 몰려왔다. 예수님은 그들을 긍휼히 보셨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현세적인 복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초기부터 군중들에게 천국이 어떠하며, 또한 축복의 실상이 어떠한지를 밝히고자 하셨다.

3) 구조

어떤 학자들은 팔복을 구약에 십계명에 비교하거나, 9복 또는 7복으로 그 구조를 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팔복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앞 부분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로, 뒷 부분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로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팔복은 어떤 특정한 순서로 배열되었다기보다는 천국 시민의 특징이라는 단일한 주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자연스럽게 나열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Ⅱ. 일반적 개관

1. 묘사된 사람들

팔복은 그리스도의 백성들의 균형잡힌 다채로운 성격을 나타낸다. 이것은 여덟 개의 분리된 서로다른 제자들의 집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온유하며, 어떤 사람들은 긍휼이 여기며, 또 어떤 사람들은 핍박을 견디라는 요구를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오히려 동시에 온유하고 긍휼이 여기며, 심령이 가난하고 마음이 청결하며, 애통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화평케 하고, 핍박을 받는 똑같은 여덟 가지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여덟 가지 복은 하나님의 나라의 모든 백성을 위한 그의 이상을 묘사한다.

2. 권면된 특성

예수님께서 팔복에서 말씀하시는 가난함과 굶주림은 영적인 상태이다.예수님께서 복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셨던 사람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부터 그가 언급하시는 다른 특성도 역시 영적인 특성이라는 것을 추론해도 무방하다.

3.약속된 축복

각 특성을 나타내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선언이 되므로 각 특성이 권면이 된다. 헬라어로 마카리오스(ՌՁՊՁՑՉՏՒ)는 "행복한"을 의미한다.

무엇이 행복인가? 그들은 하늘나라를 소유하며, 그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애통하는 자들은 위로를 받으며 굶주린 자들은 배부르게 된다.그들은 긍휼이 여김을 받으며, 그들은 하나님을 보게 되며,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 여덟 가지 특성이 모든 그리스도인을 묘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덟 가지 축복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다.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하면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수 없으며, 만족함이 없으면 위로를 받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그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면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여덟가지 특성은 함께 책임을 구성하며, 여덟 가지 축복은 함께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특권을 구성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누리는 것이 의미하는 것이다.

팔복에서의 예수님의 약속은 현재와 장래에 이루어 지는 것이다.

기본적인 요점을 요약하면, 첫째 우리는 묘사된 사람들은 대부분이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는 것, 둘째 권면된 특성은 권면적 특성이라는 것, 셋째 약속된 축복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영광스럽고 포괄적인 축복(수고 하지 않고 얻는 값없는 은사로서) 곧 땅과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얻는 것과 위로와 배부름과 긍휼과 하나님을 뵙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지금 맛보게 되고 나중에 완전하게 되는 그러한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Ⅲ. 내용 연구

1. 심령이 가난한 자 ( 3절 )

1) 어의

① ՐՔՙ՗՜ՒԈ(가난한)

가난을 뜻하는 헬라어는 ՐՔՙ՗՜Ւ인데 ՐՔՙՓՓՙ에서 왔다. ՐՔՙՓՓՙ는 얼굴을 가리운다는 뜻으로 거지 생활을 할 때 얼굴을 가리우고 손만 내미는 것을 말한다. ՐՔՙ՗՜Ւ는 직장도 없고, 집도 돈도 없어서 전적으로 타인의 도움을 의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② ࠍࠉࠉࠏࠒ (가난한 자)

'가난한 자'라는 히브리어로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suppression)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르킨다. 따라서 이 '가난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2) 마태복음 5장 3절의 '가난'의 뜻

본문의 가난은 물질의 궁핍으로 말미암은 경제적인 가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하다는 뜻으로서 마음을 비운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마음을 비우고 주님을 믿음으로 채우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란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단지 용기가 없거나 물질적으로 궁핍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자신의 영적 판단을 솔직히 시인하며,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무가치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다.

2. 복이 있나니 ( 축복 )

1) 축복(Blessing)의 의미

'bless'(축복)는 원래 'blood'( 피 )에서 나왔는데 피동적인 의미는 예수의 보혈의 선물의 복됨을 의미하고 능동적 의미는 우리의 피를 드려 산 제물로 드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이 bless는 고전 영어에서는 'blood'인데 '피의 제사로 하나님께 드린다( to God by blood ritual)'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식사 기도시에는 음식과 우리 자신을 하나님을 위한 봉사로 드린다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현대에서는 '행복'(happy), '기쁨'(joyful), 봉헌, 찬양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라틴어 Benedicere는 헬라어 ՅՕՋՏՃԽՙ에서 왔는데 '사물이나 사람에 대하여 좋게 말한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2) 성경적 의의의 축복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살펴본 축복의 개념은 믿는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것으로 일관되게 나타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선물로서 우리의 죄가 사함을 얻고 성경책에 이름이 기록됨으로서 구원 얻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 역시 축복이라 할 것이다.

3) 복이 있나니란

종말론적인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육체의 가시적인 안락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리는 궁극적인 평안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한 인간의 유복한 상태를 말한다.

3. 애통하는 자 ( 4절 )

1) 'ՐՅՍՈՅՙ'(ԇ애통 )의 의미

이 어휘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 또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묘사하는 말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자신의 심령이 파멸하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으로는 불충분 하다. 진실로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깊이 슬퍼하고 깊이 '애통하는자'의 자리에 까지 나아가야 한다.

2) 애통하는 자란

이 애통은 영적인 측면의 애통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불의에 대한 애통이며, '자기의 의'( self - righteousness)에 대한 애통이며,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찾고 躛끝내 발견하려는 애통인 것이다.



4. 온유한 자 ( 5절 )

1)어의 ( 語義 )

온유를 뜻하는 헬라어 ՐՑՁ՜ՔՇՒ는 신약성경에서 9회 사용되었다. 그리고 형용사 ՐՑՁ՝Ւ는 3회 사용되었다. 마 5 : 5에 나오는 '온유'는 형용사로서 신자의 온유함을 말한다.

라틴어의 온유는 mitis라 하는데 '말에게 재갈 먹이다'라는 뜻이다. 말이 거칠고 사나우나 재갈을 물리므로 '착하고 순하게 한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육적인 소욕을 극복한다는 태도를 말한다.

온유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힘으로 타인으로부터 모욕과 고난을 받았을 때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며 하나님께 항상 순종하고 복종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2) 온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① 온유를 가질 수 있는 사람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온유한 사람은 곧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기운 자이어야 하며 ( 약 1 : 21 ), 선을 행하는 자( 약 3 : 13 ),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 골 3: 12 ), 거룩한 자 ( 골 3 : 12 )이어야 한다. 또한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은 자 ( 벧전 3 : 15 )와 성령의 열매가 있는 자 ( 갈 5 : 23 ). 그리고 부르심을 입은자 ( 엡 4 : 1)와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이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② 온유할 수 있는 방법

성도가 온유한 성품을 갖기 위해서는 그것을 위해 구하여야 하며 ( 습 2 : 3 ),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 약 1 : 21 ) 행하여야 한다( 약 3 : 13 ). 즉 범사에 온유하여야 하며 ( 갈 6 : 1 ), 모든 사람을 대할 때에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온유함으로 하여야 한다( 살전 2 : 7-8 ), 즉 온유로 옷입고 생활해야 하는 것이다(골 3 : 12 - 13 ).

3) 온유한 자란

외형적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다.


5.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6절 )

1) 의미

주림과 목마름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인생이 겪는 육적인 기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심각한 영적 기근을 가르킨다. 이러하螥 굶주림과 목마름은 영으로 거듭난 자들이 체험하는 새 생명의 영적 욕구이다.

2) 성경에 나타난 의

① 율법적 의

율법적 의는 의롭게 되는 것 즉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이다. 유대인들도 의를 추구하였으나 그들이 그것을 그릇되이 추구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얻지 못했다고 바울은 기록했다.

② 도덕적 의

도덕적 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격과 행동의 의다. 예수님께서는 팔복에 이어서 계속해서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의와 바리새인의 의를 대조시킨다. 후자는 율법을 따르는 외적인 것이며 전자는 마음과 정신과 동기의 내적인 것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주리고 목말라 해야만 한다.

③ 사회적 의

사회적 의는 우리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배우는 바와 같이 민권, 재판의 공정, 상거래 정직, 가정의 명예와 같은 이 모든 것의 향상과 더불어 압제로부터 사람을 해방 시키려고 애쓰는 것과 관계가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인간 사회에서 의로우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서 의에 주려야 한다.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주림과 목마름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인생이 겪는 육적인 기갈 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심각한 영적 기근을 가리킨다.

6. 긍휼이 여기는 자 ( 7 절 )

1) 긍휼의 정의

헬라어 ՏԿ ԽՋՅՇՌՏ는 '자비'란 뜻의 ԽՋՅՏՒ에서 파생한 용어이다. ԽՋՅՏՒ는 '사랑'이란 뜻의 히브리어 ࠃࠑࠄ 와 '동정'이란 뜻의 히브리어 ࠎࠉࠍࠄ࠘의 번역어로 쓰였다. 그중 구약에서 '헤세드'는 주인과 종, 또는 친지들 사이의 관계, 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신약에서는 언약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을가르킨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은 바로 '긍휼이 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즉 긍휼이 여긴다는 말은 죄를 용서해 주는것과 고통을 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를 동정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3) 긍휼이 여기는 자란

긍휼이 여긴다는 말은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고통을 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를 동정한다는 의미를 포괄한 것이다.

4) 긍휼을 얻는 자

하나님은 그 택한 백성에게 긍휼을 베푸시며(신 32 : 43 ; 왕상 8 : 23 ; 호 2 : 23 ) 여호와를 경외하며 ( 시 103 : 17 ; 눅 2 : 50 ; 시 147 : 11 ) 그를 바라는 자에게 ( 시 130 : 7 ; 147 : 7 ) 긍휼을 베푸신다. 타락한 후에 죄를 회개하고 ( 시 32 : 5 ; 잠 28 : 13 ; 사 55 : 7 눅 15 : 18 - 20 )주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또한 고난을 당하는 자와 고아와 긍휼이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 호 2 : 23 )에게도 긍휼을 베푸시며 여호와의 규례를 행하는 자와 하나님의 법을 목에 매어 마음판에 새긴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7. 마음이 청결한 자

1) 어의 ( 語義 )

'마음'의 헬라어 ՊՁՑՄԿՁ 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① 육체적으로 '신체의 중심 기관', ②비유적으로 '감정이나 사고의 중심지'를 뜻하는데 쓰였다. ՊՁՑՄԿՁ는 ①문자적으로 '가슴' , ②비유적으로'인간의 사고, 종교적 윤리적 행위의 원천' 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였다.

신약에서 이 용어는 인간의 지. 정. 의의 근본 원천을 가르키는데 사용되었다.

2) 청결의 특성

성도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깨끗하고 순결함을 나타내는 청결은 성경에서 눈보다 더 흼( 시 51 : 7 ; 사 1 : 18), 금과 은을 연단하여 깨끗함과 같음( 마 3 : 2 - 3), 그리고 빛과 같이 흼 ( 마 17 : 2 ; 막 9 : 3 ; 눅 9 : 29), 양털과 같이 흼( 사 1 : 18)과 같은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3) 청결의 성경적 의미

구약에서는 축제 등의 의식이 있을 때에 '네 옷을 상상 희게 하라'(전 9 : 8)는 말씀으로 청결케 할 것을 교훈하고 있으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세상을 이긴 자들이 힌 것을 입게 된다는 (계 3 : 5) 말씀으로 성도들의 믿음의 순결을 지켜 나갈 것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주님께서는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 : 8)라고 말씀하시며 마음이 깨끗해야 바른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4) 마음이 청결한 자란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의 원천인 마음을 탐욕과 두 마음에서 해방 시키고 절결케 하는 근본적이고 내적인 청결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죄 사함을 받고 신실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마음을 가리킨다.

5) 청결한 자의 복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 마 5 : 8 ), 그들이 하늘의 상을 받게 될 것이다( 계 19 : 9 ). 그들은 청결함을 통하여 기록하게 되고( 엡 5 : 26 ), 천국을 얻게 되고 ( 마 17 : 2 ) : 막 9 : 3 ; 눅 9 : 23 ), 하나님을 보게 되며 ( 마 5 : 8 ),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된다 ( 계 3 : 5 ).

8. 화평케 하는 자 ( 9절)

1) 화평의 의미

화평은 정치적인 무력이나 억압으로 오는 것이 아니며 전쟁의 승리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받으므로 결과된 축복의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영적인 축복이다. 화목케 하는 자 ( ՔՉՑՇՍՏՐՏՉՏԿ )는 평강을 만드는 자라는 뜻이다.

՗ՁՑՉՒ(은혜), ՅԿՑԾՍՇ(평강), ԽՋՅՏՒ(긍휼)의 비교

① ՗ՁՑՉՒ(은혜) :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주시는 모든 축복을 말한다.

② ՅԿՑԾՍՇ(평강) : 은혜받은 축복의 결과로 나타나는 상태이다.

③ ԽՋՅՏՒ(긍휼) : 위기와 환란 때에 해결책으로 주시는 특별한 도움을 의미한다.

2) 화평의 특징

그리스도께서 주는 화평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며 마음의 조급함도 없고 두려움도 없게 된다(요 14 : 27 ). 또한 의로서 화평을 이루게 되며 ( 시 85 : 10 ), 생명을 누리게 한다(롬 8 : 6). 세상과 악인에게는 평화가 없지만 ( 막 13 : 6 - 8 ; 마 24 : 6 - 8 ; 사 48 : 22 ; 57 : 21 ) 그리스도와 더불이 생활하는자는 평화의 생활을 하게 된다.

3) 화평케 하는 자란

개인의 안녕이나 국가간의 평화를 의미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으로 인한 궁극적인 평화를 의미한다.

9. 의를 위하여

1) 절대적인 의

신적으로 절대적인 의는 하나님의 의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속성들과 행사들은 절대적으로 의로운 것이다.

2) 의인의 축복

의인에게 허락하신 축복의 보고는 다음과 같으나 지극히 풍성하고 넘치는 풍성하고 넘치는 하나님의 약속이요 선물인 것이다.

10. 핍박을 받는 자

1) 핍박의 의의

핍박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ՄՉ՞Պՙ로서 그 뜻은 '핍박하다'이다. 어근의ՄՉ는 무엇을 잡으려고 뒤를 따른다, 또는 무서움을 주어 무섭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2) 핍박받는 자의 축복

핍박받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표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핍박을 받는 것은 실패와 절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그 안에 담고 있는 것이다.

11. 기뻐하고

1) 기쁨의 출처

주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모진 환란과 역경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성도들이 가져야 할 기쁨의 출처는 성경에서 온다.

,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은 성도의 얼굴의 표현이며(빌 1;18 ; 4 : 4) 은혜를 받은 승리이며(대하 7 : 10)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시 100 : 2). 기쁨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며 (갈 5 : 22 ; 롬 14 : 17) 그것을 통하여 구원 받은 감사의 증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사 61 : 10)


2) 하나님의 기쁨

성경은 사람의 기쁨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바로 행하였을 때에 기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Ⅳ.팔복의 신학적 사상

1. 팔복과 그리스도

예수님은 자기의 가난함을 인하여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고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애통하는 자의 왕이셨다. 구약의 예언은 주님을 "간고를 많이 겪으며 지로를 아는 자로 "보았다. 복음서에서 성육신 하신 영광의 주님은 사랑스러운 겸손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 그리스도 예수의 내적 삶을 아주 잘 드러내신 것이다. 성육신 이전에 성령께서는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셨으며 "(사11:5)라고 알리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긍휼의 화신임을 보게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의 영광을 수치와 바꾸신 것은 바로 잃어버린 가련한 죄인들을 향한 긍휼때문 있다.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벧전1:19) 이셨습니다. 인간이 되셨지만, 더럽혀지지 않으셨고 죄의 더러움에 조금도 물들이지 않으셨다.

주님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신 분이다.주님은 화목제물로 세우심을 받으신 분이다. 주님은 또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화평을 이루셨다.

마찬가지로, 팔복에 속한 각 약속들도 주님에게서 성취되신 것을 볼 수 있다. 심령이 가난했기 때문에 천국은 더없이 주님의 것이다.애통 하셨기 때문에 주님은 자기 영혼이 수고한 것을 보고 위로를 받을 것이다.온유의 화신이신 주님이 이제는 영광의 보좌에 앉아계신다.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셨으나, 이제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의가 그백성에게 전가된 것을 보시고 완전히 만족하다. 마음이 청결하기 때문에 아무도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보고 계신다. 화평케하는 자로서 주님은 피값을 주고 산 자녀들 모두에 의해 하나님의 외아들로 인정 받고 계신다.핍박받는 자로서 주님이 받으실 상은 너무도 크다. 왜냐하면 모든 이름에 뛰어난 이름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2. 약속된 축복

각 특성을 나타내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선언이 되므로 각 특성은 권면이 된다. 헬라어로 마카리오스는 "행복한"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마카리오스를 행복이라고 번역하는것은 오해로 이끄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시는데 반하여 행복은 주관적인 상태이기 때문이다.그는 그들이 어떻게(행복하게) 느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며 또한 그것 때문에 그들이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 즉 그들이 복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무엇이 이러한 축복일까요? 각 복의 후반부가 그것을 명백히 밝힌다.그들은 하늘나라를 소유하며 그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으며 굶주린 자들은 배부르게 된다. 그들은 긍휼히 여김을 받으며, 그들은 하나님을 보게 되며,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는다. 그들의 하늘의 상급은 크다.

그리고 이 모든 축복은 합쳐서 전체를 이룬다. 여덞가지 특성이 모든 그리스도인을 묘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덞가지 축복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다. 사실 각 경우에 약속된 특정한 축복은 언급된 특정한 특성에 적합하다. 동시에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하면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수 없으며, 만족함이 없으면 위로를 받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긍휼이 여기심을 받지 못하고 그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면 그를 볼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여덞가지 특성은 함께 책임을 구성하며, 여덞가지 축복은 함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특성을 구성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다스리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긍휼히 여김과 위로를 받을 수 있고,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으며, 이 땅위에서 우리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면케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축복을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금 이 세상에서 약속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약속은 마지막의 복된 광경을 언급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며 또한 틀림없이 그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영적인 통찰력으로 이세상에서 하나님을 뵈옵기 시작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만물이 다 우리의 것임으로 이세상에서 우리는 땅을 기업으로 받기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팔복에서 예수님의 약속은 현재와 장래에 이루어 지는것이다

결 론

우리로 묘사된 사람들은 대부분이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는 것이요,권면된 특성은 영적인 특성이라는 것이요, 약속된 축복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영광스럽고 포괄적인 축복( 수고하자 않고 얻는 값없는 은사) 곧 땅과 하늘 나라를 기업으로 얻는 것과 위로와 배부름과 긍휼과 하나님을 뵙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지금 맛보게 되고 나중에 완전히 되는 그러한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팔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복되신 우리의 주님께로 돌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팔복은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행위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에 일치되는 체험 과정에 의하여 우리 속에 형성되는 만큼 우리는 완전한 본보기이신 주님에게 시선을 돌려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희미하게 반영되는 여러 영적 은혜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 모두 가장 훌륭히 예증 되기 때문이다.




☜ 참 고 도 서 ☞


·로버트 H.건드리 / 이 홍성 역 신약개관 크리스챤서적 1994

·이 상찬 목회자를 위한 산상수훈 두레마을 1990

·죤 스토트 / 김 광택역 예수님의 산상설교 생명의 말씀사 1983

·헤리슨 / 정 성구 역 신약개론 세종문화사 1992

·그랜드주석 편찬위원회 그랜드주석 성서교재간행사 1994

·레마종합씨리즈 편찬위원회 레마주석 임마누엘 1991

·강 병도 호크마종합주석 기독지혜사 1990




☜ 목 차 ☞

서 론

Ⅰ. 배경이해

1. 마태복음의 특징 1

2. 산상수훈 1

3. 팔복 2

Ⅱ. 일반적 개관

1. 묘사된 사람들 3

2. 권면적 특성 4

3. 약속된 축복 4

Ⅲ. 내용연구

1. 심령이 가난한 자 4

2. 복이 있나니 5

3. 애통하는 자 6

4. 온유한 자 6

5.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7

6. 긍휼이 여기는 자 7

7. 마음이 청결한 자 8

8. 화평케 하는 자 9

9. 의를 위하여 9

10. 핍박을 받는 자 10

11. 기뻐하고 10

Ⅳ. 팔복의 신학적 사상

1. 팔복과 그리스도 10

2. 약속된 축복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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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패란토스(ἀπέραντος)와 타페이노스(ταπεινός) / 무한한 : 겸손한


아패란토스(ἀπέραντος)와 타페이노스(ταπεινός) / 무한한 : 겸손한


ἀπέραντος, ον 스트롱번호 562

1. 끝없는.  2. 무한한. 3. 딤전1:4.
발음 [ apĕrantŏs ]
어원  / 1 [부정불변사]과 4008의 2차적 파생어에서 유래
  • 1.  끝없는, 무한한, 딤전 1:4.
  • 관련 성경  /  끝없는(딤전 1: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nor to devote themselves to myths and endless genealogies. These promote controversies rather than God's work--which is by faith.

ταπεινός, ἡ, όν 스트롱번호 5011

1. 낮은 지위의.  2. 비굴한. 3. 겸손한
발음 [ tapĕinŏs ]
어원  /  불확실한 어원에서 파생
  • 1.  낮은 지위의, 천한, 보잘것없는, 눅1: 52, 롬12:16, 고후7:6, 약1:9.
  • 2.  [감정의 상태나 사고방식에 있어서]
    • a.  [나쁜 의미] 비굴한, 비열한, 고후10:1.
    • b. [좋은 의미] 겸손한, 겸비한, 마11: 29, 약4:6, 벧전5:5.
  • 관련 성경  /   겸손한(마11:29, 약4:6, 벧전5:6), 비천한 (눅1:52, 고후7:6), 낮은(롬12:16, 약1:9), 유순 한(고후10:1).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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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온유와 겸손(마태복음 12:15-21)

15 예수께서 아시오 피하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고,
16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기기까지 하리니
2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성경 말씀 요약

  •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피하시며 병든 자들을 고치심 (15절)
  • 예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심 (16절)
  • 이사야서의 예언이 예수님의 삶에서 성취됨 (17-21절)
  •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

    마태복음 12:15-21의 말씀은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매우 세밀하게 우리에게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장면과 더불어 예수님의 모습을 예언했던 이사야서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투지 않으시고, 소리를 높이지 않으시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온유와 겸손한 모습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이 진정한 선지자의 모습이었음을 보여줍니다.

    1. 예수님의 치유 사역과 그 의미(마태복음 12:15)

    예수께서 아시오 피하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고
    마태복음 12장 15절. 이 구절은 예수님의 사역 중 하나인 치유 사역을 강조하며,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치유의 은혜를 베풀었는지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피하셨지만, 여전히 병든 자들을 고치심으로써 그의 자비로운 본성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장면은 새로운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피한 이유는 단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수용할 수 있는 더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 사랑의 실현입니다.

    현대적 적용 :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도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병든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돌보며,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병원 봉사나 지역사회에서 건강 관리 프로그램, 정신적 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과 같이 치유와 회복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2. 이사야서의 예언 성취(마태복음 12:16-21)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마태복음 12장 18절. 이 구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구절로,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택하시고, 그에게 기뻐하신다는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그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이방인들에게도 알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투지 않으시며 소리를 높이지 않으신다는 구절은 그의 온유한 태도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겸손한 심판자로서, 강자들을 억압하는 대신 연약한 자들을 돌보신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현대적 적용 :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온유와 겸손함을 통해 사람들을 대해야 합니다. 비난과 논쟁보다 사랑과 이해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갈등 상황이 발생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함을 본받아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또한, 교회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화해와 사랑으로 공동체를 유지해 나가야 합니다.

    3. 온유와 겸손의 모델로서의 예수님(마태복음 12:19-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마태복음 12장 20절. 이 구절은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모두 연약함을 상징하는데, 예수님은 이러한 연약한 자들을 돌보셨고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신앙생활의 본보기가 됩니다. 예수님은 강자나 권력자들보다는 약자들의 편에 서셨고,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셨습니다.

    현대적 적용 :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약한 자들을 돌보고 격려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사회적 약자나 소외된 이웃을 섬기고, 그들과 함께 하는 봉사활동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또한, 친구나 가족 중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음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본받자

    마태복음 12:15-21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들을 고치셨고, 다투지 않으시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서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본받아 사랑과 이해로 사람들을 대하며, 갈등 상황에서도 평화를 추구하는 태도를 가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같이 약자들을 돌보고,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 더욱 널리 퍼지기를 소망합니다.

    묵상과 나눔

  • 나는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습니까? 갈등 상황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웃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은 무엇입니까?
  • 예수님께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 모습을 본받아, 내가 돌보고 격려해야 할 사람은 누구이며,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요?
  • 기도문

    사랑의 주님, 오늘 마태복음 12장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온유와 겸손을 본받아, 우리의 삶 속에서도 사랑과 이해로 사람들을 대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약자들을 돌보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

    주님, 우리의 마음과 삶이 주님의 뜻에 맞게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갈등과 다툼 속에서도 평화를 추구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 주님의 사랑이 전달되게 하소서. 특히,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웃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넓히사,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일에 힘쓰게 하소서.

    주님,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 이웃에게 위로와 지지를 아끼지 않으며,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게 하소서. 우리의 손길과 말 한마디가 그들에게 큰 힘과 용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이해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본받아,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드러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모든 것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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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마음

    찰스 스펄전은 사복음서 89장의 내용 중 예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설명하신 구절은 단 한 곳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 11:29). 데인 오틀런드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죄인과 고난받는 자를 위한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알려준 스펄전의 이 발견에 관하여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신” 단 한 구절, “하나님의 아들께서 휘장을 걷어내고 자신의 본성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허락하신” 단 한 구절이라 말하고(23-4pp) 그 의미를 깊이 파고들었다(개혁된실천사, 2022). 오틀런드는 먼저 성경이 “마음”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단순히 이런저런 감정의 복합체 또는 이 생각 저 생각이 혼잡하게 섞여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체” 자체를 말한다고 설명했다. 마음은 “동기의 지휘소”, “존재의 중추”, “우리를 규정하고, 인도”하는 주체, “생명의 근원”(잠 4:23), “우리의 모든 행위를 이”끄는 곳이다(24-25pp). 온유함과 겸손함이 예수님의 “마음”이었다는 점은 그래서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가?

    물론 예수님도 분노하신 적이 있다(의로운 분노였지만). 때론 저주에 가까운 책망을 하셨다(“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하지만 기본적으로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의 가장 깊은 동기는 온유함과 겸손함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주변에 있는 친구들도 이렇게 평가할 때가 있다: ‘그 친구는 참 착해’, ‘그 사람은 정말 항상 따뜻한 사람이야.’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은 누구든 이렇게 그분을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분은 참 온유하고 겸손하셔.’

    그런데 예수님이 온유하고 겸손하시다는 것의 특별한 의미를 잠시 멈춰서 생각해 보자. 어쩌면 이 말씀은 당신에게 너무 익숙해서 별로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시지. 그러니까 하늘의 부귀영화를 잠시 버리시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종처럼 섬기며 사신 거잖아. 병든 사람과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만져주시고 고쳐주시고, 결국 그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셨잖아. 얼마나 온유하고 겸손하셔. 그런데 여기서 뭔가 더 특별한 의미를 찾아야 하는 건가?’

    이 책의 부제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죄인과 고난받는 자를 위한 그리스도의 마음.” 우리는 평온할 때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묵상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그러나 죄와 치열하게 싸우다가 심하게 넘어졌을 때, 고난 중에 하나님의 본심을 오해하고 그 친밀한 관계 밖으로 밀려나려고 할 때,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그리스도는 죄로 넘어진 나를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며 ‘내가 너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는데, 너는 고작 그 정도 죄도 이기지 못하느냐?’라고 호통치실 것만 같다. 고난 중에 하나님께 ‘어디 계시나요?’라고 부르짖을 때, 예수님은 ‘내 손과 발에 무슨 자국이 남아있는지 좀 봐라. 어떻게 너는 항상 의심하고 염려하느냐?’라고 혀를 차실 것만 같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예수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아니, 믿지 못한다. 더 불행한 건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죄 가운데 자백으로 빨리 예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고난 중에 더 신속하게 우리의 방패와 도움 되시는 주님께 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마음을 오해하는 문제는 이처럼 심각하다.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 마음이란?

    데인 오틀런드는 “온유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가 신약성경에 단 세 차례 나온다고 밝힌다. 각각 ‘온유함’, ‘겸손함’, ‘온순함’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오틀런드는 이를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이해심이 가장 많은 분”이라고 설명했다(26p). 예민하고 까다롭고 쉽게 화를 내고 손가락으로 항상 지적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양팔을 활짝 펼”쳐 우리를 맞이하는 분으로 묘사한다(26p). 오틀런드는 “온유”와 짝을 이루는 “겸손”의 의미를 신선하게 찾아내는데, 바로 “상황의 빈궁함과 열악함”(26p)이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겸손”의 본래 의미에 가깝다는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점을 가지고 예수님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분”이라고 설명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모든 신성과 영광과 거룩함을 옷입고 계셨으면서도 세상의 가장 빈궁하고 열악한 자들까지 차별하지 않고 만나주셨다. 조건도 없고, 장벽도 없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누구든지 내게 오면… ‘너의 죄의 짐을 다 벗어버리면 그때 만나주겠다’고 하지 않으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라고 하셨다. 그 짐을 가진 채로 주님께 나오면 주님이 쉼을 누리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오틀런드는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자상하고, 개방적이며, 너그럽고, 포용적이며, 이해심이 많고, 친절하시다”라고 소개한다(27-8pp).

    만일 주님께서 정말 이런 분이시라면, 왜 죄인들에게 분노하시고 회개하지 않으면 무서운 심판을 내릴 것이라고 누차 경고하시는 것일까? 주님이 마음을 뒤집으신 것일까? 본래 온유하고 겸손하신 마음이었는데,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들에게 분노하고 저주하는 마음으로 바뀌신 걸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마음 깊은 동기는 여전히 온유와 겸손으로 가득 차 있다. 만일 그분이 온유하고 겸손하지 않으셨다면 죄인들은 회개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고, 예수님도 그들에게 지겹도록 회개할 것을 요청할 것이 아니라 단숨에 그들을 처단하시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계속 경고하시면서 회개를 요구하시는 것 또한 그분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을 명백히 드러낸다. 그분은 죄인이 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악인이 심판받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겔 18:23; 33:11).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이 그분의 본심이시다(딤전 2:4).

    주님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은 주님을 찾고 주님께 나온 자들에게 특별히 더 주어진다. 데인 오틀런드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대하는 태도가 언제나 “온유”라고 말한다. 온유가 그분의 “본질이자 마음”이기 때문이다(28p).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어떤 죄나 약점이나 불안이나 의심이나 근심이나 실패가 있더라도…온유한 마음으로 부드럽게 감싸주신다”라고 말한다(28p). 주님은 자기 백성에게 언제나 이런 마음이시다. 어쩌다가 한 번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멍에가 쉽다고?

    주님은 당신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신 후에,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여기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러면 그렇지’라고 썩은 미소를 짓는다. 양팔 벌려 우리를 맞이하시고 이제 쉬라고 하셨으면서 결국 “멍에”를 지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 실제로 예수님을 믿으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 속에 그리스도인도 많은 고난을 겪는다. 죄와의 싸움은 예수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더욱더 힘들다. 과거엔 죄라는 것도 몰랐고, 알았어도 마음껏 저지르는 것이 나름 짜릿했는데, 이제 더 많은 생각과 행동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죄를 짓고 나면 훨씬 더 무거운 죄책감이 짓누른다. 그냥 인생을 살아가는 것만 해도 많은 어려움을 겪는데,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겪는 고난과 시험이 가중됐다. 그래서 냉정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이 지라고 하신 멍에가 그렇게까지 쉽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데인 오틀런드는 그래서 ‘쉽다’는 말은 사실 ‘친절하다’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설명한다(엡 4:32). 예수님의 멍에는 인생의 짐 위에 추가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생의 짐을 지고 살 때, 주께서 언제나 “친절”하게 자기 백성을 맞이하시고 도와주신다는 약속이다. 오틀런드는 “그분은 우리가 어려울 때 단지 도움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어려움을 함께 짊어지신다. 그분은 언제나 싫어하는 내색 없이 우리를 부드럽게 감싸주신다. 이것이 그분의 마음이다. 예수님은 항상 이런 마음으로 행동하신다”라고 설명했다(30p). 그러므로 개인의 노력으로 인생의 짐을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애쓰는 수고하는 자들이나 아무리 노력해도 밖에서 누르는 무거운 짐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유일하고도 참된 희망이 되신다. 그분께 나오는 자들을 두 팔 벌려 맞이하시는 주님은, 친절하게 그들의 짐을 대신 지시고, 그들 대신 수고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함께 하는 자들의 멍에는 쉽고 가벼운 것이다. 과거엔 그리스도 없이 살았다면 이제는 온 우주에서 가장 온유하고 겸손하고 친절한 분과 함께 산다.

    지금 예수님은 나를 어떻게 바라보실까?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 그분은 “아무런 자격도 없지만 진정으로 은혜를 바랐던 이들을 불쌍히 여겨 만져주며, 치유와 포용과 용서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35p). 혹자는 계속 그분의 온유와 겸손에만 집중하면 균형 있게 주님을 바라보는 데 문제가 생기지 않겠냐고 묻겠지만, 저자는 1) 예수님의 속성이 서로 상충하지 않으며 2) 예수님의 속성은 단순하기 때문에, 그중 하나를 논의하는 것에 문제가 없고 3) 성경이 증언하는 것에 충성하는 것뿐 일부러 치우친 시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

    그러면서 저자는 구약의 율법을 예로 든다.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는 것이 거룩함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부정한 땅에 오셨고, 부정한 백성을 만지셨다. 심지어 율법이 부정하다고 규정한 병자들과 죄인을 만나주셨다. 그분의 심연에 깊은 연민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분의 마음이 그분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고 설명했다(41p). 심지어 “동정심이 육신을 입고 세상을 돌아다닌다면 어떤 모습일까?”라고 물으며 “궁금해할 필요가 없”이 예수님이 바로 그런 삶을 사셨다고 확신했다(42p). 지금도 예수님은 그 마음이 변치 않으셨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히 13:8).

    그리스도의 영(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보이신 행동이 온통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으로 점철되어 있으셨다면, 지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역사하실 때, 우리가 경험하는 그분의 마음은 틀림없이 넘치는 긍휼과 자비와 온유와 겸손일 것이다. 그러니 주저하지 마라. 주님께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분의 마음을 오해하지 말고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라. 당신이 아무리 심각한 또는 반복되는 죄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분을 볼 낯이 없다고 여겨지더라도, 이런저런 상황과 환경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며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원망하고 있더라도, 그분만큼 당신을 친절하게 맞이해줄 분이 어디 있는가? 그분만큼 당신을 두 팔 벌려 맞이하고 자상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그 짐을 대신 지시고 그 수고를 대신해 주실 분이 어디 있는가? 그분만큼 당신의 죄를 깨끗이 용서하시고 새로운 힘과 정결한 마음으로 회복시켜 주실 분이 어디 있는가? 그분만큼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기를 영원무궁하게 하실 분이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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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손하신 예수님(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예수님께서는 창세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려고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오셨습니다.
    곧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추심과 같이 자기를 낮추는 것을 겸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빌립보교회의 교인들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라고 하였습니다.
    [2]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시려고 예루실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올라가시는 중에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러 두 제자를 보내시며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마21:2)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가신 이유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었습니다.
    [3]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 예수님께서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겸손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타페이노스]라고 하는데 자기를 낮춘다는 뜻입니다.
     
    국어사전에는 겸손이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겸손이라는 단어는 한문인데 謙(겸손할 겸) 遜(겸손할 손) 입니다.
     
    •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므로 항상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고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 또한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독생자 예수님을 공경하게 하시려고 심판하는 권한을 다 아들이신 예수님께 맡기셨습니다.
    [4]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5: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이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 말씀을 읽으며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고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공경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겸손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 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은혜를 받고 우리의 마음에 쉼을 얻습니다.
     
    • 또한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께 도움을 받기 위해 기도를 합니다.
     
    베드로사도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벧전5:7) 하였습니다.
     
    또 바울사도는 빌립보교회의 교인들에게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5]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은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곧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성경말씀을 읽으며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은혜를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찾아온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많은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6]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나 집에서 또 들이나 바닷가에서 많은 사람을 가르쳐셨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즐겁게 들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도 성경말씀을 읽을 때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받아드립니다.
     
    • 예수님께서 유월절 식사를 마치시고 일어나 수건을 가지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 하셨습니다.
     
    곧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행하게 하시려고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7]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그 말씀을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고 아픈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아픈 사람을 고쳐 주신 이유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8]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 바울사도가 2차 전도여행을 실라와 함께 하였는데 그 여행 중에 빌립보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에게 편지를 하였습니다.
     
    그 편지에서 데실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이 바울사도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9]
    [살전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우리는 항상 겸손하신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고 믿습니다.
     
    곧 성경말씀을 부지런히 읽으며 그 말씀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얻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항상 예수님과 동행을 합니다.
    [10]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감사와 간구의 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기도하고 간구할 때 성령님께서 저희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여 주시고
    저희들을 지켜 돌보아 주옵소서
    .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아멘
     
    [질문]
    1.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마 11:29)
    답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2.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합니까? (빌 2:3)
    답 :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3. 구원을 베푸시는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여서 무엇을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습니까?(슥 9:9)
    답 :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4.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판을 다 아들이신 예수님께 맡기신 이유는 무엇입니까?(요 5:23)
    답 :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5.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빌 4:6)
    답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6. 예수님께서 자기를 찾아 온 큰 무리를 보시고 어떻게 여기셨습니까? (막 6:34)
    답 :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7.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요 13:15)
    답 :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8. 예수님께서 아픈 사람을 고치신 것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마 8:17)
    답 :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9.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말 곧 복음을 들을 때 누구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까? (살전 2:13)
    답 :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10. 우리는 누구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까?(빌 2:5)
    답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 양적 시간, 질적 시간 / 질적 변화, 시간적 변화 /


    * 카이로스 : 카이로스의 변화는 질적인 것으로 새로운 것
    * 크로노스 : 크로노스의 변화는 시간적인 것으로 새로운 제품을 의미                                 

    καιρός, οῦ , ὁ 스트롱번호 2540

    1. 때.  2. 달가운 때. 3. 옳은 때
    발음 [ kair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 1. 때, 시점, 기간, 시기.
      • a. [일반적으로] 달가운 때, 고후6:2, 어려운 때, 딤후3:1, 열매 맺는 때, 행14:17, 때때로, 정규적으로, 요5:4.
      • b. 옳은 때, 알맞은 때, 좋은 때, 제때에, 마24:45, 눅12:42, 행24:25.
      • c. 정한 때, 마13:30, 21:34, 막1:15, 행17:26, 갈4:10, 6:9, 딤전2:6, 딤후4:6, 딛1:3.
      • d. [종말론적 숙어] 마8:29, 16:3, 눅21: 8, 고전4:5, 엡1:10, 계1:3, 22:10.
    • 관련 성경 /  때(마8:29, 눅8:13, 딤후3:1), 날(마16:3, 눅1:20, 고후6:2), 세월(골4:5), 연대(행17:26), 틈(행24:25), 현재(롬8:18, 히9:9), 기회(갈6:10), 항상(엡6:18).

    χρόν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5550


    1. 시간. 2. 유예
    발음 [ chrŏnŏs ]
    어원  / 불확실한 파생어에서 유래
    • 1. 시간, 때, 마25:19, 눅8:27, 요7:33, 행8:11.
    • 2. 유예, 지체, 계2:21, 10:6.
    • 관련 성경  /  때(마2:7, 행1:7, 벧전4:2), 시대(행17:30), 얼마간(행19:22), 시간(11:32), 기회(계2:21), 동안(막2:19), 기한(눅1:57), 시대(행17:30), 항상(행20:18), 날(행27:9), 영세(롬16:25).


    시간(時間)과 때 - "크로노스 kronos" "카이로스 kairos"

    시간은 무엇일까, 세월은 무엇이며, 때는 무엇일까?

    시간을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가 있는데, 그 뜻이 사뭇 다르다.
    크로노스(고대 그리스어: Χρόνος)는 그리스 신화에서 자주 사용되어 왔고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에서도 사용되었다.
    크로노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무형의 신으로 묘사되거나, ​형상으로는 긴 수염을 가진 늙은 현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크로노스는 영어의 chronicle (연대기) chronology (연대학) 정밀한 시계 chronometer 등 시간과 관계있는 단어들의 어원이다.

    ​세상만사를 수평적인(horizontal) 혹은 직선적인(linear) 시간상에 차례차례 세울 수 있다면, 모든 사건들은 선후 관계를 가지고 인과관계 법칙을 따르게 될 것이다.
    나이 지긋한 현자가 매우 정밀하게 관리하니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만사가 질서정연하게 기록될 듯하며, 만사가 엄격하게 인과관계를 따라 정열 될 것같이 보인다.

    카이로스 신
    -
    카이로스 신은 저울을 가지고 있고, 등과 발에 날개가 있다.
    역동적이고 무척 빠르게 움직일 것 같다.

    카이로스 신은 기회의 신의 이름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남긴 카이로스 신의 모습은 카이로스 신의 모습 - 긴 수염을 가진 늙은 현자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카이로스 신의 조각을 보면 역동적이고 근육질이다.

    ​이 조각에서 카이로스 신은 한 손에 저울을 들고, 한 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있다.
    ​​카이로스 신은 등에 날개가 있고, 발에도 날개가 있다. 매우 빠르게 지나갈 듯 역동적인 모습이다.

    카이로스 신은 앞머리는 치렁치렁하고, 뒷머리는 대머리이다.
    앞에서는 치렁치렁한 머리를 붙잡을 수 있도록 하나, 카이로스 신이 지나간 후에는 뒤에서는 붙잡을 수 없게 하기 위함이란다.

    손에 저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카이로스가 무엇인가의 무게를 측정하려는 것인가 보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삶의 가치를 판단할 때,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보다는 무엇을 성취하였는가를 측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음을 엿보게 한다.

    살아온 삶의 가치를 무게로 측정할 수 있을까?
    만약 삶의 굴곡과 성취, ​삶의 품위와 의미를 평가하는 저울이 있다면, 저울에 사용하는 기준치의 무게는 어떻게 정해야 하는 것일까?
    무게를 잰다는 것이 최후의 심판을 위한 것일까?.

    카이로스 신
    한 손에 저울을 들고, 한 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있다. ​​카이로스 신은 등에 날개가 있고, 발에도 날개가 있다. ​​매우 빠르게 지나갈 듯 역동적인 모습이다

    시간과 때 - "크로노스 (kronos)"와 "카이로스 (kairos)"

    시간을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가 있는데, 그 뜻이 사뭇 다르다.

    크로노스(고대 그리스어: Χρόνος)는 그리스 신화에서 자주 사용되어 왔고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에서 사용되었다. 크로노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무형의 신으로 묘사되거나, ​ 긴 수염을 가진 늙은 현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크로노스는 영어의 chronicle (연대기) chronology (연대학) 정밀한 시계 chronometer 등 시간과 관계있는 단어들의 어원이다.

    크로노스 신
    -
    크로노스는 영어의 chronicle (연대기) chronology (연대학) 정밀한 시계(chronometer) 등 시간과 관계있는 단어들의 어원이다.

    긴 수염을 가진 늙은 현자의 모습의 "크로노스가 정밀하게 관리하는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만사가 질서정연하게 기록될 듯하며, 만사가 엄격하게 인과관계를 따라 정열 될 것같이 보인다. 세상만사를 수평적인(horizontal) 혹은 직선적인(linear) 시간상에 차례차례 세울 수 있으니, 모든 사건들은 선후 관계를 가지고 인과관계 법칙을 따르게 될 것이다.

    이에 대비하여 카이로스 신은 사뭇 근육질의 역동적인 모습이다. 카이로스는 적절한 때 또는 초월적인 순간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직선적인(linear) 선을 성실하게 따르기보다는 방향을 예측할 수도 없고, 빠르게 움직일 듯하다.

    수평적(horizontal)이고 직선적인(linear)인 크로노스 시간이 질서정연하고 인과관계를 따르는 것을 거부할 기세이다.

    카이로스 신은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한 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있다. 저울은 가지고 있음은 경중을 따지겠다는 것일 터이니 심판을 상징하는 듯하다. 카이로스 신의 앞머리는 치렁치렁하고 뒷머리는 대머리이다. 앞에서는 치렁치렁한 머리를 붙잡을 수 있게 하는데 지나간 뒤에서는 붙잡을 수 없게 하기 위함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크로노스가 일직선의 철로 위를 질서 있게 움직이는 것 같다면, 카이로스 신은 언제 어디서 우리에게 다가올지 알기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마주하기도 불잡기도 어려울 울만큼 매우 빠르게 우리 곁을 지나칠 듯한 모습이다

    카이로스 (kairos)는 인과관계에 따라서 성실하였는가 여부를 따지기보다 성과가 있었는지를 평가하겠다고 말하는 듯하다.

    카이로스 신 - 카이로스 신은 저울을 가지고 있는 천사로 표현되고 있다.

    성경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때 - 카이로스

    성경에서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시하고, 이때 사용하는 단어가 "카이로스"이다. 세상의 중요한 사건들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때에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믿는다. 성경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이 역사하는 수직적(vertical) 관계 - "때"를 강조한다.성경에서의 주요 사건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이며,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이나 인과관계보다 우선하는 경우가 많다.

    구약 전도서 기자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과 인간이 사는 세상만사들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는 적당한 때(kairos)가 되어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리고 때(kairos)는 예정된 기능을 다 한 다음에는 소멸하는 것으로 본다. 성경의 저자들은 모든 일의 배후에는 인간이 알 수도 측정할 수도 없는 신비 즉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섭리하시는 "영원자"(the Eternal) 하나님의 섭리와 신비가 개재되어 있다고 믿는다.

    성경은 세상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개재된 때(kairos)에 일어난다고 말하면소, 사람은 때(kairos)를 깨어서 기다리며, 때(kairos)가 이르면 놓치지 않고, 이 kairos를 잡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마땅히 이때가 이르기까지는 각자에게 주어진 크로노스를 아끼고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부지런히 행하면서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

    우리의 삶에 주어진 물리적 기간은 길어야 100년이고, 이 100년은 크로노스적 시간으로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쏜살같이 날아간다. ​우리가 깨어 있을 때나 잠이 들어 있을 때나 시간은 흐른다. 그 끝은 각자의 삶의 끝에 맞추어진다. 우리가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시간으로 지나갈 뿐이다. 지상에서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지상의 썩을 것을 위하여 애쓰면 지상에서 성공한 것들이 많을 수 있으나, 지상에서 성공하여 쌓은 것들이 저울에 달아보니 의미가 없다면 그냥 버려질 것이다.

    이 저울의 추는 상징적이다. 우리가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추수할 때에 거둘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하니 살아가는 동안에 추수할 때 거둘 열매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권고한다.

    지인사 대천명 盡人事 待天命라는 말은 사람이 할 일을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 한다면, 한정된 삶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많은 일들'중에서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할까? 선택은 나의 몫이다. 나의 선택에 대하여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는 혼자서만 애쓰는 것을 경계한다. 지혜로운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라고 권장한다. 삶의 현장에서 선한 일로 수고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기다리라고 권장한다.

    전도서 기자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맞아 들어가도록 만들고, 사람이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을 선물로 주셨다고 말한다. 그러하니 주어진 시간 삶의 현장에서 선한 일로 수고하고, 주어진 열매들을 즐거워하라고 권장한다.

    나는 내게 주어진 삶의 기간 동안을 되돌아본다. 내가 나름대로 세운 목표를 위해 애를 쓴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내가 나름대로 세운 목표를 위해 애를 쓴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할 만한 일이고 해야 할 일들의 우선순위에 맞추어졌는지를 생각하면 답이 쉽지 않다.

    열심은 두려움을 잠재우는 효과가 있다. 이 열심은 깨어서 "때"(kairos)를 알아차리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열심보다는 먼저 해야 할 것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성령의 도움을 받으라고 성경은 말한다.

    "때"(kairos)가 임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지혜를 갖도록 도움을 청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열심으로 나의 눈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지혜를 청해야 할 때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개재된 때(kairos)를 만나서 지체없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마태가 예수를 보기 위하여 나무 위에 오르다

    성경의 크로노스적 사건들 1: 여리고의 세리장이요 부자였던 삭개오의 선택:

    마태는 예수를 보기 위하여 나무 위에 오른다.
    마태에게 중대한 카이로스의 순간이다. [누가복음 19:1~10]

    여리고의 세리장이요 부자였던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예수를 만나기 위하여 하던 일을 멈추고 나섰다.

    키가 작았던 삭개오는 체면을 벗어던지고, 예수를 보기 위하여 뽕나무 가지 위로 나무 위에 오른다.

    그리고 그가 만나고 싶어 한 예수의 부르심을 받는다.

    이에 삭개오는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말하고, 이후 예수의 제자가 된다. 삭개오에게 이 만남은 그의 삶을 극적으로 바꾸는 크로노스적 사건이었다.

    개역개정 누가복음 19장 예수와 삭개오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곱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오순절 성령 세례 사도행전 10:44~48

    성경의 크로노스적 사건들 2 : 오순절 성령 세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120사도들에게 주어지는 카이로스의 순간.
    핍박을 두려워하면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120사도는 성령의 세례를 받는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후, 이들은 담대하게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기 시작하기 시작한다.

    성경의 크로노스적 사건들 3 : 야곱에게 브니엘에서의 밤 창세기 32:24~31

    야곱은 가족을 모두 얍복강 건너로 보내고 홀로 남는다.
    형 에서를 만나게 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밤을 새워 기도한다.
    야곱은 천사를 만나게 되었고, 밤이 새도록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한다.
    그날 브니엘에서 야곱은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로 불린다.
    새로운 사람이 된다.
    야곱에게 브니엘에서 밤은 카이로스적 사건의 시간이다.

    개역개정 창세기 32장 24~31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1)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사건은 카이로스적 사건이다.

    Rembrandt, Eugène Delacroix 등 화가들이 이 위대한 사건을 그림으로 그렸다.
    야곱은 온 근육은 터질 듯 긴장하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천서를 쓰러뜨리려고 하는 모습이다.
    천사는 야곱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아마 씨름을 져주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고도 죽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은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다음날 아침 야곱은 형에서와 극적으로 화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앨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