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패란토스(ἀπέραντος)와 타페이노스(ταπεινός) / 무한한 : 겸손한


아패란토스(ἀπέραντος)와 타페이노스(ταπεινός) / 무한한 : 겸손한


ἀπέραντος, ον 스트롱번호 562

1. 끝없는.  2. 무한한. 3. 딤전1:4.
발음 [ apĕrantŏs ]
어원  / 1 [부정불변사]과 4008의 2차적 파생어에서 유래
  • 1.  끝없는, 무한한, 딤전 1:4.
  • 관련 성경  /  끝없는(딤전 1: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nor to devote themselves to myths and endless genealogies. These promote controversies rather than God's work--which is by faith.

ταπεινός, ἡ, όν 스트롱번호 5011

1. 낮은 지위의.  2. 비굴한. 3. 겸손한
발음 [ tapĕinŏs ]
어원  /  불확실한 어원에서 파생
  • 1.  낮은 지위의, 천한, 보잘것없는, 눅1: 52, 롬12:16, 고후7:6, 약1:9.
  • 2.  [감정의 상태나 사고방식에 있어서]
    • a.  [나쁜 의미] 비굴한, 비열한, 고후10:1.
    • b. [좋은 의미] 겸손한, 겸비한, 마11: 29, 약4:6, 벧전5:5.
  • 관련 성경  /   겸손한(마11:29, 약4:6, 벧전5:6), 비천한 (눅1:52, 고후7:6), 낮은(롬12:16, 약1:9), 유순 한(고후10:1).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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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온유와 겸손(마태복음 12:15-21)

15 예수께서 아시오 피하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고,
16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기기까지 하리니
2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성경 말씀 요약

  •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피하시며 병든 자들을 고치심 (15절)
  • 예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심 (16절)
  • 이사야서의 예언이 예수님의 삶에서 성취됨 (17-21절)
  •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

    마태복음 12:15-21의 말씀은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매우 세밀하게 우리에게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장면과 더불어 예수님의 모습을 예언했던 이사야서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투지 않으시고, 소리를 높이지 않으시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온유와 겸손한 모습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이 진정한 선지자의 모습이었음을 보여줍니다.

    1. 예수님의 치유 사역과 그 의미(마태복음 12:15)

    예수께서 아시오 피하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고
    마태복음 12장 15절. 이 구절은 예수님의 사역 중 하나인 치유 사역을 강조하며,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치유의 은혜를 베풀었는지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피하셨지만, 여전히 병든 자들을 고치심으로써 그의 자비로운 본성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장면은 새로운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피한 이유는 단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수용할 수 있는 더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 사랑의 실현입니다.

    현대적 적용 :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도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병든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돌보며,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병원 봉사나 지역사회에서 건강 관리 프로그램, 정신적 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과 같이 치유와 회복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2. 이사야서의 예언 성취(마태복음 12:16-21)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마태복음 12장 18절. 이 구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구절로,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택하시고, 그에게 기뻐하신다는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그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이방인들에게도 알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투지 않으시며 소리를 높이지 않으신다는 구절은 그의 온유한 태도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겸손한 심판자로서, 강자들을 억압하는 대신 연약한 자들을 돌보신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현대적 적용 :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온유와 겸손함을 통해 사람들을 대해야 합니다. 비난과 논쟁보다 사랑과 이해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갈등 상황이 발생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함을 본받아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또한, 교회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화해와 사랑으로 공동체를 유지해 나가야 합니다.

    3. 온유와 겸손의 모델로서의 예수님(마태복음 12:19-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마태복음 12장 20절. 이 구절은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모두 연약함을 상징하는데, 예수님은 이러한 연약한 자들을 돌보셨고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신앙생활의 본보기가 됩니다. 예수님은 강자나 권력자들보다는 약자들의 편에 서셨고,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셨습니다.

    현대적 적용 :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약한 자들을 돌보고 격려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사회적 약자나 소외된 이웃을 섬기고, 그들과 함께 하는 봉사활동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또한, 친구나 가족 중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음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본받자

    마태복음 12:15-21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들을 고치셨고, 다투지 않으시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서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본받아 사랑과 이해로 사람들을 대하며, 갈등 상황에서도 평화를 추구하는 태도를 가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같이 약자들을 돌보고,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 더욱 널리 퍼지기를 소망합니다.

    묵상과 나눔

  • 나는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습니까? 갈등 상황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웃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은 무엇입니까?
  • 예수님께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 모습을 본받아, 내가 돌보고 격려해야 할 사람은 누구이며,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요?
  • 기도문

    사랑의 주님, 오늘 마태복음 12장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온유와 겸손을 본받아, 우리의 삶 속에서도 사랑과 이해로 사람들을 대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약자들을 돌보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

    주님, 우리의 마음과 삶이 주님의 뜻에 맞게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갈등과 다툼 속에서도 평화를 추구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 주님의 사랑이 전달되게 하소서. 특히,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웃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넓히사,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일에 힘쓰게 하소서.

    주님,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 이웃에게 위로와 지지를 아끼지 않으며,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게 하소서. 우리의 손길과 말 한마디가 그들에게 큰 힘과 용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이해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본받아,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드러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모든 것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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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마음

    찰스 스펄전은 사복음서 89장의 내용 중 예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설명하신 구절은 단 한 곳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 11:29). 데인 오틀런드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죄인과 고난받는 자를 위한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알려준 스펄전의 이 발견에 관하여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신” 단 한 구절, “하나님의 아들께서 휘장을 걷어내고 자신의 본성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허락하신” 단 한 구절이라 말하고(23-4pp) 그 의미를 깊이 파고들었다(개혁된실천사, 2022). 오틀런드는 먼저 성경이 “마음”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단순히 이런저런 감정의 복합체 또는 이 생각 저 생각이 혼잡하게 섞여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체” 자체를 말한다고 설명했다. 마음은 “동기의 지휘소”, “존재의 중추”, “우리를 규정하고, 인도”하는 주체, “생명의 근원”(잠 4:23), “우리의 모든 행위를 이”끄는 곳이다(24-25pp). 온유함과 겸손함이 예수님의 “마음”이었다는 점은 그래서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가?

    물론 예수님도 분노하신 적이 있다(의로운 분노였지만). 때론 저주에 가까운 책망을 하셨다(“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하지만 기본적으로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의 가장 깊은 동기는 온유함과 겸손함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주변에 있는 친구들도 이렇게 평가할 때가 있다: ‘그 친구는 참 착해’, ‘그 사람은 정말 항상 따뜻한 사람이야.’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은 누구든 이렇게 그분을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분은 참 온유하고 겸손하셔.’

    그런데 예수님이 온유하고 겸손하시다는 것의 특별한 의미를 잠시 멈춰서 생각해 보자. 어쩌면 이 말씀은 당신에게 너무 익숙해서 별로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시지. 그러니까 하늘의 부귀영화를 잠시 버리시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종처럼 섬기며 사신 거잖아. 병든 사람과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만져주시고 고쳐주시고, 결국 그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셨잖아. 얼마나 온유하고 겸손하셔. 그런데 여기서 뭔가 더 특별한 의미를 찾아야 하는 건가?’

    이 책의 부제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죄인과 고난받는 자를 위한 그리스도의 마음.” 우리는 평온할 때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묵상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그러나 죄와 치열하게 싸우다가 심하게 넘어졌을 때, 고난 중에 하나님의 본심을 오해하고 그 친밀한 관계 밖으로 밀려나려고 할 때,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그리스도는 죄로 넘어진 나를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며 ‘내가 너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는데, 너는 고작 그 정도 죄도 이기지 못하느냐?’라고 호통치실 것만 같다. 고난 중에 하나님께 ‘어디 계시나요?’라고 부르짖을 때, 예수님은 ‘내 손과 발에 무슨 자국이 남아있는지 좀 봐라. 어떻게 너는 항상 의심하고 염려하느냐?’라고 혀를 차실 것만 같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예수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아니, 믿지 못한다. 더 불행한 건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죄 가운데 자백으로 빨리 예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고난 중에 더 신속하게 우리의 방패와 도움 되시는 주님께 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마음을 오해하는 문제는 이처럼 심각하다.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 마음이란?

    데인 오틀런드는 “온유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가 신약성경에 단 세 차례 나온다고 밝힌다. 각각 ‘온유함’, ‘겸손함’, ‘온순함’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오틀런드는 이를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이해심이 가장 많은 분”이라고 설명했다(26p). 예민하고 까다롭고 쉽게 화를 내고 손가락으로 항상 지적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양팔을 활짝 펼”쳐 우리를 맞이하는 분으로 묘사한다(26p). 오틀런드는 “온유”와 짝을 이루는 “겸손”의 의미를 신선하게 찾아내는데, 바로 “상황의 빈궁함과 열악함”(26p)이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겸손”의 본래 의미에 가깝다는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점을 가지고 예수님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분”이라고 설명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모든 신성과 영광과 거룩함을 옷입고 계셨으면서도 세상의 가장 빈궁하고 열악한 자들까지 차별하지 않고 만나주셨다. 조건도 없고, 장벽도 없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누구든지 내게 오면… ‘너의 죄의 짐을 다 벗어버리면 그때 만나주겠다’고 하지 않으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라고 하셨다. 그 짐을 가진 채로 주님께 나오면 주님이 쉼을 누리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오틀런드는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자상하고, 개방적이며, 너그럽고, 포용적이며, 이해심이 많고, 친절하시다”라고 소개한다(27-8pp).

    만일 주님께서 정말 이런 분이시라면, 왜 죄인들에게 분노하시고 회개하지 않으면 무서운 심판을 내릴 것이라고 누차 경고하시는 것일까? 주님이 마음을 뒤집으신 것일까? 본래 온유하고 겸손하신 마음이었는데,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들에게 분노하고 저주하는 마음으로 바뀌신 걸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마음 깊은 동기는 여전히 온유와 겸손으로 가득 차 있다. 만일 그분이 온유하고 겸손하지 않으셨다면 죄인들은 회개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고, 예수님도 그들에게 지겹도록 회개할 것을 요청할 것이 아니라 단숨에 그들을 처단하시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계속 경고하시면서 회개를 요구하시는 것 또한 그분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을 명백히 드러낸다. 그분은 죄인이 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악인이 심판받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겔 18:23; 33:11).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이 그분의 본심이시다(딤전 2:4).

    주님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은 주님을 찾고 주님께 나온 자들에게 특별히 더 주어진다. 데인 오틀런드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대하는 태도가 언제나 “온유”라고 말한다. 온유가 그분의 “본질이자 마음”이기 때문이다(28p).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어떤 죄나 약점이나 불안이나 의심이나 근심이나 실패가 있더라도…온유한 마음으로 부드럽게 감싸주신다”라고 말한다(28p). 주님은 자기 백성에게 언제나 이런 마음이시다. 어쩌다가 한 번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멍에가 쉽다고?

    주님은 당신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신 후에,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여기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러면 그렇지’라고 썩은 미소를 짓는다. 양팔 벌려 우리를 맞이하시고 이제 쉬라고 하셨으면서 결국 “멍에”를 지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 실제로 예수님을 믿으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 속에 그리스도인도 많은 고난을 겪는다. 죄와의 싸움은 예수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더욱더 힘들다. 과거엔 죄라는 것도 몰랐고, 알았어도 마음껏 저지르는 것이 나름 짜릿했는데, 이제 더 많은 생각과 행동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죄를 짓고 나면 훨씬 더 무거운 죄책감이 짓누른다. 그냥 인생을 살아가는 것만 해도 많은 어려움을 겪는데,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겪는 고난과 시험이 가중됐다. 그래서 냉정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이 지라고 하신 멍에가 그렇게까지 쉽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데인 오틀런드는 그래서 ‘쉽다’는 말은 사실 ‘친절하다’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설명한다(엡 4:32). 예수님의 멍에는 인생의 짐 위에 추가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생의 짐을 지고 살 때, 주께서 언제나 “친절”하게 자기 백성을 맞이하시고 도와주신다는 약속이다. 오틀런드는 “그분은 우리가 어려울 때 단지 도움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어려움을 함께 짊어지신다. 그분은 언제나 싫어하는 내색 없이 우리를 부드럽게 감싸주신다. 이것이 그분의 마음이다. 예수님은 항상 이런 마음으로 행동하신다”라고 설명했다(30p). 그러므로 개인의 노력으로 인생의 짐을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애쓰는 수고하는 자들이나 아무리 노력해도 밖에서 누르는 무거운 짐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유일하고도 참된 희망이 되신다. 그분께 나오는 자들을 두 팔 벌려 맞이하시는 주님은, 친절하게 그들의 짐을 대신 지시고, 그들 대신 수고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함께 하는 자들의 멍에는 쉽고 가벼운 것이다. 과거엔 그리스도 없이 살았다면 이제는 온 우주에서 가장 온유하고 겸손하고 친절한 분과 함께 산다.

    지금 예수님은 나를 어떻게 바라보실까?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 그분은 “아무런 자격도 없지만 진정으로 은혜를 바랐던 이들을 불쌍히 여겨 만져주며, 치유와 포용과 용서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35p). 혹자는 계속 그분의 온유와 겸손에만 집중하면 균형 있게 주님을 바라보는 데 문제가 생기지 않겠냐고 묻겠지만, 저자는 1) 예수님의 속성이 서로 상충하지 않으며 2) 예수님의 속성은 단순하기 때문에, 그중 하나를 논의하는 것에 문제가 없고 3) 성경이 증언하는 것에 충성하는 것뿐 일부러 치우친 시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

    그러면서 저자는 구약의 율법을 예로 든다.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는 것이 거룩함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부정한 땅에 오셨고, 부정한 백성을 만지셨다. 심지어 율법이 부정하다고 규정한 병자들과 죄인을 만나주셨다. 그분의 심연에 깊은 연민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분의 마음이 그분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고 설명했다(41p). 심지어 “동정심이 육신을 입고 세상을 돌아다닌다면 어떤 모습일까?”라고 물으며 “궁금해할 필요가 없”이 예수님이 바로 그런 삶을 사셨다고 확신했다(42p). 지금도 예수님은 그 마음이 변치 않으셨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히 13:8).

    그리스도의 영(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보이신 행동이 온통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으로 점철되어 있으셨다면, 지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역사하실 때, 우리가 경험하는 그분의 마음은 틀림없이 넘치는 긍휼과 자비와 온유와 겸손일 것이다. 그러니 주저하지 마라. 주님께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분의 마음을 오해하지 말고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라. 당신이 아무리 심각한 또는 반복되는 죄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분을 볼 낯이 없다고 여겨지더라도, 이런저런 상황과 환경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며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원망하고 있더라도, 그분만큼 당신을 친절하게 맞이해줄 분이 어디 있는가? 그분만큼 당신을 두 팔 벌려 맞이하고 자상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그 짐을 대신 지시고 그 수고를 대신해 주실 분이 어디 있는가? 그분만큼 당신의 죄를 깨끗이 용서하시고 새로운 힘과 정결한 마음으로 회복시켜 주실 분이 어디 있는가? 그분만큼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기를 영원무궁하게 하실 분이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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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손하신 예수님(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예수님께서는 창세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려고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오셨습니다.
    곧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추심과 같이 자기를 낮추는 것을 겸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빌립보교회의 교인들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라고 하였습니다.
    [2]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시려고 예루실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올라가시는 중에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러 두 제자를 보내시며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마21:2)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가신 이유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었습니다.
    [3]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 예수님께서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겸손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타페이노스]라고 하는데 자기를 낮춘다는 뜻입니다.
     
    국어사전에는 겸손이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겸손이라는 단어는 한문인데 謙(겸손할 겸) 遜(겸손할 손) 입니다.
     
    •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므로 항상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고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 또한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독생자 예수님을 공경하게 하시려고 심판하는 권한을 다 아들이신 예수님께 맡기셨습니다.
    [4]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5: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이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 말씀을 읽으며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고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공경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겸손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 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은혜를 받고 우리의 마음에 쉼을 얻습니다.
     
    • 또한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께 도움을 받기 위해 기도를 합니다.
     
    베드로사도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벧전5:7) 하였습니다.
     
    또 바울사도는 빌립보교회의 교인들에게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5]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은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곧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성경말씀을 읽으며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은혜를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찾아온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많은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6]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나 집에서 또 들이나 바닷가에서 많은 사람을 가르쳐셨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즐겁게 들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도 성경말씀을 읽을 때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받아드립니다.
     
    • 예수님께서 유월절 식사를 마치시고 일어나 수건을 가지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 하셨습니다.
     
    곧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행하게 하시려고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7]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그 말씀을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고 아픈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아픈 사람을 고쳐 주신 이유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8]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 바울사도가 2차 전도여행을 실라와 함께 하였는데 그 여행 중에 빌립보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에게 편지를 하였습니다.
     
    그 편지에서 데실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이 바울사도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9]
    [살전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우리는 항상 겸손하신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고 믿습니다.
     
    곧 성경말씀을 부지런히 읽으며 그 말씀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얻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항상 예수님과 동행을 합니다.
    [10]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감사와 간구의 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기도하고 간구할 때 성령님께서 저희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여 주시고
    저희들을 지켜 돌보아 주옵소서
    .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아멘
     
    [질문]
    1.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마 11:29)
    답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2.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합니까? (빌 2:3)
    답 :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3. 구원을 베푸시는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여서 무엇을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습니까?(슥 9:9)
    답 :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4.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판을 다 아들이신 예수님께 맡기신 이유는 무엇입니까?(요 5:23)
    답 :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5.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빌 4:6)
    답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6. 예수님께서 자기를 찾아 온 큰 무리를 보시고 어떻게 여기셨습니까? (막 6:34)
    답 :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7.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요 13:15)
    답 :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8. 예수님께서 아픈 사람을 고치신 것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마 8:17)
    답 :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9.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말 곧 복음을 들을 때 누구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까? (살전 2:13)
    답 :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10. 우리는 누구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까?(빌 2:5)
    답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 양적 시간, 질적 시간 / 질적 변화, 시간적 변화 /


    * 카이로스 : 카이로스의 변화는 질적인 것으로 새로운 것
    * 크로노스 : 크로노스의 변화는 시간적인 것으로 새로운 제품을 의미                                 

    καιρός, οῦ , ὁ 스트롱번호 2540

    1. 때.  2. 달가운 때. 3. 옳은 때
    발음 [ kair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 1. 때, 시점, 기간, 시기.
      • a. [일반적으로] 달가운 때, 고후6:2, 어려운 때, 딤후3:1, 열매 맺는 때, 행14:17, 때때로, 정규적으로, 요5:4.
      • b. 옳은 때, 알맞은 때, 좋은 때, 제때에, 마24:45, 눅12:42, 행24:25.
      • c. 정한 때, 마13:30, 21:34, 막1:15, 행17:26, 갈4:10, 6:9, 딤전2:6, 딤후4:6, 딛1:3.
      • d. [종말론적 숙어] 마8:29, 16:3, 눅21: 8, 고전4:5, 엡1:10, 계1:3, 22:10.
    • 관련 성경 /  때(마8:29, 눅8:13, 딤후3:1), 날(마16:3, 눅1:20, 고후6:2), 세월(골4:5), 연대(행17:26), 틈(행24:25), 현재(롬8:18, 히9:9), 기회(갈6:10), 항상(엡6:18).

    χρόν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5550


    1. 시간. 2. 유예
    발음 [ chrŏnŏs ]
    어원  / 불확실한 파생어에서 유래
    • 1. 시간, 때, 마25:19, 눅8:27, 요7:33, 행8:11.
    • 2. 유예, 지체, 계2:21, 10:6.
    • 관련 성경  /  때(마2:7, 행1:7, 벧전4:2), 시대(행17:30), 얼마간(행19:22), 시간(11:32), 기회(계2:21), 동안(막2:19), 기한(눅1:57), 시대(행17:30), 항상(행20:18), 날(행27:9), 영세(롬16:25).


    시간(時間)과 때 - "크로노스 kronos" "카이로스 kairos"

    시간은 무엇일까, 세월은 무엇이며, 때는 무엇일까?

    시간을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가 있는데, 그 뜻이 사뭇 다르다.
    크로노스(고대 그리스어: Χρόνος)는 그리스 신화에서 자주 사용되어 왔고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에서도 사용되었다.
    크로노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무형의 신으로 묘사되거나, ​형상으로는 긴 수염을 가진 늙은 현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크로노스는 영어의 chronicle (연대기) chronology (연대학) 정밀한 시계 chronometer 등 시간과 관계있는 단어들의 어원이다.

    ​세상만사를 수평적인(horizontal) 혹은 직선적인(linear) 시간상에 차례차례 세울 수 있다면, 모든 사건들은 선후 관계를 가지고 인과관계 법칙을 따르게 될 것이다.
    나이 지긋한 현자가 매우 정밀하게 관리하니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만사가 질서정연하게 기록될 듯하며, 만사가 엄격하게 인과관계를 따라 정열 될 것같이 보인다.

    카이로스 신
    -
    카이로스 신은 저울을 가지고 있고, 등과 발에 날개가 있다.
    역동적이고 무척 빠르게 움직일 것 같다.

    카이로스 신은 기회의 신의 이름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남긴 카이로스 신의 모습은 카이로스 신의 모습 - 긴 수염을 가진 늙은 현자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카이로스 신의 조각을 보면 역동적이고 근육질이다.

    ​이 조각에서 카이로스 신은 한 손에 저울을 들고, 한 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있다.
    ​​카이로스 신은 등에 날개가 있고, 발에도 날개가 있다. 매우 빠르게 지나갈 듯 역동적인 모습이다.

    카이로스 신은 앞머리는 치렁치렁하고, 뒷머리는 대머리이다.
    앞에서는 치렁치렁한 머리를 붙잡을 수 있도록 하나, 카이로스 신이 지나간 후에는 뒤에서는 붙잡을 수 없게 하기 위함이란다.

    손에 저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카이로스가 무엇인가의 무게를 측정하려는 것인가 보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삶의 가치를 판단할 때,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보다는 무엇을 성취하였는가를 측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음을 엿보게 한다.

    살아온 삶의 가치를 무게로 측정할 수 있을까?
    만약 삶의 굴곡과 성취, ​삶의 품위와 의미를 평가하는 저울이 있다면, 저울에 사용하는 기준치의 무게는 어떻게 정해야 하는 것일까?
    무게를 잰다는 것이 최후의 심판을 위한 것일까?.

    카이로스 신
    한 손에 저울을 들고, 한 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있다. ​​카이로스 신은 등에 날개가 있고, 발에도 날개가 있다. ​​매우 빠르게 지나갈 듯 역동적인 모습이다

    시간과 때 - "크로노스 (kronos)"와 "카이로스 (kairos)"

    시간을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가 있는데, 그 뜻이 사뭇 다르다.

    크로노스(고대 그리스어: Χρόνος)는 그리스 신화에서 자주 사용되어 왔고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에서 사용되었다. 크로노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무형의 신으로 묘사되거나, ​ 긴 수염을 가진 늙은 현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크로노스는 영어의 chronicle (연대기) chronology (연대학) 정밀한 시계 chronometer 등 시간과 관계있는 단어들의 어원이다.

    크로노스 신
    -
    크로노스는 영어의 chronicle (연대기) chronology (연대학) 정밀한 시계(chronometer) 등 시간과 관계있는 단어들의 어원이다.

    긴 수염을 가진 늙은 현자의 모습의 "크로노스가 정밀하게 관리하는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만사가 질서정연하게 기록될 듯하며, 만사가 엄격하게 인과관계를 따라 정열 될 것같이 보인다. 세상만사를 수평적인(horizontal) 혹은 직선적인(linear) 시간상에 차례차례 세울 수 있으니, 모든 사건들은 선후 관계를 가지고 인과관계 법칙을 따르게 될 것이다.

    이에 대비하여 카이로스 신은 사뭇 근육질의 역동적인 모습이다. 카이로스는 적절한 때 또는 초월적인 순간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직선적인(linear) 선을 성실하게 따르기보다는 방향을 예측할 수도 없고, 빠르게 움직일 듯하다.

    수평적(horizontal)이고 직선적인(linear)인 크로노스 시간이 질서정연하고 인과관계를 따르는 것을 거부할 기세이다.

    카이로스 신은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한 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있다. 저울은 가지고 있음은 경중을 따지겠다는 것일 터이니 심판을 상징하는 듯하다. 카이로스 신의 앞머리는 치렁치렁하고 뒷머리는 대머리이다. 앞에서는 치렁치렁한 머리를 붙잡을 수 있게 하는데 지나간 뒤에서는 붙잡을 수 없게 하기 위함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크로노스가 일직선의 철로 위를 질서 있게 움직이는 것 같다면, 카이로스 신은 언제 어디서 우리에게 다가올지 알기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마주하기도 불잡기도 어려울 울만큼 매우 빠르게 우리 곁을 지나칠 듯한 모습이다

    카이로스 (kairos)는 인과관계에 따라서 성실하였는가 여부를 따지기보다 성과가 있었는지를 평가하겠다고 말하는 듯하다.

    카이로스 신 - 카이로스 신은 저울을 가지고 있는 천사로 표현되고 있다.

    성경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때 - 카이로스

    성경에서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시하고, 이때 사용하는 단어가 "카이로스"이다. 세상의 중요한 사건들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때에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믿는다. 성경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이 역사하는 수직적(vertical) 관계 - "때"를 강조한다.성경에서의 주요 사건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이며,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이나 인과관계보다 우선하는 경우가 많다.

    구약 전도서 기자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과 인간이 사는 세상만사들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는 적당한 때(kairos)가 되어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리고 때(kairos)는 예정된 기능을 다 한 다음에는 소멸하는 것으로 본다. 성경의 저자들은 모든 일의 배후에는 인간이 알 수도 측정할 수도 없는 신비 즉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섭리하시는 "영원자"(the Eternal) 하나님의 섭리와 신비가 개재되어 있다고 믿는다.

    성경은 세상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개재된 때(kairos)에 일어난다고 말하면소, 사람은 때(kairos)를 깨어서 기다리며, 때(kairos)가 이르면 놓치지 않고, 이 kairos를 잡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마땅히 이때가 이르기까지는 각자에게 주어진 크로노스를 아끼고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부지런히 행하면서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

    우리의 삶에 주어진 물리적 기간은 길어야 100년이고, 이 100년은 크로노스적 시간으로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쏜살같이 날아간다. ​우리가 깨어 있을 때나 잠이 들어 있을 때나 시간은 흐른다. 그 끝은 각자의 삶의 끝에 맞추어진다. 우리가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시간으로 지나갈 뿐이다. 지상에서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지상의 썩을 것을 위하여 애쓰면 지상에서 성공한 것들이 많을 수 있으나, 지상에서 성공하여 쌓은 것들이 저울에 달아보니 의미가 없다면 그냥 버려질 것이다.

    이 저울의 추는 상징적이다. 우리가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추수할 때에 거둘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하니 살아가는 동안에 추수할 때 거둘 열매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권고한다.

    지인사 대천명 盡人事 待天命라는 말은 사람이 할 일을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 한다면, 한정된 삶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많은 일들'중에서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할까? 선택은 나의 몫이다. 나의 선택에 대하여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는 혼자서만 애쓰는 것을 경계한다. 지혜로운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라고 권장한다. 삶의 현장에서 선한 일로 수고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기다리라고 권장한다.

    전도서 기자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맞아 들어가도록 만들고, 사람이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을 선물로 주셨다고 말한다. 그러하니 주어진 시간 삶의 현장에서 선한 일로 수고하고, 주어진 열매들을 즐거워하라고 권장한다.

    나는 내게 주어진 삶의 기간 동안을 되돌아본다. 내가 나름대로 세운 목표를 위해 애를 쓴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내가 나름대로 세운 목표를 위해 애를 쓴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할 만한 일이고 해야 할 일들의 우선순위에 맞추어졌는지를 생각하면 답이 쉽지 않다.

    열심은 두려움을 잠재우는 효과가 있다. 이 열심은 깨어서 "때"(kairos)를 알아차리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열심보다는 먼저 해야 할 것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성령의 도움을 받으라고 성경은 말한다.

    "때"(kairos)가 임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지혜를 갖도록 도움을 청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열심으로 나의 눈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지혜를 청해야 할 때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개재된 때(kairos)를 만나서 지체없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마태가 예수를 보기 위하여 나무 위에 오르다

    성경의 크로노스적 사건들 1: 여리고의 세리장이요 부자였던 삭개오의 선택:

    마태는 예수를 보기 위하여 나무 위에 오른다.
    마태에게 중대한 카이로스의 순간이다. [누가복음 19:1~10]

    여리고의 세리장이요 부자였던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예수를 만나기 위하여 하던 일을 멈추고 나섰다.

    키가 작았던 삭개오는 체면을 벗어던지고, 예수를 보기 위하여 뽕나무 가지 위로 나무 위에 오른다.

    그리고 그가 만나고 싶어 한 예수의 부르심을 받는다.

    이에 삭개오는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말하고, 이후 예수의 제자가 된다. 삭개오에게 이 만남은 그의 삶을 극적으로 바꾸는 크로노스적 사건이었다.

    개역개정 누가복음 19장 예수와 삭개오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곱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오순절 성령 세례 사도행전 10:44~48

    성경의 크로노스적 사건들 2 : 오순절 성령 세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120사도들에게 주어지는 카이로스의 순간.
    핍박을 두려워하면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120사도는 성령의 세례를 받는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후, 이들은 담대하게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기 시작하기 시작한다.

    성경의 크로노스적 사건들 3 : 야곱에게 브니엘에서의 밤 창세기 32:24~31

    야곱은 가족을 모두 얍복강 건너로 보내고 홀로 남는다.
    형 에서를 만나게 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밤을 새워 기도한다.
    야곱은 천사를 만나게 되었고, 밤이 새도록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한다.
    그날 브니엘에서 야곱은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로 불린다.
    새로운 사람이 된다.
    야곱에게 브니엘에서 밤은 카이로스적 사건의 시간이다.

    개역개정 창세기 32장 24~31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1)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사건은 카이로스적 사건이다.

    Rembrandt, Eugène Delacroix 등 화가들이 이 위대한 사건을 그림으로 그렸다.
    야곱은 온 근육은 터질 듯 긴장하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천서를 쓰러뜨리려고 하는 모습이다.
    천사는 야곱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아마 씨름을 져주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고도 죽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은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다음날 아침 야곱은 형에서와 극적으로 화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앨로 살아간다.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4:16) 새로운 피조물(카이네 크티시스) καινη κτισις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이해를 안목(眼目)이란 관점에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찰스 엘 알렌(Chales L Allen)
    하나님의 정신의학(God's Psychiatry)

    찰스 엘 알렌(Charles L. Allen)이라는 사람은 [God`s psychiatry]라는 저서에서 세 가지의 시력을 들고 있다.
    첫째가 신체적 시력이다.
    둘째는 정신적 시력이다. 이성(理性)이 밝아야 한다. 비판하고 추리하고 통합하는 사고능력이다. 합리적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는 총명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이해력이 없이는 진리를 볼 수 없다.
    셋째는 제 3의 시력이 필요하다.
    바로 영적 시각이다.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있어야 한다.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Therefore we do not lose heart. Though outwardly we are wasting away, yet inwardly we are being renewed day by day.

    겉사람이 후패한다는 것은 육체적인 시력이 약화되어 나빠지는 것이라면
    속사람이 날로 새로와진다는 것은 영적인 시력이 점점 더 좋아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영적 시력을 향상(向上)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 시력을 어떻게 향상시켜야 합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읽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방법은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통독(通讀)하는 방법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요한계시록까지 읽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 결혼생활 50년 동안 하루 세끼 식사를 계속했는데 무엇을 먹었느냐?고 묻는다면 매끼마다 무엇을 먹었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아마 아무도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밥을 먹었고 반찬을 먹었다고 말한다면 성경을 통독하는 것도 무엇을 읽었느냐 하고 묻는다면 성경을 읽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독(精讀)하는 방법

    성경의 어느 책을 정하고 한 구절 한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살펴가며 읽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발의 등이란 어두움 밤길을 걸어갈 때 손전등을 어디에 비추며 걸아갑니까?
    바로 내 앞의 발등을 비추며 걸어갑니다.
    발 앞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간혹 저 멀리 비추기도 합니다.
    목적지를 살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 마가복음 12:30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누가복음 10: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힘을 다하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마음을 다하라 - 마음의 깊이
    목숨을 다하라 - 마지막 기회
    뜻을 다하라 - 변함이 없이
    힘을 다하라 - 변화를 일으킬 때 까지










    찰스 엘 앨런 (Charles L. Allen)
    뉴본 조지아 주에서 출생한 앨런 목사는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아틀란타에 있는 그레이스 감리교회에서의 사역을 포함하여 미국 전역에서 목회자로 섬겼다.
    1960년에는 휴스턴 텍사스로 이주하여 1983년까지 제일감리교회에서 시무하였다.
    앨런 목사님이 시무하는 동안 뉴본의 그레이스 교회는 조지아주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였고, 휴스턴에서 시무하는 동안에는 제일감리교회가 12000명이 출석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감리교회로 성장하였다.
    1950년대에는 아틀란타 신문사와 컨스티튜에서, 나중에는 휴스턴 신문사의 사설가로 있었다.
    그의 또 다른 저서로는 <하나님의 정신의학>(God's Psychiatry)등이 있다.

    교회성장형 성도의 자화상

    성장은 하나님의 뜻이다(고전 3:5-7).
    하나님은 우리 개인과 가정과 교회가 성장하기 원하신다.
    성장하는 사람은 자신의 자화상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분과 목적과 능력이 달라진 새로운 피조물이다.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능력은 성령의 은사와 열매이다.
    그렇다면 교회성장형 성도의 자화상은 무엇인가?
    ‘성장(成長)’이라는 의미를 가진 영어 단어 GROWTH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겠다.

    성장(成長) / 이룰 성, 길 장 / GROWTH

  • 1. 생물이 자라서 점점 커짐. 또는 성숙(成熟)해짐.
  • 2. 사물의 규모가 커짐.

  • GROWTH

    Goodness - 양선(良善)
    Revival - 부흥(부흥)
    Obedience - 순종(順從)
    Word - 말씀(聖經)
    Thanksgiving - 감사(감사)
    Humility - 겸손(겸손)


    첫째, 교회성장형 성도의 제 1 자화상은 GOODNESS, 즉 양선(良善)이다.
    교회성장형 성도는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며 참되시고 거룩하시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은 부모나 자식, 형제나 친구, 이웃들에게 친절하고 좋은 성도이며, 세상과는 구분된 거룩한 자이다. 하나님 제일주의이며 그분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자이다.

    헬라어에는 선(善)에 대한 두 개의 낱말이 있다. 첫째는 단순히 성질이 선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 ‘아가토스’이며, 둘째는 ‘칼로스’란 단어인데 이것은 단순히 선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매력있고 아름다우며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을 뜻한다. 성도의 선한 행위는 단순히 선할 뿐만 아니라 역시 마음을 끄는 힘이 있어야 한다. 어떤 매력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교회성장형 성도의 자화상은 예수 사랑의 공동체에서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도 아름답고 매력적인 양선(良善)이어야 한다. 바로 이것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중의 하나로서 성령충만한 성도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영적 덕목인 것이다.

    옛날의 궁수(弓手)들은 활의 한쪽 끝은 자기 발 옆에 내려놓고 또 다른 끝은 자기 앞에 세웠다. 그리고 활의 크기는 그 궁수의 키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법칙이었다. 활이 궁수의 크기와 똑같으면 그 때 비로소 그 궁수는 자신감을 가지고 전쟁터에 나갔다. 이 세상에 선을 발산하는 성도의 능력은 바로 성도 개개인의 영적 키와 일치하는 것이다.

    둘째, 교회성장형 성도의 제 2 자화상은 REVIVAL, 즉 부흥(復興)이다.

    교회성장형 성도는 교회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밖으로 뻗어나간다. 내적으로는 갱신, 외적으로는 부흥을 도모한다. 여기서 ‘부흥’(復興)의 의미는 깨어나는 것이며 살아나는 것을 뜻한다. 이 단어는 원래 ‘숨쉰다’는 뜻을 가지고 있던 ‘산다’라는 단어의 어근에서 파생되었는데, 숨쉰다는 것은 활동하는 것들의 생명력에 대한 표현이다. 영적 부흥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어 다시 살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삶 속에서 날마다 부흥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그들이 성령충만하다는 것이다. 성령충만은 예수충만을 의미한다. 자나깨나 예수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삶의 방향도, 삶의 목적도, 삶의 소망도 오직 예수이다. 성령충만은 성도들의 삶과 신앙을 회복시키는 강력한 에너지이자 동시에 예수를 증거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내적요소이다.

    성령충만한 성도는 각자가 속한 가정과 직장, 사회와 단체, 더 나아가 국가와 세계를 향한 영적 재생산과 영적 열매를 맺는다. 나 자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를 알게 되었는가? 를 자문할 때 부끄럽지 않도록 주님을 증거하는데 인색하지 않다. 이처럼 성령충만한 자는 신앙성장과 삶의 변화를 맛보게 되며, 자연히 교회성장에도 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교회성장은 작은 데서부터 시작된다. 성령충만한 성도 개개인이 부흥의 자화상으로 회복될 때, 교회는 비로소 성장의 씨앗이 발아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교회성장형 성도의 제 3 자화상은 OBEDIENCE, 즉 순종(順從)이다.

    교회성장형 성도는 영적 권세에 순종하는 자이다. 구약 성경에서의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한다. 혹은 그것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 ‘혹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다고 말한다(롬 5:19). 예수님의 가르침은 순종 이외에 다른 것이 없다. 교회성장형 성도는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자이다.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믿음의 순종은 성도간의 사랑, 이웃간의 사랑으로 표현된다. 작은 불씨 하나가 큰 불을 만들듯이, 작은 사랑 하나가 큰 사랑을 이루게 된다. 하나님이 실천하신 사랑을 듣고 행하는 것이 바로 순종인 것이다. 교회성장형 성도는 서로에게 순종하며, 피차 복종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생활속에 묻어난다. 성도간의 불협화음으로 야기되는 자중지란(自中之亂)은 성장의 최대 걸림돌지만, 순종의 태도는 교회사역에 있어서 강력한 힘이 되며 최대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는 디딤돌이다. 교회 일에 절대 순종하는 성도가 많을수록 사역의 시너지는 급상승하게 된다.

    미국의 한 연구기관에서 지난 8년 동안 미국 전역에서 2만 여명을 대상으로 수명 차이를 조사했다. 조사결과를 보면, 전혀 교회를 나가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의 경우 평균수명이 7년이나 더 길었다고 한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 신체기능이 더 양호하고, 병에 걸렸을 경우 회복도 빠르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 듀크 대학이 1999년 한해동안 4천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걱정을 줄이고 우울증을 치료하는데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면 건강도, 사업도, 회사도, 인생도 새롭게 변하고 좋아진다는 것이다. 교회가 이처럼 순종하는 성도들로 붐빌 때, 교회성장은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넷째, 교회성장형 성도의 제 4 자화상은 WORD, 즉 말씀(聖經)이다.

    교회성장형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이 탁월하다. 그들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슨 일을 하시는가에 대한 바르고 충분한 지식을 터득한다. 성장형 성도라면 단편적인 성경 지식만 깨닫는 것이 아니라 성경공부를 통해 확실한 교훈과 적용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산을 옮길만한 신념과 신령한 체험이 있더라도 성경 말씀에 근거하지 않으면 백해무익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성도들이 영적 성장을 이루는데 가장 유익한 도구가 된다. 성장형 성도의 청사진을 제공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기독교의 본질 그 자체이며 성장형 성도의 황금률이다.


    미국의 농담에 거북이 교인(Turtle Christian) 이라는 말이 있다. 새는 9일간 먹지 않고 살 수 있다. 사람은 12일간이고 개는 20일간 견딜 수 있다. 그런데 거북이는 500일을 먹지 않아도 살고 뱀은 800일을 견딘다. 곤충들은 1,200일을 음식 없이도 생존한다. 그래서 참다운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 없이 사는 성도를 거북이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

    '찰스 엘 알렌'이 쓴 「하나님의 정신의학」이란 책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사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육적으로 건강하다고 말한다. 교회 성도라면 누구나 말씀을 사랑하며 살 때 같은 복이 임하게 된다. 성장형 성도도 예외일 수 없다. 그들 역시 매일 말씀을 먹어야 한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성경을 가까이 하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이다.

    코끼리는 우둔해 보이지만 생존을 위한 지혜는 가히 경이롭다. 코끼리는 더울 때 귀로 부채질을 하거나 목욕을 하여 더위를 이겨낸다. 또는 침을 잔뜩 괴었다가 코로 들이마신 후, 몸에 뿌리는 식으로 더위를 피한다. 물론 이 방법은 근처에 개울이나 연못이 없을 때 쓰는 비상 수단이다. 햇볕을 피해 나무 그늘을 찾아서 몇 시간이고 꼼짝 않고 서 있을 때도 있다.

    코끼리의 지혜는 음식 섭취에서도 나타난다. 코끼리는 이빨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 대나무를 즐겨 먹는다. 코끼리는 단단하고 질긴 통 대나무를 으깬 다음, 코로 말아 올려 먹기도 하고, 그냥 입으로 '우지직’씹어 먹기도 하면서 부족하기 쉬운 영양소를 섭취한다고 한다. 또한 아프리카의 건조한 초원 지대의 코끼리는 죽은 동물의 뼈를 먹음으로써 부족한 칼슘을 보충한다. 그들은 보통 하루에 300kg 정도의 먹이를 먹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몸에 꼭 필요한 영양분을 찾아 섭취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성장형 성도의 영적 건강도 무슨 음식을 섭취하는가와 직결된다. 물론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해야 한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말씀에 대한 편식에 길들일 수 있다. 어린아이가 밥상에서 편식을 하듯 말씀에 대한 편식을 하는 것이다. 귀에 거슬리는 말씀에는 방음막을 친다. 좀 까다롭거나 부담스러운 말씀은 그냥 건너뛴다. 그러나 깨달아야 한다. 코끼리는 달콤한 야자 열매만 찾아다니지 않는다. 코끼리는 칼슘을 보충하기 위해 억센 대나무를 씹기도 하고, 죽은 동물의 뼈를 먹기도 한다. 교회성장형 성도라면 이런 결단이 절실히 요구된다.

    다섯째, 교회성장형 성도의 제 5 자화상은 THANKSGIVING, 즉 감사(感謝)이다.

    교회성장형 성도는 범사에 감사할 줄 안다. 영어의 "Think"(생각한다)와 "Thank"(감사한다)는 같은 어간에서 나온 말이다. 깊이 생각하면 범사에 감사하게 된다. 생각이 욕심 쪽으로 기울면 불만과 다툼이 생긴다. 그러나 생각이 하나님 쪽으로 기울면 감사와 만족이 나온다. 이처럼 교회성장형 성도는 없는 것을 탐하기보다는 갖고 있는 것을 소중히 하고 그것에 감사한다.

    미국 사람들은 어린 아이를 기를 때 제일 먼저 가르치는 말 가운데 하나가 '감사합니다'(Thank you)라는 말이다. 사실 이 말과 같이 우리 인간들의 상호관계를 부드럽게 해 주는 말도 그리 흔치 않다. 감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생활의 중심과제이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깨닫지도 못하고 표시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런 상태를 신앙이라고는 볼 수 없다. 믿음이란 구체적으로 감사로 표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신의학자 루이스 캐디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을 믿든, 그렇지 않든 자신 이외의 그 어떤 것에도 감사할 것이 없다는 말과 같다.”라고 말했다. 그 어떤 것에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삶의 기쁨도 누릴 수 없다. 감사야말로 삶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감사는 평범한 식탁을 생명의 잔칫상으로 만드는가 하면 마음의 분노를 쉬게 하고 평화를 가져다준다. 감사하는 순간 하늘의 소망이 열리고 내일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오르게 된다.

    미국의 성공학자 지그 지글러는 "감사하다고 말할 때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과 내가 있는 장소를 그대로 받아들이겠다.' 라고 다짐하는 것이다.
    나는 감사할 줄 모르면서 행복한 사람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의 논지는 감사에 성공해야 인생에 성공한다는 것이다.
    성도의 감사는 이익과 불이익을 떠난 조건없는 감사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다(살전 5:18).
    교회성장형 성도라면 이러한 감사의 법칙을 마스터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섯째, 교회성장형 성도의 제 6 자화상은 HUMILITY, 즉 겸손(謙遜)이다.

    교회성장형 성도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자이다. 여기서 말하는 겸손은 '주제넘게 행동하지 않는다'라든가, 또는 '삼간다'와 같이 외형적인 행위가 아니다. 또는 자신을 부족하게 여기고 몸을 낮추는데 그치지 않는다. 겸손의 참된 의미는 자기 자신의 가치를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티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겸손의 깨달음은 하나님께 향한 열정을 이웃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발전하게 한다.

    영국의 수상 맥밀란은 진정한 크리스천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뛰어난 점을 과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대면할 때에 수건으로 자신의 빛나는 얼굴을 덮었듯이 진정한 크리스천은 겸손이라는 수건으로 자신의 장점들을 가리운다.

    겸손한 자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것이다. 개방성이야말로 성장의 최대조건이다. 새로운 변화와 화합의 장에서 열린 마음, 열린 생각, 열린 행동으로 성장의 기회를 포착한다. 겸손한 만큼 그것에 비례해서 높은 영예를 얻기 때문이다.

    미국의 저명한 신문기자였던 필립 얀시는 40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무려 8천여 명의 명사(名士)들을 인터뷰했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인터뷰 끝에 그가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것을 뒷날 회고록에 쓰게 되는데, 그는 인생에 분명히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술회했다. 그 하나는 Star형이요, 또 하나는 Servant형이다.

    스타(Star)형에 속하는 유형은 껍데기뿐이라고 한다. 기회만 있으면 그저 자기자랑만 한다. 자기 선전만 하며 저 잘났다는 사람이다. 그런 자기를 선전해 달라고 하는데 기자로서 볼 때에 볼 것도 없더라고 했다. 쓸 것도 못되는 사람들이 주로 이렇게 계속 자기 자랑만 한다고 한다.

    두 번째 서번트(Servant)형은 인터뷰를 해보면 그저 어떻게든 섬기려는 자세를 보인다고 한다.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기쁘게 하며, 어쨌든 기회만 있으면 섬기고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산다고 한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근시안적인 마인드로 보면 이들은 정당한 상급과 대우,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갈채로부터 멀게 만 느껴진다. 하지만 실상은 플러스 인생을 위한 성공 유전자를 보유한 자들이다.

    성공이란 지속적인 성장의 과정이다. 성공이란 남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시킨 일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자신의 과거보다 현재가 나아지고 현재보다 미래가 나아지면 그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 사람이다. 교회성장형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범사에 감사할 줄 알며,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성공뿐만 아니라 타인의 성공까지도 창출하는 거룩한 자화상의 소유자인 것이다.





    목적이 분명한 교회의 7대 자화상

    건강한 교회는 목적이 분명한 교회이다. 교회성장이란 주의 뜻 즉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일이다 (잠 19:21, 고전 3:5-7). 목적이 분명한 교회는 목적을 정의하고, 전달하고, 적용하는데에 탁월한 교회이다.

    1.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목회를 하지말라

    성공의 제 1조건은 비전과 목적의식이다. 무슨 일이든지 왜 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대답할 수 없으면 실패한다. 설사 성공하더라도 의미와 가치가 없기 때문에 곧 무너지고 만다. 하나님께서 주신 확고 부동한 목적이 모든 삶의 원동력이다.

    2. 목적의 절대 중요성을 깨달으라

    목적이 분명하면 공동체의 사기가 진작되고, 좌절감을 해소시키며, 사역에 대한 집중력을 가져다 주며, 자발적인 협력을 가질수 있으며, 사역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가능하게 해준다. 세상적인 요인은 시간이 지나면 변하고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불변하며 영원히 존재한다.

    3. 목적을 성서적으로 책정하라

    목적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것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지도자의 책임이다. 비전과 목적을 책정하기 위해서는 교회와 사역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공부해야 하며, 교회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하며, 그 목적을 글로 문서화해야 하며, 짧은 한 문장 혹은 슬로건 으로 만들어야 한다.

    4. 목적을 효과적으로 진술하라

    목적선언문을 진술할 때에는 성경적이어야 할 것, 명확할 것, 쉽게 전달할 수 있을 것, 측정과 평가가 가능할 것 등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진술한 문장 하나만으로도 교회성장의 새로운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5. 목적을 총체적으로 전달하라

    목회자의 목적의식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전 성도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우리 교회의 목적과 비전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의식화시키는 것이 교회성장형 성도를 얻는 길이다. 목적을 전달 하는 방법에는 상징, 구호, 설교, 이야기, 행동지침 등이다.

    6. 목적에 따라 교회를 조직하라

    목적이 책정되고 교인들에게 침투된 후에는 그 목적과 비전을 실행하는 단계로 들어가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목적에 따라 교회를 조직화하는 것이다. 교회는 생명체요 조직체이다. 생명을 위해서는 성령화가 필요하고, 조직을 위해서는 조직화가 필요하다. 영성이 뛰어나도 조직력이 떨어지면 교회성장이 힘들어진다.

    7. 목적을 실제 목회에 적용하라

    교회성장이란 하나님이 주신 목적을 적용한 결과로서의 열매이다. 목적에 충실하면 건강한 교회가 되며, 건강한 교회는 반드시 성장한다. 목적에 따라 전도하라. 목적에 맞는 프로그램을 만들라, 목적에 따라 사람을 키우라, 목적에 따라 구역을 운영하라. 목적에 따라 사람을 쓰라. 목적에 따라 설교하라. 목적에 따라 예산을 세우라. 목적에 따라 행사를 계획하라. 목적에 따라 교회를 건축하라. 그리고 목적에 따라 기도하고 순종하라. 목적을 잃지 않는 한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선교사 사건 사고



    긴급기도부탁드립니다.

    강은택 <7627862@hanmail.net>

    5월 7일 (수) 오후 8:14 (2일 전)

    nygospelarmy, joynglorych, dongikhwang, yongcholkim, wokang, 3927ny, nygo4, heihwan, hpysc, lilyumc, yschoi037, kjwbluesky777, seungno, chungjoosung, joonp01, 나, seapoet, hongskim1623, rev_ahn, chunpyokim, chunjohn에게

    대한예수교장로회 인천제일교회에서 모태신앙으로 신앙생활하는 강은택이라고 합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편 56:3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마음으로 연락드립니다. 

    상한 마음을 치유받고 싶어서 어디다 하소연할 때가 없어서 이메일을 드립니다.

    엘에이 동양선교교회 파송 선교사인 이인 선교사 그리고 천휘숙 선교사가 작년 8월 12일 극단 이슬람테러리스트인 알샤바브에게 선교지에서 피랍되었습니다.

    케냐 사역지는 20년 넘게 아버지세대부터 이어받은 사역지였습니다. 외국인은 한 사람도 살지 않는 북쪽 사막이었습니다. 이슬람 마을에 학교를 지어주고, 기독교교육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픈 아이들을 나이로비로 큰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해주었습니다. 20년 넘게 사역한 사역지에 소말리아에 사는 테러리스트들이 찾아와 제 어머니와 선교사님을 납치해 갔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이 여동생은 두들겨 패서 현재 한국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현장에 있던 5살 아기는 사건 트라우마로 틱장애가 생겼습니다.


    외교부에서 엠바고를 걸어서 언론에 보도는 되고 있지 않습니다.
    소문이 나면 피랍된 가족이 살해당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꼭 비밀로 함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꼭 중보기도부탁드립니다. 


    * 엠바고(Embargo)는 포르투갈어로 '압류'를 뜻하며, 기타 유럽 언어에서도 수입돼 아래 의미로 쓰인다.
    비슷한 용어로 NDA가 있는데 영어권에서는 엠바고라는 용어보다 NDA가 더 자주 쓰인다.
    뉴스 엠바고(news embargo) 또는 프레스 엠바고(press embargo)라고도 하며, 간단하게 엠바고라고 부른다.
    취재는 하되 정해진 기간까지는 보도하지 않고 보류하는 것(시한부 보도유보)이다.

    https://www.reuters.com/world/two-south-korean-missionaries-kidnapped-northern-kenya-2024-08-14/




    선교사님의 조속한 한국의 복귀를 위하여 후원요청을 드립니다.


    한국계좌:우리 1002762548867 강은택



    해외계좌:

    @(BANK NAME) : WOORI BANK 

    @(BANK ADDRESS) : 17, WORLD

    CUP BUK-RO 60-GIL, MAPO-GU, SEOUL, 03921,

    SOUTH KOREA

    @SWIFT CODE(SWIFT CODE) :

    HVBKKRSEXXX

    @(BENEFICIARY A/C NO.) : 1081-501-430862

    @(BENEFICIARY NAME) :

    KANG EUNTAEK

    Phone:  +82 010-3481-0191

    The home address of the person receiving the remittance: 37-15,

    Mokdongjungangbon-ro 7-gil, Yangcheon-gu, Seoul, Republic of Korea










    중매하다(고후 11:2)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중매함이로다


    고린도후서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개역개정,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새번역,2 나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열렬한 관심으로, 여러분을 두고 몹시 마음을 씁니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여러분을 한 분 남편 되실 그리스도와 약혼시켰습니다.
    우리말성경,2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여러분을 위해 열심을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약혼시켰습니다. 
    가톨릭성경,2 나는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
    영어NIV,2 I am jealous for you with a godly jealousy. I promised you to one husband, to Christ, so that I might present you as a pure virgin to him.
    영어NASB,2 For I am jealous for you with a godly jealousy; for I betrothed you to one husband, that to Christ I might present you as a pure virgin.
    영어MSG,2  The thing that has me so upset is that I care about you so much--this is the passion of God burning inside me! I promised your hand in marriage to Christ, presented you as a pure virgin to her husband.
    영어NRSV,2 I feel a divine jealousy for you, for I promised you in marriage to one husband, to present you as a chaste virgin to Christ.
    헬라어신약Stephanos,2 ζηλω γαρ υμας θεου ζηλω ηρμοσαμην γαρ υμας ενι ανδρι παρθενον αγνην παραστησαι τω χριστω
    라틴어Vulgate,2 aemulor enim vos Dei aemulatione despondi enim vos uni viro virginem castam exhibere Christo
    히브리어Modern,2 כי מקנא אני לכם קנאת אלהים כי ארשתי אתכם לאיש אחד להעמיד אתכם בתולה טהורה לפני המשיח׃

    중매하다(하르모조.  harmŏzō)  ἁρμόζω 스트롱번호 718

    1. 결혼시키다.   2. 결합시키다. 3. 고후 11:2.
    발음 [ harmŏzō ]
    어원  / 제1부정과거중간태 ἡρμοσάμην, 완료수동태 ἥρμοσμαι, 제1부정과거수동태 ἡρμόσθην, 791에서 유래
    • 1. 결혼시키다, 결합시키다[중간태], 고후11:2.
    • 관련 성경  /  중매하다(고후 11:2).


    󰃨 하나님의 열심으로...열심내노니 - '열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젤로'(*)는 '열심'이라는 말보다는 '시기'나 '질투'라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Farrar, Martin, Barrett).그리고 영역 성경 중 RSV, NIV 등도 '시기'나 '질투'로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본 구절시 내용이 하나님의 질투하심과 동일한 질투를 가지고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침입해 들어온 적대자들을 대한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기서 구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혼인 관계의 유비(사50:1-2;54:1-8;62:5;호 1-3장)를 고린도 교인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관계의 유비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그의 적대자들에 대한 질투를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바울 자신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그에게 해롭게 행동하는데 대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오직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질투는 바울 자신이 애써 전도했던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사도들에게 유혹된 것에 대한 질투였다.

    󰃨 정결한 처녀로 중매함이로다 -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미혹하는 자들에 대해 질투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그리스도의 기쁨과 고린도 교인들의 행복을 그들이 훼방했기 때문이며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스도에게 중매시킨 장본인으로서의 바울은 그 사실을 과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본 구절의 '중매함이로다' 는 '약혼시켰다'(betrothed,RSV)또는 '정혼시켰다'(공동번역)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바울은 순결한 처녀인 고린도 교인들을 오직 한 남편인 그리스도에게 약혼시켰다(엡 5:27;요일 3:2, 3). 혹자는여기서의 '약혼'이 실질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개종', '회심' 자신들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Farrar, Barrett), 엡 5:25-27을 참조할 때 어느 정도 타당한 해석이다. 그리스도와 약혼한 당사자로서 고린도 교인들은 순결을 계속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마치 하나님의 신부로서의 이스라엘이 이방의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되며 오직 남편인 하나님에게만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처럼, 불신의 상태에서 그리스도에게로 회심한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에게만 헌신적으로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