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아노덴) ἄνωθεν



ἄνωθεν 스트롱번호 509

1. 위로부터.   2. 태초부터.  3. 오랫동안
발음 [ anōthĕn ]
어원 / 507에서 유래 <아노> ἄνω
  • 1.  [장소] 위로부터, 마27:51, 막15:38, 요19:23. [주] [특별히] 하늘로부터, 요3:31, 약1:17, 3:15,17.《반》νῦν, 요19:11.
  • 2.  [시간]
    • a. 태초부터, 처음부터, 눅1:3.
    • b. 오랫동안, 행26:5.
  • 3.  다시, 새로이, 요3:3, 갈4:9.
  • 관련 성경  /  위로부터(요 3:31), 위에서(요 19:11), 일찍 부터(행 26:5), 근원(눅 1:3), 거듭(요 3:3).

ἄνω 스트롱번호 507

1. 위에.κάτω
2. 형용사로 쓰인 경우 : 갈 4:26.
3. 명사로 쓰인 경우 : 위에 있는 것
발음 [ anō ]
어원  / 473에서 유래
  • 1.  위에.《반》κάτω, 요2:7, 행2:19. [주]
    • a. 형용사로 쓰인 경우: 갈4:26.
    • b. 명사로 쓰인 경우[정관사 τὰ가 수반됨]: 위에 있는 것, 요8:23, 골3:1,2.
  • 2. 위를 향하여, 위로, 요11:41, 빌3:14.
  • 관련 성경  /  아귀(요2:7), 위로(행2:19, 골3:1), 위에서 (요8:23), 위에(갈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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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태어나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Jesus answered,“I tell you the truth, no one can enter the kingdom of God unless he is born of water and the Spirit.”

이 말씀은 지금 처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며 이미 오래전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주셨던 말씀이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 I will sprinkle clean water on you, and you will be clean; I will cleanse you from all your impurities and from all your idols. I will give you a new heart and put a new spirit in you; I will remove from you your heart of stone and give you a heart of flesh (에스겔 36:25-26).”

예수의 이 말씀은 이미 구약의 말씀을 통해 선포된 말씀이었고 단지 침례 요한의 때에 이 말씀이 요단강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실은 공관복음서에서는 침례 요한의 정체를 두고 말이 많았다. 백성들 가운데 논란이 일자 산헤드린 공의회는 즉시 조사에 임했다.
니고데모는 제사장들과 레위인으로 구성된 특별 조사단을 예루살렘에서부터 요단강가에서 침례를 베풀었던 요한이 살고있는 베다니로 파견했던 일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또한 파견단을 그곳에 보낼 것을 가결하던 산 헤드린 공회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침례 요한 자신이 밝혔던 바와 같이 그가 그리스도도 선지자도 아니라면 그렇게 침례를 베푸는 것은 불법이라 규정하며 죄 사함을 의미하는 요단강에서의 그의 물 침례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예수께서는 그들이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바로 그 요한의 침례는 지금 니고데모가 그렇게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할 뿐 아니라 그곳에 들어가도록 하게 하는 너무도 귀한 일이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요한의 침례가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하는데 그토록 중요한 사건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침례, 세례란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는 자들에게 그들이 지은 모든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깊은 회개의 모습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이대로의 내 모습은 결코 거룩하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인정하고 다시 죄 사함을 받은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 태어나야 함을 자각하는 놀라운 삶의 변화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셔서 진실로 그들을 깨끗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그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놀라운 거듭남의 변화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Unless we were in a state of grace, it was impossible.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는 한, 그것은 불가능했다



복음 전문

영에서 태어나다

 예수님은 자신이 위에서부터 왔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위에서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위로부터 태어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뒤이어 말씀하신 내용을 살펴보면 바람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자신이 불고 싶은데로 부는 바람이 영에서 태어난 이와 같다고 말씀하시지요.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영에서 태어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은 제자 니고데모는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여쭈어봅니다.
그에 대한 답으로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와서 하늘로 돌아가는 자신의 삶을 통해, 그 사실을 깨달으라고 말씀해주시는 듯합니다.
그분의 증언, 즉 성경에 기록된 많은 사례와 삶을 살펴보며, 우리가 하늘에서부터 왔고, 또 하늘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위로부터 태어나는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이 어디서 태어났는지를 안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안다는 것과 연결됩니다.
자신의 부모가 누구이며, 또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를 안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 커다란 발디딤일 것입니다.
살면서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모든 상황과 인연이 어디서 왔고, 또 어디로 가는지 전부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하느님에게로부터 왔음을 믿고 알게 된다면, 우리 주변에 부는 바람이 무엇을 위해 우리를 스쳐가고, 또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육체와 영혼

우리는 이미 육에서 태어난 경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눈을 뜬 세상 속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적응하며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자신이 그 과정에서 육적인 것, 즉 보이는 것에만 급급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을 때면, 왠지 모를 불안감에 찾아옵니다.
그 불안감은 자신을 '세상 속 하나의 부품'으로 느끼게 하는 더 큰 두려움과 공허함으로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점점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불분명해질 때, 우리는 더욱 큰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에게는 육과 영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또 어떻게 사라질지는 알 수 있지만, 우리의 영혼은 어디서 왔고, 또 어디로 가는지는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육체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기에, 자신의 "영혼"의 출생지와 그 종착지는 우리에게 늘 고민거리로 남아있는 듯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으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들어 올려진 구리뱀

 구약성경 속 이스라엘 민족의 탈출 여정에 등장하는 구리뱀 이야기가 있습니다.
뱀에 물려 괴로워하고 있는 이들을 낫게 해주는 유일한 치료책으로, 하느님께서는 들어 올려진 구리뱀을 쳐다보는 방법을 일러주십니다. 예수님도 이때의 구리뱀처럼, 우리들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들어 올려지셨습니다.
구리뱀을 쳐다보고 낫게 된 사람들처럼, 뱀에 물려 괴로워하며 방황하는 우리 역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을 통해 치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며 방황하고 있다면, 아마 지금은 우리를 위하여 들어 올려진 예수님의 삶을 되돌아보아야 하는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요한복음서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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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의 확신(요한복음 3:1-15)

신앙은 거듭나면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거듭나다"라는 말은 다시 태어나다, 새로 나다, 위로부터 나다. 라는 뜻입니다. 내 자신이 거듭난 것을 모르고 신앙생활 하는 것과 알고 하는 신앙생활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모 성도님이 목사님 나는 아무것도 모르며 그저 교회 다니기만 한다고 하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를 아니합니다. 교회에 계속 다닌다는 것이 먼저는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고, 또 은혜를 받지 아니하고는 교회에 다닐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1. 모두가 거듭나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사람은 누구나 이 사건을 경험해야 하기 때문에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더 영적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부모로부터 태어난 육으로는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를 깨달을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부모에게서 받은 몸으로는 먹고 마시는 일을 합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육의 삶을 사나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면 영으로 사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20-30년 교회 다녔어도 거듭나지 않았으면 육의 사람인 것입니다.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1) 바리새인도 거듭나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 종교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 가운데 바리새인만큼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하고도 모든 종교 의식을 철저히 지킨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이슬람교도들). 어느 사람은 사람이 하나의 종교를 가지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하나의 종교를 가지려고 교회에 다니거나 습관적으로 교회생활을 하는 것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23: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2) 선생도 거듭나야 합니다. (1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러기에 선생이 되었습니다. 바울도 그는 베냐민 지파로 가멜리아 문하에서 공부를 한 사람으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지식이 아무리 많고 공부를 많이 했어도 거듭나지 아니했을 때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였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에 관계된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 교수라도 목사라도 거듭나지 아니하면 아니 됩니다.

3)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도 거듭나야 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요3:2-3) 당신은 하나님께 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거듭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육체의 생명을 부모에게서 받듯이 영적인 생명을 하나님께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귀신들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았습니다.

(눅4: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니라

(요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2. 왜 거듭나야 합니까?

1)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거듭나지 아니하면 영적인 것을 보고, 깨닫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하고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고 설교를 들어도 재미도 없고 가슴에 와 닿지를 않습니다. 거듭나면 신령한 것을 보게 되고, 말씀을 들을 때 깨달아 집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영의 것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나야 합니다.

(요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눅8:10)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2) 거듭나지 아니하면 영적인 것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육이 영의 것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육은 흙에서 나왔기 때문에 땅에 것을 받으며 땅의 것만을 압니다. 그러기에 땅에서 난 것을 먹으며 땅의 것을 바라며 삽니다. 육이 영의 것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은 근원이 틀리는 하늘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고전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요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 우리는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거듭나야 합니다.

몸은 살아서 숨쉬고 움직여도 그 안의 참 생명 영혼은 죽어있습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나는 것을 육의 것으로 생각하므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수 있습니까? 라고 반문했습니다(요3:4).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엡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3. 거듭난 증거

1) 거듭난 사람은 반드시 회개하게 됩니다. 거듭난 속사람, 영의사람은 죄가 싫어지고 하나님 말씀이 좋아지고 말씀에 순종하고 싶습니다. 악한 것을 싫어하고 선한 것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회개하면 용서를 받습니다.

(시119:102-103)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시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2)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족 같고 형제같이 좋아집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한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다면서 믿는 형제를 미워하고 대적하는 것은 거듭나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요일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3) 거듭난 사람은 성령님을 받습니다.

거듭난 자의 심령 속에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모시고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은 새로운 마음을 주십니다.

(요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겔11: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4) 거듭난 사람은 믿음의 법으로 삽니다. 거듭난 사람은 세상 것 의지하고 살던 마음이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바꿔져 어려움과 시험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이기며 삽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절망에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승리하며 모든 싸움을 이기어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됩니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의 증거입니다.

(요일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막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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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과 구원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두나미스 - 권능


사도행전 1:8

δύναμ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1411

1. 힘.  2. ἰδίᾳ δύναμις.  3. ἐν δύναμις : 권능으로
발음 [ dünamis ]
어원  / 1410에서 유래
  • 1. 힘, 권능, 능력, 세력, λαμβάνειν δ., 능력을 받다, 행1:8.
    • a. ἰδίᾳ δ. ~의 권능으로, 행3:12. ㉠ [하나님의] 능력, 마22:29, 롬1:16, 20, 9:17, 고전1:18,24, 5:4. ㉡ [성령의] 권능, 눅4:14, 행1:8, 롬15:13, 19. [주] δυνάμει κραταιωθ ῆναι: [성령으로] 힘을 얻다, 엡3:16. [주] πνεῦ- μα δυνάμεως: 권능의 영=성령, 엡1:19, 3:20, 골1:11, 딤후1:7. ㉢ [사도와 하나님의 사람이 가진] 힘, 행4:33, 6:8. [주] 특히 기적을 행하는 능력, 마14:2, 막6:14, 고전12:28,29, 갈3:5.
    • b. ἐν δ.: 권능으로, 권능을 가지고, 권능있게, 막9:1, 롬1:4, 골1:29, 살후1:11.
    • c. [κατὰ δύναμιν+속격] ~의 권능으로, ~의 능력으로, 히7:16. ㉠ τῷ ῥήματι τῆ ς δ. αὐτοῦ: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히1:3. ㉡ με- τ᾿ ἀγγέλων δυνάμεως αὐτοῦ: 그의 힘있는 천사들과 함께, 살후1:7, 그외, 행4:7, 고전4:19,20, 살전1:5, 딤후3:5, 히11:34, 벧후2:11.
  • 2. 능력, 역량, κατὰ δύναμιν: 역량에 따라, 능력에 따라, 마25:15, 고후8:3. [반대는] ὑ- πὲρ δύναμιν: 역량을 지나치는, 힘에 겨운, 고후1:8, 혹은 παρ ὰδ., 고후8:3.
  • 3. 의미[언어의], 고전14:11.
  • 4. [힘의 외적 표현] 힘있는 행위, 기적, 놀라운 일 [σημεῖα와 함께], 살후2:9. [복수로] 마7:22, 11:20,21, 행2:22, 고후12:12, 히2:4, 6:5. [단수] 막6:5.
  • 5. [힘의 외형] 원천, 풍부, 부요함, 마24: 29, 막13:25, 눅21:26, 계3:8, 18:3.
  • 6. [인격적 초자연적 영물이나 천사의] 권능, 능력, 롬8:38, 고전15:24, 엡1:21, 벧전3:22. [주] [최고 신의 힘, 인격적인 신 존재를 가리키는 명칭] οὗτός ἐς τιν ἡ δύναμις τοῦ θε- οῦ ἡ καλουμέ νη μεγάλη: 이 사람은 하나님의 크신 권능이라는 자다, 행8:10.
  • 7. [힘을 주는 것] ἡ δύναμις τῆς ἁμαρτίας ὁ νόμος: 죄의 힘은 율법이다, 행10:38, 고전15:56.
  • 관련 성경 / 권세(마 6:13, 행 4:7), 권능(마 7:22, 막 6:5, 행 1:8), 능력(마 13:54, 눅 1:17, 롬 1:4), 재능(마 25:15), 권능자(막 14:62), 뜻(고전 14:11), 힘 (고후 1:8, 8:3, 히 11:11), 세력(히 11:34). [동] 능하다(막 9:39, 눅 19:37), 강하다(고전 15:43), 힘있다(계 1:16)
믿는 자를 구원하게 하는 능력
병든 자 상처 받은 자를 치유하는 능력
낙심하는 자, 좌절하는 자에게 희망을 주는 능력
병들고 다투는 것에서 역사를 바꾸는 능력


* 문제의 해결을 땅에서 찾지 말고 하늘로부터 오는 것을 찾아야 한다.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은 오직 보혜사 성령으로 - 성령의 두나미스를 기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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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닫다. 아가패 로고스


 왜 헬라어로 신약성경을 기록하였는가?

1. 신약 성경이 기록되었던 A.D. 1세기경의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히브리어, 아람어, 라틴어, 헬라어 등 4개 언어가 주로 통용되고 있었다.하지만 신약성경은 극히 일부분(마27:46, 막5:41, 7:34, 14:36)을 제외하고는 모두 헬라어로 기록되었다(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달리다굼, 에바다, 아바 등).

[개역]요 19:19-20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아람어)와 로마(라틴어)와 헬라 말(헬라어)로 기록되었더라.

2. 신약 성경 저자들의 대부분은 일상생활에서는 헬라어보다는 바벨론 포수 이후 점차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된 아람어를 사용하였다.따라서 예수와 그 제자들의 일상적인 대화나 설교 시에는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헬라인 방문객 몇 사람이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와서 예수를 만났을 때(요12:20-36), 유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할 때(마27:11-14) 통역자가 있었다는 말이나 말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이때는 예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모인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그들이 모두가 동시에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인 헬라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성경 저자들이 대부분 어부 출신의 유대인으로서 비록 헬라어를 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 아닌 글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모국어가 더 익숙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헬라어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3. 왜 라틴어가 아닌 헬라어인가? 헬라어와 라틴어는 문법 구조 등이 비슷하다.

1) 헬라어가 널리 퍼져있었다.

 헬라어를 사용하는 수많은 민족들에게 더 쉽게 전파하기 위한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로마가 정복했기 때문에 라틴어도 널리 퍼져 있다.

2) 헬라의 문화와 언어에 대한 경외감 때문에 로마에서도 헬라어를 많이 사용하였다.

소피스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철학자들.

유럽문화의 2대 조류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다. 라틴어보다 표현이 풍부하다.

이러한 헬라어를 통해 성경을 표현하면 다른 언어로 표현하는 것보다 친근함이 있고 이해의 면에서도 좋다.

​3) 추상적, 논리적 언어로서의 코이네 헬라어

코이네 헬라어는 고대의 아틱 헬라어에 비해 구문과 어휘가 훨씬 간결하고 문어적이기 보 다는 구어적이지만 히브리어에 비해서 매우 복잡한 편이며 보다 추상적인 개념들을 섬세 하게 묘사하는데 용이하다.

히브리어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 나타난 현상 그대로를 표현 하는데 용이한 것이라면 헬라어는 논리적이고 섬세하여서 사고와 감정 그리고 추상적 개념들을 정확하게 묘사, 전달하는 데 용이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헬라어는 어떤 언어인가?

성경에 사용된 헬라어는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도 살아있는 헬라어 중에서도 알렉산더 대제(B.C.356-323)가 세운 소위 헬레니즘 문화권 전역에서 당시 서민들이 주로 사용하던 구어체 헬라어인 코이네 헬라어였다.

1. 헬라어의 명칭

헬라어는 우리가 흔히 ‘헬라’라고 부르는 나라, 즉 아시아 중서부에 살고 있던 아리안 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발칸 반도 남부의 헬라스라고 불리우는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발칸 반도와 이를 둘러싸고 있는 소아시아의 해안 지방에 정착하여 세운 여러 도시국가에서 사용된 언어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 지역에 정착한 그들은 그들이 세운 나라를 ‘헬라 나라’라고 불렀고 자신들을 가리켜 ‘헬라인’이라 칭했는데 헬라어라는 명칭도 바로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이들이 정착한 헬라 지역은 가파른 산맥들과 복잡한 해안선 그리고 그 주변에 위치해 있는 크고 작은 많은 섬들로 말미암아 초기부터 서로 독립된 여러 개의 도시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지정학적인 조건은 후에 그들 사이에 여러 개의 방언을 탄생시켰다.

따라서 헬라어는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개의 방언을 갖게 되었다.

2. 헬라어의 언어학적 위치

헬라어는 크게 인도 유럽 어족에 속한다. 인도 유럽어족이란 지역적으로 볼 때 유럽, 인도, 중앙아시아, 소아시아인들이 사용하는 방언들을 말한다.

3. 헬라어의 역사

1) 고전 헬라어

헬라어의 여러 방언들 중에서 코이네 헬라어의 직접적인 기원이 된 고대의 헬라어는 아틱(the Attic) 방언이었다. 이는 유명한 도시 아테네가 속해 있던 아티카(the Attica) 사람들의 방언이었다.

고대 헬라어는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틱 헬라어의 문법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그 이유는 아티카 지방이 남달리 크다거나 국력이 강성했기 때문이 아니라 헬라 전 지역에서 찬란한 명성을 펼쳤던 아티카 문명의 업적 때문이었다.

아티카 문명의 꽃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과 호모와 같은 위대한 문인들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2) 코이네 헬라어

B.C. 4세기경부터 헬라 문화권의 강력한 맹주였던 마게도냐의 빌립 2세와 그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활동으로 헬레니즘 문화권이 확장되어 헬라어도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틴 심지어는 이집트의 내륙 지방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이후 로마가 헬라 지역을 정복한 후에도 로마인들은 헬라인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경외감과 상업적인 목적에 사용될 세계적 공용어의 필요성 때문에 로마 제국 내에서도 라틴어보다 표현이 풍부한 헬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아틱 헬라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본래의 복잡하고 고급화된 문인들의 표현 양식을 잃어버리고 점차 많은 사람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평이한 언어로 서서히 변화했다.

B.C.1세기에는 고전 헬라어의 기초 위에 세계 공용어로서 필요한 요소들을 가미한 고정된 틀을 갖추어 모든 사람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써 마침내 세계적인 공용어가 되었다.

바로 이 시기 곧 B.C 1세기에서 A.D. 4세기 초까지의 헬라어를 가리켜 코이네 헬라어라고 부른다. ‘코이네’라는 말은 ‘공용어’,’일반어’라는 뜻이다.

A.D. 1세기경 70인경이 바로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3) 비잔틴 시대 헬라어

A.D.330년에서 1453년까지를 비잔틴 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는 로마가 동서로 분리되고(A.D. 395년) 다시 서로마가 게르만족의 침공을 받아 멸망한 후(476년) 거의 천년동안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비잔틴제국 곧 동로마 제국만이 존립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코이네 헬라어도 자연스럽게 세계 공용어로서의 위치를 잃고 동로마 교회 진영에서만 사용하게 되었다.

4) 현대 헬라어

A.D.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코이네 헬라어는 그 구심점을 상실하고 헬라 지역의 각 지방 방언들로 분파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현대 헬라어는 대부분 코이네 헬라어를 그 모체로 하고 있긴 하나 방언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되었다.

[3] 코이네 헬라어의 특징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에 의해 고전 헬라어를 기초로 형성되기 시작한 코이네 헬라어는 그 완전한 틀이 갖추어지기까지 여러 지역에서 장시간의 점진적인 변화를 겪어서 형성된 것이다.

코이네 헬라어는 크게 문어체 코이네와 구어체 코이네로 구분된다.

문어체 코이네 헬라어는 비교적 아틱 헬라어의 표현 양식을 보존하고 있는 코이네 헬라어로서 요세푸스의 저서 등이 있다.

구어체 헬라어는 흔히 서민들이 사용하던 통속적인 헬라어로서 이집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단편들과 신약 성경 등이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 중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 히브리서는 뚜렷하게 문어체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고전 헬라어, 즉 아틱 헬라어에 비해 코이네 헬라어는 어휘 및 구문법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1. 어휘, 어형적 특징

1) 라틴어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낱말이 만들어졌다.

알렉산더 사후 로마 제국이 등장함에 따라 헬라어가 통용되던 지역에 라틴어도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2) 어휘에 있어 단순화와 획일화의 경향이 뚜렷이 나타났다.

그 예로 고전 헬라어에서는 ‘좋은’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헬라어 ‘칼로스’와 ‘아가도스’라는 말이 같이 사용되었으나 A.D. 1세기에는 ‘칼로스’만이 주로 사용되었다.

3) 전치사를 접두어로 하는 복합어가 많이 생겨났다.

4) 단어의 축소형이 많아졌다.

단어의 격변화가 단순화됐으며 불규칙 변화가 많이 없어지고 비교급, 최상급의 용례가 축소되고 원급에 수식어를 붙여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5) 접두 모음이 많이 사라졌다.

2. 구문법적 특징

1) 문장의 단순화 현상. 고전 헬라어에서는 분사나 접속사 등을 이용한 복잡한 문장이 많았으나 코이네 헬라어가 완성된 시기에 이르러서는 주로 단순 접속사 ‘카이’나 ‘데’ 를 사용한 짧은 문장이 많아졌다.

2) 고대 언어의 공통된 특징 가운데 하나인 희구법이나 간접 화법이 사라지고 그 기능을 가정법이나 직접 화법이 대신하게 되었다.

3) 한 문장 안에서 주어, 동사, 서술어는 성, 수, 격이 일치해야 한다는 법칙이 많이 깨졌다.

4) 새로운 표현의 문장이나 관용구가 많이 생겨났다.

5) 문장에서 전치사의 사용이 많아졌으며 생생한 사실적 표현을 위해 미래형 동사 대신에 현재형 동사가 많이 사용되고 중간태 동사는 많이 사라졌다.

종합적인 면에서 볼 때 한 마디로 헬라어의 단순화에 있다.

[4] 신약성경 코이네 헬라어의 특징

신약 성경이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어왔다.

거룩한 성경이 통속적인 언어로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고전 헬라어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의 파피루스 문서들을 통해 당시 상업 및 공문서 등에서 서민들이 쉽게 사용하던 공용어인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누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본래 주로 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다.

그들에 의해 기록된 성경의 코이네 헬라어는 일반 코이네 헬라어와는 다른 몇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1. 70인역의 영향으로 인한 특징들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됨에 따라 많은 헬라어 단어들이 그 본래의 의미에다 그에 상응하는 히브리 개념을 수용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독사’라는 헬라어는 처음에는 ‘외관’ 또는 ‘의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이 히브리어 ‘카보드’의 영향을 받아 70인역에서는 ‘빛남’, ‘영광’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또한 70인역을 번역한 사람들은 가능한 히브리식의 ‘신인동형동설론’적 표현을 헬라어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맞게 추상적 표현으로 바꾸어서 나타냈다.

대표적인 예로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형상’ 또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만군의 여호와’는 ‘전능하신 주’ 라는 표현으로 대치시켰다. ​

따라서 70인역에는 원래 헬라어에서는 일상적인 것이 아니었던 이러한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게 되는데 70인역을 참고했던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이러한 표현들을 그대로 수용했다(고전2:5, 고후 6:7, 딤전1:8, 히1:3, 계11:17, 3:21, 21:22 등)

2. 셈어적 표현의 영향으로 인한 특징들

1) 아람어나 히브리어의 음역 단어의 사용.

성경 저자들이 아람어니 히브리어에 더 익숙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아람어나 히브리어의 독특한 낱말들을 대신할 헬라어가 없을 경우 그 단어를 그대로 음역해서 표기했다. ‘달리다굼, 에바다, 아바, 랍비, 엘리’ 같은 단어들이 아람어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고, ‘아멘, 할렐루야, 고르반' 같은 낱말은 히브리어를 음역한 단어들이다.

2) 동어 반복적 표현.

코이네 헬라어의 특징은 단순, 간결성에 있다.

그러나 아람어나 히브리어 같은 셈어족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반복적 표현이 자주 나타난다. ‘진실로 진실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증거하여 가라사대’ 등.

3) 병렬식 문장 구조에 따른 표현

병렬식 문장구조란 흔히 종속절 보다는 ‘카이’같은 단순 접속사를 이용하여 서로 종속되지 않는 등의의 문장들을 병렬 하여 만든 문장인데 이것은 형용사적 표현이 빈약한 히브리어의 문장 구조에 잘 쓰이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 양식들은 신약 성경, 특히 사복음서에 자주 나타난다. 이것은 헬라어가 유대식으로 표현된 대표적 경우이다.

[개역]마 22:25-27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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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에 대한 성경적 교리는 무엇인가?

영적인 의미에서의 깨달음이란 어떤 영역에 대해 이해의 “불을 밝힌다”는 것입니다.
신성한 깨우침이 새로운 지식이나 미래의 일을 다룰 때, 우리는 그것을 “예언”이라고 부릅니다.
깨우침이 이미 주어진 지식을 이해하고 적용하도록 도울 때, 우리는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어떻게 깨우치실까요?”

깨우침의 가장 근본적인 단계는 죄에 대해 아는 것입니다.

이 앎이 없으면 다른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집니다.
시편 18:28은,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은 장을 가진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노래입니다. 130절에서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기초적인 방법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에 들어오면, 그 말씀은 빛이 되고 아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11은,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98, 99절은,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기적으로 연구하면 인생의 문제에 대한 방향과 이해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첫 번째 방법이자 우리 모두를 위한 출발점입니다. 시편 119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방법의 또 다른 유형을 볼 수 있습니다. 18절에서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이 “놀라운 것”은 새로운 계시가 아니고, 오래 전에 기록된 것인데 이제서야 독자들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유사하게, 73절에서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라고 말씀합니다. 이 간구는 하나님의 계명을 개인적으로 이해하여 적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 시편에서 저자는 열다섯 번이나 하나님께 당신의 계명을 가르쳐주시고 알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깨달음과 관련하여 가끔 모순을 불러 일으키는 한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다락방에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특별한 사람들은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할 책임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3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 했으며,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들을 세상에 전파하려면, 정확하게 기억하기 위해 하나님의 특별한 도움을 받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제자들이 들었던 것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해줄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다른 이들에게 그 내용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사도들이 복음을 기록함에 있어 신성한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지만, 성령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같은 일을 하신다고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믿는 자들에게 하시는 깨달음의 사역은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1:17-18은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지혜와 계시를 우리에게 주실 것이며, 이해의 눈을 열어주셔서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알 수 있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2:10-13에서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일을 가르치시는 성령을 통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밝히십니다. 이 문맥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드러난 것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언제나 우리가 따라야 할 것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6:12-15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은 아버지와 그 아들이 이미 하신 말씀을 그저 되새기게 하십니다. 이러한 되새김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완전하게 듣도록 도와줍니다. 때때로 우리는 여러 번 듣고 나서야 제대로 “듣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때가 바로 그 순간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논의에서 때때로 간과되는 한 가지는 그것의 목적입니다. 어떤 주장을 들어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학문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의 목적 전부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말씀은 의미를 지녔고, 우리는 그러한 말씀의 세부사항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지만, 사실에 대한 아무 적용 없는 학문적인 이해는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시편 119로 돌아가서, 우리는 깨달음에 관한 구절에 목적을 나타내는 진술들이 연결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27절),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34절),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 (144절)가 그러한 구절들입니다. 깨달음은 항상 행동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도우실까요? 그래야 우리가 말씀의 빛 속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1:6은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우리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어둠의 길을 걷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우리를 깨우쳐 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이 말씀의 지식을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실제로 그렇게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로마서 8:14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우리 삶 속에서 행하시는 깨달음의 사역은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증해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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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닫다



νοέω 3539 [nŏiĕō]

  • 1. 지각하다, 이해하다, 깨닫다, 통찰하다, 마16:9, 막8:17, 요12:40, 롬1:20.
  • 2. 생각하다, 주의하다, 마24:15, 막13:14, 딤후2:7.
  • 3. 상상하다, 엡3:20.


θεωρέω 2334 [thĕōrĕō]
  • 1. 깨닫다, 감지하다, 관찰하다, 발견하다, 요4:19, 12:19, 행4:13, 28:6, 히7:4등.
  • 2. 구경하다, 보다, 관찰하다, 인지하다, 마27:55, 막15:40, 눅14:29, 23:35, 요6:40, 계11:11,12, 바라보다, 마28:1, 주목하다, 막3:11, 5:38.
  • 3. [마음이나 영으로 깨닫는 것]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ἐπίσταμαι 1987 [ĕpistamai]
  • 1.

    이해하다, 깨닫다, 막14:68, 딤전6:4.

  • 2.

    알다, 친숙해지다, 행18:25, 약4:14, 유1:10, ἐπίστα- ται περὶ τούτων ὁ βασιλεύς: 그 왕이 이것에 대하여 알다, 행10:28, 20:18, 15:7, 19:25, 22:19, 26:26, ποῦ...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συνίημι 4920 [süniēmi]
  • 깨닫다, 이해하다, 통찰하다, 마13:51, 눅2:50, 롬3:11, 고후10:12.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συνείδω 4894 [sünĕidō]
  • 완전하게 보다, 깨닫다, 이해하다, 의식이 있다, 알게 되다, 생각하다, 은밀히 알다, 행12:12.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συνομορέω 4927 [sünŏmŏrĕō]
  • 알게 되다, 깨닫다, 접촉[접근, 인접, 이웃, 연속]하다, 행18:7.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αἰσθάνομαι 143 [aisthanŏmai]
  • 1.

    깨닫다, 지각 능력을 소유하다.

  • 2.

    ‘감각에 의해 이해하다’

  • 3.

    이해하다, ἀγνοέω, 눅9:45.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καταλαμβάνω 2638 [katalambanō]
  • 1.

    [중간태] 파악하다, 깨닫다, 찾아내다, 행25:25, 엡3:18.

  • 2.

    붙잡다, 얻다, 자기 것으로 삼다, 롬9:30, 고전9:24, 빌3:12, 움켜잡다, 이해하다, 정복하다, 요1:5, 빼앗다, 덮치다, 요1:5, 붙들다, 닥쳐오다, 요12: 35, 살전5:4, 잡다, 요8:3,4.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ὁράω 3708 [hŏraō]
  • 1.

    인식하다, 깨닫다, 이해하다, 행8:23, 히2:8.

  • 2.

    [타동사]

  • 3.

    보다, 찾아내다, 주목하다, 관찰하다.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γινώσκω 1097 [ginōskō]
  • 1. 이해하다, 깨닫다.
  • 2. 알아채다, 깨닫다, 감지하다.
  • 3. 알다, 알게 되다.

기노스코(γινώσκω) : 알다

‘알다’ 라고 번역된 헬라어의 대표적 단어에는 아니스다노마이(αἰσθάνομαι), 도케오(δοκέω), 기노스코(γινώσκω) 가 있다.

‘이해하다, 깨닫다’ 라는 의미를 가진 아니스다노마이(αἰσθάνομαι)
‘생각하여 여기다, 가정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 도케오(δοκέω)가 관념적이며 이론적 지식으로써 ‘알다’ 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알다, 알기 위해 배우다, 확신하다, 사귀게 되다’ 라는 의미의 기노스코(γινώσκω)는 주관적이며 체험적인 지식으로써 ‘알다’ 의 의미가 있다.

70인역 헬라어 성경에 기록된 기노스코(γινώσκω)는 ‘안다, 알다’ 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야다(ידע)를 번역한 것이다.
야다(ידע)는 문자적 의미에서의 ‘알다’ 라는 뜻보다는 ‘직접 보아서 확인하다’ 라는 의미에서 체험적으로 ‘알다’ 라 뜻이 좀더 적합하다.
그래서 히브리어 ‘야다’ 와 헬라어 ‘기노스코’ 가 ‘동침하다’ 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ידע)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창 4:1)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γινώσκω)하지 아니하더니…’ (마1:25)

예수님은 우리를 이와 같이 친밀하게 알고(γινώσκω)계신다(요2:24).
실제적인 지식으로써 사람의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γινώσκω) 계신다(요2:25).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어버린 생명없는 자임을 알기에 생명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알라(ידע, γινώσκω)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구약에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을 알지(ידע)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ידע)! 힘써 여호와를 알자(ידע)…’ (호6:1) 고 외쳤으며, 신약에 바울도 모든 성도들이 ‘… 하나님을 알게(에피그노시스 : ἐπίγνωσις – 기노스코의 파생어)’ (엡1:17) 되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이다.

창세전 언약의 백성(엡1:4)인 성도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고(γινώσκω)있기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고 하나님 말씀의 섬김만이 있는 성전(고전3:16)으로 사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 세상 역사속 현실은 그렇게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과 사귀며 사는(요일 1:3), 이미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삶인 것이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기노스코(Homer 이래)는 기본 어근 그노(gnw)에서 형성된 단어이며,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

(a)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사물이나 사람 또는 상황을 감각으로, 특히 시각으로 '알아차리다, 지각하다, 인식하다'를 의미한다. 호머(Homer, Od.)애서 보는 것과 기노스코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경험의 세계에서 그렇게 인지되었던 것을 마음 속에 지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 단어는 또한 '경험하다, 배우다, 알게 되다'를 의미한다.
즉 경험된 것이 그것을 경험한 사람에게 알려진다.

(b) 이 단어는 '구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그 유사한 것이나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 있는 어떤 현상에 대한 경험이나 인지가 이런 일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Homer, Il).

(c) 이 단어는 '인격적으로 알다'(Heracl., Frag.), '이해하다'(Homer, Od.), '알다'(친밀함이 인격적 지식을 가져온다). '~와 알고 지내다, ~와 친하다, 숙달되다, 노련하다'(Plato, Rep.)를 의미한다.

(d) 이 단어는 '결정하다, 판단하다'(Democr. Fr., Demosth).

(e) 형사 법원이나 민사 법원의 판결은 주어진 사실의 비중에 의거하여 내려지기 때문에 이 판결들은 기노스코의 수동형으로 표현되어 '재판을 받다, 판결을 받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f) 이 단어는 "아는 사이나 친밀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육체적으로) '알다', 즉 '~와 성적인 관계를 가지다'라는 헬라 용법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아마도 이 용법의 배후에는 헬라어 아닌 다른 언어에서 차용한 단어의 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의 어근이 라틴어 기그네레([아이를] 낳다)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 왔다(참조: H. Leisgang, Die Gnosis).

(g) 이 단어는 '확인하다, 입증하다, 확증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철학적 지식의 목적은 보는 것인데 이는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이 세상의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영원하고도 실질적인 것을 보는 것이다. 이 확인은 원래 관찰로 말미암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노스코는 '통찰력을 얻다, 알아차리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통찰력의 대상은 궁극적으로 종교의 영역에 속할 것이다(Herach., Frag. 5).(참조: E. D. Schmitz; Bultmann).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기노스코는 70인역본에서 약 800회 이상 나오며, 히브리어 야다(알다)와 그 어형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라아(보다), 하자(보다), 샤마(듣다) 등 13개 단어의 역어로도 사용되었다. 헬라의 일반적인 태도와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에서도 지식은 감각을 통해서 획득된다. 이미 알려진 것은 감각으로 나타나야 하며 그 자체는 그렇게 알려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듣는 것(듣다)과 보는 것(보다)에 관한 동사가 아는 것에 관한 동사와 병행되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예: 16:6 이하; 33:9; 삼상 14:38; 41:20).이것으로 우리는 70인역본이 라아(2:7)와 하자(26:11)와 샤마(4:15)의 역어로 기노스코를 사용한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헬라와 히브리 사상에서 아는 것에 관한 개념들은 대체로일치하며 이 두 경우에 감각을 통하여 얻는 경험이 기본적인 것이다.

(a) 70인역본에서 야다/ 기노스코는 '알아채다, 인지하다, 경험하다, 관찰하다'를의미한다(예: 3:7; 41:31; 16:20; 8:5; 47:8; 5:3).

(b) 야다/ 기노스코는 '구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선악을 아는 것"(3:5; 3:22)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이다. 좋고 흉한 것을 구별하는 것은 필요하다(삼상 19:36). 어린 아이는 왼손과 오른손을 구별하지 못하며(4:11) 또 선과 악도 구별하지 못한다(7:15). 후자의 구절의 문맥과 8:4에 나오는 이와 비슷한 언명은 이 언급이, 어린 아이는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구별할 줄 모른다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는 것 같다.

좋고 흉한 것, 좌우와 같은 것에 대해 관찰하는 것은 결국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된다.

(c) 야다/ 기노스코는 '배워서 알다' know by learning라는 의미를 지닌다(30:3).

(d) 이 분사는 사냥(25:27), 학문(29:11-13), 애곡(5:16), 바다를 항해하는 일(대하 8:18),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삼상 16:16)에 능함을 묘사하는 어구에 나온다.

(e) 야다/ 기노스코는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한다.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29:5; 1:8; 삼하 3:25). 푸알 분사형은 '친척'(왕하 10:11 등)과 '아는 사람'(19:14; 2:1 등)을 지칭한다.

(f) 야다/ 기노스코는 '관계하다, 관심을 가지다'(1:6; 37:18; 119:79), '~와 관계를 맺고 싶다'(예: 33:9). 신학적인 문맥에서 자주 이 단어가 적절한 지식을 얻지 못해서 결국 관심의 결여를 초래하고 마는 것에 대한 문제로 나온다(예: 8:7; 95:10).

(g) 야다/ 기노스코는 '성적 관계를 가지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고 하는 유명한 완곡 어법과 그 병행구들(4:1; 19:8; 31:17; 31:35; 11:39; 21:11; 왕상 1:4; 삼상 1:19)에서 남녀 쌍방의 성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남색(19:5; 19:22)이나 강간(19:25)과 같은 성적 도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h) 야다/ 기노스코는 '다른 사람과 인격적이며 친숙한 관계를 맺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름으로, 대면하여 모세를 아신다(33:17; 34:10).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1:5) 어떤 민족을(3:2) 아실 때 하나님께서 그를 선정하시거나 선택하신다(참조: 16:5 70인역본). 선택으로 이해되는 이 지식은 은혜롭고 자애로운 것이지만 이것은 인격적인 응답을 요구한다.

(i) 야다/ 기노스코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지식 외에도, 다른 신들을 아는 것이든(13:3; 13:7; 13:14) 여호와를 아는 것이든(삼상 2:12; 삼상 3:7) 간에,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10:25) 선지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4:22). 애굽의 재앙은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애굽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 보내졌다(10:2 등). 그는 그가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60:16) 그들을 파멸시키시고(6:7) 회복시키실 것이다. 특히 선지자 에스겔은 위협할 때,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는 어구를 사용한다(6:7; 6:10; 6:13; 6:14; 7:4; 7:9;7:27 등).

(j) 요약하면 희랍인들이 초연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사물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사변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반해, 구약성경은 지식을 끊임없이 인격적인 만남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구약성경이 하나님과 창조에 관해서 언급한 것을 보고서, 우리가 이 언급들을 존재론적 추론으로 여겨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믿음의 선포로 간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역사적 과거와 약속된 미래 즉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존재하고 있는 이 지상의 영역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찾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예배와 행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과 요구를 식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참조: E. D. Schmitz; Bultmann).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기노스코는 신약성경에서 221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기노스코의 용법은 헬라의 용법과 구약성경의 용법과 매우 유사하다.

(a) '느끼다, 간파하다'(5:29; 8:46),

(b) '주목하다, 알아 차리다'(8:17; 12:12; 26:10; 고후2:4; 5:42; 8:27),

(c) '인정하다,인지하다' recognize(7:39; 12:15; 22:18; 3:7; 2:20; 4:1; 5:6; 6:15),

(d) '듣다, (들어서)알다'(5:43; 15:45; 9:11; 17:13; 17:19; 1:12; 2:19; 11:57; 12:9; 10:26과 병행구; 9:24; 4:5).

(e) '확증하다, 확실히 하다, 확인하다' confirm(6:38; 13:28 이하; 1:18; 고전 4:19; 고후 13:6; 4:53; 7:51).

(f) ① 알아채고 있다(의식)라는 의미에서 '알다'know(24:50와 병행구; 2:43; 16:4; 10:34; 3:3; 2:24 이하; 7:27; 요일 3:20).

② 또한 익히 앎이나 아는 사이라는 의미에서 '알다'(25:24; 12:47 이하; 16:15; 1:7; 2:18; 7:1; 고전 5:16; 1:48; 7:49).

③ 그리고 이해라는 의미에서 '알다'(18:34; 8:30; 고전 14:9; 3:10).

(g) '구별하다, 분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고전 14:7,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h) '~하는 방법을 알다' know how to.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i) 경험을 통하여 '알다, 깨닫다' find out(요 13:58; 15:18; 19:4; 요일 2:3; 요일 2:5).

(j) '~와 관계를 맺다'

1:25; 1:34에서 성적인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다.

7:23에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나는 너희와 전혀 관계를 맺지 않았다'라는 의미이다.

고후 5:21에서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그가 죄에 대해 지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이란 선언이 범죄 행위와 반어법을 나타내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7:7에서도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라는 문구는 '율법이 없었다면 인간인 나는 죄와 본질적인 관계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의역할 수 있다.

고후 5:16에서 '~와 관계가 있다, ~와 관계를 맺다, 개인적으로 알다'를 나타낸다. 이 구절의 의미는 많은 논쟁의주제가 된다. 상반절에는 오이다멘("우리가 아노니")이 나오며, 하반절에는 기노스코가 에그노카멘("우리가 알았노니")과 기노스코멘("우리가 아노니")의 형태로 나온다.

(k) 고전 5:11-21에서 바울은 자기를 개인적으로 공격하며 사도직을 공격하는 적대자들과의 논쟁에 관련되어 있다. 그들은 바울에게는 사도라고 확증할만한 눈에 보이는 영적인 특성, 예를 들면 무아지경의 현상들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고전 5:13). 그들은그를 자기 자신만을 칭찬하는 '허풍선이'라고 비난했던 것 같다. 바울은 고전 5:11("우리가 ... 사람을 권하노니")과 고전 5:12("우리가 ...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에서 그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 바울의 변호 중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그래서 상상된, 눈에 보이는 영적인 특성을 가진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하는 언급도 부분적으로 들어있다(고전 5:14 이하).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본 성령과 능력의 분명한 증거에 따라서 지금부터-모든 가치의 전도, 즉 시대의 전환점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건 이후로-"우리가 ...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못하노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고전 5:14). 이것이 얼마나 명백한 것인가를 나타내기 위해바울은 모든 사람이 분명히 알 수 있는 언명을 고전 5:16 하반절에 삽입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즉 그와 그렇게 관계하지 않고 오직 우리가 섬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만 관계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주이시며, 그가 주님이시라는 것은 외면상으로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사도 바울과 사도라고 하는 그의 주장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던 것 외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외적인 판단과 일반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준에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오직 새로운 피조물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외적 현상에 의한(엔 프로소포, 고전 5:12) 판단을 포함하여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도다"(고전 5:17). 이 논쟁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이 고후 5:16에서 그가 지상의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다는 것을 확증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 이것은 역사적 예수님의 의미와 관계를 띠고 있지 않은 것이다.

(l) 기노스코는 '인정하다, 알아주다'를 의미한다.

고전 4:19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가 갈 때 교만한 자의 말이나 그들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즉 중요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3:9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높임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이방인?) 기독 교회에 와 보면 부활하신 이가 그들을 사랑하심을 인정하게 되리라고 약속하셨다(2:23). 이렇게 하심으로서 그는 유대인의 종말론적 소망을 뒤짚어 놓으셨다(참조: E. Lohmeyer).

7:1에서 "법을 아는", 2:18; 22:14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와 같은 문구들은 단순히 이론적인 지식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적용되어 인간의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에 대한 인지를 암시한다.

7:29에서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라고 한 바리새인들의 말은 일반 백성들에 대한 잘 다듬어진 랍비 학자들의 비웃음을 반영해 주는 것이다(참조: SBⅡ 494-521). 이것은 일반 백성들이 실제로 율법을 알아 율법에 순종했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추종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을 기록하면서 요한은 여기서 율법이 바로 그들 자신을 지적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비꼬는 것이다(참조: 7:42; 5:29 이하; 11:49 이하). 7:51에서는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고 반박하고 있다.

1:21에서 하나님을 알았던 자들의 생각이 허망하여졌다는 말은 헬라 사상의 견지에서 모순된 것으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그들의 허망함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결과다(참조: 지혜서 13:1).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찬미와 감사를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거부한 이교도들은 이 지식을 단순한 지적인 활동으로 격하시켰으며 그들이 지혜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상 어리석음일 뿐이었다(1:22 이하). 이교도들이 분명히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하더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들은 핑계할 수 없게 되었다(4:9; 1:10; 고전 1:21; 4:8).

5:5; 1:3; 5:20 등에서 지식에 관한 명령과 권유는 이 은사를 붙잡아 변화하는 생활 상황에서 이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라는 요구인 것이다.

10:11에서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인정해야 한다. 2:36에서 "이스라엘의 집"은 오순절 사건에 비추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24:43의 비유에 나오는 명령문도 참조하라.

고후 8:9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즉 "부요하게 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을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하게"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실제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는 이것을 리쯔만(Lietzmann)이 해석한 것처럼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관대하심의 본이시다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H. Lietzmann, An die Korinther).

(m) 기노스코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선택하시는 지식을 언급하는데 사용되었다.

-딤후 2:19(16:5을 인용함),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하였느니라".

-고전 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여기에서 하나님의 지식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똑같이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모든 행동을 포함한다. 이 지식은 영원히 하나님의 피조물에게 유효한 것이며 죄와 불순종에 대한 승리이다. 10:2은 이에 대한 일종의 상대 구절이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을 위한 유대인의 열심을 인정하긴 하지만 이것이 카타 에피그노신("[참된] 지식을 좋은 것")은 아니다(참조: Arndt, 291). "이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보다 깊이 통찰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결핍되어 있는 지식은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지식과 인지이다"(E. Gaugher, Der Brief an die Romer).

(n) 기노스코는 어떤 구절에서 신학적이고 이론적인 지식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3:11(참조: 4:11TR)은 오직 제자들에게만 허락된 "천국의 비밀"에 관한 감추어진 지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지식이 그들을 그 외의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는 비유의 권위 있는 해석가가 되게 했다.

6:6에서는 신학적인 진리에 관한 지식, 예를 들면 세례에 관한 특별한 가르침에 대한 지식까지도 삶으로 나타내는 순종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지식의 명백한 목적은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에 있는 것이다.( R. Bultmann; E. D. Schmitz).

※ 영지주의와 논쟁에서 나타난 용법 등.

신약성경 시대에는 자기들이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전 1:18-2:16; 고전 13:12 이하; 2:8; 딤전 4:7; 딤전 6:20).

신약성경 기자들은 자주 사도적 케뤼그마(khvrugma, 2782: 선포, 전도)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순례 설교자들과 충돌하곤 했다. 디모데는 이른바 거짓된 지식(그노시스)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도록 명백히 경고받고 있다(참조: 딤전 6:20).

2:24에는 "사단의 깊은 것"을 배웠다고 주장했던 적대자들이 언급되어 있다. 이 기자는 풍자적이면서 올바른 비평적인 판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깊은 것"을 배웠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에 항변했던 것 같다(E. Lohmeyer).

(a) 바울 서신.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주장하는 지식은 이처럼 바울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2). 이것은 고전 15:34과 비교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바울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아그노시안 ... 데우)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바울은 그가 지식으로 이해한 것을 설명하라는 강요를 받은 것이다. 그는 지식을 이미 알려져 있는 것으로서 오직 수동적으로만 표현할 수 밖에 없음을 알았다(4:9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이라는 어구를 첨가시킴으로서 인간이 능동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을 시정했다). 이미 알려져 있는 이러한 것은 인간이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이전의 어떤 능동적인 이해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상응하는 것이다(고전 8:3). 하나님에 대한 완전하고도 참된 지식은 오히려 종말론적 약속과 기대의 일부이다(고전 13:12). 바울은 육을 입고 지상에 오신 존재를 간단히 무시해 버림으로써, 하나님에 의해 알려진 것과 인간이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일치시키는 영지주의자들의 에스카톤(목적)에 대한 환상적 기대를 완전히 거부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우리를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것을 전적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노스데나이(하나님에 의해 알려진 것)는 선택을 포함하고 있다(참조: G. Bornkamm). 제 아무리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서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서 전달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주신 영이다(참조: 고후 4:6). 에스카톤 이전에는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3:10; 참조: 2:1 이하). 그러나 그리스도는 신학적인 사색을 통해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에 의해서 만나지게 될 때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주로 고백하게 될 때 알려진다(3:8). 이러한 고백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된다. 이러한 고백이 없는 곳에서 지식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고전 14:38).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 Love은 하나님에 의해 아시는 바가 되는 것이다(고전 8:3).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복종과, 죄의 주권으로부터의 해방(참조: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3:10, 참조: 6:3)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는데 열심히 봉사하는 곳에서 구체화되는데, 한편으로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의 약속된 부활에 이르려한다(3:10). 참된 지식은 하나님께서 사도의 증거를 통해 어느 곳에서나 나타내셨던 지식이다(고후 2:14). 이것은 최종적으로 완성된 지식은 아니다. 지금 이 지식은 단편적일 뿐이지만(고전 13:12) 완성을 기대한다. 바울이 1:6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지식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영지주의자들은 교만하여 이 지식에 대한 어떠한 것도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내가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풍자적으로 요구했다(고전 14:37). 이 모든 점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의 논법이 본질적으로 구약성경적 지식 개념의 범위 안에 머물러 있음이 분명하다. 동시에 그는 이 개념을 종말론적으로 확대하여 완성시켰다.

(b) 요한의 기록.

지식이 예수님과 요한 자신의, 그리고 10:14 이하에서는 예수님(아들)과 하나님(아버지) 사이의 상호 내적인 친교를 나타낼 수도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영지주의적 배경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레미야스(J. Jeremias)는 불트만(R. Bultmann)이 그의 저서(The Gospel of John, 1971, 380 이하)에서 주장한 것처럼, 이것이 헬라의 신비주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셈족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식을 친교로 묘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알고 있는 자, 즉 지식을 전달하는 하나님의 사자와 완전한 초월자로 알려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동등성에 의거한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영지주의적, 이원론적 대조는 세상이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진리의 영"(14:17)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언명에 의하여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미움을 받은 것은(15:18; 16:2)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제거할 수 없는 구별의 결과로 이해되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마찬가지로 계시의 목소리도 하나님이 아닌 마귀를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자들에 의해서 그렇게 인식되어질 수 없다(참조: 8:42-43). 반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며, 영생과도 동일시되었다(17:3). 구원을 가지고 오는 이 지식은 외부로부터의 부르심, 즉 이해력, 말하자면 진리 되신 분을 아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도래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참조: 5:20).

지식에 관한 요한의 언어와 요한의 견해가 영지주의의 용어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만약 우리가 기독교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자들과 이 메시지를 반대한 사람들이 이 메시지를 표현하는 형태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의 목적은 영지주의자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의 언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영지주의자와 직면하여 자기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그를 공박했다. 이것이 복음을 신화로 만들거나 요한을 영지주의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었으나(참조: 1:18), 하나님은 그의 보내심을 받은 자, 즉 그 아들에게서 알려지게 될 것이다(10:22). 그는 육체가 되셨던 로고스(말씀)이시다(참조: 1:14; 요일 1:1-4).

예수님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14:9; 12:45). 그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도 알 것인데, 그 이유는 이 사람이 그를 이미 알았고 또한 보았기 때문이다(14:7). 따라서 하나님과의 교제는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행해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 교제가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교제에 상당하기 때문이다(10:15). 이 두 가지 수준의 교제는 기노스코로 표현된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람들 사이에 나누는 교제는 서로를 아는 지식에 의해서 효과적인 교제가 되지만, 이 교제가 영지주의에서와 같이 인간을 신격화시키거나 인간을 이 세상과 역사에서 완전히 제거시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요한에게 있어서 지식은 한 분이신 하나님과 역사적인 통로를 통해서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그 형태를 취한다. 자기 아들을 보내심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17:23; 참조: 요일 4:19 이하)과 세상에 대한(참조: 3:16)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아들은 자기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척도에 따라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셨다(참조: 15:9; 17:26). 따라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의 지식은 역사의 영역 안에서 사랑으로 표현된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아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아버지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입증하셨듯이(14:31), 그를 아는 자도 하나님의 명령, 무엇보다도 자기 형제를 사랑하라는(요일 4:7 이하; 요일 2:7-11) 명령을 지킴으로서(요일 2:3 이하), 또한 죄를 짓지 아니함으로써(요일 3:6), 자기의 지식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노스코는 두 가지로 적용된다. 첫째로, 이 지식은 아들의 보내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을 의미하며(17:8; 요일 3:6), 둘째로는 선포된 메시지에 복종하는 것으로도 묘사되는 이 지식에 기초한 사랑에 순종하는것을 의미한다(요일 4:6). 이러한 지식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 Life이 되었는데(17:3)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에서 유래된 역사 속에 있는 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요한의 개념은 영지주의의 개념과 고의적인 정반대적인 것으로 두드러진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믿음과 지식을 똑같은 수준 위에 두는 것도 적어도 지식과 대조시켜 믿음을 낮게 평가한 영지주의에 대한 논박의 일부분이다. 17:3이 영생을 지식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지만 3:36은 믿음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베드로의 고백에 관한 요한의 견해에서(6:69) 우리는 믿음을 지식에 종속하는 제일 첫 단계로 보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으나, 요일 4:16에서는 이 순서가 "알고 믿었노니"로 되어 있다.

오직 자기 자신의 구원에만 관심을 가지는 영지주의의 자기 만족은 형제 사랑(13:35)과 단합(17:21 이하)에서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과는 반대된다. 더욱이 이 배후에 있는 궁극적인 목표는 아들이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세상이 믿게 되고 또한 이 계시가 온 세계에 알려지게 될 때에만 달성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우주(창조)와 구원에 대한 영지주의의 이원론을 요한이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영지주의자에게 있어서 이러한 이원론은 극복될 수 없는 것인데, 그 이유는 이 이원론은 우주적인 타락 이전에 이미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지주의의 견해에 따르면 우주는 완전히 그리고 치명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구원 받을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참조: 1:1 이하; 요일 2:14).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 대한 증오로 표현되는 알지 못하는 것은 나타난 계시를 믿지 않는 결과이며(8:42 이하) 이것은 결과적으로 죄를 초래한다(참조: E. Kasemann). "만약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들이 참으로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도 이 지식을 심화시키고 풍요롭게 하는데 관심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만 들으려고 할 뿐, 새로운 것을 들어 그들이 전에 알고 있던 모든 것과 그와 아울러 이런 지식의 상태 곧 자기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이해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는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왜 들을 수 없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이 영역에서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것과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점에 대한 이해 부족을 나타내어 줄 뿐이다"(R. Bultmann). 지식과 믿음에로의 부름은 이렇게 세상을 위해서도 남아 있다. 아들을보내심으로 나타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제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나서 실재의 새로운 차원을 연 것이다.

요한의 어휘가 영지주의와 명백히 유사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의 주제는 영지주의의 신화적 사변보다는 구약성경의 전승에 나오는 지식의 개념과 훨씬 더 가깝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분명하다.

(참조: E. D. Schmitz).





ἀκούω 191 [akŏuō]
  • 1.

    동의하다, 요9:27, 5. 이해하다, 깨닫다[목적격과 함께 쓰임], 갈4:21, 고전14:2.

  • 2.

    [문자적으로: 감각적 의미로 사용]

  • 3.

    [자동사] 듣다, 마13:16, 11:5, 13:14, 눅7:22, 행28:26, 계2:7,11.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βλέπω 991 [blĕpō]
  • 1.

    [매우 일반적인 의미에서] 깨닫다, 느 끼다.

  • 2.

    보다.

  • 3.

    [문자적으로: 눈의 활동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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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페, 로고스, 카리스 외 성경속 단어 그 의미와 탐구

지혜와 영적 지도의 시대를 초월한 보물인 성경은 히브리어와 헬라어가 중요하다. 특히 헬라어는 신약성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성서에 깊이와 뉘앙스를 더한다. 이번 블로그에서는 성경과 관련된 헬라어 몇 단어 속의 심오한 의미를 알아보자

전 세계 신자들에게 계속 울려 퍼지는 이 고대어들의 아름다움을 파헤쳐 보자.


아가페

신약에서 사용된 가장 유명한 헬라어 단어 중 하나는 "아가페"이다 그것은 종종 인간성에 대한 신의 사랑과 관련된 사심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이 신성한 사랑은 단순한 애정을 넘어 희생적인 베푸는 것, 연민, 용서를 포함한다. 아가페는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풀도록 신자들에게 영감을 주면서 사랑의 가장 높은 형태를 나타낸다.

 

로고스

"로고스"라는 헬라어 단어는 철학적, 성경적 맥락 모두에서 매우 중요하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즉 육신으로 만드신 말씀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로고는 신의 지혜, 신의 창조적인 힘, 그리고 진리의 계시를 의미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의 궁극적인 표현이라는 생각을 요약한다.

카리스

"카리스"는 영어로 "은혜"로 번역되며 신약성경의 기본 개념이다. 우리의 결점과 단점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확장된 하나님의 변함없는 은혜와 은혜를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통해 신자들이 구원받고 용서받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을 얻는다. 카리스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상기시켜 줍니다..

디카이오신

"디카이오신"은 헬라어로 "정의" 또는 "정의"를 의미한다. 성경적 맥락에서 하나님의 도덕적 순결과 신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받는 올바른 입장을 동시에 나타낸다. 디카이오시네는 성실, 공정,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소테리아

"소테리아"는 "구원"으로 번역되어 전달, 구조, 구원의 개념을 요약한다. 신약성경에서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해, 영생을 아우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리는 구원을 말한다. 소테리아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발견된 희망과 자유를 상기시킨다.

코이노니아

"코이노니아"는 헬라어로 "동료" 또는 "커뮤니케이션"을 의미한다. 그것은 신자들의 공동체 내에서 깊고 의미 있는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코이노니아는 교회의 삶과 사명에 대한 공동의 참여를 포함하며, 통합, 지원, 상호 교화를 촉진한다.

성경에서 발견된 헬라어 단어들은 심오한 의미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의 구원 계획, 그리고 신자의 신앙에 대한 더 깊은 통찰력을 드러낸다. 사랑과 은총에서 믿음과 의로움에 이르기까지 이 말씀들은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풍부하게 하고 삶에서 하나님의 변화하는 힘을 포용하도록 영감을 줍니다. 우리가 이 헬라어 단어들의 아름다움을 탐구할 때,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경외심을 깊게 하고, 그것의 시대를 초월한 진리에 맞춰 살고자 하는 열망에 불을 붙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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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으라!

서 론

헬라 원어에 따르면, 신약에서 ‘깨어 있으라 (watch)’라는 단어는 약 22번 사용되었습니다.

헬라어 γρηγορεω을 음역하면 ‘그리고레오 (grigoreo)’입니다:
그것은 방심하지 않는, 온전히 깨어 있는, 조심스럽고 신중한, 또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중요한 여러가지의 다른 사용법과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여러 의미와 차원들을 연구하고 우리의 영적 삶에 있어서 그 중요성을 이해하길 원합니다.

먼저 신약에 나오는 이 단어의 사용법과 의미를 설명하고 우리의 영적 삶에서 이 깨어 있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 지에 대해 논의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신약에 나오는 이 단어의 사용법과 의미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헬라어 단어는 약 22번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의미와 차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깨어 있으라 (watch)’라는 단어가 언급될 때, 주님의 목적을 우리에게 알려주므로 그 의미들을 알아야합니다.

1.헬라 원어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재림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때 사용되었으며, 그분께서 밤에 도둑처럼 오실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분별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할 필요성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깨어 있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또한 그분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신부를 위한 신랑으로 오실 것입니다.

마가 복음 13:33–37: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깨어 있으라’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일한 헬라어 단어입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올  모든 세대의 사람들을 포함해서 말씀하신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세대의 믿는 자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이 동일한 의미를 가진 같은 단어가 마태 복음 24:42; 마태 복음 25:13; 누가 복음 12:37. 에서도 기록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6, 10절에서도 이 말씀이 사용 되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그분의 오심이 밤에 도둑같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깨어 있고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내용입니다.

요한계시록 16장 15절에서도 같은 단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혜, 즉, 이 영적 깨어 있음의 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혼이 그분께서 신랑으로서의 오심을 위해 준비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분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당신의 오심이 홀연한 오심이라고 경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늘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잠에서 일어나 깨어서 지켜 보도록 합시다!

2.이 단어가 사용된 두 번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고통의 교제로서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 단어는 겟세마네에서 그분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일어났습니다.

마태 복음 26: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같은 의미가 마가 복음 14: 34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고난 가운데 우리에게 당신과 함께 하도록 초대하고 계심은 놀라운 일입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우리가 이 영적인 깨어 있음의 은혜를 얻게 되면 우리는 주님의 고난 가운데 교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의 고통을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막힘 없이  그분의 고난의 교제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대로 그분과의 큰 친밀감과 뚜렷함/확실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이 단어를 신약에서 다음과 같이 사용함으로써 우리에게 계시되는 세 번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원수로부터 오는 시험과 전쟁에서 구원 받기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깨어 있음입니다.

마태 복음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동일한 말씀이 마가 복음 14:38에서도 나타납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5:8에서 다음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러므로 영적 깨어 있음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시험으로부터 지켜지거나 보호 받지 못하거나 사단의 함정에서 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에서 원수를 다음과 같이 언급 한 것을 기억할 수 있지 않습니까?: […]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요한계시록 12:10). 이것은 우리가 자고 있는 동안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소하는 자가 우리를 고소하고 우리를 고발하는 것을 중단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영적 깨어 있음이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4. 이 단어를 사용하여 강조된 또 다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영적 삶에서 견고하고 확고하게 설 수 있도록 깨어 있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기도와 감사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6: 13, 14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린도전서 16: 13, 14)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 용감하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시오 (새번역 – 고린도전서 16: 13, 14)

알렉산드리아의 신학교 학장을 지냈고 많은 성인들이 그의 영적인 제자였던, 소경인 성 디디무스(4세기)는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부르심 받은 것에 대해 훈련되고 준비된 군인이 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음은 우리를 주님을 위한 군인으로 변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에베소서 6:18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에베소서 6: 18).

그리고 골로새서 4:2에서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골로새서 4:2)

 그러므로 영적인 깨어 있음의 은혜가 우리에게 입대한 군인이 되도록 요구할 뿐만 아니라, 감사의 영으로 기도를 굳건히 계속하고, 인내로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이 중요한 단어에 대해 우리가 찾을 수 있는 마지막 의미는 사역과 주님의 양떼를 돌보는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0: 31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 있어서,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사도행전 20: 31 -새번역)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떠나기 전에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권면한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을 다시 보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양떼를 깨어 보살피라고 권면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3:2-3 절에서도 사도 요한이 사데의 교회의 사자에게 그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놓인 영적으로 약한 양떼를 향해 깨어나라고 명령하는 동일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13:17에서도 동일한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섬김을 받는 자들에게 그들의 영혼을 지키는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데 있어서 깨어 있고 굳건할 것을 명령합니다.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3:17)

이 중요한 단어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 이 단어가 발생한 여러 성경 구절을 살펴 본 후,  우리는 분명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크고 위대한 은혜를, 즉 영적 깨어 있음의 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이것이 이 나눔의 두 번째 포인트입니다.

지금까지는 성경 말씀에 나오는 “깨어 있음”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두 번째 포인트로 넘어가기 전에, 구별되고 뚜렷한 영적 은사로써 “깨어 있음”에 대한 교부들의 몇 가지의 생각을 살펴보겠습니다.

  • 시나이의 성 헤시키오스 (7/8 세기) – 필로칼리아 (Philokalia)에 기록됨:
    ‘생각을 지키면 유혹과 시험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깨어 있음은 마음의 입구에서 끊임없이 생각을 고치고 멈추는 것입니다.’

‘깨어 있음이 오랜 기간 동안 연습 되었을 때,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를 욕망의 생각들과 정욕의 말들, 그리고 악한 행동들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킵니다.’

  •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7/8 세기):

‘지성/이성에 대한 주의와 깨어 있음이 없다면, 우리는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 다니는 악마로부터 구조받거나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 시나이의 성 필로테오스 (세기) – 필로칼리아 (Philokalia)에 기록됨:

‘우리의 주의함/깨어 있음과 기도가 매일 함께 합쳐지게 되면 엘리야의 불수레처럼 (열왕기하2:11) 되어 우리를 하늘로 올라가게 합니다!’

번째: 어떻게 하면 영적 깨어 있음의 은사와 은혜를 얻을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실제적인 포인트를 나누겠습니다:

  1. 영혼의 내면적 영적인 세워짐
  2. 분열되지 않은/나뉘지 않은 마음과 선한 양심을 갖는 것
  3. 한 몸의 지체들 사이의 연합에 주의하고 깨어 있기
  4. 마지막 때와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영적 민감성
  5. 하나님 나라의 책임들

이 포인트들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1.영혼의 내면적 영적인 세워

우리가 앞서 성경과 교부들의 어록에서 보았듯이, 그 모든 축복과 특성들과 함께 영적으로 깨어 있음의 은사를 받기 위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깨어 있음, 또는 경각심은, 우리의 영혼을 세우는 에 대해 주의하며 지키는 것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세워진 속사람 안에는 깨어 있음의 은혜와 덕이 있습니다. 그것은 속사람의 성숙의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 후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태 복음 16:18).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세우시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이 교회의 일차적이고 주요한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음)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지은 자가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히브리서 3: 3, 4).

바울은 또한 자신이 섬기는 교회들의 영적 건축과 덕을 세우는 것에 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혜로운 건축자라고 (고린도전서 3:10) 부릅니다.

 이 영적인 세움/건축은 우리에게 다음을 요구합니다:

  • 매일 성령 안에서 걸음으로써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해서 살아있도록 하며, 또한 새롭고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일상 생활에, 우리의 행동 가운데, 그리고 우리의 말 가운데 합당하고 마땅한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행동이 세상의 사람들의 행동과 너무나도 비슷합니다! 또한, 때로는 우리의 말이 부정적이거나 잘못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판단/정죄하거나, 거친 농담을 하거나, 수다와 험담을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깨어 있음의 첫 번째 영역이 성령 안에서 우리의 일상의 행동들을 지키는 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볼 수 있도록 적합하고 적절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19: 14)

우리에게 있는 것들에 대해 깨어 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능력 밖의 것들을 주십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긍휼로 당신의 은혜와 덕을 허락하십니다.

기록 되기를: […] 믿음에 덕을 […]  더하라 (베드로후서 1:5)

2.분열되지 않은/나뉘지 않은 마음과 선한 양심을 갖는

우리의 마음은 종종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분열되고 나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의 정결함을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경우, 우리의 마음은 혼의 욕망과 정욕으로 가득 차기 때문에 분열되고 나뉘어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8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야고보서 1:8)

이 구절의 다른 번역들을 볼 때 우리가 이 분열과 나뉨을 이해하는데 있어 도움이 됩니다. 두 마음을 품어 라는 문구를 중심으로 몇 가지 번역을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오래된 번역 중 하나인 콥틱의 번역도 “두 마음의 사람/double-hearted man” 이라고 기록 되었습니다. Young Literal Translation (YLT)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두개의 혼의 사람은 모든 일에서 불안정합니다.” 여기서 마음의 정결함과 일관성을 가로 막으며 혼을 방해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언급함을 볼 수 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NLT)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습니다: “그들의 충성심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나뉘었다.”

그러므로 시편 86: 11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시편 86: 11)

마음과 양심의 영적 민감성에 대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성경적인 예가 있습니다: 다윗은 마음이 영적으로 매우 민감하여 자신이 죄를 지으면 즉시 자신을 찔렀습니다.

사무엘상 24: 5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사무엘상 24: 5)

또한 사무엘하 24:10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일을 행함으로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하 24:10)

사울이 다윗의 뒤를 쫓으며 그에게 많은 고통과 고난을 안겨줬는데 다윗이 겨우 사울의 옷자락을 베었다고 해서 왜 다윗의 마음과 양심이 가책을 느겼는지 우리는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 사울을 죽이지도 않았는데요! 그의 겉옷 한 귀퉁이만 베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사랑으로 가득 찬 영적으로 민감한 마음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또한 왜 다윗의 마음이 단지 백성의 수를 세었다고 자신을 찌르고 가책을 느낄까 궁금해 할지도 모릅니다!  전쟁을 위해 단순히 백성의 힘을 알기 위한 것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도 악으로부터 정결케 된 영적으로 민감한 다윗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쟁에서 정복하는 것이 백성을 강건케 하시는 주님의 선하심에 바탕을 둔 것이지, 백성의 능력과 힘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영적으로 민감한 마음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성 티콘, 모스코바의 총대주교(19세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덕은 마음에 있지 않다면 진정한 덕이 아닙니다. 악이 마음 속에 없다면 결코 겉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손은 악을 행하지 않을 것이며, 발은 악을 향하여 걷지 않을 것이며, 혀와 입술은 악을 말하지 않을 것이며, 눈은 악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지나 마음은 악을 원하지도 갈망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대해 깨어 있으며, 악함과 분열됨으로부터 지킬 때, 우리는 순전한 깨끗한 마음을 얻게 되며, 영적으로 민감한 양심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전에서 발견한 책의 기록된 말씀을 읽고 백성의 상태에 대해 여호와께 묻기 위해 요시야 왕이 여선지자 훌다에게 보낸 이야기를 기억할 수 있겠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곳과 주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약하여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네게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곳과 주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에 사신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 (역대하 34: 27, 28).

우리는 하나님의 일들과 주변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더 이상 부드럽지 않는 딱딱하고 굳어진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물 또한 말라버린 것입니다!

선지자 요엘의 말을 기억합시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요엘2: 12, 13).

여기서 선한/좋은 양심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봅시다:

  • 디모데전서 1: 5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디모데전서 1: 5)

  • 또한, 사도 바울은 유대 공회 앞에서 자신의 변호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선한 양심/good conscience)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사도행전23: 1).

  • 사도는 다음 장에서 이렇게 말하면서 동일한 것을 다시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사도행전 24: 16).

  • 사도 바울은 제자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디모데후서1: 3).

  • 사도는 악한 양심을 피하는 것의 중요성에 우리의 주의를 끌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브리서 10: 22).

악한 양심은 타인과의 부정적인 경험이, 사랑과 용서의 부족으로 축적되어 그 속에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사역에 많은 막힘과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섬기는 자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히브리서 13: 18).

이 신성한 말씀을 듣고 나서, 우리가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을 얻고, 모든 악함이 비워진, 깨끗하고 정결한 마음을 얻으며, 선한 양심을 얻어야 할 큰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걸을 수 있고 진정으로 성령 안에서 걸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깨어 있음의 이 위대한 덕을 얻을 준비가 되고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또한  마지막 때에 광범위하게 증가하고 있는 악 때문에 우리 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3.한 몸의 지체들 사이의 연합에 주의하고 깨어 있기

제가 연합에 대한 말씀을 예전에 많이 드렸지만, 여기서 몇 가지의 포인트를 추가하기 원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우리 시대 가운데 원수가 일하는 주요 영역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연합을 파괴하거나 약화시켜서 영적인 권위와 여러 다양한 특권을 상실하게 하는 원수의 주요 분야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원수는 대부분 우리의 감각들, 즉, 눈과 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거짓된 것을 보고 듣게 함으로써 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의 정확성을 조사하거나 확인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거리낌이 없는 청결한 양심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벽들이 형성되기 시작하며,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참된 사랑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남게 되는 것은 표면적이고 외적인 관계일 뿐입니다; 그 사이에 마음과 양심은 오염되고 닫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악한 계략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하며,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지키고, 타인을 향해 우리의 양심을 투명하게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몸의 구성원들 사이의 분열은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분열을 야기시킵니다. 머리이신 예수님과의 이 분열의 결과로 우리는 많은 축복과 영적 권위와 하나님의 영의 지속적인 흐름을 잃게 됩니다.

이 점을 히브리서 10:24, 25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이것의 의미는: 부정적인 것에 집중하고 비판하고 판단하는 대신에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 10:24, 25)

4.마지막 때와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영적 민감성

이 점에 대해서 반복해서 말씀드렸지만 오늘 제가 몇가지의 강조할 점들과 질문들을 제시하기 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이 마지막 때와 관련된 매우 특별한 일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드러내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요한 복음 14:26).

만약 우리가 그분에게서 마지막 때에 대해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제약되고, 마비되며, 연약함과 요동침 가운데 갇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실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즉 늘 성령 안에서 걸으라고 말했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로마서 12: 11, 12).

이 구절의 각 부분은 특별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구 하나하나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에 따라 우리 자신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요동치는 상태, 미지근한 상태에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상태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와 같은, “영적인 포로 됨, 유배”의 상태로 여기신다는 것을 제가 이해하도록 하나님의 영이 알려 주셨습니다.

요즘 날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밝히고 싶어하시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들은 설명하거나 가르칠 수 없는 문제들입니다. 신비롭게 영감으로 오는 것이며, 영적으로 마음 가운데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것은 받은 자들의 생각 가운데 드러나고 계시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영적인 포로의 상태로부터 나오게 하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 중요성 때문에 다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반복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로마서 12: 11, 12).

여기서 우리는 세가지로 연결된  두개의 세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의 말씀에 예치된 성령의 신비들을 깨닫도록 합시다:

첫 번째 세트:

  •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Not lagging in diligence)

이것은 멈추지 않는 영적인 부지런함의 상태로써,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노력하는 영적 근면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 (영 안에서) 열심을 품고 (Fervent in spirit)

우리가 부지런하지 않고 게으르기 때문에 영 안에서 열심을 품는 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부지런함과 근면은 우리의 영을 지피고 우리로 하여금 영 안에서 열심을 품도록 만들어 줍니다.

  • 주를 섬기라 (Serving the Lord)

영 안에서 열심이 있으면 그것은 우리를 즉시 하나님 임재로 올라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예배하거나 섬기는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세트:

  •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Rejoicing in hope)

주님의 영적 예배자들은 끊임 없고 지속적인 산 소망의 원천인 부활의 능력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로 고정된 소망으로써, 부활의 능력을 그분으로부터 끌어서, 하늘 자리/영역에서 마음과 영 가운데 있습니다.

  • 환난 중에 참으며(Patient in tribulation)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산 소망이 있는 한, 시련이 그 사람을 포위하거나 압도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의 영의 열심과 열성으로 인해 부드럽고 유순해졌기 때문에, 그 사람을 빚어서 형성하는 것이 쉬워집니다. 그러므로, 시련은 그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형성하고 변형시키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또 다른 구절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로마서 5: 3), 또는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새번역) 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무를 수 있게 하기 위해 병약함과 시련과 곤란을 겪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9, 10 참조).

  • 기도에 항상 힘쓰며 (Continuing steadfastly in prayer)

이 세가지 연결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사람이 하나님과 영생을 향해 점점 더 나아가게 됨으로 말미암아, 기도는 입과 입술에 오르는 말이 되기도 전에, 이미 그 마음과 그 사람의 존재 전체에 지속적인 상태가 됩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마지막 때에 연관된 영적 민감성에 대한 다른 포인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마음 가운데 죽음의 정복이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유산이기 때문에 인간의 혼 안에 그것이 심어지고 많은 두려움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또한 성경에서도: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린도전서 15: 26)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망을 멸하시고 정복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육 안에서 죽음을 대면하셨고 이기셨으며,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사도행전 2: 24).

사망에 고통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네, 그것은 깊이 있고 숨겨져 있거나 묻혀 있는 고통으로, 때로는 질병, 약점, 무력함, 또는 두려움, 불안, 슬픔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얻길 원하십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여러 다른 모습을 취할 수 있는 죽음과의 싸움을 허락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질병, 슬픔, 시험과 같이 다른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그 사람의 통찰력을 열어서 그것이 죽음의 세력과의 전쟁이라는 것을 그에게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그 사람이 성령 안에서 행하고 걸으면서 이 전쟁에서 인내한다면, 그는 부활의 능력과 죽음을 이기는 것에 대한 분깃, 몫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와 관련된 준비의 필수적이고 뗄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깨어 나고 주의하기를 바라시며 신음하십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유업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죽음을 너무나도 두려워하는 우리 세대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믿음의 이전 세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왜 큰 차이가 있을까요?

순교자들은 고난 중에서도, 왜 그리고 어떻게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었을까요?

전도가 초기 세기 가운데, 왜 그리고 어떻게 확장 되었을까요?

이 모든 것은 죽음을 극복하고 이겼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살펴봅시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사도행전4: 33).

사도 바울이 고리도인들에게 전한 말씀을 읽어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린도전서 15: 14).

순교자들은 이렇게 극복한 것입니다!
성인들은 이와 같이 노력하였고, 그 은혜가 그들을 변모하게 하였습니다!
주의 종들이 이렇게 대대로 복음을 전파하여, 어둠과 사단이 지배하는 곳들에서 구원을 위한 믿음의 문들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부활의 복음 전파는 상황들과 개인들, 나아가 국가와 민족을 변화시켰습니다.

이제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이 질문은 절대적 진정성과 기도의 영 가운데 지속적인 숙고를 필요로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문제에 잠시 주의를 기울이다가, 또 다시 평상시처럼 삶의 다른 일들에 몰두하며 방향을 돌린다면, 우리의 상황은 마지막 때의 대립과 대적에 있어서 많이 어려워질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때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마가 복음13: 37).

5. 하나님 나라의 책임들

제가 이전에 이미 이 문제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단지 몇 가지 점에만 초점을 맞추기 원합니다.

성령 안에서의 삶과 복음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며 위임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것을 투자해야 합니다. 즉,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수해 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다시 기억하고, 기록된 것에 순종합시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디모데후서 2: 2)

그대가 많은 증인을 통하여 나에게서 들은 것을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전수하십시오. 그리하면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또한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 2 – 새번역)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주 예수님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요한 계시록 3: 3).

동시에 우리의 삶은 이 세대 가운데 증인 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거룩히 구별된 공동체로 부르심 받은 자들로서, 우리는 산 위에 있는 도시와 같아야 합니다 (마태 복음 5:14).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거짓과 악에서 벗어나고 위를 향해 올라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 기록되기를, 믿는 자들을 강건케 해주도록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이사야 35: 3, 4a)

이것이 계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따로 거룩히 구별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명령이자 계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위에 있는 형제 자매에게 축복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곧 성육신 절기의 금식으로 들어가게 될 것임을 기억합시다.

이 기도와 금식의 시간들 가운데 다음을 행하도록 합시다: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살피고 검토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이 메시지를 다시 보고 이것을 가지고 기도하고;

그래서 이 메시지가 우리 안에 흡수되고 깊이 정착될 수 있도록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살아 내며, 하나님의 영의 경륜에 따라 다른 이들에게 전수해야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하고 주님의 이름이 영광 받으시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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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1장 17절의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의 헬라어적 의미, 성경사전

   야고보서 1장 17절에는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두 단어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 깊은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그래서 헬라어적인 개념을 통하여 두 단어의 차이점에 대해 정리하였습니다.


좋은 은사(도시스 아가데, δόσις ἀγαθὴ)
온전한 선물(도레마 텔레이온, δώρημα τέλειον)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야고보서 1장 17절)

   야고보서 1장 17절의 헬라어로 된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것으로 묘사된 두 개의 단어가 나타납니다.

   첫 번째 단어는 '주시는 행위'를 의미하고  좋은 것을 나타내는 형용사인 '좋은'이라는 형용사와 함께 언급이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어는 이미 받은 '실제 선물'을 표현하면서, '온전한'이라는 형용사와 함께 언급이 됩니다.

   첫 번째 표현인 '좋은 은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는 것이 선하고 좋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표현인 '온전한 선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들이 완벽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들은 무엇이든 선하고 온전한 것이며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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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왕관을 벗어 던진 사랑

키에르케고르의 글에 왕과 시골 처녀의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이 어느 날  왕궁을 떠나 민정 시찰을 했습니다. 
이곳저곳 동네를 순회하다가 한 시골 아가씨를 만났는데, 그 아가씨가 그렇게 맑고 아름다웠습니다. 
왕은 때 묻지 않은 그 시골 처녀에게 반해버렸습니다. 
왕궁에 돌아와도 그 처녀의 생각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사랑하는 신복에게 고백합니다. 
“아무래도 그 시골 처녀를 왕궁에 데리고 와서 결혼해야 할까봐.” 

그러자 신하는 왕의 말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그 시골 처녀는 신분이 천하기 때문에 왕궁에 들어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또 고민했어요.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내가 가서 그 시골처녀와 결혼해서 데려오면 되지.” 

그랬더니 또 신하가 반대합니다. 
“왕은 지체가 높으신데 의전 상도 그렇고, 경호도 그렇고 
시골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올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안 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왕이 이리저리 고민하다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어요. 
“그러면 좋다! 내가 이렇게 하겠다. 
 내가 왕관을 벗어버리고 평민이 되어서 그 시골 처녀를 찾아가 결혼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지체 높은 왕이 왕관을 던져버리고 평민의 옷을 입고 시골 처녀와의 사랑을 성사시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영광스러운 보좌를 던져버리시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를 찾아오신 사건이 바로 성탄의 이야기입니다. 

베들레헴 말구유 그 냄새나는 곳에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를 찾아오신 사건이 바로 성탄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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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마태복음 1:18-25)

'케이체프 노이드'라는 심리학자는 사람들마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들어가 사는 감옥이 여섯 개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제1감옥은 '자기 도취의 감옥'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공주병 같은 감옥입니다.

제2감옥은 '남의 단점 감옥'입니다.
사람들을 볼 때 좋은 점을 보지 못하고 나쁜 것만 보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들어가 있는 감옥입니다.

제3감옥은 '만사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감옥'이랍니다.

제4감옥
은 '옛날만 생각하는 과거 지향적인 감옥'입니다.

제5감옥은 '남이 가진 것을 무조건 좋게 보고 자기 것을 초라하게 보는 열등감의 감옥'입니다.
항상 남의 떡이 커 보입니다.

제6감옥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감옥'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성탄절입니다. 

만왕의 왕이 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이 땅에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신 목적입니다.

어느 왕이 나라를 여기 저기 돌아보았습니다.
시골에 들어갔을 때 아주 예쁜 처녀를 보았습니다.
왕은 그 처녀를 아내로 맞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대신에게 '저 처녀를 데리고 오라. 결혼하고 싶다'고 하자 그 대신이 한 마디로 거절했습니다.
'폐하! 안 됩니다.
왕의 신분으로 천민과 결혼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내가 시골로 내려  가서 거기서 결혼하고 싶다.'
신하가 또 말했습니다. '폐하! 그것도 안 됩니다. 왕의 신분으로 시골에 내려가서 살면 안 됩니다.'
왕은 너무도 그 여자가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습니다.
왕의 자리를 포기하고  천민의 신분이 되어 시골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처녀를 사랑하며 그 곳에서 살았답니다.
이 이야기는 '키에르케골'이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전하려고 쓴 '왕과 시골 처녀의 사랑'이라는 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에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육신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은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로마가 온 세계를 지배할 때, 장군들이 여기저기 나가 전쟁을 치르며 로마의 영토를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수많은 곳에 전쟁을 치르는 장군들을 지휘하는 일이 황제의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작전지시를 전달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전화가 없던 시대입니다.
사람이 전달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노예가 황제의 말씀을 가지고 가야합니다.
가다보면 적들에게 붙들려 죽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전략은 백일하에 들어나게 됩니다.
이런 중에 황제가 생각하여 낸 교묘한 말씀 전달 방법이 있었습니다.
노예의 머리를 모두 깎았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황제의 말씀을 바늘로 찔러서 쓰고 먹물을 뿌립니다.
그리고 조금 기다립니다.
머리가 어느 정도 자라게 됩니다.
그러면 장군에게 보냅니다.
가다가 적에게 붙잡혀도 비밀이 탄로 날 염려가 없었습니다.
황제가 보낸 노예가 장군에게 오면 장군은 노예의 머리를 다시 깎았습니다.
그리고 황제가 자기에게 주는 작전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준행했습니다.
노예가 장군에게 오면 사람들은 '노예가 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멀리서 노예가 올 때 군사들은 '이제 황제의 말씀이 온다'고 말하며 노예를 영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십니다.
말씀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말씀을 보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을 받으면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치유의 말씀을 받으면 치유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받으면 지혜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받으면 축복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을 받으면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명의 말씀을 받으면 사명의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말씀으로 보여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탄생에서부터 시작하여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이르기까지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본문은 주님의 탄생의 배경입니다.
주님의 탄생의 배경은 사복음서에 다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6절 하반절의 기록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나사렛 동네에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 왔습니다.
천사가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노라!'고 할 때, 마리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때 '무서워 말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말하자 마리아는 '내가 처녀의 몸으로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하자 천사가 대답하기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그러면서 더 확신 있는 말씀 한 마디는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이때 마리아가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 주옵소서'라고 순종하자 그 모습을 보고 천사가 떠나갔습니다.
  과연 천사의 예언대로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는 창3:15절의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아기 예수의 탄생할 것을 예언한 예언의 성취의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그냥 오신 것이 아니고 구약의 예언대로 오신 것입니다.

  ①창3:15절의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②미가서 5:2절에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수많은 곳 가운데 하필이면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을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그 의미는 매우 심장 합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의미는 무엇일가요? 그 지명에서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⑴베들레헴은 죽음과 슬픔의 장소입니다. 지명마다 첫 인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백담사하면 전두환 대통령이 떠오릅니다. 부엉이 바위라는 지명을 들으면 금방 노무현의 자살이 생각납니다. 성경에서 베들레헴의 첫 인상은 죽음과 슬픔입니다. 그 곳에 예수님이 탄생하셔서 복음을 외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극복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이십니다. 부활을 전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죽음과 슬픔의 인상을 가지고 있는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
  ⑵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위에 앉아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었습니다(렘22;2-4) 요한은 예수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계3;7) 거지 소경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부를 때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불렀습니다.
  ⑶작은 것을 크게 들어 쓰심에 상징입니다. 베들레헴은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마2장에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입니다. 베들레헴은 작은 나라에서도 작은 동네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것을 들어 크게 사용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고전1:27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⑷예수님의 사역의 상징이 드러난 지역입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6:3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할/


  ③사7:14절에 '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주님 탄생하시기 800여 년 전에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인간의 타락 후 멀리 떠나셨던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다시 찾아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예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④사9:6-7절에 '그 어깨에 정사'를 메고 오셨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⑴정사: 통치자란 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분입니다.
  ⑵기묘자: 인간의 과학으로는 해석하지 못할 기묘자, 즉 신기하고 오묘하여 인간이 가히 해석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무엇이 기묘한 것일까요? 예수님의 예언이 기묘자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기묘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기묘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기묘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기묘자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이 기묘자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기묘자입니다. /할/
  ⑶모사: 계획하고 설계하시는 분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카운슬러' 즉 인생의 진로를 상단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할/
  ⑷전능하신 하나님: 한나가 고백한 하나님입니다. 삼상2:6-7절에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⑸영존하신 아버지: 여기 아버지란 말은 창조자 혹은 주관자라는 말로, 영원히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되시는 그분만이 영원할 수 있습니다.   
  ⑹평강의 왕: 그 분이 다스리는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요14:27/시72:7).


  ⑤민24:17절에 '한 별로, '홀'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라고 한 예언인데 여기서 '별'이나 '홀'은 다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홀'은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지팡이입니다.


  ⑥사53:4-6절에 보면 인간의 모든 질고를 지신 분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⑦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산 자의 하나님으로 나타난 구체적인 사건

  성경은 두 종류의 인간, 즉 산 자와 죽은 자를 말합니다. 죽은 자는 생리적으로 잉태하여 난자요, 산 자는 성령으로 잉태하여 난자입니다. 죽은 자는 육신의 정욕으로 난자요, 산 자는 믿음으로 난 하늘의 후사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곧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잉태는 산 자의 신비를 깨우는 진리입니다. 롬5:12절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렇습니다. 아담이 타락하므로 죄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잘못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습니다.
  인류는 아담으로부터 육정으로 잉태된 자들의 죽음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산 자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의 후사가 된 아들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늙었고, 사라도 경수가 끊어져 생리적 생산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덤과 같은 사라의 태 속에 성령으로 역사하여 언약의 자식인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이삭은 약속의 자녀요, 성령을 따라 낳은 자식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 안에서만 이 사건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만 가능'합니다. 마19:26절에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본문을 차례대로 상고해 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①예수의 나심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나셨습니다(18).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기독교는 성령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잉태는 마리아에게 임한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두에게 성령으로 잉태되는 사건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현재 성령으로 잉태되는 사건이 없이는 모든 신앙의 죽은 신앙이요, 회칠한 무덤에 불과합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은 하늘의 생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새로운 새 생명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하십니다. 이것은 영접하는 자에게 오는 은총입니다. /믿/ 요1: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할/
  지금도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될 때 믿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어서 끝나 버리면 안 됩니다. 오직 그 말씀을 마음 밭에 받아서 한 알의 밀 알로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심령 속에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와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약속의 말씀은 심령 속에 잉태시킬 수 있는 씨앗입니다. 벧전1: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 자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산 자의 신앙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온 신앙입니다. 이 신앙이 아니면 수십 년 믿어도 미지근합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모두 성령이 잉태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될 때 그 말씀을 레마의 말씀입니다.
  오늘 마리아의 신앙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와서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할 때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레마)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여기 '말씀'은 헬라어의 '레마'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 레마는 '성령으로 잉태된 말씀이요 이 말씀이 임하는 곳에는 반드시 무슨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부르짖는 것도 중요하고 간절히 찾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 잉태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할 때는 성경을 읽고 기도해야 하며 또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죠지 물러'는 '기도의 비결은 전부 성경에 있다'고 했습니다. 죠지 물러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고아들이 길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것을 보자 저들에게 먹이고 입히고 신앙으로 길러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던 중 시편을 읽다가 말씀이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시68:5절에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이 말씀은 그의 가슴을 사랑으로 뜨겁게 하였고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오니 친히 고아원 원장이 되셔서 먹을 것, 입을 것, 책임져 주시고, 이 종은 청지기로 일하면 된다'고 하는 확신으로 고아원을 시작했습니다.
  그 뒤 고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기도로 해결했습니다. 그의 후원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요, 그의 재산은 오직 믿음이었으며 그의 사업의 방법은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시81:10절에 말씀 중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는 말씀을 읽다가 입이 넓게 열림을 체험하게 되었고, 말씀대로 크게 구하였고, 그래서 그의 일생동안 구하는 대로 하나님이 후히 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2천 년 전 마리아의 몸에 잉태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 심령 속에 잉태하기를 원하십니다. /믿/ 지금 문을 두드리십시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열면 내가 그에게고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할/
  ▶성경에 보면 신앙의 위대한 인격자 요셉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정혼'이라는 말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의 결혼은 세 가지 절차가 있습니다.
  ⑴약혼: 약혼은 흔히 나이 어릴 때 합니다. 그것은 양친에 의해서가 아니면 직업적인 중매인에 의해서 성립됩니다. 그런데 흔히 당사자들이 맞선을 보는 일이 없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결혼은 너무도 신성한 것이기에 어린아이들보다는 인생과 세상을 잘 아는 부모들이 알아 판단하여 결정하는 것입니다.
  ⑵정혼: 남녀가 성숙하여 약혼한 사람들의 사이가 원만치 않으면 파기하고 원만하면 계속 약혼자로써 인정하되 정혼을 하는 것입니다. 정혼하면 결혼식을 올리지 않아도 부부와 같이 서로 남편과 아내로 불립니다.
  정혼은 이미 맺은 약혼을 공식화하고 랍비 앞에 가서 서약을 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다 알도록 널리 공포를 합니다. 일단 정혼이 이루어지면 법적인 구속력을 가집니다. 이것은 이혼이 아니고서는 파기할 수가 없습니다.
  정혼 기간은 1년으로서 이 기간 안에 남편이 죽으면 이 여자는 처녀 과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서로 부부관계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바로 정혼한 사이입니다.
  ⑶결혼: 일 년 간의 정혼 기간이 끝나게 되면 결혼이 성립됩니다. 그리고 결혼을 해야만 비로소 부부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 세상에 오실 때 인간의 몸을 구체적으로 입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죄진 아담의 유전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태만 빌려서 잉태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자연법에 의해 남자와 여자에 의해 잉태되어 탄생되었다면 인간의 원죄로 인한 타락성과 부패성을 그대로 받아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의학자 'm.b. 디한'은 '어머니 태 속에서 자라고 있는 태아는 한 방울의 피도 어머니 피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어머니는 태 속에 있는 그 작은 몸을 기르기 위해 그 태아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나 그 태아 속에 생기는 모든 피는 그 태아 자체 속에서 형성된다'고 했습니다. 잉태로부터 갓난아기의 탄생까지 단 한 방울의 피도 어머니로부터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공통적인 결론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피는 성령의 피, 하나님의 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신성을 말해주는 것과 동시에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서 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성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신성, 인성, 양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알지 못한 요셉은 자기와 정혼한 마리아가 아무런 육체적 관계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신한 사실을 알았을 때 요셉에게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요, 분노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 사회적 관습이나 율법에 의하면 처녀가 임신하였다는 것은 돌아 맞아 죽어야 할 중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으므로 저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생각했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이름의 뜻은 '승리자, 이긴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요셉의 인격은 한마디로 본문에서 밝힌 대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네 종류의 의인

1. 독선적 의인
독선적 의인은 자칭 자기가 의롭다고 믿는 것
자기의 생각은 다 완전하고 자기의 생활을 다 깨끗하고 다른 사람을 다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2. 위장 의인
한 마디로 그 마음속에 이리와 같은 심보를 품고 얼굴은 양의 가죽을 쓴 사람을 말합니다.
달콤한 말로 남을 이용하여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위장의인 가짜 의인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사기꾼이라고 합니다.

3. 타인에게 인정 받는 의인
이웃에게 인정받는 의인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믿을만해, 그 사람이라면 틀림없어!
그 분을 보니 예수 믿어야겠구나!'
내가 선전을 안 해도 다른 사람이 감화를 받고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생기는 그런 인정을 받을 만한 의인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이런 의인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인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도 귀하지만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정말 귀합니다.
'아브라함, 요셉, 에녹, 다윗' 같은 신앙의 위인들이 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의인들입니다. 

의로운 사람 요셉(19-20절) 

그의 인격을 배워야 합니다.
  ⑴분한 감정을 억제할 줄 아는 인격자입니다.
  신22:20-21절의 모세의 법에 의하면 약혼한 처녀가 정조를 잃으면 돌로 쳐죽이게 되어있습니다. 법대로 처리하면 마리아는 돌로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를 공적인 재판에 넘기지 않았고 그의 불의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는 불의한 일들이 많습니다. '친구의 부정, 이웃의 부정, 정치인의 부정, 심지어 남편의 부정, 아내의 부정' 우리는 이런 분노를 만날 때 먼저 돌로 치고자 하는 생각부터 솟아나게 됩니다.
  그러나 감정으로만 처리한다고 능사는 아닙니다. 요즘엔 자동차 사고가 빈번한데 차들이 충돌해서 정비공장에 맡기면 정비공장은 그 차를 일일이 분해하고 쭈그러진 곳을 폅니다. 울퉁불퉁한 곳은 산소 불로 빨갛게 달구어 함마로 치는데 만약 불로 달구지 않고 무조건 함마로 치면 오히려 더 망가진답니다.
  마찬가지로 인격이 쭈그러지고 신앙이 쭈그러진 사람도 비슷합니다. 잘못된 사람은 무조건 윽박지르고 억지로 고치게 하면 더욱 삐뚤어질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마음에 뜨거운 사랑의 불을 쏟아 부으면 녹아져 버립니다.
  요셉의 의는 용서와 인정을 겸한 의입니다. 잘못된 자를 꾸짖을 때도 용서와 인정을 겸한 사랑이 절대 필요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용서와 관용하는 삶을 사십시다. 사실 우리 모두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를 '복음에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빚은 무섭습니다. 자고 나면 이자가 막 늘어납니다. 그래서 빚은 빨리 갚아야 합니다. 복음의 빚도 빨리 갚아야 하늘에 상급이 쌓입니다, 이웃 사랑의 가장 큰사랑은 그 영혼을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⑵요셉은 손해를 혼자 당하고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인격자였습니다.
  '가만히 끊고자 하여'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 주는 바다와 같은 넓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약혼한 처녀가 아기를 가졌다는 말을 듣고도 '못들은 채' 손해배상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가만히 끊고자 했다'는 말은 '나 혼자 손해보고 끝내자'는 속셈이었습니다.
  사실 이 손해는 물질적인 손해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손해, 명예 적인 손해까지 미치는 치명적인 손해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이 모든 손해를 혼자 다 당하기로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시 처녀나 과부가 임신했다면 두말없이 돌로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요셉은 내가 물질적, 정신적, 명예 적으로 치명적인 손해를 봤다고 하더라도 남의 생명을 죽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긴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런 인격을 배워야 합니다.
  ⑶요셉은 신중히 생각하며 하나님께 의논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사람들은 큰일, 감격스러운 일, 어떤 불행한 일을 만나면 생각 없이 덤비기가 쉽습니다. 더욱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좌충우돌 감정을 폭발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먼저 조용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내 신앙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가?' 사람에게는 입을 봉하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그리고 또 깊이 생각해봅니다. 신앙은 자기를 뒤돌아보는 것이요, 조용히 하나님 앞에 묵상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이렇게 최선의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민하고 묵상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해서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니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우리도 조용히 묵상하며 주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할/
  만약 하나님께서 이렇게 했다면 어땠을까요? 임신하기 전에 '요셉아, 이제 곧 네 아내가 임신할 텐데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미리 알려주었다면 얼마나 간단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실 때도 양을 준비해 놓았다고 미리 말씀하셨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도 한두 번쯤 돌면 구름이 끼고 다섯 번쯤 돌면 우르르 천둥소리가 나고 그래야 신나게 예수님을 믿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여섯 바퀴를 돌 때까지도 아무 기척이 없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으로 요단강을 일곱 번 들어가야 했을 때, 세 번째 쯤에 고름이 좀 터지고 다음에는 헌데가 벗겨지거나 무슨 몸의 흔적이 있어야 들어간 재미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드릴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당장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시고 믿음의 최선을 다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가장 정확한 때에 일하십니다. /아멘!/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주님의 출생은 보통 방법이 아닌 특별한 방법으로 되어 진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성령으로, 성령에 의해서'잉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늘 외우며,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도 보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기독교의 신비가 있고, 독특성이 있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모두가 다 교주들이 자기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석가모니가 그랬고, 공자나 맹자가 그랬고, 마호메트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만은 타종교와 전혀 다르게 예수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잉태되어'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는 사람이 만들어 낸 인위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직접 지시해 주시고, 하나님이 직접 주도하셨고, 하나님이 직접 내려 주신 종교입니다. /믿/
  또 말씀드립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냥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평범하게 태여 나섰더라면 인류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났다면 그도 역시 아담의 후예요, 가인의 후손이므로 죄인으로 태어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주님이 죄인된 몸이라면 죄인이 죄인인 인류를 구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인 마리아의 몸을 빌려 나셨기에,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태어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본래 하나님과 동등한 본체였지마는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원래 하나님과 똑같은 능력과 하나님과 똑같은 본체와 하나님과 똑같은 전지성과 지혜와 영원성 등 모두를 함께 가지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직접 마리아의 몸을 통해 나셔서 우리 인간의 형체를 입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성육신'(Incarnation) 또는 '도성인신'이라고 합니다.

  ③예수! 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십니다(21).
  사람의 이름에는 그의 업적과 인격이 나타납니다. 4복음서에만도 예수라는 이름이 무려 600번이나 나옵니다. 존경의 의미로든지 멸시와 천대의 의미로든지 비방의 의미로든지 예수님의 이름은 지금까지 세상 사람들의 글과 입과 말과 마음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고 있는 이름입니다.
  ⑴예수님의 이름은 '친히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아주 간단한 이름입니다. 그러나 아주 멀리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⑵구세주란 뜻입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의 히브리말은 여호수아인데 그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 자'입니다. '구원자, 구주'란 뜻이며 '도와주시는 주'란 의미입니다. 특별히 신약적 의미의 구원은 '죄에서 자유, 사망에서의 해방,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분입니다.
  무디와 함께 전도자로 활동했던 '헨리 워드 비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는 어떤 그림도 그린 적이 없다. 그러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품들은 거의가 예수에게서 받은 영감의 산물들이다. 예수는 단 한 줄의 시도 쓴 일이 없다. 그러나 단테, 밀턴 등 세계적인 시인들 역시 예수께 받은 영감으로 걸작을 남겼다. 예수는 단 한 곡의 음악도 작곡한 일이 없다. 그러나 하이든, 헨델, 베토벤, 바하, 멘델스존 같은 거장들의 작품 역시 예수를 찬송하는 작품들'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위대한 시인들과 음악가들과 미술가들과 조각가들과 소설가들은 예수를 알고 믿고 높였습니다.

  ④예수에 오심은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진 사건입니다(22).

  ⑤예수의 오심은 '임마누엘'로 즉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오셨습니다(23).
  '임마누엘'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자이실 뿐 아니라 지금 이 시간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 형통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것이요,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33년 동안 임마누엘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떠날 때에도 말씀하시기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28:20). 어떻게 세상 끝 날까지 임마누엘 하십니까?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은 그의 제자들에게 오순절 때에 그의 제자들에게 임하셨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의 마음 속에 거처를 정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때까지 임마누엘 하십니다.

  ⑥요셉의 순종이 빛이 납니다(24-25).
  ⑴요셉은 즉시 순종하는 인격자였습니다.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신앙은 순종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런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할/
  ⑵요셉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요셉이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온 다음에 해산하기까지 아내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말은 그만큼 정욕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참 경건한 인격자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신앙의 인격입니다.
 
말썽꾸러기 아이가 있었는데, 성탄절에 싼타크로스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고 싶었습니다.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싼타크로스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되요?'
'착한 일을 많이 해야 된단다.'
아들은 엄마 말을 듣고 걱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착한 일을 해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은 싼타크로스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싼타크로스 할아버지!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했거든요'
그리고 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다시 썼습니다.
'싼타크로스 할아버지. 사실은 착한 일을 하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착한 일을 많이 할 테니 선물을 주세요'
그리고 보니 착한 일을 많이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물은 받고 싶었습니다.
아들은 편지 쓰기를 그만 두고 성당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 상을 훔쳐왔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다시 썼습니다.
'싼타크로스. 네 엄마를 인질로 잡아 왔다. 선물과 교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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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에게 크리스마스는 무엇이며 어떻게 축하합니까?

기독교인들에게 크리스마스란 무엇인가?

성경은 크리스마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다양한 기독교 교회에서 뒤따르는 전통적인 축제입니다.
성서에 예수의 탄생에 관한 정보가 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사건이 일어난 정확한 날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전통은 306년부터 337년까지 로마에서 집권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역사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교도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개종을 시작으로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로마의 박해를 종식시켰습니다.

325년에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교회의 지도자들과 함께 최초의 제국 회의를 대표하는 이른바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성경의 신학적 문제와 해석을 논의했습니다.
거기에서 25월 XNUMX일 크리스마스 축하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25월 XNUMX일의 크리스마스는 곧 유럽과 전 세계의 문화 표준이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그때부터 개혁이 도래하여 모든 사람이 성경을 접할 수 있게 되었고 개신교 개혁자들과 가톨릭 교회가 분리될 때까지 모든 기독교인들이 기념했습니다. 

현재 가톨릭 교회와 다른 기독교 회중들은 계속해서 25월 XNUMX일을 예수 탄생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 기독교 교회들은 예수님이 그 날에 태어나셨기 때문에가 아니라 예수님이 계시다는 기쁜 소식을 가족들에게 전하는 시간으로 기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크리스마스에 무엇을 축하합니까?

가톨릭 교회를 포함한 세계의 일부 기독교 교회는 25월 XNUMX일에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축제에서 예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이 교회들에게 메시아가 태어난 날이 아니더라도 그 해에 메시아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을 갖는 것은 유익한 일입니다.

크리스마스에 이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인류의 구원을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념합니다. 일반적으로 연말까지 연장된 크리스마스 시즌은 가족, 친구 및 친척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좋은 소식입니다.

크리스마스 관습과 전통

기독교인들에게 크리스마스가 무엇인지 축하하기 위해 추가된 많은 관습과 전통이 있습니다. 일부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표현되고 다른 일부는 그것을 축하하는 국가에 따라 전통적인 관습입니다.

각 나라마다 25월 XNUMX일에 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식사를 위한 전형적인 요리가 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전통은 요리에 있어 다양한 경향이 있습니다. 또 다른 변형은 닫힌 공간과 열린 공간을 장식하는 스타일입니다. 예를 들어 일부 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날짜를 암시하는 조명 및 기타 물건으로 장식된 자연 또는 인공 나무를 배치합니다.

크리스마스에 가장 널리 퍼진 관습은 선물을 주고받는 것뿐만 아니라 평화, 번영 및 좋은 소원의 메시지를 나누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크리스마스가 무엇인지에 따라 원시 로마 달력에서 물려받은 달력에 따르면 연말과 새해 축하 행사도 있습니다.

이제 건전한 교리에 충실한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가족 및 친구들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삶에서 나타내시는 기쁨을 나누는 특별한 시간으로 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크리스마스를 축하해야 합니까?

이것은 일반적으로 세계의 기독교 교회들 사이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입니다. 가장 건전한 것은 일부 또는 다른 교회가 크리스마스 축하에 대해 생각하는 것 사이에 존중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경전이기 때문에 기독교 교리의 기초라면, 이를 바탕으로 기독교인들에게 크리스마스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는 성경이 말하는 바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탄절을 축하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답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지식에 달려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이교도의 휴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으며 존중되어야 합니다.

일부 기독교인이 크리스마스를 축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크리스마스의 기원과 그의 경전에서 하나님이 그러한 축하를 명령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반면에 다른 축제나 연례행사를 성스럽게 여길 경우를 고려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며 역사의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조사하는 것은 특히 각 그리스도인의 몫입니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진실을 알고 축하할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도록.

이 모든 것은 여러분이 진정으로 주님의 요구를 따르고 싶은지 사람이 정한 대로 따르기를 원하는지에 따라 다음과 같습니다.

에베소서 4:13-14(NBV): 13 이쪽모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연합하여우리가 거기에 도착할 때까지 그리스도와 같이 온전한 인성을 갖추게 하시고. 14 따라서 우리는 누군가가 다른 것을 이야기하거나 교활하게 그들의 거짓말을 사실로 보이게 할 때마다 자신의 신념을 바꾸는 어린이처럼 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크리스마스란 무엇인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는 라틴어 nativitas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는 차례로 인도 유럽어 단어 "nascor"에서 유래했으며, 그 해석이 태어날 예정입니다.
어원학에서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는 원래 아람어, 히브리어 및 그리스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제 탄생, 탄생 또는 탄생으로 해석될 수 있는 그 의미의 관점에서, 이 경우 주 예수의 경우에 성경은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구세주로 보내실 메시야로 선포됩니다.
성경의 신약에서는 선언된 약속이 성취되었으므로 예수의 탄생을 언급하는 여러 구절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6-7 (NIV): 6 그들이 거기 있을 때에 se le 시간이 다 되었다. 7 그래서 맏아들을 낳았다.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둘 곳이 없음이러라.

마태복음 1:18(NBV): 그렇게 된거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했습니다. 그러나 혼인하기 전에 성령께서 그녀를 잉태하게 하시니...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리라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1ㄱ(ESV):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의 마을 유대 지역,에 헤롯이 나라의 왕이었을 때.

이것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언급하는 신약성경의 성경 구절들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에서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있었는지, 그것이 어디에 있었는지, 몇시에 그것이 있었는지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으며 예수가 태어난 정확한 날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언제 태어나셨습니까?

성경은 예수가 태어난 정확한 날을 말하지 않고, 많은 기독교 학자들의 성경 연구에 따르면 출생에 가까운 사건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행 사이에서 읽을 수있는 다른 데이터에 대해 말합니다.
예수의 탄생은 유대인의 오두막 또는 초막절과 거의 확실히 일치했습니다.

Sukkot의 유대인 휴일은 23월이나 XNUMX월 사이에 떨어질 수 있는 히브리 달 Tishrei에 경축됩니다.
초실절 또는 초막절은 엄숙하거나 신성한 절기의 달력에 있는 레위기 XNUMX장에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축하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초막절의 관계

이 축하와 예수의 탄생과 관련된 몇 가지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초막절 축제에서 곡식의 첫 열매를 감사의 제물로 하나님께 바쳤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또 다른 예로 Sukkot는 오두막, 구유 또는 장막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이므로 초막절 또는 초막절이라고도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 축제를 기념하는 동안 녹색 가지로 만든 장막이나 구유에서 살았습니다.
애굽의 종살이를 마치고 광야 순례를 하던 때를 기념하기 위해 이렇게 하였다(출애굽기).

여기에서 우리는 세상을 죄의 종살이에서 건지시는 구주 예수께서 우연히 구유에서 태어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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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실존의 3단계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참 모습은 신 앞에 서는 단독자에 있다고 보고, 그의 실존을 종교적 단계에서 파악하였다.
종교적 실존이야말로 실존의 진정한 모습이며 최후의 도달점으로서, 심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의 서로 대립하는 양자의 관계(궁극적으로는 조화된다)에 의해 나타날 수 있다. ​

1. 심미적 실존(審美的 實存)

향락과 쾌락을 즐기는 삶의 단계로서 인생의 의의는 행복에 있고 이 행복은 쾌락의 최고 정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심미적 단계에서는 외면적이고 일시적 만족에 그치고, 내면적이고 깊은 정신적 만족은 이루지 못한다.
인간은 감성(感性)인 동시에 영성(靈性)이므로 심미적 실존으로서는 이 양자의 절대적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
이런 것을 깨닫는 순간, 심미적 실존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이고 아이러니컬한 태도를 갖게 된다.
이러한 양자 택일의 계기에서 양심의 입장에 서는 윤리적 실종의 단계가 시작된다.

​2. 윤리적 실존(倫理的 實存)

​ 양심의 입장에 서는 엄숙하고 진실되며 건전한 실존으로서 언제나 새로운 결의와 각오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회적이고 시민적 생활태도를 갖는 가장 온당하고 건전한 인생의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성실한 윤리적 실존에 들어가 양심적으로 되려 애쓸수록 자기의 부족과 무력과 유한성을 자각하고 깊은 회한을 느끼거나, 오히려 도저히 미치치 못한 도덕률을 무시하소 억지로 오만한 태도를 취하려 한다.
이리하여 자신이 단독자인 실존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반응에서 절대자를 연상하게 되고 그것에 귀의하고 싶은 새로운 욕망을 갖게 된다.
이에 제3의 실존인 종교적 실존이 우리 앞에 전개된다.

​3. 종교적 실존(宗敎的 實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실존으로서 하나님과 대면하는 단독자로서의 삶이다.
종교적 인간은 자기의 모든 존재를 신에게 돌린다.
그는 신의 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받았으며 신의 도움으로 그 생명을 부지해 나가려는 것이다.
겉으로는 그는 미적 인간들처럼 생을 즐긴다.
윤리적 인간들처럼 책임을 진다.
그러나 종교적 인간들은 내면적으로 모든 것을 신에게 돌리고 그에 의지하여 살아간다.
바로, 신앙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기독인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 키에르케고르는 이처럼 향락적이며 무신론적 실존에서 시작하여 종교적 실존에로 나아가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자이다.

단독자(單獨者, the individual)에 관하여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빌자면, 단독자는 “모든 사람이 그것이며 또 그것일 수 있는 단독자이다.
… 이 이중성이 단독자의 변증법이다.
곧 단독자는 모든 사람 중의 ‘오직 한 사람’을 의미하는 동시에 ‘누구나’를 의미하는 것” 이며, 그 전형은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독자가 된다는 것은 지극히 고통에 찬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사람이 먼저 자기 발로 서야한다. 신앙한다는 것은 윤리적, 종교적으로 단독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단독자가 된다는 것은 무리에 대한 죄를 짓는 것이며, 무리에게 조소와 미움을 받아 죽임당하는 위험에 자기를 내맡기는 일이 될 것이다. (여기에 근거하여 키에르케고르는 단독자로서의 신앙을 갖지 못하는 현실의 기독교를 비판하게 된다.)

​- 단독자는 그가 개별자로서 절대적인 것에 절대적으로 관계한다.

​-----> “절대적인 것에 대하여 절대적인 의무를 지닌다.”

“신앙은 사고가 멈추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

: 키에르케고어가 찾은 윤리적, 보편적인 것을 넘어서는 단독자의 최고의 표현;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 → 그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행해야 했던 것은 윤리적 판단이 아닌, 절대적 결단이었다.

​- “단독자는 그리스도교적으로 결정적인 범주이다”

​: 낱낱의 사람은 그리스도교계의 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단독자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사람이 단독자가 된다는 것은 개별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과제이며, 위에서도 말했듯이 단독자의 전형이 그리스도인이므로, 개별 인간은 하나님과 절대적으로 교류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 한다.

​- 단독자와 그리스도

​: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사람’인 그리스도와의 동시성(同時性, samtidighed)을 이루어야 한다. 이것은 역사적,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와 동시대에 사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의한 실견으로서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사랑으로 죄의 용서를 받고, 그와 함께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그리스도와의 단독대면)

​키에르케고르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

​키에르케고르 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실존’에 관한 문제에서, 그가 심미적, 윤리적 그리고 종교적 실존을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보았다. 이것은 결국 크리스천으로서의 실존의 모습 즉 주체적으로, 죄의식을 통해 그리스도와 동시대적으로 사는 실존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따라서 기독교에 대한 비판점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주관을 배제하여 객관적으로 그 점을 주장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문헌들을 통해 나타난 키에르케고르의 기독교 비판은, 깊은 통찰력과 함께 기독교의 내부에서 ‘기독교인’의 시각에서 관찰한 새로운 관점으로 말미암아, 독창적이며 또 기독교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날카로운 지적들이다.

​키에르케고르의 기독교에 대한 공격의 이면에는 언제나 기독교를 기독교계로 다시금 도입하려는 격렬한 노력이 숨어있다. 이것은 키에르케고르 자신이 기독교와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실제로는 이미 기독교가 아니고, 다만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된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다. 또한, ‘이 기독교 사회는 기독교를 기껏해야 장식품으로 밖에 보지 않았다.’ 는 그의 말을 통해, 우리는 키에르케고르가 당시의 기독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젊을 때 신학을 공부했으며 생애 후반에도 기독교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그 주위에 있는 순전히 이름뿐인 기독교에 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였고, 한편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에 관해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키에르케고르가 기독교에 대해 가장 우려하고 또 비판적으로 생각했던 점은, 형식에만 머물고 신과의 진정한 전인격적인 관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목회자들과, 신도들과, 기독교 자체의 안일한 자세였다. 따라서 기독교계에 대한 그의 비평은 기독교 내부적 비판으로, 기독교라는 칭호만 가진 사람들을 놀랍게 해서 그들의 안락에서 일깨우려는 목적을 언제나 추구한다.

​먼저 신도들은 ‘나’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 뜨거운 열정으로 교회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습관에 젖어 일요일마다 ‘비천’과는 거리가 먼, 고귀하게 단장한 모습으로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다시 일상의 공간으로 돌아온다. 인습과 관습에 질식된 기독교 생활의 지루하고 무의미한 전 부랑성이 그 속에 들어있다. 심장이 마비된 일요 기독교도들은 여하한 종교적 긴장력도 전혀 모른다. 그리스도교는 이교(異敎)가 되어 버렸고, 그리스도교 세계에 있는 것이라고는 그리스도교가 지닌 찬란하고 더할 나위 없는 여러 진리에 관해서, 또 그 부드러운 위로에 관해서, 일요일마다 한없이 되풀이되는 수다뿐이다.

​또 다른 책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신도들이 기독교를 믿게 되는 ‘동기’가 상당 부분 지극히 이기적이고 구복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비판했다. 종교를 가지지 않은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는 자기에게 불이익이 올까 우려해 종교적인 발언을 하는 것조차도 꺼려하던 사람이었다. 이제 그가 결혼을 하고 아버지가 되려 하자, 그는 모범적인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필요적인 이유’에서 종교를 갖게 되고 그 중에서도 기독교를 선택하게 된다. 이 예에서 키에르케고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사람들이 종교를 한갓 자신을 보호하고 이익을 줄만한 ‘장식품’ 정도로만 여긴다는 것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의 본질인, 그리스도의 고뇌와 죽음에 의한 은총을 헛되게 하는 시민적 그리스도교, 현세적 행복의 교회에 대하여 항의하고 싸운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신도들 뿐만 아니라 설교를 담당하고 있는 목회자들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난을 서슴치 않았다. 당시의 교회의 설교는 실존하는 일, 주체적으로 깊어지는 일의 의의를 강조하지 않으며, 그리하여 선포되는 말씀에 대한 주체의 실존적 관계가 문제되지 않는 빈말이요 설교자와 그의 실존 사이에 있는 불일치나 모순을 고려하지 않은 허망한 것이라는 비판이었다. 또한, 현대는, 설교를 듣는 사람이 설교를 단독자로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감각을 상실했다. 설교는 역설적 성격을 잃고 다만 그리스도교, 신앙, 신앙 생활에 대해서 객관적, 제 3자적으로 말하는 사상 강연, 윤리적 권면과 같은 미적인 것으로 전락되어버린 것을 키에르케고르는 한탄했다. 결국 키에르케고르는 당시의 설교가 신앙 생활에 본질적으로 따르는 ‘진리의 고난’을 말하지 않음을, 또 그리스도의 고난과 비천한 종의 모습을 눈물과 함께 감동적으로 말하지만 그를 본받아 몸소 고난받으며 뒤따르는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지 않음을 비판했다. 그는 당시의 설교를, 안이한 세속성, 행복주의, 심미성, 추상성, 상대성 등을 갖춘 ‘비본질적’인 것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지 않고 비본질적이며 형식적인 의식을 습관적으로 행하면서, 무엇인가를 얻으려고만 하는 구복(求福)적 성격을 근원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요구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에만 유언자의 유산을 취득할 권리를 갖는 어떤 사람이, 요구 조건을 행하지도 않고 은근히 그 유산을 취득하는 것만을 원하는 것’을 현 기독교의 모습에 비유시킴으로써, 풍자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간명하게 드러내었다.

​키에르케고르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에 대한 대안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를 비판함과 동시에 허점을 메워 줄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그리스도와 ‘동시대성’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했다. 크리스천으로서 말하는 것과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엄격히 구별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동시대적으로 되어가는 것’이요, 그것은 곧 진리의 실천자로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또한 그는 주체로서 그리스도 앞에 서는 것과, 그리스도와 동시대적으로 되는 것을 동일하게 취급했다.

​또한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에 대한 접근 방법에 있어서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에서의 접근’을 비난했다. 그는 기독교에 있어서 이성은 옆으로 자리를 비켜야 하고, 그 때에 개인은 제자가 되는 조건 즉 신앙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는다고 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성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라, 비이성적이고 인격적이며 영적인 관계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그리스도교가 마땅히 이성적 지식을 배척하고 체험적 신앙을 고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입으로만 성경에 관해 해석하고 논의하며, 머리로만 기독교와 예수님을 인식하는 기독교는, 예수의 삶이 옳다고 느낄 때, 과감히 그와 같이 살 수 있는 ‘진정한 동일시’의 자세로의 전환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키에르케고르의 기독교 비판은, 그의 확신과 신념에 의해 이루어진, 다시 말해 불이익이 올 것을 감수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그리스도교계의 1800년을 통하여서 나의 과업에 필적하는 것이나 그와 유사한 것은 전혀 없다. 나의 과업은 그리스도교계에 있어서 처음 있는 일이다.’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다른 학자들의 비판 및 발제자들의 비판

1. 학자들의 비판

​가. 마르틴 부버(M. Buber)

“인간실존의 기본적인 사실은 인간이 인간과 함께 있다는 것이다.”

​나. 막스 셀라(M. Sheler)

“모든 개인에게 있어서 의식의 본질적인 부분에 이미 사회라는 것이 내면화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은 사회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회는 관련 영역으로서 그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다. 하이데거(Heidegger)

“다른 인간이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고, 또한 다른 인간이 실재로는 지각되지 않을 때도 역시 공존이 존재론적으로는 현존을 결정한다. 독존은 다만 공존의 변태에 불과하다. 독존의 가능성은 공존의 증거이다.”

​라. 킴발 융(Kimball Young)

“인간은 먼저 한 개인이고 다음으로 사회의 하나의 구성분자인 것이 아니고, 인간의 실존과 그의 성품들이 이미 이웃들과의 공동생활과 문화에서 참여를 통해서 이루어진 산물이다.”

⇒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개체성과 단독성만을 생각하여 개인의 사회성을 경시하고 있다.

​마. 블랜샤드

“합리적 윤리학을 거부하는 불분명한 논증할 수 없는 주장이다.”

​바. 해롤드 드월프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실재에 관한 신념체계의 내적 의미를 주장할 수 없다. 결국 비합리주의는 귀류법에 의해 논파당하게 될 자기 파괴적 철학이다.”

​사. 매킨타이어(A.Macintyre)

“기준 없는 선택이 있느냐, 없느냐? 우리가 타당한 신념의 기준에 도달하는 것은 기준 없는 선택에 의한 것인가, 어떤가?”

⇒키에르케고르는 이성의 사용 필연성을 주지하지 못하여 비합리주의의 자기 파괴성을 간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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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란 무엇인가?

크리스마스는 매년 12월 25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기독교 전통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현대에는 종교를 넘어선 문화적 축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크리스마스라는 단어의 어원

‘크리스마스(Christmas)’라는 단어는 ‘Christ’s Mass’에서 유래되었습니다.

  • Chris t: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
  • Mass : 기독교의 미사나 예배를 뜻함.

즉, 크리스마스는 본래 "그리스도를 기리는 미사"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초기 크리스마스 축제의 기원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일을 명확히 알 수 없었기에 12월 25일을 선택했습니다.
이 날짜는 로마의 태양신 축제(Saturnalia)와 관련이 있습니다.

기독교 이전의 겨울 축제

기독교 이전에도 북유럽과 로마에서는 겨울철 동지(Winter Solstice)를 기념하는 다양한 축제가 열렸습니다.

  • 로마의 Saturnalia : 태양신을 기리는 축제.
  • 북유럽의 율(Yule) : 겨울 동지를 기념하며 오늘날의 크리스마스 전통에 영향을 미침.

로마 제국과 크리스마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자리 잡으면서, 크리스마스는 공식적인 기념일로 정착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화 정책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중세 유럽에서의 크리스마스

중세 시대의 크리스마스는 종교적 의식과 축제가 결합된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연극과 음악이 크리스마스 축제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현대적 크리스마스의 형성과 전파

19세기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를 거치며 현대적 크리스마스의 모습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시기에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이 크리스마스의 정신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산타클로스와 크리스마스의 연결

‘산타클로스’는 4세기경 소아시아의 성 니콜라스(St. Nicholas)의 전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의 자선 행위가 현대의 산타클로스 이미지를 형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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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의 유래와 역사 - 예수는 12월에 탄생하셨을까?

성탄절(聖誕節) 또는 크리스마스(Christmas)는 기독교의 최대 축제일로 알려져 있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Christ)와 가톨릭의 예배 의식인 미사(mass)의 합성어이다.
X-MAS라고 쓰는 경우도 있는데, X는 그리스어의 그리스도(크리스토스, XPIΣTOΣ)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노엘(Noël), 이탈리아에서는 나탈레(Natale), 독일에서는 바이나흐텐(Weihnachten)이라고 한다.

크리스마스는 성경에서 유래한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는 정말 12월 25일에 탄생하셨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요셉은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갔는데 그때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가 머물러 있는 동안 마리아는 ··· 첫아들을 낳았다. 여관에는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혔다. 그 근방 들에는 목자들이 밤을 새워가며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

(공동번역 누가복음 2:5~8)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정확한 날짜에 대해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 시기를 가늠할 수는 있다. 예수께서 탄생하신 무렵에, 이스라엘 목자들은 밤을 새워가며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 즉 방목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12월 날씨는 양들을 밤새도록 방목할 정도로 따뜻한 것일까?

이스라엘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를 보여 겨울철엔 우기다. 비가 자주오기 때문에 겨울엔 양을 밖에서 방목하지 않는다. ··· 실제 예수의 생일날은 12월25일보다 3개월 이상 당겨질 수도 있다는 것.

(아시아경제, 2016. 12. 22.)

(이스라엘은) 우기(雨期)에 해당하는 겨울철에는 비가 자주 내리고 기온이 많이 떨어져, 적어도 10월 이전에는 양떼를 우리 안으로 이동시켜 겨울을 나게 한다. 따라서 한겨울인 12월, 그것도 밤중에 밖에서 양을 돌보기는 힘든 일이다.

(조갑제닷컴, 2018. 12. 24.)

지중해와 아라비아 사막 사이에 있는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와 같은 위도상에 있다. 우리나라는 12월 엄동설한에 양을 방목하지 않는다. 대관령양떼목장의 정보에 의하면 양은 5월 중순에서 10월 말까지 방목되고, 겨울에는 축사 안에서 생활한다고 한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영국의 한 신학자는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양들이 방목되었다는 것은 아직 10월이 되지 않은 것”이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은 12월이 아니다”라고 얘기했다.

이처럼 성경의 기록, 전문가와 신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볼 때, 기독교의 최대 축제일로 알려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아닐뿐더러 성경에서 유래한 것도 아니다.

예수 탄생일에 대한 견해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날짜를 찾을 수 없자, 여기 저기서 예수 탄생일로 추정되는 날짜들이 거론되었다. 3세기 초까지는 1월, 3월, 5월, 11월 등 서로 다른 때에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했다.

히폴리투스(Hippolytus)의 견해

예수 탄생을 놓고 다양한 주장들이 난무하던 때, 최초로 12월 25일을 거론한 인물이 있다. 로마 가톨릭 교부였던 히폴리투스(Hippolytus)였다. 그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의 잉태를 알린 날이 3월 25일이었다”며 “이때로부터 아홉 달이 지난 12월 25일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주장은 인정받지 못했다. 성경적인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동방 정교회의 견해

동방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탄생일과 침례 받으신 날을 1월 초로 정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탄생하신 장소인 ‘베들레헴’과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신 ‘요단강’에서 예수님을 기념했다. 베들레헴과 요단강은 꽤 먼 곳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도 1월 6일, 이날만 되면 동방의 교인들은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두 곳을 하루 동안 오가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했다.

하루에, 그것도 서로 다른 장소를 순회하며 예수님을 기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교인들은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불만이 고조되자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던 키릴로스는 로마교회의 교황인 율리우스에게 ‘예수님의 실제 탄생일이 언제인지를 밝혀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율리우스 1세는 성경적 근거가 없어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히폴리투스의 의견대로 ‘12월 25일이 예수님의 탄생일로 본다’는 답장을 보냈다.

왜 하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일까?

12월 25일. 이 날짜는 고대 로마인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날이었다. 12월 25일은 로마 달력에서 1년 중 해가 가장 짧은 동지였고, 태양신 미트라의 탄생일이었다. 미트라는 274년 군인 출신인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에 의해 국가 수호신이 되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그해 12월 25일에 미트라를 섬기는 신전을 세우고 이날을 태양절로 선포했다. 이후 태양신 미트라를 국가의 수호신으로 섬기는 일은 로마 황제들의 전통이 되었다.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 콘스탄티누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321년 3월 7일에 일요일을 국가의 휴일로 정했을 때 이날을 ‘존경스런 태양의 날’이라고 선포한 것도 태양 숭배의 전통을 이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기독교대백과사전 참고).

그렇다면 태양신 미트라의 탄생일인 12월 25일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되었을까. 교회사에 따르면 고대 로마에는 12월에 세 가지 축제가 벌어졌다. 사투르날리아(Saturnalia), 시길라리아(Sigillalia), 브루말리아(Brumalia) 축제다.

사투르날리아는 12월 24일까지 열린 축제로, 로마신화에 나오는 농경신 사투르누스(Saturnus)를 기린 날이다. 이날만 되면 로마시 전체가 들썩이며 축제 기분에 젖었고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거리에 나와 환락에 취했다.

(교회사, 종교학대사전 참고)

시길라리아(Sigillalia)는 12월 하순에 열린 축제로, 이날 아이들에게 인형을 주어 즐기게 하였다.

(교회사 참고)

브루말리아(Brumalia)는 12월 25일로, 로마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태양신 ‘미트라’의 탄생을 축하하는 동지제(冬至祭)일이었다.

(교회사, 조갑제닷컴, 1%를 위한 상식백과 참고)

AD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로마의 국교로 격상된 로마교회는 기독교의 강적이던 미트라교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축제일을 이용해 로마인들을 기독교 안으로 끌어들이는 측면들을 고심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의하면 “당시 미트라 숭배가 매우 광범위하게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교회는 그 풍습을 억압하는 대신 동화시키는 방법을 선택했다”고 기록했다.

마침 성경은 그리스도를 ‘빛’으로 묘사했다. 즉 로마인들이 섬기던 빛의 신인 ‘미트라’와 빛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동일시하기에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로마교회는 대중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교도의 제일을 기회로 삼아, 여기에 기독교적 의미를 덧입혀 동화시켰다. 바로 12월 25일 태양신 탄생일과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동일하게 만들어 축하하는 것이었다.

한국사전연구사 『종교학대사전』에 의하면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는 <우리 주 예수가 탄생한 이 성스러운 날을 “태양의 탄생일”이라고 부르자>라고 하였다”고 기록했다. 제265대 교황인 베네딕토 16세는 그의 저서 『나사렛 예수의 유년기』에서 전 세계가 예수 탄생일로 지키는 크리스마스에 오류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에 앞서 한 가톨릭 신부도 “크리스마스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의 풍습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인정했다.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관습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도, 신약성경에 기원한 것도 아닌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고려해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크리스마스의 전통에 참여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이에 대한 답은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헛된 말과 거짓 철학에 속아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것들은 모두 사람의 생각에서 비롯되었으며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결코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므로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쉬운성경 골로새서 2:8)

당신은 크리스마스가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인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인지 여러 자료들을 통해서 확인했다. 크리스마스의 전통에 참여하느냐 안 하느냐의 선택은 당신의 몫이지만, 이에 따른 결과도 당신이 짊어져야 한다.

<참고자료>

  1. ‘크리스마스는 예수 탄생일 아니라 예수 탄생기념일’, 주간동아, 2018. 12. 24.
  2. ‘[성탄절의 진실]크리스마스는 원래 1월6일이었다고?’, 아시아경제, 2016. 12. 22.
  3. ’12월 25일은 그리스도 예수가 태어난 날이 아니다’, 조갑제닷컴, 2018.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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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의 유래

1. 어디에서 크리스마스의 유래를 찾을 수 있나요?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하더라”(겔 8:14~16)

담무스는 수메르, 메소포타미아, 수리아, 바벨론,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널리 숭배되던 생산(특히 봄 식물을 보호하는)을 주관하는 신이자, 들짐승들로부터 양 떼를 보호하는 신(겔 8:14)이었다. 담무스의 배우자는 아스다롯 여신이다. 제사 시에는 매우 음란한 의식이 수반되었다. 바벨론 사람들은 이 신이 당시의 달력으로 4월(지금의 태양력 6~7월로, 만물이 태양 열기로 시드는 계절)에 지하 세계로 내려갔다가 이듬해 봄에 소생하여 만물을 소성케 한다고 믿어 4월을 ‘담무스월’이라 불렀다. 그리고 담무스가 지하 세계로 내려가는 4월에는 이를 슬퍼하며 애곡하는 의식이 행해졌는데, 유다 말기에는 성전 문 앞에서 이런 우상 숭배가 이루어졌다(겔 8:14). ‘담무스월에 낮의 길이가 가장 긴 날인 하지(현대 태양력으로 6월 21, 22일)가 있으니까 태양이 세력의 절정을 찍고 쇠퇴하기 시작한 것이고, 반대로 12월 동지가 지나면서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태양신이 태어난 날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래서 담무스가 태어난 날이 12월 25일이라고 주장한다.

2. 예수님 탄생 이전에 12월 25일을 축제일로 지킨 일이 있나요?

12월 25일은 그리스도 탄생 이전에 태양신 미트라 숭배에서 비롯되었다. 고대 바벨론, 이집트, 헬라 시대를 거쳐 로마 시대에 이르러 오면서 이 축제가 이어져 왔다. 따라서 담무스와 미트라는 둘 다 태양 숭배와 관련돼 있다.

3. 정복할 수 없는 태양의 날에 관해 들어 보셨나요?

12월 25일에는 '정복할 수 없는 태양의 생일(The Birthday of the unconquerable Sun)'이라는 축제가 시작되었다. 고대 이교도들은 태양이 동지 기간 동안에는 죽어 있다가 동지가 끝나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하늘 높이 떠오르며 그것이 권세를 다시 얻는다고 믿었다. 12월 25일은 또한 정의의 태양이고 빛의 신이며 구원자인 페르샤(지금의 이란)의 신 미트라(Mithras)의 생일로 여겨지기도 했다. 태양신 미트라(Mithras)는 고대 로마 왕국의 유명한 신이었고, 그에 대한 숭배는 기원전 1세기 로마인들에게 강하게 전파되었다.

4. 왜 로마 가톨릭은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정했을까요?

바벨론의 하늘의 여왕의 아들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제가 이방인들 사이에 행해졌던 것을 왜 로마 가톨릭은 그대로 따랐을까요?

4세기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 이후에 로마 제국이 기독교화 되면서 이교도들이 교회에 대거 이입되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아마도 이방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그리고 명목상의 기독교인의 수를 늘리고, 태양신 숭배자들과 예수님의 성육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기독교인들 두 부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태양신을 위한 축제일을 예수 탄생일로 둔갑시켜 이교 문화를 기독교에 도입한 것이다.

요약하면 12월 25일은 그리스도 탄생 이전에 태양신 미트라 숭배에서 비롯되었다. 고대 바벨론, 이집트, 헬라 시대를 거쳐 로마 시대에 이르러 오면서 이 축제가 이어져 왔다. 기원후 4세기에 기독교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로마 가톨릭이 불멸의 태양신 탄생일을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던 것이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탄생하신 것은 온 우주가 경축할 일이지만 이날 12월 25일이 이교의 태양신 축일이란 사실 때문에 초기 기독교인들이나 순수한 신앙의 바통을 이어 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름만 바꾼 이방의 축제에 동참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동참한 분들을 정죄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순수하게 그리스도의 탄생만을 생각하면서 축일에 참가하는 분들도 있기 때문이다. 엘렌 G. 화잇은 우리에게 그날을 무시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날이 매우 유익한 목적에 활용될 수 있다.”(<재림신도의 가정>, 478)고 말한다. 그러면서 부모는 “자녀의 마음과 헌물을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사업과 영혼 구원으로 향하게 하라.”(<재림신도의 가정>, 478)고 촉구한다.

화잇은 이렇게 진술한다.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다. 모두 그날을 소중하게 보내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어른들은 마음과 영혼을 다해 자녀와 함께 건전한 즐거움과 레크리에이션을 즐기며, 예수님에게 예물과 헌물을 드리면서 참된 존경을 나타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각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의 사업은 그대들의 도움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흔히 서로 주고받는 선물들이 주님의 보고에 모이게 하라.”(Ellen G. White, in <Review and Herald>, Dec. 9, 1884)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역사적 내용을 살펴보려고 한다.

5. 기독교의 성탄절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기독교 성탄절의 유래는 태양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태양 탄생 축제 절기를 기독교에 유입한 것에서 시작된다.

매년 12월 22일 동지가 되면 태양은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가 동지가 지나면서 차츰 태양이 지배하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진다. 그래서 태양신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동지는 태양이 새롭게 탄생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으며, 매우 큰 제사 축제일이다. 기독교의 성탄절은 로마의 미트라신과 혼합되면서 시작되었다.

6. 세계적으로 태양신 관련 신화에 의하면, 태양신의 생일은 언제인가요?

세계적으로 태양신 관련 신화에 의하면, 태양신의 생일은 12월 25일이다. 니므롯의 아내 세미라미스가 자기 남편 니므롯(태양신)이 12월 22일 동지날에 죽었다가 12월 25일에 환생했다고 주장했다. 다시 태어난 니므롯의 생일이 12월 25일이 되었다.

로마의 미트라, 이집트의 오시리스, 가나안의 바알, 바벨론의 니므롯, 이런 신들의 생일이 12월 25일이라고 주장한다.

마지막 영웅 책 127쪽(부제 : 처음 영웅 니므롯에서 마지막 영웅 교황까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바벨론 니므롯 BC 2000년 이전 12월 25일 출생

이집트 호루스 BC 3000년 경 12월 25일 출생

인도 크리쉬나 BC 900년 경 12월 25일 출생

페르샤 미트라 BC 1200년 경 12월 25일 출생

프리기아 아티스 BC 1200년 경 12월 25일 출생

그리스 디오니소스 BC 500년 경 12월 25일 출생

이렇게 해서 12월 25일은 태양의 탄생일로 정해져, 태양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가장 크고 화려한 축제일이 된 것이다. 축제 방법은 카니발 형태로서 진탕만탕 먹고 즐기고 노는 것이다. 온갖 부도덕한 범죄들이 공공연하게 저질러 진다. 태양신 예배 자체가 음란한 것인데, 이 축제 기간 동안에는 그 예배와 축제가 절정에 이르게 된다. 로마에서는 거의 한 주일의 축제 기간을 보내게 된다.

7. 태양 탄생일이 성탄절로 바뀌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초기 기독교인들이 미트라(태양신)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지키는 태양 탄생일 축제를 보게 되었다. 그들이 거대한 축제를 즐기면서 선물을 나누고 흥겨워 하는 모습을 보고 그 제도를 교회에도 유입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 탄생일을 정하는 과정에서 그 당시 태양신 섬기는 사람들과 같은 날 축제를 갖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어 태양의 생일인 12월 25일을 그대로 도입하여 예수 탄생일로 정하게 되었다.

명칭은 크리스마스[Christ-Mass, 그리스도 미사] - 태양신 숭배자들이 태양 탄생일에 태양신에게 제사하듯이 기독교인들도 그리스도께 제사한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다.

이러한 제도는 4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5세기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게 되었다.

크리스마스의 양면성은 그리스도 탄생의 신성함과 타락성의 공존이다.

8. 예수님의 탄생 자체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눅 2:10, 개정)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 그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소식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즐거워해야 할 것은 예수님 탄생한 날이 아니라, 그 분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사실이다. 우리가 전해야 할 것은 크리스마스가 아니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기쁨의 소식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즉 굿뉴스, 가스펠, 복음이다.

9.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짜보다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만 하나요?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우리는 날짜보다는 죄인을 위해서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탄생 자체와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과 희생 그리고 우리의 소망이 되시기 위해 죽음을 정복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10.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일을 존중한다면 무엇을 고대해야만 하나요?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0~2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일을 존중한다면 다시 오실 왕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11. 재림교인이 크리스마스를 기념해도 되나요? 크리스마스에 선물교환을 해도 되나요?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가정이나 교회에 하면 죄가 되나요? 엘렌 화잇은 어떻게 답변했을까요?

2019년 12월 교회지남에 나온 기사를 소개한다.

마태복음 1장 연구 – 크리스마스를 기념해야 할까?

엘렌 화잇의 답변을 들으면 놀랄지도 모른다.

엘렌 화잇은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일에 대해 무엇이라고 권면하였을까? 예언의 은사를 받은 그녀가 크리스마스를 꺼렸으리라 예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가톨릭을 넘어 이교주의까지 거슬러 가며 12월 25일이라는 날짜와 갖가지 풍습도 거기서 말미암았다고 그들은 추적한다. 예수의 탄생을 준수할 성경적인 명령이나 사례도 없고 일상적인 크리스마스 기념이 주님을 드러내거나 드높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엘렌 화잇도 이런 염려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녀가 크리스마스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예수 탄생의 “정확한 시간에 대해 성경은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재림신도의 가정>, 477)

“12월 25일에는 어떤 신성함도 없다.”(Ellen G. White, in <Review and Herald>, Dec. 9, 1884)고 인정하면서도 우리에게 그날을 무시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날이 매우 유익한 목적에 활용될 수 있다.”(<재림신도의 가정>, 478)고 말한다. 그러면서 부모는 “자녀의 마음과 헌물을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사업과 영혼 구원으로 향하게 하라.”(<재림신도의 가정>, 478)고 촉구한다.

화잇은 이렇게 진술한다.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다. 모두 그날을 소중하게 보내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어른들은 마음과 영혼을 다해 자녀와 함께 건전한 즐거움과 레크리에이션을 즐기며, 예수님에게 예물과 헌물을 드리면서 참된 존경을 나타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각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의 사업은 그대들의 도움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흔히 서로 주고받는 선물들이 주님의 보고에 모이게 하라.”(Ellen G. White, in <Review and Herald>, Dec. 9, 1884)

선물 전달?

이 말은 서로 선물을 교환하지 말라는 말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형제자매들이여, 서로 선물 교환을 계획할 때는 하늘의 친구이신 분을 생각하고 그분의 요구를 도외시하지 말기 바란다. 우리가 그분을 잊지 않았다는 점을 드러내면 그분께서도 기뻐하시지 않겠는가?”

(<재림신도의 가정>, 480)

화잇은 두 가지 선물 모두에 목적이 있음을 보았다. 하나는 가족과 친구를 생각하고 또 하나는 우리 주님을 드높이는 것이다. “최고의 친구이신 하나님을 잊지만 않는다면 서로 사랑과 기억의 증표를 선사하는 일은 합당하다.”(<재림신도의 가정>, 479)

유용하고 유익한 선물을 주고받아야 한다. “우리의 선물이 받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거나 말씀의 교훈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키워 줄 책들을 추천하고 싶다.”(<재림신도의 가정>, 479) 그 밖에 신중히 고른 다른 선물들도 받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어야 한다.

기념일에 선물을 주는 일에 대한 엘렌 화잇의 견해는 분명 일반적 관행과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예수를 첫째로 둔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향으로 재정을 드리느라 서로 주고받는 선물의 규모가 작아지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하면서 더 강해지고 행복해진다. “형제자매여, 자녀와 함께 심지어 팔에 안긴 아기들과 함께 와서 힘닿는 대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 마음의 노래를 그분께 전하고 그대의 입술로 그분을 찬송하라.”(<재림신도의 가정>, 480)

자녀들을 가르치라

이런 식으로 변화를 주면 자녀들이 실망하지는 않을까? 지혜롭고 경험 많은 어머니인 엘렌 화잇은 이것에 대해 말한다. “아이들과 친척들에게 수시로 주는 불필요한 선물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도 운치 있게 가족 간에 예의를 차리며 행복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이 많다. 그대는 지금껏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녀들의 즐거움에 더 치중했음을 이야기하면서 아이들에게 선물 가격을 줄인 이유를 설명해 주고 교훈을 가르칠 수 있다. 하나님의 사업을 앞당기기보다 자신의 쾌락과 자녀들의 만족을 더 중시했고 세상 관습과 전통에 따라 사람들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선물을 주고 있었다고 아이들에게 말하라. 옛날의 동방 박사들처럼 그대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예물을 바칠 수 있고, 죄악 세상에 보내 주신 선물인 예수님에 대해 그분께 감사의 예물을 드릴 수 있다.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도록 아이들을 독려하면서 그 마음에 사심 없는 생각을 키워 주라.”(<재림신도의 가정>, 481)

크리스마스트리

엘렌 화잇은 크리스마스트리를 금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교회에 트리를 세워 특별하게 장식하라고 권했다. 교회 건물을 얻기 위해 애쓰고 있는 교인들에게 그녀는 이렇게 진술했다. “크리스마스 때 각 교회가 예배당을 위한 크고 작은 헌물을 걸어 둘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운다면 하나님은 매우 기뻐하실 것이다. …금과 은으로 된 자선의 열매를 그 가지들에 걸어 두어 하나님께 크리스마스 선물로 드리라. 그대들의 기부를 기도로 성결하게 하라.”(<재림신도의 가정>, 482)

주님의 사업 중 다른 분야, 가령 불우 이웃 돕기 등에도 같은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 “곤경에 빠진 이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및 신년 행사를 개최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 부양가족이 많은 이들을 돕기 위해 선물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재림신도의 가정>, 482)

‘나무를 잘라 금과 은으로 장식하는 것을 반대하는 예레미야 10장 1~5절에 따르면 크리스마스트리는 금지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3절에서 도끼를 들고 나무를 베러 가는 사람은 ‘기술공’이다. 기술공이란 히브리어로 장인, 조각가를 뜻한다. 이 구절에서는 우상 제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상은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옮겨 주어야만 하는, 사람이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물건이다(5절). 크리스마스트리가 아니라 거짓 신들에 대한 언급인 것이다.

어떻게 하면 크리스마스를 가장 잘 보낼 수 있을까? 우리 주님을 그 중심에 모시고 그분께 최고의 선물을 드리라고 엘렌 화잇은 제안한다. 그렇게 그날을 보내면 복이 올 것이다.

저자: 윌리엄 파갈

교회에서 31년간 신실하게 봉사한 뒤 엘렌 G. 화잇 유산관리소 부소장으로 은퇴했고 현재 시간제로 계속 근무 중이다.

어떻게 하면 크리스마스를 가장 잘 보낼 수 있을까? 우리 주님을 그 중심에 모시고 그분께 최고의 선물을 드리라고 엘렌 화잇은 제안한다.

출처: 재림신도의 가정 제 77장 크리스마스

“제 77 장 크리스마스

축일로서의 크리스마스 ―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는 말이 온 세계 동서남북에 걸쳐서 노래 가락과 같이 울려 퍼지고 있다. 청년들과 장년들과 심지어 노인들에게까지 크리스마스는 일반적으로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는 기간이다. 그러나 그토록 크게 이목을 끌게 하는 크리스마스란 무엇인가?

12월 25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로 여김을 받고 있으며 이 날을 지키는 것이 관습화되고 대중화되었다. 그러나 구주의 실제적인 탄일을 지키고 있다는 확실성은 아직 없다. 역사는 이에 대하여 우리에게 아무런 확실한 보증도 주지 아니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정확한 시간을 제시하여 주지 않는다. 만일 주께서 이 지식을 우리의 구원에 요긴한 것으로 여기셨다면 주께서는 우리가 그 문제에 대해서 모두 알 수 있도록 당신의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 성경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그 문제가 가장 현명한 목적이 있어서 우리에게서 숨겨진바 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명시하여 주는 것이다.

주께서는 당신의 슬기로우심으로 모세를 묻은 장소를 숨기셨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매장하시고 그를 부활시키셔서 하늘로 데려가셨다. 이것을 비밀에 부치신 것은 우상 숭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시었다. 모세가 적극적인 봉사를 하고 있을 때에 그에 대한 백성들의 반역, 인간으로서의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노를 일으키게 한 그들, 이런 일을 겪은 모세가 죽음으로 그들과 이별한 후에는 거의 하나님과 같이 경배를 받았다. 이와 똑같은 목적으로 주께서는 그리스도의 정확한 탄일을 감추시고 세상의 구속자 곧 당신에게 나오는 자들을 모두 완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자로서 받으셔야 하고 신뢰와 의지함을 받아야 하실 자이신 그리스도께 돌아가야 할 영예를 그 날이 받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사람의 경배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 돌려져야 한다. ― RH, 1884. 12. 9.

묵살하여서는 안 되는 날 ― 12월 25일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켜지는 까닭에, 또 자녀들은 이 날이 참으로 즐겁고 기쁜 날이라는 것을 교훈과 모본으로 가르침을 받아 왔기 때문에 이 기간을 아무런 관심도 나타내지 않고 지나쳐 버리기란 매우 어려운 일임을 그대도 알게 될 것이다. 이 날을 매우 유익한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할 수 있다.

청년들은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크리스마스날에 그들 스스로의 허황한 오락과 쾌락의 추구 즉 그들의 영성에 해가 될 오락을 찾도록 그들을 방임해 두어서는 안 된다. 부모는 그들의 자녀들의 마음과 헌물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업과 영혼의 구원에 향하도록 함으로써 이 문제를 조절할 수 있다.

오락에 대한 욕망을 억눌러 버리거나 독단적으로 억제하여 버리는 대신에 부모들 측에서 근실한 노력을 함으로써 그것을 조절하고 지도하여야 한다. 선물을 하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은 순결하고 거룩한 통로에로 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크고 방대한 사업에 쓰이는 재정을 공급함으로써 우리 동료 인간들에게 유익을 끼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아 부정과 희생이 주의 행하심의 특징이었다. 이것이 예수를 사랑한다고 공언하는 우리의 행동의 특징이 되게 하자. 이는 우리의 영생의 소망이 그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 상동.

애정의 표시로써의 선물 교환 ― 휴일의 계절이 선물 교환과 더불어 신속히 다가오고 있는데 노유를 막론하고 애정의 기념품으로 한결같이 무엇을 친구들에게 줄 수 있을까 연구하고 있다. 아무리 작은 선물이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자들에게서 선물을 받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것은 우리를 잊지 않고 있다는 보증이며 우리를 그들에게 조금 더 긴밀하게 묶어 매는 것처럼 보인다. …

피차에 사랑과 기념의 선물을 증정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이신 하나님을 이 점에 있어서 잊어버리지 않는 한 정당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물이 이를 받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거나 혹은 그 말씀의 교훈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증가시켜 줄 책들을 추천하고 싶다. 긴 겨울 밤 동안에 읽을 수 있는 것을 준비하라. ― RH, 1882. 12. 26.

자녀들을 위한 책들을 추천한다 ― 현대 진리에 관한 책과 간행물들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여기에 돈을 안전하게 투자할 수 있는 광대한 분야가 있다. 독서물을 마련해 주어야 할 어린이들의 수효는 매우 많다. ‘햇빛 총서’(The Sunshine Series), ‘황금 곡식 총서’(Golden Grains Series), ‘시’(Poems), ‘안식일에 읽을 책’(Sabbath Readings)* 등은 모두 소중한 책들이며 모든 가정에 소개하여도 안전하다고 생각된다. 흔히 과자와 소용없는 장난감에 쓰인 많은 금액을 이런 책들을 사는 데 모아 둘 수 있을 것이다.

자녀들과 손자들과 조카들에게 가치 있는 선물을 하기 원하는 자들은 그들을 위하여 위에 언급한 아동 서적들을 구하여 주라. 청년들에게는 ‘조셉 베이츠의 생애’가 요긴한 책이며 세 권으로 된 ‘예언의 신’*도 요긴한 책이다. 국내의 모든 가정마다 이 책을 소유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빛을 주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 책이 비치되지 않은 가정이 한 가정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대가 하는 선물이 하늘 가는 길에 빛 줄기를 비치는 그러한 종류의 선물이 되게 하라. ― RH, 1879. 12. 11.

예수를 잊어버리지 말 것 ― 형제 자매들이여, 그대들이 피차에 선물을 교환하고자 계획할 때에 그대들이 하나님의 요구를 도외시하는 일이 없도록 나는 그대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들의 친구를 상기시키고자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인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겠는가? 생명의 임금이신 예수께서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셨다. …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죽음까지 당하셨다.

우리가 모든 축복을 받아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힘입어 되는 일이다. … 하늘의 시여자께서 우리의 감사와 사랑의 선물을 함께 나누어 가지도록 하지 않겠는가? 형제 자매들이여 나아오라, 그대들의 자녀들과 함께 그대들의 팔에 안긴 어린 아기까지도 함께 나와서 그대들의 능력에 따라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라. 그대들의 마음으로 아름다운 가락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대들의 입술로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라. ― RH, 1882. 12. 26.

크리스마스-하나님을 존귀히 하는 때 ― 세상 사람들은 축제일을 부박과 사치와 탐식과 허영으로 보낸다. … 많은 돈이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와 새해에 쓸데없는 방종을 위하여 유해하게 낭비될 것이다. 그러나 이 타락한 시대의 습관과 행습에서 떠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며 다만 식욕의 만족이나 혹은 쓸데없는 장식품이나 옷감을 위하여 재정을 소비하는 대신에 우리는 오는 축일들을 하나님을 존귀히 하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 RH, 1879. 12. 11.

그리스도께서 지상(至上)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크리스마스를 지켜 온 것을 보면 하나님에게서 떠나서 죄 많고 결함 있는 품성 때문에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오시게 할 수밖에 없었던 썩을 인간에게로 영광이 돌려지고 있다.

하늘의 주재이시며 하늘의 왕이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왕위를 제쳐놓으시고 영광의 보좌와 그의 높은 지휘권도 버리시고 도덕력이 약해지고 죄로 부패된 타락한 인류에게 하늘의 도움을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부모들은 이것을 그들의 자녀들에게 명심시키고 선물과 헌물로써 피차에 공경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상호간의 의무를 이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의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면서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 ― RH, 1884. 12. 9.

자녀들의 생각을 새로운 통로에로 향하게 하라 ― 풍치 있게 계획할 수 있으면서도 그 비용은 우리 자녀들과 친척들에게 빈번히 증정하는 불필요한 선물보다 훨씬 덜 들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이같이 함으로써 예의를 차릴 수 있는 동시에 가정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그대는 이제까지 하나님의 영광보다 그들의 쾌락을 더 염려하여 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선물의 가치를 변경시킨 이유를 생각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한 교훈을 가르칠 수 있다. 하나님의 사업을 전진시키는 일보다 그대 자신의 쾌락과 자녀들의 만족을 더 생각하고 세상의 습관과 유전을 따르면서 그것이 요구되지도 않는 자들에게 선물을 하는 일을 더 생각하여 왔다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옛날의 동방박사들처럼 그대는 하나님께 그대의 가장 좋은 예물을 바칠 수 있을 것이며 그대의 허물로 죄많은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선물인 예수께 그대가 감사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자녀들로 하나님의 독생자를 선물로 주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헌물을 바치도록 격려함으로써 그들의 생각을 새롭고 이기심 없는 통로에로 달려가도록 하라. ― RH, 1894. 11. 13.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울 것인가?” ― 만일 크리스마스 날에 각 교회가 예배하는 집을 위하여 크고 작은 헌물들을 걸어 놓은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워 놓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실 것이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워도 좋을까요? 이것은 세상을 닮는 일이 아닐까요?” 라고 묻는 편지들이 우리에게 왔다. 우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만일 그대에게 세상과 같이 되고자 하는 성질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닮게 만들 수 있을 것이나 할 수만 있으면 세상과 닮지 않게 그것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향기 있는 상록수를 골라서 그것을 교회에 세워 두는 것은 무슨 특별한 죄가 아니다. 그러나 죄는 행동하게 한 그 동기와 나무 위에 둔 선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 나무의 크기와 그 가지들의 넓이를 그 경우에 가장 알맞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나뭇가지들에는 그대의 자비심에서 나온 금과 은의 열매가 열리게 하고 이것을 크리스마스의 선물로 그분께 바쳐라. 그대의 기증하는 것을 기도로써 성결하게 하라. ― RH, 1879. 12. 11.

크리스마스와 새해의 축하 의식은 무력한 자들을 위하여 개최할 수 있고 또 개최하여야 한다. 부양가족이 많은 자들을 돕기 위하여 선물을 줄 때에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 ― MS 13, 1896.

헌물이 달린 나무는 죄 되지 아니하다 ― 안식일학교 학생들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상록수를 교회에다 비치해 두는 것이 죄라는 입장을 부모들은 취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상록수는 큰 축복이 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자비심을 베풀 대상을 생각하게 하라. 이런 수집물의 목적이 단지 오락만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이런 기회를 부주의하며 경박한 시간으로 삼고 마음에 신령한 감화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의 마음과 품성에는 이 시기가 매우 유익할 것이다. 도덕을 문란하게 하는 많은 수집물을 깨끗한 대용품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을 나는 만족하게 생각한다. ― RH, 1884. 12. 9.

그 날을 위하여 깨끗한 즐거움을 준비하라 ― 나의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이여, 그대들은 일어나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의무를 시행할 태세를 갖추며 그리하여 이 날이 무미건조하게 되지 않고 하늘의 인을 받을 수 있는 깨끗한 즐거움으로 충만하게 하지 않겠는가? 나는 가난한 계급의 사람들이 이러한 제안에 응할 것을 알고 있다. 아무리 부한 자라할지라도 관심을 나타내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위탁하신 재물의 비례대로 선물과 헌물을 바쳐야 한다. 하나님의 사업을 받들고 그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바쳐질 기증물로 인하여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크리스마스가 하늘의 책에 기록되도록 하자. ― 상동.

”(가정, 476-483)

크리스마스의 유래

1. 어디에서 크리스마스의 유래를 찾을 수 있나요?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하더라”(겔 8:14~16)

담무스는 수메르, 메소포타미아, 수리아, 바벨론,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널리 숭배되던 생산(특히 봄 식물을 보호하는)을 주관하는 신이자, 들짐승들로부터 양 떼를 보호하는 신(겔 8:14)이었다. 담무스의 배우자는 아스다롯 여신이다. 제사 시에는 매우 음란한 의식이 수반되었다. 바벨론 사람들은 이 신이 당시의 달력으로 4월(지금의 태양력 6~7월로, 만물이 태양 열기로 시드는 계절)에 지하 세계로 내려갔다가 이듬해 봄에 소생하여 만물을 소성케 한다고 믿어 4월을 ‘담무스월’이라 불렀다. 그리고 담무스가 지하 세계로 내려가는 4월에는 이를 슬퍼하며 애곡하는 의식이 행해졌는데, 유다 말기에는 성전 문 앞에서 이런 우상 숭배가 이루어졌다(겔 8:14). ‘담무스월에 낮의 길이가 가장 긴 날인 하지(현대 태양력으로 6월 21, 22일)가 있으니까 태양이 세력의 절정을 찍고 쇠퇴하기 시작한 것이고, 반대로 12월 동지가 지나면서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태양신이 태어난 날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래서 담무스가 태어난 날이 12월 25일이라고 주장한다.

2. 예수님 탄생 이전에 12월 25일을 축제일로 지킨 일이 있나요?

12월 25일은 그리스도 탄생 이전에 태양신 미트라 숭배에서 비롯되었다. 고대 바벨론, 이집트, 헬라 시대를 거쳐 로마 시대에 이르러 오면서 이 축제가 이어져 왔다. 따라서 담무스와 미트라는 둘 다 태양 숭배와 관련돼 있다.

3. 정복할 수 없는 태양의 날에 관해 들어 보셨나요?

12월 25일에는 '정복할 수 없는 태양의 생일(The Birthday of the unconquerable Sun)'이라는 축제가 시작되었다. 고대 이교도들은 태양이 동지 기간 동안에는 죽어 있다가 동지가 끝나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하늘 높이 떠오르며 그것이 권세를 다시 얻는다고 믿었다. 12월 25일은 또한 정의의 태양이고 빛의 신이며 구원자인 페르샤(지금의 이란)의 신 미트라(Mithras)의 생일로 여겨지기도 했다. 태양신 미트라(Mithras)는 고대 로마 왕국의 유명한 신이었고, 그에 대한 숭배는 기원전 1세기 로마인들에게 강하게 전파되었다.

4. 왜 로마 가톨릭은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정했을까요?

바벨론의 하늘의 여왕의 아들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제가 이방인들 사이에 행해졌던 것을 왜 로마 가톨릭은 그대로 따랐을까요?

4세기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 이후에 로마 제국이 기독교화 되면서 이교도들이 교회에 대거 이입되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아마도 이방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그리고 명목상의 기독교인의 수를 늘리고, 태양신 숭배자들과 예수님의 성육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기독교인들 두 부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태양신을 위한 축제일을 예수 탄생일로 둔갑시켜 이교 문화를 기독교에 도입한 것이다.

요약하면 12월 25일은 그리스도 탄생 이전에 태양신 미트라 숭배에서 비롯되었다. 고대 바벨론, 이집트, 헬라 시대를 거쳐 로마 시대에 이르러 오면서 이 축제가 이어져 왔다. 기원후 4세기에 기독교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로마 가톨릭이 불멸의 태양신 탄생일을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던 것이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탄생하신 것은 온 우주가 경축할 일이지만 이날 12월 25일이 이교의 태양신 축일이란 사실 때문에 초기 기독교인들이나 순수한 신앙의 바통을 이어 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름만 바꾼 이방의 축제에 동참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동참한 분들을 정죄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순수하게 그리스도의 탄생만을 생각하면서 축일에 참가하는 분들도 있기 때문이다. 엘렌 G. 화잇은 우리에게 그날을 무시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날이 매우 유익한 목적에 활용될 수 있다.”(<재림신도의 가정>, 478)고 말한다. 그러면서 부모는 “자녀의 마음과 헌물을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사업과 영혼 구원으로 향하게 하라.”(<재림신도의 가정>, 478)고 촉구한다.

화잇은 이렇게 진술한다.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다. 모두 그날을 소중하게 보내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어른들은 마음과 영혼을 다해 자녀와 함께 건전한 즐거움과 레크리에이션을 즐기며, 예수님에게 예물과 헌물을 드리면서 참된 존경을 나타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각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의 사업은 그대들의 도움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흔히 서로 주고받는 선물들이 주님의 보고에 모이게 하라.”(Ellen G. White, in <Review and Herald>, Dec. 9, 1884)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역사적 내용을 살펴보려고 한다.

5. 기독교의 성탄절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기독교 성탄절의 유래는 태양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태양 탄생 축제 절기를 기독교에 유입한 것에서 시작된다.

매년 12월 22일 동지가 되면 태양은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가 동지가 지나면서 차츰 태양이 지배하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진다. 그래서 태양신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동지는 태양이 새롭게 탄생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으며, 매우 큰 제사 축제일이다. 기독교의 성탄절은 로마의 미트라신과 혼합되면서 시작되었다.

6. 세계적으로 태양신 관련 신화에 의하면, 태양신의 생일은 언제인가요?

세계적으로 태양신 관련 신화에 의하면, 태양신의 생일은 12월 25일이다. 니므롯의 아내 세미라미스가 자기 남편 니므롯(태양신)이 12월 22일 동지날에 죽었다가 12월 25일에 환생했다고 주장했다. 다시 태어난 니므롯의 생일이 12월 25일이 되었다.

로마의 미트라, 이집트의 오시리스, 가나안의 바알, 바벨론의 니므롯, 이런 신들의 생일이 12월 25일이라고 주장한다.

마지막 영웅 책 127쪽(부제 : 처음 영웅 니므롯에서 마지막 영웅 교황까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바벨론 니므롯 BC 2000년 이전 12월 25일 출생

이집트 호루스 BC 3000년 경 12월 25일 출생

인도 크리쉬나 BC 900년 경 12월 25일 출생

페르샤 미트라 BC 1200년 경 12월 25일 출생

프리기아 아티스 BC 1200년 경 12월 25일 출생

그리스 디오니소스 BC 500년 경 12월 25일 출생

이렇게 해서 12월 25일은 태양의 탄생일로 정해져, 태양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가장 크고 화려한 축제일이 된 것이다. 축제 방법은 카니발 형태로서 진탕만탕 먹고 즐기고 노는 것이다. 온갖 부도덕한 범죄들이 공공연하게 저질러 진다. 태양신 예배 자체가 음란한 것인데, 이 축제 기간 동안에는 그 예배와 축제가 절정에 이르게 된다. 로마에서는 거의 한 주일의 축제 기간을 보내게 된다.

7. 태양 탄생일이 성탄절로 바뀌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초기 기독교인들이 미트라(태양신)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지키는 태양 탄생일 축제를 보게 되었다. 그들이 거대한 축제를 즐기면서 선물을 나누고 흥겨워 하는 모습을 보고 그 제도를 교회에도 유입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 탄생일을 정하는 과정에서 그 당시 태양신 섬기는 사람들과 같은 날 축제를 갖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어 태양의 생일인 12월 25일을 그대로 도입하여 예수 탄생일로 정하게 되었다.

명칭은 크리스마스[Christ-Mass, 그리스도 미사] - 태양신 숭배자들이 태양 탄생일에 태양신에게 제사하듯이 기독교인들도 그리스도께 제사한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다.

이러한 제도는 4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5세기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게 되었다.

크리스마스의 양면성은 그리스도 탄생의 신성함과 타락성의 공존이다.

8. 예수님의 탄생 자체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눅 2:10, 개정)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 그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소식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즐거워해야 할 것은 예수님 탄생한 날이 아니라, 그 분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사실이다. 우리가 전해야 할 것은 크리스마스가 아니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기쁨의 소식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즉 굿뉴스, 가스펠, 복음이다.

9.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짜보다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만 하나요?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우리는 날짜보다는 죄인을 위해서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탄생 자체와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과 희생 그리고 우리의 소망이 되시기 위해 죽음을 정복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10.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일을 존중한다면 무엇을 고대해야만 하나요?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0~2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일을 존중한다면 다시 오실 왕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11. 재림교인이 크리스마스를 기념해도 되나요? 크리스마스에 선물교환을 해도 되나요?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가정이나 교회에 하면 죄가 되나요? 엘렌 화잇은 어떻게 답변했을까요?

2019년 12월 교회지남에 나온 기사를 소개한다.

마태복음 1장 연구 – 크리스마스를 기념해야 할까?

엘렌 화잇의 답변을 들으면 놀랄지도 모른다.

엘렌 화잇은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일에 대해 무엇이라고 권면하였을까? 예언의 은사를 받은 그녀가 크리스마스를 꺼렸으리라 예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가톨릭을 넘어 이교주의까지 거슬러 가며 12월 25일이라는 날짜와 갖가지 풍습도 거기서 말미암았다고 그들은 추적한다. 예수의 탄생을 준수할 성경적인 명령이나 사례도 없고 일상적인 크리스마스 기념이 주님을 드러내거나 드높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엘렌 화잇도 이런 염려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녀가 크리스마스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예수 탄생의 “정확한 시간에 대해 성경은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재림신도의 가정>, 477)

“12월 25일에는 어떤 신성함도 없다.”(Ellen G. White, in <Review and Herald>, Dec. 9, 1884)고 인정하면서도 우리에게 그날을 무시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날이 매우 유익한 목적에 활용될 수 있다.”(<재림신도의 가정>, 478)고 말한다. 그러면서 부모는 “자녀의 마음과 헌물을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사업과 영혼 구원으로 향하게 하라.”(<재림신도의 가정>, 478)고 촉구한다.

화잇은 이렇게 진술한다.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다. 모두 그날을 소중하게 보내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어른들은 마음과 영혼을 다해 자녀와 함께 건전한 즐거움과 레크리에이션을 즐기며, 예수님에게 예물과 헌물을 드리면서 참된 존경을 나타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각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의 사업은 그대들의 도움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흔히 서로 주고받는 선물들이 주님의 보고에 모이게 하라.”(Ellen G. White, in <Review and Herald>, Dec. 9, 1884)

선물 전달?

이 말은 서로 선물을 교환하지 말라는 말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형제자매들이여, 서로 선물 교환을 계획할 때는 하늘의 친구이신 분을 생각하고 그분의 요구를 도외시하지 말기 바란다. 우리가 그분을 잊지 않았다는 점을 드러내면 그분께서도 기뻐하시지 않겠는가?”

(<재림신도의 가정>, 480)

화잇은 두 가지 선물 모두에 목적이 있음을 보았다. 하나는 가족과 친구를 생각하고 또 하나는 우리 주님을 드높이는 것이다. “최고의 친구이신 하나님을 잊지만 않는다면 서로 사랑과 기억의 증표를 선사하는 일은 합당하다.”(<재림신도의 가정>, 479)

유용하고 유익한 선물을 주고받아야 한다. “우리의 선물이 받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거나 말씀의 교훈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키워 줄 책들을 추천하고 싶다.”(<재림신도의 가정>, 479) 그 밖에 신중히 고른 다른 선물들도 받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어야 한다.

기념일에 선물을 주는 일에 대한 엘렌 화잇의 견해는 분명 일반적 관행과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예수를 첫째로 둔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향으로 재정을 드리느라 서로 주고받는 선물의 규모가 작아지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하면서 더 강해지고 행복해진다. “형제자매여, 자녀와 함께 심지어 팔에 안긴 아기들과 함께 와서 힘닿는 대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 마음의 노래를 그분께 전하고 그대의 입술로 그분을 찬송하라.”(<재림신도의 가정>, 480)

자녀들을 가르치라

이런 식으로 변화를 주면 자녀들이 실망하지는 않을까? 지혜롭고 경험 많은 어머니인 엘렌 화잇은 이것에 대해 말한다. “아이들과 친척들에게 수시로 주는 불필요한 선물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도 운치 있게 가족 간에 예의를 차리며 행복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이 많다. 그대는 지금껏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녀들의 즐거움에 더 치중했음을 이야기하면서 아이들에게 선물 가격을 줄인 이유를 설명해 주고 교훈을 가르칠 수 있다. 하나님의 사업을 앞당기기보다 자신의 쾌락과 자녀들의 만족을 더 중시했고 세상 관습과 전통에 따라 사람들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선물을 주고 있었다고 아이들에게 말하라. 옛날의 동방 박사들처럼 그대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예물을 바칠 수 있고, 죄악 세상에 보내 주신 선물인 예수님에 대해 그분께 감사의 예물을 드릴 수 있다.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도록 아이들을 독려하면서 그 마음에 사심 없는 생각을 키워 주라.”(<재림신도의 가정>, 481)

크리스마스트리

엘렌 화잇은 크리스마스트리를 금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교회에 트리를 세워 특별하게 장식하라고 권했다. 교회 건물을 얻기 위해 애쓰고 있는 교인들에게 그녀는 이렇게 진술했다. “크리스마스 때 각 교회가 예배당을 위한 크고 작은 헌물을 걸어 둘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운다면 하나님은 매우 기뻐하실 것이다. …금과 은으로 된 자선의 열매를 그 가지들에 걸어 두어 하나님께 크리스마스 선물로 드리라. 그대들의 기부를 기도로 성결하게 하라.”(<재림신도의 가정>, 482)

주님의 사업 중 다른 분야, 가령 불우 이웃 돕기 등에도 같은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 “곤경에 빠진 이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및 신년 행사를 개최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 부양가족이 많은 이들을 돕기 위해 선물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재림신도의 가정>, 482)

‘나무를 잘라 금과 은으로 장식하는 것을 반대하는 예레미야 10장 1~5절에 따르면 크리스마스트리는 금지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3절에서 도끼를 들고 나무를 베러 가는 사람은 ‘기술공’이다. 기술공이란 히브리어로 장인, 조각가를 뜻한다. 이 구절에서는 우상 제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상은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옮겨 주어야만 하는, 사람이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물건이다(5절). 크리스마스트리가 아니라 거짓 신들에 대한 언급인 것이다.

어떻게 하면 크리스마스를 가장 잘 보낼 수 있을까? 우리 주님을 그 중심에 모시고 그분께 최고의 선물을 드리라고 엘렌 화잇은 제안한다. 그렇게 그날을 보내면 복이 올 것이다.

저자: 윌리엄 파갈

교회에서 31년간 신실하게 봉사한 뒤 엘렌 G. 화잇 유산관리소 부소장으로 은퇴했고 현재 시간제로 계속 근무 중이다.

어떻게 하면 크리스마스를 가장 잘 보낼 수 있을까? 우리 주님을 그 중심에 모시고 그분께 최고의 선물을 드리라고 엘렌 화잇은 제안한다.

출처: 재림신도의 가정 제 77장 크리스마스

“제 77 장 크리스마스

축일로서의 크리스마스 ―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는 말이 온 세계 동서남북에 걸쳐서 노래 가락과 같이 울려 퍼지고 있다. 청년들과 장년들과 심지어 노인들에게까지 크리스마스는 일반적으로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는 기간이다. 그러나 그토록 크게 이목을 끌게 하는 크리스마스란 무엇인가?

12월 25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로 여김을 받고 있으며 이 날을 지키는 것이 관습화되고 대중화되었다. 그러나 구주의 실제적인 탄일을 지키고 있다는 확실성은 아직 없다. 역사는 이에 대하여 우리에게 아무런 확실한 보증도 주지 아니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정확한 시간을 제시하여 주지 않는다. 만일 주께서 이 지식을 우리의 구원에 요긴한 것으로 여기셨다면 주께서는 우리가 그 문제에 대해서 모두 알 수 있도록 당신의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 성경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그 문제가 가장 현명한 목적이 있어서 우리에게서 숨겨진바 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명시하여 주는 것이다.

주께서는 당신의 슬기로우심으로 모세를 묻은 장소를 숨기셨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매장하시고 그를 부활시키셔서 하늘로 데려가셨다. 이것을 비밀에 부치신 것은 우상 숭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시었다. 모세가 적극적인 봉사를 하고 있을 때에 그에 대한 백성들의 반역, 인간으로서의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노를 일으키게 한 그들, 이런 일을 겪은 모세가 죽음으로 그들과 이별한 후에는 거의 하나님과 같이 경배를 받았다. 이와 똑같은 목적으로 주께서는 그리스도의 정확한 탄일을 감추시고 세상의 구속자 곧 당신에게 나오는 자들을 모두 완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자로서 받으셔야 하고 신뢰와 의지함을 받아야 하실 자이신 그리스도께 돌아가야 할 영예를 그 날이 받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사람의 경배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 돌려져야 한다. ― RH, 1884. 12. 9.

묵살하여서는 안 되는 날 ― 12월 25일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켜지는 까닭에, 또 자녀들은 이 날이 참으로 즐겁고 기쁜 날이라는 것을 교훈과 모본으로 가르침을 받아 왔기 때문에 이 기간을 아무런 관심도 나타내지 않고 지나쳐 버리기란 매우 어려운 일임을 그대도 알게 될 것이다. 이 날을 매우 유익한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할 수 있다.

청년들은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크리스마스날에 그들 스스로의 허황한 오락과 쾌락의 추구 즉 그들의 영성에 해가 될 오락을 찾도록 그들을 방임해 두어서는 안 된다. 부모는 그들의 자녀들의 마음과 헌물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업과 영혼의 구원에 향하도록 함으로써 이 문제를 조절할 수 있다.

오락에 대한 욕망을 억눌러 버리거나 독단적으로 억제하여 버리는 대신에 부모들 측에서 근실한 노력을 함으로써 그것을 조절하고 지도하여야 한다. 선물을 하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은 순결하고 거룩한 통로에로 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크고 방대한 사업에 쓰이는 재정을 공급함으로써 우리 동료 인간들에게 유익을 끼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아 부정과 희생이 주의 행하심의 특징이었다. 이것이 예수를 사랑한다고 공언하는 우리의 행동의 특징이 되게 하자. 이는 우리의 영생의 소망이 그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 상동.

애정의 표시로써의 선물 교환 ― 휴일의 계절이 선물 교환과 더불어 신속히 다가오고 있는데 노유를 막론하고 애정의 기념품으로 한결같이 무엇을 친구들에게 줄 수 있을까 연구하고 있다. 아무리 작은 선물이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자들에게서 선물을 받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것은 우리를 잊지 않고 있다는 보증이며 우리를 그들에게 조금 더 긴밀하게 묶어 매는 것처럼 보인다. …

피차에 사랑과 기념의 선물을 증정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이신 하나님을 이 점에 있어서 잊어버리지 않는 한 정당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물이 이를 받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거나 혹은 그 말씀의 교훈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증가시켜 줄 책들을 추천하고 싶다. 긴 겨울 밤 동안에 읽을 수 있는 것을 준비하라. ― RH, 1882. 12. 26.

자녀들을 위한 책들을 추천한다 ― 현대 진리에 관한 책과 간행물들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여기에 돈을 안전하게 투자할 수 있는 광대한 분야가 있다. 독서물을 마련해 주어야 할 어린이들의 수효는 매우 많다. ‘햇빛 총서’(The Sunshine Series), ‘황금 곡식 총서’(Golden Grains Series), ‘시’(Poems), ‘안식일에 읽을 책’(Sabbath Readings)* 등은 모두 소중한 책들이며 모든 가정에 소개하여도 안전하다고 생각된다. 흔히 과자와 소용없는 장난감에 쓰인 많은 금액을 이런 책들을 사는 데 모아 둘 수 있을 것이다.

자녀들과 손자들과 조카들에게 가치 있는 선물을 하기 원하는 자들은 그들을 위하여 위에 언급한 아동 서적들을 구하여 주라. 청년들에게는 ‘조셉 베이츠의 생애’가 요긴한 책이며 세 권으로 된 ‘예언의 신’*도 요긴한 책이다. 국내의 모든 가정마다 이 책을 소유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빛을 주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 책이 비치되지 않은 가정이 한 가정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대가 하는 선물이 하늘 가는 길에 빛 줄기를 비치는 그러한 종류의 선물이 되게 하라. ― RH, 1879. 12. 11.

예수를 잊어버리지 말 것 ― 형제 자매들이여, 그대들이 피차에 선물을 교환하고자 계획할 때에 그대들이 하나님의 요구를 도외시하는 일이 없도록 나는 그대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들의 친구를 상기시키고자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인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겠는가? 생명의 임금이신 예수께서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셨다. …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죽음까지 당하셨다.

우리가 모든 축복을 받아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힘입어 되는 일이다. … 하늘의 시여자께서 우리의 감사와 사랑의 선물을 함께 나누어 가지도록 하지 않겠는가? 형제 자매들이여 나아오라, 그대들의 자녀들과 함께 그대들의 팔에 안긴 어린 아기까지도 함께 나와서 그대들의 능력에 따라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라. 그대들의 마음으로 아름다운 가락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대들의 입술로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라. ― RH, 1882. 12. 26.

크리스마스-하나님을 존귀히 하는 때 ― 세상 사람들은 축제일을 부박과 사치와 탐식과 허영으로 보낸다. … 많은 돈이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와 새해에 쓸데없는 방종을 위하여 유해하게 낭비될 것이다. 그러나 이 타락한 시대의 습관과 행습에서 떠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며 다만 식욕의 만족이나 혹은 쓸데없는 장식품이나 옷감을 위하여 재정을 소비하는 대신에 우리는 오는 축일들을 하나님을 존귀히 하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 RH, 1879. 12. 11.

그리스도께서 지상(至上)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크리스마스를 지켜 온 것을 보면 하나님에게서 떠나서 죄 많고 결함 있는 품성 때문에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오시게 할 수밖에 없었던 썩을 인간에게로 영광이 돌려지고 있다.

하늘의 주재이시며 하늘의 왕이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왕위를 제쳐놓으시고 영광의 보좌와 그의 높은 지휘권도 버리시고 도덕력이 약해지고 죄로 부패된 타락한 인류에게 하늘의 도움을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부모들은 이것을 그들의 자녀들에게 명심시키고 선물과 헌물로써 피차에 공경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상호간의 의무를 이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의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면서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 ― RH, 1884. 12. 9.

자녀들의 생각을 새로운 통로에로 향하게 하라 ― 풍치 있게 계획할 수 있으면서도 그 비용은 우리 자녀들과 친척들에게 빈번히 증정하는 불필요한 선물보다 훨씬 덜 들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이같이 함으로써 예의를 차릴 수 있는 동시에 가정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그대는 이제까지 하나님의 영광보다 그들의 쾌락을 더 염려하여 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선물의 가치를 변경시킨 이유를 생각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한 교훈을 가르칠 수 있다. 하나님의 사업을 전진시키는 일보다 그대 자신의 쾌락과 자녀들의 만족을 더 생각하고 세상의 습관과 유전을 따르면서 그것이 요구되지도 않는 자들에게 선물을 하는 일을 더 생각하여 왔다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옛날의 동방박사들처럼 그대는 하나님께 그대의 가장 좋은 예물을 바칠 수 있을 것이며 그대의 허물로 죄많은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선물인 예수께 그대가 감사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자녀들로 하나님의 독생자를 선물로 주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헌물을 바치도록 격려함으로써 그들의 생각을 새롭고 이기심 없는 통로에로 달려가도록 하라. ― RH, 1894. 11. 13.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울 것인가?” ― 만일 크리스마스 날에 각 교회가 예배하는 집을 위하여 크고 작은 헌물들을 걸어 놓은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워 놓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실 것이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워도 좋을까요? 이것은 세상을 닮는 일이 아닐까요?” 라고 묻는 편지들이 우리에게 왔다. 우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만일 그대에게 세상과 같이 되고자 하는 성질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닮게 만들 수 있을 것이나 할 수만 있으면 세상과 닮지 않게 그것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향기 있는 상록수를 골라서 그것을 교회에 세워 두는 것은 무슨 특별한 죄가 아니다. 그러나 죄는 행동하게 한 그 동기와 나무 위에 둔 선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 나무의 크기와 그 가지들의 넓이를 그 경우에 가장 알맞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나뭇가지들에는 그대의 자비심에서 나온 금과 은의 열매가 열리게 하고 이것을 크리스마스의 선물로 그분께 바쳐라. 그대의 기증하는 것을 기도로써 성결하게 하라. ― RH, 1879. 12. 11.

크리스마스와 새해의 축하 의식은 무력한 자들을 위하여 개최할 수 있고 또 개최하여야 한다. 부양가족이 많은 자들을 돕기 위하여 선물을 줄 때에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 ― MS 13, 1896.

헌물이 달린 나무는 죄 되지 아니하다 ― 안식일학교 학생들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상록수를 교회에다 비치해 두는 것이 죄라는 입장을 부모들은 취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상록수는 큰 축복이 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자비심을 베풀 대상을 생각하게 하라. 이런 수집물의 목적이 단지 오락만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이런 기회를 부주의하며 경박한 시간으로 삼고 마음에 신령한 감화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의 마음과 품성에는 이 시기가 매우 유익할 것이다. 도덕을 문란하게 하는 많은 수집물을 깨끗한 대용품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을 나는 만족하게 생각한다. ― RH, 1884. 12. 9.

그 날을 위하여 깨끗한 즐거움을 준비하라 ― 나의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이여, 그대들은 일어나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의무를 시행할 태세를 갖추며 그리하여 이 날이 무미건조하게 되지 않고 하늘의 인을 받을 수 있는 깨끗한 즐거움으로 충만하게 하지 않겠는가? 나는 가난한 계급의 사람들이 이러한 제안에 응할 것을 알고 있다. 아무리 부한 자라할지라도 관심을 나타내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위탁하신 재물의 비례대로 선물과 헌물을 바쳐야 한다. 하나님의 사업을 받들고 그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바쳐질 기증물로 인하여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크리스마스가 하늘의 책에 기록되도록 하자. ― 상동.


크리스마스에 생각해 보는 종교란 무엇인가?


12월 25일은 크리스마스(Christmas, X-mas)다. 크리스마스란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축일로, 매년 12월 25일로 우리나라에서도 법정 공휴일이다.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성스러운 사람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절이라는 의미이다. 크리스마스(Christmas)란 라틴어 그리스도(Christus)와 모임(massa)의 합성어로,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모임을 의미한다.

■ 예수 그는 누구인가

예수는 2천여년 전, 지금의 이스라엘이라고 불리우는 나사렛이라는 마을의 말구유에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수는 사람의 몸으로 오셨지만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란 예수가 인간 엄마에게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아버지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즉 동정녀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를 낳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인 예수가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것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해서다.

신앙이 아닌 보통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예수는 하나님이지만 사람들의 죄를 사해주기 위해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이다. 기독교는 성부인 야훼(여호와)와 성자인 예수 그리고 하나님의 영(靈)인 성령이 한 몸(삼위일체)이다.

기독(基督)이란 그리스도(Christ) 예수를 일컫는 구세주(救世主)라는 뜻이다. 유태인의 유일신 창조주 예수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목수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 33년간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다 당시 로마법에 따라 인간이 만든 가장 잔인한 십자가의 형을 받고 처형당한다. 그는 죽은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 부활·승천한다.

■ 기독교의 구약과 신약 66권

유대인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는 구약성서는 율법책인 모세5경과 예언서인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 등 39권이다. 신약성서는 복음서 4권과 역사서, 바울서신, 공동서신, 예언서 등 27권이다. 구약성서의 약속, 메시아사상은 신약의 시대 예수를 통해 실현되고 예수는 인간의 법에 따라 십자가에 매달려 죽지만 반드시 다시 돌아와(재림) 악인을 심판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전지전능의 신, 무소불위, 무소부지의 하느님은 이렇게 원수까지 사랑하라 가르치고 재림을 약속하고 승천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다.

'기독교'라는 말은 대한민국에서 개신교(Protestant)만을 일컫는 말로 흔히 사용되나 '기독교'의 실제 의미는 주요 분파인 동방 정교회, 로마 가톨릭교회, 개신교회 등을 포함해 유일신 야훼를 믿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숭배하는 모든 종교단체들을 두루 뜻한다.

기독교의 교파는 개신교만 하더라도 무려 374개나 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동방 가톨릭교회·라틴 교회로 분류되고 개신교는 감리교·그리스도의 교회·루터교·복음주의·성결교·성공회·아르미니우스주의·오순절파·장로교·개혁교회·재림파·재세례파·침례교로, 동방 기독교는 동방 가톨릭교회·동방 정교회·러시아 정교회·오리엔트 정교회·아시리아 동방교회로... 등으로 교파가 분열되어 있다.

■ 우리나라 전체인구의 28%가 기독교인

세계 기독교 인구는 21억명이다. 대한민국의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의 약 28%인 1,340만명이라고 한다. 고든 콘웰대 연구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아프리카 인구의 49.3%, 아시아 9.2% 유럽 78.0%, 라틴아메리카 76.9%, 오세아니아 인구의 73.3%가 기독교인들이다. 기독교인이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은 2억 6천만명이 기독교인이요, 부라질은 1억 9000명, 중국이 3위인 1억 4천만명이나 된다. 종교별 분포를 보면 기독교(33.9%)에 이어 이슬람(23.9%), 불가지론자가 4위(8.9%) 힌두교(14%), 불교(7.1%) 순이다.

권력의 속성 때문일까? 스스로 권력이 된 종교는 부패하고 타락한다. 오늘날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는 권력과 손잡으면서(정교유착) 타락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이다. 기독교인들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는 로마서를 자구적으로 해석해 스스로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기독교의 정신은 사랑이요. 정의다. 기독교는 오늘날 이단의 문제가 아니라 타락의 문제다. 타락한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아전인수격으로 성경을 해석해 혹세무민하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아편이다. 이성을 잃은 종교인들을 보면 1천1백만 명을 학살한 아돌프 히틀러가 생각난다. 목적이 선하다고 과정의 악행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자신이 믿는 신을 위해 인류를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는 종교가 있는 한, 과학이 마무리 발달해도 인류에게 불안과 공포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본의 욕구,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수단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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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개 계명



613계명

유대교에서 지키는 율법으로 유대민족의 출애굽 과정에서 광야를 떠돌아다니던 시절 모세가 기록한 모세오경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세분화 한 것을 말합니다.

613개의 계명은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하라 - 긍정적 계명 248개
둘째는 하지 말라 - 부정적 계명 365개

모세오경에서 세분화 한 계명들

창세기 (1~3계명)

1.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

2. 모든 유대인 남자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창 17:10).

3. 환도뼈의 큰 힘줄을 먹어서는 안 된다(창 32:32).


출애굽기 (4~114계명)

4. "이 달을 한 해의 첫째 달로 삼아서, 한 해를 시작하는 달로 하여라"(출 12:2).

5.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니산 월 14일 오후에 흠이 없는 1년된 수양이나 숫염소를 잡아야 한다 (출 12:5-6).

6. 유월절 양으로 바친 제물은 니산 월 15일 밤에 먹어야 한다(출 12:8).

7. 유월절에 먹는 양고기는 날로 먹거나 삶아 먹어서는 안된다(출 12:9).

8. 유월절 양고기는 다음 날까지 남겨서는 안된다(출 12:10).

9. 유월절에는 누룩을 제거해야 한다(출 12:15).

10. 누룩없는 떡(무교병)을 니산 월 15일에 먹어야 한다(출 12:18).

11. 유월절 기간동안에는 누룩으로 만든 떡을 먹어서는 안된다(출 12:19).

12. 유월절에는 조금이라도 누룩이 섞인 떡을 먹지 말라(출 12:20).

13. 변절한 유대인이나 이교도들은 유월절 양을 먹지 못한다(출 12:43).

14. 임시로 거주하는 타국인이나 고용된 타국인 품꾼도 유월절 양을 먹지 못한다(출 12:43).

15. 유월절 희생 양의 고기는 집 안에서만 먹어야 한다(출 12:46).

16. 양고기의 뼈를 꺾어서는 안된다(출 12:46).

17.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유월절 양을 먹지 못한다(출 12:48-49).

18. 처음 난 것은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출 13:2).

19. 유교병(누룩있는 떡)을 먹어서는 안된다(출 13:3).

20. 유월절 이레동안에는 무교병을 먹고, 유교병이나 누룩을 다 없애야 한다(출 13:7)

21.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유월절 저녁 식사 자리에서 출애굽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출 13:8).

22. 나귀의 첫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해야 한다(출 13:13).

23. 나귀를 양을 통해서 대속하지 않으려거든 그 목을 꺾어야 한다(출 13:13).

24.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의 한계에 관한 규정(출 16:29).

25.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너희 하느님 야훼이다"(출 20:2).

26.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출 20:3).

27. 우상을 만들지 말라(출 20:4).

28.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출 20:5).

29. 우상을 섬기지 말라(출 20:5).

30.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된다(출 20:7).

31. 안식일을 기억하라(출 20:8).

32. 안식일에는 가족이나 종이나 객이라고 할지라도 아무 일도 시켜서는 안된다(출 20:10).

33.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

34. 살인하지 말라(출 20:13).

35. 간음하지 말라(출 20:14).

36. 도적질하지 말라(출 20:15).

37.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3).

38. 탐내지 말라(출 20:17).

39. 너희는 나밖에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은이나 금으로 신들의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출 20:23).

40. 제단을 다듬은 돌로 만들어서는 안된다(출 20:24-25).

41. 제단에 올라가는 층계를 놓아서는 안된다(출 20;26).

42. "히브리 종은 일곱째 되는 해에 자유케 하라"(출 21:2).

43. 종의 보호에 관한 규정.

44. 주인이 아내로 취하려고 산 여종이 마음에 안 들면 다시 그녀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야 한다(출 21:8).

45. 그녀를 다시 파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출 21:8).

46. 여종을 아들에게 주려고 샀으면, 그녀를 딸처럼 대하여 한다(출 21:9).

47. 사람을 때려서 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출 21:12).

48. 부모를 때리거나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출 21:15, 17).

49. 이웃에게 상해를 입힌 경우에 관한 규정(출 21:18-19).

50. 종을 상해하거나 죽였을 경우에 관한 규정(출 21:20-21).

51. 소가 받아서 사람을 상해한 경우에 관한 규정(참조. 출 21:28-32, 35-36).

52. 소가 사람을 받아서 죽인 경우에 관한 규정(출 21:28-32, 35-36).

53. 구덩이에 짐승이 빠진 경우에 관한 규정(출 21:33-34).

54. 도둑에 관한 규정(출 22:1-4).

55. 남의 농작물을 가축이 뜯어먹은 경우에 관한 규정(출 22:5).

56. 불을 내서 이웃의 농작물에 피해를 입힌 경우에 관한 규정(출 22:6).

57. 보관물에 대한 규정(출 22:7 이하).

58.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경우에 관한 규정(출 22:9).

59. 맡긴 집짐승이 다치거나 없어지거나 죽거나 맹수에게 물려 죽은 경우에 관한 규정(출 22:10-11).

60. 빌려 온 짐승이 다치거나 죽었을 경우에 관한 규정(출 22:14-15).

61. 처녀를 꾀어서 건드린 경우에 관한 규정(출 22:16-17).

62. 마술을 부리는 여자는 살려 두어서는 안된다(출 22:18).

63. 함께 살고 있는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출 22:21).

64. 그들을 억압하지 말라(출 22:21).

65. 과부와 고아의 보호에 대한 규정(출 22:22-25).

66. 필요한 사람에게는 돈을 빌려주어야 한다(출 22:25).

67. 돈을 빌려주었으면 빚쟁이처럼 독촉을 하지 말아야 한다(출 22:25).

68.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이자를 받아서는 안된다(출 22:25).

69. 재판장에게 욕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출 22:28).

70. 하느님께 욕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출 22:28).

71. 지도자들에게 욕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출 22:28).

72. 첫 것을 바치는 것에 관한 규정(출 22:29-30).

73. "들에서 맹수에게 찢겨 죽은 짐승의 고기를 먹지 말라"(출 22:31).

74. "근거 없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출 23:1).

75. "거짓 증언을 하여 죄인의 편을 들어서는 안된다"(출 23:1).

76.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된다"(출 23:2).

77. 다수의 사람들이 정의를 굽게 하는 증언을 할 때에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된다(출 23:2).

78. 다수를 따라야 한다(출 23:2).

79.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고 해서 치우쳐서 두둔해서도 안된다"(출 23:3).

80.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에 울려 쓰러진 것을 보거든, 그것을 내버려두지 말고, 반드시 임자가 나귀를 일으켜 세우는 것을 도와주어야 한 다"(출 23:5).

81. "너희는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고 해서, 그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려서는 안된다"(출 23:6).

82. "거짓 고발을 물리쳐라. 죄 없는 사람과 의로운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출 23:7).

83. "너희는 뇌물을 받아서는 안된다"(출 23;8).

84. 안식년에는 농경지에 아무것도 심어서는 안된다.

85.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

86.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불러서도(기억해서도) 안된다(출 23:13).

87. 다른 신들의 이름은 입밖에도 내서도 안된다(출 23:13).

88. "너희는 한 해에 세 차례 나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출 23:14).

89. "너희는 나에게 바치는 희생제물의 피를, 누룩을 넣은 빵과 함께 바쳐서는 안된다(출 23:18a; 34:25a).

90. "절기 때에 나에게 바친 기름을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도 안된다"(출 23:18b; 34:25b).

91. 첫 열매 중 가장 좋은 것으로 바쳐야 한다(출 23:19a; 34:26a).

92. "너희는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서는 안된다"(출 23:19b; 34;26b).

93. 팔레스타인의 7 민족과 언약을 맺어서는 안된다(출 23:23).

94. 팔레스타인의 일곱 민족에 속한 사람들은 히브리인들과 더불어 살아가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출 23:34).

95. "나에게 제물을 바치려거든, 너희는 흙으로 제단을 쌓고, 그 위에다 번제물과 화목제물로 너희의 양과 소를 바쳐라. 너희가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예배하도록,내가 정하여 준 곳이면 어디든지, 내가 가서 너희에게 복을 주겠다"(출 20:24).

96. "채들을 궤의 고리에 그대로 두고, 거기에서 빼내지 말아라"(출 25:15).

97. "그 상은 언약궤 앞에 놓고, 상 위에는 나에게 바치는 거룩한 빵을 항상 놓아 두도록 하여라" (출 25:30).

98. 증거궤 앞에 쳐 놓은 휘장 밖에 올리브 기름으로 등불을 밤에는 늘 켜 두어야 한다(출 27:21).

99. 대제사장의 예복에 대한 규정(출 28:2).

100. 가슴받이가 에봇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출 28:28).

101. 대제사장이 입을 옷은 목을 위하여 파 놓은 구멍의 둘레를 찢어지지 않도록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출 28:32).

102. 제사장만이 속죄의 제물을 먹을 수 있다(출 29:33).

103. 제사장은 아침 저녁으로 분향단 위에 향을 피워야 한다(출 30:7-8).

104. 분향단 위에다가는 향기로운 향을 피우는 일 이외에는 어느 것도 해서는 안된다(출 30:9).

105. 회막 세금에 관한 규정(출 30:13).

106. 제사장은 회막에 들어가기 전에 손발을 반드시 물로 씻어야 한다(출 30:19-20).

107. 성별하는 기름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규정(출 30:25)

108. 성별하는 기름은 아무에게나 부어서는 안된다(출 30:32a).

109. 성별하는 기름을 만드는 방법으로 똑같은 기름을 만들어서 다른 용도로 사용해서는 안된다(출 30:32b).

110. 사사로이 쓰려고 유향을 만드는 방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향품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출 30:37).

111. 우상숭배자들과 언약을 맺어서 그들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들을 먹게 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출 34:15).

112. 안식일에는 밭갈이하는 철이나 추수하는 철에도 일해서는 안된다(출 34:21).

113.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서는 안된다"(출 34:26).

114. 안식일에는 불을 피워서는 안된다(출 35:3).


레위기 (115~361계명)

115. 번제(burnt offering 또는 holocaust)에 대한 규례(레 1장).

116. 곡식제물에 대한 규정(레 2장).

117. 곡식제물에는 누룩이나 꿀이 들어 있어서는 안된다(레 2:11).

118. 모든 곡식제물에는 소금이 빠져서는 안된다(레 2:13a).

119. 어떤 제물에도 소금을 빠뜨려서는 안된다(레 2:13b).

120. 이스라엘 온 회중이 산헤드린의 잘못된 결정으로 죄를 범하게 되면 속죄 제물을 드려야 한다(레 4:13).

121. 개인이 실수를 한 경우에도 속죄제물을 바쳐야 한다(레 4:27-28).

122. 증인이 자기가 본 것이나 알고 있는 것을 사실대로 증언하지 않고 은닉하면 거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레 5:1).

123. 속죄제물을 바쳐야 하는 경우

124. 새를 속죄제물로 가져오면 그것은 다른 짐승을 제물로 가져온 경우와는 달리,제물을 바친 사람이 잡지 않고 제사장이 직접 그것의 목을 비틀어서 잡아야 하는데, 이 때 목이 떨어지게 해서는 안된다(레 5:8).

125. 가난하여 속죄제물로 짐승이나 새를 바칠 수 없는 경우에는 밀가루를 바칠 수 있으나,이 때 제사장은 거기에 기름을 섞어서는 안된다(레 5:11).

126. 또한 거기에 향을 얹어서도 안된다(레 5:11).

127. 제물을 바치다가 실수하여 죄를 범하면 바친 것의 20 %에 해당하는 벌금을 지불해야 한다(레 5:15-16).

128. 부정적인 계명(금지 계명)을 실수로 어긴 경우에도 속건제물을 바쳐야 한다(레 5:17-18).

129. 다른 사람의 물건을 불의하게 취한 경우에 관한 규정(레 6:1-5).

130. 남의 물건을 불의한 방법으로 취한 자는 모두 물어내야 한다(레 6:5).

131. 제단의 재에 대한 규례(레 6:10-11)

132. 제단의 불은 항상 피워져 있어야 한다(레 6:12).

133. 제단의 불을 꺼뜨려서는 안된다(레 6:12).

134. 곡식제물을 드리고 난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어야 한다(레 6:16).

135. 제사장은 곡식제물에 누룩을 넣고 구워서는 안된다(레 6:17).

136. 대제사장도 다른 사람들처럼 곡식제물로 밀가루를 드려야 하는데, 그는 매일마다 그래야 했으며, 그것으로 아침 저녁 빵을 구워 바쳐야 한다(레 6:20 이하).

137. 제사장이 드리는 곡식제물은 아무도 먹지 못한다. 그것은 다 태워 버려야 한다(레 6:23).

138. 속죄제물은 번제물을 드리는 장소에서 드려야 한다(레 6:25 이하).

139. 성소에서 속죄해 주려고 제물의 피를 회막 안으로 가져왔을 때에는, 어떤 속죄제물도 먹어서는 안된다(레 6:30).

140. 속건제물을 드릴 때의 규례(레 7:1 이하).

141. 감사의 뜻으로 화목제물을 바치는 경우에는 빵을 곁들여 바쳐야 한다(레 7:11-12).

142. 화목제물로 드린 것 가운데 감사제물로 바친 고기는 그 날로 먹어야 하며 다음 날까지 남겨서는 안된다(레 7:15).

143. 화목제물로 드린 것 가운데 서원제물이나 자원제물로 바친 고기는 이틀째 되는 날까지 다 먹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까지 그 희생제물이 남아 있으면, 불살라야 한다(레 7:17).

144. 어떤 종류의 것이든(감사제물, 서원제물, 자원제물) 화목제물로 드린 고기 중 사흘째 되는 날까지 남은 것을 먹어서는 안된다(레 7:18).

145. 어떤 종류의 화목제물이든 불결한 것에 닿은 고기는 먹지 말아야 한다(레 7:19a).

146. 그리고 그것은 불에 태워야 한다(레 7:19b).

147. 동물의 기름기는 먹지 못한다(레 7:23).

148. 어떤 피든지 먹어서는 안된다(레 7:26).

149. 제사장은 머리를 풀어서는 안된다(레 10:6),

150. 그는 옷을 찢어 애도를 해서도 안된다(레 10:6).

151. 제사장은 성전(성소)에서 일하는 동안은 밖으로 나가서는 안된다(레 10:7).

152. 제사장은 성전(성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셔서는 안 된다(레 10:9, 11).

153. 땅에서 사는 짐승들 가운데 새김질을 하면서 동시에 굽이 갈라진 것만 먹을 수 있다(레11:2-4, 7).

154. 낙타, 오소리, 토끼, 돼지 등과 같이 새김질을 하지 않거나 굽이 갈라지지 않은 짐승은 먹지 못한다(레 11:4).

155. 물 속에서 사는 동물 중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먹을 수 있다(레 11:9,12).

156. 그러나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먹지 말아야 한다(레 11:12).

157. 새 가운데서 먹지 말아야 할 것(레 11:13).

158. 곤충 가운데서 네 발로 걷는 날개 달린 것들은 먹지 못한다(레 11:21).

159. 길짐승에 대한 규정(레 11:29 이하).

160. 요리가 된 젖은 음식에 죽은 길짐승이 닿으면 그것은 먹어서는 안된다(레11:34).

161. 먹을 수 있는 짐승이라도, 그 주검을 만진 자는 저녁 때까지 부정하다(레11:39).

162. 땅에 기어다니는 길짐승은 먹지 말아야 한다(레 11:41-42).

163. 과일이나 채소에 붙어사는 벌레는 먹지 알아야 한다(레 11:41-42).

164. 물 속에 기어다니는 것들도 먹어서는 안된다(레 11:46).

165. 흙에서 생긴 벌레는 먹지 말아야 한다(레 11:44).

166. 산모의 정결 예식에 관한 규정(레 12:1 이하).

167. 제의적으로 부정하게 된 사람은 거룩한 음식을 먹을 수 없다(레 2:6).

168. 아이를 낳은 여인이 정결 예식을 위해 바쳐야 할 제물(레 12:6-8).

169. 제사장이 나병의 여부를 확인하여야 한다(레 13:2).

170. 백선이 머리나 턱에 생긴 경우, 백선이 난 자리만 빼고 털을 민 다음에, 백선이 생긴 그 환자를 이레 동안 격리시켜야 한다(레 13:33).

171.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입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야 하며,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야 한다(레 13:45).

172. 천이나 가죽 제품에 곰팡이가 생긴 경우에 관한 규정(레 13:47-59).

173. 악성 피부병이 나은 경우에도 제사장이 확인을 해야 한다(레 14:2, 3).

174. 악성 피부병이 나은 사람은 이레 후에 모든 털을 다 밀어야 한다(레 14:9).

175. 또한 그는 옷을 빨고 목욕을 해야 한다(레 14:9).

176. 악성 피부병을 고침 받은 사람이 바쳐야 할 제물(레 14:10 이하).

177. 건물에 생기는 악성 곰팡이에 관한 규정(레 14:34 이하).

178. 성기에서 고름이 계속 흐르는 남자는 부정한 사람이며, 그와 접촉하는 모든 물건이나 사람도 부정하게 된다(레 15:1-12).

179. 고름이 멎은 경우에는 정결례를 행해야 한다(레 15:13-15).

180. 남자가 실수로 정액을 흘린 경우에 관한 규정(레 15:16-18).

181. 월경에 관한 규정(레 15:19 이하).

182. 여자가 계속 피를 흘리면 부정하게 여겨야 하며, 그녀와 접촉하는 사람도 부정하게 된다(레 15:2 이하).

183. 그녀의 병이 다 난 다음에는 정결례를 행해야 한다(레 15:25 이하).

184. 보통 때는 지성소에 들어가서는 안된다(레 16:2).

185. 속죄일에 드리는 제사에 관한 규정(레 16 장).

186. 희생제물은 성전(성소)에서만 드려야 한다(레 17:3-4).

187. 짐승의 피는 땅에 묻어야 한다(레 17:13).

188. 가까운 살붙이의 몸을 범하면 안된다(레 18:6).

189. 아버지의 몸을 범하면 안된다(레 18:7).

190. 어머니의 몸을 범하면 안된다(레 18:7).

191. 아버지가 데리고 사는 여자의 몸을 범하면 안된다(레 18:8).

192. 누이의 몸을 범하면 안된다. 누이가 아버지의 딸이든지 어머니의 딸이든지 그녀를 범하면 안 된다(레 18:9).

193. 손녀나 외손녀의 몸을 범하면 안된다(레 18;10).

194. 아버지가 낳은 딸의 몸을 범하면 안된다(레 18:10).

195. 딸의 몸을 범하면 안된다(참조. 레 18:10).

196. 아버지가 데리고 사는 여자가 낳은 딸을 범해서는 안된다. 즉 배다른 누이를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1).

197. 고모의 몸을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2).

198. 이모의 몸을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3).

199. 숙모의 몸을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4).

200. 숙모의 몸을 범하는 것은 삼촌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레 18:14).

201. 며느리의 몸을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5).

202. 형수나 제수의 몸을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6).

203. 데리고 사는 여자의 딸의 몸을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7).

204. 데리고 사는 여자의 손녀의 몸을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7).

205. 데리고 사는 여자의 외손녀의 몸을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7).

206. 아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내의 형제들을 첩으로 데려다가 살아서는 안된다(레 18:18).

207. 여자가 월경을 하는 경우에는 그녀와 동침해서는 안된다(레 18:19).

208. 자녀를 몰렉에게 바쳐서는 안된다(레 18:21).

209. 동성 연애 금지에 관한 규정(레 18:22)

210. 남자들은 짐승과 교접해서는 안된다(레 18:23).

211. 여자들도 짐승과 교접해서는 안된다(레 18:23).

212. 부모를 두려워하라(레 19:3).

213. 우상들을 의지하지 말라(레 19:4).

214. 쇠를 녹여 신상을 만들어서도 안된다(레 19:4).

215. 제물로 바친 것들은 그 날로 다 먹어야 한다(레 19:6).

216. 농작물이나 과수를 거두어들일 때 조금은 남겨 두어야 하며(레 19:9-10),

217. 그것들을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된다(레 19:9-10).

218. 농작물을 거두어들일 때 조금은 남겨 두어야 하며(레 19:9),

219. 그것을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된다(레 19:9).

220. 포도원의 포도를 조금은 남겨 두어야 하며(레 19:10),

221. 그것을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된다(레 19:10).

222.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는 그대로 남겨 두어야 하며(레 19:10),

223. 그것을 다 주워서는 안된다(레 19:10).

224. 훔치지 말라(레 19:11).

225. 사기하지 말라(레 19:11).

226. 속이지 말라(레 19:11).

227.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한다(레 19:12).

228. 이웃을 억누르지 말아야 한다(레 19:13).

229. 이웃의 것을 빼앗지 말아야 한다(레 19:13).

230. 품삯은 그날로 지불해야 한다(레 19:13).

231.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된다"(레 19:14).

232. "눈이 먼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는 안된다"(레 19:14).

233. 재판관은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해서는 안된다(레 19:15).

234. 누구도 편들어서는 안된다(레 19:15).

235. 그는 반드시 공정한 재판만을 해야 한다(레 19:15).

236. "남을 헐뜯는 말을 하고 다녀서는 안된다"(레 19:16a).

237.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레 19:16b).

238. "미워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된다"(레 19:17a).

239. 이웃이 잘못을 하면, 반드시 그를 타일러야 한다(레 19:17b).

240. 그리고 이렇게 하는데 있어서 그를 부끄럽게 해서는 안된다(참조. 레19:17a).

241. 이스라엘 백성끼리 원수를 갚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며(레 19:18a),

242. 앙심을 품어서는 안된다(레 19:18a).

243.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레 19:18b).

244. 가축 가운데서 다른 종류끼리 교미시켜서는 안된다(레 19:19).

245. 밭에다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씨앗을 함께 뿌려서는 안된다(레 19:19).

246. "할례 받지 못한" 과일에 관한 규정(레 19:23)

247. "거룩한 과일"에 관한 규정(레 19:24)

248. 피째로 먹어서는 안된다(레 19:26).

249. 점을 쳐서도 안 되며(레 19:26),

250. 마법을 써서도 안된다(레 19:26).

251. 관자놀이의 머리를 둥글게 깎아서는 안된다(레 19:27).

252. 구레나룻을 밀어서는 안된다(레 19:27).

253. 몸에 문신을 새겨서는 안된다(레 19:28).

254. 성소를 속되게 하지 말라(레 19:30).

255. 혼백을 불러내는 사람에게 가지 말아야 한다(레 19:31).

256. 점을 치는 사람에게 가서도 안된다(레 19:31; 20:6).

257. 어른을 공경하라(레 19:32).

258. 길이나 무게나 양을 잴 때에 바른 기구를 사용하여야 한다(레 19:35).

259. 그리고 정확하게 재야 한다(레 19:36).

260.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레 20:9).

261. 남자가 그의 아내와 장모를 함께 취하면 그들은 모두 화형에 처해야 한다(레20:14).

262. 이교도들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레 20:23).

263. 제사장이 주검을 만져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된다.

264. 그러나 가족의 주검은 만질 수 있다(제 264 계명; 레 21:1-4).

265. 주검을 만져 부정하게 된 제사장은 제의적인 목욕을 한 뒤 그날 저녁에는 제사 음식을 먹을 수 있다(레 21:6; 22:7).

266. 제사장은 창녀와 결혼해서는 안된다(레 21:14-15).

267. 제사장은 부정한 여자와 결혼해서도 안된다(레 21:7).

268. 제사장은 이혼한 여자와 결혼해서도 안된다(레 21:7).

269. 제사장을 거룩하게 여겨야 한다(레 21:8).

270. 대제사장은 어떤 주검에도 가까이 가서는 안된다(레 21:11).

271. 대제사장은 가족의 주검에도 가까이 가서는 안된다(레 21:11).

272 대제사장은 처녀와만 결혼해야 한다(레 21:13).

273. 대제사장은 과부와 결혼해서는 안된다(레 21:14).

274. 대제사장은 이혼한 여자와 결혼해서도 안된다(레 21:14).

275. 아론의 후손 가운데 몸에(영구적인)흠이 있는 사람은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할 수 없다(레 21:17).

276. 일시적인 흠이 있는 제사장도 그것이 날 때까지는 제사 드리는 일을 할 수가 없다(참조. 레 21:17).

277. 또한 이러한 사람들은 휘장 안으로 들어가거나 제단에 가까이 나아갈 수 없다(레 21:23).

278. 부정하게 된 제사장은 제사를 드릴 수 없다(참조. 레 22:2).

279. 그는 성물(聖物)을 먹을 수 없다(레 22:4).

280. 제사장이 아닌 여느 사람들은 성물을 먹을 수 없다(레 22:10).

281. 제사장이 데리고 있는 나그네나 품꾼도 성물을 먹을 수가 없다(레 22:10).

282. 할례 받지 않은 제사장은 성물을 먹을 수 없다(참조. 레 22:10 이하).

283. 제사장의 딸이더라도 여느 남자에게로 시집 간 사람은 성물을 먹을 수 없다(레22:12).

284. "테벨"(tevel)은 먹지 말아야 한다(참조. 레 22:16).

285. 흠있는 짐승을 거룩하게 해서는 안된다(레 22:19).

286. 모든 제물은 흠이 없는 것이라야 한다(레 22:20-21).

287. 제물에 흠이 생기게 해서는 안된다(레 22:21).

288. 흠이 있는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려서는 안된다(레 22:22).

289. 흠이 있는 짐승을 잡아서는 안된다(레 22:22).

290. 흠이 있는 짐승의 내장을 불살라서는 안된다(레 22:22).

291. 거세(去勢)해서는 안된다(레 22:24).

292. 이방인이라도 흠이 없는 짐승을 바쳐야 한다(레 22:25).

293. 제물로 바치는 짐승은 난지 여드레가 지난 것이라야 된다(레 22:27).

294. 제물로 짐승을 바칠 때,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 잡아서는 안된다(레 22:28).

295. 하느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는 안된다(레 22:32).

296.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해야 한다(레 22:32).

297. 유월절 첫날은 쉬어야 한다(레 23:7).

298. 유월절 첫 날은 생업을 위하여 일해서는 안된다(레 23:7).

299. 유월절 기간 동안에는 계속 번제를 드려야 한다(레 23:8).

300. 유월절 기간중 이레째 되는 날에는 다시 쉬어야 한다(레 23:8).

301. 그날은 생업을 위해서 일해서는 안된다(레 23:8).

302. 유월절 둘째 날에는 첫 곡식단을 제사장에게 가져가야 하고 제사장은 그것을 흔들어 바쳐야 한다(레 23:10).

303. 첫 곡식 단을 바치기 전에는 거두어들인 곡식을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된다(레23:14).

304. 첫 곡식 단을 바치기 전에는 볶은 곡식도 먹어서는 안된다(레 23:14).

305. 또한 햇곡식도 먹어서는 안된다(레 23:14).

306. 곡식단을 흔들어 바친 그 날부터 49일이 되는 때까지 매일매일 날을 세어야 한다(레 23:15).

307. 오순절에는 햇곡식으로 만든 빵 두개를 바쳐야 한다(레 23:17).

308. 오순절에는 쉬어야 한다(레 23:21).

309. 오순절에는 생업을 위해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레 23:21).

310. 새해 첫날(일곱째달 초하루)은 쉬어야 한다(레 23:24).

311. 새해 첫 날에는 일해서는 안된다(레 23:25).

312. 새해 첫날은 살라 바치는 제물을 드려야 한다(레 23:25).

313. 속죄일에는 금식해야 한다(레 23:27).

314. 속죄일에는 살라 바치는 제물을 드려야 한다(레 23:27).

315. 속죄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레 23:28).

316. 속죄일에는 어떤 것도 먹거나 마셔서는 안된다(레 23:29).

317. 속죄일에는 쉬어야 한다(레 23:32).

318. 초막절 첫날에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레 23:35).

319. 초막절에는 어떤 종류의 일을 해서도 안된다(레 23:35).

320. 초막절 절기 동안 매일 살라 바치는 제물을 드려야 한다(레 23:36).

321. 초막절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야 한다(레 23:36).

322. 초막절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살라 바치는 제물을 드려야 한다(레 23:36).

323. 초막절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생업을 위해 일해서는 안된다(레 23:37).

324. 초막절 첫날에는 좋은 나무에서 난 열매와 종려나무 가지, 무성한 나뭇가지, 갯버들을 가져와야 한다(레 23:40).

325. 초막절 기간에는 이레 동안 초막에서 지내야 한다(레 23:42).

326. 안식일에는 땅을 놀려야 한다(레 25:4).

327. 안식년에는 포도원을 가꾸어서도 안된다(레 25:4).

328. 안식년에 저절로 열린 곡식들도 거두어 드려서는 안된다(레 25:5).

329. 안식년에는 저절로 열린 과실들도 거두어 드려서는 안된다(레 25:5).

330. 안식년을 일곱번 세어야 한다(레 25:8).

331. 속죄일에는 뿔나팔을 불어야 한다(레 25:9).

332. 50년째 되는 해(희년)를 거룩히 여기라(레 25:10).

333. 희년에는 심거나 거두어서는 안된다(레 25:11).

334. 희년에는 저절로 열린 포도를 거두어들여서도 안된다(레 25:11).

335. 희년에는 저절로 맺힌 열매를 필요 이상으로 거두어들여서는 안된다.

336. 무엇을 사거나 팔 때에 부당한 이익을 남겨서는 안된다(레 25:14).

337. 속이지 말라(레 25:14).

338. 말을 함부로 하여 이웃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된다(레 25:17).

339.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레 25:23).

340. 희년에는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로 돌려주어야 한다(레 25:24).

341. 성곽 안에 있는 집을 판 경우에는 일년 안에는 언제든지 다시 살 수 있지만, 일년이 지나면 그렇게 할 수 없다. 희년이 되어도 집은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레25:29, 30).

342. 레위 사람의 땅과 집에 관한 규정(레 25:32-34).

343. 가난한 사람에게서 이자를 취해서는 안된다(레 25:36, 37).

344. 가난하여 종이 된 동족(同族)에 대해서는 노예 부리듯 해서는 안된다(레25:39).

345. 동족인 종은 팔 수 없다(레 25:42).

346. 동족인 종을 심하게 부려서는 안된다(레 25:43).

347. 종이 가나안 사람인 경우에는 그를 영원히 부릴 수 있다(레 25:46).

348. 이교도들에게 동족이 종으로 팔려 갔으면, 값을 치르고 그를 다시 되돌려와야 한다(레 25:53).

349. 조각한 석상에게 절을 해서는 안된다(레 26:1).

350. 하느님께 사람을 바치기로 서원해 놓고 돈으로 바치는 경우에 관한 규정(레 27:2-9).

351. 제물은 바꿔치기 할 수 없다(레 27:10).

352. 바꿔치기한 제물은 본래의 제물과 바꿔치기한 제물 둘 다를 드려야 한다(레 27:10).

353. 제물로 바치기로 했던 짐승 대신에 돈으로 바칠 경우에 대한 규정(레 27:9-14)

354. 주께 바치기로 한 (또는 바친) 집 대신에 돈으로 바칠 경우에 관한 규정(레 27:14).

355. 주께 바치기로 한 (또는 바친) 땅 대신에 돈으로 바칠 경우에 대한 규정(레 27:16).

356. 짐승의 맏배 대신 더 좋은 것이라 하여 다른 것을 바쳐서는 안된다(레 27:26).

357. 주께 바친 것은 무를 수 없다(레 27:28).

358. 주께 바친 땅은 팔 수 없다(레 27:28).

359. 주께 바친 땅은 무를 수도 없다(레 27:28).

360. 가축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에 관한 규정(레 27:32).

361. 십일조로 드려야 할 가축을 팔아서는 안된다(레 27:33).


민수기 (362 - 413계명)

362. 악성 피부병 환자와 고름을 흘리는 사람과 주검에 닿아 부정을 탄 사람은 모두 진에서 내보내야 한다(민 5:2).

363. 하느님이 머물고 계신 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민 5:3).

364. 남에게 잘못을 한 사람은 그가 저지른 잘못을 고백하고 피해자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민 5:6,7).

365. 아내의 간통을 밝히는 절차에 관한 규정(민 5:12-28).

366. 아내의 간통을 밝히기 위해 바치는 제물에는 기름을 부을 필요가 없다(민 5:15).

367. 그 제물에는 향을 얹을 필요도 없다(민 5:15).

368. 나실 사람은 포도주와 독한 술을 삼가야 한다(민 6:3).

369. 나실 사람은 포도를 먹어서는 안된다(민 6:3).

370. 그는 마른 포도를 먹어서도 안된다(민 6:3).

371. 나실 사람은 포도 씨를 먹어서도 안된다(민 6:4).

372. 그는 포도 껍질을 먹어서도 안된다(민 6:4).

373. 나실 사람은 머리를 깎아서는 안된다(민 6:5).

374. 그는 머리를 길게 자라게 내버려두어야 한다(민 6:5).

375. 나실 사람은 죽은 사람이 있는 방에 들어가서는 안된다(민 6:6).

376. 그는 가족이 죽었을 때에도 죽은 사람이 있는 방에 들어갈 수 없다 (민 6:7).

377. 나실 사람은 서약 기간이 끝나면 머리를 자르고 제물을 바쳐야 한다(민 6:13-14).

378. 제사장은 매일마다 이스라엘을 축복해야 한다(민 6:23).

379. 법궤는 제사장이 어깨에 메고 옮겨야 한다(민 7:9).

380.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한 달 후에 다시 지켜야 한다(민 9:10).

381. "두 번째 유월절"(또는 "작은 유월절")을 지키는 사람들은 누룩을 먹지 않고 만든 빵과 쓴 나물과 함께 유월절 양을 먹어야 한다(민 9:11).

382. 그들은 다음 날 아침까지는 아무것도 남겨서는 안된다(민 9:12).

383. 희생 양의 뼈를 부러뜨려서는 안된다(민 9:12).

384. 성소에서는 날마다 나팔을 불어야 한다(민 10:8).

385. 처음 거두어들인 곡식으로 만든 과자를 제사장에게 헌납물로 드려야 한다(민 15:18-20).

386. 옷자락 끝에 술을 만들어 달아야 한다(민 15:38).

387. 마음 내키는 대로 따라가거나 눈에 좋은 대로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민 15:39).

388.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소를 지켜야(보호해야) 한다(민 18:4).

389. 제사장과 레위인은 각각 각자가 할 일을 해야 한다(민 4:19)

390. 아무나 성소에서 일해서는 안된다(민 18:4, 22).

391. 일반 사람이 성소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켜야 한다(민 18:40).

392. 짐승의 맏배는 제사장의 몫으로 바쳐야 하되, 사람과 부정한 짐승 가운데 처음 난 것들은 그것을 바치는 대신에 속전을 바쳐야 한다(민 18:15, 16)

393. 정결한 짐승의 맏배는 속전을 받고 돌려주어서는 안된다(민 18:15).

394. 회막 일은 레위인이 하여야 한다(민 18:23).

395. 십일조는 레위인에게 돌아간다(민 18:24).

396. 레위인도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민 18:26).

397. 붉은 암송아지에 관한 규례(민 19:2).

398. 죽은 사람이 있는 곳에 들어가는 사람은 부정을 타게 된다(민 19:14).

399. 부정을 탄 사람은 물로 정결하게 하여야 한다(민 19:20).

400.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딸에게 유산을 상속하여야 한다(민 27:8).

401. 번제로는 날마다 아침과 저녁으로 1년된 숫양 한 마리씩 바쳐야 한다(민 28:3).

402. 안식일에도 평상시와 같이 번제를 드려야 한다(민 28:9).

403. 매달 초하루에는 수송아지 두 마리, 숫양 한 마리, 일년된 숫양 일곱 마리를 번제로 바쳐야 한다(민 28:11).

404. 오순절(칠칠절)에 드려야 할 제물(민 28:26-31).

405. 신년(새해)에는 나팔을 불어야 한다(민 29:1).

406. 서약이 효력이 없어지게 되는 경우에 관한 규정(민 30:3-9).

407. 서약한 것은 지켜야 한다(민 30:2).

408. 레위 사람에게 그들이 거할 성읍을 주어야 한다(민 35:2, 7).

409. 사람을 죽인 자를 그 자리에서 죽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민 35:12).

410. 살인 혐의자를 도피성에 보내는 것에 관한 규정(민 35:25).

411. 살인 사건의 경우에는 혐의자에게 사형을 내리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민 35:30).

412. 살인자를 돈을 받고 목숨을 살려주어서는 안 된다(민 35:31).

413.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 도피성으로 피한 사람에게서 속전을 받고 그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서 살게 해서는 안 된다(민 35:32, 33).


신명기 (414 - 613계명)

414. 토라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재판관이 될 수가 없다(신 1:17).

415. 재판관은 아무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신 1:17).

416.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서는 안된다(신 5:21).

417. 하느님은 한 분이심을 선언하는 것에 관한 규정(신 6:4).

418. 하느님을 사랑하라(신 6:5).

419. 자녀에게 부지런히 주의 규례와 법도를 가르쳐라(신 6:7).

420. 매일 쉐마를 암송하라(신 6:7).

421. 경문(테필린)을 손에 매라(신 6:8).

422. 경문(테필린)을 이마에도 붙이라(신 6:8).

423. 집 문설주와 대문에 메주라(mezura)를 붙여라(신 6:9).

424. 하느님과 예언자를 시험해서는 안된다(신 6:16).

425. 가나안의 7 민족을 진멸해야 한다(신 7:2).

426.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신 7:2).

427. 가나안의 7 민족과 결혼해서는 안된다(신 7:3).

428. 이교도들의 신상을 불태우고, 그 위에 입힌 보석들을 탐내서는 안 된다(신7:25).

429. 하느님이 증오하시는 것들을 집 안에 끌어들여서는 안된다(신 7:26).

430. 먹을 것을 주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들 드려야 한다(신 8:10).

431. 나그네를 사랑해야 한다(신 10:19).

432. 항상 하느님을 경외하라(신 10:20).

433. 하느님을 섬기라(신 10:20).

434. 하느님에게만 가까이하라(신 10:20).

435. 맹세할 일이 있으면 하느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라(신 10:20).

436. 이교도들이 신을 섬기는 장소는 어느 곳이나 다 허물어야 한다(신 12:2).

437. 거룩한 것들을 없애서는 안된다(신 12:4).

438. 예루살렘에 절기를 지키러 갈 때 제물을 가지고 가야 한다(신 12:6).

439. 번제는 성전에서만 드려야 한다(신 12:13).

440. 다른 모든 제물도 마찬가지로 성전에서만 드려야 한다(신 12:14).

441. 마음에 원하는 대로 짐승의 고기를 성 안에서 먹을 수 있다(신 12:15).

442. "두 번째 십일조"로 바친 곡식은 예루살렘 밖에서 먹어서는 안 된다(신 12:17).

443. "두 번째 십일조"로 바친 포도주를 마셔서도 안된다(신 12:17).

444. 기름도 마찬가지이다(신 12:17).

445.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도 예루살렘 밖에서 먹어서는 안된다(신 12:17).

446. 속죄제나 속건제로 드린 것도 성전 밖에서 먹어서는 안된다(신 12:17).

447. 번제물로 드린 것은 먹어서는 안된다(신 12:17).

448. 제물의 피를 뿌리기 전에 고기를 먹어서는 안된다(신 12:17).

449. 첫열매로 바친 것은 일반 사람이 먹어서는 안된다(신 12;17).

450. 레위 사람을 저버려서는 안된다(신 12:19).

451. 짐승을 잡는 것에 관한 규정(신 12:20, 21).

452. 산 짐승의 신체 중 일부를 먹어서는 안된다(신 12:23).

453. 제물은 성전으로 가져가야 한다(신 12:26).

454. 토라에 하나라도 더해서는 안된다(신 12:32).

455. 토라에서 하나라도 빼서는 안된다(신 12:32).

456. 우상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자에게 귀를 기울이지 말라(신 13:1).

457. 유혹하는 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신 13:7-10).

458. 이방 신에게로 유혹하는 자를 증오하라(신 13:9).

459. 그들을 죽여야 한다(신 13:9).

460. 그들을 감싸주어서도 안된다(신 13:9).

461. 그들의 잘못에 대하여 숨겨서도 안된다(신 13:9).

462. 우상을 숭배하게 하는 자는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신 13:10).

463. 우상을 숭배하게 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조사하고 잘 알아보아야 한다(신 13:14).

464. 하느님을 섬기다가 우상에게로 빠진 성읍은 불살라야 한다(신 13:15).

465. 그런 성읍은 다시 세워서도 안된다(신 13:16).

466. 그 성읍에서 어떤 물건도 취해서는 안된다(신 13:17).

467. 스스로 몸에 상처를 내서는 안된다(신 14:1).

468. 죽은 사람을 애도한다고 머리를 밀어서는 안된다(신 14:1).

469. 부정한 것은 먹어서는 안된다(신 14:3).

470. 새는 그것이 정한 것인지 알아보고 먹어야 한다(신 14:11).

471. 날개 달린 기어다니는 곤충은 먹어서는 안된다(신 14:19).

472. 저절로 죽은 것을 먹어서는 안된다(신 14:21).

473. "두 번째 십일조"에 관한 규정(신 14:23-27).

474. 가난한 자를 위한 십일조에 관한 규정(신 14:28-29).

475. 안식년에는 동족(同族) 유대인의 빚을 삭쳐 주어야 한다(신 15:2).

476. 안식년이라도 이방인에게 준 빚은 받아야 한다(신 15:3a).

477. 안식년에는 유대 동족의 빚을 삭쳐 주어야 한다(신 15:3b).

478. 가난한 동족에게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신 15:7).

479.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신 15:8).

480. 안식년이 가까온다고 돈을 꾸어 주지 않으면 안된다(신 15:9).

481. 종을 놓아줄 때에는 빈 손으로 보내서는 안된다(신 15:13).

482. 그들에게 넉넉히 주어 내보내야 한다(신 15:14).

483. 하느님께 바칠 짐승의 맏배를 부려서는 안된다(신 15:19a).

484. 제단에 바칠 첫새끼 양의 털을 깎아서도 안된다(신 15:19b).

485. 니산 월 정오가 지나서는 누룩이 들어 있는 빵을 먹어서는 안된다(신 16:3).

486. 유월절 양의 고기를 다음 날까지 남겨서는 안된다(신 16:4).

487. 유월절 양을 성전 이외의 곳에서 바쳐서는 안된다(신 16:5).

488. 3대 절기는 기쁨으로 지켜야 한다(신 16:14).

489. 모든 성인 남자는 일년에 세 차례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한다(신 16:16).

490. 제물이 없이 성전에 올라가서는 안된다(신 16:16).

491. 모든 성읍에는 재판관이 있어야 한다(신 16:18).

492. 성전에는 나무를 심어서는 안된다(신 16:21).

493. 어느 곳에도 석상을 만들어 세워서는 안된다(신 16:22).

494. 흠있는 짐승을 제물로 바쳐서는 안된다(신 17:1).

495. 산헤드린의 결정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신 17:10).

496. 전통을 무시해서는 안된다(신 17:11).

497. 이스라엘의 왕은 산헤드린에서 임명받아야 한다(신 17:15a).

498. 외국 사람을 왕으로 세워서는 안된다(신 17:15b).

499. 왕은 군마를 필요 이상으로 가져서는 안된다(신 17:16a).

500. 왕은 이집트로 내려가서는 안된다(신 17:16b).

501. 왕은 아내를 많이 두어서는 안된다(신 17:17a).

502. 왕은 재물을 너무 많이 가져서는 안된다(신 17:17b).

503. 왕은 율법 책을 복사해야 한다(신 17:18, 19).

504. 레위 지파는 땅을 유산으로 이어받지 못한다(신 18:1).

505. 레위 지파는 전리품을 취할 수 없다(신 18:1).

506. 제사장은 제물의 특별한 부위들을 가질 수 있다(신 18:3).

507. 처음 거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은 제사장에게 주어야 한다(신 18:4).

508. 처음 깎은 양털도 제사장에게 주어야 한다(신 18:4).

509. 각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각기 다른 시간에 일해야 한다(신 18:6-8).

510. 점쟁이를 용납해서는 안된다(제 510 계명).

511. 복술객을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

512. 주문을 외는 사람을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

513. 마법사를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

514. 마술하는 사람을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

515. 죽은 사람에게 물어 보는 사람을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11).

516. 예언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신 18:15).

517. 거짓 예언자를 삼가라(신 18:20).

518. 우상의 이름으로 예언해서는 안된다(신 18:20).

519. 거짓 예언자는 죽여야 한다(신 18:22).

520. 여섯 개의 도피성을 마련해야 한다(신 19:3).

521. 살인자를 동정해서는 안된다(신 19:13, 21).

522. 이웃의 경계를 침범해서는 안된다(신 19:14).

523. 한 사람의 증언만 가지고 재판해서는 안된다(신 19:15).

524. 거짓 증언을 하는 자에게는 그가 이웃에게 해를 입히려고 했던 것과 똑같은 벌을 내려야 한다(신 19:19).

525. 전쟁에 나가서 적군을 두려워하지 말라(신 20:1).

526. 전쟁터에서 되돌려 보내야 할 사람들에 관한 규정(신 20:5-7).

527.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평화를 제의하라(신 20:10, 11).

528. 가나안의 7 민족을 진멸하라(신 20:16).

529. 성읍을 점령할 때 나무들을 베버리지 말라(신 20:19).

530. 범인을 알 수 없는 살인 사건에 관한 규정(신 21:1-9).

531. 범인을 알 수 없는 살인 사건을 위해서 송아지를 죽인 험한 계곡에서는 일도 하지 말고 그곳에 씨도 뿌리지 말라(신 21:4).

532. 포로로 잡혀 온 여인을 아내로 취해도 된다(신 21:10, 11).

533. 그러나 그 여인을 팔아서는 안된다(신 21:14a).

534. 그에게 힘든 일을 시켜서도 안된다(신 21:14b).

535. 죽을 죄를 지어서 처형당한 사람의 주검은 나무에 매달아 두어야 한다(신 21:22).

536. 그러나 그 주검을 밤까지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신 21:23).

537. 그 주검은 그 날로 파묻어야 한다(신 21:23).

538. 다른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발견했을 때는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신22:1).

539. 그리고 그것을 못본체 해서는 안된다(신 22:3).

540. 이웃의 짐승이 길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면 주인을 도와 그 짐승을 일으켜 주어야 한다(신 22:4).

541. 짐승에게 짐을 싣거나 내릴 때 도와주어야 한다(신 22:4).

542. 여자는 남자의 옷을 입어서는 안된다(신 22:5a).

543. 남자도 여자의 옷을 입어서는 안된다(신 22:5b).

544. 새끼를 품고 있는 어미 새를 잡아서는 안된다(신 22:6).

545. 새끼를 잡기 전에 먼저 어미 새를 날려보내야 한다(신 22:7).

546.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야 한다(신22:8a).

547. 그리고 집에서 사고가 나 사람이 죽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신 22:8b).

548. 포도나무 사이사이에 다른 씨를 뿌려서는 안된다(신 22:9a).

549. 그리고 거기에서 거둔 곡식도 먹어서도 안된다(신 22:9b).

550. 소와 나귀에게 한 멍에를 메워 같이 밭을 갈게 해서는 안된다(신 22:10).

551. 양털과 무명실을 함께 섞어서 잔 옷을 입어서는 안된다(신 22:11).

552. 결혼의 성립에 대한 규정(신 22:13).

553. 아내에게 그녀가 처녀가 아니었다고 하는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난 경우에 관한 규정 (신 22:14-18).

554. 아내에게 그녀가 처녀가 아니었다고 거짓 누명을 씌운 사람은 평생 그 여자와 함께 살아야 한다(신 22:19).

555. 성 안에서 한 남자와 다른 사람에게 약혼한 여자가 성관계를 가졌을 때에는 둘 다 돌로 쳐죽여야 한다(신 22:24).

556. 그러나 성 밖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남자만 돌로 쳐죽여야 한다(신 22:26).

557. 약혼하지 않은 처녀를 욕보인 남자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신 22;29).

558. 그리고 그는 그녀와 결혼해야 하되, 그 여자와 이혼해서는 안된다(신 22:29).

559. 신낭이 터졌거나 신(腎)을 베인 사람은 주의 총회 회원이 될 수 없다(신 23:1).

560. 사생아는 주의 총회 회원이 될 수 없다(신 23:2).

561. 유대인은 암몬 사람이나 모압 사람과는 영원히 결혼할 수 없다(신 23:3).

562.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과는 평화 관계를 가지려고 해서는 안된다(신 23:6).

563.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신 23:7a).

564. 이집트 사람도 미워해서는 안된다(신 23:7b).

565. 제의적으로 부정한 사람은 진(陳)에 들어갈 수 없다(신 23:10, 11).

566. 화장실은 진 밖에 만들어야 한다(신 23:12).

567. 군인은 무기와 더불어 삽을 항상 같이 가지고 다녀야 한다(신 23:13).

568. 도망온 종을 되돌려 보내서는 안된다(신 23:15).

569. 그리고 그들을 압제해서도 안된다(신 23:16).

570. 이스라엘 자손은 창녀나 남창이 되어서는 안된다(신 23:17).

572. 동족에게서 이자를 취해서는 안된다(신 23:20).

573. 이방인에게는 이자를 받을 수 있다(신 23:21).

574. 하느님에게 서원한 것은 지체함이 없이 지켜야 한다(신 23:21).

575.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신 23:23).

576.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먹을 만큼 실컷 따먹는 것은 괜찮다(신 23:24a).

577. 그러나 그릇에 담아 가면 안된다(신 23;24b).

578. 이웃의 밭에 들어가서 이삭을 손으로 잘라먹는 것은 괜찮지만, 곡식에 낫을 대면 안된다(신 23:25).

579. 이혼 증서에 대한 규정(신 24:1 이하).

580. 이혼한 아내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여서는 안된다(신 24:4).

581. 새신랑은 1년동안 집을 떠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신 24:5a).

582.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는 그는 모든 의무로부터 자유하다(신 24:5b).

583. 맷돌을 저당 잡아서는 안된다(신 24:6).

584. 악성 피부병의 조짐이 보이면, 그것을 무시하지 말라(신 24:8).

585. 담보물을 잡으려고 집에 들어가서는 안된다(신 24:10).

586. 담보물은 그날로 되돌려 주어야 한다(신 24:12).

587. 담보물을 그것을 잡힌 사람이 필요한 때에 즉시로 돌려주어야 한다(신 24:13).

588. 품꾼에게는 그날로 품삯을 지불해야 한다(신 24:15).

589. 혈연 관계가 있는 사람의 증언은 받아들여서는 안된다(신 24:16).

590. 외국 사람과 고아에게 억울하게 재판해서는 안된다(신 24:17).

591. 과부의 옷을 저당 잡아서는 안된다(신 24:17).

592.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잊어버리고 거두어들이지 않은 단을 다시 가서 취하여 와서는 안된다(신 24:19).

593. 그것은 올리브 나무의 열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신 24:20).

594. 형벌로 매를 맞을 경우에는 재판관은 매 맞을 사람을 자기 앞에 엎드리게 하고 죄의 정도에 따라 매를 때리게 해야 한다(신 25:2).

595. 그러나 40대 이상 때려서는 안된다(신 25:3).

596. 곡식을 밟으면서 타작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워서는 안된다(신 25:4).

597. 남편이 아들이 없이 죽은 경우, 그의 아내는 다른 사람과 재혼해서는 안된다(신 25:5a).

598. 죽은 남편의 형제가 그녀와 결혼을 해야 한다(신 25:5b).

599. 죽은 형을 대신해서 형수와 결혼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에 대한 규정(신 25:7-10).

600. 음낭을 잡는 자를 보고도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신 25:11).

601. 그에게는 동정심을 보여서는 안된다(신 25:12).

602. 집에 크고 작은 두개의 되를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신 25:14).

603. "아말렉 사람이 너희에게 한 일을 기억하라"(신 25:17).

604.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라(신 25:18).

605. 그리고 절대로 그들이 한 일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신 25:18).

606. 햇곡식을 예물로 바칠 때 드리는 고백(신 26:5-10).

607.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십일조를 드린 것에 대한 고백(신 26:12-15)

608. 십일조를 애곡하는 날에 먹어서는 안된다(신 26:14a).

609. 그리고 제의적으로 부정한 상태에서 먹어서도 안된다(신 26:14b).

610. 또한 그것을 죽은 자를 위해 사용해서도 안된다(신 26:14c).

611. 하느님의 길을 따라 걸으라(신 26:17).

612. 안식년 장막절에 모든 이스라엘 회중을 다 모아야 한다(신 31:12-13).

613. 토라(율법)를 써서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신 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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