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 법칙(Frame Law) 똑같은 상황이라도 어떠한 틀 속에서 현상을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진다는 법칙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프레임 법칙(Frame Law)

감명 깊은 사례 네 가지 이야기를 통해 살펴봅니다. 

사례 1. 

공자가 제자들과 함게 진나라로 가던 도중에 양식이 떨어져 일주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적이 있었다.
안회가 가까스로 쌀을 구해와 밥을 지었다.
공자는 밥이 다 되었는지 알아보려고 부엌을 들여다 보다가 밥솥의 뚜껑을 열고 밥을 한 움큼 먹고 있는 안회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공자는 깜짝 놀랐다.
안회는 자신의 제자 가운데서 도덕수양이 가장 잘 되어 공자가 아끼는 제자였다.
공자는 이런 안회의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하고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이윽고 안회가 밥이 다 되었다고 하자 공자가 말했다.

"안회야! 내가 방금 꿈 속에서 선친을 뵈었는데 밥이 다 되거든 먼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하더구나."

밥을 몰래 먹은 안회를 뉘우치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 말을 들은 안회는 곧장 무릎을 꿇고 말했다.

"스승님! 이 밥으로는 제사를 지낼 수는 없습니다.
제가 뚜껑을 여는 순간 천장에서 흙덩어리가 떨어졌습니다.
스승님께 드리자니 더럽고 버리자니 아까워 제가 그 부분을 먹었습니다." 

공자는 안회를 잠시나마 의심한 것이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다른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전에 나는 나의 눈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눈도 완전히 믿을 것이 못되는구나. 
그리고 또 나는 나의 머리도 믿었다. 
하지만 나의 머리도 역시 완전히 믿을 것이 못되는구나. 
너희는 보고 들은 것이 꼭 진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명심하거라."

성인 공자도 이렇게 오해를 했는데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은 어떠 하겠는가? 

때문에 귀로 직접 듣거나 눈으로 본 것이라고 해도 항상 심사숙고하고, 결정을 내리기 전에 반드시 그 사건 자체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섣불리 결론을 내려 평생 후회할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사례 2.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어느 날 그의 집 마당을 쓰는 하인이 세 시간 넘게 지각을 했다. 
화가 많이 난 타고르가 해고해야  하겠다고 작정했다.
3시간 후 허겁지겁 달려 온 하인에게 빗자루를 던지며 말했다.
"당신은 해고야! 빨리 이 집에서 나가!"
그러자 하인은 빗자루를 들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젯 밤에 제 딸 아이가 죽어서 아침에 묻고 오는 길입니다." 

타고르는 그 말을 듣고 인간이 자신의 입장만 생각했을 때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는지 배웠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사람에 대해 화가 나고 미움이 생길 때는 잠시 상대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생각해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사례 3. 

시장통을 거쳐가는 8번 버스엔 늘 승객들이 만원이다. 
보따리마다 주고받은 정을 받아 온다고들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를 매달고 있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 안에서 갑자기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시 후 그치겠지' 했던 아이의 울음소리는 세 정거장을 거쳐 올 때까지도 그칠 기미가 없어 보였다.
슬슬 화가 난 승객들은 여기저기서 “아줌마 애기 좀 잘 달래 봐요..”
“버스 전세 냈나..”
“이봐요. 아줌마 내려서 택시 타고 가요!  여러 사람 힘들게 하지 말고.... "

“아~짜증 나... 정말"

아기를 업은 아줌마에 대한 원성으로 화난 표정들이 버스 안을 가득 메우고 있을 그 때 차가 멈추어 선다. 
다들 의아한 표정으로 버스기사만 바라보고 있는데, 버스기사는 운전석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서는 무언가를 사들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아이 엄마에게로 다가간 버스기사는 긴 막대사탕의 비닐을 벗겨 아기 입에 물려주니 그제사야 아기는 울음을 그쳤다. 

다시 버스는 출발을 했고, 버스 안의 승객들은 그제야 언제 그랬냐는듯이 웃음이 번져나왔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하는 아이엄마는 버스기사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손등에 다른 한 손'을 세워보였다.

“고맙습니다..!“ 라는 수어(수화)로 고마움을 표현한 것이다. 아이 엄마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청각 장애인이었던 것이다. 

아이 엄마가 버스에서 내린 뒤 버스기사는 아주머니와 아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사랑의 불빛을 멀리 비추어 주고 있었고, 누구하나 '빨리 갑시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례 4. 

한 남자가 시골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계산하려고  주머니를 뒤졌는데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식당 주인에게 말했다.
"깜박 잊고 돈을 놔두고 나왔네요. 한 시간 안에 돈을 가져와 지불해도 될까요?"
늙은 식당 주인은 펄쩍 뛰었다.
돈을 당장 지불하지 않으면 신고하겠다고 외쳤다.
계속되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식당 웨이터는 주인에게 말했다.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지갑을 깜박하고 외출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죠. 제가 대신 내 드리겠습니다. 이 분은 정직해 보입니다."

얼마 후 남자가 식당에 다시 돌아와 식당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식당을 판다면 얼마에 팔겠소?" 

주인은 욕심껏 말했다. "3만 프랑이오"

그는 그 자리에서 3만 프랑을 주며 식당을 자기가 사겠다고 했다.
그는 식당 문서를 받아서 웨이터에게 주면서 "당신이 나를 믿어준 건 3만 프랑보다 더 값진 일입니다. 오늘부터 이 식당 주인은 이 웨이터 분입니다"

그는 평복 차림으로 나왔던 나폴레옹이었다.

프레임 법칙이란?

똑같은 상황이라도 어떠한 틀 속에서 현상을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진다는 법칙이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서로 간에 불협화음이 일어나곤 하는 것은 자기의 고정관념에서 나오는 선입견이나 편견 때문인 경우가 많다. 상대방을 배려하기 전에 모든 걸 자기 입장에서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오게 되어 분쟁이 생기게 된다. 

선입견(先入見)은 자아의 성찰(省察)없는 자만(自慢)이나 오만(傲慢)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모든 오해와 분쟁의 불씨라 아니할 수 없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프레임(Frame)은 창틀이란 의미이다.

여기서는 관점이나 생각의 틀을 말하고 있다.
동일한 현상도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이 프레임의 법칙(Frame Law)이다.
질문이 달라져야 답이 달라지고 관점이 달라져야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프레임의 법칙(Frame Law)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널리 알려진 우화이다.

어느 날 세실과 모리스는 함께 예배를 드리러 갔다.
세실이 모리스에게 물었다.
"모리스 자네는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된다고 생각하나?"
"글쎄, 잘 모르겠는데. 랍비께 한 번 여쭤보는 게 어떻겠나?" 
세실이 랍비에게 다가가 물었다.
"선생님,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되나요?" 
랍비는 정색을 하면서 대답했다. 
"형제여, 기도는 신과 나누는 엄숙한 대화인데, 절대 그럴 수 없지." 
세실로부터 답을 들은 모리스가 질문을 잘못했기 때문이라면서 자기가 다시 여쭤보겠다면서 이번에는 모리스가 랍비에게 물었다.  "선생님, 담배 피우는 중에는 기도하면 안 되나요?" 
랍비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제여, 기도는 때와 장소가 필요 없다네. 담배를 피우는 중에도 기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

동일한 현상도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다.
생각의 틀을 바꾸면 불행도 행복으로 느껴진다.
이것이 프레임의 법칙(Frame Law)이다.
인간은 어떤 조건에 대해서 거의 무조건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프레임(Frame)을 마음의 창에 비유되곤 하는데 이는 어떤 대상 또는 개념을 전했을 때 어떤 프레임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해석이 바뀌기 때문이다.
원하는 답을 얻으려면 질문을 달리하라.
질문이 달라져야 답이 달라진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져야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이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늘 문이 열리면

마태복음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누가복음 3: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늘이 열리며


에스겔 1:1
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마태복음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누가복음 3: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사도행전 10: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사도행전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요한계시록 15:5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요한복음 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사도행전 10: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에스겔 1:1

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예수의 세례


우리가 복음서를 읽으면서 약간 의아하게 생각하는 대목 중의 하나는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일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한다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는 게 옳은 순서일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건 분명한 사실이고, 또한 예수님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 메시아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두 사실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고난도 수학문제처럼 풀기 힘든 탓인지,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세례 사건을 조금씩 다르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세례 받는 장면을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암시적으로만 묘사합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 하늘에서 성령이 예수님에게 내려와 머물렀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요 2:33) 우리는 요한복음 기자의 이런 보도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의 세례 사건에서 세례자체보다는 성령이 임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님의 세례 사건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복음서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입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 3:13-17절이 가장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여기서는 이 사건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대화하는 방식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예수님이 왜 세례를 받으셔야 했는지 세례 요한도 몰랐고, 초기 기독교에 속한 모든 이들도 정확하게는 몰랐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해야만 하느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 순간에 일어난 현상을 마태복음 기자는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시각적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청각적인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영상과 소리입니다. 전자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예수님에게 내려오는 현상이었습니다. 후자는 하늘에서 울려난 소리 현상이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바울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에 부활한 주님을 만나게 되는데, 거기서도 역시 빛과 소리가 중요한 현상으로 나타납니다.(행 9:1-19)


하늘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성서의 보도를 읽을 때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세요.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올 때 갑자기 하늘이 열렸다고 합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늘에 문이 있어서 그게 열렸다는 뜻은 아니겠지요. 사실 하늘은 열리는 게 아닙니다. 하늘은 늘 열려 있습니다. 장마가 진다거나 폭설이 쏟아질 때 하늘이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이면 열리는 것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라 우리의 느낌일 뿐입니다. 하늘은 어느 한 순간에도 닫혀 있지 않습니다.

또한 본문은 하늘이 열린 뒤에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 위에 내려오는 게 보였다고 말합니다. 서양화가들은 이런 장면을 자주 그렸습니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니까 아마 성령을 그런 모습으로 그린 것 같습니다. 이런 표현에서 성령의 모양이 실제로 비둘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비둘기는 성령을 설명하기 위한 일종의 메타포(은유)입니다. 메타포는 실제가 아니라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뜻하는 하트 모양이 사랑 자체가 아닌 것처럼 비둘기가 성령 자체는 아닙니다. 이 두 가지를 잘 연결해서 생각해보십시오. 하늘이 열린다는 것과 비둘기 모양의 성령 말입니다. 비둘기가 성령에 대한 메타포이듯이 하늘이 열린다는 것도 그 어떤 것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성서시대의 사람들은 하늘이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성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되는 주기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신약성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면 우리가 모두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살전 4:13 이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말합니다.

고대인들이 하늘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로 생각했다는 사실은 그렇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성서를 읽을 때 그 성서가 기록되던 시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서를 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일종의 시간여행이 필요합니다. 2천 년 전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하늘은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이었습니다. 그 하늘에서 비가 내립니다. 노아 홍수 때는 사람들이 하늘에 구멍이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에서는 때로 벼락도 칩니다. 화산이 폭발하면 연기가 하늘도 올라갑니다. 그 하늘에 태양이 있고, 별들도 있습니다. 태양이 동에서 떴다가 서로 떨어지면 세상이 어두워집니다. 이런 일들이 왜 벌어지는지 고대인들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들에게 하늘은 신비의 원천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하늘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생각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무식하다고 깔보면 안 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물리적 지식이 비록 우리보다 짧았지만 영적으로는 우리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못하지 않습니다. 여기 노벨물리학상을 탈만한 능력이 있는 물리학자와 시골에서 한평생 농사만 지은 늙은 농부가 있다고 합시다. 이 두 사람이 물리의 세계를 진지하게 대하기만 한다면 지식의 많고 적음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비록 물리적인 지식이 없는 농부라 하더라도 마음을 열고 세상을 직면하기만 한다면 그는 궁극적인 진리와 맞닿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뭔가 다르긴 다르지 않느냐, 물리학자가 근원에 훨씬 가까이 다가간 게 아니냐, 하는 생각할 할 분들이 계시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별 개 아닙니다. 왜냐하면 농사꾼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물리학자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모두 바닷가의 모래 한 알 정도로 작기 때문입니다. 도토리 키 재기라는 말이 여기에 어울립니다.

그렇습니다. 성서기자들은 영적으로 아주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리적 지식은 부족했지만 근본에 대한 생각은 아주 깊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생각한 근본은 무엇일까요? 하늘이라는 말로 그들이 전하고 싶었던 핵심은 무엇일까요? 이걸 놓치면 우리는 성서를 아무리 읽어도 그 중심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서기자들이 말하는 하늘은 생명의 비밀장소입니다. 이 말은 곧 생명이 비밀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공부한다고 해도 생명이 무엇인지를 완전하게 알아낼 도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비밀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생명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이렇게 생명 안으로 들어왔는지, 이 생명 밖으로 나간다는 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지난 시간들을 조금만 돌아보세요. 20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40대, 50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이 시간, 이 세월이 무엇인지 우리는 여전히 잘 모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난다는 것 자체도 신비롭습니다. 부부도 그렇고, 친구도 그렇고, 교우도 그렇습니다. 얼마나 많은 우연성이 겹쳐야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참으로 신기합니다. 이런 비밀, 이런 신비를 땅의 경험만으로 우리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성서기자들이 말하는 하늘은 바로 이런 모든 비밀이 놓여 있는 곳을 가리킵니다. 궁극적 생명이 은폐되어 있는 곳이 곧 하늘입니다.


예수는 하늘의 문이다.

오늘 본문을 다시 잘 보세요.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그 순간에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숨겨졌던 생명의 비밀이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하늘은 바로 위해서 말한대로 궁극적 생명이 은폐된 곳입니다. 아무도 하늘로 올라갈 수 없듯이 아무도 그 생명이 은폐된 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하늘이 열려야만 우리는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을 여는 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제 우리는 생명을 알게 되었고, 그 생명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마태는 그 증거를 성령의 임재와 하늘의 소리로 제시합니다.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 위에 임했습니다. 성령은 바로 생명의 영이십니다. 하늘에서 들린 소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 3:17) 이 구절은 시편 2:7절의 인용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잘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사람처럼 아들을 둔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른 말로는 그 관계를 설명할 수 없어서 아들이라고 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을 그대로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듯이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속성, 또는 하나님의 유업은 생명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참된 생명의 아들이십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 사건은 완성될 수 있습니다.

이 창조 사건의 완성은 곧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사건에, 그 창조의 완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엄청난 일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을까요? 생명의 완성보다 더 신나는 일이 어디 있을까요? 모든 것이 죽어야 할 운명 가운데서 이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으니, 우리가 어찌 소리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로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되고 궁극적인 생명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이 열렸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그 사건을 더 이상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방법이 그들에게는 없었기에 그렇게 시(詩)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초기 기독교인들의 이런 신앙 경험과 이런 신앙 고백을 따라가고 있을까요? 하늘이 열린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예수님이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깨닫고 있나요? 이런 건 무조건 깨달아지는 게 아닙니다. 무조건 믿습니다, 하고 외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알지 못하는 데 어찌 깨달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천박한 생명 이해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결코 하늘이 열린다는 복음서 기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천박한 생명 이해라는 말이 조금 불편하게 들리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천민자본주의라는 말이 있듯이 생명에 관해서도 그런 말이 가능합니다. 생명을 수단으로 다루는 삶의 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은 그 나무를 비싸게 팔아서 돈 벌 생각만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그 나무의 생명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저는 어떤 분에게서 곶감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오늘 예배 후에 하나씩 맛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곶감을 보고 돈이나 맛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그 곶감의 생명의 깊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난여름에 햇빛과 물, 탄소가 결합해서 감이 만들어졌고, 그 껍질을 깎아 몇 달 동안 말리는 과정에서 귀한 곶감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생명의 깊이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에게 생명은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다가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차원으로 생명을 생각합니다. 그냥 돈 잘 벌고, 건강하게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걸 목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만이 목적이라고 한다면 굳이 예수님을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돈 잘 벌 사람은 잘 벌고, 건강할 사람은 건강합니다. 거꾸로 예수님을 아무리 잘 믿어도 망하기도 하고, 병도 듭니다. 이런 문제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생명, 삶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여기서 영원하다는 것은 참되다는 뜻입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생명, 이런 삶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조건과 환경이 좋다고 해서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이걸 여러분은 알고 계시나요? 그런 경험이 있나요? 이런 인식과 경험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우리 삶에서 생명의 깊이인 하늘이 열리는 걸 경험할 수 있을까요?

이건 제가 말로 설명하기 힘듭니다. 기독교 교리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감정적인 뜨거운 신앙으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바울의 가르침처럼, 이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일치로만 주어지는 경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겁먹지 마세요. 반대로 너무 자신만만하게 생각하지도 마세요.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준비는 선물을 받을 준비 이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준비도 어느 한 가지로만 정답을 말씀드리기는 힘듭니다. 여러분의 삶이 제각각이듯이 여러분의 하나님 경험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준비가 되기만 한다면 우리의 중심을 헤아리시는 성령이 여러분의 형편에 맞추어 찾아가실 겁니다. 그 성령은 여러분을 이 세상에서 유일한 방식으로 찾아가시어 영혼의 문을 두드릴 겁니다. 그때 여러분은 문을 열기만 하면 됩니다. 시인이 언어의 영감을 얻듯이, 작곡가가 소리의 영감을 얻듯이 말입니다. 그 과정이 바로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의 깊이인 하늘이 열리는 걸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안개 낀 숲속 길에 햇살이 비쳐 안개가 걷히듯 금년에도 여러분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문이 활짝 열릴 줄로 믿습니다.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날 예수님께서 요단강 가에 나타나셨습니다.  아직 사람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지 못하던 때입니다.  이제 막 인류역사를 바꾸는 일이 시작되는 것을 모르는 때였습니다.  역사의 흐름을 바꾸시는 분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 등장하시는 때, 그 분은 겸손히 세례요한을 통해 요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그 물에서 나와 땅으로 올라오시는데 저 위에 하늘이 열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마치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환한 빛을 내면서 예수님을 향해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해 지셨습니다.  오늘 본문성경 16절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이 열리고,
물에서 나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우리 인생에 하늘이 열리는 일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하늘이 아니라 정말 천국의 하늘이 열리는 일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사도요한이 천국에 대한 계시를 받을 때 그 앞에 하늘이 열렸습니다.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4:2,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이렇게 천국의 하늘이 열리는 일이 있습니다. 그보다 먼저, 이 땅의 저 위의 하늘이 열리는 일도 있습니다. 그 경우는 물리적인 하늘이 열리는 것이지요. 

옛날 노아홍수 때에 그렇게 하늘이 열리면서 위에서 지구를 신비하게 에워싸고 있던 큰물의 띠가 풀어져 모두가 다 비가 되어 부어졌지요. 


창 7:11,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하늘의 창이 열린다는 것은 비유적 표현이지만 그러나 정말 그렇게 열리면서 홍수를 일으키는 비와 물이 쏟아져 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하늘이 열립니다. 그 하늘은 신령한 하늘이요 천국의 하늘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기도의 응답의 문입니다. 신령한 문이지요. 그 문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문입니다. 그 사랑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 문은 한마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 때문에 열리는 문입니다. 얼마든지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은혜, 응답, 축복, 능력,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어지는 그 통로의 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바로 그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요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구원과 생명, 축복의 문을 여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언제 이 문이 우리에게 실제로 활짝 열렸지요?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위해 속죄의 죽음을 죽으시는 순간 하늘의 용서의 문은 열렸습니다.


누가복음 23:44∼45
때가 제 육 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그 죽은 육체가 우리에게 하늘의 열린 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믿고 안기면 하늘의 문은 우리에게 늘 열린 문입니다.


히브리서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천국문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속으로 열린 그 문으로만 연결된 문입니다. 안문과 바깥문인데 예수님께서 그 연결통로이시며 문이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이제 하늘이 열린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 위로부터 오는 모든 신령한 은혜를 지금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늘이 열린 사람은


첫째, 하나님의 얼굴이 보이는 사람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하늘이 열리는 은혜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이 보입니다.  이 일이 중요합니다.  인생은 죄를 짓고 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며 보지 않는 일에 익숙해 졌습니다.  그리고 그냥으로는그 분의 낯을 보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캄캄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깜깜한 곳에 오래있다가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오면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눈을 상할 수 있습니다. 충격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죄로 인해 어둡고 어둠의 세계에 길든 인생은 그래서 하나님의 빛을 피하고 그분의 낯을 피합니다.  그 일이 에덴동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에덴동산의 이런 기록을 우리가 봅니다.  죄를 지은 후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낯과 멀어집니다.


창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아니, 날이 서늘한 시간, 그 좋은 시간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으니 얼른 다가가서 하나님, 저희 여기 있습니다, 라고 해야할 일인데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피해 숨은 인생이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하나님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분의 표정을 읽는 길을 얻고 힘을 얻는 길을 회복하는 은혜입니다. 

이 길이 오직 예수님 안에서 열립니다.  예수님의 보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어도 죽지 않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됩니다.  성령의 은혜로 뜨는 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신 곳을 향해 눈을 뜨고 또 보는 일이 중요한데 그것이 바로 천국이 열리는 일입니다.  천국의 열린 문은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먼저, 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의 역사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천국의 열린 문을 보게 됩니다.  하늘이 열린 사람이 되고 늘 하나님의 낯을 뵈옵는 마음으로 기도를 하게 됩니다.  마음은 이제 죄를 씻고 거듭나서 눈을 뜹니다. 귀가 열립니다. 보게 되면서 그리고 살아서 자라나는 행동을 하면서 하늘의 열린 문을 늘 보며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 같은 생각, 같은 뜻, 같은 바람, 같은 관점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영을 받았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집이 보이고 그 분의 얼굴표정이 보이고 그 분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싫어하시는 지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하늘 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조금 일찍 나타나서 물세례를 베풀면서 마음을 열고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마음의 문을 열라고 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2)  세례요한의 설교의 핵심은 우리의 마음을 본격적으로 여실 분이 오시는데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마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성령의 세례는 또한 세상의 죄악에 대해서는 심판하시는 불의 세례를 동반합니다.  그러나 회개한 심령에는 이 불이 심판의 불이 아니고 깨끗게 하시면서 새 힘을 주시는 능력의 불입니다.  죄악을 소멸하시는 불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힘을 주시는 불입니다. 이 성령과 불을 받으면 우리는 정말 힘있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복종하면서 삽니다. 이 때 하늘이 열리고 우리는 늘 하나님과 대면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늘이 열린 사람은 하나님의 낯을 보는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나를 보시옵소서, 들으시옵소서,  아, 우리를 보시는 분을 본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한 영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그 분의 얼굴이 보입니다. 느낌이 보입니다.  아, 놀라운 일입니다.  하늘이 열린 것은 하나님아버지의 얼굴을 가리는 커튼이 제쳐지고 그 분의 표정을 봅는 일입니다. 비로소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이 보이고 그 표정, 그 섬세한 느낌이 보입니다.  누가복음15장의 탕자는 회개할 때 비로소 아버지의 진심어린 사랑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아 좋은 아버지, 풍성하신 아버지,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나를 기다리시는 아버지가 보입니다. 멀리 있었어도 보입니다.  그리고 그 얼굴을 향해 돌아간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을 받지 못한 큰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표정을 잘 읽지 못했습니다.  동생을 보고 싶어하시는 아버지의 그 얼굴빛이 보이지 않았고 같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여러분,우리가 아버지의 영,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그 분의 낯을 볼 수 있게끔 하늘이 열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탕자같이 아버지께로 더 가까이 돌아오면서 우리를 향해 사랑이 가득한 얼굴로 반가와하시는 그 모습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 때, 회개하라, 천국이 열린다, 는 말씀이 전파되는 때에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서 요단강으로 오신 것입니다.


3: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이 때에, 바로 하나님의 낯을 볼 수 있는 길이 세례요한을 통해 전파되고 있는 때입니다.  회개하는 일,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사랑의 낯빛을 발견하고 에덴동산에서처럼 피하지 않고 오히려 가까이 다가갑니다.  설교를 듣기 싫어서 피하면 하나님의 얼굴 빛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듣기 싫건 좋건 하여튼 이 강단에서 나오는 말씀 앞에 피하지 않아야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나무 그늘을 찾아 피할 곳을 찾선 때로 돌아가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때가 바로 큰 은혜받을 때입니다. 


고후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 때는 늘 이 때, 지금, 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회개하고 물과 성령의 세례를 받으시면서 그 분의 영으로 새로와지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분의 얼굴이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늘 그 분을 뵙는 기도에 힘쓸 줄 믿습니다. 나를 향해서 사랑하시며 웃으시는 그 분의 모습을 뵙는 눈을 뜨기를 축복합니다.


하늘이 열린 사람은


2. 예수님의 겸손이 보이는 사람


우리는 주님의 겸손이 보여야합니다.  겸손. 우리에게 온전한 최선의 선물은 겸손입니다.  겸손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을 보며 또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이 겸손의 모습으로 모든 의를 완성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지은 인류의 죄는 교만이었습니다. 교만을 일으키는 사탄의 유혹에 걸려 하나님을 넘보는 교만의 영이 들어가니까 선악과를 탈취하여 따 먹고 그리고 하나님의 낯은 피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겸손으로서 정말 하나님의 나라, 생명의 세계, 속죄의 평화로 인해 열린 아버지의 그 풍성하신 은혜의 얼굴을 뵐 수 있는 길을 보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첫 방법이 겸손이었습니다.  겸손은 가장 온전한 하나님의 의라고 할 수있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하실 때 요한이 크게 말렸습니다. 


3:14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요한에게 간청하시면서 허락을 요청하셨습니다. 이 일부터 겸손의 극치입니다.  그리고 겸손이 모든 의의 완성임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신대도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시고 우리 인생의 세계에서 사람들 사이의 도리도 따르셨습니다.  때로는 까마득한 인생의 허락을 구하시는 일도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에게서 물로 세례를 받으려 하실 때 제가 감히 어떻게, 라고 하는 요한을 설득하셔서 그에게서 세례를 받으신 주님, 정말 겸손하신 분입니다.  그 분의 음성을 들어보실까요. 


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허락을 받으시는 이 겸손.  우리는 바로 이런 겸손의 길에 주님의 십자가가 놓인 것을 보아야합니다.  주님은 이 겸손의 십자가를 통해서 사람이 되시고 종이 되시고 낮아지신 후 우리가 하나님의 그 얼굴, 평화로우신 얼굴을 뵙는 길에 같이 서게 인도하십니다.  겸손이 최고입니다. 우리는 이 겸손의 교회로 새롭게 거듭나야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진정 겸손의 의를 이루어 위 사람이 아래 사람의 허락을 얻어서 큰 겸손을 보이는 정도까지 그런 사랑의 의의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이 가장 앞서는 사랑의 나라, 이지요.  하늘이 열린 사람은 겸손의 세계에 선 사람입니다.  천국은 정말 다 겸손합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이 겸손해서 온 성도들의 진정한 감사제목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여름출애굽을 통해서 우리가 다 겸손의 허리를 주님으로부터 선물로 받기를 바랍니다.


하늘이 열린 사람은


3. 성령의 평화와 축복을 힘입는 사람


하늘이 열린 사람은 성령님의 그 평화와 하늘의 축복이 비둘기처럼 덮혀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눈이 열리고 성령의 영으로 함께 생각하면서 주님의 겸손의 허리를 배운 사람은 이제 큰 평안, 큰 평화의 세계로 새출애굽하는 사람입니다.  출애굽의 홍해는 겸손의 새출발이며 모든 순종과 복종이며 이 때문에 오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이 평화를 우리에게 선물하시는 주가 되셨습니다.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이 열린 사람은 평화와 축복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십자가 안에서 우리를 향해 열린 하늘을 바라보면서


첫째, 용서의 확신을 가진 사람이 됩시다.. 

먼저 죄에 대한 회개를 해야합니다.  그동안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깨닫고 그리고 진심으로 회개하여야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의 속죄의 용서와 보호가 크게 임합니다.  용서받았구나, 라는 확신이 옵니다.  이 확신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용서하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는 용서를 받은 사람이니 우리에게 지은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이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것을 용서해 주었는데 자기에게 오백데나리온의 빚진 친구의 멱살을 잡고 감옥에 넣은 것을 본 주인이 그를 감옥에 넣었다고 하셨지요.  용서받았으니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용서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셋째, 용서로 이끄는 사람이 됩시다.

하늘이 열린 사람은 마음이 크고 트이고 그리고 이제 화평케 하는 일이 제일 목적인 사람입니다.  주님은 이제 그 사명, 화평의 사명의 길에 섰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성취하실 그  화평의 길에 서신 것입니다.  성령은 그 일에 협력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셨다는 표현은 출애굽의 광경을 배경으로하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유대인의 신을 신고 들어가서 유대인의 관점으로 보아야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관점의 핵심은 출애굽의 관점, 엑소더스의 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눈을 떠야 오늘 말씀의 뜻이 밝히 보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새로운 출애굽운동을 예고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이 물에서 올라오시는 것은 혼자 외롭게 올라오시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는 광경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예수님은 용서의 세계, 사랑이 충만한 평화의 나라로 저와 여러분, 수많은 사람을 이끌어 새출애굽을 시키는 일을 하시는 광경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요단강에서는 엄청난 큰 광경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 한 사람이 세례를 받고 한 사람이 성령을 받고 한 사람이 용서의 세계로 들어온 것이 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우리 속에서 함께 용서의 세계로 들어온 것을 믿어야합니다.  아, 주여, 저를 용서하심을 감사합니다. 주여, 저도 용서하겠나이다, 라는 이 고백 하나가 수많은 사람을 미움받는 칼 끝에서 벗어나 평안을 얻게 할 수 있습니다.  평화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평화의 영으로 비둘기같이 이 시간 우리 위에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여야합니다.


그러므로


넷째, 하늘이 열리기를 기도합시다

우리는 이 놀라운 평화의 나라, 평화와 화목의 나라가 열리기를 기도해야합니다.  주님은 이제 새출애굽의 길을 걸으시면서 이 일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그 길이 열린 것입니다. 


눅3: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이 열리기를 기도할 때 하늘이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의 사람들, 화평의 일에 힘쓰는 사람들에게 이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주님은 후에 이렇게 이해시켜 주셨습니다. .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하늘이 열린 사람이 되어 평화의 사람,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면 큰 축복의 문은 열린 사람이 됩니다.


첫째, 기도응답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기도응답의 길이 열려서 기도가 올라가고 응답이 내려오는 광경입니다. 오르락, 내리락, 하는 천사들이 우리의 기도를 올리고 응답을 전달해 내려줍니다. 오르락, 내리락, 이 은혜를 받습니다.


둘째, 큰 비전, 소망의 사람이 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포로되어있는 상태에서 민족 구원의 큰 비전을 보기 시작합니다.  열린 하늘로부터 말입니다.


겔1:1 제 삼십 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하나님의 비전이 하늘을 열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셋째, 물질적 축복의 문도 열립니다

하늘이 열린 사람에게 주시는 축복이지요.


말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신28: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다섯째, 모든 시험을 이기는 승리자가 됩니다

예수님이 하늘이 열린 체험후 성령으로 이끌리신 일은 광야의 시험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렇게 해서 육체중심으로 살아라,는 시험을 말씀을 중심으로 살겠다, 고 이기셨습니다.  우리가 삼인의 교회운동으로 주일 말씀을 서로 나누는 일을 중요시하게 하는 것도 말씀으로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을 의심하여 혹시 하고 시험하는 의심의 충동도 이기셨습니다. 말씀은 의심할 필요도 없다, 고 이기셨습니다.  성전의 높은 곳에서 자기를 높이는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결국 하늘이 열린 사람, 겸손의 새출애굽의 사람, 평화의 사람은 용서를 이끌어서 교회에 큰 화평을 주고 인생에 큰 위로를 주는 일 때문에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라로 할 일이 넘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제 하늘이 열리는  처음 시작은 바로 회개를 통해서 우리 마음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면 하늘 문이 이미 열린 것을 볼 것입니다. 이미 용서받은 것을 보시면서 우리를 향해 웃으시는 하나님의 낯을 보게 됩니다.  아, 우리가 이제 용서를 믿고 용서를 하며 수많은 사람을 요단강에서 이끌어 용서받고 용서하는 삶으로 이끄는 일을 합시다.  정말 회개하고 우리 위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고 너를 사랑한다, 아들아,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평화의 사람, 마음이 큰 사람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마태복음 3:13∼17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위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세 가지 영적 사건이 일어납니다.


첫 번째 영적 사건, 하늘이 열린 것

이는 곧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뜻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 스스로 결정하고 시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뒤 시작해야 합니다. 시작하는 문은 언제나 성령이 여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늘이 열리는 것은 창세기 족장들이 하나님을 만날 때 가진 체험입니다. 야곱이 자기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피해 도망가다가 벧엘에서 돌베개를 베고서 잠을 자는데 하늘 문이 열리고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광경을 보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7)라고 고백했습니다.

에스겔이 계시를 받았을 때도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겔 1:1).

스데반이 순교할 때도 하늘이 열렸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용서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도 하늘 문이 열렸을 때 종말의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도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다메섹에 가다가 하늘이 열리면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이 당당히 죽을 수 있었던 것도 하늘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영적 사건,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온 일

예수님의 머리 위에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터치입니다. 여기서 ‘터치’란 단순히 ‘만지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플러스 인이 되다’ ‘접촉되다’입니다. 신앙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삶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의 터치가 일어났습니다. 한 번 번쩍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임재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 듯, 성령의 생기와 능력이 각 개인의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스며들어 사고와 언어, 행동을 주관하셨습니다. 성령은 머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입니다.


세 번째 영적인 사건,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는 것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오늘 본문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를 모두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자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성령은 비둘기 같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임하셨습니다.


성령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성령 세례 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성령세례를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요? 하늘 문이 열릴 때입니다. 하늘 문이 어떻게 열립니까? 순종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내 마음 속에 들려오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친다고 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심지어 실패도 괜찮습니다.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오늘의 실패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이 나라 이 민족도 변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저 북한 땅에 불면 북한도 변할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는 사건(사 42:1-9, 행 10:34-43, 마 3:13-17)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심을 찬양하는 주현절입니다. 이 세상에는 억압과 전쟁, 불의와 고통이 그 모습을 바꾸며 이어집니다. 

주현절의 시작입니다. 이 땅에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저는 그것을 ‘하늘이 열린 사건’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성서는 ‘하늘이 열리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무엇을 가리켜 ‘하늘이 열린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무겁게 덮고 어둠이 걷히고, 진실과 평화가 세워지는 것을 가리켜 ‘하늘이 열리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의 정신을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제국주의적 폭압의 질서를 극복하려는 해방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 안에는 두 가지 핵심사건이 있습니다. 출애굽과 십자가 사건입니다. 제1성서는 이집트 제국으로부터 고통 받던 노예들의 탈출한 ‘출애굽’ 사건을 동심원으로 하여 이야기가 전개되고, 제2성서는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정치범을 처형하는 형벌인 십자가에 예수가 달려 죽었지만, 도리어 하나님이 그를 살려내셨다는 이야기를 동심원으로 하여 모든 활동이 펼쳐집니다.

성서의 시각은 제국주의자들의 패권적 입장이 아니라, 억눌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합니다. 또한 죽임당한 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준 하늘의 목소리를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해방적이고 신학적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 종교에는 이런 성서의 정신이 잘 전달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교회가 제국주의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성공주의와 패권주의에 물들고 말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아이러니한 현상입니다. 교회가 패권주의에 물들자, 진보적인 사상들이 탈종교적인 성격을 가지면서 성서의 정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을 갖게 된 것입니다. 진보적인 기독교 신학 역시 탈종교적인 목소리를 띠어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나치에 대항한 기독교 윤리학자 디이트리히 본훼퍼 목사의 세속화 신학이요, 해방신학의 북미주 파트너였던 토마스 알타이저의 사신(死神)신학입니다. 이 신학들은 신의 죽음과 교회의 죽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보다 세속적인 방식으로 신앙의 길을 찾아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신이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 이후 20세기의 진보사상 대부분이 이렇게 탈종교적인 특징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오면서 많은 진보사상들이 거꾸로 재종교화하는 경향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특히 바울의 사상에 대한 재해석이 정치철학에서 일어납니다. 바울은 로마제국의 주요도시를 돌면서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데 성공한 인물입니다. 그의 사상과 행동을 살펴보면서, 오늘날의 제국주의적 패권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려는 것이지요.

그런 흐름 가운데 알랑 바디우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바울이 제국주의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활용했던 전략이었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재해석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전략의 중요성을 충분히 전수받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죽고 난 후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로 포섭되면서, 바울의 논리마저 제국주의화 되어 해석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진보적인 기독교 신학자들도 바울의 전략을 예수운동의 보수화라고 평가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울에 대한 오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이 반복해서 말했던, 피스티스(믿음), 엘피스(소망), 아가페(사랑)는 모든 패권적 질서를 극복하려는 해방의 이상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가 최초로 세워지던 당시를 상상해 보십시오. 로마가 지중해를 둘러싸고 지배하던 시대에 유대 사회는 그 식민 질서에 봉사하는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종교 체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게 삶인가, 이것도 믿음인가’ 하고 묻는 사람들이 등장한 것이지요. 그 가운데 예수의 아가페 정신을 모토로 삼은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그 일에 앞장 선 사람이 사도 바울이 있었죠. 그는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을 돌면서 새로운 공동체를 세워갔습니다. 그의 무기는 세 가지, 믿음, 소망, 사랑이었습니다. (살전 5:8)

새해를 맞으며 목사로서 자문해봅니다. 우리 신앙공동체는 무엇을 꿈꾸는가? 어떤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이 공동체에서 서로 부대끼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 교회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을 길러내고 있는가? 이것은 아마 저만의 고민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깊은 위기의식이 드리어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신학이 부족해서도 아니요, 의지가 약해졌거나 윤리가 모호해져서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더 본질적인 문제의 부수현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공동체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왜곡된 데 있습니다. 믿음을 구성하는 앎이 잘못되면 신앙이 길을 잃습니다. 소망을 지탱하는 뜻이 왜곡되면 영적 질병에 걸립니다. 사랑이 숨 쉬지 못하면 공동체가 사소한 일에서도 질곡에 빠집니다.

어떻게 다시 하늘이 열리는 사건을 볼 수 있는가? 주현절 아침 우리가 생각해볼 과제입니다.

 

[예수가 꿈꾼 ‘모든 의’를 위해서 / 마태복음 3장 13-17절]

마태복음 본문은 세례를 받기 위해 요한을 찾아가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도리어 ‘내가 선생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이 나에게 세례를 받고자 왔는가!’ 하고 만류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요한을 설득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나의 뜻대로 하십시다. 그렇게 해서 모든 의를 이루어봅시다! 결국 요한이 수락하여 예수께 세례를 베풉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리는 것을 예수가 보게 됩니다. 이어서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사람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 가운데 눈여겨볼 대목은 16절에 나오는 표현, “그 때에 하늘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이 열리는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인데, 그것이 언제 벌어졌느냐 하면, 예수가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요한의 세례를 받았을 때입니다.

‘모든 의’(pasan dikaiosynēn)란 무엇일까요? 수수께끼와 같은 이 말은 앞으로 예수의 삶을 통해서 그 의미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것은 예언을 통해서 이어져온 오랜 기다림이요, 시대가 갈구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다리고 갈구하고 있나요?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에 관한 것입니다. 패권적 힘의 질서에서 자신들의 삶을 빼내려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하나님의 종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는 사람이 역사에 태어나는 것을 가리켜 성서는 ‘하늘이 열리는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흥망성쇠의 굴곡이 있습니다. 종교적 위기가 생기는 경우는 대부분 내부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복음의 정신이 자기시대보다 뒤쳐져서 힘을 잃을 때입니다. 복음이 시대보다 뒤쳐졌다는 것은 복음이 시대적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말이요, 사람들의 아픔을 치유할 능력을 잃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한 무능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종교가 기득권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종교는 정복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혀서, 대결의 승리를 목표로 삼는 전투적 종교가 되어갑니다.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예수의 정신은 사라지고, 안전과 승리를 판매하는 황제의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의 종교이자 율법의 종교가 되면, 더 이상 하늘이 열리지 않습니다.

한국교회가 21세기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서가 들려준 복음의 정신에 충실해야 합니다. 고통과 질곡의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자비로운 방식으로 열고자 했던 예수의 정신이 살아나야 합니다. 예수가 이루고자 했던 ‘모든 의’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려했던 바울처럼 믿음의 모험을 벌여야합니다.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가능성이 솟아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다리는 종(이사야서 42:1∼9)

이사야서 42장에 나오는 본문은 ‘종의 노래’입 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므로  무슨 전근대적 신분주의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신앙적인 고백에서 ‘종(ebed)’이라는 말은 ‘하늘이 열리는 사건’을 위해 순종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종’이란 어떤 사람인가요?

그는 하나님이 붙들어주는 사람, 하나님이 택한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1절).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2절),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고, 진리로 공의를 베풉니다(3절). 그는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웁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말하시는 하나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는 당신의 종을 찾는 하나님, 이런 종이 있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소원을 보게 됩니다.


인간이란 본래 자유인으로 살고자 하는 심정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보다 고상하고 원대한 것을 향하여 한없이 복종하려는 마음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것, 그것이 믿음의 영혼이 가진 특징입니다. 영원한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바라는 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엘피스(ἐλπίς), 소망입니다.

기독교 정신의 아름다움과 힘은 소망하는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종교의 특징이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를 향하는 것이라면, 소망이야말로 이 특징을 잘 드러낸다고 하겠습니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넘어선 것에서 성스러움(sacred)을 느낍니다. 신앙인이란 세속적인 바람 너머의 소망을 구성해가는 사람입니다. 성스러운 것을 추구하는 삶에서 생명의 진정한 가치와 기쁨을 찾는 뚜렷한 의식이 바로 소망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5절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일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창조해 펴시고 땅을 만드신 다음, 땅위에 사는 백성에게 ‘생명(neshamah)’을 주시고, 땅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에게 ‘목숨(ruach)’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에는 뜻이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주님은 당신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당신의 종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의(義)를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이끌어내고, 어두운 영창에 갇힌 이를 풀어 줄 것”입니다. 7절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사야가 본 하나님의 뜻이요 다짐입니다. 본문의 마지막 두 구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나는 야훼다. 이것이 나의 이름이다. (ănî Yahweh hū šəmî) 내가 받을 영광을 다른 이에게 넘겨주지 않고, 내가 받을 찬양을 우상들에게 양보하지 않는다.”

눈먼 사람의 눈이 뜨여서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는 사건, 갇힌 이들이 풀려서 하늘로 향한 길을 걷는 사건, 그것이 하나님이 받고자 하는 영광이요, 하나님이 우상들에게 양보하지 않은 찬양이라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감당할 당신의 종을 찾습니다.

 

예수의 증인(사도행전 10:34∼43)

사도행전 본문은 고넬료라는 로마군인의 집에서 베드로가 한 설교입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증언하면서, 자신은 그것을 증언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하늘이 열리는 사건’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을 가리켜 이사야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표현했다면, 베드로는 ‘증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증인이란 헬라어로 ‘마르투스(μάρτυς)’ 라고 합니다. 그 ‘마루투스’의 의미는 “목격자(witness)” 보다는 “순교자(martyr)”에 가깝습니다. 일반적으로 ‘증인(證人)’이란 어떤 사건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증인’은 말보다는 삶을 강조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않습니다. 어떤 민족에 속하여도 편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 입니다(34∼35절).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에게 당신의 ‘성령과 능력’을 부어주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마귀에게 억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지만,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습니다(38∼40절). 우리가 증언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베드로의 마지막 증언은 “이 예수를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하기를,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교리 조각 몇 개를 믿는 싸구려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를 통해 열린 하늘의 사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바라며 하나님께 나옵니다. 무언가를 갈망하며 예수를 찾습니다. 그 끝에 발견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의 수난이 서로 얽혀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단지 기독교적 교리가 아니라, 인간의 경험이 움직여온 방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경제적인 풍요만으로는 다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그릇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방식으로 풍요로울 수 있는 삶을 추구합니다. 기독교는 그 삶을 가리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삶입니다. 여기서 사랑이란 그리스도의 고난을 증언하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증언이 진실하다는 것은, 형제자매의 고난, 이웃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참된 특징은 ‘고난의 친교’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교회가 이 고난의 친교를 망각하면, 가장 본질적인 삶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의 친교야말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 상징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늘이 땅에 임하는 방식이요, 땅이 하늘을 여는 열쇠입니다.

종교적 진리는 교리나 제도에 있지 않습니다. 교리와 제도는 ‘내용을 담는 형식’에 해당됩니다. 베드로가 증언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즉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기독교는 그 증언의 공동체, 곧 삶으로써 그것을 드러내려는 증인, 마르투스라고 하겠습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힘써야 할 삶의 경주입니다. 기독교적 경주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밀고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우성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하늘이 열리는 사건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늘이 열릴까요? 아니 어떻게 열려야 하늘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나라는 사랑이 이기는 세계입니다. 사랑이 이기는 교회, 사랑이 승리함으로써 하늘이 열리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파송사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했던 예수의 삶은 하늘이 열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한 베드로 또한 이 역사에서 열리는 하늘의 증인으로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깃든 곳이 하늘이 열리는 곳입니다. 오늘 그 사랑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http://www.hyanglin.org/home/board_cdIM31/1439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일곱 영
참조 / 이사야 11:1∼2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A shoot will come up from the stump of Jesse; from his roots a Branch will bear fruit. The Spirit of the LORD will rest on him-- the Spirit of wisdom and of understanding, the Spirit of counsel and of power, the Spirit of knowledge and of the fear of the LORD.     

* 유대인의 수(數)에 대한 특수한 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7이란 수는 6일 천지창조 후에 일곱째 날 안식하셨다는 하나님의 사역에서 “안식의 수”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안식”이란 “완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7이란 수를 “완전수”라고 합니다. 완전수가 발전하여 서구사회에서는 “행운의 수”라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3을 하늘의 수라고 합니다. 물론 자연계의 하늘에는 태양과 달과 별이 있는 것처럼 기독교 전통적인 신앙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으로 구분하여 3을 하늘의 수라고 합니다. 땅에서는 동서남북 방향을 네 가지로 구분하므로 4을 땅의 수라고 합니다.

하늘의 수 3과 땅의 수 4을 더하면 7이 됩니다. 그리고 하늘의 수와 땅의 수를 곱하면 12가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12라는 수는 이스라엘의 지파 수이며 동시에 완전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곱 영이란 하나님의 완전한 영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 하나님의 일곱 영 - τὰ ἑπτὰ Πνεύματα τοῦ Θεοῦ
                      the seven spirits of God    


요한계시록 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요한계시록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음성(音聲)을 듣는 신앙(信仰)의 길

한국에서 한 교회의 고등부를 다니던 시절, 내게 신앙적으로 큰 도전을 주신 선생님 한 분이 계셨다. 소위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강했던 그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삶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늘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과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참 궁금했다. 그래서 그 방법을 여쭈어 보았더니 선생님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 중 하나는 기도나 묵상 중에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 그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이 질문에 칼 융(C. G. Jung)의 종교심리학이 새로운 이해의 빛을 던져준다.


최근 영성학에서는 학문간의 대화(interdisciplinary methods)를 통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철학, 심리학, 문화인류학, 비교종교학 등 인접학문과의 대화는 영성학을 그 이전보다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고 있다. 특히 인간의 무의식을 연구하는 심리학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어서, 영성을 형성해가는 인간주체의 내면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새롭게 열리고 있다. 실제로 필자는 주위에서 영성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심리학의 글을 읽으면서, ‘이제야 비로소 길을 찾았다'며 무릎을 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심리학은 이전에 영성의 연구에서 설명하지 못하고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던 것들을 설명해냄으로써 인간영성의 신비스러운 본질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심층심리학에서 종교와 영성의 연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 중의 하나로 칼 융(Carl Gustav Jung)을 들 수 있다. 융이 심리학적으로 이해하는 종교의 출발은 인간은 종교적 존재(homo religiosus)라는 그의 확신에서 기인한다. 융은 인간이 본질상 종교적인 존재라고 이해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 영혼에는 특별한 종교적인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융은 말한다.

“인간 영혼은 그 안에 하나님과 관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결코 일어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능력을 심리학적인 용어로 하나님 이미지의 원형(the archetype of the God-image)이라고 부른다.”

인간 영혼에 내재해 있는 이 무의식적인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도록 만들어 준다. 융이 말하는 하나님 이미지의 원형을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 하나님 이미지의 원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게 다가가며, 무엇보다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이러한 인간 영혼이 가진 하나님과 관계하는 능력 때문에 종교는 본질적으로 인간 영혼의 내면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융은 기독교인들이 외면적인 신앙의 모습들에만 치중할 때에 그들의 가장 깊은 영혼에는 어떠한 변화나 성숙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모두 밖에 가두어두고, 인간 영혼 안에 내재하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융의 말 속에서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한 탄식을 새롭게 듣게 된다. 인생의 의미를 찾아 젊은 시절을 덧없는 시간 속에 보냈던 어거스틴은 후에 그의 가장 깊은 내면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후 이렇게 탄식한다.

“너무 늦게 당신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렇게 오래되셨건만 늘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당신은 내 안에 계셨건만, 나는 밖에서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고백록 X.27.38).

하나님은 인간 영혼의 내면에서 발견되는 분이다. 그래서 융에 따르면,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인간 무의식 속에 있는 하나님 이미지의 원형을 의식 속으로 이끌어 내는 노력과 작업이 필수적이다.


융 심리학은 무의식 속에 있는 것을 의식 속으로 이끌어내는 것에 그 핵심이 있다. 융에 따르면 인간 정신세계는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뉘어지는데, 무의식은 또한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으로 분류된다. 의식의 중심에는 자아(the Ego)가 있고, 무의식의 중심에는 초자아(the Self)가 있다. 이 자아와 초자아는 인생 전반을 걸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정신 건강과 인간 영성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인간의 무의식 안에는 다양한 원형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우리가 의식하든지 못하든지 간에 항상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다.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무의식은 끊임없이 인간 삶에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며 그 숨은 의미들을 구현하고자 한다. 초자아의 목적은 인생 전체를 걸쳐서 무의식 속에 있는 원형들(archetypes)을 의식 속으로 이끌어내어 그 본래의 의미와 기능을 드러내는 데 있다. 따라서 융 심리학의 기본 목표는 인생의 단계마다 필요한 무의식의 원형들을 의식 속으로 이끌어내는 데 있다. 필요한 무의식의 원형들이 적절히 이끌어 내어지지 않았을 때 그것은 정신건강을 위협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신질환을 초래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의식적으로 경험되어야 하는 중요한 무의식의 원형들 중의 하나가 바로 하나님 이미지의 원형(the archetype of the God-image)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하나님 이미지의 원형을 의식 속으로 이끌어내어 경험할 수 있을까? 여기에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무의식을 통해 말씀하시는 비밀이 담겨져 있다. 다음 회에서 인간 무의식의 경험과 영성의 관계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칼 융(C. G. Jung)은 현대인이 경험하고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로 “영적인 빈곤”(spiritual poverty) 현상을 대표적으로 꼽는다. 지난 회에서 살펴 본대로 융 심리학의 기본목표는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있는 원형들(archetypes)을 의식 속으로 적절하게 이끌어내어 의식과 무의식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에 있다. 의식 속에서 경험되어야할 중요한 무의식의 원형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하나님 이미지의 원형(the archetype of the God-image)”이다. 현대 이전의 사회는 종교와 신화, 상징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이 하나님 이미지의 원형이 사람들에게 손쉽게 경험되어졌다. 그러나 근대화의 과정 속에 합리주의적 사고와 세속화가 시대의 정신을 이끌어가면서, 이제 종교와 상징은 그 전통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한계를 경험하고 있다. 결과는 하나님 이미지의 원형이 의식 속에서 경험되지 못하는 영적 빈곤의 상태이다. 최근 들어 급증하고 있는 기독교 영성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현대인이 경험하는 영적 빈곤에서 기인하는 자연스러운 갈망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내면에서 발견되는 분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무의식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융에 따르면, 인간이 무의식 속에 있는 하나님 이미지의 원형을 의식 속으로 이끌어내는 것에 인간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비밀이 담겨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본질상 종교적인 존재(homo religiosus)이기 때문에 하나님 이미지의 원형이 계발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전인건강을 위협하는 요소가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 이미지의 원형을 어떻게 의식 속으로 이끌어내어 경험할 수 있을까? 그것은 상징의 신비를 통해 가능하다.


상징이란 어떤 알려지지 않은 것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해내는 수단이다. 이것이 아니고서는 그 무언가를 도무지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상징이다. 상징이 은유나 기호와 다른 것은 그 의미를 이성적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상징의 의미가 완전히 파악이 될 때, 상징은 그 기능을 상실하고 더 이상 상징이 되지 못한다. 요약하면, 상징이란 자기 자신을 넘어서 무언가를 지시하는 것, 이 방법 외에는 그 지시대상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 그리고 그 의미가 완전히 파악되지 않고 신비로 남아있는 것이 상징이다. 상징의 이러한 신비스러운 기능 때문에 융은 인간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가장 적절한 수단이 상징이라고 말한다.


인간 무의식의 원형들은 그것 자체로는 의식에 경험되지 않는다. 무의식의 원형들이 경험되기 위해서는 수단이 필요한데, 바로 상징이 그 통로 역할을 한다. 상징은 의식과 무의식을 매개하여 무의식의 원형들을 의식 속으로 이끌어내어 경험하도록 돕는다. 우리 주변에는 무의식의 통로가 되는 수많은 상징들이 있다. 융 심리학에서 꿈은 무의식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상징이다. 우리가 매주 드리는 예배 또한 수많은 상징들로 가득차 있다. 예배당에 들어서며 발견하는 십자가, 스테인드 글라스(유리화)는 내면의 신비와 연결하게 우리를 도와준다. 예배에서 부르는 찬송, 앉고 일어서는 행위, 기도, 성만찬. 이것들은 모두 거대한 상징들이다. 종교적인 용어, 복장, 심지어는 교리 또한 상징에 속한다. 설교자들은 자신의 설교가 성도들을 내면 깊은 곳과 연결시켜 주는 하나의 상징이 되어야함을 명심해야한다.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무의식과 의식을 매개하는 상징으로 글쓰기를 강조하고 싶다. 미국에 와서 공부를 하면서 생활 속에서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되었다. 어설픈 영어 때문에 겪은 일화들을 소개하자면 밤을 새워 이야기해도 모자랄 것이다. 부족한 영어 때문에 내 생각을 잘 전달할 수 없을 때, 미국인들과는 다른 액센트 때문에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때, 나는 종종 무기력과 무능력을 느끼곤하였다. 말에 힘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영어로 글을 쓸 때면 문제는 한층 심각해진다. 보통 글쓰기는 생각을 더 깊게 한다. 한글로 글을 쓸 때, 처음에는 무슨 말을 써야할지 모르다가도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면 생각이 정리되고 자라나기 시작한다. 마치 글쓰는 행위가 나를 생각의 뿌리까지 연결시켜 주는 기분이다. 하지만 영어로 글을 쓰는 것은 사뭇 다르다. 부족한 영어가 나의 생각을 깊게 해주기는커녕 글쓰기의 발목을 잡는다. 글의 흐름은 계속해서 끊기고, 글의 정신(분위기)은 점점 엷어져간다. 많은 경우 영어 글쓰기는 생각의 중심을 파고들지 못하고 언저리를 맴돌다 끝나는 때가 허다하다.


인간의 언어는 기호와 상징 두 가지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위에서 말한 나의 영어 글쓰기는 기호로서의 언어이고, 한글 글쓰기는 상징으로서의 언어이다. 대화와 정보전달이 주목적인 기호로서의 언어는 무의식의 통로가 되는 상징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언어사용은 의미전달을 목표로 하는 표면적인 수준에만 머무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를 상징으로 사용할 때, 언어는 의식이 상상하지 못한 내면의 깊숙한 곳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융은 말하기를, 문학가들이 작품을 쓸 때 그 행위의 주체는 문학가 자신이 아니라 무의식의 원형들이라고 강조한다. 곧 문학가들은 내면의 소리에 형태를 부여하여 언어로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원형들은 상징의 역할을 수행하는 언어를 통해 의식 속으로 전달되고 경험된다.


독자들도 오늘부터 이러한 상징으로서의 글쓰기를 영성훈련으로 시작해보면 어떨까 싶다. 하는 요령은 이렇다. 먼저 생각의 재료를 하나 정한다. 주로 성경 말씀에서 한 부분이나, 영성가들의 고전에서 한 부분, 혹은 성화나 삶에서의 한 장면도 괜찮겠다. 호흡을 고르게 하면서 주어진 생각의 재료를 가지고 묵상을 시작한다. 생각에도 층이 있다고 가정하면서 한층 한층 보다 깊은 곳으로 내려가본다. 이때 떠오르는 이미지와 장면이 있으면 그것을 부여잡고 묵상을 계속한다. 묵상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후에는 이제 상징으로서의 글쓰기를 시작한다. 묵상한 과정, 내용을 기록하는데,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내 삶의 무엇이 그것을 발견하게 했는지 써내려간다. 특히 묵상 중에 떠오른 이미지들에 집중한다. 천천히 묵상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나, 때로 의식(혹은 무의식)의 흐름을 빠르게 여과없이 적어나간다. 이러한 상징으로서의 글쓰기는 내면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 관심 있는 분을 위한 책 소개 :
C. G. Jung, Psychology and Religion (Yale University Press, 1938).

* 관심 있는 분을 위한 책 소개 :
C. G. Jung, Modern Man in Search of a Soul (Harcourt, 193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호세아 2:16)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의 핵심은 삶에서 복음을 늘 새롭게 발견하고 경험하며 사는 것에 있다. 기독교 역사 속에 수많은 영성가들과 신학자들, 개혁가들은 그들이 새롭게 발견한 복음에서 그들의 신학과 영성의 토대를 발견하였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보면 이것만큼 쉬운 질문도 없다. 신앙이란 복음에, 이 정말 기쁜 소식에 늘 새롭게 감동하며 사는 것이다. 처음에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는 기뻐하다가 점차 시들해지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롭고 깊은 차원으로 복음에 감격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신앙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신앙이 복음에 늘 감격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일까? 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신학적, 철학적인 정의 말고, 우리들 자신의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복음의 정의가 우리에게는 있는가? 사실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복음의 기쁜 소식은 각자의 삶에서 다양하게 경험되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 저마다 복음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의 말로 표현하는 것은 우리의 영성생활에 있어서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 신학자들의 화려하고 학문적인 복음의 정의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시골 아낙네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흥얼거리는 삶에서 체험한 복음과 믿음의 고백을 더 소중하게 보실 것이다.

내가 발견한 복음을 소개하자면, 가장 단순한 문장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이다. 사실 이 복음에 대한 정의는 나만의 독특한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고, 가장 가깝게는 내 어머니가 늘 하시는 말씀이다. 7남매를 키워내신 내 어머니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처럼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참 많은 어려운 일들을 겪으셨다. 그런데 내가 자라오면서 가장 많이 들어온 말은 어머니가 늘 입버릇처럼 하시던 “하나님이 날 사랑하셔서” 라는 말이었다. 어머니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나, 기쁜 일이 있을 때나 늘 “하나님이 날 사랑하셔서” 하시는 거였다. 그것을 매일 보고 들으며 자란 나는 처음에는, “아, 하나님이 어머니를 참 사랑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그럼, 어머니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도 사랑하시겠네!” 라는 참으로 위대한(?) 발견을 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복음의 핵심은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알려주지만, 호세아서만큼 그것을 감동적으로 전해주는 책도 드물다. 호세아서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당신의 백성을 먼저 찾아가 그들을 달래시고 사랑을 고백하시는 하나님의 애틋한 마음을 잘 담아내고 있다. 호세아서의 한 부분을 잠시 묵상해 보자.

호세아 2:7∼17(공동번역)
본문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두 가지 고발과 그에 따른 제재를 내리신다. 하나님이 고발하시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바알 신에게 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바알이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문 7절은 이렇게 말한다.

“빵과 물을 주고, 양털과 모시를 주고, 기름과 술을 줄 그이에게 가야지.”

삶에서 필요한 것과 삶의 만족과 기쁨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인데, 이스라엘은 바알이 그것을 준다고 생각하고 바알 신에게 가겠다는 것이다. 삶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나서 헛된 것을 찾아가 만족을 구하는 어리석은 모습이다. 사실 우리의 모습이 꼭 이와 같다.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혜와 학력과 돈을 의지하고 그것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첫 번째 이스라엘의 죄의 고발에 이어서 그에 따른 제재가 나오는데, 이스라엘이 바알에게 가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그 길을 가시와 담으로 막아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두 번째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신다. 본문 10절의 말씀이다: “내가 곡식과 햇포도주와 기름을 주었으나 그것도 모르고, 재산을 불려 주었더니, 금과 은으로 바알을 만들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다. 곡식도 주시고, 부도 주시고,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우상을 만들고 우상을 섬기는 일에 사용한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헛된 일에 사용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과도 이렇게 똑같은지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많은 은혜를 주셨는데, 우리는 이 받은 은혜를 헛된 인생의 목표나 나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두 번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주신 은혜를 모두 거두어가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고발과 정죄 속에서 마지막 결론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된 것으로 바꾸어 버리는 자에게는 멸망과 심판이 어截?듯한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본문 16-17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를 꾀어내어 빈들로 나가 사랑을 속삭여 주리라. 거기에 포도원을 마련해주고 아골 골짜기를 희망의 문으로 바꾸어 주리라. 그제야 내 사랑이 그 마음에 메아리치리라. 애급에서 나오던 때, 한창 피어나던 시절같이.”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자들을 하나님이 먼저 찾아가셔서 그들을 살살 달래고 꾀어내어서 첫사랑의 장소인 빈들로 데리고 나가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귀에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니?' 하고 사랑을 속삭여 주겠다는 것이다. 이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 일인가? 어떻게 상처를 받은 사람이 온갖 사랑과 은혜는 다 받고서 당신이 싫다고 떠난 사람을 먼저 찾아가 달래면서 사랑을 속삭일 수 있단 말인가? 우리 같으면 찾아가 복수나 안하면 다행일 것이다. 우리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은혜이고, 복음인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곁을 떠났을 때에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 우리가 때로 절망 가운데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한결같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결정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대신해서 우리를 살릴 정도로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롬 8:38∼39). 혹시 내 자신이 가치 없고 초라하다고 느껴질 때 이 사실을 꼭 기억하자.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나를 살려 놓을 정도로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소중한 존재인지. 이 놀라운 복음에 날마다 감격하며 사는 것이 영성생활의 핵심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에게서 하나님을 없애 주십시오!
영성가 이야기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1 

중세 종교재판이 생기기 이전, 유례없는 한 이단논쟁이 당시의 교회와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이단논쟁의 풍파에 휩싸인 주인공은 바로 독일의 도미니칸 수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약 1260∼1328)였다. 무려 3년여 동안 지속된 이단논쟁에서 에크하르트는 적대자들의 고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옹호해갔다. 이 논쟁에 대한 기록은 에크하르트의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들에 대한 설명을 제공해 주고 있어서 영성가 에크하르트를 보다 깊게 이해하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논쟁의 결말은 결국 당시의 교황이 1329년 3월 27일 에크하르트를 정죄하는 교서를 내림으로써 일단락되었다. 특이한 것은 교황의 교서가 에크하르트가 이미 죽은 지 일 년 후에 내려졌다는 것이다. 결국 교황의 정죄는 에크하르트 자신에 대한 정죄라기보다는, 중세 말에 우후죽순처럼 솟아난 이단들을 두려워한 교황이 에크하르트의 논쟁의 소지가 다분한 가르침들이 이단에게 악용될 것을 두려워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교황의 두려움은 에크하르트의 가르침을 살펴볼 때 사실 이해할 만하다. 에크하르트의 가르침은 때로 모순적이고, 독선적이며, 심하게는 신성모독의 발언까지 담고 있다. 예를 들면, 한 기도에서 에크하르트는 “하나님, 나에게서 하나님을 없애 주십시오(I pray God to rid me of God)” 하고 기도한다. 또한 에크하르트는 즐겨 “하나님은 그 무엇도 아니다(God is nothing at all)” 라고 말한다. 이단 논쟁에서 적대자들을 심기불편하게 만든 말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본질이 나의 본질이다(God's essence is my essence)” 라는 에크하르트의 천명이었다. 이런 에크하르트의 가르침들은 에크하르트 자신의 말과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이는 그 바른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교황의 교서가 내려진 이후 에크하르트의 영향력은 독일에서의 몇몇 추종자들을 제외하고는 제한적이었다. 에크하르트의 가르침은 끊임없이 교권, 이단, 교리라는 무거운 단어들 밑에 눌려 그 의미가 드러나지 못했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교권의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사고하게 되면서, 에크하르트의 가르침도 그 멍에에서 풀려나 자유로운 인간정신과 마주하게 되었다. 19세기부터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에크하르트에 대한 논의는 최근 교황이 에크하르트의 가르침을 인용하기까지 이르면서, 하나님을 보다 가까이 느끼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보고가 되고 있다.


에크하르트를 이해하기 위해 그가 말하는 “무지(unknowing)”에 대한 개념을 먼저 생각해 보도록 하자. 에크하르트는 신학자요 철학자인 동시에, 영성가요 설교가였다. 그의 라틴어 저서는 신학자로서의 에크하르트를 잘 보여주고, 중세 독일어로 행한 설교와 저서는 에크하르트의 영성가로서의 면모를 잘 드러내준다. 에크하르트는 이 신학자(Lesemeister)와 설교가(Lebemeister)의 두 면모를 함께 고려해야 그의 진면목을 감상할 수 있다.


설교자로서의 에크하르트에게는 커다란 딜레마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그의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이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숨겨진 신비와 충돌하고 있는 것이었다. 에크하르트에게 하나님은 인간의 어떠한 말이나 개념으로도 담아내거나 표현할 수 없는 신비이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의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급진적인 부정의 신학(radical apophaticism)으로 이어졌다. 곧 인간의 어떠한 언어도 하나님을 표현할 수 없고, 하나님에게 어떠한 이름을 붙이는 것도 불가능하기에 하나님은 “그 무엇도 아닌” 분(God is nothing at all)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떠한 분으로 정의하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멀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에크하르트는 우리가 가진 하나님에 대한 개념과 언어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무지화(unknowing)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개념과 언어들이 없어졌을 때, 진정한 신비로서의 하나님이 이 무지 속에 우리 앞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에크하르트는 설교 속에 소위 “충격요법”(shock therapy)을 사용하기를 즐겨한다. 이 충격요법은 겉으로 보기에는 신성모독에 가까운 표현들을 사용하는 것인데, 그 목적은 청중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기존의 개념들을 도전하고 해체하여 하나님과의 침묵의 합일(the silent union)로 이끄는 데 있다. 에크하르트는 말한다: “인간 영혼이 하나님은 모든 자연과 다르다는 지식을 가질 때, 그 영혼은 경외의 상태에 이르고, 더 깊게 나아가서는 침묵의 상태에 다다른다. 그 침묵과 함께 하나님은 인간 영혼의 깊은 곳으로 침잠해 들어오시며, 인간 영혼은 은혜 안에 머무르게 된다.” 하지만 이 침묵의 합일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신비로 남아계신다.


글의 서두에 소개한 에크하르트의 기도는 이러한 그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하나님, 나에게서 하나님을 없애 주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이라는 이름 안에 담아놓은 나의 모든 아집과 독선을 버리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이것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놓은 나의 모든 욕심과 이기심을 벗어나게 해달라는 간청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만든 모든 거짓된 하나님을 넘어서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해달라는 절규이다. 중세시대에 이 절규가 에크하르트가 없애기를 기도했던 그 하나님에 의해 침묵당했지만, 이 간절한 소망은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들의 기도 속에 계속되고 있다.

* 관심 있는 분을 위한 책 소개 :
Bernard McGinn, The Mystical Thought of Meister Eckhart: The Man From Whom God Hid Nothing(Crossroad, 2001).

unio mystica영성가 이야기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2 

기독교영성이 추구하는 목표는 무엇일까? 더 넓게는 기독교인이 추구하는 신앙생활의 목표는 무엇일까? 평생을 두고 씨름해야 할 것 같은 이 질문을 오늘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기독교영성에 대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소위 말하는 “신비주의”에 있다. 요즘 젊은 세대가 자주 쓰는 말 가운데, 이성 앞에서 과묵하게 분위기를 잡으며 자신을 잘 노출하지 않는 사람을 일컬어 “신비주의 전략”을 쓴다고 한다. 우리는 “신비주의”라는 말에서 무언가 비밀스러운 것, 신비에 싸인 것, 초자연적인 마술과 같은 것을 생각한다. 그래서 기독교인들도 “신비주의”하면 쉽게 떠올리는 것이 오순절운동, 기도원, 성령의 은사 등이다. 이러한 신비주의와 은사(예를 들면, 방언, 예언, 환상 등의 신비경험)를 동일시하는 경향 때문에 이성과 말씀을 강조하는 신앙인들은 신비주의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하지만 기독교 신비주의(Christian mysticism)는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 그 목표가 아니다. 영성가들은 그 누구보다 신비경험을 많이 한 사람들이지만, 그것 자체가 그들의 목표가 되지는 않았다. 중세의 영성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약 1260-1328)는 소위 말하는 신령한 은사의 위험성에 대해서 지적한다. 에크하르트는 예언이나 환상과 같은 초자연적인 은사의 유익성에 대해 인정하면서도, 이것 자체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경고한다. 초자연적인 경험이나 은사는 보다 근본적인 목표를 위해 봉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크하르트가 이야기하는 근본적인 기독교영성의 목표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신비한 합일”(unio mystica)이다. 에크하르트는 모든 만물은 하나님과 하나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하나님과의 신비한 합일은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간 것처럼 어떤 환상과 직관에 사로잡힌 상태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에크하르트는 하나님과의 합일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또 현재적인 경험이어야함을 강조한다. 하나님과의 합일을 이룬 사람은 삶의 작은 것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사람이다. 얼굴에 스치는 바람에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민감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민감성(mystical consciousness)이 하나님과의 합일을 이룬 사람의 특징이다.


사실 하나님과의 합일에 대한 가르침은 에크하르트가 독창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에크하르트의 견해는 기독교 영성사에 면면히 이어져내려온 기존의 하나님과의 합일에 대한 가르침을 더 깊게 하고 도전한다. 에크하르트의 독창성은 우리가 하나님과 합일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은 우리와 하나님이 “같은 본질”(God’s essence is my essence)이라는 그의 확신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하나의 근본을 나누어가지고 있다. 따라서 에크하르트는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내면 깊은 근본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근본으로 들어가야한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자신을 먼저 알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한 신비의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의 내면 깊은 곳으로 관심을 돌린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거짓된 나를 하나하나 벗겨가다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나, 곧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근본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 하나님과 내가 나누는 동일한 근본 속에서 나와 하나님은 하나가 된다. 나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이 되고, 하나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이 된다. 하나님과 구별이 없는 이 상태(a fused idendtity)가 바로 에크하르트가 이야기하는 하나님과의 신비한 합일(unio mystica)의 순간이다.


주목할 만하게도 하나님을 담아내는 사상에는 동양, 서양의 구분이 없다고 강조하던 한국의 영성가 다석 류영모에게서 우리는 에크하르트와 유사한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다. 류영모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 곧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얼나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곧 류영모 영성의 목표는 “하나님이 주신 얼나(성령)로 하나님과 같아지고 하나되자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닮은 영성의 얼나”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온 하나님의 형상(얼나)”이다.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 형상인 얼나는 우리와 하나님이 함께 나누는 동일한 근본이다. 따라서 류영모는 에크하르트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류영모는 말한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굴러가다가 날아오르듯이 사람은 생각으로 추리하다가 초월하게 된다. 그리하여 영원한 세계(하나님나라, 얼의 나라)로 직입하여 직관하게 된다. 그런데 초월해서 들어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제 속으로 자기의 뿌리 밑둥을 제가 파고 들어간다. 하나님이 따로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소자(小子, 아들)되는 얼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다.”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근본인 얼나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이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길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 된 근본 속으로 파고들 수 있을까?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하나 되는 신비적 합일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다음 회에서는 에크하르트가 들려주는 신비적 합일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서, 그리고 신비적 합일을 이룬 사람의 삶의 특징은 어떠한지 자세히 다루어보자.

* 관심 있는 분을 위한 책 소개 :
Meister Eckhart: The Essential Sermons, Commentaries, Treatises, and Defense. Translated by Colledge, Edmund &McGinn, Bernard. Paulist Press, 1981.

완전한 자유 :
이유 없이 살아가기 영성가 이야기 - Meister Eckhart (3) 

기독교 영성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신비한 합일(unio mystica)을 이루는 것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약 1260∼1328)는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근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살려낼 때, 우리는 하나님과 구분이 없는 합일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하나가 되는 순간, 삶의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과의 합일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에크하르트가 들려주는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단절”(detachment)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주목해 보자.

“무소유의 행복!” 이 말은 내 차가 접촉사고가 나서 속상한 마음을 토로하고 있을 때 한 목사님이 내게 들려준 말이다. 어찌보면 진부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차를 산 지 일주일 만에 황당한 사고를 당한 나에게는 씁쓸하게 되새겨 보게 하는 말이었다. 행복은 분명 어떤 소유에 있지 않음을 잘 알지만, 살아가면서 점차 살림은 늘어가고, 그 가운데 아끼는 것들이 생기고, 어느덧 무언가에 의지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꼭 물건들만은 아닐게다. 내가 아끼는 일, 사랑하는 가족, 양보할 수 없는 가치들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매여 간다. 에크하르트는 삶의 모든 매임들을 끊어버리고, 삶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다.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길은 바로 이 모든 매여 있는 것들로부터 단절하는 행위에 있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 것도 알지 않으며 (무지에 대해서는 영성가 이야기27 참고),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합일을 위해서 무엇보다 끊어내어야 할 것은 나 자신이다. 그것은 마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누구든지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태복음 16:25)는 역설적인 진리이다.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우리가 끊어내어야 할 “나”는 타락하고 만들어진 “거짓 나”이다. 이것은 바울이 이야기하듯이, 내 속에서 끊임없이 육신의 법과 성령의 법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제어할 수 없는 나이다. 이것은 융(C. G. Jung)이 말한 것처럼, 사회의 관습에 적응하여 사람들에게 보여 지기 위해 만들어진 형식적인 나이다. 이러한 모든 거짓 나를 넘어선 참된 “나”는 하나님과 근본을 함께 나누는 초월적인 나이다. 이 하나님의 근본에 참여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짓된 나를 끊임없이 부정해야한다. 이처럼 거짓나의 해체(deconstruction of the created subjectivity 혹은 unbecoming the created self) 가운데 새롭게 태어나는 영원한 참나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신비한 합일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합일을 위해 철저한 단절의 삶을 이룬 사람의 특징은 삶에서 누리는 완전한 자유에 있다. 삶의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 이 사람은 어떤 이유 때문에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 마치 하나님이 일하시는 데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으로부터 자유로이 일하시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일하도록 만드는 이유를 제공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합일을 이룬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된 근본으로부터 나오는 성품 속에 이유에 얽매이지 않고 행동하는 삶을 살아간다. 바로 이러한 “이유 없이 살아가는 것”(living without a why)이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자의 삶이다.


여기에서 독자들은 대단히 중요한 것 하나를 놓치지 말아야한다. 흔히 기독교 영성은 기도와 명상에 전념하는 것이 전부인 것 같지만, 사실 우리의 영성은 명상과 실천이 조화될 때에 비로소 온전한 것이 된다. 에크하르트는 기독교 역사 속에 내재해 있는 명상과 실천의 긴장 관계를 극복하고, 두 모습이 조화된 하나님의 근본으로부터 이유 없이 살아가는 삶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그의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이러한 그의 견해를 잘 드러내준다.


에크하르트의 독일어 설교 86은 기존의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의 해석을 뒤집는 성경읽기를 감행한다. 성경본문(눅 10:38-42)은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분주한 마르다와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듣는 마리아를 대조해서 보여준다. 바쁜 일에 분주하던 마르다가 마침내 예수님께 마리아로 자신을 돕게 해달라고 간청하자, 예수님은 한 가지가 중요한데 마리아는 그 좋은 한 가지를 가졌으니 빼앗기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전통적으로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실천의 삶에 반하여 명상과 기도의 삶에 손을 들어준 것으로 해석돼왔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특유의 성경읽기로 본문의 표면적 의미 이면에 담겨있는 깊은 영적인 의미를 포착하여 전해준다.


에크하르트에게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듣는 마리아는 이제 영성적 삶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기 시작한 초보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단지, 신앙생활의 기쁨이 무엇인지 이제 깨닫기 시작한 단계이다. 하지만 마르다는 이러한 초보의 단계를 지나서 삶의 어떠한 모습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단계이다. 마르다에게는 봉사의 삶이 자신의 영성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일과 실천이 마르다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하는 수단이 된다. 마르다는 신앙의 초보에 머물러있는 마리아가 안타깝다. 은혜와 기쁨만을 사모하는 마리아가 이제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 명상과 실천이 조화된 삶으로 성장하기를 마르다는 바란다. 이러한 마리아를 아끼는 사랑에서 마르다는 예수님께 간청을 한 것이다. 에크하르트에게 ‘좋은 것 한 가지를 선택한 마리아’는 사실 상징적인 의미의 마리아이다.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있는 마리아는 아직 그런 참된 마리아가 아니다. 마리아가 이제 예수님의 발아래에서 일어나 삶을 배우고 실천하기 시작할 때, 마리아는 그 좋은 것 한 가지를 소유한 진정한 마리아가 된다. 이렇게 삶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과 하나 된 근본 때문에 사랑함에 이유를 가지지 않는 것, 삶에서 만나는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 이것이 에크하르트가 이야기하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영성적 삶이다.

* 관심 있는 분을 위한 책 소개 :
Meister Eckhart: Teacher and Preacher. Edited by Bernard McGinn. Paulist Press, 198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성가 이야기 1 - 아씨시의 프란체스코 

“영성가 이야기”라는 새로운 연재글을 시작하며, 오늘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가장 사랑받는 영성가인 아씨시의 프란체스코(Francesco d’Assisi 약 1181∼1226)를 함께 살펴보자. 1992년 미국 타임지는 새천년의 도래를 기념하며 지난 천 년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인을 분야별로 선정했다.

음악에 모차르트, 문학에 셰익스피어, 미술에 미켈란젤로, 과학에 갈릴레오와 아인슈타인 등에 이어 종교분야에 이름을 올린 인물은 마틴 루터와 프란체스코였다. 약 800년 전에 살았던 중세의 한 영성가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영향력을 미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씨시의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코는 가르침이나 저서보다 자신의 삶을 통해 널리 알려진 성인이다. 프란체스코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영성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의 삶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1181년(혹은 1182년) 이탈리아 아씨시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코는 의류상을 하던 아버지 덕택에 어린 시절 부유한 삶을 영위했다. 세속적인 성공을 꿈꾸며 평범한 삶을 살았던 프란체스코는 청년기에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삶으로 전적으로 회심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게 된다. 1206년경 25세의 프란체스코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는 복음서의 명령(마태복음 10:7∼10)에 감동하여 걸식 복음전도자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후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1226년까지 프란체스코는 복음서에 나타난 가난과 겸손, 평화와 화해의 삶을 몸소 실천하는 삶을 살아간다.

프란체스코는 태양을 형제라 부르고, 달을 자매라 부르는 자연친화적인 영성가였다. 새들에게 설교하고, 늑대 또한 그의 말에 순종했다는 일화들로도 유명하다. 특별히 그가 말년에 라베르나(LaVerna) 산에서 기도 가운데 받았다는 주님의 못자국과 창자국의 성흔(stigmata)은 이후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이런 초자연적인 모습들뿐만 아니라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전도와 봉사의 삶을 살았던 프란체스코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으로 인도했다.

프란체스코는 삶이 말을 앞서는 사람이다. 그는 어떤 설교나 주해, 신학적인 글도 남기지 않았다. 그가 남긴 글이라곤 몇 편의 시, 기도, 편지, 그를 따른 형제들을 위한 공동체의 규칙과 교훈뿐이다. 그에게 있어서 복음은 살아내야 할 삶이지, 해석하고 설교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란체스코에게는 삶이 그의 영성을 드러낸다. 그의 삶 가운데 프란체스코의 영성을 특징적으로 드러내 주는 몇 가지 일화들을 함께 살펴보자.

거룩한 가난

먼저 프란체스코를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삶으로 헌신하게 만든 회심 과정에서 있었던 사건을 살펴보자. 프란체스코의 회심은 몇 가지 사건들을 통해 점차적으로 일어나는데, 그 과정의 중심에 있는 사건은 성 다미아노(San Damiano)의 한 허물어진 교회에서 시작된다. 이 허물어진 교회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던 프란체스코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의 교회를 회복하라”는 음성을 듣게 된다. 이것은 사실 타락한 당시의 교회를 개혁하라는 주님의 명령이었지만, 프란체스코는 이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성 다미아노의 교회를 수리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교회를 수리하기 위해 프란체스코는 아버지의 가게에서 옷을 가져다 팔아 돈을 마련하여 직접 교회를 수리하기 시작한다.

이미 예견되었던 갈등은 아버지가 이 모든 일들을 발견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불거지기 시작한다. 상인이었던 아버지는 아들 프란체스코가 몸소 무너진 교회를 수리하고, 더욱이 그 물질적인 출처가 자신의 재산이었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아들을 말리기 위해 프란체스코를 집에 가두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아버지는 마침내 아들을 아씨시의 감독 앞으로 데리고 간다. 공적인 자리에서 아들을 정신 차리게 하려는 아버지의 계획은 오히려 프란체스코의 회심을 향한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계기가 된다. 감독 앞에서 성전 수리에 들어간 돈의 반환을 요구하는 아버지에게 프란체스코는 자신의 옷을 전부 벗어 건네 주며 아버지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당황한 감독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프란체스코의 알몸을 감싼다.

이 상징적 사건은 프란체스코 연구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로렌스 커닝햄은 이 사건이야말로 프란체스코가 옷을 벗어버림을 통해 물질적 소유가 특징인 이 세상과 단절하고, 복음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벗어던지는 비워냄의 실천을 통해 복음서에서 말하는 거룩한 가난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인 것이다. 이제 프란체스코의 남은 인생의 목표는 그가 직접 밝히듯이 “그리스도의 발자국과 가난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 다미아노의 교회에서 그가 주님으로부터 들었던 “나의 교회를 회복하라”는 소명은 그의 가난의 삶을 통해 완성된다. 왜냐하면 성직 매매와 부의 축적을 통해 타락한 당시의 교회들이 프란체스코와 그를 따르는 형제들의 가난의 실천을 통해 점차 개혁되어 갔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코가 보여 주듯이 신앙인의 삶의 핵심은 복음을 살아내는 데 있다. 복음서에 나타난 주님의 가난과 청빈의 삶을 각자의 삶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실천할 때, 신앙인의 삶은 보다 성숙한 영성으로 자라게 된다.

화해의 중재자

프란체스코는 ‘평화의 사도’로 알려져 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로 시작하는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는 사실 20세기 초에 쓰인 기도문으로 프란체스코의 작품이 아니지만, 프란체스코의 영성을 잘 대변하는 기도문으로 프란체스코회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다. 프란체스코의 삶은 화해의 중재자 이미지로 가득하다. 그의 자연친화적인 영성은 프란체스코를 자연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로 세웠으며, 그의 평화에 대한 소명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평화의 사절’로 부르기도 했다.

이런 화해의 중재자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사건 가운데 하나가 이슬람의 술탄 앞에서 복음을 전한 프란체스코의 모습이다. 당시 중세의 시대상은 몇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간에 처절한 피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잔인한 살육과 복수가 반복되는 폭력과 전쟁은 종교적인 권위를 통해 거룩한 것으로 승인된 상태였다. 이러한 폭력의 시대에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무저항의 평화주의를 원칙으로 한 프란체스코는 그의 오랜 꿈이었던 이슬람 전도에 나선다. 순교를 각오한 채 이슬람 술탄 앞에서 복음을 전한 프란체스코는 비록 술탄을 전도하지는 못했지만, 술탄의 존경을 받고 안전하게 돌아온다. 술탄 앞에 선 프란체스코! 이것은 화해의 상징으로서 그의 진면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상징적인 모습이다. 폭력의 시대가 종교적인 허울들로 치장하고 피의 전쟁에 급급하고 있을 때에 프란체스코는 시대의 정신에 대항하며 기독교와 이슬람 진영의 한 가운데 평화의 사도로, 화해의 중재자로 우뚝 서 있는 것이다.

프란체스코가 오늘의 신앙인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화해의 중재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미국 땅에 살아가는 이민교회에게 이보다 도전이 되는 말씀이 또 있을까? 소소한 의견 차이와 감정 대립으로 주님의 몸된 이민교회가 쉽사리 나뉘어지는 현실을 향해 프란체스코는 화해와 일치의 정신을 역설한다. 프란체스코의 화해와 평화의 정신을 이민교회가 실천할 때, 이민교회는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이,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가,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가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드러낼 것이다.

겸손한 마음

프란체스코는 마음의 변화를 강조한 영성가였다. 그가 강조한 마음의 변화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우는 데서 오는 기쁨이다. 프란체스코는 후에 남긴 글 “진실하고 완전한 기쁨”에서 이것을 자세히 묘사한다. 이 글에서 프란체스코는 먼저 진정한 기쁨이 아닌 것들을 몇 가지 나열한다. 파리 대학의 대학자들이 프란체스코회에 가입한다거나, 모든 감독과 대주교들, 영국과 프랑스의 왕들까지 프란체스코회에 가입한다고 해도 이것은 진정한 기쁨이 아니라고 프란체스코는 말한다. 심지어 프란체스코의 형제들이 전도를 나가 모든 불신자들을 믿음으로 이끌어 온다고 해도 진실하고 완전한 기쁨은 여기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프란체스코는 진실한 기쁨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 하나를 소개한다. 프란체스코가 어느 겨울밤 전도를 마치고 먼 길에서 돌아오게 되었다. 겨울의 늦은 밤이라 날씨는 춥고, 손과 발은 진흙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고,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프란체스코회의 문을 두드린 그에게 돌아온 것은 다른 묵을 곳을 찾아보라는 한 형제의 싸늘한 답변뿐이었다. 자신을 프란체스코라고 밝히고 여러 번 사정함에도 불구하고, 문 안의 형제는 계속해서 프란체스코를 타박하며 들여보내기를 거절했다. 이 부분에서 비로소 프란체스코는 완전한 기쁨에 대해서 말한다. “만일 내가 인내를 가지고 화를 내지 않게 되었다면, 진정한 기쁨, 또한 참된 미덕과 영혼의 구원은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프란체스코가 겪은 상황에서 화를 내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자신이 세운 공동체의 형제에게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있는 프란체스코는 화를 내어야 마땅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삶의 어떤 상황에서도 인내하며, 외부의 상황이 마음의 평화를 앗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은 사람이다. 이 겸손을 가진 사람만이 삶의 상황에 휩쓸리지 않는 진정한 기쁨을 소유하게 된다. 프란체스코의 영성은 가난과 평화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우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의 삶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과 달콤함이 넘치게 된다. 그것은 겸손한 마음이 프란체스코가 강조하듯이 모든 소유와 집착을 넘어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겸손한 마음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영적인 덕목이다.

신학자 칼 라너는 영성가들은 새로운 기독교인의 삶을 실험적으로 보여준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영성가들은 그 시대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삶의 형태와 실천을 통해 새로운 양식의 기독교적인 삶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영성가들에게서 배운다는 것은 영성가들의 삶을 단순히 모방하기보다는 그들이 씨름했던 것처럼 그들의 영성이 현재 나의 삶 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오늘 프란체스코는 가난과 화해, 겸손의 가치가 드러나는 기독교인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리고 이 가치들은 오늘의 신앙인의 삶에 새롭게 도전한다. 이제 이 도전을 받은 우리가 자신의 삶에서 구현해야 할 새로운 기독교적인 삶의 모습은 무엇인가? 이것은 프란체스코가 오늘의 신앙인에게 건네는 어렵고도 중대한 질문이다.

* 자세한 내용은 저자의 글 ‘프란체스코 다시 생각하기’ 기독교사상 2011년 3월호 참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성가 이야기 2 - 사도 바울 (Saint Paul) 1 

“영성가 이야기”의 두번째로 사도 바울의 영성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바울을 부르는 호칭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영성가 바울’은 생소하게 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최초의 영성가’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사람입니다. 영성가 바울의 면모를 살펴 보기 위해 이번 호와 다음 호에는 바울의 삶을 소개하고, 그 다음에는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영성을 깊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바울의 삶은 한 마디로‘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힌 삶’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으로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을 했고, 이렇게 경험한 복음의 능력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기 위해 일평생을 헌신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의 삶을 묵상하다 보면, 바울과 함께 눈물 짓고, 함께 가슴 뛰고, 함께 감탄하는 순간들이 많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나의 할아버지는 초기 한국 기독교 역사 속에서 권서로 활동하셨던 분입니다. 당시 한국인들에 의해 번역된 쪽복음을 들고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던 할아버지 이야기는 어릴 적 동화 속에 나오는 어떤 이야기보다 내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그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한 이야기는 맨발로 다니시던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전도자의 삶으로 먼 길을 다니시기에 신발이 금방 해어지던 터라, 가난한 살림에 신발을 아끼려던 할아버지는 맨발로 길을 다니시다가 먼 곳에 마을이 보이면 그때서야 근처 개울에서 발을 씻고 신발을 신고 마을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셨다고 합니다. 어릴 때 그 모습을 상상하며 가슴 따뜻하게 들었던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 바울의 모습에서 다시 한 번 발견합니다.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혔던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이 유대민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한 복음이라는 비전을 품고 자신의 생명을 건 전도여행을 감행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전도자 바울과 그의 파란만장한 삶에 몰입하다가 쉽게 놓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삶 전체를 따라다녔던 고뇌의 모습들입니다. 바울에게는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는 내내 씨름했던 문제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고뇌한 이 문제들은 바울의 신학과 영성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이제 바울이 평생 씨름했던 자신 안에 있던 긴장관계들을 중심으로 영성가 바울의 삶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유대와 헬라 사이에서

바울은 주후 약 8년경 지금의 터키에 위치한 소아시아 남부의 주요 도시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학자들은 바울이 예수님보다 10살 정도 연하였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바울은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유대식 이름인 사울이고, 또 하나는 로마식 이름인 바울입니다. 베드로가 유대식 이름인 게바와 헬라식 이름인 베드로의 두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의 삶에서 중요한 점을 지적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 공동체(고향을 떠나 해외에 거주하는 유대인 공동체)에서 태어나 자라났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바울의 삶과 영성은 이민교회에게 특별히 구체적인 가르침을 줍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던 바울은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곧 바울은 헬라문화권에서 살아가던 유대인(a Greek-speaking Jew)이었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유대문화와 헬라문화, 두 문화에 속한 중간인이면서(그래서 양쪽의 문화를 모두 거리를 두고 볼 줄 아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두 문화 모두에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빌립보서 3:5-6에 따르면, 그는 유대인이며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 당시에 외식하는 사람들로 비판을 받았지만, 실은 율법을 순수하게 지키려는 이상을 가진 경건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 중에도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으로 율법에 대한 ‘열심’이 특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14에서 바울은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열심’이 바울로 하여금 그리스도교 운동을 박해하게 했는데, 이 율법에 대한 열심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는 새로운 변화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유대인 뿌리에 대한 열심을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완전히 버렸는가? 아니면 자신의 젊은 시절의 ‘열심’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부활의 주님에서 발견하였는가? 바울의 신학과 영성에서 우리가 살펴 보아야 할 중요한 질문입니다.

바울은 또한 헬라문화에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다소에서 헬라철학, 수사학 등을 공부했습니다. 바울은 아람어뿐 아니라 당시의 공용어인 코이네(Koine) 헬라어를 사용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울의 헬라어 글이 적대자들에게 인정을 받을(고후 10:10) 정도로 힘이 있음을 보여 주지만, 헬라 철학자들에게 버금갈 만큼 그렇게 세련되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합니다.

 

바울이 평생에 걸쳐 씨름한 긴장관계의 첫번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실존적 삶에 놓여진 두 문화, 곧 유대문화와 헬라문화의 긴장관계 속에 살았습니다. 바울 안에는 헬라문화와 유대문화가 섞여 있고, 이 두 문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폭넓게 수용했습니다. 이 긴장관계에 대한 씨름과 고뇌 속에 바울은 유대인이면서도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는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미국의 이민교회는 바울과 같은 긴장관계 속에 살아갑니다. 한국 문화와 미국 문화의 긴장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민자들입니다. 이민자에게는 소수민족의 한계와 불편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문화의 비판적 수용을 통해 새로운 비전을 폭넓게 제시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바울은 두 문화를 오가며 당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내다보지 못한 기독교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부활의 주님과의 만남

바울은 20대 중후반, 곧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지 약 3-5년 후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일생일대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의 주님이 그의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실 때,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그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면서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부활의 주님의 나타나심이 드물게 되었던 즈음에, 바울에게 부활의 주님이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과의 만남 속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요? 유대인으로 율법에 열심을 내던 그의 삶이 어떻게 그리스도 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는(빌 3:8), 철저하게 복음에 사로잡힌 삶으로 변하게 된 것일까요?

바울의 회심 사건에서 중요한 점은 부활의 주님과의 만남이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바울을 압도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16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바울은 부활의 주님과의 신비한 만남 속에서 복음의 능력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주님이시다”라는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어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바울은 물론, 앞으로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키게 됩니다. 복음은 역동적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힘이요, 능력입니다.

바울의 회심 사건에서 우리는 바울이 평생 안고 살았던 두번째 긴장관계의 시작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바울이 유대인이면서 동시에 복음의 능력으로 새롭게 변한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긴장관계 속에서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위에서 언급한 질문이 다시 떠오릅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서 자신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유대인의 뿌리를 모두 버렸을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여전히 자신을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주님을 통해 복음의 능력으로 새롭게 변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말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제 바울은 평생에 걸쳐 유대교의 뿌리와 새롭게 발견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그 둘을 조화롭게 이해하기 위한 해답을 찾아나섭니다. 바울의 해답은‘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영성’에서 독자들과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바울에 관한 몇 가지 단편적인 이야기를 전하는 것으로 오늘의 글을 마무리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복음 전도 외에 생계를 위해 천막장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천막장이는 당시에 어느 대도시에 가든지 손쉽게 일거리를 구할 수 있는 기술이었습니다. 바울 당시에는 교회 규모가 작았고(가정이나 일터에서 모여 예배를 드렸던 가정교회는 아무리 큰 교회도 100여 명을 넘지 않았을 것), 예루살렘의 가난한 교회를 돕기 위해 이방 교회로부터 연보를 받았을 뿐, 교회의 후원으로 생계를 유지했다는 말이 없으므로, 바울에게는 천막장이가 생계 유지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새 도시에 가면 천막장이의 기술로 자리를 잡고 그것으로 생계를 꾸리면서, 거기에서 만나는 시장 사람들이나 손님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대일, 혹은 소그룹 방식의 선교를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울의 성격과 외모에 대해 잠시 소개하면, 바울은 아마 말주변이 없고, 몸도 연약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그의 적대자들의 말을 소개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고후 10:10)고 말합니다. 바울 자신도 이것을 인정하는 것을 보면(고후 11:6), 직접 대면하는 바울은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의 사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바울은 육체의 질병(고후 12:7; 한 성서학자는 말라리아 열병으로 추측)으로 늘 고통받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이러한 약점들을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통로로 여기는 겸손함을 가졌습니다. 고린도후서 12:9에서 바울의 고백을 귀담아 들어 보십시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의 이 고백은 자신의 연약함을 없애 주시기를 간청한 기도의 응답으로 받은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한탄이나 인간의 지혜로 채우려 하지 아니하고, 바울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을 본받아 인간의 어리석음과 연약함마저도 사용해 당신의 능력과 지혜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겸손히 의지한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바울의 연약함까지도 하나님의 지혜의 통로로 바꾸어 놓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 참고문헌: Marcus Borg &Dominic Crossan, The First Paul; E.P. Sanders, Paul; N.T. Wright, What Saint Paul Really Said; James D.G. Dunn, WBC Romans.

 


영성가 이야기 3 - 사도 바울 (Saint Paul) 2

지난 시간 ‘최초의 영성가’로 불러도 손색이 없는 사도 바울의 삶을 함께 살펴 보았습니다. 그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힌 삶’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으로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경험을 했고, 이렇게 경험한 복음의 능력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기 위해 일평생을 헌신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의 삶에는 그의 신학과 영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세 가지의 긴장관계가 있습니다. 지난 주에 두 가지를 소개해 드렸는데, 하나는 헬라문화권에서 자란 유대인이라는 점에서 바울에게는 헬라문화와 유대문화의 두 문화가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가 율법에 열심이던 유대인에서 그리스도의 사도로 회심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곧 바울 안에는 유대의 전통과 그리스도의 사도가 서로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바울의 삶에 등장하는 세번째 긴장관계와 그의 말년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역사적 바울이 얼마나 그의 삶 속의 문제들로 씨름하며 살아갔는지를 확연하게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과의 긴장관계

바울은 회심 후 그가 사역한 약 20여 년 동안 총 2번에 걸쳐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으로 보입니다. 첫 번째로 바울이 회심하고 3년이 지난 시점에 예루살렘의 지도자들, 특별히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아마도 바울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만나 자신을 소개하고,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 운동을 핍박하던 사람에서 돌아서게 되었는지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18-19에 따르면, 바울은 15일간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베드로와 야고보 사도를 만납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의 두번째 예루살렘 방문(갈 2:1-10)입니다. 14년 후에 바울은 바나바,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바울과 예루살렘 지도자들간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바울과 함께 한 디도의 할례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헬라인 디도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새롭게 시작된 예수운동을 유대교의 범주에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유대의 문화 속에서 생각했던 사람들이고, 유대교의 관습과 율법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충돌하지 않는 것으로 여긴 사람들입니다. 사실 예수님 자신도 스스로를 유대인으로 생각하면서,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왔다.”고 말하며 초기에는 공공연히 자신의 사역을 유대교 안으로 한정지었습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새로운 종교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유대교의 뿌리 위에서 시작하고 성장했습니다. 이런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자연스럽게 이방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디도에게 유대의 전통인 할례를 지킬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비슷한 예가 갈 2:11-14에 나오는 안디옥 사건입니다. 음식에 관한 율법이 논쟁의 핵심인데, 결국 이방인에게 유대교의 율법을 강요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씨름했던 헬라인이면서도 유대인인 자신의 정체성 문제에 대한 뿌리 깊은 고뇌에서 나온 확신일 수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 조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운동은 유대인에게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해당되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복음은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는 조건(곧 할례나 율법을 지키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바울이 발견한 새로운 비전은 당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약속된 메시야가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을 넘어서서, 이 메시야가 유대인에게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주라는 것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이 비전을 깨닫고 전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기독교인들도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할례와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결국 예루살렘공의회에서는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면서(갈 2:9), 이방인에게는 유대교의 율법을 강요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행 15:19-20). 이러한 합의를 이루면서 바울은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이방인 교회에서 헌금(갈 2:10)을 모아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동의를 얻어 유대교 율법의 조건을 붙이지 않는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로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삶에 있던 세번째 긴장관계는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이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이끄는 지도자들과 긴장관계를 이룬 것입니다. 바울은 이 긴장관계를 어떻게 풀고자 했는지, 유대계 지도자들과는 어떤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잘 알려 주는 사건이 그의 말년에 일어납니다.

바울의 말년

바울은 로마서 15:22-24에서 로마교회를 방문할 계획을 언급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바울의 삶의 마지막을 언급하는 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바울은 지중해 동쪽 지역에서 더 이상 일할 곳이 없어서 이제는 서쪽 지방에 있는 서바나(지금의 스페인)로 선교지를 옮길 예정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선교전략은 지중해 연안의 대표적인 대도시의 선교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지중해 동쪽 지역에서 대표성을 띤 도시들을 두루 다닌 바울은 ‘일할 곳이 없다’고 느끼고, 지중해 서쪽 지역으로 진출하려고 합니다.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로마교회를 방문하고, 그들이 스페인 선교를 후원해 주기를 바울은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모든 것을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교회를 위한 헌금을 전하러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일이었습니다(롬 15:25-26). 바울의 계획은 예루살렘에 들러 헌금을 전하고, 그 후 로마교회를 방문한 후에, 최종적으로 스페인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헌금을 전하러 간 예루살렘 방문은 바울의 마지막 여행이 됩니다.

사실 바울은 예루살렘 방문에 따르는 위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 스스로가 예루살렘 방문에 대한 많은 걱정으로 로마교회에 기도 부탁까지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 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롬 15:30-31).

바울은 예루살렘 방문에서 두 가지를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 곧 유대인들의 박해였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 교회가 헌금을 잘 받을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내에는 여전히 바울을 인정하지 않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바울이 그리스도운동을 박해한 과거가 있는 인물에다가, 이방인에게 유대인의 율법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이방인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을 일삼으며 복음을 주장하는 사람으로 좋지 않게 보였을 것입니다.

바울서신에는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서 우리는 이후의 모습을 사도행전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 21:17-27에 따르면, 바울의 우려와는 달리 헌금은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잘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유대인과의 관계에서 벌어졌습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은 바울에게 몇몇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 정결 예식을 행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일부가 바울을 모세의 율법을 업신여기고 배반하는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결예식을 행함으로써 바울은 유대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고, 단지 복음은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 유대의 율법을 강요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전에 나타난 바울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가만 두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의 출입이 금지된 성전 지역에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누명을 씌워서 유대인들은 바울을 붙잡았습니다. 결국 바울은 로마군대에 의해 감금되어, 로마로 압송됩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네로는 64년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재 사건의 희생양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고, 이때 바울 또한 베드로와 함께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랫동안 학수고대했던 로마교회 방문 계획도, 지중해 서쪽의 스페인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들고 나아가고자 했던 그의 원대한 꿈도 이렇게 예루살렘의 방문으로 사라졌습니다.

도대체 왜 바울은 예루살렘에 연보를 직접 전달하러 가야 했을까요? 바울은 그의 선교사역 내내 다른 사람을 통해 편지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의 연보 또한 다른 사람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자신의 복음과 사역에 늘 물음표를 붙이는 예루살렘 교회에 위험을 무릅쓰고 가야 했을까요? 바울은 직접 가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에게는 교회의 일치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였습니다. 비록 예루살렘 교회의 몇몇 사람들은 바울의 복음과 사역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지만, 바울은 이방계 그리스도인의 지도자로서 유대계 그리스도인의 대표인 예루살렘 교회를 직접 방문하여 함께 협의했던 예루살렘 공의회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1세기 예수운동에서 이방계 그리스도인들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중요한 비전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화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본받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일치와 화해의 사역을 담당하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고후 5:18)을 사명으로 받았다고 바울은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비전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고, 또 오해를 종식시키기 위해 적대적인 유대인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성전에까지 들어가도록 만든 것입니다.

오늘 바울의 삶에 대한 묵상을 마무리하면서 이민교회의 현실을 생각해 봅니다. 이민자의 고달픈 삶 속에서 이민교회 또한 아픔과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한 실정입니다. 때로 대수롭지 않은 일들로 분열하는 이민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사도바울이 생명을 바쳐가며 실천했던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스스로 이민자요, 이민교회의 지도자였던 사도바울이 외쳤던 화해하고, 하나되게 하는 복음의 능력이 오늘 미국의 이민교회 속에서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 참고문헌: Marcus Borg &Dominic Crossan, The First Paul; E.P. Sanders, Paul; N.T. Wright, What Saint Paul Really Said; James D.G. Dunn, WBC Romans.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성가 이야기 4 - 성 어거스틴

신앙인에게 가장 관심 있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깊은 사귐 속에 들어가는 구체적인 방법은 항상 우리에게 오리무중입니다. 오늘의 “영성가 이야기”에서는 성 어거스틴이 들려 주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어거스틴의『고백록』제10권에 소개되어 있는 ‘기억(memory)’을 통한 방법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고백록』에서 하나님을 외부세계에서 발견하고자 노력한 후에 이제『고백록』10권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찾기 위해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가 내면에서 발견하고 있는 것은 ‘기억이라고 하는 넓은 궁전’입니다. 어거스틴이 내면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자리는 바로 이 기억이라는 공간을 통해서입니다. 어거스틴은 현재의 영성생활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이 기억이라는 넓은 궁전을 올바르게 탐험할 때라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어거스틴은 어떻게 기억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어거스틴이 말하는 ‘기억의 영성’은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기억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되살리는 것(기억하기 remembering). 둘째, 기억 안에 존재하는 생각하는 능력을 통해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생각하기 thinking). 마지막으로 기억 안에서 자신의 참된 자아를 찾아 여행하는 것(회복하기 reintegrating)입니다. 이 세 요소들이 가진 지혜는 우리의 영성생활에 큰 유익을 줍니다.

기억하기(remembering)

어거스틴에게 기억이란 먼저 단순히 기억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기억이라는 ‘넓은 궁전’은 감각기관에 의해 습득된 이미지들이 저장되어 있는 장소입니다. 이때 인간이 가진 기억이라는 능력은 자신 안에 저장되어 있는 이미지들을 기억(발견)하여 의식 속으로 불러옵니다. 하지만 어거스틴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과거의 경험을 단순히 기억해 내는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거스틴이 말하는 기억하기란 과거 경험을 다시 살아내는 것(re-living)을 의미합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기억 안에 존재하는 것들은 자신이 스스로 우리의 인식 속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저장되어 있는 이미지들을 우리가 기억하게 될 때 우리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곧 기억이라는 능력이 이미지로 저장되어 있는 과거의 경험을 능동적, 적극적으로 찾아내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결국 기억의 창고 안에 이미지들로 저장되어 있는 것들을 기억 속에 발견해 낼 때, 이 이미지들은 현재에서 새롭게 경험됩니다. 따라서 기억하기란 과거의 경험을 다시 살아내는 순간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체험한 경험은 이미지들로 환원되어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게 됩니다. 이 기억 속에 있는 이미지들을 기억해 낼 때, 다시 말해 기억이 그 속의 광대한 궁전을 탐험하여 하나님 경험의 이미지들을 우리의 인식 속으로 다시 불러내어 올 때, 과거의 하나님 경험은 현재 속에서 새롭게 경험됩니다.

어거스틴이 들려 주는 영성생활의 첫번째 지혜는 바로 이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기억해 내라는 것입니다. 이 기억하기는 과거의 하나님 경험을 현재에 새롭게 살아내는 순간(re-living)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현재에 신앙적인 갈등과 시험을 경험할 때 그것을 극복하는 커다란 원동력이 됩니다. 비록 현재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지만, 예전에 나에게 은혜를 주셨던 하나님에 대한 경험, 내 삶의 고통 속에서 나를 건져 주셨던 하나님을 기억의 창고에서 불러와 새롭게 경험한다면, 지금의 시험과 고통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영적인 지혜와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하기(thinking)

어거스틴의 기억은 단순히 이미지들의 저장소나 이것을 찾아내는 인간 능력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에게 기억의 보다 중요한 기능은 생각하는 능력입니다. 어거스틴은 “마음과 기억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고 같은 것”(mind and memory are one and the same. 고백록 X.14.21.)이라고 강조합니다.

여기에서‘마음’(mind)은 생각하는 능력과 동일한 것입니다. 기억은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게 작용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문장을 하나 말할 때, 만일 문장에서 시작된 말들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문장을 끝맺을 수가 없습니다. 기억은 생각을 이어가고,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 갑니다.

기억이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이유는 자신 안에 저장되어 있는 이미지들을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무언가를 기억할 때, 단순히 예전의 경험을 불러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이미지들을 꺼내어 ‘새로운 영상들을 구성’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기억이 실제의 모습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이 가진 이러한 ‘과거의 경험에 대한 재구성’은 결국 ‘과거의 경험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과거의 사건과 경험은 기억의 과정을 통해 ‘현재’와 관련된 모습으로 새롭게 구성되고 해석되어 나타납니다. 곧 기억은 저장된 이미지들을 우리의 인식에 불러들이는 과정을 통하여 과거의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사고의 과정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영적 자서전 쓰기’를 하나의 영성훈련으로 실천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영성가들은 자신의 삶을 기록한 ‘영적 자서전’(spiritual autobiography)을 중요한 영성훈련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의『고백록』도 하나의 영적 자서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적 자서전이라는 영성훈련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을 통해 과거에 이해할 수 없었던 아픔이나 고난, 혹은 삶의 중요한 경험들을 묵상하게 되고, 이 묵상 중에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던 의미들을 발견하면서 상처에 대한 치유와 함께 깊은 영성형성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적 자서전 쓰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어거스틴이 말하는 기억의 능력을 통해서입니다. 기억은 이처럼 과거의 이미지들로부터 현재에 걸맞은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 내는 사고와 묵상의 과정입니다.

회복하기(reintegrating)

기억을 생각하는 능력(마음)과 동일시한 어거스틴은 계속해서 기억이 곧 자아(the self)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아라는 주제는 어거스틴의 신학에서 가장 관심을 끈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초기 저작 가운데 하나인 『독백록』(the Soliloguies)에서 어거스틴은 그의 신학의 끊임없는 관심은 “하나님을 알고, 영혼(자아)을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두 요소(하나님과 자아)는 불가분리의 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내면의 가장 깊숙한 자아에서 발견되는 분이시고, 인간은 또한 하나님 안에서만 자신의 참된 자아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이 자아가 곧 기억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기억력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위대합니다. 나의 하나님, 그것은 깊고도 무한한 다양성을 가진 무서운 존재입니다. 바로 그것이 내 마음이요, 나 자신입니다.” (고백록 X.17.26.) 어거스틴이 왜 기억과 자아를 동일시하는지 기억상실증의 예를 들면 이해할 만합니다. 어떤 사람이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그 사람은 자신이 누구였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누구를 알고 있었는지를 완전히 잃어 버립니다. 이것은 세상으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이고, 철저한 자아 상실입니다. 어거스틴에게 기억이란 단순히 기억하는 능력과 생각하는 능력을 넘어 자아 자체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모두 영적인 기억상실증 상태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에 있는 참 자아를 잃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당신을 알게 된 이후 계속 당신은 내 기억 안에 임재해 계셨습니다. 내가 바로 그곳에서 당신을 기억하고, 당신 안에서 기뻐할 때, 당신을 찾아 만나게 됩니다”(고백록 X.24.35.). 하지만 어거스틴은 자신의 밖에서 헛되이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탄식합니다. “그렇게도 오래 되셨지만, 그렇게도 새로운 ‘아름다움’이 되시는 당신을 나는 너무 늦게 사랑했습니다. 보시옵소서. 당신은 내 안에 계셨건만, 나는 내 밖에 나와서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고백록 X.27.38). 어거스틴에 따르면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의 밖에 나와 하나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참나를 찾아 들어가야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참나를 내면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 참나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 속에 있는 나이며, 하나님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 참나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헛되이 자신의 바깥에서 하나님을 찾을 뿐입니다. 어거스틴은 이제 우리의 관심을 내면으로 돌리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기억(memory) 속에 숨어 있는 참나를 찾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참나를 회복해 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참나 속에서 발견하는 하나님과의 원초적인 관계를 회복해 가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어거스틴에게 기억이란 ‘회복된 자아’(the reintegrated self)입니다. 잃어 버렸지만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자아, 분열되고 나누어진 자아를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여 그 속에서 하나님을 올바로 찾아가는 것이 바로 기억의 사명입니다.

어거스틴이 들려 주는 ‘기억의 영성’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우리의 내면, 곧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과거에 우리를 만나 주셨던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합니다. 기억이라는 사고의 과정을 통해 과거의 삶의 경험에 대한 깊은 의미와 은혜를 새롭게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노력 속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 있는 진정한 나를 찾아갑니다. 어거스틴은 우리의 내면 속에 들어가 그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참나를 발견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보다 자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소기범, “고백록 제10권에 나타난 영성생활의 특징”, 『한국교회의 올바른 영성 확립과 해석학』(한들출판사, 2010) 참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성가 이야기 5 - 수도원 운동 

작년 한 학기 동안 나는 한국에 머무르면서 한국교회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매주 한국의 다양한 교회를 순방하며 한국교회의 영성과 목회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내 마음을 가장 안타깝게 만들었던 것은 성장주의와 물질주의에 빠진 한국교회의 모습이었다. 화려한 교회의 외형을 치장하기에 급급하고, 모든 목회적 관심은 교회 성장에 맞추어져 있었다. 한국교회의 영성 또한 이러한 성장주의의 한 방편이 되었다. 곧 한국교회는 영성을 하나의 ‘최신 프로그램’으로 생각하면서 ‘교회 성장’을 이루는 또 하나의 방편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존재하는 개혁되어야 할 모습들과 영성에 대한 오해를 염두에 둘 때, 이제 살펴 보려고 하는 수도원운동이 한국교회에 갖는 의미는 실로 지대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세상적인 성공과 안락을 떠나서 하나님 사랑의 은혜만을 올곧게 추구하고자 했던 수도원운동은 한국교회의 올바른 영성 회복을 위해 절실하게 요청되는 모습이다. 오늘 “영성가 이야기”에서는 수도원운동의 역사 속의 두 인물과 그들의 중요한 영성의 특징을 간단히 살펴봄으로써 ‘한국교회에 수도원운동의 필요성’이라는 주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사막의 교부 성 안토니

기독교 역사가 4세기를 맞이하였을 때, 새롭게 태동된 한 운동이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것은 수도원주의(monasticism)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운동으로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 소아시아 등지의 사막에서 독거생활을 한 교부들의 등장이었다. 어느 종교에든지 제도권 종교지도자들에게 깊은 영성과 더불어 비판과 도전을 동시에 제공하는 무리가 있기 마련인데, 초대 사막의 교부들이 바로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이러한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제도권 교회의 인정을 받으면서도 항상 제도권 교회와 거리를 갖는 독특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후에 기독교 역사 속에 전개된 수도원운동은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아 항상 시대의 영성과 개혁을 선도하는 자리를 지키게 된다.

이 사막의 교부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막으로 들어가 홀로 살아가면서(혹은 공동체를 이루어서) 오직 하나님 안에만 거하기 위한 다양한 영적인 실험을 행했던 사람들이다. 사막의 교부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수도승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성 안토니(St. Anthony or Anthony the Great, 약 251-356)이다. 안토니는 그의 나이 약 18세에 “가서 너의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복음서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여 수행의 삶을 살기 시작하였다.

사막의 교부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소유를 모두 팔아 사막으로 나아가 홀로 거하는 단순한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방법을 찾아내었다. 이들의 이러한 신념은 “하나님께 귀기울이기 위해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부르기 위해 금식하는” 거룩한 가난(holy poverty)으로 이어졌다. 가난 속에 거하는 가운데 수도승의 마음은 다른 것에 나뉘어짐 없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비로소 살아 숨쉬게 된다. 그래서 안토니는 이렇게 말한다: “마치 물고기가 물 밖에서 너무 오래 머무르면 죽게 되듯이, 수도승들이 그들만의 처소 밖에서 지내며 세상 사람들과 오래 시간을 보내게 되면, 내적인 평화의 깊이를 잃게 된다. 따라서 마치 물고기가 바다를 향하여 가듯이, 우리는 모두 우리만의 처소로 서둘러 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밖에서 오래 머무르면 우리의 내적인 민감성을 잃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안토니는 하나님 안에만 머물기 위하여 세상의 것들과 단절하고, 거룩한 가난을 실천하며 살아간 사람이다.

오늘의 한국교회에 수도원운동이 필요한 첫번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한 가난의 삶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성장을 향해 발버둥치며, 내적으로는 세력 다툼을 통해 부와 명예, 권력을 축적해 가는 한국교회는 수도원운동이 전해 주는 가난의 삶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수도원운동이 보여 주듯이 한국교회가 복음서에 나타난 우리 주님의 가난과 청빈의 삶을 실천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날 때, 한국교회는 그 회복의 물꼬를 트게 될 것이다.

존 카시안

어거스틴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서방교회 영성의 창시자 가운데 하나로 존경받는 존 카시안(John Cassian, 약 365-435)은 쇠락해가는 로마를 지켜보며 사회적 불안으로 심려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막의 교부들의 영성을 신앙적인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모두 능통했던 카시안은 15여 년 동안 동방의 이집트를 비롯한 사막의 수도사들을 찾아 다니며 그들의 가르침을 전수받았다. 기독교영성사에서 카시안의 결정적인 공헌은 그가 사막에서 배운 동방교회의 영성전통을 서방교회에 전해준 데에 있다. 카시안이 전한 동방의 수도원운동은 쇠락해 가는 사회에 대한 ‘기독교적인 대안’이었다. 하지만 카시안은 단순한 전수자가 아니었다. 그가 일관되게 유지한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태도는 사막의 영성을 자신만의 체계로 발전시켜 이후 서방교회의 영성에 커다란 토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카시안은 서방교회의 수도원운동의 창시자가 되었지만, 그가 보다 관심을 가진 것은 제도로서의 수도원운동보다 수도원운동이 간직하고 있는 영성적인 삶의 태도였다. 카시안은 이집트 사막에서 전해지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한 농장의 일꾼이 어떤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낸다. 이 귀신들린 사람은 유명한 수도사 요한이 아무리 노력해도 치유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수도사 요한은 도대체 어떻게 평범한 일꾼이 이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여 여러 가지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이 일꾼은 결혼을 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일꾼은 매일 하루 일과 전후에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십일조를 바치고, 또 자기의 소가 다른 사람의 밭을 망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하는 사람이었다. 수도사 요한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덕목으로는 귀신을 쫓아내는 특별한 능력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해서 숨은 어떤 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계속 질문한다. 마침내 그가 발견한 것은 이 일꾼이 원래 수도사가 되고 싶었는데 부모님의 반대로 그 길을 포기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지금은 사람들이 모르게 아내를 여동생처럼 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당시 보편적으로 이해되고 있던 결혼과 성에 대한 금욕적인 태도(continence)가 영성생활과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보여 준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일꾼의 경건성이 세상 속에서 발휘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이 일꾼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가 행하는 덕목들은 바로 수도사의 것이다. 카시안은 제도적인 수도원운동보다는 사막의 교부들이 가르친 대로 하나님 안에만 거하는 삶의 자세를 일관되게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영성적 삶의 자세이지, 그것이 수도원 안이든 세상 속에서든 장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카시안의 이러한 정신은 이후에 탁발수도사(mendicant orders)들로 이어지게 된다. 그들은 세상 속에서의 사역과 세상과 분리된 수도원 정신의 조화를 이루어간 사람들이다. 이러한 조화는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수도원운동이 추구하는 ‘삶의 모든 순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삶의 정신’을 본받아 살도록 도전하며, 수도원운동은 이러한 정신의 원동력을 제공하는 영적인 원천으로 그 역할을 수행한다. 성장과 외형주의에 사로잡힌 한국교회를 향해 수도원운동은 이러한 영적인 회복을 촉구하는 영적 보고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신앙인들에게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영성적 삶을 일깨워 준다. 카시안이 강조하는 것은 수도원운동 자체이기보다, 수도원운동의 정신을 따라 세상에서 살아가는 영성적 삶인 것이다.

최근 뉴저지에는 ‘개신교 수도원 수도회’(Protestant Abbey Mission)라는 수도회가 생겼다. 수도원 영성의 회복을 통해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이 단체는 지금의 시대에 꼭 필요한 운동을 실천하는 모임이다. 기독교 역사 속의 수도원운동은 거룩한 가난과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영성적 삶을 통하여 교회와 세상을 향한 영적 보고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러한 수도원운동의 정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도 요청되는 자세이다. 삶에서 마음의 어두운 욕망들을 숨기며 살아가는 우리가 수도원운동의 정신을 배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성적 삶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참고문헌

Benedicta Ward, The Sayings of the Desert Fathers (Cistercian Publications, 1984).

Bernard McGinn, Early Christian Mystics: The Divine Vision of the Spiritual Masters (Crossroad, 2003).

The Foundations of Mysticism: Origins to the Fifth Century (Crossroad, 1991).

John Cassian, Conferences (Paulist Press, 198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파트리스교회 주일 설교(추수감사주일) 2019-11-24

하나님의 언약궤(요한계시록 11:19)


추수감사주일을 준비하며 요한계시록에서 감사에 대한 말씀을 찾아보았더니 “감사(感謝)”라는 단어가 사용된 말씀은 “4장 9절과 7장 12절 그리고 11장 17절”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소개된 감사에 대한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4:9,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세세토록 사시는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올리는 존재는 ‘생물들’입니다.

요한계시록 7: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

12절에는 누가 감사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1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하는 존재는 ‘모든 천사들’입니다.

요한계시록 11:17,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 하시도다. 

17절에서 누가 감사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 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큰 권능을 잡고 왕 노릇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존재는 보좌에 앉으신 ‘24장로들’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존재는 이 세상에 머물고 있던 성도들이 아니라 생물들(4:9)과 모든 천사들(7:12)과 이십 사 장로들(11:17)입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이 세상에 머물고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어느 날 새벽 요한계시록을 읽던 중 제 마음을 사로잡았던 말씀은 11장 19절이었습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하나님의 성전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였다고 합니다.
하늘 성전에 왜 하나님의 언약궤가 왜 있었을까요?

성경에 언약궤가 마지막으로 언급된 사건은 요시야 왕 때 솔로몬 성전으로 옮긴 것입니다. 그 이후에 언약궤에 대한 말씀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들이 소개됩니다.

첫째는 예루살렘 성전 산 밑에 묻혀 있다.
둘째는 에디오피아 악숨 “시온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 있다.
셋째는 아일랜드 전통에 의하면 “타라 언덕”에 있다.
넷째는 갈보리 산 아래에 있다.
다섯째는 비스가 산에 있다.

이와 같은 언약궤가 있다고 하는 것은 추측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늘 성전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었을까요?


여러분의 이름이 어린 양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습니까? 만일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면 오늘 내 이름이 어린 양 생명책에 분명하게 기록되었다는 믿음을 확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언약궤(言約櫃)에 대한 두 가지 믿음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언약궤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둘째는 “언약궤 뚜껑은 무엇인가?”

첫째 언약궤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가?(히브리서 9: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언약궤 안에는 세 가지 물건이 들어 있습니다. 언약궤 안에 세 가지 물건이 들어있다는 것은 구약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신약 히브리서에 근거한 것입니다.

첫째,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
둘째,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셋째, 언약의 비석들

둘째는 언약궤 뚜껑은 무엇인가?(출애굽기 25:21∼22)

속죄소를 궤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레위기 16: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언약궤의 뚜껑” 즉 “덮개”를 “속죄소(贖罪所)” 라고 합니다.
속죄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일 년에 한 번씩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짐승의 피를 갖고 속죄소 위에 뿌리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약속을 확인하는 거룩한 만남의 장소를 말합니다.

왜 언약궤의 뚜껑을 속죄소라는 하는가?

언약궤의 뚜껑을 히브리어로 “카포레트(Kapporeth)” 라고 합니다. ‘카포레트’는 “뚜껑” “덮개” 라는 뜻입니다.

언약궤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과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 세 가지 물건이 들어 있습니다. 세 가지 물건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철저한 타락 즉 죄악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죄악을 담은 언약궤의 뚜껑을 속죄소라고 하는 것은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는 약속을 말씀합니다.

언약궤에 들어있는 세 가지 물건이 상징하는 죄악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
- 백성들의 방자(放恣)한 죄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약속의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광야에 머물던 백성들은 40일 동안 지도자 모세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광야에서 백성들을 인도할 지도자를 찾기 위하여 애급에서 숭배하던 송아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금을 모아 커다란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제부터 금송아지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할 것이라며 금송아지 주위를 돌며 춤을 추며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산에서 내려가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의 두 돌판을 들고 내려오다가 백성들의 방자한 광경을 목격하고 그 돌판을 던져버렸기 때문에 깨지고 말았습니다. 언약궤에 들어있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은 두 번째로 받은 것입니다. 첫 번째 돌판이 백성들의 죄로 깨졌기 때문에 다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십계명의 두 돌판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방자한 죄악을 생각하게 합니다.

둘째는 만나를 담은 항아리
- 불순종(不順從)의 죄

만나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이 일용할 양식으로 먹었던 음식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면서 감사를 모르고 애급에서 먹던 부추와 마늘과 같은 음식을 그리워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받은 은혜보다는 애급에서 노예로 살면 먹었던 음식을 그리워하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모습을 반영한 것입니다. 따라서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불평하며 감사할 줄 모르는 타락한 삶을 연상하게 합니다.

셋째, 아론의 싹 난 지팡이
- 패역(悖逆)한 백성들의 죄

* 패역(悖逆) ; 어그러질 패(悖), 거스릴 역(逆)
패역이란 “사람으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도리에 어긋나고 순리를 거스름.” 

아론의 지팡이가 싹이 나게 된 배경은 고라 자손의 반역 때문이었습니다. 고라 자손이 주동이 되어 모세와 아론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만 지도자로 세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모세는 화로를 준비하고 고라 자손의 화로와 아론의 화로를 준비한 후 하늘에서 화로에 불이 내림으로 지도자가 누구인가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고라 자손과 그들의 모든 것은 땅이 갈라져 삼켜버렸습니다(민수기 16장).

그 후에 각 지파를 상징하는 지팡이 12개를 취하고 레위 지파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적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고 하셨습니다. 지팡이에 싹이 나는 사람을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라고 증명하신 사건이 고라 자손의 반역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14,700명이 죽었습니다.

따라서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고라 자손들의 반역죄를 상징합니다. 언약궤 안에 담겨진 세 가지 물건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악을 상징하는 물건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죄악이 담겨진 언약궤 위 뚜껑을 속죄소로 덮었습니다. 모든 죄가 반드시 용서받아야 할 것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하늘 하나님의 성전에 언약궤가 있다는 것은 모든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은혜 가운데 지내온 것도 감사할 이유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최고의 감사는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상징하는 언약궤가 하늘 성전에 있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되는 죄에 대한 용서를 위한 언약궤의 뚜껑 속죄소(贖罪所)에 예수님의 보혈의 피가 뿌려졌기 때문에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할 수 있다는 은혜를 되새기며 이제부터는 날마다 하나님의 언약궤의 은혜에 감사하므로 승리하는 파트리스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십자가(十字架)는 언약궤 뚜껑 즉 속죄소의 결정적인 계시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죄와 죽음은 원인과 결과가 분명합니다. 문제는 죄를 지은 것은 사람 즉 내가 지었지만 죽은 것은 내가 아닌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징표가 됩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신 것을 확신하는 것이며, 평강이란 은혜가 이룩한 것을 하나님과 더불어 또 다른 사람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 성전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었다는 것은 천국의 화해가 완성된 곳을 의미합니다. 


하늘 성전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었다는 것은 진노의 자식으로 태어난 우리들이었지만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값을 갈보리 십자가에 못 박혀 피흘 흘리시고 죽으셨다가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올라가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힘입어 우리들의 이름이 어린 양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확신하고 최고의 감사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생각하며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해석은 요한계시록 11장 19절에서 언약궤가 소개되므로 하늘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외에 다양한 해석들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예루살렘 성전” “








공간적 구조의 틀에서 살펴보면 4장과 7장 11장은 하늘에서 계시된 말씀이므로 땅에서 핍박을 받으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아닙니다. 감사하는 존재들은 생물들과 천사들과 24장로들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감사할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요한계시록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음에 크게 새겨진 것은 “하나님의 언약궤(言約櫃, the ark of God’s covenant, ἡ κιβωτὸς τῆς  διαθήκης αὐτοῦ)”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언약궤가 하늘 성전에 있었을까?”

성경에서 “언약궤”가 언급된 것은 요시야 왕 제18년 때 솔로몬 성전으로 옮겼다고 하는 것이 마지막 기록입니다(역대하 35:3a).

또 여호와 앞에 구별되어서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에게 이르되 거룩한 궤를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건축한 전 가운데 두고. 

성경에서 더 이상 언급이 없기 때문에 다양한 추측들이 소개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성서학자는 언약궤가 요한계시록에 다시 소개되므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너무 비약적인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성막은 하늘 성전의 모형 즉 그림자와 같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필요한 것이었지만 하늘 성전에서는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애급에서 노예로 고통을 받던 히브리 백성들은 모세와 더불어 약속의 땅으로 자유를 찾아 나올 수 있었습니다. 광야 생활을 시작 할 때 어느 날 하나님은 모세를 하나님의 산 시내 산으로 올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그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성막에 대한 계시와 성막의 기구들에 대한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십계명의 두 돌비를 받아들고 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산 아래에서 히브리 백성들은 40일 동안 모세가 보이지 않는다며 이제부터 광야에서 인도할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주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히브리 백성들의 방탕한 광경을 목격하고 손에 들고 있던 두 돌비를 땅바닥에 던져 깨트렸습니다. 왜 돌비를 깨트렸을까요? 그 이유는 돌비는 계명 즉 율법입니다. 율법의 첫 번째 와 두 번째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그리고 어떤 우상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율법을 깨트리지 않았다면 히브리 백성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율법이 깨져버림으로 아직 율법의 내용에 따라 징계를 받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도 금송아지를 만들게 했던 사람들이 무려 삼천 명 가량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두 번째로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 계명의 돌비를 받았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보여주신 계시에 따라 성막에 사용할 각종 기구들을 만들었습니다. 다양한 기구들 중에 “언약궤”가 있습니다. 언약궤는 성막의 지성소 안에 놓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소개한 “감사”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고백하고 표현한 것이 아니라 생물들과 천사들 그리고 23장로들에 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으로서 하나님에 대해 어떤 감사를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제 자신에게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깨닫게 된 것이 “하나님의 언약궤”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한글개역 성경에 “하나님의 언약궤” 라는 용어가 사용된 구절을 검색하면 5회 사용된 것으로 소개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라는 용어가 사용된 말씀을 소개합니다.

사사기 20:27,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사무엘상 4:4,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

사무엘하 15:24, 사독과 그와 함께한 모든 레위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더니.

역대상 16:6, 제사장 브나야와 야하시엘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나팔을 부니라.

요한계시록 11: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하나님의 언약궤라는 용어가 말씀하는 것은
첫째는 해답이 있는 곳
- 하나님께 질문하는 곳

둘째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의 상징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하늘 성전에 왜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었을까요?
언약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낼 때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 언약궤의 뚜껑 즉 속죄소 위에 희생의 피를 뿌림으로 용서를 확신하기 위하여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 성전에서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늘 성전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미 천국에 들어간 사람에게 속죄소가 필요할까요? 천국에서는 속죄소가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 성전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습니다.
울릉도에서 무당의 아들로 태어난 삼형제가 있었습니다. 삼형제 모두 목사가 되었습니다. 삼형제 목사 중에서 한 목사님이 간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어느 기도원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기도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그 기도원에 찾아갔습니다. 마침 기도원 원장이 출타 중이어 갑자기 설교를 맡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그 때 소개했던 갈라디아서 6장 17절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제가 이 말씀을 소개하게 된 이유는 기도원에서 그 목사님을 만났을 때 “천국 문 앞에서 너는 이곳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는 음성을 듣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죽음의 문턱에서 천국 문 앞에 섰을 때 “당신은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는 단호한 음성을 듣고 깜짝 놀라서 “나 같은 목사가 들어갈 수 없다면 누가 들어갑니까?” 하고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네가 누구냐?” 라고 묻기에 “예, 나는 무당의 아들로 태어나서 목사가 되었고 교회를 개척하여 부흥시켰으며 부흥사로 활동하며 많은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노회장이 되어 노회를 섬겼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소개하였더니 “그런 것으로는 이곳에 들어올 자격이 안 된다.”고 하였답니다. 그 순간 “하나님 한번만 살려주면 이제부터는 목사들을 찾아다니며 목사들을 깨우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표적은 “예수의 흔적” 이란 것을 생각하며 그 말씀을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고 부탁하셔서 그 교회를 찾아가서 3일간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을지라도 사람이 바뀌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게 부탁하기를 승용차를 바꿔야 한다. 강대상을 바꿔야 한다. 이런 것들을 이야기 할 때 기도원에서 한번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다면 목사들에게 찾아가서 깨우치겠다고 서원했던 것을 잊었느냐 하고 충고했습니다.

여러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고 신앙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체험은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본질은 진노의 자녀로 태어났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 하늘 성전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용서가 없으면 어느 누구도 하늘 성전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본질상 진노의 자식입니다(에베소서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진노의 자식이란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선행을 하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살아도 여전히 죄는 인간의 내부에서 죄 값으로 죽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죄인이 하늘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언약궤안에 감추어진 죄는 이미 속죄소 뚜껑위에서 완전히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에 하늘 성전에 들어올 수 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울릉도에서 무당의 아들로 태어난 삼 형제가 있었습니다. 삼형제가 모두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섬기며 부흥사로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그 중에 한 형제가 간암 말기라는 판정을 받고 서울에 올라와 어느 기도원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제게 연락이 와서 기도원을 방문하여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 천국문 앞에 섰는데 너는 이곳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고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에서 어느 교회를 세웠고, 노회장도 했고, 부흥사로 활동하며 얼마나 많은 부흥회를 인도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하고 이야기를 하였더니 그런 것 가지고는 이곳에 들어올 자격이 안 된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번 한번만 살려주시면 제가 세상에 내려가서 목사들에게 전하겠습니다. 교회 정치도 노회와 총회의 임원 모두 중요하지 않다. 오직 예수만 증거 하자고 알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회복하여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늘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어떤 직분도 하늘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언약궤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나와 삼 개월이 지났을 때 신 광야에 도착하여 장막을 쳤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정체성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애굽기 19:6)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찬성했습니다. 그리고 20장에서 십계명에 대한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4:18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Then God's temple in heaven was opened, and within his temple was seen the ark of his covenant. And there came flashes of lightning, rumblings, peals of thunder, an earthquake and a great hailstorm. 

* 하나님의 언약궤(the ark of God's covenant)
- ἡ κιβωτὸς τῆς  διαθήκης αὐτοῦ    

* κιβωτός(2787. kibótos)
Definition : a wooden box

Usage : (properly: a wooden box, hence) the Ark, in which Noah sailed; the Ark of the Covenant.    

* διαθή(1242. diathéké)  
Definition : testament, will, covenant

Usage : (a) a covenant between two parties, (b) (the ordinary, everyday sense [found a countless number of times in papyri]) a will, testament. 
 
“추수감사주일”과 “하나님의 언약궤”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새벽마다 요한계시록을 읽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을 준비하면서도 여전히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감사”라는 주제에 합당한 말씀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요한계시록 22장 404구절에서 감사라는 단어가 사용된 세 구절의 말씀을 찾았습니다. 먼저 요한계시록에 “감사” 라는 단어가 사용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4:9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요한계시록 4장에 소개된 감사는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하여 사도 요한이 하나님 보좌 주위에 네 생물들의 감사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할 감사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7: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

요한계시록 7장에 소개된 감사는 6장에서 여섯 번째 인이 떼어진 후 일곱 번째 인을 떼기 전에 삽입된 내용으로 인 맞은 자의 수가 각 지파에서 12,000으로 열 두 지파의 인 맞은 수가 144,000이라고 소개한 후 모든 천사가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하여 영광을 돌리는 감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도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될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11:17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요한계시록 11장에 소개된 감사는 일곱 번째 나팔을 불었을 때 하나님 보좌 앞에 24장로들이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한 감사입니다. 따라서 이것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할 감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감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여러 차례 요한계시록을 읽고 묵상하면서 깨닫게 된 감사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옳다.
고난은 환영받지 못하는 형태로 다가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 내게? 왜 내게만? 이렇게 울부짖는다.

악의 형태
1. 자연적 형태
2. 도덕적 형태
3. 고난의 형태
4. 죄의 형태

성경에서 고난은 하나님의 선한 세계에서 이방 세력이 침입한 것이다.
새 우주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사탄을 꾸짖어 내쫓는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사탄의 사자라고 하였다.

문둥병은 신체 말단부의 감각을 마비시켜 감각 상실로 인해 궤양과 감염이 뒤따른 결과 죽음을 초래한다.
고통은 신경 반응에 자극을 주어 자신을 보호하도록 유도한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 - 고통은 아름답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레니우스(Irenaeus) - 성육신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이해될 수 있으며, 무감각한 것이 감수성이 강하게 되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언약궤 자료 #. 1(2019-11-19, 화)
언약궤는 어디에 있을까?

언약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라는 문제는 수세기 동안 신학자, 성경 연구자 및 고고학자들을 매료시킨 질문입니다. 왕이 된지 십팔 년째 되던 해에 유다의 요시야 왕은 언약궤를 돌보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예루살렘 성전에 돌려놓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역대하 35:1∼6, 열왕기하 23:21∼23). 그것이 언약궤가 놓인 위치에 대한 성경의 마지막 언급입니다.

역대하 35:3, 또 여호와 앞에 구별되어서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에게 이르되 거룩한 궤를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건축한 전 가운데 두고 다시는 너희 어깨에 메지 말고 마땅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섬길 것이라. 

열왕기하 23:23,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그 뒤 40년 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습격했습니다. 이후 10년이 안 되어서,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 남겨진 것을 가져가고 성전과 성읍을 불에 태워 흙더미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언약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느부갓네살이 가져갔습니까? 성읍과 함께 파괴되었습니까? 애급의 바로 왕 시삭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통치 기간에 성전을 습격했을 때처럼, 누군가가 언약궤를 치워서 안전하게 숨겼던 것입니까? (시삭이 언약궤를 가져갔다면 어떻게 요시야 왕이 레위인들에게 그것을 돌려놓으라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만일 언약궤가 애급에 있었다면 (“잃어버린 성궤의 침략자들”의 줄거리처럼), 레위인들은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돌려놓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요한계시록 11:19은 언약궤가 있다고 언급합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몇몇 사람들은 이 구절 때문에 언약궤가 하늘로 옮겨져서 그곳에 보존되어 있다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요한이 하늘에 대한 환상에서 본 언약궤는 아마도 모세가 지은 언약궤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성막에 있는 물건들이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히브리서 9:23)이며, 성소 자체는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히브리서 8:5)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히브리서 8: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요한계시록 11장은 이 땅에 마지막 심판의 때가 도래하는 사건을 알리는 일곱 번째 나팔 소리를 다룹니다. 요한이 하늘에 있는 언약궤를 잠깐 보게 된 것은 아마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잊지 않으셨으며, 그들과 함께 계시며, 진정한 예배가 곧 회복될 것을 상기시키려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정경에 속하지는 못한 마카베오 하권(2 Maccabees)은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바벨론 침략 직전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장막과 언약궤를 취하여 모세가 하나님의 유업을 보기 위해 올라갔던 그 산으로 갔습니다(즉, 느보산. 신명기 31:1∼4). 예레미야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장막과 언약궤와 향단을 넣을 수 있는 동굴 속의 방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 물건들을 그곳에 두고 입구를 막았습니다(2:4∼5).” 그러나 “그를 따라온 사람들 중에는 산으로 올라오면서 길을 표시하려고 의도한 사람이 있었지만 그 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말을 듣고 그들에게 책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다시 모으고 자비를 베푸실 때까지는 그 위치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되면 주께서는 이 일들을 알려주실 것이며, 모세 시대처럼,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이 영광스럽고 거룩하게 될 것을 기도했을 때처럼, 구름 속에서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2:6∼8).” 이 간접적인(2:1 참조) 기록이 정확한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더라도, 기록 그 자체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언약궤의 위치에 관한 다른 이론으로는 랍비 슐로모 고렌(Shlomo Goren)과 예후다 겟츠(Yehuda Getz)의 주장이 있습니다. 그들은 느부갓네살이 언약궤를 훔쳐가기 전에 성전의 산 밑에 숨겨져서 그곳에 묻혀 있다고 주장합니다. 불행하게도, 성전 산은 지금 이슬람교의 거룩한 장소인 바위 사원(Dome of the Rock)이 있는 곳이며, 지역 무슬림 공동체는 그곳의 발굴을 거부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랍비 고렌과 겟츠의 주장이 맞는지 알 수 없습니다.


탐험가 벤딜 존스(Vendyl Jones)는 사해 두루마리 가운데서 발견된 유물인 쿰란 동굴 3번의 수수께끼 같은 “구리로 된 두루마리(Copper Scroll)”가 바벨론 침략이 있기 전에 언약궤를 포함한 여러 귀중한 보물의 위치를 자세히 설명하는 실제 보물지도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까지 두루마리에 열거된 필수적인 지리적 경계표를 아무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확인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몇몇 학자들은 구리로 된 두루마리는 마카비하 2장 1절 및 4절과 관련된 실제 기록일 수 있다고 추측합니다. 이것은 흥미로운 추측이지만, 입증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이코노미스트” 잡지의 동아프리카 특파원이었던 “그레엄 핸콕(Graham Hancock)”은 1992년에 “암호와 봉인 : 잃어버린 언약궤를 찾아서(The Sign and the Seal: The Quest for the Lost Ark of Covenant)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언약궤가 고대 에티오피아 도시인 악숨(Aksum)에 있는 시온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B.A.S.E 협회의 탐험가 “로버트 코르누크(Rovert Cornuke)”도 언약궤가 지금 악숨에 자리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도 그곳에서 언약궤를 찾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고학자 마이클 샌더스(Michael Sanders)는 이스라엘의 드야하랴(Djaharya) 마을에 있는 이집트의 고대 사원에 언약궤가 숨겨져 있다고 믿고 있지만, 아직 그곳에서 실제로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의심스러운 아일랜드 전통은 언약궤가 아일랜드의 타라(Tara) 언덕 아래 묻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아일랜드의 “무지개 끝에 있는 아일랜드의 금 냄비” 전설의 시작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심지어 론 와이어트(Ron Wyatt)는 잃어버린 언약궤를 갈보리 산 아래에서 보았고, 톰 크로체(Tom Crotser)는 느보 산 곁에 있는 비스가 산에서 그것을 보았다고 주장하지만, 둘 다 신빙성이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은 고고학 공동체에서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의 주장은 지지받을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결국, 언약궤는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채로 남아 있습니다. 위에서 제시된 것과 같은 흥미로운 이론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지만, 언약궤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마케베오 하권의 저자가 옳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이 친히 다시 오실 때까지는 잃어버린 언약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언약궤 자료 #. 2(2019-11-19, 화)
언약궤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

Ⅰ. 법궤와 내용물

1. 언약의 법궤

지성소 안에는 시은좌(자비석, mercy seat)를 덮개로 가진 법궤가 있다. 법궤는 “ 언약의 말씀”인 십계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출 34:28) 그것은 가끔 “언약의 법궤”라고 불렀다. 시내산에서 법을 발표하신 그리스도께서도 “언약의 천사”라고 불렸다(히 9:4).

법궤를 만드는데 대한 지시는 매우 특별했었다.

“조각목으로 궤를 짓되 두 규빗 반, 광이 한 규빗 반, 고가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정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귓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금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네 발에 달아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서 그 채를 궤 양편 고리에 궤어서 궤를 메게 하며 채를 궤의 고리에 꿴대로 두고 빼어내 지 말지며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니라”(출 25:10∼26).

또한 여기에는 반복되어진 명령이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지을 것이라”(출 25:9). 금과 다른 재료를 다루는데 기술자인 “브라셀”에게 이 신성하며 거룩한 법궤 만드는 일이 맡겨졌다.

Ⅱ. 법궤

안전의 자리 “웹스터 사전”은 법궤라는 단어를 안전 혹은 피난처로 정의한다. 언약의 법궤 이외에도 성경은 안전의 장소로 고안된 다른 두 개의 법궤(Ark)를 언급하 고 있다. 첫째는 노아 당시 의인이 발견할 수 있는 피난처인 방주(Ark)이었으며, 둘째는 아기 모세의 안전 을 위해서 요게벳이 만든 방주(Ark)이었다. 이와 같이 언약의 법궤는 안전의 장소였으며 그것에 담긴 여호와의 율법을 위한 안전의 장소이었다. 율법은 법궤 안에 놓여 졌으며 삼라만상을 지배하는 보좌의 상징으로서 그 겉은 속죄소로 덮여 있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이었으며 하나님의 헌법이며 우리 정부의 기초인 하나님의 율법이 얼마나 신성하게 보관되어야 할지를 보여준다.

Ⅲ. 보물함

하나님의 보물함의 법궤는 “하나님의 보물함”이라 불렀다. 왜냐하면 그 중심부에는 하나님의 율법 곧 특별한 보물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소의 건축에 있어서 모든 부분이 나무를 사용한 것같이 법궤도 역시 광야의 가시나무인 싯딤나무(조각목)로 만들어졌다. “파우셋 성서 사전”에는 “언약의 천사는 인류에게 축복하기 위해 호렙에 있는 인간의 저주를 함께 받은 가시덤불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났다. 언약의 법궤를 형성하고 있는 이 나무로부터 그의 축복이 흘러 나왔다” 참으로 우리의 축복과 영원한 안전의 원천은 법궤가 포함하고 있는 법에 순종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노아의 방주와 모세의 궤가 안팎으로 역청을 칠하므로 방수를 했으나(창 6:14; 출 2:3), 하나님의 언약의 신성한 법궤는 “안팎으로” 순금으로 도금되어 있 었다(출 37:2). 금이 신성을 나타내듯이 이 이중 금 덮개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이중의 보호를 나타내었다. 금과 나무로 만들어진 법궤는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 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함께 나타내고 있다. 얼마나 안전하며 고귀한 법궤인 가! 하나님께서는 그곳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으셨기 때문에 그 중심부에 그의 법을 두실 수 있으셨다. 그것은 결코 변경될 수 없으며 버려짐을 당하거나 결코 곡해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행하신 것처럼 그들의 마음에 그의 법을 지키는 아들들을 위해서도 행하실 것이다.

Ⅳ. 금으로 씌운 법궤

금테 법궤를 두른 순금의 경계는 구세주께서 취하실 “많은 금관” 뿐만이 아니라(계 19:12). 그의 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주의 법으로 기뻐할(시 1:2). 모든 구속 받은 자들에게 그가 씌워 줄 면류관을 표상하고 있다. 그들의 생애에 당신의 율법을 기록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편지며 이는 먹으로 쓴 것도 아니며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고후 3:3). 그와 같이 떡상과 제단에 있는 이 금테두리가 율법을 무너뜨리는 죄를 없애 버리는 권위와 힘을 나타내듯이 법궤의 금테도 그러하다(요일 3:4). 그러므로 거룩한 법을 고의로 무시하며 그것의 일점, 일획 을 파괴하거나 변경시키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면류관에 대한 약속이 없다. 그리스도 자신 조차라도 그렇게 할 수 없으셨다(마 5:17∼18).

Ⅴ. 채

채도 역시 싯딤나무로 만들어서 순금으로 덮었으며 그 채를 양편 금고리에 꿰어서 메게 하였으며 채를 궤의 고리에 꿴대로 두고 빼내지 말게 했다(출 25:12, 14, 15). 이것은 다른 성소 물품과 관련되어 언급된 명령이 아닌,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이었다. 왜 그러했을까? 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최고의 보물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죄를 아는 인간의 손에 닿도록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다른 장소로 옮길 때는 휘장으로 덮혀졌으며(민 4:5). 이 일을 전담하고 있는 선택된 레위인의 어깨에 메어 그 채로 운반되었다. 이 점에 있어서 불순종의 대가는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갈 때 드러났다. “기드온의 타작마당 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웃사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대상 13:9∼10). 이것이 다윗을 매우 슬프게 했지만 우리가 최대의 공경심으로 하나님의 신성한 법을 인식하며 결코 무관심하게 그것을 다루지 아니할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다.

Ⅵ. 증거판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쓰신 돌비가 “증거판”이라고 불리웠으므로 법궤도 “증거궤”라고 불리웠다(출 32:15; 30:6).

“증거”라는 히브리 단어의 뜻은 “증인, 증명, 증거”의 뜻이다. 그와 같이 십계명도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증인이며 위대한 창조주는 오직 한 분으로 살아계신 진실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거, 증명해 주는 것이다. 이 증인, 증명, 증거는 사단이 교묘하게 폐지하고자 노력했던 넷째 계명이 안식일 계명에 특별히 집중되어 있다. 그의 사악한 일 속에서 우리가 그를 돕지 않도록 그의 기만적 속임수에 항상 유의하자. 안전의 고귀한 법궤이신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시 40:8) 그의 생애에 세상에 증거, 증명한다(요 17:3).

Ⅶ. 돌비

양쪽 면에 쓰여 진 돌비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출 25:16). “여호와께서 시내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 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출 31:18).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다.”(출 32:16). 인간의 도구로 쓴 것과는 다르게 하나님께서 파고 쓰신 것은 결코 지워지지 아니하며 변하지 아니한다. “그 판의 양면 이편 저 편에 글자 가 있었다.”(출 32:15). 우리는 가끔가다 이 돌비를 한쪽 면만 쓴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의 생각이 올바른가 아니면 출애굽기 32:15에서 읽을 수 있는 대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성경을 취해서 읽어 본다면 십계명이 돌비의 양쪽에 쓰여 진 포개어진 것을 알게 된다.

출애굽기 32:15,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두 증거판이 그의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쪽저쪽에 글자가 있으니. 

신명기 9:10, 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내게 주셨나니 그 돌판의 글은 하나님이 손으로 기록하신 것이요 너희의 총회 날에 여호와께서 산상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니라. 

8에는 또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십계명 전체가 각 판에 쓰여 졌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지성소와 그리스도

하여 돌비가 책처럼 함께 접혀졌으며 -초기 32. 처음 네 계명은 왼쪽에 그 다음 여섯 계명은 오른쪽에 있었다. -

마태복음 22:37∼48.
돌비가 어떻게 접혀졌든지 간에 각 돌판은 완전한 십계명을 포함하고 있었다.

출애굽기 32:15에 대한 ‘모팻의 번역’을 보면 “이쪽 면과 저쪽 면의 양쪽 면에 쓰여 진 돌비”라고 되어 있으며 ‘오하이오의 히브리대학’의 다른 권위자의 해석을 보면 “랍비 아브라함(1092∼1167)은 이 말의 문자적인 번역을 시도했는데 그는 양쪽 면에 쓴 것 같다”고 되어 있다. 이 랍비에 의하면 신명기 4:13(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은 각 돌비가 십계명 전부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지하는데 사용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랍비의 해석은 차이를 가져오지만 돌비의 양면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에는 일치하고 있다.

Ⅷ. 법의 반복이 주는 의미

하나님의 돌판의 양쪽 면에 두 번 쓰여 졌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왜 그것이 꼭 그렇게 되어 야 할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의심할 것 없이 그것은 “하나님이 이일을 정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바로로 꿈을 두 번 꾸게 한 그 이유와 같은 것이다(창세기 41:32).

고대의 중요한 문서는 안팎으로 쓰고 도장을 찍었다. 도장 찍은 것이 파손되었을 때 안에 쓴 것이 바깥에 쓴 것과 일치한다면 그것의 정확성과 유효성은 증명될 수 있었다. 그와 같이하여 하나님께서도 그의 법이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고 유효하게 만들려고 하셨다.

이 관습의 예가 에스겔 2:9∼10과 요한계시록 5:1에 나타나 있다. 먼저 전자에 관해서 말하자면 ‘파우셋’과 ‘브라운 성서주해’는 “안과 밖 혹은 앞면과 뒷면이라고 한다. 보통 양피지는 그것이 감길 때 안쪽 면에만 쓴다. 그러나 에스겔 2:9∼10에 있는 하나님의 급박한 저주의 기별은 너무나도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뒷면에까지 기록하였다. 요한계시록 5:1의 사본에 대해서 ‘모팻’은 충만함과 완전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어떠한 다른 것도 첨가될 수 없는 것을 함축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와 같이 돌비의 앞쪽과 뒤쪽 양쪽 면에 쓰여 진 하나님의 법은 그것들이 비상한 중요성뿐만이 아니라 충만과 완벽함을 동시에 의미하고 있어서 어떠한 것도 첨가가 시도 될 수 없음을 알려준다. 하나님 법의 특성이 신성하고 유용하며 영속적이며 동시에 우리의 구원과 밀접히 관계되어 있음을 언급해 놓은 곳은 사실상 성경에서 성소 외에는 없다. 하나님의 법을 시기함으로 하늘에서 쫓겨난 사단은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은 속박의 멍에라고 믿게 하 지만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영감을 받은 야고보는 그것을 “자유의 완전한 법”이라고 불렀다(약 1:25). 바울은 우리에게 “죄는 불법(요일 3:4)이요, 썩어짐의 종노릇(롬 8:21)으로 전락하는 것이요 하나님에 순 종하는 자는 그것으로부터 구원될 것”이라 말한다. 요한은 “그의 계명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요일 5:3). 사실상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 우리가 그를 사랑하고 그를 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요일 5:3, 2:3∼4). 하나님의 사랑의 법은 새 계명이 아니라 태초부터 우리가 가졌던 옛 계명이다(신 5:6∼22). 그리스도께서 인류에게 주시려 오셨던 “새 계명”(요일 2:7∼8)은 인간이 만든 규제의 굴레를 벗겨내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옛 계명이다.

Ⅸ.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 언약의 돌비

법궤 속에는 만나를 담았던 금 항아리와 싹이 난 아론의 지팡이를 함유하고 있었다(히 9:4). 이것들은 언제 첨가되었는가? 하나님의 지시가 있었음에도 회중의 몇몇이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갔을 그 때 주께서 모세에게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이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라고 지시하셨다(출 16:33∼34). 하나님께서 간수하시지 않았다면 하루 밤 사이에 썩을 이 음식의 표본을 여러 해 동안 보존하도록 한 그의 목적은 그들 에 대한 그의 계속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어떠한 음식과 물도 얻을 수 없는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양식을 구할 수 있었는가 하는 사실을 대대로 전함으로 그들 마음속에 주를 신뢰하는 마음을 기르고자 한 것이었다(민 20:5).

아론의 지팡이는 고라와 다단, 그리고 아비람이 하나님의 택한 지도자 모세와 아론에 대해서 반역을 꾀 했을 때(민 16:3). 증거판 앞에 놓여졌다. 레위인이 중요한 위치를 맡도록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민 16:10) 하나님께서는 밤새동안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서 꽃이 피고 살구열매가 맺히게 함으로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인정하였다(민 17:8). 그때 주께서 모세에게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하라”고 명령하셨다(민 17 :10).

만나 항아리나 아론의 지팡이는 이스라엘의 40년 광야생활 동안 법궤 안에 간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약 500년 후 법궤가 성전 봉헌식 때 솔로몬 전 안에 놓일 때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에서 나오고 모세가 호렙에서 취한 두 돌판 이 외에도 법궤 안에 아무것도 없었다고 전해진다(왕상 4:8). 

이사람 102 지성소와 그리스도 들은 제사장직을 맡으려고 했던 것이다. -민 16 :10. 이 자만의 정신은 루스벨이 가졌던 것과 똑같은 정신 이었으며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이었다.

Ⅹ. 법궤는 어디에 있는가?

솔로몬 시대부터 B.C 606년 바벨론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까지 거룩한 계명이 든 법궤는 무사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충성스러운 목적아래 의로운 사람들은 두 돌비가 든 거룩한 법궤를 약탈자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곳에 놓아두기로 결정했다. “슬픔과 애통에 싸이어 그들은 죄된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을 피해 어느 동굴에 그 법궤를 숨겼으며 그들에게 더 이상 드러나지 않았다.”(선지자와 왕 453).

바벨론 유수 후 성전은 재건립 되지만 그것의 봉헌식 때에 새로 이 건립된 성소에는 쉐키나도 더 이상 지성소안의 그룹 사이에 내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법궤와 속죄소, 증거판은 그때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여호와의 뜻을 묻는 제사장의 질문에 대한 응답의 음성은 하늘로부터 들려오지 않았다.”(쟁투 24). “여러 노인들이 첫 성전을 보았던고로 통곡(스 3:12) 했다는 말은 조금 도 이상하지 않다.

Ⅺ. 두 돌비는 어디에 있는가?

당신의 손가락으로 친히 쓰신 하나님의 법은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게 될 기준이다. 그러므로 1844년에 하나님 집의 심판이 하늘 성소의 지성소에서 시작되었을 때 법궤와 함께 동굴에 감추어져 있었던 두 돌비는 분명히 나중에 구조되어 하늘 지성소로 옮겨졌을 것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율법책이 있을 것이며 그것에 따라서 모든 사람이 영원한 생명 혹은 영원한 멸망이 결정지어 지게 될 것이다.

“돌판은 그가 적은 그대로 심판의 날에 나타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서 숨겨졌다.”(R.H. 3.26.1908, P8).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장소인 하늘 성전 지성소 안에 하나님의 법인 두 돌비가 있으며(초기 33).” “모든 인류가 의의 위대한 법에 의해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쟁투 415). 1000년 기의 마지막 때 즉 새 예루살렘이 새 땅으로 내려올 때 사단의 무리는 그것을 포위할 목적으로 그 도성을 둘러 에워 쌀 것이다. 그러나 높이 들리워진 보좌 위에 하나님의 아들이 앉아 있음을 보게 될 것이 다. 둘러싸고 있는 무리들의 놀라움 앞에 “책과 같이 겹쳐진 두 돌비를 잡고 있는 손이 하늘에 나타난다.”(초기 32). 그 손이 돌판을 열고 십계명의 근본적인 개념을 설명한 다음 불같은 펜으로 그들의 죄를 추적할 것이다(쟁투 639). 사악한 자들은 그들이 멸시하고 범한 하늘의 법을 주시하게 될 것이며(쟁투 668). 그들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해 오셔서 그의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의 손에 있게 될 것이며 거룩하며 공의로우며 선한 하나님의 법이 그것을 제정하신 분처럼 영원하다는 사실을 또한 보게 될 것이다(4T 257). 이것이 돌비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지식이다. 그리스도의 손으로부터 이 두 돌비는 분명히 제 자리로 돌아가“ 여호와 보좌 옆에 놓여진다.”(초기 255).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한 두 돌비는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한 율법이며 친수로 쓰셔서 보물함에 넣으신 이 법은 당신의 보좌의 영원한 기초이며 온 우주 정부의 영원한 헌법임을 증명하기 위 해 존재할 것이다.

Ⅻ.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때

지성소에 들어가는 모든 자들의 특별한 사업 이와 연관하여 1844년에 있었던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때”(계 11:18)가 언제인지 살펴보는 일은 중요하다. 타락의 무더기 속에 여러 세기동안 묻혀왔던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지식은 이때 당신의 백성들에게 회복되었다(계 11:10). 그때에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계 11:15). 하신다. 이 성경 절을 볼 때 지성소에 들어가는 모든 자가 해야 할 특별한 일은 법궤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의 영원한 의무를 전 파함에 일곱째 천사와 연합해야 함이 자명하다. 지금 세계적으로 전파되고 있는 하나님의 마지막 기별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다(계 14:12). 이 사업이 완성될 때 “하나님의 비밀”이 완성된다.

휘장들
- 재료와 위치

1. 휘장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그가 또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장을 짜고, 그 위에 그룹들을 공교히 수놓고…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장막 문을 위하여 장을 만들고.”(출 36:35, 37).

“뜰의 문장을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수놓아 짰으니, 장은 이십 규빗이요, 광 곧 고는 뜰의 포장과 같이 오 규빗이며.”(출 38:18).

“이 세마포는 그리스도의 의, 즉 믿음으로 예수를 자기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흠이 없는 품성을 표상하는 것이다.”(실물교훈 310).

여기에 사용된 실들은 양들의 옷인 양털에다 염색을 한 것인데, 양털은 하나님의 어린 양의 두루마기를 가리킨다. 금은 믿음과 사랑을 나타낸다.

2. 휘장에는 어떤 색깔과 자수가 사용되었는가?

“너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공교히 수놓아서…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짜서, 성막 문을 위하여 장을 만들고.”(출 26: 31, 36).

“이것들은… 청색, 자색, 홍색 등 가장 화려한 색이 아름답게 배합되어 있었고, 하늘 성소의 사업에 관련 있는 천사의 무리와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영인 천사들의 무리를 대표하는 그룹은 금실과 은실로 짜여 있었다.”(부조와 선지자 347).

3. 세 개의 휘장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어디에 쳐졌던가?

“…둘째 휘장 너머의 거룩한 법궤…”(부조와 선지자 349).

“안 휘장 앞에는 끊임없는 중보의 제단이 있었다.”(상게서 353).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의 간구를 둘째 휘장 안으로 올려 보내야 한다.”(초기 문집 76. 2)

휘장과 기둥의 목적

1. 휘장을 친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너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공교히 수놓아서 금 갈고리로 네 기둥 위에 드리우되, 그 네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서 네 은받침 위에 놓으라. 그 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리라.”(출 26:31∼33).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들어가서 간 막는 장을 걷어 증거궤를 덮고.”(민 4:5).

“그[예수]의 영광이 가리워진 것은… 그가 슬픔과 시험에 싸인 인간에게 접근하시려 하심이었다.”(시대의 소망 권 19). 안쪽 휘장은 여행할 때에 법궤를 덮는데 사용되었다.

2. 가장 안쪽 휘장은 무엇에 달려 있었는가?

“금 갈고리로 네 기둥 위에 드리우되, 그 네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서 네 은 받침 위에 둘지며.”(출 26:32).

“건물은 금으로 싼 기둥에서 드리워진 화려 하고 아름다운 휘장으로 두 칸으로 나뉘었다.”(부조와 선지자 347). 네 개의 갈고리는 그 휘장에 못으로 뚫린 네 개의 구멍이 나 있을 것을 요구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두 손과 두 발에 못 자국이 뚫렸다.

3.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을 때 휘장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태복음 27:51).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성전 휘 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두 조각으로 갈라짐으로 하나님께서 희생과 의식을 받으시기 위하여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더 이상 만나지 않으실 것을 나타내는 동시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헐으셨다는 것을 또한 보여 주셨던 것이다.”(초기 문집 214).

휘장에 생긴 다섯 번째의 찢김(상처)은 필경 창에 맞아 찢긴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가리켰을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언약궤(言約櫃)

언약궤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언약궤의 뚜껑 즉 덮개라고 하겠습니다. 뚜껑 즉 덮개를 “속죄소(贖罪所)”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카포레트(kapporeth)” 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25:17,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속죄소의 상징적 의미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출애굽기 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애굽기 30:6b,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민수기 7:8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씀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대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를 들고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 위와 앞에 그 피를 뿌려 이스라엘의 죄를 속하였다(레위기 16:14∼19).

그는 또 수송아지의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찌니.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를 인하여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같이 할 것이요. 그가 지성소에 속죄하러 들어가서 자기와 그 권속과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고 나오기까지는 누구든지 회막에 있지 못할 것이며. 그는 여호와 앞 단으로 나와서 그것을 위하여 속죄할찌니 곧 그 수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를 취하여 단 귀퉁이 뿔들에 바르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 번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 할 것이요.           

속죄소(贖罪所)의 의미(意味)
1.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는 장소(화목의 자리)
2.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는 장소(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 사이를 화목하신 중보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돌판을 넣고 뚜껑을 덮어야 하는데, 뚜껑을 덮고 돌판을 넣으라고 하셨다.

출애굽기 25:10∼22, 법궤에 대한 이야기

법궤가 다 만들어졌는데 21절에 보면 “속죄소를 궤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하였다. 속죄소는 법궤를 덮는 뚜껑을 말하며, 그 뚜껑에는 두 천사가 양쪽 끝에서 서로 마주보며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법궤를 만든 후 증거판 곧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을 궤 속에 넣고 난 뒤에 법궤 뚜껑인 속죄소를 덮어야 한다. 그런데 출애굽기 25장 21절에서는 속죄소를 궤위에 얹은 후에 증거판을 넣으라고 했다. “돌판을 넣고 뚜껑을 덮어야 하는데, 뚜껑을 덮고 돌판을 넣으라니? 뚜껑을 덮은 상태에서 어떻게 넣을 수 있지?”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돌판이 있는 동안에는 죄의 결과로 저주와 멸망을 당해야 하기에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늘나라에 있는 성전을 보여 주셨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두 개의 돌판에 십계명을 새겨서 모세에게 주셨는데, 모세가 그것을 가지고 내려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한다면 그 죄로 인해 그들이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죄를 범할 것이었다. 죄를 범하며 사는 것이 십계명이 없을 때에는 괜찮지만 법이 내려오면 그 법에 따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저주를 피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가 돌판을 들고 산에서 내려가기 전에 먼저 하늘나라에 있는 성전을 자세히 보여 주신 것이다.

“모세야, 이것은 제단이다. 이것은 물두멍이다. 이것은 등대다. 이것은 떡상이다. 이것은 향단이다. 이것은 법궤다.”


모세가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을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와 깜짝 놀랐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후, ‘이것이 너희를 애급에서 건져낸 신이다’고 하며 그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행했던 이유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후 40일이 지났는데도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무도 없고 풀 한 포기 없는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살아 있을리 만무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 누가 우리를 인도할 것인가?’ 하며 자신들을 인도할 신이 필요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 가운데 제1은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이며, 제2는 ‘너를 위해 우상을 만들지 말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두 계명을 어긴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 죄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이다. 죄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성전이 있어야 하고, 제단이 있어야 하고, 속죄소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할 수 없이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집어던져서 깨뜨려버렸다. 그 돌판이 있는 동안에는 거기에 새겨진 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고, 죄의 결과로 백성들이 처벌을 받아 저주와 멸망을 당해야 하기에 깨뜨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했지만 그 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 삼천 명이 죽는 일이 일어났다. 법이 없으면 죄가 형성되지 않지만 법이 있으면 죄가 형성되어 그 죄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을 죄에서 건져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제단이 필요하고, 법궤가 필요하고, 속죄소가 필요했다. 죄를 범했어도 제단과 속죄소가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죄를 지었지만 어린양 등 제물이 죽어서 그 죄를 씻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죄를 씻어야 하는데, 제단도 법궤도 속죄소도 없어서 모세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금을 가져와라! 은을 가져와라!” 이스라엘 여자들이 귀걸이와 목걸이와 반지를 빼서 내놓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금이 쌓이고 은이 쌓였다. 그것으로 말씀을 좇아 제단을 만들고, 물두멍을 만들고, 떡상을 만들고, 등대를 만들고 향단을 만들고, 법궤와 속죄소를 만들었다.


돌판을 보는 시간이 짧아지길 원하셔서

법궤는 길이가 2규빗 반, 넓이가 1규빗 반, 높이가 1규빗 반으로, 아카시아 나무로 만든 상자에 순금을 입혀서 만들었다. 그 위에 덮을 뚜껑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2규빗 반, 너비가 1규빗 반인 직사각형으로, 그 위에 천사 둘이 마주보며 날개로 궤를 덮게 했다. 하나님은 그 뚜껑인 속죄소를 궤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고 하셨다.

속죄소(贖罪所)는 “죄를 속(贖)하는 곳”으로, 속죄소가 첫 번째로 하는 일은 율법을 덮는 것이다. 율법을 덮기 위해서는 먼저 돌판을 궤 속에 넣고 뚜껑을 덮어야 하는데, 성경에서는 궤를 얹고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고 한 것이다. 뚜껑을 덮고 어떻게 그 안에 증거판을 넣을 수 있을까?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법을 만들기를 정말 원치 않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 지키겠다고 하여 법을 만들었지만 그 법으로 다스리면 그들이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기에, 법을 덮고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신 것이다(KJV에서는 속죄소를 ‘머시 시트(mercy seat)’ 즉 시은좌(施恩座)라고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증거판을 법궤 안에 넣고 속죄소로 덮어서 법이 보이지 않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법궤의 뚜껑을 열어놓고 돌판을 넣은 후 뚜껑을 닫으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하나님은 돌판이 보이지 않게 하려고, 뚜껑을 덮어놓은 후 그것을 살짝 옮긴 뒤 돌판을 집어넣고 빨리 뚜껑을 닫게 하신 것이다. 돌판이 보이는 시간이 훨씬 짧아지게 하려고 속죄소로 법궤를 먼저 덮은 후 돌판을 넣으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당신 사이에 법이 있어서 그들에게 죄를 정하는 무서운 일을 하기 전에 돌판을 법궤에 넣고 덮기를 원하셨다. 돌판을 보는 시간이 짧아지길 원하셔서 뚜껑을 덮고 난 뒤 살짝 들어서 그 틈으로 돌판을 집어넣고 얼른 뚜껑을 덮길 바라셨다. 그처럼 율법을 보지 못하도록 속죄소로 법궤를 덮었을 뿐 아니라, 두 천사의 날개로 덮고, 다시 피로 속죄소를 덮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벌하기 위해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꺼낼 필요가 없도록 죄의 값인 피를 이미 뿌린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죄가 다 사해진 사실을 보도록 법궤 위에 피를 뿌리라고 하신 것이다.


당신과 우리 사이에 법이 없고 죄가 없는 상태에서 죄를 지어서 저주와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런 놀라운 일을 행하셔서 우리를 구원하길 원하셨다. 예레미야 31장 31절 말씀대로 하나님은 새 언약을 세우셨다. 십계명이 아닌 우리 죄를 사하신 언약을 세우셔서,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렘 31:34) 하셨다. 하나님은 새 법을 세우셨고, 옛 법인 율법을 볼 수 없도록 법궤 안에 넣고 뚜껑을 덮고 그 위에 피를 칠하게 하셨다. 죄의 값을 이미 지불했기 때문에 법을 끄집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속죄소 위에서 우리와 만나길 원하신다. 당신과 우리 사이에 법이 없고 죄가 없는 상태에서 서로 마음을 나누길 원하신다.

속죄소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놀라운 이야기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와 상관없이 당신 앞에 나아가도록 모든 절차를 갖추어 놓으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직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죄 속에 빠져서 고통하며 사는 것을 보면 너무 안타깝다. 이제 우리는 자신이 죄를 짓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 죄를 완벽히 사한 예수님의 피를 보고 죄에서 벗어나 복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율법은 다시 볼 수 없다. 법궤에 넣고 뚜껑을 덮었다. 그 뚜껑을 두 천사가 날개로 가리고 있어서 누구도 열지 못한다. 그리고 피를 칠해서 다시 열어 볼 필요가 없게 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대할 수 있다. 법궤에 관한 말씀대로,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도록 우리 죄를 다 씻어 처리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출처 : 굿뉴스데일리(http://www.gndaily.kr)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지난 일 년 동안 무엇을 감사할까?

이건일집사님과 한완섭권사님은 용커스에서부터 매주일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무려 2시간 동안 주일 예배에 참석하셨습니다. 이렇게 행할 수 있었던 것은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건강하지 못하면 예배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박은아 자매는 요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며 신분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소망의 꿈을 갖게 하셨습니다.

구은숙권사님은 손주를 품에 안게 되었습니다. 아들과 딸의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기도 제목이 응답되는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황선민목사님과 윤연숙사모님은 매주일 찬양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섬길 수 있는 은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됩니다.

‘다바르’의 뜻은 “말씀”입니다

말씀의 히브리어는 ‘다바르’입니다

“말씀”, “사건”을 뜻하는 ‘다바르’는,

“실제 존재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각 성경의 처음 나오는 단어를 성경의 책 제목으로 부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는 가장 처음 나오는 단어가 ‘태초에’라는 뜻의 ‘베레쉬트’이기 때문에 히브리어 성경의 창세기를 ‘베레쉬트’라고 부릅니다.

신명기를 히브리어로는 ‘드바림’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말씀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처음 나오는 단어가 가장 중요한 핵심 주제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세가 요단 저편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

(신명기 1:1)

‘드바림(דברים)’은 ‘말씀들’이라는 복수 형태이며, ‘말씀’의 단수형은 ‘다바르(דבר)’입니다.

선지자에게 말씀이 임할 때도 ‘다바르’라고 합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세기 15: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이사야 2:1)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열 가지 계명(명령), 십계명도 ‘다바르’입니다.

열 가지 말씀입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언약을 너희에게 밝히 보여 주시고 그것을 수행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셨으니 곧 열 가지 명령이라. 그분께서 두 돌 판에 그것들을 쓰셨느니라.”(​신명기 4:13)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오신 예수님, 그 말씀도 ‘다바르’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1)

말은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바르”로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다바르”는 말이자 사건이자 사물입니다.

‘다바르’는 “실제 존재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 마음에 새기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말하고, 믿고, 기도하고, 노래하면 그대로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다바르)은 “실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말씀(다바르)은

생각하는 대로 되고, 말하는 대로 되고, 믿음대로 되고, 기도 한대로 되고, 노래 한대로 될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브리서 11:1)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간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시편 119:58)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시편 119:65)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시편 119:116)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누가복음 1:38)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사도행전 27:25)

<가슴 뛰게 하는 말>

요즘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잘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잘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수기 14:28)

  

오늘 나의 입술의 말이 나의 믿음의 현주소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어린 양(요한복음 1:29)

기원전 722년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합니다.
기원전 586년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합니다.
왜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이 세운 나라가 세상 나라에 의해서 무너졌습니까?
중심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선택받은 백성들의 중심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우상들을 모셨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유다가 망했다는 것을 알려주므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 하지 말라고 하는 교훈을 얻습니다.

요한복음의 목적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려주고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세 가지로 소개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빛
빛은 생명을 말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영
영은 자유를 말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은 사랑
사랑은 용서를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증거 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첫째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한복음 1:29, 36)

흠이 없고 정결한 어린 양은 희생의 제물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나의 죄와 허물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바쳐진 속죄를 위한 희생 제물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지다라는 것에 대한 이해는 사람마다 그 문화적인 배경을 갖고 생각하게 됩니다.
한국인의 경우는 지다는 의미는 마치 물건을 짊어지는 것처럼 이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지다는 헬라어 동사 “아이로”를 사용합니다.
‘아이로’의 뜻을 “치워버린다” “없애버린다” “들어올린다” 등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세상 죄를 치워버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이해하면 쉽게 본문의 깊이를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둘째는 선재하시는 분(1:30)
셋째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알 수 없는 분(1:31a, 33a)
넷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1:31-33)
다섯째는 하나님의 아들(1:3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한복음의 전체 주제는 “예수님은 누구신가?”이다. 요한복음을 저술한 목적은 저자가 직접 20장 31절에서 밝힌 것처럼 전도를 위한 것이 분명하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예수님의 많은 표적과 말씀에 대한 기록도 이 목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1장 초반부터 지금까지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자기가 누군지를 소개하고 있다. 이제 세례요한은 많은 무리들 속에 서 계신 예수님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본문에서 사도요한은 세례요한의 입을 빌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다음 다섯 가지로 소개한다.

I.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The Lamb of God.) - 29절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우선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그에게 나아오자 사람들에게 보라(behold, look)고 말한다. 여기서 29, 36절에서 “보라”는 말은 그냥 대충 흘깃 보라는 의미가 아니다. 군대 열병식에서 군인들이 사열관을 향해 경례하며 집중하듯이, 서치라이트로 어떤 대상을 집중적으로 비추듯이 보라는 의미이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라고 한 후 그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아그누스 데이, 아뉴스 데이)으로 소개한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유대인들만의 죄를 지고 가시는 분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 우리 모두의 죄를 지고 가는 분이었다. 여기서 지고 간다는 마른 운반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제거한다는 의미도 있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세상의 죄를 제거하는 분이었다.

세례요한은 이미 수천 년 동안 내려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야, 즉 하나님의 어린양 개념을 알고 있었다. 구약은 곳곳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예수님의 모습을 예시한다. 대표적인 경우를 몇 가지 살펴보자.

첫째, 하나님은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린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어린양을 예시하신다. 아버지의 손에 결박되어 장작더미 위에서 죽기를 기다리는 이삭의 모습은 구약에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가장 분명한 예시였다.

둘째, 출애굽기 12장은 출애굽 당시에 애굽의 장자들이 죽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어린양을 예시한다.

“21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22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23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출12:21-24).

모세가 바로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해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게 된다. 이 때 마지막 재앙이 바로 장자가 죽는 재앙이었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뿌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은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다. 유월절이라는 말은 바로 넘어갔다는 말이다. 성경은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하셨다고 말한다.

셋째, 레위기 16장은 속죄의 염소(scapegoat), 즉 아사셀 염소를 통해 어린양을 예시한다:

“5.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제물로 삼기 위하여 숫염소 두 마리와 번제물로 삼기 위하여 숫양 한 마리를 가져갈지니라 ... 7. 또 그 두 염소를 가지고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 8.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9.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10.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레16:5-10).

아사셀(Azazel, לזאזע)이란 말은 “염소”라는 단어와 “떠나보내다”라는 단어가 합쳐져서 “떠나보내는 염소”(the goat that departs, goat sent out)의 의미이다. 대제사장이 속죄일에 백성들이 가져온 염소 중에 두 마리를 택한다. 한 마리는 속죄의 제물로 죽여서 그 피를 지성소에 뿌린다. 다른 한 마리 아사셀로 뽑힌 염소는 대제사장이 안수하여 백성들의 모든 죄를 전가시키고 광야로 쫓아낸다. 아사셀 염소는 모든 백성들의 죄를 지고 광야에서 유리하다가 죽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아사셀 염소에게 지운 후 그를 광야로 내 보내어 사나운 짐승에게 찢겨 죽거나 굶어 죽게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용서함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나운 짐승이 있는 광야에 아무런 방어를 할 수 없는 아사셀 염소를 내 보내는 것은 마치 죄가 없는 예수님이 어둠의 세력으로 가득 찬 세상에 성육신 하셔서 사람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찢겨 죽으시는 것을 상징한다.

넷째, 이사야 42장과 53장은 구약성경 전체에서 예수님을 가장 분명하게 고난의 종으로 오신 어린양을 묘사한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3-7).

이 외에도 구약에서 예수님을 어린양 혹은 그와 유사한 모습으로 묘사한 곳은 많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비록 희미하지만 다양한 상징으로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어가신 유월절 어린양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죄사함과 구원을 받았다.


II. 선재하시는 분 - 30절


다음에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선재하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surpassed)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before)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구약은 곳곳에서 하나님을 선재하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예를 들면 다니엘서(7:13, 22)에서는 하나님을 가리켜 말할 때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the "Ancient of Days")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13),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더라.”(22)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이종사촌 형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이 자기보다 앞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앞의 1장 15절에서도 동일하게 언급되었다: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여기서 앞섰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시간적으로 먼저라는 의미이다. 먼저(before)라는 것은 6개월 먼저라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은 다만 세례요한보다 먼저 계셨을 뿐 아니라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이다. 이것을 예수님의 선재성 혹은 존재론적 선재성이라고 부른다. 그 분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존재하셨던 분이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은 부처님보다, 공자님 훨씬 후에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선재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능력이 뛰어나다(surpass)는 의미이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자기보다 훨씬 더 뛰어난 분이라고 말한다. 만물보다 선재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은 인간인 자기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는 말이다.

III. 예수님은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알 수 없는 분 - 31a, 33a절


세 번째로 세례요한은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알 수 없는 분으로 소개한다. 그는 31절과 33절 첫 부분에서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라고 말한다.

31,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I myself did not know him,

정말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몰랐을까? 누가복음 1장 36절에 의하면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이종사촌 형이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그가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고 말할까? 이는 그가 예수님을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로는 알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는 예수님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가 이제야 그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

복음서에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두 분 다 매우 경건한 분들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임신한 것이 요셉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한 것이라고 떠들고 다녔을 리가 없다.

요셉은 아직 부부생활을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마리아가 임신한 것이 드러나자 분노하며 마리아로 수치를 당하게 하기보다 조용히 파혼하고자 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마1:19).

마리아 역시 예수님의 탄생이나 성장하는 중에 일어난 놀라운 일들을 마음에 묻은 채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면서 산 여인이었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예수님이 계실 때 목자들이 찾아와서 그들이 본 것을 요셉과 마리아에게 들려주었을 때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눅1:19)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특별한 출생에 대해 요셉과 마리아는 거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요한복음 7장 3-5절에 보면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오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다른 마을에서 자랐던 이종사촌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정체를 몰랐을 것은 당연한 것이다.

지금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은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한다.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없으면 예수님에 대해 아무리 많은 연구를 하는 종교학자라도 예수님을 모를 수밖에 없다. 우리 동네에 계시는 어떤 종교학과 교수는 예수님은 역사상 여러 훌륭한 선생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예수님 외에도 여러 길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많은 공부를 했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한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는 것이 공부를 통해 이루어진다면 구원은 학벌 순서가 될 것이다.


IV.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The Baptizer in the Spirit) - 31-33절


넷째,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자신이 물로 세례를 주는 것도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분임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I myself did not know him, but the reason I came baptizing with water was that he might be revealed to Israel."

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Then John gave this testimony: "I saw the Spirit come down from heaven as a dove and remain on him.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I would not have known him, except that the one who sent me to baptize with water told me, 'The man on whom you see the Spirit come down and remain is he who will baptize with the Holy Spirit.'


V.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34절


마지막으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한다.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I have seen and I testify that this is the Son of God."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파트리스교회 주일 설교 / 2020-1-?

 하나님은 사랑(요한일서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Whoever does not love does not know God, because God is love.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치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아주 익숙합니다. 그런데 새해 복 받으셨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 복을 받았습니다.” 라고 대답을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끼셨나요?” 라고 질문하면 대답을 잘 못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대답은 막연하게 “내 죄를 용서해주셨기 때문” 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죄를 용서하신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즐거움을 누리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에베소서 3:18∼19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사랑을 추상적으로 알지 말고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말씀에 사용된 동사를 잘 관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에서 두 단어 “알고” 그리고 “깨달아”를 살펴보겠습니다.

예를 들면 한글 성경의 여러 번역을 참조합니다.

(NIV) May have power, together with all the saints, to grasp how wide and long and high and deep is the love of Christ. and to know this love that surpasses knowledge that you may be filled to the measure of all the fullness of God.  
(새번역)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공동번역)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현대인) 19절은 없고 18절과 같다고 표기
모든 성도들과 함께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폭과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알고 하나님의 모든 풍성하신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헬라어 원문)
18, 알고(καταλαβέσθαι) - to comprehend
καταλαμβάνω(2638. katalambanó)
Definition : to lay hold of, seize

Usage : (a) I seize tight hold of, arrest, catch, capture, appropriate,
(b) I overtake,
(c) mid. aor: I perceived, comprehended.   

19, 깨닫고(γνῶναί) - to know
γινώσκω(1097. ginóskó) 
Definition : to come to know, recognize, perceive

Usage : I am taking in knowledge, come to know, learn;
aor : I ascertained, realized.  
    
“알고”라는 단어의 뜻은 “손으로 꽉 잡는다.”는 뜻입니다.
“깨닫고”라는 단어의 뜻은 “체험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막연하게 또는 추상적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직접 체험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항상 붙잡고 살아가야 할 사랑입니다.

사랑을 붙잡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까?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직접 삶의 현장에서 부르셨던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그의 직업이었던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을 정도로 열광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열광적인 사랑으로 예수님을 쫓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 모른다고 부인했던 슬픈 과거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며 나를 쫓아왔느냐? 라는 질문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체험했습니까?

베드로는 어느 날 예수님과 요한과 야고보와 더불어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된 예수님을 목격했습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베드로는 그곳에 초막을 짓고 여기에서 살고 싶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때 위로부터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산 아래로 내려가자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아쉽게 느꼈을까요?
여기가 좋은데, 여기서 살고 싶은데, 산 아래보다는 산 위가 더 좋은데 이런 생각에 베드로는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는 것은 좋은데 그 체험과 느낌이 현실에서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뉴욕나사렛교회 금요성서연구 / 2015-10-16

하나님은 사랑(요한복음 3:16, 로마서 5:8)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예수님을 만난 구두방 아저씨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크게 표현한 말씀은 요한복음 3:16과 로마서 5:8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한복음 3장 16절을 묵상하면서 몇 가지 설교 제목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사랑의 대상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둘째는 사랑의 방법 - 독생자를 주셨으니

셋째는 사랑에 참여 - 저를 믿는 자마다

넷째는 사랑의 목적 - 하나님이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은 사랑의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요한복음 3장 16절을 중심으로 몇 차례 설교를 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랑!

사랑의 하나님!


성경에서 사랑에 대한 대표적인 말씀은 고린도전서 13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전서 13:4-8a).


사랑의 하나님! 또는 하나님은 사랑! 이라고 표현 할 때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과연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장이라고 일컫는 고린도전서 13장에 나타난 사랑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 사랑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온유하며 -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온유합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 사랑은 자기가 행한 것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온유합니다. 사랑은 차별하지 않고, 모든 자에게 선한 일을 하셨습니다. 사랑은 남이 가진 것을 탐하지 않고, 불만 없이 낮은 삶을 사셨습니다. 사랑은 자신이 육체 가운데 거하면서 실제로 어떤 분임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이 만났던 어떤 사람보다 높은 위치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사랑은 복종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에게 복종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예수는 기꺼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순종했습니다.


“오직 아버지가 명하신 대로 행함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14:31).


사랑은 항상 다른 이들의 유익을 찾으셨으며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 분의 영원한 집, 천국에서 그 분과 함께하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소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심으로 이 것이 가능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로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셨습니다.


첫째, 사랑은 용서하는 것(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의 약점과 잘못을 갖고 있습니다. 만일 잘못이나 약점을 그대로 드러내거나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한다면 사람들은 실망할 것입니다.

용서란 인격을 갖춘 존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인격적 존재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길을 선택하고 결정을 할 때마다 그들을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세를 가리켜 최고의 온유한 사람이라고 칭찬했습니다(민수기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모세는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왜 모세를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셨을까요?

모세는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두 눈으로 목격하며 그들의 잘못을 지워버리려고 차라리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고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던 지도자이었습니다(출애굽기 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잘못한 것을 용서하는 것도 어렵지만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을 내가 감당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하여 자기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라고 간구했던 지도자이었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두 가지 자세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사람을 수단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을 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만난다는 것은 사람을 이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사람을 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할 때 수단으로 만났다면 하나님 저 원수와 같음 무리들에게 벌을 내리셔도 마땅합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목적으로 만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애급에서 고통 받고 신음하던 무리들을 인도하셨으므로 저들의 잘못을 기억하지 마시고 차라리 내 이름을 지워 버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수단으로 찾았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 그의 잘못을 일러주었을 때에 오히려 더 확신 있게 예수님을 팔아넘기겠다고 다짐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목적으로 찾았기 때문에 그의 잘못을 뉘우치고 예수님의 부름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아들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한 자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같이 사랑할 능력을 주셨습니다(요한복음 1:12, 요한일서 3:1; 23, 24). 

둘째, 사랑은 변화하는 것(요한복음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변화한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삶을 시작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변하기 전에는 내가 내 방법대로 생활하고 습관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변한 후에는 내가 주님의 삶을 닮아갑니다. 주님처럼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것을 변화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변화하기 전에는 내가 최고의 법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며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변화한 후에는 내가 주님을 본받는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깨우쳤습니다.

고린도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린도전서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셋째, 사랑은 영원한 것(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영원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빛이 되신 하나님은 생명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영원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용서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용서하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4:10b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한일서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사도요한이 듣고 보고 손으로 만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사도요한은 다른 제자와는 다르게 하나님을 세 가지로 정의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영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도 예배해야 합니다(요 4:24)

둘째, 하나님은 빛

하나님이 빛이시기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어두움 가운데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어서도 안 되고 어두움 가운데 안주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빛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빛 가운데 거하고 빛 가운데 행동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사랑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사도 요한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정의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정의를 포함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도 요한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해야 알 수 있는 하나님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하는 이유를 요한일서 4:7∼8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되는 첫 번째 이유는 사랑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성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귀신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7절 말씀을 다시 보면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을 믿는다! 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는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9∼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로 하는 사랑을 많이 합니다. 말로는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행동이 따라 주지 않는다면 삶으로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 사랑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로는 선지자를 보내서 말씀하셨고 때로는 직접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10절을 보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이유입니다.

죄인을 사랑하신 예수님

10절을 다시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해서라는 구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해서 자기의 아들을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에 얽힌 이야기를 할 때 자주 언급하는 것은 “나라 사랑” 즉 “조국애(祖國愛)”라고 합니다. 출신 학교를 사랑하는 것을 “모교애(母校愛)” 라고 합니다. 무엇인가 의미 있는 것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자식애(子息愛)”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罪人)을 사랑하셨습니다. “죄인애(罪人愛)” 라고 할까요?

위대한 사람이나 특별한 관계를 갖는 사람을 사랑하거나 대신 죽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위해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만한 가치가 없는 죄인을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그 죄인이 누구입니까? 저와 여러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주 나약하고 더럽고 추악하고 악취가 나고 보잘 것 없는 저와 여러분을 죽기까지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화목제물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분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그 사랑의 십자가가 여러분 마음에 뜨거움으로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내가 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그 큰 사랑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되는 세 번째 이유가 11∼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 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계속해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중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 줄 수 없는 사람을 받아주고 사랑할 때 그 사랑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많은 사람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안에 사시는 성령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어떻게 거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여 하나 되게 하는 신비로움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13∼16절의 말씀입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일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저라는 말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계속해서 16절에 보면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 됨의 비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는 하나 됨을 맛보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을 보면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합니다. 이 하나 됨이 얼마나 신비한지요? 요한복음 17장 22∼23절에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하려 함이로소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고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입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 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모든 것은 성령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의 은혜가운데 나아가고 성령의 힘에 의지하여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 되는 놀라운 영광의 자리에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하나 됨의 열매 담대함

사도 요한은 하나 됨의 열매에 대해 말합니다. 17절에서 21절입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

사랑함으로 얻어지는 첫째 열매는 담대함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담대함이란 단어를 네 번 쓰고 있습니다. 두 번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 우리가 담대함을 얻었다고 했고 또 다른 두 번은 마지막 날 재림의 날에 누리는 담대함을 이야기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된 담대함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두려움이 없고 장래에 받을 심판에 대한 담대함이 있습니다. 담대하다는 것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죄를 범한 인간이 갖게 된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운전을 하다가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그냥 달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경찰차가 나타나서 제 차를 세웠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두려워서 도저히 경찰관과 눈을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면 우리의 죄가 드러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나만 아는 죄까지도 다 드러납니다. 생각으로 지은 죄까지 다 드러납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사탄은 우리의 죄에 대해 참소합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담대해 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이미 죄 값을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담대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여준 온전한 사랑이 우리의 두려움을 내어 쫓고 담대함을 줍니다.

하나 됨의 열매 형제사랑

둘째 열매는 형제사랑입니다

20∼21절을 보면 사도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사랑한다고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픔을 주고 고통을 주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형제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지 않으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이라고 지적합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눈에 보이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사랑의 몸부림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가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하나님의 사랑가운데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우리의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완성되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를 볼 때 사랑받을 수 없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보고 사랑할 수 없는 형제자매들을 사랑할 힘과 용기를 얻기를 축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람들이 기독교를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복음주의 기독교 변증가인 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는 이를 세 가지로 제시한다. 

1. 응답받지 않는 기도

"신은 죽지 않았다(God's Not Dead)"는 영화의 끝 부분에 영화 내내 학생의 기독교 신앙을 공격하고 비꼬고 조롱하던 무신론자 대학 교수는 어린 시절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과 그녀를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던 자신의 응답받지 않은 기도가 자신을 결국 무신론자로 만들었다고 인정한다.

자신을 위로해주려고 애쓰던 목사님을 찾아가 나눈 대화에서, 그 목사님은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노(No)"라고 말씀하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교수는 고뇌하면서 이 영화에서 가장 신랄한 말 중 하나를 말한다.

"하나님은 노(No)라고 하실 때가 너무 많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실 때가 너무 많아.)

그 기도가 그저 차를 갖게 해달라는 것이나, 시험에서 A학점을 맞는 것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데이트하게 해달라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기도가 당신의 친구나 당신의 자녀가 암으로 투병하거나, 오랜 실직으로 고통당하는 가정이거나, 약물 남용으로 자신의 삶을 포기한 사람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반복적으로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그 터널의 끝에서 빛은 나타나지 않았다.

성경의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사랑의 아버지라고 성경이 약속하지만 않았다면, 자녀들의 요청에 속히 응답하시는 분이라고 약속하지만 않았다면, 그리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고 약속하지만 않았다면 달랐을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6-8)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 42:2)

비기독교인들은 물론이고 기독교인들조차도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문제로 씨름하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과 다른 듯한 현실을 놓고 하나님의 약속과 퍼즐을 맞추기 위해 사투한다.

2. 악은 왜 존재하는가?

찰스 다윈, 테드 터너(CNN 설립자), 바트 어만(자유주의 신학자)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이들은 다른 분야의 전문가이지만, 모두 매우 강한 지성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거부하게 되거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불가지론자가 된 이유가 있다고 인정한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자신들이 경험한, 그리고 이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악을 보면서 절대자 신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터너는 자신의 어린 여동생이 죽는 걸 봐야 했고, 다윈은 자신의 어린 딸 애니의 죽음을 겪었다. 어만은 신정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인생에서 발생하는 악과 비극과 전능하고 선한 신을 화해시키는 문제는 불신자들과 신자들 사이에 끝없는 토론을 일으킨다. 자신의 자녀가 갑작스럽게 죽거나 퇴행성 질환으로 고통당하다 천천히 죽어갈 때, 정치적 폭군에 의해 살해되거나 대학살을 당할 때, 전능하고 선한 신에 대해 혼란을 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악이 그들을 찾아올 때, 사람들은 때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고, 리차드 도킨스가 말하는 악의 존재에 대한 이유를 믿기 시작한다. 그는 말한다. "전자와 이기적 유전자, 통제 불능의 물리적 힘, 유전자 복제의 우주에서, 어떤 사람들은 상처 받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행운이 찾아온다. 거기에서 당신은 어떤 라임이나 이유도, 정의도 찾을 수 없다. 우리가 관찰하는 우주에는 아무런 설계도, 목적도, 악도, 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통제 불능의 무자비한 무관심만 있을 뿐이며 그것만을 기대할 수 있다."

3. 말과 삶이 다른 그리스도인

바나 그룹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30%만이 복음주의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간디의 유명한 말과 일치하는데,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좋아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행위가 예수님의 행동을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인 래비 재커라이어스(Ravi Zacharias)는 자신에게 수 천 개의 기독교에 대해 도전하는 질문들이 쏟아지는데, 자신을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한 힌두교 친구가 물은 질문이라고 했다. "너는 회심이 초자연적이지만 정말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는데, 내가 아는 그렇게 많은 기독교인들의 삶에서는 왜 그것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가?"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이 정말 삶에서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을 만들어내지 못하는가?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교회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선행의 셀 수 없이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 병원, 고아원, 학교, 재난 및 구호 단체, 노숙자 보호소, 의복 및 생필품 제공 등에 이르기까지. 이런 곳들은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사랑의 증인이 되기 위해,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반박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에 의해 설립되거나 운영되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말했다.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벧전 2:15)

여전히 잘못된 기독교인들의 이야기도 들려오지만, 그것은 일탈한 기독교인들의 개인적인 행동일 뿐이다.

4.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슈마허는 "기독교에 대한 이 세 가지 장애물에 대해, 나는 이 문제들과 관련해서 사람들이 제기하지 않는 것들을 좀 생각해보라고 제안하고 싶다"면서 "이러한 장애물들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모순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고, 우리가 경험하는 삶과 성경이 본질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성경의 사례들을 열거했다. 성경에서도 선인이 악인에 의해 살해당하고(가인의 아벨 살해, 창 4:8), 기근이 일어나고(창 41:27), 라헬처럼 사랑하는 아내가 출산 중 죽고(창 35:19), 훨씬 더 악한 나라에 의해 나라들이 정복당하고(단 1:1-2), 원수에 의해 생계와 가족, 건강이 파괴되었고(욥 1-2장),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태어난 자 중에서 이 사람보다 더 큰 자가 없다 했던 사람이 악한 여인에 의해 감옥에서 부당하게 살해당했고(마 11:11, 14:1-12, 세례 요한의 죽음), 의로운 사람의 진실한 설교가 거부당하고 심지어 살해까지 당했으며(행 7장, 스데반의 순교), 생명의 구원을 놓고 기도한 위대한 기독교인들의 기도가 응답되기도 했지만 응답되지 않기도 했다(행 12:2,5,12, 기도로 감옥에서 풀려난 사도 베드로와 감옥에서 순교한 사도 야고보).

그는 무고하고 죄 없은 한 사람의 기도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그의 죽음을 피해가게 해달라고 했던 기도는 거부되고(마 26:42), 원래 사형이 선고된 사람과 운명이 뒤바뀌어 십자가에서 처형당했다는 것(마 27:21).

하나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도, 성경에서는 이들의 영웅적인 면모와 함께 죄의 모습도 보여준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 사라에 대해 두 번이나 아내가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고(창 12:13, 20:2), 야곱은 에서에게 임할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 아버지를 속였으며(창 27장), 다윗은 간음을 저지르고 그 여인의 남편을 죽였고(삼하 11장), 예수님의 제자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으며(26:47-50), 예수님의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고(마 26:56, 마 26:69-75), 요한 마가는 바울의 선교 여행 도중 이탈했으며(행 13:13), 도마는 사도 바울을 떠났다(딤후 4:10)는 것.

슈마허는 "요점은 악은 존재하고 기도는 응답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고, 믿는 자들의 성품의 결함은 성경 어디에서나 발견 된다"며 "성경은 우리가 매일 매일 살아가는 불공정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것과 인생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나의 대답은 성경과 우리의 현실은 조화를 이루어 희망을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며 "성경에서 우리는 무고하고 죄없는 사람의 구원을 위한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친한 친구에 의해 배반까지 당하고, 악의 비극적 희생자가 본 것처럼 된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악으로부터 위대한 선을 보시는 것을 보게 된다. 성경은 왜 이 모든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사흘 후에 보여 준다"고 말했다.

성경에서 우리는 왜 악이 존재하는지(사단에 의해 악이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 일에 대해 언젠가 어떻게 하실 것인지, 왜 기도가 자판기처럼 응답되지 않는지, 왜 신실한 신앙인들이 그것이 가짜인 것처럼 행동하는지에 대해 발견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이러한 대답을 받아들일 것이냐 하는 것"이라면서 "우리는 이 길의 끝이 무엇인지 하나님처럼 볼 수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믿음으로 걸어갈 뿐"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때로는 이것이 어렵다"면서 "이러한 것들을 극복하기 위한 키는 이 세 가지 중요한 이슈를 자신의 삶에서 직접 당하시고 견뎌내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시선을 고정하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보다 더 크신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신뢰함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그 문제들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글을 마쳤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일 설교 / 2020-1-19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Whoever does not love does not know God, because God is love.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요한서신에서는 하나님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5)

둘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16)

셋째는 하나님은 영이시라(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빛이시라

빛의 영적 의미는 "생명"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의 영적 의미는 "용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영의 영적 의미는 "자유"를 말합니다.


빛과 사랑과 영의 공통된 특징은 "영원"이라고 하겠습니다.

생명도 영원한 것이고, 용서도 영원하며, 자유도 영원합니다.


2020년 1월 5일 신년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오늘은 1월 4일(토)에 읽었던 요한일서 4장의 말씀 중에서 묵상 주제로 소개했던 "하나님은 사랑"이란 주제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 말에는 "사랑" 이란 단어가 하나뿐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을 기록한 '코이네 헬라어'와 '헬라어'에는 사랑이란 단어를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먼저 사랑이란 다양한 단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랑이란 단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살펴야 하는 이유는 언어의 혼돈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범위가 매우 넓습니다.


예를 들면 나라를 사랑한다는 대상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모를 사랑한다.

형제를 사랑한다.

친구를 사랑한다.

애인을 사랑한다.

음악을 사랑한다.

꽃을 사랑한다.

개(伴侶犬)를 사랑한다.

고양이(伴侶猫)를 사랑한다.

문학을 사랑한다.

교회를 사랑한다.

학문을 사랑한다.


우리 말에서는 사랑이란 단어 하나만으로도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그러나 헬라어에서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했습니다.


첫째는 스토르게(storge, φιλόστοργος)(5387. philostorgos) 

Definition : tenderly loving

Usage : tenderly loving, kindly affectionate to.


로마서 12:10(형제를 사랑하여)


둘째는 필리아(philia, φιλία)(5373)

Definition : friendship

Usage : friendship, affection, fondness, love.


야고보서 4:4(세상과 벗된 것)


셋째는 에피투미아(epithumia, ἐπιθυμία)(1939)

Definition: desire, passionate longing, lust

Usage: desire, eagerness for, inordinate desire, lust.


마가복음 4:19(욕심), 누가복음 22:25(원하고 원하였노라)


넷째는 에로스(eors, Ἔρως)

성경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단어

그리스 신황에  등장하는 연정과 성애의 신이다.

로마신화에서 아모르 또는 큐피드와 같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고대 그리스어로 주로 이성에 대한 강렬한 성적 욕구를 의미하는 보통명사가 신격화된 것이다


다섯째는 아가페(agape, ἀγάπη)(26)

Definition : love, goodwill

Usage : love, benevolence, good will, esteem; plur: love-feasts


마태복음 24:12(사랑이 식어지리라), 누가복음 11:42(하나님께 대한 사랑), 요한복음 5:42(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란 단어가 우리 말처럼 단순하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필요한 단어를 사용하므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한 예를 성경에서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노련한 어부이었지만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여 피곤하고 지쳤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져보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순식간에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물을 잡아 당기면서 얼마나 많은 고기가 잡혔는지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말씀하셨던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잡은 물고기를 구워 아침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가 사용한 사랑이란 단어는 "필리아" 라는 단어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단어는 "아가페"와 "필리아"이었습니다. 처음과 두번째는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세번째는 필리아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아가페라는 사랑은 베드로처럼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입장에서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변함없이 사랑하고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마치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처럼 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필리아라는 사랑은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과 같은 사랑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물었을 때 어떻게 베드로가 주님에게 아가페라고 대답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필리아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리셨던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네가 정말 나를 필리아할 수 있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예 나는 주님을 필리아 할 수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많은 신혼부부들이 예식장에서 주례와 증인들 앞에서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 사랑할 것을 다짐하고 약속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부부들이 서로 헤어지고 있습니까?


인간들의 사랑이란 이렇게 약속을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시리라는 말씀은 인간들이 배신하고 떠나버려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용서하는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용서의 특징은 덮어주는 것입니다.


가죽옷으로 덮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창세기 3:21)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으로 덮어주셨습니다.


방주의 안과 밖을 역청을 바르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창세기 6:14)

노아가 방주를 만든 나무를 '잣나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개역 개정판 성경에서는 '고페르 나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역청을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역청을 "코페르"라고 합니다. 코페르라는 단어는 "속죄" 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속죄제 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피로 덮는 용서가 완성된 것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므로 모든 사람의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예수께서 흘리신 피를 "화목제"라고 합니다.

 

화목제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랑

요한일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인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화목제를 히브리어로 "제바흐 쉘라밈" 이라고 합니다.

제바흐는 제물, 쉘라밈은 평화(샬롬의 복수형)


화목제 제사의 특징


첫째는 암수 모두 바칠 수 있다.


둘째는 기름과 콩팥을 드린다.

(기름이 잘 타기 때문이다)


셋째는 남은 제물은 바친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이 나눠 먹을 수 있다.

(단 3일 이내에 만 먹어야 하고 그 후에는 반드시 불에 태워버려야 한다)


넷째는 평등 의무 제사

화목제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배려하는 산비둘기, 집비둘기의 새끼는 제물을 받지 않는 평등의무 제사였습니다.

즉 성막을 지을 때에는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에게 똑 같은 속전을 거두시게 하신 것처럼, 평등하게 부담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화목제 제사의 근거

로마서 3:23-26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예화)

가정과 화평


메이어라는 랍비는 설교를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그는 매주 금요일 밤이면 예배당에서 어김없이 설교를 했는데, 몇 백 명씩 한꺼번에 몰려 들어 그의 설교를 들었다.

그들 가운데 메이어의 설교듣기를 매우 좋아하는 여인이 있었다.

다른 여자들은 금요일 밤이되면 안식일에 먹을 음식을 만드느라 바쁜데, 그 여자만은 이 랍비의 설교를 들으러 나왔다.

메이어는 긴 시간 동안 설교를 했고 그 여인은 그 설교에 만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남편이 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내일이 안식일인데 음식은 장만하지 않고 어디를 쏘다니고 있느냐며 화를 내며 물었다.

"도대체 어디를 갔다 왔어!"

"예배당에서 메이어 랍비님의 설교를 듣고 오는 길이예요"

그러자 남편은 몹시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 랍비의 얼굴에다 침을 뱉고 오기전에는 절대로 집에 들어올 생각은 하지도 말어!"

집에서 쫓겨난 아내는 할 수 없이 친구 집에서 머물며 남편과 별거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메이어는 자기의 설교가 너무 길었기 때문에 한 가정의 평화를 깨뜨렸다고 몹시 후회했다.

그리고는 그 여인을 불러 눈이 몹시 아프다고 호소하면서 '남의 타액으로 씻으면 낫게 된다는데, 당신이 좀 씻어 주시오'하고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여인은 랍비의 눈에다 침을 뱉게 되었다.


제자들은 랍비에게 '선생님께선 덕망이 높으신데, 어째서 여자가 얼굴에 침을 밷도록 허락하셨습니까?'하니 랍비는 이렇게 말했다.


"가정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는 그 보다도 더한 일이라도 할 수 있다네."


사랑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 아들이 화목제 희생의 제물이 되어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일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랑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무섭게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던 시대에 기록된 말씀으로 빨리 예수님 오시기를 갈망한 예언서입니다.

그런데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주님은 다시 오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예수님을 알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사랑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가페 사랑의 힘


첫째, 두려움을 물리치는 힘(요한일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합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힘 이상의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딤후 1:7).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두려움이란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의 줄임말

(Fear ; False Evidence Appering Real)


반려견을 돌보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처음에 집으로 데려오면 불안하여 부들부들 떨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집 주인은 나를 버리지 않겠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 꼬리를 흔들고 따라다니며 좋아한다고 합니다.


강아지도 이렇게 반응한다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둘째, 성령으로 역사하는 힘(요한일서 4:12∼23)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울이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믿고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면 하나님의 영, 곧 인격을 가지신 거룩한 바람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임재 하시어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그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겠습니까!

 셋째,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도록 역사하는 힘(요한일서 4:14∼15)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 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아가페 사랑)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1. 내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보니

슬픔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2. 주의 얼굴 뵙기전에 멀리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3.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예수 모신곳이 그어디나 하늘나라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모든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치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아주 익숙합니다. 그런데 새해 복 받으셨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 복을 받았습니다.” 라고 대답을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끼셨나요?” 라고 질문하면 대답을 잘 못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대답은 막연하게 “내 죄를 용서해주셨기 때문” 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죄를 용서하신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즐거움을 누리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에베소서 3:18∼19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사랑을 추상적으로 알지 말고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말씀에 사용된 동사를 잘 관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에서 두 단어 “알고” 그리고 “깨달아”를 살펴보겠습니다.


예를 들면 한글 성경의 여러 번역을 참조합니다.


(NIV) May have power, together with all the saints, to grasp how wide and long and high and deep is the love of Christ. and to know this love that surpasses knowledge that you may be filled to the measure of all the fullness of God.  

(새번역)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공동번역)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현대인) 19절은 없고 18절과 같다고 표기

모든 성도들과 함께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폭과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알고 하나님의 모든 풍성하신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헬라어 원문)

18, 알고(καταλαβέσθαι) - to comprehend

καταλαμβάνω(2638. katalambanó)

Definition : to lay hold of, seize

 Usage : (a) I seize tight hold of, arrest, catch, capture, appropriate,

(b) I overtake,

(c) mid. aor: I perceived, comprehended.   


19, 깨닫고(γνῶναί) - to know

γινώσκω(1097. ginóskó) 

Definition : to come to know, recognize, perceive

 Usage : I am taking in knowledge, come to know, learn;

aor : I ascertained, realized.  

    

“알고”라는 단어의 뜻은 “손으로 꽉 잡는다.”는 뜻입니다.

“깨닫고”라는 단어의 뜻은 “체험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막연하게 또는 추상적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직접 체험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항상 붙잡고 살아가야 할 사랑입니다.


사랑을 붙잡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까?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직접 삶의 현장에서 부르셨던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그의 직업이었던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을 정도로 열광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열광적인 사랑으로 예수님을 쫓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 모른다고 부인했던 슬픈 과거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며 나를 쫓아왔느냐? 라는 질문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체험했습니까?


베드로는 어느 날 예수님과 요한과 야고보와 더불어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된 예수님을 목격했습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베드로는 그곳에 초막을 짓고 여기에서 살고 싶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때 위로부터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산 아래로 내려가자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아쉽게 느꼈을까요?

여기가 좋은데, 여기서 살고 싶은데, 산 아래보다는 산 위가 더 좋은데 이런 생각에 베드로는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는 것은 좋은데 그 체험과 느낌이 현실에서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뉴욕나사렛교회 금요성서연구 / 2015-10-16

 하나님은 사랑(요한복음 3:16, 로마서 5:8)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예수님을 만난 구두방 아저씨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크게 표현한 말씀은 요한복음 3:16과 로마서 5:8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한복음 3장 16절을 묵상하면서 몇 가지 설교 제목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사랑의 대상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둘째는 사랑의 방법 - 독생자를 주셨으니

 셋째는 사랑에 참여 - 저를 믿는 자마다

 넷째는 사랑의 목적 - 하나님이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은 사랑의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요한복음 3장 16절을 중심으로 몇 차례 설교를 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랑!

 사랑의 하나님!


 성경에서 사랑에 대한 대표적인 말씀은 고린도전서 13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전서 13:4-8a).


 사랑의 하나님! 또는 하나님은 사랑! 이라고 표현 할 때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과연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장이라고 일컫는 고린도전서 13장에 나타난 사랑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 사랑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온유하며 -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온유합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 사랑은 자기가 행한 것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온유합니다. 사랑은 차별하지 않고, 모든 자에게 선한 일을 하셨습니다. 사랑은 남이 가진 것을 탐하지 않고, 불만 없이 낮은 삶을 사셨습니다. 사랑은 자신이 육체 가운데 거하면서 실제로 어떤 분임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이 만났던 어떤 사람보다 높은 위치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사랑은 복종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에게 복종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예수는 기꺼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순종했습니다.


 “오직 아버지가 명하신 대로 행함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14:31).


 사랑은 항상 다른 이들의 유익을 찾으셨으며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 분의 영원한 집, 천국에서 그 분과 함께하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소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심으로 이 것이 가능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로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셨습니다.


 첫째, 사랑은 용서하는 것(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의 약점과 잘못을 갖고 있습니다. 만일 잘못이나 약점을 그대로 드러내거나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한다면 사람들은 실망할 것입니다.

 용서란 인격을 갖춘 존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인격적 존재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길을 선택하고 결정을 할 때마다 그들을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세를 가리켜 최고의 온유한 사람이라고 칭찬했습니다(민수기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모세는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왜 모세를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셨을까요?

 모세는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두 눈으로 목격하며 그들의 잘못을 지워버리려고 차라리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고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던 지도자이었습니다(출애굽기 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잘못한 것을 용서하는 것도 어렵지만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을 내가 감당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하여 자기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라고 간구했던 지도자이었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두 가지 자세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사람을 수단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을 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만난다는 것은 사람을 이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사람을 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할 때 수단으로 만났다면 하나님 저 원수와 같음 무리들에게 벌을 내리셔도 마땅합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목적으로 만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애급에서 고통 받고 신음하던 무리들을 인도하셨으므로 저들의 잘못을 기억하지 마시고 차라리 내 이름을 지워 버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수단으로 찾았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 그의 잘못을 일러주었을 때에 오히려 더 확신 있게 예수님을 팔아넘기겠다고 다짐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목적으로 찾았기 때문에 그의 잘못을 뉘우치고 예수님의 부름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아들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한 자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같이 사랑할 능력을 주셨습니다(요한복음 1:12, 요한일서 3:1; 23, 24). 

 둘째, 사랑은 변화하는 것(요한복음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변화한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삶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내 방법대로 생활하고 습관대로 나를


 셋째, 사랑은 영원한 것(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영원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한일서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사도요한이 듣고 보고 손으로 만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사도요한은 다른 제자와는 다르게 하나님을 세 가지로 정의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영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도 예배해야 합니다(요 4:24)

 둘째, 하나님은 빛


하나님이 빛이시기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어두움 가운데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어서도 안 되고 어두움 가운데 안주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빛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빛 가운데 거하고 빛 가운데 행동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사랑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사도요한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정의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정의를 포함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도 요한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해야 알 수 있는 하나님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하는 이유를 요한일서 4:7∼8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되는 첫 번째 이유는 사랑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성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귀신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7절 말씀을 다시 보면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을 믿는다 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는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9∼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로 하는 사랑을 많이 합니다. 말로는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행동이 따라 주지 않는다면 삶으로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 사랑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로는 선지자를 보내서 말씀하셨고 때로는 직접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10절을 보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이유입니다.

 죄인을 사랑하신 예수님

 10절을 다시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해서라는 구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해서 자기의 아들을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한 지도자나 탁월한 사람을 위해서 대신 죽는 사람은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위해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만한 가치가 없는 죄인을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그 죄인이 누구입니까? 저와 여러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주 나약하고 더럽고 추악하고 악취가 나고 보잘 것 없는 저와 여러분을 죽기까지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화목제물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분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그 사랑의 십자가가 여러분 마음에 뜨거움으로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내가 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그 큰 사랑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되는 세 번째 이유가 11∼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 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계속해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중 하나님을본 사람은 없지만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 줄 수 없는 사람을 받아주고 사랑할 때 그 사랑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많은 사람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축원합니다.

 우리 안에 사시는 성령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어떻게 거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여 하나 되게 하는 신비로움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13∼16절의 말씀입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일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절에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저라는 말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계속해서 16절에 보면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 됨의 비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는 하나 됨을 맛보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을 보면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합니다. 이 하나 됨이 얼마나 신비한지요? 요한복음 17장 22∼23절에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하려 함이로소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고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입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 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모든 것은 성령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의 은혜가운데 나아가고 성령의 힘에 의지하여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 되는 놀라운 영광의 자리에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하나 됨의 열매 담대함

 사도 요한은 하나 됨의 열매에 대해 말합니다. 17절에서 21절입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

 사랑함으로 얻어지는 첫째 열매는 담대함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담대함이란 단어를 네 번 쓰고 있습니다. 두 번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 우리가 담대함을 얻었다고 했고 또 다른 두 번은 마지막 날 재림의 날에 누리는 담대함을 이야기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된 담대함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두려움이 없고 장래에 받을 심판에 대한 담대함이 있습니다. 담대하다는 것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죄를 범한 인간이 갖게 된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운전을 하다가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그냥 달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경찰차가 나타나서 제 차를 세웠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두려워서 도저히 경찰관과 눈을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면 우리의 죄가 드러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나만 아는 죄까지도 다 드러납니다. 생각으로 지은 죄까지 다 드러납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사탄은 우리의 죄에 대해 참소합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담대해 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이미 죄 값을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담대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여준 온전한 사랑이 우리의 두려움을 내어 쫓고 담대함을 줍니다.

 하나 됨의 열매 형제사랑

 둘째 열매는 형제사랑입니다


20∼21절을 보면 사도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사랑한다고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픔을 주고 고통을 주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형제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지 않으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이라고 지적합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눈에 보이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사랑의 몸부림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가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하나님의 사랑가운데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우리의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완성되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를 볼 때 사랑받을 수 없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보고 사랑할 수 없는 형제자매들을 사랑할 힘과 용기를 얻기를 축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사랑이란 어떤 사랑인가?


아가페 사랑은 모든 인간적 사랑을 완전케 하는 사랑으로서 인과율, 축복과 저주, 약속과 성취, 등 인간의 이성적, 감정적, 정서적 판단으로 이해 가능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욥의 고난, 악인의 형통(시편 73:1-12), 최후의 심판, 등 인간의 이성적, 감정적, 정서적 판단으로는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부분도 포함되어 있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신적인 사랑(Love from above)입니다.


이와 같은 것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이사야 55:7∼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보다 높으니라.


전도서 5: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생각의 차이를 하늘과 땅으로 명확하게 구분했습니다.

 아가페 사랑의 궁극적 결론

하나님 나라를 주시려는 사랑

누가복음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화목제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랑

요한일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인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일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랑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사랑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기 위해 친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의 죄를 사해 주시고, 율법의 정죄와 저주에서 풀어주셨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주시고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인간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함께 보시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한1서 4:9~10)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1서 4:16~19)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이루었다”라고 하실 때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대가로 전 인류를 구속하는 역사를 하시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하게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면 주님을 따르는 형제자매들은 다 말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믿고 나서 평안과 기쁨이 생겼다면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가정과 생활과 사업에서 힘든 일에 부딪혔을 때 주님께 기도하여 해결 받으면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고, 더욱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병이 치유되어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축복을 값없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는데,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와 축복뿐일까요? 요즘 저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은 숨어 있을 때도 있지만 그런 사랑이 우리의 영적 생명에는 유익한 점이 더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성경에 널리 알려진 믿음의 아버지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생자 아들 이삭을 산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볼 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베풀어 주신 아이이고 또한 아브라함이 100살에 얻은 아들이니 아브라함이 그 무엇보다 이삭을 사랑한 것은 틀림없었을 거야. 그런데 하나님께선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어. 하나님께선 이삭이 자란 후 번제로 바치게 하시면서 왜 이삭을 아브라함에게 주셨을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뜻은 뭘까?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아야 할까?’ 나중에 저는 영적 서적을 보고서야 곤혹이 풀렸습니다. 그 책에서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한 때부터,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정말로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했던 그 전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보았다. 이전에 아브라함이 어리석었고 무지했으며 하나님을 오해했다 할지라도, 이때만큼은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진짜였으며 진실했다. 아브라함은 진심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준 이삭을 ― 그의 아들을 ― 하나님께 돌려드리려고 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그의 순종을 보았으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한 것이었다.사람이 봤을 때, 하나님이 행하는 많은 일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심지어는 기이하게 여겨질 때도 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지배하고자 할 때, 이 ‘지배’는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으며, 또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이자, 하나님의 검증인 것이다.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것이다. 이때,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에 ― 이삭을 바치라는 것에 ―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인류에 대해, 즉 자신이 선택한 아브라함이란 사람에 대해 참으로 안심하였고, 그를 진정으로 인정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그 사람이 자신의 약속과 앞으로의 경륜을 맡아서 실행해 나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주된 인물이라고 확신하였다.』 이런 말씀을 통해 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게 한 일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나님 경영 계획의 선도자로 택하셨기 때문에, 즉 아브라함에게 약속과 부탁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시련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정말 칼을 들어 아들을 죽이려고 할 때 즉, 아브라함이 진실로 순종하여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할 때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마음이 참되고 정직하다는 것을 보신 하나님은 흡족해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정말로 이삭의 목숨을 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고 소중히 여기셨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진심과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보시고 얻으셨을 때 시련은 끝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해 마음을 놓고 인정하신 후에야 그에게 더 큰 부탁을 맡겨 줄 수 있었고, 또 아브라함이 구하고 생각한 것보다 더 크나큰 축복을 베풀어 주실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6~18)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 책에는 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준 일을 통해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이유 하나로 하나님은 그에게 이처럼 큰 복을 내렸다. 비록 표면적으로 볼 때 이 일은 아주 정상적이고 당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를 귀히 여기며,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에게 진심을 보이는 자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 하나님이 보기에 이는 인류가 창조된 이래로 하나님께 드린 가장 진귀한 첫 번째 ‘제물’이었다. 이 ‘제물’은 하나님이 그토록 힘들게 기다렸던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 제물을 처음 피조물로부터 받은 가장 중요한 선물로 간주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진심과 순종을 보셨을 때, 마음이 기뻤고 감동받았으며 또한 매우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을 크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현재 아브라함의 후손은 온 땅에 가득합니다. 이스라엘만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 몇 십 개 나라들도 모두 그의 후손인데, 여기에는 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마다 그 속에는 다 하나님의 계획과 고심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련하신 이 일에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와 바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택하시면 그 사람에게 부탁이 있으시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원하는 조건이 갖춰져 있는지를 확인하실 때 시련을 통해 그 사람의 진심과 순복을 검증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우리에게는 다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일부러 우리를 난처하게 하고 고생하게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러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나님의 역사를 잘 받아들이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에 대해 진심과 순복이 있어야 시련을 거쳐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또 모세가 광야에서40년 양을 방목한 후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이스라엘 사람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게 하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광야는 기후도 아주 나쁜 데다가 야수까지 출몰하고 게다가 광야에는 사람도 없는데 모세 혼자 동반자도 없이 40년 동안 양을 방목했으니, 매일 양 말고도 별과 달과 마주한 그 날들은 틀림없이 아주 고생스러웠을 거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는데 왜 모세를 광야에 있게 하셨을까? 그것도 40년이나 말이야.’ 그 책에는 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혼자 어떻게 광야에서 40년을 생존하였을까? 참된 믿음이 없다면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 하나님에 대한 이런 참된 인식이 있으면 그 믿음은 어떠냐? 크지 않으냐? (큽니다.) 하늘을 찌를 만큼 크다, 그렇지? 그러므로 모세가 광야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였느냐? (모세에게 애굽 왕 바로를 찾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쓰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쓰기 위해 먼저 그의 믿음을 연단하였다. 보아라, 하나님은 말씀을 하지 않았고, 사역을 하지 않았으며, 진리를 공급하지 않았고, 설교도 하지 않았다. 또한 모세에게는 책과 서류들도 없었고,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그저 혼자 광야에서 지내왔는데, 마지막에 하나님은 모세의 참된 믿음을 이루었다. 그럼 하나님은 왜 그 일을 했을까? 하나님은 모세에게 일을 맡기려고 하였고, 그를 쓰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크게 쓰려고 했고, 하나님은 하려고 하는 사역이 있었기 때문에 모세를 단련시켰다. 무엇을 단련시켰느냐? (믿음입니다.) 모세의 믿음은 얻으려고 했던 것이지, 단련시킨 것이 아니다. 무엇을 단련시켰느냐? (모세의 의지와 의지력을 단련시켰습니다.) 그렇다, 의지력이다.』 이 말씀을 보고서야 저는 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양을 방목한 거기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열악한 환경을 통해 모세의 믿음을 연단하고 또 그의 내면에 있는 열심과 좋은 마음과 혈기에 속하는 것을 없애 버리셨습니다. 그래야 그를 크게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이스라엘 사람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광야의 그런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모세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고통스러운 환난을 겪어야 생기게 됩니다. 안일한 상황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앙망하는 게 쉽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 참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다는 것을 다 압니다. 반대로 열악한 상황에 있을수록, 마음의 고통이 클수록 하나님께 의지하려는 마음이 더 강해지고, 고통스러울수록 힘껏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며, 또 그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 진실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40년 동안 광야에 있게 하신 것이 사람의 생각과 맞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뒤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으로 모세를 단련시켜 그에게 참된 믿음과 의지력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모세에게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게 하여 그러한 조건을 갖추게 한 뒤에야 하나님은 모세를 크게 써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게 하는 중임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면서 부딪힌 여러 가지 고난과 시험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과 의지력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께서 주신 부탁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도 증명되다시피, 오직 모세만이 그 중임을 감당할 수 있었고, 그 부탁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모세가 비록 연단의 고통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아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또 모세를 통해 율법과 계명을 반포하셨고, 또한 그를 120 살까지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매사마다 겉보기에는 이해하기 힘들고 때로는 우리로 고통받게 할 때도 있지만 그 뒤에는 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온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저는 우리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깊고 크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우리의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해도 다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실질이 사랑이기에 우리를 괴롭히거나 혹은 일부러 우리를 고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매사마다 다 하나님의 계획과 고심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깨우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런 깨달음이 있었을 때, 저의 마음은 감동으로 차 넘쳤습니다. 저는 하나님에 대한 진심과 순복이 너무 적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느꼈고 아울러 하나님의 사랑을 더 알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런 깨달음으로 인해 저는 하나님과 더 가까워짐을 느꼈고,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사람의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더욱더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기 위해 친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의 죄를 사해 주시고, 율법의 정죄와 저주에서 풀어주셨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주시고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인간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함께 보시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한1서 4:9~10)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1서 4:16~19)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이루었다”라고 하실 때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대가로 전 인류를 구속하는 역사를 하시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하게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면 주님을 따르는 형제자매들은 다 말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믿고 나서 평안과 기쁨이 생겼다면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가정과 생활과 사업에서 힘든 일에 부딪혔을 때 주님께 기도하여 해결 받으면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고, 더욱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병이 치유되어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축복을 값없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는데,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와 축복뿐일까요? 요즘 저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은 숨어 있을 때도 있지만 그런 사랑이 우리의 영적 생명에는 유익한 점이 더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성경에 널리 알려진 믿음의 아버지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생자 아들 이삭을 산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볼 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베풀어 주신 아이이고 또한 아브라함이 100살에 얻은 아들이니 아브라함이 그 무엇보다 이삭을 사랑한 것은 틀림없었을 거야. 그런데 하나님께선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어. 하나님께선 이삭이 자란 후 번제로 바치게 하시면서 왜 이삭을 아브라함에게 주셨을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뜻은 뭘까?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아야 할까?’ 나중에 저는 영적 서적을 보고서야 곤혹이 풀렸습니다. 그 책에서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한 때부터,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정말로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했던 그 전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보았다. 이전에 아브라함이 어리석었고 무지했으며 하나님을 오해했다 할지라도, 이때만큼은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진짜였으며 진실했다. 아브라함은 진심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준 이삭을 ― 그의 아들을 ― 하나님께 돌려드리려고 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그의 순종을 보았으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한 것이었다.사람이 봤을 때, 하나님이 행하는 많은 일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심지어는 기이하게 여겨질 때도 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지배하고자 할 때, 이 ‘지배’는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으며, 또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이자, 하나님의 검증인 것이다.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것이다. 이때,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에 ― 이삭을 바치라는 것에 ―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인류에 대해, 즉 자신이 선택한 아브라함이란 사람에 대해 참으로 안심하였고, 그를 진정으로 인정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그 사람이 자신의 약속과 앞으로의 경륜을 맡아서 실행해 나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주된 인물이라고 확신하였다.』 이런 말씀을 통해 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게 한 일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나님 경영 계획의 선도자로 택하셨기 때문에, 즉 아브라함에게 약속과 부탁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시련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정말 칼을 들어 아들을 죽이려고 할 때 즉, 아브라함이 진실로 순종하여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할 때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마음이 참되고 정직하다는 것을 보신 하나님은 흡족해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정말로 이삭의 목숨을 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고 소중히 여기셨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진심과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보시고 얻으셨을 때 시련은 끝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해 마음을 놓고 인정하신 후에야 그에게 더 큰 부탁을 맡겨 줄 수 있었고, 또 아브라함이 구하고 생각한 것보다 더 크나큰 축복을 베풀어 주실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6~18)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 책에는 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준 일을 통해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이유 하나로 하나님은 그에게 이처럼 큰 복을 내렸다. 비록 표면적으로 볼 때 이 일은 아주 정상적이고 당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를 귀히 여기며,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에게 진심을 보이는 자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 하나님이 보기에 이는 인류가 창조된 이래로 하나님께 드린 가장 진귀한 첫 번째 ‘제물’이었다. 이 ‘제물’은 하나님이 그토록 힘들게 기다렸던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 제물을 처음 피조물로부터 받은 가장 중요한 선물로 간주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진심과 순종을 보셨을 때, 마음이 기뻤고 감동받았으며 또한 매우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을 크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현재 아브라함의 후손은 온 땅에 가득합니다. 이스라엘만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 몇 십 개 나라들도 모두 그의 후손인데, 여기에는 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마다 그 속에는 다 하나님의 계획과 고심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련하신 이 일에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와 바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택하시면 그 사람에게 부탁이 있으시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원하는 조건이 갖춰져 있는지를 확인하실 때 시련을 통해 그 사람의 진심과 순복을 검증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우리에게는 다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일부러 우리를 난처하게 하고 고생하게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러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나님의 역사를 잘 받아들이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에 대해 진심과 순복이 있어야 시련을 거쳐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또 모세가 광야에서40년 양을 방목한 후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이스라엘 사람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게 하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광야는 기후도 아주 나쁜 데다가 야수까지 출몰하고 게다가 광야에는 사람도 없는데 모세 혼자 동반자도 없이 40년 동안 양을 방목했으니, 매일 양 말고도 별과 달과 마주한 그 날들은 틀림없이 아주 고생스러웠을 거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는데 왜 모세를 광야에 있게 하셨을까? 그것도 40년이나 말이야.’ 그 책에는 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혼자 어떻게 광야에서 40년을 생존하였을까? 참된 믿음이 없다면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 하나님에 대한 이런 참된 인식이 있으면 그 믿음은 어떠냐? 크지 않으냐? (큽니다.) 하늘을 찌를 만큼 크다, 그렇지? 그러므로 모세가 광야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였느냐? (모세에게 애굽 왕 바로를 찾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쓰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쓰기 위해 먼저 그의 믿음을 연단하였다. 보아라, 하나님은 말씀을 하지 않았고, 사역을 하지 않았으며, 진리를 공급하지 않았고, 설교도 하지 않았다. 또한 모세에게는 책과 서류들도 없었고,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그저 혼자 광야에서 지내왔는데, 마지막에 하나님은 모세의 참된 믿음을 이루었다. 그럼 하나님은 왜 그 일을 했을까? 하나님은 모세에게 일을 맡기려고 하였고, 그를 쓰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크게 쓰려고 했고, 하나님은 하려고 하는 사역이 있었기 때문에 모세를 단련시켰다. 무엇을 단련시켰느냐? (믿음입니다.) 모세의 믿음은 얻으려고 했던 것이지, 단련시킨 것이 아니다. 무엇을 단련시켰느냐? (모세의 의지와 의지력을 단련시켰습니다.) 그렇다, 의지력이다.』 이 말씀을 보고서야 저는 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양을 방목한 거기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열악한 환경을 통해 모세의 믿음을 연단하고 또 그의 내면에 있는 열심과 좋은 마음과 혈기에 속하는 것을 없애 버리셨습니다. 그래야 그를 크게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이스라엘 사람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광야의 그런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모세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고통스러운 환난을 겪어야 생기게 됩니다. 안일한 상황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앙망하는 게 쉽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 참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다는 것을 다 압니다. 반대로 열악한 상황에 있을수록, 마음의 고통이 클수록 하나님께 의지하려는 마음이 더 강해지고, 고통스러울수록 힘껏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며, 또 그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 진실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40년 동안 광야에 있게 하신 것이 사람의 생각과 맞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뒤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으로 모세를 단련시켜 그에게 참된 믿음과 의지력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모세에게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게 하여 그러한 조건을 갖추게 한 뒤에야 하나님은 모세를 크게 써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게 하는 중임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면서 부딪힌 여러 가지 고난과 시험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과 의지력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께서 주신 부탁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도 증명되다시피, 오직 모세만이 그 중임을 감당할 수 있었고, 그 부탁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모세가 비록 연단의 고통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아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또 모세를 통해 율법과 계명을 반포하셨고, 또한 그를 120 살까지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매사마다 겉보기에는 이해하기 힘들고 때로는 우리로 고통받게 할 때도 있지만 그 뒤에는 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온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저는 우리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깊고 크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우리의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해도 다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실질이 사랑이기에 우리를 괴롭히거나 혹은 일부러 우리를 고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매사마다 다 하나님의 계획과 고심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깨우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런 깨달음이 있었을 때, 저의 마음은 감동으로 차 넘쳤습니다. 저는 하나님에 대한 진심과 순복이 너무 적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느꼈고 아울러 하나님의 사랑을 더 알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런 깨달음으로 인해 저는 하나님과 더 가까워짐을 느꼈고,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사람의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더욱더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는 우리가 당연히 갖춰야 할 양심이자 이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그분의 뜻에 합당할까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신명기 5: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한복음 14:23)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 22:37~39)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가복음 14:26)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범위가 매우 넓습니다.


예를 들면 나라를 사랑한다. 부모를 사랑한다. 형제를 사랑한다. 친구를 사랑한다. 애인을 사랑한다. 음악을 사랑한다. 꽃을 사랑한다. 개(伴侶犬)를 사랑한다. 고양이(伴侶猫)를 사랑한다. 문학을 사랑한다. 교회를 사랑한다. 학문을 사랑한다.


우리 말에서는 사랑이란 단어가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기록했던 코이네 헬라어에서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했습니다.


첫째는 에피투미아(epithymia)


본능적인 욕구로서의 사랑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식탐, 색탐, 수면욕, 명예욕 등을 말합니다.


둘째는 스토르게(stroge)


혈연적인 사랑으로 자연적 사랑(natural affection)이라고도 합니다. 예를 들면 부모형제 자손 사이의 사랑을 말합니다.


셋째는 필리아(philia)


친구, 동료, 이웃, 등 따듯한 우정적 사랑 혹은 학문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넷째는 에로스(eros)


문화 창조의 동력으로서의 사랑 혹은 남녀 간의 성적 사랑을 말합니다.


다섯째는 아가페(agape)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희생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요한일서 4장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할 때 사랑은 다섯 번째 아가페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어떤 사랑인가?


아가페 사랑은 모든 인간적 사랑을 완전케 하는 사랑으로서 인과율, 축복과 저주, 약속과 성취, 등 인간의 이성적, 감정적, 정서적 판단으로 이해 가능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욥의 고난, 악인의 형통(시편 73:1-12), 최후의 심판, 등 인간의 이성적, 감정적, 정서적 판단으로는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부분도 포함되어 있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신적인 사랑(Love from above)입니다.


이와 같은 것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이사야 55:7∼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보다 높으니라.


전도서 5: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생각의 차이를 하늘과 땅으로 명확하게 구분했습니다.

 아가페 사랑의 궁극적 결론

하나님 나라를 주시려는 사랑

누가복음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화목제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랑

요한일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인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일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랑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사랑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가페 사랑의 힘


첫째, 두려움을 물리치는 힘(요한일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합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힘 이상의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딤후 1:7).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두려움이란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의 줄임말

(Fear ; False Evidence Appering Real)


반려견을 돌보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처음에 집으로 데려오면 불안하여 부들부들 떨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집 주인은 나를 버리지 않겠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 꼬리를 흔들고 따라다니며 좋아한다고 합니다.


강아지도 이렇게 반응한다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둘째, 성령으로 역사하는 힘(요한일서 4:12∼23)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울이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믿고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면 하나님의 영, 곧 인격을 가지신 거룩한 바람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임재 하시어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그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겠습니까!


 셋째,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도록 역사하는 힘(요한일서 4:14∼15)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 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아가페 사랑)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기 위해 친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의 죄를 사해 주시고, 율법의 정죄와 저주에서 풀어주셨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주시고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인간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함께 보시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한1서 4:9~10)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1서 4:16~19)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이루었다”라고 하실 때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대가로 전 인류를 구속하는 역사를 하시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하게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면 주님을 따르는 형제자매들은 다 말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믿고 나서 평안과 기쁨이 생겼다면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가정과 생활과 사업에서 힘든 일에 부딪혔을 때 주님께 기도하여 해결 받으면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고, 더욱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병이 치유되어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축복을 값없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는데,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와 축복뿐일까요? 요즘 저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은 숨어 있을 때도 있지만 그런 사랑이 우리의 영적 생명에는 유익한 점이 더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성경에 널리 알려진 믿음의 아버지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생자 아들 이삭을 산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볼 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베풀어 주신 아이이고 또한 아브라함이 100살에 얻은 아들이니 아브라함이 그 무엇보다 이삭을 사랑한 것은 틀림없었을 거야. 그런데 하나님께선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어. 하나님께선 이삭이 자란 후 번제로 바치게 하시면서 왜 이삭을 아브라함에게 주셨을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뜻은 뭘까?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아야 할까?’ 나중에 저는 영적 서적을 보고서야 곤혹이 풀렸습니다. 그 책에서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한 때부터,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정말로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했던 그 전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보았다. 이전에 아브라함이 어리석었고 무지했으며 하나님을 오해했다 할지라도, 이때만큼은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진짜였으며 진실했다. 아브라함은 진심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준 이삭을 ― 그의 아들을 ― 하나님께 돌려드리려고 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그의 순종을 보았으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한 것이었다.사람이 봤을 때, 하나님이 행하는 많은 일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심지어는 기이하게 여겨질 때도 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지배하고자 할 때, 이 ‘지배’는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으며, 또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이자, 하나님의 검증인 것이다.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것이다. 이때,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에 ― 이삭을 바치라는 것에 ―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인류에 대해, 즉 자신이 선택한 아브라함이란 사람에 대해 참으로 안심하였고, 그를 진정으로 인정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그 사람이 자신의 약속과 앞으로의 경륜을 맡아서 실행해 나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주된 인물이라고 확신하였다.』 이런 말씀을 통해 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게 한 일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나님 경영 계획의 선도자로 택하셨기 때문에, 즉 아브라함에게 약속과 부탁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시련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정말 칼을 들어 아들을 죽이려고 할 때 즉, 아브라함이 진실로 순종하여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할 때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마음이 참되고 정직하다는 것을 보신 하나님은 흡족해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정말로 이삭의 목숨을 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고 소중히 여기셨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진심과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보시고 얻으셨을 때 시련은 끝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해 마음을 놓고 인정하신 후에야 그에게 더 큰 부탁을 맡겨 줄 수 있었고, 또 아브라함이 구하고 생각한 것보다 더 크나큰 축복을 베풀어 주실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6~18)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 책에는 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준 일을 통해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이유 하나로 하나님은 그에게 이처럼 큰 복을 내렸다. 비록 표면적으로 볼 때 이 일은 아주 정상적이고 당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를 귀히 여기며,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에게 진심을 보이는 자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 하나님이 보기에 이는 인류가 창조된 이래로 하나님께 드린 가장 진귀한 첫 번째 ‘제물’이었다. 이 ‘제물’은 하나님이 그토록 힘들게 기다렸던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 제물을 처음 피조물로부터 받은 가장 중요한 선물로 간주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진심과 순종을 보셨을 때, 마음이 기뻤고 감동받았으며 또한 매우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을 크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현재 아브라함의 후손은 온 땅에 가득합니다. 이스라엘만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 몇 십 개 나라들도 모두 그의 후손인데, 여기에는 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마다 그 속에는 다 하나님의 계획과 고심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련하신 이 일에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와 바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택하시면 그 사람에게 부탁이 있으시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원하는 조건이 갖춰져 있는지를 확인하실 때 시련을 통해 그 사람의 진심과 순복을 검증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우리에게는 다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일부러 우리를 난처하게 하고 고생하게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러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나님의 역사를 잘 받아들이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에 대해 진심과 순복이 있어야 시련을 거쳐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또 모세가 광야에서40년 양을 방목한 후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이스라엘 사람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게 하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광야는 기후도 아주 나쁜 데다가 야수까지 출몰하고 게다가 광야에는 사람도 없는데 모세 혼자 동반자도 없이 40년 동안 양을 방목했으니, 매일 양 말고도 별과 달과 마주한 그 날들은 틀림없이 아주 고생스러웠을 거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는데 왜 모세를 광야에 있게 하셨을까? 그것도 40년이나 말이야.’ 그 책에는 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혼자 어떻게 광야에서 40년을 생존하였을까? 참된 믿음이 없다면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 하나님에 대한 이런 참된 인식이 있으면 그 믿음은 어떠냐? 크지 않으냐? (큽니다.) 하늘을 찌를 만큼 크다, 그렇지? 그러므로 모세가 광야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였느냐? (모세에게 애굽 왕 바로를 찾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쓰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쓰기 위해 먼저 그의 믿음을 연단하였다. 보아라, 하나님은 말씀을 하지 않았고, 사역을 하지 않았으며, 진리를 공급하지 않았고, 설교도 하지 않았다. 또한 모세에게는 책과 서류들도 없었고,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그저 혼자 광야에서 지내왔는데, 마지막에 하나님은 모세의 참된 믿음을 이루었다. 그럼 하나님은 왜 그 일을 했을까? 하나님은 모세에게 일을 맡기려고 하였고, 그를 쓰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크게 쓰려고 했고, 하나님은 하려고 하는 사역이 있었기 때문에 모세를 단련시켰다. 무엇을 단련시켰느냐? (믿음입니다.) 모세의 믿음은 얻으려고 했던 것이지, 단련시킨 것이 아니다. 무엇을 단련시켰느냐? (모세의 의지와 의지력을 단련시켰습니다.) 그렇다, 의지력이다.』 이 말씀을 보고서야 저는 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양을 방목한 거기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열악한 환경을 통해 모세의 믿음을 연단하고 또 그의 내면에 있는 열심과 좋은 마음과 혈기에 속하는 것을 없애 버리셨습니다. 그래야 그를 크게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이스라엘 사람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광야의 그런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모세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고통스러운 환난을 겪어야 생기게 됩니다. 안일한 상황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앙망하는 게 쉽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 참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다는 것을 다 압니다. 반대로 열악한 상황에 있을수록, 마음의 고통이 클수록 하나님께 의지하려는 마음이 더 강해지고, 고통스러울수록 힘껏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며, 또 그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 진실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40년 동안 광야에 있게 하신 것이 사람의 생각과 맞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뒤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으로 모세를 단련시켜 그에게 참된 믿음과 의지력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모세에게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게 하여 그러한 조건을 갖추게 한 뒤에야 하나님은 모세를 크게 써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게 하는 중임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면서 부딪힌 여러 가지 고난과 시험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과 의지력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께서 주신 부탁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도 증명되다시피, 오직 모세만이 그 중임을 감당할 수 있었고, 그 부탁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모세가 비록 연단의 고통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아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또 모세를 통해 율법과 계명을 반포하셨고, 또한 그를 120 살까지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매사마다 겉보기에는 이해하기 힘들고 때로는 우리로 고통받게 할 때도 있지만 그 뒤에는 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온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저는 우리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깊고 크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우리의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해도 다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실질이 사랑이기에 우리를 괴롭히거나 혹은 일부러 우리를 고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매사마다 다 하나님의 계획과 고심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깨우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런 깨달음이 있었을 때, 저의 마음은 감동으로 차 넘쳤습니다. 저는 하나님에 대한 진심과 순복이 너무 적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느꼈고 아울러 하나님의 사랑을 더 알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런 깨달음으로 인해 저는 하나님과 더 가까워짐을 느꼈고,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사람의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더욱더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는 우리가 당연히 갖춰야 할 양심이자 이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그분의 뜻에 합당할까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신명기 5: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한복음 14:23)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 22:37~39)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가복음 14:26)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범위가 매우 넓습니다.


예를 들면 나라를 사랑한다. 부모를 사랑한다. 형제를 사랑한다. 친구를 사랑한다. 애인을 사랑한다. 음악을 사랑한다. 꽃을 사랑한다. 개(伴侶犬)를 사랑한다. 고양이(伴侶猫)를 사랑한다. 문학을 사랑한다. 교회를 사랑한다. 학문을 사랑한다.


우리 말에서는 사랑이란 단어가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기록했던 코이네 헬라어에서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했습니다.


첫째는 에피투미아(epithymia)


본능적인 욕구로서의 사랑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식탐, 색탐, 수면욕, 명예욕 등을 말합니다.


둘째는 스토르게(stroge)


혈연적인 사랑으로 자연적 사랑(natural affection)이라고도 합니다. 예를 들면 부모형제 자손 사이의 사랑을 말합니다.


셋째는 필리아(philia)


친구, 동료, 이웃, 등 따듯한 우정적 사랑 혹은 학문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넷째는 에로스(eros)


문화 창조의 동력으로서의 사랑 혹은 남녀 간의 성적 사랑을 말합니다.


다섯째는 아가페(agape)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희생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요한일서 4장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할 때 사랑은 다섯 번째 아가페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어떤 사랑인가?


아가페 사랑은 모든 인간적 사랑을 완전케 하는 사랑으로서 인과율, 축복과 저주, 약속과 성취, 등 인간의 이성적, 감정적, 정서적 판단으로 이해 가능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욥의 고난, 악인의 형통(시편 73:1-12), 최후의 심판, 등 인간의 이성적, 감정적, 정서적 판단으로는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부분도 포함되어 있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신적인 사랑(Love from above)입니다.


이와 같은 것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이사야 55:7∼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보다 높으니라.


전도서 5: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생각의 차이를 하늘과 땅으로 명확하게 구분했습니다.

 아가페 사랑의 궁극적 결론


하나님 나라를 주시려는 사랑

누가복음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화목제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랑

요한일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인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일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랑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사랑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가페 사랑의 힘

 첫째, 두려움을 물리치는 힘(요한일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합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힘 이상의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딤후 1:7).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두려움이란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의 줄임말

(Fear ; False Evidence Appering Real)


반려견을 돌보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처음에 집으로 데려오면 불안하여 부들부들 떨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집 주인은 나를 버리지 않겠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 꼬리를 흔들고 따라다니며 좋아한다고 합니다. 강아지도 이렇게 반응한다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둘째, 성령으로 역사하는 힘(요한일서 4:12∼23)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울이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믿고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면 하나님의 영, 곧 인격을 가지신 거룩한 바람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임재 하시어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그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겠습니까!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진리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은 변함이 없습니다.

변함이 없는 성령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들을 위하여 어떻게 역사하실까요?


성령으로 보증합니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린도후서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성령으로 예수를 주라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2:3b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셋째,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도록 역사하는 힘(요한일서 4:14∼15)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 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아가페 사랑)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기 위해 친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의 죄를 사해 주시고, 율법의 정죄와 저주에서 풀어주셨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주시고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인간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함께 보시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한1서 4:9~10)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1서 4:16~19)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이루었다”라고 하실 때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대가로 전 인류를 구속하는 역사를 하시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하게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면 주님을 따르는 형제자매들은 다 말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믿고 나서 평안과 기쁨이 생겼다면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가정과 생활과 사업에서 힘든 일에 부딪혔을 때 주님께 기도하여 해결 받으면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고,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병이 치유되어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축복을 값없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는데,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와 축복뿐일까요?

요즘 저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은 숨어 있을 때도 있지만 그런 사랑이 우리의 영적 생명에는 유익한 점이 더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성경에 널리 알려진 믿음의 아버지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생자 아들 이삭을 산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 22:2)


예전에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볼 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베풀어 주신 아이이고 또한 아브라함이 100살에 얻은 아들이니 아브라함이 그 무엇보다 이삭을 사랑한 것은 틀림없었을 거야. 그런데 하나님께선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어. 하나님께선 이삭이 자란 후 번제로 바치게 하시면서 왜 이삭을 아브라함에게 주셨을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뜻은 뭘까?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아야 할까?’ 나중에 저는 영적 서적을 보고서야 곤혹이 풀렸습니다. 그 책에서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한 때부터,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정말로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했던 그 전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보았다. 이전에 아브라함이 어리석었고 무지했으며 하나님을 오해했다 할지라도, 이때만큼은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진짜였으며 진실했다. 아브라함은 진심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준 이삭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려고 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그의 순종을 보았으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한 것이었다.


사람이 봤을 때, 하나님이 행하는 많은 일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심지어는 기이하게 여겨질 때도 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지배하고자 할 때, 이 ‘지배’는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으며, 또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이자, 하나님의 검증인 것이다.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것이다. 이때,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인류에 대해, 즉 자신이 선택한 아브라함이란 사람에 대해 참으로 안심하였고, 그를 진정으로 인정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그 사람이 자신의 약속과 앞으로의 경륜을 맡아서 실행해 나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주된 인물이라고 확신하였다.

이런 말씀을 통해 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게 한 일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나님 경영 계획의 선도자로 택하셨기 때문에, 즉 아브라함에게 약속과 부탁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시련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정말 칼을 들어 아들을 죽이려고 할 때 즉, 아브라함이 진실로 순종하여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할 때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마음이 참되고 정직하다는 것을 보신 하나님은 흡족해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정말로 이삭의 목숨을 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고 소중히 여기셨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진심과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보시고 얻으셨을 때 시련은 끝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해 마음을 놓고 인정하신 후에야 그에게 더 큰 부탁을 맡겨 줄 수 있었고, 또 아브라함이 구하고 생각한 것보다 더 크나큰 축복을 베풀어 주실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6~18)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 책에는 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준 일을 통해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이유 하나로 하나님은 그에게 이처럼 큰 복을 내렸다. 비록 표면적으로 볼 때 이 일은 아주 정상적이고 당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를 귀히 여기며,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에게 진심을 보이는 자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 하나님이 보기에 이는 인류가 창조된 이래로 하나님께 드린 가장 진귀한 첫 번째 ‘제물’이었다. 이 ‘제물’은 하나님이 그토록 힘들게 기다렸던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 제물을 처음 피조물로부터 받은 가장 중요한 선물로 간주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진심과 순종을 보셨을 때, 마음이 기뻤고 감동받았으며 또한 매우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을 크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현재 아브라함의 후손은 온 땅에 가득합니다. 이스라엘만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 몇 십 개 나라들도 모두 그의 후손인데, 여기에는 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마다 그 속에는 다 하나님의 계획과 고심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련하신 이 일에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와 바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택하시면 그 사람에게 부탁이 있으시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원하는 조건이 갖춰져 있는지를 확인하실 때 시련을 통해 그 사람의 진심과 순복을 검증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우리에게는 다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일부러 우리를 난처하게 하고 고생하게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러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나님의 역사를 잘 받아들이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에 대해 진심과 순복이 있어야 시련을 거쳐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또 모세가 광야에서40년 양을 방목한 후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이스라엘 사람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게 하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광야는 기후도 아주 나쁜 데다가 야수까지 출몰하고 게다가 광야에는 사람도 없는데 모세 혼자 동반자도 없이 40년 동안 양을 방목했으니, 매일 양 말고도 별과 달과 마주한 그 날들은 틀림없이 아주 고생스러웠을 거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는데 왜 모세를 광야에 있게 하셨을까? 그것도 40년이나 말이야.’ 그 책에는 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혼자 어떻게 광야에서 40년을 생존하였을까? 참된 믿음이 없다면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 하나님에 대한 이런 참된 인식이 있으면 그 믿음은 어떠냐? 크지 않으냐? (큽니다.) 하늘을 찌를 만큼 크다, 그렇지? 그러므로 모세가 광야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였느냐? (모세에게 애굽 왕 바로를 찾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쓰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쓰기 위해 먼저 그의 믿음을 연단하였다. 보아라, 하나님은 말씀을 하지 않았고, 사역을 하지 않았으며, 진리를 공급하지 않았고, 설교도 하지 않았다. 또한 모세에게는 책과 서류들도 없었고,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그저 혼자 광야에서 지내왔는데, 마지막에 하나님은 모세의 참된 믿음을 이루었다. 그럼 하나님은 왜 그 일을 했을까? 하나님은 모세에게 일을 맡기려고 하였고, 그를 쓰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크게 쓰려고 했고, 하나님은 하려고 하는 사역이 있었기 때문에 모세를 단련시켰다. 무엇을 단련시켰느냐? (믿음입니다.) 모세의 믿음은 얻으려고 했던 것이지, 단련시킨 것이 아니다. 무엇을 단련시켰느냐? (모세의 의지와 의지력을 단련시켰습니다.) 그렇다, 의지력이다.』 이 말씀을 보고서야 저는 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양을 방목한 거기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열악한 환경을 통해 모세의 믿음을 연단하고 또 그의 내면에 있는 열심과 좋은 마음과 혈기에 속하는 것을 없애 버리셨습니다. 그래야 그를 크게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이스라엘 사람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광야의 그런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모세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고통스러운 환난을 겪어야 생기게 됩니다. 안일한 상황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앙망하는 게 쉽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 참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다는 것을 다 압니다. 반대로 열악한 상황에 있을수록, 마음의 고통이 클수록 하나님께 의지하려는 마음이 더 강해지고, 고통스러울수록 힘껏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며, 또 그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 진실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40년 동안 광야에 있게 하신 것이 사람의 생각과 맞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뒤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으로 모세를 단련시켜 그에게 참된 믿음과 의지력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모세에게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게 하여 그러한 조건을 갖추게 한 뒤에야 하나님은 모세를 크게 써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게 하는 중임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면서 부딪힌 여러 가지 고난과 시험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과 의지력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께서 주신 부탁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도 증명되다시피, 오직 모세만이 그 중임을 감당할 수 있었고, 그 부탁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모세가 비록 연단의 고통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아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또 모세를 통해 율법과 계명을 반포하셨고, 또한 그를 120 살까지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매사마다 겉보기에는 이해하기 힘들고 때로는 우리로 고통받게 할 때도 있지만 그 뒤에는 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온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저는 우리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깊고 크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우리의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해도 다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기에 우리를 괴롭히거나 혹은 일부러 우리를 고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매사마다 다 하나님의 계획과 고심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깨우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런 깨달음이 있었을 때, 저의 마음은 감동으로 차 넘쳤습니다.

저는 하나님에 대한 진심과 순복이 너무 적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느꼈고 아울러 하나님의 사랑을 더 알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런 깨달음으로 인해 저는 하나님과 더 가까워짐을 느꼈고,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사람의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더욱더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는 우리가 당연히 갖춰야 할 양심이자 이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그분의 뜻에 합당할까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신명기 5: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한복음 14:23)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 22:37~39)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가복음 14:2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http://www.dongsan-church.or.kr/n_sub04/4.pdf


◀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 ▶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 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 리로 예배할지니라” (요4:23-24) 인간은 특별히 두 가지 면에서 다른 동물들과 차별화 된 존재라고 한다. 첫째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철학이나 문화의 발전 등.. 둘째는 종교를 가지고 있다. 즉 예배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IQ 높은 침팬지도 신에 대한 두려움이나 종교심을 갖지는 않는다. 즉 종교야 말로 인간과 다른 동물과 차별화시키는 독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생각하는 기 능이 문화를 발전시켜왔고 예배가 종교를 만든 것이다. - 요 4:23-24 읽자. ♣ 예배란 : 존경과 존귀를 받으실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올려드리는 것. ● - 히. 아바드, 샤아흐 : 주인을 섬긴다. 엎드린다. - 헬. 프로스퀘네오 : 엎드린다. - worthship= Worth(가치) + ship(신분) : "최상의 존경과 존귀를 받을 가치가 있는 분" 예 배는 존경과 존귀를 받으실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올려드린다는 의미. - 계5:12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 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 ● 신학자 칼 바르트 "인간이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중대하고 긴급하며 가장 영 광스러운 행동이 바로 예배이다." 성경은 예배로 가득 차 있는 책이다. - 창세기는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가? - 출애굽기는 노예로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서 예배드리기 위해 출애굽 함 - 레위기는 예배의 근본 원리와 방법을 자세히 기록 - 역사서는 하나님만을 섬기며 예배하는 왕의 역사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왕 의 역사 - 시가서는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하는 내용 - 선지서는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떠난 백성들의 멸망의 모습과 예배의 회복들의 이야기 → 우리는 예배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 ♣ 구약시대의 예배(제사) : 레위기를 중심으로 ●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신 가장 큰 이유가 하나님이 정하신 장소에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방법을 하나하나 자세히 가르쳐주 신 곳이 레위기, 구약의 예배법이다. 그렇기에 구약의 제사를 바로 알고 이해해야 한다. 삶의 행복이 회복되는 곳, 동산교회 - 2 - 1. 번제 : 제물을 모두 태워 연기를 올려드림. 완전한 자기부인, 자기의탁을 의미 ● 완전한 자기부인, 자기의탁을 의미. 제물을 모두 태운다, 완전한 자기 부인, 자기의탁 1) 기본정신 : 레1:1-3 1.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 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 지니라 3.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없는 수컷으로 회막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ㄱ. 누구든지 : 예배를 드리는 자는 누구나 똑같은 자세로 임해야 한다. ● 예배를 드리는 기본자세는 목사, 장로, 평신도 누구든지 똑같아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말씀하시는데.. 나는 평신도니깐..뭐 대충해도 되겠지..나는 예외다.. 할 수 없다. 목회자 가 강단에 올라갈 때 그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또 기대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서듯이.. 하나 님앞에 제사를 드리러 온 누구든지..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ㄴ. 흠없는 : 사모하는 마음으로 준비된 예배 ● 흠없는 제물인지는 번제단에 오기전에, 먼저 확인하고 준비하는 단계가 반드시 필요. 마찬가 지.. 흠없는 예배를 위해서는 반드시 준비하는 시간과 단계가 필요하다!!! 교회에 들어오는 시간부터 예배가 시작된다고 생각하는데 아니다. 그 전, 준비의 단계부터 예배 는 시작된 것이다. 예화) 작년에 토요일에 신세계 영화. 황정민씨 출연하는.. 너무 영상이 강하고 잔인.. 주일에 예배드리는데 계속 생각이 남. 예배에 방해받음. 준비가 안 된 것이다. 토요일에 어떻게 예배를 준비하느냐.. 예배가 시작되서 급하게 들어와 예배드리는 사람과 10분전에 와서 마음을 정돈하고 주실 은혜를 사모하며 차분히 기도하는 가운데 예배에 임하는 사람과 예배 때 받는 은혜가 다르다. ㄷ. 기쁘게 받으시도록 :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 ● 그러나 우리의 예배는 안 그런 경우가 많다. -사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예배는 나를 기쁘게 하고, 사람을 기쁘게 해서는 안된다. 예배는 면죄부가 아니다. 내 만족을 위 해서 드려져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2) 내 용 : 레1:4-5, 9 4.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되어 그를 위하여 속 죄가 될것이라 5.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 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 9.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 - 레1:4 그는 머리에 안수할지니 : 그는? 누구든지.. 안수하다.. 회개의미. 내 죄로 내가 죽어야 하는데 제물에게 내 죄를 전가함. 예배의 시작은 회개로 시작되어야 한다. 내가 죄인임을 인식하는 것에서 예배는 시작되고, 그 죄를 해결하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인 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예배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진다. ● - 레1:5-6 그는 여호와 앞에서 송아지를 잡아라.. 목을 치라. 예배를 드리러 오는 누구든지..바로 그 사람이 목을 쳐야한다. 내 자신의 목을 내려치는 심정으 삶의 행복이 회복되는 곳, 동산교회 - 3 - 로 제물의 목을 치는 것. 이것이 예배이다. 말씀이 선포될 때 그 말씀에 비추어 내가 죽는 것, 내 죄와 자아와 본성이 죽는 것이다. 말씀앞 에 나를 죽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죄가 무엇인지.. 찾아서 고쳐라. ●-1:9 겉과 내장까지 모두 태워라. 겉과 중심이 모두 예배 드려져야 한다. 2. 소제 : 곡식의 제사. 은혜에 감사하여 자발적으로 드리는 헌신과 봉사의 예배 ● 헌신, 봉사, 다짐.. 예배 후에 삶속에서 봉사와 헌신으로 이어져야 한다. 1) 내 용 : 레2:1-2 1.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2.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가루 한 움큼과 기 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ㄱ. 고운가루: ● 고운가루로 갈아서.. 헌신과 봉사를 위해서는 내가 먼저 철저히 갈아져야 한다. ㄴ. 기름을 붓고 유향을 놓고: ● 기름과 유향은 아주 귀한 것. 즉 예배는 쓰고 남은 것, 남는 시간에 드리는 것이 아니다. 기 름: 성령을 의미. 성령의 도우심으로 헌신 봉사해야 함 유향: 기도를 의미. 헌신과 봉사에는 반드시 충분한 기도가 있어야 한다. 2) 주의점 : 레2:11-13 11.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 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12.처음 익은 것으로는 그것을 여호와께 드릴지나 향 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제단에 올리 지 말지며 13.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ㄱ. 누룩을 넣지마라 : ☛ 부풀리지 말라. 헌신과 봉사를 뻥튀기 하지 말라. ㄴ. 꿀을 넣지마라 : ☛ 인위적으로 아름답게 꾸미지 말라. 쓴것도 단것처럼 포장하지 말라. ⇒ 누룩과 꿀을 넣는 이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 하나님이 보시는 봉사와 헌신이 되어야 한다. ㄷ. 소금을 반드시 치라 : ☛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 ☛ 소금은 치는 즉시 사라진다. 맛을 주고 사라지는 소금처럼 헌신하고 봉사하라. 아무치 치장하 고 자랑하고 싶어도 참아라. 참된 예배를 드리는 순간 소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3. 속죄제 : 무지(無地)하게 범한 죄를 깨달았을 때 속죄의 의미로 드리는 제사 ● 삶의 현장에서 불현듯 죄를 깨달으면 그 즉시 드리는 제사. - 레 4:27-31: 27.만일 평민의 한 사람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 28.그가 범한 죄를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그범한 죄로 말미암아 그 것을 예물로 삼아, 29.그 속죄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제물을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요, 30. 제사장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제단 밑에 쏟고, 31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물의 기름을 떼어낸 것 같이 떼어내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지니 제사장이 그를 위 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1) 드리는 자(레4:3,13,22,27): 제사장, 온 회중(교회의미), 족장, 평민등 누구든지 드려야 함. 삶의 행복이 회복되는 곳, 동산교회 - 4 - 2) 드리는 시기(레4:28): 죄를 깨닫는 즉시 ● 죄를 깨닫는 즉시 드려야 한다는 것은 죄에 그만큼 민감해야 한다는 뜻. 따라서 말씀속에 사 는 것이 중요. 말씀을 가까이 해야 그것이 죄인지 깨달을 수 있다. 3) 드리는 방법(레4:29): 머리에 안수하고 잡는다. ● 안수한다는 것은 죄를 고백하는 것을, 목을 치는 것은 회개한다는 것을 의미. 회개는 죄를 고백하는 것이 끝이 아니라, 죄를 고백하고 삶에서 실천될 때 회개이다. 삭개오처럼, 내가 다른 사람의 것을 속여 빼앗았으면 4배로 갚겠다.. 실천으로 이어진다. 무를 자 르듯이 끊어버려야 회개이다. 제물이 다 다르다. 형편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남. 가난한 자, 부한 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다름. 숫양, 염소,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2마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제사를 요구하심. 4. 속건제 : 하나님의 성물을 범했거나, 사람에게 해를 끼쳤을 때 드리는 제사 1) 내용 : 레5:15-16 15.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부지중에 범죄하였으면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 리되 네가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소의 세겔로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 없는 숫양을 양 떼 중에서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서 16. 성물에 대한 잘못을 보상하되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 장은 그 속건제의 숫양으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ㄱ. 하나님의 것을 범한 죄는 범한 대로 갚고 1/5을 더해서 갚아라. ㄴ.사람에 대한 것을 범한 죄는 그대로 돌려보내고 1/5을 더해서 갚아라. ㄷ. 만일 돈 받을 사람이 없으면 친족에게 갚고, 친족도 없으면 제사장에게 갚아라(민5:6-8) ● 속건제, 속죄제 드리는 시기는 죄가 드러나는 날에(레6:5) - 속죄제: 죄사함이 목적. 돌이킬 수 없는 죄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김, 간음 등) 하나님과 나 사이에 해결 - 속건제: 보상이 목적(돈 떼어먹은 것, 훔친 것 등) 사람과 사람, 하나님 사이에서 해결. 사람과 사람, 하나님 사이에서 해결. 하나님께만 회개하고 끝내면 안된다. 그 사람과도 화해하고 해결하라 5. 화목제 : 하나님과 인간이 평화를 얻도록 드리는 잔치제사 ● 모든 예배는 잔치, 축제로 끝나야 한다. 잔치는 나눔으로 연결되어야 함. * 레17:15-18: 15.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16.그러나 그의 예물의 제물이 서원이나 자원하는 것이면 그 제물을 드린 날 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17.그 제물의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18. 만일 그 화목제물의 고기를 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드 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되지 못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죄를 짊어지리라 1) 종류: ㄱ. 감사제: 감사제목이 있을 때 - 제사 다음날 까지 제물을 남겨두지 말라 ㄴ. 서원제: 서원하고 서원이 이루어졌을 때 – 제사 다음날 까지만 제물 남겨둘 수 있다 ㄷ. 낙헌제: 괜히 좋은 일이 있을 때 드리는 제사 – 제사 다음날 까지만 제물 남겨둘 수 있다. 그러나 3일째는 먹으면 안된다. 삶의 행복이 회복되는 곳, 동산교회 - 5 - ● 제사드리는 날에 다 먹고, 다음 날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이유는 이웃들과 함께 나누어 먹으라 는 의미. 작은 부족에서 소 한마리(약 1200근)를 다 먹기위해서는 미운사람, 내가 싫어하는 사람까지 다 줘야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화목제를 온전히 드릴 수 있다. 예배를 통해서 진정으로 화 해와 용서가 일어나야 함을 의미. 하나님께 온전한 화목제, 예배를 드릴 때 사람과의 불편한 관 계로 회복된다. 온전한 예배를 드리면 미운사람과 화목하고 화해해야 한다. -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그렇다면 예배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나? 예배란 존경과 존귀를 받으실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올려드린다. 목적: 1.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 나는 굴복되어 지는 참된 회개와 자기부인 2. 하나님을 만나고 임재를 경험 3. 하나님께 감사 4. 하나님께 헌신과 봉사 5. 하나님과 이웃들과의 관계의 회복 ♣ 왜 지금은 구약과 같은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까? 1. 히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다른 제물이 필요없다. 예수님께서 단번에 희생제물이 되셨다. 2. 히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 구약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단번에 십자 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얻었다는 것. 예배의 중심이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어떻게 죄인 된 우리가 감히 예배를 통해서 하나 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께 절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십자가의 의를 의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록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가리워진 우리의 모습을 보고 우리를 받아 주 시는 것이다. 그렇기에 구약의 불완전한 제물과 제사를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것이다. 3.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 1) 영으로(in spirit) : 성령안에서, 성령의 임재안에서 예배를 드려라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예배를 드리라 ● 2) 진리로(in truth) : 진리되신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을 바라보며 예배를 드려라. -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의 통제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가운데 예배하라. 하나님이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시는 곳은 그분의 말씀뿐이다. 4. 삶으로 드리는 예배 :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 삶의 행복이 회복되는 곳, 동산교회 - 6 - 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 삶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교회당 문을 나서면서부터 시작됩니다. 믿음과 행위는 따로 떨어져 있지않고 함께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자의 모습과 생활인으로서의 모 습은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참된 예배자는 그의 삶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신앙고백 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 예배를 잘 드리고 있는가?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예배 공동체’이다. 예배가 빠지면 교회가 아니다. 지금처럼 바쁜 세상에서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지 성인들에게 그런 생각이 강한데, 그것은 세속화의 결과이다. 유럽과 미국은 이미 예배가 사라졌다. ● 예배를 등한하게 여기는 이유? → 예배를 드리나 드리지 않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것. 이런 생각은 예배를 드리면 복을 받는다는 잘못된 생각의 결과. 예배를 실용적인 어떤 행위로 오해.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최고의 표현이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께 영광돌리는 것이고, 은혜 받는 것은 그 다음이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으려고 너무 애를 쓰는 것 같다. 예배를 통해서 은혜가 임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은혜는 결과이고 목표가 아니다. 예배의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 묵상 &적용 1. 온전한 예배에는 번제(자기부인과 의탁), 소제(봉사와 섬김), 속죄제(죄의 회개), 속건제(죄의 회개), 화목제(감사와 헌신)의 모든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온전히 드려지고 있는 예배의 요소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2.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 고쳐야 할 모습을 구체적으로 적어보세요. 3. 삶의 예배를 드리고





  오늘은 화목제 속건제 속죄제 세 제사 예물에 대해서 강론하겠다. 항상 공부할 때는 일단은 문법적으로 구분을 하는 것이다. 국어 책을 읽듯이 어떻게 배열이 되어 있는지 그 다음 그 자체에서 이 제사법의 의미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해석하고 그리고 나서 구원 역사에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의미가 있는지를 해석하면 되는 것이다.


먼저 화목제 제물의 종류다. 소나 양 염소 이렇게 드리는데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드린다. 드리는 방법은 임자가 안수하고 회막문에서 잡으면 제사장이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리고 임자가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 기름을 취한다. 이 기름 취하는 것이 화목제의 한 특징이다. 그런데 내장에 덮힌 모든 기름 거기 보니까 간 꺼풀 쭉 있는데 기름을 강조하는 방법이고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두 콩 팥 그리고 양일 때는 기름진 꼬리 이것을 단에 불살라 드린다. 그렇게 해서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한다. 그런데 불사를 때도 그냥 단위에 불살르라 그렇게 되어 있지를 않고 번제물위에 사르라 그렇게 강조되어 있다.


항상 기록 자체를 자세히 읽어야 한다.

가령 3장 5절을 보면 아론 자손은 그것은 단위 불 위에 있는 번제물위에 사를지니 무엇이 복잡하다. 단에 불이 있다. 그 위에 나무가 있다. 그 위에 번제물이 탄다. 그 위에다 태워라 그렇게 되어 있다. 다른 데는 그렇게 자세히 언급이 안되어 있는데 단 위에 있는 나무 그 위에 불이 붙고 그 위에 번제물이 타고 있는데 그 위에다 드려라 이렇게 되어 있다.

화목제는 여호와께 드리는 식물이다. 제사장이 단위에 불살라 화제로 드리는 것은 여호와의 식물이요 향기로운 냄새다.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다. 기름과 피는 대대로 영원히 먹지 말라 16절에 그렇게 강조되어 있다. 3장 16절에 식물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라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이것이 여호와의 식물이다. 여호와의 몫이다 하는 이것이 화목제의 강조가 되어 있다.


그 다음에 뒤에 장을 보면 속죄 제물을 보고 한꺼번에 강론하겠다. 속죄 제물의 종류는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이 죄를 지으면 수송아지 여기서는 짐승이 먼저 강조가 안되고 누가 죄를 지었냐 하는 죄의 등급이 강조가 되어 있다. 그래서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죄를 지으면 수송아지 이스라엘이 온 회중이 죄를 지어도 수송아지 족장이 죄를 지으면 수 염소 평민이 죄를 지으면 암염소나 어린 암양 여기 암컷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평민 중에서 힘이 암 염소나 암 양을 드릴 힘이 안되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둘로 하나는 속죄 제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이 보다더 힘이 없으면 에바 십분의 일로 하나님 앞에 드린다. 그런데 이것은 속죄 제물로 드리기 때문에 소제처럼 기름과 향을 놓아서는 안된다. 에바 십분의 일은 성인 하루의 양식이다. 드리는 때는 여호와의 금령을 부지중에 범하고 그리고 깨달았을 때 드린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분해해 주니까 알기 좋지만 기록 문장 형식은 이렇게 안되어 있다. 속죄제는 어느 때 드리는가 그 죄에 대한 이야기는 저 뒤에 있고 앞에 누가 죄를 지었냐 죄의 등급이 전면에 드러나 있고 그 다음에 평민도 이렇게 드리라 해 놓고 저 뒤에다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을 때에 죄의 종목은 뒤에다 조금 붙어 있다.


속죄제를 보면 기록 형식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항상 기록 형식 문장 자체에 흐름이나 문맥을 잡으라 그 말이다. 속죄제는 다른 경우와 달리 누가 죄를 지었냐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죄의 등급이 중요하고 어디까지 죄를 미쳤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여호와의 금령은 어떤 것이냐? 저 뒤에 쯤 보면 증인이 증거 하지 않을 때 부정한 사체를 만졌을 때 사람의 부정에 접촉할 때 무심중에 맹세할 때 그리고 깨닫고 나면 이렇게 이렇게 제사를 지내라. 그런 말이다.

드리는 방법은 죄를 자복하고 그리고 드리는 자가 안수하고 회막 문에서 잡으면 제사장이 피를 여호와 앞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여기서 속죄제는 피 뿌리는 장소가 특징이다. 속죄제 종류를 죄를 지은 사람 등급 어디까지 죄가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문제인데 드리는 방법은 피뿌리는 것이 속죄제의 특징이다. 그래서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여호와 앞 향단 뿔에 피를 바르고 피 전부 회막 문앞 번제단 앞에 쏟는다. 드리는 자가 화목제에서처럼 기름과 콩팥을 취하면 제사장이 화목제물 위에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한다.


이 속죄 제물은 화목제의 기름 위에서 사르라. 그렇게 되어 있다. 여기까지는 1번 기름부은 제사장이나 온 이스라엘의 회중이 범죄 했을 때는 5번까지 순서다. 송아지 전체를 진밖에 재 버리는 곳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버린다 거기까지가 그렇고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과 회중의 속죄제를 드리는 법은 6번까지 그렇게 된다. 그러나 그 위에 즉 족장이나 평민이 죄를 지으면 피를 휘장이나 향단에 바르게 않고 번제단 뿔에 바르고 번제단 밑에 뿌리고 제물의 나머지는 제물을 드린 제사장이 회막 뜰 거룩한 곳에서 먹는다.


그렇게 하면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얻는다. 화목 제물의 제일 끝은 기름은 내것이라 너희들은 먹지 말아라 그 말로 끝나 있고 속죄제는 여호와께 속죄가 된다. 무슨 죄든지 속죄함을 얻으리라 그렇게 결론이 되어 있다.

속건제는 속건제와 속죄제가 거의 구별이 안될 만큼 연결이 되어 있지만 속건제는 성물에 대하여 부지중에 범하였을 때 또 여호와의 금령을 부지중에 범하였을 때 남의 물건을 전당 잡거나 강도질했거나 빼앗거나 분실물을 얻고도 부인할 때 들켰을 때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부지중에 범한 여호와의 금령은 어떤 것인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런데 드리는 종류는 이제는 속죄제는 사람에게 강조가 있었다. 누가 죄를 지었냐가 강조인데 속건제는 보상이 강조 점이다. 그래서 성물에 대해서 죄를 지었으면 속건제를 드리는데 지정한 가치를 따라서 성소의 은세겔에 해당하는 흠없는 수양 거기다가 1/5을 가산해야 한다. 여호와의 금령을 범한 경우는 지정한 가치에다 흠없는 수양이다. 이것은 직접 손해를 끼친 것은 아니다. 금령을 범했을 때도 일단은 하나님께 손해를 끼친 것인데 물건에 손해를 끼친 것이 아니여서 1/5을 가산하지 않지만 성소에서 지정 한대로 성소의 세겔은 일상 세겔의 약 두배가 된다. 그것도 은 가치에 해당한 것으로 그렇게 고가로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3번 같이 다른 사람에의 물건을 장난 질 했을 때는 본 물건에다가 1/5을 더하고 거기다가 지정한 가치대로 성소의 세겔대로 더 드려야 된다. 그것이 속건제을 드리는 종류다.


드리는 방법은 부지중에 죄를 지었는데 죄가 드러나는 날에 임자가 그렇게 보상을 하고 그리고 제사장이 속건제 수양으로 제사를 한다. 그러니까 속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하는 5장에는 이 제사법은 안 나와 있고 보상 문제만 나와 있고 이 제사지내는 방법은 7장에 나와 있다.


7장에서는 실은 제사법이 강조가 아니라 음식 나누는 몫에가 더 강조거든요. 그런데 그 쪽으로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왜 문장이 거기 배열되어 있는지 그런 문제들이 중요하다.


가령 속죄제는 어떻게 지낸다냐? 법이나 연구하려면 이렇게 구분해 주면 알기에 좋다. 그래서 레위기는 복잡하지 않게 구분하니까 알기 좋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설명하기가 훨씬 쉽다. 그런데 기록된 문장 형식은 이렇게 안되어 있다. 그런 것은 제물을 나누는 데서 더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속건제는 제사 드리는 법은 일체 안 나와 있고 오히려 제사지내는 법은 오히려 제물을 나누는 몫에 들어가 있다.

그래도 여기서는 구분해서 배우니까 일단 읽어는 두자. 7장을 보면 드리는 방법이 있는데 속건제는 속죄제처럼 지극히 거룩하다 이 말이 제일 앞서 있다. 그리고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잡는다. 제사장은 피를 단 사면에 뿌린다. 모든 기름과 콩팥을 단에서 여호와께 화제로 드린다. 고기는 속죄제처럼 그것을 드린 제사장의 몫이요 지극히 거룩하니 제사장의 남은 자만이 거룩한 곳에서 먹는다. 그렇게 되어 있다. 속건제는 지극히 거룩하다는 말이 앞과 뒤에 배열되어 있다.


여기서는 피를 어디다가 뿌린다 하는 것은 그렇게 강조가 되어 있지를 않는다. 단에 뿌리는 것이다. 피 뿌리는 것이 강조된 것은 속죄제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속건제를 드리면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얻는다 그것이 결론이다.

이제 해석을 하겠다. 그러면 이런 제사법은 어떻게 해석을 하냐? 이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제사법법들이 다섯 가지가 있지요? 그 특징들을 비교해야 한다. 그런데 제사법은 기록되기를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법과 또 제물 나누는 법 이렇게 두 단계로 구분이 되어 있다. 그런데 제물을 나누는 법은 제물을 나누는 법만 있냐? 그렇지 않고 드리는 법도 함께 언급이 되어 있다. 실은 거기서 드리는 법은 하나님의 몫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된 것이고 그리고 이 제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드리는 것의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그 본질은 앞에 제사 드리는 법에 나타나 있다.


그러니까 이것을 한꺼번에 모아서 해석을 하면 실은 잘 안 맞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들은 기록된 단위로서 레위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체를 보고 비교해 보면 아! 드리는 법에서 강조 점은 무엇이고 음식 나누는 강조 점은 무엇인가? 그래서 이것이 이렇게 배열이 되었구나. 그런 것들을 알 수가 있다.


그러면 비교를 해보자. 5쪽으로 돌아가서 비교하는 것이다. 6쪽을 읽어도 될 것이다. 왜 이렇게 반복이 돼냐면 매주 하나씩 강론하지요? 그러니까 중요한 토대는 반복되고 또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한꺼번에 해 버리면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6장 가운데 문단부터 읽겠다 그 말이다.-각 제사 예물의 의미는 여호와께 향기로 예물을 드리는 법과 그 예물의 몫에 대한 규례를 함께 읽고 제사들을 서로 비교하면 알 수 있다. 번제는 전체를 화제로 드린다. 불은 꺼지지 않게 하고 아침마다 번제물을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서 사른다. 가죽은 제사장의 몫이다. 지금은 전체에 대한 비교로서 설명을 하는 것이다. 나중에 몫은 왜 여기 기록되어 있는가는 다시 설명을 할 것이다.


하여튼 불은 꺼지지 않게 하라는 것은 번제에 있는 이야기지 다른데는 불 이야기는 안 나온다. 그리고 그 단 이름도 번제단이다. 그리고 아침마다 드리고 정규적으로 드린 것이 번제다. 그것은 개인이 원해서 드리면서도 또 정규적으로 드리도록 뒤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다. 이 불은 꺼지지 않고 하는 이야기는 실은 번제물에 대한 제사법에 나온 것이 아니라 뒤에 제물을 나누는 몫에 나온다. 하여튼 번제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번제물과 기록된 것이 아니라 제물 나누는 법을 보면 화목제의 기름을 번제위에 사르라. 그것까지 번제에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거기서는 제물을 나누는 목적에 해당되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라 제물의 종류가 강조였다. 전체로 불살라 드려라. 그런 것이 강조였는데 전체를 비교해 보면 이런 것이다. 그러니까 번제는 전체를 화제로 드린다. 불은 꺼지지 않게 하고 아침마다 드려야 되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 살라야 되고 가죽은 제사장의 몫이다. 그것이 번제물에 대한 전체적인 요약이다.


그러면 소제는 어떻게 되어 있냐? 기념물로 일부를 드리고 모든 유향을 화제로 드린다. 기념물로 일부 그리고 모든 유향을 향내로 드려 향내나게 한다. 이것이 소제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핵심이다. 특별히 향은 전부 사르라고 예비되어 있다. 그러니까 다른 것도 향내나는 예물이 되지만 완전히 향만 사르는 것이 진짜 향내가 나겠지요? 그래서 소제물로 한 움큼 기념물로 모든 유향을 화제로 불살라 드리면 향내가 된다. 그것이 소제물에서 강조되는 것이다. 나머지는 제사장의 지극히 거룩한 양식이며 성소의 뜰에서 먹는다. 이것에 접촉하는 자마다 거룩하게 된다. 그것이 소제물에 대한 총 요약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몫이 무엇이다 하는 것은 잘 안 나와 있고 제사장에게 양식을 준다. 그리고 이것은 지극히 거룩하니까 성소의 뜰에서 먹고 이 음식물에 접촉된 것은 다 거룩하다. 이 음식물의 지극히 거룩함 어떤 의미로 거룩한가? 성소에 속한다는 의미로 거룩함 모든 것을 정결케 한다는 의미로 거룩함 거기가 강조되어 있다.

화목제는 모든 기름과 콩팥을 화제로 드린다. 여기서 기름과 콩팥은 같은 자리에 있다. 문법적으로 같은 자리에 있다. 그러니까 콩팥은 기름하고 같은 의미다. 힘 이것은 아마 우리 동양권에서 말하는 개념들은 더 잘 이해를 할 것이다. 사람 힘이 어디서 나오냐 허리로부터 나온다. 힘이 좋다고 했을 때는 어깨의 힘이 좋다고는 잘 안한다. 허리힘이 좋다고 그런다. 힘이 어디서 나오냐 콩팥에서 그런 식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콩팥은 전부 기름진 것 내장에 덮인 기름진 것 그리고 그 기름과 함께 두 콩팥, 콩팥과 기름은 같은 가치를 가지는 그런 위치에 있다. 이것은 기름지고 힘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기름과 콩팥을 화재로 드린다. 번제물 위에서 사른다.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다. 화제물이 하나님 앞에 음식 드리는 것이 핵심이다. 내것이다. 음식의 친교가 화목제에서 특징이다. 기름은 여호와의 식물이다. 내 몫이다 주장하고 있는 것은 화목제에서 하는 이야기지 다른 제물에서 이것은 내것 그렇게 말한대가 별로 없다. 가령 속죄제를 드릴 때 기름을 사른데 기름은 내것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안는다. 화목제에서만 하는 이야기다. 기름은 여호와의 식물이다. 무교병과 유교병과 함께 드리고 음식상이 걸다.


이제 유고병도 드려져 있고 그리고 가슴과 우편 뒷다리를 드린다. 그것은 하나님의 상에 와서 하나는 흔들어 드리고 하나는 들었다 났다 한다. 어떻든 하나님의 상에 드린 것이다. 그리고 화목제를 읽어보면 임자가 가져오너라 그렇게 되어 있다. 다른 데는 제사장이 가져다 드린 것으로 되어 있다. 임자가 안수하고 죽이면 제사장이 가져다 드린 것으로 되어 있는데 화목제는 임자가 내게로 가져와라 표현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면 임자가 제단에 드린가? 아니다. 분명히 제사장이 드리는데 임자가 가져와라 그렇게 되어 있다. 여호와께 드린 가슴과 다리 소제물은 제사장의 몫이며 나머지는 임자의 몫이며 깨끗한 자만 먹는다. 그 고기가 부정한 것과 접촉하면 고기가 부정하게 된다. 나중에 제물을 나누는 법을 보면 서원 해서 드리는 화목제물은 이틀까지 먹는다. 그러니까 이 예물을 소제물처럼 지극히 거룩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자만 먹는다는 의미로 거룩하다. 이것은 성소 밖의 양식이다. 왜 부정한 자가 접촉되면 음식이 부정하게 된다. 그런데 성소에서 먹으면 부정한 것이 접촉되면 부정한 것이 깨끗게 되어 버린다. 그런 차이점이 있다.


속죄제는 죄가 미치는 영향의 등급을 따라서 명령에 의해서 가난한 자라도 반드시 드린다. 이것은 거의 강제적이다. 번제는 너희들이 예물을 드리려거든 이렇게 되어 있는데 속죄제는 아니다. 이렇게 죄를 지어서 온 백성에게 죄가 미쳤으면 이렇게 이렇게 드려라 명령되어 있다. 그리고 다른 제물은 드리고 싶으면 이것 이것을 드려라. 개인에게 자유가 허락되어 있는데 속죄제는 전부 항목이 정해져 있다. 누가 범죄 하면 이것 그리고 족장이 범죄 하면 수 염소다. 그런데 평민이 범죄 하면 암염소다. 이것은 풍성히 드린다는 것에 강조가 아니라 더 약한 것 작은 것을 드린다는데 강조 점이다. 왜 뒤에 힘이 미치지 못한 자들을 언급하는 것을 보니까 그렇다.


화목제에서 암컷을 드린 것은 풍성함이 강조다. 왜 거기는 나중에 유교병도 드리고 많이 드리니까 그것은 풍성함이 문제지만 속죄제에서 암컷을 드린 것은 더 작은 것을 드리는 문맥이다. 그러니까 그 문맥을 따라서 해석을 해야 되지 그 성별로 논쟁하고 있으면 안된다 그 말이다. 그 문맥을 봐야 한다. 그런데 평민이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를 드려도 좋고 그것도 미치지 못하면 하루 식량으로 드려야 된다. 그러니까 안 드린 사람이 없다. 반드시 드려야 한다. 그것이 속죄제에 대한 강조 점이다. 그래서 죄가 미치는 등급을 따라서 이 죄가 어디까지 미쳤는가 봐서 피도 거기까지 뿌린다. 가난한 자라도 반드시 드린다.


기름은 화목제처럼 드리고 피는 죄얼이 미치는 곳까지 뿌리며 그런데도 제물은 화목제처럼 드리도록 했다. 그리고 피는 어디까지 뿌리는가? 죄의 결과가 미치는 곳까지 뿌려야 된다. 그래서 제사장이 범죄 하면 휘장 앞에 뿌려야 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막힌 것이고 또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이 범죄 하면 그것은 온 백성이 죄를 짓는 것과 같다. 향단 뿔에 발라야 된다. 왜 비는 권세가 영향을 받았다. 또 번제단에만 바르는 것이 아니라 번제단 뿔에 바르고 뿌려야 된다. 뿔에 바르는 것은 권세에 대한 강조다. 번제는 뿔에 바르라는 말은 업다. 번제단에 뿌리고 단 사면에 뿌리고 밑에 붓고 그런 식인데 속죄제는 그 뿔에 바르도록 되어 있다. 성소에 피를 가지고 드러간 것은 먹지 못하고 진 밖에서 태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휘장 앞에 뿌리고 향단에 뿌린 피 그렇게 뿌린 피는 기름 부음 받은 대 제사장이나 백성이 지은 죄 그런 것은 먹지 못하고 진 밖에서 태운다. 그 외에 경우에는 예물의 나머지는 제사장이 성소의 뜰에서 거룩한 양식으로 먹는다. 소제물처럼 거룩하고 속건제는 성소의 세겔대로 드리며 성물에 대해서 오분의 일을 더한다. 개인 피해에 대한 것은 항상 오분의 일을 더한다. 기름은 화목제처럼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지극히 거룩한 양식이다. 제사장이 먹는다.


번제는 무엇이 강조냐? 전부 요약하면 번제는 전체를 드림이 소제는 향내가 화목제는 음식의 교제가 속죄제 는 죄를 속하는 것이 속건제는 손해에 대한 보상이 중심이다. 그 앞에 5쪽을 봐도 이런 말이 더 자세히 써 있을 것이다.

그것이 5대 제사를 비교 해 봤을 때 강조 점들이다. 이 강조 점들을 따라서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강조에 맞도록 배열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표현도 그렇게 되어 있다.


이제 다시 앞 페이지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속죄제를 해석할 찬스이니까? 지금은 해석하기 위해서 전부 비교해 봤다.

화목제다. 화목제 예물을 드리는 법에서 강조 점은 내장에 모든 기름과 콩팥을 화제로 드리는 것과 기름을 여호와의 식물이라 칭하고 피와 같이 사람에게 먹지 못하도록 금한 것이다. 그것이 화목제의 제일 끝에 강조되어 있다. 화목제를 드리는 것을 화목제의 기름을 사른다고 말한다. 또 화목제를 드릴 때도 어떻게 하느냐? 화목제의 의 기름을 사른다 했고 속죄제 는 피를 뿌린다 그런다. 표현하면 그래서 화목제를 드릴 때도 화목제의 기름을 드린다 이렇게까지 표현한다. 그래서 기름과 콩팥은 문장에서 같은 의미를 가진다. 기름과 콩팥은 생명의 힘을 표상 한다. 수컷뿐만 아니라 암컷도 드리며 임자도 성소 밖에서 먹으며 먹는 날수도 정한 것도 특징이다. 며칠까지 먹어라 다른 데서는 며칠날까지 먹어라 날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어디서 먹는가 먹는 장소가 강조다. 거룩한 뜰에서 먹어라 그것이 소제물이다. 거룩하게 먹어라 한 것은 속건제와 속죄제다. 그것은 장소가 문제인데 화목제는 몇 일까지 먹어라 그 쪽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먹는 날수를 정한 것도 특징이다.


속건죄와 속죄제와 소제의 예물은 성소에서 제사장이 먹는 지극히 거룩한 양식이며 접촉한 자를 거룩하게 하지만 화목제의 고기는 부정한 것에 접촉하면 부정하게 되며 깨끗한 자만 먹는다. 만일에 부정한 자가 먹으면 그는 하나님이 벌을 줄 것이다.

그렇게 먹는 방식의 차이가 있다. 이 먹는 방식은 어디 자리에서 먹는 것이 아니나 언제 까지 먹어라 드리는 것도 기름을 살라라. 이쪽이 강조다. 기름은 내것이라. 아까도 비교해 봤지만 많이 드린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다른 것은 기름만 주로 사르는데 번제는 전체를 사르고 나머지는 대표자만 사르는데 이것은 오른쪽 뒷다리 가슴도 드린다. 그러니까 많이 드린다. 그것이 강조다. 그러니까 이 예물은 성소 밖에서도 먹는데 거룩한 자만 먹어라 부정한 자가 먹으면 그가 벌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 고기도 부정하게 되어 버린다.


그리고 특별히 서원 해서 드리는 감사제는 이틀까지 먹어라 더 확대가 되어 있다. 그것이 화목제의 특징이다. 화목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가지는 거룩한 식탁의 교제 곧 하나님께서 성소에 속한 생명의 교제를 허락하신 것이다. 화목제의 교제는 전 생명을 드리는 번제물 위해서 사르며 향기로운 삶의 향기를 드리는 소제와 함께 드리고 유교병과 함께 드렸다. 이것은 화목제를 드리라는 제사 법에 직접 나온 것이 아니라 나중에 제사 제물을 나누는 몫에서 나타나는 방법들이다. 그러니까 제사 제물을 나누는 몫에서 제사 드리는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몫으로서 의미가 드러나 있다. 거기에 그렇게 나타나 있다. 번제와 소제가 화목제의 토대요 화목제는 모든 제사의 목표이다.

시내산 언약 체결 식에서도 번제와 함께 화목제를 드렸다. 그러나 기름은 하나님만의 몫이며 백성에게는 생명의 양식도 부정으로부터 오염 될 수 있는 것이었으며 서원의 양식일지라도 안식일에 먹는 이틀까지 먹는 양식밖에는 안되었다.


화목제를 보면 화목제의 기름을 사른다. 콩팥을 사른다 해서 힘, 생명의 힘 그것을 드리는 것으로 되어 있고 특별히 기름은 내것이니 아무도 먹지 말아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 앞에 음식물 드리는 것이 강조 점인데 어떻게 드리자면 이 화목제는 번제물 위에서 불사르고 또 소제물 유교병과 무교병과 함께 드린다. 그러니까 이것은 완전히 음식상이다. 또 유교병까지 드리니까 안식의 양식까지 드려지는 것이다. 그렇게 드린다.


그러니까 이 화목제는 번제물 위에서 불사르고 소제와 함께 드린다. 그리고 이것은 제물을 먹는 것이 강조다. 그러니까 실은 이 화목제는 번제와 소제가 토대가 되고 번제와 소제가 목표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 생명을 헌신하고 그리고 그들의 모든 삶을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열매로 드리고 그렇게 하는 삶이 목표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축제 하나님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 그런데 이 축제는 성소 밖에까지 확대된다. 그것이 화목제의 중심이다. 먹는 것도 서원 제물은 이틀까지 먹는데 구약에서 먹는 양식의 최고 한도는 이틀이다. 왜 그것이 안식일에 만나를 먹는 방식이다. 다른 모든 것은 하루의 양식인데 안식일에는 이틀치를 주웠다. 그래서 이틀은 하루의 완성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서원제물도 이틀까지 먹고 더 이상 먹으면 부정한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식탁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으로 그의 삶을 성화 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그이 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로 세우셨다. 단어 그대로 화목제물로 나와 있는 구절들을 인용했다. 특별히 롬3:2


5. 요한-서 2:4절 4장 10절 예수는 그의 피로 인하여 교회로 자기 상에 앉게 하시고 그의 피에 살과 속한 영원한 생명의 교제를 허락하셨다. 예수를 화목제물로 보내셨다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화목제물 그러니까 진노를 푸는 화목 그런 교리 적으로 해석을 하지만 그것은 구약이 화목제물이 일단은 토대다. 왜냐하면 그 화목제물은 한 상에서 먹고 마시는 교제의 특권이다. 성소에서만 먹는 것이 아니라 성소의 뜰 밖에서도 먹는 거룩한 교제의 양식이다. 그것이 예수를 화목제물로 보내셨으니 하나님과 화목해라 그런 말이다.

나를 먹는 자는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는 화목제물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먹고 마시는 모든 삶을 하나님 앞에 음식 드리는 축제로 그렇게 드리도록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셨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파트리스교회 주일 설교 / 2020-2-2

 하나님은 영이시라(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1월 5일 주일에는 “하나님은 빛이시라”
1월 19일 주일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오늘(2월 2일) 주일에는 “하나님은 영이시라”
이러한 주제로 설교를 진행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과 바르게 하는 것은 구분해야 합니다.
잘한다고 말할 때는 교회 중심의 신앙을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바르게 한다고 말할 때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 개인적인 삶을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바르게 잘 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바르게 잘 하려면 “하나님의 속성”을 성경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말할 때 빛은 생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할 때 사랑은 용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할 때 영은 영원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죄인들을 용서하시기를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영의 특징은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영의 특징은 모양이 없습니다.
영의 특징은 능력이 있습니다.
영의 특징은 변화를 일으킵니다.

요한일서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사도요한이 듣고 보고 손으로 만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사도요한은 다른 제자와는 다르게 하나님을 세 가지로 정의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영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도 예배해야 합니다(요 4:24)


둘째, 하나님은 빛

하나님이 빛이시기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어두움 가운데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어서도 안 되고 어두움 가운데 안주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빛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빛 가운데 거하고 빛 가운데 행동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사랑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사도요한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정의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정의를 포함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도 요한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해야 알 수 있는 하나님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하는 이유를 요한일서 4:7∼8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되는 첫 번째 이유는 사랑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성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귀신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7절 말씀을 다시 보면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을 믿는다 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는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9∼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로 하는 사랑을 많이 합니다. 말로는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행동이 따라 주지 않는다면 삶으로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 사랑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로는 선지자를 보내서 말씀하셨고 때로는 직접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10절을 보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이유입니다.

죄인을 사랑하신 예수님

10절을 다시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해서라는 구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해서 자기의 아들을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한 지도자나 탁월한 사람을 위해서 대신 죽는 사람은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위해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만한 가치가 없는 죄인을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그 죄인이 누구입니까? 저와 여러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주 나약하고 더럽고 추악하고 악취가 나고 보잘 것 없는 저와 여러분을 죽기까지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화목제물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분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그 사랑의 십자가가 여러분 마음에 뜨거움으로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내가 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그 큰 사랑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되는 세 번째 이유가 11∼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 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계속해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중 하나님을본 사람은 없지만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 줄 수 없는 사람을 받아주고 사랑할 때 그 사랑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많은 사람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축원합니다.

우리 안에 사시는 성령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어떻게 거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여 하나 되게 하는 신비로움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13∼16절의 말씀입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일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절에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저라는 말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계속해서 16절에 보면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 됨의 비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는 하나 됨을 맛보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을 보면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합니다. 이 하나 됨이 얼마나 신비한지요? 요한복음 17장 22∼23절에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하려 함이로소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고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입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 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모든 것은 성령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의 은혜가운데 나아가고 성령의 힘에 의지하여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 되는 놀라운 영광의 자리에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하나 됨의 열매 담대함

사도 요한은 하나 됨의 열매에 대해 말합니다. 17절에서 21절입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

사랑함으로 얻어지는 첫째 열매는 담대함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담대함이란 단어를 네 번 쓰고 있습니다. 두 번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 우리가 담대함을 얻었다고 했고 또 다른 두 번은 마지막 날 재림의 날에 누리는 담대함을 이야기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된 담대함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두려움이 없고 장래에 받을 심판에 대한 담대함이 있습니다. 담대하다는 것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죄를 범한 인간이 갖게 된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운전을 하다가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그냥 달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경찰차가 나타나서 제 차를 세웠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두려워서 도저히 경찰관과 눈을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면 우리의 죄가 드러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나만 아는 죄까지도 다 드러납니다. 생각으로 지은 죄까지 다 드러납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사탄은 우리의 죄에 대해 참소합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담대해 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이미 죄 값을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담대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여준 온전한 사랑이 우리의 두려움을 내어 쫓고 담대함을 줍니다.

하나 됨의 열매 형제사랑

둘째 열매는 형제사랑입니다

20∼21절을 보면 사도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사랑한다고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픔을 주고 고통을 주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형제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지 않으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이라고 지적합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눈에 보이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사랑의 몸부림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가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하나님의 사랑가운데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우리의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완성되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를 볼 때 사랑받을 수 없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보고 사랑할 수 없는 형제자매들을 사랑할 힘과 용기를 얻기를 축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파크리스교회 주일 설교(2020-1-5)

하나님은 빛이시라

요한일서 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빛이시라!
God is light.
ὁ Θεὸς φῶς ἐστιν(the God light is)

2020년 첫 주일을 맞이합니다.
첫 주일의 의미를 “시작(始作)이 반(半)” 이라는 속담과 “첫 단추(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는 끼울 구멍이 없다”는 독일의 문호 궤테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 주일 예배에 성공한다면 2020년의 절반은 이미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에 오늘의 예배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 세자를 남긴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죽어서 무엇을 남겨야 할까요? 속담대로 한다면 사람은 누구나 이름 세 글자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남길 수 있는 것과 다른 것을 남겨야 할 것입니다. 다른 것을 남기려면 먼저 나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2020년 신앙생활을 위한 목표를 위한 표어를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라고 결정했습니다.

지난 1월 1일부터 요한일서를 읽기 시작하여 1장부터 4장까지 읽었습니다. 함께 읽었던 말씀 중에서 설교 본문을 선택하고 설교하기 위하여 오늘 설교 제목은 요한일서 1장 5절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을 선택했습니다. 빛에 대한 탈무드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도입 이야기)
어느 유명한 랍비가 제자들에게 10불씩 나눠주며 날이 어둡기 전에 기도실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물건을 구해오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모였을 때 랍비는 제자들이 구입한 물건들을 확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이 가져온 것들은 기도실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10불을 갖고는 기도실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물건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평소에 어리석고 둔하다고 놀림을 받던 제자가 전기 스위치를 내리더니 어두워진 기도실 책상 위에 양초를 올려놓고  불을 밝혔습니다. 그 순간 어둡던 기도실이 환해졌습니다. 작은 양초의 불빛이 기도실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빛이란 어두운 방안을 물리칠 수 있다는 교훈의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지난 한 주일 동안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말씀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빛이라고 하셨을까요?

신약 성경 27권을 세 개의 기둥으로 설명하면 “복음의 기둥”과 “요한의 기둥” 그리고 “바울의 기둥”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기둥에서 빛이란 “착한 행실”이라고 합니다(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에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바울의 기둥에서 빛이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합니다(에베소서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요한의 기둥에서 빛이란 복음서와 바울 서신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내용을 말씀합니다(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서는 빛을 도덕과 윤리적인 행동으로 제한시켰습니다. 그러나 요한서신에서는 빛을 도덕과 윤리적인 행동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좁은 범위에서 읽을 수 있지만 2020년부터는 넓은 범위에서 읽고 묵상하려고 합니다. 주간에 읽은 말씀 중에서 설교 본문으로 선택하고 설교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더불어 설교하므로 성경을 폭 넓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스스로 존재하시는 영”입니다.
시편 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욥기 33:30
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돌이키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려 하심이니라.

시편 56:13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영원한 생명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영의 하나님을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합니다. 삼위일체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성부(聖父) 하나님(시편 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

야고보서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성자(聖子) 예수님(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일서 1: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요한일서 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성령(聖靈) 하나님(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이한 빛"이란 "놀라운 빛"을 말합니다. 놀라운 빛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어두운 죄 가운데서 불러내어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신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기이한 빛이 되신 예수님은 놀라운 빛으로 죄악에 붙잡힌 인생을 불러내십니다. 그 좋은 예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을 향하여 가는 길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사울은 땅에 엎드렸을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이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물었을 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러한 기이하고 놀라운 빛을 곧 성령의 역사라고 하겠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다양한 빛으로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로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성령님은 기이한 빛으로 임하셨습니다.


생명의 하나님(시편 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민수기 16:22
그 두 사람이 엎드려 가로되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민수기 27:16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예수님은 생명의 주(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성령님은 살리는 영(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곧 생명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첫 사람 아담은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므로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할 때 지으아직 영원한 생명에 대한 관심도 없고 오직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다른 사람들 특히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들보다 더 잘 살아가는 것이 선택받은 사람들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백성들에게 먼저 깨우쳤던 것은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삶과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선택받은 백성들일지라도 도덕과 윤리적인 측면에서 가르친다면 사람은 빛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죄를 지은 상태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빛이라는 주제는 도덕과 윤리가 아닙니다. 이와 같은 내용에 따라 기독교와 종교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종교(宗敎)는 사람이 신(神)을 만나기 위하여 최선(最善)을 다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基督敎)는 신(神)이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최선(最善)을 다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종교의 자세는 상향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하향적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독교는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계시와 사랑에 의해서 사람을 부르는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부르셨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시기 위하여 영원한 생명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육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르시려고 성령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성령은 죽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예수의 몸이 죽었지 성령이 죽은 것이 아니므로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제자들과 당시 유대인들의 시각은 바뀌었습니까?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과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이 바뀌었다면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아버지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합니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때와 기한은 아버지만 아신다. 너희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능력을 받아 땅 끝까지 다니며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만 더 중요한 의미는 영원한 생명을 깨닫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던 것처럼 너희들도 성령을 받으면 반드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며 그 생명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이시라!
영원한 생명은 성령을 받는 사람만이 확신할 수 있고 그 생명의 기쁨과 소망 때문에 생명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요한서신에서 빛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함께 확인해 보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동안 빛을 복음서와 바울 서신의 내용에 따라 주로 그리스도인들의 도덕과 윤리적인 삶을 강조하는 설교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요한서신을 중심으로 빛이란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빛이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사람은 죄를 짓고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영원한 생명을 되찾아야 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되찾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의 아들을 이 세상에 사람으로 보내셨습니다. 사람으로 세상에 임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도 육신의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사람들과 같은 방식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말씀과 행하셨던 일들을 지켜보며 오래전부터 예언된 메시아라는 기대를 갖고 다윗의 왕국을 건설하기만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국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죽으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죽으러 간다는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을 때 제자들은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삼일 후에 죽었던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죽었던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소식에 다시 제자들이 모였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질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나라가 언제 임할는지 그런 것에 관심을 갖지 말고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깨우쳤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죽는 것이 끝이 아니라 다시 살아날 것과 너희가 본 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에 따라 제자들은 성령을 받으라는 깨우침에 관심을 갖고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성령이 임재 했을 때 영원한 생명의 실체가 무엇인지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의 아들로 육신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제자들과 영원한 생명을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회복의 영이 되어 죽은 것을 살려낼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심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이시라!
영원한 생명을 증거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알려주시려고 영이란 생명을 마리아의 몸에 보내시고 육신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육신의 모습으로 드러나신 예수님을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이해할 수 없었고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다만 사람들은 굶주림을 해결하고 억압받는 고통스런 자리에서 자유를 보장하고 육체의 질고와 세상의 온갖 시련들을 해결할 수 있는 다윗 왕국을 재건할 수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를 갈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갈망하는 길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 죽음의 길을 선택하므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대도 무너졌고 메시아 신앙마저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가장 가까이서 따르던 제자들도 알 수 없었던 놀라운 사건이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또다시 사람들은 열광하기를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때가 언제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관심을 갖고 기도해야 할 것은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실 때 들었던 다시 오실 것이라는 말씀은 지금도 성경의 기록에 의해서 우리들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생명의 주가 되십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이 되십니다. 이 진리를 믿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죽음을 이기신 영원한 생명입니다.
성령은 죽은 것을 살릴 수 있는 생명의 영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생명으로 하나가 되셨습니다.

이제 이와 같은 진리를 성경의 근거를 찾아보며 하나님은 빛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빛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생명의 주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빛이라는 말씀은 성령님은 살리는 생명의 영입니다.

- (공동번역) 하늘의 빛들을 만드신 아버지

빛을 지으신 아버지가 어떤 빛을 지으셨습니까?
물론 천지창조의 순서에 따라 첫째 날은 빛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넷째 날은 낮을 주관하는 해와 밤을 주관하는 달과 별들을 만드셨습니다. 이와 같은 빛은 물리적인 빛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빛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빛은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말씀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생명의 하나님

민수기 16:22
그 두 사람이 엎드려 가로되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민수기 27:15∼17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와 이르되.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시편 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생명의 예수님

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생명을 창조하시는 영원한 생명이 되시고 스스로 존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성령님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새번역 성경)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 데도 소용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이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






첫째, 빛은 생명(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왜 빛을 생명이라고 하셨을까요?

시편 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욥기 33:30
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돌이키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려 하심이니라.

시편 56:13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죽어야 할 인생들은 영원한 생명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의 빛이 되신 하나님은 그 아들을 성령의 생명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명의 주를 믿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영원한 생명을 깨닫지 못하는 인생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를 하나님께서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게 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은 죽음을 다스릴 수 있고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 모였던 사람들에게 너희가 본 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빛입니다.
빛은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입니다.

둘째, 빛은 예수 그리스도(요한복음 1:9∼12)
⑨.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⑩.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⑪.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⑫.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한복음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빛은 생명입니다.
생명의 빛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삼위일체가 됩니다.
따라서 생명의 빛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입니다.

셋째, 빛은 하나님(야고보서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빛들의 아버지는 생명의 아버지입니다. 생명의 아버지 하나님은 성령으로 아들을 잉태하게 하시고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빛의 아버지만이 할 수 있는 놀라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생명의 빛이 되신 하나님께서 빛으로 치료하십니다.

말라기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공의로운 해는 장차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공의로운 해가 되어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무엇을 치료하셨나요?

첫째는 자연 - 바람아 잔잔하라!
둘째는 귀신 - 더러운 귀신아 물러가라!
셋째는 병 - 혈루증
넷째는 죽음 -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인 성 과부의 아들, 죽어서 나흘이 지나 냄새가 진동하던 나사로
이 시간 빛이 되신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치료받지 못하던 각종 질병을 반드시 치료하실 것을 확신하고 믿음으로 주장하십시오.

빛이 되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영과 혼과 육을 건강하게 할지어다!

성도들이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믿음의 근거는 능력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위임받은 법적 권위라고 하겠습니다. 법적 권위는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으니.
합법적인 권위는 예수를 믿을 때 이미 받았습니다. 이미 받은 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순종하지 못한 죄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믿음으로 주장하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창세기 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빛”이었습니다. 그런데 넷째 날 만드신 것은 “해”와 “달”과 “별” 즉 “일월성신(日月星辰)”이었습니다. ‘일월성신(日月星辰)’이란 사전적 의미는 “밤하늘에 작은 점 모양으로 반짝이는 천체.”라고 정의합니다. 따라서 첫째 날 만들었던 “빛”과 넷째 날 만들었던 해와 달과 별들의 빛은 과연 같은 빛일까요? 첫째 날의 빛과 넷째 날의 빛은 같은 빛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첫째 날 만들었다는 빛의 의미는 물리적인 빛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 날 생명의 빛을 만드셨습니다. 생명의 빛을 구체적으로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왜 하나님을 빛이라고 하셨을까요?
창세기에 소개된 창조의 순서를 먼저 확인해 보겠습니다.

1일:빛(낮과 밤)
2일:궁창(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   
3일:육지, 육지의 식물, 바다(땅 바다)
4일:해, 달, 별(日月星辰)   
5일:하늘을 나는 새(鳥類), 바다에 사는 물고기(魚類)   
6일:육지에 사는 동물(動物), 사람(人間)
7일 : 안식(安息)

아래와 같이 외우면 쉽습니다.

일 빛 - 1일째는 빛
이 궁 - 2일째는 궁창(穹蒼)
삼 육식해 - 3일째는 육지와 육지의 식물과 바다(海)
사 해달별 - 4일째는 해와 달과 별(日月星辰)  
오 조어 - 5일째는 하늘에 사는 조류와, 바다에 사는 생물인 어류
육 동사 - 6일째는 육지에 사는 동물(動物)과 사람(人間)
칠 안식 - 7일째는 안식(安息) 

이제까지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말 할 때마다 빛을 물리적인 빛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기회에 빛에 대한 성경적 이해 즉 복음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존재해야 할 것을 의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뱀을 만드셨을 때 뱀을 향한 존재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뱀에게 들어가 뱀을 조정하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결국 뱀은 존재 의도를 잊어버리고 사탄의 도구로 이용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뱀은 저주를 받고 흙을 먹어야 하고 배를 땅에 대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빛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없을 때 이와 같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존재 방식을 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이신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복음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근본 하나님의 본체’(very nature, 빌 2:6)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실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인류의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해 자신을 버리사 하나님께 향기로운 희생제물이 되었다. 이 사실이 현실로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이 전제돼야 한다. 이것을 깨닫고 믿을 수 있는 자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사랑받은 자들일 것이며, 그 사랑을 맛본 자들만이 그런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한 자들이라면 이제는 그 새로운 모습을 삶 가운데 비추어야 한다.(마 5:15~16) 빛을 알았고 그 빛을 소유한 사람은 그냥 있을 수 없다. 빛은 반드시 다른 곳을 비추어야만 한다. 비출 수 없는 것이라거나 비출 대상이 없다면 그 빛은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아직도 어둠 가운데 헤매고 있는 영혼들이 너무 많다. 그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어주지 않는다면 죄악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인식해야 한다. 거울에 햇빛을 반사해 다른 어두운 곳을 비추게 되는 비유를 살펴보자.


첫째는 거울 자체에 다른 이물질이 잔뜩 끼어서 더러워졌을 때는 아무리 강렬한 빛을 비추어도 다른 곳으로 반사할 수 없게 된다. 근본적으로 죄악의 문제가 해결되어 있지 않은데 강렬한 빛을 비추면서 그로부터 빛을 다른 곳으로 발하라고 아무리 애쓰고 외쳐보아도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는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은 거울이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거울은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아무리 거울을 잘 닦는다 해도 결단코 그 자체로 빛을 만들어내어 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빛을 받아야지만 그 빛을 다른 곳으로 다시 비출 수 있다. 아무리 스스로 도를 열심히 닦아 남들에게 빛을 비추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빛을 주셨다.(요 1:9~13) 그래서 그 빛을 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게 하셨다. 그런 자들은 또 그 빛을 반사해 어두움에 거하는 자들에게 비추어 주어야 한다. 빛과 어두움이 함께 거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간이나 복음을 전파하며 참 진리와 참 빛이 무엇인지를 전했다. 그때에도 잘못된 철학 사상으로, 잘못된 종교로, 상업의 발달로 인한 도덕적 타락으로, 기독교를 핍박하고 왜곡하는 자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대할 때 긍휼과 사랑의 마음은 가져야 하지만 그들과 동조하고 그들이 하는 일에 같이 참여해서도 안 되고 참여할 수도 없다. 그 이유는 궁극적으로 ‘빛’과 ‘어두움’이 함께 공존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빛 가운데 사는 사람들의 열매는 ‘모든 선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말한다(에베소서 1장). 만일 이런 열매가 우리 생활 가운데 없다면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의 거울을 들여다보고 지금 무슨 빛을 받으며 살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신에 대하여 책망 받을 것을 찾아내어 빛 가운데로 드러내놓고 치유를 받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주님 보시기에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다.(엡 5:14) 참빛을 찾았고 그 안에 거하는 자들은 담대함을 얻을 수 있도록 말씀을 주셨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그 빛에 거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해 주실 것인지를 약속해 주시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 84:11)


이 빛에 거하는 자들은 이 세상 가운데 어려움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이기고 어떻게 인생의 여정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사 60:19~20)


미가 7:8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려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구약 성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한 기록입니다.  
신약 성경은  오신 예수님에 대한 기록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여러 가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창세기 3:15  '여인의 후손'
2. 이사야 7:14  '임마누엘' 
3. 민수기 24:17  '한 별'
4. 이사야 9:2 '큰 빛'
5. 시편 84:11 '해' 
6. 누가복음 1:78 '돋는 해'
7. 요한복음 1:9 '참 빛'
8. 요한복음 8:12 '세상의 빛'
9. 요한계시록 22:16 '광명한 새벽별' 
10. 요한복음 15:1 '참 포도나무'
11. 이사야 9:6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또한 양으로 표현하기도 했고, 사자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목자나 골짜기의 백합화, 샤론의 장미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명칭은 212가지가 넘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의로운 해'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의로운 해'이신가?


첫째, 예수님은 결점이 하나도 없는 완전한 분이시기 때문

예수님은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정의롭습니다.  
예수님은 의롭습니다.  

세상적인 의는 모순이 많습니다. 한쪽만 위하는 형편에 치우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공평무사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판단은 항상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항상 옳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의로우신 태양이신 증거는 태양이 만물을 비추듯이 예수님은 만 인간에게 모두 모두 필요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햇빛이 필요하지 않는 식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햇빛을 받지 않으면 식물은 생존 할 수 없습니다. 햇빛이 필요하지 않는 동물도 없습니다. 햇빛을 쬐이지 않으면 질병을 앓습니다. 그러기에 지하에 근무하는 분들은 자주 해빛을 쪼여야 건강에 이상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만큼 태양의 빛은 동식물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의 빛을 받으면 어두움에 다니지 않습니다.

요 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햇빛 되시는 예수님이 필요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햇빛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필요 없다는 사람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해야 합니다.  내 남편, 내 부모님, 내 가족을 지옥에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눈물로서 뿌린 씨는 기쁨으로 거둡니다.  눈물로서 지옥에 보내어서는 안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셔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금식 기도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큰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그때 기쁨이 넘치는 은혜가 있게 됩니다.


다음, 의로우신 태양이신 예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본문 2절은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니"라고 했습니다.  광선은 본래 치료의 효과가 있습니다.  인류가 발견한 최고의 소독법은 햇빛소독 입니다.

예수님은 치료하는 햇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복음서에는 이 증거를 확실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치료하신 것은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자연을 치료하신 경우 

 

하루 종일 복음을 증거 하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습니다. 그때 갑자기 큰 광풍이 일어나 물결이 부딪혀 배에 물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제자 가운데 네 사람은 그 바다 출신입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입니다. 그런데 그 풍랑에는 어떻게 대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깨우며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깨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며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하여졌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과 인간의 방법이 다른 점입니다.

인간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1. 빨리 그 폭풍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는 것입니다.

2. 어서 속히 노를 저어서 풍랑을 건너는 것입니다.

3. 배에 싣고 있는 물건을 바다에 버리는 것입니다. 
배가 가벼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방법은 풍랑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연을 지배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을 보호하실 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필요할 때 홍해를 갈라 바다를 육지같이 건널 수 있게 하셨습니다. 뇌성과 벼락을 이용하여 적군을 무찌르는 일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지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치료하셨습니다.


다음, 예수님은 사단을 물리치실 수 있는 권능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들어와 있었던 귀신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귀신들은 힘이 강합니다. 쇠사슬을 끊는 힘이 있었습니다. 돼지 2,000마리를 몰아서 물에 빠뜨리는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귀신은 인간들이 감당 못할 괴력을 갖고 있습니다. 귀신이 인간들 마음 속에 들어가면 자해(自害) 합니다. 자기 몸을 해칩니다. 자살하게 됩니다. 근간에 들어와서 많은 자살자가 나오는 것은 귀신들 때문입니다. 귀신들의 미혹에 넘어가서 자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을 하신 일이 있었으면 그때 귀신이 내 마음에 들어왔었던 증거임을 알아야 합니다. 죽으면끝이라는 생각은 너무 위험한 생각입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혼이 육체에서 떠나면 무엇입니까?  그것이 죽음입니다. 그때 육체는 흙에서 왔기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영혼은 어떻게 됩니까? 불신 영혼은 음부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생명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 귀신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예수님은 그 귀신을 이깁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예수 이름으로 우리를 넘어지고, 자빠지고, 실패하게 만드는 귀신들을 쫒아내시고 날마다 승리하시기를 주님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었네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었네

예수 이름으로 나아 갈 때 누가 나를 괴롭히리요

예수 이름으로 나아 갈 때 승리를 얻었네  


병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병의 원인은 “하나님이 보내지 않은 영”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귀신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지 않은 영은 악령을 말합니다.

1. 악령은 반역을 합니다.

2. 악령은 불신앙에 빠지게 합니다.

3. 악령은 부패하게 합니다.

4. 악령은 방탕에 빠지게 합니다.  

5. 잘못된 습관에 빠지게 합니다.

6. 악령은 교회와 멀어지게 합니다.

7. 예배드리기 싫어지게 합니다.

8. 기도하기 싫어지게 합니다.

9. 공연히 비판합니다.  

10. 불평합니다.

11. 원망합니다.

12. 짜증냅니다.

13. 교만에 빠집니다.

14. 분쟁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모두 마음이 병든 사람이 하는 행동입니다. 누가 이길 수 있습니까? 의로우신 태양이신 예수님의 이름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이 이길 수가 있습니다. 악령의 세력을 무찌를 수가 있습니다. 그 분은 의로우신 태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이름 아니고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악령은 마음의 병 뿐 아니고 육신에도 병을 줍니다. 악령은 우리로 하여금 죄 가운데 들어가게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의 값으로 육신이 고달파 고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이름은 육신의 병도 깨끗하게 치료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병으로 고생하시는 분 계십니까?

육신의 병으로 고생하시는 분 계십니까?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중에 예수 이름으로 고침 받기를 바랍니다.


의로우신 태양이신 예수님이 하신 세 번째 일은 모든 병든 자를 치료하신 일입니다.


마태복음 8:16∼17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쫒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바 우리 연약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모든 병자들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사역은 선지자 이사야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은 불치병인 나병도 치료하셨습니다. 중풍병도 일으켰습니다. 열병도 치료하셨습니다. 앉은뱅이도 일으켰습니다.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의 병도 치료하셨습니다. 소경도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귀 먹고 어눌한 자도 고치셨습니다. 49년 동안 앉은뱅이로 고생하던 불쌍한 자도 예수님은 고쳐 주셨습니다. 한편 손 마른 자도 고치셨습니다. 반신 불수도 고치시고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두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을 고치시는 권능을 갖고 계셨습니다. 연약한 분 계십니까? 나도 고칠 수 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의사는 다 못 고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믿는 자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예수 이름으로 고침 받기를 바랍니다.  


♪ 찬송 214장 4절    
십자가 든든히 붙잡고 날마다 이기며 나가세

머리에 면류관 쓰고서 주 앞에 찬양할 때까지

예수는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주시니

그의 피 우리를 눈보다 더 희게 하셨네


의로우신 태양이신 예수님의 하신 네 번째 일은 죽은 자를 살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권능을 갖고 계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방금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일으켰습니다. 그 소녀에게 “달리다굼” 하고 명령하셨습니다. “소녀야! 네게 명령하노니 일어나라”입니다.


죽어서 상여 나가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상여를 멈추시고 명령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죽었던 자가 일어나서 앉고 말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다시 돌려주셨습니다. 통곡하며 상여를 따르던 과부 어머니에게 그 아들을 돌려 주었습니다.


무덤에 장사 지냈던 나사로는 4일 만에 무덤을 찾아간 예수님께서 일으켰습니다.  나사로의 생명을 돌려주신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던 그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도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장례를 집례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무슨 병이든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건강을 회복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의로운 태양이신 예수님은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셨습니다.


마음이 병든 사람이 있습니까? 육신이 병든 사람이 있습니까? 주 예수님은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십니다. 

연약하신 분 계십니까? 이 시간 고침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고침받기를 바랍니다. 어떤 병이든 주님은 고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는 자에게 기적이 나타나는 것 입니다.


다음 누구에게 이 복이 주어집니까?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입니다.  
그 뜻은 “스스로 계신 자(I am that I am)”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렵게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경외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세로 나타납니다. 경외는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나타납니다.


애급의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했으므로 히브리 여인들이 출산했을 때 태어난 아이들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태어난 아기가 모세입니다.


경외는 겸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경외는 정직하고 깨끗하며 성결한 생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을 주실 때 엎드려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고넬료는 천사의 지시에 순종하여 베드로를 모셔서 말씀을 듣고 성령 충만을 체험하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은사를 주십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신유, 능력 행함, 예언, 영들 분별함, 방언, 방언 통역함을 주십니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 이름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배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건강을 주실 것입니다.  
모세는 120세가 되어도 눈이 흐리지 않았습니다.  
기력이 쇠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우리 모두 받을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너희는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나가서”라는 말은  

1. 오랫동안 갇혀 있다가 풀려나는 것을 말합니다.  

2. 병에 사로잡혀 있다가 놓여 나는 것을 말합니다.  

3. 귀신에 사로잡혀 있다 놓여나는 것을 말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넷째, 빛은 의(시편 37: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이사야 62:1,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다섯째, 빛은 사랑(요한일서 2: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요한일서 2: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여섯째, 빛은 교제(사귐)(요한일서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시편 90: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골로새서 1: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예레미야애가 3:2
나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빛 안에서 걸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며.

호세아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잠언 13:9
의인은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 빛 앞에서 자기의 죄를 깨닫습니다.
“주를 만날 기회(시편 32:6)”를 난외의 주에서 “죄를 깨달을 때에” 라고 번역합니다. 빛이 되신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만일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인생은 아직 빛 되신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한 인생입니다.

♦ 빛의 특징은 변함이 없습니다(야고보서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 빛은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요한일서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4:16) 
  
♦ 빛은 영으로 존재합니다(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인터넷 자료 ;
http://thesciencelife.com/archives/2500 


요한복음 1장 15절을 개역개정은 “빛이 어두움에 비치니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번역하는데, 여기서 “깨닫다”로 번역된 단어는 “카타람바노”로, “이긴다”라는 말로 번역될 수도 있는 단어이다. KJV는 comprehend(이해하다)로 옮겼지만, NRSV, NIV, ESV 등 주요 현대번역들은 죄다 overcome(이기다)이라고 하여 “이긴다”는 번역을 택하고 있다. 빛과 어두움이 선명하게 대조되며 이원론적 경향이 강조되는 번역이다.

요한복음에는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 위와 아래, 영과 육, 생명과 죽음, 사랑과 미움 등이 명백하게 대조되고 있어, 이원론적인 경향이 강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사상은 아래와 같은 점에서 전형적인 이원론들과는 구별된다.


우리가 “이원론(dualism)”이라고 하는 사상에는 많은 갈래가 있다. 육은 악하고, 영은 선하며 따라서 물질세계를 창조한 신은 열등한 신이라는 식의 영지주의와 그 배경을 이루는 중기 플라톤주의의 사상이 가장 유명하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태초에”라는 말로 창세기의 첫 구절을 상기시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창조의 하나님임을 분명히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1:14)”라는 말로 육체와 물질의 세계를 적극 인정한다. 선과 악의 투쟁과 그 향배가 주요 플롯을 구성하는 것이 우주적 이원론의 드라마라면,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승리가 분명한 싸움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긴장으로 점철되는 이원론적 드라마와는 거리가 있다.


이원론은 세상을 악한 것으로 보고,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권하기도 한다. 사해 지역의 쿰란이라는 동굴 근처에서 집단생활을 한 유대종파가 이런 유에 해당한다. 그들이 남긴 문서에 나오는 빛과 어두움 등의 표현이 요한복음과 많이 겹치기 때문에, 이 두 집단의 사상적 유사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말한다(3:16).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1:29)”이며 “세상의 생명을 위해자신을 내주신 분이다(6:51).”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17:18, 참조 20:21)”라는 말에서처럼 세상 속에서의 실존, 세상을 향한 선교가 강조된다. 요한복음은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을 누구보다 강조하고 있다. “서로 사랑하라(13:34)”는 계명의 빛이 워낙 강력하여 폐쇄적인 종파(sect)로 오해 받지만 요한복음은 외부를 향해 열린 태도를 가진 공동체이다(10:16, 17:20).


본회퍼 목사가 나치 정권과 싸울 때가, 한국교회가 삼일운동에 앞장 설 때가 그랬다. 그러나 현실의 세계는 어둠과 빛을 깔끔히 나눌 수 없을 때가 더 많다.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도 비진리가 있고, 어둠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일말의 진정성이 있을 수 있다.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모든 면에서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말로 지금 어둠에 속한 사람들을 포기하고 눌러 버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깊다. 그래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셨다. 설령 지금 “어둠”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그 “개인”이 얼마든지 예수를 영접하고 빛으로 나아 올 수 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세상의 어떤 영역도 그 통치권에서 양보하지 않으신다는 점에서, 통속적 이원론과 요한복음의 세계이해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어둠에 속한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빛으로 나오도록 초청하기 위해서 이원론의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빛과 어두움의 중간 어디쯤에 속한다. 니고데모로 대표되는 지성인도, 도마로 대표되는 의심 많은 제자도 그렇다. 요한복음이 이원론을 사용하고 있다면 이런 사람들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이원론, 초청하기 위한 이원론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하더라.” 개역개정의 해석도 틀린 해석이 아니라, 여전히 강력한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 이렇게 볼 때 어둠에 있는 사람들은 정복의 대상이기 이전에 빛으로 초청해야 할 사랑의 대상이 된다.

- 박영호 목사(포항제일교회, 전 한일장신대 신약학교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무에서 유의 창조 하나님만의 사역

하나님의 창조 진화론적 사고와 정반대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타난 창조 기사의 내용을 보면 창조의 순서에 있어서 언뜻 모순되어 보이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창세기 1장에는 식물이 먼저 창조되고(11∼12절) 그 후에 사람이 지은바 된 것으로(26∼27절) 기록되어 있는데, 2장에서는 그 순서가 바뀌어 마치 식물이 사람보다 나중에 창조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기록이 있다. 과연 창세기 1장과 2장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으며, 각각의 창조의 순서는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는지 같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창세기 2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창세기 1장에서 나타난 연대기적인 창조의 기술이 2장 3절에 이르러 일단락을 짓고, 그 뒤로 앞의 1장 내용을 보완하며 동시에 에덴동산으로 독자의 시선을 모으게 하는 내용이 따라 나옴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 2장은 창조의 사건을 다음 3장에 나오는 에덴동산에서의 인류의 타락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한다.

 창세기 2장의 성격이 1장에 기록된 많은 창조 내용 중에서 특히 인간의 창조와 에덴동산의 환경을 보완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진다면, 그 안에 기록된 창조의 순서와 내용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2장 5절에 보면 분명히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하여야 할 부분은 ‘들’과 ‘밭’은 동일한 원어에서 나온 단어로서 인간의 농사를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사실은 5절 앞부분에 아직 비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과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기록에 의해 더욱 뒷받침되고 있다. 사실 밭이라는 것은 인간이 타락함으로 얻어진 결과로,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싸우면서 이마에 땀을 흘린 후에야 비로소 먹을 수 있는 식물을 얻어 낼 수 있는 땅의 일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결국 2장 5절에 기록된 내용은 앞서 1장 11∼12절에 기록된 창조의 셋째 날,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으로 표현된 지상의 모든 종류의 식물이 ‘땅’에는 이미 창조되었으나,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땀 흘려 농사지으며 가꾸게 될 ‘밭’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그러면 이번에는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창조의 순서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우선 하나님께서는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지구와 함께 모든 우주에 필요한 구성 물질을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사용된 ‘창조하다’란 뜻의 히브리어 ‘bara’는 무에서 유의 창조를 가리키는 특별한 단어로서 이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지구는 아직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에 있었다(2절). 이제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시고 그 빛을 중심으로 지구를 한 바퀴 자전시키심으로, 저녁이 되며 아침을 오게 하셨고 이는 지구의 첫째 날이 되었다(3∼5절). 여기서 창조된 빛은 태양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우주의 어딘가에서 단지 지구를 비추는 빛의 근원에 대한 창조를 가리킨다고 여겨진다. 둘째 날에는 궁창을 만드시고, 물을 둘로 나눠 궁창 위의 물과 그 아래의 물로 나누셨다(6∼8절). 셋째 날에는 육지가 드러나면서 식물이 만들어진다(9∼13절). 식물은 본래 광합성을 할 때 태양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만, 이 때 창조된 식물은 이미 잎사귀가 무성한 장성한 식물로서 태양이 있기 전에 만들어졌어도 다음 날 태양이 나올 때까지 충분한 양의 에너지가 이미 그 잎사귀에 저장되어 있었을 것이며, 또한 첫째 날 만들어진 보다 근원적인 빛이 지구를 비추고 있으므로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라는 측면에서 하등의 문제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하나님은 놀랍게도 넷째 날에 가서야 비로소 태양과 달과 별을 만드셨는데(14∼19절), 태양에서 지구가 떨어져 나왔다는 식의 진화론적 사고와는 정반대의 순서로 창조를 하셨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제 태양이 창조됨으로써 지구를 비추는 빛의 역할을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이 맡아 하게 된다. 다섯째 날에는, 하늘의 새와 물 속의 생물을 창조하시고(20∼23절), 여섯째 날에 이르러, 땅 위의 모든 생물과 사람을 지으셨다(24∼31절).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6일간에 걸쳐서 창조를 하셨을까? 그 분은 본래 전능하시어서 단 하루 만에도 천지를 지으실 수 있는 분이 아닌가?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제 칠일 째 되는 날 친히 안식을 하심으로, 우리도 하나님처럼 6일 동안 힘써 일하고 7일에는 안식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는 날을 갖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출 20:8∼11). 이것은 매우 중요한 성경적 진리로서, 진화론적 사고에 영향을 받아 창조의 각 하루를 수억 년의 긴 연대로 인식하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6일 창조의 내용이 오히려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가령, 셋째 날 만들어진 식물이 수 억년 동안을 태양도 없이 어떻게 살 수 있었겠는가? 6일의 노동 후 7일째 안식의 개념은 또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수억 년을 안식하셨어야만 된다는 결론이 아닌가? 성경은 창조의 기록에 있어서 분명하다. 창세기 1장은 창조의 순서를 6일 간에 걸쳐 명시하고 2장에서는 초점을 에덴동산으로 모아 3장에서 타락된 존재로서의 우리의 실체를 밝힐 준비를 한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는 인간이 상상하여 쓸 수 있는 종류의 글이 아니다. 여기에 성경의 위대함이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ARTH BEFORE SUN (태양보다 지구가 먼저)

진화론과 창세기의 설명을 조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게 하는 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자주 떠오르는 그러한 문제 중의 하나는 진화론 혹은 장구한 세월 이론에 의하여 요구되는 사건의 순서는 창세기 1장의 서술과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별 진화의 예로, 태양은 지구보다 먼저 형성되었다고 한다. 태양은 우주 안의 물질들의 반복된 응집의 산물이라고 여겨지는데, 이 응집은 핵융합과 결국 노바(신성)들의 폭발로 이어진다. 장구한 세월을 믿는 천체 물리학자들은 지구가 중력에 의하여 수많은 작은 입자들이 결집하여 행성 크기의 집합체를 이룸으로 생성되었다고 제안한다.

성경은 다른 순서를 제시한다. 창조주 첫째 날에 지구가 창조되었고, 이어 우주의 다른 물질들과 빛이 만들어졌다고 말씀한다. 지구가 형체가 없이 텅 빈 상태로 창조되었기에 우주의 나머지 물질들을 여기에 언급한다. 창조의 둘째 날과 셋째 날에 하나님께서 이 지구에 형체를 부여하시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넷째 날까지 하나님께서 태양과 달을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엄격한 진화론자들도 이 단절을 올바르게 보지만, 이것을 이용하여 성경적 설명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진실을 말씀하셨음을 믿는다. 창조에 대한 하나님이 말씀하신 순서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문제의 핵심에 있다.

Although there are those who believe that it is possible to harmonize the theory of evolution with the Genesis account, there are severe problems in attempting to do so. One such problem, which occurs frequently, is that the order of events required by evolutionary or deep-time theories is different from that found in Genesis 1.

For instance, an example of stellar evolution would be that the Sun was formed before the Earth. The Sun is thought to be the product of repeated coagulations of material in the universe, followed by nuclear fusion, and, eventually, explosion by novae. Deep-time astrophysicists suggest that the Earth came about by gravity eventually joining lots of small particles together in a planet-sized conglomerate.

The Bible gives a different order. It states that the Earth was created on the first day of the Creation Week, along with the material of the rest of the universe and light. I refer to the material of the rest of the universe because the Earth was created formless and void. God began to give structure to this Earth on the second and third day of the Creation Week. However, He did not create the Sun, Moon and stars until the fourth day.

Strict evolutionists also correctly see this disconnect, but use it to argue that the biblical account is wrong. We trust God to have told us the truth in His word. God’s order of creation is at heart an issue of the authority of the Bible.

Ref: Taylor, P.F. (2007), The Six Days of Genesis, (Green Forest, AR: Master Books), pp. 33-35.


FOR SIGNS, SEASONS, DAYS AND YEARS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하늘의 별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중요했던 때가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위해서 하늘에 떠 있는 것들에 의존하지만, 이것들은 이제 인위적인 물체들- 지상 위치 탐지나 날씨 관찰과 같은 문제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발사된 인공위성들이다.

옛날에는 별들을 사용하여 길을 찾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충 지구의 북극 위쪽에 북극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이 별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당신이 그 별을 찾았다고 한다면, 당신은 어느 쪽이 북쪽인지를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당신이 지평선 위로부터 북극성의 각도를 측정하면 위도상 어느 지점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밤 동안에 북극성 주위로 나타나서 돌아가는 별들을 관찰하면 몇 시쯤인지 알 수도 있다.

지구가 태양을 돌아가는 궤도 위에서 시간의 변화에 따라 하늘에 나타나는 별들이 변화한다. 이것이 당신이 지구상 어느 곳에 있든지 우리가 종종 여름과 겨울의 별자리들을 이야기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별들이 우리가 일 년 중 어느 계절에 있는지 또 새해가 시작되는 시점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 모든 정보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사용 가능하며, 하늘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기에 그러한 것을 조금 배워둘 만도 하다.

There was a time when the stars in the sky were much more important to us than they are today. We still rely on objects in the sky for signs, seasons, days and years, but they tend to be artificial objects – satellites that have been launched to help with issues such as global positioning and weather monitoring.

In times past, stars would have been used to help people find their way. Most people know that there is a star called Polaris which is pretty much above the Earth’s North Pole, but few know how to find it. When you have found it, then you know which direction is North. Not only that, but if you measure the angle of Polaris above the horizon, then you know what line of latitude you are on. And if you watch the stars appear to move around Polaris during the night, then you will get an idea of what the time is.

Where the Earth is in its orbit around the Sun changes what stars can be seen in the sky at different times. That is why, wherever we are in the world, we often speak of Summer and Winter constellations. So the stars also tell us what season of the year we are in and indeed when the year is about to begin again.

All this information is still available to us, and it is worth learning at least a bit of it because the heavens declare the glory of God.

Ref: Lisle, J. (2010), Telling Time with the Stars, < https://answersingenesis.org/astronomy/stars/telling-time-with-the-stars/ >, accessed 5/29/20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빛과 어두움

요한복음 1장 5절에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빛과 어두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복음 12장 46절에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요한복음 12장 46절에서 빛은 예수를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한복음 12:35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요한일서 2: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요한일서 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한일서 2: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에베소서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이제까지 “빛”을 도덕과 윤리적인 의미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빛이 아닌 것을 “악함” “불의” “거짓”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가르치려는 것이 도덕과 윤리적인 삶에 제한시킨다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분명 기독교와 다른 종교는 같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사람이 신을 향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하나님이 죄인을 향하여 최선을 베풀어 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생명입니다. 단순한 육체적 생명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음을 이기시고 하늘로 올라가실 때 너희가 본 대로 오실 것이라는 부활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빛이란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주일 설교 자료 / 2020. 1.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왜 하나님을 빛이라고 하셨을까요?
이제까지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말 할 때마다 빛을 물리적인 빛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기회에 빛에 대한 성경적 이해 즉 복음적인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살아야 할 것을 의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첫째, 빛은 생명(요한복음 1:4)
④.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시편 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둘째, 빛은 예수 그리스도(요한복음 1:9∼12)
⑨.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⑩.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⑪.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⑫.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한복음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셋째, 빛은 하나님(야고보서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넷째, 빛은 의(시편 37: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이사야 62:1,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다섯째, 빛은 사랑(요한일서 2: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요한일서 2: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여섯째, 빛은 교제(사귐)(요한일서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시편 90: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골로새서 1: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예레미야애가 3:2
나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빛 안에서 걸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며.

호세아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잠언 13:9
의인은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고린도후서 4:6
ㅗ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ㅛ빛을 ㅜ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ㅗ 창세기 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ㅛ 고린도후서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ㅜ 베드로후서 1: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빛의 세 가지 능력
1. 혼돈(混沌) -
2. 흑암(黑暗) -
3. 공허(空虛) -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도 세 가지 능력이 임한다.

고린도후서 4:4
그 중에 ㅍ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ㅎ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ㅏ광채를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ㅑ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ㅍ 요한복음 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ㅎ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ㅏ 고린도후서 4:6,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사도행전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ㅑ 골로새서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빌립보서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히브리서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 혼돈(混沌) -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질서)
2. 흑암(黑暗) -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3. 공허(空虛)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만족)

세 가지 질서(法, 命令)
1. 가정(家庭) - 머리(家長)
2. 교회(敎會) - 목사(牧師)
3. 국가(國家) - 대통령(大統領), 지도자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때는 반대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자유만 확보해주면 누구든지 다 잘 할 수 있다! (황교안 장로)









구약의 하나님 이름

https://biblia.co.il/wp-content/uploads/2020/08/LXX.pdf


히브리어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י (요드), ה (헤이), ו (바브), ה (헤이)라는 네 개의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기록합니다 (Tetragrammaton). 히브리어 성경 뿐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을 יהוה 라고 소개합니다 (참조. 메사 석비). 영어로는 YHWH 라고 쓰지요. 그런데 영어 철자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네개의 글자에는 모음이 없습니다. 굳이 우리 식으로 빗대어 표현하자면,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ㄷㅎㅁㄴㄱㄱ”이라고 써놓은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히브리어는 원래부터 모음이 없었습니다. 모음은 관습처럼 부모의 세대에서 자녀의 세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었거든요.

모음이 없는 히브리어 표기 전통은 곧 매우 난처한 경우를 맞이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은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이 금지 되어 있습니다.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스스로 드러내신 이후에 한번도 불러보지 못한 하나님의 이름 יהוה (요드-헤이-바브-헤이) 는 모세 이후 몇 백년 뒤에 결국 아무도 어떻게 읽는지 모르는 이름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이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그 이름” (히. השם 하쉠), 또는 “주님” (히. אדני 아도나이)이라고 부릅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는 יהוה를 “the Lord” 라고 번역하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유대교의 전통을 따라서 “주님”이라고 번역한 것이지요.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 하나님의 이름 יהוה를 “여호와”라고 읽습니다. 아마 우리 말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렇게 과감하게(?) 부르는 것은 초기 영어 성경 번역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는 듯합니다. 1611년 이래로 영어 성경의 표준이 된 흠정역 (King Jame Version, KJV)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대화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실 때 (출 6:3), 그 이름 יהוה를 Iehovah(Jehovah, 흠정역이 개정되면서 Jehovah로 영어식 표기가 바뀜) 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흠정역을 기준으로 미국에서 번역한 미국표준역 (Amerian Standard Version, ASV)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이름을 Jehovah 라고 번역했거든요. 우리나라로 성경이 전래될 때, 아마 영미권 선교사들을 통해서 그들이 사용하던 성경책의 하나님 이름 Jehovah 를 그대로 음역해서 “여호와”로 표기한 것은 아닐까요? 그럼,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지요. “영어 성경은 어떻게 유대인들도 알지 못한 יהוה 의 모음 음가를 알았을까?” 이것은 매우 쉽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아도나이’ (יהוה, ADONAI)의 모음을 떼어다가 그대로 히브리어 (YAHOWAH)에 적용해서 발음한 것입니다 (참조. 히브리어 ‘요드’ י 는 영어로 Y, I 또는 J 로 환원이 가능함).

그럼, 정말 하나님의 이름 יהוה를 어떻게 읽어야할 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히브리어와 고대 셈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한가지 중요한 고고학 발굴의 도움을 얻었습니다. 오늘날의 시리아에 위치한 고대 에블라 (Ebla, Tel-Mardikh)에서 1974-1976년 사이에 8,000여개의 토판들이 대규모로 발견되었습니다. 이 돌판들은 대략 2,500-2,250 BCE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하는데요. 이 토판들에 새겨진 신들의 이름 가운데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 יהוה를 고대 서아시아식으로 읽을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된 것입니다. 신의 이름이 쓰여진 에블라 토판의 쐐기 문자를 읽으면 ‘이아베일루’ (Ia-á-ve-ilu, Ia-ve-ilu) 또는 ‘이아우움일루’ (Ia-ú-um-ilu) 라고 읽을 수 있는데요. 이 발음에 근거해서 구약 성경의 하나님의 이름을 ‘야웨’ 라고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야웨’라고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증거는 대표적으로 두 개를 더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집트 18 왕조 (약 1550-1295 BCE)부터 지중해 동편 이스르엘 골짜기-아쉬켈론-시나이 반도 지역에 이르는 지중해 동쪽 해변가에 살았던 샤수 (Shasu)에 대한 아멘호텝 3세 Amenhotep III (기원전 14세기)와 람세스 2세 Ramesses II (기원전 13세기)의 기록에서 샤수들이 살던 땅 (가나안)을 가리켜, “야오(를 섬기는) 샤수의 땅” (ta Shasww yhwaw) 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증거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을 위해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성경 사본들입니다. 기원후 3세기 이후에 기록된 그리스어 구약성경에서는 יהוה가 나올 때마다 유대교의 전통을 따라, 그리고 기독교의 교리적인 이유로 하나님의 이름을 ‘쿠리오스’(κύριος, ‘주님’)으로 번역했지만, 기원 이전에 번역된 그리스어 구약성경(DSS 4Q120-4QpapLXXLevb)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그리스어 알파벳 ΙAW (YAW, ‘이아오/야오’)로 바꾸어 쓴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아오/야오’와 비슷한 발음의 ‘야웨’가 하나님의 이름에 조금 더 가까운 발음이 아니었을까요?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는지에 대해서는 정답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어 레위기, 하나님의 이름 (DSS 4Q120-4QpapLXXLevb)E-Book 다운로드


DSS 4Q120-4QpapLXXLevb 라는 말은;



사해바다 주변에서 발견된 두루마리들(DSS) 네번째로 발견된 쿰란 동굴(4Q)에서 120번째로 발견된 성경 (120)

네번째로 발견된 쿰란 동굴 (4Q)에서 발견된 파피루스(pap) 중 그리스어 칠십인역 (LXX) 레위기 (Lev)의 b 버전 (b)


이라는 뜻입니다.


 




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출애굽기 3:15)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20:7)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출애굽기 34:1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이사야 43:10~11)

관련된 하나님 말씀 :

‘여호와’란 내가 이스라엘에서 사역할 때 택한 이름으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저주하며, 사람의 생활을 인도할 수 있는 이스라엘 사람(하나님 선민)의 하나님이자, 크나큰 능력을 지닌 지혜가 충만한 하나님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여호와만이 이스라엘 선민의 하나님이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모세의 하나님이다. 또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당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 족속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호와를 경배하였고, 그를 위해 제단에서 제사를 드렸으며, 성전 안에서 제사장 옷을 입고 여호와를 섬겼다. 그들이 소망하는 것은 여호와의 재현이다.

‘여호와’란 이름은 율법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생겨난 고유한 이름이다. 각 시대, 각 단계 사역마다 내 이름은 대표적 의의가 있고,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의의는 바로 이름마다 한 시대를 대변한다는 것에 있다. ‘여호와’는 율법시대를 대변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이 경배하는 하나님을 일컫는 존칭이며,…

율법 시대에 하나님이 여호와 이름을 취하신 의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약의 하나님 이름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태복음 1:21)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사도행전 4:12)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립보서 2:9~11)

관련된 하나님 말씀 :

은혜시대는 예수의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예수가 직분을 수행하기 시작하자 성령이 그의 이름을 증거 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여호와의 이름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고, 성령은 예수의 이름을 위주로 하는 새로운 사역을 하였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고, 그를 위해 사역하였다. 구약의 율법시대가 끝났다 함은 여호와의 이름을 위주로 하는 사역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이름을 더 이상 여호와가 아닌 예수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성령은 예수의 이름을 위주로 하는 사역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란 본래 임마누엘을 가리키며, 자비와 긍휼이 충만한, 사람을 속량하는 속죄 제물을 의미한다. 예수는 은혜시대 사역을 행했고 은혜시대를 대표하지만, 경륜의 일부 사역만 대표할 수 있다.

오직 예수만이 인류의 구속주이고, 죄에서 인류를 속량한 속죄 제물이다. 다시 말해, 예수란 이름은 은혜시대에서 비롯된 이름이고, 은혜시대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이름이다. 예수란 이름은 은혜시대의 사람들이 거듭나서 구원받게 하기 위해 생겨난 이름이고, 온 인류를 속량하기 위해 생겨난 고유한 이름이다. 그러므로 ‘예수’란 이름은 구속 사역을 대변하고 은혜시대도 대변하는 이름이고, ‘예수’는 은혜시대를 대변하며, 은혜시대에 속량 받은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의 이름이다.

예수의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주님 재림 시의 새 이름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계시록 3:12)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시록 1:8)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 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계시록 11:16~17)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계시록 4:8)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시록 19:6)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계시록 15:3)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계시록 16:7)

하나님의 이름 : 요한계시록 3장, 하나님 이름의 비밀에 대한 나눔

관련된 하나님 말씀 :

여호와, 예수 그리고 메시아는 모두 나의 영을 대표하지만, 이 이름들은 내 경륜의 서로 다른 시대를 대표할 뿐, 나의 모든 것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땅의 사람들이 부르는 나의 이름이 나의 모든 성품과 어떠함을 다 분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단지 시대에 따라 나에 대한 호칭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말세의 시대, 즉 마지막 시대가 도래 하면 나의 이름은 또 바뀌게 된다. 여호와는 물론 예수라고도 칭하지 않고, 메시아라고는 더욱 칭하지 않는다. 대신 크나큰 능력을 갖춘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이라고 칭하는데, 나는 이 이름으로 전체 시대를 끝낸다. 나는 여호와라고 칭한 적이 있고, 사람들에게 메시아라고 불린 적도 있다. 사람들은 나를 우러러 구주 예수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나는 더 이상 사람들이 예전에 알았던 여호와나 예수가 아니라, 말세에 다시 돌아와 시대를 끝낸 하나님이자 나의 모든 성품을 가득 지니고, 권병과 존귀 그리고 영광을 가득 지니고 땅 끝에서 나타난(원문: 興起) 하나님 자신이다. 사람들은 나와 접촉한 적도 없고, 나를 알아본 적도 나의 성품을 안 적도 없으며, 창세부터 지금까지 그 누구도 나를 본 적이 없다. 이러한 이가 바로 말세에 사람들 앞에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은밀히 거하고 있는 하나님이다. 그는 사람들 눈앞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다. 그는 마치 뜨거운 해 같고 불꽃같으며, 능력이 충만하고, 권병을 가득 지니고 있다. 세상의 온갖 것이 나의 말에 심판받고, 불사름 속에서 정결케 될 것이다. 최종에 만국은 반드시 나의 말로 말미암아 복 받기도 하고 산산이 부서지기도 할 것이다. 이를 통해 말세의 모든 사람들은 내가 바로 돌아온 구세주이고, 온 인류를 정복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내가 사람의 속죄 제물이 된 적이 있지만, 말세에는 또 만물을 불사르는 뜨거운 해와 같은 불꽃이 되고, 만물을 드러내는 공의로운 태양임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말세에 행하는 사역이다. 내가 이 이름을 택하고 이런 성품을 지닌 이유는 바로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공의로운 하나님이고 뜨거운 해이자 불꽃임을 알게 하고, 유일한 참 하나님인 나를 경배하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만의 하나님도 아니고 구속주 만도 아니라, 천지와 바다 속 모든 피조물의 하나님인 내 본래 모습을 보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말세 재림 때에도 여전히 예수님으로 불리시는가?

하나님의 이름은 바뀌었지만 하나님의 실질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위의 내용을 통해 하나님은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이 있으셨고, 각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왜 시대 별로 이름을 바꾸셨는지 알고 계신가요? 이는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비밀에 대해 더 알고 싶거나 신앙적인 문제로 고민이 있으신 분은 우측 하단의 창구를 통해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테트라그라마톤
http://blog.daum.net/saintjh/126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ardofjesus&logNo=22018397984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8-12-20(수)

1. 하나님은 창조주 이십니다 - 엘 로힘(Elohim)

2.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 여호와(Jehovah)

3. 하나님은 나를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 엘 로이 (El Roi)

4.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 엘 샤다이( El Shaddai)

5.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 엘 올람( El Olam)

6. 하나님은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 나함(Naham)

7. 하나님은 모든 것 다해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 엘 칸나(Ll Kanna)

8.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 치드케뉴( Tsidkenu)

9. 하나님은 미리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 여호와 이레(Jehovah Jireh)

10. 하나님은 가장 높으신 분이십니다 - 엘 엘리온( El Elyon)

11.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십니다 - 여호와 삼마( Jehovah Samma)

12. 하나님은 은혜 주시는 분이십니다 - 챈(Chen)

13. 하나님은 승리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 여호와 닛시(Jehovah Nissi)

14. 하나님은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 여호와 카도쉬(Jehovah Kadesh)

15. 하나님은 평강이십니다 - 여호와 샬롬(Jehovah Shalom)

16.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 여호와 멜렉(Jehovah Melek)

17. 하나님은 치료자이십니다 - 여호와 라파(Jehovah Rapha)

18. 하나님은 부드러운 분이십니다 - 알룹(Al lup)

19. 하나님은 목자이십니다 - 여호와 로이(Jehova Roi)

20. 하나님은 능력이십니다 - 여호와 체바오트(Jehova Sebaot)

21.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십니다 - 여호와 추리(Jehova Tsuri)

22. 하나님은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 아도나이(Adonai)

23.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 임마누엘(Immanuel)

24. 하나님은 말씀이십니다 -로고스(Logos)

25. 하나님은 용서 하시는 분이십니다 - 암모스(Amnos)

26. 하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입니다 - 자오 히도르( Zao Hydor)

27.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 포스(Phos)

28. 하나님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 프뉴마(Pneuma)

29.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 아가페(Agape)

30.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분이십니다 - 하사(Hasah)

이사야 55:6∽9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2013. has Strong's Concordance
has: hush! keep silence!
Original Word: הָסָה
Part of Speech: Verb
Transliteration: has
Phonetic Spelling: (haw-saw')
Definition: hush! keep silence!
NAS Exhaustive Concordance
Word Origin
a prim. interj.
Definition
hush! keep silence!
NASB Translation
keep quiet (1), keep silence (1), quiet


http://blog.daum.net/teddy5050/1357

이사야 64:1∼9


http://www.immanuelaustin.com/msg/11262017kr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무엇을 해야 하나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하나님이 나에 대해 침묵하시고 돌보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울 수 없어서 포기했다고 이해해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이 상황들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신 분인지 알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들을 제공한다.

크리스천포스트는 최근 기사에서 '많은 어려움에 둘러쌓여 있는데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소개했다. 크리스천포스트는 "하나님께서 내게 침묵하시고 무관심하신 것 같아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는가? 여기에 시험과 시련의 순간에도 여러분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법이 있다"면서 아래와 같이 소개했다.

첫째, 그분의 약속들을 굳게 붙들라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떤 약속도 깨지 않으신다. 그것을 생각하라.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그 무엇이든, 그분은 신실하게 그것을 다 이루신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기 20년 전 그 약속을 받았던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라.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히6:15)"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기까지 하나님을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한다. 그는 신실하시며, 쉽게 약속을 잊어버리는 우리 인간과 같은 분이 결코 아니시다. 민수기 말씀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23:19)"

둘째, 주님을 신뢰하고 선한 일을 행하라

많은 어려움들로 둘러쌓여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 같을 때, 우리는 많은 어려움들을 겪으면서 이를 극복했던 다윗이 전해주는 시편 말씀의 가르침을 듣고 격려 받으며 이에 순종할 수 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37:3-4)"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우리 자신의 방법으로 살아가려는 유혹이 강하게 다가올 때,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며 모든 역경을 우리와 함께 또 우리를 위해 능히 헤쳐나가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알라. 우리를 위해 최선의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에 당신을 복종케 하라.

셋째, 기도를 계속하라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 같을 때, 진정으로 우리가 던져야 할 물음은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지 안 들으시는지가 아니다. 오히려 무슨 일이 일어난다해도 우리가 그분을 끝까지 신뢰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나를 돌봐주시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시험이 올 때, 하나님께서 이미 당신을 위해 행하신 모든 선한 일을 생각하고 그분께 기도하라.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친다.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여호와 이레

 :하나님은 미리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대신 양을 준비해 주셨다. 아브라함은 그 산을 여호와 이레라 이름했다. (창세기 22:14)

 #2

 여호와 닛시

 :하나님은 승리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말렉 사람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모세가 세운 제단에 붙은 이름이다. (출애굽기 17:15)

 #3

 여호와 라파

 :하나님은 치료자이십니다 그분의 뜻에 따라 살면 질병의 고통도 극복하고 치유될 수 있다.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않겠다" (출애굽기 15:26)

 #4

 여호와 샬롬

 :하나님은 평강이십니다 기드온이 여호와로부터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고무의 말씀을 받앗을 때 쌓은 제단 이름이다. (사사기 6:24)

 #5

여호와 삼마(에스겔 48:35)
- 여호와 삼마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에스겔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바벨론 땅을 끌려갔을 때를 배경으로 선포된 말씀입니다.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가지 잘못된 신앙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헛된 희망

곧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둘째는 잘못된 신앙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신에게 무너졌다는 잘못된 신앙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에스겔서는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바벨론 땅으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는 두 가지 잘못을 지적하고 그 잘못을 깨우치기 위해 선지자 에스겔을 통하여 선포한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곧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는 70년이 지나야만 성취될 것이라며 지금은 바벨론 땅에서 바른 신앙을 회복해야 할 때라고 깨우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신과 싸워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로 인하여 죄 값을 치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 땅으로 끌려온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에서만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바벨론 땅의 포로가 된 곳에서도 너희들과 함께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The distance all around will be 18,000 cubits. And the name of the city from that time on will be: The LORD is There. 

여호와 삼마(Jehovah shammah, יְהוָה שָׁמָּה)는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신다.” 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여기서 성읍은 예루살렘 혹은 장차 올 복음시대의 교회를 상징합니다(Easton's Bible Dictionary).


 

  

여호와 삼마라는 복합적인 하나님의 이름을 NIV 영어 성경에서는 “The LORD is There.” 즉 “거기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그리고 그 성의 전체 둘레는 약 9.5킬로미터이다. 사람들은 그 성을 '여호와께서 계시는 성'이라 부를 것이다.” 

일만 팔천척이란 약 9.5km 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10리를 4km 라고 합니다.
9.5km는 25리가 되는 거리라고 하겠습니다.
보통걸음으로 대략 2시간 30분 정도 걸어야 갈 수 있는 거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십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여호와의 영광이 떠난 것을 보았으나, 이제 새로운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토록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할 것을 보았을 때 ‘여호와삼마’하고 외쳤다.

  







----------------------------------------------

♠ 서론 - 신29:29 -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 어린 아이들이 가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아빠, 나는 어디서 나왔어?’ 아빠는 '엄마 배꼽에서 나왔지’ 라고 대답을 합니다. 아이에게는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네가 태어나기까지는 엄마와 아빠는 전쟁과 같은 사랑을 했단다. 어느 날 임신을 하고 엄마는 입덧때문에 무척 고생을 했단다. 엄마의 생식기관 부분에서 너를 빼낼 때 엄마는 무척 고통스러웠으며 아빠의 머리를 붙잡았단다’ 라고 이야기를 다 못합니다. 감 출수 밖에 없습니다. 아이는 이해도 못하고 그 말씀을 감당 하지도 못합니다.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제 이웃 중에 삼형제가 있었는데 한명은 다른 두 명과 조금 다르게 생겼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얼굴이 조금 다르게 생긴 아이는 입양아였습니다. 어렸을 때 입양이 되어서 그 아이는 같은 부모, 같은 형제 인줄 알고 자란 것입니다. 그 입양한 부모님이 입양한 어린아이한테 ‘너는 혈액형이 다른 입양아야’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너는 내가 열 달 동안 배 아파서 낳은 아이가 아니고 복지센터에서 절차를 밟고 데리고 왔단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아이를 위해서 감추거나 알리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도 인생을 살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처음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왜 나는 가난할까? 왜 나는 반장이면서 소풍 갈 때 김밥 하나 못 쌀까? 왜 나는 돈이 없어서 대학을 못 갈까? 왜 나는 친척집에 얹혀 살아야만 할까? 왜 우리 엄마와 아빠는 매일 다툴까? 조금 커서는 왜 나는 불행할까? 왜 나는 자주 꿈에 시달릴까? 나는 왜 툭하면 코피가 날까? 지금은 이제 다 알게 됬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 신앙생활 역시 똑같습니다. 목사님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장로님들도 기도응답을 받는 다고 하고 하지만 볼 때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하나님이 꼭 나에게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게 전부 사실과 진실은 나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나의 유익을 위해서 감추어 두신 것입니다. 신명기 29장 마지막 절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하나님이 감춘 것입니다.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우리가 행하지 못할만한 일들은 감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는 일들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은 하나님께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왈가왈부 불평을 하면 나만 손해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전부 하나님의 시간표를 잘 기다린 사람들이 였습니다.

 

1. 하나님의 침묵을 기다린 하나님의 사람들

▶ 첫번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들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 잘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아브라함 가문이 그랬습니다. 목동 다윗이 그랬습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초대교회 성도님들이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때 하나님께 약속을 받았습니다. ‘네 자손이 많아질 것이다. 그러니 너의 이름을 바꾸어라.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 열국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76세가 되어도 77세가 되어도 응답이 안 왔습니다. 80세가 되어도 응답이 오지 않았고, 90세가 되어도 응답이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습니다. 100세때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그것도 겨우 아들 하나, 이삭을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열국의 아버지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내 사정이지 하나님은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십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40살때 결혼을 했습니다. 60세때 20년만에 쌍둥이를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증손자인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셉의 나이 17살때 하나님이 비전, 꿈을 주셨습니다. ‘네가 세계를 살릴 것이다. 네가 세계의 머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세계를 정복하기보다 형제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노예로 팔렸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결코 하나님이 침묵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비밀이지만 세상적으로 보면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창세기 41장에 ‘드디어 요셉이 총리가 되니 30세 더라’ 13년만에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성취하신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이랬습니다. 목동 다윗은 10대때 사무엘 목사님을 통해서 안수를 받고 왕이 될 것이다 라는 예언을 받았습니다. 골리앗을 꺾을 때만 해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내가 왕이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사울왕으로부터 지시를 받아서 죽음의 고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맹수를 때려잡는 기술 때문에 창을 피할 수 있었고 계속 살아서 도망 다녔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왕이 되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40년간 통치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랜세월동안 도망자 생활을 할 때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 한들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이랬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맞다면 이 비밀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친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200년 동안 핍박과 박해가 일어납니다. 친척이 순교 당합니다. 자녀들이 붙잡혀갑니다. 나까지 순교합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습니다. 세계복음화는커녕 로마복음화도 안되는 것 같습니다. 200년 이상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고 또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끊임없이 속에서 일하셨습니다.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준비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주무시거나 졸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인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정하시고 뜻을 세우신 그 일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조금만 불편해도 원망합니다. 조금만 두려워도 포기합니다. 조금만 내게 불리하면 낙심해버립니다.

 

2. 이스라엘이 통과한 하나님의 인도

▶ 두번째가 이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완벽한 시간표를 갖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 불평, 불신앙, 그리고 포기했습니다. 홍해 앞에서 그랬습니다. 광야를 통과하면서 그랬습니다. 눈 앞에 가나안 땅이 보이는데 가나안에서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권능으로 애굽에 10가지 능력을 베푸십니다. 특별히 마지막 유월절 대기적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홍해 앞에서 주저하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원망에 볼멘소리를 합니다. ‘애굽 땅에는 묘지가 없더란 말이냐. 당신 모세가 우리가 이끌어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냐. 우리를 내버려달라, 우리가 애굽에 돌아가서 애굽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 홍해 앞에서 죽는 것보다 백배 낫다.’ 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미 모세의 믿음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일할 것이다. 여기에 모든 애굽 군사가 수장될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볼 것이라고 모세가 선언했습니다. 홍해바다를 가를 만한 광풍을 준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서 다 빠져나오고 나서 애굽병사들이 수장됩니다. 그 시간표도 하나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이루실 줄 믿습니다.

▶ 출애굽기 14장 광야를 통과하면서 목마르다고 불평불만을 합니다.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에게 우리가 목마른데 어떻게 할까요 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을 목말라 죽게 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왜 구원받게 해서 남들처럼 담배 못 피고 술 못 마시고 파티를 못 가게 합니까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신자들은 마음대로 다니는데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이유로 이것도 저것도 못하니 불신자로 돌아가겠습니다 라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완벽하게 준비하고 이끌어 가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 광야를 통과하고 드디어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 앞에 두고 또 낙심의 소리를 합니다. 민수기 13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자손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이 땅을 네게 주었노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못한다고 불신앙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못 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신앙, 원망, 낙심, 포기했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능력으로 일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돌아가시지 않고 지금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졸거나 주무시지 아니하시고 지금도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연약한 우리의 모습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똑같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아시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다 이룬 것입니다. 왜 불신앙을 하고 인생이 흔들립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을 못 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 단어만 붙잡게 되면 하나님을 만나고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입니다. 한 단어만 붙잡으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인생을 흔들고 불신앙을 하며 망하게 하는 존재가 사단, 마귀입니다. 이 마귀의 일을 멸하신 분이 그리스도입니다. 인류를 위해서 스스로 멸하시고 희생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인간의 모든 불신앙, 모든 원망, 불평, 연약함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입니다. 끝내고 해결하신 것입니다. 오늘 다시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모든 것을 끝내셨습니다. 이 결론이 나오게 되면 고백할 수 있고 자녀들에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 갈라디아서 4장에 보시게 되면 ‘때가 이르매 하나님의 시간표가 되니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라고 말합니다. 창 3:15의 주인공 여자의 후손이 때가 이르러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재앙의 문제, 지옥의 문제, 마귀의 권세를 멸하신 것입니다. 그 사건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인류 최대의 큰 뉴스가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여러분 영혼, 가슴 속에 들어가는 날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여러분이 움직일 때마다 천사가 동원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고 손을 대는 것마다 천군이 동원됩니다. 구원받은 자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생각과 마음, 감정으로 불신앙, 원망, 불평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은 체질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두려워하고 불신앙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 마음 가운데, 내 생각 가운데 불신앙이 밀려오지만 나는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끝내셨습니다. 이런 고백의 한주간, 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생각과 마음, 감정에 불신앙 올 수 있습니다. 단지 여러분의 입술로는 절대로 시인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고백하십시오. 우리 사랑하는 램넌트들이 서밋이 될 것이다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침묵을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목적

▶ 세번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우리를 내버려두시는 시간표가 있는데 왜 그렇게 하실까요? 하나님의 침묵처럼 보이는 시간표를 통해서 우리를 향하여 이루려 하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첫번째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고 우리는 그분의 아들입니다.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 한들 절대적인 관계임을 깨닫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인 하나님, 우리는 자녀라고 하는 절대 불변의 관계를 깨닫고 시인하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심이라, 나의 부모는 나를 버렸지만 여호와께서는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영접하시리로다.’ 믿음이 없는 불신자들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원망, 토로할 수 있지만 우리는 믿음의 고백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 히브리서 13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다, 너희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바울을 통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셨습니다. 절대 변하지 않는 관계입니다. 많은 불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침묵하신다고 말할 때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입으로 시인하여 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십니다.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다 할찌라도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함께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 선하신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믿음의 고백을 하게 해서 흑암세력을 무너뜨리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것을 이루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절대 불변의 관계, 이 축복을 고백할 수 있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 또 한가지는 세상과 사람이 나를 어떻게 하더라도 나의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결국에는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에 합력해서 내게 유익이 되게 할 것입니다. 어떤 모양이 오더라도 내겐 응답이 될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어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모든 상황을 하나님 앞에서 예수 이름으로 시인하고 고백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게 깨닫기 위해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응답으로 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좋은 것으로 옵니다.

▶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경전, 탈무드가 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실화입니다. 유대인들이 랍비를 존경합니다. 가장 존경받는 아카바 라는 랍비가 순례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두워졌습니다. 마을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마을 입구에 작은 오두막채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아무도 없어서 거기에 묵기로 했습니다. 아카바 랍비가 자기가 끌고 다니는 당나귀 한마리와 개 한마리를 오두막집 앞에 묶어두고 오두막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밤에 잠자려고 하는데 잠이 안 왔습니다. 가지고 있던 램프에 불을 키고 책을 읽었습니다. 잠시 후 바람이 불어서 램프 불이 꺼졌습니다. 하는 수 없이 책 읽기를 멈추고 잠을 청했습니다. 아침이 되어 일어나보니 오두막 집 앞에 묶어두었던 당나귀와 개가 맹수에 잡아 먹혀 죽었습니다. 할 수 없이 혼자 램프를 들고 마을에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마을 중심에 이르렀습니다. 놀라운 광경이 벌어집니다. 그 마을 중심에 도둑떼들이 들이닥쳐 모든 사람을 죽이고, 불태우고 모든 물건을 강탈해갔습니다. 모든 것이 폐허가 되어버렸습니다. 아카바 랍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지난 밤에 램프 불이 꺼지지 않았다면 그는 계속 책을 읽었을 것입니다. 오두막 집에 불빛이 보였다면 도둑들이 쳐들어왔을 것입니다. 또한 개와 당나귀가 살아있었다면 개가 짖었을 것입니다. 그 소리에 도둑들이 찾아와서 아카바 랍비를 죽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아카바 랍비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건져낼 수 있었습니다. 이해 안 되는 일이 벌어졌지만 결국엔 중요한 것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완벽한 시간표와 계획을 가지고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소중한 존재,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그냥 태어나 신앙생활 하는 줄로 알고있습니다. 괜히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분명한 이유와 계획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움직이는 것, 부딪치는 것, 만나는 것이 내게 유익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줄로 믿습니다. 세상에서는 내가 외롭고 실패하고 멸망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응답, 인도하시며 승리케 하십니다. 이것을 알고 조금만 누리게 되면 모든 것을 통해 응답받고 성취받고 성공하게끔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과의 동역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데 내가 이룬 것처럼 만들어 주십니다. 그것이 세번째, 하나님의 동역입니다. ‘이 모든 일에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게 하시느니라.’ 세상에서는 버려진 자 같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응답은 반드시 옵니다. 멸망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의 침묵과 같은 순간 속에서도 이루십니다.

 

♠ 결론 - 엡 3:18-19 -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결론을 맺겠습니다. 결론의 말씀은 에베소서 3장 18~19절입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이 넘치는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라.’ 어느 정도로 깨달아야 합니까? 그 너비, 길이, 높이, 깊이가 어떠한 것을 깨달아 하나님의 충만한 것으로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인 저와 여러분들을 모든 부분을 통해 경험케 하고 체험케 하고 깨닫게 하십니다. 더 넓은 뜻을 이루기 위해서 넓은 그릇을 만드는 것입니다. 숨겨진 것처럼,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깊은 의미를 두신 것입니다. 생선 한 마리 요리할 때 어떻게 합니까? 튀김가루를 묻혀서 기름에 튀깁니다. 한 군데만 튀기지 않고 돌려가면서 요리를 해야 잘 익습니다. 하나님께서 전후좌우, 동서남북, 여러가지로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게 하십니다. 속히 응답되는 것도 있습니다. 내 당대에 응답이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까?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계십니까? 그런 법이 없습니다. 완벽하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성도를 위한 하나님의 완벽한 인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시편 13편 1~6절을 다시 한번 보고 마치겠습니다.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 구원을 베푸시고 은덕을 끼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적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하시고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 기도합니다. 지존하신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부족한 종이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언약의 말씀을 전달했습니다. 부디 깨닫게 하시고 승리케 하옵소서. 하나님의 침묵시간표가 하나님의 성도들을 향한 완벽한 인도라는 사실을 믿고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영원히 승리케 하실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파트리스 수요성서학당(2020-07-15)

여호와, 예수, 알파와 오메가

왜 하나님의 이름이 필요한가?

첫째, 이름은 존재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둘째, 이름은 존재 능력 및 가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이름을 갖는 존재를 찾는 것으로 그 이름의 능력과 가치를 깨닫게 합니다.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참조 / 사도행전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셋째, 이름은 구속의 은혜

구약에서 하나님의 대표적인 이름은 “여호와” 라고 합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대표적인 이름은 “예수” 라고 합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알파와 오메가” 라고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문자적인 의미로 소개합니다.
“여호와” 라는 이름은 히브리 알파벳 4자로 표현합니다.
히브리 알파벳은 24자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을 히브리 알파벳으로 “요드(י), 헤(ה), 바브(ו), 헤(ה)” 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것을 “테트라그라마톤(Tetragramaton)” 이라고 합니다.
“테트라그라마톤”은 “네(τετρα, tetra)” “글자(γράμματον, grammaton)”라는 뜻의 헬라어 단어입니다.
“테트라그라마톤”을 우리 말로 “신명사문자(神名四文字)”라고 합니다.
“신명사문자(神名四文字)”란 “신의 이름을 표현하는 문자” 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을 히브리 알파벳으로 “요드, 헤, 와우, 헤” 라고 합니다.
히브리 알파벳은 숫자 값이 있고 상징하는 것이 있습니다.
요드(י)란 알파벳의 숫자 값은 “10”, 상징은 “하나님의 손” “능력”
헤(ה)란 알파벳의 숫자 값은 “5”, 상징은 “보다” “내 쉬는 숨” “생명을 주다”
바브(ו)란 알파벳의 숫자 값은 “6”, 상징은 “못” “연결” “갈고리” “실제화하다” 
헤(ה)란 알파벳의 숫자 값은 “5”, 상징은 “보다” “내 쉬는 숨” “생명을 주다”
여호와 라는 히브리 알파벳의 숫자값은 10+5+6+5=26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라는 히브리 알파벳의 상징은 “하나님의 손을 보라, 못 박힌 손”
따라서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은 출애굽기에서 스스로 있는 자 라고 소개하였지만 감추어진 의미는 장차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속하기 위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할 예수님의 손을 상징으로 예언하며 계시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여호와라는 이름을 계시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돌보며 호렙 산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떨기나무에서 불이 타올랐습니다. 모세는 들판에서 가끔 일어나는 들불인 줄 알았으나 불이 꺼지지 않아 가까기 다가갔을 때 음성이 들렸습니다.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를 부르셨던 하나님은 모세를 애급에서 고통 받고 신음하며 부르짖는 히브리 백성들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아직도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출애굽기 3:11∼15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여호와” 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영원한 이름입니다.
“여호와” 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이름)니라.

영원한 이름을 바뀔 수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
이름이 바뀐 것일까요?
아닙니다. 발음은 다르게 표현하지만 이름이 갖는 속뜻 본래의 의미는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예수라는 이름은 곧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깨우쳤습니다.

요한복음 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한복음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 하는 것이어늘. 

요한복음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요한복음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한복음 17:11∼12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알파와 오메가”

알파와 오메가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헬라어 알파벳의 첫 문자 “알파”와 마지막 문자 “오메가”를 말합니다. 알파벳을 시작하는 첫 문자와 마지막 문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구약에서 여호와로 불렀고 신약에서 예수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이름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첫 번째 이름이며 또한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마지막 이름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창세기 : 이스라엘의 선택(12: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출애굽기 : 이스라엘의 구원(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레위기 : 이스라엘의 성화(11:44-45) cf. 베드로전서 1:15-16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 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급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cf.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민수기 : 이스라엘의 연단(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신명기 : 이스라엘의 경고(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나님의 이름은 사람의 수용 능력과 인류의 언어에 따라 불리지만, 사람이 이 이름을 개괄할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행하셨던 사역은 히브리백성들을 중심으로 나타내셨다면 예수라는 이름으로 행하셨던 사역은 모든 백성들을 중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본체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사역을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이름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시대마다 하는 사역이 모두 똑같고 모두 동일한 이름으로 불린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겠느냐? 하나님은 여호와로 불려야 하고, 여호와만이 하나님이고 다른 이름으로 불리면 하나님이 아니라고 인식할 것이다. 혹은 예수만이 하나님이고 예수라는 이름 이외의 다른 이름으로는 불릴 수 없으며, 예수 외에 여호와나 전능하신 하나님도 하나님이 아니라고 여길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하는 하나님이셔.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하는 하나님이시니 예수라 불려야 해.’라고 생각한다. 너의 이런 생각은 규례를 지키는 것에 불과하고, 하나님을 어떤 범위 내에 제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시대마다 행한 사역과 불린 이름, 그가 지닌 형상과 그가 행한 각 단계의 사역은 지금까지 어떤 규례도 따르지 않고 어떤 제한도 받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여호와이지만 예수이기도 하고 메시아이며 전능하신 하나님이기도 하다. 그의 사역이 바뀜에 따라 그의 이름도 변하지만, 어떤 이름도 그를 완전하게 대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불린 이름은 모두 그를 대표할 수 있고, 그가 시대마다 하는 사역은 모두 그의 성품을 대변한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새로운 사역을 하고 새 이름으로 불린다. 시대가 다른데 어찌 같은 사역을 행하겠느니? 어떻게 낡은 것을 지키겠느냐? ‘예수’란 구속 사역을 위해 취한 이름인데, 말세에 그가 재림할 때에도 이 이름으로 불릴 수 있겠느냐? 또다시 구속 사역을 하겠느냐? 여호와와 예수는 하나인데도 왜 서로 다른 시대에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렸느냐? 사역한 시대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냐? 이름 하나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있겠느냐? 그렇기에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 시대는 이름에 의해 바뀌고, 이름으로 시대를 대변한다. 어떤 이름도 하나님 자신을 완전하게 대변할 수 없으며, 또한 시대성을 띤 그의 성품만을 대변하고 사역을 대변할 수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에 적합한 이름 하나를 택하여 전체 시대를 대변할 수 있다.』

예수가 행한 사역은 예수란 이름을 대변한 것이자 은혜시대를 대변한 것이고, 여호와가 행한 사역은 여호와를 대변한 것이자 율법시대를 대변한 것이다. 그들의 사역은 한 분의 영이 서로 다른 두 시대에 행한 사역이다. 예수가 행한 사역은 은혜시대만 대변하고, 여호와가 행한 사역은 구약 율법시대만 대변할 뿐이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과 애급 백성을 인도했고, 이스라엘 외의 족속들도 인도했다. 신약의 은혜시대에 예수가 행한 사역은 하나님이 예수의 이름으로 사역하며 시대를 이끈 것이다. 서로 다른 두 이름으로 불렸지만, 한 분의 영이 두 단계의 사역을 한 것이다. 그 사역은 계속 이어진 것이었다. 이름과 사역의 내용이 다르기에 시대 역시 다르다. 여호와가 오면 여호와의 시대이고, 예수가 오면 예수의 시대이다. 그러므로 일단 오게 되면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고, 하나의 시대를 대표하며,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데, 그 단계의 새로운 길이 하나의 이름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은 언제나 새롭고, 그의 사역은 끊임없이 발전함을 의미한다. 역사(歷史)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하나님의 사역도 끊임없이 발전한다. 6천년 경륜을 완수하려면 반드시 끊임없이 발전하면서 날마다 해마다 새로운 사역을 해야 한다. 또한 새로운 길과 신기원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역과 더 큰 사역도 개척해야 한다. 그에 따라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사역이 나타나게 된다.


"여호와"란 내가 이스라엘에서 사역할 때 택한 이름으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저주하며, 사람의 생활을 인도할 수 있는 이스라엘 사람(하나님 선민)의 하나님이자, 크나큰 능력을 지닌 지혜가 충만한 하나님임을 의미합니다.

"예수"란 본래 임마누엘을 가리키며, 자비와 긍휼이 충만한, 사람을 속량하는 속죄 제물을 의미합니다.

예수는 은혜시대 사역을 행했고 은혜시대를 대표하지만, 경륜의 일부 사역만 대표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여호와만이 이스라엘 선민의 하나님이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모세의 하나님, 또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 족속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호와를 경배하였고, 그를 위해 제단에 제물을 드렸으며, 성전 안에서 제사장 옷을 입고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그들이 소망하는 것은 여호와의 재현입니다.

오직 예수만이 인류의 구속주이고, 죄에서 인류를 속량한 속죄 제물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란 이름은 은혜시대에서 비롯된 이름이고, 은혜시대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이름이다. 예수란 이름은 은혜시대의 사람들이 거듭나서 구원받게 하기 위해 생겨난 이름이고, 온 인류를 속량하기 위해 생겨난 고유한 이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란 이름은 구속 사역을 대변하고 은혜시대도 대변하는 이름이고, ‘여호와’란 이름은 율법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생겨난 고유한 이름입니다.

각 시대, 각 단계 사역마다 내 이름은 대표적 의의가 있고,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의의는 바로 이름마다 한 시대를 대변한다는 것에 있다. ‘여호와’는 율법시대를 대변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이 경배하는 하나님을 일컫는 존칭이며, ‘예수’는 은혜시대를 대변하며, 은혜시대에 속량 받은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의 이름이다. 사람들이 말세에도 구주 예수가 강림하기를 소망하고, 유대인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서 강림하기를 소망한다면, 전체 6천년 경륜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구속시대에 머물 것이다. 또한 말세가 영영 도래하지도 않고, 시대를 끝내지도 못할 것이다. ‘구주 예수’는 단지 인류를 속량하고 구원하는 분이고, 내가 택한 ‘예수’란 이름은 단지 은혜시대의 모든 죄인을 위해 생겨난 이름이지 온 인류를 끝내기 위해 생겨난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호와, 예수 그리고 메시야는 모두 나의 영을 대표하지만, 이 이름들은 내 경륜의 서로 다른 시대를 대표할 뿐, 나의 모든 것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땅의 사람들이 부르는 나의 이름이 나의 모든 성품과 어떠함을 다 분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단지 시대에 따라 나에 대한 호칭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말세의 시대, 즉 마지막 시대가 도래 하면 나의 이름은 또 바뀌게 된다. 여호와는 물론 예수라고도 칭하지 않고, 메시야라고는 더욱 칭하지 않는다. 대신 크나큰 능력을 갖춘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이라고 칭하는데, 나는 이 이름으로 전체 시대를 끝낸다. 나는 여호와라고 칭한 적이 있고, 사람들에게 메시야로 불린 적도 있다. 사람들은 나를 우러러 구주 예수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나는 더 이상 사람들이 예전에 알았던 여호와나 예수가 아니라, 말세에 다시 돌아와 시대를 끝낸 하나님이자 나의 모든 성품을 가득 지니고, 권병과 존귀 그리고 영광을 가득 지니고 땅 끝에서 나타난(원문: 興起) 하나님 자신이다. 사람들은 나와 접촉한 적도 없고, 나를 알아본 적도 나의 성품을 안 적도 없으며, 창세부터 지금까지 그 누구도 나를 본 적이 없다. 이러한 이가 바로 말세에 사람들 앞에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은밀히 거하고 있는 하나님이다. 그는 사람들 눈앞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다. 그는 마치 뜨거운 해 같고 불꽃같으며, 능력이 충만하고, 권병을 가득 지니고 있다. 세상의 온갖 것이 나의 말에 심판받고, 불사름 속에서 정결케 될 것이다. 최종에 만국은 반드시 나의 말로 말미암아 복 받기도 하고 산산이 부서지기도 할 것이다. 이를 통해 말세의 모든 사람들은 내가 바로 돌아온 구세주이고, 온 인류를 정복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내가 사람의 속죄 제물이 된 적이 있지만, 말세에는 또 만물을 불사르는 뜨거운 해와 같은 불꽃이자 만물을 드러내는 공의로운 태양임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말세에 행하는 사역이다. 내가 이 이름을 택하고 이런 성품을 지닌 이유는 바로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공의로운 하나님이고 뜨거운 해이자 불꽃임을 알게 하고, 유일한 참 하나님인 나를 경배하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만의 하나님도 아니고 구속주만도 아니라, 천지와 바다속 모든 피조물의 하나님인 내 본래 모습을 보게 하기 위함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https://www.light-of-truth.org/bible-verse-about-God-s-name.html 


성경에 시대별로 하나님의 이름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세 개의 이름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여호와’, 신약시대의 '예수',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왜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시대마다 다르게 소개되었을까요?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 때에 알았더라면.........”


지난 수요일 “박원숙 같이 삽시다!” 라는 프로를 보면서 호스트인 탈랜트 박원숙씨가 거주하는 남해안 집에 최근 이혼했다는 가수 한 사람과 배우 두 사람이 모여서 며칠을 같이 지내는 프로인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방영하는 날이라 첫날 일정을 마치고 모두 함께 모여 지난 이야기를 하던 중 공통된 생각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 때 알았더라면 지금 이러지는 않았을 텐데...”


하나님의 이름을 일찍 알았더라면 이렇게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 이름은 “여호와”


출애굽기 3:13∼15

⑭.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⑮.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⑯.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신약에서 하나님 이름은 “예수”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빌립보서 2:9~11

⑨.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⑩.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⑪.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 이름 “알파와 오메가”


요한계시록에서 소개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살펴보기 전에 “종말론(終末論)”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종말론에 대한 생각을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첫째는 개인적 종말론


개인적 종말론이란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태어났다가 이 세상에서 죽습니다.

단 에녹과 엘리야는 이 세상에서 태어났다가 죽음을 경험하지 얺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둘째는 우주적 종말론


우주적 종말론이란 부활 승천하셨던 예수님께서 재림의 주가 되셔서 다시 세상에 오셔서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개인적 종말론 우주적 종말론 모두 그 마지막 시간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전천년설


역사적 전천년주의 : 환난이 일어나고 예수님의 재림이 임하여 천년왕국이 시작된다.


세대주의적 전천년 : 환난 전에 휴거가 일어나고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며 재림이 일어난다.

대부분의 이단들이 주장하는 내용이라고 하겠다.


무천년설

천년 왕국은 없다.

재림 시에 인류에 대한 심판이 있고 의인과 악인으로 구분될 것이다.


후천년설

천년 왕국 후에 재림하신다(토마스 아퀴너스)


마가복음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종말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

종말은 복음의 핵심이다.


요한계시록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처음과 나중


요한계시록 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요한계시록 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여호와를 영어로 “제호바(Jehovah)” 라고 합니다.
히브리 알파벳으로는 “요드, 헤, 와우, 헤”로 구성됩니다.

“여호와(JEHOVAH)”
렛셀과 러더포드에 의해서 과장되었다.
신학자들은 “여호와”를 “테트라그라마톤(Tetragramaton)” 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 알파벳 자음 네 개로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여호와” 라는 이름은 히브리 알파벳으로 “요드, 헤, 와우, 헤”로 구성됩니다.
이 단어는 맛소라들의 히브리어 모음 부호들이 제시되지 않으면 그 단어가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은 발음을 표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모음부호 하텦, 파타, 카메츠를 붙여 “아도나이(Adonai)”라고 읽었습니다.
때때로 “테트라그라마톤” 밑에 “엘로힘”에 해당하는 모음부호 “하텦, 쎄골, 히렉”을 붙이기도 하지만 그때에도 여전히 “아도나이(주)”라고 읽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발음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발음이 “여호와(Jehovah)” 라고 합니다. (영어에는 히브리어 “요드”에 해당하는 글자가 “J”라고 합니다. “지저스(Jesus)”는 다른 언어에서는 “예수스” 또는 “야수스”로 발음합니다.)

맨슨스(Masons)는 여호와를 “요호(Yoho)”, “야후(Yahoo)”, 또는 “요후(Yohoo)”로 제안합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연스럽게 “야훼(Yaweh)”라는 말을 선호하는데 이 말은 모세가 만들어낸 사막 뒤쪽에 있는 “민족 신(Tribal god)” 또는 “산신(Mountain god)”의 의미로 신성을 격하시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어떤 저술가나 주석가, 강연자, 작가, 또는 성경 개정자도 “야훼”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아! 저 사람은 자유주의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거나 자유주의 성향이나 기질이 있구나!” 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질이 부족한 자들입니다(삼상 2: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또한 이 구절은 중요한 구절들로서 다음의 사항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1. NEW ASV(1963)는 밥 존스 대학에서 추천하는 성경인데, 구약에서는 명확하게 “여호와”라는 말을 사용해 놓고, 여호와의 증인들이 출판하는 “신세계 역본(New World Translation)”과 같이 신약에서는 그 여호와라는 말을 모두 제거해 버렸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서 보면 요한계시록 19:16과 출애굽기 6:2이 전혀 연관이 될 수 없다. 설상가상으로 요한복음 1:18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피조된” 신으로 만들어 놓아 NEW ASV는 찰스 테이즈 러셀(1852-1916)에게 배알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2. “킹제임스성경”은 히브리 맛소라 본문에서 그 말을 다루는 것과 같은 방법을 취한다. 즉, “여호와”가 나오면 “주(LORD)” 라는 단어를, “아도나이”나 다른 말이 나오면 “주(Lord)” 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3. 여호와의 증인들은 본문을 시편 83:18과 연결시켜 시편에서 말하는 의미가 “그 이름이 하나뿐인 여호와(Whose name is JEHOVAH-alone)” 라고 오해하도록 조장한다. 그래서 여호와 이외의 다른 이름은 용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물론 터무니없는 말이다. 성경에는 “여호와” 라는 이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11개의 다른 이름들이 있으며,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 “예수” 라는 이름은 “"여호와”가 아니다. (예로 엘, 엘로아, 여호와, 엘로힘, 엘리욘, 엘리욘 엘 등)

4. 20세기의 어떤 정통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생아이고, 마귀에게 사로잡혔다고 믿는다. 또 치유의 “기적들”을 “테트라그라마톤”을 사용하여 실행한다고 믿는다. 예수님께서 이 마법의 이름을 대제사장으로부터 훔쳤다고 믿는 것이다.

5.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요한복음 5:19, 8:58에서 “여호와” 바로 그 이름이라고 주장하시는 데 대해 여호와의 증인들이 매우 당황해하는 구절이다(출애굽기 3:14 주석 참조). 이렇듯 본문에는 핵폭탄이 장전되어 있다. 정통주의 주석가들이 해석하는 전형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다.

“...네가 언약 관계에 있는 내 백성에게는 이 이름을 알리지 아니하였다.”

상식선에서만 보더라도 모세는 창세기를 기록할 때 창세기 본문에 “여호와”라는 이름을 기입해 넣었다.

“여호와” 라는 이름은 분명히 “모세”에게 알려졌고 모세는 그 이름을 적절하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이 문제에 대한 가장 명백한 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표면상으로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학자들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이보다 더 단순한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답을 얻지 못한다면 학자로서는 고귀한 부름에 부응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지한 자세로 “깊은 것들”에 목말라 한다면 “E, D, P, J" R? 등이 파내려갔던 석회 동굴보다 값진 다이아몬드가 묻힌 “킹제임스성경” 본문으로 안내하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경적 역사관
http://m.newspower.co.kr/a.html?uid=45045



성경의 분류 방식

첫째, 유대교(타나크, TaNaK)
둘째, 기독교(성경, Bible)

유대교식 분류

토라(율법서)
- 신명기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느비힘(선지서)
- 말라기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케투빔(성문서)

유대교식 분류

모세오경 :
선지서
- 전기 :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 후기 :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소선지서(12권)
성문서 : 시편, 욥기, 잠언, 룻기, 아가, 전도서, 예레미야애가, 에스더,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서

기독교식 분류
모세오경
역사서
시가서
선지서

* 유대교에서는 다니엘서를 지혜서로 분류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선지서라고 한다.


천상지천(天上地天)

최근 한국 사회에 젊은이들을 현혹하는 이상한 카페가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카페 운영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내가 그 옆에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이런 궤변을 늘어놓으며 젊은이들을 유혹하여 철저하게 온라인상에서 회원 중심으로 운영을 하고 필요할 때는 오프라인으로 어느 곳에 모여 함께 교제를 갖는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이 모이면 “전 세계에서 모든 정답의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야!”하고 말 하는데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모두 동조한다고 합니다.

* 온라인으로 세상을 구원하라!
(OnSeGu)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할수록 성경을 읽을 때 나도 모르는 습관이 몸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족보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대한 말씀은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을 찾아 올라가는 방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누가복음의 족보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


* 성경에서 “전염병(傳染病)” 또는 “염병(染病)” 이라고 하는 것을 영어 성경에서는 “pestilence” “pest” “plagues” 라고 한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국제보건기구에서는 “팬데믹(pandemic)”이라고 하였다.

전염병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솔로몬 왕이 성전 건축을 마쳤을 때 솔로몬에게 계시하셨던 말씀입니다.

역대하 7:11∼14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을 마치고 솔로몬의 심중에 여호와의 전과 자기의 궁궐에 그가 이루고자 한 것을 다 형통하게 이루니라.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 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성전을 삼았으니.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민수기 14:12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I will strike them down with a plague and destroy them, but I will make you into a nation greater and stronger than they.

역대하 7:11∼14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을 마치고 솔로몬의 심중에 여호와의 전과 자기의 궁궐에 그가 이루고자 한 것을 다 형통하게 이루니라.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 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성전을 삼았으니.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창조과학회

코로나 바이러스는 치사율과 함께 무엇보다도 전염 속도가 빠른 것이 위협적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전염병’ 현상인 팬데믹(pandemic)으로 선언 하였다.

전염병은 성경에도 여러 번 언급된다. 개역개정 성경은 ‘전염병’ 또는 ‘염병’으로 번역되었으며, 영어로는 pestilence, pest, plagues 등으로 번역 되었다. 모두가 비슷한 단어이다. 또한 질병이나 재앙 등의 일종으로 전염병이 등장한다.

하나님을 떠났을 때 사용하시는 전염병

성경에서 전염병의 첫 등장은 출애굽 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고, 언약을 배반할 경우,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게 될 것을 경고하셨다. 그런데도 주의 말씀을 청종치 않으면, 앞의 징벌에 일곱 배를 더하며, 그래도 여전하면 이에 일곱 배를 또 더하며 이때 ‘전염병’도 함께 보낸다고 경고하셨다(레 26:1∼26).

다른 한 번은 출애굽 동안에 가나안 땅에서 정탐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이다. 정탐꾼들이 ‘거주민들은 신장이 장대한 자신들보다 강하기 때문에 이길 수 없다’는 허약한 말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모세에게 항의했을 때, 하나님께서 ‘내가 전염병으로 이 백성을 쳐서 멸하겠다고’고 진노하셨다. 그러나 모세의 간곡한 간청으로 전염병의 시행을 거두셨다(민 14:12).

이처럼 전염병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경고하실 때 여러 번 등장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잊고 악을 행하면 전염병으로 멸한다고 하셨다(신 28:21). 선지서에 보면 하나님을 잊고 악을 행할 때에‚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멸하겠다‛(렘 14:12)와 동일한 구절이 수십 번이나 등장한다. 칼, 기근, 전염병 모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며 전염병도 그 중에 하나였다. 대상이 단지 이스라엘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예루살렘을 벌한 것 같이 애급 땅에 사는 자들을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벌하리니”(렘 44:13), “선지자들이 예로부터 많은 땅들과 큰 나라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렘 28:8)와 같이 다른 나라에도 동일하게 사용하신다. 예수님께서 세상 끝의 징조를 언급하실 때도 전염병이 등장한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 21:10, 11).

하나님께서 전염병을 실제로 시행하셨던 기록들도 있다. 반역자인 고라 자손이 멸망한 후에 회중들이 이 사건에 대하여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 이때 주님께서 진노로 전염병을 일으키어 14,700명이 죽었다(민 16장). 또한 이스라엘이 싯딤 에서 머물 때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고, 그들 나라의 바알 신들에게 절하였을 때 전염병으로 24,000명이 죽었다(민 25장). 다윗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인구조사를 했을 때의 조치로 사흘 만에 70,000명이 전염병으로 죽었다(삼하 24:15; 대상 21:14). 전염병으로 죽은 이 숫자는 당시 인구를 고려하면 아주 높은 것이다. 시편 기자의 “진노로…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붙이셨다”(시 78:50) 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죽이는 방법의 하나로 전염병을 사용하셨다.

전염병에서 건지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전염병을 일으키시기도 하지만 전염병에서 건져내거나 그 치시며 자신의 능력과 성품을 드러내기도 하신다.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전염병이 있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든지 막론하고… 성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주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시며”(왕상 8:37; 대하 20:9). 이에 대하여 시편 기자는 “그가 심한 전염병 에서 건지실 것이 기에…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다가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하지 못하리로다” (시 91:3-7)라고 하며 전염병과 재난 가운데 피난처 (시91:9) 되신 주님을 의지했다. 실제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셨다”(눅 7:21).

앞서 언급했던 다윗의 인구조사로 사흘간 70,000명이 전염병에 죽었을 때 천사가 예루살렘까지 다가와 멸하려 하는 순간이었다. 이때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셨다(삼하 24:16). 이때 다윗이 기도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을 때에 전염병 재앙이 그쳤다(삼하 24:25). 전염병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었던 것이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 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 하심을 받으리라”(약 5:15)와 같이 주님은 우리의 관계를 통해 병마로부터 구원하신다.

전염병의 의미와 우리의 자세

전염병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행하시는 징벌의 수단 중 하나이다. 그러나 전염병의 이런 무서운 모습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모습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다.” 라고 하는 감탄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좋았던 상황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부터 모든 피조물이 저주 아래 있게 되며 가시덤불과 엉겅퀴, 고통과 피 흘림으로 반전된다. 그렇다면 전염병도 범죄 후에 등장한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를 포함한 모든 재앙은 실제 역사인 성경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왜 이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지’ 성경을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회복된 때를 더욱 사모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이런 어려운 상황은 문제의 해결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전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인간이 해결 불가능한 문제에 봉착하는 어려움에 닥쳤을 때 오히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그 중 몇 사람을 남겨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서 벗어나게 하여 그들이 이르는 이방인 가운데에서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자백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겔 12:16)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전염병을 포함한 고통스러운 상황을 통해 자신을 모르던 자들에게 복음이 전달되는 기회로 삼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떡을 주시든지 재앙을 주시든지 그 마음은 언제나 더 많은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것이다.

아울러 크리스천들은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시 41:1)의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자들을 돌보아야 한다.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가 더 퍼지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사회적 거리 두기와 외출과 모임을 자제하는 등 전염병 억제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그때야 예수님의 복음을 훨씬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전염병의 의미가 하나님의 경고라고 할지라도 보다 심하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가나 사람에 대하여 섣부르게 판단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예를 들면 ‘저 나라나 사람이 어떤 잘못을 했기 때문에 전염병이 더 크게 퍼졌다’는 식이다.

예수님께서‚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4,5) 말씀하셨다. 재앙은 죄악이 들어온 세상에서는 주님의 계획안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며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사람이 함부로 정죄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전염병은 그 이유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오늘날 겪고 있는 재앙은 구체적인 이유를 알 수 없다. 즉 큰 그림에서는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각 나라와 개인이 겪고 있는 이유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의도는 우리가 섣불리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교회와 크리스천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점이다. 교회만이 하나님을 알고 진리인 성경이 있기 때문이다. 구약의 대부분은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것이며, 신약은 교회에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전염병에 관한 성경의 예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우리 손에 성경이 있기에 가능했다. 교회 밖에서는 아무리 고민해도 이번 사태의 큰 그림과 극본 문제를 알 수 없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administration)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엡 3:9∼10)와 같이 전염병과 같은 어려움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도 교회를 통해서 알리고 싶으신 것이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집안에서 가족끼리 함께 하는 시간이 훨씬 길어졌다. 함께 성경을 보는 기회로 삼기를 적극 추천한다. “너희 뒤에 일어나는 너희의 자손과 멀리서 오는 객이 그 땅의 재앙과 여호와께서 그 땅에 ‘유행시키시는 질병’을 보며… 묻기를,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땅에 이같이 행하셨느냐 하면…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버리고… 여호와께서 이 땅에 진노하사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재앙을 내리셨다”(신 29:22∼27).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유행병’을 내리신 이유는 나중에 자손들이 그 이유를 물어볼 때 조상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겼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라고 하시며 이 일들은 단지 조상뿐 아니라 우리와 자손들에게도 영원히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하셨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다음 세대에게 성경에 대한 믿음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는 거짓의 아비인 사탄(요 8:44)이 가장 적극적으로 막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처럼 ‘성경이 곧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어려움을 통해 복음의 진리가 각자의 마음에 새겨지고 다음 세대와 이웃에게 영원한 언약이 담겨있는 성경을 전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왜 시대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다르게 불렀는가?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각종 동물들과 새들을 만드시고 아담에게 보여주었을 때 아담이 부르는 것이 그 동물과 새의 이름이 되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아버님이 직업 군인으로 부대가 있는 지방에서 거주하셨고 저희들은 어머니와 서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집에서는 저녁에는 모든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하지만 저희들은 아버지가 함께 거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어머니와 동생들과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나 오늘 아버지를 봤다!” 라고 말을 했더니 모두들 “언제, 어디에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남의 아버지!” 라고 말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남의 아버지는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런 것을 존재 가치라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면 하나님 아버지 라 하고 불렀을 때 하나님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첫째는 이름은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이름은 부를 때에 존재 가치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제일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불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도입이야기
- 인도의 우화 또는 불경의 가르침에 “소경과 코끼리”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한 두 번씩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들에게 코끼릴 직접 만져보게 한 후에 너희들이 직접 만졌던 코끼리는 무엇과 같은가? 라는 질문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여러 시각장애인들은 “코끼리는 마치 무슨 큰 송곳과 같다” 이것은 코끼리의 상아 이빨을 만졌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코끼리는 무슨 밧줄과 같다” 이것은 코끼리의 꼬리를 만졌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코끼리는 무슨 부채와 같다” 이것은 코끼리의 귀를 만졌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코끼리는 무슨 기둥과 같다” 이것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졌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코끼리는 무슨 커다란 벽과 같다” 이것은 코끼리의 몸통을 만졌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소경과 코끼리의 이야기에서 코끼리의 다양한 모양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이제까지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마치 소경이 코끼리를 만졌던 이야기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리의 코끼리에 대한 부분적인 이야기와 한 하나님에 대한 제 각기 다른 경험의 이야기는 실체는 하나이지만 느끼는 방법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온전한 하나로 계시지만 하나님을 알고 만나고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시대마다 하나님을 불렀던 이름이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다르게 알려지고 불렸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 것은 각 사람의 환경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육체의 질병에 시달리던 사람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은 병을 고쳐주신 하나님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육체의 질병만 고쳐주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의사와 같다고 말할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면 배가 고파 굶주린 사람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은 먹을 것을 제공하신 하나님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먹을 것만 주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주방장과 같다 또는 요리사와 같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다양한 이름들 중에서 “임마누엘” 이란 이름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임마누엘이란 이름으로 하나님을 완전하게 계시하고 나타낼 수 있을까요?

어떤 이름도 하나님을 완전하게 대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많지만, 많은 이름들조차도 그의 모든 성품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람들이 완전히 알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합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성품이 완전하게 드러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로 하나님을 정의하고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하다, 지혜롭다, 사랑이시다, 존귀하다, 기묘자, 공의롭다 등과 같은 말로 설명할 뿐입니다.

언어 표현력이 절정에 이르렀지만, 사람은 아직도 분명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어떤 이름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어떠함은 너무나 많은데, 사람의 언어는 너무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단어 하나와 특정한 이름 하나로 하나님의 전부를 전혀 대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거룩하기 때문에 시대에 부합하는 이름으로 자신의 사역을 개괄하고, 시대적 의의를 지닌 특정한 이름으로 그의 시대별 성품을 대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을 인류의 언어로 표현하도록 나타내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의 신비한 영적 체험에 갇혀 그 체험을 갖고 일생동안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나에게 “도대체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가?” 라고 질문을 한다면 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다른 어떤 말로 설명을 다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궁금증을 갖고 살아가기 때문에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히브리 백성들에게 특별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이때 계시하셨던 대표적인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사람의 수용 능력과 인류의 언어에 따라 불리지만, 사람이 이 이름을 개괄할 수는 없다.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행하셨던 사역은 히브리백성들을 중심으로 나타내셨다면 예수라는 이름으로 행하셨던 사역은 모든 백성들을 중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본체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사역을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이름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시대마다 하는 사역이 모두 똑같고 모두 동일한 이름으로 불린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겠느냐? 하나님은 여호와로 불려야 하고, 여호와만이 하나님이고 다른 이름으로 불리면 하나님이 아니라고 인식할 것이다. 혹은 예수만이 하나님이고 예수라는 이름 이외의 다른 이름으로는 불릴 수 없으며, 예수 외에 여호와나 전능하신 하나님도 하나님이 아니라고 여길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하는 하나님이셔.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하는 하나님이시니 예수라 불려야 해.’라고 생각한다. 너의 이런 생각은 규례를 지키는 것에 불과하고, 하나님을 어떤 범위 내에 제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시대마다 행한 사역과 불린 이름, 그가 지닌 형상과 그가 행한 각 단계의 사역은 지금까지 어떤 규례도 따르지 않고 어떤 제한도 받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여호와이지만 예수이기도 하고 메시아이며 전능하신 하나님이기도 하다. 그의 사역이 바뀜에 따라 그의 이름도 변하지만, 어떤 이름도 그를 완전하게 대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불린 이름은 모두 그를 대표할 수 있고, 그가 시대마다 하는 사역은 모두 그의 성품을 대변한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새로운 사역을 하고 새 이름으로 불린다. 시대가 다른데 어찌 같은 사역을 행하겠느냐? 어떻게 낡은 것을 지키겠느냐? ‘예수’란 구속 사역을 위해 취한 이름인데, 말세에 그가 재림할 때에도 이 이름으로 불릴 수 있겠느냐? 또다시 구속 사역을 하겠느냐? 여호와와 예수는 하나인데도 왜 서로 다른 시대에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렸느냐? 사역한 시대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냐? 이름 하나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있겠느냐? 그렇기에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 시대는 이름에 의해 바뀌고, 이름으로 시대를 대변한다. 어떤 이름도 하나님 자신을 완전하게 대변할 수 없으며, 또한 시대성을 띤 그의 성품만을 대변하고 사역을 대변할 수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에 적합한 이름 하나를 택하여 전체 시대를 대변할 수 있다.』

예수가 행한 사역은 예수란 이름을 대변한 것이자 은혜시대를 대변한 것이고, 여호와가 행한 사역은 여호와를 대변한 것이자 율법시대를 대변한 것이다. 그들의 사역은 한 분의 영이 서로 다른 두 시대에 행한 사역이다. 예수가 행한 사역은 은혜시대만 대변하고, 여호와가 행한 사역은 구약 율법시대만 대변할 뿐이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과 애급 백성을 인도했고, 이스라엘 외의 족속들도 인도했다. 신약의 은혜시대에 예수가 행한 사역은 하나님이 예수의 이름으로 사역하며 시대를 이끈 것이다. 서로 다른 두 이름으로 불렸지만, 한 분의 영이 두 단계의 사역을 한 것이다. 그 사역은 계속 이어진 것이었다. 이름과 사역의 내용이 다르기에 시대 역시 다르다. 여호와가 오면 여호와의 시대이고, 예수가 오면 예수의 시대이다. 그러므로 일단 오게 되면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고, 하나의 시대를 대표하며,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데, 그 단계의 새로운 길이 하나의 이름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은 언제나 새롭고, 그의 사역은 끊임없이 발전함을 의미한다. 역사(歷史)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하나님의 사역도 끊임없이 발전한다. 6천년 경륜을 완수하려면 반드시 끊임없이 발전하면서 날마다 해마다 새로운 사역을 해야 한다. 또한 새로운 길과 신기원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역과 더 큰 사역도 개척해야 한다. 그에 따라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사역이 나타나게 된다.

여호와’란 내가 이스라엘에서 사역할 때 택한 이름으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저주하며, 사람의 생활을 인도할 수 있는 이스라엘 사람(하나님 선민)의 하나님이자, 크나큰 능력을 지닌 지혜가 충만한 하나님임을 의미한다. ‘예수’란 본래 임마누엘을 가리키며, 자비와 긍휼이 충만한, 사람을 속량하는 속죄 제물을 의미한다. 예수는 은혜시대 사역을 행했고 은혜시대를 대표하지만, 경륜의 일부 사역만 대표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여호와만이 이스라엘 선민의 하나님이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모세의 하나님, 또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 족속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호와를 경배하였고, 그를 위해 제단에 제물을 드렸으며, 성전 안에서 제사장 옷을 입고 여호와를 섬겼다. 그들이 소망하는 것은 여호와의 재현이다. 오직 예수만이 인류의 구속주이고, 죄에서 인류를 속량한 속죄 제물이다. 다시 말해, 예수란 이름은 은혜시대에서 비롯된 이름이고, 은혜시대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이름이다. 예수란 이름은 은혜시대의 사람들이 거듭나서 구원받게 하기 위해 생겨난 이름이고, 온 인류를 속량하기 위해 생겨난 고유한 이름이다. 그러므로 ‘예수’란 이름은 구속 사역을 대변하고 은혜시대도 대변하는 이름이고, ‘여호와’란 이름은 율법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생겨난 고유한 이름이다. 각 시대, 각 단계 사역마다 내 이름은 대표적 의의가 있고,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의의는 바로 이름마다 한 시대를 대변한다는 것에 있다. ‘여호와’는 율법시대를 대변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이 경배하는 하나님을 일컫는 존칭이며, ‘예수’는 은혜시대를 대변하며, 은혜시대에 속량받은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의 이름이다. 사람들이 말세에도 구주 예수가 강림하기를 소망하고, 유대인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서 강림하기를 소망한다면, 전체 6천년 경륜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구속시대에 머물 것이다. 또한 말세가 영영 도래하지도 않고, 시대를 끝내지도 못할 것이다. ‘구주 예수’는 단지 인류를 속량하고 구원하는 분이고, 내가 택한 ‘예수’란 이름은 단지 은혜시대의 모든 죄인을 위해 생겨난 이름이지 온 인류를 끝내기 위해 생겨난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호와, 예수 그리고 메시야는 모두 나의 영을 대표하지만, 이 이름들은 내 경륜의 서로 다른 시대를 대표할 뿐, 나의 모든 것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땅의 사람들이 부르는 나의 이름이 나의 모든 성품과 어떠함을 다 분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단지 시대에 따라 나에 대한 호칭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말세의 시대, 즉 마지막 시대가 도래하면 나의 이름은 또 바뀌게 된다. 여호와는 물론 예수라고도 칭하지 않고, 메시야라고는 더욱 칭하지 않는다. 대신 크나큰 능력을 갖춘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이라고 칭하는데, 나는 이 이름으로 전체 시대를 끝낸다. 나는 여호와라고 칭한 적이 있고, 사람들에게 메시야로 불린 적도 있다. 사람들은 나를 우러러 구주 예수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나는 더 이상 사람들이 예전에 알았던 여호와나 예수가 아니라, 말세에 다시 돌아와 시대를 끝낸 하나님이자 나의 모든 성품을 가득 지니고, 권병과 존귀 그리고 영광을 가득 지니고 땅끝에서 나타난(원문: 興起) 하나님 자신이다. 사람들은 나와 접촉한 적도 없고, 나를 알아본 적도 나의 성품을 안 적도 없으며, 창세부터 지금까지 그 누구도 나를 본 적이 없다. 이러한 이가 바로 말세에 사람들 앞에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은밀히 거하고 있는 하나님이다. 그는 사람들 눈앞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다. 그는 마치 뜨거운 해 같고 불꽃 같으며, 능력이 충만하고, 권병을 가득 지니고 있다. 세상의 온갖 것이 나의 말에 심판받고, 불사름 속에서 정결케 될 것이다. 최종에 만국은 반드시 나의 말로 말미암아 복받기도 하고 산산이 부서지기도 할 것이다. 이를 통해 말세의 모든 사람들은 내가 바로 돌아온 구세주이고, 온 인류를 정복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내가 사람의 속죄 제물이 된 적이 있지만, 말세에는 또 만물을 불사르는 뜨거운 해와 같은 불꽃이자 만물을 드러내는 공의로운 태양임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말세에 행하는 사역이다. 내가 이 이름을 택하고 이런 성품을 지닌 이유는 바로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공의로운 하나님이고 뜨거운 해이자 불꽃임을 알게 하고, 유일한 참하나님인 나를 경배하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만의 하나님도 아니고 구속주만도 아니라, 천지와 바닷속 모든 피조물의 하나님인 내 본래 모습을 보게 하기 위함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https://www.light-of-truth.org/bible-verse-about-God-s-name.html 

성경에 시대별로 하나님의 이름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3개의 이름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여호와’, 신약시대의 ‘예수’,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소개한 또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시대마다 다르게 소개되었을까요?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 때에 알았더라면.........”

지난 수요일 “박원숙 같이 삽시다!” 라는 프로를 보면서 호스트인 탈랜트 박원숙씨가 거주하는 남해안 집에 최근 이혼했다는 가수 한 사람과 배우 두 사람이 모여서 며칠을 같이 지내는 프로인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방영하는 날이라 첫날 일정을 마치고 모두 함께 모여 지난 이야기를 하던 중 공통된 생각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 때 알았더라면 지금 이러지는 않았을 텐데...”

하나님의 이름을 일찍 알았더라면 이렇게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 이름은 “여호와”

출애굽기 3:13∼15
⑭.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⑮.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⑯.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신약에서 하나님 이름은 “예수”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빌립보서 2:9~11
⑨.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⑩.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⑪.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 이름 “알파와 오메가”
요한계시록에서 소개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살펴보기 전에 “종말론(終末論)”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종말론에 대한 생각을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첫째는 개인적 종말론

개인적 종말론이란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우주)에서 태어났다가 이 세상(우주)에서 죽습니다.

둘째는 우주적 종말론

우주적 종말론이란 부활 승천하셨던 예수님께서 재림의 주가 되셔서 다시 세상에 오셔서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개인적 종말론 우주적 종말론 모두 그 마지막 시간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전천년설

역사적 전천년주의 : 환난이 일어나고 예수님의 재림이 임하여 천년왕국이 시작된다.
세대주의적 전천년 : 환난 전에 휴거가 일어나고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며 재림이 일어난다. 대부분의 이단들이 주장하는 내용이라고 하겠다.

무천년설
천년 왕국은 없다.
재림 시에 인류에 대한 심판이 있고 의인과 악인으로 구분될 것이다.

후천년설
천년 왕국 후에 재림하신다(토마스 아퀴너스)

마가복음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종말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
종말은 복음의 핵심이다.


요한계시록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구약의 하나님 이름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애굽기 3:15)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애굽기 20:7)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출애굽기 34:1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이사야 43:10~11)

‘여호와’란 내가 이스라엘에서 사역할 때 택한 이름으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저주하며, 사람의 생활을 인도할 수 있는 이스라엘 사람(하나님 선민)의 하나님이자, 크나큰 능력을 지닌 지혜가 충만한 하나님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여호와만이 이스라엘 선민의 하나님이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모세의 하나님이다. 또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당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 족속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호와를 경배하였고, 그를 위해 제단에서 제사를 드렸으며, 성전 안에서 제사장 옷을 입고 여호와를 섬겼다. 그들이 소망하는 것은 여호와의 재현이다.… ‘여호와’란 이름은 율법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생겨난 고유한 이름이다. 각 시대, 각 단계 사역마다 내 이름은 대표적 의의가 있고,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의의는 바로 이름마다 한 시대를 대변한다는 것에 있다. ‘여호와’는 율법시대를 대변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이 경배하는 하나님을 일컫는 존칭이며,…』

❑ 신약의 하나님 이름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태복음 1:21)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사도행전 4:12)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립보서 2:9~11)

은혜시대는 예수의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예수가 직분을 수행하기 시작하자 성령이 그의 이름을 증거 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여호와의 이름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고, 성령은 예수의 이름을 위주로 하는 새로운 사역을 하였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고, 그를 위해 사역하였다. 구약의 율법시대가 끝났다 함은 여호와의 이름을 위주로 하는 사역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이름을 더 이상 여호와가 아닌 예수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성령은 예수의 이름을 위주로 하는 사역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란 본래 임마누엘을 가리키며, 자비와 긍휼이 충만한, 사람을 속량하는 속죄 제물을 의미한다. 예수는 은혜시대 사역을 행했고 은혜시대를 대표하지만, 경륜의 일부 사역만 대표할 수 있다.… 오직 예수만이 인류의 구속주이고, 죄에서 인류를 속량한 속죄 제물이다. 다시 말해, 예수란 이름은 은혜시대에서 비롯된 이름이고, 은혜시대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이름이다. 예수란 이름은 은혜시대의 사람들이 거듭나서 구원받게 하기 위해 생겨난 이름이고, 온 인류를 속량하기 위해 생겨난 고유한 이름이다. 그러므로 ‘예수’란 이름은 구속 사역을 대변하고 은혜시대도 대변하는 이름이고,… ‘예수’는 은혜시대를 대변하며, 은혜시대에 속량 받은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의 이름이다.

❑ 계시록에 예언된 주님 재림 시의 새 이름

요한계시록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요한계시록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요한계시록 11:16~17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 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요한계시록 4: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요한계시록 19: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요한계시록 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요한계시록 16:7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여호와, 예수 그리고 메시아는 모두 나의 영을 대표하지만, 이 이름들은 내 경륜의 서로 다른 시대를 대표할 뿐, 나의 모든 것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땅의 사람들이 부르는 나의 이름이 나의 모든 성품과 어떠함을 다 분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단지 시대에 따라 나에 대한 호칭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말세의 시대, 즉 마지막 시대가 도래 하면 나의 이름은 또 바뀌게 된다. 여호와는 물론 예수라고도 칭하지 않고, 메시아라고는 더욱 칭하지 않는다. 대신 크나큰 능력을 갖춘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이라고 칭하는데, 나는 이 이름으로 전체 시대를 끝낸다. 나는 여호와라고 칭한 적이 있고, 사람들에게 메시야라고 불린 적도 있다. 사람들은 나를 우러러 구주 예수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나는 더 이상 사람들이 예전에 알았던 여호와나 예수가 아니라, 말세에 다시 돌아와 시대를 끝낸 하나님이자 나의 모든 성품을 가득 지니고, 권병과 존귀 그리고 영광을 가득 지니고 땅 끝에서 나타난(興起) 하나님 자신이다. 사람들은 나와 접촉한 적도 없고, 나를 알아본 적도 나의 성품을 안 적도 없으며, 창세부터 지금까지 그 누구도 나를 본 적이 없다. 이러한 이가 바로 말세에 사람들 앞에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은밀히 거하고 있는 하나님이다. 그는 사람들 눈앞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다. 그는 마치 뜨거운 해 같고 불꽃같으며, 능력이 충만하고, 권병을 가득 지니고 있다. 세상의 온갖 것이 나의 말에 심판받고, 불사름 속에서 정결케 될 것이다. 최종에 만국은 반드시 나의 말로 말미암아 복 받기도 하고 산산이 부서지기도 할 것이다. 이를 통해 말세의 모든 사람들은 내가 바로 돌아온 구세주이고, 온 인류를 정복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내가 사람의 속죄 제물이 된 적이 있지만, 말세에는 또 만물을 불사르는 뜨거운 해와 같은 불꽃이 되고, 만물을 드러내는 공의로운 태양임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말세에 행하는 사역이다. 내가 이 이름을 택하고 이런 성품을 지닌 이유는 바로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공의로운 하나님이고 뜨거운 해이자 불꽃임을 알게 하고, 유일한 참 하나님인 나를 경배하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만의 하나님도 아니고 구속주만도 아니라, 천지와 바닷속 모든 피조물의 하나님인 내 본래 모습을 보게 하기 위함이다.

위의 내용을 통해 하나님은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이 있으셨고, 각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왜 시대 별로 이름을 바꾸셨는지 알고 계신가요? 이는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비밀에 대해 더 알고 싶거나 신앙적인 문제로 고민이 있으신 분은 우측 하단의 창구를 통해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1. 하나님은 창조주 이십니다 - 엘 로힘(Elohim)

02.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 여호와(Jehovah)

03. 하나님은 나를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 엘 로이 (El Roi)

04.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 엘 샤다이( El Shaddai)

05.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 엘 올람( El Olam)

06. 하나님은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 나함(Naham)

07. 하나님은 모든 것 다해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 엘 칸나(Ll Kanna)

08.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 치드케뉴( Tsidkenu)

09. 하나님은 미리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 여호와 이레(Jehovah Jireh)

10. 하나님은 가장 높으신 분이십니다 - 엘 엘리온( El Elyon)

11.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십니다 - 여호와 삼마( Jehovah Samma)

12. 하나님은 은혜 주시는 분이십니다 - 챈(Chen)

13. 하나님은 승리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 여호와 닛시(Jehovah Nissi)

14. 하나님은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 여호와 카도쉬(Jehovah Kadesh)

15. 하나님은 샬롬이십니다 - 여호와 샬롬(Jehovah Shalom)

16.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 여호와 멜렉(Jehovah Melek)

17. 하나님은 치료자이십니다 - 여호와 라파(Jehovah Rapha)

18. 하나님은 부드러운 분이십니다 - 알룹(Al lup)

19. 하나님은 목자이십니다 - 여호와 로이(Jehova Roi)

20. 하나님은 능력이십니다 - 여호와 체바오트(Jehova Sebaot)

21.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십니다 - 여호와 추리(Jehova Tsuri)

22. 하나님은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 아도나이(Adonai)

23.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 임마누엘(Immanuel)

24. 하나님은 말씀이십니다 -로고스(Logos)

25. 하나님은 용서 하시는 분이십니다 - 암모스(Amnos)

26. 하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입니다 - 자오 히도르( Zao Hydor)

27.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 포스(Phos)

28. 하나님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 프뉴마(Pneuma)

29.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 아가페(Agape)

30.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분이십니다 - 하사(Hasah)

[출처:  https://www.facebook.com/bogcheol.kim/posts/498846330213732]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ardofjesus&logNo=22018397984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이름

잠언 18:10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The name of the LORD is a strong tower; the righteous run to it and are safe.   


*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존재(存在)”하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어떤 산모가 출산을 합니다. 산고의 고통을 겪으며 아들을 낳았지만  아기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것을 본 산모는 몹시 불안해합니다. 혹시 아이가 죽은 것은 아닐까? 그때 친정어머니가 축 늘어진 아기를 들어 올렸는데 아기가 갑자기 몸을 움직이면서 숨을 쉬고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산모는 “기적”이라는 의미를 지닌 아버지의 이름에 다른 “암하라어 단어”를 결합하여 아들에게 “기적이 일어났다”는 뜻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부룬디에서 한 젊은 남자가 자신을 죽이려는 군인들을 피해 도망합니다. 그는 풀밭에 숨어서, 만일 하느님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신다면 첫 아들의 이름을 “하느님은 구원자이시다”라는 뜻의 “마니라키자”로 짓겠다고 맹세합니다. 5년 후에 그는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첫 아들의 이름을 “마니라키자” 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일부 문화권에서는 아이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이름을 지어 준다는 것이 생소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이것은 아주 오래된 관습입니다. 사실 성서에는 그러한 이름이 수없이 많습니다. 성서를 읽을 때 여러 등장인물의 이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면 더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러한 예들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나오는 의미 깊은 이름들

성서의 앞부분에 나오는 이름들 중에는 셋이 있는데 그 이름은 “정해진”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어머니인 하와는 셋이라는 이름을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였으므로, 하느님께서 나를 위하여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정해 주셨다.” (창세 4:25) 셋의 후손인 라멕은 아들에게 “쉼” 또는 “위안”을 의미하는 노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라멕은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은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 아이가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땅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일과 우리 손의 고통으로부터 우리에게 위로를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창세 5:29.

하느님은 예언적인 의미로 특정한 성인들의 이름을 직접 바꿔 주기도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그분은 “아버지는 높여지셨다”를 의미하는 아브람의 이름을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셨습니다. 그 이름과 일치하게 아브라함은 많은 나라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창세 17:5, 6)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래의 예도 고려해 보십시오. 사래라는 이름은 아마도 “다투기 좋아하는”이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그의 이름을 “왕후”라는 뜻의 “사라”라고 바꾸시면서 그가 왕들의 조상이 될 것이라고 알려 주셨을 때 그는 정말 기뻤을 것입니다.—창세 17:15, 16.

또한 하느님은 어떤 아이들의 이름을 직접 정해 주기도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그분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의 이름을 “웃음”이라는 뜻의 이삭으로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충실한 부부는 그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노년에 아들을 얻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자신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이삭이 자라서 하느님의 충실한 종이 되었을 때, 그의 이름은 분명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늘 웃음 짓게 하였을 것입니다(창세기 17:17, 19, 18:12, 15, 21:6)

한편 이삭의 며느리인 라헬이 자신의 막내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을 때는 그 이유가 전혀 달랐습니다. 라헬은 죽기 전에 그 아들을 벤-오니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의 의미는 “나의 애통의 아들”입니다. 라헬이 죽은 후 그의 남편 야곱은 아들의 이름을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의미인 베냐민으로 고쳤습니다. 그 이름은 베냐민이 사랑과 돌봄을 많이 받았음을 시사합니다.—창세 35:16-19; 44:20.

때때로 신체적 특성에 따라서 이름이 정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예로서, 이삭과 리브가는 아들을 낳고 보니 마치 털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붉은 털이 많았기 때문에 그를 에서라고 불렀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어로 에서는 “털이 많은”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창세 25:25) 룻기에서 볼 수 있듯이 나오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한 아들의 이름은 “병약한, 허약한”을 의미하는 말론이었고 다른 아들의 이름은 “약함”을 뜻하는 기룐이었습니다. 그러한 이름이 주어진 것이 태어날 때였는지 아니면 그 후였는지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 두 젊은이가 일찍 사망한 것을 볼 때 적절한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룻 1:5.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궁핍한 상황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더는 “나의 즐거움”을 뜻하는 나오미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나를 마라[“비통한, 쓴”이라는 의미]라고 부르십시오. 전능자께서 나를 매우 비통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룻 1:20, 21.

한편 아이에게 중요한 사건을 기념하는 이름을 지어 주는 관습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언자 학개의 이름은 “축제일에 태어난”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교 시대의 의미심장한 이름들

예수의 이름에는 예언적으로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가 태어나기 전 그의 부모는 하느님으로부터 “그 이름을 예수[“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라고 불러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천사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요셉에게 말했습니다. (마태 1:21) 예수께서 침례를 받고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후에, 그분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메시아”라는 칭호와 함께 불리게 되었습니다. 동일한 칭호가 그리스어로는 “그리스도”로 번역됩니다. “메시아”와 “그리스도”는 모두 “기름부음받은 자”를 의미합니다.—마태 2:4.

예수께서는 몇몇 제자들에게 그들의 특성을 잘 묘사하는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그분은 시몬에게 셈어로 “바위”를 뜻하는 게바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게바는 그 이름의 그리스어 형태인 “베드로”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요한 1:42) 또한 예수께서는 열심 있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의 “보아너게”라고 부르셨습니다.—마가 3:16, 17.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서도 적절한 별명을 지어 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한 가지 예로서 제자 요셉을 들 수 있는데, 사도들은 그에게 “위로의 아들”을 의미하는 바나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바나바는 많은 사람들을 위로해 줌으로 그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살았습니다.—사도 4:34-37; 9:27; 15:25, 26.

우리의 이름—왜 중요한가?

태어날 때 받은 이름은 우리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주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얻게 되는 평판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잠언 20:11) 이렇게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예수나 사도들이 나에게 이름을 지어 준다면 그 이름은 무엇일까? 나의 주된 특성이나 평판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이름은 무엇일까?’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한 질문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혜로운 왕 솔로몬은 “풍부한 부보다 이름이 택할 만한 것”이라고 썼습니다. (잠언 22:1) 분명히 사람들 사이에서 좋은 이름을 얻는다면, 다시 말해 좋은 평판을 듣는다면 참으로 가치 있는 자산을 가진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으로서 우리가 하느님 앞에 좋은 이름을 가진다면 우리는 사라지지 않을 보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러합니까? 하느님이 자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념 책”에 기록하고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전망을 주겠다고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말라기 3:16; 계시 3:5; 20:12-15.

임마누엘은 누구인가?

어떤 성서 인물들의 이름은 예언적인 의미를 띠고 있었으며, 그 사람이 할 일을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 예언자 이사야는 영감을 받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겠고, 틀림없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이사야 7:14)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일부 성서 해설가들은 이 예언의 첫 성취를 이스라엘의 왕들 중 한 사람이나 이사야의 아들 가운데 한 명과 연관 지으려고 해 왔습니다. 하지만 복음서 필자인 마태는 이사야의 이 예언이 예수에게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마태 1:22, 23.

어떤 사람들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예수에게 적용시키면서, 성서는 예수가 하느님이라고 가르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논리를 따르자면 욥을 위로하고 시정했던 엘리후라는 젊은이 또한 하느님이 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이름 엘리후는 “나의 하느님은 그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요한 14:28; 빌립보 2:5, 6) 하지만 그분은 아버지의 특성을 완벽하게 반영하셨으며, 메시아와 관련하여 하느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모두 성취시키셨습니다. (요한 14:9; 고린도 둘째 1:20)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그 분을 숭배하는 사람들과 함께 계심을 확증해 줄 메시아인 씨 곧 다윗의 후손으로서 예수의 역할을 잘 나타내 줍니다.
 
가장 의미 깊은 이름

하느님의 이름은 성서 전체에 7000번 이상 나옵니다.
네 개의 히브리어 글자 야웨(יהוה)로 표기되는 그분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한국어에서 “여호와” 로 옮깁니다.

이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모세가 하나님께 이름을 물었을 때 여호와께서는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되겠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출애굽기 3:14, 강조된 성서 “The Emphasised Bible” J. B. 로더럼).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되실 것임을 보증합니다(이사야 55:8∼11). 하나님이 어떤 약속을 하실 때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그 약속에 따라 우리의 삶을 틀 잡아 갈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분의 이름이 여호와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책에서 이름이 흐려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생명의 책에서 지워지지 않을 이름


요한계시록 3장 5절에서 주님은 이기는 자에게 그분께서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할 것”을 약속하셨다. 우리는 이 구절을 그 자체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은 위험스럽다. 이와 같은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온 성경에 의해 안전하게 보호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생명의 책에서 이름이 지워진다.”는 것은 그 이름이 이미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생명책”이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미리 예비하신 축복에 참예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신성한 기록이다.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고 이런 축복들에 참예하도록 예정된 모든 성도들의 이름이 이 책에 기록되어 있다(눅 10:20).


이 축복들은 세 단계-교회, 천년 왕국, 영세(永世)-안에 있다. 교회의 단계 안에 있는 축복들은 죄 사함, 구속, 거듭남, 영원한 생명, 신성한 본성 등과 같은 것으로 모두가 초기의 분깃들이다.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께 선택된 모든 이들은 이러한 초기의 분깃들에 참예함으로 그들의 영적 삶을 시작한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은혜에 협력한다면, 그들은 교회 시대에 생명이 성숙할 것이며, 이러한 조기 성숙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주께서 그들에게 보상으로 주실 상을 조성할 것이다. 그 상은 천년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될 것이며, 그분께 선택된 이들이 교회 시대에 그분과 함께 전진하도록 하나님이 자극제(격려제)로 예비하신 주의 기쁨과 안식(마 25:21, 23, 히 4:9-11)과 만국 위에 왕노릇 함(계 2:26-27, 20:4, 6) 등과 같은 그 단계의 신성한 축복들에 참여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 선택된 많은 이들이 그분의 죄 사함과 구속과 영원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 등을 받은 후에 그분의 은혜와 협력하지 않고 그분과 함께 전진하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교회 시대에 생명이 성숙하지 못하므로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천년 왕국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의 상(賞)인 그 시대의 신성한 축복들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천년 왕국 동안에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서 지워질 것이다. 천년 왕국 동안 주님께 징계를 받아서 성숙하게 생명이 자란 후에라야 그들은 영세 단계의 신성한 축복들, 즉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와 함께한 영원한 섬김, 영원한 왕노릇(계 22:3-5), 새 예루살렘, 생명의 나무(22:14), 생명수(22:17) 등과 같은 것에 참여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다시 기록될 것이다. 이것은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고 또 교회 단계에서 신성한 축복에 참여하게 된 하나님께 선택된 모든 자들이 「결코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요 10:28)임을 의미한다. 즉 그들은 영세의 신성한 축복들을 결단코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 시대에서 주님과 협력하지 않은 어떤 이들은 천년 왕국 동안 주님께 경륜적으로 징계를 받을 것이며 그 단계에서의 신성한 축복들을 놓칠 것이다.


우리는 천년 왕국 동안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험에 직면해 있다. 만일 당신이 패배하여 주의 은혜로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을 거절한다면 그분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시는 동안 당신의 이름은 생명책 안에 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부르심을 받았지만 택하심 받지 않았음을 뜻한다. 17장 14절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분이 다시 오실 때 모든 성도들이 휴거된 후 주님이 택하심을 이루시리라는 것이다. 이 선발(택하심)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어떻게 영위했는가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패배하면서 살았다면 정녕코 주님은 우리를 선발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승리하면서 살았다면 우리는 선발될 것이며 우리의 이름은 천년 동안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학교를 졸업하는 것과 유사하다. 비록 모든 학생의 이름이 학적부에 있을지라도, 오직 소수의 이름만이 상을 받게 될 명단에 있게 될 것이다. 믿는이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는 것은 그가 영원토록 멸망하리라는 뜻이 아니다. 단지 그것은 장차 올 왕국의 천년 동안 그의 이름이 거기에 있지 않으리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그가 천년 왕국에서 그의 장자상속권을 상실하여 하나님이 본래 그분께 선택된 모든 이들에게 주시고자 한 것에 참여할 권리를 갖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그분이 선택한 모든 자들이 오늘날 그리스도를 극도로 누림으로 장차 올 시대에서도 역시 그들로 그리스도를 누릴 권리를 갖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현재 이렇게 하지 않으려 하므로 왕국이 도래할 때 그들은 그들의 장자상속권을 상실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원래 의도와 협력한 사람들만이 그리스도를 그들의 특별한 분깃으로 누리면서 왕국 안에 있게 될 것이다. 그때에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있게 될 것이지만, 다른 많은 이들의 이름은 거기에 없게 될 것이다. 이 이상을 본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이 문제에 관한 구절들을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의 누림을 위해 그리스도를 우리 안으로 역사하는 것이다. 교회 시대는 이것이 성취되는 때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과 협력하느냐의 여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과 협력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로 장차 올 왕국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하나의 보상으로 정하실 것을 결정하셨다. 이 보상은 오늘날 우리로 하나님과 협력하고 그리스도를 누리도록 격려하는 자극제이다. 만일 우리가 협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왕국 시대를 놓칠 것이다. 생명책은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에 참여하는 모든 이름들을 기록한 것이다. 교회 시대 동안에는 우리 모두의 이름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왕국 시대에서는 게으른 자들의 이름이 이 책에서 지워질 것이다. 천년 왕국 후에 그들의 이름이 다시 생명책 안으로 넣어질 것이다 그분의 구원 안에 있는 하나님의 축복이 세 시대-교회 시대, 왕국 시대, 영세 시대-로 되어 있다는 것은 보기에도 좋다. 우리가 왕국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누림에 참여할 것인지의 여부는 오늘날 우리가 교회 생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기꺼이 누리느냐에 좌우된다.


오늘날 기회를 놓치지 말라. 만일 우리가 오늘날 그리스도를 누린다면 우리는 장차 도래할 왕국에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장차 올 왕국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특별한 누림을 놓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다루심을 받게 될 것인데, 이는 그들로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누림 안으로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침내 우리 모두가 이 두 시대-교회 시대와 왕국 시대-를 통과하게 된 때에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 안에서 있게 될 것이며 영원 시대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 출처 / 요한계시록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14번 중에서 

구약 시대에 "여호와"라는 부르던 하나님의 이름이 신약 시대에 와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을까요?

왜 은혜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에서 "예수"로 바뀌었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영원하다면 계속 그 이름을 써야 하지 않을까요? 왜 하나님은 은혜시대에 ‘여호와’가 아닌 ‘예수’라는 이름을 쓰셨고, ‘예수’라는 이름에는 어떤 의의가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행사는 측량할 수 없고, 하나님의 어떠한 이름도 하나님을 완전히 대표할 수는 없으며,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이름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람을 인도하고, 구속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역사에 따라 시대마다 다른 이름을 가졌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여호와 하나님은 율법과 계명을 반포하셨고, 백성들의 삶을 인도하시며 율법과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고, 율법과 계명을 어기면 하나님의 정죄와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때 여호와 하나님이 드러낸 성품은 진노와 저주의 성품이었습니다. 율법시대 말기에 이르러,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 이미 율법으로 정죄되어 죽음의 형벌을 당해야 하는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처음으로 성육신이 되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예수님께 기도하고, 주님께 죄를 자백해 회개하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신약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자애로움과 긍휼하심은 하나님이 은혜시대에 사역하실 때 드러내신 성품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사역마다 드러낸 성품도 모두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이에 따라 바뀌었고, 이는 하나님의 항상 새로운 사역의 원칙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학교에서 선생으로 일을 한다면 사람들은 우리를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가 더 이상 선생으로 일을 하지 않고 직장을 새로 옮겨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면, 사람들이 우리를 만났을 때 여전히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선생은 우리가 전에 했던 일에서의 칭호이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의 호칭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재 직업에 따라 부르는 것이 가장 적합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고,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성품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공개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도 사역의 필요에 따라 바뀌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서로 다른 시대에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가?
하나님 이름의 의의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이름이 아무리 바뀌어도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사역의 목적은 더더욱 변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 단락의 내용과 같습니다. 
“여호와”란 내가 이스라엘에서 역사할 때 택한 이름으로, 원래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저주하며, 사람의 삶도 인도할 수 있는 이스라엘 사람(하나님의 선민)의 하나님이자, 크나큰 능력을 지닌 지혜가 충만한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란 본래 “임마누엘”을 가리키며, 자비와 긍휼이 충만한, 사람을 구속하는 속죄제를 의미합니다. 예수는 은혜시대 사역을 행했고 은혜시대를 대표하지만, 경영 계획의 일부 사역만 대표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여호와만이 이스라엘 선민의 하나님이고,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그리고 모세의 하나님입니다. 또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당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 족속을 제외하고 모두 여호와를 경배하고 있고, 그를 위해 제단에서 제사를 드리며, 성전 안에서 제사장 복장을 하고 여호와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소망하는 것은 여호와의 재현입니다. 오직 예수만이 인류의 구속주이고, 인류를 죄에서 구속해 낸 속죄제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란 이름은 은혜시대에서 비롯된 이름이고 은혜시대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이름입니다.

예수란 이름은 은혜시대의 사람들이 거듭나서 구원받게 하기 위해 생겨난 이름이고, 온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생겨난 고유한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란 이름은 구속 사역을 대표하고 은혜시대도 대표하는 이름이고, ‘여호와’란 이름은 율법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생겨난 고유한 이름입니다.

각 시대, 각 단계 역사마다 이름은 대표적인 의의가 있습니다. 그 의의는 바로 이름마다 한 시대를 대표한다는 것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여호와’는 율법시대를 대표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경배하는 하나님을 일컫는 존칭이며, ‘예수’는 은혜시대를 대표하며, 은혜시대에 구속받은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시대마다 취한 이름에는 모두 비범한 의의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사역의 원칙, 시대별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사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이름의 의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고 그냥 흐리멍덩하게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주님에게 은혜와 축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기만 하는 것은 더욱 아니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창세 이후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들을 인도해왔는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해 오셨는지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이해할 수 있고, 예수님의 재림을 더 잘 영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대마다 다른 이름을 취하신 것이 그 시대에 행한 사역과 성품을 나타내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어떤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실까 걱정할까요?

여호와라는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이름은 신약 시대에는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왜 그 이름이 이렇게 바뀌어서 부르게 되었는가?

여러분 만일 당신이 어느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을 가르쳤을 때는 학생들이 선생님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직 생활을 사퇴하고 직장에 취직하여 일을 시작할 때는 더 이상 선생님이 아니라 회사의 직급에 따라 부르게 될 것입니다. 회사원으로서 계장, 과장, 부장, 이사, 전무 등과 같은 명칭으로 부르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애급에서부터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려고 “여호와” 라는 이름을 계시하셨습니다. 이렇게 부르게 된 하나님의 이름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행하신 사역에 따라 하나님의 모습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 이레(준비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라파(치료하시는 하나님)

구약 시대 특히 율법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성격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축복을 위하여 사용하는 이름(신명기 10:8)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이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고 그 일은 오늘날까지 이르느니라.

- 시편 129:8, 지나가는 자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

둘째, 도움을 주는 이름(시편 124:8)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셋째, 기도하는 이름(시편 116:4)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출애굽기 20:7)

출애굽기 20: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You shall not misuse the name of the LORD your God, for the LORD will not hold anyone guiltless who misuses his name. 

(새번역)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 함부로 부르는 것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현대인)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 함부로 부르는 것
너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자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않으려면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시편 29:2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찌어다.  


성경에서 언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을까?

창세기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Seth also had a son, and he named him Enosh. At that time men began to call on the name of the LORD.

* “에노스(Enosh, Enos)” 라는 이름의 뜻은?

- 인터넷 성경인명 지명 사전을 검색한 결과 이름의 뜻이 없는 사이트, 다만 “아담의 손자요 셋의 아들이다(창 4:26, 대상 1:1, 눅 3:38)” 이렇게 정의한다.


- 에노스의 어원은 히브리어로 “아나쉬(אנשׁ)” 라고 한다. ‘아나쉬’ 라는 단어의 뜻은 “깨지기 쉽다”, “약하다” 라고 한다. ‘에노스’는 “인간이 전적으로 무력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참으로 그것은 “숙명적인 연약성”이다. 

-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
에노스(אֱנוֹש,ׁ ‘에노쉬’/ Enosh)
(뜻) ‘아담(사람), 연약한 사람(죽을 수밖에 없는)’
1. 아담의 3대손
2. 셋의 아들(105세에 낳음), 게난의 아버지
3. 아담 이후 235년에 출생
4. 90세에 게난을 낳고 815년간 자녀를 낳고, 905세(아담 이후 1140년)에 죽음
5. 아담과 695년, 노아와는 84년 동시대에 살았다.
6. 752세에 에녹의 승천을 목격
7. 누가복음 족보에 ‘에노스(’Ενως)’로 기록(눅 3:38)
“에노스”의 어원은 히브리어로 “아나쉬(אנשׁ)”로서, “깨지기 쉽다”, “약하다”라는 뜻이다. “에노스”는 인간이 전적으로 무력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참으로 그것은 “숙명적인 연약성” 이다. 이것은 치료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와 병들고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죄악 된 인류의 한계 상황을 나타낸다. “에노스”의 아버지 “셋”은, 아담 타락 이후 거세게 밀려오는 죄악의 물결로 말미암아 이제 여호와를 찾지 않고서는 죄의 유혹을 도저히 이기며 살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절실하게 인식하였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그의 신앙 고백을 좇아 “에노스”라고 짓게 된 것이다.

“아담”과 같이 “에노스”는 고유명사로 사용될 수도 있고,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사용될 수도 있다. “에노스”란 이름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던 “셋”의 입에서 나온 신앙고백이었다. 우리는 그 이름을 통해 당시 시대상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1. 에노스 시대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성경은 셋이 자기 아들을 낳고 ‘에노스’라고 이름 지은 동기에 대하여 그 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세기 4:26)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시작”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특별히 성경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구원”과 직결되는 중대한 문제로 말씀하고 있다(행 2:21, 롬 10:13).

* 사도행전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적극적인 사귐이 시작된 것”을 의미한다.

“부르다(카라, קרא)”는 “선포하다”, “크게 외치다” 라는 뜻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멀리까지 알린 것을 뜻한다. 에노스 시대에 참예배가 확립되고 바르게 세워짐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알려지기 시작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2. 에노스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바른 의식, 예배생활이 시작되었다.

창세기 4:26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쉽게 말해 공식적인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표준 새번역”에는 “셋도 아들을 낳고, 아이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하였다.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하였다.” 라고 번역하였다.

이것은 아담 이후 235년 만에 처음 드린 제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가인과 아벨도 제사를 드린 것으로 보아 이미 제사 드린 지는 오래 되었다. 따라서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기 위한 규칙적인 예배생활을 말한다.

신학자들은 에노스 시대에 대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예배의 근본정신과 자세가 확립된 때’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내 의지를 버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100% 신용하겠다는 자세이며, 또한 당신 편만한 죄악으로 말미암은 극심한 상황에서 속히 구원해 주시기를 호소하는 자세이다.

가인의 후손들이 교만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고 세속 문화에 심취해 있을 때, 경건한 셋의 후손들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 그분과 교제하는 예배생활을 세워 나갔다.

3. 에노스는 스스로 구원하기에 무능하고 나약한 전 인류를 예표 한다.

셋은 ‘정해진 운명’ 안에 있는 인생을 대표한다. 지음 받은 모든 것은 지으신 이로부터 그 운명이 지정되어졌다.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성취하는 사람이라 해서 정해진 운명을 바꾸지는 못한다. 우리는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산제물로서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그러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고 찾을 때 ‘구원’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

시편 90편에서 모세는 “주께서 사람을(에노스)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라고 했다(시편 90:3).

“사람”은 히브리어로 “에노스”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유약한 존재이며 따라서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시편 8:4, 103:15). 인간은 모두 그 이름이 “에노스” 라고 하겠다. 하나님께 의존해야만 하는 존재다.

시편 8: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편 103: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부서지기 쉬운”, “죽어야 할 존재”, “연약한 사람” 이라는 에노스 그 이름의 뜻처럼, 인간들은 아주 약하여 날마다 시험과 유혹에 빠지기 쉬우며, 언제든지 악에 대해서 꼼짝 못하는 무능력한 존재이다. 이에 에노스 시대의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찾고 부르짖는 일, 곧 예배드리는 일에 전심전력하였으며, 인간은 죄와 사망의 짐에 눌려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온 몸으로 고백하였다. 오직 여자의 후손이 오시기 전까지는 인간 스스로는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고백한 것이다. 오늘날도 자신이 “에노스와 같은 존재” 라는 것을 고백하며 진심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기다리는 자들을 통한 참 예배의 회복이 간절히 요청되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 라파(치료하시는 하나님)

“기독교는 질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이승구 박사, 에스라성서신학회 학술대회서 발표

에스라성서신학회가 20일 서울 에스라성서원에서 ‘전염병과 마주한 기독교’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첫 번째 순서로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한국개혁신학회 회장)가 ‘기독교는 질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란 주제로 발표했다.

이 박사는 “창조 때 이 세상에 병은 없었다. 창조 될 때 그 상태에 계속 있었거나 더 높은 상태로 나아갔다면 우리에게는 질병이나 고통은 없었을 것”이라며 “그러나 사람이 죄악을 범한 후 피조계 전체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되었고, 그 저주의 결과 중 하나가 바로 다양한 형태의 질병”이라고 했다.

이어 “이런 질병들은 타락한 상황에서 인과응보로 주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형벌이나 징계의 형태로 주어지기도 한다”며 “이는 타락 이후에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의 구조 속에서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에 병이 존재하게 된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죄 때문이고, 때로는 어떤 구체적인 죄 때문에 특별히 발생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옛 유대인들은 질병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공식을 가지고 모든 상황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려고 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역하실 때 제자들조차도 이와 관련해 예수님께 질문한 적이 있다”며 “그 대표적인 예가 ‘선천적 시작장애’에 대한 질문”이라고 했다.

이어 “제자들은 시각장애를 가지게 된 것이 그의 부모의 죄로 인함인지 자기의 죄로 인함인지 물었다. 그들은 죄와 병을 기계적으로 연결시키는데 익숙했고, 그 논리로 질문했다”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큰 원리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므로 생긴 오류이다. 예수님은 이런 기계적인 적용에 대해 비판하셨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고난이 존재한다”며 “우리는 질병과 고난, 죽음에 대해 어떤 한 가지 시각만을 가지고 기계적인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 박사는 “지금과 같이 전염병이 창궐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며 “먼저 우리는 병을 하나님의 심판이나 마귀의 역사로만 봐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생각해 성경의 온전한 생각을 따라가지 않는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둘째 위와 관련해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병마(病魔)라는 말도 실은 바람직하지 않은 용어”라며 “이런 말은 무의식중에 모든 병은 마귀의 작용으로 생기는 것과 같이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소위 ‘명령 기도’, ‘선포 기도’라는 방식도 사용해서도 안 된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일반계시의 빛 아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삶의 온전한 의미를 가지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면서, 혹시 병에 걸리게 되면 주께서 이 병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겸허하게 묻되, 혹시 이것이 우리의 죄에 대한 징벌인지, 아니면 우리를 좀 더 성숙하게 만드는 시험인지를 묻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했다.

더불어 “우리가 지녀야 될 태도는 먼저 질병에 걸리면 주께서 기적과 같은 초자연적 방식으로, 또는 의료기술과 약을 사용하시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우리를 속히 치유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기도해야 한다”며 “모든 치유는 하나님께서 하신다. ‘하나님은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는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둘째, 만약 주께서 우리가 계속 병을 지니고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면 내 은혜가 그것으로 족한 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서 더 잘 드러나기를 바라면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앙을 유지해야 한다”며 “ 질병을 안고 살아가면서 주변에 같은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위로하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고 했다.

끝으로 “셋째, 우리는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더 이상 질병과 죽음이 없다는 것을 특별계시에 근거해 아는 사람으로서, 그 나라가 속히 임하여 오도록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며 “온 세상이 감당하기 어려운 전염병의 현실을 주목하여 역사의 마지막 날에 주께서 이 모든 것을 제거해 주실 것을 겸손히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하나님의 백성은 병과 고난 그 자체보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존하고 바른 관계를 지니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현재 코로나19의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굳게 하여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살아갈 것”을 권면했다.

“성경에 나타난 동물보호 정신 다시 새기자”

이어서 두 번째 발제자로 노영상 박사(백석대 기독교윤리학, 호남신대 전 총장, 한국기독교학회 전 회장)가 ‘인수공통감염병 창궐과 동물보호’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노 박사는 “최근 코로나19도 아직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지만 인수감염병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이어 “인수감염병 창궐은 인간이 동물들과의 바른 관계를 갖지 못해 야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 특히 오늘날의 공장식 축산은 동물들의 면역력을 크게 떨어뜨리는 사육방식이다. 이런 사육방식은 병에 취약하게 되며 그 병이 인간에게도 전염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덧붙였다.

더불어 “이제 우리도 인간의 입장에서만 동물을 보지 않고, 동물복지의 측면에서 그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며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성경에 나타나는 동물보호 정신을 다시 새겨 서로 위로자와 보호자가 되는 위치로 관계를 되돌려야 한다”고 했다.

“신자의 사회참여, 하나님 나라 위한 헌신”

또 이날 세 번째 발제자로 김광열 박사(총신대 조직신학, 총체적복음사역연구소장)는 ‘성도의 사회참여의 성격’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김 박사는 “코로나19의 재앙 앞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교회가 사회적 책임에 뛰어드는 가운데, 올바른 신학적, 신앙적 정체성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의 사회적 의의를 드러내는 일을 성경적으로 잘 깨닫고 감당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며 “성도가 사회참여를 하는 이유는 복음의 총체성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영향을 끼쳐왔던 죄의 통치는 전인적, 사회적, 우주적”이라며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를 회복하는 복음사역의 범위도 총체적이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와 사회봉사는 복음의 정신으로,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감당해야 한다”며 “그 이유는 첫째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는 은혜의 복음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둘째 그리스도인은 사회적 섬김의 출발점에서 뿐만 아니라, 그것을 수행할 때 고려해야할 조건들을 결정하는 일에서도 복음의 정신으로 접근하되, 무조건적인 성격과 함께 조건적인 요소들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신자의 사회참여는 주님의 복음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이다”며 “종말에 완성될 주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이 땅에서부터 총체적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는 사역”이라고 했다.

“전염병과 자연재해는 하나님의 심판일까?”

최만수·신국원 박사, 에스라성서신학회서 발제

“구약 선지서에서 질병은 ‘하나님이 절대 주권자’라는 사실”

이날 네 번째 발제를 맡은 최만수 박사(고신대 강사)는 ‘구약과 질병-선지서에 나타난 질병 이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최 박사는 “구약 선지서에 나타난 질병은 사건이 아닌 하나님의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대변했고, 백성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고 순종하도록 인도했다. 하지만 백성들은 불순종의 연속이었다. 질병은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았던 백성들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며 “구약 선지서에서 질병은 ‘하나님이 절대 주권자이다’는 사실을 알리는 하나님의 메시지였다”고 했다.

최 박사는 “하나님은 마음과 정신까지도 직접 다스리시는 전능한 분이시다. 교만한 마음은 낮추시고 하나님만이 진정한 왕임을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신다”며 “이는 바벨론 왕이었던 느부갓네살의 경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느부갓네살은 당시 대제국을 건설한 바벨론 왕이었다. 그런 왕이 미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소와 같은 동물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동물처럼 행동했다. 당시로는 이런 증상이 있는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해 공동체에서 분리하거나 사람과의 접근을 차단해야 하는 질병으로 여겼다. 이는 ‘낭광증이나 수광증으로 알려진 정신병’의 일종”이라고 했다.

이어 “느부갓네살이 비록 이방 왕이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워졌는데 왜 이런 질병에 걸렸을까? 그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운 사람이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왕국이 이룬 업적을 통해 자신의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라고 자랑했다. 그는 다니엘을 통해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알았지만 무시하고 교만함의 극치를 드러냈다”며 “왕은 자신의 권력의 모든 것이 자신이 성취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차지했다. 이런 그의 마음을 하나님은 ‘들짐승’과 같아지도록 하셨다”고 했다.

또 “이 병으로 인해 7년간 사람들에게서 격리되었다. 그가 이 병에서 회복되었을 때에 그는 교만한 마음이 변하여 겸손한 자가 되었고, 여호와께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며 진정한 주권자임을 알고 높이게 되었다.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회복되는 개인적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진실과 공의 그리고 그분이 왕을 능히 낮추시는 분임을 드러낸다”며 ”결국, 자신의 권세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깨닫는다. 실제로 그가 이 병에서 놓임을 받은 후 30년간의 통치 기간 동안 어떤 심판도 주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최 박사는 “구약 선지서에서 질병은 ‘하나님이 절대 주권자이시다’라는 사실을 알리는 장치였다. 이를 통해 모든 질병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주께서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고 알려주신다”며 “재앙 같은 전염병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다시 하나님을 만나고 그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절망에 이르는 병들이 일어날 때, 우리는 온전히 기뻐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더욱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 인간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신 분 아냐”

신국원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제공

다섯 번째 발제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본 전염병 사회 속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란 제목으로 신국원 박사(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총신대학교 명예교수)가 맡았다. 신 박사는 “전염병이 창궐하는 상황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염병을 비롯하여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재해들에 직면한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가 무엇인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어 “과연 어떤 이들의 말처럼 전염병과 자연재해는 하나님의 심판일까? 물론 그럴 수 있다. 노아 홍수가 그랬다. 관련 성경 구절도 많다. 하나님이 완악한 바로와 블레셋에게 ‘독종’(페스트)을 보내신 적도 있다(삼상 5:6; 6:11, 출 8-9장)”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난이 인류의 죄악에 대한 직접적 심판임이 분명한 경우는 드물다. 하나님께서 질병과 재해를 통한 심판을 기꺼워하지 않으신 것도 분명하다. 다시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며 ‘무지개’를 펼치신 것이 그 증거”라고 했다.

또 “사도행전 16장에서는 지진이 빌립보 간수의 마음을 여는 도구로 사용됐다. 이처럼 재난이 사람들의 마음을 열기도 한다.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인간을 향해 분노로 불타는 심판자가 아니시다는 것”이라고 했다.

신 박사는 “왜 하나님께서 이번 코로나19나 지진과 같은 재난을 때로 허락하시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재난은 우리를 겸허하게 만든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자연의 힘 앞에서 그리고 창조주 앞에서 우리는 더욱 자세를 낮추어야 한다”며 “재난이 우리를 믿음 안에 굳게 서게도 하지만, 연약한 심령은 공포와 의심과 분노로 녹아버릴 수 있다”고 했다.

특히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거리를 두고 냉정히 둔감하게 바라보는 분이 아님을 기억하는 것도 재난에 대한 바른 시각을 갖추는 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신 박사는 또 “지구상에 많은 재난이 닥칠 때마다 성경을 공부하는 이들이 지금 우리가 겪는 재난들을 말일의 징조로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모르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며 “이를 징조로 알았다면 그에 부합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서서 남을 돕는 것이 필요하다. 진정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팬데믹 재난이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가 말일의 징조인지를 알기 원한다면, 아모스 선지자의 말을 경고의 나팔로 새겨들어야 한다. 두려워 경각심을 갖고 공의를 세우는 일에 나서라는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 이런저런 재난이 말일의 증거인지를 따지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이미 역사는 종말을 향해서 가고 있다”고 했다.

그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팬데믹과 같은 재난이 잦아진다 해서 종말이 가깝다고 기뻐하거나 긴장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재난의 소식 가운데 재림의 나팔 소리를 들어야 한다”며 “그것을 죽은 자들을 향한 심판의 조종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를 향하신 경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조종은 살아있는 이를 위해 울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칼뱅, 질병의 아픔과 고난 성화의 기회로 삼아”

‘전염병과 마주한 기독교’ 학술대회

인수공통감염병의 동물 숙주와 레위기 11장

먼저 이종훈 원장은 크리스천 의사의 시각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생태계의 순환을 위해 천지만물엔 좋은 미생물도 많이 존재한다. 나쁜 세균이라 할지라도 세균의 사람 간 전염력은 높지 않아서 인위적이든 사고이든 세균을 뿌리지 않는 한 대유행이 되기는 힘들다. 문제는 바이러스”라며 “바이러스는 세균처럼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고, 반드시 숙주 생물체의 세포로 들어가(감염) 숙주 세포의 시스템을 이용해 증식되고 다시 배출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바이러스는 감염되기 전에 미리 백신을 맞아서 예방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돌연변이가 심한 바이러스에 꼭 맞는 백신을 만들기도 쉽지 않고, 우리가 알고 있는 미생물은 전체의 1%도 되지 않을 수 있다”며 “아담이 그랬듯 이미 존재했던 미생물을 처음 발견할 때마다 인간들은 하나하나 이름을 붙이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어 “치명적인 전염병들 대부분은 동물의 몸에만 살아야 할 미생물이 종간전파를 통해 인간을 감염시키며 생긴 ‘인수공통감염병’이다. 바이러스의 목적은 숙주를 살리면서 자신의 증식, 배출되는 방법을 찾는 것이며, 인간에게 전파된 바이러스는 또 다른 사람 사이에 전염을 일으켜 인류를 위협하는 전염병이 된다. 인수공통감염에 성공한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퇴치된다 해도 다시 동물의 몸에 숨어 명맥을 유지하다가 가끔 인간들을 공격한다는 게 골치 아픈 것”이라고 했다.

또 “코로나 바이러스는 최근 가장 뜨겁게 부상하고 있는 인수공통감염 바이러스로 2002년 ‘사스’, 2012년 ‘메르스’에 이어, 2019년 잠복기에도 전염력이 있고 전파속도도 훨씬 빠른 돌연변이 신종 코로나19가 드디어 팬데믹을 일으켰다”며 “계절독감처럼 계절코로나가 되어 인간에게 장기적으로 뿌리를 내릴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그는 “이런 인수공통감염병은 보유 숙주인 동물을 모두 죽이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동물 숙주를 가려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과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신기한 사실은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 하나님이 부정하다고 하여 식용을 금지한 동물들이 인간들이 어렵게 밝힌 인수공통감염병의 동물 숙주들이 족집게처럼 나온다는 것이다. 낙타(메르스), 돼지(돼지독감), 박쥐, 뱀, 도마뱀류(코로나 바이러스), 쥐(페스트) 등”이라며 “감염병연구센터장인 류충민 박사도 레위기 11장에 대한 이 같은 관점에 동의하고 있다. 앞으로 새로운 인수공통전염병의 숙주를 찾는 일에 과학자들이 레위기를 참고한다면 유레카를 외치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 원장은 “전염병이 돌 때 인류는 신속히 백신과 치료법을 개발해야 하고, 성도들은 간절히 기도하고, 크리스천 의사들은 치료에 힘쓰며, 욥이 그랬듯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눈으로 볼 날을 기대해야 한다. 의학의 한계를 넘어선 부분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성경적인 질병관”이라며 “전염병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던져주신 청어이론의 물메기와 같다. 과학문명 바벨탑의 불완전성과 우리의 신앙적 타성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경고와 사랑”이라고 했다.

“칼뱅, 하나님 섭리의 관점에서 사람들 위로”

평택대 안명준 교수 ©페이스북

안명준 박사는 “‘역병’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플레게(πληγή)’에서 나왔는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재앙’이라는 단어로 악한 자들에게 닥칠 심판과 연관해 번역했다(계 9:20, 11:6). 중세 유럽에서 역병은 주로 페스트균에 의해 발병하는 흑사병을 가리키는 말로, 1347년부터 시작해 유럽 인구의 약 30%가 죽고 유럽의 사회구조를 붕괴시켰으며, 소외된 자들과 유대인 같은 외국인에 대한 증오와 학살, 그리고 집단폭력을 일으켰다”고 했다.

그러면서 “흑사병은 종교개혁자들의 큰 아픔이었다. 죽음의 자리를 모면한 루터와 베자는 흑사병에 대해 글을 썼으며, 쯔빙글리는 흑사병에 걸렸다가 죽음에서 살아난 후 역병가를 썼고, 루터는 자녀를 흑사병으로 잃었고, 불링거는 아내를 흑사병으로 잃었다. 역병은 인생의 폭풍과 같은 죽음의 공포였으나 이들은 욥처럼 고난 속에서도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승리했다. 흑사병은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인생의 방향과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는 영적 교훈을 주었다”며 “칼뱅 당시 역병의 공포는 서적이나 찬송 그리고 번역된 성경 안에서 나타난다”고 했다.

특히 칼뱅에 대해 그는 “칼뱅은 6세에 어머니의 죽음으로 역병의 공포라는 심리적 압박을 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1536년 8월 1일 <기독교 강요> 서문 프란시스 1세 헌정사에서 역병이라는 용어를 처음 썼는데, 그는 역병을 인간의 부패한 관습에 관계된 것으로 보았다. 칼뱅은 주변의 많은 사람이 역병으로 죽어 고통의 날을 보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인간의 삶을 인도하는 것이 분명하기에 선한 목적으로 이런 일들을 의도하셨다며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에서 사람들을 위로했다”고 했다.

안 박사는 “칼뱅의 삶은 질병으로 인한 아픔과 고통의 생애였지만 무서운 질병의 고난 속에서도 이웃을 돌보며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질병으로 인한 고난에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질병이 진정한 그리스도 학교의 학생이 되게 한다며 그리스도를 통해 아픔과 고난을 성화의 기회로 삼았다. 칼뱅이 흑사병을 통해 우리에게 준 교훈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회개와 겸손에 대한 강조와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이 하늘의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현실 속에서 헌신과 사랑과 돌봄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것”이라며 “오늘날 전염병이 세상으로 퍼진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세상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책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지혜를 가르쳐준다”고 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 닛시와 여호와 삼마 출17:14-16 겔48:35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삭대신 숫양을 미리 준비하셨다는 말에서 여호와이레라는 말이 나왔는데 성경에는 여호와란 말은 본래부터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의미하는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대신 주님 혹은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고자 여호와이레니 여호와닛시니 여호와삼마라는 말도 나오는데 오늘은 이런 하나님의 특별한 성품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여호와닛시


예루살렘 근처 야드바셈이라는 곳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의 학살을 추모하는 기념관이 있습니다. 그곳에 새겨진 문구가 인상적입니다. “용서는 하되 결코 잊지는 말자” 나치의 만행도 하나님이 주신 승리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문구입니다. 이처럼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17장 14절에는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으로 삼고 또 여호수아의 귀에 그것을 되풀이 하여 말하라. 내가 하늘아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철저히 없애리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이것이란 이스라엘과 아말렉과의 전쟁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말인데 좀더 자세히 들어가 보자.

 

BC 약1440여년 경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을 한 후 마지막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로 들어섰다. 광야는 말 그대로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추운 곳이다. 그렇다고 낮에 더울 때에 마실 물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 광야생활 통해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셨던 것이다.

물이 없다고 부르짖을 때는 반석에서도 물이 콸콸 솟아나 마시게 해주었고 매일 새벽아침에는 만나로 저녁에는 메추라기로 먹을 수 있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그 백성들은 알게 되었다. 정말로 하나님이 돕지 않고서는 그들은 살아갈 수 가 없는 백성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이 자기들 가운데 계신가? 아닌가? 시험을 하므로 하나님의 노를 일으키게 하였던 것이 몇 번 이던가?

이스라엘이 출애굽 때 두 가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떠날 수 없도록 뒤에서 물고 늘어지는 애굽 왕 바로이었고 또 앞으로 전진 할 때에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아말렉이라는 원수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막는 아말렉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혈통에서 야곱의 형이 에서입니다. 그런데 (창36:12)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아말렉은 에서의 손자입니다.

에서는 배고픈 창자를 위해 장자의 명분인 상속권을 팔았던 사람입니다. 배가 고픈데 예배가 밥 먹여주나? 영적 무관심, 현실주의자, 이기주의자가 에서같은 사람입니다.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아말렉입니다. 영적축복엔 무관심하고 현실문제, 물질문제만 급급한 자가 에서요, 아말렉의 가치관입니다.

야곱은 누구입니까? 나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야곱입니다. 야곱이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라면, 에서는 인간중심의 사람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에서와 야곱이 싸우듯이 우리 안에도 에서의 가치관과 야곱의 가치관이 싸웁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세상의 가치, 거룩한 마음과 육신의 정욕, 영원한 가치와 현실주의가 내 안에서 싸웁니다. 우리들도 기도하기를 내 속에 있는 에서와 아말렉의 체질을 야곱의 체질로 변화시켜주소서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말렉은 (신25:17-18)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한 족속이며 천지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교회와 성도를 존중할 줄 모르는 자들이 아말렉입니다.

 

(출17:8)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르비딤에서 이스라엘과 싸우니라로 시작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 길을 막는 아말렉족속과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까지 종으로 살았기 때문에 누구와 싸움을 한 적도 없는데 아말렉이 와서 르비딤에서 싸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행진하고 있었는데 에서의 후손인 아말렉 족속이 이스라엘을 쳤습니다.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이 피곤할 때 후미에 있는 약한 자들을 쳤다고 합니다. 힘들고 약할 때 공격하는 것은 비겁하며 그에 대한 상처와 분노는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말렉은 무기로 무장하고 후방에서 힘들어 지쳐서 떨어져가는 자들을 갑자기 공격을 하여 전쟁을 걸었지만 이스라엘은 이 처음에 행한 전쟁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을 했을 때 싸우는 방법이 좀 희한했습니다.

(1) 모세가 손을 들면 전쟁에서 이기다

아말렉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여호수아는 젊은 장정들을 모집하여 산밑에서는 아말렉과 전쟁하고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도로 부르짖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은 하루 종일 밀고 밀리는 팽팽한 싸움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모세가 손을 들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지는 겁니다. 여호수아가 어떤 전략을 가지고 있느냐? 군대의 숫자가 많으냐 적으냐, 어떤 무기로 싸우느냐 등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산위에서 모세가 손들고 기도하는 것이 승리하는 무기였습니다. 기도할 때 손을 드는 것은 하나님한테 먼저 항복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내가 죽으면 망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내가 항복하면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살고 민족이 삽니다.

(출17:10) 여호수아가 모세가 자기에게 말한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더라. 모세와 아론과 홀은 산 꼭대기로 올라갔는데

(출17: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그가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라.

그래서 아예 모세를 바위에 앉게 합니다. 그리고 해가 질 때까지 그 양손을 아론과 훌이 받쳐 들고 있습니다. 그 결과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이런 식의 전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은 모세가 기도할 때는 승리했다는 말입니까?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우선 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것의 이름을 여호와닛시라 하였습니다. 여호와닛시는 ‘여호와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깃발이 상징하는 바는 깃발은 군대를 상징합니다. 깃발 아래 모이고 깃발을 따라 행진하고 깃발을 꽂을 때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모세의 손이 깃발 역할을 했습니다. 이 깃발을 볼 때 이스라엘은 힘을 내서 싸워 승리했습니다.

깃발이 보이지 않을 때 이스라엘은 패배했습니다. 깃발은 곧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깃발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있습니다. 우리도 깃발을 보고 그 깃발을 따라갈 때 승리가 있습니다.

산아래에는 여호수아로 하여금 전쟁을 하도록 하고 모세는 아론과 훌을 데리고 산위에 올라가서 기도하였을 때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그가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는 전쟁인데 이때 아론과 훌이 모세 양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해가 질때까지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아서 이스라엘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께 단을 쌓고 여호와닛시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기도도 필요하지만 그 기도는 깃발 되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기도이어야 합니다. 세상전쟁은 항복하면 끝입니다. 영적전쟁은 두손 들고 하나님께 항복하면 승리합니다. 내가 사령관, 지휘관이 아닙니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었다" 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했다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피곤해도 기도를 멈추면 안됩니다. 내 기도의 손이 올라가면 가정이 승리하지만, 피곤하여 기도의 손이 내려오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80살 모세가 피곤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형 아론과 매형 훌 두 사람이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하여 모세의 기도하는 팔을 붙들어 주었을 때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영적전쟁은 기도로 승리하는 것인데 영적으로 먼저 승리하면 결국은 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아말렉과의 전쟁은 양면으로 싸웠습니다.

첫째는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말렉과의 전쟁은 골짜기의 전쟁이었습니다. 둘째는 모세와 아론과 훌이 산꼭대기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는 산위에서는 영적전쟁이 있었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산꼭대기에서 기도하므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기도하면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가능해 집니다. 기도하면 세상 사람들이 꿈도 꾸지 못했던 기적이 여러분에게도 일어납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여호와 깃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 말씀을 붙잡고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하면 이기고 또 이겨 여호와 닛시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지휘하에서 승리하였듯이 세상사는 동안에도 교회로 모여 세상의 왕인 사탄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모두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연약한 교인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민족을 가슴에 끌어안고, 기도할 때에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승리의 깃발이 천국에 꽂혀지는 그날 까지 여호와 닛시의 복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의 줄을 놓지 안기를 믿습니다.

 

(2) 하나님을 대적하는 아말렉을 잊지 말자

오늘 말씀의 핵심은 15절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것의 이름을 여호와닛시라 하였으니 16 이는 그가 이르기를 주께서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리라고 주께서 맹세하셨도다. 하였기 때문이더라.

아말렉 족속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대대로 그들의 후손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아말렉의 역할을 자청하지 마십시오. 뒤에 처지는 교인도 되지 말고, 뒤에 처진 교인을 공격하는 사람도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전쟁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으로 삼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전쟁을 수행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게 하라 명령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악한 마귀와의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는 비밀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악한 사단과 아말렉은 전면전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행렬에서 뒤처진 사람들, 은혜의 자리에서 멀어진 사람들, 교회의 비전에서 멀리 처진 사람들, 믿음의 확신없이 방황하는 사람들, 구경꾼처럼 원망불평하는 사람들을 악한사단이 공격합니다.

이 아말렉과 치러진 전쟁을 성경에 기록하고 잊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하지만 아말렉은 이스라엘과는 형제 관계였습니다. 아말렉은 야곱의 형 에서, 곧 에돔의 자손입니다(창36:12). 형제의 몰인정은 사람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합니다. 이후 아말렉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세력을 상징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아말렉이 이스라엘에 행한 것은 처음으로 르비딤에서 아말렉과의 싸움을 시작으로 이스라엘과 아말렉은 대대로 원수 관계가 됩니다.

사울 왕 때에 아말렉과 전쟁이 있었습니다. 아말렉 왕 아각을 사로잡았지만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사울 왕이 물질에 욕심을 내어 아각 왕과 좋은 짐승들을 남겨 놓았다가 선지자 사무엘의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다(삼상15:9 그러나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또 양과 소와 살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과 어린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그것들을 진멸하려 아니하며 다만 나쁘고 가치 없는 것만 다 진멸하니라).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가 페르시아 치하에 있을 때 벌어졌습니다. 이때 하만이란 자가 유대인을 박멸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에스더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이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함께 있는 모든 대신 위에 두니”(에3:1) 하만을 아각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아각은 아말렉의 왕 아각입니다. 하만은 그의 후손으로 추정합니다.

하만이 유대인 왕궁문지기 모르드개에 대한 원망을 품고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열두째 달 곧 아달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대인들,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을 막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에3:13) 이런 위기는 하만 때만이 아니라 포로로 살던 유대인들에게는 언제든 닥쳐올 수 있는 일상적인 공포였습니다. 하만의 계획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나아간 왕비 에스더의 목숨을 건 항명과 모르드개의 활약으로 저지됩니다. 오히려 하만이 모르드개를 나무에 달려고 했던 바로 그 나무에 자신의 목이 달리게 되고 유대인들을 대적하던 세력들이 거꾸로 이 날 보복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부림절입니다. 유대인 전통에서는 부림절 앞에 오는 안식일을 자코르라 부릅니다.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아말렉을 ‘기억하라’는 말씀과 관련있다 할 것입니다.

 

아말렉의 만행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만행을 물리치고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대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가져다주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무리에 맞서 싸우시는 하나님입니다. 주께서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리라고 주께서 맹세하셨도다. 하였기 때문이더라(16). 그들이 더 이상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복수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복수는 무섭습니다. (나1:2-3)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시며 원수갚는 분이십니다. 주께서는 보복하며 격노하는 분이시니 주께서는 자신의 대적들에게 보복하시고 자신의 원수들을 위해 진노를 간직하시도다. 3 주께서는 분노하기를 더디하시고 권능이 크시며 사악한 자를 결코 사면하지 아니하시리도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세력에 대해서 분노하는 분입니다. 그들에게 복수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무조건적인 편견에 사로잡히거나 민족적인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기억하십시오. 마지막 때에 최후의 심판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의인들을 괴롭힌 악인들에 대한 철저한 심판이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르지만 우리는 정의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아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아말렉족속을 대적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라면서 우리들에게 승리케 하여주시는 하나님께 늘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아말렉에 대한 교훈

그리스도 십자가 이후 우리는 복수나 응징보다는 용서나 사랑이라는 단어가 더 친숙해졌습니다. 로마서 12장 19-20절 말씀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원수 갚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 몫입니다. 복수는 하나님께 맡기고 너희는 사랑의 길을 가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소년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말하기를 또 주께서 칼이나 창으로 구원하지 아니하심을 이 모인 온 무리가 알게 하리라. 전쟁은 주게 속한 것인즉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 주시리라(삼상 17:47)하면서. 전쟁의 승패는 인간의 능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으로 벌인 전쟁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14절에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으로 삼고 또 여호수아의 귀에 그것을 되풀이 하여 말하라. 내가 하늘 아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철저히 없애리라" 하시니라.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가 된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는 전쟁 마당에 나가 열심히 싸웠습니다. 어떤 때는 이기고, 어떤 때는 지는 그 이유를 잘 몰랐습니다. 여호수아는 전쟁의 승리의 비결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까지 들어갈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또 여호수아의 귀에 그것을 되풀이 하여 말하라. 내가 하늘아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철저히 없애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전쟁은 여호수아 자신이 열심히 싸워서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게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모세로 하여금 여호수아에게 알려주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잘나서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내가 주님을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2. 여호와 닛시

모세는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단을 "여호와 닛시"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여호와 닛시라는 말은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란 뜻입니다. 깃발은 전쟁시 용기와 힘을 북돋워 주며 동시에 소속감을 고취시켜 주는 상징물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말은 "여호와는 당신을 따르고 의지 하는 자의 승리의 깃발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시편 20:5에는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주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최초로 경험했던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을 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여호와닛시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그를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 자에게 힘과 방패와 승리의 깃발이 되신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몸된 교회는 오늘날의 여호와닛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교회를 통해 말씀과 기도를 통해 병마와 이단과 사단과의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영력과 기력과 근력이 더 충만이 있어야 될 주로 믿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길목을 막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심과 기도으로 승리한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끝나는 날까지 언제 어디서 아말렉이 대적한다 하더라도 말씀과 기도의 권세로 또 주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삼마의 복

성경에서 전쟁의 대립개념으로서 쓰는 말로 평화, 화평, 평강 등을 의미하는 말이 [샬-롬-]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샬롬하면 전쟁이 없다는 소극적인 상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무엇에 의해서도 저해되는 일 없는 개인 및 공동체의 생활에 있어서의 정신적, 물적, 육체적으로 자유, 완전한 이상적 충족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호와살롬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에스겔서에 나오는 여호와삼마의 축복을 믿어야 합니다(겔48:35). 여호와삼마라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거기 계신다는 뜻입니다. 2019년에도 우리들이 가는 곳마다 우리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실 것이며 우리들이 어디를 가든 우리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인이시면서 천국에도 계시고 교회에도 계시고 우리 마음에도 계시고 여러분 집에도 계시고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일년 365일 동안 우리가 가는 곳마다 그곳에 계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바다를 가르시기 전에 먼저 건너편에 가서 계셨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전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와 가나안에 먼저 가 계신줄로 믿습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서 가셨습니다. 여호와삼마에 관련돤 말씀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삼마 (겔 48: 30~35)

30 그 성읍의 출입구는 이러하니라 북쪽의 너비가 사천오백 척이라

31 그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를 것인데 북쪽으로 문이 셋이라 하나는 르우벤 문이요 하나는 유다 문이요 하나는 레위 문이며

32 동쪽의 너비는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요셉 문이요 하나는 베냐민 문이요 하나는 단 문이며

33 남쪽의 너비는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시므온 문이요 하나는 잇사갈 문이요 하나는 스불론 문이며

34 서쪽도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갓 문이요 하나는 아셀 문이요 하나는 납달리 문이며

35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본문 말씀의 배경을 보면 BC 586년에 유다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에게 멸망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지 14년 되던 해에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에스겔서는 총 48장으로 된 예언서인데 그 내용을 보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장에서 32장까지는 주께서 거기 계시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주께서 거기 계시지 않기 때문에 유다가 멸망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32장에서 48장까지는 주께서 거기 계신다는 내용입니다.

주께서 거기 계시기 때문에 유다가 다시 회복되리라는 내용입니다.

주께서 거기 계시지 않으면 멸망하게 되고 주께서 거기 계시면 회복되는 축복을 받는다는 내용이 에스겔서의 전체적인 내용입니다.

 

그리고 48장에는 말세에 지어질 예루살렘 성읍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읍 사면에는 총 12개의 대문이 각 방향마다 3개씩이 있는데 그 성문의 이름은 유다 12족속의 이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는 말씀은 35절 말씀입니다.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고 했습니다.

 

(1)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이름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여러 별명 같은 이름들이 있습니다. “여호와닛시”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인데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여호와살롬”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평강이라’는 뜻인데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여호와이레”라는 이름이 있습니다.‘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인데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여호와라파”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치료하신다’는 뜻인데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여호와삼마라고 했습니다. 삼마라는 말은 거기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거기 계시면서 도우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여호와 샬롬의 평화가 있고, 번영이 있고, 축복이 있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왜 유다가 멸망했습니까? 주께서 거기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유다가 다시 회복되었습니까? 주께서 거기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삼마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주께서 거기 계시면 우리를 도우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시어서 우리들은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되는 여호와삼마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있을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간 종 노릇할 때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해내게 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 7절 말씀에 보면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았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들었나니 내가 그들이 고통을 아노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당하는 고통을 “보았고” “들었고”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모세라는 지도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길 40년을 갈 때도 하나님은 거기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면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마실 물과 먹을 양식과 고기를 공급해 주시고 대적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2) 역사 속에 계신 하나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유대인 작가 “엘리 위젤”의 자서전 「밤(Night)」이라는 책에서는 제 2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의 히틀러가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고발하였습니다.

위젤은 어린 시절을 헝가리의 작은 마을에서 신앙심 깊은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1944년 15살 때 부모와 누나와 여동생과 함께 아우슈비츠에 끌려갔습니다. 위젤은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감방 책임자가 위젤의 금니를 빼어 가려고 괴롭혔습니다.

하는 수 없이 위젤은 녹슨 숟가락으로 금니를 뽑아서 감방 책임자에게 바쳤습니다. 부모님과 누나와 여동생은 그곳에서 학살을 당했습니다.

어느 날 13세 소년이 수용소를 탈출하다가 붙잡혀서 공개적으로 교수대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소년은 30분 이상 밧줄에 매달려서 혀를 내밀고 꿈틀거리며 죽어갔습니다.

위젤은 온 가족이 학살당하고 매일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소년이 밧줄에 매달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절규를 합니다.

“하나님! 도대체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그때 위젤의 내면에서 이런 대답이 들려옵니다.

“내가 어디 있냐구? 저기 있잖아. 저기 목매달려 버둥거리고 있잖아”

하나님께서 위젤에게 들려주신 음성은 ‘나는 저 소년의 죽음 가운데, 유대인의 고통과 절규 가운데 있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현재 고난의 자리에도 계시고 형통한 자리에도 계십니다.

유대인의 제사장이요 이스라엘의 젊은 청년이었던 에스겔은 참으로 비운의 시대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성전의 제물을 먹고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성년이 되어 영광스런 제사장 위임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 위임을 받은 지도 얼마 안 되어서 나라가 멸망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의 계속적인 범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내려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모든 성읍은 바벨론에 의해 불타버렸고 휘황찬란하던 예루살렘 성전도 비참하게 파괴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뿐입니까? 모든 예루살렘의 거민은 바벨론에 노예로 끌려갑니다. 이스라엘 왕은 두 눈이 뽑힌 채 피를 철철 흘리며 끌려가고 궁중의 대신이나 율법 학사나 성전의 제사장들도 종의 신분으로 끌려가는 비극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에스겔도 사슬에 묶인 채 눈물을 흘리며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스겔의 개인적인 비운이었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 절망의 깊은 먹구름 속에서도 약속의 땅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픈 향수의 본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벨론 그발강가에 모여 앉아 수금을 타며 구슬픈 곡조로 본향의 노래를 부르곤 하였습니다.

에스겔도 그 무리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바로 그런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에스겔을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에스겔의 눈을 열어 주시고 하늘 보좌의 신령한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두렵고 떨리는 광경이었습니다. 과연 이스라엘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바로 그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원인이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그들이 이제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에겐 절대적으로 희망이 없다고 에스겔로 하여금 예언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계속해서 바벨론의 종노릇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스라엘 멸망이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에스겔 2장부터 36장까지 계속해서 이런 예언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은 그런 에스겔에게 또 하나의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과 예루살렘성의 재건에 관한 환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수많은 해골들과 마른 뼈들이 있는 골짜기로 데리고 갔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수많은 해골과 마른 뼈들이 주의 말씀과 생기로 인하여 다시 살아나 큰 군대를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에스겔에게 보여주셨습니다(겔 37장). 그리고 그 능력으로 다시 살아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다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여 새로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도성을 회복할 영광의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겔 40-48장). 에스겔은 먼저 예루살렘 시온산 위에 세워질 찬란한 성전의 영광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웅대하게 재건되어 있었습니다. 야곱의 열두지파, 곧 야곱 총회의 기업들이 다시 회복되었고 이 영광스런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거대한 도시로 건설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이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고 이름 하여 주셨습니다(겔 48:35).

(에스겔 40장 1-4절, 48장 35절)

1 우리가 포로 된지 이십 오년이 되는 해 즉 그 도시가 공격을 받은 뒤 십 사년이 되는 해 곧 그 해의 시작의 그달 십일 바로 그날에 주의 손이 내위에 임하여 나를 거기로 데리고 가시니라

2 하나님께서 환상 속에서 나를 이스라엘 땅으로 데리고 가서 심히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으셨는데 그 곁에는 남쪽으로 도시의 형태 같은 것이 있더라.

3 그분께서 나를 거리로 데리고 가셨는데 보라 거기에 놋의 모습과 같은 사람 하나가 손에 아마줄과 측량 갈대를 가진 채 문에 서 있더라.

4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네게 보여 줄 모든 것을 네 눈으로 보며 귀로 듣고 네 마음을 그것들 위에 둘찌어다. 내가 그것들을 네게 보여 주려고 너를 여기로 데려왔나니 네가 보는 모든 것을 다 이스라엘 집에게 밝히 드러낼지어다, 하더라.

겔 48:35 그것을 측량하면 돌아가며 (사면의 도합이)만 팔천갈대더라 그날 이후로 그 도시의 이름은 주께서 거기 계신다가 되리라.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3) 여호와삼마

여호와삼마라는 말은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다’는 말입니다. 성전에 계시던 하나님께서 성전을 중심으로 세워진 새 예루살렘 도성에도 똑같이 계신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여호와삼마는 에스겔 선지서의 중심사상이었습니다. 이것이 에스겔 선지서의 목표였고 이것이 에스겔 선지서의 핵심이며 결론이었습니다.

젊은 선지자 에스겔은 저 바벨론 땅에서 목이 터져라 여호와삼마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절망에 지쳐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겔의 예언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피를 토하도록 외치는 에스겔의 여호와삼마의 소리가 자신들을 조롱하는 소리로만 들릴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젊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자기를 이렇게 종으로 버리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하는 마음으로 돌을 던졌습니다. 에스겔은 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이마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죽습니다. 그러나 전설에 의하면 그는 쓰러져 죽으면서도 여호와삼마를 외쳤다고 합니다. 여호와삼마! 여호와삼마! 이 비운의 선지자 에스겔! 그는 절망의 먹구름 속에 살면서도 먹구름 속에 감추어져 있는 은빛 광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 백성들의 회복의 비전과 축복의 환상을 외치며 죽어갔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죽었지만 그 입술 속에서 선포되었던 여호와삼마의 복음은 아직도 지구촌을 메아리치고 있고 하늘 보좌를 진동하도록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호와삼마는 바벨론 해방 이후에 실제로 역사적으로 성취되었고 신약의 교회시대에 영적으로 성취되었으며 또한 종말론적으로 궁극적인 성취가 이루어져 가는 가운데 있습니다.

여호와삼마! 이것은 바벨론 포로 시절 하나님의 회복을 기다리던 에스겔 선지자의 소원이었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소망이었습니다. 또한 이것은 현대를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기도 하며 종말론적으로는 전 시대, 전 역사 속에 살았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 소망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삼마란 구체적으로 어떤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지금 선민 이스라엘이 처한 역사적 정황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모든 것을 다 놓치고 빼앗기고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과연 그들의 처지는 마치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것처럼 마른 뼈와도 같았고 마른 해골들과도 같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좌절과 비탄 속에 젖어 암흑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여호와삼마를 외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삼마! 하나님은 죽지 않으셨고 우리를 떠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분은 반드시 우리를 바벨론에서 해방해 주셔서 우리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고 그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여호와삼마의 성읍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일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삼마의 복음으로 당신의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여호와삼마의 구원은 그냥 보통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구원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지금 너희의 처지가 골짜기에 누워있는 해골들과 같고 마른 뼈다귀와 같다 할지라도 내가 너희를 구원하면 된다. 아무리 너희에게 돌파구가 없고 희망이 없어 너희가 절망의 산으로 첩첩이 싸여 있다 할지라도 내가 너희를 구원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내가 누구란 말이냐? 하늘과 땅을 지으신 전능자가 아니더냐? 천지의 역사를 주관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더냐? 그러므로 너희는 못해도 나는 할 수 있다. 너희는 포기하여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반드시 때가 되면 내가 너희를 바벨론에서 구원해 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여호와삼마의 성읍을 재건하여 여호와 삼마의 축복을 누리게 하리라.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니까 말이다. 할렐루야!

 

셋째, 임마누엘의 언약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호와삼마!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구원해 놓은 그들과 그들의 장막, 아니 그들의 성읍에 영원히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영원히 축복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원수들이 에워싸고 군대가 너희를 향해 진 칠지라도 내가 너희와 함께 해 주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볼지어다.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하여주리라는 것이 바로 여호와삼마의 복음이요 축복의 메시지였습니다.

 

(4) 여호와삼마의 신도시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반역하자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왕을 통해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성전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백성들은 바벨론에 끌려가 종노릇을 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번에도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다시 재건하고 회복시키는 여호와삼마의 신도시를 계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한 도시! 하나님의 성전에 의해 다스려지고 축복을 받는 도시! 하나님은 실제로 이 도시를 이루셨습니다. 기어이 하나님은 페르샤의 고레스왕 때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에서 해방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해서 성전을 건축케 하였고 느헤미야를 통해서 예루살렘 성벽과 도시를 재건하도록 했습니다. 한마디로 여호와삼마의 도시를 이룬 것입니다.

물론 이 여호와삼마의 도시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인 예언이요, 환상이었습니다. 종말에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을 목표로 한 예언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여호와삼마의 성읍은 오늘날도 교회를 통해 우리들에게도 영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계속해서 종말을 향해 궁극적으로 이루어져 가야 합니다. 살아있는 교회라면 성도들에게 영적인 여호와삼마의 도성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참된 교회란 주일날 모였다가 흩어져도 영적으로는 언제나 교회와 성도 간에 영적인 네트워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결과 성도는 교회를 통해 은혜를 받고 신앙의 지도를 받으며 내 자녀, 내 가정, 내 직장과 사업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신도시, 여호와삼마인 것입니다. 더 위대한 여호와삼마의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더 온전한 여호와삼마를 이루어 갑시다.

 

2000년전 예수님께서 유대 땅에 오셨던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라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표현하면 “여호와삼마”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도우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셔서 평화와 번영의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고난을 당할 그 당시에도 거기에 계셨다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삼마”는 ‘거기 계시다’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거기”가 어디입니까? “거기”는 장소적인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곳이 바로 “거기”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거기에 함께 계시면서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5) 미래에도 거기 계시는 하나님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미래에도 거기에 계신다 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언제입니까? 우리의 미래는 앞으로 살아갈 날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원한 미래는 천국에서 영생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미래인 천국, 거기에도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절 말씀부터 보면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적용한다면 “ 천국은 여호와삼마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있는 거기에 함께 계시면서 도우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시어서 평화와 번영의 축복을 주시면 가장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마태복음 28장 20절은 예수님께서 죽은지 삼일만에 부활하셨다가 40일 지난 후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하시니라.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함께 계시며 또 앞으로도 함께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거절하지 아니하는 한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그분의 도우심과 지키심과 인도하심이 여러분과 영원히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그분을 원하고 기도로 모셔 들이시길 바랍니다. 믿음이 없이는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믿음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말씀을 계속 듣고 읽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말씀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장차 우리가 영원히 거할 곳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삼마” 천국에 계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아멘.

 


여호와 살롬은 순종으로부터 얻는다 삿6: 20-27, 7:7, 16-18

 

얼마전 월트컵결승전에서 프랑스와 만난 크로아티아는 아주 작은 나라인데 면적으로는 우리나라의 1/2이고 인구는 400만명이다. 이런 작은 약소국이 월드컵에서 8강에서 러시아를 이겼고 4강에서 영국을 이겼고 결승에 올랐던 나라인데 이런 작은 나라가 자기보다 큰 나라들을 꺽고 결승까지 올라갔다는 것은 스포츠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전쟁에서는 아주 작은 나라가 강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한다면 스포츠경기와는 다르게 약소국이 강대국을 이긴다는 것은 기적이 아니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세계역사에 일어난 전쟁중에서 약소국이나 약소민족이 강대국들을 상대로 승리한 전쟁하면 이스라엘과 아랍연합국과의 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이야기는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이 아니라 우리들이 살아가던 시대에 일어났었던 전쟁으로 친히 우리가 보고 듣고 익히 잘 아는 이야기이다.

지금부터 70년전 우리나라가 독립하였던 바로 그 해에 이스라엘도 1948년 5월 14일 독립 선언을 하였는데 24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사우디 아라비아 그리고 이집트 등 아랍연합국 6개국은 신생 독립국 이스라엘을 향해 일제히 공격 개시하므로써 이스라엘은 8개월간 독립전쟁을 치르게 되었는데 독립할 당시 60만명의 인구중 1%에 해당하는 6천명이 전사했으니 얼마나 큰 손실이었을까?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아랍 연합군을 물리쳤으나 유대 민족의 최대 성지인 통곡의 벽 등 구 예루살렘 성안 유대인 지역을 요르단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그러나 이 독립 전쟁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은 이 독립전쟁에서 패배를 극복하기 위해 군비를 증강시킨 끝에 1956년 이집트가 수웨즈 운하를 국유화하면서 이스라엘 해상을 봉쇄하였을 때 이스라엘은 ‘시나이 작전'이라는 이름 하에 시나이 반도를 점령함과 동시에 최신 장비로 무장한 이집트군을 무력화시켰고 전쟁을 종결시킨다. 당시의 벤구리온 수상은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나세르 대통령의 기를 꺾는데 성공했다. 이스라엘은 독립후 지금까지 독립전쟁 (1948), 시나이작전(1956), 6일전쟁(1967)등 6차례의 중동전쟁을 치렀는데 매 전쟁마다 생존이 결렸던 전쟁이었지만 이스라엘 역사의 분수령이 된 것은 1967년 6월 5일부터 10일까지 딱 6일간 전쟁을 치렀던 6일 전쟁이었다. 애꾸눈 모세 다얀 장군이 국방 장관으로서 활약한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국경을 맞닿은 시리아부터 골란 고원, 요르단으로부터 요르단 서안 지구 즉 동예루살렘, 이집트로부터 시나이 반도 등을 빼앗아 자기 영토의 3배나 넘는 넓은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 6일전쟁을 제3차 중동전쟁이라고도 하는데 어떻게 가장 작은 영토와 가장 적은 인원을 보유한 이스라엘이 6일전쟁을 통해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닿은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 4개 아랍국가들을 상대로 확실하게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던 ‘6일전쟁’에 대해 사람들은 말하기를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기적의 전쟁이라고 한다.

이 6일 전쟁에 대해 좀더 자세히 말한다면 제1차 독립전쟁과 제2차 수에즈운하로 발생한 시나이작전에서 이스라엘에 패한 이집트와 중동국가들은 이스라엘을 눈에 가시처럼 생각하면서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간에는 늘 살얼음을 밟는 듯한 정치적·군사적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이집트의 국명을 ‘아랍연합 공화국’이라고 하면서 이집트를 아랍국가의 맹주로 자처하고 아랍국가들의 통합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켜 나간다.

이집트의 나세르는 ‘이스라엘과 전쟁이 벌어지면 승리를 확신한다’고 전쟁분위기를 돋구면서 반 이스라엘 행보를 통해서 아랍민족주의를 자극하고 이집트 주도하에 아랍국가들을 통합하고 있었다. 이런 전쟁일보직전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군사적 전진배치에 위협을 느끼면서 이집트에 선제공격을 감행한다.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은 수많은 전투기들을 출전시켜서 이집트의 공군기지를 맹 폭격하니 이집트공군은 반격한번 못하고 이집트 공군기 450대 중 300대가 파괴될 정도로 엄청난 참패를 당했고 이스라엘 공군전투에서 대승리를 점한 상태에서 이집트군과의 지상전투에서도 또 다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시나이반도를 점령한다.

이 6일전쟁에서 이집트의 나세르는 이스라엘과 국경분쟁을 겪고 있는 시리아와 요르단, 레바논에게 이스라엘을 공격해줄 것을 요청하자 이번 전쟁은 아랍주변국가들로 확대되자, 이스라엘은 신속하게 공군기를 출동시켜서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의 공군기들을 격파해 버린다.

이스라엘은 역시 이들 국가들과 지상전투에서도 압승을 거두어서 이스라엘은 시리아가 점령했던 골란고원과 요르단이 점령하였던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을 차지하면서 이스라엘은 영토가 3배로 크게 확장되었다. 이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의 병력은 5만명에 비해 아랍연합국들의 병력은 24만명으로 이스라엘군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이스라엘군은 고작 800명이 사망한데 반해, 아랍연합군은 무려 21,000명이 사망하면서 ‘6일전쟁’은 이스라엘군이 아랍 4개국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쟁취한 전쟁이 되었다.

‘6일전쟁’은 이스라엘에게는 엄청난 영광을 안겨주었고, 아랍국가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엄청난 치욕과 수치를 안겨주었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야 말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사사기에 있는 대로 여호와 살롬이라고 수없이 외쳤을 것이다.

 

1. 여호와 살롬의 기원

삿 6:24에는 기도온이 주를 위해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부르는 말이 나오는데 샬롬은 평안이라는 뜻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사이기도 하다.

그러면 여호와 샬롬(삿 6: 20~24)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합니다.

20. 하나님의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누룩없는 납작한 빵을 가져다가 이 바위 위에 놓고 국을 쏟으라 하시므로 그가 그대로 하니라.

21. 그때에 주의 천사가 자기 손에 든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누룩없는 납작한 빵에 대매 그 바위에서 불이 나와 고기와 누룩없는 납작한 빵을 살랐고 그때에 주의 천사는 그에게서 떠나 보이지 아니하니

22. 기드온이 그가 주의 천사임을 깨닫고는 이르되 슬프나이다. 오 주 하나님이여! 내가 얼굴을 마주 대하여 주의 천사를 보았나이다, 하매

23.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4. 이에 기드온이 주를 위해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부르니 그 제단이 이날까지 여전히 아비에셀 사람들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느니라.

본문은 사사 시대 중에 기드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면서 그가 하나님의 천사를 만난 후에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했던 기원에 대한 내용입니다. 기드온이 부르심을 받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 사람들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삿6:1절에 보니 주께서 7년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을 미디안에 넘겨 주었느냐 하면 2:12에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 곧 자기들 사방에 있던 백성의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에게 절하며 주의 분노를 일으켰더라. 13 그들이 주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니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기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에게 이런 시련을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미디안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이 얼마나 극심했느냐 하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보통 동네에서 살지 못하고 산에 굴을 파고 그 속에서 생활 해야만 할 정도였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은 원래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가 살던 지역 사람들로 지금으로 말하면 사우디 아라비아 사람들이었습니다.

3,4절에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씨를 뿌린 뒤에는 미디안 사람들이 올라와서 토지소산을 멸하고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않고 다 강탈해 갔습니다. 5절에 보니 미디안 사람들이 메뚜기 떼와 같이 쳐 들어오니 그들이 한 번 지나가면 남아나는 것이 없을 정도로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6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 앞에 너무나 미약한 존재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6 :1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으로 주의 천사가 기드온 집에 있는 상수리 나무밑에 있었는데도 기드온이 밀을 타작하는 곳에서 타작했다가는 미디안 사람들에게 눈에 띄어 빼앗길 것 같기 때문에, 눈에 잘 안 뜨이는 포도주 틀 곁에서 타작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어려움을 당할만한 이유는 2:12-13에서 말씀한 것처럼 바알과 아스다롯 같은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사시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참 왕이었음에도 백성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잘 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샬롬(평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 기드온을 통해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샬롬을 회복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샬롬을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샬롬의 은혜를 주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족속으로 인해 늘 불안해 떨었을 때 하나님의 신이 기드온에게 임하셔서 기드온에게 승리의 약속을 주셨는데

삿6: 16~24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승리의 약속과 이적을 나타내 보이신 것을 읽어볼까요?

 

16.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한 사람을 치듯 미디안 족속을 치리라, 하시거늘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반드시 함께 하여 미디안 족속을 치게 하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17. 그가 그분께 이르되 이제 내가 주의 눈앞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주께서 나와 말씀하심을 보여 주는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18. 원하건대 내가 내 예물을 가지고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릴때 이 곳에서 떠나지 마소서, 하니 그가 이르되 네가 돌아올때까지 내가 기다리리라, 하니라.

19. 기드온이 안으로 가서 염소 새끼 한마리를 예비하고 밀가루 일 에바로 누룩없는 납작한 빵을 만든 뒤 고기는 바구니에 국은 냄비에 담아 상수리나무 밑에 있던 그분께로 가져다가 드리매

20. 하나님의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누룩없는 납작한 빵을 가져다가 이 바위 위에 놓고 국을 쏟으라 하시므로 그가 그대로 하니라

21 그때에 주의 천사가 자기 손에 든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병에 대매 그 바위에서 불이 나와 고기와 누룩없는 납작한 빵을 살랐고 그때에 주의 천사는 그에게서 떠나 보이지 아니하니

 

주님이 함께 하여 미디안족속을 치신다는 약속의 표시로 바위위에 염소새끼 한 마리잡은 고기와 누룩없는 납작한 빵에 국을 쏟고 주의 천사가 지팡이 끝을 대니 바위에서 불이 나와 그 음식들을 살라버린 것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보여 주신 것이다.

22. 기드온이 그가 주의 천사임을 깨닫고는 이르되 슬프나이다 오 주 하나님이여! 내가 얼굴을 마주 대하여 주의 천사를 보았나이다, 하매

23.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4. 이에 기드온이 주를 위해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부르니 그 제단이 이날까지 여전히 아비에셀 사람들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느니라.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던 곳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1) 기독교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시는 계시의 종교이다.

기독교는 철학이 아니요 신비주의가 아니요 이성주의가 아니며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시는 계시의 종교이다.

사실 기드온의 가문은 그리 좋지 않았으며 또한 기드온 역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만한 명문지파도 아니었다. 그가 속한 므낫세지파는 이스라엘 12지파 중 3류의 지파였고 또 그의 가문의 세력도 지극히 약하였고 기드온은 또 개인적 능력도 부족한 사람이었는데 6:15절에 보니까 기드온이 “나는 내 아비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라고 할 정도였으며 거기다가 기드온은 지극히 소심하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니다. 기드온이 뭐 하나 잘나서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 아닌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기드온이 뱃심좋고 용감한 사람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삿6:25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알제단과 아세라의 단의 숲을 헐라고 명하시는데 백주 한낮에 못하고 밤에 그리 행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겠다고 하셨을 때도 이미 바위위에서 불이 솟아나와 하나님이 함께 하여주신다는 확답을 받았음에도 다시한번 양털을 통해 기적을 구하니 믿음도 좋다고 할 수 없다. 삿6: 37절 이하에 보면 양털을 땅에 놓고 이슬이 양털에만 내리고 땅엔 내리지 않도록 구하였는데 하나님은 그가 구한대로 이슬이 양털에만 내렸다. 그런데도 기드온은 또 다시 표적을 구하는데 이번에는 양털 주위의 땅 사면에만 이슬이 내리고 양털만 마르게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여기까지 이야기는 기드온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특별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신 것이다.

이런 몇가지 시험을 통해 하나님이 기드온과 함께 하여 미디안족속들을 물리치게 된다는 약속을 믿고 나니 여러지파들로부터 기드온을 따르는 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우선 생각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기드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사람들을 모집하는데 삿6장 34절에 보면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기드온을 따르고 또 므낫세 지파도 아셀지파도 스블론지파도 납달리 지파도 기드온을 따르게 되자 모집된 이스라엘 군사가 32000명이 되었거늘,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 단 300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300명을 가지고 엄청난 수의 미디안 군대와 싸워서 승리하게 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때 미디안 군대의 숫자는 삿7:12에 보니 미디안족속과 아말렉 족속과 동쪽의 모든 자손이 골짜기를 따라 누웠는데 그 수가 메뚜기같이 많고 그들의 낙타도 수없이 많아 마치 해변의 모레 같이 많더라고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정예인원 300명을 선발하여 메뚜기 같이 많은 미디안군대를 물리침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샬롬이 회복된 것이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항상 사람숫자가 많고 적음이 아니라 정말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집되어야 합니다. 돈을 버는 일도 중요하고, 어떤 일에 성과를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짜 중요한 일은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국가의 지도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국가의 흥망성쇠가 결정됩니다. 다윗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너무나 평화스러웠지만 다윗의 손자 르호보암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같은 영토에서 같은 국가를 다스리는데도 어떤 임금이 세워지느냐에 따라서 국가의 운명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가문이 사는 것도 결국은 사람의 문제이고 교회도 마찬가지고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세워지느냐에 따라서 미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 가운데는 사람을 위한 기도가 정말 중요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들이 세워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의 자녀들이 참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배경이나 개인적인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기드온의 순종에 대해 알아봅시다.

삿 7:9 이하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적진장막으로 내려가라고 기드온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기드온이 적진쪽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표적을 주셨는데도 기드온이 300명으로 적들을 물리친다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니 이에 기드온을 미디안 진영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미디안 사람의 꿈 이야기를 듣게 하십니다. 한 미디안 군사가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니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니 그것을 쳐서 무너뜨렸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동무가 그것은 기드온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기드온은 보리떡 한 덩어리처럼 부족하고 무능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미디안 군사가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칼날에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붙이셨다”라고 해몽을 합니다. 기드온이 그 말을 듣고서야 용기를 내서 미디안 공격을 결정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드온은 집안 배경도 좋지 않고, 개인적인 능력도 부족하고, 의심도 많고, 소심한 겁쟁이였는데도 하나님께서 그를 왜 사용하셨을까요? 그의 순종을 보신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상을 찍으라고 하셨을 때 그는 두려워했지만 순종했습니다. 비록 두려워서 백주 대낮에 하지는 못했지만 결국 밤중에 가서 바알과 아세라우상을 찍어버렸던 것입니다. 또 미디안과 전쟁을 위하여 3만2천명의 군인들이 모였는데 다 돌려보내고 300명만 남게 하라고 하셨는데 그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300명의 용사로 메뚜기 같이 수많은 대적들을 완전히 물리쳤던 기적 같은 대 승리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7:16 삼백명을 세무리로 나누어 각 사람의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주고 항아리 안에 등불을 주며

17 그들에게 이르되 나만 바라보고 그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18 나와 및 나와 함께한 자들이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사면에서 나팔을 불며 말하기를 주의 칼이라, 기드온의 칼이라 하라

19 이에 기드온과 그와 함께한 백명이 중간 경점이 시작되는 때에 진영밖에 이르렀는데 그들이 막 새로 파수꾼을 세우므로 그들이 나팔을 불며 손에 있던 항아리를 부수니라 20 세무리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등불을 오른손에 나팔을 들고 불면서 외치되 주의 칼이라 기드온의 칼이라 하고는

그들은 도망하면서 각 사람의 칼이 그의 동료를 치게 하므로

삿7:24 기드온이 사자들을 온 에브라임 산으로 보내어 말하기를, 내려와서 미디안족속을 치고 그들을 앞질러 벧 바라와 요르단에 이르는 물들을 취하라, 하매 이에 에브라임 모든 사람이 함께 모여 벧바라와 요르단에 이르는 물들을 취하고

25. 또 미디안의 두 족속의 두 통치자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오렙은 오렙 바위에서 죽이고 스엡은 스엡의 포도주 틀에서 죽이며 또 미디안을 추격하여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가지고 요르단 저편에 있던 기드온에게로 나아오니라. 할렐루야!

기드온은 두려워하긴 했지만 순종했더니 그는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승을 거둔 것은 그가 목숨을 걸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있다고 자만하는 자보다는 순종하는 자를 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궁무함으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바 되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300명으로도 메뚜기 떼처럼 수많은 미디안군대를 이기게 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물맷돌 하나로도 거인 골리앗도 쓰러뜨리게 하시는 분이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3. 여호와 샬롬은 순종으로 얻는다

* 로리 베스 존스는 ‘주식회사 예수’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성공에 대한 정의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통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은 순종하고 원하지 않는 것은 순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기드온은 자기에게 좋은 것만 골라가며 순종했던 것이 아니라 적진까지 내려가라고 하였을 때 적진속까지 내려가 미디안군인들의 꿈 이야기를 듣게 된다는 것은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것에도 순종했던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에게 이제 갓 운전면허를 딴 아들이 와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이제 저도 면허증을 땄으니 차 좀 빌려주세요?” 아들의 말에 목사님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대답했습니다. “그래, 한 가지 약속을 하자! 네가 학교 성적을 끌어올리고, 매일 조금씩 성경공부를 하고, 머리를 단정히 깎는다면 네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지.” 얼마쯤 지나자 아들이 다시 아버지께 와서 차를 빌려달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들아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학교 성적도 오르고 매일 성경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런데 머리는 왜 아직도 깎지 않았니?” 그러자 아들이 말했습니다. “그 동안 성경공부를 좀 했는데요. 삼손과 모세, 그리고 예수님까지도 머리를 기르고 다니셨더라고요!” 그러자 아들의 말에 아버지가 충고했습니다. “그렇구나! 그런데 그분들께서는 어디든지 두 발로 걸어 다니셨단다. 너도 두 발로 어디든 걸어 다니도록 하렴!” 이라고 말하니 아들이 결국 아버지 뜻대로 하였다는 것은 지혜의 순종을 배우라는 것이지요.

 

1. 오늘날도 하나님은 순종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샬롬을 누리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물을 항아리에 부으라 했을 때 물을 항아리에 부으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깊은 곳으로 가 그물을 던지라는 주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순종하니 엄청난 물고기가 잡혀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부탁하시기를 성령이 임할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하셨을 때, 그대로 순종하니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여서 그들이 나가 복음을 전할 때는 하루에도 수천 명씩 예수를 믿는 대 부흥의 역사가 초대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그 무엇이든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이 오고 성공이 오고 기적이 오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나 자신은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시고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일하시고 나는 마침내 하나님의 샬롬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3. 기드온의 이루어낸 기적은 기드온의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여러분 모두가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한번 기드온이 어떻게 여호와살롬을 얻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샬롬이 사라진 사사시대에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하나님의 천사가 기드온을 찾아 와서 “너 강한 용사여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시는 도다!”라고 말하면서 샬롬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매번 사사를 통해 그들을 구원하신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큰 용사를 쓰시어 전쟁에 승리하게 하신 것입니까? 이미 살핀 것처럼 에훗은 칼도 잘못 쓰는 왼손잡이였습니다. 드보라는 여자였지요. 그러니 큰 용사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셨으니 그렇다면 기드온은 어떻하였을까요?

 

11절 보면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몰래 타작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무슨 세상을 구하려는 영웅심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냥 몰래 미디안 사람의 눈을 피해서 타작하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머리 좋은 사람, 돈 많은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들만의 나라가 된다면 가난하고 가진 것 없고 평범한 사람들은 세상에서도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도 기를 펴고 살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튼 기드온은 처음부터 영웅이거나 큰 용사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가 하나님을 만난이후 변화하였기 때문입니다. 기드온도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놀랍게 변해가는 모습이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우리들도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꿈꾸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임하여서 나로 하여금 큰일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자 그럼 기드온이 어떤 사람인가는 13절 보니

출발점에 선 기드온은 샬롬이 없었다는 불만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 기드온은 샬롬이 없었으므로 불만이 가득한 모습입니다.

주의 천사가 기드온에게 “너 강한 용사여,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하자 기드온의 불만이 기다렸다는 듯이 터져나옵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닥쳤나이까?

우리조상들이 우리에게 말해 준 그분의 모든 기적들은 어디에 있나이까?(삿613)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의 손에서 건져 내시고 가나안 땅을 주었다는 말씀에 대하여 불평을 한다는 것은 샬롬이 없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기드온의 말을 잘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어찌하여 우리가 이렇게 미디안의 압박밑에서 살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드온은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서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징계받는 원인만이라도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게 기드온의 현 주소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이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 족속의 손에서 구원할지니라. 내가 너를 보내지 아니하였느냐?.”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주께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에게 넘겨주신 것을 알고 있다면 마땅히 회개하고 자복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고개를 뻣뻣이 들고 도대체 애굽 땅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불평하는 기드온을 하나님이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랬더니 기드온이 대답합니다.

15절입니다. “내 집은 므낫세 중에서도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제일 작은 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하면 기드온은 자존감이 없는 열등감이 꽉찬 사람인 것입니다. 나는 키도 작고 별 볼일 없는 므낫세지파 사람이라는 것은 괜한 열등감으로 준비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준비가 아무것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람을 주목하십니까? 어쩌면 이것이 우리 시대,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겠습니까? 별로 잘나지도 못했고 내세울 것도 없는 저와 여러분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정말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16절)고 하십니다. 네가 미디안 사람을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기드온은 주께서 나와 말씀하셨다는 표징을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표징을 요구하고는 염소 새끼 한 마리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병을 만들고 국을 양푼에 담아 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사자가 반석 위에 고기와 무교병 놓은후 그위에 국을 쏟으라고 하니 기드온이 그대로 합니다. 그러자 주의 천사가 지팡이 끝을 내밀어 축축이 젖은 고기와 무교병에 댔더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서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습니다. 그리고 주의 천사는 떠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불로 응답받았던 것처럼, 모세가 시내산에서 불로 응답받았던 것처럼 기드온이 불로 응답받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마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이제 열심히 일하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반응은 그게 아닙니다.

22절 “슬프도소이다. 그가 주의 천사임을 깨닫고는 슬프나이다 오 주 하나님이여 내가 얼굴을 마주 대하여 주의 천사를 보았나이다 하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주의 천사를 보았느니 나의 목숨은 죽게된다는 것입니다. 기막힌 말입니다.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찾아오셨는데 기드온은 이제 죽게 되었다고 헛바퀴를 돕니다. 여기에 무슨 믿음의 영웅의 모습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냥 평범하지도 못한 여리디 여린 사람이 기드온인 것입니다. 몰래 숨어서 포도주틀옆에서 수확하던 기드온입니다. 그는 아직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이라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더 커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겠다는 것에 대해 두려움만 가득합니다. 그는 아직 주님으로 말미암는 샬롬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기서부터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이 어떻게 사용하십니까? 여기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다루시는 손길이 있다고 믿습니다.

 

23-24절입니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기드온이 주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기드온이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아니하리라”는 말씀을 듣고 단을 쌓고서 여호와 살롬! 이라고 말합니다. 드디어 기드온에게 믿음이 생겼고 샬롬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샬롬이 없이 불안하게 살았던 기드온에게 샬롬을 회복하셔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용하셨다는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4. 샬롬의 축복을 누리자

샬롬은 평안이라는 뜻입니다. 샬롬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사입니다. 여러분! 샬롬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삿 6:24).

여러분 마음이 평안하시고 여러분 가정이 우리나라가 평안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으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강이 여러분과 가정에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샬롬(Shalom)이라는 말에는 안녕이라는 뜻을 포함하여 다섯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로 평화라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외부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으로 나 자신이 살고 있는 가정과 사회와 나라가 언제나 평화롭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이 평화를 위하여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디모데에게 권면하였다(딤전 2: 1.그러므로 내가 권면하노니 무엇보다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중보와 감사를 드리되 2.왕들과 권위를 가진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하라. 이것은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며 정직한 가운데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자 함이라).

그렇게 해야하는 이유는 다른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경건 생활이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이다.

 

두째로 샬롬은 평강이라는 뜻이 있다.

이것은 내면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의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비록 외부적인 요인이 여의치 못하여 평화롭지 못하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나의 마음을 붙잡아 주심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의 내면적인 평강을 이루는 것이다. 평강을 너희에게 주노니 곧 나의 평강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요14:27)는 말씀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내적 평강을 말하는 것이다.

 

세째로 정의를 의미한다.

나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불의로 충만한 곳이 아니라 정의가 충만한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판단의 공의를 물같이, 의를 힘찬 시내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오늘날 처럼 불의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이 말을 간절히 원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만큼은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서도록 해야 한다.

 

넷째로 샬롬은 질서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가정과 사회는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가정에서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간의 질서가 흐려져 가고 있으며 사회에서는 나이가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들 간의 질서가 무너져 내린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 질서의 문제는 서로의 위치를 구별해 주는 문제이지 결코 서로를 차별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도로에서 교통 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운전자가 질서를 지키지 않아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정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질서가 바로 잡히지 못할 때 항상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다섯번째로 조화라는 뜻이 있다.

이것은 서로 대립되거나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과 결핍을 채워 줌으로 전체적인 측면에서 온전함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기드온은 처음부터 믿음의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불평에 가득 찬 사람입니다. 역사관도 왜곡된 사람입니다. 자존감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그는 두렵습니다. 샬롬이 없어 숨어사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샬롬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밖으로 끌어내셔서 큰 영웅으로 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만나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원래부터 남보다 크게 잘난 영웅이기 때문에 만나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온전히 믿지 못해 오히려 주님의 샬롬이 필요하기 때문에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도 기드온처럼 왜곡되고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이 만나주시고 샬롬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오늘 그 주님을 만나 여호와 샬롬을 회복하고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헌신하셔서 하나님이 쓰시는 믿음의 큰 영웅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목 / 여호와의 이름

본문 / 출애굽기 20장 7절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부모가 아이를 낳아서 하는 가장 부모로서의 주어진 권위를 사용하는 첫 번째 일이 이름을 짓는 것입니다.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은 어렵지만 부모가 가진 최고의 특권인데, 이름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아이를 낳아서 첫째 아이를 1번, 둘째 아이를 2번이라고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련 번호 상품 매기듯이 A, B, C 이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여자 분들은 결혼하고 나면 아이를 낳고, 아이의 이름으로 불리면서 여인의 이름이 없어져 버립니다.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로 불리고 이름이 없어져 버리면서 자신의 정체성도 혼란해 집니다. 우리가 잘 아는 김춘수 시인의 시 「꽃」에서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꽃은 그냥 꽃으로 있으며 불러 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꽃의 이름을 불러 주니까 내게로 와서 비로소 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은 존재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이름을 가질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또 하나님의 이름을 누가 지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지어서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이름을 지을 수는 없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지어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ID가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당신이 당신의 이름을 드러내셔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다양한 이름을 갖고 계시는데 가지실 필요가 없으신 하나님이 이름을 가지신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드러내셨던 성경이 출애굽기 3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학대받고 있는 히브리 민족을 출애굽하게 하기 위해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타오르는 가시 떨기 가운데서 나타나신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는 매우 주저합니다. 양치기로 도망자로 지내면서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숨어 있었던 그가 그 시대 최고의 제국이었던 애굽의 왕에게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히브리 민족을 이끌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과 설전을 벌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내가 누구이길래?”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을 보내신 분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질문을 던졌을 때 1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말하는데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자존자라는 말입니다. 나는 누구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나 스스로 본래부터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할 그분. “I am Who I am." 우리는 자존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존자, 모든 존재가 가능하게 했던 근원자이시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뭔가 결여된 분이 아니고 완전하신 분이시고, 절대주권자이시고, 하나님 위에 다른 분이 없으신 비교될 수 없는 분이심을 얘기하는 것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입니다.

마침내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애굽의 바로왕 앞으로 갑니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일을 그가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이해와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그 이름을 의지하여 바로왕 앞에 나갑니다. 이름은 그냥 이름이 아닙니다. 이름은 존재요, 그분의 인격이요, 능력이요, 명예요, 권위며 그리고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왕 앞에 나가 맞대결 할 수 있는 용기는 모든 근원의 근원이신 절대주권자이신 엘 샤다이 능력의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3계명에서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기 “망령되게”라는 말은 “실제와 다르게”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답게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잘못되게 다루어서는 안 되고 이용해서도 안 되며 misuse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 3계명 역시 1계명과 2계명과 동일한 강도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 그분에 관련된 것에 있어서는 우리가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경을 기록했던 서기관들이 성경을 필사할 때, “여호와”라고 하는 이름이 나오면 붓을 다시 씻고 난 다음에 몸을 가다듬고 나서 다시 여호와의 이름을 썼다고 합니다. 쓰다가 “여호와”의 이름이 나오면 멈추는 것입니다. 붓을 씻고 깨끗하게 하고 난 다음에 몸과 마음을 다시 정돈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쓰는 것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조차도 너무 영광스럽고 거룩한 이름이기에 쓰지 않고 점만 네 개 찍고 지나갑니다. 히브리어의 “야훼”라고 하는 자음이 네 개를 찍는 것입니다. 혹은 성경을 읽다가도 여호와의 이름이 나오면 읽지 않고 그냥 묵음으로 묵묵히 지나가기도 합니다. 죄인인 인간이 존엄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윗의 이야기 속에서 그런 것을 발견합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을 얼마나 경외했는가하는 것을 드러내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 사무엘상 17장의 다윗과 골리앗과의 싸움입니다.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 엘라 골짜기로 형들의 도시락을 들고 갔는데 이상한 장면을 목격합니다.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의 명장이었던 골리앗이 큰 소리를 외쳐대고 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하나님의 이름의 군대를 모욕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는 소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욕하는 것으로 들렸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군대는 그냥 이스라엘의 군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전쟁은 그들의 신들과의 전쟁입니다. 백성들과의 전쟁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신들과의 전쟁입니다. 그러니까 블레셋의 명장인 골리앗도 이스라엘의 군대를 욕하면서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이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의 입으로 모욕 당하는 것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골리앗을 향하여 물맷돌을 들고 나아간 결정적인 사건인 사무엘상 17장 45절을 보면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다윗이 그냥 골리앗에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는데 너의 입으로 모욕하고 있는 그 이스라엘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 이유는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과 존재를 분리시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진영의 사울왕을 비롯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냥 듣고만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두려워서 그 앞에 전혀 반응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는 사실 앞에서 침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의 관계는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련된 영적인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친밀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입니다. 누군가 자신의 어머니의 이름을 들고 욕한다면 가만히 있을 아들이 없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영성입니다. 다윗이 들판에서 양을 지킬 때 하나님의 이름은 그를 지켜준 실제였습니다. 이름은 존재입니다. 어린 시절에 양을 칠 때, 모든 맹수로부터 지켜 주었던 실제적인 능력은 하나님의 이름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능력입니다. 골리앗을 향해 달려갈 때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갔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한 것입니다. 골리앗 앞에 나갈 때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형식적으로 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어린 소년이 물맷돌만 들고 골리앗 앞에 나갈 때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오직 의지하는 것은 하나, 여호와의 이름, 그 이름의 능력이었습니다. 우리가 직접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도 문제지만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데 가만히 있는 것 역시 3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사회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에 의해서 폄하되고 모욕을 당하는데도 가만히 있다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 속에서 많은 훼손을 당하고 있습니다. 영어권에서 심한 욕들에는 하나님, 그리스도 이름을 다 집어넣었습니다.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안에서 거룩한 분노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존귀하신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거룩한 분노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가 애굽의 바로에게 달려 나간 것은 여호와의 이름의 능력입니다. 다윗이 블레셋에 나아가게 한 힘은 여호와의 이름의 능력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도행전에서 날 때부터 앉아서 일어나지 못한 사람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선포했습니다. 그 이름은 실제요 능력이요 존재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의 명예를 지키는 일에 목숨을 건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시는 가를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 이름을 걸고 나아간 다윗, 그 이름의 권세를 믿고 나아갔던 모세! 그 속에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때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십니까? 우리는 우리의 명예에 생명을 겁니다. 누가 나의 이름을 욕하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 너무 지나칠 정도로 예민합니다. 사울왕은 골리앗 사건 이후에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노래를 부르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그렇게 여호와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데도 가만히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를 당한 것에 격분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펄쩍 뛰십니까?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아니면 여러분 자신의 이름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름이 모욕을 당한다 할지라도 여호와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거룩한 분노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뿐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된 것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것을 소홀히 다루거나 함부로 다루면 매우 위험한 일이 됩니다. 절대 위험지역입니다. 구약에 법궤가 다윗성으로 돌아오는 가운데 법궤가 넘어지려고 하자 웃사라고 하는 사람이 그것을 붙들었다고 현장즉사합니다. 이상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넘어지려고 하는 걸 붙잡았는데 왜 죽었을까요? 여기에는 다양한 해석이 필요하지만 우리에게 주시는 핵심적인 메시지는 하나님과 관련된 것을 인간이 함부로 취급하는 것에 대한 위험성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그냥 물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인데 그것을 잘못 다룬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무서운 일이 하나 일어났습니다. 아나니야와 삽비라 부부가 성전에서 즉사하는 사건입니다. 이들 부부가 재산을 팔아 베드로에게 가져와 헌금을 하다가 즉사합니다. 재산의 일부를 숨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속인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성령 하나님을 속인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경솔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것을 가지고 장난을 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7-29절에서는 성만찬에 참여할 때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27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28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29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성찬예식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떡, 잔이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냥 떡이 아니랍니다. 의미 없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참여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시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구원사건의 핵심적인 의미를 살리는 그 순간은 그냥 떡이 아니고 그냥 잔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시간에 십자가의 깊은 구속의 은혜를 다지며 신중하고 정중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함부로 먹고 마시는 일은 죄를 범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가끔 재밌는 풍경이 펼쳐질 때가 있는데 이 떡이 지나갈 때, 엄마가 먹으려고 하는데 아이가 나도 달라고 합니다. 줘야 하나요? 말아야 하나요? 그 떡 한 조각 가지고 너무 그렇게 유치하게 하지 마시고 달라고 한다면 곤란합니다.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 분의 이름은 거룩합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것은 다 거룩합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맡았다면 그 일도 그냥 일이 아닙니다. 성직입니다. 어떤 직이든 성직입니다. 모세를 부르실 때 하나님께서는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선 곳이 거룩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위험한 것이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익숙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익숙해지는 것들 중에는 “예배, 기도, 말씀, 봉사, 섬김” 등과 같은 것입니다. 익숙해지면 마음은 움직임이 없고 몸으로만 따라가는 경향이 강해진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도 아무런 감동도 없고 느낌과 생각도 없습니다.

익숙해지기 때문에 예의가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사람이 기준이 됩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과 내 방법대로 함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가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유명한 사람이 교회의 직분을 맡은 경우에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켰다면 공교롭게도 그 사람 때문에 교회와 더불어 교회의 주인이 되신 주 예수님께서도 비판과 비난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그만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세상에서는 일반인들보다 월등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날마다 성전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의 성전이 이 제사장의 아들들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거룩한 성물에 손을 대기 시작하고, 자기 마음대로 다루기 시작합니다. 자기 물건 같이 다룹니다. 하나님의 성소에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관련된 일을 하며 살다보니 놀이터처럼 장난감처럼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너무 익숙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것들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취급주의 품목을 다루는 사람들도 너무 오랫동안 다루다 보면 그것이 취급주의 품목 즉 위험물인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다가 사고가 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부르거나 성경 속 수없는 용어들을 너무 익숙하게 생각 없이 경박스럽게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전화를 받을 때마다 “할렐루야!” 그러는데 그다음에 막 남 욕을 하기 시작합니다. 처음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았을 때는 예배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진지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익숙해지면서 예배다운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겁니다. 처음에 구원을 받고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 그 하나님의 은혜로우심 앞에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죄인 된 내가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날마다 회개하고 예수의 속죄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며, 예배에 나올 때마다 간절함으로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신앙의 고백은 형식화되고 기도와 찬양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언급되지만 그 안에 진정성은 놓쳐 버릴 수 있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회의하기 전에 “간단히 기도하고 시작합시다!”라고 하는데 간단한 기도는 없습니다. 어떤 기도든지 그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드려집니다.

진정성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성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진정성을 놓쳐 버리고 껍데기만 남고 모든 것은 형식화되는 그때부터 신앙은 무너지고 영적 타락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짧은 기도라도, 한 구절의 찬양이라도 우리는 언제나 진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해치울 수 있는 예배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것은 어떤 것 하나도 소홀히 경박스럽게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만큼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을 존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지상의 주님의 교회가 연약하고 부끄럽고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우리가 교회를 폄하할 수 없는 이유는 그곳이 하나님이 세우시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못난 엄마라도 때로는 정말 부끄러운 일을 했던 엄마라도 그 아들은 그 엄마의 아픔을 막 떠들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지켜주는 것입니다. 교회 직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직분은 어떤 직분이든지 존귀한 이유는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직분은 그 어떤 직분이든지 상관없이 거룩한 성직입니다. 영적 타락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지만 하나님과 상관없이 지낼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타락이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진지한 교제가 결여되면서 영적 진정성을 잃어버리면서 타락이 오는 것입니다. 이곳이 사고다발지역입니다. 오래된 신자들이거나 목회자들이 가장 위험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을 신중하게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경외심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뜻도 없이, 의미 없이 그냥 일상에서 입에 발린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축구 경기를 보다가 한 골 넣었다고 “할렐루야!”합니다. 어떤 사람은 로또를 사서 번호를 확인하면서 “주여!”합니다. “아멘!”도 그냥 “아멘!”하면 안 됩니다. “주여!”도 그냥 하면 안 됩니다. “아멘”은 좋은 것입니다. 많이 하십시오. 그러나 진정성을 담아하시라는 겁니다.

무슬림들은 시도 때도 없이 “인샬라”라고 합니다.
“인샬라”는 “신의 뜻이면…” 무조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입에 발린 소리입니다. 우리도 그런 우를 범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이 함께하셨다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우리는 생각 없이 이런 말을 수없이 주고받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지면 위험한 신호입니다. 최근 북한이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고 북한에 대한 붕괴설이 많이 떠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붕괴의 위기의 조짐을 다양하게 많은 사람들이 평가하고 있지만 가장 강력한 조짐 가운데 하나는 북한 주민들이 김정은의 이름을 막 그냥 부르거나 욕을 섞어서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종교체제와 같습니다. 김일성 주체사상 한가운데 김일성이 신입니다. 북한체제가 유지된 것은 신성으로 체제가 유지된 것입니다. 김일성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습니다. 그 신성이 지금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북한체제가 허물어지는 매우 중요한 요인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신성을 신성으로 느끼지 않고 경박스럽고 함부로 부르는 행위는 신앙이 이미 많이 무너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이름은 그냥 이름이 아닙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산상수훈을 마무리 지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매우 중요한 것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고 22절의 말씀은 더 충격적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이 정도는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수없이 부르며 사역을 하며 별 일을 다 하였는데도 주님은 정작 “나는 너를 모른다.” 하시니 얼마나 심각한 이야기입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의 삶을 통하여 올려 드리지 않는다면 그의 모든 행위는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진실되게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신앙은 입술만의 문제가 아니고 진정성의 문제입니다. 입으로 죄를 짓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마음으로도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있다면 자신도 모르게 경솔한 말과 행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이름을 가볍게 다루는 행동을 한 것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걸고 약속을 하거나 자신의 거짓을 변호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진정성이 없으면 별 생각 없이 자신이 망령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 앞에서 존칭을 사용하고 존댓말을 사용했는데 돌아서면서 아니라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과 상대를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관련된 언어들을 얼마나 겁 없이 마음대로 쓰고 오늘날 하나님에 대한 망령됨을 참 많이 봅니다. 영적 삶의 경박성이 오늘날 우리 신앙의 매우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너무 가벼워졌습니다. 헛되고 공허하게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의 거룩하고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 뜻 없이 사용하면 신앙은 자랄 수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그 이름 앞에 어떤 태도를 취하십니까? 그 단어들 안에 담겨있는 경이로우심 앞에 얼마나 마땅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나의 태도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 기도할 때, 찬양을 드릴 때 그냥 뜻 없이 형식적으로 참여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이름 앞에 마땅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너무 쉽게, 가볍게 다루어 가는 우리의 신앙적 행위가 바로 3계명이 우리에게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앞에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태도를 회복해야 할 줄 믿습니다. 단어 하나하나에 담겨져 있는 그 의미를 되새기고 우리의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진정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찬양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도 미사어구를 꾸며서 화려하고 멋지게 청산유수 같이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하고 싶은 욕망과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진솔하게 내 마음이 담겨져 있는 진실된 언어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합당한 영광을 돌리고 찬양을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처음이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의 귀중한 이름이, 그분이 귀중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하는 것이 바로 기도의 첫 번째 간구입니다.

사무엘상 2장 30절 하반절에 매우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이것은 우리가 일평생 잊지 말아야 할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엘리 제사장과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엘리 제사장뿐만 아니라 그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결국은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됩니다. 이유는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는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항상 우리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주만물을 다스리시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고 불렀을 때 하나님의 위엄과 통치와 능력이 임하는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마치 애급의 고센 지방에 머물렀던 히브리 백성들에게는 애급에 내렸던 열 가지 재앙에서 자유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애급의 고센 지방에서 재앙으로부터 자유를 누렸던 히브리 백성들과 동일한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에 문제가 있는가?

 

주기도 본문의 번역에 있어 ‘하나님’에 대한 제2인칭 대명사의 번역이 특별히 어려운 문제가 되는 것은, 인구어계(印歐語系, Indo-European family)에서는 거의 없고, 몇 개의 동양어, 그 중에서도 우리말과 일본어에서이다. 주기도 본문에서 보면, 그 첫 마디에 ‘하나님’을 ‘아버지’(호격)로 부르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 그리고 마지막 송영 부분에서 ‘하나님의 것’을 언급하는 데 있어 제2인칭 대명사 속격(소유격) 또는 소유대명사를 쓰고 있는 바, 이 네 곳에서 지난 번(2004년 12월 3일) 작성 공포된 새 번역안에서 는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것’이라고 번역하였다. 이렇게 제2인칭 대명사를 ‘아버지’라는 명사로 바꾼 것은, 우리말의 제2인칭 대명사에서는 극존대가 없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에서 하나님에 대해 ‘아버지’(헬라어로) 라는 어휘를 쓴 것은 부름말(呼稱語)과 가리킴말(指稱語)을 합쳐서 총 400여 회이고, 그 중에서 하나님의 신성이 특별히 강조된 요한복음에서는 130여 회나 사용되었다. 이 중에는 헬라어 원문에서는 제2인칭대명사로 되어 있으나 그것을 ‘아버지’라는 명사로 바꾸어 쓰고 있는 사례가 매우 많다. 예컨대, 우리말성경 모든 번역에서 요한복음 제17장에는 ‘아버지’라는 어휘가 39회 나타나는데, 헬라어 원문으로는 6회만이 ‘아버지’이고, 33회는 제2인칭 대명사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말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극존대를 나타내는 제2인칭 대명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우리말의 경어법(대우법)에서는 크게 네 계층이 있는데 그것은 ‘너’(아주낮춤), ‘자네’(예사낮춤), ‘당신’(예사높임)까지만 있을 뿐 극존대(아주높임)에 해당되는 말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에서 이때까지의 우리말 성경에서는 네 번의 대명사 번역을 어떻게 해 왔는가? 세 가지의 번역을 볼 수 있다. 첫째, 구역(1911년)과 개역 성경(1937년)에서는 세 번의 인칭대명사는 번역을 회피하고, 마지막의 소유대명사는 명사로 대치하여 “아버지의 것”이라고 한 것, 둘째, 1961년의 “새로 옮긴 신약성서”(복음동지회 역)에서는 네 번 모두 ‘당신’이란 대명사로 번역한 것, 셋째는 1993년의 표준새번역에서 세 번의 지시관형사 ‘그’와 한 번의 소유대명사 ‘아버지의 것’을 쓴 것, 넷째는 1887년의 예수셩교젼셔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번역에서 ‘아버지’라는 명사로 대신한 것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다른 복잡한 양상이 나타났는가? 우리말에 현재 존재하는 인칭대명사 중에서 가장 높은 단계인 ‘당신’은 어른에게도 쓸 수 없는 예사높임밖에 못 되니, 그것을 하나님에게 쓸 수 없다고 하는 고정관념 때문인 것이다.

그러면, 과연 ‘당신’은 하나님에게 적용할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그 이유로는, 1) 현재 ‘당신’을 쓰는 사람들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하여 불경스러운 생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근접감(nearness)과 친근감(intimacy)으로 쓴다는 사실, 2) 독일어를 비롯한 여러 인구어와 중국어에서 경칭(敬稱)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친칭(親稱; 독일어에서 Ihr이 아닌 dein, 중국어에서 您이 아닌 你)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 3) 우리말과 가장 유사한 일본어에서 부모에게 못 쓰는 ‘아나타’(우리말에 ‘당신’에 해당)를 오래 전부터 쓰고 있는 사실, 4) 우리말 성경에서도 예수나 하나님에 대하여 ‘당신’을 쓰고 있는 사례가 허다한 사실, 5) “우리말 큰 사전”(한글학회 편)에서도 ‘당신’을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극존대로 쓸 수 있다고 정의하고 있는 사실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이번에 주기도 새 번역에서는 ‘당신’을 쓰지 않고 ‘아버지’를 사용하였는가? 그것은 이번에 여성위원회에서 제기한 문제인 가부장적 사상에 기인한 것은 전연 아니다. 단지 우리말의 현재의 언어적 사실 즉 아직도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언중(言衆)의 언어적 정서에 기인하고, 그 정서란 단지 어른에게도 못 쓰는 ‘당신’을 하나님에게 쓸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기인한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은 상술한 여러 가지의 ‘당신’ 사용 가능성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다. 지난 5월 10일에 모인 모임(여성위원회 대표들의 요청으로 모인 특별위원회)에서는 여성위원회의 대표 3인이 참석했으나 그 사람의 의견도 다 다르게 제시되어서 논의가 진전되기 어려웠다. 즉 한국염 회장은 ‘당신’으로 하자고 하였고, 이숙자 권사는 이미 한기총과 합동하여 공포된 것이니 번역위원 명단에 여성 2-3명 정도 추가만 해 줄 것을 요청했고, 최영실 교수(서면)는 난하주에 ‘아버지’로 번역한 것을 가부장적 발상이 아니라는 뜻을 명확히 해 주면 좋겠다는 등이었다. 그리고 여성위원회에서는 처음의 위원회 구성에 있어 여성 대표를 배제했다고 지적하였다.

이상의 문제에 대하여 이종윤 위원장은 주기도 사도신경 번역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전문성이 요청되는 것이므로 각 교단이 파송한 위원으로 구성한 것뿐 결코 여성이 배제되지 않았다는 것과, 여성위원회가 그 당시에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설문조사를 한 결과 ‘당신’에 반대하고 ‘아버지’에 찬성한 비율이 ‘교회학교 학생 702명 중 90.17%이고, 목회자 153명 중 138명(90.2%)이라고 밝혔다. 이로 보아 현재로서는 교인들의 절대다수가 ‘당신’을 반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교인들이 다 앞서 언급한 ‘당신’ 사용의 가능성에 관한 이론을 다 아는 사람은 아니나, 언어는 역사적 사회적 소산이기에 그러한 비전문가들의 여론도 배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말 문법에서 철칙이었던 모음조화법칙도 대다수 언중의 사용 실태를 따라 1989년의 맞춤법 개정에서 무너뜨리고 만 것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주목할만한 사실은 대 교단을 대표하는 저명한 학자들(김창락, 정훈택, 박창해, 민영진, 김영봉, 나용화, 배종수, 조병수, 나채운 등)이 모두 원문의 sou를 직역하여 우리말에서 인칭대명사(‘당신’)을 쓰는 것이 합당하나, 언어의 사회성 문화성을 감안할 때 현재로서는 ‘아버지’를 쓸 수밖에 없다고 의견의 일치를 본 것이다. 이것은 바로 성경번역의 권위자인 Metzger 박사의 번역이론 “as literal as possible, as free as necessary" (가능한 한 문자적으로, 그러나 필요한 만큼 자유롭게”라는 말과 일치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한 경우를 보면, 구약의 경우에는 아주 드물고 (13회), 신약의 경우에는 주로 복음서에서 400여회 중 예수께서 사용하신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리고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라 하셨다. 물론 하나님을 남성이라고 해서 그렇게 가르치셨거나, 더욱이 가부장적인 관념에서 ‘아버지’라고 하라 하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영이신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성을 가지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은 복음서 전체의 전통이다. 그뿐 아니라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동시에 우리의 아버지도 되심을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라고 가르치셨다(요 20:17). 바울도 성도들이, 하나님을 아람어로 친근성을 나타내는 ‘아빠’란 말로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롬 10:8).

우리말 주기도(와 사도신경)의 번역이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은 20년이나 계속되었고, 여러 번의 노회 총회에서 거부되다가 겨우 3년 전부터 구체화되어 작년에는 한기총과 KNCC가 합동하여 30개 교단 60여 명의 학자들이 진지한 토론 끝에 드디어 새로운 안이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실로 한국교회사 120년만의 쾌거였다. 이제 각 교단 총회에서의 인준과 실시만 남은 단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버지’ 대신에 ‘당신’을 쓰게 된다면, 바로 그것 때문에도 새 번역안이 거부될 것은 불을 보듯 명백한 것이다. 앞으로 ‘당신’에 대한 바른 이해와 대다수 언중의 사용의 날이 올 때까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이 오늘의 지혜이다.









화병 / 화증(火症), 울화(鬱火), * 분(Ὀργίζεσθε) : 오르기조(orgizó. ὀργίζω) : to make angry. 성인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에베소서 4:26∼27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In your anger do not sin : Do not let the sun go down while you are still angry, and do not give the devil a foothold.      

* 분(Ὀργίζεσθε) : 오르기조(orgizó. ὀργίζω) : 분을 내다(to make angry)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Ⅰ. 정의

억울한 일을 당했거나 한스런 일을 겪으며 쌓인 화를 삭이지 못해 생긴 몸과 마음의 질병.

Ⅱ. 내용

주로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힐 듯하며, 뛰쳐나가고 싶고, 뜨거운 뭉치가 뱃속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증세와 불안, 절망, 우울, 분노가 함께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다.

‘화병’과 비슷한 맥락의 ‘화증(火症)’이라는 말은 조선 정조의 모친이며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부인이던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1735∼1815)가 쓴 『한듕록』에서 사도세자의 병세를 언급할 때 자주 나온 말이다.


“화(火) 곧 나시면 푸실 데 없사오니……”, “화증(火症)을 덜컥 내오셔……”, “그 일로 섧사오시고 울화(鬱火)가 되어시더니……”, “그 6월부터 화증이 더하사 사람 죽이시기를 시작하오시니……” 하는 등의 대목을 보면 화·화증을 화내는 증, 또는 특별한 병증(病症)의 이름으로 쓴 것이 분명하다.


『한중록 연구』의 저자 김용숙(金用淑)은 『조선왕조실록』을 인용하여 “세자에게는 두려워하는 병이 있었고 세자 자신은 화병이라 했으나 영조는 차라리 ‘발광(發狂)한 것’이라 했고, 사관(史官)의 말로는 증(症)이 발하면 역시 본성(本性)을 잃는다.”고 하면서 세자의 병증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달랐음을 지적하고 있다.


한의학(韓醫學) 연구가들은 ‘화병’이라는 병명은 한의학의 전통문헌에서 독립된 질병으로 다루어진 적이 없는듯하다고 하였는데, 화병을 화병(禍病)이라 부르는 이도 있고 한자를 쓰지 말고 순수한 우리말로 홧병이라 부르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화’·‘화증’·‘울화’가 주석자에 의해 모두 ‘火(화)’자로 표현된 점이나 우울·분노라는 증상의 특성, 『한중록』과 『조선왕조실록』의 용례(用例)로 미루어 볼 때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사전』(1999)에서도 정했듯이 화병(火病)이라 부르는 것이 옳고, 영어로는 ‘Hwa-byung’이라 하고 필요하면 그 말뜻(‘Fire’ Syndrome)을 설명해도 무방할 것이다.


화병이 현대 정신의학의 심인성 신체장애와 관련해서 처음 언급되었고, 민간정신병관 중 『한듕록』의 화증과의 관련이 시사된 것은 1969년과 1970년의 일이며, 1975년에 농촌사회의 질병관 조사의 하나로 설문조사가 실시된 뒤 화병만을 대상으로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77년의 일이다.


1983년에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 의료원의 한 정신과 의사가 그곳 한국인 교포여성으로 자신이 화병에 걸렸다고 믿는 세 명의 환자를 치료한 결과를 미국 정신의학회지에 발표하면서 ‘화병이 한국의 문화연계증후군(Culture-Bound Syndrome)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자 국내의 연구도 갑자기 활발해졌다.


특히 1986년부터 화병의 개념, 증상, 현대 정신의학적 진단부류와의 관계에 관한 통계적 조사가 현재까지 실시되어 오고 있고, 여기에 가세하여 한의학 분야에서도 화병의 증상에 대하여 통계적 조사 등을 시작하면서 한의학적 입장에서 화병을 정의하고 치료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심리학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위의 통계적 조사들은 주로 일반 인구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병의원에 오는 환자군에 국한되어 있고 린(Lin)의 증례 이외에 1994년 민속학의 현지답사 방법에 의한 화병사례조사가 화병에 관해 매우 생생한 정보를 제공한 것 말고는 통계조사를 현실성 있게 보완할 심도 있는 사례분석이 부족하여 화병의 치료반응과 경과 등의 실상은 아직 충분히 밝히지 못한 상태이다.


(1) 역학


자기의 병이 화병이라고 생각하고 직접 화병에 걸린 일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화병을 앓은 일이 없다는 사람들에 비해서 나이가 더 많은 기혼여성이고 교육정도가 더 낮다는 사실에 연구자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경제상태에 관해서는 두 군에서 차이가 없다는 연구결과도 있고, 경제수준이 낮은 사람들에게 더 많다는 경우도 있어 일정치 않다. 화병을 앓았다는 사람이 전체 일반 인구에서 어느 정도 되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2) 유발요인


사례면담을 통한 경상북도 금릉군 대덕면 덕산리의 민속조사 결과는 ‘화병’을 일으키는 요인이 심리적 갈등과 충격이며, 그 가운데서도 억울함·분함·상실감·한(恨) 등의 감정을 일으키는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반복적이거나 급격한 감정부담으로 ‘신경을 쓰고’, ‘속을 썩일 때’ 화병이 생긴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남편과의 사이에 말못할 사연”, “손자가 말썽을 자꾸 부려서”, “자기 잘못으로 시동생이 죽고, 뒤에 남편이 죽고, 시부모나 자식이 속을 썩여서”, “가족들이 연거푸 사고로 죽었을 때”, “재산을 강제로 털려서 억울하게 손해볼 때”, “남편이 바람피고 돈 없애고 술버릇이 사나워서”, “사업하다 돈을 모두 날린 뒤”, “자식이 죽거나 고치기 어려운 병이 든 뒤에” 화병이 났다고들 말하고 있다.

신경을 쓰는 일이 누적되어 만성스트레스로 작용하거나 죽음과 같은 급격한 상실의 경험을 크게 겪은 뒤에 일어난 경우이다. 미국교포 사례의 경우도 “함께 살아 온 딸의 부부가 크게 다툰 뒤”, “남편과 싸운 뒤, 남편이 헤어지겠다고 한 뒤에”, “미국이민 3개월에 미래가 불확실해서 너무 불안하고 긴장되어 여기저기 아프다가 발병했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의 설문지 조사결과도 홧병을 앓은 일이 있다는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 대부분이 화병의 원인이 심리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심리적인 원인을 생각지 못했던 사람들도 면담을 통하여 모두 만성적으로 부정적 감정을 억제해 왔음이 밝혀졌다. 특히 부부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사업실패, 사기 등 사회경제적인 문제가 보고 되었다.

어쨌든 화날 일이 있어도 화를 풀 수 없을 때 그것이 속으로 들어가 온갖 속병을 일으킨다고 본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이 화병의 심리적인 원인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일부는 몸의 증상은 신체의 이상이므로 몸 속의 뭉치를 외과수술로 제거해 달라는 등의 요구를 하기도 하고 신체질환으로 간주하고 약물 등 신체적 치료를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런 면에서 민속의료조사에서 보고된 덕산리 사람들의 화병에 대한 개념은 매우 독특하다. 한 제보자는 “신경을 쓰면 마음이 상하여 화가 들어 화병이 난다”고 하여 한의학의 심상증(心傷症)을 연상케 하고, 다른 사람은 “화병은 마음으로 난 것이고 속에서 심장이 놀랬는데 점이나 굿으로 고칠 수 없고 병원 약을 먹고 무엇보다 마음을 안정시켜 속의 화를 풀어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참으로 어렵다”고도 하였다.

“염통(심장)에 화가 들어 차올라 발생한다”는 의견에는 한의학에서 말하듯 화기(火氣)가 심(心)을 침범하여 상충하는 관계를 설명하는 듯하다. 화병은 결국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일어나기에 어쩌지 못한다”, “심장에 화가 들어 난 병은 낫기 어렵다”고 하는 제보자가 많았다.

화가 결국 신체의 핵심부에 손상을 끼쳐 낫기 어렵게 된다는 견해로 집약된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보편적인 것은 아닌 듯하고 화병의 원인이 급격한 상실이나 시간을 두고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심리적 스트레스라고 보는 점에 다름이 없다.


(3) 나타나는 증상

화병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정한 증상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화나는 일을 참다가 생기는 여러 가지 정신적, 신체적 이상은 무엇이나 다 화병이라고 부르는 것인지를 알아보려고 연구자들은 여러 조사를 거쳤다.

그 결과 대체로 불안·분노·우울에 해당되는 정신증상과 ‘가슴이 뛰고 답답하다’, ‘피로하다’, ‘머리가 띵하다’, ‘소화가 안 된다’, ‘기운이 없다’는 등의 불안과 우울에 수반되는 신체증상, ‘얼굴에 열이 오른다’, ‘몸이 화끈거린다’는 등의 자율신경 기능실조의 증후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일치점을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화병의 증상에 대해 대략 일정한 증상을 생각하고 있는데 다만 화병을 앓은 일이 있다는 사람들은 그 증상의 표현이 강하고 보다 구체적으로 강조됨을 알 수 있다. 즉, ‘가슴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른다’, ‘가슴이 답답해 뛰쳐나가고 싶다’, ‘억울하다, 분하다, 몸이 화끈거리고 파괴적인 충동이 일어난다’고 호소한다.

민속조사 사례 중 68세의 한 여성보살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슴이 쇠갈고리로 긁는 것처럼 아팠다. 돌멩이같은 게 아랫배에서 명치로 해서 목 있는 쪽으로 오면 주먹만한 게 버티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앞이 깜깜하고 잔뜩 부대껴서 못 견딜 정도라 바로 누웠다가 오만 몸살을 다 한다.”

대부분의 사례가 아랫배에 덩어리가 생겨 그것이 올라오고 또한 가슴이 답답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외치기도 하고 방 안에 있다가 밖으로 뛰쳐나간다는 말을 하고 있으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르고 뜨듯한 방에는 못 있고 찬 데로 나가야 한다고 한다.

미국 교포의 사례에서도 배에 뭉친 덩어리가 위로 움직여 가슴을 누르고 심장을 눌러 숨이 차고 두근거리며, 덩어리가 아래로 내려가면 비뇨기와 허리를 눌러서 소변을 자주 보고 허리를 아프게 만든다고 호소하거나 덩어리가 가슴을 눌러서 숨차고 두근거리면서 불같은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목에 이르고, 숨이 막혀 죽지 않을까 불안을 가졌는데 이 환자는 추위를 타서 옷을 두껍게 입어야 했다.


(4) 현대정신의학의 진단분류와의 관련

정신의학에서 과거에 히스테리증(Hysteria)이라 부르던 신경증은 그리스어로 히스테라(Hystera=자궁)에서 나왔는데,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 병을 자궁이 온 몸을 돌아 다니는 병이라고 생각한 데서 나온 것이다.

목을 꽉 조이는 덩어리는 히스테리 구(球)(Globus hystericus)라고 해서 히스테리증의 특이한 증상 중의 하나로 간주되었고, 1960년대 초만 해도 우리 나라에서 정신과의 외래환자 중 히스테리성 전환장애환자의 진단에 적용되었다.

현재는 국제진단분류(ICD-10) 중 신체화장애, 전환장애의 여러 증상 가운데 하나로 목의 덩어리(lump in throat)라는 이름으로 포함되어 있는데, 위의 사례들에서도 같은 증상을 볼 수 있다.

다만 전형적인(히스테리성) 전환장애에서는 자기의 증상을 과장되게 호소하기는 하지만 사실은 자기증상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특성이 있으며, 화병환자는 이를 강렬한 감정적 신체적 고통과 함께 생생하게 호소하는 점이 다르다.

민간에서 말하는 화병이 비교적 일정한 증상을 가지고 있고 일정한 심리적 요인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나는 것이라면 화병을 특수한 단일질환으로 볼 수 있을지 분명치 않다.

현대정신의학에서 국제적인 현장조사를 실시한 끝에 정해 놓은 정신장애 진단분류 가운데 어느 것에 해당되는지, 아니면 화병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우리 문화와 관련된 문화연계증후군(Culture-Bound Syndrome)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를 밝히려는 연구가 정신의학 분야에서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화병군에서 흔히 진단되는 것은 미국 정신과 분류 중 신체화 장애(Somatization disorder), 큰 우울증(Major depression), 감정부전장애(Dysthymic disorder), 범불안장애(Generalized anxiety disorder), 공황(恐慌)장애(Panic disorder), 강박장애, 적응장애의 순서로 많다는 보고가 있다.

대부분은 한 환자가 두 개 이상의 진단을 받고 있었고 신체화장애와 우울증이 겹쳐 있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화병을 기존의 정신과 진단분류와 구별해 내는 가장 중요한 점은 신체증상 중 ‘가슴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른다’, ‘머리가 무겁다’, ‘가슴이 답답하다’는 등의 증상이라는 연구보고가 있고, 화병이라고 하는 것이 현대 정신의학의 진단분류상 한두가지 질환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는 증상도 있다.

화병은 한의학의 관점에 영향을 많이 받은 우리나라 민간의료 문화에 바탕을 둔 독특한 문화연계증후군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조심스런 추정을 하는 이도 있으나 그러기에는 그 증후의 특이성이 별로 두드러지지 않다.


(5) 치료와 예후

화병에 걸렸다고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화병이 낫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그들이 받은 치료는 주로 양·한방의 약물치료거나 아예 낫지 않는 병이니 사람의 팔자(八字)라고 생각해 치료를 받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교포사례에서 치료에 응한 두 예는 항우울제 투여와 지지적 정신요법, 환경개선 등을 통해서 완전히 치유되었다.

환자들이 치료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데는 환자가 정신과 의사가 권하는 현대 정신의학적인 치료, 즉 약물요법·정신치료·가족치료를 제대로 충분히 받지 못한 데도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또한, 병의 증세를 이용해서 주위사람의 관심을 모으고 홀로 서지 못하는 환자의 의식적·의존적 성향도 때로는 증세의 만성화에 이바지할 것이다.

화병은 현재 다른 나라의 것과 함께 문화연계증후군으로 미국 『정신장애 진단분류』 제4판(1994) 부록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화병은 억눌린 분노와 한(恨)과 연관되어 나타난 다양한 정신적, 신체적 현상에 대하여 우리나라 민간에서 붙인 질환명(labelling), 또는 문화적으로 규정된 민간진단(Culturally determined folk diagnosis)이며, 그 증상이나 경과가 일관성을 가지고 있어 한국문화에만 나타나는 특이한 문화연계증후군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미흡한 점이 있다.

이에 대한 횡(橫)문화적 고찰도 필요할 것이다. 다만, 이런 민간의 질병관의 특성을 앎으로써 일차 진료를 하는 의사나 정신과 의사가 임상에서 그 질환이 정서적 갈등과 부담으로 생겼고 따라서 감정적 응어리를 푸는 각종 정신요법이 약물과 함께 필요하다는 점을 환자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즉, 화병에 관한 지식은 의사-환자 사이의 의사소통에 도움이 될 것이다.

화병의 현상은 각종 장애가 겹친 복합증후군으로 그 특징에 따라 ‘연극성(히스테리성)우울증후군’, 또는 ‘신체형우울성 분노 및 불안증후군(Somatoform depressive anxious anger syndrome)급·만성스트레스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안에는 중증우울증이 우세한 유형, 소위 신체화장애가 우세한 유형, 불안 및 자율신경실조증이 우세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 각각의 진단과 결합된 두 개 이상의 장애의 성질에 따라 치료방법이 달라질 수 있고 경과와 예후도 다를 수 있다. 화병이 낫지 않는다고 하고 여자의 팔자로 돌리는 식의 민간개념은 의료계몽을 통해 고쳐져야 하고, 화병이라고 하여 일률적으로 일정한 한방약을 투여하는 것도 지양되어야 하며, 개별적인 사례 또는 치료반응과 경과에 대한 보다 면밀한 연구와 한국문화의 밖에 있는 유사한 현상에 대한 횡문화적 연구도 필요할 것이다.

 참고문헌



『한듕록』(이병기·김동욱 교주,민중서관,1961)

『한중록연구』(김용숙,정음사,1987)


『홧병과 화풀이』(이부영,협동,1969)


「한국민간의 정신병관과 그 치료」(1)(이부영,『신경정신의학』 19-1,1970)


농촌주민의 정신질환에 대한 태도


「지식 및 견해」(김용식 등,『신경정신의학』 14-4,1975)


「화병(火病)에 대한 연구」(이시형,『고려병원잡지』 1,1977)


「보길도에서의 홧병에 대한 연구」(민성길·김진학,『신경정신의학』 25-3,1986)


「홧병에 대한 임상적 연구」(민성길 등,『대한의학협회지』 30,1987)


「화병(火病)개념에 대한 연구」(민성길,『신경정신의학』 28,1989)


「화병(火病)에 대한 문헌적 소고」(구병수·이종형,『동의신경정신과학지』 4-1,1993)


「화병의 총괄」(이종형,『송제이종형정년퇴임논문집』,송제의학회,1994)


「홧병을 통해본 민속의료관념과 관행: 경상북도 금릉군 대덕면 덕산리의 사례를 중심으로」(김준권,경북대학교 대학원석사학위논문,1994)


「홧병 경험군과 홧병 비경험군 간의 홧병의 질병 개념에 대한 비교 연구」(이철 등,『울산대학의학지』 4-2,1995)


「홧병연구에 대한 검토와 전망」(구병수·김동일,『동국논총』제36집 자연과학편,1997)


「홧병에 대한 진단적 연구」(박지환·민성길·이만홍,『신경정신의학』 36-3,1997)


「홧병의 증상」(민성길·김경희,『신경정신의학』 37-6,1998)


Hwa-Byung -A Korean Culture-Bound Syndrome-(Keh-Ming Lin,Am. J. Psychiatry 140-1,1983)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화병(火病))]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화병

혹시 간헐증 폭발장애 아닌가요?

주변에 보면 화가 잘 조절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뉴스에 보도되는 사건사고를 봐도 화를 다스리지 못해서 발생하는 경우가 꽤 많다. 이런 경우는 단순히 성격 탓이 아닌 화(火)와 관련된 질환에 노출된 상태일 수 있다. 간헐적 폭발장애, 외상 후 울분장애, 성인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화병이 대표적인 화 관련 질환이다.

1. 외상 후 울분장애


이혼이나 해고, 회사 부도, 사망 같은 특정 사건에 대한 분노를 3개월 이상 참지 못할 때를 말한다. 보통 사람들은 과거에 발생한 특정 사건이 있어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면 체념을 하는데, 외상 후 울분장애 환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되돌리려고 집착을 하는 경향이 있다.ℼ

2. 성인 ADHD

성인 ADHD는 화를 습관적으로 낸다. 직장 생활을 할 때 상사들과 자주 갈등을 겪는 특징이 있다. 성인 ADHD가 생기는 이유는 주의력 관련 뇌신경전달물질과 함께 분노와 화를 조절하는 뇌신경전달물질에 불균형이 초래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소아 ADHD의 3분의 2는 성인 ADHD로 이어진다는 연구가 있다.

3. 간헐적 폭발장애

남들은 '별 일 아닌 것'으로 그냥 넘겨버릴 만한 일인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화를 내거나 폭력을 휘두른다. 간헐적 폭발장애 환자들은 감정을 관장하는 뇌 변연계와 이성적 판단을 관장하는 전두엽의 연결이 약해져 이성이 감정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변연계와 전두엽은 3세 정도에 연결되는데 이 시기에 부모가 자주 싸우는 등 주변 환경이 불안한 것이 원인이다.

4. 화병

화병은 화를 잘 해소하지 못하고 참아서 생기는 우리나라 고유의 병이다. 우울감과 함께 불면증 소화불량 같은 증상이 동반된다. 

화가 많은 사람들은 화가 날 때마다 스스로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는 연습을 의식적으로 해야 한다. 스스로 조절하기 힘들면 주위 사람에게 “내가 화를 낼 것 같은 상황이면 손목을 꽉 잡아 신호를 보내라”는 식으로 부탁을 하는 것도 좋다. 

화가 나는 상황임을 본인이 느낀다면 심호흡을 하면서 행동을 잠시 멈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스스로 제어가 안 되면 약물치료, 인지행동 치료를 받아야 한다. 인지행동치료는 부적절하게 화를 낼 때의 생각 감정을 본인 스스로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화병일 땐 억눌린 것을 풀어야 한다. 운동 역시 공격성을 분출하는 행동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 

보다 근본적 방법 중 하나는 명상 수련을 통해 잠재의식에 쌓여있는 화의 찌꺼기나 트라우마 등을 제거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화병(火病) 또는 울화병(鬱火病, somatization disorder)은 한국에서 스트레스를 발산하지 못하고 참는 일이 반복되어 발생하는 일종의 스트레스성 신체화 장애를 일컫는 말이다. 

공식적인 정신의학적 질병으로 정의되어 있지는 않으며, 우울장애 중 신체화증상이 주가 되는 한 양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미국 정신과 협회에서는 DSM-IV에 화병을 로마자로 “Hwabyeong”이라는 이름으로 문화관련 증후군의 하나로 등록했으나, 이후 삭제되었다.  

화병은 주로 다음과 같은 증상이 수 개월 이상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우울·불안

발열

잦은 기침

자주 눈물을 보임

신체화 증상(답답함, 오한, 성기능 장애 등)

섭식·수면 장애

일반적인 우울증은 정신증상을 위주로 우울감을 호소하고 부교감신경계가 과항진 되어 있는 반면, 화병은 신체증상을 위주로 분노와 억울함을 호소하고 교감신경계의 과항진을 특징으로 한다. 화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증상, 정서, 사고, 행동, 환경에 대한 총체적인 치료 및 관리가 필요하다.

화병이라는 말은 중국 명나라 의사 장개빈(張介賓)이 처음 사용했으며, 조선 시대에 한국으로 전해졌다.

화병이란 누른 감정을 발산하지 않고 억제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신경성적 불(울화:鬱火)으로 인하고 드러날 전부의 증상을 의미하다. 이 감정은 '노'(怒:노여움), '희'(喜:기쁨), '사'(思:생각), '우'(憂:근심), '비'(悲:슬픔), '공'(恐:두려움), '경'(驚:놀람)의 일곱 감정(七情)이 있어, '억누른 화'만이 원인은 아니라 하였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A씨는 2남 2녀를 둔 54세 가정 주부입니다.

​“속에서 불이 활활 타며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요. 견딜 수 없을만큼 가슴이 답답해요. 화가 나는 것을 참으려고 하면 목에 덩어리가 콱콱 막히고… 요즘에는 사는 재미도 없고, 울고만 싶어요.”

A씨의 증상,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A씨는 여기에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증상을 말하니 다들 ‘화병’이라고 하더라고요. 저 역시 ‘속이 썩어 생긴 병’인 것 같아요.”

한겨울입니다. 바깥 공기는 서늘하다 못해 차갑기 그지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요? 삼성서울병원 정신과를 찾은 A씨는 이 날씨에도 열이 난다고 합니다. 체온이 높은 게 아니라, 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화가 차올라 화가 나고, 답답하다고 합니다. 가슴을 두드리는 일도 늘었답니다. 무슨 사연일까요? 


가정주부 A씨의 증상을 살펴보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화병이 맞습니다. 화병은 정확히 말하면 우리나라 문화와 관련한 정신 의학적 증후군인데요. 서양 의학의 진단 분류 체계상으로 우울증과 신체화 장애(身體化障碍), 범불안 장애(凡不安障碍), 공황 장애(恐慌障碍), 공포증 및 기분 부전증(氣分不全症) 등의 혼합을 뜻합니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 나라 인구 중 4.2%에서 이 증상이 발견되고 있는데요. 의외로 남성보다는 A씨 같은 중년 여성에게서 더 많이 나타납니다. 남편과 시부모 관계 등 고통스러운 결혼 생활, 가난, 사회적 좌절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인데요.


 A씨의 이야기를 보다 보니, “나 혹시 화병 아니야?”하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자꾸만 화가 나서 조절이 안돼요”,

 “가슴에 뜨거운 불덩이 같은 열이 뻗치면서 올라와요”하는 증상. 혹시 여러분께서도 요즘 이런 증상에 시달리고 계시다면 일단 ‘화병’을 의심해 보셔야 합니다.


 거기에 더해 화병에는 다음과 같은 증상이 나타나니까요. 한 번 체크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화병 = 1+2+3

① 특징정 감정 반응 : 속상함, 억울함, 분함, 화남, 증오 등

 ② 신경증 증상 : 우울, 불안, 불면, 소화 장애, 두통, 신체적 통증 등

 ③ 기타 특징적 증상 : 답답함, 열기, 입마름, 치밀어 오름, 가슴 뜀, 목 가슴의 덩어리 뭉침, 한숨, 뛰쳐 나가고 싶음, 잦은 하소연 및 한숨 등

  

 화병의 증상을 살펴 봤는데요. 글만 봐도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움이 전해지는 듯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더 있습니다. 이 화병이 합병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건데요. 화병의 증상이 심해지면 심장에 이상이 없는 사람도 가슴통증이나 협심증, 심근경색, 심혈관 질환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는 심장이 멈춰서 돌연사할 가능성 까지 있지요. 마음의 병이 신체의 질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건데요.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는 것이 좋겠죠? 그래서 오늘은 ‘화병’의 진단부터 예방법까지 천천히,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학기중 조별과제에서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동기 때문에 가슴이 답답한 적 있으셨던 학생 여러분, 일 못하는 상사 때문에 뒷처리 하느라 속 터지는 직장인 여러분, 그리고 A씨처럼 가족과 함께 있어도 외롭고 우울한 주부 여러분 모두 천천히 살펴보시고, 화병과 싸워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혹시나 스트레스 쌓이고 속이 답답하다고 담배를 입에 달고 사시는 것은 아니시지요? 백해무익! 담배는 치료약이 아니라는 점! 기억해주세요.

  
흔히들 화가날 때, ‘울화가 치민다’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이렇게 울화가 치미는 증상이 나타나는 화병은 일반적인 우울증과 마찬가지로 주변 환경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가 그 원인입니다. 분노와 같은 격렬한 감정이나 마음의 흥분이 장기에 쌓여 병이 나는 거지요.

 

  

화병의 원인  

 1. 장기적 스트레스 : 일회적 분노의 감정이 아닌 장기적으로 누적된 스트레스와 분노에 의해 발생한다

 2. 폐경기에 따른 호르몬 변화 : 폐경기 여성은 열을 조절하는 능력이 남성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게 되는데, 이 때의 여성에게 쉽게 나타난다

 3. 고연령 : 나이가 들면 화를 통제하기 어려워지는데 이것이 화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일상의 잦은 스트레스도 화병의 원인이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스트레스에 쉽게 노출된 우리 현대인들의 건강이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화병 진단법을 준비했습니다.
지금 체크해 보세요!


화병을 진단하는 12가지 체크리스트

 밤에 잠을 잘 못 자거나, 자고 나도 개운하지 않다

  신경이 예민해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난다.

  두통이 생긴다

  소화가 잘 안 된다

  숨이 쉽게 차오른다

  화가 나면 얼굴과 온 몸에 열이 오른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의욕이 없다

  명치끝이 딱딱하게 느껴진다

  혓바늘이 돋아 음식을 삼키기 힘들다.

  아랫배가 따갑다

  목 안이 꽉 찬 느낌이다

 ​* 자가진단 테스트 중 2~3가지 이상 체크가 되는 경우에는 ‘홧병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전문의 상담을 받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께 도움 드리려고 진단법과 증상 등을 소개해드렸는데요.
약은 약사에게- 병은 의사에게-라는 말처럼 증상이 의심되면 즉시 병원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병원에서는 더 전문적으로 여러분의 병을 진단하고 치료가 이루어지기 때문인데요.
화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병원에서는 화병의 검사부터 치료까지 전문적인 진료가 이루어집니다.

화병의 진단 자체를 위한 검사가 특별히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기질적인 원에 의해 증상이 나타나는지 여부를 감별하기 위해 뇌 자기공명영상(MRI), 뇌파 검사 등을 시행하지요. 신체적 질환이 원인으로 작용하거나 혹은 동반된 경우를 감별하기 위해 기본적인 혈액검사나 심전도, 흉부 X선 사진 등의 검사도 시행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심리 검사나 신경 인지 기능 검사 등을 통해 환자의 진단이나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를 추가적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화병에는 약물 치료와 정신 치료 두 가지 치료방법이 있습니다.

  

화병 치료

 1. 약물 치료 : 항우울제를 주로 사용한다

 2. 정신 치료 : 증상 자체를 조절한다기보다는 환자가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방식이나 대인관계, 성격 등의 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추구하는 치료법. 단기간에 증상이 회복되기보다는 장기간의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일반적이다.


 지금까지 화병의 증상, 검사, 치료법 등을 살펴봤는데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고, 추천하고 싶은 것은 애초에 화병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화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화병 예방법

 1. 스스로 기분이 좋아지는 일을 만든다. 가벼운 운동을 하거나 취미생활을 갖는 것이 좋다.

 2. 좋은 사람과 자주 만난다. 친구와 함께 식사하거나 차를 즐기며 대화를 나눈다. 즐거움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과 고통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 좋다.

 3. 자신의 감정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싫은 것은 싫다고 말한다.

 4. 술이나 담배, 카페인에 의지 하지 않고, 녹차와 허브차 등 화병을 분산시킬 수 있는 음식으로 기분전환한다.

 5. 화병의 원인 우울증을 치료한다. 우울증은 스스로가 잘 모르고 지나치기 쉬운 질병이다. 따라서 자신의 감정상태를 꾸준히 살피는 것이 중요한데, 2주 이상 비관적인 마음이 들거나 식욕이 없고, 의욕 상실 상태가 지속된다면 전문의를 찾아 상담과 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


 화병의 증상부터 화병 예방법까지- 오늘은 화병에 관한 모든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일로 스트레스 받을 일이 많은 환경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런 스트레스가 화병으로 이어지기까지 하지요. 하지만 마음에서 비롯된 병은 마음가짐을 새로 하는 것 만으로도 호전될 가능성이 큽니다.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의사표현을 확실히 하고, 속에 나쁜 생각, 감정 등을 쌓아두지 마세요!

 그리고 가족과 배우자, 친구들과 더 많이 사랑하고 대화하세요. 화병도 결국 마음에서 시작되는 병이듯 마음이 상하면 몸이 상합니다. 마음에서부터 건강한 생각을 유지한다면, 분명 여러분은 화병을 완전 정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은 하나로 연결 되어 있다고 합니다. 어느 것 하나 포기하거나 지나치지 마시고 세심한 관리를 통해 건강을 유지하세요!


 여러분의 건강을 응원합니다.

 

 우울증은 스스로는 잘 모르고 지나치기 쉬운 질병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자신의 감정상태를 꾸준히 살피는 게 중요합니다. 2주 이상 비관적인 마음이 들거나 식욕이 없어지고, 의욕도 점점 상실되는 감정이 지속되면 꼭 전문의를 찾아서 상담과 치료를 받으시는 게 좋습니다.

-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홍진 교수 -



에베소서 4:26∼27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In your anger do not sin : Do not let the sun go down while you are still angry, and do not give the devil a foothold.      

* 분(Ὀργίζεσθε) : 오르기조(orgizó. ὀργίζω) : 분을 내다(to make angry)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화병, 혹시 간헐증 폭발장애 아닌가요?

주변에 보면 화가 잘 조절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뉴스에 보도되는 사건사고를 봐도 화를 다스리지 못해서 발생하는 경우가 꽤 많다.
이런 경우는 단순히 성격 탓이 아닌 화(火)와 관련된 질환에 노출된 상태일 수 있다.
간헐적 폭발장애, 외상 후 울분장애, 성인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화병이 대표적인 화 관련 질환이다.

1. 외상 후 울분장애

이혼이나 해고, 회사 부도, 사망 같은 특정 사건에 대한 분노를 3개월 이상 참지 못할 때를 말한다.
보통 사람들은 과거에 발생한 특정 사건이 있어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면 체념을 하는데, 외상 후 울분장애 환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되돌리려고 집착을 하는 경향이 있다.ℼ

2. 성인 ADHD

성인 ADHD는 화를 습관적으로 낸다.
직장 생활을 할 때 상사들과 자주 갈등을 겪는 특징이 있다.
성인 ADHD가 생기는 이유는 주의력 관련 뇌신경전달물질과 함께 분노와 화를 조절하는 뇌신경전달물질에 불균형이 초래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소아 ADHD의 3분의 2는 성인 ADHD로 이어진다는 연구가 있다.

3. 간헐적 폭발장애

남들은 '별 일 아닌 것'으로 그냥 넘겨버릴 만한 일인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화를 내거나 폭력을 휘두른다.
간헐적 폭발장애 환자들은 감정을 관장하는 뇌 변연계와 이성적 판단을 관장하는 전두엽의 연결이 약해져 이성이 감정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변연계와 전두엽은 3세 정도에 연결되는데 이 시기에 부모가 자주 싸우는 등 주변 환경이 불안한 것이 원인이다.

4. 화병

화병은 화를 잘 해소하지 못하고 참아서 생기는 우리나라 고유의 병이다.
우울감과 함께 불면증 소화불량 같은 증상이 동반된다. 

화가 많은 사람들은 화가 날 때마다 스스로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는 연습을 의식적으로 해야 한다.
스스로 조절하기 힘들면 주위 사람에게 “내가 화를 낼 것 같은 상황이면 손목을 꽉 잡아 신호를 보내라”는 식으로 부탁을 하는 것도 좋다. 

화가 나는 상황임을 본인이 느낀다면 심호흡을 하면서 행동을 잠시 멈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스스로 제어가 안 되면 약물치료, 인지행동 치료를 받아야 한다.
인지행동치료는 부적절하게 화를 낼 때의 생각 감정을 본인 스스로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화병일 땐 억눌린 것을 풀어야 한다.
운동 역시 공격성을 분출하는 행동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 

보다 근본적 방법 중 하나는 명상 수련을 통해 잠재의식에 쌓여있는 화의 찌꺼기나 트라우마 등을 제거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동물의 각인효과 / 로렌츠(Konrad Lorenz) 각인(imprinting),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

동물의 각인효과

지난 73년 노벨상을 탄 오스트리아 학자 로렌츠(Konrad Lorenz)는 인공부화로 갓 태어난 새끼 오리들이 태어나는 순간에 처음 본 움직이는 대상, 즉 사람인 자신을 마치 어미오리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을 관찰하였다.  

그는 이런 생후 초기에 나타나는 본능적인 행동을 각인(imprinting)이라고 불렀다.
각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극에 노출되는 시기가 매우 중요한데, 이를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라고 한다. 

각인 효과는 새(조류) 에게 특히 많이 나타나지만, 최근에는 포유류와 어류 그리고 곤충에서도 각인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어린 동물들은 처음으로 눈과 귀 그리고 촉각으로 경험하게 된 대상을 부모로 생각하고 따라다니게 된다.
오리는 생후 17시간까지가 가장 민감한 시기이고, 보통 새들은 생후 50일 동안 경험한 대상을 부모로 알고 쫓아다닌다.

각인(刻印) 이라고 합니다.
새길 각(刻), 도장 인(印)

각인과 결정적 시기  

로렌츠(Lorenz. 1903-1989)는 오스트리아의 동물학자. 동물행동학자로 비엔나 대학과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Munich대학에서 동물학으로 박사학위(1936)를 받았다.
1973년에 Tinbergen, karl von Frisch와 공동으로 노벨 생물학상을 받았다.
물고기와 조류의 행동 연구를 통해 발달 이론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로렌츠는 생의 초기에 나타나는 각인을 발견하였다.
그는 어미 오리가 낳은 알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서 다르게 부화시켰다.
한 집단의 알은 어미가 부화시키고, 다른 집단의 알은 로렌츠가 부화를 시켰다.
두번째 집단에서 깬 새끼 오리는 로렌츠를 어미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그는 새끼 오리가 어미 오리를 따르는 추종행동을 각인(imprinting)이라고 명명하였다.
병아리와 오리의 결정적 시간대(critical time window)는 부화 후 36 시간 정도인데, 부화 후 13-16 시간대가 가장 민감하였다.

이렇듯 발달의 각 요소에는 가장 중요한 결정적 시기가 있으며,
결정적 시기 이전에는 유전적인 요인이,
결정적 시기 이후에는 주위 환경이 발달에 영향을 준다.

다른 예로 파랑새의 경우, 결정적 시기에 부모 새의 노래를 못 들으면,노래를 따라하지 못하며, 성장한 후에는 아무리 훈련을 시켜도 효과가 없었다.

로렌츠는 각인되는 대상의 범위가 종에 따라 각기 다른 것을 발견하였다.
기러기 새끼는 움직이는 것이면 어느 것에나 각인을 하여, 몇 마리는 움직이는 보트에도 각인을 하였다.
그러나 물오리 새끼는 로렌츠가 어떤 높이 이하로 몸을 구부리고, 꽥꽥 소리를 지를 때에만 그에게 각인을 하였다.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로렌츠가 학습과 경험의 역할을 무시했다고 비판을 했다.
그러나 로렌츠는 여기에 관해 달리 설명을 했다.

특수한 유발 자극에 대한 동물의 반응은 생래적이거나 선천적인 경우가 많지만 학습의 영향도 받는다는 것이다.
즉 발달의 많은 부분은 유전적으로 결정이 되지만  또한 유전적인 여러 결정인자는 학습에도 영향을 준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로렌츠는 각인은 일종의 학습으로  경험을 통해 습득되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았다.
물론 이때의 학습의 의미는  로크(Locke), 파블로브(Pavlov), 스키너(Skinner)가 언급한 학습과는 다르다.
각인은 결정적 시기 동안에만 일어나는 매우 영구적인 학습인 것이다.

Horn(1985)은 조류의 뇌에서.
아래의 그림에 표시된 HV(hyperstriatum ventrale)부분 중
중간 부분을 제거하면 각인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분자생물학적으로 완전히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뇌는 뉴런이 뉴로트로핀을 얻기 위해 경쟁하면서 발달이 된다.
뉴로트로핀은 NGF(Nerve Growth Factor), BDNF(Brain-Derived Neurotrophic Factor)등
신경세포의 생존과 성장을 증진시키는 요소이다.
뇌의 초기 발달에는 뉴로트로핀이 큰 영향을 주며,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뉴런은 다른 뉴런보다 더 많은 뉴로트로핀을 얻는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결정적 시기의 길이가 뉴로트로핀이 영향을 미치는 기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우리는 뇌세포의 연결성이 더욱 효율적으로 발달되기 위해 결정적 시기에 더욱 풍부한 환경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초신자를 위한 카톡 성경 용어 정리



예배(禮拜)


1. 한문자의 의미
- 예절 예(禮), 절 배(拜)

예를 갖추어 절하는 것

2. 헬라어의 의미
- 라트레이아(Latreía, Λατρεία)

봉사(service, worship), 복무

λατρεία, ας, ἡ 2999 1. 섬김, 2. 예배,

요한복음 16:2

발음 / 라트레이아(latrĕia) 

어원 / 300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섬기는 일, 예식(요 16:2, 히 9:6), 예배(롬 9:4, 12:1), 섬기는 예법(히 9:1).
신약 성경 / 5회 사용
예배의 정의

예배(Worship)라는 말은 ‘가치(Worth)있는 지위’(신분, Ship)에게 적절한 영광과 존경을 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예배는 오직 창조주(創造主)시며 구속주(救贖主)되신 하나님께만 그 합당한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 찌어다.”(시 96:8)라고 하였다.
이를 기초로 레이번 교수는 “예배는 진실로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와 존귀와 찬송과 사랑과 복종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으로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려드리는 수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런즉 기독교의 예배는 타종교에서 행해지는 인간의 욕구 충족과 의식(儀式)적인 예배와는 다르다.
기독교는 예배의 대상이 확실하며 예배를 드려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

약속을 변개하고 식언(食言)하는 불완전(不完全)한 인간이나(민 23:19), 아무 이성 없는 짐승 또는 밝혀지지 않은 어떤 외계적(?) 존재가 결코 인간의 예배 대상이 될 수 없다.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빚으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 되신다. 모든 만물이 다 하나님께 예배하며 찬송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당연한 창조 질서(秩序)요 법칙(法則)이다. 그런즉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사람 된 그 존재적 의미를 바로 찾는 것이요, 창조주의 그 창조 목적을 바로 실현하는 일이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 지어다. 할렐루야!”(시 150:6)

성경적 예배 용어

성경에서 예배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표현에 차이가 조금씩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에는 거의 일맥상통하고 있다.

구약에 나타난 예배 용어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곁에 나타났을 때 아브라함이 “몸을 땅에 굽혀 영접한다.(창 18:2), 저희가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영접한다.(창 18:2), 욥이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욥 1:20) 등에 사용된 단어 ‘샤하이’(Shahai)는 ‘굴복하다’, ‘머리 숙이다’, ‘엎드린다’는 뜻으로 구약에만 120회 이상 나온다. 이는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행위를 나타냄으로써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순복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섬긴다는 뜻의 ‘아바드’(Abad)는 예배가 단순히 어떤 예식이 아닌 전(全) 생애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삶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렇듯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종(에베드)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곧 예배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뜻은 ‘봉사 한다’, ‘섬긴다’라는 말이며 이런 의미에서 유대인의 종교생활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일관되었다.

신약에 나타난 예배 용어

프로스퀴네오(Proskuneo)
– 신약에 약 60회 정도 나온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 받으실 때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고 하신 말씀과 또 예수께서 수가 성(城) 여인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라고 말씀하실 때에 사용된 단어이다. 그 뜻은 ‘무릎 꿇다’, ‘허리를 굽힌다’ 등의 존경을 표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라트레이아(Latreia) – 이는 예수께서 “다만 그 분만 섬기라.”고 말씀하시며 유혹하는 사단에게 최종 선언하실 때 사용하신 말이다. 이 말은 ‘종으로서 자신의 상전만을 섬겨야 할 신분’을 나타낸다.

레이투르기아(Leitourgia) – 일반적으로 예전(禮典) 또는 의식(儀式)과 관계되며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을 섬기고(빌 2:30), 예루살렘 교회에 연보로 섬기는 일(고후 9:12), 그리스도인의 구제(롬 15:16,27) 등이 바로 ‘레이투르기아’로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봉사(奉事)를 뜻한다.

호모로기아(Homologia) – 이는 죄의 고백과 찬양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 가운데 시인(是認, Confess)이 이에 해당된다.

교회적 예배 용어

워십(Worship)

이 말은 ‘존경과 존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자’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최고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의와 권위를 인정할 때 사용되는 이 말은 영국에서 시장(市長)을 호칭할 때 ‘Your Worship’, 미국에서 ‘Your Honour’등으로 쓰이는 것에서 그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이 말이 종교적 용어로 예배를 지칭할 때는 바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경의와 권위가 함축되는 것이다.

컬트(Cult)

라틴어에서 유래한 종교의식을 나타내는 용어로 “어떤 것을 숭배한다.”는 의미와 이교적 배경의 주술적 요소가 있다. 이 말이 기독교에서 는 거의 외형적 예배 의식을 나타내며 주로 로마 가톨릭의 형식적(形式的)이고 의식적(儀式的)인 면에 사용되고 있다. 한 마디로 제의(祭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전통적인 종교 의식뿐 아니라 심지어 이단 종파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워십’보다 ‘컬트’는 정형화된 어떤 예배의 틀과 형식을 생각하게 한다.

리터지(Liturgy)

예전적(禮典的) 의미를 가리키는 용어로 예전(禮典)을 나타내며 예배의 대부분이 미리 정해진 절차에 의해 드려져야 할 것임을 가리킨다.
세례식, 성찬식 등의 어떤 예식을 가리킬 때 이 용어를 사용하는데 보다 넓은 의미로는 예배의 모든 것을 의미할 때도 있다.

예배의 신학적 의미

기독교의 예배는 항상 하나님과 연관하여 이해되고 또 집행되어야만 한다. 예배가 곧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존경과 찬송을 드리는 것이므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 방법을 알지 못하고서는 바른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의 신학적 원리를 정립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미의 ‘코람 데오(Coram Deo)’가 종교개혁의 한 구호가 된 것은 바로 이 예배 신학적 원리를 적시한 말이다.

– 오직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신 여호와 하나님

선지자 이사야는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사 40:25)라고 하였다. 또 주님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0)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어떤 것으로든 제한될 수가 없다는 뜻으로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할 때에 오직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에 집중해야 함을 말한다. 이는 하나님만 바라고 기대하고 나아가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듣고 받아서 그대로 행하는 것으로 그 삶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즉 예배 의식이나 예배당은 마음을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향하게 하는 수단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창조주시며 구속주(救贖主) 되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신전(神前) 인격의 삶을 사는 것이다.

– 예배 자는 오직 구속함을 입은 백성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예배자의 요건을 말한다. 또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자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고 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인 예배 자가 믿음이 없이는 참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또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요 4:24)라고 할 때 이는 예배자로서 요건(要件)을 말한다. 곧 예배는 아무렇게 멋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하신 원칙(原則)을 따라 드려야 됨을 말한다. 이방인의 예배는 예배자의 필요와 감정이 기준이 되지만 기독교의 예배는 ‘하나님 중심’이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오직 구속(救贖)함을 입은 자들만이 드릴 수 있다. 곧 그 안에 하나님의 영(靈)이 있는 자(롬 8:9)들이 드리는 예배다. 예배자의 필수 요건은 대략 다음과 같다.

-믿음(히 11:6 롬 14:3)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고백(요일 1:9 눅 18:3) 하나님은 자기 죄를 고백하는 세리와 같은 자를 찾으신다.
-회개(막 1:15 시 51:17) 하나님이 구하시는 예배는 통회하는 심령의 예배이다.
-기도(엡 3:15 시 17:1) 하나님은 정직한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
-청종(약 1:21 마 8:8) 말씀을 듣는 것이 곧 예배의 중심이다.
-찬양(엡 5:19 시 51:15) 여호와를 찬양함이 예배의 처음이요 끝이다.
-감사(시 50:23 엡 5:20) 여호와의 구속과 섭리를 감사함이 예배의 기초이다.
-거룩(시 96:9 레 19:2)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예배자도 거룩해야만 한다.
-화목(마 5:23,24) 예배하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목해야만 한다.
-희생(고전 5:7 히 9:26) 그리스도의 희생이 없이는 예배가 성립될 수 없다.

-구속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는 예배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신령과 진정’은 ‘영’(in spirit)과 ‘진리’(in truth)라는 말이다. 사마리아 인들은 지식이 없이 마음으로만 드리는 예배를 드렸고, 유대인은 지식은 있었지만 신령이 없는 예배를 드렸다.(요 4:22) 참된 예배가 되려면 신령과 진리로 드려야 한다. 신령과 진리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였다. 기독교에 있어서 진리(眞理)란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 또 ‘신령(神靈)’은 그리스도의 영(靈, 하나님의 영, 성령)을 말한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靈)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 8:10)고 말씀하였다.

그런즉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from) 예수님을 통하여(through) 하나님께(unto) 드리는 예배이다. 예컨대 오직 예수의 영(성령)을 가진 자들만이 드릴 수 있는 예배가 바로 기독교의 예배인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는 말씀은 곧 예수를 통한 받으심 직한 예배를 지적함이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통한 예배 행위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의 대속의 죽으심, 부활, 승천, 재림을 통한 죄 사함과 영생 그리고 영원한 천국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며(信望愛) 그 말씀에 응답’하는 삶을 말한다.

 예배의 정의

이 같은 모든 의미를 종합해 볼 때 성경적 의미의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자존적(自存的) 자세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창조주만을 섬겨야 할 의존적(依存的) 존재라는 사실을 시인하고, 그 합당(合當)한 대상(對象)이신 하나님에게 경배와 복종의 생활이 자기 삶의 근본이 됨을 표시하는 것이다.

예배 신학자 깁스(Gibbs)는 예배를 정의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감사한 마음이 넘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영혼이 쉼을 누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훈(Paul Hoon)은 “기독교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람의 응답이다.”고 하였고 헉스터블(Huxtable)은 “예배는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의사소통이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알아 그 하나님께 감사(感謝)와 사랑(愛情)을 표시하며 자신을 하나님 앞에 헌신(獻身)하는 것이다.

즉 개혁교회의 예배는 “지존 무상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榮光)과 위엄(威嚴)과 존영(尊影)과 거룩의 본질적 가치 앞에 피조물이 엎드리고, 따르며, 섬기게 하고 그 말씀에 충성(忠誠)을 맹약(盟約)하며,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번 주간에는 "믿음"에 대한 주제로 소개합니다.
11월 8일(월) -

첫째, 믿음이란 무엇인가?

1. 한문자의 정의

한자로 믿음을 "믿을 신(信)"이라고 합니다.
"신(信)"이란 한자를 파자(破字)하면 "사람 인(人)"과 "말씀 언(言)"의 합성어 입니다.

믿음이란 "사람이 말씀과 결합된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말씀과 결합된 것을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에서 살펴봅니다.

좁은 의미는 "사람과 사람의 약속"을 말합니다.
이때 약속은 "언어(言語)"와 "문서(文書)"라는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넓은 의미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약속"을 말합니다.
이때 약속은 "하나님의 말씀(聖經)에 대한 사람의 동의(同意)"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16장 31절에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말씀을 믿는 것(同意)입니다.


2. 신약의 언어 헬라어의 정의

헬라어로 믿음이란 단어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피스티스(pistis. πίστις)"라고 합니다.
'피스티스'란 "믿음" "신실성" "엄숙한 약속"이란 뜻으로 성경에서 사용됩니다.

예를 들면 차를 몰고 어느 한적한 시골길을 가는데 마침 할머니 한 분이 머리에 짐을 짊어지고 걸어갑니다.
차를 멈추고 할머니에게 "어디로 가세요?" 물어봅니다.
마침 할머니가 가려는 목적지가 같은 방향이라며 차에 태웠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여전히 머리에 짐을 얹고 있습니다.
"왜 머리에 짐을 이고 계세요? 내려 놓으세요"
그러자 할머니는 "나 혼자 타고 가는 것도 미안한데 어떻게 짐까지 태웁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자동차에 올라탔으면 짐은 자연히 내려놓아야 하지만 자동차의 용도를 잘 모르면 이런 우스개 이야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나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3. 믿음의 생활화

세상은 믿음이 없으면 한 순간도 생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하철을 탈 때에도 지하철이 안전하게 운행 될 것을 믿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없이 이용합니다.
수도물을 사용할 때도 누군가 블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죽이려고 수원지에 독극물을 뿌렸다는 의심을 하면 수도물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비행기에 오를 때에도 비행기가 안전하게 운항 할 것을 믿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좌석에 앉아 그 긴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세상은 각자 맡은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안전하게 유지됩니다.
이런 세상을 좋은 사회라고 합니다.
반면에 나쁜 세상은 서로 믿을 수 없는 관계가 팽배할 때 나타는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경(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성실하고 정직해야 한다고 깨우칩니다.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언 11:1)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다니는 안개니라."(잠언 21:6)

"한결 같지 않은 저울 추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잠언 20:2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디모데후서 3:13)

(적용과 현실)


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세상으로부터 멸시를 받는가?
믿음을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마치 기도하면 성공하는 비결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믿음은 내가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성공하도록 돕는 것이다.

믿음이란 "신행일치(信行一致)" 라고 한다.
신행일치란 믿는 것과 행동하는 것 즉 믿는 것과 생활하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아주 오래 전 이야기라고 합니다.
뉴욕주와 카나다의 국경 근처에 유명한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지요.
독일의 유명한 서커스 단원 찰스 브론딘이란 사람이 폭포 위에 외줄을 걸어놓고 공중곡예를 보여준다고 하여 수 많은 군중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찰스 브론딘이란 공종 곡예사가 손에 긴 장대를 잡고 중심을 잡아가며 외줄을 건넜습니다.
수 많은 군중들이 환호하며 그의 곡예에 손벽을 치며 열광했다고 합니다.
그때 곡예사가 군중들에게 "이번에는 내가 사람을 업고 이 줄을 건너려고 합니다. 정말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군중들은 열렬히 환호하며 "당신을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다"며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곡예사는 맨 앞에서 할 수 있다며 소리치는 한 노인에게 "그러면 당신이 나와 함께 이 일을 해 봅시다" 라고 말하자 그 노인은 "나는 나이가 많아 중심을 잘 잡을 수 없다'고 하였답니다.
이번에는 젊은 사람에게 제안을 하였더니 그 젊은이도 "나는 아직 할일이 많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찾으라"고 합니다.
곡예사가 군중들에게 다시 묻기를 "여러분, 정말 내가 사람을 등에 업고 이 외줄을 건너갈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라고 질문하였을 때 모든 군중들은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하며 외쳤다고 합니다.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느 누구 한 사람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지요.
결국 곡예사는 그의 메니저에게 "이제 우리가 보여주어야 합니다. 내가 의자를 등에 묶고 당신을 앉힐터이니 당신은 내가 시키는대로만 하면 됩니다." 하고 그의 메니저와 함께 외줄타기를 마쳤다고 합니다.
모여 있던 군중들의 한결같은 환호성은 점점 더 커져만 갔습니다.

곡예사의 외줄타기를 보는 것은 좋아하면서도 맡겨야 할 때는 맡기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라고 하겠지요.
믿음이란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에는 목숨도 포함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목숨만은 하고 맡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목숨이 그만큼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소중한 목숨을 맡길 수 있을 때 그것을 온전한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주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을 주옵소서.
내가 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이 찾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11. 09. 2021(화)

두 종류의 무신론자

1. 신을 부정하고 믿지 않는 자
2.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자

세상은 신을 부정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이 없는 삶을 떳떳하게 살아가는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저런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면, 나는 차라리 예수를 믿지 않겠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믿음'은 장식품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적기 위한 신앙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의 방식을 당당하게 유지하는 것이 "믿음"이 아닐까요?

오늘도 믿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둘째, 믿음에 관한 동영상 자료

1. 믿음이란 무엇인가?


2. 믿음의 세 가지 요소
이승구교수
믿음의 세 가지 요소

첫째, 믿음의 내용(notitia)
  1. 사도신경
  2. 이신칭의(以信칭의)

둘째, 동의(assensus)
야고보서 2:19


셋째, 신뢰(fidusia)
복음 사건에 나를 던져 넣는 것

믿음은 역동적이다.
성경은 믿음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믿게 하므로 믿을 수 있다.




3.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는다고 착각하는 사람의 차이

유기성목사 / 예수님에게 입 맞추라
입을 맞추는 것은 아주 친밀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
죄 사함을 받았다!
이런 수준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입을 맞추는 것

무신론자
첫째,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
둘째,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자

믿는 사람의 표정

4.


5.


6.


7. 하나님은 존재하시는가?
보이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거들 / 공기,
하나님은 영적 존재이므로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