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 4대 요소 경쟁 - Agon(아곤), 모방 - Mimicry(미미크리), 현기증 - Ilinx(일링크스), 우연 - Alea(알레아)



놀이 4대 요소, Agon(아곤), Mimicry(미미크리), Ilinx(일링크스), Alea(알레아),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유희의 인간

놀이 4대 요소

경쟁(아곤:Agon): 상대를 이기기 위한 경기나 시합
   예) 축구, 농구 등
우연(알레아:Alea): 요행을 바라며 하는 놀이
   예) 주사위 게임
모방(미미크리:Mimicry): 특정 누군가를 흉내내는 놀이
   예) 역할 놀이
현기증(일링크스:Ilinx): 자신의 내부 기관의 혼란과 착란의 상태를 일으키면서 하는 놀이
   예) 놀이기구


놀이 4대 요소

Agon(아곤), Mimicry(미미크리), Ilinx(일링크스), Alea(알레아)

네덜란드의 고전 학자인 '요한 하위징아'의 저서인 「호모 루덴스」에서 인간을 '유희의 인간'이라고 칭했습니다.
프랑스의 '로제 카유아'라는 학자는 「호모 루덴스」의 이론을 발전시켜 그의 저서인 「놀이와 인간」 (원제 「Man, plays and games」) 에서 ‘놀이의 4대 요소’를 말했습니다. 
저자는 그것을 아곤, 미미크리, 알레아, 일링크스로 소개했습니다. 
이 네 가지 놀이의 요소는 인간의 모든 유희, 놀이에서 발전되어 현대의 비디오 게임에서도 매우 중요한 이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곤(Agon), 경쟁
아곤은 놀이의 주체와 객체간의 경쟁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경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성취감을 얻고, 우월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 아곤을 현대의 게임에 대입 시켜보면 경쟁은 최근 가장 많이 플레이하는 게임 중 하나인 ‘배틀 그라운드’나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게임들도 경쟁에 기반이 되어있고, 혼자 플레이하는 게임에서도 자기 자신과의 경쟁, AI와의 경쟁 등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슈퍼 마리오 같은 게임에서도 플레이어들은 어떻게 이 게임을 더 빨리 클리어하기 위해 경쟁하고, 더 많은 점수를 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또한 비교적 MMR시스템이 잘 짜여져있는 '리그 오브 레전드'같은 AOS게임에서도 플레이어의 등급을 결정하는 랭크 게임 시스템이 중점적으로 돌아가고 있고, '오버워치'의 경쟁전 등 많은 게임에서 이런 경쟁을 유도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게임을 계속 플레이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가 아곤입니다. 많은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경쟁을 어떻게 잘 이끌어 나갔느냐에 따라서 그 게임의 성공이 나뉠 수도 있습니다.

미미크리(Mimicry), 역할
미미크리는 역할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실제 세계에서 하지 못하는 일들을 놀이에서 느끼면서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역할은 롤플레잉 게임에서 흔히 말하는 ‘직업’이라는 요소가 될 수 있지만 게임을 어떻게 플레이할 것인지에 대한 ‘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룰은 게임의 가장 기초적인 요소이면서 플레이어에게 게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감정과 경험을 체험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미미크리는 크게 게임의 '모든 요소들의 집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역할이라고 표현해 놓았지만 슈퍼 마리오 게임에서 마리오가 점프하여 굼바를 죽이는 것도 룰이면서 캐릭터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링크스(Ilinx), 현기증
일링크스는 가장 큰 재미요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놀이를 할 때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어지럽고 신나는 기분을 느끼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곤, 미미크리, 알레아 모두 일링크스를 이끌어내기 위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링크스는 게임을 재밌게 느끼는 가장 큰 요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수집 요소를 모두 모았을 때, 축구 게임에서 멋진 골을 넣었을 때, 전략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생각한 전술이 적에게 통했을 때 등 많은 부분에서 일링크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플레이어는 이런 일링크스들을 느끼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기부여가 되고, 게임의 어려운 부분을 극복하고,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 노력합니다. 
또한 일링크스를 일으키기 위해 알레아를 이용하는 게임들이 많습니다. 좋은 예시는 아니지만 많은 게임에서 강화 확률이나 랜덤 박스같은 시스템으로 플레이어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알레아(Alea), 행운
알레아는 행운이라는 요소입니다. 놀이을 함에 있어서 행운이란 것은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줄 수도 있고, 나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놀이에 몰입을 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알레아의 요소는 작은 부분으로 볼 때 많은 온라인 게임들에서 사용하고 있는 랜덤 박스같은 확률 시스템으로 볼 수도 있지만, 크게 볼 때는 플레이어들이 하는 조작 하나하나의 행운이나 어려운 길을 운으로 통과할 때의 기쁨이 이런 알레아의 요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 등의 AOS게임에서 치명타 데미지가 들어갈 때, FPS게임에서 우연히 적을 맞췄을 때, RPG 게임에서 데미지 확률 등 모든 게임에서 행운의 요소가 들어가 있습니다.

알레아는 플레이어가 게임을 플레이 할 때 더 많은 일링크스를 느낄 수 있게 도와줍니다. 이런 우연적인 요소는 플레이어가 스스로 성취감과 자부심 등을 느낄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 베소라(בְּשׂרָה ), Gospel / 복음의 비밀 / 복음의 삼덕(청빈, 정결, 순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진짜 복음과 가짜 복음

복음(福音) / 복(福), 소리 (音)

복음이란 "복된 소리"라는 뜻입니다.
1. 매우 반갑고 기쁜 소식(消息)
2. 그리스도(Kristos)에 의(依)한 인간(人間) 구원(救援)의 길.
   그리스도(Kristos)의 가르침. 복음서(福音書)

유앙게리온 / 그리스어로 “ευαγγελιον” 이라고 표기합니다.
"ευ"는 "기쁨" 이란 뜻이고 "αγγελιον" 은 "천사"라는 뜻입니다.
두 단어가 합하여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라는 의미가 됩니다.

“유앙겔리온“의 유래는 페르시아 B.C. 538년에 제국인 바벨론을 정복하고 세계 제국의 권좌에 오릅니다.
그동안 바벨론이 지배하였던 많은 나라들을 페르시아가 인수하고서 행정구역 개편, 납세부과 등 새로운 정책으로 통치를 확고히 합니다.
그후 페르시아는 지배영역을 더욱 넓히기 위하여 먼 지방까지 자주 원정을 나가기도 했는데 어느 날 백만 대군을 이끌고 아시아지역을 벗어나 마게도니아(유럽)로 진출하여 거기에서 그리스를 만나게 됩니다.

당시 그리스는 규모가 작은 나라였기 때문에 페르시아 대군을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남자들은 페르시아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죽기로 최종 결정하고 모두 전쟁터로 나가 맞섰습니다.
당시 전쟁에서 대항하지 않고 항복하면 민족이 멸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항하였다가 패하면 그 결과는 참혹한 멸망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개인들의 재산은 모조리 약탈당하고 건물들과 도시들은 불에 타 폐허가 됩니다.
모든 남자들은 칼에 죽을 것이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붙잡혀 죽거나 노예로 팔려갑니다.
전쟁에서 대항하였다가 패한 나라는 이처럼 비참하게 역사의 종말을 맞습니다.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대항하여 이길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이제 페르시아에 의하여 그리스의 종말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은 삶을 포기하고 무서운 죽음의 종말을 기다려야 했고 더러는 들이나 산속으로 피난하여 거기에서 죽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시작된지 한 달이 넘었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전쟁터의 소식은 감감하였고 그리스 주민들은 매일 불안과 두려움과 함께 마음을 조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전쟁터 쪽에서 멀리 한 군사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스 아테네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그 군인을 지켜보았습니다.
42킬로가 넘는 거리에서 달려온 그 병사는 죽을 힘을 다해 비틀거리며 가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포들 앞에 다가와서는 힘없이 쓰러지면서 “승리는 우리에게” 한마디를 외치고 그대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유앙겔리온”하며 외치기를 시작하였고 그들은 이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큰소리로 “유 앙겔리온”하며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이때의 전쟁을 역사에서는 필로폰네서스 전쟁이라 하는데 그 후 그리스 왕 알렉산더가 B.C. 331년에  페르시아를  정복함으로서 세계제국이 됩니다.  


“유앙겔리온”은 그리스어로 “ευαγγελιον”으로 표기하는데 ευ는 기쁨이란 뜻이고 αγγελιον 은 천사란 뜻으로 이 두 단어가 결합되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란 뜻이 됩니다.
이 단어는 그들이 그 때의 그 기쁜 소식을 전해준 그 병사를 생각하며 즐겨 사용했던 새로 만들어진 단어였습니다.


구약에서 복음 "베소라"

복음(베소라) [ besôwrâh ] בְּשׂרָה 스트롱번호 1309

1. 기쁜 소식. 2. 좋은 소식에 대한 보답
발음 [ besôwrâh ]
어원 / 1319에서 유래한 여성형
구약 성경  /  6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여성 기쁜 소식, 좋은 소식, 삼하 18:22, 25
2. 명사, 여성 좋은 소식에 대한 보답, 삼하 4:10.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소식(삼하 4:10, 18:27, 왕하 7:9).

* 1319
בָּשַׂר 스트롱번호1319

1. 기뻐하다.  2. 피엘형 בִּשַּׂר .       .
3. 기쁜 소식으로 즐겁게 하다
발음 [ bâsar ]
구약 성경 / 24회 사용


이사야 40:9
아름다운 소식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아름다운 소식을 히브리어로 "베소라(besora)" 라고 합니다.
베소라가 내포하는 의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입니다(창세기 1:31).
따라서 "좋다" "선하다"가 들어가 있는 것이 "베소라"입니다.

"베소라"는 모음 변화시키면 "바사르"가 됩니다.
바사르는 "살" "육체" "몸" "창조물" "생물"이라고 합니다.

בָּשָׂר 스트롱번호 1320

1. 살.  2. 살아있는 몸의 살. 3. 가축의 살코기 출 16:12
발음 [ bâsâr ]
어원  / 131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70회 사용
☞살(창 2:21, 시 27:2, 슥 14:12), 몸(창 2:24, 출 30:32, 레 14:9), 육체(레 17:11, 민 16:22), 혈육(창 6:12, 시 56:4), 생물(창 7:21, 민18:15), 고기(창9:4, 출12:8, 레16:27), 포피(창17:14, 레12:3), 하체(레6:10), 육신(창6:3, 신5:26, 대하32:8, 잠14:30), 전부(사10:18).



다시 "바사르"를 동사로 생각하면 "베소라"가 됩니다.
그래서 몸, 몸속에 있는육(肉)을 "바사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인 바사르가 되어 이 세상에 육신으로 오신 그 분이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곧 기쁜 소식입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으로 마지막 남은 예언은 재림입니다.

기쁜 소식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救援)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기쁨의 소식을 가리킨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역(使役)으로 말미암은 죄(罪) 사(赦)함의 은총을 의미하는 바, 인간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따라서 '복음(福音)'은 예수님의 가르침 또는 예수님에 의한 인간 구원(救援)의 길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원래 히브리어 '베소라'의 번역으로서 단순히 '좋은 소식'(삼무엘하 18:20, 열왕기하 7:9)
또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제공되는 보상'이란 의미로 쓰였다.
점차 신앙적 의미가 첨가되어 시편과 이사야서 후반부에서는 이 단어가 '바사르'라는 동사형으로 쓰여 장차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질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가리키게 되었다(시편 40:10, 이사야 41:27).

시편 40:10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I do not hide your righteousness in my heart; I speak of your faithfulness and salvation. I do not conceal your love and your truth from the great assembly.


이사야 41:27
내가 비로소 시온에 이르기를 너희는 보라 그들을 보라 하였노라 내가 기쁜 소식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리라.
I was the first to tell Zion, 'Look, here they are!' I gave to Jerusalem a messenger of good tidings.


신약 시대 초기에 이르러서는 헬라어 '유앙겔리온'이라는 용어로 쓰였으며,
이는 본래 전쟁에서의 '승리의 소식'을 의미하나 신약에서는 히브리어 '베소라'의 용례(用例)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 구약이 예언한 메시야(요한복음 4:25),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기쁘고 좋은 소식', 즉 죄인(罪人)을 살리는 구원의  메시지를 가리키게 되었다.

요한복음 4: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The woman said, "I know that Messiah" (called Christ) "is coming. When he comes, he will explain everything to us."


복음의 중심적 내용은

1. 구약 예언과 약속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의 도래(到來)(마태복음 1:16, 사도행전 2:16).
 
2. 예수님의  사역(使役)
 a. 십자가 사건(고린도전서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None of the rulers of this age understood it, for if they had, they would not have crucified the Lord of glory.

 b. 부활(復活)과 승천(昇天) 및 재림의 약속(골로새서 1:5-6)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the faith and love that spring from the hope that is stored up for you in heaven and that you have already heard about in the word of truth, the gospel.
  that has come to you. All over the world this gospel is bearing fruit and growing, just as it has been doing among you since the day you heard it and understood God's grace in all its truth.

이와 같은 내용은 사도 바울뿐 아니라 초대 사도들의 설교의 핵심이었다(사도행전 3:13-26).

복음에 대한 성경의 표현

1. 은혜의 경륜(에베소서 3: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Surely you have heard about the administration of God's grace that was given to me for you,

2. 천국복음(마태복음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And this gospel of the kingdom will be preached in the whole world as a testimony to all nations, and then the end will come.

3. 구원의 복음(에베소서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And you also were included in Christ when you heard the word of truth, the gospel of your salvation. Having believed, you were marked in him with a seal, the promised Holy Spirit,

4. 생명의 말씀(사도행전 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Go, stand in the temple courts," he said, "and tell the people the full message of this new life."


5. 비밀의 경륜(에베소서 3:9)
영원부터 만물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and to make plain to everyone the administration of this mystery, which for ages past was kept hidden in God, who created all things.


6. 십자가의 도(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For the message of the cross is foolishness to those who are perishing, but to us who are being saved it is the power of God.


7. 진리의 말씀(고린도후서 6: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in truthful speech and in the power of God; with weapons of righteousness in the right hand and in the left;



복음의 중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므로, 이 사실이 개인에게 전파(傳播)될 때 믿음과 불신(不信)에 따라 구원과 심판이 결정된다.
복음은 하나님을 떠나 죄의 노예가 된 인류에게 있어 참된 구원과 믿음(빌립보서 1:27), 평화(에베소서 6:15)를 얻게하는 유일한 길이자 토대(土臺)인 것이다(고린도전서 4:15, 베드로전서 1:23).

빌립보서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Whatever happens, conduct yourselves in a manner worthy of the gospel of Christ. Then, whether I come and see you or only hear about you in my absence, I will know that you stand firm in one spirit, contending as one man for the faith of the gospel.




에베소서 6: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and with your feet fitted with the readiness that comes from the gospel of peace.



고린도전서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Even though you have ten thousand guardians in Christ, you do not have many fathers, for in Christ Jesus I became your father through the gospel.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For you have been born again, not of perishable seed, but of imperishable, through the living and enduring word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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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복음삼덕(福音三德) - 청(淸) 정(淨) 순(順)

예수(Jesus)가 복음(福音)으로 지키기를 권고(勸告)하여 가르친 세 가지 덕행(德行).
곧 자원(資源)에 의(依)한 청빈(淸貧)과 평생(平生)의 정결(淨潔) 온전(穩全)한 순명(順命).

1. 청빈(청빈) / 맑을 淸, 가난할 貧

(1). 청백(淸白)하여 가난함.
(2). 성품(性品)이 깨끗하여 가난함.

마태복음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누가복음 9: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청부(淸富)인가? 청빈(淸貧)인가?

청부와 청빈의 개념

오늘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는 이슈는 다양하다.
남북한 정상의 만남으로 교류가 확대되고 금강산 관광과 경의선 연결로 통일이 성큼 다가서는 듯 싶다가, 북한 핵과 미국의 공화당 정권의 등장, 우리나라의 남남갈등, 보혁 갈등으로 남북관계는 전혀 새로운 국면에 처해지고 있다.

한때 이라크 파병과 대통령의 재신임 건, 행정수도 이전의 이슈가 현재는 국가보안법 개폐 등 서로 다른 입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최근 기독교계에서 제시된 또 다른 이슈 중의 하나가 바로 청부인가 청빈인가라는 주제가 아닌가 한다.

한자의 뜻대로 맑고 깨끗한 부와 또 맑고 깨끗한 가난을 의미한다.
청빈에 대한 생각과 예찬은 동서양에서 비슷한 전통을 갖고 있다. 청빈은 고양된 사상과 높은 학문과 실천의 경지를 나타내는 한 기준'로 이해되기도 했다.
공자는 논어에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가하다'고 했으며, 불사이군의 충성을 지키며 수양산에서 죽어간 백이숙제의 얘기는 부정한 부와 명예보다 맑고 높은 절개에 가치를 둔 청빈의 삶이라 할 수 있다.

간디는 "우리 사회는 필요를 위해선 충분하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부족하다"고 하였고,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는 말에서 보듯이 가난은 약간 불편한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고 인지되고 있었다.

불교는 청빈을 주요 가치로 여기고 있으며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강조하고 있고, 시인 서정주는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칼린 지브란은 "가난한 친구여, 가난을 즐겨라. 그대가 정의를 말해 줄 입이 되고 삶을 기록한 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친구여, 가난을 기꺼이 맞아들여라. 그래야 그대를 지배하는 사람들에게 미덕의 기준을 보여 줄 것이고, 그대를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성결한 푯대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가난은 우리를 맑고 깨끗하게 하며 고양시키며 최소한의 물질로도 충분히 살게 하며, 정신적이고 신앙적인 참 삶을 살게 한다.
이것이 청빈론의 요지다.
이러한 청빈론에 대해서는 그 정신은 존중하나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현대의 생활에 적절치 않은 부분이 있고 패배주의적인 신앙 아니냐는 비판도 존재한다.

한편 역사적으로나 세계적으로 부자로서 선행을 하고 사회에 많은 도움을 준 사람들이 허다하다.
여기에서 부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나 은사로서 자신의 재물을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청부론이 고개를 든다.
우리 사회는 아담 스미스가 말한 개인의 이윤 동기에 의해 생산되고 부와 자본이 축적되어 더 큰 생산성을 갖게 되는 자본주의 사회다.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의 능력 차이에서 오는 부의 차별성이 존재한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가장 큰 문제는 분배의 불균형에 있다.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수입을 보장한다는 원칙은 좋으나, 적절한 통제가 없으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부자는 부를 대물림하는 상황에 이른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삼박자 축복 또는 영육 간에 형통하는 축복과 기복이 핵심 복음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는 청부론이란 형태로 나타나며 깨끗하게 벌어서 깨끗하게 쓰면 그것이 복을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의 검소한 절약 생활을 통해 축적된 자본이 근대 자본주의를 가능케 했다는 막스 베버의 주장도 부를 긍정적 각도에서 접근한 중요한 시도였다.

근래 청부론의 주창자들은 교회 일에만 충성하면 무조건 만사형통하다고 말하지 않고, 바른 생활과 바른 신앙을 강조한다. 옳게 믿고 옳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자신의 수입에서 다른 사람의 몫을 반듯하게 떼라고 요구하며, 그렇게 하면 결국 물질적인 복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청부론이 기복주의와는 다르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청부론에 대해서도 비판이 제기된다. 청부론은 기복주의를 교묘히 포장한 것이며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과 다르다는 주장이다. 기복주의 신앙의 핵심은 신앙 목적을 하나님과의 관계나 존재의 변화에 두지 않고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데 두는 것이다. 청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나 '존재의 넉넉함'을 충분히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결론은 '소유의 넉넉함'으로 귀결되며, '풍요로운 삶을 얻기 위해 제대로 믿으라'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존재의 넉넉함'과 '소유의 넉넉함'을 모두 가지려는 욕심 즉 하나님과 돈을 함께 가지려는 욕심을 조장할 수 있다. 그들은 '우선순위'(priority)만 제대로 하면 된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우선순위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선택'(choice)을 말씀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의 부자와 가난함

성경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루어졌다.
예수님의 비유 중 많은 부분이 돈과 관련되어 있다.
구약의 족장시대 믿음의 선진들은 큰 부자들이 많았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모두 큰 부자였다.
동방의 의인이자 부자 욥, 사사시대의 사사들과 이후 왕들도 부자였다.
물론 가난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했던 의인들도 많이 있다.
모세, 아론,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등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이후의 많은 선지자들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신약에 오면 예수님과 제자들과 사도 바울과 많은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가난한 상태가 아니었나. 예수님께서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하시면서 가난을 말씀하셨다.
물론 신약시대에도 부자들이 있다.
아리마대 요셉과 세리장 삭개오는 부자였을 것 같고, 백부장 고넬료도 당시에는 부자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물론 성경 인물을 부의 정도를 가지고 빈부를 나누는 일은 어려운 일이며  비교의 기준도 일정하지 않아 쉽지 않음을 느낀다.

주님의 기도와 야베스의 기도

오늘 우리 주변에 야베스의 기도가 인기 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개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역대상 4:10)란 구약성경이 인기가 있다.
"지경을 넓히라"와 "복에 복을 더하사"란 구절은 많은 집회의 구호로 등장한다.
또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의 교육 훈련 프로그램 형식으로 개발되어 참여하기도 한다.

야베스의 기도는 주님의 기도와는 다르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하나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고 하나님 나라와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물질의 부요보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시며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신다.
오늘날 '주님의 기도' 대신 '야베스의 기도'가 더 사랑받는 현상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잘 먹고 잘 살기 원하는 사람에게 주님의 기도는 매력이 없을 지도 모른다.

빈부 격차의 심화와 구조화

자본주의 역사에서 빈부 격차는 오래고 깊다. 상대적으로 그 역사가 짧은 우리 사회는 아직도 빈부 격차에 대한 비판과 불공정한 부에 대한 멸시가 강하다. 그래서 졸부와 벼락부자에 대한 비판이 강하고 부동산 투기나 부정한 방법으로 번 돈에 대해 비판한다. 그런 사람은 국가의 고위직에 올라갈 수 없음을 지난 정권에서 보았다.

미국 사회를 비판하며 자연의 삶을 사는 스콧 니어링(Scott Neering)은 자본주의 원리를 '네가 일함으로 나는 논다'는 문장으로 요약한 바 있다.
미국식 자본주의에는 '놀고먹는 사람' '먹기 위해 일하는 사람' '일해도 먹기 어려운 사람'의 세 부류가 있다.
그래서 미국에는 천국과 지옥이 공존한다.
한 도시 안에서 특권층은 상상할 수 없는 사치와 향연을 벌이는 한편, 빈민들은 배고픔으로 잠을 못 이룬다.

소득과 부의 분배 정도를 나타내는 로렌츠 곡선을 보면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의 빈부의 격차가 더 심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경우에도 2002년 20월 <뉴욕타임스>에 실린 프린스턴 대학교 폴 크루그먼 교수(Paul Krugmann)의 보고에 의하면, 미국 100대 기업 CEO의 연봉은 70년도에 일반인의 39배였으나, 1999년에 이르러 1,046배가 되었다고 한다.

2002년 <이코노믹 저널>(Economic Journal)에 의하면 세계 인구 중 가장 부유한 1%(5천만 명)의 재산이 가장 가난한 60%(27억 명)의 재산보다 더 많다고 한다.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 2002년 8월 17일자)는 미국 상위 1%가 1981년에는 미국 자산의 25%를 소유했던 것에 비해 90년대 후반에는 그 비율이 38%로 증가했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빈부 격차는 정보의 격차와 지식의 격차에 의해 더 심화되고 구조화될 것이다.

달란트와 청지기

이런 청빈과 청부에 대한 논쟁의 해결을 위해 우리는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할까?

첫째, 재물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 겸손히 살아가라

먼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눅 18:25)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유명한 비유이지만 여기서 바늘귀는 유대 민족이 외부의 침략을 막고 적이 신속히 성안으로 침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약대나 말과 같은 큰 짐승이 쉽게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약대 바늘귀을 만들어 약대가 무릎을 꿇고 간신히 들어올 수 있도록 해 놓은 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약대의 등에 재물을 싣고 성안(천국·하나님 나라)에 맘대로 선 채로 들어 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재물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 겸허히 바늘귀를 통과할 때만 가능하다는 뜻이라고 본다.

둘째, 부와 가난은 그 자체가 성도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열심히 생활하고, 일하고, 전도하며, 이웃을 돕고, 선행을 행한 결과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부자가 되기를 목표하지 않고 가난해지기를 목표하지도 않지만, 성실하게 본분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욥처럼 시험하시기도 하고 다시 축복해 주시기도 한다는 점이다.

셋째, 달란트 비유(마 25:14~30)처럼 우리의 달란트가 5달란트인지, 2달란트인지, 1달란트인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서 일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칭찬하시고 축복하사 큰 복을 주신다는 점을 기억할 일이다.

특히 1달란트 받은 자라도 그가 열심히 일해 1달란트를 더 남겼더라면 5달란트 받은 자와 같이 똑같이 칭찬을 받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청지기에게는 소유권이 없지만 열심히 맡겨진 일을 감당할 때 하나님의 칭찬이 있다는 점이다. 월마트를 창시한 셈 월튼이나 코닥 필름의 창업자나 우리나라의 유한양행의 창설자 유일한 박사나 그들이 자기 기업을 일구어 많은 돈을 모았지만, 청지기로서 그것을 자신의 재물로 삼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고 이웃을 돕기 때문에 칭찬을 받는다. 자신의 재물로 생각하여 약대 등에 높이 싣지 않고 내려 무릎을 꿇고 이웃을 돕고 섬겨서 그들은 부자였으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고 믿는다.

미국 펜실베니아 허쉬 타운(Hershey Town)에는 밀튼 허쉬(Milton Hershey)가 세운 초콜릿 공장과 그 공장의 이익금으로 운영되는 밀튼 허쉬 학교(Milton Hershey School)가 있다.
이 학교는 허쉬 사장이 사재를 전부 투자하여 만든 고아 학교로 출발했으며 지금은 결손 가정 학생들을 위한 학교로서 최고급 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청부인가 청빈인가를 목표하는 것이 중요하다기보다, 선한 청지기로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성실하게 관리하고 일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결과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재물을 주어 부하게 하시기도 하고, 부보다는 영혼의 고아함과 풍요함을 주셔서 가난하게도 하실 것이 아닌가? 선한 청지기의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대로 믿음을 지키며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창조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청빈(淸貧)

회개하고 정직하고 겸손한 자리로

성직자들은 물론이려니와 신앙의 세계에 몸을 담아 수행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의 첫째가 청빈이다.
한국 종교계에는 각기 다른 종교를 신봉하였지만 청빈한 삶을 실천하며 후학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준 세 분 선배들이 있었다.
개신교에 한경직 목사(1902-2000)
가톨릭에 김수환 추기경(1922-2009)
불교에 성철 스님(1912-1993)

한경직 목사께서 남긴 유품은 오로지 세 가지였다.
휠체어, 지팡이, 겨울 털모자였다.
집도 통장도 남기지 않았다.
영락교회 장로들이 집을 사주면 어느 새 팔아서 고아원을 세우거나 모자원을 세우는데 사용하곤 하였다.

김수환 추기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가 남긴 유품은 신부복과 묵주 뿐이었다.

성철 스님 또한 깁고 기워 누더기가 된 두 벌 가사(袈娑)를 남겼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세 분 어른들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와 한국교회의 목사들은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다는 반성이 든다.
교회들은 너무 큰 교회, 부자 교회가 되려 하고 목사들은 유명한 목사, 성공한 목사가 되려고들 한다.
그래서 교회는 백성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되고 목사들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
이런 처지에서 벗어나 교회와 목사들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길은 무엇일까?
그 답은 간단하고 단순한다.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하여 청빈하고 정직하고 겸손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배우는 신앙정신

초대교회 때부터 시작된 수도원 운동은 2000년 교회역사에서 중단 없이 계속 된 경건운동이다. 수도원 운동은 세속생활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는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보다 경건하게 살려는 갈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수도원 운동의 모양은 다양했지만 시대를 무론하고 수도자들에게 공통된 서원은 청빈(淸貧), 순결(純潔), 순명(順命)이다.

이 청빈, 순결, 순명은 산상수훈을 중심으로 하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다. 종파를 초월하여 수도자들은 이 세 정신을 갈고 닦아 예수님의 삶을 닮는 것이 목표로 했다. 수도원과 수도사의 생활규칙을 만든 성 베내딕토 폰 누르시아(St. Benedictus von Nursia. 가톨릭의 베네딕토 수도회의 창설자. 480? ~ 550?)는 수도자들이 거룩한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자신을 개혁하는 수도정신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수도자의 요강(要綱) 중의 첫째가 청빈(淸貧)이다.

청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 그 자체이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외양간에서 나셨고, 30년을 목수로 사셨다. 당시의 목수는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노동자다. 예수님은 3년간 공생 사역 중에 자신의 삶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고 요약하신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근거지 없이 떠도는 유랑이었다. 주의 가르침의 강령이 되는 산상수훈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라고 시작하신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사회를 정화시킬 힘을 잃고, 오히려 세상의 질타를 받고, 세상 권력이 얕잡아 보는 것은 교회와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청빈의 신앙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도자들에 있어 순결(純潔)의 기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삶 자체이다. 33년에 걸친 예수 그리스도의 짧은 일생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티 하나 없는 순결 그 자체시다. 순결의 쉬운 말은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한 깨끗함이다.

요한1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깨끗하여야 할 이유에 대하여 말씀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1서 3:3)

믿음과 소망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깨끗하셨으니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깨끗하여야 한다는 주문이다. 깨끗함이 힘이다.

평생을 깨끗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은 복중의 복이다. 문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에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경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회개하면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진다고 약속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지난 날 깨끗하게 살지 못하였음을 후회만이 아니라 철저한 회개와 올곧은 믿음으로 깨끗하여지고, 깨끗한 삶 살기를 결단하는데서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순명(順命)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자기를 온전히 바치는 삶을 말한다. 순명의 모본도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께서 마지막 날 밤에 드린 기도가 순명의 모본이 된다.

"(예수께서)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하시니"(눅 22:41, 42)

주님의 이 기도에서처럼 자기가 원하는 것이나 자신의 뜻하는 바가 아니라, 나를 통하여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 그것에 자신의 삶을 반영하여 바치는 삶이 진정한 순명의 신앙이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 자기 뜻을 이루려 한다. 그러기에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듣고, 구하는 기도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참되고 바른 기도다. 그래서 기도는 Speaking(말하기)이 아니라 Listening(청취, 귀를 기울임, 경청)이다.

빌립보서 2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개하면서 진정한 순명의 삶을 교훈하신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2. 정결(淨潔) / 깨끗할 정, 깨끗할 결

(1). 정(淨)하고 깨끗함.

3. 순명(順命) / 순할 順, 목숨 命


(1). 명령(命令)에 복종(服從)함.
(2). 천명(天命)에 순종(順從)함.



마태복음 19:21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고린도후서 6:10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여 완덕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청빈과 정결과 순명의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청빈과 정결과 순명은 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생활모습이고 복음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권고하신 삶의 형태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복음삼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청빈한 생활의 모범

성서를 읽어보면 성모님은 가난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낳으실 때에도 여관에 방을 얻지 못하고 마구간에서 출산해야 하는 가난을  맛보았습니다.(누가 2:7)

    요셉과 마리아는 가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전에서 정결례의 제물을 봉헌할 때에도

    가난한 이들이 바치는 비둘기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성모님은 목수의 아내로서 손수 길쌈을 하여 옷을 만들고 음식을 준비하면서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를 꾸려 갔습니다.

    성모님은 현재의 우리들보다 더 가난한 생활을 하셨지만

    그날그날 주어지는 물질에 대하여  감사하며 사셨습니다.

    성모님은 세상 만물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고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대로 물질을 선용할 수 있었습니다.

    청빈이란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참된 청빈이란 물질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며

    하느님의 뜻대로  재물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도자들처럼 청빈을 실천하기 위하여

    물질에 대한 소유권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재물과 부채와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미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 봉헌했으므로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물질적으로 곤란한 생활을 하더라도

    2000년 전의 성가정보다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성모님과 예수님의 뜻대로 사용하고자 힘써야 합니다.

 정결한 생활의 모범

    원죄 없이 잉태되시고 평생 동정이신 성모님은 일생을 순결하게 사셨습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은 영육간의 모든 면에서 순결하신 분이셨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정결의 덕을 닦기 위하여 일생을 동정으로 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정결의 덕은 어떤 사람이든지 완덕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필요합니다.

    동정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정덕(貞德)은 동정(童貞)을 잘 지키는 것이고,

    기혼자들에게는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이성적인 관계를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결의 참된 의미는 사람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특히 이성간의 지나친 애착을 끊어버리고

    마음과 몸을 자신의 신분에 맞게 순결한 상태로 간직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모님께 봉헌된 사람으로서 성모님처럼 순결(정결)한 생활을 하려면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추한 생각들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좋지 않은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예수님!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나쁜 생각들을 끊어버립니다.”라고 말하면 좋습니다.

    때로는 좋지 않은 생각이 마귀의 유혹에 의하여 오는 경우도 있으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한다. 정욕의 마귀야, 물러가라.”라고 명령할 수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순결한 생활을 하려면 모든 유혹의 기회를 피해야 합니다.

    인간은 나약하여 유혹의 기회나 환경에 자신을 던지면 그 유혹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과신하지 말고 유혹의 함정에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그래야 후회의 쓴 잔을 마시지 않게 됩니다.

    죄를 지을 때 주어지는 한 순간의 쾌락보다는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서 치러야 할

    죄의 대가가 더 크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끝으로, 순결한 생활을 하려면 나태한 생활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대화를 멀리하고 영적 독서와 영적인 대화를 많이 하고자 힘쓰며

    깊은 기도 생활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정결한 생활을 할 수 없기에 자주 자신의 순결을

    성모님께 봉헌하며 도움을 청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순명의 모범

예수님이 출생할 당시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죄를 지은 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는 삶이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된 성모님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누가 1:38)

성모님은 마구간에서의 출산이나 출산 후의 피난살이나 장부인 요셉의 죽음 앞에서도

    오직 하느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네”하고 순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면서

    오직 하느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불평 없이 순명하셨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있어서 순명이란

    자신의 장상들을 통하여 나타난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어떤 신분에 있든지 성서의 말씀과 나의 환경과 웃어른들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에 늘 순명할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순명의 참된 의미는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순명의 덕을 실천하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다고 성서는 말합니다.(히브5,8)

    우리가 참으로 순명의 덕을 닦으려면 때로는 자기의 뜻에 맞지 않아도

     자기의 뜻을 버리고 웃어른과 환경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명의 덕은 자기 자신을 비우는 아픔과 이웃을 위하여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고통을 통하여 성장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마태7,21)

    청빈과 정결과 순명은 하늘나라를 효과적으로 건설하게 하는 성령의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음삼덕을 닦으려고 힘쓰는 동시에 이 은사를 풍성히 내려 주시도록

    간청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짝이시며 복음삼덕의 모범이신 성모님과 함께

    이 은사를 청하고 늘 성모님과 일치하여 생활하고자 한다면

    보다 빨리 덕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청빈과 정결과 순명은 소유물과 사람과 자신에 대한 애착의 끈을 끊어줌으로써

    하늘을 향하여 날아갈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는 율법을 복음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롭게 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복음이라고 믿었다.
그 결과 바울은 독신의 길을 걸으며 예수님의 삶을 살고자 몸부림을 쳤다.

고린도전서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린도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율법은 가짜 복음이다.
마치 율법을 지키므로 거룩하고 의롭게 되는 것처럼 살아간다.
예수를 율법처럼 믿으려고 한다.
착하고 선하게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한다.
이러한 것은 율법적 예수를 믿는 것으로 가짜 복음이라고 하겠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믿음도 가짜 복음이다.
왜 사람을 의식하는가?
복음은 오직 예수님만을 의식한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고, 금식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

마태복음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천국복음(하나님 나라의 복음)




마태복음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태복음 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태복음 24:14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누가복음 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하나님 나라 복음 즉 천국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천국 복음은 내가 천국의 삶을 살아가야만 전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0:1-4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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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교수(복음기도신학연구소)

이스라엘에서 구약을 전공하며 히브리어가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언어임을 깨닫고 현재 성경언어학교를 통해 믿음의 세대를 세우는 일에 전력하고 있다.


하나님은 창세전 꿈꾸시던 원형의 회복을 위해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복음이 우리 존재에 부딪혀지면 그 결과가 반드시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복음을 만났는데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복음이 내 안에 실제가 되었다면 반드시 변할 수밖에 없다.
당신은 변화되었는가?

복음에 대한 오해 없어야

우리가 함께 생활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오해가 일어난다.
이러한 오해는 서로 잘 몰라서 나타나기도 하고, 서로 잘 알아도 발생한다.
이런 오해는 마음에 좀 상처를 받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풀어지고 진의가 반드시 드러난다.
하지만, 복음에 대한 오해를 가진 채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베쇼라

복음은 히브리어로 (베쇼라, 참조: 삼하 18:20, 22, 25)
헬라어로 ‘εὐαγγέλιον’(유앙겔리온),
영어로 ‘기쁜 소식’(the gospel)이다.

사무엘하 18:20, 22, 25.

요압이 저에게 이르되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에 전할 것이니라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날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하고.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컨대 아무쪼록 나로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음질하게 하소서 요압이 가로되 내 아들아 왜 달음질하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인하여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

파숫군이 외쳐 왕께 고하매 왕이 가로되 저가 만일 혼자면 그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할 때에 저가 차차 가까이 오니라.

신약 성경이 기록된 헬라어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에는 ‘기쁜 소식이 가져오는 보상(reward)’이란 의미도 있지만 ‘고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 인생의 삶이나 미미한 사물에도 기쁨 너머에는 항상 고난이 동반된다.

욥기는 그런 우리의 인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욥의 고백을 들어보자.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여기서 ‘단련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바칸’인데 ‘고난 가운데 시험’(examine, prove, test)을 말한다.

바칸

원어에 나타난 복음의 속성

출애굽기 28:17-20에 보면 여러 보석들의 이름이 나온다.
그 중에 ‘홍마노’(백수정)라는 보석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다이아몬드(diamond)다.
히브리어로는(야할롬)으로 발음되는 이 단어에는 복음이란 의미가 전혀 없다.

야할롬은 “쇠망치(hammer)로 내려치다”는 뜻이다.
보석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순도 99.99%의 24K 순금이 되기 위해선 금을 정제하는 용광로에 24번을 들어갔다 나와야 한다.

야할롬

그래서 이렇게 만들어진 순금(진짜 금)은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와 같이 복음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아는 하나님의 참된 자녀는 결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συμπάσχω)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πάθημα)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6-18)”

그래서 복음은 속성상 환영을 받지 못한다.
복음이 기쁜 소식이니까 모두가 좋아하고 복음 앞으로 나아올 것 같지만 천만에 그렇지 않다.
태생적으로 자기 자아에 길들여진 인간은 ‘고난’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이 복음을 싫어한다.
우리가 말씀 앞에 서거나 복음이 우리의 삶을 깊숙이 파고들면 자아가 본색을 드러내며 복음 앞에 발악을 한다.

그래서 복음을 잘 이해하는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쳤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어찌하든지)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 1:14)”
다른 것이 아니라, ‘복음’ 만이 우리를 원형으로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 자료정리 / 03-06-2021(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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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그 용어의 유래

“복음”이라는 용어의 의미와 유래를 정리 해 봅니다.
“복음”을 영어성경에서는 Good news 또는 Godspel 이라 하는데 이는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란 뜻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어떤 좋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반가운 소식“의 의미를 내포한다고 합니다.
즉 죄로 인하여 형벌 받을 운명에 놓여 있었던 인간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죄를 사하시고 크신 복을 주시기 위하여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을 선지자들의 예언으로 알려주셨는데 그 예언이 이제 성취되어 이미 시작하였다는 내용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가 복음의 본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복음”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는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에 이에 적절한 용어를 찾다가 ”복음“(복된 소식)이라는 용어로 확정하였던 것입니다.

신약성경이 기록될 때 원어인 그리스어(헬라어)로는 “유 앙겔리온”이라 하였는데 이 말에는“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 그 자체가 가장 큰 기쁨이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기 때문에 세상의 일반적인 기쁨과는 구별하기 위하여 “유 앙겔리온“이라는 특별한 용어를 채택하여 사용하기로 했던 것 같습니다.

”유앙겔리온‘이라는 용어의 유래를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유앙겔리온“의 유래

페르시아는 B.C. 538년에 제국인 바벨론을 정복하고 세계제국의 권좌에 오릅니다.
그동안 바벨론이 지배하였던 많은 나라들을 페르시아가 인수하고서 행정구역 개편, 납세부과 등 새로운 정책으로 통치를 확고히 합니다.
그후 페르시아는 지배영역을 더욱 넓히기 위하여 먼 지방까지 자주 원정을 나가기도 했는데 어느 날 백만 대군을 이끌고 아시아지역을 벗어나 마게도니아(유럽)로 진출하여 거기에서 그리스를 만나게 됩니다.
당시 그리스는 규모가 작은 나라였기 때문에 페르시아 대군을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남자들은 페르시아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죽기로 최종 결정하고 모두 전쟁터로 나가 맞섰습니다.

당시 전쟁에서 대항하지 않고 항복하면 민족이 멸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항하였다가 패하면 그 결과는 참혹한 멸망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개인들의 재산은 모조리 약탈당하고 건물들과 도시들은 불에 타 폐허가 됩니다.
모든 남자들은 칼에 죽을 것이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붙잡혀 죽거나 노예로 팔려갑니다.
전쟁에서 대항하였다가 패한 나라는 이처럼 비참하게 역사의 종말을 맞습니다.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대항하여 이길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이제 페르시아에 의하여 그리스의 종말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은 삶을 포기하고 무서운 죽음의 종말을 기다려야 했고 더러는 들이나 산속으로 피난하여 거기에서 죽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시작된지 한 달이 넘었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전쟁터의 소식은 감감하였고 그리스 주민들은 매일 불안과 두려움과 함께 마음을 조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전쟁터 쪽에서 멀리 한 군사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스 아테네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그 군인을 지켜보았습니다.
42킬로가 넘는 거리에서 달려온 그 병사는 죽을 힘을 다해 비틀거리며 가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포들 앞에 다가와서는 힘없이 쓰러지면서 “승리는 우리에게” 한마디를 외치고 그대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유앙겔리온”하며 외치기를 시작하였고 그들은 이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큰소리로 “유 앙겔리온”하며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이때의 전쟁을 역사에서는 필로폰네서스 전쟁이라 하는데 그 후 그리스 왕 알렉산더가 B.C.331년에  페르시아를  정복함으로서 세계제국이 됩니다.  

“유앙겔리온”은 그리스어로“ευαγγελιον”으로 표기하는데 ευ는 기쁨이란 뜻이고 αγγελιον 은 천사란 뜻으로 이 두 단어를 합하니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란 뜻이 됩니다.
이 단어는 그들이 그 때의 그 기쁜 소식을 전해준 그 병사를 생각하며 즐겨 사용했던 새로 만들어진 단어였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쁨이 너무나 크고 위대하고 신비하기 때문에 세상의 일반적인 기쁨과는 구별하기 위하여 약 350년전 한때 그리스인들이 즐겨 사용하였던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를 도입하여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신비한 기독교 복음의 특성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특성

첫째,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기쁨을 제공하는 것

세상에서 경험되는 기쁨은 관계된 자들에게만 해당될 뿐 다른 사람에게는 무관하거나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운동 경기에서 승리한 쪽은 기쁨이 되지만 패한 쪽은 기쁘지 않습니다.
국회의원으로 선출 된 자는 기쁨이 되지만 선출 되지 못한 자에게는 그 반대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은 양쪽 모두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입니다.
즉 나에게도 기쁨이 되지만 너에게도 기쁨이 되고 그에게도 기쁨이 됩니다.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이웃나라나 먼 다른 나라 사람이나 남녀노소 귀천을 막론하고 한결같은 기쁨을 제공합니다.
이와 같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기쁨을 제공하는 것은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한결같은 기쁨을 제공하는 신비한 특성이 있습니다.  

둘째, 기쁨의 지속성

세상에서 얻는 기쁨은 그때 잠간이요 순간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물거품처럼 식어지고 사라집니다.
행복을 안겨 줄것 처럼 보였던 그 기쁨은 사라져 없어지고 허전함과 아쉬움만 남겨줍니다.
잠시 나타나 보였다가 사라져 없어지는 것들은 참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온통 쉽게 변하고 사라지고 부패해버리는 거짓된 것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참 기쁨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오래토록 지속하는 참 기쁨을 제공합니다.
어제도 기뻐했지만 오늘도 기쁘고 내일도 기쁨이 됩니다.
한 달이 되고 1년이 되어도 기쁨의 감정은 변하지 않고 여전합니다.
어려움과 가난과 고난이 닥쳐와도 변하지 않고 핍박이 와도 그 기쁨은 사라지지 않고 빼앗기지도 않습니다.
사라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은 참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참 기쁨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참 기쁨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거듭난 자들만이 변하지 않는 참 기쁨을 이해하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변하지 않는 참 기쁨을 제공합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신비한 복음의 특성입니다.

셋째, 큰 기쁨을 제공하는 것

이 세상이 제공하는 기쁨들은 순간적이면서도 극히 작은 것들 뿐 입니다.
사람들은 유치하고 저급하고 작은 기쁨에 매달려 좋아하고 즐거워합니다.
모두 다 허풍스럽고 사소한 것들입니다.
두더지가 땅위의 좋은 것을 모르고 땅속만을 파헤치면서 무엇을 찾으려 애쓰듯이 사람들은 정말 크고 좋은 참 기쁨을 알지 못한채 작은 것들을 붙잡으려고 수고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위대하고 놀라운 큰 기쁨을 제공합니다.
결코 작은 것이 아닌 큰 기쁨을 선물합니다.
충만한 기쁨, 넘치는 기쁨, 표현 할 수 없는 한 없는 기쁨을 제공합니다.
실로 기독교의 복음이 제공하는 큰 기쁨과 견줄만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인들 중에는 자기 일생에서 경험 해보지 못한 놀랍고 큰 기쁨을 복음에서 처음 체험했다 하며 지금도 그 기쁨을 누리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고 간증하며 증언하는 것을 쉽게 봅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은 기쁨을 증가시켜 줍니다.
그 진리를 자세히 그리고 깊이 알면 알수록 그 기쁨은 크게 증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처럼 복음의 신비스런 특성 때문에 세상의 일반적인 기쁨과는 차별을 두려고 “유앙겔리온“ 이라고 하는 특별한 단어를 도입하여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롬 1:16) 오늘날에도 복음이 바르게 전하여 지기만 한다면 그리고 듣는 자들이 그 내용을 바르게 듣고 이해하기만 한다면 참되고 크고 신비한 기쁨의 삶을 누구나 체험하며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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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소식(유앙겔리온)

약 2천여 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던 당시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어쩌면 모든 정치와 경제, 종교와 사회 등 저 밑바닥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도 로마와 자국의 권력자들의 지배에 의해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면서 할 말 못하며 살아가고 있었으리라.
이러한 상황에서 메시아, 예수님의 탄생은 만백성에게 “기쁜 소식” 혹은 “좋은 소식”(Good News)이었음에 틀림없다.

일반적으로 성경에 “복음”(福音)이라고 번역된 이 용어는 원래 기쁜 소식을 뜻하는 헬라어 “유앙겔리온" 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학에 가장 중요한 단어로 자리매김하게 된 이 용어는 ‘좋은’, ‘기쁜’, ‘반가운’을 의미하는 “eu;”와 ‘소식’, ‘기별’을 뜻하는 "aggelion"의 합성어로서 신약성경 전체에 76번 나타난다.

고대지중해 문화권에서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비롯하여 황제와 관련된 모든 사건들은 모두 좋은 소식이었다.
이를 테면 황제의 출생, 생일, 즉위식, 그리고 군사적·정치적 승전보 등이 모두 좋은 소식, 반가운 기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축제일이 되면 전령관(kerux. 케룩스)이 말을 타고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여기에 유앙겔리온이 있다”고 외치며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알렸던 것이다.
그 케룩스가 전하는 내용을 우리가 잘 아는 “케리그마”(Kerygma)라고 했던 것이다.

소아시아의 프리에네(priene)에서 이러한 쓰임새의 기원을 알게 해주는 기원전 9년의 고대 비문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기원전 63~기원후 14)의 탄생에 관해 “신의 생일은 세상을 위한 기쁜 소식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도미티아누스 황제(기원후 51~96)는 스스로 “신이요 황제”라고 자처하여 ‘유앙겔리온’을 외치면서, 자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했다. 곳곳에 황제 신전을 지어 참배하도록 하면서 말이다. 이처럼 황제의 근황들을 알리는 좋은 소식을 의미하는 용어가 바로 ‘eu;agge;lion’(유앙겔리온)이며, 이런 기쁜 소식들은 로마제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과 안정을 주는 희망의 용어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복음서 저자들과 사도 바울은 당시 황제에게만 적용되었던 이 개념을 차용하여 예수의 생애야 말로 바로 이 ‘유앙겔리온’이라고 온 지중해 세계에 선포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의 탄생, 생애, 죽음, 부활과 현현을 그리스도의 승리(승전보)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유앙겔리온”이라는 말 한마디를 통해서 1세기의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야말로 황제와 관련된 기쁜 소식 못지않게 반갑고도 좋은 기별이었으며, 그의 오심은 곧 세계가 동터오는 것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만백성의 구원자요, 화해자로 오셨다는 예언자적 목소리가 보다 더 강력하게 담겨야 할 것이다.

그는 진정 평화의 왕이요, 회복의 화신이자 우리 민족의 일치와 화합을 위해 오신 분임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연평도에서 죽어간 해병대 병사들과 주민들을 기억하고 그 유가족의 마음을 위로하는 일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북한의 도발에 맞선 전투의지를 주장하는 것도 일리 있지만 굶어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발터 카스퍼(W. Kasper)가 “예수의 메시지는 기쁜 소식이요, 하나님의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은총의 제공이다…. 예수의 설교는 위협의 설교가 아니라 기쁜 소식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 나라의 지도자들도 그러한 신앙자세로 이번 일을 잘 대처해준다면 백성들에게 뜻 깊은 선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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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내게 부르짖으라...응답하겠고

- 이는 미래의 모든 일을 주관하며 계시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뿐이므로, 그분께 간절히 매어달려야 함을 상기시킨다.
특히 '부르짖으라'의 히브리어 '카라'(*)는 '절규하다'는 의미로서, 심한 갈증속에서 물을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던 삼손의 모습이나 자식의 잉태를 위해 간구하던 한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삿 15:18. 삼상 1:10-16).


부르짖으라(카라) 7121.

קָרָא 스트롱번호7121

1. 부르다.  2. 삿 18:23.  3. 도움을 청하다
발음 [ qârâʼ ]
구약 성경 /  755회 사용



비밀(바차르) 1219.

בָּצַר 스트롱번호1219

1. 삭제하다.  2. 삼가다.3. 신 28:52
발음 [ bâtsar ]
구약 성경  / 38회 사용
☞거두다(레 25:5,11, 삿 9:27), 끊다(시 76:12), 견고하다(민 13:28, 왕하 18:13, 스 11:16), (성곽이 하늘에) 닿다(신 1:28, 9:1),
둘러 있다(신 3:5), 은밀한 일(렘 33:3), 금지하다(창 11:6), 무성하다(슥 11:2), 견고히 하다(렘 51:53).
[명] 포도 따는 자(렘6:9, 옵1:5), 거두는 자(렘49:9), 성벽(겔36:35), 성(호8:14).


* רָז 스트롱번호  7328

1. 비밀.  2. 복수형으로 רָזִן
발음 [ râz ]
어원 / ‘가늘게 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한 듯함
구약 성경  /  9회 사용

은밀한 일[것](단 2:18, 47,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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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에서의 비밀









신약에서 비밀이란 "신비"라는 뜻으로 28회 사용됩니다.

μυστήρι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3466

1. 비밀.  2. 마 13:11. 3. 신비
발음 [ müstēriŏn ]
어원  / μύω ‘입을 다물다’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비밀, 비밀 의례, 비밀 교훈, 신비.
  a. 마 13:11, 막 4:11, 눅 8:10.
  b. 비밀, 신비, 롬 11:25, 고전 15:51, 골 2:2.
  c. [계시록에서] 계 1:20, 10:7, 17:5 ,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비밀(마 13:11, 눅 8:10, 살후 2:7).

첫째,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골로새서 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


둘째, 복음의 비밀

고린도전서 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셋째, 천국의 비밀

마태복음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넷째,  이방인의 비밀

로마서 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다섯째, 종말에 관한 비밀

요한계시록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


여섯째, 영의 세계의 비밀

고린도전서 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하나님의 뜻(불래 βουλή, 델레마 θέλημα) / 하나님을 믿으라(마가복음 11:20-25) / 하나님의 일(요 6:29)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 하나님’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부르는 데 있어서 많은 경우에 ‘아버지’를 덧붙어 부르기도 하는데, 이 때 ‘하나님’과 ‘아버지’ 붙여 부르는 경우에 ‘하나님 아버지’라 부르기도 하고, ‘아버지 하나님’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면 이 두 경우에 그 의미는 어떻게 다른가?

언어에서 복합어(겹낱말)가 쓰일 때 그 두 낱말은 문법적 관계에 있어서 주(主)와 종(從), 즉 주어와 수식어의 관계를 가지게 된다. 예를 들어 ‘달밤’이란 말은 ‘밤’이라는 주어에 ‘달’이란 수식어가 붙어 “달이 빛나는 밤”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관계를 ‘하나님’과 ‘아버지’에 적용시켜 보면 어떠한 표현이 맞는가를 쉽게 알 수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아버지’를 결합시킬 때 거기서 주가 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이고, ‘아버지’는 그 ‘하나님’을 수식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경우에 그 두 낱말 ‘하나님’과 ‘아버지’를 어떻게 결합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든 ‘달밤’의 예에서 보는 대로, 주 된 낱말이 ‘하나님’이 되므로 따라서 그 복합어가 나타내고자 하는 개념은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내용을 수다히 볼 수 있다. 성경에서 ‘아버지’라는 낱말의 쓰임을 보면 첫째로 ‘하나님’을 가리키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 중 구약에서보다는 신약에서 훨씬 많이 쓰이고(거의 400회), 신약 중에서는 요한복음에 가장 많이(110회) 나타난다. 이는 요한복음이 예수를 특별히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기도 중에 수많이 쓰는 이 복합어를 ‘하나님 아버지’로 써야 하느냐, 아니면 ‘아버지 하나님’으로 써야 하느냐? 성경에서는 이 두 낱말이 따로 쓰이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는 그것이 복합어의 형태로 쓰이는 대표적인 예를 사도신경 중의 첫 고백의 항목에서 볼 수가 있다. 헬라어로는 Theon Patera, 라틴어로는 Deum Patrem, 이들 원어의 영어 번역은 God the Father 이다. 여기서 우리말 사도신경은 처음에 (아마 영어로부터의 번역인 듯) 그 두 낱말의 순서를 그대로 따라 ‘하나님 아버지’로 번역하여 오랫동안 쓰여 왔다. 그러나 이 번역이 바르지 못 한 것을 최근의 재번역에서 ‘아버지 하나님’으로 바로잡았다. 이것은 인구어의 구문과 우리말의 구문이 다른 것을 간과한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말로 ‘과학자 아인슈타인’이라고 할 때, 영어로는 ‘Einstein a scientist'이지 ’A scientist Einstein'이 될 수 없는 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이상과 같이 분석해 볼 때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할 때 ‘하나님’과 ‘아버지’를 겹낱말로 쓸 때는 ‘하나님 아버지’보다는 ‘아버지 하나님’으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나님의 뜻(불래, 델레마)

하나님의 뜻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뜻으로 "불래"
불래의 뜻은 어느 누구도 그 뜻을 변경할 수 없습니다.

βουλή, ῆς, ἡ 스트롱번호 1012

1. 뜻.  2. 결의.  3. 사람의 결정
발음 [ bŏulē ]
어원 / 101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뜻, 의도, 의향, 동기, 고전 4:5.
2. 결의, 결정.
 a.  사람의 결정, 눅 23:51, 행 5:38, 27:12.
 b. 하나님의 결정, 눅 7:30, 엡 1:11, 히 6:1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의견(행 27:12), 뜻(눅 7:30, 행 2:23, 고전 4:5), 결의(눅 23:51), 사상(행 5:38), 결심(행 27:42).

둘째는 하나님의 소원적인 뜻으로 "델레마"

델레마는 사람의 결정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변경될 수 있습니다.

θέλη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2307

1. 뜻.  2. 뜻하는 바. 3. 마 6:10
발음 [ thĕlēma ]

뜻풀이부
I. 뜻, 의지.
II. [객관적으로] 뜻하는 바.
 1. [일반적으로] 마 6:10, 26:42, 눅 11:2, 요 6:39, 행 21:14, 골 4:12, 히 10:10.
 2. [자신의 행동에 관하여 바라는 바] 요 5:30, 6:38, 고전 16:12, 엡 1:9.
 3. [다른 사람의 행동에 관하여 의지된 바]
  a. [인격적 존재에 대하여] 마 21:31, 눅 12:47.
  b. [마귀에 대하여] 딤후 2:26.
  c.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탁월성] 롬 12:2, 엡 5:17, 살전 4:3, 5:18, 벧전 2:15, 4:2,
      γινώσκειν τὸ θέλημα : 뜻을 알다, 롬 2:18, 행 22:14.
  d. ποιεῖν τὰ θελήματα τ. σαρκός : 육체의 욕망을 행하다, 엡 2:3.
III. [주관적으로 의도하거나 욕망하는 행동]
 1. [인간의 뜻에 대하여] 고전 7:37, 벧후 1:21, [예수의 죽음을 갈망하는 유대인의 뜻에 대하여] 눅 23:25.
 2. [하나님의 뜻] 엡 1:11, 벧전 3:17,
    διὰ θελήματος θεοῦ : 하나님의 뜻대로, 롬 15:32, 고전 1:1, 고후 1:1, 8:5, 엡 1:1, 골 1:1, 딤후 1:1

연관 단어 / 문법설명
2309의 연장형
관련 성경
뜻(마 7:21, 눅 12:47, 고전 1:1, 엡 1:11), 원(마 26:42, 요 5:30), 원하는 것(엡 2:3).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한자풀이

이현령비현령의 각 한자를 바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耳(이) : 귀, 청각 기관의 일부를 나타내며, 소리와 관련된 의미를 가집니다. 
  • 懸(현) : 매달리다, 달다와 같은 의미를 가지며, 무엇을 떠올리거나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뜻합니다. 
  • 鈴(령) : 종, 방울, 소리와 관련된 물체를 나타내며, 소리의 발생을 의미합니다. 
  • 鼻(비) : 코, 인체의 기관 중 하나를 나타내며, 냄새와 관련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懸(현) : 매달리다, 달다
  • 鈴(령) : 종, 방울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은 한자어 속담 중 하나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속담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 해도 될 수 있고, 저렇게 해도 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양쪽에 관련되어 어느 한쪽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 속담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며, 언론에서도 종종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정치인이 어떤 정책을 추진하다가 이현령비현령에 빠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속담의 유래는 불분명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중국 절대군주인 만만황제의 첫째 아들인 묵황(穆皇)이 임금의 위치를 먼저 물어봤다가, 버릇없는 몸짓을 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버려 실패한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위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이현령비현령은 상황에 따라서 어떤 선택을 할지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에 자주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이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은 한자어 속담으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 해도 될 수 있고, 저렇게 해도 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하나의 문제나 상황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며, 모든 선택이 타당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한자어 속담의 경우 유래가 애매한 경우가 많은데, 이현령비현령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표현이 무척 오래전부터 존재하였으며, 이를 한자어로 표현한 것이 이현령비현령이 됩니다. 

실제로 중국의 역사적인 문헌인 '밍자(明子)'에는 "귀는 귀걸이로 장식을 하며, 코는 코걸이로 장식을 한다"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 구절은 여성의 장신구로서의 귀걸이와 코걸이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역사적인 배경에서 파생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현령비현령은 고대 중국의 첫 번째 황제인 황제(黃帝)의 십 신(十神) 중 하나인 이神(耳神)에 대한 이야기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여 생각을 형성하고 판단할 때, 손가락에 대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귀와 코에 대한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이神은 인간의 판단능력이나 직관력과 관련된 신이었으며, 이현령비현령의 의미와도 일맥상통할 수 있습니다. 
한자어 속담에서는 단어의 의미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현령비현령의 경우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선택의 중요성은 어떤 일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취해야 하는 행동이 대부분의 경우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속담은 선택을 내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뜻, 의미에 관한 예화

▣ 세 배의 축복

한 여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인도 선교사로 가기를 원해서 신학을 공부하고, 언어 훈련도 마쳤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언니네 가정에 큰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아들 셋, 딸 하나를 둔 언니가 그만 병들어 세상을 떠나더니, 곧 그 남편마저 죽었습니다. 졸지에 아이 넷을 떠맡게 된 그녀는 도저히 아이들을 남기고 선교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선교본부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인도 선교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의 뜻이 다른데 있는 것 같습니다. 가지 못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선교사의 꿈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믿음으로 정성껏 키웠습니다. 25년 후, 4명의 아이들 중 세 명이 인도 선교사를 자원했습니다. 그녀는 다시 선교본부에 편지를 띄웠습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는 저의 기도를 25년 만에 세 배로 이루어주셨습니다. 이제 저희 세 자녀를 인도로 파송해주세요.”
하나님의 뜻은 내 뜻과 다를 수 있고, 하나님의 시간은 내 시간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우리의 뜻을 초월해서 열매를 만들어냅니다.

▣ 상어와의 혈전

플로리다 주에 사는 제리라는 사람이 친구 두 사람과 함께 고무 구명보트를 타고 5일 동안 대서양에서 표류했던 일이 있었다. 그들은 닷새 동안이나 추운 바다에서 표류하던 참이라 세 사람 모두 기진맥진해 몽롱한 상태가 되었다. 이때 상어가 나타나서 세 사람이 누워 있던 구명보트를 들이받기 시작했다. 이대로 두면 구명보트에 구멍이 나게 되고, 구명보트를 잃으면 곧 죽음이었다. 그들은 상어와 필사적으로 싸워야 했다. 그들이 가진 무기는 주머니칼 하나뿐이었다. 세 사람은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주머니칼로 상어와 싸웠다. 그 무렵에 화물선 한 척이 근처를 지나가다가 멀리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고, 결국 그들은 구출되었다. 만약 세 사람이 모두 구명보트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면 멀리 지나던 화물선은 이들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상어와 열심히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 멀리 지나가던 화물선이 그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산다는 것은 매우 힘들고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악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죄의 세력과 싸우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죄와 싸우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신자는 죄와 싸움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다.

▣ 뜻을 맞춰라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선교에 일생을 바친 영국선교사였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어떻게 일생을 사역자로 보낼 수 있었습니까? 그러면서도 행복한 비결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했다.
『제 헌신과 행복의 비결은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연주자는 음악회가 시작되기 전 악기를 조율합니다. 음악회가 끝난 뒤 조율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겠지요.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의 뜻과 맞추는 일부터 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보람있지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2)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기 위해서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 한가운데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들의 존재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 이 세상을 거룩하게 만드는 영적 예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감사는 하나님의 뜻

미국의 자동차 왕이었던 헨리 포드는 믿음이 독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에 한 고아원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고아원생들을 위해서 강당을 하나 지어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 2,000파운드를 기증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신문에 뜻밖에도 이러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헨리 포드 회장이 고아원을 위해서 20,000파운드를 기증하기로 약속하다.” 2,000파운드가 20,000파운드로 잘못 게재된 것입니다. 고아원 측에서 그 기사를 보고 포드 회장을 찾아와 정중하게 사과를 했습니다. 그리고 신문사에 정정 기사를 내도록 요청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헨리 포드는 웃음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 수 없지요.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18,000파운드를 더 내겠습니다. 그 대신 고아원의 강당이 완공이 되고 나면 그 입구에 이런 글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헨리 포드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드려진 헌금으로 지어진 강당’.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는 것은 우리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이 말씀에 순종할 뿐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감사함도 마땅히 넘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낭비가 아닙니다. 결코 손해보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언제나 축복의 전주곡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는 더 큰 감사를 낳게 마련입니다.

▣ 죽음에서 건진 이후…

사랑스러운 딸 하나를 둔 과부가 목사님에게 심방을 와 달라고 부탁했다. 찾아오신 목사님에게 그녀는 말을 시작했다. 딸이 세 살 때 심한 병이 들었는데 의사들이 얼마 살 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그때 하나님께 너무 잔인하다 비난했고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강요했다. 만일 자기 원대로 안 살려 주시면 다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고함을 질렀다. 의사들의 비관적인 진단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병이 나았다. 그 이후 13년 동안 그 딸은 어머니의 기쁨이요 자랑이었다. 그 딸이 16세가 되자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더니 별의별 문제를 다 일으켜 어머니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결국 “제 딸은 죽었습니다. 어제 밤에 자살을 했어요. 오늘 아침 시체를 그 애 방에서 발견했습니다” 얼마 동안 몸부림을 치며 통곡을 하다가 이렇게 말을 마쳤다. “오, 목사님 그 애가 세 살 때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제가 왜 하나님의 뜻에 맡기지 않고 제 뜻대로 고집을 부렸는지요!” 그녀는 다시 회한과 슬픔으로 울었다. 인생의 최선은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수다한 사람들은 그들의 기도가 하나도 하나님께 상달되지를 않고, 맥없이 툇자를 맞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이상해 한다. 이상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까닭은 그들의 효험 있는 기도를 드리는데, 가장 중대한 조건, 즉 완전한 순종의 계단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뜻으로 할 때라야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뜻을, 그의 뜻으로 받으신다.

▣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똑똑한 젊은이 한 명이 변호사가 되겠다는 강한 꿈을 갖고 있었다. 그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하나님과 자기 장래에 대해 한번도 의논한 적이 없었다. 하루는 그가 어려서부터 다니던 교회의 주일학교 선생님 한 분을 만났다. 선생님이 물었다.
“자네는 그 많은 재능을 가지고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
“변호사가 되려고 준비하는 중입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무척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자네가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되도록 간절히 기도해왔는데…”
이 말은 젊은이를 놀라게 했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는 이런 글을 썼다.
“나는 그제야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기 시작했고 목회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순종했다. 주님을 섬기기 시작한 지 35년. 나는 그때 내가 선택한 목회자의 길을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과 의논하고 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말하기를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지어다”(약 4:15)

▣ 못난 자식· 예쁜 사위

사랑하는 아내가 직장을 마치고 와서 일하는 것이 안쓰러워 설거지를 도와주던 남편이 주부습진에 걸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시어머니와 장모의 입장이 전혀 달랐습니다.
그것은 “못난놈. 얼마나 일을 했기에 그 모양이냐. 아예 앞치마를 두르고 집에 들어앉지 그러냐 ”
“아이구 예쁜 우리 사위, 고무장갑을 껴야 하는데 그냥해서 그렇지. 다음엔 꼭 고무장갑을 사용하게나”

남편은 못난놈이 되기도 했고 예쁜 사위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내 쪽으로 모든 것을 유리하게 생각하고 합리화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즉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것입니다.
혹 우리는 신앙생활에서도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뜻을 묵상과 기도 속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단편적이고 감각적인 것에 의존해 마치 자신의 뜻과 의지를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판단해 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지 않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 은혜는 수학공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세계를 소유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계획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똑똑하고 젊은 변호사였던 척 콜슨은 영향력 있고 권력이 있는 자리에까지 오르고자 계획했었습니다. 닉슨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이었던 그는 주님께서 간섭하시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높은 지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은폐공작에 연루되어 감옥에까지 가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위기 중에 그는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오늘날 그는 '교도소 선교회'의 지도자로서의 그의 사역이 하나님을 모르던 과거 정계의 삶이나 그 삶이 줄 수 있었던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보람이 있다고 간증합니다. 성경에는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139:16)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세 만대 전에 보고 아시고 우리의 일생을 다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신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그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비된 길로 인도하시며, 우리의 일생을 책임져 주시고 돌보아 주시며, 우리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기도

아프리카의 선교사로 가 있는 리빙스턴에게 하루는 역시 아프리카에서 선교중인 그의 장모로부터 이런 편지가 날아왔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 리빙스턴,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그대롤 꼭 평안히 보호해 주시리라는 것으로 마음을 진정해 왔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기도가 반드시 응답되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네. 무엇을 소원하거나 간절히 기도할 경우라도 '하나님의 뜻에 맡깁니다'라고 하는 경건함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네'. 이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기도야말로 참된 기도라 할 수 있다.

▣ 링컨과 하나님의 뜻

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남북전쟁이 예상외로 길어져 희생자가 많아지자 마음이 몹시 아팠다. 동족끼리 싸우며 하루에도 수백명씩 젊은 청년들이 죽어갔다. 마음이 괴로운 그에게 주위에 있는 이들이 다가와 승리를 회의하며 물었다. "하나님은 과연 우리 편이실까요?" 링컨이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신가 아닌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과연 하나님 편인가 하는 점입니다."

▣ 하나님의 뜻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할 때는 언제나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내적인 마음의 움직임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
세째는 환경의 추세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서 그리고 환경가운데서 자신의 뜻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일치하기까지는 절대 일을 시작하지 마십시오."

요한1서에서 나타난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계속 행하려 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 윗치만 니의 청혼

윗치만 니라는 유명한 성도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에게 결혼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그 여인에게 요청하지 않고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런데도 그 여인의 생각이 계속 그의 마음 속을 지배했습니다.
그는 그 여인과의 결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문제를 하나님께 모두 맡겼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는 우연히 다른 장소에서 그 여인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셔서 두번째 요청을 했습니다.
이때에 이 여인이 허락을 해서 10년 전에 사랑했던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께 헌신되지 않은 사람일 경우에 인간적인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10년간이나 계속해서 그 여인을 따라 다녔다고 합시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결혼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는 주의 뜻을 구하는 훈련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결혼을 하게 되어 아름다운 결혼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그는 후에 간증을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을 잘 살펴야 합니다.

▣ 하나님의 뜻

어떤 사람이 길을 걸어가다가 네거리를 만나서 어느 방향으로 갈까 망설이다가 동쪽으로 갈 것을 마음에 정하고, 그래도 “이 지팡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야지” 하고 던졌더니 서쪽을 가리켰습니다.
다시 던지니까 북쪽을 향했습니다.
계속 지팡이를 던지니까 드디어 동쪽을 가리켰습니다.
그랬더니 “이것 봐라. 이 지팡이가 동쪽을 가리키지 않느냐” 하고 좋아하며 가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는 것도 이런 식으로 믿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 자기 고집과 욕심대로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이 됩니다.

기독교신앙이 기초가 된 서구사회에서 유행하는 용어가 “하나님 뜻이면”(데오 보렌데 Deo Volente)라는 용어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무슨 일을 하거나 계획할 때는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뜻이면”(If it's God's will) 한다는 생각이 항상 앞서야 합니다. 이보다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 성공하게 해달라고 하고 복 받게 해달라고 하면 큰 잘못입니다.

▣ 하나님의 뜻으로 상황을 판단하라

너무 쉽다고 생각될 때, 이것쯤은 내 경험과 상식으로도 너끈히 해결할 수 있다고 방심할 때 우리는 덫에 걸리고 만다.
당신의 지식이 아무리 풍부해도, 당신의 경험이 아무리 많아도, 당신의 처세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당신은 유한한 인간에 불과하다.
파일럿들 가운데서도 가장 숙달된 파일럿들이 뜻밖에 평이한 비행 중 사고로 죽는 비율이 높은 원인을 아는가?
너무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나머지, 계기판을 보지 않으므로 사고를 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일럿들을 훈련시킬 때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계기판을 철저히 바라보고, 자신의 감을 믿지 말고 계기판을 믿으라고 가르친다.
당신은 영리하다고 자부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그 영리함이 오히려 당신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라.
당신의 인생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경솔하게 결정해 버린 일들,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일이라고 여겨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신속하게 처리해 버린 일들이 뜻하지 않게 당신의 덜미를 잡는 치명적 실수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상황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지 말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상황을 해석해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을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을 판단하시게 하라.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자꾸 말하지 말고, 하나님이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라

▣ 하나님의 뜻 알기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 고민할 때가 많이 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를 받기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삶의 근본적인 자세이다.

조지 뮬러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6가지 단계를 소개한다.

첫째,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에 관한 나의 의사가 있지 않도록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한다.
둘째, 결과에 대해서는 나의 감정이나 이상을 개입시키지 않도록 노력한다.
셋째,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시고자 하는 방향을 깨달으려고 노력한다.
넷째, 주변 상황을 고려한다. 종종 상황과 말씀과 성령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뜻을 밝혀준다.
다섯째,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내게 보여주시기를 간구한다.
여섯째, 앞에 열거한 대로 하나님께로 향한 기도를 통하고, 성경 말씀과 묵상을 통한 뒤에 심사 숙고하여 다다르게 된 결론에 따라 행한다.
이때 내 마음에 평안이 따르면, 두세 번 더 기도한 다음 진행한다.

죠지 트루엣은 이런 말을 했다.“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은 비록 역경이 있다 할지라도 영원한 행복과 풍요로움이 보장되어 있다.
매일 매순간의 삶 가운데 우리의 무릎을 꿇고 주님의 뜻을 구하자.

▣ 돼지를 잘 먹이는 이유

돼지는 주인에 의해서 온갖 좋은 것으로 사육되어진다.
돼지가 잘 먹는 것을 주며 좋아하는 것을 제공한다.
그런데 그것이 누구를 위함인가?
돼지를 위해서 돼지를 먹이는가?
그렇지 않다. 다만 돼지의 주인을 위해서 돼지를 먹일뿐이다.

느부갓네살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에게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제공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은총이나 혜택이 아니라 자기를 섬기게하기 위함이었다.
다니엘은 왕이 주는 것들을 과감히 배격했다.
그것으로 자기를 더럽힐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함이다.
진미와 포도주를 거부하고 채식과 물만 먹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신 것은 물론이다.
진미로 배불린 사람보다 더 아름답고 건강하게 하셨다.
사단이나 세상권력은 우리를 자신의 세력 밑에 두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하다.
세상의 좋은 것들, 귀한 것들, 맛나는 것들 화려한 것들을 제공하고 진열하고 마음껏 먹으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종을 삼고자 함이다.
신앙인은 세상이 주는 것으로 배불리려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해지려고 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 판단하라 고 외쳤던 베드로의 말을 되새겨봐야 할 때이다.

▣ 감옥에 갇힌 것도 하나님의 뜻

1920년 아르메니아가 공산 러시아에 의해 유린당한 이후 이나라에서는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 무척 어려워졌고 위험했다.
그러나 신실한 신앙인인 네리 먼 남작은 사람의 법보다 하나님을 더 순종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쉬지 않았고어려운 때일수록 굳건히 서야 함을 권면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감옥에 갇혔다.
그는 감옥에서도 갇혀 있는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를 본 간수가 그를 조롱했다.
"여보시오. 당신의 그리스도는 너무 무력해서 당신을 옥에서 구해내지도 못하지 않소?"
"내가 옥에 갇힌 것이 도리어 그리스도의 권능을 증명하는 것이오.
내가 그대더러 이 옥에 들어와 갇힌 사람들에게 전도하게 해달라고 청한다면 들어 주겠소?"
"물론 안되지요."
"그러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의 권능을 깨달아야 해요.
그 분께서 나를 여기 갇힌 자들에게 전도하게 데려 오셨소.
그대는 사실 내 전도를 위하여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는 셈이오."

▣ 뜻에 관한 성경 말씀

0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 8)
0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0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막 3: 35)
0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 22:42)
0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롬 1:10)
0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 2)
0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 18)
0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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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으라!(마가복음 11:20-25)

카이 아포크리데이스 예수스 레게이 아우토이스 에케테 피스틴 데우.
και αποκριθεις ιησους λεγει αυτοις εχετε πιστιν θεου.


개역개정,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새번역,22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어라.
우리말성경,22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라. 
가톨릭성경,22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 하느님을 믿어라. 
영어 NIV,22 "Have faith in God," Jesus answered.
영어 NASB,22 And Jesus answered saying to them, "Have faith in God. 
영어 MSG,22  Jesus was matter-of-fact: "Embrace this God-life. Really embrace it,
영어 NRSV,22 Jesus answered them, "Have faith in God.
헬라어신약 Stephanos,22 και αποκριθεις ιησους λεγει αυτοις εχετε πιστιν θεου
라틴어 Vulgate,22 et respondens Iesus ait illis habete fidem Dei
히브리어 Modern,22 ויען ישוע ויאמר אליהם תהי נא בכם אמונת אלהים׃



ō) ἔχω 스트롱번호 2192
1. 가지다.   2. 손에 가지다.  3. 입다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의 믿음을 소유하라(가져라)

에코(ĕch
발음 [ ĕchō ]



έχετε (échete)

  1. 2nd person plural present indicative form of έχω (écho).: "you have"
  2. 2nd person plural present imperative form of έχω (écho).: "have!"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그의 전능하신 능력과 무한히 선하심을 의심 없이 신뢰하는 것이다.
엄숙한 선언에 뒤이어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 속으로 던지우라고 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과장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셨다.
한 가지 조건은 부정적으로는 의심없이 그리고 긍정적으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인데 그러한 기도는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은 이스라엘의 부족한 신앙과 대조되었다.
그러므로 기도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게 하는 두드림이 되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기도로 구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고 훈계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오늘 우리는 또 다시 “믿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늘 생각하고 이 질문에 대한 확고하고 분명한 성경적 해답을 갖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배우고 깨달은 바로는, “믿음”은 두 가지 근본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실재(reality)”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실재에 대한 나의 확신과 참여(confidence and participation)”입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은 한 편으로는 “우주적인(universal)” 것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개인적인(personal)”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이며 과학자인 갈릴레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하는 책을 출간했다가 종교재판에 회부되고 고문과 화형의 위협 속에서 이 주장을 철회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재판장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Yet the earth does move)”고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실재(universal reality)가 있고, 마음 속에 이것을 부인할 수 없는 확신(personal confidence)이 있습니다. 이 믿음이 갈릴레오의 심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세상의 어떤 권세도 그것을 깨뜨릴 수는 없었습니다. 실재가 아닌 것을 믿는 것은 망상이나 착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재를 인정하지만 내가 그것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몸소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의하고 비겁한 행동입니다. 갈릴레오의 이야기를 비유로 하자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라” 하실 때 그 믿음이란 우리가 모든 ‘불리한’ 상황에서 “그래도 하나님은 살아계신다(Yet God is living)”라고 중얼거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살면서 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며 그것들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드는 “베이스(base - fundamental principle or underlying concept of a system or theory)”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은 “승리(victory)”가 그 삶의 베이스가 될 것입니다. 적을 이기는 승리야말로 그의 삶을 명예롭고 가치 있게 만들 것입니다. 굳이 “이기기 위해서”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이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어떻게 하면 싸움을 이길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것이며, 그것과 상관이 없는 일들은 이 사람에게 별로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베이스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돈이야 말로 가치의 근본이며 믿을만한 의지가 됩니다. 그래서 돈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얘기합니다. “결국은 돈이야!”라고 실토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 회사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에 이 회사는 주식을 공개했습니다. 회사의 주식을 일반인들에게 판매하는 것입니다. 주식을 공개하면서 회사 직원들에게도 일정 수의 자사 주식을 비교적 싼 값에 살 수 있는 권리를 줍니다. 당시 주식시장은 활황이었고 더구나 회사에서 돈을 무이자로 빌려주었기 때문에, 그냥 서류에 서명만 하면 수백 주의 주식을 받고 적지 않은 이익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직원들이 흔쾌히 서류에 서명을 하고 회사 돈을 빌려 주식을 샀습니다. 그런데 저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당시 막 크리스천이 되어 예수님처럼 살겠다는 열정이 하늘을 찌르고 있던 저는 매일 주가의 등락에 울고 웃는 사람들이나 주식으로 불로소득을 올리는 것이 불편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회사 주식을 사지 않았고, 사람들은 이런 저의 행동을 이상하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주식이 공개된 지 얼마 후 한국의 주식시장이 급격히 침체되고 저희 회사 주식의 값도 처음 공개시의 가격보다도 더 낮게 떨어졌습니다. 결국 주식을 산 사람들은 모두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저의 “이상했던 행동”을 이제 매우 “유의미한 (significant) 행동”으로 달리 보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실 직원들은 제게 질문했습니다: “전낙무씨, 주가가 떨어질 것이란 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저는 어이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손을 내둘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이 되는 두 가지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라버린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은 좀 특이한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고 이어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후 다음날 아침에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버린 것이 발견됩니다. 한 사건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또 다른 사건을 샌드위치처럼 감싸고 있는 모양입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 두 사건이 같은 의미를 품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열매 없는 거짓 신앙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예수님께서 멀리 서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본문에는 이 나무를 “잎사귀가 있는 무화과나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배가 고프셨던 예수님께서는 이 나무에서 먹을만한 열매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무에 가까이 가셨을 때 그 나무에는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보기에만 좋은” 그런 나무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은 잎사귀는 무성하지만 열매는 없는 이 무화과나무와 같았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종교 생활은 동서고금을 통해서 비교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유별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삶 전체가 종교였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예루살렘의 성전이 있었고,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전한 율법이 있었고, 또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오는 바 선민의 표시인 할례가 있었습니다. 성전과 율법과 할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거룩한 옷”과 같았습니다. 무화과나무로 치자면 아름답게 보이는 “무성한 잎”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그곳에서 보신 모습은 “거룩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 곳은 성전이 아니라 물건을 매매하고, 돈을 바꾸고, 동물을 거래하는 장사꾼들로 붐비는 시장바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사꾼들을 내어쫓으시고 그들의 상과 의자를 둘러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책망하셨습니다.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가장 거룩해야 할 성전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한 예로, 본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희생으로 드릴 짐승을 직접 갖고 오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성전의 제사장들은 이렇게 사람들이 갖고 오는 짐승들을 “흠이 있다”고 하며 퇴짜를 놓고 대신 성전에서 파는 짐승들을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사도록 했다고 합니다. 또 모든 사람들이 내야 하는 성전세를 시중에서는 유통되지 않는 특정한 화폐로만 내도록 하면서 엄청 높은 환전수수료를 부과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성전은 실상 강도들의 소굴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올바른 삶(義)과 행복한 삶(福)입니다. 이 둘은 모두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그 앞에 나아오는 자들에게 이 은혜를 주십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는 대신, “자기의(self-righteousness)”를 고집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한 잎으로 열매 없는 자신을 치장한 것처럼, 유대인들은 성전과 율법과 할례로 꾸민 종교생활로 자신들의 죄를 가리고 마치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들인 양 행하였습니다. 이렇게 겉을 “자기의”로 치장함과 동시에 그들의 내면은 돈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긍휼하심을 의지하여 살지 않고, 성전을 찾는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 자신들의 욕심을 채웠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하여 이런 유대인들의 거짓된 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가복음 7:6). 갈릴레오는 비록 위협에 굴복하여 입으로 자신이 믿는 지동설을 철회하였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외쳤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반대였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존경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자기의”를 자랑하고 “돈이 최고야!” 속삭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말씀하시자 곧 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랐습니다 (20절). 뿌리가 말랐다는 것은 이 나무가 근본부터 잘못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수없이 많은 계명들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뿌리(베이스)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뿌리는 “위선적인 종교 생활로 세워진 자기의”와 “세속적인 축복(돈)”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하신 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이었습니다. 이 뿌리가 너무 깊어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버린 것과 같이 유대인들이 자랑하던 성전 곧 그들이 “도적의 소굴”로 더럽힌 성전은 후에 디도(Titus)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의 공격으로 인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않은 삶은 그것이 아무리 푸르고 무성하더라도 이미 죽은 나무와 같은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열매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의 베이스가 되시며, 우리의 삶은 이 하나님께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나의 의가 되시며, 하나님께서 나의 복이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첫째, 믿음이란 주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놀라워하며 말했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잎이 무성한 나무”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이 나무는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계절을 따라 무성한 잎을 내고 있습니다. 이 “자연 속에 살아있는 나무”는 절대로 마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이 모든 자연의 조화들이 중단되고 나무는 뿌리로부터 말라버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은 수십 년의 세월에 걸쳐 건축되고 있었던 당대 최고의 건물이었습니다. 이 성전을 보고 감탄한 제자들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제자들처럼 우리도 자주 “세상 속에서 (in the context of the world)” 세상과 자신을 보고 이해합니다. 세상의 화려한 문명을 감탄하며, 매일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날을 계속해서 이렇게 평안히 살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이 세상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속에서” 태평하게 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경고의 말씀 안에서 (in the context of the Word) 깨어있는 삶을 살며, 우리 앞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말씀의 눈으로 보고, 깨닫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이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완전한 긍정 (Absolute Yes)입니다. 23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keyword는 “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주님께 대한 어떤 의심 곧 부정적인 생각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의심하다가 (시험하다가) 망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열왕기 6-7장에 보면 사마리아 성이 아람 군대에 포위되어 성 내의 사람들은 심지어 자식까지 삶아먹어야 할 정도로 극심한 식량난을 겪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서 “내일까지” 그들에게 먹을 양식이 흔해빠질 정도로 넘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에 한 왕의 장관이 비웃었습니다.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그러자 엘리사가 대답합니다.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과연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람 군대가 쫓겨가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들이 버리고 간 식량들을 마음껏 노략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한 왕의 장관은 사람들에게 밟혀 죽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산”처럼 절망적인 문제(Absolute No)에 가로막힌 자신을 봅니다. “산”처럼 그 문제는 당연히 그리고 영원히 거기에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믿는 자에게 “Absolute No”는 없습니다. 심지어 아주 희미한 의심의 그림자조차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Absolute Yes”만 있을 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믿음이란 오직 기도와 감사로만 사는 것입니다. 2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우리가 구하는 것마다 “즉시” 받는다면, 우리는 늘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또 감사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즉시” 들어주시기 보다는 “하나님의 때”에 들어주십니다. 우리는 이 시간의 갭(time gap)을 믿음의 기다림으로 채워야 합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 동안에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물 없는 광야를”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받은 줄로 믿으라” 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특징은 잘 기다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으면 끊임없이 불평하며, 성내며, 방황합니다. 믿는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기다림의 시간을 오직 기도와 감사로 채웁니다. 그리하면 마침내 기도하고 구한 것이 “그대로 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이란 쓴 뿌리를 품지 않는 것입니다. 25절 말씀입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우리는 자주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품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문제는 “원망하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한 너”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마음에 품고 있는 미움이나 원망은 우리 영혼에 해로운 독한 기운을 뿜어냅니다. 그리고 이 쓴 뿌리를 없애는 유일한 길은 “용서”입니다. 에베소서 4:31,3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참 쉽지 않습니다. ‘용서한다’는 말의 원어는 ‘보낸다 (let go, send away),’ ‘포기한다 (give up)’ 등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용서가 “조건 없이” 베풀어져야 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나의 허물을 “조건 없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살 길은 “형제의 허물에 대한 원망”을 내려놓고, 대신에 “나의 허물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부터 온갖 향기로운 생명의 기운들이 흘러나옵니다.

갈릴레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모든 진리는 일단 발견하기만 하면 그것을 이해하기는 쉽다; 다만 그것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All truths are easy to understand once they are discovered; the point is to discover them).” 오늘날 우리는 아무도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 진리에 따라 하늘을 관찰하면 모든 천체의 움직임들이 아주 쉽게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진리를 발견하기까지는 수천 년의 세월이 걸렸으며 그간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무한하신 능력과 사랑을 일단 발견하기만 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하!” 하는 탄성이 나오게 됩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우리 속에 깊이 내려진 “자기의”와 “탐욕”의 뿌리를 뽑아내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주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중국 고사에 “우공이산 [愚公移山]”이란 말이 있습니다. 북산에 우공이라는 아흔 살 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노인집 앞에 만 길 높이의 태행산과 왕옥산이 가로막고 있어 생활하는 데 무척 불편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인은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가족이 힘을 합쳐 두 산을 옮기자. 그러면 길이 넓어져 다니기에 편리할 것이다. 당연히 가족들은 반대했으나 노인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다음날부터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우공과 아들, 손자는 지게에 흙을 지고 발해 바다에 갔다 버리고 돌아왔는데, 꼬박 1년이 걸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이웃 사람이 “이제 멀지 않아 죽을 당신인데 어찌 그런 무모한 짓을 합니까?” 하고 비웃자, “내가 죽으면 내 아들, 그가 죽으면 손자가 계속 할 것이오. 그동안 산은 깎여 나가겠지만 더 높아지지는 않을 테니 언젠가는 길이 날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두 산을 지키던 산신이 이 말을 듣고는 큰일 났다고 여겨 즉시 상제에게 달려가 산을 구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상제는 두 산을 각각 멀리 삭땅 동쪽과 옹땅 남쪽으로 옮기도록 하였다는 우화입니다.

  어리석을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알려 주는 고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산을 옮기는 일은 상상속의 우화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모두가 산을 옮기기까지 하는 큰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고난 주간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건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다니라는 곳에 머물던 주님과 제자들은 이른 아침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가까이에 왔을 때 무화과나무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무화과나무에서 무엇인가를 먹을 것이 있을까하여 무화과나무 가까이에 가셨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없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였습니다. 주님은 그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향해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주님과 함께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들은 참으로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제 아침에 주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완전히 말라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선생님. 선생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것을 보고 어떤 주석가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또 어떤 주석은 무화과 때가 아니라도 열매를 요구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영적 추수기 전에도 열매를 찾으실 수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불신자인 영국의 작가“버틀란드 러셀“은 ”나는 왜 크리스챤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이 사건을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때도 아닌데 열매를 찾으시고 자연의 일부분인 나무를 말라 죽게 저주를 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단순히 주님의 축복과 저주의 말씀이 매우 준엄하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기도의 중요성을 깨우쳐 가르치시고자 한 사건입니다.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을 믿으라”라는 말씀의 영어 번역은 “Have faith in God" 로 직역하면 ”하나님안에 있는 믿음을 가지라“이고 킹제임스 번역은 ”Have the faith of God" 즉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믿음과 같은 종류의 믿음을 소유하셨음을 제자들에게 무화과 나무의 저주 사건으로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너희들도 나와 같이 하나님께서 소유하고 계신 것과 같은 종류의 믿음을 가지라고 한 말씀이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3가지의 믿음의 대상이 있습니다. 사람을 믿는 것과 마귀를 믿는 것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먼저 사람을 믿는 것은 믿을 수 있다면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 갈 때에 사람들 속에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용이 좋아야 하고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믿을 수 없습니다. 모두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마귀를 믿는 것입니다. 마귀는 죄를 짓게 합니다.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게 합니다. 마귀는 자신의 주먹을 믿게 합니다.

 한없는 명예욕을 갖게 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의 길로 나아가게 합니다. 탐욕으로 돈에 눈이 멀게 합니다. 환경을 믿고 세상에 취하여 멸망의 길을 걷게 하는 것입니다. 말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는 목석 과 금은으로 만든 우상을 믿고 섬기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소유하신 것과 같은 종류의 믿음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건에서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용하셨던 그 믿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관자이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하나님의 칭호는 “엘 샤다이”라는 호칭입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1절에 보면 십자가의 길을 가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심하는 제자들에게“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본적이 없으되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보고 말씀을 듣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로 3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과 하나님은 동시에 같이 계셨으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에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 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1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바로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신 것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신 것입니다. 두 인격자이시나 완전히 하나로써 존재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무조건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용서받고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28절에“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죄 짐, 세속의 짐, 마음과 몸의 질병의 짐, 가난과 저주의 짐, 죽음의 짐을 십자가에서 홀로 짊어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질병을 대속하시고 치료와 건강을 주시며 저주에서 해방하시고 모든 가난에서 놓여나게 해 주시고 형통의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기 때문에 믿으라는 것입니다. 창1장 2절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은 3차원의 세계의 모습인 것입니다. 물질세계에 사는 우리 인간의 삶은 공허한 상태에 무질서가 지배하여 절망상태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지혜나 노력으로는 이 삶의 문제를 해결될 수 없습니다. 문제가 절망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운행하시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의 삶을 혼돈에서 질서로 새롭게 하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활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절망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면 성령을 보내 주시여 새로운 삶을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과 희망을 갖고 일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 가정에 절망상태에 빠져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여도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늘 보좌에 가만히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일을 행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에레미아 33장 2-3절 말씀에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믿고 순종하면 모든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주셨습니다.

    시편 68장19절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날마다 우리의 짐을 날마다 지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은 우리의 짐을 지신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무거운 짐을 기도로 맡기고 의지할 때 우리의 일을 대신해 주시는 분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바라고 나아가면 우리의 인생은 순항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즐겁고 보람찬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을 믿고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젊음도 믿을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변화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며 우리의 길을 정해놓으신 하나님을 믿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담대한 믿음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로 던져라. 여러분 이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느 해변 가 마을에 어떤 믿음이 좋은 분이 집을 가로 막고 있는 앞산을 향하여 성경에 말씀대로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로 던지우라”하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사람이 미쳤다고 했는데 어느 날부터 바다 매립공사가 시작되어 그 산을 파서 바다를 매웠다고 합니다.

 정말로 앞산이 바다로 던져졌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인지 알 수 없지만 책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본문의 이 산은 상징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 산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장애물을 의미합니다. 바벨론에 잡혀갔던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와서 성전건축을 합니다. 성전건축을 하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방해를 해서 짓지 못합니다. 그 때 스가랴 선지자가 말합니다. 스가랴 4장 7절에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 때에 산이라고 하는 것은 장애물입니다. 풀어야 할 문제요, 넘어야 할 산입니다. 그 산을 바다에 던져지라는 것은 문제를 풀고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산이라는 것은 내 인생에 다가오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태산 같은 문제를 말한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러한 장애물을 물리칠 수 있는지 예수님이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에 내 생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라도 내가 믿음으로 입술의 고백을 하면 하나님이 기적을 창출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믿음은 입으로 말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다가 미국의 한 목사님이 쓴 책에서 “너는 마가복음 11장 23절에 믿음이라는 말은 한번 나오는데 ‘말하다”라는 말은 세 번이나 나온 것을 아느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을 읽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큰 깨닮음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성경은 말하다가 문맥상 기록할 필요가 없어서 생략이 되어 있으나 영어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대로 되리라”는 영어성경에 “He shall have whatsoever he SAITH”입니다. 그대로 번역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 라 말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말한 그대로 되리라” 입니다.

    우리는 믿음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믿음은 입으로 말함으로서 밖으로 쏟아 놓아야 말한 것을 얻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으로 말하는 것이 3배로 중요합니다. “그 말하는 것이 이를 줄 마음에 믿고” 말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그것을 말하고 그 말한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이나 이영훈 목사님이 설교 후 치유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이 바로 이 말씀을 실천하므로 역사가 일어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담대한 꿈과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상식을 넘는 불가능한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과감한 꿈을 꿔야 합니다. 나의 태산 같은 문제가 입술의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옮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믿고 입술로 고백할 때 하나님의 큰 힘이 나타나게 됩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도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고 말했습니다. 우리 구원조차도 우리가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른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의심을 가지고 입술로 아무리 고백해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고백을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6절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태초에 천지창조 역사는 말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죄를 사하여 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다를 잠잠케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매 하나님이 그대로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도 말씀을 가지고 사역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이후 성령 받고 성전미문에서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에게 “우리를 바라보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그러자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8년 동안 중풍병으로 누워있는 애니아를 바라보고 “애니아야 예수께서 너를 고치시니 일어나라” 애니아는 즉시 일어났습니다. 또한 욥바에 가서 도르가라는 여자가 죽어 시체를 돌아보고 기도하고“도르가야 일어나라”말하니 죽은 도르가가 일어났습니다. 이와같이 베드로는 말씀으로 사역하였던 것입니다. 입술로 고백을 통해서 위대한 역사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를 믿는 우리의 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말을 통해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이고 생산적이며 희망찬 말을 해야 합니다. 부정적이고 패배적이고 파괴적이고 절망적이며 원망과 불평의 말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와 생활을 파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입술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도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을 하면 그것이 심어져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생활을 하는 사람은 말을 선택해서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하시는 말이 여러분의 현재와 미래의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을 알고 말을 잘 선택해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분의 전능하심에 의지하여 담대하게 믿음의 말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믿음의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본문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여기서 “그러므로” 는 23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기도하고 구하면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 산을 옮기는 믿음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소원이 일치하여야 합니다. 기도해 주는 사람의 소원이 다르다면 내 소원을 떠 안겨 이루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9절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하나님은 두 사람이 구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병석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 살 것이라고 내가 가지고 있는 태산을 옮기는 믿음을 사용하여 기도하더라도 정작 본인은 죽으리라고 믿는 다면 치유 받을 수 없습니다. 합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얻기 위하여 합심기도하고 “아맨” 한 후에 당사자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하면 잘못 기도한 것입니다. 한 사람을 믿고 기도하고 한 사람을 바라고(hoping)있기 때문에 함십 기도는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분명해야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현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영어성경은 "Now faith is~"입니다. 지금 구원 받아야지 “구원 받을 것을 믿어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지옥에 가고 말 것입니다. 지금 받은 줄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기도는 거듭거듭 자주자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1장 8절로 9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여기에 간청이라는 것은 인내를 가지고 강하게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조금 구하다가 어렵다고 해서 뒤로 물러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7절로 8절에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여기에서는 원한이라고 말했습니다.

  한 서린 그런 기도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속의 믿음이 생길 때까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기억하기 위하여 여의도 순복음교회 복음지를 거실등에 붙여 놓고 불안해 질 때 마다 붙잡고 기도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의 믿음”이 올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나의 믿음에 하나님의 믿음이 와야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한 예화로 조용기목사님이 신학교 다닐 때 일어난 일입니다. 삼각산 기도회 도중 비기 와 계곡물이 넘쳐 길이 막혔습니다. 모두가 기도 하는 중 두 처녀가 베드로가 물을 걸은 것을 상기하고 주님께 기도하고 “주여 믿습니다” 건너다가 급류에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그 처녀들은 한강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처녀들은 하나님을 진짜 믿었는데 왜 믿음대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에 의한 믿음”이 임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기적이 일어날 줄 알고 스스로 행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인간 편에서의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물위를 걸으라고 명했을 때 베드로의 마음에 하나님에 의한 믿음이 부어진 것이고 이 때 물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믿음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기적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 24절에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는 것은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목표를 분명한 기도를 통해서 받은 줄 믿는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믿는 자는 기도하면 능치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는 것은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믿음의 모범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로 18절에 보면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20절로 21절에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아브라함은 약속하신 말씀을 능히 이루 실 줄을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모든 기도가 즉시로 응답되는 것은 아닙니다. 응답의 시기는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기도 하다가 응답이 없다고 낙심하고 기도를 그만두면 안 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기 위해서 마음에 의심을 심어주어 낙심케 만듭니다.

    예수님은 본문 25절에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라는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 23-24절에“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누구와 불화하거나 원한을 품으면 기도의 문이 막힙니다. 그런 마음 상태로는 기도해 보았자 응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고 또는 기도할 의욕이 생기지 않거든 우리 마음에 누구를 미워하고 있지는 아니한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땅에서 풀어야 하늘에서도 풀립니다.

  용서가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12절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 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담력을 얻게 됩니다. 의인의 간구로 응답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들의 허물을 기꺼이 용서해 줌으로써 기도에 막힘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결론입니다  

  사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이 내 생의 가장 큰 영향을 준 말씀입니다. 나를 일으킨 말씀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일년에 2-3번은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말씀을 전합니다. 저는 4차원 영성의 핵심 말씀임을 깨달았습니다. 믿는 자에게 주실 가장 기본적인 말씀은 “하나님을 믿으라”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오늘 본문을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태산 같은 문제가 가로 막혀 주저앉아 있을 때 주님이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라” 라는 명령, 그 생명의 말씀이 들려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문제가 생긴 그 시간에 일을 행하시고 역사하시며, 우리의 짐을 짊어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기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도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셨고 저는 그것을 믿으며 체험을 했습니다. IMF 때 회사 부도로 세상에서 쫓길 때 본문의 이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간증하며 선포했습니다. 이제 태산이 옮기여 지고 모든 신용이 회복되어 1등급이 되고 이제는 홀로 어느 정도 경제활동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23절을 의지하여 굳게 선 것입니다. 이 말씀에 확고히 서서 여러분이 믿는 바를 말로 하십시오. 믿음을 지금 밖으로 쏟아 내시기 바랍니다. 말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태산 같은 문제가 앞을 가로 막고 있더라도 바다로 던지우고 길을 여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많은 열매를 맺고 여러분 하시는 일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정주영회장님이 계실 때 현대자동차에서 포니라는 자동차를 만들었습니다. 그 때는 정말 멋지고 좋은 자동차였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그런 자동차를 주면 타고 다닐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동차를 만들 때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오늘날과 같은 최첨단기능을 가진 멋진 자동차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T.V나 다른 전자제품도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발전했고 품질이 매우 좋아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오래 전에 예수님을 믿을 때는 나름대로 잘 믿었고, 믿음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과거를 되돌아보면 그 때의 믿음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도 점점 더 발전해야 되고 성장하고 차원이 높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4: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근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과 근심걱정은 함께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마음에 근심이 있거나 어떤 문제로 인해서 염려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빌4: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으며 벧전5:7/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근심과 염려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6:31-33/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불신자들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문제로 염려하지 말아야 됩니다. 의식주문제로 염려하는 것은 예수님을 불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염려하지 않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의식주 문제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니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루종일 놀면서 할렐루야!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채워 주십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잘못된 믿음이고 주님의 참된 의도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언제 성경이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염려하는 대신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채워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의식주 문제를 가지고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하며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염려하지 않도록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되 넘치도록 부어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고려해야 할 또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마지막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이 있은 후 하루가 지나고 나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루 전에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는 (저주의)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성전으로 올라가셔서 더럽혀진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셔서 잠을 주무시고 그리고 다음날 다시 성전으로 올라가시는 바로 그 날 어제 그 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베드로가 다른 사람보다 눈살미가 있었는지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는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 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마른 사건과 관련해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믿으라든지 아니면 이렇게 믿어야 돼 라는 부가 설명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 다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막11:23-24/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구절의 말씀은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에 대한 부가설명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두 번씩이나 믿음에 관해서 말씀하셨고, 그대로 되리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22절에서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명령하셨고, 23-24절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구체적인 방법과 부연설명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무엇을 믿는 것이며, 어떻게 믿는 것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산을 향하여 말했으면 말한 그대로 될 줄 믿는 것입니다.

막11: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들으면 성경을 통해서 보여 주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존재나 일하심에 관하여 믿는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는 그분의 이름이나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단순히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존재나 사역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즉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문제와 연관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적용하고 응용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의 모든 삶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나의 크고 작은 모든 문제까지도 해결해 주시고 싶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역을 믿는다면 이제는 그 믿음을 나의 삶으로 가지고 와서 내가 지금 당면한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 믿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그 믿음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23절을 통해서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막11: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라고 말하라고 명령합니다. 산이란 상징적인 의미에서 문제나 장애물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크고 작은 문제나 장애물들이 산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제라는 산이 생겼을 때 그 산을 향하여 바다에 던져지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바다에 던져지라고 말하는 것은 곧 사라지라는 뜻입니다. 어떤 물체든지 바다에 떨어지면 가라앉아 버리고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사라지고 없어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문제의 산더러 바다에 던져지라고 말했으면 그 말하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나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에게 일어났던 사건과 기적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말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하면서 실제로 나의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 어떤 해결방법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나의 삶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나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나의 삶으로 가지고 와서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나의 문제를 해결해야 됩니까? 예수님은 이 산더러(자신의 문제를 향하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문제를 향하여 사라지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을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말의 힘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말의 권세란 곧 예수님이 주신 천국열쇠이며, 이 땅에서 말하면 하늘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놀라운 말의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입니다. 과거에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 또는 남아일언중천금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침묵의 미덕이라고 할까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함부로 말하지 말고 말한 것은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말을 해야 합니다. 문제를 향하여 떠나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문제가 있는 데도 떠나라고 말하지 않으면 점점 더 고통스럽고 손해를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문제를 향하여 떠나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대로 되어집니다. 할렐루야!

2. 하나님을 믿는 것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했으면 반드시 그대로 될 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하나님을 믿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합니다. 막11: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느냐 그렇다면 그것을 응용해 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말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자신의 기도에 적용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믿음을 자신의 기도에 적용해야 하는데 거기에는 어떤 제한도 두지 않았습니다. 이런 제목과 이런 문제만 가지고 기도하라고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지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떤 문제든지 그것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해도 되고 저것은 기도하면 안돼 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도 모든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닮은 아들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무능하고 연약하여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같은 자녀가 아니라 모든 일을 척척해 내고, 어떤 문제든지 기도로 해결해 내는 그런 유능하고 탁월한 자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까 서론에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을 때 우리가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한 가지는 근심과 염려를 하지 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다면 근심 걱정 염려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 있으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도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는 불신자처럼 근심 걱정하는 문제에 집착하지 않는 대신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과 하나님과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예배하며 날마다 기도하며 전도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모든 문제는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 주십니다.

이제부터 말씀 드리려는 것은 당면한 문제라는 큰 산을 향하여 말을 했고,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기도하고 구했는데도 즉시 산이 제거되지 않고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에 관한 말씀입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만약 기도했지만 즉시 응답되지 않고 응답이 늦어지거나 내가 볼 때(보이는 형상이) 가능성이 없어 보여도 그것은(허상이기 때문에) 믿어서는 안되고 주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볼 때 100% 불가능해 보여도 그것은 진리가 아니며 허상이기 때문에 보이는 현상은 받아들이지 말고 오직 진리이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얼마나 자주 보이는 현상을 믿는지 모릅니다. 보여지는 현상이나 과정은 허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신실한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마귀가 주는 어떤 의심과 의심을 주려는 현상이나 느낌이나 반응조차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가장 걸림돌이 되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의심입니다.

내가 말하는 즉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말하고 기도하는데도 즉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의심이 들어오고, 또한 기도하고 말한 것이 즉시 이루어지지도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경우 의심이 밀려올 때 그것을 방어하고 잘 막아야 합니다.

다시 본문 23-24절을 읽겠습니다. 막11:23-24/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23절에서도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고, 24절에도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여기에도 의심하지 말라는 말씀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리고 믿음을 말하고 기도하면 다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믿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 믿음인데 왜 그 믿음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까?

믿음을 가지고 일하고,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믿음으로 기도해서 응답받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역시 의심입니다.

왜 우리의 믿음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습니까? 왜 우리의 믿음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까? 마귀의 방해작전 때문입니다. 마치 군대에서 상대방을 향하여 전파를 보내면 상대방에서 전파를 교란시키려고 방해전파를 맞받아 쏩니다. 그래서 내가 보내는 전파가 목적대로 제대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것처럼 우리의 말이나 기도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는 것도 결국에는 방해작전인 의심 때문입니다.

4. 그렇다면 이 의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이제 우리의 말과 기도를 무너뜨리는 의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말씀드립니다.

1) 의심을 이길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은 인내하는 믿음입니다.

제가 치질을 고친 것을 이야기 할 때에도 보름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처음 믿음을 가지고 말할 때의 그 믿음을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유지하며 간직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내하는 믿음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에게 명령을 했을 때에도 즉시 마르지 않았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에게 명령하는 즉시 무화과나무가 말랐다면 그 다음 날 아침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그렇게 신기하고 놀라면서 랍비여,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에게 저주하셨고, 그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데는 하루가 걸렸습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말하고 기도하는 것도 시간이 걸립니다. 나의 말과 기도가 이루어지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가 되기 때문에 의심하지 말라는 겁니다. 말하는 데로 즉시 이루어진다면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나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많은 시간이 흐른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상관하지 않고 이미 받은 것처럼 믿고 기뻐하면서 기다리면 반드시 그대로 되어집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만나서 처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했을 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말씀입니다. 요1:40-42/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말씀입니다. 마16:15-18/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두 번의 말씀들이 언제 이루어졌습니까? 그렇게 말한 즉시 이루어졌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는 말씀은 성경의 기록을 보면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충만을 받고 난 뒤에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시몬을 게바 즉 베드로라고 부르신 말씀도 그 이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로보건 데 우리가 산을 향하여 말하고 기도한다고 해서 즉시 이루어지는 것도 있지만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사람이 변화되고 사람들이 돌아오는 문제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베드로의 변화되지 않는 모습과 실수들을 보면서도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주님의 말씀처럼 베드로는 반석같은 사람이 되었고 베드로를 통해서 주님의 교회가 세워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두고 볼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이 너무나 늦게 이루어졌는데 그렇게 늦게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가 믿음이 없었다거나 그의 믿음이 실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믿기 힘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꿋꿋이 견딘 믿음이 하나님이 보실 때 더 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히6:13-15/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21일 동안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기도하는 첫 날 내려왔지만 공중권세를 잡은 마귀가 방해를 했기 때문에 21일만에 응답이 내려왔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임계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물이 끊는 온도는 100°가 되어야 합니다. 온도가 99도까지 올라가도 물이 끊지 않습니다. 100°가 되어야 물이 끊게 됩니다. 그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임계점을 통과해야 합니다.

2) 마지막으로 우리가 인내하면서 기다리는데 왜 자꾸 의심이 생길까요?  이유는 의심이 내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의심을 완전히 쫓겨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의심을 완전히 몰아내야 합니다.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근심 걱정 염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히 쫓아내면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될 것이고 더 이상 근심 걱정 염려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대신 믿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의심을 주는 악한 영의 모든 활동을 완전히 멈추게 해야 합니다. 마12장에 보시면 사람에게서 쫓겨난 귀신이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문제가 있었습니다. 악한 영이 쫓겨나면서 그 마음이 수리되고 청소되었다고 했습니다. 완전히 쫓아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절반의 청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을 완전히 쫓아낸다는 것은 내 마음속에서 떠나라고 명령해서 밖으로 내 보내는 일도 해야 하지만 다시 의심의 영이 찾아왔을 때 의심하지 말라는 말씀과 믿음의 말씀이 내 마음에 가득차 있어서 다시 들어올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비고 청소된 상태로 그냥 두어서는 안됩니다. 악한 영이 떠난 그 자리에 말씀의 물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돌 항아리에 물을 아구까지 채운 것처럼 말입니다. 나의 입을 열면 말씀이 철철 흘러 넘칠 때까지 말씀을 채우면 내가 쫓아낸 의심은 더 이상 들어올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렇게 믿고 말하고 기도했으면 인내하면서 기다릴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어떤 의심도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이 다시 들어와서 발붙일 곳이 없도록 내 마음속을 믿음에 관한 말씀들로 가득 채우는 온전한 믿음, 승리하는 믿음, 원하는 것을 받는 성공하는 믿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이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10가지)

하나님은 말씀을 보내셨습니다. 받는 것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 주셨듯이 말씀을 보내 주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고, 단련하시며, 보호하십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 그 성격에 대해서 전하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한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단련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시12:6). 불순물이 도가니에서 완전히 정제된 은은 자신의 얼굴을 볼 때 환히 보이는 거울과 같은 정도의 은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든지 그 앞에 서면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다 비추어 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거짓말할 수 있고, 합리화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고, 감출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주의 말씀은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그것을 사랑하나이다.](시119:140). 말씀이 순수하다는 것은 말씀의 정화 작용에 대한 언급입니다. 순수한 말씀은 생각이나 상상조차도 악한 것으로 기울게 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마음, 순수한 양심, 순수한 신앙은 순수한 말씀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순수한 말씀을 제쳐두고 마음이 순수해야 성경을 읽는다는 식의 생각을 한다면 어리석기 그지없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수하며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시느니라.](잠30:5). 순수한 말씀이란 왜곡, 거짓, 편견, 부풀림이 전혀 없고, 불순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안심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신뢰할 수 있습니다. 조금의 오염 물질도 없을 만큼 완벽하게 순수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수 천년이 아니라 영원히 지나도 변질되지 않으며, 부패되지 않으며, 해롭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신뢰할 때 주님은 방패가 되십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여 이 젖으로 자라가도록 하라](벧전2:2). 순수한 말씀은 성도를 자라나게 하는 양식입니다. 왜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이 성장이 없고, 열매가 없느냐고 물으면 교회가 어쩌고 설교가 어쩌고, 오늘날 기독교가 어쩌고 별별 진단이 많지만 핵심은 그들이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말씀을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주의 말씀은 단련된 말씀입니다.

단련되었다는 것은 마치 금이나 은이나 놋 등이 불속에서 단련되어 불순물이 다 제거되었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불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은 광택이 나고 단단해지고 깨끗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꼭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금속보다 강하여 불속이나 물속에나 그 어디라도 들어갈 수 있으며, 그런 과정을 통해서 더욱 단련됩니다. 여러분은 10년 전에 들었던 설교나 지금 들었던 설교의 내용이 같아도 동일하게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몇 십년 전에 읽었던 성경을 읽으면 또 다르게 느껴지고, 또 다르게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은 살아 있으며 단련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말하건대 그분의 길은 완전하고 [주]의 말씀은 단련되어 /순수하니/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가 되시는도다.](삼하22:31). 여러분이 한 때는 의심했고, 싫어했고, 무관심했고, 멸시했던 말씀들이 새롭게 능력있고 은혜롭게 내게 다가오는 체험이 있을 것입니다. 말씀은 수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수없이 시험과 공격과 근거없는 비방과 의심과 욕을 먹었지만 그럴 때마다 더욱더 강력하게 역사했습니다. 우리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으로 말하건대 그분의 길은 완전하고 [주]의 말씀은 단련되어 /순수하니/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가 되시는도다.](시18:30). 단련된 말씀이 여러분을 단련합니다. 말씀이 단련된 것처럼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 단련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한 사람을 그들보다 앞서 보내셨으니 곧 요셉이라. 그가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족쇄에 상하고 그는 쇠/사슬/에 매였으니 그분의 말씀이 임하기까지 /그러하였도다/. [주]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105:17-19). 고난과 시련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진리임이 드러나듯이 여러분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 우리가 읽고 듣고 믿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신뢰할 만한 말씀이란 사실이 입증됩니다. 이것은 모든 신앙인들이 간증하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단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은을 단련함같이 우리를 단련하셨음이니이다.](시66: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분께서 아시나니 그분께서 나를 단련하신 뒤에는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어떻게 단련합니까?  말씀을 보내셔서 단련하십니다. 여러분은 한 가지 사건에서 한 마디 말씀을 더욱 깊이 배우게 됩니다.

셋째, 주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영생은 모든 사람의 꿈입니다. 생명이 없이는 삶이 없습니다. 생명이 출발이고 삶이 결과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통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생명을 얻으려고 합니다. 이는 본말(本末)이 전도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며, 생명의 말씀이십니다. [... {주}여,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이 주께 있사온대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여러분들은 이 생명의 말씀을 통해 더욱 풍성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생명이 없이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아예 불가능합니다. 때로 영적인 것처럼 산다 해도 그것은 위조품이요, 흉내 내는 것이지 영적인 삶이 아닙니다. 경건한 삶은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성품(divine nature), 신성한 권능이 없이는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를 부르사 영광과 덕에 이르게 하신 분을 아는 것을 통하여 그분의 신성한 권능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나니](벧후1:3). 생명의 말씀을 받지 않고 영적이고 경건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제시해야 할 말씀입니다. [가서... 이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다 말하라](행5:20). [또한 /너희는/ 생명의 말씀을 제시할지니...] (빌2:16). 우리는 삶을 제시하기 전에 생명을 제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가 땅에 속한 생명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생명으로 살고 있음을 삶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로나 행위로나 우리 속에 있는 생명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생명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생명-life)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2:20).- I am crucified with Christ : nevertheless I live; yet not I, but Christ liveth in me : and the life which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Gal2:20).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생명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생명의 말씀이시기에 우리에게 말씀을 보내셔서 살리십니다. [내가 고난 당할 때에 이것이 내 위로가 되었사오니 이는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시119:50).

넷째, 주의 말씀은 믿음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그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10:8).  믿음의 말씀이란 믿음을 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 믿음이 생기며, 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즉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느니라.](롬10:17). 믿음은 성도들에게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믿음을 어떻게 크고 강하게 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여러분이 믿음의 말씀들을 얼마나 읽고 듣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의 말씀들로 양육됩니다. [네가 형제들에게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면 네가 도달한 믿음의 말씀들과 선한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사역자가 되리라.](딤전4:6). 여러분이 주님의 사역자가 되고, 무슨 영적인 일을 하고자 한다면 필히 믿음의 말씀으로 양육 받아야 합니다.

다섯째, 주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너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들의 확실함을 알게 하며 또 너에게 /사람을/ 보내는 자들에게 진리의 말씀들로 답변하게 하려 함이 아니겠느냐?](잠22:21). [ .../여기/ 기록된 것은 올바른 것이요, 곧 진리의 말씀들이로다](전12:10).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확실히 알아야 하며, 답변해 줄 수 있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은 믿음의 대상을 넘어서 부지런히 공부해야 할 것들입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2:15). 성경을 읽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의외로 많은 성도들이 일주일에 교회 오는 것이 전부인 사람도 있고, 그것마저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대신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속기를 잘하며, 이리 저리 흔들리는 법입니다. 믿음이 약하다는 형제들을 보면 그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읽는 척을 하기에 부지런히 읽나 보다 싶으면 지속성이 전혀 없습니다. 일주일을 채 가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진리의 말씀을 낳으셨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약1:18). 이는 우리가 진리를 통해서만 살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태생의 근원이 바로 진리의 말씀입니다.

여섯째, 주의 말씀은 은혜의 말씀입니다.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맡기노니 이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워 거룩히 구별된 모든 자들 가운데서 너희에게 상속을 주리라.](행20:32). 은혜의 말씀은 강건하게 합니다. 여러분들의 은혜의 말씀을 맛보면 볼수록 속 사람은 강건해지고, 든든히 세움을 입습니다. [그러므로 내 아들아, 너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건한 자가 되고](딤후2:1). 여러분은 마음 속에 늘 말씀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獨生)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성령 충만이란 말씀 충만이며, 말씀 충만이라 곧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을 증거하실 때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은혜로운 말씀’이었다는 점입니다. [모두가 그분을 증거하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더라.](눅4:22). 그들은 주님을 아는 지식이나 진리의 지식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했지만 주님의 말씀이 매우 은혜로운 말씀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사도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오랫동안 머물며 {주} 안에서 담대하게 말하매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이적을 행하게 하사 은혜의 말씀에 증거를 주시니라.](행14:3). 성경의 모든 말씀이 은혜의 말씀이 아닌 것이 없지만 특히 우리에게 힘과 위로를 주는 은혜로운 말씀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얻기를 원한다면 말씀을 보고 들으십시오. 은혜가 풍성한 삶은 은혜로운 말씀을 통해서 나옵니다. 주님은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주]께서 그 앞으로 지나가시며 선포하시되, [주]로다. 긍휼이 많고 은혜롭고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주] 하나님이로다.](출34:6). 풍성한 은혜의 주님을 맛보려면 말씀의 은혜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통해 은혜를 입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예배가 끝난 후에 얼굴 표정이 다르고, 말투가 다릅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이 은혜가 풍성한 삶을 삽니다.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하여 있나니 이것은 많은 사람의 감사를 통하여 풍성한 은혜가 넘쳐 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4:15), [그런즉 너희가 모든 일 곧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열심과 우리를 사랑하는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할지니라.](고후8:7). 고린도 교회가 은혜가 풍성한 일을 했던 것은 이들이 은혜를 풍성히 받았음을 보여 주는 예입니다. 여러분들의 감사, 찬양, 헌금, 물질의 나눔, 구제 등은 강요로 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은혜의 말씀을 받아 누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일곱째, 주의 말씀은 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음식에 비유하자면 은혜의 말씀이 우유라면 의의 말씀은 고기에 해당합니다. [이는 젖을 사용하는 자마다 갓난아이이므로 의의 말씀에 능숙하지 못한 자로되](히5:13). 성경은 때로 어렵고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며, 부담스럽습니다. 어떤 부분은 입에는 달지만 배에는 씁니다. 오늘날 교회는 은혜의 말씀을 잘 증거하는 목사님들이 많고, 은혜를 받았다는 분들의 간증도 많습니다. 감동이 되고, 전적으로 뜻을 같이하는 말씀들을 들으면 기분도 좋습니다. 덕분에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기저귀를 차고 있는 성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귀엽지만 성장이 멈추었다면 그보다 더 슬픈 일은 없습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단단한/ 음식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지금까지 너희가 그것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지금도 못하기 때문이라.](고전3:2). 이들은 의의 말씀을 접하지 않았거나 거부했기 때문에 늘 젖으로만 살아야 하는 성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자라나야 하며, 장성해야 합니다. 의의 말씀은 지각을 사용해서 선악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의의 말씀을 바라고 사모해야 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의 말씀을 바라며 쇠약하오니](시119:123). 젖을 주지 않는다고 떼를 쓰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젖을 떼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고통스럽고, 울고, 불어도 과감히 젖을 떼고 입에다 어른들이 먹는 음식을 넣어주고 씹게 해야 합니다. 못 먹으면 굶겨서라도 먹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젖을 떼어야 할 나이에도 젖을 물고 있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이런 성장통을 겪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나는 저런 설교가 싫어!! ....앙앙 웁니다. 얼굴은 굳어지고, 노려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필수적입니다.

여덟째, 주의 말씀은 권능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깜짝 놀라니 이는 그분의 말씀에 권능이 있었음이더라.](눅4:32). [이에 그들이 다 심히 놀라며 서로 말하되, 이 어떠한 말씀인가! 권위와 권능으로 부정한 영들에게 명령한즉 그들이 나가는도다, 하더라.](눅4:36). 주님의 말씀에 권능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말과 차이입니다. 사람들의 말은 그냥 말입니다. 산을 향해 말하는 것은 고사하고, 책상을 향해 “움직여라!” 백번을 말해도 움직이게 하는 권능(힘-power)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을 하시면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되어지는 권능이 있습니다. [이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라. 그분께서 자신의 권능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붙드시며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하게 하신 후에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지으셨을 뿐 아니라 말씀으로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권능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권능이 있어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骨髓)를 찔러 나누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니](히4:12).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그냥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권능의 말씀을 통해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입의 말로는 아무 것도 되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말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입으로는 무엇을 못하느냐? 는 조롱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갈 때 우리 입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입에서 생명의 말씀이 나가면 생명을 주고, 진리의 말씀이 나가면 해답이 없는 인생들에게 답변을 주며, 은혜의 말씀이 나가면 강건하게 하고, 믿음의 말씀이 나가면 믿음을 주며, 의의 말씀이 나가면 정확한 판단력을 줍니다.

권능은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 성령의 능력, 믿음의 능력, 학습 능력, 돈을 벌 능력조차도 다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능력을 얻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믿음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사용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재물과 존귀가 다 주께로부터 나오며 또 주는 모든 것을 다스리사 손에 권능과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29:12). 주님을 통해 권능을 얻고자 한다면 권능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 하나님은 곧 능력으로 내게 띠를 두르시며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는 이시니](시18:32). 다윗이 능력이 있었던 것은 그의 학문이나 지혜나 가문이나 인물이나 백성들의 인기나 지지 기반이 튼튼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늘 주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데서 말씀의 권능을 힘입어 살았습니다. [오 나의 능력이시요, 나의 구속자(救贖者)이신 [주]여,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默想)이 주의 눈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아홉째, 주의 말씀은 선한 말씀입니다. 

[또 시내 산에 강림하시고 하늘에서부터 그들과 말씀하사 바른 법도와 참된 율법과 선한 법규와 명령을 그들에게 주시고](느9:13).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선한 말씀입니다. 선한 말씀, 선한 법규, 주의 선하심을 맛보고 알아야 합니다. [오 /너희는/ [주]의 선하심을 맛보고 알지어다.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시34:8). 우리 말에는 “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로우심을 맛보고 알아야 제대로 사람이 됩니다. 주의 말씀이 송이 꿀보다 달고, 생수보다 시원하고, 버터보다 달콤한 경험을 해 보아야 합니다. [너희가 {주}의 은혜로우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2:3). 우리의 입이 어디에 길들여지고, 무엇을 맛보아 아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을 읽고 또 읽을 때 여러분은 그 맛을 알게 됩니다.

열 번째, 주의 말씀은 지혜와 지식과 명철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단순한 자는 민감하게 되며, 우둔한 자는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지식의 말씀을,](고전12:8). 어떤 많은 책을 읽어도 사람은 지혜를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할 때 누구나 지혜를 얻게 됩니다. 요즘 어려서부터 조기 교육을 시키고, 아이들 교육이라면 정신을 못차리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혜를 주는 교육은 학교나 학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또 어린 아이때부터 네가 성경 기록들을 알았기 때문이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딤후3:15). 어릴 때부터 성경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이 지혜와 지식과 명철을 주기 때문입니다. 새벽 기도를 열심히 나가는 어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서 매일 기도했습니다. 자기 자식이 솔로몬과 같이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기를 구하고 또 구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성경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았습니다. [주의 증거들이 나의 묵상이 되므로 나의 모든 스승보다 더 많은 명철이 내게 있으며 내가 주의 훈계들을 지키므로 노인들보다 잘 깨닫나이다.] (시119:99~100).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나의 모든 스승”-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인생에서든 누구를 막론하고-보다 더 많은 명철이 있게 되며, 그것들을 지킬 때 노인들보다 잘 깨닫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지혜롭게 되는 것이나 자녀를 지혜롭게 하는 방법은 같습니다. [네 귀를 기울여 지혜로운 자의 말씀들을 들으며 네 마음을 내 지식에 쏟을지어다.](잠22:17)란 말씀에 순종하면 됩니다. 여러분은 부지런히 설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성경 공부, 기도 모임, 주일 예배 등 모임에는 가능한 한 다 참석하십시오.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일은 집중력과 인내력을 요구합니다. 성경을 읽는 일은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힘을 쏟아야 하는 일입니다. 말씀의 효능에 대해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주]의 율법은 완전하여 혼을 회심(回心)시키고 [주]의 증거는 확실하여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주]의 법규들은 정당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하는도다. [주]의 두려우심은 깨끗하여 영원토록 지속되고 [주]의 판단들은 진실하고 다 의로우니 참으로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또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주의 종이 또한 이것들로 경고를 받나니 이것들을 지킬 때에 큰 보상(報償)이 있나이다.] (시19:7~11). 지혜와 지식, 명철의 말씀들은 쉽게 습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씀들은 그동안 자라오면서 배우고, 익혀온 가치관, 생각, 사상 등을 모두 깨뜨리고 버리게 하며, 처리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채찍을 맞는 것처럼 아프기도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때 내 가슴 속으로 강하게 파고드는 못과 같이 박힙니다. 그래서 빠지지 않고 평생 동안 내 마음 속에 있게 됩니다. 저는 처음 성경을 공부할 때 요한복음 8:32절과 로마서 1:17 두 구절이 얼마나 깊게 박혔는지 아직도 그 말씀에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말하기를 [지혜로운 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집회의 스승들이 굳게 박은 못들 같으니 이 말씀들은 한 목자께서 주신 것이니라.](전12:11)고 했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에게 지혜의 말씀들을 주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고치시고, 건지시고, 녹이시며, 필요를 공급하십니다. 말씀으로 비추시고,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며, 책망하시고, 징계하십니다. 말씀으로 위로를 주고 말씀으로 씻으시며, 먹이십니다. [자신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며 멸망들에서 그들을 건지셨도다.](시107:20). 주님의 말씀으로 추운 겨울에 얼어 있는 대지를 녹이시고 싹이 나게 하시며, 얼어붙은 강을 녹이사 물이 흐르게 하십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자신의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들이 흐르는도다. 그분께서 자신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자신의 법규들과 판단들을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시147:18~19). “말씀을 보내사” -이것이 핵심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보내 주셨습니다.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매 이 말씀이 이스라엘 위에 임하였으므로](사9:8). 이제 여러분이 받을 차례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가? 에 따라 주님은 그 말씀에 있는 대로 복을 주시기도 하고, 저주를 내리시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보내 주시는 말씀을 거부했을 때 포로가 되었고, 멸망했습니다.

말씀을 보내시는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말씀을 선포할 자신의 사자들을 보내십니다. 대언자, 목사, 교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내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성령의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보내시고, 세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나옵니다. 우리는 역대기를 기술한 한 성경 역사가의 증언을 들어 보아야 합니다. [[주]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자신의 거하는 곳을 불쌍히 여기사 자신의 사자(使者)들을 통하여 백성에게 /말씀을/ 보내고 늦기 전에 일어나 보내셨으나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그분의 말씀들을 멸시하며 그분의 대언자들을 학대하여 마침내 [주]께서 자신의 백성을 향해 진노하사 구제할 방법이 없게 되었으니] (대하36:15~16). 주님이 하신 일은 자신의 사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 일은 신, 구약을 막론하고 동일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종들을 통해 말씀을 보내십니다. 성령이 있고, 성경이 있으면 족할 것 같은데 주님은 목자와 교사를 세우시고 그들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저는 누가 저를 욕하는 것이나 무시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저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딴죽을 걸고 불평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누가 제 개인을 욕하고 비난하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말씀과 기도로 섬기고 가르치기 위해 이곳에 있지 군림하고 섬김 받고 존경받기 위해 이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하는 말씀을 받지 않는 일은 목사의 힘을 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주]께서 너희에게 자신의 모든 종 대언자들을 일찍부터 일어나 보내시고 보내셨으나 너희가 주의하여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렘25:4). 이것이 패망의 지름길이었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보내 주실 때 선생들을 보내 주십니다. 주님은 선생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비록 {주}께서 너희에게 역경의 빵과 고통의 물을 주시나 다시는 네 선생들을 구석진 곳으로 옮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선생들을 볼 것이며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나는 말을 네 귀가 들으리니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 길로 걸으라, 할 것이며] (사30:20~21).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목자들이 전념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면하는 것과 교리를 가르치는 것에 마음을 쏟으라.](딤전4:13). 성경을 읽고, 권면하고, 교리를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이 제가 주께로부터 받은 사역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도록 촉구하고 권면하는 일 역시 제가 할 일입니다. 저는 올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성경 읽기를 다시 한번 촉구하며 이 말씀들을 생명의 양식이요, 삶의 법전이요, 능력이요, 지혜요,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목사님이 가난한 달동네에 사시는 할머니 성도님을 심방가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할머니는 얼마나 가난하든지 방에 불도 넣지 못하고, 오돌오돌 떨고 있었습니다.
방에 벽지도 신문지, 광고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할머니 손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를 해 드리고 집을 나올려고 하면서 방을 다시 한번 둘러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벽에 이상한 딱지가 하나 붙어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그것은 딱지가 아니고 수표였습니다.
보통 수표도 아니고, 0이 굉장이 많은, 아파트를 한 채 살 수 있는 거액의 수표였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할머니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할머니, 이 수표를 왜 여기다 붙여 놓았습니까?”
“응, 내가 파출부하면서 한 할아버지를 돌봐 드렸는데,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고맙다고 저걸 내게 줘서 버리기도 아깝고 해서 기념으로 붙여 놓았지, 뭐”
목사님이 깜짝 놀라서 말했습니다.
“할머니, 저게 수표라는 거에요. 돈이에요. 저 돈이면 큰 아파트 한 채 살 수 있어요” 할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 종이 한 장이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목사님의 도움으로 할머니는 그 수표로 좋은 아파트를 사서 입주하여 편안히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할머니가 거액의 수표를 벽에 붙여 놓고 판자촌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능력의 하나님을 제껴 놓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슬픔에 잠겨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저희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이 말씀은 단 두 마디 밖에 되지 않지만, 지금까지 수 많은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희망과 확신을 심어준 말씀입니다. 저도 복음역사를 섬기다가 지치고 낙심이 될 때 이 말씀이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은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라” 이 말씀을 제 방에 써서 붙여 놓았습니다. 이 시간 주님이 우리에 주시는 이 귀한 말씀을 깊이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로서 산을 바다에 던지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Ⅰ. 믿음의 능력(20-23)

20절을 봅시다.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이 아침에 성전 앞을 지나가다가 무화과 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이 전날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말했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 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 전날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14절에 보면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예수님이 무섭게 저주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는 당시 이스라엘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상징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크고 화려한 헤롯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 자부심을 느끼고 자기들의 믿음이 대단한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이렇게 성전이 크고 멋있고, 성대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크신 능력이 나타나리라 믿었습니다. 실제로 이 성전 짓는데 80년이 소요되었습니다. 만 명의 인부들과 천 대의 마차, 천 명의 사제들이 동원 되었습니다. 공사 완공 후, 수소 300마리를 제물로 바쳤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웅장한 성전에서 힘이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 앞에 서 있는 무화과 나무를 뿌리채 마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성전 건물이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거기서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제사의식이 아무리 성대해도 그들 내면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이 없으면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능력을 부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하셔서 뿌리채 마르게 하신다고 경고하십니다. 우리도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이나 형식으로 우리를 치장한다고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실제적인 믿음이 없으면 메마른 무화과 나무처럼 심령이 말라 비틀어져서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 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2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Have faith in God. 성전 건물을 믿지 말고, 거대한 조직이나, 돈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경력, 타이들 의존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권세가 어디서부터 옵니까? 하나님께로 부터 옵니다. 능력이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죄 사함의 권세,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 우리 가정과 민족을 새롭게 하는 능력, 다 하나님께로 부터 옵니다. 우리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죽음의 권세를 파하시고 승리를 주신 분이십니다. 로마서 4:17절에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121:1-6절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

를 상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하였습니다.

우리 손에 당장 돈이 없고 나를 밀어주는 사람 하나 없고, 내가 비빌 언덕이 없어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나의 도움이 되시고, 나의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을 믿고 의지할 때 얼마든지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며칠 후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게 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비롯해서 남은 제자들에게 남겨주실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자리에 관심이 많았고, 예수님에게 뭔가 인간적인 도움을 기대했습니다. 자리에서, 권력에서 힘이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런 인간적인 보장을 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예수님은 그런 것들을 주실 수도 있으신데 일부러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을 주면 그런 것들을 붙들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것 보다 더 본질적인 것, 더 근원적인 것, 모든 축복과 능력의 쏘스가 되시는 하나님 자체를 붙들고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이 하나님만을 믿게 되었을 때 후에 얼마나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습니까?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베드로와 요한이 외쳤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베드로와 요한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을 때 앉은뱅이에게 믿음으로 도전하였습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때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룻다에서 중풍병으로 고생하던 애니아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욥바에서 죽은 도르가를 살렸습니다. 성전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여 3천명, 5천명을 회심시켰습니다. 베드로는 어떤 타이틀도 없었습니다. 그가 가진 교회 건물도 없었습니다. 동원할 수 있는 자금력이나 조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을 때, 그는 두려울 것이 없었고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오직 하나님을 믿을 때 다른 외적 조건이 다 열악할지라도 능히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저는 요즘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에 연재되고 있는 한국시각장애인선교연합회 신인식(57세) 이사장의 간증을 보고 참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이 분은 경상도 의령,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4살 때 술래잡기를 하다 이마를 뭔가에 부딪혀 실명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도 아파서 병상에 누워 계시고, 자신은 실명해서 앞을 못 보니 얼마나 절망이 되었겠습니까? 너무 많이 울고 눈물을 많이 흘려서 눈물도 말라 버렸다고 했습니다. 청소년기에는 결핵 말기에 신경성 폐렴까지 걸려서 치료를 위해 약을 4년 동안 14만알, 주사를 매일 한 대씩 1400대를 맞았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불우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이 분은 하나님을 믿고 운명에 도전했습니다. 초등학교때 부터 껌팔이, 볼펜팔이, 신문배달, 전화교환원, 학교 숙직, 드럼 연주 아르바이트를 하며 인생을 개척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귀로 듣는 잡지인 <사랑의 메아리>를 창간하였습니다. 1994년에는 <종달새 전화도서관>을 개원하여서 시각장애인들이 전화만 하면 매일 신문기사를 읽어주고, 주간지, 월간지 등을 음성으로 들려주는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장애인들이 히말라야산에도 등정하도록 후원해 주고, 해병대 병영체험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해서 서울장신대를 졸업하고, 미국 faith 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으며, 대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피아노, 드럼, 트럼펫 연주가 수준급이고, 노래는 성악가도 놀랠 정도의 실력입니다. 전 세계 20여개국에 다니며 집회를 하였습니다. 그가 최근에 쓴 책 『꿈꾸는 자의 무한도전』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 속을 거닐고 있습니까? 별거 아닙니다. 일곱 블록을 가득 채우는 안개라도 담으면 물 한 컵 분량 밖에 되지 않습니다. 절망은 가장 게으른 선택입니다. 불행에 절망하지 말고 희망으로 기도하십시오. 믿음으로 기적을 구하십시오” 그는 눈에 보이는 것 아무 것도 없고,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고, 의지할 것 하나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Have faith in God”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랬을 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 그것이 우리의 최고 자산이요, 위대한 가능성입니다. 이 하나님을 믿으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떤 일까지 할 수 있습니까?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일반적으로 산은 거대해서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그 거대하고 견고한 산을 향해서도 외칠 수 있습니다. “산이여, 들려서 바다에 던져져라” 이렇게 말하고, 이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옛말에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말을 아주 복음적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산이 아무리 높다한들 하나님보다 높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집어 던지시면 산 아니라 한 나라도 바다에 집어 던져 버리실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직후 바로군대가 철병거 6백대를 이끌고 뒤쫓아 왔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탱크 600대를 몰고 뒤쫓아 온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애굽 군대를 다 물에 던져 빠져 죽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5:1,2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하나님은 세계 최강의 군대도 다 들어서 바다에 던지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홍해도 건너게 하시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바다에 빠뜨리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지만 실제로 그 마음에 믿음이 없습니다. 거대한 산 아니라, 작은 언덕만 만나도 두려워서 벌벌 떨고 호들갑을 떱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산도, 들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고후 4:7). 우리 하나님은 얼마든지 산도 들려서 바다에 던지울 수 있고, 뽕나무도 뽑아서 바다에 심으실 수가 있습니다(눅17:6).

저희들이 6년 전에 이 곳에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을 때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돈이 충분히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앞 집 최사장이 여러모로 방해공작을 꾸몄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말씀 마가복음 11:22절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을 붙들고 밀어 붙였습니다. 그때 단 한 건의 민원도 없이, 단 한 푼도 빚을 지지 않고 기적같이 건축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앞에 말씀드린 신인식 목사님은 그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해 봤자 안 될 일 뭐 하러 힘을 쓰냐 라고 말합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깨진 계란의 흔적이라도 바위에 남지 않겠습니까. 단번에 될 수 없겠지만 끝없이 하다보면 언젠가는 되지 않겠습니까? 낙수물이 바위를 뚫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실제로 그 분이 고등학교 들어갈 때 시각장애인은 일반고에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혈혈단신 대구에서 서울까지 올라가서 물어 물어서 정부청사에 가서 문교부 장관을 만나게 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자,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또 그 다음 날에도 계속해서 찾아갔습니다. 마침내 장관을 만나서 시험을 보게 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물론 그때 바로는 법이 시행되지 않았지만 나중에 법이 개정되어서 지금은 시각 장애인이 일반고도 가고, 판사도 임용되고, 대기업도 들어가고 각 분야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있는 사람과 믿음없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믿음없는 사람은 계란으로 바위를 칠 엄두를 내지 못하지만, 믿음 있는 사람은 과감하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깨진 계란 자국만 남기지만 나중에는 바위가 깨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차사순 할머니 이야기 아십니까? 전북 완주에 사시는 이 할머니는 손주 손녀들을 직접 자기 손으로 운전해서 유치원에 데려다 주기 위해서 운전면허에 도전했습니다. 70이 다 된 나이에 운전면허 시험에 도전하는 것이 무모하게 보였습니다. 실제로 959번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시험보기 위해 지출한 인세만 500만원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포기치 않고 도전해서 960번 만에 합격했습니다. 이 할머니의 도전정신에 감동받은 승용차 회사에서 무료로 차도 한 대 선물해 주고, 승용차 광고모델로 출연하여 ‘올해의 광고모델상’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아직까지 운전면허증 못 따신 사모님들, 다음 주부터 당장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이번 여름수양회도 100명의 양들을 능히 초청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12명의 형제 노아, 12명의 자매 노아 제자양성역사를 능히 이룰 수 있습니다.

지난 주 파트모임 메시지에서 나베드로 목자님은 “우리 모두 거룩한 뻥쟁이가 됩시다”라고 하였습니다. 거룩한 뻥쟁이. 참 좋은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우리가 하는 말들이 뻥을 치는 것 같고, 얼도 당토 않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뻥은 반드시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위대한 성경선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 2세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영적 거장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개척하고 있는 캠퍼스들이 복음으로 정복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처럼 믿음의 말을 선포하고 승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의심을 극복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마음에 의심치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 야고보서 1:6절에서도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마음에 파고드는 의심과 불신, 부정적인 생각, 인간적인 생각을 이겨낼 수 있습니까?

Ⅱ. 기도의 능력(24-25)

2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우리가 사단이 심는 의심을 극복하고 확신가운데 도전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의심의 먹구름이 물러가고 마음에 서광이 비쳐 옵니다. 기도할 때 절망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도전하고자 하는 의욕이 솟구쳐 올라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어 기도할 때 위축된 마음이 풀리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는 자신감과 열정이 생겨납니다. 또 기도할 때 이미 받은 줄로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히11:1).

제이 필립스(J. B. Philips) 목사님이 쓰신 책 중에 『너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 (Your God is too small)』이란 책이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너무 하나님을 작은 분으로 제한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히 산도 들어서 바다에 던지우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작은 하나님으로 제한시키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자꾸 믿음의 말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는 우리의 하나님이 너무 작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게 되면 크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느끼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공급받는 파이프라인과 같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신기하게도 길을 보여 주시고, 용기와 담대함과 지혜를 부어 주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연결된 파이프 라인이 막히고 녹슬어서 하늘의 능력이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지치고 낙심되고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신기하게도 힘이 솟구치고 의욕과 열정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엘리야가 기도하자 3년 반 동안 메말랐던 이스라엘 땅에 비가 쏟아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온 교회가 기도하자 감옥 문이 열리고 베드로가 유유히 걸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히스기야가 금식하며 기도하자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서 앗수르 군대 185000명이 순식간에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생 살다 보면 기가 막힐 때가 많습니다. 물질문제, 건강문제, 자녀문제 등 우리를 가로 막고 있는 산을 만날 때 힘이 빠지고 기가 막힙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기가 막힐 때 기도합니다. 기가 막힐 때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3기’라고 합니다. 우리가 문제 앞에서 낙심하지 말고 절망하지 말고 기도합시다. 예례미야 33:3절은 말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가 이번 여름수양회를 앞두고, 또한 여름수양회를 통해서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 주실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의 기도 파이프라인을 막히게 하는 것이 불편한 인간관계입니다. 내 마음에 누군가 미워하는 사람, 서운한 사람이 있으면 기도의 문이 닫힙니다. 그래서 25절에 보면 기도할 때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도 사하여 주시고 기도도 응답해 주십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인생의 능력의 쏘스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굳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굳게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우리도 거룩한 꿈을 꾸고, 꿈을 선포하고, 도전해서 꿈을 성취하는 거룩한 꿈쟁이, 뻥쟁이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을 믿으라. 마귀를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 세상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 하신다. 또 돈을 믿지 말고, 자기 재주를 믿지 말고, 수단 방법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시란다.

어느 날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어떤 자매를 보고 "하나님 공경하고 예수 믿으세요"하니까 "아니, 나는 안 믿어요" 한다. "뭘 믿으려고 안 믿어" 하니 "내가 나를 믿지요"한다. "아니! 여보 자매, 그거 무슨 소리요, 내가 나를 믿다니 자매가 무엇인데요?" 자매가 아무리 안다고 해도 눈앞에 눈썹이 몇 개인 줄도 모르면서, 또 아무리 잘났대도 콧구멍 두 개와 입 구멍만 막으면 팩팩하다 십 분 후에 눈알이 나와서 죽을 터인데 그것을 믿다니...... 그런 망령된 소리를 하지 말고 피조물 된 인간은 조물주(하나님)를 믿어야 된다고 전도하였다.

그 자매뿐만 아니라 오늘 이 세계와 이 강산이 요 모양이 되는 것은 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를 믿는다는 무신론자들과 인본주의자들 때문이다.

아니 무신론자들과 사회주의자들만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반역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계심을 증거하는 자들 가운데서도 말과 붓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전하면서도 실제 생활로는 무신론자의 행동을 하는 것을 볼 때에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 세상에 계실 때 베다니에 가셨다가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길에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시장하시어 열매를 찾으셨으나 잡수실 만한 실과가 없으므로, 이제 후로는 네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영원히 없으리라 하시고 그곳을 떠나 그 이튿날 그곳을 다시 지나가실 때에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모두 말라진 것을 보고, 베드로가 기억하고 여쭈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임의로 말랐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시장하신데 잡수실 것이 없어서 감정으로 무화과를 저주하신 것인가? 그렇지 않다. 40일 동안 금식하셔도 돌로 떡을 만들어 잡수시는 시험을 이기셨으니 그것은 자기를 위한 감정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아니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한 것임을 나는 믿는다.

1. 어떠한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1) 열매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믿으라

나무 한 그루라도, 풀 한 포기라도 자기의 사명을 감당치 못하면 저주를 받는 것이다. 너희들도 특별한 은총을 받고도 주님의 열매가 없으면 버림을 받게 하신다는 공의로우신 하나님, 심판의 주님, 두려우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느니라. 죄많은 세계를 홍수로 멸망시키시고,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유황불로 심판하시고, 일본의 죄악을 원자탄으로 징계하시고, 한국의 죄악을 38선으로 가로막아 놓으신 것이다.

삼손의 죄악은 결국 삼손이 눈이 뽑히고 연자 맷돌을 돌리게 하셨고, 웃시야 왕의 교만한 죄악은 문둥병이 들어 죽게 하셨으며, 헤롯의 교만은 몸에 충이 먹어 죽게 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나 민족의 죄악을 저울로 달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2)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으라.

무화과나무의 이적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에게 구하여 얻은 능력이다. 너희들도 기도하여 구한 것은 이미 받는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받으리라.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임을 믿으라.

너희들이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너희들에게 더욱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어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존재를 여러 가지로 증거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으신 만물을 보아 알 것이다(롬 1:20). 본능으로 알 수 있고 자연과 인생의 조직, 피조물을 보아 조물주를 아는 것이다.

둘째,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간다 하였다(벧전 3:21). 양심이 선악을 분별하며 책망하고 심판한다.

셋째, 성경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요 5:39).

넷째, 세계의 역사가 증명한다(단 4:17, 7:27).

다섯째,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께 모든 소원을 아뢰고, 거룩한 뜻을 분별하게 되고, 죄를 자복하게 되고, 능력을 구하여 얻으며, 하나님의 섭리로 위험과 실패와 사망에서 구함을 받는 체험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어떤 노인에게 전도하였더니 "여보, 예수쟁이들만 하나님을 공경하시오? 우리도 다 하나님을 공경한답니다. 하나님이 우순풍조(雨順風調)로 오곡백과를 주어서 다 잘 산답니다" 하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노인장, 하나님을 어떻게 공경하시오?" 하니 "나는 해 뜨는 데로 향하여 소변도 보지 않지요"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생활을 하는가?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생활태도

1. 철두철미한 회개의 생활을 하여야 한다

신구약의 모든 성도들 가운데 참된 하나님을 믿는 자는 먼저 회개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였다. 다윗을 보시라. 한때 인간성을 가지고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무서운 죄를 짓고 타락했었으나 나단의 책망을 듣고 겸손히 용상에서 내려와 부스러진 심정으로 침상을 적시고 요를 적시는 눈물의 회개를 밤마다 하였던 것이다.

바울의 회개와 베드로의 회개! 하여간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믿을 때 죽었다 살아나는 철저한 회개를 경험한 것이다. 어거스틴도 그러하였고 존 번연과 루터가 그러하였다. 아직도 회개가 철저치 못한 연고이다.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2.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양심생활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니 털끝만치도 어두움이 없나니 하나님과 사귀었다 하면서도 어두운 데 거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 하였다. 사람들이 볼 적에는 점잖고 의롭고 깨끗하게 사는 것 같으나 혼자 있을 때는 별 짓을 다하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까닭이다.

외식하는 바리새 교인과 서기관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고 양심적으로 살지 않음으로 주님에게 얼마나 책망을 들었는가? 그 반대로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보시라. 형님들의 미움을 받아 팔리어 이국 타향에 가서 보디발 장관의 가정에 총무로 충성되게 봉사할 때에 장관의 부인이 날마다 유혹하여도 듣지 않고 말하기를 주인께서 나를 신용하여 가정의 모든 것을 맡기셨으나 당신만은 맡기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이런 일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요 하고 거절할 때에 달려들어 옷을 붙잡고 더욱 유혹함으로 붙잡힌 옷을 벗어버리고 달아났다. 그랬더니 부인이 모함하여 잡히게 되고 감옥에 들어갔으나 그 정조를 지킨 것은 그가 하나님을 참되게 믿은 결정이 아닌가?

오늘날 하나님을 믿고 일한다 하면서도 양심을 버리고 개인의 편리와 안일을 위하여 이리저리 좌우하는 생활로 신앙의 정조를 더럽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안타깝기 끝이 없는 것이다.

내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너희에게 경계로서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사람들이 그 양심을 버렸으니 그 믿음을 의논컨대 파선한 배와 같으니라(딤전 1:9).

3.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생활은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저희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마는 하나님을 알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않는다고 하였다(롬 1:21).

물고기가 물 안에 있으면서도 물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땅에 사는 인간들이 땅덩어리가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 지중하여 무감각하게 지내는 인간들 중에서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자는 밥 한 그릇을 대할 때나 물 한 잔을 대할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려고 해서 난 것이 아니요 살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어머니 복중에 있을 때 신기하고 오묘하게 지음을 받아 열 달 동안 그 속에 있다가 나올 때에 배꼽줄 하나 가지고 나왔지만 나오자마자 그것을 똑 잘라 버리니 정말 핏덩어리로 된 것을 젖으로 먹여주시고, 입혀 주시고, 보호하여 주신 그 사랑을 어찌 감사하지 않으랴.

이웃집에서 떡국 한 그릇을 얻어먹고도 감사를 몇 번이나 하면서 날 때부터 지금까지 아름다운 세계에서 봄에는 백화가 만발하고, 여름에는 녹음방초(錄陰芳草) 우거지고, 가을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고, 겨울에는 백설강산이 은세계를 이루어 보기 좋고, 놀기 좋고, 살기 좋게 축복하시었건만 우리는 얼마나 조물주께 감사를 하였는가? 캄캄한 밤중에 수렁에 고무신 한 짝을 빠뜨리고 헤맬 때에 누가 성냥 한 개비를 켜서 밝혀 주면 아이고 이 양반 고마워라 하면서도 낮에는 태양으로 변함없이 비추어 주시고 밤에는 달과 별로서 밝게 해 주시는, 그 빛을 주시는 조물주 하나님께는 얼마나 감사하였는가? 배은망덕하는 인간들을 다 멸망시킬 것이로되 자비와 긍휼로 무조건 사랑하심을 깨닫는 자는 행복스러운 인간인 것이다.

또한 우리의 육체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독생자까지 주신 그 사랑, 어찌 다 말로 형언하리오. 주를 사랑하고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게는 일만 가지 일이 다 합동하여 유익하게 하시므로 행복과 순경(順境)에서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는 불행과 역경 중에서도 항상 감사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어떤 독실한 신자 노인이 있었다. 그가 쌀 한 가마니를 외상 맡아다가 마루에 두었더니 그날 밤에 도적이 와서 홀랑 가져다 버렸다.

그의 마누라는 도적을 욕하면서 야단을 치는데 영감님은 "마누라, 너무 떠들지 마시오. 나는 쌀 한가마니 잃어버렸는데 다섯 가지 감사가 생기는구먼" 한다. "원, 저런 영감두, 무엇이 감사하단 말이요" 하니 "보라구, 우리는 쌀 한 말도 얻기 힘든 집에서 한 가마니나 외상으로 얻게 된 신용을 얻었으니 감사하지 않은가? 또 감사할 것은 남은 도적질하면서 사는데 우리는 도적질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오. 또한 그것 모두 다 우리가 잘못했지, 그것을 방안에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마루에 두어 실패하였으나 결국 좋은 경험을 얻었으니 감사하고, 또한 육신의 양식은 잃어버렸어도 영혼의 양식은 잃지 않았으니 감사하고, 또 외상으로 얻어온 쌀이라도 남의 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내 것을 잃었으니 감사하지 않소?" 하며 찬송을 불렀다 한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감사 안할 것이 없고 감사 안 하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것이 없는 것이다.

4.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강하고 담대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종이가 약하지만 벽에 붙어 있게 될 때는 강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몸도 약하고 마음도 약하고 의지도 약하지만 만세 반석 되시는 하나님께 신앙으로 의지하여 하나님과 나와 그리스도의 피로 반죽하여 콘크리트를 할 때 강하고 담대하게 되는 것이다.

다윗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골리앗을 물매 돌 한 개로 쳐서 죽이고, 엘리야는 하나님을 믿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고 3년 6개월간 비가 오지 않게 하였고 다시 기도하여 비가 쏟아지게 한 것이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하나님을 믿어 유대 민족을 하만의 손에서 위기 일발에 구원하여 낸 것이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것이 없느니라.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행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욱 큰 것도 행하게 하리라(요 14:12).

5.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항상 기도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깨어 기도하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기도와 간구와 감사함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고 생활을 하는 것이다.

효자 효녀는 무엇이든지 부모님께 문의하고 보고한다. 불효 자식은 무엇이든지 다 제 맘대로 자행자지(自行自止)한다. 부모님이 무엇을 좀 알고 싶어서 이번 일이 어찌되었느냐, 아까 왔던 사람이 누구이냐 하고 물을 때 "아이구, 그것은 알아서 무엇하겠소. 어서 진지나 잡수시고 낮잠이나 주무시구려. 원, 노인네들은 별 간섭을 다 하시려고 드시네" 하면 부모님들은 그만 쑥 들어가 손을 비비면서 "이거 왜 여지껏 살아서 이 수모를 받고 있을꼬" 하면서 뒷방에서 한숨만 짓는다. 물론 늙은 부모님은 아무 것도 몰라도 자식들이 하는 것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뒷방 늙은이가 아니시다. 무엇이든지 기도로 그에게 문의하고 보고하면 대소만사(大小萬事)를 최선으로 인도하여 주실 터인데, 불신앙의 무리들은 무엇이나 제 뜻대로 하여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며 자신의 불행을 초래하는 것이다.

호흡이 끊어지면 죽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 교통의 기도 호흡이 두절되면 벌써 죽어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치 아니하리라(삼상 12:23).

살아 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말단 사정을 다 아시는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어 참된 회개로 죄사함 받고 성령을 받아 빛 가운데서 양심적으로 살며, 항상 기도와 감사와 희락과 화평으로 살며, 극히 강하고 담대하여 악마와 세상과 죄악과 싸워 날마다 백전 백승하는 개선장군이 되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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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요한복음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NASB. Jesus answered and said to them, "This is the work of God, that you believe in Him whom He has sent."
NIV. Jesus answered, "The work of God is this: to believe in the one he has sent."
KJV. Jesus answered and said unto them, This is the work of God, that ye believe on him whom he hath sent.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수많은 무리들을 먹이신 후에 너희들이 왜 나를 따라다니느냐? 그것이 먹을 것 때문이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확장한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동기를 살펴볼 때 다양한 원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암병을 치유하셨기 때문에, 다양한 절망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의 힘으로 해결 할 수 없었던 심각한 질병과 실패와 절망에서 기적같은 은혜로 구원하신 것 때문에 믿음을 선택한다면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태복음 16:13-25)

본문을 볼 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베드로는 그러한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간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여기 ‘간하여’는 원어적으로 ‘비난하다, 책망하다 훈계하다’라는 뜻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 예수님을 가르치고 책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 섭리 가운데 작정된 대로 행하시는데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몰라도 한참 모르고, 영적인 생각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인간의 생각으로 합리화하려고 할 때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 이익을 위해 교회와 직분을 이용하지는 않습니까?
그 나라 갈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일인가 사람의 일인가 잘 분별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책망 받게 된 원인

얼핏 생각하면 베드로의 말은 옳은 말입니다.
거짓이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님을 위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지 않고 ‘사단’이라고까지 몰아붙이셨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섭섭하기 짝이 없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여기에는 베드로가 알지 못하는 깊은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인간의 소위 ‘진심’이나 ‘진정’이라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받들고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혈육의 문제, 땅의 요소이지 하나님의 뜻과 결부시킬 성질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말씀입니까?
베드로와 같은 고백도 못하는 자들이 많은 것이 현실인데, 예수님은 더하여 베드로의 고백까지도 불합격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진심이나 진정이라고 하는 연약하고 감정적인 부분은 사단이 노리는 가장 교묘한 틈이며, 동시에 성도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통로로 이용당하고 있는 베드로와, 그의 인간적인 진심을 빌미삼아 틈타려는 배후의 어둠까지 함께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진심과 진정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것을 버릴 때 거짓 것들은 자동으로 따라 나갑니다. 인간의 진정으로는 그리스도를 바로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고전 2:10-14).

신앙은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 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사정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영의 일과 육신의 일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롬 8:5).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생각에 합당한가, 사람의 생각에 합당한가 하는 것입니다(사 55:8-9).

마 22:15-22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세금 문제를 통해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를 묻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생각의 뿌리가 어디에 두고 있는가를 물으심으로써, 그들이 ‘먼저’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점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정과 사람의 사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사정 편을 들면 안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생각을 몰랐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면서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정을 헤아렸다면 베드로는 결코 주님의 책망을 받는 자리에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앙은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마 6:33)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롬 8:5-6).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골 3:1-2).
자기 식대로 예배드리고 자기 식대로 기도하고 자기 식대로 봉사하며 직분 감당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셨습니다(히 2:17).
시간이 없다, 바쁘다 하면서 자기 사정을 핑계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헌신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결코 손해보지 않도록 해주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 속한 일’(히 5:1)에 충성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마 16:24).
자기 자신은 십자가에 죽고 예수님만이 주관자가 되시도록 해야 합니다(갈 2:20).
복 있는 사람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받들고 순종하는 가운데 마침내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시 1:1-3).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고전 4:2).
충성은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은 손해보고 하나님을 위해, 남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충성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해주시고 함께 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요 8:29).
하나님의 뜻을 제쳐놓고, 받은 말씀도 놓치고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 온 어리석은 모든 시간들을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일을 함으로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역사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요한복음 6:29)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벳새다 마을의 빈들에서 5,000명 이상의 무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신 후 배고픈 무리를 위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다(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요 6:1-14).
특히 누가복음 9장 11절은 오병이어의 기적 이전에 무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야기하며, 병자들을 고치셨다고 기록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무리를 배불리 먹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이 바로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의도와 다르게 떡을 먹고 배부른 것에 만족하여 다시 그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았다. 예수님을 찾을 때 당시 유대인처럼 먹을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자신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찾는 것이 우리의 물질적인 복과 잘 먹고 잘살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시 유대인이 예수님을 찾았던 목적과 차이가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그 말씀을 듣고 무리는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요 6:28) 라고 질문을 하였다. 그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명백히 밝혀 주셨다.

여기서 “믿는다”라는 것은 헬라어로 “피스튜에테”라는 단어로 지속적인 믿음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즉 예수님을 믿음으로 계속해서 그분의 통치와 인도하심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하며, 그분의 통치와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거나 스스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였다.
대표적으로 사울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하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감옥에 보내기도 하였다(행 22:3-4. 빌 3:5-6).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믿고 사람들이 제자들을 박해할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 16:2). 이처럼 예수님을 찾지만, 그것이 자신의 필요를 위한 목적 또는 잘못된 신념으로 인한 열심은 하나님의 일과는 상관이 없다.

예수동행일기 제자훈련인 “With Jesus Ministry” 운동을 하는 유기성 목사는 설교를 통해 “조심스럽지만,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다. 주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고 바쁜 것은 다 우상”이라고 했다.
또 “사람들이 칭찬하고 부러워해도, 주님과의 관계가 메말라 있다면 무슨 만족이 있겠나”라며, “주님이 낯선 분인 것을 너무 늦게 깨닫게 된다면 이보다 두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하나님과 관계 없는 일들은 우상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우선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 일이 진정한 하나님 일이 될 수 있다.
마태복음 10:41-42에 선지자의 이름, 의인의 이름이나 제자의 이름으로 영접하거나 냉수 한 그릇을 주어도 상이 있다고 한 것은 어떤 일을 한 것보다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 가운데 믿음으로 행한 일들이 하나님께 의미 있음을 말해 준다.

헨리 블랙바기 목사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를 하나님의 일에 어떻게 동참케 하시는지 성경적인 원리를 가르쳐 준다.
그중 가장 중요한 원리가 하나님은 자녀와 친밀한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알리시고 초청하신다는 내용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은 자기 일을 도와주시기 위해 존재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기도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하여 천동설을 믿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고 주권자 되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알아 그분의 일에 동참해야 한다.

하나님은 실존하셔서 역사하시고 당신의 일에 사람들을 참여시킬 때에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과 길을 아는 것이 필수이다.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과 친밀해지려면 그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친밀해지려면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고 그분을 계속 생각하라고 한다.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시고 역사하시는 일을 우리의 마음에 소원을 두고 기도하게 하신다(빌 2:13).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이유이다.

스바냐 3장 7절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말씀하시는데, 자녀가 하는 일로 인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기뻐하고 사랑하는 분이심을 알려 준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예수님께서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신 데는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무디(D. L. Moody)는 “인간은 깨어진 그릇과 같으므로 계속 충만하게 되는 방법은 물이 쏟아지는 수돗물 아래 그 깨어진 그릇을 가져다 놓는 방법밖에 없다.”라면서, 깨어진 존재 같은 우리가 채움을 받기 위해서는 날마다 십자가 앞으로 성령님을 의지해 나가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십자가 앞에서의 회개는 관계 회복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칼빈은 회개가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로 속죄와 중생의 체험을 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경험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회개한 자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하였다(히 8:12; 10:17).

히브리서 8:12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For I will forgive their wickedness and will remember their sins no more."

히브리서 10:17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Then he adds: "Their sins and lawless acts I will remember no more."

“기억하지 않겠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나의 모든 죄와 또 내가 일평생 싸워야 할 죄의 본성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정죄함에 이르지 않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회개와 믿음은 회복된 관계로 귀결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나 자신의 필요를 위한 목적도 아니고, 하나님을 위한다고 스스로 쌓아 올린 업적도 아니다.
예수님 자신이 목적이 되고,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
The work of God is to believe in Jesus
요한복음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NIV / Jesus answered, "The work of God is this: to believe in the one he has sent."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야”
교회학교 교사, 성가대 봉사, 전도와 선교만이 하나님의 일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근본적인 것을 말씀하신다.
그렇다.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역사이다.
성령이 아니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수 없다(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Therefore I tell you that no one who is speaking by the Spirit of God says, "Jesus be cursed," and no one can say, "Jesus is Lord," except by the Holy Spirit.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을 내 안에 주인으로 모시는 것, 영접하는 것이다(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믿음은 지적동의나 신념이 아닌 관계이다.
예수님을 내 안에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며 동행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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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삼위일체


삼위일체(三位一體)

일체에서 ‘하나’의 의미는 숫자가 아니라 세 위격이 상호 내재 연합된 ‘공동체적 하나님’을 말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표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존재를 서술하는 신비이며, 인간의 언어와 사고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특별한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상식적인 사고로는 잘못된 이해에 빠지기 쉽고, 오히려 바른 이해가 어렵습니다.


삼위일체론의 두 방법


인간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연구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내적인 관계에 접근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기술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이해한 삼위일체에 대한 이론을 ‘내재적 삼위일체론’이라 부른다. 삼위 하나님을 반드시 ‘존재론’적으로 규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중요하다. 하지만 내재적 삼위일체는 삼위의 내적인 관계이며, 삼위가 존재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인식하기 어려운 한계를 가진다. 또 삼위일체를 존재론적으로만 논하면 사변적이 되어 공허해진다.


다른 하나는 삼위가 역사 속에서 행하신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인식하는 방법이다. 성경에는 성부, 성자, 성령의 행위에 대한 풍부한 기록이 있다. 이렇게 삼위의 역사 섭리를 통해 이해하는 방법을 ‘경세적 삼위일체론’이라 부른다. 성경은 모호하게 삼위에 대해 말하지 않고 구체적 행위에 근거해서 말한다. 하나님의 활동과 역사는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경험되고 인식된다. 이 점에서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장점이다. 그러나 경세적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의 ‘존재’에 근거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은 인간에게 경험되는 어떤 ‘기능’이나 ‘현상’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접근할 때는 경세적 삼위일체로 시작하고, 그에 근거해서 내재적 삼위일체를 함께 이해하는 방법이 좋다. 하나님의 활동은 반드시 그의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에 경륜과 내재는 분리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칼 라너는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내재적 삼위일체론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경세적 삼위일체론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했다.


일체는 숫자가 아니라 공동체


이제 삼위일체에 대한 적절한 개념과 표현을 보자.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숫자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아주 나쁜 접근방법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이 숫자적으로 ‘하나’의 본질이나 신성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다. 삼위일체론에서 한 분 하나님과 세 인격체(person)라는 표현을 할 때 한 하나님의 ‘하나’와 세 인격체의 ‘셋’을 같은 평면에서 다루면 안 된다. 즉 3과 1을 동일 평면에서 이해하면 셋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셋이 되는 모순에 빠진다. 인간의 이성으로 볼 때


‘3=1’이 될 수 없다. 이렇게 삼위와 일체를 숫자로 이해하면 삼위일체는 매우 비합리적이고 모순적 교리가 된다.


성부, 성자, 성령을 모두 신성이라고 인정한다면 결국 삼위일체론의 핵심은 ‘하나’를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관건이다. ‘하나’는 숫자가 아니고 세 위격이 함께 연합해서 가지는 공동체성을 의미한다. ‘일체’는 세 위격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상호 내재해 있는 ‘연합이며, 삼위의 의지와 구속 사업이 서로 상반되지 않고 통일을 이루는 ‘공동체’를 뜻한다.


최근에 삼위의 공동체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를 사용한다. 페리코레시스는 상호 내재적, 순환적, 침투적이라는 의미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페리코레시스’ 곧 상호통재(相互通在)를 통해서 일체되시는 ‘공동체적 하나님’을 형성하고 있다.


이 통일성 때문에 성부는 성자 안에 전적으로 계시고, 성령 안에 전적으로 계신다. 성자는 성부 안에 전적으로 계시고, 성령 안에 전적으로 계신다. 성령은 성부 안에 전적으로 계시고, 성자 안에 전적으로 계신다. 페리코레시스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계신 것이 아니고 상호 침투하셔서 성부는 성자 안에, 성자는 성부 안에, 성부와 성자는 성령 안에 거하시는 공동체라는 의미다.


삼위는 함께 역사


기독교 역사에서 오랫동안 성부, 성자, 성령이 가지는 고유한 속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부를 전능, 성자를 전지, 성령을 전선이라고 표현했다. 성부를 태초의 근원, 성자를 지혜, 성령을 덕성으로 부르는 것도 유사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최근 삼위의 속성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됐다. 삼위가 자신만의 고유한 속성을 가지면 결국은 삼위의 완전한 일치가 깨지고 삼위가 분리된다.


삼위의 역할과 경세도 마찬가지다. 만약 성부가 천지창조의 행위를 하고, 성자는 십자가에서 대속적 죽음으로 구원사업을 하고, 성령은 성화의 영으로 피조세계에 임한다고 생각하면 삼위는 각자 고유한 영역을 가지게 되고 결국 삼위의 공동체성이 훼손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신학계에서는 삼위가 함께 활동하신다는 표현이 더 좋다고 본다. 예를 들면 천지창조는 성부의 단독 행위가 아니라 성자와 성령이 함께 하신 사건으로 본다. 또 십자가의 구원도 예수님의 단독 행위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행위이고, 성령님의 성화도 성령 홀로가 아니라 삼위의 역사로 본다.


성경이 어떤 사건을 때로는 성부, 때로는 성자, 때로는 성령의 행위로 표현하지만 그 의미는 삼위가 함께 역사하신 것으로 보면 되겠다. 즉 십자가 사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성령을 ‘통해’ 행하신 구속사업인 것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삼위일체 르네상스 시대를 맞고 있다. 삼위의 온전한 사귐 안에서 인간사회의 자유와 평등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찾기도 하고, 삼위일체를 실천적이고 해방적 교리로 해석하기도 하며, 삼위의 섭리 형태를 생태계와 우주를 포함하는 사상으로 발전시키는 모티브로 삼기도 한다. 삼위 하나님에게 다가가려는 노력 속에서 온 피조세계가 하나님 안에 안길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를 기대한다.


김동건 교수 <영남신대 조직신학, 저자연락은 페이스북 facebook.com/dkkim222>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7031206



국 문 초 록 오늘날 한국교회는 엄청난 위기 가운데 서 있다. 안으로는 기독교정체성의 약화로 신앙이 흔들리고 있고, 밖으로는 공적신앙의 결여와 실천의 부족으로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정체성이 약화되면서 기독교 신앙을 갖는 이유가 '구원과 영생'이라는 종교적 이유에서 '마음의 평화와 안정'또는' 건강, 재물, 성공'과 같은 기복적 내용으로 바뀌고 있고, 청소년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회심하는 비율이 점차 낮아지고 있으며, 한국교회의 성장이 급기야는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교회학교는 급속도의 감소를 보이며 붕괴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공적신앙의 결여와 실천의 부족으로 한국교회가 선교초기부터 감당해 온 공적역할들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으며, 도덕적 윤리문제로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고, 신앙과 일상생활이 일치되지 않는 이원론적인 삶을 살고 있고, 한국을 대표하는 불교, 천주교, 기독교 중에서 가장 낮은 신뢰도를 갖고 있다. 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을까? 첫째로, 신학적으로 그 원인을 분석해 보면 사랑을 이야기하는 기독교가 신학적인 차이로 인해 분열하고 깨지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고, 참 진리를 말하는 기독교 안에 너무나 많은 이단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전적 모습을 보지 못하고 성부의 창조에만 집중하여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자유주의 신학, 성자의 구속에만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초월성만 강조한 근본주의 신학, 그리고 인격적인 성령 하나님의 모습을 개인적 체험과 경험으로 제한시키는 오순절 성령주의 운동의 통전성 상실에서 오는 파편화 현상이 한국교회의 이중적 위기를 초래하였다. 둘째, 철학적 관점에서 그 원인을 살펴보면, 포스트모던이 갖는 다원주의와 상대주의가 기독교정체성을 바로 정립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 교리가 이 시대 가운데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종교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또한 근대 객관주의 인식론의 영향으로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고, 객관적인 지식위주의 신앙은 아는 것을 실천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원론적 신앙을 양산하였다. 셋째,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그 원인을 분석하면,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전 세계가 일일생활권이 되고,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시청하는 세계화의 영향으로 기독교정체성이 혼란을 입게 되었다. 또한 지구적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종교적 세속화가 일어나고, 소통이 화두인 세계화 물결 속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게토화 되면서 더욱 위기 가운데 빠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교육적으로 원인들을 분석해 보면 이러한 한국교회의 이중적 위기의 외적요인으로는 가족구조의 변화와 저출산의 영향과 입시위주의 사회와 깨어진 가정으로 인해 고통받는 학생들의 문제임을 알 수 있고, 내적요인으로는 교회-가정-학교가 함께 신앙교육에 협력하지 못하고 교회에서만 신앙교육이 이루어지면서 신앙교육의 한계를 경험하게 되고, 제자직에 대한 교육은 많지만 공적신앙을 배양하는 신앙교육의 부족으로 공적의식과 실천이 약하고, 포스트모던 시대와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맞지 않는 교육방법으로 가르치면서 접촉점을 상실한 교육을 하는 문제로 인해 신앙교육이 교회 안에서 제대로 일어나고 있지 못하는 원인들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신학적 규범을 마련해야 하는데, 이 신학적 규범을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핵심인 '페리코레시스'안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삼위일체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되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다. 하지만,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온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헬라 철학적 영향을 받으면서 사변론적으로 흐르게 되고, 그 영향으로 이성이 지배하던 자유주의 시절을 지나면서 가치없는 것으로 신학의 변방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바로 그때 몰트만은 하나 됨에서 삼위의 위격을 찾는 서방교회 전통이 아니라, 삼위에서 하나 됨을 찾는 동방교회의 전통을 따라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주장하게 된다.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성경적 이야기를 중심으로 삼위 하나님께서 영원한 사랑 안에서 온전한 하나가 되시는 신적인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이고, 사회적 삼위일체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바로 삼위 하나님의 존재방식인 '페리코레시스'이다. 페리코레시스는 삼위 하나님께서 영원한 사랑 안에서 상호침투, 상호내주, 상호 교류하면서 온전한 하나를 이루신다는 것이다. 페리코레시스 개념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에서 발견할수 있는 것으로 '다양성과 일치,' '사랑의 관계성,' '목적지향의 연대성'의 원리이다. 둘째, 삼위 하나님의 관계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관계성,' '평등성,''개방성'이다. 셋째, 삼위일체 하나님의 프락시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페리코레시스 방식으로 성부의 창조, 성자의 구속, 성령의 영화 사역이 삼위 안에서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성부의 창조에서는 성부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성자와 성령이 함께 참여하시고, 성자의 구원에서는 성자가 주도권을 가지고 성부와 성령이 함께 참여하시고, 성령의 영화에서는 성령이 주도권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가 함께 참여하시는 원리이다. 이러한 '페리코레시스' 교육원리는 오늘날 발생되는 한국교회의 이중적 위기 해결에 대안이 될 수 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페리코레시스'기독교교육은 신학의 합리성 자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에 응용신학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실천신학이 되기 때문이다. 교육이 목적, 내용, 방법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속에서 발견되어진다. 두 번째 이유는, 포스트모던 시대와 세계화 시대에 맞는 후 인습적 자아의 모습과 새로운 교회의 모습이 정립되어야 하는데, 삼위 하나님의 관계성에서 발견되는 '페리코레시스' 원리인 '관계성,' '평등성,' '개방성'의 원리는 바로 후 인습적 자아의 모습과 이 시대 가운데 교회가 가져야할 교회의 바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유는, 교육방법에 있어 '페리코레시스'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다양성과 일치' 안에서 다양한 관점들을 통전적으로 잘 조화하여 하나 됨을 이루는 교육방법과 '목적지향적 연대'를 통해 거시적 관점에서는 총회-신학교-교회를 연계하고, 중시적 관점에서는 교회-가정-학교를 연계하고, 미시적 관점에서는 설교-성경공부-활동을 연계하는 교육을 펼치고, '사랑의 관계성'의 원리를 통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온전히 하나가 되도록 제자직과 시민직을 함께 가르쳐지고 통합되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페리코레시스'기독교교육 모델은 목회자나 교회의 프락시스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프락시스에 근거하여 기독교 프락시스를 실천함으로 하나니 나라라는 개념 안에서 기독교의 지평을 개인, 교회, 사회로 확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이러한 '페리코레시스'기독교교육 모델이 교회현장에 잘 접목되어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욱 잘 알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과 소명을 가지고, 교회가 내적으로는 기독교정체성을 굳건히 하고, 외적으로는 공적신앙과 실천을 가지고 세상과 소통하며, 선한영향력을 발휘함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한국교회가 되어 다시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여 다시 도약하는 한국교회가 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ABSTRACT Perichoresis Christian Education Model for the Korean Church: Focusing on the Double Crisis of Christian Identity and Public Faith Kim, Seong Su Major of Christian Education The Gratuate School Presbyterian University &Theological Seminary The Korean church today is in the midst of turmoil. Internally, due the weakness of Christian identity, its faith is shaken. And externally, due to the disinterest of the society from the lack of public faith and action thereafter. As the Christian identity weakens, the reason for Christian faith as 'salvation and eternal life' has changed to 'peace of mind and security,''health, material and success.' Statistically, there is a great decrease in number of adolescence coming to know Christ. Furthermore, the growth of Korean church has drastically decreased and the church school is showing rapid decline. Also, due to the lack of public faith and its action, the Korean church is unable to properly handle the public role which was handled as the mission of the church in the beginning. Moreover, the church is criticized for its ethical issues as well as the life of a believer not being consistent with one's faith, giving Christianity lowest credit in comparison to other religions such as Buddhism, and the Catholic church. Why do you suppose these issues arose? First, analyzing the issue from a theological perspective, the fragmentation from difference in theology exposed a negative Christian image. There was a great presence of cults within the Christian community, and the liberal theology unable to see the holistic view of the trinitarian God, focused on the creation of the Spirit and the pursuance of truth. On the other hand, the fundamental theology focused on the redemption and emphasis on God's transcendence; and the personal experience which the Pentecostal movement limited the personal experience of the personable presence of the Holy Spirit and the absence of the holistic theology lead to the fragmentation, causing dual crisis in the Korean church. Second, analyzing the issue from the philosophical perspective, the pluralism and the relativism in which the post modernism made a huge influence not only culturally but to the church goers making it difficult to maintain a firm Christian identity. In a pluralistic society, claiming Christianity as the true religion seemed selfish and an exclusive religion to the people in the world. Also, through the school's system of nurturing one's faith, the appearance of modern objectivism's abuse lead to subjectivism and the objectivism to be separated, and plagued the experiential Christians as knowledge driven faith seekers. Third, in analyzing from the sociological perspective, the global propagation of the western capitalist culture lead to religious secularization, and in the midst of globalization, in keeping true to the Christian identity, a wall between the society and the church was created. As combination of these issues made its way into Christian education, it made it difficult for the formation of Christian education; internally and externally. The external factors, such as globalization and post-modernism made it difficult for Christian education as it made its way into family dynamics; low birth rate, competitive education system, and the increase number of broken families. Not only that, but after the modernization everything became specialized and professionalized; the division of church, family and school not only caused noncooperation on children's faith education but a misconception that Church is the only place where children's faith education takes place. Moreover, the lack of education on public faith training with only discipleship training taking place in the church and the teaching method of the post modernism and the globalization era, the church lost its contact point creating disinterest of faith education. Moltmann criticizes the problem of philosophical and metaphysical fundamental issues of Catholic church's traditional sovereignty of monotheism, and based on the biblical narrative and following the Eastern Christianity tradition, emphasizes the social trinitarianism. Social trinitarinism is the triune God indwelling in eternal love fully becoming one, and the core principle of triune God fully becoming one is called 'perichoresis.' The principle of 'perichoresis' from the Christian Education perspective can be largely divided into three categories. First, triune God's perichoresis are based on 'unity in diversity,' 'relationship of love,' and 'purpose-oriented solidarity.' Second, in the relationship of triune God's perichoresis we can find relationship of love, mutual respect of equality, and the respected self image as one believe and follows God as an individual and as a community in the openness to the world. Third, the educational principle we can find in the triune God's perichoresis praxis are creation of the Father, redemption of the Son, glorious work of the Holy Spirit and the harmonious dialogue with the triune God, is as like fully becoming one; the principle of the Father's dialogue, the dialectical principle of the Son, the principle of the transformation of the Spirit becomes blended to form trinitarinism which result in the principle of the interdisciplinary dialogue. The 'perichoresis' Christian education can be a solution to the dual crisis the Korean church are facing today. First, information, human, and as the situation forms the educational trinitarianism, biblical centered Christian identity education, human relationship centered education, and the interpretation of scripture education, in the principle of 'perichoresis' completely fulfills one and can restore conductivity. Second, in speaking of conductivity, there is always a problem of shifting to one area. However, in the 'perichoesis' Christian education, because the 'diversity in unity' is the basic principle, the three elements are always connected, and the harmony within creates a true conductivity restoration. Finally, 'perichoresis' Christian education claims God's perichoresis praxis and because it pursues Christian education, it goes beyond the applied theology of Christian education. To go beyond the ministerial and Church's praxis, one experiencing the Christian praxis by experience God in the real world can be a education. My hope is 'perichoresis' Christian education to be a model in the church, to know more about the triune God, to take God's vision and call, establish a firm Christian identity in the church internal, communicating with the world through practice of public faith, overcoming the divided life of faith and daily lifestyle by achieving the Kingdom of God in our world so that the dual crisis which exist in the Korean church can be restored and the trust once lost can be rebuilt again within the society.

페리코레시스는 성경적인 개념인가?

전통적으로 삼위일체론에서 “삼위는 구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분리되지 않음의 근거로 페리코레시스가 제시됩니다.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는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를 뜻합니다.


역사적인 기원과 의미에 대하여서는 개혁교의학(유해무 저, p164)의 내용을 옮기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메섹 요한(670-750)은 삼위일체론에 공재(περιχώρησις :circumcessio, circumincessio)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요한복음 10:38, 14:9,11, 17:21을 근거로 이를 말한다. 물론 이 용어와는 관계없이 이 사상 자체는 이레네우스, 아타나시우스나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등 교대 교부들에게서도 발견된다. 기독론에서 Maximus the confessor(580-662)가 양성 연합에서 오는 사역의 단일성을 표현하려고 이 용어를 최초로 썼다. 신론에서는 Pseudo-cyril이 최초로 썼고, 이를 다메섹 요한이 계승했다. 이 말은 위격들의 대면적 공재와 상호 침투를 표현한다. "삼위 하나님은 상호 안에서 서로 뒤섞이지 않는 침투를 공유한다. … 성자는 성부와 성령 안에 계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계시며 성부는 성자와 성령 안에 계시나 뒤섞임이나 용해나 혼합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 공재는 본질의 단일성에 기초한다. 위격들은 동등한 본질이며 상존하고 있다. 상호 관계하며, 상호 개방적이고 상호 자기 수여적이다.”


페리코레시스와 관련하여 몇 가지 내용을 살핌으로 그 개념이 성경적인지를 살피고자 합니다.


성경적 근거의 문제
페리코레시스의 성경적 근거는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안에 있다”(요 10:38, 14:9,11, 17:21)는 표현입니다.

“안에 있다(계신다, 거한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는 상호공재를 지지하고 있는 듯하지만 잘 살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강림을 언급하시면서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요 14:20)고 말씀하셨습니다. 위의 논리를 따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각자 안에 상호공재하는 것이라고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제자들이 공재해 있고 제자들 안에 예수님이 공재해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지만 누구도 이러한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여기에서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공재하거나 침투한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6)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공재 또는 침투하는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 곧 새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새로운 피조물 곧 새 것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안에 있다”는 표현은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를 의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연합을 통한 하나됨, 한 생명을 공유하고 생명의 사귐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특히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전적인 의존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안에 있다”는 표현은 복이면서 사명의 요소를 동시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복이면서 동시에 그 복을 받은 사람 편에서 온전케 하여야 할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고 말씀합니다. 사도 요한이 그 글을 쓸 때에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은 단어나 문장에 대한 개념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과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일 때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로 하는데, 추가적인 설명이 전혀 없습니다. "품속에 있는"은 명백하게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아기 또는 유아기의 자녀가 부모 특히 엄마의 품속에 안겨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라는 것입니다. 독자들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렇게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그 말씀은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의 의미가 아니라 완전한 연합과 전적인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의 근거로 제시되는 성경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중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때의 ‘나’는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피와 살과 뼈를 가지고 계신 사람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들을 근거로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를 주장하면 피와 살과 뼈를 지니신 예수님께서 성부와 성령 안에 계신다는 것이 됩니다. 피와 살과 뼈를 지니신 한 존재가 성부와 성령 안에 계신다는 것은 넌센스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를 주장하는 신학자들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페리코레시스(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는 성경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논리의 문제

삼위의 독특성은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기원하지 않으시고 나시지도 않으며 나오시지도 않으나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라는 것입니다.


페리코레시스는 위의 설명과 분리될 수 없고 연관성을 가지고 성립되어야 합니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는데, 페리코레시스가 성립되려면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시면서 나신다는 것이든지 아니면 나시고서 성부 안에 들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시는데, 페리코레시스가 성립되려면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계시면서 나오신다고 하든지 아니면 나오시고서 성부와 성자 안에 들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성부는 성자를 낳으시고 성자 안에 들어가시든지 아니면 성부 자신을 성자 안에 두시고서 성자를 낳으신다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나오시면서 성부와 성자가 성령 안에 계시다고 하든지 나오신 성령 안으로 들어가신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성경적인 근거도 없고 수긍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경륜적인 관점에서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성자는 역사적인 한 시점에서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성자가 인성을 가지지 않으셨고 육신을 입으심으로 인성을 덧입으셨습니다. 페리코레시스를 따르면 성자가 육신을 입으신 이후에 성부와 성령 안에 공재하신 성자는 어떻게 된다는 것일까요? 성부와 성령 안에 공재하신 성자가 인성을 입은 신인이 되셨다는 것일까요?  이는 성부와 성령 안에 공재하신 성자가 성육신한 것은 아니기에 성립되지 않는 말입니다. 아니면 성부와 성령 안에 공재하신 성자는 성육신하지 않으셨기에 신성만을 지니시고 계신다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땅에 계신 예수님과 성부와 성령 안에 공재하신 성자는 다른 존재가 됩니다.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그에 대하여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취급하지 않는 사안이라는 것입니다. 언급해야 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언급할 사안 성경의 원리를 통하여 풀 수 없는 문제를 야기하는 페리코레시스는 성경적인 사안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협의의 현장과 관련한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삼위가 협의하시는 분이심을 알려줍니다(창 1:26). 그러한 협의의 현장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협의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성부 안에는 성자와 성령이 계시고 성자 안에는 성부와 성령이 계시며 성령 안에는 성부와 성자가 계십니다. 위격의 관점에서 보면 공재하지 않은 방식으로 계신 성부 한 분과 공재하시는 방식으로 계신 성부가 두 분이십니다. 성자와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위격의 관점에서는 총 아홉 분이 계시는 것이 됩니다. 전혀 성경적이지 않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분에 대한 성경적 이해

성경에서는 두 개체가 하나 되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부부로서 한몸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몸이란 육체적 결합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몸이란 단어가 전인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다르게는 한 영, 한 인격이라고 사용할 수도 있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몸(육)이란 육체성을 강조하는 전인을 가리킵니다. 영이란 성령님의 좌소를 강조하는 전인을 가리키고 혼이란 인격성(지정의)을 강조하는 전인을 가리킵니다. 부부에게는 성적관계를 통한 육체적 결합이 있기에 몸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각각의 인격체이지만 성경은 한 몸(분)이라고 말씀합니다. 각 개체가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한 것이 아니지만 한 몸(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 2:24)에서 둘(남자와 여자)은 구분을, 한 몸은 분리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은 전혀 하자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확증되어집니다. 예수님은 결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둘이 아니라 한 몸이기에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마 19:6)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누지 못한다는 것은 이혼하지 못한다는 것으로서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복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복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고 사명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음행한 연고 외에는 이혼할 수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 5:32)은 음행에 의해서는 이혼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는 복을 얻었다면 혼외정사인 음행으로 인해 분리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음행으로 인해 주어진 복을 저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사명을 따라 생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복과 사명의 온전한 결합을 추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의 모든 삶과 관련한 성경적 원리입니다.]

구분되는 두 개체에 대하여 한 분되는 것에 대한 성경에서의 표현 양식입니다. 숫자적인 1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연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경이 삼위이시면 한분이신 하나님을 말씀하실 때에 한분이 숫자적인 1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성경적인 근거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페리코레시스를 말한다고 하더라도 숫자적인 1이 되지 않는 것은 자명합니다. 성자와 성령이 페리코레시스하신 성부, 성부와 성령이 페리코레시스하신 성자, 성부와 성자가 페리코레시스하신 성령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한분이란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이 완전하게 연합하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을 가리키는 성경적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삼위일체에 대한 정의와 같이 “그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에 있어서 동일하시다”는 것입니다. 첨가하자면 그 뜻과 말씀과 행하심에 있어서 조금의 분리도 없으시기에 삼위이시지만 한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성경적 증거

바울 사도는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고후 5:6)라고 말씀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주와 따로 거한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하늘 보좌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늘 보좌 곧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계십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한다는 성경의 증거들과 모순되는 표현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주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그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와 동일하시고 그 뜻과 말씀과 행하심에 있어서 완전히 일치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내주하심으로 성경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성령님만 내주하시기에 주님이 이 땅에 거하는 우리와 따로 거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상호공재를 통한 분리되지 않음이 성경의 가르침이라면 결코 쓰일 수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이 성령님만이라고 하더라도 상호공재로 인하여 주님도 거하시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론

교의는 사고(논리)가 아니라 성경 본문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합니다. 한쪽으로 편향된 이해가 아니라 전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에 근거하여 형성되어야 합니다. 페리코레시스는 “안에 있다”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를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주장되었고 전 성경적인 이해와도 동떨어진 것입니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적인 요소는 '페리코레시스(순환)'를 강조하는 측면과 '필리오케(그리고 아들로부터)를 반대'하는 측면에서 잘 나타난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핵심교리이다. 삼위일체론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유대교, 회교와 구별되고, 고대 헬라 종교처럼 여러 신들을 섬기는 다신론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그런데 셋이면서 하나이며,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이 삼위일체론의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대체로 부정적인 용어로, 일반적인 상식과 경험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애매한 용어로 설명된다.

 삼위일체론을 설명할 때 자칫 잘못하면 군주신론(君主神論, 사벨리안주의)이나 양태론 혹은 단일신론으로 빠져버린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대체로 양태론적 경향을 띄고 있었다. '하나의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로 삼위일체론을 묘사한 아타나시우스 신조(420~∼450년)이래로 아퀴나스, 20세기에는 칼 바르트와 칼 라너라는 신구교의 신학의 거장들이 양태론적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성경적 삼위일체론과는 다른 오류에 빠져있었다.

 '삼위' 보다는 '일체'를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러한 모든 오류의 배후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어야 한다는 성경의 계시와는 관계없는 철학적인 대전제가 깔려 있었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일체' 보다는 '삼위'를 좀 더 강조하는 인상을 주는데, 사실은 모두를 균형있게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페리코레시스 개념을 통해서이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8세기 다마스커스(Damascus)의 요한이 사용한 이후 동서교회 양쪽에 걸쳐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었다(De Fide Orthodoxa).

 이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마치 우리 몸의 피가 각 기관을 순환하듯이,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여호와 하나님, 예수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각각 독립된 인격의 신들이지만 하나가 되는 것은 이 영원한 신적인 삶의 순환(페리코레시스) 때문이다. '신적인 삶의 순환'이란 '신적인 사랑의 순환' 혹은 '신적인 사랑의 뜨거운 피의 교환'같은 것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한 몸 속에 심장, 간, 폐가 각각 다른 기관이지만 뜨거운 피의 순환으로 서로 의존되어 있고, 하나의 삶을 이루듯이 삼위일체가 그와 같다는 것이다.

 이 용어는 사도 요한이 설명하고 있는 성부가 성자 안에 침투해서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침투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에 대한 성서적 표현(요 14:10∼11, 요 17:20∼23)에 상응하는 용어이다.

 이러한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이 다시 크게 빛을 보게 된 것은 몰트만 덕분이다(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는 페리코레시스 개념에 기초한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이 성경적으로 부합한다는 사실을 확언하고 과거 일신론적 경향을 깔고 있는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한편 성경적 삼위일체론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실천적 의미를 설파하였다.

즉 독재적이고 군주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라 삼위이면서 일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적 코이노니아 개념을 이해하고 배워서 그것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남 정 우前러시아선교사 / 서울여대교회 목사 <13〉 삼위일체론① '페리코레시스'

 '三位'와 '一體' 균형있게 강조

 "한 몸 속에 심장과 간, 폐 등이 각각 다른 기관이지만 뜨거운 피의 순환으로 서로 의존되어 있듯이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

 <사진설명〉 15세기 러시아 이콘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 작품. 창세기 18장에 아브라함을 찾아온 세 천사의 이야기를 근거로 삽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그렸다고 하여 구약의 삼위일체라고 부른다. (http://www.orthodox.or.kr/)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적인 요소는 '페리코레시스(순환)'를 강조하는 측면과 '필리오케(그리고 아들로부터)를 반대'하는 측면에서 잘 나타난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핵심교리이다. 삼위일체론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유대교, 회교와 구별되고, 고대 헬라 종교처럼 여러 신들을 섬기는 다신론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기독교 핵심 교리

 그런데 셋이면서 하나이며,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이 삼위일체론의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대체로 부정적인 용어로, 일반적인 상식과 경험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애매한 용어로 설명된다. 삼위일체론을 설명할 때 자칫 잘못하면 군주신론(君主神論, 사벨리안주의)이나 양태론 혹은 단일신론으로 빠져버린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대체로 양태론적 경향을 띄고 있었다. '하나의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로 삼위일체론을 묘사한 아타나시우스 신조(420~∼450년)이래로 아퀴나스, 20세기에는 칼 바르트와 칼 라너라는 신구교의 신학의 거장들이 양태론적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성경적 삼위일체론과는 다른 오류에 빠져있었다. '삼위' 보다는 '일체'를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러한 모든 오류의 배후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어야 한다는 성경의 계시와는 관계없는 철학적인 대전제가 깔려 있었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일체' 보다는 '삼위'를 좀 더 강조하는 인상을 주는데, 사실은 모두를 균형있게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페리코레시스 개념을 통해서이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8세기 다마스커스(Damascus)의 요한이 사용한 이후 동서교회 양쪽에 걸쳐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었다(De Fide Orthodoxa).

 이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마치 우리 몸의 피가 각 기관을 순환하듯이,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여호와 하나님, 예수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각각 독립된 인격의 신들이지만 하나가 되는 것은 이 영원한 신적인 삶의 순환(페리코레시스) 때문이다. '신적인 삶의 순환'이란 '신적인 사랑의 순환' 혹은 '신적인 사랑의 뜨거운 피의 교환'같은 것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한 몸 속에 심장, 간, 폐가 각각 다른 기관이지만 뜨거운 피의 순환으로 서로 의존되어 있고, 하나의 삶을 이루듯이 삼위일체가 그와 같다는 것이다.

 이 용어는 사도 요한이 설명하고 있는 성부가 성자 안에 침투해서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침투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에 대한 성서적 표현(요 14:10∼11, 요 17:20∼23)에 상응하는 용어이다.

 몰트만 "성경에 부합"

 이러한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이 다시 크게 빛을 보게 된 것은 몰트만 덕분이다(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는 페리코레시스 개념에 기초한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이 성경적으로 부합한다는 사실을 확언하고 과거 일신론적 경향을 깔고 있는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한편 성경적 삼위일체론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실천적 의미를 설파하였다.

 즉 독재적이고 군주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라 삼위이면서 일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적 코이노니아 개념을 이해하고 배워서 그것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남 정 우/ 前러시아선교사, 서울여대교회 목사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성적 의미


이정순 교수(목원대 신학과)


기독교 절기력으로 성령감림절이 지나면 바로 삼위일체주일을 지킨다. 물론 교회력을 중요시하지 않는 교회에서는 삼위일체 주일이 있는지 조차 모른다. 올해는 6월 16일이 바로 삼위일체주일이다. 삼위일체주일이 교회력에 들어 있는 것을 보면 삼위일체가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가 있다. 특히 삼위일체는 예배의 중요 전통으로 오랫 동안 내려오고 있다. 좋든 싫든 기독교인이라면 예배를 드릴 때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교백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도 없을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과 신앙인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많은 의문이 든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충분한 신학교육의 부재 때문이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역사적, 신학적 교육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어떤 목회자와 나눈 대회가 생각난다. 그는 삼위일체에 대해 신학교에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왜 삼위일체를 믿고 있는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삼위일체를 한 마디로 설명해 보라고 요구했다. 나는 최근의 해석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설명했는데, 그는 납득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5분에 걸친 설명으로 삼위일체가 다 설명될 수 있을까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이게 바로 우리 현실이다. 왜 우리는 유대교처럼 야훼나 엘로힘으로 계시된 한 분 하나님만을 믿지 않고,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일까?

현대신학자 폴 틸리히 교수가 하버드에서 강의할 때 어떤 학생이 왜 우리는 유니테리안(Unitarian, 단일신론자)이 아니고 삼위일체(Trinitarian)를 믿는 자들인가 하고 질문한 적이 있다. 이 물음에 틸리히는 유니테리안이나 유대교의 유일신론보다는 삼위일체가 더 역동적인 하나님을 보여준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즉 유니테리안이나 유대교의 유일신론은 하나님의 역사를 한 측면에서 보여주지만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역사를 여러 측면에서 보여주는 보다 역동적인 교리라는 말이다. 적어도 삼위일체에서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측면에서 역사하신다는 말이다. 매우 적절한 설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런 개략적인 설명으로는 삼위일체가 정확히 이해되지 않는다. 위에서 하나님의 역사의 역동성, 즉 세 가지 차원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너무 강조하게 되면 하나님이 세 가지 양태(mode)로 나타나셨다는 이른바 양태론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목회자들이 설교 시간에 가장 많이 삼위일체의 예로 들곤 하는 ‘아버지, 남편, 아들’, 또는 ‘기체, 액체, 고체’의 세 가지 형태라는 비유는 ‘양태론’의 오류를 그대로 드러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이나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를 초월해 계신 절대자요, 초월자이시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다. 또한 하나님이 성부시대와 성자시대에 역사하셨고 지금은 성령시대이므로 성령으로 역사하고 계시다는 주장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하나님이 마치 3분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삼신론(three Gods)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지 세 분 하나님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양태론과 삼신론은 목회자들이 가장 쉽게 빠지게 되는 삼위일체의 오해 또는 왜곡이다.


▶삼위일체의 예로 들곤 하는 ‘아버지, 남편, 아들’, 또는 ‘기체, 액체, 고체’는 '양태론'의 오류다


또 다른 오류를 지적하자면, 삼위일체 신앙이 정확히 성서에 근거해 있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혹자들은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는 구절부터 성령의 역사라고 해석하곤 한다. 또한 복음서와 서신서의 많은 구절들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되고(381) 신양성서 정경이 완성된 때(397)를 고려해보면 맞지 않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서에는 ‘하나님에 관한 삼중적인 형식’이 이곳 저곳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삼위일체라고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성서에는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후 성령의 체험으로 형성된 초대 교회에서는 하나님에 관한 삼중적인 형식이 예배에서 먼저 사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헬라 철학을 공부한 바울이 헬레니즘 세계 문명권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이제 기독교는 헬라철학의 도움을 받아 복잡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구약성서 시대나 역사적 예수 시대와는 매우 다른 양상이 전개된 것이다. 기독교가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로마의 종교로 인정된 후에 바로 콘스탄틴 황제는 325년에 니케야공의회를 열어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삼위일체 교리의 확립을 명령했다. 이때까지 곳곳에서 형성되기 시작했던 삼위일체의 교리가 이제 보편교회가 인정하고 사용할 수 있는 교리로 확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는 신학자들이나 초대 교부들이 함께 모여 충분한 토론을 걸쳐 형성된 교리가 아니라 콘스탄틴 황제의 통치를 위한 목적으로 삼위일체가 아타나시우스파 한쪽의 입장을 토대로 기본 교리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니케야 공의회에서는 삼위일체 교리의 토대가 형성되었을 뿐 완성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론에 관한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우여곡절을 통해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거쳐 그리스도론의 문제가 해결되었고, 이후에도 두 번에 걸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 683)에서도 삼위일체에 관한 문제들이 논의되었고, 정통으로 간주한 삼위일체 논리에 벗어난 이론들을 정죄했다. 또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된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나 신약성서가 정경으로 확립된 카르타고 공의회(397)를 생각해 보면 거의 400여 년간 기독교는 지금과 같은 삼위일체 교리도 없었고, 정경으로 간주된 성서도 없었다는 말이 된다. 물론 그래도 그 시대 기독교인들은 훌륭한 신앙을 대대로 전할 수 있었고 마침내 로마의 종교로까지 자신들의 종교를 승격시키기까지 했다. 교리를 절대화하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사뭇 궁금하다.


▶성서에서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삼위일체라고 언급한 구절은 어디인가?


어쨌든 삼위일체는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기독교 전통이 되었다. 삼위일체가 바울의 헬라화된 기독교의 부산물이라는 비판을 듣는다 하더라도, 삼위일체는 기독교 예배 안에 뿌리 내린 확고한 기독교 전통인 것이다. 이제 문제는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믿는가 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에서 미사 때 자주 쓰는 “이것은 신앙의 신비입니다”라는 말로 삼위일체를 얼버무려버릴 수만은 없다. 물론 삼위일체가 신앙의 신비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이성까지 다 포기해 버리고 설명 내지는 이해하려는 시도까지도 무시해 버릴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필자는 현대 삼위일체의 해석 중 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와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이 제시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 또는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이 매우 타당하며 의미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보프나 몰트만은 초대교회에서 사용되었던 헬라어 ‘단어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한다. 페리코레시스란 ‘상호순환’, ‘상호침투’, ‘상호내재’ 등으로 번역된다. 보프나 몰트만은 페리코레시스를 사용하여 한 위격에 두 위격들이 상호침투되어 있음을 표현하고자 한다. 이 용어가 언제부터 삼위일체에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헬라어 페리코레시스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다른 위격 안에 포함되고 내주하며 존재하는 어떤 상황이나 상태를 의미한다. 이 경우 페리코레시시는 상호순환의 뜻을 지닌다. 이 뜻을 삼위일체에 적용하면, 한 위격이 다른 두 위격들 안에 존재하고, 다른 두 위격들을 둘러싸며, 다른 두 위격들과 똑 같은 영역을 차지하고 다른 두 위격들을 채운다는 의미이다. 둘째, 페리코레시스는 활동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한 위격이 다른 두 위격들과 더불어, 동시에 다른 위격들 속으로 상호침투하거나 상호 얽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페리코레시스는 하나님의 세 위격들에 독특하게 적용되며, 세 위격의 살아 있고 영원한 관계를 적절하게 표현한다. 즉 하나님의 위격은 셋이지만 서로 동등한 상호 침투 내지 상호교류를 통해 하나라는 전체성을 늘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1+1=3이 아니라 1+1+1=1이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페리코레시스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적용해서 설명할 수도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신 적이 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요17:21). 인간 예수와 하나님이 하나라는 말인데,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은 아들의 인격 안에 공존하며 일치된다. 두 본성이 인격 안에서 너무도 깊이 하나가 되기 때문에 한 본성의 속성들은 다른 본성의 속성들과 상호 교환된다. 두 본성은 용해되거나 혼돈됨 없이 서로에게 상호 침투한다는 것이다. 즉 신성은 인성을 입고 신성과 인성 각각은 동일한 하나님의 본체의 전체성을 가짐으로써 진정한 페리코레시스를 완성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속성의 교류라고 부른다. 둘 같지만 속성의 교류를 통해 하나라는 전체성을 견지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미를 전통적으로 인격, 관계성, 신성, 발현 등으로 설명하는데, 이런 방식은 페리코레시스 모델에서 모두 설명가능하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세 위격의 연합과 상호침투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삼위의 일치는 상호침투와 연합의 일치인 것이다. 상호침투와 연합을 통한 한분 하나님이 되심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적 삼위일체론’ 또는 ‘공동체적 삼위일체론’


페리코레시스 모델은 삼위일체의 중요한 의미를 드러낸다. 즉 삼위일체는 피조세계를 포함해서 세 위격의 존재를 넘어 열려진 연합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라는 서로 동등한 위격들의 상호침투와 교류를 통한 일치는 그를 믿는 인간과 피조세계 역시 동등한 관계에 기초한 공동체 내지 사회를 우리에게 계시한다. 먼저, 그를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이룬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그런 모습을 띤 진정한 공동체, 어떤 위계질서나 차별이 없는 동등한 구조의 공동체를 구현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다. 더 나아가, 인간 사회 전체가 삼위일체로부터 영감을 받아 친교, 기회의 균등, 개인과 단체가 동등하게 중요시되는 사회를 형성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다. 역으로 말한다면, 모든 면에서 이루어지는 참여와 연합에 기초해 사회구조가 이루어진 자매와 형제의 사회만이 삼위일체의 형상과 모양을 가진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이런 사회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지배와 억압이 없이 전체적으로 하나를 이루는 기독교 공동체, 계급 지배와 독재의 억압이 없이 전체적으로 통일된 하나를 이루는 인간공동체만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존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삼위일체의 형상과 모양을 가진 사회는 인간의 권력이나 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로 특징되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야말로 교회와 사회를 위한 영감의 원천이다. 삼위일체야말로 기독교가 어떻게 존재해야하며, 또한 기독교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제시해 주는 지침이다. 삼위일체야말로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영성의 근거이다. 삼위일체를 고백하는 자들이라면 세 위격이 동등하게 서로 교류하며 침투함으로 일치를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며, 그런 신앙을 생활 속에서 구현해내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성적 의미이다.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17:11).


출처 : 익투스타임즈(http://www.xtimes.kr)




필리버스터(filibuster) “무제한 토론(無制限 討論)” “합법적 의사 진행 방해(合法的 議事 進行 妨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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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filibuster) 

“무제한 토론(無制限 討論)” 
또는 “합법적 의사 진행 방해(合法的 議事 進行 妨害)”
의회 운영 절차의 한 형태로서, 입법부나 여타 입법 기관에서 구성원 한 사람이 어떤 안건에 대하여 장시간 발언하여 토론을 포기하고 진행되는 표결을 지연하거나 완전히 막고자 하는 행위이다.

‘필리버스터’라는 말은 1851년에 처음으로 쓰였다.
이 낱말은 스페인어 ‘필리부스테로(filibustero)’에서 나온 말로, “해적” 또는 “도적”, “해적선”, “약탈자”를 뜻하는 말이다.
또 이 낱말은 원래 프랑스어 ‘플리뷔스티에르(flibustier)’에서, 또 네델란드어 ‘브리부이터(vribuiter, 도적)’에서 유래한 말이다.
당시 “필리버스터”란 표현은 미국에서 보통 미국 중앙 정부를 전복하고자 하던 남부 주의 모험가들을 이르는 말이었으나, 토론을 전횡하는 방식이 이와 같다고 여겨져 의사 진행 방해자를 이르는 말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국회법 제 106조의 2에 의거하여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이 서명한 요구서를 의장에게 제출한다면 가능한 합법적 행위이다. 
2016년 2월 23일 정의화 국회의장이 테러방지법을 대한민국 제340회 국회(임시회) 본회의에 직권상정하자, 야당은 표결을 막고자 52년 만에 테러방지법 반대 피리버스러를 시작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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