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다. 아가패 로고스


 왜 헬라어로 신약성경을 기록하였는가?

1. 신약 성경이 기록되었던 A.D. 1세기경의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히브리어, 아람어, 라틴어, 헬라어 등 4개 언어가 주로 통용되고 있었다.하지만 신약성경은 극히 일부분(마27:46, 막5:41, 7:34, 14:36)을 제외하고는 모두 헬라어로 기록되었다(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달리다굼, 에바다, 아바 등).

[개역]요 19:19-20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아람어)와 로마(라틴어)와 헬라 말(헬라어)로 기록되었더라.

2. 신약 성경 저자들의 대부분은 일상생활에서는 헬라어보다는 바벨론 포수 이후 점차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된 아람어를 사용하였다.따라서 예수와 그 제자들의 일상적인 대화나 설교 시에는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헬라인 방문객 몇 사람이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와서 예수를 만났을 때(요12:20-36), 유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할 때(마27:11-14) 통역자가 있었다는 말이나 말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이때는 예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모인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그들이 모두가 동시에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인 헬라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성경 저자들이 대부분 어부 출신의 유대인으로서 비록 헬라어를 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 아닌 글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모국어가 더 익숙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헬라어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3. 왜 라틴어가 아닌 헬라어인가? 헬라어와 라틴어는 문법 구조 등이 비슷하다.

1) 헬라어가 널리 퍼져있었다.

 헬라어를 사용하는 수많은 민족들에게 더 쉽게 전파하기 위한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로마가 정복했기 때문에 라틴어도 널리 퍼져 있다.

2) 헬라의 문화와 언어에 대한 경외감 때문에 로마에서도 헬라어를 많이 사용하였다.

소피스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철학자들.

유럽문화의 2대 조류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다. 라틴어보다 표현이 풍부하다.

이러한 헬라어를 통해 성경을 표현하면 다른 언어로 표현하는 것보다 친근함이 있고 이해의 면에서도 좋다.

​3) 추상적, 논리적 언어로서의 코이네 헬라어

코이네 헬라어는 고대의 아틱 헬라어에 비해 구문과 어휘가 훨씬 간결하고 문어적이기 보 다는 구어적이지만 히브리어에 비해서 매우 복잡한 편이며 보다 추상적인 개념들을 섬세 하게 묘사하는데 용이하다.

히브리어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 나타난 현상 그대로를 표현 하는데 용이한 것이라면 헬라어는 논리적이고 섬세하여서 사고와 감정 그리고 추상적 개념들을 정확하게 묘사, 전달하는 데 용이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헬라어는 어떤 언어인가?

성경에 사용된 헬라어는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도 살아있는 헬라어 중에서도 알렉산더 대제(B.C.356-323)가 세운 소위 헬레니즘 문화권 전역에서 당시 서민들이 주로 사용하던 구어체 헬라어인 코이네 헬라어였다.

1. 헬라어의 명칭

헬라어는 우리가 흔히 ‘헬라’라고 부르는 나라, 즉 아시아 중서부에 살고 있던 아리안 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발칸 반도 남부의 헬라스라고 불리우는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발칸 반도와 이를 둘러싸고 있는 소아시아의 해안 지방에 정착하여 세운 여러 도시국가에서 사용된 언어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 지역에 정착한 그들은 그들이 세운 나라를 ‘헬라 나라’라고 불렀고 자신들을 가리켜 ‘헬라인’이라 칭했는데 헬라어라는 명칭도 바로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이들이 정착한 헬라 지역은 가파른 산맥들과 복잡한 해안선 그리고 그 주변에 위치해 있는 크고 작은 많은 섬들로 말미암아 초기부터 서로 독립된 여러 개의 도시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지정학적인 조건은 후에 그들 사이에 여러 개의 방언을 탄생시켰다.

따라서 헬라어는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개의 방언을 갖게 되었다.

2. 헬라어의 언어학적 위치

헬라어는 크게 인도 유럽 어족에 속한다. 인도 유럽어족이란 지역적으로 볼 때 유럽, 인도, 중앙아시아, 소아시아인들이 사용하는 방언들을 말한다.

3. 헬라어의 역사

1) 고전 헬라어

헬라어의 여러 방언들 중에서 코이네 헬라어의 직접적인 기원이 된 고대의 헬라어는 아틱(the Attic) 방언이었다. 이는 유명한 도시 아테네가 속해 있던 아티카(the Attica) 사람들의 방언이었다.

고대 헬라어는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틱 헬라어의 문법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그 이유는 아티카 지방이 남달리 크다거나 국력이 강성했기 때문이 아니라 헬라 전 지역에서 찬란한 명성을 펼쳤던 아티카 문명의 업적 때문이었다.

아티카 문명의 꽃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과 호모와 같은 위대한 문인들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2) 코이네 헬라어

B.C. 4세기경부터 헬라 문화권의 강력한 맹주였던 마게도냐의 빌립 2세와 그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활동으로 헬레니즘 문화권이 확장되어 헬라어도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틴 심지어는 이집트의 내륙 지방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이후 로마가 헬라 지역을 정복한 후에도 로마인들은 헬라인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경외감과 상업적인 목적에 사용될 세계적 공용어의 필요성 때문에 로마 제국 내에서도 라틴어보다 표현이 풍부한 헬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아틱 헬라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본래의 복잡하고 고급화된 문인들의 표현 양식을 잃어버리고 점차 많은 사람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평이한 언어로 서서히 변화했다.

B.C.1세기에는 고전 헬라어의 기초 위에 세계 공용어로서 필요한 요소들을 가미한 고정된 틀을 갖추어 모든 사람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써 마침내 세계적인 공용어가 되었다.

바로 이 시기 곧 B.C 1세기에서 A.D. 4세기 초까지의 헬라어를 가리켜 코이네 헬라어라고 부른다. ‘코이네’라는 말은 ‘공용어’,’일반어’라는 뜻이다.

A.D. 1세기경 70인경이 바로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3) 비잔틴 시대 헬라어

A.D.330년에서 1453년까지를 비잔틴 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는 로마가 동서로 분리되고(A.D. 395년) 다시 서로마가 게르만족의 침공을 받아 멸망한 후(476년) 거의 천년동안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비잔틴제국 곧 동로마 제국만이 존립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코이네 헬라어도 자연스럽게 세계 공용어로서의 위치를 잃고 동로마 교회 진영에서만 사용하게 되었다.

4) 현대 헬라어

A.D.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코이네 헬라어는 그 구심점을 상실하고 헬라 지역의 각 지방 방언들로 분파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현대 헬라어는 대부분 코이네 헬라어를 그 모체로 하고 있긴 하나 방언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되었다.

[3] 코이네 헬라어의 특징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에 의해 고전 헬라어를 기초로 형성되기 시작한 코이네 헬라어는 그 완전한 틀이 갖추어지기까지 여러 지역에서 장시간의 점진적인 변화를 겪어서 형성된 것이다.

코이네 헬라어는 크게 문어체 코이네와 구어체 코이네로 구분된다.

문어체 코이네 헬라어는 비교적 아틱 헬라어의 표현 양식을 보존하고 있는 코이네 헬라어로서 요세푸스의 저서 등이 있다.

구어체 헬라어는 흔히 서민들이 사용하던 통속적인 헬라어로서 이집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단편들과 신약 성경 등이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 중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 히브리서는 뚜렷하게 문어체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고전 헬라어, 즉 아틱 헬라어에 비해 코이네 헬라어는 어휘 및 구문법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1. 어휘, 어형적 특징

1) 라틴어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낱말이 만들어졌다.

알렉산더 사후 로마 제국이 등장함에 따라 헬라어가 통용되던 지역에 라틴어도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2) 어휘에 있어 단순화와 획일화의 경향이 뚜렷이 나타났다.

그 예로 고전 헬라어에서는 ‘좋은’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헬라어 ‘칼로스’와 ‘아가도스’라는 말이 같이 사용되었으나 A.D. 1세기에는 ‘칼로스’만이 주로 사용되었다.

3) 전치사를 접두어로 하는 복합어가 많이 생겨났다.

4) 단어의 축소형이 많아졌다.

단어의 격변화가 단순화됐으며 불규칙 변화가 많이 없어지고 비교급, 최상급의 용례가 축소되고 원급에 수식어를 붙여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5) 접두 모음이 많이 사라졌다.

2. 구문법적 특징

1) 문장의 단순화 현상. 고전 헬라어에서는 분사나 접속사 등을 이용한 복잡한 문장이 많았으나 코이네 헬라어가 완성된 시기에 이르러서는 주로 단순 접속사 ‘카이’나 ‘데’ 를 사용한 짧은 문장이 많아졌다.

2) 고대 언어의 공통된 특징 가운데 하나인 희구법이나 간접 화법이 사라지고 그 기능을 가정법이나 직접 화법이 대신하게 되었다.

3) 한 문장 안에서 주어, 동사, 서술어는 성, 수, 격이 일치해야 한다는 법칙이 많이 깨졌다.

4) 새로운 표현의 문장이나 관용구가 많이 생겨났다.

5) 문장에서 전치사의 사용이 많아졌으며 생생한 사실적 표현을 위해 미래형 동사 대신에 현재형 동사가 많이 사용되고 중간태 동사는 많이 사라졌다.

종합적인 면에서 볼 때 한 마디로 헬라어의 단순화에 있다.

[4] 신약성경 코이네 헬라어의 특징

신약 성경이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어왔다.

거룩한 성경이 통속적인 언어로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고전 헬라어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의 파피루스 문서들을 통해 당시 상업 및 공문서 등에서 서민들이 쉽게 사용하던 공용어인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누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본래 주로 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다.

그들에 의해 기록된 성경의 코이네 헬라어는 일반 코이네 헬라어와는 다른 몇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1. 70인역의 영향으로 인한 특징들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됨에 따라 많은 헬라어 단어들이 그 본래의 의미에다 그에 상응하는 히브리 개념을 수용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독사’라는 헬라어는 처음에는 ‘외관’ 또는 ‘의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이 히브리어 ‘카보드’의 영향을 받아 70인역에서는 ‘빛남’, ‘영광’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또한 70인역을 번역한 사람들은 가능한 히브리식의 ‘신인동형동설론’적 표현을 헬라어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맞게 추상적 표현으로 바꾸어서 나타냈다.

대표적인 예로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형상’ 또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만군의 여호와’는 ‘전능하신 주’ 라는 표현으로 대치시켰다. ​

따라서 70인역에는 원래 헬라어에서는 일상적인 것이 아니었던 이러한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게 되는데 70인역을 참고했던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이러한 표현들을 그대로 수용했다(고전2:5, 고후 6:7, 딤전1:8, 히1:3, 계11:17, 3:21, 21:22 등)

2. 셈어적 표현의 영향으로 인한 특징들

1) 아람어나 히브리어의 음역 단어의 사용.

성경 저자들이 아람어니 히브리어에 더 익숙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아람어나 히브리어의 독특한 낱말들을 대신할 헬라어가 없을 경우 그 단어를 그대로 음역해서 표기했다. ‘달리다굼, 에바다, 아바, 랍비, 엘리’ 같은 단어들이 아람어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고, ‘아멘, 할렐루야, 고르반' 같은 낱말은 히브리어를 음역한 단어들이다.

2) 동어 반복적 표현.

코이네 헬라어의 특징은 단순, 간결성에 있다.

그러나 아람어나 히브리어 같은 셈어족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반복적 표현이 자주 나타난다. ‘진실로 진실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증거하여 가라사대’ 등.

3) 병렬식 문장 구조에 따른 표현

병렬식 문장구조란 흔히 종속절 보다는 ‘카이’같은 단순 접속사를 이용하여 서로 종속되지 않는 등의의 문장들을 병렬 하여 만든 문장인데 이것은 형용사적 표현이 빈약한 히브리어의 문장 구조에 잘 쓰이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 양식들은 신약 성경, 특히 사복음서에 자주 나타난다. 이것은 헬라어가 유대식으로 표현된 대표적 경우이다.

[개역]마 22:25-27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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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에 대한 성경적 교리는 무엇인가?

영적인 의미에서의 깨달음이란 어떤 영역에 대해 이해의 “불을 밝힌다”는 것입니다.
신성한 깨우침이 새로운 지식이나 미래의 일을 다룰 때, 우리는 그것을 “예언”이라고 부릅니다.
깨우침이 이미 주어진 지식을 이해하고 적용하도록 도울 때, 우리는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어떻게 깨우치실까요?”

깨우침의 가장 근본적인 단계는 죄에 대해 아는 것입니다.

이 앎이 없으면 다른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집니다.
시편 18:28은,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은 장을 가진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노래입니다. 130절에서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기초적인 방법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에 들어오면, 그 말씀은 빛이 되고 아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11은,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98, 99절은,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기적으로 연구하면 인생의 문제에 대한 방향과 이해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첫 번째 방법이자 우리 모두를 위한 출발점입니다. 시편 119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방법의 또 다른 유형을 볼 수 있습니다. 18절에서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이 “놀라운 것”은 새로운 계시가 아니고, 오래 전에 기록된 것인데 이제서야 독자들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유사하게, 73절에서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라고 말씀합니다. 이 간구는 하나님의 계명을 개인적으로 이해하여 적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 시편에서 저자는 열다섯 번이나 하나님께 당신의 계명을 가르쳐주시고 알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깨달음과 관련하여 가끔 모순을 불러 일으키는 한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다락방에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특별한 사람들은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할 책임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3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 했으며,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들을 세상에 전파하려면, 정확하게 기억하기 위해 하나님의 특별한 도움을 받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제자들이 들었던 것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해줄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다른 이들에게 그 내용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사도들이 복음을 기록함에 있어 신성한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지만, 성령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같은 일을 하신다고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믿는 자들에게 하시는 깨달음의 사역은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1:17-18은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지혜와 계시를 우리에게 주실 것이며, 이해의 눈을 열어주셔서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알 수 있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2:10-13에서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일을 가르치시는 성령을 통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밝히십니다. 이 문맥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드러난 것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언제나 우리가 따라야 할 것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6:12-15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은 아버지와 그 아들이 이미 하신 말씀을 그저 되새기게 하십니다. 이러한 되새김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완전하게 듣도록 도와줍니다. 때때로 우리는 여러 번 듣고 나서야 제대로 “듣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때가 바로 그 순간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논의에서 때때로 간과되는 한 가지는 그것의 목적입니다. 어떤 주장을 들어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학문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의 목적 전부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말씀은 의미를 지녔고, 우리는 그러한 말씀의 세부사항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지만, 사실에 대한 아무 적용 없는 학문적인 이해는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시편 119로 돌아가서, 우리는 깨달음에 관한 구절에 목적을 나타내는 진술들이 연결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27절),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34절),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 (144절)가 그러한 구절들입니다. 깨달음은 항상 행동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도우실까요? 그래야 우리가 말씀의 빛 속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1:6은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우리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어둠의 길을 걷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우리를 깨우쳐 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이 말씀의 지식을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실제로 그렇게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로마서 8:14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우리 삶 속에서 행하시는 깨달음의 사역은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증해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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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닫다



νοέω 3539 [nŏiĕō]

  • 1. 지각하다, 이해하다, 깨닫다, 통찰하다, 마16:9, 막8:17, 요12:40, 롬1:20.
  • 2. 생각하다, 주의하다, 마24:15, 막13:14, 딤후2:7.
  • 3. 상상하다, 엡3:20.


θεωρέω 2334 [thĕōrĕō]
  • 1. 깨닫다, 감지하다, 관찰하다, 발견하다, 요4:19, 12:19, 행4:13, 28:6, 히7:4등.
  • 2. 구경하다, 보다, 관찰하다, 인지하다, 마27:55, 막15:40, 눅14:29, 23:35, 요6:40, 계11:11,12, 바라보다, 마28:1, 주목하다, 막3:11, 5:38.
  • 3. [마음이나 영으로 깨닫는 것]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ἐπίσταμαι 1987 [ĕpistamai]
  • 1.

    이해하다, 깨닫다, 막14:68, 딤전6:4.

  • 2.

    알다, 친숙해지다, 행18:25, 약4:14, 유1:10, ἐπίστα- ται περὶ τούτων ὁ βασιλεύς: 그 왕이 이것에 대하여 알다, 행10:28, 20:18, 15:7, 19:25, 22:19, 26:26, ποῦ...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συνίημι 4920 [süniēmi]
  • 깨닫다, 이해하다, 통찰하다, 마13:51, 눅2:50, 롬3:11, 고후10:12.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συνείδω 4894 [sünĕidō]
  • 완전하게 보다, 깨닫다, 이해하다, 의식이 있다, 알게 되다, 생각하다, 은밀히 알다, 행12:12.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συνομορέω 4927 [sünŏmŏrĕō]
  • 알게 되다, 깨닫다, 접촉[접근, 인접, 이웃, 연속]하다, 행18:7.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αἰσθάνομαι 143 [aisthanŏmai]
  • 1.

    깨닫다, 지각 능력을 소유하다.

  • 2.

    ‘감각에 의해 이해하다’

  • 3.

    이해하다, ἀγνοέω, 눅9:45.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καταλαμβάνω 2638 [katalambanō]
  • 1.

    [중간태] 파악하다, 깨닫다, 찾아내다, 행25:25, 엡3:18.

  • 2.

    붙잡다, 얻다, 자기 것으로 삼다, 롬9:30, 고전9:24, 빌3:12, 움켜잡다, 이해하다, 정복하다, 요1:5, 빼앗다, 덮치다, 요1:5, 붙들다, 닥쳐오다, 요12: 35, 살전5:4, 잡다, 요8:3,4.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ὁράω 3708 [hŏraō]
  • 1.

    인식하다, 깨닫다, 이해하다, 행8:23, 히2:8.

  • 2.

    [타동사]

  • 3.

    보다, 찾아내다, 주목하다, 관찰하다.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γινώσκω 1097 [ginōskō]
  • 1. 이해하다, 깨닫다.
  • 2. 알아채다, 깨닫다, 감지하다.
  • 3. 알다, 알게 되다.

기노스코(γινώσκω) : 알다

‘알다’ 라고 번역된 헬라어의 대표적 단어에는 아니스다노마이(αἰσθάνομαι), 도케오(δοκέω), 기노스코(γινώσκω) 가 있다.

‘이해하다, 깨닫다’ 라는 의미를 가진 아니스다노마이(αἰσθάνομαι)
‘생각하여 여기다, 가정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 도케오(δοκέω)가 관념적이며 이론적 지식으로써 ‘알다’ 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알다, 알기 위해 배우다, 확신하다, 사귀게 되다’ 라는 의미의 기노스코(γινώσκω)는 주관적이며 체험적인 지식으로써 ‘알다’ 의 의미가 있다.

70인역 헬라어 성경에 기록된 기노스코(γινώσκω)는 ‘안다, 알다’ 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야다(ידע)를 번역한 것이다.
야다(ידע)는 문자적 의미에서의 ‘알다’ 라는 뜻보다는 ‘직접 보아서 확인하다’ 라는 의미에서 체험적으로 ‘알다’ 라 뜻이 좀더 적합하다.
그래서 히브리어 ‘야다’ 와 헬라어 ‘기노스코’ 가 ‘동침하다’ 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ידע)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창 4:1)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γινώσκω)하지 아니하더니…’ (마1:25)

예수님은 우리를 이와 같이 친밀하게 알고(γινώσκω)계신다(요2:24).
실제적인 지식으로써 사람의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γινώσκω) 계신다(요2:25).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어버린 생명없는 자임을 알기에 생명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알라(ידע, γινώσκω)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구약에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을 알지(ידע)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ידע)! 힘써 여호와를 알자(ידע)…’ (호6:1) 고 외쳤으며, 신약에 바울도 모든 성도들이 ‘… 하나님을 알게(에피그노시스 : ἐπίγνωσις – 기노스코의 파생어)’ (엡1:17) 되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이다.

창세전 언약의 백성(엡1:4)인 성도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고(γινώσκω)있기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고 하나님 말씀의 섬김만이 있는 성전(고전3:16)으로 사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 세상 역사속 현실은 그렇게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과 사귀며 사는(요일 1:3), 이미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삶인 것이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기노스코(Homer 이래)는 기본 어근 그노(gnw)에서 형성된 단어이며,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

(a)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사물이나 사람 또는 상황을 감각으로, 특히 시각으로 '알아차리다, 지각하다, 인식하다'를 의미한다. 호머(Homer, Od.)애서 보는 것과 기노스코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경험의 세계에서 그렇게 인지되었던 것을 마음 속에 지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 단어는 또한 '경험하다, 배우다, 알게 되다'를 의미한다.
즉 경험된 것이 그것을 경험한 사람에게 알려진다.

(b) 이 단어는 '구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그 유사한 것이나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 있는 어떤 현상에 대한 경험이나 인지가 이런 일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Homer, Il).

(c) 이 단어는 '인격적으로 알다'(Heracl., Frag.), '이해하다'(Homer, Od.), '알다'(친밀함이 인격적 지식을 가져온다). '~와 알고 지내다, ~와 친하다, 숙달되다, 노련하다'(Plato, Rep.)를 의미한다.

(d) 이 단어는 '결정하다, 판단하다'(Democr. Fr., Demosth).

(e) 형사 법원이나 민사 법원의 판결은 주어진 사실의 비중에 의거하여 내려지기 때문에 이 판결들은 기노스코의 수동형으로 표현되어 '재판을 받다, 판결을 받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f) 이 단어는 "아는 사이나 친밀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육체적으로) '알다', 즉 '~와 성적인 관계를 가지다'라는 헬라 용법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아마도 이 용법의 배후에는 헬라어 아닌 다른 언어에서 차용한 단어의 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의 어근이 라틴어 기그네레([아이를] 낳다)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 왔다(참조: H. Leisgang, Die Gnosis).

(g) 이 단어는 '확인하다, 입증하다, 확증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철학적 지식의 목적은 보는 것인데 이는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이 세상의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영원하고도 실질적인 것을 보는 것이다. 이 확인은 원래 관찰로 말미암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노스코는 '통찰력을 얻다, 알아차리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통찰력의 대상은 궁극적으로 종교의 영역에 속할 것이다(Herach., Frag. 5).(참조: E. D. Schmitz; Bultmann).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기노스코는 70인역본에서 약 800회 이상 나오며, 히브리어 야다(알다)와 그 어형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라아(보다), 하자(보다), 샤마(듣다) 등 13개 단어의 역어로도 사용되었다. 헬라의 일반적인 태도와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에서도 지식은 감각을 통해서 획득된다. 이미 알려진 것은 감각으로 나타나야 하며 그 자체는 그렇게 알려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듣는 것(듣다)과 보는 것(보다)에 관한 동사가 아는 것에 관한 동사와 병행되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예: 16:6 이하; 33:9; 삼상 14:38; 41:20).이것으로 우리는 70인역본이 라아(2:7)와 하자(26:11)와 샤마(4:15)의 역어로 기노스코를 사용한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헬라와 히브리 사상에서 아는 것에 관한 개념들은 대체로일치하며 이 두 경우에 감각을 통하여 얻는 경험이 기본적인 것이다.

(a) 70인역본에서 야다/ 기노스코는 '알아채다, 인지하다, 경험하다, 관찰하다'를의미한다(예: 3:7; 41:31; 16:20; 8:5; 47:8; 5:3).

(b) 야다/ 기노스코는 '구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선악을 아는 것"(3:5; 3:22)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이다. 좋고 흉한 것을 구별하는 것은 필요하다(삼상 19:36). 어린 아이는 왼손과 오른손을 구별하지 못하며(4:11) 또 선과 악도 구별하지 못한다(7:15). 후자의 구절의 문맥과 8:4에 나오는 이와 비슷한 언명은 이 언급이, 어린 아이는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구별할 줄 모른다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는 것 같다.

좋고 흉한 것, 좌우와 같은 것에 대해 관찰하는 것은 결국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된다.

(c) 야다/ 기노스코는 '배워서 알다' know by learning라는 의미를 지닌다(30:3).

(d) 이 분사는 사냥(25:27), 학문(29:11-13), 애곡(5:16), 바다를 항해하는 일(대하 8:18),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삼상 16:16)에 능함을 묘사하는 어구에 나온다.

(e) 야다/ 기노스코는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한다.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29:5; 1:8; 삼하 3:25). 푸알 분사형은 '친척'(왕하 10:11 등)과 '아는 사람'(19:14; 2:1 등)을 지칭한다.

(f) 야다/ 기노스코는 '관계하다, 관심을 가지다'(1:6; 37:18; 119:79), '~와 관계를 맺고 싶다'(예: 33:9). 신학적인 문맥에서 자주 이 단어가 적절한 지식을 얻지 못해서 결국 관심의 결여를 초래하고 마는 것에 대한 문제로 나온다(예: 8:7; 95:10).

(g) 야다/ 기노스코는 '성적 관계를 가지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고 하는 유명한 완곡 어법과 그 병행구들(4:1; 19:8; 31:17; 31:35; 11:39; 21:11; 왕상 1:4; 삼상 1:19)에서 남녀 쌍방의 성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남색(19:5; 19:22)이나 강간(19:25)과 같은 성적 도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h) 야다/ 기노스코는 '다른 사람과 인격적이며 친숙한 관계를 맺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름으로, 대면하여 모세를 아신다(33:17; 34:10).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1:5) 어떤 민족을(3:2) 아실 때 하나님께서 그를 선정하시거나 선택하신다(참조: 16:5 70인역본). 선택으로 이해되는 이 지식은 은혜롭고 자애로운 것이지만 이것은 인격적인 응답을 요구한다.

(i) 야다/ 기노스코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지식 외에도, 다른 신들을 아는 것이든(13:3; 13:7; 13:14) 여호와를 아는 것이든(삼상 2:12; 삼상 3:7) 간에,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10:25) 선지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4:22). 애굽의 재앙은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애굽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 보내졌다(10:2 등). 그는 그가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60:16) 그들을 파멸시키시고(6:7) 회복시키실 것이다. 특히 선지자 에스겔은 위협할 때,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는 어구를 사용한다(6:7; 6:10; 6:13; 6:14; 7:4; 7:9;7:27 등).

(j) 요약하면 희랍인들이 초연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사물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사변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반해, 구약성경은 지식을 끊임없이 인격적인 만남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구약성경이 하나님과 창조에 관해서 언급한 것을 보고서, 우리가 이 언급들을 존재론적 추론으로 여겨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믿음의 선포로 간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역사적 과거와 약속된 미래 즉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존재하고 있는 이 지상의 영역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찾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예배와 행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과 요구를 식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참조: E. D. Schmitz; Bultmann).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기노스코는 신약성경에서 221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기노스코의 용법은 헬라의 용법과 구약성경의 용법과 매우 유사하다.

(a) '느끼다, 간파하다'(5:29; 8:46),

(b) '주목하다, 알아 차리다'(8:17; 12:12; 26:10; 고후2:4; 5:42; 8:27),

(c) '인정하다,인지하다' recognize(7:39; 12:15; 22:18; 3:7; 2:20; 4:1; 5:6; 6:15),

(d) '듣다, (들어서)알다'(5:43; 15:45; 9:11; 17:13; 17:19; 1:12; 2:19; 11:57; 12:9; 10:26과 병행구; 9:24; 4:5).

(e) '확증하다, 확실히 하다, 확인하다' confirm(6:38; 13:28 이하; 1:18; 고전 4:19; 고후 13:6; 4:53; 7:51).

(f) ① 알아채고 있다(의식)라는 의미에서 '알다'know(24:50와 병행구; 2:43; 16:4; 10:34; 3:3; 2:24 이하; 7:27; 요일 3:20).

② 또한 익히 앎이나 아는 사이라는 의미에서 '알다'(25:24; 12:47 이하; 16:15; 1:7; 2:18; 7:1; 고전 5:16; 1:48; 7:49).

③ 그리고 이해라는 의미에서 '알다'(18:34; 8:30; 고전 14:9; 3:10).

(g) '구별하다, 분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고전 14:7,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h) '~하는 방법을 알다' know how to.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i) 경험을 통하여 '알다, 깨닫다' find out(요 13:58; 15:18; 19:4; 요일 2:3; 요일 2:5).

(j) '~와 관계를 맺다'

1:25; 1:34에서 성적인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다.

7:23에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나는 너희와 전혀 관계를 맺지 않았다'라는 의미이다.

고후 5:21에서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그가 죄에 대해 지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이란 선언이 범죄 행위와 반어법을 나타내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7:7에서도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라는 문구는 '율법이 없었다면 인간인 나는 죄와 본질적인 관계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의역할 수 있다.

고후 5:16에서 '~와 관계가 있다, ~와 관계를 맺다, 개인적으로 알다'를 나타낸다. 이 구절의 의미는 많은 논쟁의주제가 된다. 상반절에는 오이다멘("우리가 아노니")이 나오며, 하반절에는 기노스코가 에그노카멘("우리가 알았노니")과 기노스코멘("우리가 아노니")의 형태로 나온다.

(k) 고전 5:11-21에서 바울은 자기를 개인적으로 공격하며 사도직을 공격하는 적대자들과의 논쟁에 관련되어 있다. 그들은 바울에게는 사도라고 확증할만한 눈에 보이는 영적인 특성, 예를 들면 무아지경의 현상들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고전 5:13). 그들은그를 자기 자신만을 칭찬하는 '허풍선이'라고 비난했던 것 같다. 바울은 고전 5:11("우리가 ... 사람을 권하노니")과 고전 5:12("우리가 ...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에서 그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 바울의 변호 중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그래서 상상된, 눈에 보이는 영적인 특성을 가진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하는 언급도 부분적으로 들어있다(고전 5:14 이하).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본 성령과 능력의 분명한 증거에 따라서 지금부터-모든 가치의 전도, 즉 시대의 전환점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건 이후로-"우리가 ...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못하노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고전 5:14). 이것이 얼마나 명백한 것인가를 나타내기 위해바울은 모든 사람이 분명히 알 수 있는 언명을 고전 5:16 하반절에 삽입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즉 그와 그렇게 관계하지 않고 오직 우리가 섬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만 관계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주이시며, 그가 주님이시라는 것은 외면상으로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사도 바울과 사도라고 하는 그의 주장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던 것 외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외적인 판단과 일반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준에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오직 새로운 피조물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외적 현상에 의한(엔 프로소포, 고전 5:12) 판단을 포함하여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도다"(고전 5:17). 이 논쟁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이 고후 5:16에서 그가 지상의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다는 것을 확증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 이것은 역사적 예수님의 의미와 관계를 띠고 있지 않은 것이다.

(l) 기노스코는 '인정하다, 알아주다'를 의미한다.

고전 4:19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가 갈 때 교만한 자의 말이나 그들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즉 중요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3:9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높임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이방인?) 기독 교회에 와 보면 부활하신 이가 그들을 사랑하심을 인정하게 되리라고 약속하셨다(2:23). 이렇게 하심으로서 그는 유대인의 종말론적 소망을 뒤짚어 놓으셨다(참조: E. Lohmeyer).

7:1에서 "법을 아는", 2:18; 22:14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와 같은 문구들은 단순히 이론적인 지식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적용되어 인간의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에 대한 인지를 암시한다.

7:29에서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라고 한 바리새인들의 말은 일반 백성들에 대한 잘 다듬어진 랍비 학자들의 비웃음을 반영해 주는 것이다(참조: SBⅡ 494-521). 이것은 일반 백성들이 실제로 율법을 알아 율법에 순종했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추종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을 기록하면서 요한은 여기서 율법이 바로 그들 자신을 지적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비꼬는 것이다(참조: 7:42; 5:29 이하; 11:49 이하). 7:51에서는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고 반박하고 있다.

1:21에서 하나님을 알았던 자들의 생각이 허망하여졌다는 말은 헬라 사상의 견지에서 모순된 것으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그들의 허망함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결과다(참조: 지혜서 13:1).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찬미와 감사를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거부한 이교도들은 이 지식을 단순한 지적인 활동으로 격하시켰으며 그들이 지혜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상 어리석음일 뿐이었다(1:22 이하). 이교도들이 분명히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하더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들은 핑계할 수 없게 되었다(4:9; 1:10; 고전 1:21; 4:8).

5:5; 1:3; 5:20 등에서 지식에 관한 명령과 권유는 이 은사를 붙잡아 변화하는 생활 상황에서 이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라는 요구인 것이다.

10:11에서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인정해야 한다. 2:36에서 "이스라엘의 집"은 오순절 사건에 비추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24:43의 비유에 나오는 명령문도 참조하라.

고후 8:9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즉 "부요하게 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을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하게"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실제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는 이것을 리쯔만(Lietzmann)이 해석한 것처럼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관대하심의 본이시다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H. Lietzmann, An die Korinther).

(m) 기노스코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선택하시는 지식을 언급하는데 사용되었다.

-딤후 2:19(16:5을 인용함),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하였느니라".

-고전 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여기에서 하나님의 지식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똑같이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모든 행동을 포함한다. 이 지식은 영원히 하나님의 피조물에게 유효한 것이며 죄와 불순종에 대한 승리이다. 10:2은 이에 대한 일종의 상대 구절이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을 위한 유대인의 열심을 인정하긴 하지만 이것이 카타 에피그노신("[참된] 지식을 좋은 것")은 아니다(참조: Arndt, 291). "이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보다 깊이 통찰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결핍되어 있는 지식은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지식과 인지이다"(E. Gaugher, Der Brief an die Romer).

(n) 기노스코는 어떤 구절에서 신학적이고 이론적인 지식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3:11(참조: 4:11TR)은 오직 제자들에게만 허락된 "천국의 비밀"에 관한 감추어진 지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지식이 그들을 그 외의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는 비유의 권위 있는 해석가가 되게 했다.

6:6에서는 신학적인 진리에 관한 지식, 예를 들면 세례에 관한 특별한 가르침에 대한 지식까지도 삶으로 나타내는 순종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지식의 명백한 목적은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에 있는 것이다.( R. Bultmann; E. D. Schmitz).

※ 영지주의와 논쟁에서 나타난 용법 등.

신약성경 시대에는 자기들이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전 1:18-2:16; 고전 13:12 이하; 2:8; 딤전 4:7; 딤전 6:20).

신약성경 기자들은 자주 사도적 케뤼그마(khvrugma, 2782: 선포, 전도)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순례 설교자들과 충돌하곤 했다. 디모데는 이른바 거짓된 지식(그노시스)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도록 명백히 경고받고 있다(참조: 딤전 6:20).

2:24에는 "사단의 깊은 것"을 배웠다고 주장했던 적대자들이 언급되어 있다. 이 기자는 풍자적이면서 올바른 비평적인 판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깊은 것"을 배웠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에 항변했던 것 같다(E. Lohmeyer).

(a) 바울 서신.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주장하는 지식은 이처럼 바울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2). 이것은 고전 15:34과 비교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바울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아그노시안 ... 데우)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바울은 그가 지식으로 이해한 것을 설명하라는 강요를 받은 것이다. 그는 지식을 이미 알려져 있는 것으로서 오직 수동적으로만 표현할 수 밖에 없음을 알았다(4:9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이라는 어구를 첨가시킴으로서 인간이 능동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을 시정했다). 이미 알려져 있는 이러한 것은 인간이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이전의 어떤 능동적인 이해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상응하는 것이다(고전 8:3). 하나님에 대한 완전하고도 참된 지식은 오히려 종말론적 약속과 기대의 일부이다(고전 13:12). 바울은 육을 입고 지상에 오신 존재를 간단히 무시해 버림으로써, 하나님에 의해 알려진 것과 인간이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일치시키는 영지주의자들의 에스카톤(목적)에 대한 환상적 기대를 완전히 거부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우리를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것을 전적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노스데나이(하나님에 의해 알려진 것)는 선택을 포함하고 있다(참조: G. Bornkamm). 제 아무리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서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서 전달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주신 영이다(참조: 고후 4:6). 에스카톤 이전에는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3:10; 참조: 2:1 이하). 그러나 그리스도는 신학적인 사색을 통해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에 의해서 만나지게 될 때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주로 고백하게 될 때 알려진다(3:8). 이러한 고백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된다. 이러한 고백이 없는 곳에서 지식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고전 14:38).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 Love은 하나님에 의해 아시는 바가 되는 것이다(고전 8:3).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복종과, 죄의 주권으로부터의 해방(참조: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3:10, 참조: 6:3)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는데 열심히 봉사하는 곳에서 구체화되는데, 한편으로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의 약속된 부활에 이르려한다(3:10). 참된 지식은 하나님께서 사도의 증거를 통해 어느 곳에서나 나타내셨던 지식이다(고후 2:14). 이것은 최종적으로 완성된 지식은 아니다. 지금 이 지식은 단편적일 뿐이지만(고전 13:12) 완성을 기대한다. 바울이 1:6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지식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영지주의자들은 교만하여 이 지식에 대한 어떠한 것도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내가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풍자적으로 요구했다(고전 14:37). 이 모든 점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의 논법이 본질적으로 구약성경적 지식 개념의 범위 안에 머물러 있음이 분명하다. 동시에 그는 이 개념을 종말론적으로 확대하여 완성시켰다.

(b) 요한의 기록.

지식이 예수님과 요한 자신의, 그리고 10:14 이하에서는 예수님(아들)과 하나님(아버지) 사이의 상호 내적인 친교를 나타낼 수도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영지주의적 배경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레미야스(J. Jeremias)는 불트만(R. Bultmann)이 그의 저서(The Gospel of John, 1971, 380 이하)에서 주장한 것처럼, 이것이 헬라의 신비주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셈족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식을 친교로 묘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알고 있는 자, 즉 지식을 전달하는 하나님의 사자와 완전한 초월자로 알려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동등성에 의거한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영지주의적, 이원론적 대조는 세상이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진리의 영"(14:17)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언명에 의하여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미움을 받은 것은(15:18; 16:2)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제거할 수 없는 구별의 결과로 이해되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마찬가지로 계시의 목소리도 하나님이 아닌 마귀를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자들에 의해서 그렇게 인식되어질 수 없다(참조: 8:42-43). 반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며, 영생과도 동일시되었다(17:3). 구원을 가지고 오는 이 지식은 외부로부터의 부르심, 즉 이해력, 말하자면 진리 되신 분을 아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도래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참조: 5:20).

지식에 관한 요한의 언어와 요한의 견해가 영지주의의 용어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만약 우리가 기독교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자들과 이 메시지를 반대한 사람들이 이 메시지를 표현하는 형태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의 목적은 영지주의자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의 언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영지주의자와 직면하여 자기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그를 공박했다. 이것이 복음을 신화로 만들거나 요한을 영지주의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었으나(참조: 1:18), 하나님은 그의 보내심을 받은 자, 즉 그 아들에게서 알려지게 될 것이다(10:22). 그는 육체가 되셨던 로고스(말씀)이시다(참조: 1:14; 요일 1:1-4).

예수님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14:9; 12:45). 그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도 알 것인데, 그 이유는 이 사람이 그를 이미 알았고 또한 보았기 때문이다(14:7). 따라서 하나님과의 교제는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행해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 교제가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교제에 상당하기 때문이다(10:15). 이 두 가지 수준의 교제는 기노스코로 표현된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람들 사이에 나누는 교제는 서로를 아는 지식에 의해서 효과적인 교제가 되지만, 이 교제가 영지주의에서와 같이 인간을 신격화시키거나 인간을 이 세상과 역사에서 완전히 제거시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요한에게 있어서 지식은 한 분이신 하나님과 역사적인 통로를 통해서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그 형태를 취한다. 자기 아들을 보내심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17:23; 참조: 요일 4:19 이하)과 세상에 대한(참조: 3:16)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아들은 자기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척도에 따라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셨다(참조: 15:9; 17:26). 따라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의 지식은 역사의 영역 안에서 사랑으로 표현된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아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아버지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입증하셨듯이(14:31), 그를 아는 자도 하나님의 명령, 무엇보다도 자기 형제를 사랑하라는(요일 4:7 이하; 요일 2:7-11) 명령을 지킴으로서(요일 2:3 이하), 또한 죄를 짓지 아니함으로써(요일 3:6), 자기의 지식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노스코는 두 가지로 적용된다. 첫째로, 이 지식은 아들의 보내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을 의미하며(17:8; 요일 3:6), 둘째로는 선포된 메시지에 복종하는 것으로도 묘사되는 이 지식에 기초한 사랑에 순종하는것을 의미한다(요일 4:6). 이러한 지식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 Life이 되었는데(17:3)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에서 유래된 역사 속에 있는 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요한의 개념은 영지주의의 개념과 고의적인 정반대적인 것으로 두드러진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믿음과 지식을 똑같은 수준 위에 두는 것도 적어도 지식과 대조시켜 믿음을 낮게 평가한 영지주의에 대한 논박의 일부분이다. 17:3이 영생을 지식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지만 3:36은 믿음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베드로의 고백에 관한 요한의 견해에서(6:69) 우리는 믿음을 지식에 종속하는 제일 첫 단계로 보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으나, 요일 4:16에서는 이 순서가 "알고 믿었노니"로 되어 있다.

오직 자기 자신의 구원에만 관심을 가지는 영지주의의 자기 만족은 형제 사랑(13:35)과 단합(17:21 이하)에서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과는 반대된다. 더욱이 이 배후에 있는 궁극적인 목표는 아들이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세상이 믿게 되고 또한 이 계시가 온 세계에 알려지게 될 때에만 달성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우주(창조)와 구원에 대한 영지주의의 이원론을 요한이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영지주의자에게 있어서 이러한 이원론은 극복될 수 없는 것인데, 그 이유는 이 이원론은 우주적인 타락 이전에 이미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지주의의 견해에 따르면 우주는 완전히 그리고 치명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구원 받을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참조: 1:1 이하; 요일 2:14).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 대한 증오로 표현되는 알지 못하는 것은 나타난 계시를 믿지 않는 결과이며(8:42 이하) 이것은 결과적으로 죄를 초래한다(참조: E. Kasemann). "만약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들이 참으로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도 이 지식을 심화시키고 풍요롭게 하는데 관심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만 들으려고 할 뿐, 새로운 것을 들어 그들이 전에 알고 있던 모든 것과 그와 아울러 이런 지식의 상태 곧 자기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이해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는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왜 들을 수 없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이 영역에서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것과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점에 대한 이해 부족을 나타내어 줄 뿐이다"(R. Bultmann). 지식과 믿음에로의 부름은 이렇게 세상을 위해서도 남아 있다. 아들을보내심으로 나타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제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나서 실재의 새로운 차원을 연 것이다.

요한의 어휘가 영지주의와 명백히 유사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의 주제는 영지주의의 신화적 사변보다는 구약성경의 전승에 나오는 지식의 개념과 훨씬 더 가깝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분명하다.

(참조: E. D. Schmitz).





ἀκούω 191 [akŏuō]
  • 1.

    동의하다, 요9:27, 5. 이해하다, 깨닫다[목적격과 함께 쓰임], 갈4:21, 고전14:2.

  • 2.

    [문자적으로: 감각적 의미로 사용]

  • 3.

    [자동사] 듣다, 마13:16, 11:5, 13:14, 눅7:22, 행28:26, 계2:7,11.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βλέπω 991 [blĕpō]
  • 1.

    [매우 일반적인 의미에서] 깨닫다, 느 끼다.

  • 2.

    보다.

  • 3.

    [문자적으로: 눈의 활동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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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페, 로고스, 카리스 외 성경속 단어 그 의미와 탐구

지혜와 영적 지도의 시대를 초월한 보물인 성경은 히브리어와 헬라어가 중요하다. 특히 헬라어는 신약성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성서에 깊이와 뉘앙스를 더한다. 이번 블로그에서는 성경과 관련된 헬라어 몇 단어 속의 심오한 의미를 알아보자

전 세계 신자들에게 계속 울려 퍼지는 이 고대어들의 아름다움을 파헤쳐 보자.


아가페

신약에서 사용된 가장 유명한 헬라어 단어 중 하나는 "아가페"이다 그것은 종종 인간성에 대한 신의 사랑과 관련된 사심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이 신성한 사랑은 단순한 애정을 넘어 희생적인 베푸는 것, 연민, 용서를 포함한다. 아가페는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풀도록 신자들에게 영감을 주면서 사랑의 가장 높은 형태를 나타낸다.

 

로고스

"로고스"라는 헬라어 단어는 철학적, 성경적 맥락 모두에서 매우 중요하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즉 육신으로 만드신 말씀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로고는 신의 지혜, 신의 창조적인 힘, 그리고 진리의 계시를 의미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의 궁극적인 표현이라는 생각을 요약한다.

카리스

"카리스"는 영어로 "은혜"로 번역되며 신약성경의 기본 개념이다. 우리의 결점과 단점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확장된 하나님의 변함없는 은혜와 은혜를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통해 신자들이 구원받고 용서받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을 얻는다. 카리스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상기시켜 줍니다..

디카이오신

"디카이오신"은 헬라어로 "정의" 또는 "정의"를 의미한다. 성경적 맥락에서 하나님의 도덕적 순결과 신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받는 올바른 입장을 동시에 나타낸다. 디카이오시네는 성실, 공정,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소테리아

"소테리아"는 "구원"으로 번역되어 전달, 구조, 구원의 개념을 요약한다. 신약성경에서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해, 영생을 아우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리는 구원을 말한다. 소테리아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발견된 희망과 자유를 상기시킨다.

코이노니아

"코이노니아"는 헬라어로 "동료" 또는 "커뮤니케이션"을 의미한다. 그것은 신자들의 공동체 내에서 깊고 의미 있는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코이노니아는 교회의 삶과 사명에 대한 공동의 참여를 포함하며, 통합, 지원, 상호 교화를 촉진한다.

성경에서 발견된 헬라어 단어들은 심오한 의미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의 구원 계획, 그리고 신자의 신앙에 대한 더 깊은 통찰력을 드러낸다. 사랑과 은총에서 믿음과 의로움에 이르기까지 이 말씀들은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풍부하게 하고 삶에서 하나님의 변화하는 힘을 포용하도록 영감을 줍니다. 우리가 이 헬라어 단어들의 아름다움을 탐구할 때,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경외심을 깊게 하고, 그것의 시대를 초월한 진리에 맞춰 살고자 하는 열망에 불을 붙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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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으라!

서 론

헬라 원어에 따르면, 신약에서 ‘깨어 있으라 (watch)’라는 단어는 약 22번 사용되었습니다.

헬라어 γρηγορεω을 음역하면 ‘그리고레오 (grigoreo)’입니다:
그것은 방심하지 않는, 온전히 깨어 있는, 조심스럽고 신중한, 또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중요한 여러가지의 다른 사용법과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여러 의미와 차원들을 연구하고 우리의 영적 삶에 있어서 그 중요성을 이해하길 원합니다.

먼저 신약에 나오는 이 단어의 사용법과 의미를 설명하고 우리의 영적 삶에서 이 깨어 있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 지에 대해 논의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신약에 나오는 이 단어의 사용법과 의미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헬라어 단어는 약 22번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의미와 차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깨어 있으라 (watch)’라는 단어가 언급될 때, 주님의 목적을 우리에게 알려주므로 그 의미들을 알아야합니다.

1.헬라 원어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재림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때 사용되었으며, 그분께서 밤에 도둑처럼 오실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분별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할 필요성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깨어 있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또한 그분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신부를 위한 신랑으로 오실 것입니다.

마가 복음 13:33–37: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깨어 있으라’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일한 헬라어 단어입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올  모든 세대의 사람들을 포함해서 말씀하신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세대의 믿는 자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이 동일한 의미를 가진 같은 단어가 마태 복음 24:42; 마태 복음 25:13; 누가 복음 12:37. 에서도 기록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6, 10절에서도 이 말씀이 사용 되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그분의 오심이 밤에 도둑같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깨어 있고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내용입니다.

요한계시록 16장 15절에서도 같은 단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혜, 즉, 이 영적 깨어 있음의 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혼이 그분께서 신랑으로서의 오심을 위해 준비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분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당신의 오심이 홀연한 오심이라고 경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늘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잠에서 일어나 깨어서 지켜 보도록 합시다!

2.이 단어가 사용된 두 번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고통의 교제로서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 단어는 겟세마네에서 그분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일어났습니다.

마태 복음 26: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같은 의미가 마가 복음 14: 34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고난 가운데 우리에게 당신과 함께 하도록 초대하고 계심은 놀라운 일입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우리가 이 영적인 깨어 있음의 은혜를 얻게 되면 우리는 주님의 고난 가운데 교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의 고통을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막힘 없이  그분의 고난의 교제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대로 그분과의 큰 친밀감과 뚜렷함/확실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이 단어를 신약에서 다음과 같이 사용함으로써 우리에게 계시되는 세 번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원수로부터 오는 시험과 전쟁에서 구원 받기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깨어 있음입니다.

마태 복음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동일한 말씀이 마가 복음 14:38에서도 나타납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5:8에서 다음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러므로 영적 깨어 있음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시험으로부터 지켜지거나 보호 받지 못하거나 사단의 함정에서 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에서 원수를 다음과 같이 언급 한 것을 기억할 수 있지 않습니까?: […]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요한계시록 12:10). 이것은 우리가 자고 있는 동안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소하는 자가 우리를 고소하고 우리를 고발하는 것을 중단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영적 깨어 있음이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4. 이 단어를 사용하여 강조된 또 다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영적 삶에서 견고하고 확고하게 설 수 있도록 깨어 있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기도와 감사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6: 13, 14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린도전서 16: 13, 14)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 용감하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시오 (새번역 – 고린도전서 16: 13, 14)

알렉산드리아의 신학교 학장을 지냈고 많은 성인들이 그의 영적인 제자였던, 소경인 성 디디무스(4세기)는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부르심 받은 것에 대해 훈련되고 준비된 군인이 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음은 우리를 주님을 위한 군인으로 변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에베소서 6:18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에베소서 6: 18).

그리고 골로새서 4:2에서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골로새서 4:2)

 그러므로 영적인 깨어 있음의 은혜가 우리에게 입대한 군인이 되도록 요구할 뿐만 아니라, 감사의 영으로 기도를 굳건히 계속하고, 인내로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이 중요한 단어에 대해 우리가 찾을 수 있는 마지막 의미는 사역과 주님의 양떼를 돌보는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0: 31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 있어서,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사도행전 20: 31 -새번역)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떠나기 전에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권면한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을 다시 보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양떼를 깨어 보살피라고 권면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3:2-3 절에서도 사도 요한이 사데의 교회의 사자에게 그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놓인 영적으로 약한 양떼를 향해 깨어나라고 명령하는 동일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13:17에서도 동일한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섬김을 받는 자들에게 그들의 영혼을 지키는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데 있어서 깨어 있고 굳건할 것을 명령합니다.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3:17)

이 중요한 단어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 이 단어가 발생한 여러 성경 구절을 살펴 본 후,  우리는 분명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크고 위대한 은혜를, 즉 영적 깨어 있음의 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이것이 이 나눔의 두 번째 포인트입니다.

지금까지는 성경 말씀에 나오는 “깨어 있음”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두 번째 포인트로 넘어가기 전에, 구별되고 뚜렷한 영적 은사로써 “깨어 있음”에 대한 교부들의 몇 가지의 생각을 살펴보겠습니다.

  • 시나이의 성 헤시키오스 (7/8 세기) – 필로칼리아 (Philokalia)에 기록됨:
    ‘생각을 지키면 유혹과 시험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깨어 있음은 마음의 입구에서 끊임없이 생각을 고치고 멈추는 것입니다.’

‘깨어 있음이 오랜 기간 동안 연습 되었을 때,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를 욕망의 생각들과 정욕의 말들, 그리고 악한 행동들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킵니다.’

  •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7/8 세기):

‘지성/이성에 대한 주의와 깨어 있음이 없다면, 우리는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 다니는 악마로부터 구조받거나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 시나이의 성 필로테오스 (세기) – 필로칼리아 (Philokalia)에 기록됨:

‘우리의 주의함/깨어 있음과 기도가 매일 함께 합쳐지게 되면 엘리야의 불수레처럼 (열왕기하2:11) 되어 우리를 하늘로 올라가게 합니다!’

번째: 어떻게 하면 영적 깨어 있음의 은사와 은혜를 얻을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실제적인 포인트를 나누겠습니다:

  1. 영혼의 내면적 영적인 세워짐
  2. 분열되지 않은/나뉘지 않은 마음과 선한 양심을 갖는 것
  3. 한 몸의 지체들 사이의 연합에 주의하고 깨어 있기
  4. 마지막 때와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영적 민감성
  5. 하나님 나라의 책임들

이 포인트들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1.영혼의 내면적 영적인 세워

우리가 앞서 성경과 교부들의 어록에서 보았듯이, 그 모든 축복과 특성들과 함께 영적으로 깨어 있음의 은사를 받기 위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깨어 있음, 또는 경각심은, 우리의 영혼을 세우는 에 대해 주의하며 지키는 것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세워진 속사람 안에는 깨어 있음의 은혜와 덕이 있습니다. 그것은 속사람의 성숙의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 후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태 복음 16:18).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세우시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이 교회의 일차적이고 주요한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음)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지은 자가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히브리서 3: 3, 4).

바울은 또한 자신이 섬기는 교회들의 영적 건축과 덕을 세우는 것에 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혜로운 건축자라고 (고린도전서 3:10) 부릅니다.

 이 영적인 세움/건축은 우리에게 다음을 요구합니다:

  • 매일 성령 안에서 걸음으로써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해서 살아있도록 하며, 또한 새롭고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일상 생활에, 우리의 행동 가운데, 그리고 우리의 말 가운데 합당하고 마땅한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행동이 세상의 사람들의 행동과 너무나도 비슷합니다! 또한, 때로는 우리의 말이 부정적이거나 잘못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판단/정죄하거나, 거친 농담을 하거나, 수다와 험담을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깨어 있음의 첫 번째 영역이 성령 안에서 우리의 일상의 행동들을 지키는 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볼 수 있도록 적합하고 적절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19: 14)

우리에게 있는 것들에 대해 깨어 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능력 밖의 것들을 주십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긍휼로 당신의 은혜와 덕을 허락하십니다.

기록 되기를: […] 믿음에 덕을 […]  더하라 (베드로후서 1:5)

2.분열되지 않은/나뉘지 않은 마음과 선한 양심을 갖는

우리의 마음은 종종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분열되고 나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의 정결함을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경우, 우리의 마음은 혼의 욕망과 정욕으로 가득 차기 때문에 분열되고 나뉘어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8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야고보서 1:8)

이 구절의 다른 번역들을 볼 때 우리가 이 분열과 나뉨을 이해하는데 있어 도움이 됩니다. 두 마음을 품어 라는 문구를 중심으로 몇 가지 번역을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오래된 번역 중 하나인 콥틱의 번역도 “두 마음의 사람/double-hearted man” 이라고 기록 되었습니다. Young Literal Translation (YLT)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두개의 혼의 사람은 모든 일에서 불안정합니다.” 여기서 마음의 정결함과 일관성을 가로 막으며 혼을 방해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언급함을 볼 수 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NLT)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습니다: “그들의 충성심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나뉘었다.”

그러므로 시편 86: 11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시편 86: 11)

마음과 양심의 영적 민감성에 대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성경적인 예가 있습니다: 다윗은 마음이 영적으로 매우 민감하여 자신이 죄를 지으면 즉시 자신을 찔렀습니다.

사무엘상 24: 5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사무엘상 24: 5)

또한 사무엘하 24:10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일을 행함으로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하 24:10)

사울이 다윗의 뒤를 쫓으며 그에게 많은 고통과 고난을 안겨줬는데 다윗이 겨우 사울의 옷자락을 베었다고 해서 왜 다윗의 마음과 양심이 가책을 느겼는지 우리는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 사울을 죽이지도 않았는데요! 그의 겉옷 한 귀퉁이만 베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사랑으로 가득 찬 영적으로 민감한 마음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또한 왜 다윗의 마음이 단지 백성의 수를 세었다고 자신을 찌르고 가책을 느낄까 궁금해 할지도 모릅니다!  전쟁을 위해 단순히 백성의 힘을 알기 위한 것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도 악으로부터 정결케 된 영적으로 민감한 다윗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쟁에서 정복하는 것이 백성을 강건케 하시는 주님의 선하심에 바탕을 둔 것이지, 백성의 능력과 힘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영적으로 민감한 마음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성 티콘, 모스코바의 총대주교(19세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덕은 마음에 있지 않다면 진정한 덕이 아닙니다. 악이 마음 속에 없다면 결코 겉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손은 악을 행하지 않을 것이며, 발은 악을 향하여 걷지 않을 것이며, 혀와 입술은 악을 말하지 않을 것이며, 눈은 악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지나 마음은 악을 원하지도 갈망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대해 깨어 있으며, 악함과 분열됨으로부터 지킬 때, 우리는 순전한 깨끗한 마음을 얻게 되며, 영적으로 민감한 양심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전에서 발견한 책의 기록된 말씀을 읽고 백성의 상태에 대해 여호와께 묻기 위해 요시야 왕이 여선지자 훌다에게 보낸 이야기를 기억할 수 있겠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곳과 주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약하여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네게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곳과 주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에 사신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 (역대하 34: 27, 28).

우리는 하나님의 일들과 주변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더 이상 부드럽지 않는 딱딱하고 굳어진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물 또한 말라버린 것입니다!

선지자 요엘의 말을 기억합시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요엘2: 12, 13).

여기서 선한/좋은 양심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봅시다:

  • 디모데전서 1: 5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디모데전서 1: 5)

  • 또한, 사도 바울은 유대 공회 앞에서 자신의 변호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선한 양심/good conscience)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사도행전23: 1).

  • 사도는 다음 장에서 이렇게 말하면서 동일한 것을 다시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사도행전 24: 16).

  • 사도 바울은 제자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디모데후서1: 3).

  • 사도는 악한 양심을 피하는 것의 중요성에 우리의 주의를 끌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브리서 10: 22).

악한 양심은 타인과의 부정적인 경험이, 사랑과 용서의 부족으로 축적되어 그 속에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사역에 많은 막힘과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섬기는 자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히브리서 13: 18).

이 신성한 말씀을 듣고 나서, 우리가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을 얻고, 모든 악함이 비워진, 깨끗하고 정결한 마음을 얻으며, 선한 양심을 얻어야 할 큰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걸을 수 있고 진정으로 성령 안에서 걸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깨어 있음의 이 위대한 덕을 얻을 준비가 되고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또한  마지막 때에 광범위하게 증가하고 있는 악 때문에 우리 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3.한 몸의 지체들 사이의 연합에 주의하고 깨어 있기

제가 연합에 대한 말씀을 예전에 많이 드렸지만, 여기서 몇 가지의 포인트를 추가하기 원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우리 시대 가운데 원수가 일하는 주요 영역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연합을 파괴하거나 약화시켜서 영적인 권위와 여러 다양한 특권을 상실하게 하는 원수의 주요 분야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원수는 대부분 우리의 감각들, 즉, 눈과 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거짓된 것을 보고 듣게 함으로써 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의 정확성을 조사하거나 확인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거리낌이 없는 청결한 양심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벽들이 형성되기 시작하며,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참된 사랑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남게 되는 것은 표면적이고 외적인 관계일 뿐입니다; 그 사이에 마음과 양심은 오염되고 닫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악한 계략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하며,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지키고, 타인을 향해 우리의 양심을 투명하게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몸의 구성원들 사이의 분열은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분열을 야기시킵니다. 머리이신 예수님과의 이 분열의 결과로 우리는 많은 축복과 영적 권위와 하나님의 영의 지속적인 흐름을 잃게 됩니다.

이 점을 히브리서 10:24, 25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이것의 의미는: 부정적인 것에 집중하고 비판하고 판단하는 대신에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 10:24, 25)

4.마지막 때와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영적 민감성

이 점에 대해서 반복해서 말씀드렸지만 오늘 제가 몇가지의 강조할 점들과 질문들을 제시하기 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이 마지막 때와 관련된 매우 특별한 일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드러내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요한 복음 14:26).

만약 우리가 그분에게서 마지막 때에 대해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제약되고, 마비되며, 연약함과 요동침 가운데 갇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실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즉 늘 성령 안에서 걸으라고 말했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로마서 12: 11, 12).

이 구절의 각 부분은 특별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구 하나하나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에 따라 우리 자신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요동치는 상태, 미지근한 상태에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상태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와 같은, “영적인 포로 됨, 유배”의 상태로 여기신다는 것을 제가 이해하도록 하나님의 영이 알려 주셨습니다.

요즘 날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밝히고 싶어하시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들은 설명하거나 가르칠 수 없는 문제들입니다. 신비롭게 영감으로 오는 것이며, 영적으로 마음 가운데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것은 받은 자들의 생각 가운데 드러나고 계시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영적인 포로의 상태로부터 나오게 하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 중요성 때문에 다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반복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로마서 12: 11, 12).

여기서 우리는 세가지로 연결된  두개의 세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의 말씀에 예치된 성령의 신비들을 깨닫도록 합시다:

첫 번째 세트:

  •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Not lagging in diligence)

이것은 멈추지 않는 영적인 부지런함의 상태로써,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노력하는 영적 근면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 (영 안에서) 열심을 품고 (Fervent in spirit)

우리가 부지런하지 않고 게으르기 때문에 영 안에서 열심을 품는 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부지런함과 근면은 우리의 영을 지피고 우리로 하여금 영 안에서 열심을 품도록 만들어 줍니다.

  • 주를 섬기라 (Serving the Lord)

영 안에서 열심이 있으면 그것은 우리를 즉시 하나님 임재로 올라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예배하거나 섬기는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세트:

  •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Rejoicing in hope)

주님의 영적 예배자들은 끊임 없고 지속적인 산 소망의 원천인 부활의 능력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로 고정된 소망으로써, 부활의 능력을 그분으로부터 끌어서, 하늘 자리/영역에서 마음과 영 가운데 있습니다.

  • 환난 중에 참으며(Patient in tribulation)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산 소망이 있는 한, 시련이 그 사람을 포위하거나 압도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의 영의 열심과 열성으로 인해 부드럽고 유순해졌기 때문에, 그 사람을 빚어서 형성하는 것이 쉬워집니다. 그러므로, 시련은 그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형성하고 변형시키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또 다른 구절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로마서 5: 3), 또는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새번역) 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무를 수 있게 하기 위해 병약함과 시련과 곤란을 겪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9, 10 참조).

  • 기도에 항상 힘쓰며 (Continuing steadfastly in prayer)

이 세가지 연결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사람이 하나님과 영생을 향해 점점 더 나아가게 됨으로 말미암아, 기도는 입과 입술에 오르는 말이 되기도 전에, 이미 그 마음과 그 사람의 존재 전체에 지속적인 상태가 됩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마지막 때에 연관된 영적 민감성에 대한 다른 포인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마음 가운데 죽음의 정복이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유산이기 때문에 인간의 혼 안에 그것이 심어지고 많은 두려움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또한 성경에서도: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린도전서 15: 26)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망을 멸하시고 정복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육 안에서 죽음을 대면하셨고 이기셨으며,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사도행전 2: 24).

사망에 고통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네, 그것은 깊이 있고 숨겨져 있거나 묻혀 있는 고통으로, 때로는 질병, 약점, 무력함, 또는 두려움, 불안, 슬픔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얻길 원하십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여러 다른 모습을 취할 수 있는 죽음과의 싸움을 허락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질병, 슬픔, 시험과 같이 다른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그 사람의 통찰력을 열어서 그것이 죽음의 세력과의 전쟁이라는 것을 그에게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그 사람이 성령 안에서 행하고 걸으면서 이 전쟁에서 인내한다면, 그는 부활의 능력과 죽음을 이기는 것에 대한 분깃, 몫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와 관련된 준비의 필수적이고 뗄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깨어 나고 주의하기를 바라시며 신음하십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유업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죽음을 너무나도 두려워하는 우리 세대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믿음의 이전 세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왜 큰 차이가 있을까요?

순교자들은 고난 중에서도, 왜 그리고 어떻게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었을까요?

전도가 초기 세기 가운데, 왜 그리고 어떻게 확장 되었을까요?

이 모든 것은 죽음을 극복하고 이겼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살펴봅시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사도행전4: 33).

사도 바울이 고리도인들에게 전한 말씀을 읽어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린도전서 15: 14).

순교자들은 이렇게 극복한 것입니다!
성인들은 이와 같이 노력하였고, 그 은혜가 그들을 변모하게 하였습니다!
주의 종들이 이렇게 대대로 복음을 전파하여, 어둠과 사단이 지배하는 곳들에서 구원을 위한 믿음의 문들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부활의 복음 전파는 상황들과 개인들, 나아가 국가와 민족을 변화시켰습니다.

이제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이 질문은 절대적 진정성과 기도의 영 가운데 지속적인 숙고를 필요로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문제에 잠시 주의를 기울이다가, 또 다시 평상시처럼 삶의 다른 일들에 몰두하며 방향을 돌린다면, 우리의 상황은 마지막 때의 대립과 대적에 있어서 많이 어려워질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때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마가 복음13: 37).

5. 하나님 나라의 책임들

제가 이전에 이미 이 문제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단지 몇 가지 점에만 초점을 맞추기 원합니다.

성령 안에서의 삶과 복음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며 위임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것을 투자해야 합니다. 즉,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수해 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다시 기억하고, 기록된 것에 순종합시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디모데후서 2: 2)

그대가 많은 증인을 통하여 나에게서 들은 것을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전수하십시오. 그리하면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또한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 2 – 새번역)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주 예수님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요한 계시록 3: 3).

동시에 우리의 삶은 이 세대 가운데 증인 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거룩히 구별된 공동체로 부르심 받은 자들로서, 우리는 산 위에 있는 도시와 같아야 합니다 (마태 복음 5:14).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거짓과 악에서 벗어나고 위를 향해 올라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 기록되기를, 믿는 자들을 강건케 해주도록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이사야 35: 3, 4a)

이것이 계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따로 거룩히 구별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명령이자 계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위에 있는 형제 자매에게 축복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곧 성육신 절기의 금식으로 들어가게 될 것임을 기억합시다.

이 기도와 금식의 시간들 가운데 다음을 행하도록 합시다: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살피고 검토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이 메시지를 다시 보고 이것을 가지고 기도하고;

그래서 이 메시지가 우리 안에 흡수되고 깊이 정착될 수 있도록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살아 내며, 하나님의 영의 경륜에 따라 다른 이들에게 전수해야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하고 주님의 이름이 영광 받으시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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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1장 17절의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의 헬라어적 의미, 성경사전

   야고보서 1장 17절에는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두 단어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 깊은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그래서 헬라어적인 개념을 통하여 두 단어의 차이점에 대해 정리하였습니다.


좋은 은사(도시스 아가데, δόσις ἀγαθὴ)
온전한 선물(도레마 텔레이온, δώρημα τέλειον)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야고보서 1장 17절)

   야고보서 1장 17절의 헬라어로 된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것으로 묘사된 두 개의 단어가 나타납니다.

   첫 번째 단어는 '주시는 행위'를 의미하고  좋은 것을 나타내는 형용사인 '좋은'이라는 형용사와 함께 언급이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어는 이미 받은 '실제 선물'을 표현하면서, '온전한'이라는 형용사와 함께 언급이 됩니다.

   첫 번째 표현인 '좋은 은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는 것이 선하고 좋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표현인 '온전한 선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들이 완벽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들은 무엇이든 선하고 온전한 것이며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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