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율례와 규례


율법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계명
율례는 율법(계명)을 지키기 위한 세부 사항
규례는 율례를 지키지 않을 때 가하는 법적인 제재(심판)

예를 들면
율법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Remember the Sabbath day by keeping it holy.


율례 - 안식일을 지키기 위한 세부 사항
  1. 안식일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사도행전 1:12) / 2천 규빗, 900미터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이라.
     Then they returned to Jerusalem from the hill called the Mount of Olives, a Sabbath day's walk from the city.


  2. 안식일에 음식을 만들지 말라(출애굽기 35:3)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Do not light a fire in any of your dwellings on the Sabbath day.


규례 - 율례를 지키지 않을 때
 1. 죽이라(출애굽기 31:14-15)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찌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찌며 무릇 그 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찌니라.
Observe the Sabbath, because it is holy to you. Anyone who desecrates it must be put to death; whoever does any work on that day must be cut off from his people.
For six days, work is to be done, but the seventh day is a Sabbath of rest, holy to the LORD. Whoever does any work on the Sabbath day must be put to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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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토라) 출 13:9
계명(미차바) 출 20:6



토라() 율법

תּוֹרָה 스트롱번호8451

1.

교훈

2.

잠1:8

3.

선지자를 통한 예언

발음 [ tôwrâh ]
어원
3384에서 유래
구약 성경
220회 사용
계명
מִצְוָה 스트롱번호4687
1.

지휘

2.

하나님의 교훈

3.

선생의 교훈

발음 [ mitsvâh ]
어원
6680에서 유래
구약 성경
181회 사용
  • 1.
    명사, 여성 지휘, 지배, 명령, 가르침, 교훈, 훈계.
    • a.
      명사, 여성 하나님의 교훈, 신6:1,25, 7:11.
    • b.
      명사, 여성 선생의 교훈, 잠7:1,2.

참고 정보

문법설명

복수 מִצְוֹת

연관 단어

  • 문법설명
    복수 מִצְוֹת
    관련 성경
    ☞명령(창26:5, 레26:14, 느9:34), 계명(출16:28, 왕상2:3, 시19:8), 규례(대하8:14), 법도(단9:5). [동] 명령하다(말2:1, 수22:3, 대하8:15, 29:25).


מִשְׁפָּט 스트롱번호4941

1.

판단

2.

레19:15

3.

욥9:32

발음 [ mishpâṭ ]
어원
8199에서 유래
구약 성경
424회 사용
규례(호크)

חֹק 스트롱번호2706
1.

제한된 것

2.

과업

3.

경계

발음 [ chôq ]
어원
2710에서 유래
구약 성경
129회 사용












대머리(케레아흐. qêrêach) קֵרֵחַ


대머리(케레아흐. qêrêach)  קֵרֵחַ 스트롱번호 7142

1. 머리의 뒷부분이 벗겨진 대머리의.   2. 레 13:40. 3. 왕하2:23.
발음 [ qêrêach ]
어원  /  713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회 사용
  • 1. 형용사, 남성 머리의 뒷부분이 벗겨진 대머리의, 레13:40, 왕하2:23.
  • 관련 성경 /  ☞대머리의(레 13:40). [명] 대머리(왕하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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קָרַח 스트롱번호 7139
1. 대머리로 만들다.  2. 니팔형 : 벗겨지다. 3. 히필형 : 대머리가 되게 하다
발음 [ qârach ]
구약 성경  /  5회 사용
  • 1. 원형 대머리로 만들다, 털을 뽑다, 레21:5, 미1:16.

    • a. 원형 니팔형 : 벗겨지다[לְ을 수반하여], 렘16:6.
    • b. 원형 히필형: 대머리가 되게 하다, 겔27:31.
    • c. 원형 호팔분사형: 대머리가 된, 겔29:18.
  • 관련 성경  /  ☞무지러지다(겔29:18), 머리털을 밀다(겔27:31, 렘16:6), 대머리 같게 하다(미1:16, 레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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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머리를 대머리라고 하지만 정확히는 유전적으로 머리카락이 없거나 매우 적어서 뒤통수나 정수리가 드러난 상태를 말한다.
한마디로 자연적으로 탈모가 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
일부러 머리를 민 경우는 스킨헤드, 혹은 빡빡이 문서로 가도록 하자.

탈모가 머리가 빠지는 상태를 말한다면, 대머리는 탈모가 심해져서 머리숱이 거의 없어지고(즉 이미 빠진), 이마선이 뒤로 밀린 상태를 말한다.
대머리가 심한 경우에는 머리 옆과 뒤쪽에 얇은 띠 모양의 머리털만 남기도 한다. 
이 경우 정수리까지 벗어졌다 하여 민머리라고 부를 수 있다.

대머리가 흔히 나이 든 남자의 상징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빠르면 20~30대 초중반에도 대머리가 될 수 있다.
개인차가 심하기는 하지만 빠른 사람은 정말 빨리 대머리가 된다.
게다가 대머리까지는 아니지만 머리카락이 가늘어지다가 빠지는 탈모 자체가 아직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에게서 발생하는 빈도가 생각보다 많다.
10~20대인데 벌써 프로페시아를 복용하고 미녹시딜을 뿌리는 등 탈모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다.
실제로 탈모를 전문으로 진료하는 피부과 의사의 말에 따르면 특이하다고 넘길 정도로 적은 숫자가 아니라고 한다.

유심히 보면 한국의 남성 연예인들 중에도 대머리가 의심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일부러 머리를 밀고 다니는 사람도 많지만, 남성형 M자 탈모 등이 젊을 때 발생해서 중장년 헤어스타일을 하는 바에야 밀고 만다는 생각으로 머리를 밀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예 이렇게 밀어버리면 그나마 스트레스를 덜 받는 효과도 있긴 하다.

국내에서는 승려가 아닌 이상 머리를 삭발한 것을 이상하거나 고깝게 보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기 때문에 10대 고등학생이나 20대 대학생이나 20~30대 초임 직장인들이 1년 365일 삭발을 하고 다닌다면 사회에 불만이 있는 사람으로 찍혀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면접 같은 채용 과정에서도 치명적이다.
그나마 개방적이고 포용적이고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머리를 삭발한 사람에 대해선 좋은 첫인상을 가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탈모가 심해서 머리를 밀고 다닌다고 설명을 해 줘야 비로소 납득하는 경우가 대다수일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이 동아시아권에서는 삭발이 권위에 대한 도전 및 반대 및 반항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사업자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직장은 직원간에 상하 위계 서열을 정해서 업무를 진행하는데, 권위에 대한 저항감이 크다고 생각해 대머리인 사람에 대해서는 아랫사람으로의 채용을 꺼린다. 문신한 사람을 자기 아랫사람으로 잘 채용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집회, 시위 등에서 특정 사안을 반대하며, 삭발식을 거행하는 것은 매우 흔하다.

불교를 믿는 승려들도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머리를 미는데, 이는 당연히 탈모가 아니라 일부러 깎아서 만든 머리다. 즉 스님을 보고 대머리다 라고 하는 것은 큰 실례이며 응당 빡빡이로...는 아니고, 삭발하셨다고 함이 옳다.[4] 다만 머리를 밀지 않는 승려도 드물지만 있다. 한편 이슬람교의 행사 하지에서 남자 신도는 머리를 모두 미는 것이 규칙이다. 가끔 큰 시험을 앞둔 사람들은 외출을 자제하기 위해 머리와 눈썹까지 밀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카더라.

탈모가 시작된 사람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로, 이것이 별명인 사람도 있다. 29만원으로 유명한 모 전직 대통령이라든가... 미국에서는 거의 없던 지도자형이다.[5]

러시아의 국가지도자에게서 유독 많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심지어 러시아의 지도자는 대머리 황제(알렉산드르 3세)-대머리가 아니었던 마지막 황제(니콜라이 2세)-소련의 첫 번째 지도자 대머리(레닌) - 강철의 비대머리(스탈린)-[6]쿠바에 폭격기 배치한 간큰 대머리(흐루쇼프) - 체코 들쑤셔놓은 비대머리(브레즈네프) - 소련 최후의 희망 대머리(안드로포프) - 존재감 없는 비대머리(체르넨코) - 페레스트로이카 대머리(고르바초프)소련이 해체될때까지 반복되었다. 이후 러시아 연방에서도 옐친은 대머리가 아니지만 푸짜르는 대머리, 다시 바지대통령 메드베데프는 또 대머리가 아니고, 다시 푸틴이 집권하면서 계속 이 패턴이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푸틴의 유력한 후계자 후보들 혹은 그루지닌 같은 경쟁자들도 대부분 대머리가 아니다.[7]

프랑스의 역대 대통령들도 은근히 대머리가 많다. 샤를 드골,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프랑수아 미테랑, 자크 시라크, 프랑수아 올랑드가 대머리이다.

한국보다 대머리가 흔한 유럽 축구리그에서는 선수를 교체할 시기를 고를 때, 선수의 현재 컨디션은 어떤가, 그 선수가 이전에 몇시간 출장했는가와 함께 낮 경기라면 그 선수의 머리숱이 얼마나 남았는가도 고려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모자를 쓸 수 없는 축구 경기의 특성상 머리숱이 적으면 따가운 햇살 때문에 피로도가 빨리 오른다고 한다.

정력과 대머리는 전혀 관계가 없다. 과학적인 인과관계가 전혀 없다.

남성 호르몬의 양이 많다고 탈모가 생기는 게 아니고 DHT 또한 양이 많다고 탈모가 생기는 게 아니다. DHT는 남성 호르몬이 많다고 그대로 변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남성 호르몬이 많은 사람도 DHT로 잘 변환되지 않는 체질이라면 탈모가 생길 확률이 낮다. 반대로 남성 호르몬이 적은 사람도 DHT로 활발히 변환되는 체질이라면 탈모가 생길 확률이 높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DHT가 많더라도 탈모 유전자가 없다면 탈모가 생길 확률은 낮다.# 흔히 말하는 '탈모 유전자'는 'DHT가 탈모를 유발하게 만드는 유전자'를 말한다.

이는 머리카락을 제외한 털의 성장도 마찬가지다. 체모가 많은 것은 남성 호르몬과 DHT 양의 많고 적음과는 상관없고, DHT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체모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유전자가 있어야 비로소 체모가 많아지는 것이다.

참고로 DHT를 잘못 이해하여 DHT가 많으면 힘도 세고 근육도 더 잘 크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DHT는 근육과는 상관없다.다시 말해 많아봤자 아무런 장점이 없다

남성형 탈모의 가장 주요한 원인은 유전DHT로, 이 두 가지 원인이 동시에 작용해야만 탈모 증상이 발현된다. DHT는 탈모 유전자를 지닌 사람의 모낭에 작용해 모낭을 위축시키고 모발의 성장기를 단축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이는 다름아닌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특정 효소에 의해 변환된 물질이다. 비록 DHT가 테스토스테론 변환 물질이기는 하나, 그 역할은 테스토스테론과 상이해 성인 남성의 근육 및 성징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따라서, 탈모 치료제의 역할 역시 탈모 원인 물질인 DHT의 생성을 억제해 모낭 위축에 따른 모발 연모화 및 탈모를 막는 것이지, 남성호르몬을 자체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다. # 그래서 탈모 치료제를 복용하면 남성 호르몬이 줄어들 것이라는 걱정과는 전혀 다르게, 오히려 남성 호르몬의 양이 증가하기도 한다. 따라서 탈모 치료제는 스포츠에서 금지약물로 분류되기도 한다.[8]

수많은 사람들이 탈모로 고통받고 있지만 대머리는 그보다 더한 고통을 받는 편이다. 가장 먼저 사람 외모와 성적 매력에서 머리카락과 헤어 스타일이 차지하는 비중(약 50~70% 가량)이 굉장히 큰 편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인식에서도 영향이 크게 오간다. 여자 대머리를 생각하면 확 체감이 되는데, 아무리 이목구비 얼굴형이 절세미인이라 하더라도, 탈모가 있어서, 머리 숱이 별로 없다면, 매력이 폭락하며 남자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을 것이다. 결혼적령기 여성에게 있어, 결혼 상대를 찾는 데 어려움이 따를 수도 있다.

주로 남성들에게서 대머리가 보이는 경우가 압도적이라서 여자는 대머리가 없을거라는 생각이 많지만, 탈모의 형태와 출현 빈도가 다를뿐이지 여자도 대머리가 있다. 당신이 모르게 가발을 착용하고 있을 뿐이다. 여자도 남자처럼 이마선이 뒤로 완전히 밀리고, 두피색이 피부색으로 완전히 바뀌는 남성형 탈모와는 다른 형태인 숱 자체가 비기 시작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하지만 남자는 탈모가 오면 머리라도 깎을 수 있지만 대한민국에서 여자가 대머리로 다니는 것은 매우 생소한 만큼, 대머리인 여자에게 있어서 가발은 필수품이나 다름 없기에 남자 이상으로 더한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남자 대머리도 젊은 나이에 대머리가 되면 사회 생활에 치명적이며, 애로사항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과거에 비하면 엄청난 이미지 개선이 이루어졌지만 아직 대한민국 사회가 대머리에 매우 익숙한 사회까지는 아니다보니 결혼 상대자를 구하는 것에도 애로사항이 생길 수 있고, 대머리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다른 매력조건이 있음에도 저평가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특히 대머리가 일종의 유전병이라서 자식을 낳을 경우 2세와 3세가 대머리일 확률이 매우 높아서 본능적으로 피하는 이유도 존재한다. 외모를 많이 보는, 서비스 업종에 취직하는 것도 대머리는 굉장히 어렵다. 특별한 전문직이나 거친 육체 노동 분야 등이 아니고, 외모가 중요한 서비스 업종에서는 대머리가 면접을 통과해서 채용되는 것이 매우 어려운게 현실이다.

때문에 대머리는 건강에는 특별히 문제가 없지만 일종의 사회적 질병 취급을 받는다. 그 때문에 몇 몇 지자체(서울 성동구, 충남 보령시)에서는 탈모 치료 비용을 지원하는 경우가 생겼으며 20대 대선 당시에 탈모 치료의 건강보험 여부로 공약도 여럿 나왔다.

탈모 및 대머리로 인하여 수많은 상품들이 나와 있으며, 단순히 머리에 검은 가루를 뿌리는 흑채에서 두피를 자극해 모발 성장을 촉진하는 상품이나 모발 이식 수술까지 이어진다.

모발이식수술 중에서 마치 여성들의 지방이식수술과 똑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수술도 있는데 여성의 지방이식수술이 뱃살을 떼어다 가슴에 붙이는 수술이라면 대머리의 모발이식수술은 수염과 가슴털 등에서 떼어다 머리에 붙이는 수술이다.

2015년 9월 MBC에서 방송된 다큐스페셜 "대머리라도 괜찮아" 를 보면 대머리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특히 정상인이 대머리로 분장을 한 채 몰래카메라를 촬영하는데, 피실험자는 대머리들이 심리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받는지 느낄 수 있으며, 다큐멘터리를 보는 일반인들은 그것을 관찰할 수 있다. 피실험자나 집에서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는 일반인이나 대머리들이 받는 심리적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이런 종류의 다큐멘터리는 결과를 정해놓고 찍는 일이 많기 때문에 신뢰도가 높은 편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실험 카메라 형식으로 조사한 걸 내보내는 방송 중에서 조작 혹은 왜곡 논란이 있던 사례가 꽤 있다.

심지어 나이지리아에서는 대머리들 머리에 금이 있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안 자란다는 이상한 믿음에 대머리들이 살인 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한국에서도 대머리라고 놀린 사람이 살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댓글의 반응은 대부분, 남의 민감한 신체를 가지고 놀렸으니 죽을만도 했다는 반응이 많다.

심지어 모잠비크에선 미신 때문에 살해 당한 후 주술의 재료로 쓰인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50대 이상 고령층 탈모는 외모의 관심이 극도로 줄어드는 연령대인 만큼 그냥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받아들이고,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한창 학교를 다니고, 구직 면접을 보고, 여자를 사귀고, 결혼을 해야하는, 20~30대의 조기 탈모 및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하는 40대에게는 치명적이다. 특히 20대 초반에 탈모가 올 경우, 한창 대학을 다녀야 하는 나이인데, 대인 관계 특히, 이성과의 교류가 매우 어려워지고, 대인 기피증이 생기고, 우울증이 생기고, 여자를 사귀기 힘드는 등 어려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구직 면접에서도 탈모 및 대머리는 치명적이다. 30대를 넘어가면 탈모 인구가 꽤 있는 편이라서 좀 덜하지만, 20대에 탈모가 오면 일자리를 잡는데에도 어려움이 많다. 사람과의 관계가 별로 안 중요한 연구직 등 일부 직종을 제외하고, 대면 영업직군 등에서는 면접에서 탈락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애인이나 아내가 될 예비신부에게 대머리인 사실을 언젠가는 알려야 하는 난감한 상황을 겪는데, 참고로 대머리라고 사실을 알리지 않아도 혼인 취소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 이는 단지 외모적 문제이기 때문에 반드시 고지해야 할 의무 사항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명나라의 태조 주원장은 자신의 옛날 빡빡이 스님 생활에 콤플렉스가 있어서 자신에게 바치는 글에 대머리란 한자(禿)[9]를 쓴 사람을 죽여버렸다. 심지어는 매우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한자인 (빛 광)자도 사용을 금지했을 정도였다.

로마시대 투석구에 적힌 낙서 중에는[10] "루키우스는 대머리"라는 것이 있었다.[11] 출처는 앤서니 에버렛, 아우구스투스: 로마 최초의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젊은 나이에 탈모가 왔는데 개선식 때 병사들이 바람둥이 대머리라고 놀리자 무척 불쾌해 했다고 전한다. 본디 개선하는 주인공을 일부러 신명나게 놀려먹는 것은 당시의 관습이자 일종의 축하인사인지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놀림을 받든지 그냥 웃어넘겼음에도 불구하고 대머리라는 놀림만은 속이 상했나 보다.

열왕기에 나오는 예언자 엘리사는 동네 아이들에게 대머리라고 놀림받았는데 갑자기 암곰 2마리가 튀어나와 아이들 중 42명을 찢어 죽였다. 자세한 건 문서 참조.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제사장이 대머리가 되면 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보고 참수했다고 한다.

그래도 중세 유럽에서는 성직자나 학자가 대머리인 것은 드높은 지성의 상징과도 같았다. 즉 존경의 대상이었던 것.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대머리였을 경우에는 놀림감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유전자 분석 기술이 발달해서, 침 한방울로 유전자 검사만 받아봐도, 탈모 유전자 여부와 탈모가 올 확률을 알 수 있다.

남녀 모두 탈모 유전자가 유전될 확률은 같다. 하지만 남성이 여성보다 탈모 유병률이 높은데, 여성도 난소와 부신에서 테스토스테론이 발생되기 때문에, 탈모 유전자를 보유했고, DHT가 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탈모가 진행되지만, 여성의 앞머리 헤어라인 쪽에는 탈모 유전자에 반응한 DHT로부터 모낭을 보호하는 아로마타제가 많이 분피되어 있어서 정수리에서 유전성 탈모가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모발의 탈모 진행을 방지하고 모발을 성장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탈모가 대부분 억제된다.

본인을 기준으로 삼촌 항렬에 대머리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본인도 대머리가 될 확률이 있으며 주변 가족들과 친/외가 친척 중에서 아무도 대머리가 없어도 본인은 얼마든지 대머리가 될 수 있다. 실제 피부과에서도 이미 대머리로 변한 사람이든 아니면 한참 탈모로 스트레스 받는 사람이든 주변 가족이나 친척들 중에서 누군가 탈모로 고생하고 있거나 이미 대머리로 변한 사람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은 하지만,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자신은 가족들도 또 친척들도 아무도 대머리로 변한 사람이 없거나 탈모가 없다는 이유로 안심하면 안된다. 사람마다 헤어 사이클이 존재하는데, 그 사이클의 숫자가 사람마다 다르고 대머리인 사람은 그 사이클의 횟수가 짧아 일정 나이가 되면 머리가 빠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또 직접적인 원인은 유전이 맞지만, 사람이 어제는 멀쩡하다가 오늘 대머리로 변하지는 않으며 머리숱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는데 이렇게 줄어들 때 스트레스, 계절 같은 부차적인 요인도 줄어드는 속도에 분명 영향을 준다. 게다가 고혈압, 당뇨병 같은 만성질환도 영향이 준다.

여자 쪽의 아버지가 대머리이면 그 자식이 대머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탈모 유전자는 상염색체 중 3번과 20번, 성염색체 X 등에서 나타난다. 탈모는 부계로도 유전되고, 모계로도 유전되지만, 최신 연구에서는 부계유전보다 모계유전이 더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성염색체는 여성 XX, 남성 XY이다. 이는 모계로 유전될 가능성이 더 높음을 의미한다. 외조부의 X염색체 탈모 유전자가 어머니의 X염색체에게 전해지고, 다시 아들의 X염색체에 실릴 수가 있는 것이다.

노인들이 하는 말에 따르면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된다"고 하는데, 이 말의 유래는 과거 공짜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은 사람들이 이발소의 불결한 이발 도구로 인해 백선균에 걸려 탈모가 되었고, 이를 경계하는 의미에서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된다는 말이 생겨났다는 썰이 있다.

이미 대머리가 된 상태라면 모발 이식 외엔 답이 없다. 아니면 가발을 쓰던가. 현재 의학계에서 머리카락이 다시 나오긴 힘들지만 적어도 머리카락이 빠지는 건(탈모) 일정 부분 막는다고 인정받은 치료 방법은 딱 두 가지인데, 바로 먹는 약 프로페시아(피나스테리드)와 바르는 약 미녹시딜.

모발이식 중 하나인데 아예 피부이식을 하는 방법도 있다. 털이 나는 피부를 머리에 이식하는 것.

만약 모발이식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먹는 약인 피나스테라이드나 두타스테라이드의 복용을 중단해서는 안된다. 공여부 우성의 원리[12]에 따라 이식된 모발들은 빠지지 않지만 이식되지 않은 머리카락들은 약 복용을 중단한다면 탈모가 계속 진행되기 때문이다.

다만 모발이식도 머리카락이 안 빠지는 옆이나 뒤가 풍성해야 가능하다는 한계점이 있다. 대머리 중 상당수는 뒷머리도 별로 없기 때문에 모발이식도 쉽지 않다. 뒷머리가 풍성하더라도, 특히나 뒤통수에 여분의 살집이 없으면 최악의 경우 불가능할 수도 있다. 모발이식은 빠진 머리카락을 다시 나게 하는게 아니라 있던 머리카락을 다른 곳으로 고르게 분포시키는 수술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머리 클리닉에 괜히 수백만원 주면서 다니는 것은 그야말로 가성비 떨어지는 돈낭비다. 마사지를 하거나 머리에 마찰을 준다거나 해서 머리카락이 다시 나는 경우는 없다. 클리닉에서 두피 세척을 하면서 두피를 깨끗하게 해야 탈모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맞는 말이긴 하지만 집에서 샴푸로 열심히 머리 감으면 될 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대머리 클리닉은 돈낭비이니 가지 않는 것을 권장한다. 차라리 그 돈으로 모발 이식 수술을 하는 편이 백 번 낫다.

대부분의 탈모 관련 클리닉은 스트레스성 탈모나 지루성 탈모[13] 치료에는 효과를 보일지 몰라도, 유전성 탈모, 즉 대머리에는 아무 효과를 보이지 못한다. 대부분의 치료 사례로 보이는 사진들은 스트레스나 지루로 인한 일시적인 탈모다. 치료 사례 사진이 남성형 탈모, 즉 M자나 복합성보다는 정수리 쪽이 많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거라면 굳이 돈 들여 클리닉 다닐 필요가 없다. 규칙적인 식습관, 수면습관, 청결 유지 등만 해도 충분하기 때문. 즉, 한마디로 잘 먹고 잘 자고 머리 잘 감고 잘 말리면 될 일이다.

그 외 보톡스가 탈모 방지/재생 효과 기능도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 새로운 방법을 개발 중이라고 하니 지금 젊은 세대들은 조금 기다려보자. 만에 하나 확실한 탈모 치료제가 나온다면 개발자는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부자건 가난하건 탈모는 공평하게 찾아오니까...

UNIST박종화 교수는, 미래에는 게놈 치료를 통해 치료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프로페시아는 워낙 많은 루머와 사실이 뒤섞여 떠돌아다니고 있다.

  • 프로페시아는 비타민제와 비슷한 정도의 약효만을 가질 뿐이다?
    프로페시아는 의사협회에서 강력권장으로 분류될 만큼 확실한 약효를 가지고 있다.[14] 특히 영양제급 효과라는 건 말이 안 되는 게 성분 자체가 특정 호르몬[15] 생성의 부촉매 역할이지, 영양분이 들어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 프로페시아는 내성이 있다?
    프로페시아에는 내성효과가 없다. 하지만 대개 1~5년 후엔 효과가 조금씩 떨어지는데, 이는 노화로 인한 탈락과 더불어 약이 차단해 주는 호르몬 비율 외 때문이다. 대머리가 아닌 어른도 나이 50이 넘어가면[16] 모발이 현저히 얇아지는데, 대머리는 이게 수배~수십 배는 빠른 상황이기에 내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는 약 복용을 그만두면 더 빨리 대머리가 된다.

  • 프로페시아를 계속 복용하면 고자가 된다?
    소수 부작용이 나타나며, 영구적이지 않다. 매뉴얼을 보면 알겠지만, 2%의 환자에게서 성기능 감퇴가 일어났고[17], 그 중 95%가 넘는 사람들은 다시 성기능이 회복되었다. 즉, 0.1%에 해당되는 사람만이 프로페시아를 복용하면 불임으로 살아야 하는 것. 당연히 복용을 멈추면 정상으로 돌아온다. 일단 이런 루머가 떠도는 이유는 프로페시아가 탈모 호르몬이기도 한 전립선 호르몬 생성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18] 물론 고자는 고환이 제 기능을 못하는 거라 아예 다른 얘기가 되지만 성기능 약화로만 본다면 그 부작용을 아예 없다고 하는 것은 사실 문제가 있다.

  • 프로스카를 쪼개 먹는다면?
    프로스카는 프로페시아의 5배 용량이며 전립선비대증용으로 허가가 난 약이다. 피나스테라이드를 포함한 제제이기 때문에 프로페시아와 성분이 동일하며, 함량이 다를 뿐이다. 약을 쪼개기 때문에 매일매일 먹는 약의 용량이 조금씩 달라질 수는 있지만, 두피에서의 DHT 차단률, 부작용 확률 등은 프로페시아를 복용할 때와 별 차이가 없다. 따라서 안심하고 먹어도 된다. 참고로 프로스카의 경우 인천국제공항 초기 의약분업 예외지역 시절 공항에서 많이 팔린 약 중 하나다. 물론 지금은 인천공항도 의약분업 시행 중이며 오남용 우려약이라서 예외지역에서도 처방전이 필수다. 다만 피나스테리드 특성상 피부흡수가 잘되는 편이며, 임신 중인 여성이 만졌을 경우 태아에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어서 코팅이 잘 되어 있다. 거기다 알약도 그렇게 큰 편이 아니라 쪼개는게 굉장히 불편하다. 실제로 쪼개다보면 가루가 되는 양도 많고 조각끼리 크기도 많이 다르게 된다. 위에 말한 성기능 부작용이 용량에 비례하여 확률이 높아지는지라 부작용 위험이 커진다. 전립선비대증의 경우 보험이 적용되기 때문에 프로스카를 처방받아 먹는 게 비용부담이 적어서 쪼개서 먹는 경우가 많은데, 심평원에 걸리면 처방한 의사도 곤란한지라 되도록 그냥 프로페시아를 먹는 게 낫다.

대머리들이 애환을 겪는 근본적인 이유가 외모 문제이다. 대머리는 머리카락만 없기 때문에 신체 기능에 심각한 문제를 주지는 않으며 실제로 의료계에서는 급박한 생명의 생존이 아닌, 어디까지나 미용의 영역으로 보는 편이다. 그러므로 일상 생활이 물리적으로 불편할 이유는 없다. 단, 머리카락이 너무 없으면, 겨울에 두피가 춥다는 명백한 단점도 있긴 하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뇌에 대한 완충 작용으로 보호 역할도 하는데, 머리카락이 없으니 군대나 건설 현장 등에서 소위 험한 일을 할 때 부상 위험성이 더 커진다.

진화심리학적으로 대머리는 기대 수명이 충분히 남아 있어서, 2세가 성년이 되는 시기까지 충분하게 부양이 가능하리라 예상되는 남성을 여성이 선택하는데 도움이 되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대머리라는 기전을 만들어서, 아직 탈모가 진행되지 않고 기대 수명이 충분히 남아있는 젊은 남자들이 우선 순위로 여성들에게 선택받아서, 2세를 가지도록 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남자의 대머리는 외모에는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데, 스킨헤드나 대머리에 익숙하지 않은 대한민국 기준으로는 여성의 남자에 대한 성욕을 심각하게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결혼 적령기 남자가 대머리라면, 연애 대상이 결혼 상대로써는 꺼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결혼정보회사에 등록할 때도, 대머리면, 평가 점수와 매칭 가능 상대 여자의 레벨이 심각하게 떨어지기도 한다. 어쩔 수 없는 것이 대머리는 일종의 유전병이기 때문이다. 예시로, 전두환이 한국인 중에서 대머리로 가장 유명한 인물인데, 아들 전재용도 심각한 대머리다.

또한 대한민국에서의 머리를 빡빡 깎는 것은 일종의 반항, 사회와 어긋나려는 사람이른 이미지가 박혀있다보니 일반적으로 외모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인식이 있다. 다만, 반대로 대머리가 개성으로 꼽히기도 하는데 대머리가 어울리는 사람들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한국에서는 구준엽, 홍석천 등이 있으며 외국인까지 치면 축구 감독인 지네딘 지단, 펩 과르디올라 등이 여기에 속한다.[19]

서구권에서는 스킨헤드에 매우 익숙한 만큼 동양권, 특히 대한민국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마찬가지고 머리가 풍성하게 있는 사람보다는 열등감 포인트로 자리잡아있다. 더욱이 서구권이 유전적 탈모 비율이 40~50%대로 집계될 정도로 높기 때문에 탈모로 고민하는 남자들이 매우 많다. 미국의 국민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에서 대머리 캐릭터 호머 심슨은 탈모 컴플렉스와 발모제에 관한 에피소드가 수차례 등장했으며, 그와 정반대 캐릭터인 네드 플랜더스가 풍성한 머리숱에 근육질 몸매인 것을 봐도 대머리의 일반적인 이미지를 알 수 있다. 방송 매체에서도 대머리는 농담거리로 삼는데, 한 예로 머리숱 풍성하기로 유명한 배우 앤드류 가필드스티븐 콜베어 토크쇼에 출연했을때 방청석에 앉아있던 대머리 형과 아버지와 비교되며 머리채를 잡히기도 했다(...).#

그리고 서구에서 대머리를 미학적으로 높게 쳐주는 것도 어디까지나 그것이 어울리는 사람에 한해서이다. 미드 30Rock에서 대머리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행복한 삶을 살 확률이 현저히 낮아진다며 부하에게 가발을 권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과거 모 결혼알선업체에서 여성회원들에게 한 설문조사 결과 가장 결혼하기 싫은 배우자 1위로 꼽힌 적이 있다.

탈모가 진행되는 사람들 중엔 모발 이식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20] 오히려 삭발하는게 훨씬 나은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21]중년에게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 중에 가끔 대머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SMP(Scalp Micro-Pigmentation)라는 모근을 한 땀 한 땀 문신을 새겨서 머리숱 자체가 풍성하게 보이는 대머리치료 방법도 있다. 사실 치료는 아니고, 대머리이지만 일부러 삭발을 하고 다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게 착시효과를 노린 시술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다만 이쪽의 경우 또한 단점이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퍼렇게 피부가 물들어 이상한 색이 그대로 피부에 물들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또한 시술자의 경험이 부족하거나 실력이 미숙할 경우 오히려 안 하니만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창작물에서의 대머리 캐릭터는 높은 확률로 악당이며 간지 캐릭터 혹은 네타/개그 캐릭터가 된다는 두 가지 극단적인 스펙트럼이 자주 보인다. 악역이 아니라면 어느 쪽이건 주인공 혹은 일행들의 편이거나 조력자가 될 확률이 높다. 가끔 간지와 개그를 겸비한 대머리 캐릭터도 있겠지만... 과거 라인리그 시절의 게임라인에서는 게임 속 대머리 캐릭터들을 주제로 다룬 특집 기사를 내일은 빛나리라는 제하에 실은 적도 있다.[22] 대머리의 매력을 내세우는 여자 캐릭터는 거의 없다. 그나마 현실에 가까운 세계관에서는 일부 여군 캐릭터들, 사이버펑크포스트 아포칼립스같은 일부 SF장르에서는 해당 작품에 따라 인류의 패션 센스가 현실보다 진보되었거나, 혹은 파격적으로 변형되었다거나 한 경우 대머리까진 아니어도 거의 빡빡 깎은 여캐들이 나오긴 하다만, 매력이라기보다는 작품 배경에 감도는 패션센스적 장치에 가깝다. 사실상 남성 전용 속성으로 굳어진 상태. 다만 원펀맨의 주인공 사이타마 여체화 팬아트 같은 경우가 예외인데 비록 2차 창작이긴 하지만 대머리 여캐임에도 인기가 제법 있는 편이다.

참고로 1980년부터 1987년까지 대머리를 개그소재로 쓰는 것을 금지했다. 이유는 당시 대통령인 전두환이 대머리라서(...) 방송법상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지만 KBS나 MBC나 전두환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에 알아서 자체검열을 한 것. 이 때문에 박용식이나 이주일도 한 동안 출연금지조치를 먹었다는 웃지 못할 후문도 있었고, 만화도 마찬가지로 고바우 영감의 주인공인 고바우 영감이 대머리를 드러내면서 새해인사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가 한동안 연재가 중단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고, 김수정의 만화가 대머리 악당 캐릭터 때문에 연재가 중단되기도 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일어났다.

삭발한 대머리는 의외로 여성들이 선호한다. 바버샵 스타일 언더컷하고 전부 삭발한 대머리, 투블럭 바가지머리하고 반삭 헤어스타일과 울프컷, 삭발 모히칸을 포함해 6개의 남자 헤어스타일의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 의외로 여성들 사이에는 빡빡민 대머리가 매력적인 것으로 선호되었다. 조사 자료를 보면 여성들에게 가장 선호가 되었던 남자 헤어스타일은 바버샵 스타일의 슬릭백 언더컷 형태 투블럭이였으며, 반삭, 삭발한 대머리 순으로 선호하였고 투블럭 바가지 머리와 멀릿 헤어스타일은 선호도가 적었으며, 가장 선호도가 낮은 헤어스타일은 모히칸 스타일이였다.[23]

대머리는 위생에서 보통 머리보다 관리하기 쉬운 편이다.[24] 일단 머리카락이 없으므로 머리를 매만질 필요도 없으며, 온도 또한 차갑기에 진균이 자랄 확률을 낮춘다. 진균은 최적의 온도 및 습도에서 자란다.

그리고 머리 감는 데 샴푸린스가 필요하지 않다. 얼굴 씻듯이 씻으면 되며, AHA와 같은 크림을 쓰면 비듬도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다. 단, 피부가 연약한 상태에서 쓰는건 금물이다.

수분의 경우 수분크림을 발라주면 된다. 아래에 나오는 기능적 상실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머리의 두번째 장점은 진드기 예방이다. 상기 내용에 해당돼야 높은 확률로 예방할 수 있다. 진드기는 비듬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피부 진드기 중에서 흔한 집먼지 진드기는 단지 비듬만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최적의 온도와 습도에서 자라기 때문에, 대머리가 될 경우 이 조건들이 줄줄이 깨지게 된다. 비듬이 많아도 온도와 습도가 낮기 때문에 자랄 확률이 낮은데, 이마저도 비듬이 상당 부분 제거되면 아예 사는 것 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의외의 장점으로 생각보다 실제 나이를 맞추거나 가늠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지며, 오히려 젊게 보는 경우도 생긴다. 머리카락이 외모와 인상에 있어서 큰 비중을 주는 만큼, 머리를 밀어버리면 머리카락으로 나이를 판단할 수 없게 되어 얼굴에 집중된다. 여기에 눈가주름을 상대적으로 덜 인식 시키는 두꺼운 뿔테안경을 착용해주면[25] 실제 나이보다 동안처럼 보이는 경우가 매우 많아지기도 한다.

이는 사람은 타인의 나이를 인상착의나 얼굴형, 얼굴이나 목의 주름 정도로 빠르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노화는 오랜시간동안 천천히 진행되기 때문에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럴 때는 다들 외모가 비슷비슷해 보이는 대머리의 단점이 오히려 장점이기도 한 셈이다.

하지만 이는 얼굴이 동안인 경우에만 해당된다. 우선 홍석천은 대머리를 떠나서 외모 자체가 동안이라는 점을 상기해두자. 일반적이거나 얼굴이 나이에 비해 삭은 편이라면 오히려 아래의 노안 항목을 참조하는 것이 좋다.

그나마 나이가 70 이상을 바라보고 흰머리가 나는 케이스라면 이 경우엔 대머리인 쪽이 좀 더 동안으로 보이긴한다. 물론 흰머리가 노인의 대명사라 늙어보여서 그런 거지 대머리가 동안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은 아님을 알아두자. 물론 이정도의 나이가 되면 머리가 시린 게 문제지 동안으로 보이는 것엔 신경도 쓰이지 않을 것이다.

여름에 피부는 뜨거워지고, 겨울에 피부는 차가워진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머리카락은 일부 보온기능이 있는데, 이게 제거되면 두피는 일반적인 살 이상의 고온과 저온에 노출된다. 두피에 땡볕이 직접 쬐어진다고 생각해보라. 뜨거워 죽을 지경이다. 겨울에는 뜬금없이 맨살을 드러내고 있는 꼴이라 상당히 춥다. 때문에 대머리인 사람은 겨울에 모자를 쓰는 경우가 많다.

대머리도 반사율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가에 따라 반사율은 큰 차이를 보인다. 매우 흰 편이고, 자외선 차단제 등을 잘 바르면 50%도 가능하다고 한다.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눈부심이 일어난다. 반면, 어둡고 평범한 대머리는 20%에도 못미친다.

스님들은 여름에도 그대로 절에서 지낸다. 삭발한 사람이 여름에 뜨겁다고 말하지만, 삭발과 대머리는 반사율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난다. 삭발은 어두운 계열에 머리카락이 잔존해 있고, 대머리는 보다 밝은 계열에 모든 곳이 반사지점이기 때문이다.[26]

머리카락은 단순 장식용이 아니고 엄연히 자체 기능이 있다. 비록 일상생활에 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대머리는 머리카락의 두피 보호, 보온 등의 기능을 상실하는 셈이다.

자세한 건 머리카락 문서에서 기능 부분을 같이 참조하면 좋다.

장점 항목에는 동안이 장점이라고 적혀 있지만, 이건 얼굴이 동안인 경우에나 부각되는 거고, 대머리라면 시선이 머리카락으로 분산되지 않고 얼굴에 집중되며 머리가 벗겨졌다는 자체만으로 나이가 많을 거라고 오해를 받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일반적인 사람의 대머리는 오히려 사람을 늙어보이게 만든다. 전술했듯이 사람은 타인의 나이를 외모로 판단하기 때문.

위에 있는 장점에 있는 영상의 1분 9초대에서 머리를 민 남성이 가발을 쓴 모습을 보고 오자. 여자 가발을 썼음에도 가발을 쓴 모습이 훨씬 더 젊어보일 것이다.

게다가 머리를 전부 손실한 대머리가 아니라 탈모라면 더욱 노안이 부각된다. 김광규가 가발 쓴 사진을 보면 탈모가 가발을 착용할 경우 노안이 되긴커녕 오히려 더 젊어보이는 효과를 보여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광규의 외모는 준수한 편인데도 말이다. 때문에 두상이 전부 벗겨질 정도로 심각한 탈모를 겪고 있다면 포기하고 머리를 전부 밀어버리는 것도 방법이다.

서비스업이나 영업사원일 경우 불리할 수 있다. 다만 이부분은 대머리임에도 개성적으로 보이는 외모거나 자연스런 가발을 사용한다면 어느 정도 커버할 수는 있다. 이를 법적으로 제재할 경우 문신 등도 전부 허용해줘야 하기에 법으로 제재하기에는 무리이다.

로고스(λόγος)와 레마(ῥῆμα)


인터넷 상에서 "로고스(논리, 원칙, 이성)"와 "레마(대화하는 언어, 말씀)"를 구분하여 이렇게 설명하는 내용을 자주 읽게 됩니다.

로고스는 논리, 원칙, 이성이란 의미
레마는 (대화하는) 언어, 말씀이란 의미
따라서 로고스는 주로 문자로 기록된 말씀
레마는 언어로 선포된 말씀이라고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로고스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
레마는 기록된 말씀 중에서 특별히 나에게 영적 감동을 주는 말씀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주관적인 입장입니다.
성경 전체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고스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대략 331회
레마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대략 70회
로고스와 레마를 정확하게 분석하려면 위에 열거된 모든 구절을 읽고 살핀 후에 바르게 해석해야만 합니다.

어느 특정 선교 단체에서 몇 구절을 인용하여 레마의 의미를 마치 어떤 능력이 임한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신앙에서 이탈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소개합니다.

마태복음 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레마)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로고스) 받으리니.”

마태복음 18:15-16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레마) 확증하게 하라.”

마태복음 12:36-3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하릴없는 레마(말)를 하든지 심판 날에 그것에 대해 로고스(심문으로 번역됨)를 줘야 하리라.
로고스(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로고스(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누가복음 3: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레마)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요한복음 12: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레마)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로고스)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즉, 예수님의 그 당시 발언 혹은 증언을(레마) 받지 않았던 사람들은 곧 예수님이 한 그 말이(로고스) 그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10:42-44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을(레마) 할 때에 성령이 말씀(로고스)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이 구절에서 보면 오히려 레마는 베드로의 증언(발언)이었고 로고스는 그 내용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6:16-19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레마)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로고스)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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λόγ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056

1. 말하기.   2. 말.  3. ㉠ 너의 말
발음 [ lŏgŏs ]
어원  / 3004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말(마5:37, 눅1:20, 행2:22), 말씀(마8:8, 막4:15, 행6:2, 11:19, 14:25, 살전1:6), 소리(눅 3:4), 소문(눅7:17, 행11:22), 이야기(눅24:17), 글(행1:1), 언변(고전1:5), 모양(골2: 23), 일(행15:6, 18:15, 19:40), 고발(행19: 38), 전도(골4:3), 결산(마18:23, 25:19), 전파(막1: 45), 말씀(막2:2, 요2:22, 행20:35), 고(벧전4:5), 예언(벧후1:19), 이유(마5:32, 벧전3:15).

ῥῆμα 스트롱번호 4487

1. 말하여진 것.   2. 예언.  3. 명령
발음 [ rhēma ]
어원  / 4483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말씀(마4:4, 눅1:37, 행5:20), 말(마5:11, 행2:14, 고후12:4), 일(눅2:15, 행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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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λόγος)와 레마(ῥῆμα)  -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λόγος)와 레마(ῥῆμα)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신약 성경은 두 단어 모두 큰 구별 없이, 말 혹은 말씀으로 번역합니다.
원어로 보지 않는 한 어떤 구절이 로고스이고 어떤 구절이 레마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신약에 331번 등장하는 로고스가 말, 말씀, 이야기, 진술 등을 뜻하는 광범위하고도 포괄적인 단어라면 70번 등장하는 레마는 ‘발언’을 뜻하는 구어(口語)입니다.
로고스의 숫자를 더하게 되면 7이(3+3+1) 나오고 레마는 70이 됩니다(하나님의 완전수 7과 70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단을 참조).

‘로고스’는 성경에 적힌 일반적인 하나님의 말씀
‘레마’는 내게 주는 특별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며 계시라고 주장

레마를 통해 성령의 권능이 강력하게 역사하며 주님을 영적으로 만나게 된다는 근거 없는 주장으로 교회를 미혹하며 혼탁 시킵니다.

몇 년 전 이런 주장을 하며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던 사람이 가는 곳마다 파탄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레마와 로고스가 들어간 모든 구절을 뽑아 비교 분석하였고 레마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성경이 뒷받침되지 않는 주장임을 발견했었습니다.

물론 70번 나오는 레마 구절들을 읽다 보면 레마엔 로고스와는 다른 특별하고 비밀스러운 어떤 힘과 능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레마가 나오는 몇 유명 구절 중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레마) 살 것이라(마 4:4)’,
‘주의 말씀(레마)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 던져(눅 5:5)’,
‘내 말이(레마)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레마)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 5:26)’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로고스가 나오는 331구절을 읽어보지 않기에 오는 착각일 뿐입니다.
로고스 구절들을 모두 읽어본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로고스든 레마든 살아 움직이는 능력의 말씀임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오해는 그보다도 더 근본적인 어원을 무시한 탓일 것입니다.
여러 형태의 말(로고스) 중에서도 특별히 레마는 구어(口語)를 뜻하며 여러 사람 앞에서의 공식적인 ‘발언’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정도 차이를 갖고 로고스가 성경에 적힌 문자라면 레마는 살아서 움직이는 ‘로고스’, ‘성령으로 변화 받은 능력 있는 영의 언어’라고 까지 비약하는 건 미혹하는 영의 역사일 뿐입니다.

레마에 대해 연구하다 얻은 유익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마태복음 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레마)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로고스) 받으리니.”

이 구절을 그냥 ‘말’의 의미로 읽으면 보통 부담되는 구절이 아닙니다.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실없고 무익한 말을 많이 하나요.
영어로 직역하면 ‘하릴없는(idle)’인데, 이처럼 마음에도 없고 일없이 괜히 한 말까지도 심판 날에 심문받아야 한다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레마’가 ‘발언’을 뜻한다는 걸 알자 이해가 됐습니다.
이 구절은 공식적으로 쓸데없는 발언 혹은 증언을 하는 경우이지 일상적인 경우를 말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역시 주님께서 말씀하신 다음 구절에서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레마) 확증하게 하라(마 18:15-16)”

마태복음 12장 36절엔 레마와 로고스가 같이 쓰였다는 것입니다.
두 원어를 넣어서 36절과 37절을 직역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하릴없는 레마(말)를 하든지 심판 날에 그것에 대해 로고스(심문으로 번역됨)를 줘야 하리라.
로고스(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로고스(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사람들 앞에서(주로 공식적인) 하릴없는 발언이나 증언을 한 사람은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서 그것에 대해 말해야(변론 혹은 보고) 할 것입니다.
그 말에 따라 의롭다 함을 받을 수도 있고 정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레마만 특별한 계시의 말씀인 것처럼 인용되는 구절 중 하나는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레마)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2)” 라는 세례 요한에게 말씀이 임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에 대한 다른 두 구절엔 레마가 아닌 로고스가 쓰입니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로고스)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요 10:35).”
한국어 번역이 이렇게 되어서 어감이 약간 다르게 느껴집니다.

영어로는 “If he called them gods, unto whom the word of God came, and the scripture cannot be broken;(요 10:35).”
누가복음 3장 2절은 “Annas and Caiaphas being the high priests, the word of God came unto John the son of Zacharias in the wilderness.”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인데 예수님이 시편을 인용하신 구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임한 말씀’을 오히려 로고스로 썼고, 세례 요한 부분은 레마로 쓰였습니다.

또한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고전 14:36)”며 따진 구절도 ‘로고스’가 쓰입니다.
영어로는 “What? came the word of God out from you? or came it unto you only?”
직역하면, “무엇이라? 너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나왔더냐? 아니면 너에게만 그것이 임했더냐?”입니다.

레마(ῥῆμα)와 로고스(λόγος)의 차이가 어떤 신비나 능력에 있지 않고 그저 상황에 맞게 쓰인 것뿐이란 걸 증명하는 좋은 방법은 아무래도 두 단어가 한 구절에 같은 용도로 쓰인 경우를 보는 걸 겁니다.

다음은 그런 경우의 몇 구절입니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레마)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로고스)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요 12:48).” 즉, 예수님의 그 당시 발언 혹은 증언을(레마) 받지 않았던 사람들은 곧 예수님이 한 그 말이(로고스) 그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을(레마) 할 때에 성령이 말씀(로고스)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 10:42-44).” 이 구절에서 보면 오히려 레마는 베드로의 증언(발언)이었고 로고스는 그 내용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레마)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로고스)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 6:16-19).”
로고스를 폄하하고 레마를 신비롭고 영화롭게 하려는 사람들은 아마도 엡 6:16-18절까지만 인용할 것 같습니다.
이 두 구절만 보면 마치 레마가 특별한 것 같지만 이어지는 19절까지 보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는 말씀으로는 ‘로고스’가 쓰였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더하고 빼고 뜻을 왜곡하는 일은 단 에덴동산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마지막 예로,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레마)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로고스)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히 12:18-19).” 이 구절에서도 레마와 로고스는 같은 의미지만 상황에 맞춰 쓰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로고스)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란 구절은 레마가 아닌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그냥 흰 종이에 검은 글씨이고(그들의 말대로), 레마는 살아있는 로고스로서 능력 있는 말씀이란 주장이 얼마나 근거 없는지 잘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또한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로고스)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4).”에서도 청년들 안에 거한 로고스(말씀)로 흉악한 자를 이겼다고 하지 레마로 이겼다고 하지 않습니다. ‘로고스’는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요 1:1, 14)’을 칭하는 표현이기도 한데 이렇게 로고스를 무시하는 생각과 궤변이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이지 깊이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레마가 로고스보다 한 수 아래다’란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로고스는 살아 있는 말씀, 능력의 말씀이 아니라는 주장에 반론을 제시하다 보니 로고스에 치중해서 글을 쓴 것뿐입니다.
로고스든 레마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면 능력 있고 살아서 역사하는 말씀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저 허공에 흩어지는 말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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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of Numbers:7(70)이란 숫자의 의미

“3이란 숫자를 생각하니 베드로의 3번의 부인과 3번의 고백 사이에 예수님의 3개의 못자국도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만났을 때 사랑하느냐 물어보시는 주님의 손과 발에  못자국을 베드로는 어떤 마음으로 보았을까 떠올려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엔 3개의 십자가만 있었던 게 아니라,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의 몸에도 3개의 못이 박혔습니다.
양손(혹은 손목)과 두발목을 관통한 3개의 못은 4개의 상처를 남기고 옆구리의 찔린 상처까지 더하면 5가 됩니다.
하나님이(3) 세상을(4) 사랑하신 은혜의 죽음이(5) 십자가였음을 다시 묵상하자니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에 나오는 7개의 간구도 3개는 하나님에 관한 것, 4개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음이 상기되었습니다(마 6장 9-13).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수이면서 안식과 영적 완전함과 완성을 뜻하는 7에 대해 적으려 합니다.
7은 성경에 자주 등장할 뿐만 아니라 너무도 중요한 숫자이기에 3처럼 일일이 다 적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주요 포인트만 적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6일간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7일째 되던 날 안식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는 창세기 1장 1절은 7단어의 히브리어(바라싯 바라 엘로힘 에트 하샤마임 워에트 하아레스)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총 28개(7×4)의 히브리 알파벳으로 되어 있습니다(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열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구절이 하나님의 수 7과 세상과 창조물의 수인 4의 곱셈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성경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숫자 7은 지난 글에 적었던 것처럼 숫자 3과 같이 일하는 경우를 꽤 발견하는데 숫자 10과도 그러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7단어의 히브리어로 구성된 창세기 1장 1절은 10단어의 영어(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로 번역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 하나님이 데려가신 에녹은 아담의 7대손이었고 심판의 홍수에서 구원을 얻은 노아는 10대손이었습니다.
그는 정결한 동물은 암수 일곱씩 방주에 들였으며(창 7:2), 방주에 들어간 7일 후에 홍수가 지면을 덮었습니다(창 7:10).
노아라는 이름이 성경에서 7번째로 등장하는 부분은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입니다.
이런 7과 10을 더한 17은 부활 승리를 의미하는 중요한 숫자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직접 이름을 지어주시거나 바꿔주신 이름이 몇 번인지 궁금해서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적어도 제가 찾은 것으로는 모두 17번이었습니다.

또한 7과 10을 곱한 숫자인 70도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7년의 가뭄과 7년의 흉년을 맡아 관장하던 요셉의 초청으로 에굽으로 야곱과 함께 내려간 가족의 수는 모두 70명이었습니다(출1:5). 야곱이 죽자 요셉은 그 몸을 40일간 향으로 처리하게 했고 에굽인들은 70일간 애곡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사역을 도울 70장로를 세우는데(출24:1), 에스겔서에도 70장로가 나오고(겔8:11) 예수님도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70인을 세워 둘씩 짝지어 내보내십니다(눅10:1-17). 그런 반면에 적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아비멜렉은 아버지에게서 난 70명의 형제를 한칼에 죽입니다(삿 9:56). 40이란 수가 주로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개개인의 시험 및 연단의 기간을 뜻하는 수라면, 70이란 기간은 한 나라의 시험 및 연단의 어떤 기간을 뜻합니다. 이스라엘만 우상숭배로 바벨론에 멸망당했다가 70년의 포로 기간이 끝난 후 돌아와 다시 나라를 재건한 게 아닙니다. 이사야서에는 두로에 대한 70년 예언도 나옵니다. 두로는 70년간 잊혀질 것이나 70년 후에는 창녀처럼 노래하고 그 70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찾아오시리니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모든 나라와 음란을 행할 것이라고 합니다(사 23:15-17). 개역개정은 이 부분을 ‘하나님이 돌보신다’로 번역했지만 이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성경에서 쓰이는 ‘하나님이 방문하신다(visit), 찾아오신다’는 표현은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려고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천사가 직접 방문하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복된 약속의 성취일 수도 있고(약속의 자녀인 이삭이나 에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의 경우), 은혜와 구원(룻 1:6), 죽음(민 16:29), 혹은 심판의 때가 임한 것일 수도(출 20:5, 32:34) 있습니다(킹제임스 영어성경에서 ‘visit’을 찾게 되면 모두 80번 나오는데 구절들을 일일이 읽어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의하면 이스라엘에 죄와 허물이 그치고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 환상과 예언이 응하여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시기까지의 70주, 혹은 70개의 7일이 정해져 있습니다(단 9:24). 다니엘이 바벨론의 포로 기간 가운데 받은 이 예언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주님은 내게 죄를 범한 형제를 7번은 용서해야 하는 거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70의 7번이라도 용서해주라고 하십니다(마18:22).

7은 또한 은혜의 수인 5와도 함께 일해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상징하는 12를 이루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담은 창세기 1장과 2장엔 ‘창조’란 단어가 5구절에 걸쳐 7번 나옵니다(창1:1, 21, 27(3번), 2:3, 2:4).
킹제임스 영어 성경에서 “사랑하는 아들(beloved son)”을 찾게 되면 11번 나오고 “사랑하는 아들들”이란 복수형까지 포함하면 12번 나온다는 걸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향한 ‘내 사랑하는 아들(my beloved son)’이란 표현은 정확히 7번 나온다는 것입니다.

모세 5경에도 7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첫째로는 여호와의 7절기가 있습니다.
7절기 중 무교절은 7일간 무교병을 먹으며(레 23:6) 오순절은 초실절부터 7번의 안식일을 센 다음 날, 즉 50일이 되는 날을 기념하는 절기로 성령이 강림하신 날이기도 합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에녹이 태어나고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신 날 또한 오순절이라고 하는데 전승이니 권위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리고 나팔절은 7번째 달의 첫날이며 장막절은 7번째 달 15일부터 7일을 셉니다(레 23장). 레위기에는 7이 들어간 구절이 57번 나오는데,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으로 섬기기 전에 7일간 거룩히 구별해야 했습니다(레8:31-36). 속죄절에는 대제사장이 속죄소에(긍휼의 자리) 7번 피를 뿌려 속죄해야 했는데(레16:14) 이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피의 속량을 나타냅니다(히 9:12). 성소에 있던 금으로 된 등잔대의 7줄기의 빛도 사람의 혼을 비추는 하나님의 완전한 빛을 상징합니다.

또한 7일마다 7번째 날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던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7년마다 땅에 안식년을 주어 씨를 뿌리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레25:4). 그리고 7번의 안식년, 즉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을 7번 계수해서 49년이 된 다음 해인 50년은 희년으로 거룩하게 하여 자유를 공포해야 했고 각자 자기 소유지와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했습니다(레25:8-10).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귀한 법은 모두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표하는 것들이기에 지켜졌어야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70년 바벨론의 포로기를 통해 땅이 그동안 도둑맞았었던 안식년을(7년마다 취해야 하는 안식년 70번은 490년의 불법의 세월에 해당합니다) 누리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대하 36:21).

7과 6의 관계도 하나님의 수와 인간의 수의 합계에서 오는 독특한 의미가 있습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의 첫 전투였던 여리고성을 하나님은 매일 한 번씩 6일을 돌되 7일째 날에는 7번을 돌고 함성을 지르라고 하십니다(수 6:3-4). 즉, 여리고 성은 7 제사장들이 7 나팔을 메고 총 ’13번’을 돌고 무너져내린 게 됩니다. 연약한 인간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승리의 역사를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1장의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 예수님의 계보는 14세대씩 3그룹으로 묶인 42대인데, 7과 6의 곱셈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42는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을 잘 나타내는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12 제자를 두셨는데, 주님까지 합치면 13이 되며 그중 한 제자가 배반합니다. 이처럼 13은 타락과 배반의 숫자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13이란 숫자가 처음 나오는 구절은 창세기 14장 4절인데, 12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던 5 나라가 13년째가 되었을 때 배반해서 4 나라와 전쟁을 일으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대적하는 도시의 상징인 바벨론의 시조는 니므롯인데, 함의 13대손입니다(창 10:9-10). 에스더가 여왕으로 있을 때 하만은 왕을 속여 첫째 달 13일에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라는 왕명에 서명하도록 했고 이를 시행할 날짜는 열두째 달 13일이었습니다(에3:12-13). 마가복음 7장 21-22절에 주님은 부패한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13가지의 죄악들을(악한 생각,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질투, 비방, 교만, 우매함) 열거하십니다.

솔로몬은 7년간(왕상 6:38) 성전을 지었고 일곱째 달 절기에 궤를 메어 선전의 내소인 지성소로 들였는데, 7일과 7일 도합 14일을 절기로 지켰습니다(왕상 8장). 성경엔 7과 2를 곱한 14란 수도 자주 발견되는데, 14는 구원과 속량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보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14대, 그리고 바벨론 이후 그리스도까지 14대로 총 3번의 14대가 나옵니다(마1:17). 마태복음의 기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하나님의 완벽한 구원 및 속량을 나타내는 14대로 3번 나눠 적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7년 전에 하나님이 사람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신 기록이 성경 전체에 정확히 7번 나온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을 2번씩 7번 부르셨기에 이름의 수로는 14번이 됩니다. 따라서 14는 성령의 증거 및 증언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7은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 중 성령의 일하심이 두드러지는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7영, 하나님의 7눈 등을 떠나서 특별히 성령의 기름 부음이 두드러지는 책은 7이란 숫자로 엮어져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개인적으로 에스겔, 요한복음, 요한계시록). 4 복음서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많은 기적을 담고 있지만, 특별히 요한복음은 7개의 기적을 다루고 있고 7에 대한 숨은 진리가 곳곳에 박혀 있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책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조명은 2018년에 올린 ‘7 I Am, 7 기적, 7 증인’이란 글에 있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에는 7이란 숫자가 36구절에 걸쳐(킹제임스 영어성경) 54번 나오는데, 등장하는 순서대로 적자면, ‘7교회, 7금촛대, 7별, 하나님의 7영, 7등불, 7봉인, 7뿔과 7눈(하나님의 7영)을 가진 죽임당한 양, 7천사, 7나팔, 7천둥, 7머리에 10뿔이 달렸는데 머리마다 7왕관을 쓴 용, 7머리에(그 여자가 앉은 7산과 7왕) 10뿔이(10왕) 달렸는데 뿔마다 10개의 왕관을 쓴 짐승, 7재앙, 하나님의 진노를 담은 7금대접입니다. 에스겔 같은 경우는 여호와의 말씀과 환상이 임한 후 7일간 충격 가운데 놀라 있었다고 나오고(겔3:15-16), 7년째 되던 해 다섯 번째 달 10일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에스겔에게로 나아왔다는 기록이 있으며(겔20:1), 천년왕국이 임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7년간 전쟁 무기들을 태우고 7개월 동안 전쟁으로 죽은 시체들을 묻어 땅을 정결케(깨끗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겔39:9, 12). 천년왕국의 기간에 세워질 에스겔의 성전엔 7계단, 7규빗과 70규빗의 측량이 나오고, 7일동안 매일 염소, 수소, 그리고 숫양의 피를 올려 7일 동안 제단을 정결케 하고 제사장들을 거룩히 구분하라고 합니다(겔 43:25-25). 스가랴에도 7눈을 가진 한 돌(슥 3:9)과 7등잔과 7 관(슥 4:2), 그리고 온 세상을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7눈(슥4:10)이 나옵니다.

욥에게는 7아들이 있었고, 고난을 받고 있던 그를 3친구가 방문했을 때 7낮과 7밤을 침묵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들은 속죄로 7숫양과 7수소를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나만 장군은 요단강에 7번 몸을 담은 후 나병이 나았는데 레위기 14장에 나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에 대한 규례를 보면, 새 2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고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7번 뿌린 후 놓아줍니다(레 14:2-7). 그 후 정결함을 받은 자는 자기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은 후 진영에 들어와 자기 장막 밖에 7일을 머문 후 7일째 되는 날에 온몸의 모든 털(머리털, 수염, 눈썹)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은 후 정결하게 됩니다(레14:8-9). 그리고 8일째 날에는(새로운 시작, 거듭남, 재생을 의미하는 8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흠 없는 어린 숫양 2마리와 1년 된 암양 1마리, 고운 가루 3/10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속건제와 속죄제로 드리는데, 제사장은 그 기름을 왼쪽 손바닥에 따른 후 오른쪽 손가락으로 찍어 여호와 앞에 7번 뿌립니다(레14:10-16). 이 외에도 집에 생기는 나병에 대한 규례와(레 14:34-57) 몸에 유출병이 생길 때의 규례도 숫자 7과 연관해서 비슷한 과정들을 거칩니다(레 15:13-28).

마태복음 13장에서 7개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왕국)를 설명하셨던 주님이 십자가 선상에서 말씀하신 횟수는 총 7번인데, 가상칠언으로 불립니다. 주님은 또한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7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막16:9). 이런 주님의 족보는 누가복음 3장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는데, 정확히 77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경 전체에서(영어 킹제임스 성경)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을 찾으면 총 77번 등장한다는 걸 발견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12사도를 뒀던 신약의 초대교회에는 7집사가 선출됩니다(행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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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한 말씀이며, 약속과 생명과 능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믿는다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복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라고 합니다.

이 ‘로고스’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이 말씀이 우리에게 특별히 주어지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특별히 말씀해 주시고 그 말씀에 의해서 믿음이 생길 때 들려옵니다.

이 믿음이 생기게 하는 말씀이 헬라어로 ‘레마’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어느 구절이 갑자기 마음에 와 닿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그 말씀이 곧 ‘레마’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레마’를 받게 되면 기적적인 믿음이 생겨나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읽지 말고 살아서 역사하시는 말씀인 ‘레마’를 받기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레마. 모이. 소이
 
 
레마. 모이. 소이


요 17:8 - 요 17:10
(8)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9)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저희’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자들이다.
아버지는 저희를 아들에게 주면서 저희들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게 하기 위해서 아들에게 말씀을 주었다.
아버지의 초점은 늘 ‘저희’에게 가 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받은 말씀을 저희에게 가르쳤는데 가르친 결과 저희들이
자신을 가르친 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하나님께로서 나온 자이며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영생이다. 이것이 거듭남이며 구원이 되는 것이다.


*영생의 구원에 수준이 있다.
죄 사함의 영생과 요1:12절의 영생이 있다.
요 3:15절과 요 3:16절의 영생이 있다.
이것이 구분되지 않으면 아버지의 것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흐레마; 라는 말씀이 필요하다.
우리의 생명력은 8절의 아버지가 주신 흐레마에 있다.
*말씀들을 4487 rJh'ma
4483에서 유래;‘말’(개인적으로, 집합적으로 혹은 특히), 함축적으로(특히 해설, 명령, 토론의)‘논제‘또는‘주제’<눅 1:65; 롬 10:8>중명. a word, message;


@말씀은 호 로고스가 되는데 이곳은 왜 로고스를 쓰지 않고 흐레마를 쓴 것일까?
말씀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생명의 근원지인 씨로서 호 로고스가 있고[종자]
에너지가 되는 것으로 나에게 이루어진 것으로 아버지가 직접 주시는 흐레마가 있다.[열매]


*레마는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요4: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4487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된다.
왜?
요 6: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4487 영이요 생명이라
--흐레마가 바로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생명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이것이 들리지 않고 깨달아지지 않으며 믿어지지 않는 자는 아버지가 보낸 자가 아니다
아버지가 보낸 자는 이것을 알아듣고 깨달아지므로 영생을 얻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되는 호 로고스는 흐레마를 들으면서 생겨지게 된다.
이것은 도적 같이 오므로 흐레마를 듣고 흘러 보내지 말아야 한다.
흐레마는 ‘흐레오; 인 ’흐르다; 에서 유래다 되어서 흘러가는 것이 흐레마 이다.
흐레마를 듣는 자는 생명을 얻어서 이 생명을 흘러 보내야 한다.
에덴동산에서 강이 흘러 나가는 것처럼 흘러가야 한다.
흘러 보내지 못하면 고여서 썩게 된다.


내가 생명을 가진 자인지 알려면 자녀를 낳았는가를 보면 안다.
생명 있는 자의 증거가 바로 자녀가 있는 가를 보면 안다.
그래서 구약은 그렇게 생명의 씨를 가진 아들을 원했으며
신약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모든 교회가 말씀을 증거 하지만 그곳에 정말 생명의 말씀이 있는 가를 알아서 들어서 한다. 인간의 혼을 달래주는 위로의 말이 아니라, 나에게 생명이 되고 에너지가 되는 영의 말을 들어야 한다.


*주님의 중보기도는 저희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지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
저희들은 복 받은 자들이다.
복의 개념을 생각하면 1.내 적인 복을 원하는 자가 있고 2. 외적인 복을 원하는 자가 있다.
나의 상태가 지금 어떤 것을 추구하고 있는가?
내적인 것은 영원한 것이지만 외적인 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세상의 외적인 복에 의해서 나의 행, 불행이 좌우된다면 나는 어떤 자인가?
나는 지금 가난한 자인데 무엇에 가난하다고 생각하는가?
물질이 없으므로 가난한가?
하나님이 없으므로 가난한가?
우리의 의식이 영원한 것을 찾는 의식이 되어야지 일시적인 것을 찾는 것에만 치우쳐 있으면 성장이 없다.[너는 돈 없어도 살 수 있어? 이런 의식 자체가 지금 어린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힘들어서 벌어야 할지라도 나의 의식은 일시적인 것에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 것 ‘소이; 와 내 것 ’모이;
저희는 주님에게 말씀을 듣지만 소속은 아버지의 것‘소이’ 것이었다.
과거에는 ‘소이; 것이었지만 지금은 주님의 것’모이; 것이 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과거에는 소이 것이 었는데
지금은 ‘모이; 것이 되어 가지고 살고 있지만 우리는 모두 ’소이;‘ 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나의 생명까지 모두 ‘소이;에게 넘겨주어야 하는데 이것이 산제사가 되며 이것이 헤렘제사이다. 이것은 하나가 되었기에 이런 현상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10)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내것은 아버지 것, 아버지 것은 내 것으로
처음에는 구분이 되었지만 조금 지나니 구분이 되지 않고 하나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는다.
반면에 주님은 저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므로 아버지가 영광을 받는다.
그렇다면
저희가 된 자들은 주님이 영광 받게 할려면 십자가에 죽어야 영광 받는다.
주님이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저희들이 십자가 죽음을 택해서 죽었다는 결론이다.


우리를, 나를 생각해 봅니다.
내가 주님의 십자가로 죄사함 받아서 아들로 칭의를 받았습니다.
이제 생명의 말씀을 듣고 그것이 들려지고 깨달아지므로 나에게도 호 로고스인 생명이 들어가 있습니다. 요 1:12
즉 십자가의 주님이 아니라 부활한 그리스도의 말슴인 보혜사 성령이 내 안에 내주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우리는 주님이 영광을 받게 해야 할 의무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십자가에 죽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소이’ 것이 ‘모이’ 것이 되었다가 다시 ‘소이’에게 돌려주는 것이 됩니다.
주인의 물건은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소이; 것을 ’모이; 것인줄 착각하고 가지고 있으면서 누리고 있습니까?
나의 생명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돌려주었다는 증거가 내가 믿음의 계대를 이어갈 자녀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흐레마;는 ’흐르다; 라는 단어에서 유래 되었으니 생명이 흘러가야 합니다.
그것을 흘려주기 위해 나는 ,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에게 구하며 긍훌의 은혜가 베풀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레마에 대하여
 
레마에 대하여 -


우리는 성경을 사랑의 편지다 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편지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 입니다.


성경은 적용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고 무조건 믿으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레마는 별다른 뜻이 없고 그저 "입의 말"이라는 뜻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로고스가(하나님) 레마(소리)로 말씀하신 것을 문자로 기록한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믿는 순간 예수님이 제자들의 귀에 말씀하신 것 같이 지금 내 귀에 대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믿는 순간 현재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  
 
불안의 시대 혼돈의 시대를 능력 있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은
과연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1)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온다.
(2) 로고스는 기록된 말씀 전체며 여기서 내게 부딪쳐 오는
레마의 말씀이 주어진다. 이것이 신앙성장을 가져다 준다.
(3) 우리의 신앙 경험은 성경에 의해서 시인 혹은 시정된다.
(4) 가장 건전하고 건강한 신앙생활은 하나님 중심, 성경말씀 중심,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이다..
                   (5)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세상을 이길 수 있다.
 
기록된 로고스의 말씀을 읽을 때 성령님을 의지함으로,
그 로고스가 레마가 되어 믿음이 무럭무럭 자라나, 불안과 혼돈이
팽배한 이 시대에도 평강과 강한 확신을 가지고, 말씀의 약속을
붙잡고 언제나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자.

 

 

 

 
 
 

 

로고스와 레마의 차이
 
로고스와레마의 차이


헬라어로고스(λόγος)와 레마(ρήμα)는 성경에서 ‘말씀’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이 두 단어의 의미상 차이는 모호하다.
일반적으로 로고스는 “성경말씀”이며, 레마는 “깨달아진 성경말씀”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이것은 출처불명의 견해이다.
헬라어원어사전을 보면, 로고스는 “생각의 표현”을 의미하며, 레마는 “말씀되어진 것, 또는 기록되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성경 상에서의 로고스와 레마의 의미상의 차이는 무엇인가?

먼저 로고스에 대해 살펴보자. 성경 상에 ‘말씀’이라고 번역되는 단어의 약 90% 이상은 로고스이다.
로고스라는 말의 의미는 헬라어 원어의 의미 그대로 “생각의 표현”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면 “하나님의 생각의 표현”이고, 예수님의 말씀(로고스)이면 “예수님의 생각의 표현”이며, 성령님의 말씀(로고스)이면 “성령님의 생각의 표현”이다.
즉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성령님이 당신의 생각을 말씀으로 표현한 것이 로고스이다.

레마 역시 헬라어의 원어적 의미와 연관하여 생각하면 좋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로고스)이 성경으로 기록되어 전해지는 말씀이 레마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다메섹으로 가는 바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말씀(로고스)이며, 그 말씀(로고스)이 성경에 기록되어 우리에게 전해지는 말씀은 레마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40일 금식 후에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마4:4)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말씀(로고스)이지만,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레마)를 사용한 것이며, 또한 본문에 나오는 “모든 말씀(레마)”은 예수님께서 레마로 주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상에서 로고스와 레마는 그 의미가 쉽게 구별되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성경해석 시에는 항상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로고스.포네.레마
 
로고스.포네.레마

1. 로고스와 포네와 레마는 모두 말씀이다. 하나님은 신이고 영이시고 말씀이다.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로서 신이며 초월적이고 제한받지 아니하는 영적존재이시고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시기 위해 말씀으로 나타나셨다.

신과 인간의 만남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영이신 조물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만남은 신과 인간의 상태로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는 방법으로 신이신 하나님이 제한 받지 아니하는 영이신 고로 말씀까지 될 수 있었다. 인간은 인간인 채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설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은 신과 인간의 만남에 있어서 피조물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하시지 않고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말씀이 되어 이 땅에까지 낯아져서인간을 만나러 오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두 존재가 서로 만나야 무엇을 주든지 받든지 하는 거래가 이루어진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지 아니하면 두 존재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날 수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고 받고 하는 일도 일어날 수 없으며 두 존재는 서로 상관이 없는 무관한 관계가 된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양보한 최선의 방법이 말씀이고 하나님이인간을 만나주는 최대한의 노력이 말씀이며 하나님이하나님을 인간에게 나타내는 최선의 수단이 말씀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노력과 양보는 왜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기 위한 오직 하나의 목적 때문이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들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이요 최선의 수단이고 최대의 기회이며 능력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서 예수 곧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말씀이 되셨다. 인간은 예수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예수를 주시기 위해 말씀으로 나아오시고 인간은 하나님에게 예수를 받기 위해 믿음으로 나아간다.
하나님과 인간은 예수를 주고 받기 위해 말씀으로 나아오시고 믿음으로 나아간다. 하나님과 인간은 예수를 가운데 두고 말씀과 믿음으로 만난다.
만약 예수가 없다면 아무리 인간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더라도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고 만약 예수가 없다면 아무리 인간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더라도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수가 없다.

인간이 예수를 전제로 하지 않고 성경말씀을 백번 통독하더라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으며 인간이 예수를 전제로 하지 않고 교회에 백년을 다니더라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을 주실 때 인간은 믿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 예수가 옮겨지고 예수의 거래가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예수 이름의 하나님과 예수이름을 영접하여 소유하게 된 인간이 동일한 예수 이름으로 화목하게 되고 기쁨으로 만나 한 가족이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천국가족이 되는 길이요 수단이다. 예수이름 외에는 천하인간에게 천국가족이 되는 다른 길이 없다(행4:12).

2. 말씀에서 로고스(Logos)와 포네(Phone)와 레마(Rhema)가 있다.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말씀이며 태초로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말씀이시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요1:1). 포네는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을 인간에게 전해주는 외치는 자의 소리(포네)에 의하여 인간에게 전달되고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을 인간이 적용되며 생명으로 나타나는 말씀이다.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포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말씀이며 아멘으로받아들여져 적용되는 말씀이다.
로고스와 포네와 레마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현실적인 육신적인 육신으로 나타나 인간이 소유하는 복이 되고 하늘의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요1:14,눅2:14).

포네의 소리는 선지자,종 또는 전도자들이 전한다.
로고스가 전기의 발전소이면 포네는 이를 운반하는 전선이고 레마는 전기가 빛으로 나타나는 전등이 된다. 태초에 계신 말씀 로고스(요1:1)를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포네로 전했고 (눅1:26-33)마리아가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로고스 말씀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나님의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되었다(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하나님을 외치는 소리가 있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1-3) 하며 전달하매 이를 명령으로 받아 수용하는 사람에게는 (요12:49-50, 요1:12)구원을 받아 영생하게 된다(요3:16).

3.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가 외치는 자의 소리 포네로 인간에게 전해졌을 때 이 말씀이 적용되는 레마 말씀으로 되려면 반드시 인간은 그 말씀을 명령으로 받아야 한다.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론이나 학문이나 지식등의 생각으로 분석하지 않고 이 말씀을 통째로 받아들여 자기의 이론과 생각으로 튼튼하게 세워진 인간의 견고한 진(고후10:3-6)을 파하며 말씀을 명령으로 받을 때(요12:50)

말씀이 영생이 된다(요6:68). 성경말씀은 진리(요17:17)인데 진리는 초자연적법칙은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 이해가 되지 아니한다. 자연 안에 있는 인간은 자연 밖으로부터 온 진리를 결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해가 안되고 납득이 안 되는 진리의 말씀은 인간이 따지지 않고 그대로 명령으로 받아야 된다.

이렇게 말씀을 명령으로 받으려면그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고 하나님은 무조건 옳고 선하다라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을 때 하나님의 말씀인 초자연적이고 이해가 안되는 진리의 말씀을 명령으로 받을 수가 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사흘을 있다가 나왔다든가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이 바다를육지같이 건넜다든가 사람이 기도하여 해를 중천에 붙들어 매었다든가 하나님이 친지를 창조하셨다는 등의 사실을 인간의 능력으로 어찌 이를 납득하고 이해할 수있겠는가 그러나 이는 사실이니 사람이 이를 믿음으로 받을 때 또한 이 모든 일들이 사실로 나타난다

이적중에 가장 큰 이적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셨으로 우리의 구세주예수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인간 예수가 인간의 그리스도 곧 메시야이심을 우리 인간의 생각이나 지식으로 어찌 믿을 수가 있겠는가. 도무지 인간의 능력이나 상상으로는 예수가 하나님이시고 인간의 구세주되심을 수용하고 받아들일수가 없는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를 명령으로 받아 믿어야 한다. 이를 믿어야 구원이 이루어지고 영생하게 된다. 이를 받지 아니하면 로고스 말씀이 레마 말씀으로 될수 없고 영생의 복을 소유할 수없다.

4. 한 율법사가 주님 앞에 나아와 어찌 하면 영생을 얻는지에 대하여 묻고 있는 말씀이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다(눅10:25-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에 율법사는 이웃이 누구인가를 물었고 예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 인을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는데 제사장과 레위인과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를 보고 피하여 가고 사마리아인은 그 불쌍히 여겨 도와 주었다.

율법박사인 율법사가 율법의 이웃을 묻고 있고 율법에 대하여 너무도 잘 알고 많이 읽고 많이 듣고 있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알고 있는 것을 행하지 않아 율법의 말씀이 저들에게 생명이 되지 못하였고 사마리아 인은 율법을 적게 알고 있었으나 이를 명령으로 받아 아는대로 행한고로 말씀이 생명이 된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말씀을 믿어 명령으로 받지 않고 세상의지식이나 학문과 같이 체세수단으로 받았지만 사마리아 인은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의 말씀을 명령으로 받았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듣고 가르치기만 하였고 믿음으로 받아 행하지 않았으므로 모두 멸망하였던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믿으면 나의 말을 믿을것이요 나의 말을 믿으면 이를 당연히 행하리라(요8:47)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니(약2:26) 하나님의 말씀은 영생인즉 말씀을 명령으로 받아 이를 행할 때 영생하느니라(요12:50) 아멘

 

 

 
 
 

 

 

성경말씀을 레마로 받을 수 있는 큐티하는 방법
 
( 매일 매일 말씀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 큐티 )
 
일시 :  년 월 일

성경본문적기:

내용을 여러번 읽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적어내려 갑니다.

1. 본문 내용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2. 나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신가?
 
3. 죄악이 어떤것이라고 하셨는가?
 
4.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약속하신 것은 무엇인가?
 
5. 내가 똑같은 사건을 보는데 어떤 각도에서 보는가?(말씀조명후)
 
6. 명령하신 것은 무엇인가?
 
7. 말씀 통해서 어떤 방향을 알게 하시는가?
 
 
*** (구주되신 주님과 교제를 통해 고백할 것들)

① 말씀을 읽으며 죄책감이 느껴지는 부분은 무엇인가?
 
② 말씀을 조명해서 감사할 부분은 무엇인가?
 
③ 기도 할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기
 
④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백을 구체적으로 적기.
 

매일 매일 충실히 큐티를 하면 반드시 성령 하나님의
터치를 받게 되시리라 확신합니다.

 

 

 

 
 
 

 

질문, 많은 목사님들이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합니다
 
안녕하세요.
전 고신대학교를 다니는 학생입니다. 캘거리 카페를 통해 많은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눈으로만 보다가 이렇게 궁금한 것이 있어서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합니다. 그런데 개혁주의는 이것을 구분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것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구분하지 않는 것을 자신들은 체험을 강조하기 위해서 구분한 것 때문에 잘못된 것 같은데, 제 생각이 맞는지요?


그리고 구분을 하는 것이 어떤 위험을 줄 수 있는지 자세히 알고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로고스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고 레마를 개인에게 감동과 감화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데, 말씀이 감동과 감화를 주는 것은 사실이라서 헷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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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질문에 감사드립니다. (김동진교수)




답글에서도 잠깐 언급하였듯이 솔직히 말씀드려서 님께서 하신 질문은 개인적으로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한 주제였습니다만, 질문해 주신 덕분에 자료들을 찾아 보던 중에,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님의 질문에 있어서 저의 관심은 우선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님의 지적과 같이 정말로 많은 목회자들이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여 설명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여 설명하려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두 단어를 구분하여 설명하는 데는 교파와 교단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가장 현저하게 강조하는 그룹은 은사주의를 표방하는 순복음이나 오순절 계통의 신학에 영향을 받은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니,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한국을 대표하는 보수 장로교회의 목사로부터 신정통주의를 부르짖는 또 다른 장로교단에 속한 목회자들과 성경 연구와 개인 묵상을 강조하는 일부 유명 선교 단체들, 그리고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것은 로마 가톨릭(천주교회)와 기독교 이단들 중에서도 매우 유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볼 때,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여 설명하는 일은, 적어도 한국교회에서는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며, 나아가 신앙적 내용과 배경이 전혀 달라야 할 천주교회와 이단에까지 공유되고 있는 보편적이며, 공통적인 성경 이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일반적인 현상을 확인한 이상, 저의 관심은 도대체 누가, 왜, 어떤 성경적 근거로서 이런 주장을 하게 된 것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다면, 자칫 현상만 나열하고, 그에 대한 성경적 대안을 찾을 수 없는 노릇이 되기 때문에, 후자의 관심을 정리하는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게 된 점을 양해해 주시리라 기대하며, 이제부터 님의 질문에 대해 구체적인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이들의 공통된 주장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사람들은 <로고스>와 <레마>는 ‘말씀’에 대한 두 가지 헬라어로 번역이라고 하면서, 의미면에서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로고스>는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레마>는 <로고스>되는 말씀이 청자의 구체적인 삶의 상황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즉 <로고스>는 객관적, 합리적, 이성적인 말씀인데 반해, <레마>는 주관적, 감정적, 개인적인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이 견해에 동조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고스>로서의 말씀의 기능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삶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는 <레마>로서의 말씀입니다. <로고스>의 말씀이 <레마>의 말씀으로 인간에게 임하게 될 때, 실제적으로 그에게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합니다. 이러한 <로고스>에서 <레마>로의 변화 과정에 적극적으로 요청되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한결같이 성령의 역사나 은사를 매우 강조합니다.




2. 이들의 <로고스>와 <레마> 구분은 과연 성경적인가?


우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사용된 두 단어의 용례와 구문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 신약 언어에 정통한 성경 사전만큼 도움이 되는 자료는 없습니다. 따라서 제가 소유하고 있는 두 가지 성경 사전(「킷텔 신약 원어 사전(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by Gerhard Kittel and Gerhard Friedrich)」, 「콜린 브라운 신약 사전(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by Colin Brown): 참고, 이 두 권의 사전은 신약 원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기술하는데 정평이 나 있는 좋은 사전임」의 내용을 꼼꼼하게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정당화 할만한 원어적 근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로고스>와 <레마>의 용법이 성경에서 전혀 차이가 없는 형태로 사용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로고스>의 경우, 헬라의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사용한 것과 또한 구약과 신약(그중에서도 요한복음서의 경우는 매우 특별함)에서 언급된 범례가 신학적으로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로고스>에 대한 일반적인 용례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로고스>와 <레마>를 전적으로 구분하여 하나는 기록된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경험되어진 말씀이라는 식의 해석은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한편 신약 성경의 헬라어 <로고스>와 <레마>는 구약 성경의 <다바르(rb'D'))>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 70인경(LXX)의 경우, <로고스>와 <레마>의 차이를 두지 않고서 상호 교환적으로 히브리어 <다바르>를 번역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예레미야 1:1,2에서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1절에서는 <레마>로, 2절에서는 <로고스>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러한 예는 성경에 부지기수입니다. <로고스>와 <레마>가 사용된 용례가 전혀 의미상의 차이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두 단어가 앞서 말씀드린 그러한 방식의 구분을 입증하는 사례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두 단어를 임의로 구분하여 설명하려는 시도는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성경의 본의를 왜곡하는 비신앙적 행위입니다.




3. 그렇다면 누가, 왜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가?


이미 앞서 ‘누가’에 해당하는 범주의 사람들을 말씀드렸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성경 해석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강조되고 있습니다. (1) 오순절식 성령 운동주의자(순복음 교회, 피터와그너 계열), (2) 로마 가톨릭 교회(천주교), (3) 워치만니 계열에속한 자(지방교회 혹은 형제교회), (4)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라>와 <알파 운동> 옹호론자(이단), (5) 칼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주창자


혹자들 중에는 (5)의 예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정통주의의 내면을 알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정통신학의 창시자로 인정받는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자들의 세속적인 성경 이해에 맞서 하나님 말씀 중심의 신학을 강조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을 3가지 형태로, 즉 계시된 말씀, 기록된 말씀, 선포된 말씀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이런 성경 이해는 성경과 하나님 말씀과의 차별을 인정하게 되면서, 성경은 인간에게 말씀으로 다가올 경우에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희한한 주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과 말씀과의 구별 혹은 차별은 결국 성경이 개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지의 여부는 성경을 읽거나 혹은 성경을 통해 느끼거나 하는 체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배태하였습니다. 흔히 Q.T라고 불리는 <말씀 묵상>이라는 성경 이해 방식이 신정통주의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근거로 보편화되었다는 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하지만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신학 이론을 만든 사람이라면, 찰스 파라(Charles Farah, 1926-2001)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미국의 은사주의 신학의 요람인 오랄 로버츠 대학(Oral Roberts University)에서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고전적 은사주의 운동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 신앙 운동’(the Word Faith movement)의 주창자였습니다. 이 운동은 신학적으로 오순절적 은사 운동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내용면에서 훨씬 더 미신적이고 물질적인 세속적인 은사주의 운동입니다. 그런데 이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찰스 파라가 고안해 낸, <로고스>와 <레마>의 구별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즉 <로고스>의 법적 성격의 말씀이 삶의 체험과 경험(대부분이 초자연적인 은사나 세속적 번영과 축복과 관련된 것이지만)으로서 <레마>의 말씀으로 변화를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적 혹은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여기는 반면, 말씀은 오직 체험이라는 구호를 부르짖습니다. 그러한 영적 체험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의 주관화가 중요한데,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성령의 신비적 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신앙 내용으로 취급합니다. 이러한 자들의 행태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듯이, 오늘날 <로고스>와 <레마>를 구별짓고자 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체험중심, 물질중심, 세속중심의 신앙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당화하려는 수작일 따름입니다.




4.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로고스>, <레마>나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군가가 그 능력을 체험했건 그렇지 않건 관계 없이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개인의 수준이나, 경험같은 어떤 조건에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영적 권위와 능력이 발휘되는 것은 오직 성령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개입에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아셔야 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해서 성도에게 역사하실때에는 성경을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은 질서없이 무분별하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 말은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아무렇게나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수단으로서 역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이 은혜를 끼치게 하시는 주체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은혜의 수단으로 삼으십니다. 그래서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고 완전한 ‘은혜의 방도’(메디아 그라티아에, media gratiae)라는 신학 용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정리한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서 입증하는데 신비적 경험이나 인간적 사색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성경을 은혜의 방도 삼으셔서 깨닫게 해 주실 때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뜻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간곡하게 부탁한 권면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4-17)


따라서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지혜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여 바르게 배우며, 익히며, 깨달아 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영적으로 혼미한 세상에서 참된 구원의 도리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말씀으로 영적 분별력을 기르며, 말씀을 통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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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향 파트리스



πατρίς, ίδος, ἡ 스트롱번호 3968

1. 조국.   2. 고향
발음 [ patris ]
어원 /  3962에서 유래
  • 1. 조국, 고국, 요 4:44, 히 11:14.
  • 2. 고향, 마 13:54, 막 6:1, 눅 4:23.
  • 관련 성경 /  고향(마 13:54, 눅 4:23, 요 4:44), 본향(히 11:14).


3962. 파테르  πατήρ, πατρός, ὁ   

1. 아버지.  2. 조상
발음 [ patēr ]
  • I.  아버지.
  • II. [문자적으로]
    • 1. 아버지, 마 2:22, 막 5:40, 눅 1:17, 요 4:53.
    • 2. 조상, 선조, 마 3:9, 눅 1:73, 요 4:53.
  • III. [상징적으로]
    • 1.  영적인 아버지, 고전4:15.
    • 2.  [경칭] 마 23:9, 행 7:2, 22:1.
    • 3. 교회의 늙은 회원, 요일2:13,14.
    • 4. 이미 죽은 여러 세대의 기독교인들, 벧후3:4.
    • 5.  [구약의 위대한 종교적 영웅을 가리킨 경우] 롬4:11,12.
  • IV.  [하나님을 가리키는 경우]
    • 1. 창시자 또는 지배자로서의 아버지, 히12:9, 약1:17.
    • 2. 인류의 아버지.
      • a. [예수님의 증거에 나타난 것] 마11:27, 눅2:49, 요2:16.
    • 3.  [그리스도인의 고백에 나타난 것] 롬15:6, 고후1:3, 계1:6.
    • 4.  [하나님을 단순히 아버지라 부른 경우] 엡2:18, 3:14, 요일1:2.
  • V.  [귀신에 대해서]
    • 1. 유대인의 조상, 요8:44.
    • 2. 거짓말의 아버지, 요8:44.
  • 아버지(마 2:22, 눅1:59, 요5:17, 행16:3, 살전1:1), 조상(마 3:9, 눅1:32, 고전10:1), 열조(히 3:9, 8:9), 부모(히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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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dos

아히-닥스'

품사: 명사 여성

에이도스 정의

NAS 단어 사용 – 총계: 1

  1. 수치심이나 명예, 겸손, 수줍음, 존경, 타인에 대한 배려, 존경

성경에서 겸손을 논할 때 그리스어로 아이도스(Aidos)가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성서의 맥락에서, 겸손의 미덕을 논할 때 그리스어 단어 “아이도스”는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아이도스'라는 용어는 단순한 겸손의 번역을 넘어 풍부하고 미묘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Aidos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면 겸손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이도스(Aidos)는 겸손, 존경, 존경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여기에는 타인에 대한 깊은 배려, 부적절한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 자신에 대한 겸손한 태도가 포함됩니다. 성경에서는 겸손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고 다른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는 미덕으로 자주 묘사됩니다.

겸손을 언급하는 성경 구절을 살펴보면, 우리는 종종 아이도스(Aidos)라는 기본 개념을 접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빌립보서 2:3-4에서 우리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헛된 자만으로 하지 말라.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귀히 여기고 자기 이익을 돌보지 말고 각 사람의 이익을 돌보아라.” 이 구절은 다른 사람을 우선시하고 그들의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겸손, 즉 아이도스(Aidos)의 개념을 요약합니다.

더욱이 아이도스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존경심과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한계와 불완전함을 인식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항복하고 복종하는 태도를 반영합니다. 야고보서 4장 10절에서 우리는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상기시켜 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는 이러한 행위는 아이도스의 본질, 즉 하나님의 권위를 경건하게 인정하고 그분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과 일치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리스 문화의 수치심과 존중의 개념에서 아이도스는 어떤 역할을 합니까?

성경에 나오는 단어와 개념의 뉘앙스를 조사하려면 고대 그리스 사회의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러한 단어 중 하나인 "아이도스(Aidos)"는 그리스 문화에서 수치심과 존경심에 관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성경의 맥락에서 아이도스는 명예, 수치심, 존경의 개념과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 문화에서 아이도스는 단순한 당혹감보다 더 넓은 의미로 수치심이라는 개념을 포괄했습니다. 그것은 옳고 정의로운 것에 대한 뿌리 깊은 도덕적 수치심이나 존경심을 나타냅니다. Aidos에는 권위, 전통 및 사회적 규범에 대한 존중의 강력한 요소도 포함되었습니다. 이 개념은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개인의 행동과 윤리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아이도스라는 용어는 다양한 문맥에서 나타나며, 종종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존경심과 관련됩니다. 이는 신에 대한 깊은 존경심과 명예를 의미하며, 아이도스를 경건과 도덕적 의식과 얽힌 미덕으로 이해하는 그리스 문화를 반영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이도스의 개념은 도덕적 성실성, 겸손,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외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는 개인이 자신의 행동과 다른 사람과의 상호 작용에서 존엄성, 정의, 명예를 지키도록 안내하는 도덕적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 문화와 성경적 맥락을 통해 아이도스는 수치심, 존중, 명예, 존경의 상호 작용을 구현하는 다면적인 개념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사회에서 조화로운 관계를 조성하고 도덕적 가치를 유지하는 데 있어 성실성, 겸손, 윤리적 행동의 지속적인 가치를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스어로 된 아이도스(Aidos)에 대한 이해는 성경 이야기에서 겸손과 명예라는 주제를 어떻게 밝혀 줍니까?

성경 이야기에서 그리스어 단어를 탐구하면 겸손과 명예와 같은 개념의 뉘앙스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 단어 중 하나는 'Aidos'입니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아이도스(Aidos)는 겸손, 존경, 수치심이라는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의 맥락 내에서 아이도스는 다양한 이야기에서 겸손과 명예의 복잡한 상호 작용을 탐구할 수 있는 렌즈를 제공합니다. 아이도스를 통해 이해되는 겸손은 단순히 겸손한 태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에 대한 깊은 존중을 포함합니다. 이는 개인의 행동과 그것이 공동체의 명예와 평판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인식을 반영합니다.

아이도스(Aidos)의 개념은 여러 성경 이야기의 구조에 복잡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우리는 등장인물이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에서 강한 아이도스 감각을 나타내는 사례를 봅니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한 룻의 변함없는 충성심은 겸손과 명예에 대한 깊은 감각을 예시합니다. 그녀의 행동에는 가족 유대에 대한 깊은 존경심과 의로움과 고결함을 수호하려는 헌신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사람의 행동에 있어 아이도스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산상수훈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된 영예로 이끄는 미덕으로서 겸손과 온유의 가치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이도스가 다른 사람을 향한 자신의 행동을 안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마음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그리스어 아이도스(Aidos)의 풍부함을 탐구함으로써 우리는 성경 이야기에 묘사된 겸손과 명예의 복잡한 역동성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행동과 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들 모두를 존중하는 미덕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성찰하도록 도전합니다. 우리가 삶의 복잡성을 탐색할 때 Aidos의 개념은 우리의 행동이 우리 지역 사회의 존엄성과 명예 보존에 미치는 중대한 영향을 상기시켜 주는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결론

결론적으로, 성경 문맥에서 헬라어 단어 “아이도스(aidos)”는 깊고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종종 “경외” 또는 “존중”으로 번역되는 아이도스는 하나님을 향한 겸손과 명예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의 유래와 뉘앙스를 이해하면 성경 본문이 전달하고자 하는 미덕과 가치에 대한 더 명확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이도스(aidos)”와 같은 그리스어 성경 단어의 언어적 풍부함을 더 깊이 탐구함으로써 우리는 신성한 본문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감상을 풍요롭게 하는 의미의 층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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ἐκκλη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1577


1. 회.   2. 모임, 운집. 3. 행 7:38
발음 [ ĕkklēsia ]
  • I.  회[정기적으로 소집되는 정치단체로서의 회합].
  • II. 모임[일반적인],운집, 행19:32,41.
  • III. [특히 종교적인 목적으로 모던 이스라엘 민족의 회중] 행7:38, 히2:12.
  • IV. [기독교] 교회 또는 회중.
    • 1. 교회 모임, 고전11:18, [참조] 고전14: 4,5,19,28,35.
    • 2. [한 장소에서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 전체로서의] 교회 또는 회중, 마18:17, 행5:11, 8:3, 고전4:17, 빌4:15, [참조] 행15:22. [주]
      • a. [보다 제한적으로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교회] 행8:1, 11:22.
      • b. [겐그레아에 있었던 교회] 롬16:1.
      • c. [고린도] 고전1:2, 고후1:1.
      • d. [데살로니가] 살전1:1, 살후1:1.
      • e. [골로새] 몬1:2.
      • f. [다른 명칭으로] 계2:1,8,12,18, 3:1,7,14. [복수] 행15:41, 16:5, 롬16:16, 고전7:17, 고후8:18,19,23, 24.
      • g. [유대지방에 있는 교회들] 갈1:22, 살전2:14.
      • h. [갈라디아] 고전16:1, 갈1:2.
      • i. [아시아] 고전16:19, 계1:4.
      • j. [마케도니아] 고후8:1.
      • k. [각 개개의 교회에서] 행14:23.
    • 3. [가정 교회에 대해서] 롬16:5, [참조] 고전16:19, 골4:15, 몬1:2.
    • 4. [보편 교회] 마16:18, 행9:31, 고전6:4, 12:28, 엡1:22, 3:10,21, 5:23, 24,27,29,32, 빌3:6, 골1:18,24, 딤전5:16. [주] 지교회이자 보편교회는 특히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교회’로 불린다. 이것은 본래 바울이 쓴 용법 이며 현재 헬라어 용어에 기독교적 색 채를 가미시켜주며 따라서 특별한 의미를 제공하는 데 기여한다.
      • a. [하나님의] 행20:28, 고전1:2, 10: 32, 11:16,22, 15:9, 고후1:1, 갈1:13, 살전2:14, 살후1:4, 딤전3:5,15.
      • b. [그리스도의] 롬16:16.
      • c. [두 가지가 함께] 살전1:1.
      • d. [기타 특별 형태] ἐ. τῶν ἁγίων, 고전14:33, ἐ. τῶν ἐθνῶν, 롬16:4.
  • 관련 성경  / 교회(마 16:18, 행 2:47, 롬 16:4), 모인 무리(행 19:32), 민회(행 19:39), 모임(행 19:41).

에크
ἐκ 스트롱번호 1537

1. 모음 앞에서는 ἐξ.  2. 마 2:15. 3. 요 15:19
발음 [ ĕk ]
I. 모음 앞에서는 ἐξ, 소유격 지배전치사: ~로부터, ~에서, ~의 밖으로.

καλέω 스트롱번호 2564

1. 부르다.  2. ㉠ ~라고 부르다. 3. 초대하다
발음 [ kalĕō ]
  • 1.  부르다.
    • a.  ㉠ ~라고 부르다, 이름하다, 일컫다, 마21:13, 눅20:44, 롬9:25, 약2:23. ㉡ 이름을 주다, 명명하다, 눅1:59. ㉢ [수동] 이름을 받다, 이름을 가지다, 일컬음을 받다, 눅1:60, 행1:19. ㉣ ~라고 한다, 마2:23, 눅1:32, 고전15:9, 히3:13.
    • b.  초대하다, 마22:3, 눅14:8, 고전10:27.
    • c.  불러모으다, 마20:8, 22:3, 25:14, 눅19:13.
    • d.  부르다, 마2:15, 행3:11, 히11:8.
    • e.  호출하다, 마4:21, 막1:20, 행4:18, 24:2.
  • 2.  [비유적] 부르다, 마9:13, 막2:17, 롬4:17, 고전1:9, 벧전5:10.

미완료 ἐκάλουν, 미래 καλέσω, 제1부정과거 ἐκάλεσα, 완료 κέκληκα, 완료 수동태 κέκλημαι,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κλήθην, 미래 수동태 κλη- θήσομαι, 2753의 어간과 유사

  • 관련 성경 / 부르다(마2:7, 막2:17, 행4:18), 일컬음을 받다(마5:19), 청하다(마22:3, 눅14:10, 12), 칭하다(마22:43, 눅20:44, 행3:11), 일컫다(마27:8, 눅1:32, 요일3:1), 이름을 짓다(눅1:62), 청함을 받다(눅14:8, 요2:2), 부르심을 받다(고전7:18,22, 엡4:1, 골3:15, 딤전6:12), 부르심을 입다(갈5:13).
창세기 19:29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So when God destroyed the cities of the plain, he remembered Abraham, and he brought Lot out of the catastrophe that overthrew the cities where Lot had lived.

마태복음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And I tell you that you are Peter, and on this rock I will build my church, and the gates of Hades will not overcome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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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의 상표




르까프(le CAF)

​나이키, 아식스, 라피도와 관련된 어원을 살펴보았습니다.

1. 르까프(le CAF)의 의미

​"le CAF"라는 이름은 근대 올림픽의 모토(motto)인 라틴어 "Citius Altius Fortius(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의 각 단어 앞글자를 조합한 CAF에 프랑스어 전치사 le를 붙인 것입니다.

​참고로 남성명사 앞에 붙이는 프랑스어 전치사 le는 "저것"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지시대명사 남성형인 ille에서 il-이 떨어져 나가면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2. citius의 의미와 파생된 영어 단어들

​citius(더 빠르게)는 "빠르게"라는 뜻의 라틴어 부사(adverb) cito의 비교급입니다. 

cito는 "빠르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형용사 citus, "움직이게 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동사 cieo(ciere-civi-citum)의 변화형입니다.

​영어 단어 excite(흥분시키다), incite(자극하다) 등의 단어에 포함되어 있는 cite는 위에서 말씀드린 라틴어 동사 cieo(ciere-civi-citum)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3. altius의 의미와 파생된 영어 단어들

​altius는 "높게"라는 뜻의 라틴어 부사(adverb) alte의 비교급이며, 라틴어 부사 alte(높게)는 라틴어 형용사 altus(높은)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높이"나 "고도"를 뜻하는 영어 단어 altitude가 altus에서 파생된 단어이며, 음악에서 테너(tenor)보다 높은 음역대를 나타내는 알토(alto) 역시 altus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4. fortius의 의미와 파생된 영어 단어들

​fortius는 "강하게"라는 뜻의 라틴어 부사(adverb) fortiter의 비교급 형태로, 라틴어 형용사 fortis(강한)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fortis에서 파생된 가장 대표적인 영어 단어로 "힘"을 뜻하는 force가 있으며, comfort(위로하다), effort(노력하다), fortify(확고히 하다) 등의 단어도 fortis에서 파생된 단어들입니다.



나이키 로고 이야기 - 시작부터 현재까지(Nike Logo Story)

 


나이키 로고는 정말 역사적인 로고입니다. 50년의 역사를 최고로 지켜온 나이키, 나이키 로고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로고디자인 관점에서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나이키 브랜드의 가치는 항상 최고를 달립니다. 2020년에도 구찌, 루이뷔통, 아디다스를 앞질러 1위를 차지했습니다.


나이키 스우시 로고의 시작


나이키의 역사는 1971년 포틀랜드 주립대의 그래픽 디자인 전공 대학원생 캐롤린 데이비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시간당 2달러로 17시간 30분 작업을 통해 총 35달러를 받고 역사적인 로고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굳이 계산해보자면 현재 인플레이션 감안 25만 원 정도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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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식스(ASICS)

지난 포스팅에서 "나이키(NIKE)"의 어원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번 포스팅에서는 다른 스포츠 브랜드인 ASICS와 관련된 어휘를 살펴보겠습니다.

1. ASICS의 의미

ASICS는 "Anima Sana in Corpore Sano(아니마 사나 인 코르포레 사노 :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영혼이 깃든다)"라는 라틴어 표현의 약어입니다.

원래는 고대 로마의 풍자시인 유베날리스(Decimus Iunius Iuvenalis)가 처음 사용한 표현인 "Mens Sana in Corpore Sano(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를 변형하여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MENS SANA IN CORPORE SANO (DECIMVS IVNIVS IVVENALIS)

2. anima와 mens의 의미와 파생된 영어 단어들

anima(f.)는 "숨, 영혼"을 의미하는 라틴어 여성형 명사로 영어 단어 animal(동물), animation(애니메이션)의 어원이 되는 단어입니다.

mens(f.)는 "정신"이라는 뜻의 라틴어 여성형 명사로 영어 단어 mental(정신의), dementia(치매), comment(말, 언급, 논평) 등의 어원이 되는 단어입니다.

3. sana, sano의 의미와 파생된 영어 단어들

sana와 sano는 모두 라틴어 형용사 sanus(건강한, 건전한)의 변화형들입니다.

sana는 sanus의 여성형으로 여성형 명사인 anima(f.)를 수식하기 위해 여성형으로 바뀐 형태입니다. 그리고 sano의 경우, 전치사 in(~안에)은 뒤에 5격을 가지기 때문에 sanus의 5격 형태인 sano으로 변화한 형태입니다.

sanus에서 파생된 영어 단어로는 sane(제 정신인), insane(제 정신이 아닌) 등이 있습니다.

4. corpore의 의미와 파생된 영어 단어들

corpore는 "몸, 신체, 시체"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 중성형 명사 corpus(n.)의 5격 형태입니다. sano와 마찬가지로 전치사 in 뒤에서는 corpus(n.)가 5격 형태인 corpore로 바뀝니다.

corpus(n.)에서 파생된 영어 단어들로는 corps(단체, 군대의 부대), corporation(기업, 법인), corporal(신체의)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