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상에서 "로고스(논리, 원칙, 이성)"와 "레마(대화하는 언어, 말씀)"를 구분하여 이렇게 설명하는 내용을 자주 읽게 됩니다.
로고스는 논리, 원칙, 이성이란 의미 레마는 (대화하는) 언어, 말씀이란 의미 따라서 로고스는 주로 문자로 기록된 말씀 레마는 언어로 선포된 말씀이라고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로고스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 레마는 기록된 말씀 중에서 특별히 나에게 영적 감동을 주는 말씀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주관적인 입장입니다. 성경 전체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고스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대략 331회 레마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대략 70회 로고스와 레마를 정확하게 분석하려면 위에 열거된 모든 구절을 읽고 살핀 후에 바르게 해석해야만 합니다.
어느 특정 선교 단체에서 몇 구절을 인용하여 레마의 의미를 마치 어떤 능력이 임한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신앙에서 이탈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소개합니다.
마태복음 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레마)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로고스) 받으리니.”
마태복음 18:15-16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레마) 확증하게 하라.”
마태복음 12:36-3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하릴없는 레마(말)를 하든지 심판 날에 그것에 대해 로고스(심문으로 번역됨)를 줘야 하리라. 네 로고스(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로고스(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누가복음 3: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레마)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요한복음 12: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레마)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로고스)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즉, 예수님의 그 당시 발언 혹은 증언을(레마) 받지 않았던 사람들은 곧 예수님이 한 그 말이(로고스) 그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10:42-44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을(레마) 할 때에 성령이 말씀(로고스)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이 구절에서 보면 오히려 레마는 베드로의 증언(발언)이었고 로고스는 그 내용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6:16-19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레마)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로고스)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λόγ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056
어원 / 3004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말(마5:37, 눅1:20, 행2:22),
말씀(마8:8, 막4:15, 행6:2, 11:19, 14:25, 살전1:6), 소리(눅 3:4), 소문(눅7:17,
행11:22), 이야기(눅24:17), 글(행1:1), 언변(고전1:5), 모양(골2: 23), 일(행15:6, 18:15,
19:40), 고발(행19: 38), 전도(골4:3), 결산(마18:23, 25:19), 전파(막1: 45), 말씀(막2:2,
요2:22, 행20:35), 고(벧전4:5), 예언(벧후1:19), 이유(마5:32, 벧전3:15).
ῥῆμα 스트롱번호 4487
발음
[ rhēma ] 어원 / 4483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말씀(마4:4, 눅1:37, 행5:20), 말(마5:11, 행2:14, 고후12:4), 일(눅2:15, 행5:3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로고스(λόγος)와 레마(ῥῆμα) -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λόγος)와 레마(ῥῆμα)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신약 성경은 두 단어 모두 큰 구별 없이, 말 혹은 말씀으로 번역합니다. 원어로 보지 않는 한 어떤
구절이 로고스이고 어떤 구절이 레마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신약에 331번 등장하는 로고스가 말, 말씀, 이야기, 진술 등을
뜻하는 광범위하고도 포괄적인 단어라면 70번 등장하는 레마는 ‘발언’을 뜻하는 구어(口語)입니다. 로고스의 숫자를 더하게 되면
7이(3+3+1) 나오고 레마는 70이 됩니다(하나님의 완전수 7과 70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단을 참조).
‘로고스’는 성경에 적힌 일반적인 하나님의 말씀 ‘레마’는 내게 주는 특별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며 계시라고 주장
레마를 통해 성령의 권능이 강력하게 역사하며 주님을 영적으로
만나게 된다는 근거 없는 주장으로 교회를 미혹하며 혼탁 시킵니다.
몇 년 전 이런 주장을 하며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던 사람이
가는 곳마다 파탄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레마와 로고스가 들어간 모든 구절을 뽑아 비교 분석하였고 레마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성경이 뒷받침되지 않는 주장임을 발견했었습니다.
물론 70번 나오는 레마 구절들을 읽다 보면 레마엔 로고스와는 다른 특별하고 비밀스러운 어떤 힘과 능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레마가 나오는 몇 유명 구절 중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레마) 살 것이라(마 4:4)’, ‘주의 말씀(레마)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 던져(눅 5:5)’, ‘내 말이(레마)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레마)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 5:26)’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로고스가 나오는 331구절을 읽어보지 않기에 오는 착각일 뿐입니다. 로고스 구절들을 모두 읽어본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로고스든 레마든 살아 움직이는 능력의 말씀임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오해는 그보다도 더 근본적인
어원을 무시한 탓일 것입니다. 여러 형태의 말(로고스) 중에서도 특별히 레마는 구어(口語)를 뜻하며 여러 사람 앞에서의 공식적인
‘발언’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정도 차이를 갖고 로고스가 성경에 적힌 문자라면 레마는 살아서 움직이는 ‘로고스’, ‘성령으로
변화 받은 능력 있는 영의 언어’라고 까지 비약하는 건 미혹하는 영의 역사일 뿐입니다.
레마에 대해 연구하다 얻은 유익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마태복음 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레마)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로고스) 받으리니.”
이 구절을 그냥 ‘말’의 의미로 읽으면 보통 부담되는 구절이 아닙니다.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실없고 무익한
말을 많이 하나요. 영어로 직역하면 ‘하릴없는(idle)’인데, 이처럼 마음에도 없고 일없이 괜히 한 말까지도 심판 날에
심문받아야 한다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레마’가 ‘발언’을 뜻한다는 걸 알자 이해가 됐습니다. 이 구절은 공식적으로
쓸데없는 발언 혹은 증언을 하는 경우이지 일상적인 경우를 말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역시 주님께서 말씀하신 다음
구절에서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레마) 확증하게 하라(마 18:15-16)”
마태복음 12장 36절엔 레마와 로고스가 같이 쓰였다는 것입니다. 두 원어를 넣어서 36절과 37절을 직역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하릴없는 레마(말)를 하든지 심판 날에 그것에 대해 로고스(심문으로 번역됨)를 줘야 하리라. 네 로고스(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로고스(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사람들 앞에서(주로 공식적인) 하릴없는 발언이나 증언을 한 사람은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서 그것에 대해 말해야(변론 혹은 보고) 할 것입니다. 그 말에 따라 의롭다 함을 받을 수도 있고 정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레마만 특별한 계시의 말씀인 것처럼 인용되는 구절 중 하나는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레마)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2)” 라는 세례 요한에게 말씀이 임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에 대한 다른 두 구절엔 레마가 아닌 로고스가 쓰입니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로고스)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요 10:35).” 한국어 번역이 이렇게 되어서 어감이 약간 다르게 느껴집니다.
영어로는 “If he called them gods, unto whom the word of God came, and the scripture cannot be broken;(요 10:35).” 누가복음 3장 2절은 “Annas and Caiaphas being the high priests, the word of God came unto John the son of
Zacharias in the wilderness.”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인데
예수님이 시편을 인용하신 구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임한 말씀’을 오히려 로고스로 썼고, 세례 요한 부분은 레마로 쓰였습니다.
또한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고전 14:36)”며 따진 구절도 ‘로고스’가
쓰입니다. 영어로는 “What? came the word of God out from you? or came it unto you only?” 직역하면, “무엇이라? 너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나왔더냐? 아니면 너에게만 그것이 임했더냐?”입니다.
레마(ῥῆμα)와 로고스(λόγος)의 차이가 어떤 신비나 능력에 있지 않고 그저 상황에 맞게 쓰인 것뿐이란 걸 증명하는 좋은 방법은 아무래도 두 단어가 한 구절에 같은 용도로 쓰인 경우를 보는 걸 겁니다.
다음은 그런 경우의 몇 구절입니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레마)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로고스)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요 12:48).” 즉, 예수님의 그 당시 발언 혹은 증언을(레마) 받지 않았던 사람들은 곧 예수님이 한 그 말이(로고스) 그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을(레마) 할 때에 성령이 말씀(로고스)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 10:42-44).” 이 구절에서 보면 오히려 레마는 베드로의 증언(발언)이었고 로고스는 그 내용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레마)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로고스)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 6:16-19).” 로고스를 폄하하고 레마를 신비롭고
영화롭게 하려는 사람들은 아마도 엡 6:16-18절까지만 인용할 것 같습니다. 이 두 구절만 보면 마치 레마가 특별한 것 같지만
이어지는 19절까지 보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는 말씀으로는 ‘로고스’가 쓰였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더하고 빼고
뜻을 왜곡하는 일은 단 에덴동산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마지막 예로,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레마)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로고스)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히 12:18-19).” 이 구절에서도 레마와 로고스는 같은 의미지만 상황에 맞춰 쓰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로고스)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란 구절은 레마가 아닌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그냥 흰 종이에 검은 글씨이고(그들의 말대로), 레마는 살아있는
로고스로서 능력 있는 말씀이란 주장이 얼마나 근거 없는지 잘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또한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로고스)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4).”에서도 청년들 안에 거한 로고스(말씀)로 흉악한 자를 이겼다고 하지 레마로 이겼다고 하지 않습니다. ‘로고스’는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요 1:1, 14)’을 칭하는 표현이기도 한데 이렇게 로고스를 무시하는 생각과 궤변이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이지 깊이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레마가 로고스보다 한 수 아래다’란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로고스는 살아 있는 말씀, 능력의 말씀이
아니라는 주장에 반론을 제시하다 보니 로고스에 치중해서 글을 쓴 것뿐입니다. 로고스든 레마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면 능력
있고 살아서 역사하는 말씀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저 허공에 흩어지는 말일 뿐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God of Numbers:7(70)이란 숫자의 의미
“3이란 숫자를 생각하니 베드로의 3번의 부인과 3번의 고백 사이에 예수님의 3개의 못자국도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만났을
때 사랑하느냐 물어보시는 주님의 손과 발에 못자국을 베드로는 어떤 마음으로 보았을까 떠올려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엔 3개의 십자가만 있었던 게
아니라,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의 몸에도 3개의 못이 박혔습니다. 양손(혹은 손목)과 두발목을 관통한 3개의
못은 4개의 상처를 남기고 옆구리의 찔린 상처까지 더하면 5가 됩니다. 하나님이(3) 세상을(4) 사랑하신 은혜의 죽음이(5)
십자가였음을 다시 묵상하자니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에 나오는 7개의 간구도 3개는 하나님에 관한 것, 4개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음이 상기되었습니다(마 6장 9-13).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수이면서 안식과 영적 완전함과 완성을 뜻하는 7에 대해 적으려 합니다. 7은 성경에 자주 등장할 뿐만
아니라 너무도 중요한 숫자이기에 3처럼 일일이 다 적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주요 포인트만 적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6일간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7일째 되던 날 안식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는
창세기 1장 1절은 7단어의 히브리어(바라싯 바라 엘로힘 에트 하샤마임 워에트 하아레스)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총 28개(7×4)의
히브리 알파벳으로 되어 있습니다(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열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구절이 하나님의 수
7과 세상과 창조물의 수인 4의 곱셈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성경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숫자 7은 지난 글에 적었던 것처럼 숫자 3과 같이 일하는 경우를 꽤 발견하는데 숫자 10과도 그러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7단어의 히브리어로 구성된 창세기 1장 1절은 10단어의
영어(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로 번역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 하나님이 데려가신 에녹은 아담의 7대손이었고 심판의 홍수에서 구원을 얻은 노아는 10대손이었습니다. 그는 정결한 동물은 암수 일곱씩 방주에 들였으며(창 7:2), 방주에 들어간 7일 후에 홍수가 지면을
덮었습니다(창 7:10). 노아라는 이름이 성경에서 7번째로 등장하는 부분은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입니다.
이런 7과 10을 더한 17은 부활 승리를 의미하는 중요한 숫자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직접 이름을 지어주시거나 바꿔주신 이름이 몇 번인지 궁금해서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적어도 제가 찾은 것으로는 모두 17번이었습니다.
또한 7과 10을 곱한 숫자인 70도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7년의 가뭄과 7년의 흉년을 맡아 관장하던 요셉의
초청으로 에굽으로 야곱과 함께 내려간 가족의 수는 모두 70명이었습니다(출1:5). 야곱이 죽자 요셉은 그 몸을 40일간 향으로
처리하게 했고 에굽인들은 70일간 애곡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사역을 도울 70장로를 세우는데(출24:1), 에스겔서에도 70장로가 나오고(겔8:11)
예수님도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70인을 세워 둘씩 짝지어 내보내십니다(눅10:1-17). 그런 반면에 적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아비멜렉은 아버지에게서 난 70명의 형제를 한칼에 죽입니다(삿 9:56). 40이란 수가 주로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개개인의
시험 및 연단의 기간을 뜻하는 수라면, 70이란 기간은 한 나라의 시험 및 연단의 어떤 기간을 뜻합니다. 이스라엘만 우상숭배로
바벨론에 멸망당했다가 70년의 포로 기간이 끝난 후 돌아와 다시 나라를 재건한 게 아닙니다. 이사야서에는 두로에 대한 70년
예언도 나옵니다. 두로는 70년간 잊혀질 것이나 70년 후에는 창녀처럼 노래하고 그 70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찾아오시리니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모든 나라와 음란을 행할 것이라고 합니다(사 23:15-17). 개역개정은 이 부분을
‘하나님이 돌보신다’로 번역했지만 이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성경에서 쓰이는 ‘하나님이 방문하신다(visit), 찾아오신다’는
표현은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려고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천사가 직접 방문하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복된 약속의 성취일 수도
있고(약속의 자녀인 이삭이나 에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의 경우), 은혜와 구원(룻 1:6), 죽음(민 16:29), 혹은 심판의
때가 임한 것일 수도(출 20:5, 32:34) 있습니다(킹제임스 영어성경에서 ‘visit’을 찾게 되면 모두 80번 나오는데
구절들을 일일이 읽어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의하면 이스라엘에 죄와 허물이 그치고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 환상과 예언이 응하여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시기까지의 70주, 혹은 70개의 7일이 정해져 있습니다(단
9:24). 다니엘이 바벨론의 포로 기간 가운데 받은 이 예언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주님은 내게 죄를 범한 형제를 7번은 용서해야 하는 거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70의 7번이라도 용서해주라고 하십니다(마18:22).
7은 또한 은혜의 수인 5와도 함께 일해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상징하는 12를 이루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담은 창세기 1장과 2장엔 ‘창조’란 단어가 5구절에 걸쳐 7번
나옵니다(창1:1, 21, 27(3번), 2:3, 2:4). 킹제임스 영어 성경에서 “사랑하는 아들(beloved son)”을
찾게 되면 11번 나오고 “사랑하는 아들들”이란 복수형까지 포함하면 12번 나온다는 걸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향한 ‘내 사랑하는 아들(my beloved son)’이란 표현은 정확히 7번 나온다는 것입니다.
모세 5경에도 7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첫째로는 여호와의 7절기가 있습니다. 7절기 중 무교절은 7일간 무교병을 먹으며(레 23:6) 오순절은 초실절부터 7번의 안식일을 센 다음 날, 즉 50일이 되는 날을 기념하는 절기로 성령이 강림하신 날이기도 합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에녹이 태어나고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신 날 또한 오순절이라고 하는데 전승이니 권위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리고 나팔절은 7번째 달의 첫날이며 장막절은
7번째 달 15일부터 7일을 셉니다(레 23장). 레위기에는 7이 들어간 구절이 57번 나오는데,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으로 섬기기 전에 7일간 거룩히 구별해야 했습니다(레8:31-36). 속죄절에는 대제사장이 속죄소에(긍휼의 자리) 7번 피를
뿌려 속죄해야 했는데(레16:14) 이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피의 속량을 나타냅니다(히 9:12). 성소에 있던 금으로 된 등잔대의
7줄기의 빛도 사람의 혼을 비추는 하나님의 완전한 빛을 상징합니다.
또한 7일마다 7번째 날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던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7년마다 땅에 안식년을 주어 씨를 뿌리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레25:4). 그리고 7번의 안식년, 즉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을 7번 계수해서 49년이 된 다음 해인
50년은 희년으로 거룩하게 하여 자유를 공포해야 했고 각자 자기 소유지와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했습니다(레25:8-10).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귀한 법은 모두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표하는 것들이기에 지켜졌어야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70년 바벨론의 포로기를 통해 땅이 그동안 도둑맞았었던 안식년을(7년마다 취해야 하는 안식년 70번은 490년의
불법의 세월에 해당합니다) 누리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대하 36:21).
7과 6의 관계도 하나님의 수와 인간의 수의 합계에서 오는 독특한 의미가 있습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의 첫 전투였던 여리고성을 하나님은 매일 한
번씩 6일을 돌되 7일째 날에는 7번을 돌고 함성을 지르라고 하십니다(수 6:3-4). 즉, 여리고 성은 7 제사장들이 7 나팔을
메고 총 ’13번’을 돌고 무너져내린 게 됩니다. 연약한 인간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승리의 역사를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1장의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 예수님의 계보는 14세대씩 3그룹으로 묶인 42대인데, 7과 6의 곱셈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42는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을 잘 나타내는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12 제자를 두셨는데, 주님까지
합치면 13이 되며 그중 한 제자가 배반합니다. 이처럼 13은 타락과 배반의 숫자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13이란 숫자가 처음
나오는 구절은 창세기 14장 4절인데, 12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던 5 나라가 13년째가 되었을 때 배반해서 4 나라와 전쟁을
일으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대적하는 도시의 상징인 바벨론의 시조는 니므롯인데, 함의 13대손입니다(창 10:9-10).
에스더가 여왕으로 있을 때 하만은 왕을 속여 첫째 달 13일에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라는 왕명에 서명하도록 했고 이를 시행할 날짜는
열두째 달 13일이었습니다(에3:12-13). 마가복음 7장 21-22절에 주님은 부패한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13가지의 죄악들을(악한 생각,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질투, 비방, 교만, 우매함)
열거하십니다.
솔로몬은 7년간(왕상 6:38) 성전을 지었고 일곱째 달 절기에 궤를 메어 선전의 내소인 지성소로 들였는데, 7일과 7일
도합 14일을 절기로 지켰습니다(왕상 8장). 성경엔 7과 2를 곱한 14란 수도 자주 발견되는데, 14는 구원과 속량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보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14대,
그리고 바벨론 이후 그리스도까지 14대로 총 3번의 14대가 나옵니다(마1:17). 마태복음의 기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하나님의 완벽한 구원 및 속량을 나타내는 14대로 3번 나눠 적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7년 전에 하나님이 사람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신 기록이 성경 전체에 정확히 7번 나온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을 2번씩
7번 부르셨기에 이름의 수로는 14번이 됩니다. 따라서 14는 성령의 증거 및 증언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7은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 중 성령의 일하심이 두드러지는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7영, 하나님의
7눈 등을 떠나서 특별히 성령의 기름 부음이 두드러지는 책은 7이란 숫자로 엮어져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개인적으로 에스겔,
요한복음, 요한계시록). 4 복음서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많은 기적을 담고 있지만, 특별히 요한복음은 7개의 기적을 다루고 있고
7에 대한 숨은 진리가 곳곳에 박혀 있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책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조명은 2018년에 올린 ‘7 I Am, 7
기적, 7 증인’이란 글에 있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에는 7이란 숫자가 36구절에 걸쳐(킹제임스 영어성경) 54번 나오는데, 등장하는 순서대로
적자면, ‘7교회, 7금촛대, 7별, 하나님의 7영, 7등불, 7봉인, 7뿔과 7눈(하나님의 7영)을 가진 죽임당한 양, 7천사,
7나팔, 7천둥, 7머리에 10뿔이 달렸는데 머리마다 7왕관을 쓴 용, 7머리에(그 여자가 앉은 7산과 7왕) 10뿔이(10왕)
달렸는데 뿔마다 10개의 왕관을 쓴 짐승, 7재앙, 하나님의 진노를 담은 7금대접입니다. 에스겔 같은 경우는 여호와의 말씀과
환상이 임한 후 7일간 충격 가운데 놀라 있었다고 나오고(겔3:15-16), 7년째 되던 해 다섯 번째 달 10일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에스겔에게로 나아왔다는 기록이 있으며(겔20:1), 천년왕국이 임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7년간 전쟁
무기들을 태우고 7개월 동안 전쟁으로 죽은 시체들을 묻어 땅을 정결케(깨끗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겔39:9, 12).
천년왕국의 기간에 세워질 에스겔의 성전엔 7계단, 7규빗과 70규빗의 측량이 나오고, 7일동안 매일 염소, 수소, 그리고 숫양의
피를 올려 7일 동안 제단을 정결케 하고 제사장들을 거룩히 구분하라고 합니다(겔 43:25-25). 스가랴에도 7눈을 가진 한
돌(슥 3:9)과 7등잔과 7 관(슥 4:2), 그리고 온 세상을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7눈(슥4:10)이 나옵니다.
욥에게는 7아들이 있었고, 고난을 받고 있던 그를 3친구가 방문했을 때 7낮과 7밤을 침묵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들은
속죄로 7숫양과 7수소를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나만 장군은 요단강에 7번 몸을 담은 후 나병이 나았는데 레위기
14장에 나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에 대한 규례를 보면, 새 2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고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7번 뿌린 후 놓아줍니다(레 14:2-7). 그 후
정결함을 받은 자는 자기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은 후 진영에 들어와 자기 장막 밖에 7일을 머문 후 7일째 되는
날에 온몸의 모든 털(머리털, 수염, 눈썹)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은 후 정결하게 됩니다(레14:8-9). 그리고 8일째
날에는(새로운 시작, 거듭남, 재생을 의미하는 8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흠 없는 어린 숫양 2마리와 1년 된 암양 1마리, 고운 가루 3/10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속건제와 속죄제로 드리는데, 제사장은 그 기름을 왼쪽 손바닥에 따른 후 오른쪽 손가락으로 찍어 여호와 앞에 7번
뿌립니다(레14:10-16). 이 외에도 집에 생기는 나병에 대한 규례와(레 14:34-57) 몸에 유출병이 생길 때의 규례도
숫자 7과 연관해서 비슷한 과정들을 거칩니다(레 15:13-28).
마태복음 13장에서 7개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왕국)를 설명하셨던 주님이 십자가 선상에서 말씀하신 횟수는 총
7번인데, 가상칠언으로 불립니다. 주님은 또한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7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막16:9). 이런 주님의 족보는
누가복음 3장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는데, 정확히 77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경
전체에서(영어 킹제임스 성경)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을 찾으면 총 77번 등장한다는 걸 발견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12사도를 뒀던 신약의 초대교회에는 7집사가 선출됩니다(행6: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