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언약의 일군(고린도후서 3:6) 프뉴마(영) & 그람마(의문, 문자, 율법)




새 언약의 일군(고린도후서 3:6)

새번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πνεῦ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151

1. 불기.   2. 바람.  3. 숨 내쉬기
발음 [ pnĕnuma ]

어원  /  4154에서 유래
γράμ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1121

1. 알파벳의 글자.   2. 문서.  3. 편지
발음 [ gramma ] 
어원  /  1125에서 유래


새 언약의 일군 

- '돌비와 심비'의 대조(3절)가 '율법과 복음'의 대비를 나타낸다는 것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바울은 자신을 '새 언약의 일군'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옛 언약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적대자들과 자신을 뚜렷이 구별시키고 있다.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 '의문'(그람마)은 본래 알파벳의 '문자'를 나타내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점차 `기록된 것' 즉 '문서'나'책'을 의미하는 말로 발전되었다. 
이 말이 본문에서 뜻하는 바는 '율법'이라고 할 수있다. 
반면 '영'(*,프뉴마)은 썩어질 육과 대비되는 `영혼', 혹은 '생명'을 뜻하며 본문에서는 `복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바울은 본문에서 '의문'과 '영'이라는 상징적 개념을 통해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비시키고 있음을 알수 있다. 
우리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들을 다음과 같이 구체화 시킬 수 있다. 

(1) 적응 대상에 있어서. 
옛 언약은 육적 이스라엘(출 19:5, 6)에 적용됨로써 민족적 한계를 갖는 반면, 새 언약은 영적 이스라엘, 즉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됨으로써 민족적 한계를 넘어선다. 

(2) 언약의 성립 과정에 있어서. 
옛언약은 하나님께 대해 순종을 맹세하고 피의 희생제사를 드림으로써 성립된 반면, 새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의 제물이 되심으로써 성립되었다. 

(3) 언약을 수행하는 방법에 있어서. 
옛 언약은 행함으로 하나 새 언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한다(롬 10:9, 10;히 10:39). (4)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언약의 결과에 있어서. 
옛언약은 죽음을 낳지만 새 언약은 생명을 낳는다. 따라서 옛 언약에 대해 새 언약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히 시간적인 차이를 넘어 완전한 질적 차이를 가진다. 한편 혹자는 본문의 '의문'과 '영'을 '인간적인 것'과 '신적(神的)인 것'의 대비로 이해하기도 한다(Barrett). 전자는 삶의 중심을 인간에 둠으로 인해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되고 후자는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둠으로써 생명을 얻는것이다. 또한 칼빈(Calvin)은 '의문'이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외적인 설교'를 뜻하고, '영'이란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사람의 마음 속에 실제로 작용하는 '생명력있는 가르침'을 뜻한다고 본다.




고린도후서 3장 1–18절
중심 구절 : “우리가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함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라” (고후 3:5)

우리는 때때로
“나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자격이 있을까?”
“내가 과연 복음을 전하고, 누군가를 섬길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의 부담과 주저함을 느낍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자신이 어떤 증명서나 추천서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새 언약 안에서 역사하시는 증거로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떤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인지,
그리고 새 언약의 일꾼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1. 진정한 추천서는 사람의 편지가 아니라, 삶입니다 (1–3절)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너희에게 시작하겠느냐
혹은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붙이거나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1절)

바울은 자신을 의심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내 추천서는 바로 너희다.”

  • 바울의 사역이 남긴 가장 큰 증거는 변화된 성도들의 삶이었습니다.
  • 그들은 먹으로 쓴 글이 아니라,
    성령으로 새겨진 살아 있는 편지
    였습니다. (3절)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자격증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편지입니다.

2.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4–6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느니라.” (5절)

바울은 사역자로서의 자신감과 능력이 자기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분명히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정의합니다.

  • 옛 언약은 돌에 새겨졌고, 죽이는 역할을 했지만,
  • 새 언약은 성령으로 새겨져 사람을 살리는 사역입니다. (6절)

우리는 율법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생명을 전하고 변화시키는 복음의 일꾼입니다.

3. 영광이 더 큰 새 언약의 사역을 맡았습니다 (7–11절)

바울은 모세가 돌판을 들고 나왔을 때 그 얼굴에 나타났던 옛 언약의 영광을 언급합니다.
하지만 그 영광은 잠시였고, 사라질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즉 성령의 사역

  • 더 큰 영광을 가지며,
  • 점점 더 밝아지고,
  •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사역입니다.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나니…
이 영광은 더 넘치는 영광이라.”
(8–9절)

오늘 우리도
이 영광의 사역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비록 연약하지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러운 복음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4. 우리는 담대하게, 그리고 열린 얼굴로 주님을 바라보며 변화받는 자입니다 (12–18절)

“우리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2절)

  •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 율법의 그늘 아래 머물지도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난 뒤 자신의 얼굴에 수건을 썼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건 없이, 하나님을 직접 바라보며 변화되어 갑니다. (18절)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며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18절)

복음은 단지 ‘지식’이 아니라,
우리를 점점 더 예수님 닮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적용 /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 나는 사람에게 인정받는 추천서를 구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 나의 삶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편지가 되고 있는가?
  • 복음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전하고 있는가?
  • 성령의 역사로 날마다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을 보고 쓰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으로 세우십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새 언약의 일꾼이다.
이 사명은 내 힘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감당하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나의 부족함과 한계를 뛰어넘어 복음의 편지로 살아가고,  예수님의 형상으로 점점 변화되어 가는 새 언약의 일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님,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으로 세우시고 복음을 맡겨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나의 자격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가 되게 하옵소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날마다 주의 형상으로 변화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역사 이래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해왔습니다. 
과연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찰스 다윈은 인간을 가리켜 “고등한 존재이지만 본질적으로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고 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인간을 “경제적 동기에 의해 조작되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인간과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찰스 다윈의 주장은 인간을 동물과 같은 광기로 만들었고, 칼 마르크스의 주장은 인간을 물질로 전락시켰습니다.

다윗은 시편 8편에서 광대 불변한 자연 앞에 무력감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무엇이관대”(What is man)”, “인자가 무엇이관대(What is the son of man)”를 물었습니다. 
그는 인간이란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쉽게 더럽혀지고, 쉽게 상처받고, 쉽게 넘어지고,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성도를 어떤 존재로 보았습니까? 
바울은 성도를 그리스도의 편지,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새 언약의 직분의 영광스러움을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우리는 새 언약의 직분의 영광스러움을 알아 영광스러운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1.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1-5)

고린도교회에는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고 비방하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미혹하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습니다(고후 3:1). 그들은 어떤 추천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파 출신 교사들로(행 15:5),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추천서가 없는 바울을 비방하고 그가 전한 복음까지 의심을 품도록 했습니다(고후 2:17). ‘추천서(recommendation)’란 권위가 있는 기관이나 이름 있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으로 사람들에게 공인되고 보증하는 증표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도로서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믿음이 어린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과 구원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은 추천서를 보낼 필요도 없고 받을 필요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2-3)

바울 자신은 추천서가 없지만 너희가 우리의 편지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편지를 즐겨 쓰지 않지만 전에는 편지를 즐겨 썼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서 소식을 전하고 자신의 마음을 전달했습니다. 제 아내는 지금도 그러하지만 이전에는 선교사님들과 형제자매들에게 편지를 많이 썼습니다. 그 우편요금도 꽤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를 우리의 편지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성도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소식,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신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 것은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간 생명을 바쳐서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심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그들의 마음판에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심을 새겼습니다. 또한 바울의 마음판에 고린도교회의 개척사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이름과 기도 제목과 그들의 변화된 모습이 일일이 다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바울의 마음에 기록된 그 편지로 바울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추천서는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먹으로 종이나 돌판에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추천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마음판에 쓰여 있었습니다. 이 편지야말로 바울이 사도임을 확실하게 보증하는 추천서였습니다.

단체나 기관이나 사람이 써주는 추천서는 100% 믿고 신뢰할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가짜가 너무 많고 과장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가짜 신분증을 들고 다니며 사칭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돌판에 쓴 추천서는 세월이 흐르다보면 풍화작용에 의해 희미해지거나 사라지고 또 깨질 수도 있습니다. 모세의 십계명은 돌에 새겨졌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다시 시내 산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육의 마음판에 쓰인 편지는 성령으로 각 사람들의 마음판에 쓰인 것이기 때문에 깨지거나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추천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로마서 16장 1절을 보면 바울은 겐그리아에 있는 뵈뵈 자매를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보낼 때 추천서를 써서 보냈습니다. 때로는 추천서도 필요합니다. 선교사를 파송할 때 선교사 패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추천서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써 주신 살아있는 추천서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무는 속일 수 있지만, 그 열매는 속일 수 없습니다. 바울이 전한 구원의 열매가 바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선교사들은 추천서 문제로 무시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거의가 평신도 선교사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보다 추천서를 가지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1990년대 황돈연 선교사가 수교도 되기 전에 유학생 선교사로 파송 받아 러시아의 재원인 물리학과 레나 자매를 비롯하여 많은 모스크바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기숙사에서 2,30여명이 러시아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기관에서 파송된 목사는 황돈연 선교사를 꼭 황돈연씨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황선교사는 신학교를 나오지 않았고 또 목사 안수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선교사들의 추천서는 그들이 맺는 성령의 열매, 구원의 열매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함부로 추천서를 써주시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 받고 추천서를 써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헌금을 많이 낸다고 추천서를 써주시지 않습니다. 스팩이 좋다고 추천서를 써주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과 신앙의 인격과 삶을 보시고 써주십니다. 사람들이 써 주는 추천서는 조금만 노력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는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 받고 분명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추천서를 써주십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추천서라고 확신했습니다(고후 3:4-5). 바울은 그의 추천서가 자신의 능력과 자격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나의 능력과 자격, 그리고 사람이나 기관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면 사람이나 기관 앞에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기관이나 조직이 깨지게 되면 자격과 능력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확신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환경과 상황을 넘어서서 변함없이 주님께 충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격과 능력도 영원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아름다운 삶과 복음 증거를 통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너는 분명 예수님을 믿는 성도다.” “너는 주님께 진짜 헌신하는 집사다.” “너는 양무리를 돕는 정말 목사다.” “너는 진짜 선교사다”라는 그리스도의 편지요 주님의 추천서를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 새 언약의 일꾼(고후 3:6-18)

첫째, 새 언약(고후 3:6)

바울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새 언약의 일꾼으로 삼으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습니까?

“그가 또 우리를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후 3:6)

우리가 새 언약의 일꾼이 된 것은 율법 조문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인함입니다. ‘율법 조문’은 의식과 율법을 가리킵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입니다(갈 3:24). ‘초등교사’란 헬라 시대에 주인의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후견인으로서 책임을 맡았던 전문노예를 말합니다.

바울은 이 용어를 율법에 적용하여 율법의 역할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신령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이 연약하여 거룩한 율법을 지킬 힘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를 통해 한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선을 행하고자 하지만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절망의 늪에 빠져 ‘누가 나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의 순간에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감사 찬양이 나왔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7:24, 8:1-2)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나 생명을 주는 성령의 세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성령은 항상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나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새 언약의 기원은 예레미야 31장 31-34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달리 돌판에 기록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판에 기록합니다. 또한 새 언약을 믿을 때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게 됩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성만찬을 하실 때 포도주 잔을 그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하)

옛 언약에도 죄를 사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정결한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면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일시적이고 불완전하여서 죄를 지을 때마다 번거롭게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옛 언약의 제도는 구원역사의 모형으로서 장차 올 참된 것의 그림자였습니다.

새 언약은 짐승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피는 아무 죄가 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피이기 때문에 죄 사함의 효과가 완전하고 영원합니다(히 9:12). 베드로는 예수님의 피의 효력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이제 우리는 죄를 지을 때마다 번거롭게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를 지을 때마다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를 힘입어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죄를 진실하게 회개하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셨음을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새 언약은 십자가의 보혈의 피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가기만 하면 어떤 몹쓸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다 용서해 주십니다. 나의 지은 죄가 중하고 추하여서 내가 어느 정도 씻고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여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눈과 같이 양털 같이 희게 해주십니다(사 1:18).

둘째, 새 언약의 일꾼(고후 3:7-11)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새 언약의 일꾼의 영광이 어떠합니까?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후 3:7-9)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십계명을 들고 내려왔을 때에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이 영광은 곧 없어질 영광이었습니다. 모세의 직분은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이었습니다(출 34:29-30). 사람들은 이런 직분을 가진 모세를 감히 주목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물며 사람을 살리는 영의 직분은 얼마나 영광스럽겠는가를 감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하면 요즘 유명한 목사들처럼 존경을 한 몸으로 받으며 복음을 전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추천서가 없다고 사도로 인정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노예들이나 하는 천막을 만들며 복음을 전하는 무명의 전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내면에는 새 언약의 직분의 영광으로 인해 감사와 찬양이 흘러 넘쳤습니다.

바울은 이 직분이 영광스럽고 귀하기 때문에 이 직분을 감당하기 위하여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습니다(고전 4:13).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행 20:24). 이를 위해 몸을 던져 충성했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이 직분은 죽은 영혼을 살리고 영생을 얻게 하고 영원히 살게 하는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직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직분입니다.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고후 3:10-11)

세상에는 영광스러운 직분들이 많습니다. 한 나라를 통치하는 대통령의 직분도 영광스럽게 보입니다. 시장이나 구청장이나 국회의원의 직분도 영광스럽게 보입니다. 그리고 직장의 장도 영광스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이런 직분에 오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직분들은 죽어가는 사람의 영혼을 살리고 의롭게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직분들은 영광이 풀의 꽃과 같아서 얼마 못가서 시들고 맙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직분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치가 있고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새 언약은 사람을 살리고 의롭다 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새 언약으로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고 더 나아가 사람을 살리는 새 언약의 직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를 찬송가 저자는 천사도 흠모하는 귀한 직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새 언약의 일꾼의 복(고후 3:12-18)

일꾼이 누릴 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첫째는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자기 얼굴의 영광이 결국에는 사라져 없어질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도록 수건을 썼습니다. 이는 백성들이 율법의 한계를 알게 되면 율법을 순종하지 않게 될 위험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지금까지 이 사실은 알지 못하고 율법의 영광이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고 율법을 사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과 강박감, 또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으로 인한 죄의식에 늘 시달렸습니다. 이러한 율법에 대한 매임은 그리스도께로 돌아갈 때만이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고후 3:17).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죄와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십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율법의 수건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면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점점 변화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를 의미합니다. 성화의 절정은 영화입니다. 우리는 점점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예수님이 재림하실 최후의 날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광스러운 희망을 바라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 언약의 일군입니다. 
우리는 이 귀한 직분을 귀히 여기어 주님이 오시는 날에 영화롭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경건의 능력을 부인 하는 것(딤후 3:5)


경건의 능력

자료 / https://m.blog.naver.com/josephclass/223048135541


경건(敬虔)하다 

경건(敬虔)은 ‘경건하다’의 어근이다. 

형용사 겅건하다의 뜻은 ‘공경하며 삼가고 엄숙하다’이다. 경건주의(敬虔主義)는 17세기 말 독일의 개신교가 교의(敎儀)와 형식에 치우치는 것에 반대하여 일어난 신앙 운동이다. 스페너(Spener, P. J.)가 창시한 운동이며, 성경을 중심으로 한 개인의 영적 생활의 체험과 실천을 중요시하여 경건한 생활을 하자고 주장하였다. 모습이란 ‘다른 것을 본뜨거나 본받음’을 말한다. 능력이란 ‘일을 감당해 낼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디모데후서 3장 5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와 디모데후서 3장 16절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말씀에서 경건의 모양과 능력에 대하여 묵상하려고 한다.

디모데전서 3장 2~4절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에서 경건하게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 ‘감독과 집사의 덕목’으로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다. 야고보서 1장 26~27절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에서 경건의 참 모습이 무엇이며 경건의 능력을 어떻게 기를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50년 이상한 사람으로서 경건의 모습과 능력이 얼마나 삶에서 나타나고 있는가를 돌아본다. 주일이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고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며 생활하고 있다. 나의 내면 모습이 과연 성경 말씀대로 변화하여 성장과 성숙의 길로 가고 있는가를 돌아보면서 허물과 흠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이 아니면 하루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음을 느끼고 있다. 밖으로 들어나는 모습에서 어느 정도 경건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내면의 성숙한 변화와 변혁이 없다면 근본적인 경건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혀에 재갈을 물리고 말의 절제가 있었는가 생각하며 말하기보다는 듣는 일에 치중하려고 다짐을 해본다. 내 양심을 속이면서 인간관계를 하였던 적도 있었음을 고백한다. 또한 경제적 이익을 취하려고 제도를 악용한 적도 있었다. 

형제자매와 이웃의 어려움을 보고도 보지 못한 척한 적이 있었다. 세상 쾌락을 찾으면서 세속에 물들어간 적도 있었다. 앞으로 겉으로 나타나는 경건의 모습보다 내면에서 나오는 경건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한다. 우리 모두 경건의 능력자로서 지역사회에 덕과 유익을 끼치면 좋겠다.
 



경건의 모양과 경건의 능력(디모데후서 3:1-9)

헬라어 원문에 의하면, 오늘 본문은 지시대명사 “이것을”(Τοῦτο)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 다음으로 접속사 “그러나”(δὲ)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접속사가 빠져 있지만, 헬라어 원문과 영어 성경에도 분명히 들어가 있습니다. 
제가 볼 때는 이 접속사가 중요하게 보이는데, 왜냐하면 이 단어 안에 사도의 안타까운 심정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앞 장에서 사도는 거역하자는 자들, 즉 거짓 교사 또는 이단자들을 온유함으로 대할 것을 디모데에게 권면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을 그렇게 온유한 태도로 대할지라도, 그들의 행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오늘 본문 1-9절에 걸쳐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을 온유함으로 대할지라도 그들이 얼마나 간교하고 회심하기 어려운 자들인지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디모데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여, 에베소 교회 안에 있는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을 온유함으로 훈계할 때 혹시 하나님이 그들을 돌이켜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시오. 그러나 그대는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간교하고 회심하기 어려운 자들인지를.

여하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러나 너는 이것을 알라”(Τοῦτο δὲ γίνωσκε)고 명령하며,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세’라 함은, 예수님의 재림이나 재림 직전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말세’라는 말을 종종 접하는데, 이것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말세’는 단수가 아니라 언제나 복수로 표현됩니다(행 2:17; 딤후 3:1; 약 5:3; 벧후 3:3). 
본문 1절에서도 “말세에”(ἐν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라는 말이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는데, 풀어서 번역하자면, “마지막 날들에”(in the last days) 또는 “마지막 기간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한 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여러 날들’ 또는 ‘특정한 기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말세는 어떤 기간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 요엘서를 인용한 사도 베드로의 증언에 따르면, 오순절 성령강림 때 말세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로부터 시간이 좀 지나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기록할 때도,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말세’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순절 성령강림 때처럼 하나님의 성령이 디모데가 목회하던 에베소 교회에도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증언대로,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시는 때가 곧 말세라고 했으니,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셨으므로 그때에도 여전히 말세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께서 그때와 동일한 방식으로 거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도 말세에 살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말세는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전까지 처하게 되는 ‘모든 현재’를 뜻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 보면, 이 본문은 2천 년 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말세에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2절)라고 말씀합니다. 말세의 뜻을 잘 몰라도 사도가 증언하는 내용만 봐도,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당시처럼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합니다.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지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얼짱’과 ‘몸짱’이 되기 위해 자기 얼굴과 몸을 뜯어 고치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 완전히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돈을 사랑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돈이라면 완전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험금을 노리고 자기 가족을 죽이기도 하고, ‘목사’를 사칭하는 사기꾼들이 헌금을 횡령하는 어처구니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랑하고 교만하며 남을 비방하는 일에 능숙합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물론,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한 삶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사람들이 절제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스마트 기기를 사용하면서 즉흥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소셜 미디어(Social Media) 문화’가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절제하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점점 사나워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육신적 쾌락에 빠져 급기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망각해 버립니다. 

사랑하는 청년(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바울 당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경고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똑같이 “말세에” 살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말세의 특징을 보면서 오늘 한국 교회와 우리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게다가 더욱 충격적인 사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은 일차적으로 불신자들에 대한 묘사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거짓 교사 또는 거짓 신자들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는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라는 5절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따라서 “경건의 모양” 따위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경고는 일차적으로 교회 공동체를 겨냥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로 치면, 한국 교회와 그 밖의 모든 기독 단체 및 캠퍼스 기독 동아리를 향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 교회도 결코 예외일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참 신자인 척하면서 그냥 ‘가라지’로 앉아 있는 교인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단 한 번도 예수님과 만남의 경험이 없이 부모 또는 친구의 권유로 마지못해 교회당에 출입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리스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반면에 과거에 거듭난 체험은 있지만, 세상 가운데 불신자 친구들의 틈바구니에 살면서,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거의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칭의(의롭다 하심)의 은혜에서 결코 떨어져 나가지는 않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는 불신자와 거의 다를 바가 없이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굴복시키려는 선한 의지를 거의 소멸한 채, 언제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보다 육신적 쾌락에 매몰되어 온갖 욕심에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제가 볼 때 오늘 본문에 언급되는 사람들은 방금 말씀드린, 교회 안의 두 부류에 모두 해당됩니다. 다시 말해, 애초부터 거듭나지도 않았으면서 어릴 적부터 부모나 친구의 권유로 마지못해 종교 생활하는 자들과, 그리고 예전에 분명하게 거듭난 체험은 있지만 현재 세상의 영에 미혹되어 일시적으로 거의 불신자처럼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는 당시 디모데가 목회하던 에베소 교회 안의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이 앞서 말한 그 두 부류 모두에 해당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없으면서 참 신자인 척하는 부류, 또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이단자들에게 미혹되어 일시적으로 진리를 대적하게 된 부류를 가리킵니다. 

아무튼 이 두 부류의 특징은 우선 “경건의 모양”(μόρφωσιν εὐσεβείας)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애초부터 거듭난 체험이 없는 사람도 오랜 기간 동안 교회의 예배행위나 여러 의식에 노출되다 보면, 참 신자와 거의 동일한 모습으로 “경건의 모양”을 무의식중에 습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경건의 모양을 보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닥쳐오면, 항상 자신의 욕망을 위해 무언가를 선택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마저도 자신의 양심을 평안하게 해 주는 수단 정도로 생각해 버립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주님의 십자가가 자기 위안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역시 경건의 모양은 갖추고 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경건의 모양이 어떤 것인지 알며, 한때 경건의 능력을 가지고자 노력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거짓 교사들, 즉 이단자들의 거짓 가르침에 미혹되어 일시적으로, (물론 그 기간이 언제까지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불신자의 영적 상태와 거의 다를 바가 없이 살아갑니다. 자기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채, 자신의 욕망에 따라 무언가를 선택합니다. 말씀을 향한 선한 의지가 조금 살아 있을 때에는 양심의 가책이라도 받는데, 그 선한 의지가 거의 소멸된 상태가 되면, 신앙적 양심의 가책도 거의 받지 않습니다. 참으로 자기 양심에 화인 맞은 것처럼 살아갑니다. 

아무튼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6절에 나오듯이,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그런 부류에 속한 자들입니다. 여기에서 “어리석은 여자”(γυναικάρια)란, 거짓 교사들에게 ‘잘 속아 넘어가는 여인들’(gullible women, NKJV)을 가리킵니다(Thomas D. Lea, NAC: 1,2 Timothy, Titus).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남편이 밖에 일하러 나간 사이에, 거짓 교사들이 집요하게 집으로 침투해서 여인들을 교묘하게 미혹하는 행태가 있었습니다(존 스토트, 『BST 시리즈: 디모데후서 강해』). 그들의 이런 은밀한 수법은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를 미혹했던 뱀의 수법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사탄에 사로잡힌 멸망의 자식들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여인들은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긴 하지만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6-7절). 그렇기 때문에 이런 어리석은 여자들도 (일시적이면 좋겠지만) 같은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8절에 나오는 얀네와 얌브레 같은 사람들도 동일한 부류에 속합니다. 모세를 대적한 그들의 이름이 구약성경에 나오진 않지만, 바울은 유대인의 전통 문서들을 통해 그들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John Calvin, William Hendricksen).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대적하고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며, 또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입니다(8절). 오늘날로 치면, ‘ㅅㅊㅈ’와 같은 사악한 이단들을 가리킵니다.

놀랍게도(?) 본문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나타낼 때는 특별한 외적 형식을 가지게 됩니다. 외적 형식과 참된 경건의 관계는 몸과 영혼의 관계와 비슷합니다(Charles H. Spurgeon). 다시 말해, 참된 경건은 외적인 형식이 없이 표현될 수 없으며, 외적인 형식만 있는 참된 경건도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청년(성도) 여러분, 우리는 ‘교회 개혁’이라는 명분 아래, 형식을 무조건 좋지 않은 것이라 하여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형식적’이라는 말 자체를 굉장히 부정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우리의 신앙에는 ‘형식’이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신앙의 형식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3장과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화 있을진저”라는 강한 어조로 질책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11:42). 

여기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이것도 행하고”, 즉 경건을 표현하는 외적 형식인 “십일조”도 행하고, 또한 “저것도”, 즉 그 외적 형식에 담긴 경건의 의미인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경건을 담아내는 외적 형식(경건의 모양)이 필요 없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본질’이라는 명분 아래 ‘형식’ 자체를 거부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교회 개혁’이라고 생각하면 완전히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물론 성경에도 없는 온갖 외적 형식으로 경건의 능력과 전혀 상관없는 것들은 당연히 없애 버려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경건에 유익이 되는 외적 형식들을 모두 없애 버리면 참으로 곤란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한번 적용해 봅시다. 사랑하는 청년(성도)들이여, 여러분은 과연 경건의 능력을 드러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 다시 한 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내 삶에 과연 “경건의 모양”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거짓 교사들과 거짓 신자들은 경건의 모양이라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여러 규례들을 지켰고, 온갖 율법 조항들을 만들어 내어 금욕주의적 삶을 살았으며, 외적으로 볼 때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종교적 행위들은 철저히 자신들의 의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도 그들이 갖추었던 외적 형식, 즉 “경건의 모양”이라도 갖추고 있는지부터 한번 살펴봐야 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5절)라는 사도의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경건의 모양은 필요 없고 경건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경건의 능력을 담아내는 최소한의 경건의 모양이 당연히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당시 사도가 보기에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누구나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 속에 몰래 침투한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도 참 성도들과 동일하게(?)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음을 그가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는 경건의 모양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생활’에 열중하는 모습입니다. 매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고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헌금생활도 열심히 하는데, 이것들은 그들에게 신앙이 아니라 종교일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런 행위들을 다른 사람에게 ‘신실하게’ 보여 줌으로써 존경과 좋은 평판을 얻으려는 데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

바울 당시에도 그랬겠지만, 오늘날에도 몰래 침투한 거짓 교사들은 보통 더 뜨겁게 교회생활을 합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 저희 학교에 ‘대학교회’가 세워졌는데, 이곳을 섬기려고 찾아온 두 명의 청년이 처음부터 굉장히 뜨겁게 교회를 섬겼습니다. 여느 청년들과는 달리 찬양 팀 멤버로서 참 헌신적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몰래 침투한 ㅅㅊㅈ 추수꾼이었습니다. 이들은 본문에서 사도의 증언대로, 경건의 모양을 뚜렷하게 갖추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참 신자들과 비교해 봐도 전혀 차이가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관심사는 경건의 모양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행위에만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엇비슷한 모양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의 관심은 경건의 모양을 드러내게 하는, 기저(基底)에 깔린 경건의 능력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계신 청년(성도)들에게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과연 경건의 능력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경건의 능력이라고 해서 뭔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칼빈의 말대로, 경건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이 하나로 결합된 것입니다. 따라서 경건의 능력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일상생활 가운데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도 겉보기에는 참 신자들과 동일한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증언대로, 사람은 외모를 보기 때문에(삼상16:7) 그런 자들의 중심을 정확히 꿰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자들에게 속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추수 때까지 많은 경우에 그런 가라지들이 교회당에 나오도록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마13:29).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결정적인 한 가지 증상이 나타납니다. 일단 참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 없는 증상이 나타납니다. 이런 성도들은 주일 성수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마치 어린아이가 밥을 굶은 것처럼 영적 결핍에 허덕이게 됩니다. 그런데 경건의 능력이 없는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은 말씀을 듣지 않고 기도를 하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바른 말씀과 바른 교리와 참된 경건생활을 누리지 못하는데도 이들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증상을 보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안에서 결코 거듭난 적이 없기 때문에, 영적 양식을 공급 받지 못해도 자신이 굶어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항상 배우긴 하지만 자기 욕심대로 생활할 뿐이며,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처음부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이들은 우리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고 책망 받을 사악한 자들입니다.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계신 청년(성도)들이여, 여러분이 소유한 경건의 능력이 일상생활 가운데 더욱 드러나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날마다 살피며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또 자기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거짓 교사들처럼 경건의 능력을 부인한 채, 자기 욕심에 사로잡힌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청년(성도) 여러분, 내일이면 또 다른 한 주가 세상 가운데 시작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경건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지, 이번 한 주간에 또다시 판가름 나게 될 것입니다. 매주 교회당에 있을 때는 경건의 모양으로 서로를 대하지만, 세상 가운데 여러분이 살아갈 때는 경건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대할 것입니다. 본문 8-9절에 나오듯이, 믿음에 관하여 버림받은 자처럼 살다가 자신의 어리석음이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폭로되지 않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겸손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적인 경건의 모양과 함께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경건의 능력을 아울러 겸비(兼備)하시는 복된 청년(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경건의 모양과 능력(디모데후서 3:1-7)


여러분은 왜 예수를 믿으십니 까? 저는 제가 삶에 대하여 무지하 고 무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다른 피조 물에 비교하면 제법 아는 것도 많고 할 줄 아는 것도 많습니다. 그런면 에서 사실 우리 인간과 비교될 수 있는 피조물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 습니다. 인간 다음으로 똑똑하고 유 능한 피조물이 무엇인지 정확히 잘 모르지만 그것이 아무리 똑똑하고 유능하다고 하여도 우리 인간과는 정말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 인간은 아주 월등한 존재요 탁 월한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을 가리 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 말이 맞습 니다.

사람은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동물은 아니지만 자동자라는 것을 만들어 세상에서 가장 빨리 달 릴 수 있는 동물이 되었습니다. 사 람은 날지 못하는 동물이지만 비행 기를 만들어 세상의 그 어느새 보다 더 높이 더 멀리 그리고 더 빨리 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강과 바다를 헤엄치는데 있어서 강과 바 다의 그 어떤 물고기보다 무능하지 만 우리 사람들은 배와 잠수함을 만 들어 강과 바다의 그 어떤 물고기 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멀리 그리 고 더 많은 짐을 싣고 물위와 물속 을 다닐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 다.

정말 우리 인간들이 하는 일들과 만들 것들을 생각해보면 우 리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에 스스로 놀랄때가 많습니다. 우주를 날아 다니는 위성 들. 컴퓨터와 그 컴퓨터가 수행하는 여러 가지 기가막힌 일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전쟁 무기들과 그 무기들의 파괴력과 정확함만 생각하 여도 우리 인간의 능력이 얼마나 뛰 어난 것인가를 금방 알 수 있습니 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치명적이리만큼 무지하 고 무능합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가 구원이라고 부르는 생명과 그 생명 의 질 즉 다시 말해서 행복하고 만 족한 삶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능하 고 무지한 존재들입니다.

컴퓨터 대단한 물건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기쁨과 평 안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 엄청 난 기능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컴퓨 터가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는 것입 니다. 우주를 날아 다니는 여러 위 성들 참으로 대단한 것들이지만, 그 높은 곳에서 땅에 있는 개미까지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 만 그 또한 우리의 생명과 행복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고통을 받으며 불행하게 사는 이유 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다시한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 니하며 배반 하여 팔며 조급하 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 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 의 모 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격 게 되는 이유는 자기만 사랑하여 자 기를 사랑하기 위하여 남을 미워하 고 훼방하며, 돈을 사랑하여 돈 때 문에 나쁜 짓을 하고 그 때문에 다 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고, 교만 하여 남을 깔보아 다른 사람의 마음 에 깊은 상처를 입히며, 자기를 사 랑하여 모든 것을 희생한 부모에게 까지도 불순종하고 감사할 줄 모름 으로 사랑과 희생을 우스운 것으로 만들며, 거룩하지 못한 것을 좋아하 여 스스로의 삶을 돼지 우리의 돼지 보다 더 더럽히며, 무정하여 외로운 세상을 만들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 하여 언제나 지나친 복수로 불안한 세상을 만들며, 절제할 줄 모르는 끝없는 욕심으로 환경을 파괴하고 경제 질서를 어지럽히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악한 세상을 만들어 세상과 사람을 악의 노예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그와 같은 문제는 컴퓨터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하늘 높은 곳에 떠있는 위성으로도 해결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인간은 생 활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능력이 있 으나 보다 근본적인 생명에 대하여 는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입니다.

욥기 38장에 보면 욥에 대 한 하나님의 질문이 나옵니다. 퍼 부으시듯 여러 가지 질문을 욥에게 하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그 준승을 어디에 띄웠는 지 네가 아느냐?"

"까마귀 새끼가 배가 고파 오락 가락 할 때 네가 그에게 먹을 것을 주었느냐?"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 느냐?"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 같 이 넘쳐 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

이 모든 질문을 요약하면 질문은 크게 두가지 유형으로 구분 됩니다. 첫째는 '네가 할 수 있느 냐?'는 유형의 질문이고, 둘째는 ' 네가 아느냐?'는 유형의 질문입니 다. 그와 같으신 질문에 대하여 욥 과 우리가 하나님께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무지함과 무능함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무지함과 무능함을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그 와 같은 질문을 욥과 우리에게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질문을 하시는 도중 욥기 40장 14절에서 하나님은

"그리하다면 네 오른 손이 너를 구 원 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다면'의 뜻 이 무엇입니까? 네가 이 모든 것을 알고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면, 다시말해서 네가 모든 것을 알고 모 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라면 이라 는 뜻입니다. 네가 정말 그렇다면 네가 말하는대로 네 오른 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나도 인정해 주시 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컴퓨터와 위성과 비 행기와 자동차와 같은 것들을 만들 어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 들을 하면서 살아도 우리 인간은 여 전히 생명과 그 생명의 구원에 대하 여 전적으로 무지하고 무능한 존재 입니다. 저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저 는 제가 제 삶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능하고 무지한 존재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나와 우리 인간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나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항상 기뻐하 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사는 축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저는 이 세상이 절대로 우 연히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 습니다. 저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믿고 있습니 다. 이토록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살 아있는 것들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그리고 진화한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은 정말 마귀가 들리지 않고는 생 각할 수 없는 억지입니다.

저는 이 세상이 한 분 창조 주에 의하여 창조된 것임을 믿습니 다. 저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 주가 계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 렇지 않으면 이 세상을,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존재와 생 명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세상이 한 분 창조주에 의 하여 창조된 것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창조주가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로 시작되는 사도신경은 정말 저의 신 앙고백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 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습니 다.

나는 하나님께 능력이 있으 심을 믿습니다. 때문에 내가 하나님 을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면 비록 나 는 약해도 하나님의 강하신 능력이 나의 것이 되어 골리앗과 같은 세상 도 이겨내며 사망의 움침한 골짜기 와 같은 곳에서도 해 받음음을 두려 워하지 아니하고 푸른 초장의 양과 같이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믿습니다.

나는 생명이 주께 있음을 믿습니다. 나는 능력이 주께 있음을 믿습니다. 나는 나의 구원이 하나님 께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세상과 환경을 바꾸실 수 있는 능력 이 있으십니다. 때문에 나는 나의 세상과 나의 삶의 환경을 위해 하나 님께 기도합니다. 몸이 약할 때 건 강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나는 하나 님께 치유의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 다. 암과 같이 무서운 질병도 하나 님이 한 번만 손대 주시면 단번에 나을 줄을 저는 믿습니다. 저는 성 경에 예수님께서 귀머거리와 소경과 문둥병자와 그밖의 모든 병자들을 고쳐주셨다는 것을 믿으며 예수님께 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때문 에 저는 물질이 부족할 때 물질의 넉넉함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저는 저에게도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났 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저는 늘 가 난하고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 님께서 때마다 시마다 먹여주시고 입혀주시고 인도해 주셔서 오늘 여 기에 까지 이르를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세상과 환경 을 바꾸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 음을 믿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합니다. 미신적이라고 생각하실는지 모르나 저는 아이들이 수양회를 할 때 날씨를 위하여 기도 하고 길이 막혀서 중요한 약속 시간 에 늦게 될 경우는 시간에 늦지 않 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게 해달라 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 세상 과 환경 보다 더 중요한 사람을 바 꾸시고 변화시키시는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삭개오를 변화 시키시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변화 시키시는 능력이 주께 있음을 믿습니다. 다말과 라합과 룻 그리고 밧세바를 변화시켜 예수님의 족보에 오를 만큼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시 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바 로 능력이 나 같은 사람을 목사가 되게하여 하나님의 귀한 사역자가 되게하셨음을 저는 믿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어도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지 않습니 다. 하나님께는 십자가상의 강도를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하시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구원은, 기쁨과 감 격이 넘치는 천국의 생활은 환경이 바뀔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 리 사람이 거듭나고 변화할 때 이루 어지는 것입니다.

자기만 사랑하던 사람이 하 나님과 세상과 이웃을 사랑할 줄 아 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악 한 사람이 선하게 세상 욕심으로 무 절제한 생활을 하던 사람이 경건하 고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 바뀌 어 질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이 하나 님께 있으며 그와 같은 변화가 정말 우리의 삶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 꾸어 놓는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구원의 능력이 주께 있음을 저는 믿 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세상의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 상은 우리에게 재미와 편안함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에게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주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 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 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하나님의 능력은 믿음의 생 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 믿음의 생활을 오늘 본문은 경건 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 건한 믿음의 생활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경건한 생활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쉽게 기도와 말씀과 찬송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찾는 자에게게 찾게 하시고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문을 열어 주 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였습니 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능력을 간증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기도 에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찾을 수 있 습니다. 기도하면 세상의 그 어떤 문도 열 수 있습니다. 기도에 하나 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사람의 심령 골수를 쪼개 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은 이 우주 만물의 식입니다. 식을 세우면 답은 저절로 나옵니다. 길을 찾으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시 간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 들은 도를 닦고 철학을 하였던 것입 니다. 도를 닦음은 길을 찾음으로 철학을 함은 삶의 식을 찾고자 함이 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찾던 그 식과 길이 바로 말씀안에 있습니다. 말씀이 곧 길이고 말씀이 곧 식입니 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때로는 어렵고 힘들지만 그러나 말씀대로 살면 결국 모든 삶의 문제가 풀립니 다. 저는 말씀이 능력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씨름을 할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을 저는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사탄은 말씀대로 살다가믄 밥굶기 딱 좋다 고 우리를 속이지만 아닙니다. 그렇 지 않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 력은 말씀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기를 원하신다면 말씀 에 집착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속에서 길을 찾고 말씀 속에서 식을 찾을 실 수 있기를 바 랍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읽고 듣고 암송하고 묵상하며 공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 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에 감동 하며 감동할 때 그리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 때 천지를 창조하 신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줄을 저는 믿습니다.

찬송에 능력이 있습니다. 경건의 능력을 이야기할 때 찬송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찬송을 빼놓 고 경건의 능력을 이야기 한다는 것 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뜨겁고 은혜 스러운 찬양을 사모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한국 교회가 이 찬양을 통하여 다시 살아 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찬양 이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을 교회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저는 앞으로 전문목회를 하 려고 합니다. 내년부터 전문목회가 시작될 것입니다. 저는 목회에 은사 가 있는 여러분들과 함께 교회를 목 회하고 싶습니다. 제가 함께 동역하 려고 하는 목회자는 저에게 없는 은 사를 가진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기도의 은사가 있는 동역자 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교구 관리 와 심방에 은사가 있는 동역자가 있 었으면 좋겠습니다. 구제와 봉사에 은사가 있는 동역자도 필요하고 선 교에 은사가 있는 동역자도 필요합 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제가 간절 히 바라고 기도하는 동역자중에 하 나는 찬양에 은사를 받은 목회자입 니다. 찬양만 전문으로 하는 사역자 가 능력있는 교회를 위하여 절대적 으로 필요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 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 다. 비록 우리는 약하지만 그래서 이 강하고 무서운 세상에서 늘 넘어 지고 실패하는 존재들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모든 부족한 것 을 채우시고 모든 잃어 버린 것들을 찾게 하시며 모든 닫힌 문들을 열게 하시는 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경건한 생 활을 통하여 우리의 것으로 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생활을 통하여 말 씀의 생활을 통하여 찬양의 생활을 통하여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 나님의 능력에 접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와 같 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 고 세상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 저들이 당하는 고통을 그대로 당하 면서 사는 까닭이 무엇인줄 여러분 아십니까? 오늘 본문은 그것을 경건 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 어서 그렇다고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신앙이 너무 형식적이어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너무 건 성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씀입니 다.

하나님을 믿으십시다. 하나 님만 믿으십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좀더 진지해지고 정직해 지십 시다. 그리고 좀더 간절해 지십시다. 좀더 깊은 기도에 들어가십시다. 좀 더 깊은 말씀에 들어가십시다. 좀더 깊은 찬송에 들어가십니다. 경건의 모양만 갖추지 말고 경건의 능력을 경험하십시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면 모르나 그렇지 않다면 이왕 믿는 하나님께 인생을 걸고, 생명을 걸고 매달리십시다. 하 나님의 능력을 구하십시다. 사모하 십시다. 그리하여 경건의 모양만 있 는 교인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소유한 축복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 다. 그리하여 그 하나님의 능력의 증인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 다.










유대의 수 개념



유대 신비주의에서

유대인의 신비주의 연구에서, 숫자는 신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졌습니다.
상징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 사이의 이 결혼은 성막의 창조에서 그 정점을 찾았습니다.
신전의 수치적인 크기는 "신이 올라모트 우주를 창조하기 위해 사용했던 창조의 축소판"입니다.

마하랄의 사고체계에서 각 숫자는 일관된 철학적 의미를 갖습니다.
 
1 - 통일성. 
2 - 이원성과 다중성.
3 - 양 극단의 일치.
4 - 기본 방향과 같이 두 방향의 다중성. 
5 - 네 극단을 하나로 묶는 중심점.
6 - 3차원의 다중성. 
7 - 모든 자연을 하나로 묶는 중심점, 샤바트처럼.
8 - 자연을 먹여 살리는 초자연적 영역, 초자연과의 연결을 위한 인간의 노력. 
9 - 자연과 초자연의 구분을 포함한 가장 완전한 다중성. 
10 - 자연과 초자연의 최종 통합.


1

  • 하늘과 땅에서 하나는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 אחד אלוהינו שבשמיים ובארץ ובארץ שבשמיים אלוהינו one אחד our god is and , - heaven in

2

3

  • 셋은 아버지 (총대주교) - שלושה אבות ( ab (아브라함, 이삭, 야곱)
  • 노아의 세 아들은 함과 야벳입니다.
  • 욤토브가 아닌 월,목요일 토라 읽기의 알리요트 수와 샤바트 민차의 알리요트 수
  • 성전(이전에는 성막) 면적의 3분의 1을 성막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 천사들은 하나님이[3] '거룩하신 거룩하신 거룩하신 거룩하신 거룩하신 거룩하신 거룩하신 거룩하신 거룩하신 거룩하신 거룩하신 거룩하신 거룩하신 거룩하신
  • 사제의 축복은 3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셋째날에 유대인들은 토라를 받았습니다.

4

  • 네 명은 어머니들입니다 (Matharchs) - ארבע אימהות ( (Sarah, Rebecca, Rachel, Leah)
  • Rosh Chodesh의 알리요트 수
  • 유월절에는 포도주 네 잔을 마시고, 구원의 네 가지 표현을 암송합니다.
  • 하늘과[4] 땅은[5] 모두 네 개의 면과 모서리를 가지고 있으며, 기본 방향과 유사합니다.

5

  • Five are the books of the Torah - חמישה חומשי תורה
  • 십계명 가운데 다섯 개는 두 [6]판에 각각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 시편집의 절들
  • Tzitzit의 매듭 수
  • Shabbat과 일치하지 않는 Yom Tov의 알리요트
  • 곡물 5종

6

  • 여섯 권은 미슈나의 책입니다.
  • 일주일 중 6일 근무일.
  • 창조의 6일

7

  • 미드라쉬에 따르면 "모든 일곱은 사랑을 받습니다."하늘을 가리키는 말은 일곱 개이고 땅을 가리키는 말은 일곱 개입니다. 에녹은 아담에게서 일곱 번째 세대이고, 모세는 아브라함에게서 일곱 번째 세대입니다. 다윗은 그의 집안에서 일곱 번째 아들입니다. 아사는 하나님을 부르짖는 이스라엘 왕들의 일곱 번째 세대입니다. 일곱 번째 날(삿밧)과 일곱 번째 달(디스레이)과연도(shmita)와 슈미타(shmita)는 모두 특별한 종교적 [7]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 노아의 일곱 가지 법칙
  • 오메르의 계수는 7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 7일입니다.
  • 쉐바 브라코트[8] 축복 횟수
  • 월경니다에서 여자는 미카에 몰입하기 전에 "깨끗한 날"을 7번 세야 합니다.
  • 속죄와 정화의 행위에는 일곱 번의 살수가 수반되었습니다.
  • 성전 안의 메노라는 일곱개의 램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 시바를 애도하는 기간은 7일입니다.
  • Sukkot[8] and Pesach [8](이스라엘)
  • 안식일 아미다, 욤토브, 모든 무사프 기도에서의 축복 횟수(로쉬하샤나 제외)
  • 샤브바트의[8] 알리요트
  • 노아의 방주에는 일곱 마리의 순수한 동물이 있었습니다.
  • 숫자 7은 완성, 하나님과의 연합 또는 거룩함과 거룩함의 언약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 모세는 아달 일곱째 날에 죽었습니다.
  • 안식일 카운트를 포함한 주 주기의 일 수

8

  • Eight are the days of the circumcision - שמונה ימי מילה
  • 이스라엘에서 1년에 욤 토브의 총 일수
  • 차누카 일수
  • 수코 8일
  • 페사흐 일수(디아스포라)
  • 조하르에 따르면 여덟째 날은 하나님이 다시 일을 시작한 창조 후 첫 날이기 때문에 숫자 여덟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한 주가 [citation needed]다시 시작되었습니다.

9

  • 아브의 히브리어 의 첫 9일은 "The Nine Days" (티샤 하야밈)으로 통칭되며, 예루살렘에 있는 두 사원이 파괴된 아브의 아홉 번째 날인 티샤 바브까지 이어지는 반 애도의 기간입니다.

10

  • 십계명
  • 이집트의 열 가지 역병
  • 10명의 유대인들이 민얀을 형성합니다.
  • 카발라에는 열 가지의 세피로트(인간과 신의 특성)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 미슈나에 의하면,세상은 열 가지 신성한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아담과 노아 사이와 노아와 아브라함 사이에 열 세대가 지나갔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열 번의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광야에서 열 번의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집트에서 열 번의 재앙이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열 번의 기적이 일어났고, 황혼 기간에 열 번의 초자연적 현상이 일어났습니다.창제 [9]6일째 되는 날에이 미슈나에서 숫자 10은 많은 수를 나타냅니다(예: 미슈나는 아브라함이 열 번의 시련을 기꺼이 겪으려는 의지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낸다"고 선언합니다).

      * 「Minyan」(명료화)를 참조해 주세요.
         In Judaism, a minyan (Hebrew: מניין \ מִנְיָןmīnyān[minˈjan], lit. (noun) count, number; pl. 민자님(Minjanimnam)특정 종교적 
         의무에 필요한 유대인 성인 10명의 정족수이다.
         유대교의 전통적인 흐름에서는 13세 이상의 남성만이 미니안을 구성할 수 있으며, 보다 자유주의적인 흐름에서는 여성도
         집계된다.  

11


  • Eleven are the stars of the Joseph's dream - אחד עשר כוכביא
  • 향제물에는 열한가지 향신료가 있습니다.

12

  • 열두 개는 이스라엘의 지파입니다 - שנים עשר שיבטיא שיבטיא עשר שנים twelve the of tribes - israel
  • 각 부족의 역할을 나타내기 위해 제사용품은 종종 열두 가지로 나누어졌습니다.대제사장의 가슴판(호센)에는 12개의 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귀중한 돌이 박혀 있었습니다.엘리야는 [10]지파를 대표하는 12개의 돌로 제단을 쌓았고, 모세는 [11]지파를 대표하는 시나이에 12개의 기둥을 세웠고, 여호수아는 [12]지파를 대표하는 요르단강에 12개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열두 지파와 같은 수이다: 12개의 점성술 별자리, 12개월, 하루의 12시간, 밤의 12시간, 대제사장 아론이 입을 12개의 돌."[13]
  • 템플마운트12개의 문을 통해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 유대인 여성이 유대인의 법을 따라야 할 의무가 생기는 박쥐 미츠바의 시대
  • 베이트 하믹다쉬슐찬(테이블) 위에 쇼브레드 열두 덩어리가 있었습니다.
  • 야곱의 아들들
  • 용수철 제거 개수

13

14

  • 유월절 시저의 스텝 수
  • 미쉬나 토라에 나오는 책의 수, Yad Hahazaka라는 제목으로도 Yad가 gematria를 가지고 있는 Yad Hahazaka 14

15

  • 하나님의 [14]이름을 쓰지 않기 위해 히브리어로 숫자를 쓰는 관례와 다르게 쓰는 두 숫자 중 하나.나머지 하나는 16살입니다.
  • 사제 축복의 말씀 수

16

  • 하나님의 이름을 쓰지 않기 위해 히브리어로 숫자를 쓰는 관례와 다르게 쓰는 두 숫자 중 하나.나머지 하나는 15살입니다.

18

  • 히브리어로 생명을 뜻하는 '차이'의 게마트리아.이 숫자의 배수는 행운으로 여겨지며 선물을 주는 데 자주 사용됩니다.
  • 아미다는 원래 18개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Shemoneh Esreh" ("Eighteen")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19번째 축복이 나중에 추가되었습니다.

19

20

  • 이스라엘 군대에 입대할 수 있는 최소 나이
  • 할라카에서는 범인이 최소 20세 이상일 경우에만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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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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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36

  • 세상은 36명의 숨은 의인의 공덕으로 지탱된다고 합니다. 18명의 두배입니다 - 위 참조

40

  • 모세는 토라를 바친 뒤에 시내 산에서 사십 일 동안 머물렀습니다.황금송아지가 끝난 후, 그는 40일을 더 그곳에서 보냅니다. (그리고 밤)
  • 스파이들이 가나안 에 있었던 일수는
  • 사막에서의 세월—한 세대[17]
  • 노아의 시간에 발생한 홍수 동안 밤낮으로 비가 내렸습니다.
  • 레베카결혼할 당시 이삭의 나이
  • 처음 두 부인과 결혼한 에소의 나이
  • 니네베가 멸망하기 전 요나가 예언한 이 지나갑니다.(그들은 회개합니다)
  • 미케브에는 최소 40 세아(부피 측정) 이상의 물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 다윗과 솔로몬, 그리고 심판서에서 가장 의로운 심판들이 다스린 해의 수
  • 명령을 위반한 사용자의 래치 수
  • 토라가 주어진 일수
  • 한 사람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형성되는 주수
  • 아담의 저주 횟수
  • 남자가 산헤드린에 가입할 수 있는 최소 나이

42

  • 신의 이름하나로 쓰인 편지들
  • 난민들이 우발적으로 목숨을 잃었을 때 갈 수 있는 42개 도시(피난도시 참고)
  •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를 지나는 42개의 여행이 있었습니다.
  • 42 예언자 엘리사를 '대머리'로 지목한 후 베델에서 2명에게 참살당한 청소년 (머리가 가려지지 않음)

50

54

60

70

86

130

  • 그녀가 [20]모세를 낳은 요체베드의 나이.
  • 130 세겔 은화는 제단을 봉헌하는 동안 바쳐졌습니다.

248

  • 양의 계명 수
  • 사람의 신체에서 팔다리의 수

314

318

  • 아브라함이 4명의 왕들과 싸우기 위해 가져간 사람들의 수(창 14:14); 또한 엘리에셀의 게마트리아(아브라함의 종)

365

  • 양력의 길이 (유대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 금지계명수
  • 체내 동맥 수

374

  • 첫번째 성전이 세워진 해의 총 숫자

400

세갈림 아브라함이 에브론에게 지급한 금액(베레싯 23:15)

에사브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수는

이집트에서의 세월

613

620

  • 토라와 랍비 기원의 미츠봇을 포함한 총 미츠봇 수.






전형(투포스) τύπος /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



τύπ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5179
1.

찍힌 자리

2.

모형

3.

형성된 것

발음 [ tüpŏs ]
어원
5180에서 유래
  • 1.
    찍힌 자리, 맞은 자리, 표, 흔적, 요20:25.
  • 2.
    모형, 형상.
  • 3.
    형성된 것, 빚어진 것, 초상, 행7:43.
  • 4.
    모양, 형성, 형식, 행23:25, 롬6:17.
  • 5.
    원형, 전형, 표본.
    • a.
      [기술적 의미에서] 모형, 원형, 행7:44, 히8:5.
    • b.
      [도덕적 의미에서] 모범, 귀감, 빌3:17, 딤전4:12.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자국(요20:25), 형상(행7:43), 양식(행7: 44), 모형(롬5:14), 본(롬6:17, 살후3:9, 벧전5:3), 본보기(고전10:6,11).



아담과 그리스도(로마서 5:12-14)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 바울은 그리스도로 인해 새 시대(new aeon)가 시작됨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옛 창조의 시작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가 오염되었음을 가리킴과 동시에 '죄의 세력'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하셨던 명령을 염두에 두었음이 분명하다.

 

죄와 사망은 불가피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여기서 '사망'은

 

(1) 육체적인 죽음,

 

(2)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엡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골 2: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딤전 5:6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계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3) 지옥의 형벌로 영원한 죽음을 의미한다.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본절에서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사망의 개념이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지만 6:23은 마지막 영생과 사망이 대조되어 있으므로 세 번째 사망의 개념이 더욱 타당하다.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 바울은 한 사람에 의해 세상에 들어온 죄가 보편성을 지님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 죄의 보편성에 대해 증명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이미 1:18-3:19에서 이미 설명을 했기 때문이다.

 

 

▶ 이르렀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엘덴'은 일반적으로 '통과하다', '퍼져가다'를 의미한다.

 

 

 

[롬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 본절은 삽입구로서 반론(反論)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내용으로 보인다.

 

그 반론이란 '모세 율법이 있기 전까지 과연 죄가 존재했던가'라는 물음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답변하기를 하나님께서 비록 기록된 율법으로 죄를 심판하지 않으셨으나 인류는 모태에 있을 때부터 저주 아래 있었다고 한다.

즉 율법이 공포되지 않았을 때의 범죄자들 또한 결코 죄의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모세 율법이 주어지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죄의 결과로 생기는 사망이 인류를 지배했다는 점에서 증명된다.

 

(14절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또한 이 같은 사실은 모세 율법이 적용되기 이전의 시대에 아우를 죽인 가인이 하나님께 형벌을 받은 사실,

 

(창 4:9-1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죄악이 관영했던 노아 당시의 사람들이 홍수로 심판을 받은 사실,

 

(창 6:1-7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바벨탑 사건,

 

(창 11:1-9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음란한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 등,

구약성경에 기록된 구체적인 여러 실례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창 19:23-29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24)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27)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28)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

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결론적으로 죄는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14절)의 기간에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구절에는 죄의 역사성(歷史性)과 보편성(普遍性)이 시사되어 있다.

 

 

▶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 모세 율법 전에도 각 나라마다 비록 원시적이긴 하지만, 사회를 통치해 나가는 불문률(不文律)과 법률 및 도덕적 관습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것들의 지배를 받아왔었다(Ur-Nammu Code, Eshnunna Code, Lipit-Ishta Code, Hammurabi Code, Hittite Code).

 

그러므로 율법 이전에도 '죄에 대한 정죄'가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왜 본절과 같은 진술을 하였는가?

 

바울은 단순히 법에 저촉되는 '죄'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죄, 곧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삶 그 자체를 죄로 규정하고 있다.

 

율법이 있기 전에 사람들은 죄를 윤리적인 것으로만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었으며,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을 반역하던 삶이 죄라는 사실을 몰랐으므로 그러한 것을 죄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식이 결여 되었다는 것이다.

역으로 모세 율법이 공포되었을 때 인류는 진정한 의미에서 죄를 죄로 인식하게 되었다.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 아담과 범죄는,

 

(1)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며,

(2) 하나님과 같이 되어 보려고 하는 교만이었다.

 

그리고 모세 이전 사람들이 이와 동일한 범죄를 짓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죄인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거역하는 본성을 이어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호세아 선지자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호 6:7)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인간의 범죄가 단순히 자범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파생된 근본적인 죄임을 선포하고 있다.

 

▶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바실류센호 다나토스' 는 '사망이 왕권을 잡았다'로 번역된다.

이 말은 세상이 죄악으로 충만했다는 의미이며, 보다 적극적으로는 죄악의 세력이 꺾을 수 없을 만큼 강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말에 대조되는 것으로 바울은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21절)라고 표현했다.

 

▶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 이렇게 아담을 그리스도의 표상(表象)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다.

 

두 사람은 신분이나 인류에게 미친 영향면에서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담이 그리스도의 표상이 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1) 아담이 옛 시대의 시조인 것처럼 그리스도는 새 시대의 시조이다.

(2) 아담의 범죄가 모든 사람에게 미치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義)도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후 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즉 아담이 범죄의 시조라면, 그리스도는 의의 시조이시다.

 

이 두 가지 의미에서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튀포스)이 될 수 있다(type)

 




요한복음 3장 16절 / 독생자(모노게네스. μονογενής) 외아들, 성품 속성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 - 오직 하나


유일무이(唯一無二)

'유일무이(唯一無二)'란 성어는 오직 하나 뿐, 
그리하여 다른 것과는 차원이 다른 독특함을 나타냅니다. 
이 성어는 다양한 상황에 사용될 수 있으며, 이 명제와 관련된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중국 문헌에서 발견되는 이 성어는 철학적 관점에서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것을 이야기하는 데 사용되였고, 
이를 통해 그 아름다움과 순수함을 설명하였습니다. 

유래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나 역사적 배경은 찾을 수 없지만, 중국 철학과 역사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를 통해 이 성어가 오랜 시간 동안 전통적인 문화에서 독특하고 지존하는 것을 상징하는 역할을 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이 역사적 배경과 연관된 이야기를 살펴보고 독자들이 이 성어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자풀이

이제 '유일무이(唯一無二)' 성어의 각 한자가 가진 의미를 살펴봅시다. 
이를 통해 성어의 전체적인 뜻과 그 속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고 이를 다양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唯 : 오직 유 
    이 한자는 오직, 단 하나라는 의미를 가지며, 다른 것과 견주어 볼 때 그 순수하고 독특한 가치를 나타냅니다.
     
  • 一 : 한 일 
    이 한자는 숫자 '하나'를 나타내며, 전체적인 구조 속에서 다른 것과 구별되는 독특함을 표현하는데 사용됩니다. 

  • 無 : 없을 무 
    이 한자는 없음, 부재를 의미하며, 다른 것과 차이를 두기 위해 쓰이는 부정적 표현입니다.
     
  • 二 : 두 이 
    이 한자는 숫자 '두'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이 한자가 부정적 표현으로 사용되어, 두 번째도 아닌 오직 하나뿐임을 강조하는데 사용됩니다.


후토스 가르 에가페센 호 데오스 톤 코스몬 호스테 톤 휘온 톤 모노게네 에도켄 히나 파스 호 피스튜온 에이스 아우톤 메 아폴레타이 알 에케 조엔 아이오니온

개역개정,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새번역,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말성경,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가톨릭성경,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영어NIV,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영어NASB,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begotten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영어MSG,16  "This is how much God loved the world: He gave his Son, his one and only Son. And this is why: so that no one need be destroyed; by believing in him, anyone can have a whole and lasting life.
영어NRSV,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Son,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may not perish but may have eternal life.
헬라어신약Stephanos,16 ουτως γαρ ηγαπησεν ο θεος τον κοσμον ωστε τον υιον αυτου τον μονογενη εδωκεν ινα πας ο πιστευων εις αυτον μη αποληται αλλ εχη ζωην αιωνιον
라틴어Vulgate,16 sic enim dilexit Deus mundum ut Filium suum unigenitum daret ut omnis qui credit in eum non pereat sed habeat vitam aeternam
히브리어Modern,16 כי ככה אהב האלהים את העולם עד אשר נתן את בנו את יחידו למען לא יאבד כל המאמין בו כי אם יחיה חיי עולמים׃


이 구절은 복음에 관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서들 속에 있는 복음'(the Gospel within the Gospels) 혹은 `작은 복음서'(Little Gospel)라고 불리기도 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전체 대표할 수 있는 요절인 본절은 복음의 진수(眞髓)로서, 복음이 담고 있는 모든 계시의 말씀을 사랑의 개념에서 천명(天命)한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세상'을 뜻하는 헬라어 `코스모스'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온 인류를 가리킨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은 선민 이스라옐에게만 국한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민족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이는 곧 복음의 보편성과 그 맥을 같이한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개방되어 있지만 그 은혜틀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본절에는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기가된 것임이 밝혀져있다. 
특별히 `사랑'의 헬라어 `아가페'는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 중의 하나로서, 하나님 편에서 선수권(先手權)과 주도권(主導權)을 가지고 인생의 연약함과 죄성을 끝없이 감싸 안으신다고 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이라 하겠으며(요일 4:8)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의 생애를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사랑은 결코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성격의 것이며 막연한 이론이나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응분(應分)의 대가를 아낌없이 지불하는 것이다. 
그리고 `독생자'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의 특수함을 강조하는 말이며, 루터의 말을 빌리면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결국 예수의 탄생은 영원 전부터 독생자로 존재하셨던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이었다는 점에서 유일 무이한 사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독생자'
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노게네스'`외아들'이란 뜻 외에 `그 속성과 성품에 있어서 유일 무이하신 분'이란 의미도 내포한다. 

그리고 본서에서는 `아들'의 뜻인 `휘오스'를 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3:16, 36;5:20, 23;8:36 등). 
한편 `주셨으니'의 헬라어 `디도미'는 `보내다'(send)와 `넘겨주다'(hand over), `값을 지불하다'(pay) 등의 뜻이 있는데 본절에서도 이 말은 성육신(Incarnation)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심(crucifixion)까지도 의미하고 있다. 
웨스트콧(Westcott)은 이 낱말이 제을 바치는 일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창 22:2 주석 참조).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믿는 자의 구원에 있음을 15절에 이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멸망'과 `영생' 사이에 어떠한 중립적인 선택은 없으며 그것은 절대적인 양자 택일의 문제이다. `멸망하다'의 뜻인 `아폴뤼미'(*) 또한 요한이 자주 사용한(10번 정도) 단어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첫째, 이 말은 `잃다', `상실하다'(to be lost)의 뜻과 둘째, `없어지다', `파괴되다'(to perish, be destroyed)의 뜻이 그것이다. 또한 이 동사는 구원과 반대되는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이며,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을 나타낼 때(막 3:6), 존속되는 것과 반대되는 `멸망'을 나타낼 때 (고전 1:19), 그리고 무엇을 얻거나 받는 것과는 반대되는 `상실'을 나타낼 때 등의 경우 에도(요이 8절) 사용되었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아가는 자들은 필경 절망과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됨을 암시한다. 그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허망하며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멸망을 뜻한다.


μονογενής, ές 스트롱번호 3439

1. 오직.  2. 독생하신
발음 [ mŏnŏgĕnēs ]
어원  /  3441과 1096에서 유래
  • 1.  오직,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눅7:12, 9:38, 8:42, 히11:17.
  • 2.  독생하신, 요 1:14, 18, 3:16, 요일 4:9.
  • 관련 성경  /  독생한(요 1:18). 
    [명] 외아들(눅 9:38, 히 11:17), 독생자(요 1:14, 요일 4:9).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독생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 요한복음 3:16에 나오는 말입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헬라어 모노게네스를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은 영어로 “only 오직”, “one and only 오직 하나뿐인”, 
그리고 “only begotten 독생하신”으로 다양하게 번역됩니다.

문제는 마지막 단어(KJV, NASB, NKJV에서 사용된 “only begotten 독생하신”)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짓 가르침을 증명하기 위해 이 말을 고수해왔습니다. 
즉 예수님은 삼위일체 중 두 번째 인격으로서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어 “begotten 생긴”을 보고 시간상 시작이 있는 존재만이 오직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창조된 존재라고 말합니다. 
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begotten 생긴”이 헬라어를 번역한 영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어의 의미를 본문에 전가할 게 아니라 헬라어의 본래 의미를 살펴 봐야 합니다.

모노게네스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헬라어-영어 신약성경 사전과 다른 초기 크리스천 문학 (BAGD, 제 3판)에 의하면 모노게네스는 두 가지의 중요한 정의를 가집니다. 

첫째, 특별한 관계 안에서 오직 하나뿐인 종류로 존재하는 것

히브리서 11:17에서 저자가 이삭을 아브라함의 “독생자”라고 언급한 부분에서 사용된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한 명 이상의 아들이 있었으나, 이삭은 사라에게서 난 유일한 언약의 아들이었습니다.

둘째, 종류 또는 계급에 있어서 오직 하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독특한 종류로서 존재하는 것
 
요한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언급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한 유일한 저자입니다(요한복음 1:14, 18; 3:16, 18; 요한1일 4:9). 
요한은 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관심이 있었기에(요한복음 20:31), 
예수님을 하나님과 같은 신성한 본성을 가지신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각시키는 데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믿는 자들에게는 사용하지 않는 표현입니다.

요컨대 하나님과 예수님을 묘사하는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말은 우리로 하여금 삼위일체의 각각 다른 인격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인간적인 용어라는 것입니다. 
사람 아버지와 사람 아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으면 삼위일체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인격 사이의 관계도 부분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기독교 이단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처럼, “begotten 생긴”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태어”나거나 “창조”되었다고 곡해하고 그렇게 가르치려 하는 것은 잘못된 유추입니다.


'독생자'란 무슨 뜻인가요?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까?

신약성서에서   9번 사용된 단어로, 독특한 또는 독특한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는 외아들을 지칭하기 위해 이 용어를 세 번 사용합니다(눅 7:12 , 8:42 , 9:38 ).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과 약속의 아들인 사라의 외아들인 이삭을 지칭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합니다( 히브리서 11:17 ). 
현대 번역판은 일반적으로 이 정의를 반영하기 위해 요한복음 3:16을 "유일한 아들" 또는 "독생자"로 번역 합니다. 
성경의 다른 구절들은 이 점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1-3“독생자”로 번역된 헬라어 용어는 모노게 네스( monogenes) 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가 어떤 식으로든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태어나거나 창조되었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대신, 아버지와 독특한 관계를 맺고 계신 예수님이 강조됩니다.

​성경에서는 종종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님과 예수님과 함께 사용하여 우리가 인간으로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그들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느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골로새서 1장 15-17 절도 예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3:16절의 이 구절은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 예수님을 유일하신 분으로 언급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장 14 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 18 절에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18덧붙여 “그를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요한일서 4장 9절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완전히 독특하시지만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는 이해는 초기 교회에서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초기 신조 중 하나인 니케아 신조에서 강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시요,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니, 하나님의 하나님이시요, 빛 중의 빛이시요,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이시라, 나셨으나 만들어지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요, 아버지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되었느니라." 

이 진술은 예수가 영원하며 세상에 구원을 제공하기 위해 보내진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임을 분명히 하고자 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이유


신학적 의의

삼위일체 신론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신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 곧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동일한 한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즉 주시오,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에서 출발한다. 구원을 약속하시고 이를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은 당신을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게 해 주신다. 삼위일체론은 성서 안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신앙 고백을 다루는 신학적인 해석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고 이루어진 궁극적인 진리와 실재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37)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 본질, 한 실체임을 강조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계시의 현실이 곧 신적인 본질과 동일한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38) 삼위일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사건 가운데 밝혀지는 신앙의 새로운 현실을 알려 주는 언어로서 하나님이 자신을 예수라는 인간의 구체적인 실재 가운데 인간과 스스로 연관적이게 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계시의 언어임을 의미한다.39)

인간의 인간성은 결코 그 자체로 그 존재의 근거와 목적을 갖지 못하며 철저히 하나님의 신성을 통해서 새롭게 근거와 참된 완성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의 인간성은 비록 창조의 사건을 통한 하나님과의 연관 속에서 이미 긍정되고 우리에게 수여되었다고 할지라도 또 한 번 육신이 된 똑같은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본래적인 의미와 완성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죄로 어두워지고 파괴된 상태에 있는 인간의 인간성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자유로운 사랑과 은총 가운데 그분의 신성에 용납되며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으로서 결정적으로 그분이 계시하고 정한 바 새로운 실재 가운데 알려지고 개방된다.40)

성육신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 하나의 이름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자기전달이다.41) 삼위일체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가운데 드러낸 사건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알려진 하나님 자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유의 완전성과 전체성(totus Dei 가 아닌 totum Dei)을 증거하는 신앙의 언어이다.42) 하나님 자신의 사건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삼위일체는 역사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궁극적인 자기전달이다.43)

하나님의 육성으로서의 4복음서44)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인간이시다. 하나님 자신의 궁극적인 자기전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말씀을 기록한 것이 4복음서이다. 따라서 4복음서는 신의 말씀, 곧 하나님의 육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성육신이시다. 비록 부족한 제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것이지만, 하나님의 육성과 그 흔적은 4복음서에만 있다. 따라서 4복음서는 하나님의 최종적이며 유일하신 말씀의 권위를 가진다. 4복음서를 구약이나 신약중의 하나의 성경으로 보는 잘못된 시각을 바꾸어, 모든 말씀의 최종, 최고 권위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에 한정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한다. 바울은 십자가 대속으로 오는 은혜를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을 복음이라 하였으나,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만을 복음이라 하였다.

바울을 중심한 초기교회에서는 주후 33년 이후부터 70년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말씀된 복음이 교인들에게는 전혀 들려지지 않다시피 하였다. 신약성서 가운데 복음서가 맨 앞에 등장하지만 가장 먼저 저작되고 교회에 유포·회람된 책은 바울 서신이다. 신약성서 27권 중 바울 서신이 기록된 시기는 48년부터 58년 사이로 성서비평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그 뒤를 이어 마가복음이 60∼70년경, 마태복음70∼80년경, 누가복음 과 사도행전 80∼90년경, 그리고 요한복음이 90∼100년경에 쓰였다. 따라서 바울 서신은 복음서보다 앞선 교회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주로 이방인들이 주축이 된 교회들 사이에 회람된 바울서신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강조하는 선교 신학이다. 이는 믿지 않는 자들을 교회에 입문시키는 기초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이 바울이 정립한 바울의 복음이나 바울의 사상이나 신학이나 바울의 신앙이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처럼 동일시되었다.

이런 구약적 회귀와 바울적 복고와 영지적 역행의 혼란 속에서 복음서 기자들은 대단한 용기와 각오와 수고로 바울이 말하는 복음과는 전혀 다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한 복음서를 내어 준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별되었다. 복음서 기자들은 바울처럼 유추하거나 스스로 정리한 것이 거의 없이 사실적이며 역사적인 복음을 중시하였다.45)

하나님이 바로 성육신 하시어 친히 말씀하시며 새로운 구원 역사를 시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과 진리와 생명의 복음이 온 인류와 모든 만물을 멸망치 않고 영생하는 유일한 구원의 원리와 법칙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없이도 되는 기독교와 교회는 어불성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영원무궁하시고 영원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인류의 마지막 구원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다.46)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동일시하면서, 교리와 신조와 신경으로 애를 썼으나 무리와 억지였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은 역사성과 사실성에 대한 책임이 없다. 말하는 자마다 다르고 시대마다 다를 수 있다. 이런 것을 복음 과 구분치 못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달리 추가를 하거나 수정을 하거나 보완을 할 수 없다. 그렇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하신 말씀, 곧 하나님의 유일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구약과 바울의 가르침과 혼합될 수 없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의 복음과 동일선상에 놓일 수 없다. 때문에 구약과 바울의 기초하에서 2천 년간 지탱되어 온 기독교를 보수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새 기초를 놓아 새집을 지어야 한다.47)

신앙을 위한 예수에 대한 복음은 얼마든지 말할 수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역사적으로 말씀되어진 대로 사실대로 기록되어 있는 대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소설이나 공상이나 유령이나 영상으로 말하여도 무방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복음서가 나온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으로 망각되고 제외되고 실종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되찾기 위함이다. 그리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구원 역사를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였다.48)

예수가 구약의 왜곡을 걷어내기 위해서 오셨듯 이제는 복음서가 바울을 걷어내야 한다. 바울은 복음서가 나오기 이전에 이미 교회와 서신서 들을 통하여 기독교를 만들고 형성하였다. 그래서 복음이 높이 올려진 것이 아니라 유대교적 기독교 종교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구약과 바울로 가려지고 덮혀지고 묻혀져서 보이지도 않게 되고 들리지도 않게 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 바울의 복음이 이제는 기력을 완전히 잃었다. 가감할 수 없는 복음만이 교회와 기독교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친히 주신 인류 구원의 참 길과 진리와 생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나머지는 예비요, 준비며 서론일 뿐이며 부수적일 뿐이다. 그러니까 “오직 성서” 안에 들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근원의 복음이다.49)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다. 길이라는 말은 곧 도를 말한다. 도는 진리와 생명의 도를 말한다. 도는 이치(理致)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도는 어떤 제한적인 전제가 전혀 없는 우주 만물의 객관성을 말씀하신 것이고, 인류가 멸망치 않고 영생하는 도를 말씀하신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객관적인 원리를 말씀하신 것이지 주관적인 교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도에는 자기 욕심이나 사심이나 이기심을 버리는 것이나, 지위고하, 성공실패, 전쟁, 대적, 승리 같은 것이 없다.50)

유대교나 로마교나 기독교는 그런 도에 이르지 못하였다. 진리를 알기 원하기보다 자기 구원을 위하여 열심을 다해서 빌고 바라고 바치며 안간힘을 쓰며 혈기를 부리며 집단적인 행패를 부리고 폭력을 불사한다.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죽거나 없어지거나 줄어들거나 실패하거나 죄를 지으면 안 되는 것과 상관없이 더 강하여야 하고 언제나 이겨야 하며 전능하신 신과 함께 사는 신앙인들을 말한다. 아플 때는 낫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 그러다가 죽음이 오면 죽지 않기를 바라서 기도하고 애쓰며 정한 이치로 돌아가는 순리와 정도를 역행한다.51)

구속신학은 인간들의 최대 염치없는 사리사욕이며 이기심이다. 자기가 자기의 죄 값을 떳떳이 치루지 못하는 비열한 인간들이며, 죄 없는 짐승을 잡아서 신에게 바치는 것은 짐승의 원한을 살 일이며 하나님을 물질로 보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죽음으로 주홍같이 붉은 죄일지라도 사하심을 받아 전에는 죄인이었지만 자기가 이제는 의인이 되었다는 대속론은 참으로 뻔뻔한 인간들의 망연자실이다. 도를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도에 이르고 도에 거하기를 바라시는 그 이상이 없는 것을 모른다.52)

“독생자”라 믿는 믿음이 중요한 이유

복음은 하나님의 최후 계시이며 말씀이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브리서1:1-2)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다시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하여 그의 다른 아들을 결코 주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백성들을 위한 구원의 일을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끝내셨다(요한복음19:30).

복음은 “아들에 관한 말들(words about the Son)”이 아니라, 
“그 아들의 말씀(Word of the Son)”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모세와 토라는 유대교를 위한 기초이다. 
교황과 법규집은 로마 카톨릭의 기초이다. 
바울의 신학은 개신교의 기초이다. 
코란과 모하메드는 이슬람의 기초이다. 
더하여, 포스트모던 신학의 기초는 좋게 들리는 모든 것을 결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뿐이다.

복음은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신학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신학, 교회신학, 성서신학들은 너무나 많은 이론들과 교리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고 꾸미고 수정하였다.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과 교리와 신조와 신학들로 교회 밖에서보다 교회 안에서 가려졌고 매장되었고 무시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은 사람들에 의해 편집되고 이서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 길과 생명과 진리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은 사도들과 사도 적 교부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수립하고 체계화한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을 만한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그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다. 복음은 다른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이나 교부들이나 목사들이나 종교개혁자의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세의 율법이 아니다. 바울의 서신도, 사도 신조도, 초기교회의 교리도, 로마 캐톨릭의 규범집도, 어떠한 개신교 신학들의 것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죄인들과 덕인들 간에, 원수와 친구들 간에, 신자와 비신자간에, 세리와 매춘부들, 살인자와 강간범들 간에, 가난한 자와 부자들 간에 어떠한 구별도 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은 복음을 듣고 깨닫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다.

예수를 삼위일체 하나님이라 믿으면서도 사실은 전혀 그렇게 믿지 않은 기독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육신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육성이다. 이 육성의 복음은 바울 이전에 이미 가르쳐진 복음이다. 바울과 상관없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다. 대속과 상관없는 하나님 자신의 구원의 복음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육성인 4복음서가 바울 복음 앞에 숨을 쉬지 못했다. 대속론을 대표로 하는 바울신학이 구약과 4복음서 해석의 중심 원리가 되어 버렸다. 모든 성경이 바울의 대속론을 위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4복음서가 하나님의 본질 메시지인데도 바울신학을 위한 부교재(副敎材) 정도로 사용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가르침과 상관없는 바울의 가르침이 기독교를 점령해 버렸고 정통 기독교가 되어 버렸다. 이 바울 기독교가 바로 오늘날 인류의 생존을 방해하는 애물단지가 되어 버렸다. 건설적인 모든 가치를 왜곡시켰다.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원리를 왜곡시켰다. 억지 종교 교리만 남아 있는 기독교를 만들고, 해독을 뿜어내는 기독교가 되어 버렸다.

때문에 시대를 위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곧 하나님의 친 육성을 바울 신학과 분리하여야 하며, 더 나아가 4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 말씀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바울의 신학과 상관없이 오직 4복음서의 가르침을 발견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래 복음을 발견하는 길이다. 하나님은 그냥 신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친부인 것을, 모든 인간들은 신의 피조물로서 신의 도구가 아니라, 친부 창조주의 친 자녀들이며, 형상이며 생명의 존재들이어서 창조주의 가능성을 그 영에 가지고 있는 존재들인 것을, 그래서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임을, 용서는 대속을 통한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결국 죄사함 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들이 되는 것을, 그리고 내세 천국 구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창조 목적을 위하여 인간들 간에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여 원수까지 한 형제와 가족으로 사랑하여 아버지의 가정을 이룩하는 사랑의 나라인 것을 예수 그리스도는 말하였다.

바울이 말한 대속 구원은 전혀 예수께서 말씀하신 구원이 아니다. 내세 천국 구원의 유일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유일하다고 믿고 가르치기 때문에 모든 오해들이 발생하였다. 종교적이며 신학적인 문제가 발생하였고,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 공생에 문제를 발생시켰다. 내세 천국은 현재 인간들이 사는 삶에서 단지 육체만을 벗는 의미의 삶이다. 육체 없는 삶이 죽은 후의 삶이고 내세의 삶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 천국을 살 수 없는 실력이면 내세 천국에서도 천국다운 천국을 살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천국 가는 오직 유일한 대속의 제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친히 말씀하신 신의 육성으로서의 유일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은 신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라는 절대 권위의 말씀으로서의 유일성이다. 누구도 절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변개, 변조 시킬 수 없다. 친부, 친자, 인간의 본 생명, 인간에 대한 아버지의 희망, 아버지의 방식대로 원수까지 서로 사랑하며, 결국 아버지와 같은 형상으로 완성되는 구원에 대한 가르침은 절대로 인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단순한 교훈이 아니다.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창조주 신의 말씀이다.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증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다. 우리는 예수를 하나님의 독생자로 믿어야 하며, 그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 한다. 예수를 하나님의 독생자로 믿지 않으면, 그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을 수 없으며, 그의 가르침을 믿지 않는 것은 곧 그가 하나님의 독생자요, 하나님이신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는 것은 진실로 믿음이 필요하다. 다른 모든 가르침은 이해할 수 있지만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하는 문제이다.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으며,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말씀하신다는 자기 증거를 살펴보자.

우선 그는 그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설명한다. 그는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오셨으며54) 그는 오셔서 진리를 말씀하셨다.55) 그래서 요한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왔다”고 한다.56)

진리는 무엇에 관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아버지”에 관한 것이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왔는데, 그것은 아버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이었다.57) 그는 아버지를 아는 유일한 분이시다. 그를 통하여 그 아버지를 알 때 우리는 우리가 영생을 이미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때문에 아버지의 일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이 100%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하신다.58)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영생을 가지는 방법이라고 하신다.59)

이 진리는 처음부터 아버지 그 자신의 말씀이셨다. 그 말씀은 100% 그분 자신이셨다. 이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60) 말씀이 인간의 육체로 변형되셨다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위하여 한 육체를 준비하시고 그 육체 안에 직접 오심으로 그 육체를 말씀의 완전한 표현을 위한 장치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 말씀 안에는 완전한 아버지에 관한 지식과 이해가 있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고,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한없는 경륜과 지식이 완전하게 들어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개역한글, 요한복음1:14)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말하라고 하신 바로 그 말씀이셨고, 그 말씀을 알면 영생을 가지게 되는 말씀이셨다.61) 그 말씀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 자체이다. 그는 그 자신의 마음대로 하는 것이 전혀 없으시다.62) 그는 아버지에게서 보고 배운 것만을 말씀하신다.63) 아버지께서 말하라고 이르신 것만을 말씀하신다.64) 그분의 말씀은 하나님이 인치신 말씀이다.65) 그분의 말씀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66)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가르침이 그의 것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분의 것이라고 하신다.67)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 싶어 하시는 말씀 그 자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분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것을 믿어야 한다. 그분의 말씀은 육체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하나님의 친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삼위일체 신앙의 핵심이다. 모든 성경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최고 최종 권위를 가진다.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배우고 이해하여야 한다. 이해를 하지 못한다면 말씀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분이 “아버지”를 말씀하신다. 왜 그분이 “아버지”에 관한 말씀을 하시는가?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영생, 그리고 신의 삶을 사는 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독생자”로 믿지 않는 증거

어떤 책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가? 로마서인가? 아니면 레위기인가? 만약에 이같이 4복음서, 특별히 요한복음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믿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독생자의 친(親) 말씀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성경이 감동으로 기록되었지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친히 하신 말씀이 첫 번째로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