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4:16) 새로운 피조물(카이네 크티시스) καινη κτισις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이해를 안목(眼目)이란 관점에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찰스 엘 알렌(Chales L Allen)
하나님의 정신의학(God's Psychiatry)

찰스 엘 알렌(Charles L. Allen)이라는 사람은 [God`s psychiatry]라는 저서에서 세 가지의 시력을 들고 있다.
첫째가 신체적 시력이다.
둘째는 정신적 시력이다. 이성(理性)이 밝아야 한다. 비판하고 추리하고 통합하는 사고능력이다. 합리적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는 총명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이해력이 없이는 진리를 볼 수 없다.
셋째는 제 3의 시력이 필요하다.
바로 영적 시각이다.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있어야 한다.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Therefore we do not lose heart. Though outwardly we are wasting away, yet inwardly we are being renewed day by day.

겉사람이 후패한다는 것은 육체적인 시력이 약화되어 나빠지는 것이라면
속사람이 날로 새로와진다는 것은 영적인 시력이 점점 더 좋아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영적 시력을 향상(向上)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 시력을 어떻게 향상시켜야 합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읽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방법은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통독(通讀)하는 방법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요한계시록까지 읽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 결혼생활 50년 동안 하루 세끼 식사를 계속했는데 무엇을 먹었느냐?고 묻는다면 매끼마다 무엇을 먹었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아마 아무도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밥을 먹었고 반찬을 먹었다고 말한다면 성경을 통독하는 것도 무엇을 읽었느냐 하고 묻는다면 성경을 읽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독(精讀)하는 방법

성경의 어느 책을 정하고 한 구절 한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살펴가며 읽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발의 등이란 어두움 밤길을 걸어갈 때 손전등을 어디에 비추며 걸아갑니까?
바로 내 앞의 발등을 비추며 걸어갑니다.
발 앞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간혹 저 멀리 비추기도 합니다.
목적지를 살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 마가복음 12:30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누가복음 10: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힘을 다하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마음을 다하라 - 마음의 깊이
목숨을 다하라 - 마지막 기회
뜻을 다하라 - 변함이 없이
힘을 다하라 - 변화를 일으킬 때 까지










찰스 엘 앨런 (Charles L. Allen)
뉴본 조지아 주에서 출생한 앨런 목사는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아틀란타에 있는 그레이스 감리교회에서의 사역을 포함하여 미국 전역에서 목회자로 섬겼다.
1960년에는 휴스턴 텍사스로 이주하여 1983년까지 제일감리교회에서 시무하였다.
앨런 목사님이 시무하는 동안 뉴본의 그레이스 교회는 조지아주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였고, 휴스턴에서 시무하는 동안에는 제일감리교회가 12000명이 출석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감리교회로 성장하였다.
1950년대에는 아틀란타 신문사와 컨스티튜에서, 나중에는 휴스턴 신문사의 사설가로 있었다.
그의 또 다른 저서로는 <하나님의 정신의학>(God's Psychiatry)등이 있다.

교회성장형 성도의 자화상

성장은 하나님의 뜻이다(고전 3:5-7).
하나님은 우리 개인과 가정과 교회가 성장하기 원하신다.
성장하는 사람은 자신의 자화상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분과 목적과 능력이 달라진 새로운 피조물이다.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능력은 성령의 은사와 열매이다.
그렇다면 교회성장형 성도의 자화상은 무엇인가?
‘성장(成長)’이라는 의미를 가진 영어 단어 GROWTH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겠다.

성장(成長) / 이룰 성, 길 장 / GROWTH

  • 1. 생물이 자라서 점점 커짐. 또는 성숙(成熟)해짐.
  • 2. 사물의 규모가 커짐.

  • GROWTH

    Goodness - 양선(良善)
    Revival - 부흥(부흥)
    Obedience - 순종(順從)
    Word - 말씀(聖經)
    Thanksgiving - 감사(감사)
    Humility - 겸손(겸손)


    첫째, 교회성장형 성도의 제 1 자화상은 GOODNESS, 즉 양선(良善)이다.
    교회성장형 성도는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며 참되시고 거룩하시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은 부모나 자식, 형제나 친구, 이웃들에게 친절하고 좋은 성도이며, 세상과는 구분된 거룩한 자이다. 하나님 제일주의이며 그분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자이다.

    헬라어에는 선(善)에 대한 두 개의 낱말이 있다. 첫째는 단순히 성질이 선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 ‘아가토스’이며, 둘째는 ‘칼로스’란 단어인데 이것은 단순히 선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매력있고 아름다우며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을 뜻한다. 성도의 선한 행위는 단순히 선할 뿐만 아니라 역시 마음을 끄는 힘이 있어야 한다. 어떤 매력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교회성장형 성도의 자화상은 예수 사랑의 공동체에서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도 아름답고 매력적인 양선(良善)이어야 한다. 바로 이것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중의 하나로서 성령충만한 성도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영적 덕목인 것이다.

    옛날의 궁수(弓手)들은 활의 한쪽 끝은 자기 발 옆에 내려놓고 또 다른 끝은 자기 앞에 세웠다. 그리고 활의 크기는 그 궁수의 키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법칙이었다. 활이 궁수의 크기와 똑같으면 그 때 비로소 그 궁수는 자신감을 가지고 전쟁터에 나갔다. 이 세상에 선을 발산하는 성도의 능력은 바로 성도 개개인의 영적 키와 일치하는 것이다.

    둘째, 교회성장형 성도의 제 2 자화상은 REVIVAL, 즉 부흥(復興)이다.

    교회성장형 성도는 교회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밖으로 뻗어나간다. 내적으로는 갱신, 외적으로는 부흥을 도모한다. 여기서 ‘부흥’(復興)의 의미는 깨어나는 것이며 살아나는 것을 뜻한다. 이 단어는 원래 ‘숨쉰다’는 뜻을 가지고 있던 ‘산다’라는 단어의 어근에서 파생되었는데, 숨쉰다는 것은 활동하는 것들의 생명력에 대한 표현이다. 영적 부흥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어 다시 살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삶 속에서 날마다 부흥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그들이 성령충만하다는 것이다. 성령충만은 예수충만을 의미한다. 자나깨나 예수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삶의 방향도, 삶의 목적도, 삶의 소망도 오직 예수이다. 성령충만은 성도들의 삶과 신앙을 회복시키는 강력한 에너지이자 동시에 예수를 증거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내적요소이다.

    성령충만한 성도는 각자가 속한 가정과 직장, 사회와 단체, 더 나아가 국가와 세계를 향한 영적 재생산과 영적 열매를 맺는다. 나 자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를 알게 되었는가? 를 자문할 때 부끄럽지 않도록 주님을 증거하는데 인색하지 않다. 이처럼 성령충만한 자는 신앙성장과 삶의 변화를 맛보게 되며, 자연히 교회성장에도 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교회성장은 작은 데서부터 시작된다. 성령충만한 성도 개개인이 부흥의 자화상으로 회복될 때, 교회는 비로소 성장의 씨앗이 발아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교회성장형 성도의 제 3 자화상은 OBEDIENCE, 즉 순종(順從)이다.

    교회성장형 성도는 영적 권세에 순종하는 자이다. 구약 성경에서의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한다. 혹은 그것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 ‘혹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다고 말한다(롬 5:19). 예수님의 가르침은 순종 이외에 다른 것이 없다. 교회성장형 성도는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자이다.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믿음의 순종은 성도간의 사랑, 이웃간의 사랑으로 표현된다. 작은 불씨 하나가 큰 불을 만들듯이, 작은 사랑 하나가 큰 사랑을 이루게 된다. 하나님이 실천하신 사랑을 듣고 행하는 것이 바로 순종인 것이다. 교회성장형 성도는 서로에게 순종하며, 피차 복종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생활속에 묻어난다. 성도간의 불협화음으로 야기되는 자중지란(自中之亂)은 성장의 최대 걸림돌지만, 순종의 태도는 교회사역에 있어서 강력한 힘이 되며 최대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는 디딤돌이다. 교회 일에 절대 순종하는 성도가 많을수록 사역의 시너지는 급상승하게 된다.

    미국의 한 연구기관에서 지난 8년 동안 미국 전역에서 2만 여명을 대상으로 수명 차이를 조사했다. 조사결과를 보면, 전혀 교회를 나가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의 경우 평균수명이 7년이나 더 길었다고 한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 신체기능이 더 양호하고, 병에 걸렸을 경우 회복도 빠르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 듀크 대학이 1999년 한해동안 4천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걱정을 줄이고 우울증을 치료하는데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면 건강도, 사업도, 회사도, 인생도 새롭게 변하고 좋아진다는 것이다. 교회가 이처럼 순종하는 성도들로 붐빌 때, 교회성장은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넷째, 교회성장형 성도의 제 4 자화상은 WORD, 즉 말씀(聖經)이다.

    교회성장형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이 탁월하다. 그들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슨 일을 하시는가에 대한 바르고 충분한 지식을 터득한다. 성장형 성도라면 단편적인 성경 지식만 깨닫는 것이 아니라 성경공부를 통해 확실한 교훈과 적용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산을 옮길만한 신념과 신령한 체험이 있더라도 성경 말씀에 근거하지 않으면 백해무익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성도들이 영적 성장을 이루는데 가장 유익한 도구가 된다. 성장형 성도의 청사진을 제공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기독교의 본질 그 자체이며 성장형 성도의 황금률이다.


    미국의 농담에 거북이 교인(Turtle Christian) 이라는 말이 있다. 새는 9일간 먹지 않고 살 수 있다. 사람은 12일간이고 개는 20일간 견딜 수 있다. 그런데 거북이는 500일을 먹지 않아도 살고 뱀은 800일을 견딘다. 곤충들은 1,200일을 음식 없이도 생존한다. 그래서 참다운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 없이 사는 성도를 거북이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

    '찰스 엘 알렌'이 쓴 「하나님의 정신의학」이란 책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사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육적으로 건강하다고 말한다. 교회 성도라면 누구나 말씀을 사랑하며 살 때 같은 복이 임하게 된다. 성장형 성도도 예외일 수 없다. 그들 역시 매일 말씀을 먹어야 한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성경을 가까이 하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이다.

    코끼리는 우둔해 보이지만 생존을 위한 지혜는 가히 경이롭다. 코끼리는 더울 때 귀로 부채질을 하거나 목욕을 하여 더위를 이겨낸다. 또는 침을 잔뜩 괴었다가 코로 들이마신 후, 몸에 뿌리는 식으로 더위를 피한다. 물론 이 방법은 근처에 개울이나 연못이 없을 때 쓰는 비상 수단이다. 햇볕을 피해 나무 그늘을 찾아서 몇 시간이고 꼼짝 않고 서 있을 때도 있다.

    코끼리의 지혜는 음식 섭취에서도 나타난다. 코끼리는 이빨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 대나무를 즐겨 먹는다. 코끼리는 단단하고 질긴 통 대나무를 으깬 다음, 코로 말아 올려 먹기도 하고, 그냥 입으로 '우지직’씹어 먹기도 하면서 부족하기 쉬운 영양소를 섭취한다고 한다. 또한 아프리카의 건조한 초원 지대의 코끼리는 죽은 동물의 뼈를 먹음으로써 부족한 칼슘을 보충한다. 그들은 보통 하루에 300kg 정도의 먹이를 먹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몸에 꼭 필요한 영양분을 찾아 섭취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성장형 성도의 영적 건강도 무슨 음식을 섭취하는가와 직결된다. 물론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해야 한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말씀에 대한 편식에 길들일 수 있다. 어린아이가 밥상에서 편식을 하듯 말씀에 대한 편식을 하는 것이다. 귀에 거슬리는 말씀에는 방음막을 친다. 좀 까다롭거나 부담스러운 말씀은 그냥 건너뛴다. 그러나 깨달아야 한다. 코끼리는 달콤한 야자 열매만 찾아다니지 않는다. 코끼리는 칼슘을 보충하기 위해 억센 대나무를 씹기도 하고, 죽은 동물의 뼈를 먹기도 한다. 교회성장형 성도라면 이런 결단이 절실히 요구된다.

    다섯째, 교회성장형 성도의 제 5 자화상은 THANKSGIVING, 즉 감사(感謝)이다.

    교회성장형 성도는 범사에 감사할 줄 안다. 영어의 "Think"(생각한다)와 "Thank"(감사한다)는 같은 어간에서 나온 말이다. 깊이 생각하면 범사에 감사하게 된다. 생각이 욕심 쪽으로 기울면 불만과 다툼이 생긴다. 그러나 생각이 하나님 쪽으로 기울면 감사와 만족이 나온다. 이처럼 교회성장형 성도는 없는 것을 탐하기보다는 갖고 있는 것을 소중히 하고 그것에 감사한다.

    미국 사람들은 어린 아이를 기를 때 제일 먼저 가르치는 말 가운데 하나가 '감사합니다'(Thank you)라는 말이다. 사실 이 말과 같이 우리 인간들의 상호관계를 부드럽게 해 주는 말도 그리 흔치 않다. 감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생활의 중심과제이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깨닫지도 못하고 표시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런 상태를 신앙이라고는 볼 수 없다. 믿음이란 구체적으로 감사로 표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신의학자 루이스 캐디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을 믿든, 그렇지 않든 자신 이외의 그 어떤 것에도 감사할 것이 없다는 말과 같다.”라고 말했다. 그 어떤 것에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삶의 기쁨도 누릴 수 없다. 감사야말로 삶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감사는 평범한 식탁을 생명의 잔칫상으로 만드는가 하면 마음의 분노를 쉬게 하고 평화를 가져다준다. 감사하는 순간 하늘의 소망이 열리고 내일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오르게 된다.

    미국의 성공학자 지그 지글러는 "감사하다고 말할 때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과 내가 있는 장소를 그대로 받아들이겠다.' 라고 다짐하는 것이다.
    나는 감사할 줄 모르면서 행복한 사람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의 논지는 감사에 성공해야 인생에 성공한다는 것이다.
    성도의 감사는 이익과 불이익을 떠난 조건없는 감사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다(살전 5:18).
    교회성장형 성도라면 이러한 감사의 법칙을 마스터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섯째, 교회성장형 성도의 제 6 자화상은 HUMILITY, 즉 겸손(謙遜)이다.

    교회성장형 성도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자이다. 여기서 말하는 겸손은 '주제넘게 행동하지 않는다'라든가, 또는 '삼간다'와 같이 외형적인 행위가 아니다. 또는 자신을 부족하게 여기고 몸을 낮추는데 그치지 않는다. 겸손의 참된 의미는 자기 자신의 가치를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티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겸손의 깨달음은 하나님께 향한 열정을 이웃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발전하게 한다.

    영국의 수상 맥밀란은 진정한 크리스천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뛰어난 점을 과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대면할 때에 수건으로 자신의 빛나는 얼굴을 덮었듯이 진정한 크리스천은 겸손이라는 수건으로 자신의 장점들을 가리운다.

    겸손한 자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것이다. 개방성이야말로 성장의 최대조건이다. 새로운 변화와 화합의 장에서 열린 마음, 열린 생각, 열린 행동으로 성장의 기회를 포착한다. 겸손한 만큼 그것에 비례해서 높은 영예를 얻기 때문이다.

    미국의 저명한 신문기자였던 필립 얀시는 40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무려 8천여 명의 명사(名士)들을 인터뷰했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인터뷰 끝에 그가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것을 뒷날 회고록에 쓰게 되는데, 그는 인생에 분명히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술회했다. 그 하나는 Star형이요, 또 하나는 Servant형이다.

    스타(Star)형에 속하는 유형은 껍데기뿐이라고 한다. 기회만 있으면 그저 자기자랑만 한다. 자기 선전만 하며 저 잘났다는 사람이다. 그런 자기를 선전해 달라고 하는데 기자로서 볼 때에 볼 것도 없더라고 했다. 쓸 것도 못되는 사람들이 주로 이렇게 계속 자기 자랑만 한다고 한다.

    두 번째 서번트(Servant)형은 인터뷰를 해보면 그저 어떻게든 섬기려는 자세를 보인다고 한다.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기쁘게 하며, 어쨌든 기회만 있으면 섬기고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산다고 한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근시안적인 마인드로 보면 이들은 정당한 상급과 대우,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갈채로부터 멀게 만 느껴진다. 하지만 실상은 플러스 인생을 위한 성공 유전자를 보유한 자들이다.

    성공이란 지속적인 성장의 과정이다. 성공이란 남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시킨 일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자신의 과거보다 현재가 나아지고 현재보다 미래가 나아지면 그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 사람이다. 교회성장형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범사에 감사할 줄 알며,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성공뿐만 아니라 타인의 성공까지도 창출하는 거룩한 자화상의 소유자인 것이다.





    목적이 분명한 교회의 7대 자화상

    건강한 교회는 목적이 분명한 교회이다. 교회성장이란 주의 뜻 즉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일이다 (잠 19:21, 고전 3:5-7). 목적이 분명한 교회는 목적을 정의하고, 전달하고, 적용하는데에 탁월한 교회이다.

    1.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목회를 하지말라

    성공의 제 1조건은 비전과 목적의식이다. 무슨 일이든지 왜 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대답할 수 없으면 실패한다. 설사 성공하더라도 의미와 가치가 없기 때문에 곧 무너지고 만다. 하나님께서 주신 확고 부동한 목적이 모든 삶의 원동력이다.

    2. 목적의 절대 중요성을 깨달으라

    목적이 분명하면 공동체의 사기가 진작되고, 좌절감을 해소시키며, 사역에 대한 집중력을 가져다 주며, 자발적인 협력을 가질수 있으며, 사역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가능하게 해준다. 세상적인 요인은 시간이 지나면 변하고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불변하며 영원히 존재한다.

    3. 목적을 성서적으로 책정하라

    목적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것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지도자의 책임이다. 비전과 목적을 책정하기 위해서는 교회와 사역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공부해야 하며, 교회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하며, 그 목적을 글로 문서화해야 하며, 짧은 한 문장 혹은 슬로건 으로 만들어야 한다.

    4. 목적을 효과적으로 진술하라

    목적선언문을 진술할 때에는 성경적이어야 할 것, 명확할 것, 쉽게 전달할 수 있을 것, 측정과 평가가 가능할 것 등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진술한 문장 하나만으로도 교회성장의 새로운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5. 목적을 총체적으로 전달하라

    목회자의 목적의식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전 성도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우리 교회의 목적과 비전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의식화시키는 것이 교회성장형 성도를 얻는 길이다. 목적을 전달 하는 방법에는 상징, 구호, 설교, 이야기, 행동지침 등이다.

    6. 목적에 따라 교회를 조직하라

    목적이 책정되고 교인들에게 침투된 후에는 그 목적과 비전을 실행하는 단계로 들어가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목적에 따라 교회를 조직화하는 것이다. 교회는 생명체요 조직체이다. 생명을 위해서는 성령화가 필요하고, 조직을 위해서는 조직화가 필요하다. 영성이 뛰어나도 조직력이 떨어지면 교회성장이 힘들어진다.

    7. 목적을 실제 목회에 적용하라

    교회성장이란 하나님이 주신 목적을 적용한 결과로서의 열매이다. 목적에 충실하면 건강한 교회가 되며, 건강한 교회는 반드시 성장한다. 목적에 따라 전도하라. 목적에 맞는 프로그램을 만들라, 목적에 따라 사람을 키우라, 목적에 따라 구역을 운영하라. 목적에 따라 사람을 쓰라. 목적에 따라 설교하라. 목적에 따라 예산을 세우라. 목적에 따라 행사를 계획하라. 목적에 따라 교회를 건축하라. 그리고 목적에 따라 기도하고 순종하라. 목적을 잃지 않는 한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선교사 사건 사고



    긴급기도부탁드립니다.

    강은택 <7627862@hanmail.net>

    5월 7일 (수) 오후 8:14 (2일 전)

    nygospelarmy, joynglorych, dongikhwang, yongcholkim, wokang, 3927ny, nygo4, heihwan, hpysc, lilyumc, yschoi037, kjwbluesky777, seungno, chungjoosung, joonp01, 나, seapoet, hongskim1623, rev_ahn, chunpyokim, chunjohn에게

    대한예수교장로회 인천제일교회에서 모태신앙으로 신앙생활하는 강은택이라고 합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편 56:3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마음으로 연락드립니다. 

    상한 마음을 치유받고 싶어서 어디다 하소연할 때가 없어서 이메일을 드립니다.

    엘에이 동양선교교회 파송 선교사인 이인 선교사 그리고 천휘숙 선교사가 작년 8월 12일 극단 이슬람테러리스트인 알샤바브에게 선교지에서 피랍되었습니다.

    케냐 사역지는 20년 넘게 아버지세대부터 이어받은 사역지였습니다. 외국인은 한 사람도 살지 않는 북쪽 사막이었습니다. 이슬람 마을에 학교를 지어주고, 기독교교육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픈 아이들을 나이로비로 큰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해주었습니다. 20년 넘게 사역한 사역지에 소말리아에 사는 테러리스트들이 찾아와 제 어머니와 선교사님을 납치해 갔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이 여동생은 두들겨 패서 현재 한국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현장에 있던 5살 아기는 사건 트라우마로 틱장애가 생겼습니다.


    외교부에서 엠바고를 걸어서 언론에 보도는 되고 있지 않습니다.
    소문이 나면 피랍된 가족이 살해당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꼭 비밀로 함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꼭 중보기도부탁드립니다. 


    * 엠바고(Embargo)는 포르투갈어로 '압류'를 뜻하며, 기타 유럽 언어에서도 수입돼 아래 의미로 쓰인다.
    비슷한 용어로 NDA가 있는데 영어권에서는 엠바고라는 용어보다 NDA가 더 자주 쓰인다.
    뉴스 엠바고(news embargo) 또는 프레스 엠바고(press embargo)라고도 하며, 간단하게 엠바고라고 부른다.
    취재는 하되 정해진 기간까지는 보도하지 않고 보류하는 것(시한부 보도유보)이다.

    https://www.reuters.com/world/two-south-korean-missionaries-kidnapped-northern-kenya-2024-08-14/




    선교사님의 조속한 한국의 복귀를 위하여 후원요청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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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매하다(고후 11:2)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중매함이로다


    고린도후서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개역개정,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새번역,2 나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열렬한 관심으로, 여러분을 두고 몹시 마음을 씁니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여러분을 한 분 남편 되실 그리스도와 약혼시켰습니다.
    우리말성경,2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여러분을 위해 열심을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약혼시켰습니다. 
    가톨릭성경,2 나는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
    영어NIV,2 I am jealous for you with a godly jealousy. I promised you to one husband, to Christ, so that I might present you as a pure virgin to him.
    영어NASB,2 For I am jealous for you with a godly jealousy; for I betrothed you to one husband, that to Christ I might present you as a pure virgin.
    영어MSG,2  The thing that has me so upset is that I care about you so much--this is the passion of God burning inside me! I promised your hand in marriage to Christ, presented you as a pure virgin to her husband.
    영어NRSV,2 I feel a divine jealousy for you, for I promised you in marriage to one husband, to present you as a chaste virgin to Christ.
    헬라어신약Stephanos,2 ζηλω γαρ υμας θεου ζηλω ηρμοσαμην γαρ υμας ενι ανδρι παρθενον αγνην παραστησαι τω χριστω
    라틴어Vulgate,2 aemulor enim vos Dei aemulatione despondi enim vos uni viro virginem castam exhibere Christo
    히브리어Modern,2 כי מקנא אני לכם קנאת אלהים כי ארשתי אתכם לאיש אחד להעמיד אתכם בתולה טהורה לפני המשיח׃

    중매하다(하르모조.  harmŏzō)  ἁρμόζω 스트롱번호 718

    1. 결혼시키다.   2. 결합시키다. 3. 고후 11:2.
    발음 [ harmŏzō ]
    어원  / 제1부정과거중간태 ἡρμοσάμην, 완료수동태 ἥρμοσμαι, 제1부정과거수동태 ἡρμόσθην, 791에서 유래
    • 1. 결혼시키다, 결합시키다[중간태], 고후11:2.
    • 관련 성경  /  중매하다(고후 11:2).


    󰃨 하나님의 열심으로...열심내노니 - '열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젤로'(*)는 '열심'이라는 말보다는 '시기'나 '질투'라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Farrar, Martin, Barrett).그리고 영역 성경 중 RSV, NIV 등도 '시기'나 '질투'로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본 구절시 내용이 하나님의 질투하심과 동일한 질투를 가지고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침입해 들어온 적대자들을 대한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기서 구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혼인 관계의 유비(사50:1-2;54:1-8;62:5;호 1-3장)를 고린도 교인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관계의 유비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그의 적대자들에 대한 질투를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바울 자신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그에게 해롭게 행동하는데 대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오직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질투는 바울 자신이 애써 전도했던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사도들에게 유혹된 것에 대한 질투였다.

    󰃨 정결한 처녀로 중매함이로다 -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미혹하는 자들에 대해 질투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그리스도의 기쁨과 고린도 교인들의 행복을 그들이 훼방했기 때문이며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스도에게 중매시킨 장본인으로서의 바울은 그 사실을 과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본 구절의 '중매함이로다' 는 '약혼시켰다'(betrothed,RSV)또는 '정혼시켰다'(공동번역)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바울은 순결한 처녀인 고린도 교인들을 오직 한 남편인 그리스도에게 약혼시켰다(엡 5:27;요일 3:2, 3). 혹자는여기서의 '약혼'이 실질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개종', '회심' 자신들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Farrar, Barrett), 엡 5:25-27을 참조할 때 어느 정도 타당한 해석이다. 그리스도와 약혼한 당사자로서 고린도 교인들은 순결을 계속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마치 하나님의 신부로서의 이스라엘이 이방의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되며 오직 남편인 하나님에게만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처럼, 불신의 상태에서 그리스도에게로 회심한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에게만 헌신적으로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로마서 5:1, 창세기 15:6)


    창세기 12:1 / 개역개정,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가라(3212) - 가라 get 

    야라크( ) יָלַךְ
    스트롱번호 3212

    1. 가다.  2. 1980 참조.
    발음 [ yâlak ]
    구약 성경  /  1549회 사용  
    • 1. 원형 가다, 걷다, 참조.
      • a. 원형 [주]1980 참조.


    떠나(1004) - 집을 떠나 and from house 

    בַּיִת 스트롱번호1004
    1.

    2.

    장막

    3.

    왕하23:7.

    발음 [ bayith ]
    어원
    연계형 בֵּית, 복수 어미활용 בָּתֵּיהֶם ,בָּתֵּיכֶם ,בָּתֵּינוֹ, 1129에서 유래한 약어로 보임
    구약 성경
    2036회 사용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 일반 사람들도 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아브람의 계시를 받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람의 심령 속에 내적으로 임했는지 분명치 않다. 
    다만 '이르시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마르'(*)의 의미가 대개 '말한다', '이야기한다'란 점에 비추어 볼때 전자일 가능성이 크다.

    본토 
    - 혹자(Calvin)는 이를 '우르'로 이해하고 아브람이 구체적 소명을 받은 것을 우르에 있을 때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1:31). 
    그러나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 떠난 곳이 '하란'인 점에 입각할때(4절) 이는 하란 , 더 나아가 우르와 하란을 포함하는 메소포타미아 전지역을 가리키는 것임에 분명하다.

    떠나...가라 
    - '누가 네 뒤에 남든지 상관 말고 너를 위하여 떠나라' 는 의미이다. 
    기독교 역사는 이러한 떠남과 분리의 역사인데 오늘날 우리 성도들 역시 죄악된 이 세상에서 분리되어 의와 거룩을 좇는 순례의 길을 떠나야 한다(롬 12:2).

    내가 네게 지시할 땅 
    - 직역하면 '내가 네게 보여 줄 그 땅'. 여기서 '보여 줄' 은 미래 미완료형으로 아직까지는 보여지지 않으나 미래에는 구체적으로 보여질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땅'은 아브람으로서는 불명확하나 하나님으로서는 이미 작정해 놓은 가나안 땅을 의미한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Abram believed the LORD, and he credited it to him as righteousness.

     여호와를 믿으니 
    - '믿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만'(*)은 '신뢰하다'(대하 20:20; 욥 39:12)는 뜻으로 아브람이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그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했으며 더 나아가 이미 계시된 '여자의 후손' 메시야에 대하여도 신앙하였음을 증거해 준다(요 8:56; 히 11:1).

    의(義) 
    - '차다크'(*, 의로운 상태가 되다)에서 온 말로 간단히 '의의 옷'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죄인으로(3:10; 사 20:3; 고후 5:3; 계 3:17, 18) 오직 하나님께서 덧입혀 주시는 '의의 옷'으로만 그 죄악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롬 3:23-28; 4:7, 8; 계 19:8).
     
    여기시고
     
    - '정하다'(시 106:30), '계산하다'(레 27:50), '짊어지게 하다'란 뜻으로 여기서는 곧 전가된 '의(義)'를 나타낸다. 
    한편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인 전가(轉嫁)의 예를 살펴보면 
    1. 전 인류에게 전가된 아담의 죄(롬 5:12) 
    2. 그리스도에게 전가된 인류의 죄(사 53:5, 6; 고후 5:14, 15; 히 2:9) 
    3.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죄인에게 전가된 하나님의 의 (롬 4:18-24; 빌 3:9) 

    이상에서 우리는 본래 칭의받기에 부족한 죄인이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그에게 전가된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신율(神律) 앞에서 무죄한 상태로 간주됨을 알 수 있는데 본절에 나타난 바 아브람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Therefore, since we have been justified through faith, we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로마서 3:2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갈라디아서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야고보서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025년 7월 6일 성령강림 후 제4주 및 맥추감사주일
    설교 : 믿음의 사람(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지난 6월 8일 성령강림주일 설교를 간략하게 요약합니다.
    성경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
    "새로운 피조물"
    즉 "새 사람"에 대하여 소개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려면 세 가지 새로운 것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는 새로운 관계
    둘째는 새로운 소유
    셋째는 새로운 선택

    오늘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중심으로 "믿음의 사람"에 대하여 증거하려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려면 첫째는 영적 연합, 둘째는 영적 생활, 셋째는 영적 믿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영적 연합이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두 강도 뿐이었습니다.
    두 강도의 이름을 "디스마"와 "게스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도 아니고 내가 임마누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성별되었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건에 참여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건에 참여한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영적 연합을 의미합니다.

    영적 생활이란?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 삶의 주체는 바로 나라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고 합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계신다는 것은 성령이 주체가 되는 삶을 말합니다.
    따라서 영적 생활이란 육체의 주인으로 내가 주인이 아니라 영혼의 주인이 되시는 성령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영적 생활이라고 합니다.
    영적 생활이란 삶의 주인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 믿음이란?

    영적 믿음이란 이미 영적 연합을 이루었고 영적 생활을 하기 때문에 영적 믿음이 아니면 영적 행활도 영적 연합도 불가능하므로 영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영적 믿음만이 영적 연합과 영적 생활을 지탱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영적 믿음이란 영적 연합과 영적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결론 /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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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이스라엘 달력 절기

    이스라엘 달력

    성경에서 사용되는 달력 체계는 매우 복잡하고 어지럽습니다. 성경 안에서도 다양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복잡하고 어지럽습니다. 아래의 표를 통해 대략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태양력과 태음력

    성경에서 사용되는 달력은 종교력이든 민간력이든 기본적으로 달을 기준으로 하는 태음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고대에는 시간을 알 수 있는 방법이 하늘의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보고 계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태양력은 그레고리력으로 1582년 교황 그레고리 13세가 도입한 것으로 천문학이 발달한 중세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 이전은 대부분은 태음력이었다. 하지만 태음력은 잘 맞지 않기 때문에 오차들을 수정하기 위해 일부를 태양력을 넣어 오차를 줄이려는 시도를 한다. 이것이 윤달이다. 참고로 이집트를 태양력을,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태음력을 사용한다.

    종교력

    종교력은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면서 시작된 달이다. 유월절이 시작되는 그 달을 첫 달로 하고 1년을 계산하는 방식이다. 태양력 3월중하순에 걸쳐 있다. 이 때는 늦은비가 내리는 시기로 얼마 후에 보리 추수가 시작되고, 50일은 오술절로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날이기도 하다.

    민간력

    민간력은 10월 중순경이 1월로 시작한다. 나팔절이 있는 달이다. 나팔절은 첫 시작을 의미하는 달리다. 이 때 대속죄일이 있다. 장막절이 있어 세 절기가 한 달 안에 다 이루어진다. 민간력이 어디서 부터 시작했은지 알 수 없지만 당시 레반트 지역에서 사용하는 달력이었을 것을 보인다.

    히브리/바벨론력

    히브리 달력이 또 하나 있다. 히브리 달력은 종교력과 대체로 일치한다. 바벨론 포로 이후 바벨론식으로 고쳐 부른다. 아마도 종교력을 주 달력으로 쓰고, 포로이후는 바벨론식 이름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달력

    종교력 민간력 태양력 히브리(바벨론) 월력 절기 농사
    1월 7월 3-4월 니산(아빕)월 1일 신정
    14일 – 유월절(출 12장)21일 – 첫 열매
    15일 무교절 7일간
    17일 초실절
    늦은비, 보리추수 건기
    2월 8월 4-5월 이야르월      
    3월 9월 5-6월 시반월 6일-칠칠절(오순절,맥추절)(신16:9-12절) 밀 추수
    4월 10월 6-7월 탐무스월    첫 포도
    5월 11월 7-8월 아브월      
    6월 12월 8-9월 엘룰월   14-15일 부림절, 에9:26-28 포도 추수
    7월 1월 9-10월 티쉬리월 1일- 나팔절
    10일 -대 속죄일(레 16장)
    15-21일-장막절(초막절, 7일간)레 23:33-36
    경작
    8월 2월 10-11월 마르헤스반월    이른 비, 곡물 파종 우기
    9월 3월 11-12월 기슬르월(엘롤) 25일- 수전절, 요한복음 10:22   
    10월 4월 12-1월 테벳월      
    11월 5월 1-2월 스밧월      
    12월 6월 2-3월 아다르월 13-14일-부림절(에스더 9장)   
          윤달 아다르세니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에 대한 기본적 정의


    한글은 명사와 동사, 또는 동명사 등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고 사용합니다.
    물론 저도 그럴 것입니다.
    이것은 한글이 갖는 특성 때문에 모든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간략하게 이러한 용어와 사용법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믿음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명사로서의 믿음. 믿음 faith.

    믿음은 믿는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동사적 성향이 매우 강합니다.
    나는 너를 믿는다고 말할 때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하는 것입니다. 믿는 것, 자체를 믿음으로 규정합니다.

    동사로서의 믿음, 믿는다. believe.

    동사로서의 믿음은 누군가를 신뢰하는 행위로서의 믿음이다.
    명사로서의 믿음을 규정하는 것이라며, 동사로서의 믿음은 관계적입니다.
    즉 ‘나는 너를 믿어’라고 말하면,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이 갖추어야할 기본적 요소를 발견합니다.

    믿음의 세 가지 요소

    첫째는 믿는 사람이 존재
    둘째는 믿는 대상이 존재
    셋째는 믿는 내용이 존재

    예를들어봅시다. ‘나는 너를 믿어’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나는 네가 방금 ‘민수가 학교에 갔어’라고 말한 것을 믿어.
      왜냐하면 너는 지금까지 나에게 거짓말한 적이 없거든.
      그리고 너의 말은 신빙성이 있어 보여 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믿음의 세 가지 요소라고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세 가지 요소를 구분하여 믿음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믿음의 3요소

    믿음의 대상은 누구인가?
    - 하나님과 그리스도

    믿음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할 부분은 믿음의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과 내용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봅시다.

    믿음의 대상 하나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시간과 역사를 주관하시며, 만물을 통치하시는 능력의 주인이십니다. 이러한 정의는 과도하게 간략하지만 명확한 정의입니다. 하나님을 계명을 주셨고, 그 계명을 사람들이 어김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작정하시고 보내주십니다. 순종의 삶을 살았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함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죽은 지 사흘만에 살려내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십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인류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 예수 그리스도

    예수는 구약 성막에서 드렸던 제물의 본질이십니다. 모든 죄를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하십니다.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에 오르십니다. 천상에 계신 예수님은 보좌에 앉으셔서 영원히 통치하십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믿음의 내용이며 대상입니다.

    믿음의 과정 성령의 적용과 신뢰

    믿음은 사실의 인지를 너머 확신과 신뢰로 나아가야합니다. 믿음의 과정은 사실의 인지, 사건의 이해, 사건의 확신과 신뢰로 나아갑니다. 이 과정에서 성령이 역사하여 온전한 믿음의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조직신학적 용어로 이 과정을 ‘구원 서정’이라고 부릅니다. 9과정으로 나누어 설명을 하지만 엄밀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명-중생-회심-믿음-칭의-양자됨-성화-성도의 견인-영화

    1. 소명(召命)(calling)
    2. 중생(重生)(regeneration)
    3. 회심(悔心)(conversion)
    4. 신앙(信仰)(faith)
    5. 칭의(稱義)(justification)
    6. 입양(入養)(adoption)
    7. 성화(聖化)(sanctfication)
    8. 견인(堅忍)(perseverace)
    9. 영화(榮華)(glorification)

    구원서정은 후에 따로 다루고 오늘은 믿음의 과정만을 간략하게 다룹니다.

    1) 사실의 인지 단계

    사실의 인지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사실, 또는 성경에 기록된 구속사적 사건들을 말합니다. 역사적 사건을 누구나 믿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성경은 신화나 예수님의 역사적 사건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은 역사적 사건에 뿌리는 둡니다. 가상으로 꾸며낸 이야기에 근거하지 않고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는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믿음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성경의 기록된 사건들이 역사적 사건이란 사실을 믿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2) 확신의 단계

    두 번째 확신의 단계는 그 사건이 나를 위한 사건으로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단지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나를 위한 것으로 받아 들아들이는 것으로 확신하기에 이르러야 합니다.

    3) 신뢰의 단계

    마지막 신뢰의 단계는 나의 삶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삶을 말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하고, 계명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삶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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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역사와 시대 구분

    성경의 시대구분

    성경의 역사는 창조에서 종말까지 이릅니다. 하지만 모든 세계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입니다. 창조의 시기를 가늠할 수 없으나 아브라함이 살았던 시대는 기원전 2200년 경으로 보입니다. 이후 야곱이 애굽에 내려가고 430년 정도가 흐른 뒤 모세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지내고 요단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이후 사사시대를 거쳐 왕국시대, 그리고 멸망과 포로 시기, 재건시기와 중간기로 넘어가면서 구약은 끝이 납니다. 이후 예수의 탄생과 공생애, 부활 승천 이후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사도들이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사도들 이후 성경의 내용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 시대라고 부르지만 이 부분은 성경에 나와있지 않고 곧바로 요한 계시록의 종말 시대로 넘어갑니다. 엄밀하게 계시록은 장차 일어날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성경 안의 역사로 보기르 힙듭니다. 그러므로 저는 구약과 신약의 역사를 사도행전까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요한계시록이 1세기 말에 기록되었다고 가정할 때의 성경 속의 역사를 아브라함부터 계산한다면 약 2300년 정도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시대를 구분하여 간략하에 서술하겠습니다.

    구약

    1) 창조시대
    2) 족장시대
    3) 출애굽시대
    4) 정복-정착시대
    5) 통일왕국시대
    6) 분열왕국시대
    7) 단일왕국과 포로기
    8) 재건시대

    신약

    1) 예수의 탄생과 공생애
    2) 사도시대
    3) 교회 시대
    4) 종말

    성경의 역사

    1) 창조시대

    창조시대는 창조로부터 아브라함 직전까지의 역사를 다룹니다. 성경에 기록된 문자적 역사는 대략 기원전 4000년 전까지 이릅니다. 하지만 고대의 표기 방식이 모호하기 때문에 대체로 아브라함이 살았던 기원 2200년 즈음부터 역사의 시대로 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거부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습니다. 그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이후 가인과 아벨을 낳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때려죽이고 하나님께 저주를 받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다시 동침하여 셋을 낳고 살다 죽습니다. 셋의 후손들이 점점 퍼져 나가고, 다른 한쪽은 가인의 후손들이 퍼져 나갑니다. 사람들이 퍼져나갈수록 죄를 짓지 하나님은 홍수로 그들을 멸합니다. 노아는 방주를 짓고 살아남습니다. 홍수 이후 노아는 방주를 나와 포도주 농사를 짓게 되고, 함이 술 취한 노아를 놀리고 저주를 받습니다. 홍수 이후 셈과 함과 야벳을 통해 인류가 다시 번창합니다. 이들 중 일부가 시날 평지로 가다 바벨탑을 쌓게 됩니다.

    2) 족장시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열두 아들과 디나를 낳습니다. 형들의 미움을 받은 요셉은 애굽에 팔려 가게 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서른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이후 기근이 전 세계적으로 오면서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가서 곡물을 사는 과정에서 요셉에게 발견됩니다. 요셉은 형들을 테스트하게 되고 결국 형들에게 자신이 요셉인 것을 밝힙니다. 이후 야곱과 가족들을 애굽으로 데려오고 고센 땅에 머물게 되면서 숨을 거둡니다. 요셉 역시 마지막 숨을 거두지만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가나안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3) 출애굽시대

    출애굽은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 간 지 430년이 지난 후에 일어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는 성경에 나와 있는 역사나 시기는 현대의 시각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과도하게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려 합니다. 굉장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이 부분도 후에 따로 다루도록 하고 여기서는 넘어갑니다. 하여튼 성경의 문자 대로 400년이 조금 지나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합니다.

    처음 소명을 받은 모세는 애굽의 바로를 찾아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내라고 말하지만, 바로는 듣지 않습니다. 저라도 그럴 겁니다. 그렇게 출애굽의 기적이 시작됩니다. 열 가지의 기적은 애굽인들에게는 열 가지의 재앙입니다. 마지막 재앙은 장자의 죽음으로, 유월절이 제정됩니다. 이후 바로는 모세를 불러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나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떠나자 곧바로 후회다고 전차 육백 승을 보내 잡아 오도록 명합니다.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은 앞으로 뒤로도 가지 못하는 상황에 부닥치지만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도 출애굽 시키고, 애굽의 군대는 홍해의 물속에 수장시킵니다.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은 처음 시내 산으로 가서 율법을 받고, 성막을 짓습니다. 이후 38년 동안 광양을 방황하며 출애굽 1세대는 모두 죽게 됩니다. 결국 모세도 모압 광야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고 느보산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후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로 지명을 받게 되면서 광야 시대는 끝이 납니다.

    4) 정복-정착시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요단을 건너 길갈에서 숙박합니다. 길갈에서 다시 할례의식을 행하고 유월절을 보냅니다. 광야 40년 동안 기적으로 만나가 내렸지만, 유월절을 맞이해 그 땅의 소산을 먹자 만나가 그칩니다. 이후 7년 동안 정복 전쟁을 하게 되고 열두 지파는 가나안 땅을 분배받습니다. 큰 전쟁은 끝이 났지만 각 지역에서 지파별로 이루어지는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사기는 각 지파가 자신들이 분배받은 땅을 정복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처음은 좋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복에서 실패하게 되고 후에는 오히려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밀리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후에 그들은 가나안 인들과 섞여 살 게 되면서 가나안 인과 친구처럼 지내면서 그들의 악한 관습을 배우면서 타락해 갑니다. 그들이 범죄할 때마다 하나님은 사사들을 보내 그들을 구원합니다. 하지만 결국 다시 범죄하는 악순환이 계속 일어납니다. 사사기 마지막 부분에서는 타락한 베냐민 지파를 응징하기 위해 나머지 열 한지 파가 연합하여 공격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5) 통일왕국시대

    이스라엘의 왕국(kingdom) 시기는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울과 다윗, 솔로몬은 모든 이스라엘의 왕이기 때문에 통일왕국 시대로 구분합니다. 솔로몬 이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분리되어 분열 왕국 시대가 도래합니다. 명칭에 있어서 정식적으로는 북쪽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왕국’이라 부르고, 남쪽을 ‘유다 왕국’으로 부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종종 이스라엘 전체를 말하기도 하므로 구분하기가 모호해 국가적 의미로 사용될 때는 북이스라엘로 부르기로 합니다. 남쪽 왕국도 유다 지파가 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혼돈하지 않기 위해 ‘남유다’로 부르기도 합니다.

    사사 시대 말기에 하나님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나를 통해 사무엘을 낳게 하여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 활동하게 합니다. 사울을 통해 자멸 직전의 이스라엘이 소생하게 됩니다. 장로들이 찾아와 왕을 달라고 하자, 베냐민 지파인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초대 왕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처음 겸손했던 사울은 시기심이 강했고, 곧 교만해지고 말았습니다. 곧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 왕이 되도록 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지만 결국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아들 요나단과 함께 사망합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사울파와 다윗파로 나뉘어 내전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다윗이 승리하게 되고, 다윗의 왕 위에 오름으로 이스라엘의 왕족 전통 가문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다윗 언약을 통해 다윗과 후손들이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할 것이라 약속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납니다.

    다윗은 정복 전쟁을 통해 주변의 수많은 나라를 굴복시키고 거대한 왕국을 형성합니다. 이후 솔로몬이 왕위를 물려받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때로 되돌아가자’라고 말할 때는 항상 ‘다윗의 때’라는 관념이 머리에 박혀 있습니다. <지금은 엘리야 때처럼>이란 CCM에도 ‘다윗의 때’에 예배가 회복된다는 가사 들어가 있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수고로 말미암아 최고의 부흥기를 맞이합니다. 전쟁도 일어나지 않고 다윗이 받은 축복을 향유하며 살아갑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고, 성을 건축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 하나님만을 섬기지 못하고 이방의 나라들과 혼인하여 우상들을 들여오는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경고하지만, 말을 듣지 않습니다. 결국 솔로몬이 죽고 나자 이스라엘은 분열하게 됩니다. 북쪽 지파들은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고 독립하고, 남쪽은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왕국을 형성하게 됩니다. 나중에 이 시기를 집중적으로 다룰 때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엄밀하게 북지파가 10지파, 남쪽이 2지파가 아닙니다.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습니다. 일단 남쪽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시므온 지파가 섞여 있으며, 심지어 상당수의 단 지파도 섞여 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레위지파가 남유다에 머뭅니다.


    6) 분열왕국시대

    분열왕국시대는 초기는 서로 대립, 중반이후 부터는 협력 관계로, 후에는 다시 대립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김으로 완전히 하나님을 떠납니다. 하지만 비록 위기가 있기는 했지만 예루살렘 성전이 있어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으로 남게 됩니다. 분열왕국 시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후에 자세히 다루고 여기서는 그냥 넘아가겠습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함으로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집니다.

    7) 단일왕국과 포로기

    북왕국이 망한 이후 남유다는 홀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남유다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우상숭배의 길을 걷게 되고 기원전 586년 신흥왕국이던 바벨론(신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유다는 왕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대부분으로 바벨론으로 끌려가 포로로 살게 됩니다. 하지만 완전히 멸망 당하지는 않고 자신들만의 게토(ghetto)를 형성하여 살아남게 됩니다. 포로 초기의 기록은 에스겔서 안에 담겨져 있고, 초기와 이후는 다니엘성서에 대략적으로 기술되어있습니다. 에스더서는 바벨론이 망하고 파사(페르시아) 시대 왕비로 있던 에스더를 중심으로 일어난 포로기의 이야기입니다. 멸망 70년이 차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예언한 대로 다시 이스라엘을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려 보내게 됩니다.

    8) 재건시대

    예루살렘의 귀환은 모두 세 번에 걸쳐 이루어지며 모든 유대인이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사로잡힌 사람들의 1/5 정도만 돌아왔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남겨진 사람들은 바벨론 회당을 짓고 자신들만의 사회를 일궈나갑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이들은 짐을 정리한 다음 성전을 건축합니다. 하지만 성전 건축은 주변 원수들에 방해 공작에 의해 중단되었다 후에 완전히 마무리됩니다. 느헤미야의 주도 아래 성벽 건축이 완공되고, 에스라와 느헤미야로 더불어 부흥기를 맞이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빛을 보지 못하고 역사의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가면서 소위 신구약 중간기 400년 정도 시작됩니다.

    *중간기


    중간기는 성경에 기록어 있지 않지만 신약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토대를 제공합니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페르시아가 멸망하고,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정복당하고 헬라 시대가 도래하며, 이후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들이 다스리는 시대가 도래합니다. 이후 약 100년 동안 마카비가문에 의해 독립을 쟁취하고 하스모니안 왕조를 구축합니다. 하지만 다시 로마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이두매인이던 헤롯 가문에 의해 지배를 받는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이때 예수님이 탄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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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이 아홉 가지 열매


    성령의 9가지 열매는 바울의 초기 서신에 속하는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르는 삶에 대해 강조하며, 성령을 따르는 삶은 아래와 같은 9가지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성경 본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Greek NT: Nestle 1904

    ὁ δὲ καρπὸς τοῦ Πνεύματός ἐστιν ἀγάπη, χαρά, εἰρήνη, μακροθυμία, χρηστότης, ἀγαθωσύνη, πίστις, πραΰτης, ἐγκράτεια· κατὰ τῶν τοιούτων οὐκ ἔστιν νόμος.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언급하기 전에 먼저 육신의 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앞선 육선의 일과 반대 되는 것이며, 대립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갈 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육체의 일에 대해 말하고 싶지만 그럼 글이 너무 길어지고 여기서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에 대해서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후에 갈라디아서를 묵상하면서 그 부분은 상세하게 다두도록 하겠습니다.

    성령이 아홉 가지 열매

    열매란 무엇인가?

    성령의 열매를 언급하기 전에 먼저 성경 속에서 열매가 갖는 상징에 대해 조금만 언급하고 넘어갑니다. 열매는 결과 결론을 의미합니다. 최종적 결과를 의미하기 때문에 ‘명백함’ ‘확실함’ 등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행위의 최종점, 결과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을 알려면 그들의 ‘열매’를 봐야 한다 하십니다.

    마태복음 7:16절에서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는데, 21-23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란 표현이 등장하고 결국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떠나가라 하십니다. 열매는 의인이든 악인이든 행위를 말하고 있음을 분명합니다. 즉 삶으로 드러난 명백한 행위가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잠언 18:21에서는 ‘혀의 열매’를 언급합니다. 말이 곧 행함으로 드러날 때를 말합니다. 호세아 10:13에서는 ‘거짓 열매’란 표현이 소개됩니다. 결국 열매는 먼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최종적인 결론, 확정, 심판 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령의 열매 또한 성령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의 삶 가운데 확정적으로 드러나는 습관, 행위 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열매에 대한 언급은 후에 더 깊이 다루고 여기서는 이러 정도만 이해하고 곧바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로 넘어가 봅시다.

    사랑

    사랑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아가페(ἀγάπη)’로 가장 흔하게 사랑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구약의 헤세드를 번역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 안에서 아가페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예수님의 자비 등으로 번역되며 일반 사람들의 언어로는 번역되지 않는 특이한 단어 중의 하나입니다.

    희락

    두 번째 성령의 열매인 희락은 헬라어 ‘카라(χαρά)’를 번역한 단어로, 일반적으로 ‘기쁨’ ‘즐거움’ ‘희락’ 등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기쁨은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이며, 하나님으로 인해 기쁨, 하나님을 향한 기쁨입니다.

    화평

    세 번째 열매는 화평입니다. 화평은 헬라어 ‘에이레네(εἰρήνη)’를 번역한 단어입니다. 성경은 에에레네를 ‘평화’ ‘화평’ 등으로 번역합니다. 영어 성경은 대부분 peace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바적으로 아는 평화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의 ‘샬롬’을 번역한 단어입니다.

    오래참음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마카로수미아(μακροθυμία)’는 ‘멀다’ ‘긴’ 의 뜻을 가진 ‘마카로스(μακρός)’와 ‘전진하다’ ‘화를 내다”분내다’ ‘열정’이란 뜻의 ‘쉬모스(θυμός)’의 합성이 입니다. 갈 5:20에서 ‘분냄’으로 번역되었고, 계 14:19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로 번역되었습니다. 오래 참음은 단순히 버티는 것이 아니라 힘을 내고 열정을 내어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비

    자비는 헬라어 ‘카레스토네스(χρηστότης)’를 번역한 것입니다. 롬 11:20에서는 ‘인자’로, 딛 3:4에서는 ‘자비’로 번역했습니다. 대부분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한 태도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자비는 도덕적으로 선하고, 타인에 대해 친절한 태도를 말합니다. 온유한 성품으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는 타인에 대해 친절하고 온유한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양선

    양선은 헬라어 ‘아가소쉬네(ἀγαθωσύνη)’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영어를 보면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성경은 Goodness로 원의를 보면 ‘하나님을 닮음’이란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선(good)은 구약의 ‘토브’를 번역할 사용되기도 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토브는 ‘보시기에 좋았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창조의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충성

    충성은 헬라어 ‘피스티스(πίστις)’를 번역한 단어입니다. 영어로 faithfulness로 해석해 보면 ‘믿을 수 있는’ 믿음이 충만한’ 등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일관성 성실성이 보장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맡길 때 그대로 해내는 능력인 동시에, 어떤 약속을 할 때 그 시간에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충성은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꾸준함과 성실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영어는 faith 외에도 trust 또는 confidence 등으로 번역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그 말은 변함 없이 삶을 통해 꾸준히 성실히 순종과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온유

    온유는 헬라어 ‘프라우테스(πρᾳΰτης)’입니다. 영어로는 gentleness로 신사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온유는 양선과 매우 비슷한 단어입니다. 다만 온유의 경우는 관계적인 의미로 타인을 향한 친절한 태도를 포함한 성품입니다. 고후 10:1에서 바울은 이 단어를 ‘그리스도의 온유’로 사용하고 있으며, 딤전 6:11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성품으로서 ‘온유’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파라우테스의 기본형인 ‘파라우스(πραΰς)’가 사용된 마태복음 5:5에 의하면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마치 바다가 많은 강물을 받는 것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πραΰς는 ‘관용’이란 단어와 친구처럼 사용될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고후 10:1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권한다고 말하며, 디도서 3:2에서 역시 관용하고 온유함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내라 권면하고 있습니다.

    절제

    절제는 헬라어 ‘엑크라테이아(ἐγκράτεια)’를 번역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복잡한 설명이 필요 없는 단어로 영어로는 ‘self-control’로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성경적 의미에서 절제는 탐욕과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모든 죄는 절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죄의 본질은 탐욕입니다. 우리 안에 죄악된 성향이 남아 있어도 성령을 따르는 자들은 ‘절제’합니다. 이것이 절제의 의미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하나씩 깊이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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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상징 이미지 목록

    상징과 이미지

    상징과 이미지는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차이에 두지 않고 같은 맥락으로 보겠습니다. 비평이 아닌 이상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여기서는 성경에 나타난 다양한 상징과 이미지에 대한 목록을 제공합니다. 각 목록은 용어, 이미지 관련 글로 이동하여 상세히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워낙 방대한 작업이나 짧은 시간에 완성할 수는 없지만 시간이 되는대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글에 링크가 생성되지 않았다면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곳에 소개된 용어와 단어들은 필요에 따라 비주기적으로 계속하여 수정, 보완, 축소, 삭제 될 수 있습니다.

    [참고 도서 및 목록]

    이곳에서 사용되는 글은 각 상징과 이미지에 해당되는 글에 소개하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은 아래와 같습니다. 각 도서는 갓피플에서 구입할 수 있도록 링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세세한 내용들은 각 인터넷글과 논문, 주석 등을 참고하였기에 각 글의 내용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킨에 각주 기능이 없어 정확한 출처는 밝힐 수 없지만 가능한 하단에 참고 문헌을 실을 예정입니다.

    더 많은 참고 도서들이 있지만 이정도만 소개합니다. 더 깊은 연구를 위해서 필요한 분들은 구입해서 찾아 읽으시면 성경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관련 책과 도서들은 후에 기회가 되면 차례대로 한 권씩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상징목록

    사람의 신체와 관련된 상징

    머리, 머리카락, 이마, 얼굴, 코, 입, 귀, 목, 가슴, 팔, 손, 손가락, 다리, 발

    창자, 뼈, 이, 눈물,

    성경속의 신체와 기관 에 관련된 상징적 의미와 내용들은 아래의 글에서 더욱 상세히 다룹니다.

    생활과 문화에 대한 상징들

    이 부분은 아래의 링크를 통해 목록을 확인하십시오. 내용이 광대하고 복잡하여 따로 구분하여 올립니다. 이곳에 실린 내용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주거용

    집, 천막, 움막, 동굴, 왕궁, 성막과 성전(성막과 성전은 하단의 <성막과 성전> 관련 상징 참고 바람)

    음식과 식생활

    빵, 전, 나물, 육류, 생선, 부정한 음식과 정한 음식

    생활과 마을과 관련된 상징들

    의류, 마을, 거리, 행위들, 탄생과 죽음, 가족, 배신, 우정, 의리, 사랑, 결혼

    자연과 계절과 관련된 상징

    [자연]

    산, , 바위, 흙,

    [계절]

    봄, 여름, 가을, 겨울

    [날씨]

    맑음, 흐림, 바람, 구름,

    [우주/하늘]

    빛, 어둠, 태양, 달과 별, 우주, 하늘

    동물과 관련된 상징

    포유류

    조류

    비둘기 까마귀 독수리 갈매기 참새

    파충류 및 그 외 동물

    뱀, 도마뱀, 거미,

    식물과 관련된 상징과 이미지

    식량으로 사용되는 식물들

    [가나안 7대 소산물] 밀, 보리, 올리브, 포도, 무화과, 석류, 대추야자, 나물, 쓴나물,

    독초 / 가시류

    성막 / 성막 관련된 상징과 이미지

    성막 : 뜰, 테두리, 줄, 기둥, 성소, 지성소,

    성막뜰 : 제단, 물두멍

    성소 : 등잔대, 떡상, 향단, 휘장

    지성소 : 법궤

    성경 속 숫자 상징

    숫자와 관련된 상징들을 소개합니다. 이 부분 소개란은 따로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간략한 소개글로 대신하고, 각 숫자에 대한 상징들은 개별 글에서 소개합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에서 1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경우가 흔하며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은 유일(1)하신 분이며, 오직 한 분이십니다. 5는 기본적으로 완전수이자 모세오경을 암시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이스라엘이 절기는 5라는 숫자를 통해 완성되는 경우가 종종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순절은 7의 7곱으로 49일이 지난 다음 날로 50일이 되는 날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렇듯 성경은 숫자를 통해 유의미한 메시지를 전달할 때가 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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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몸, 신체

    사람에 신체에 대한 상징들

    성경에는 사람의 신체와 관련하여 다양한 상징들이 사용됩니다. 특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람의 신체에 비유하는 사용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사람의 신체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의미를 드러 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머리카락은 존중과 명예를, 팔은 보호와 힘, 뼈는 힘과 중심 등을 뜻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신체의 다양한 지체와 기관을 소개하며, 세세한 내용은 각 글에서 더 자세하 소개합니다.

    머리

    머리에는 다양한 기관들이 존재하는 곳으로 다양한 의미가 부여됩니다. 단지 머리로만 사용될 경우 ‘처음’ ‘시작’ ‘앞서다’ ‘우두머리’ ‘장자권’ 등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1:1에 사용된 태초에의 히브리어 ‘베로쉬트(בְּרֵאשִׁ֖ית)’는 머리를 뜻하는 ‘로쉬’가 들어가 있으며, 여기서는 ‘처음’ ‘시작’이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머리카락

    머리카락은 두상을 덮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에 그 사람의 존재 전체를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명예와 매력 등을 나타 내기도 합니다.

    얼굴

    얼굴은 숨겨진 마음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교만과 자만, 부끄러움과 수치, 슬픔과 걱정 등 다양한 의미가 얼굴을 통해 표현 됩니다. 하나님께 이 표현이 사용되면 하나님의 임재나 진노, 뜻을 드러내는 계시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얼굴이란 표현보다는 ‘낯’으로 사용하지만 히브리어는 페니로 동일할 단어입니다. 얼굴과 관하여 관용적 표현이 많습니다.

    낯을 향하다.

    낯을 피하다.

    낯을 들다. 낯을 들지 못하다.

    낯을 따르다. 낯을 보지 않다.

    다양한 의미는 후에 [사람의 신체 상징 – 얼굴]편에서 더 깊이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눈(eye)

    눈은 머리 안에 있고, 얼굴에 속해 있습니다. 감각 기관으로는 가장 높은 곳에 있습니다. 눈은 보는 것과 연관되며, 지식과 탐욕과 깊은 연관이 있는 기관입니다. 인류의 최초의 타락은 봄으로 일어났고, 자신의 욕망이 드러나는 곳이 ‘눈’입니다. 즉 눈은 마음이 가는 곳입니다. 종종 보는 행위를 하나님의 지식과 전지함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형벌로서 눈을 뽑기도 하는데, 그가 가진 아름다움과 탐욕, 모든 능력을 소실 시키기 위함입니다.

    귀(ear)

    귀는 오감 중에서 듣는 역할을 합니다. 청각은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오는 수용적 기관으로 성경 안에서도 수동적인 역할을 합니다.하지만 긍정적 의미로 사용될 때는 의지나 책임의 의미를 갖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보이는 신’을 ‘들리는 신’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존재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듣는’는 존재입니다. 듣는 것은 순종을 의미합니다.

    입술(lips)

    입술은 독립적으로 사용된 것이 적지 않지만 의미상으로 보면 입이나 혀의 기관처럼 ‘말’ ‘언어’ 등과 관련이 있습니다.

    • 레위기 5장4절 만일 누구든지 입술로 맹세하여 악한 일이든지 선한 일이든지 하리라고 함부로 말하면 그 사람이 함부로 말하여 맹세한 것이 무엇이든지 그가 깨닫지 못하다가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는 그 중 하나에 그에게 허물이 있을 것이니
    • 민수기 30장6절 또 혹시 남편을 맞을 때에 서원이나 결심한 서약을 경솔하게 그의 입술로 말하였으면
    • 욥기 13장6절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이러한 구절들의 맥락을 보면 입술을 말이 나오는 입을 상징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입이 먹는 것과 말하는 것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진 반면 입술은 오직 말하는 것과 언어 등의 의미만을 한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neck)

    놀랍게 성경 속에서 신체의 일부인 목은 매우 주의하여 사용됩니다. 속박과 복종의 의미로 사용되기도하며, 목숨과 숨통이란 의미이기도 합니다. 전쟁에서 패한 장수는 적군의 장수에 의해 발로 목을 밟히는데 이것은 완전한 패배와 죽음을 뜻합니다. 단정한 여인들은 목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목을 드러내는 행위는 남성을 유혹하는 방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성적으로 매우 민감한 부분이기도하고, 목을 보이는 행위는 남성을 유혹하는 행위로 간주 되기도 합니다.

    배꼽(navel)

    성경에서 배꼽은 딱 두 번 언급됩니다. 한 곳은 성적 매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른 한 곳은 생명의 진원지를 의미합니다.

    • 아가 7장 2절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 에스겔 16장 4절 네가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두 가지는 개념이 다른 듯 보이지만 결국 같은 의미입니다. 마치 여성의 가슴이 성적인 부분이자 생명의 힘이 되는 젖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배꼽은 중심이란 의미이자, 시작 출발의 개념이 들어가 있습니다. 배꼽이 있다는 것은 어머니가 있다는 것이고, 어머니를 통해 이 땅에 태어났음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아가 7:2에서 배꼽은 쉬레르(שֹׁרֶר)이고, 에스겔 16:4의 배꼽은 쉐르(שֹׁר)입니다. 쉐레르의 기본은 형은 쉐르로 결국 동일한 단어라할 수 있습니다. 쉐레의 경우 잠 3:8에서 ‘몸’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잠에서는 몸 전체를 뜻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팔(arm)

    팔은 특이하게 사람 자체에게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하나님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팔은 대체로 힘과 능력, 또는 보호를 뜻합니다. ‘펴신 팔'(신 11:2)의 경우 하나님의 능력의 현현을 뜻하며, ‘팔 아래'(신 33:27)는 보호를 뜻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21:4-5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뜻하기도 합니다.

    다리

    다리와 발은 신체 중에서 가장 아랫 부분에 해당됩니다. 발은 종종 다리 안에 포함되거나 따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다리는 움직이는 행위나 이동하기 위한 수단 등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는 표상적 행위이기도 합니다. 걸음과 다리는 혼용되어 사용되며, 대체로 걸음으로 사용됩니다.

    발은 신체의 가장 밑바닥 기관입니다. 손과 더불어 다른 외부적 접촉이 불가피하여 정결 의식 때 반드시 씻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가장 더럽기 때문에 발로 사람이나 동물을 밟는 행위는 정복과 모욕을 주는 행위입니다. 발로 상대방의 목을 밟는 행위는 승리 또는 정복을 의미하며, 발을 씻는 행위는 가장 미천하고 천한 자가 해야할 일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긴 이유는 바로 겸손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간은 신체에서 내장기관이며, 몸의 독소를 해독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일부이기도하고, 이방인들이 점을 칠 때도 간의 모양으로 사용합니다. 간은 종종 고통과 슬픔을 뜻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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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막의 구조와 상징

    성막이란

    성막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시내산에 도착해 하나님의 명령으로 지어진 장소입니다. 성막에 관련된 상징과 신학, 의미들은 후일에 차근차근 다루기로 여기서는 개론적인 이야기만을 소개합니다.

    성막과 성전

    많은 일반인들이 헷갈려 하는 부분입니다. 사실 간단하고 쉬운 부분이지만 간과하기 쉬운 내용이기도 합니다. 성막은 출애굽 때 만들어진 천과 가죽으로 덮여진 곳이며, 성전은 후에 다윗이 지으려다 하나님의 거절로 하지 못하고 그 아들 솔로몬이 짓게 된 돌과 나무로 지어진 거대한 건축물입니다. 성막은 레위인들에 의해 거두어지고 다시 세워지는 방식으로 옮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전은 건축물이기에 옮겨질 수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지만 여기서는 넘어갑니다. 우리가 주의해야할 부분은 성막이며, 성막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성전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전은 이스라엘의 정체성, 현재 유대인들의 정신적인 장소이기에 따로 주의해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성막의 구조와 크기

    성막은 바깥 칸막이로 되어 있고, 그 안에 성막 뜰이 있고, 성막 뜰 안에 성막이 들어가 있습니다. 성막은 성소와 지성소로 되어 있으며, 성소는 매일 들어가 금촛대의 기름을 점검하고 향을 피워야 합니다. 진설병상의 떡도 교환합니다. 지성소에는 일 년에 딱 한 번 대속죄일에 들어가며, 향을 피우고 피를 뿌려 죄를 정결케 합니다.

    성막의 바깥 테두리는 가로 100규빗, 세로 50규빗의 장방형(長方形, 직사각형)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방향은 동쪽으며, 출구는 동쪽에 있으며 유일합니다. 동쪽문의 크기는 20규빗입니다. 성막의 크기는 30규빗 10규빗입니다. 성소는 20규빗, 10규빗이며, 지성소는 10규빗 10규빗의 정방형(正方形, 정사각형)입니다.

    성막 문

    성막 문은 성전 뜰로 들어가는 바깥문이 있고, 뜰에서 성소로 들어가는 문,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있습니다. 성전뜰로 들어가는 문을 동쪽에 있어 종종 동문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뜰에서 성소로 들어가는 문에 대한 호칭은 성경에 없습니다.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은 ‘휘장’으로 되어 있고, 그룹들과 별들이 수 놓아져 있습니다. 이것은 휘장은 하늘을, 지성소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는 문은 오직 하나며 유일하기에 신약의 유일하신 예수님을 뜻한다고 봅니다.

    성막뜰

    성막 뜰에는 가장 앞에 번제단이 있고, 뒤로는 물두멍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막 뜰에서 제물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다른 도구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제물들은 대체로 번제단의 오른쪽, 즉 북쪽에서 잡았습니다.

    번제단

    번제다는 정방형으로 되어있고, 정금으로 도금되어 있습니다. 24시간 불이 꺼지면 안 되며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신 불로 불을 지펴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다른 불로 드릴 경우 하나님의 저주를 받습니다.

    물두멍

    뭉두멍은 놋을 펴서 만든 것인데 유일하게 크기가 지정되어 있습니다. 제사를 마치거나 성소로 들어갈 경우 반드시 물두멍에서 씻어야 합니다.

    성소

    성소는 장막의 앞 쪽 부분이며, 그곳에는 금등대, 떡상, 분향단이 있습니다. 크기는 20규빗 10규빗입니다.

    성소 상상도

    금등대 / 금촛대

    종종 금촛대로 표현을 하는데 옳지 않습니다. 등대이며, 기름을 넣어 불이 꺼지지 않게 합니다. 모두 7개의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하누카칼로 불리는 마카비 혁명으로 만들어진 수전절에는 8개의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공식 절기는 아니나 예수님이 지킨 것으로 봐서 민족적 성향이 강하지만 모두가 함께 지킨 절기입니다. 금등대는 빛이신 예수님, 하나님의 말씀 등을 상징합니다.

    떡상

    떡상은 매일 새 떡을 만들어 올려 놓는 것으로 모두 12지파를 상징하여 12개의 떡을 올립니다. 하늘의 만나, 떡으로 내려오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분향단(Altar of incense)

    분향단은 휘장 바로 앞에 자리하며 향을 하나님께 올리는 것입니다. 향은 찬양이며 기도입니다. 향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자연현상으로 구름과 같은 의미입니다. 정방형이며, 네 개의 뿔이 달려 있습니다.

    휘장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휘장은 천들을 짜서 만들었습니다. 천사의 일종인 그룹과 별 달 등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일반 하늘을 뜻합니다. 성소가 땅이라면 지성소는 하늘의 하늘 속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뜻합니다. 시은소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라는 뜻입니다.

    지성소

    지성소는 일년 에 한 번, 대제사장만 들어가는 공간입니다. 들어갈 때는 자신을 완전히 정결하게 해야하고, 정해진 복장과 정해진 방식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부정을 타서 죽게 될 수 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방울을 달고 들어가는데 한 동안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죽었다고 생각하고 발에 묶인 밧줄로 끄집어 냅니다.

    법궤 / 시은소

    법궤(Ark of the Covenant, ארון הברית)는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입니다. 법궤는 뚜껑과 관으로 되어 있습니다. 관에는 만나 항아리, 십계명,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가 있습니다. 뚜껑은 두 명의 그룹이 서로 날개를 합하여 둘러싸는 형태로 그곳을 시은소라고 부릅니다. 법궤는 반드시 네 명의 제사장이 어깨에 메고 옮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후일에 다윗이 법궤를 수레로 옮기다 ‘베레스 웃사’ 사건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법궤를 메고가는 제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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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열두 지파 이름과 기원

    이스라엘 열두 지파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르우벤 지파

    2. 시므온 지파

    3. 유다 지파

    4. 잇사갈 지파

    5. 스불론 지파

    6. 단 지파

    7. 납달리 지파

    8. 갓 지파

    9. 아셀 지파

    10. 에브라임 지파

    11. 므낫세 지파

    12. 베냐민 지파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기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야곱의 열두 아들에게서 기원을 했습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야곱의 손자이며, 요셉의 아들입니다. 레위와 요셉이 빠지고 요셉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추가되어 모두 열두 지파가 형성이 됩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과 아내

    야곱의 열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창세기 29장과 30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에게 두 명의 아내가 있었고, 후에 두 명이 추가되어 모두 네 명의 아내에게서 딸 디나를 비롯하여 아들 열두 명이 태어납니다. 순서와 이름, 아내의 이름을 정리해 봤습니다.

    순서 이름
    어머니
    1 르우벤(Reuben)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라도다(창 29:32) 레아
    2 시므온(Simeon) 내게 이 아들도 주셨다. 즉 더하다.(창 29:33) 레아
    3 레위(Levi) 연합하다 (창 29:34) 레아
    4 유다(Judah)  찬송하다 (창 29:35) 레아
    5  단(Dan) 내 호소를 듣다 (창 30:6) 빌하(라헬)
    6 납달리(Naphtali) 경쟁하여 이겼다 (창 30:8) 빌하(라헬)
    7 갓(Gad) 복되도다 (창 30:11) 실바(레아)
    8 아셀(Asher) 기쁘다 (창 30:13) 실바(레아)
    9 잇사갈(Issachar) 값을 주다 또는 더하다.(창 30:18) 레아
    10 스불론(Zebulun) 높이다 (창 30:20) 레아

    디나(Dinah) 레아의 딸로 세겜성에서 강간 당한다 (창 34장) 레아
    11 요셉(Joseph) 내게 더하다 (창 30:24) 라헬
    12 베냐민(Benjamin) 오른손의 아들(창 35:18) 라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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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산나

    호산나의 뜻과 용례

    호산나는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입니다. 성경에는 모두 5번에 걸쳐 사용되지만 시간적 배경은 예수님이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기 위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들어가시는 날 사람들이 환영하며 외친 것입니다.

    • 마태복음 21장 9절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그 외에도 마 21:15, 막 11:9, 막11:10, 요 12:13에 사용되지만 모두 동일한 사건 속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던 용어가 갑자기 등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의 원출처는 구약성경이며, 시편 118:25에 사용된 히브리어입니다.

    • 시 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26절을 함께 읽으면 마태복음의 내용과 거의 흡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시 118: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시 118:25 히브리어

    אנא יהוה הושיעה נא אנא יהוה הצליחה נא׃

    여기서 호산나는 ”이제 구원하소서’의 부분을 그대로 읽은 것입니다.

    나나 야훼 호쉐아 나 난나 야웨 하치리하 나

    나는 구한다 야훼께 구원하소서 지금, 나는 기도한다 야훼께 형통을 지금

    형통은 ‘짤라(צָלַח)’이며, 구원하다는 ‘아샤(יָשַׁע)’입니다. 호산나는 ‘아샤(יָשַׁע)’ 그대로 발음한 것입니다.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사용된 언어는 아람어(히브리어 방언 정도)였으며, 성경으로 기록할 때 당신 공용어인 헬라어로 적으면서 ‘호산나’가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21:9을 헬라어로 그대로 옮겨 봅니다. 사용한 성경은 NA28 최신판입니다.

    οἱ δὲ ὄχλοι οἱ προάγοντες αὐτὸν καὶ οἱ ἀκολουθοῦντες ἔκραζον λέγοντες·

    ὡσαννὰ τῷ υἱῷ Δαυίδ·

    εὐλογημένος ὁ ἐρχόμενος ἐν ὀνόματι κυρίου·

    ὡσαννὰ ἐν τοῖς ὑψίστοις.

    호산나(ὡσαννὰ)는 아람어인 ‘아샤(יָשַׁע)’를 그대로 헬라어로 적은 것입니다.

    종려가지를 흔다는 것은 제2성전기의 역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후에 따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호산나는 샬롬이 목적이며, 샬롬은 평안의 히브리어입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달라는 간절함은 메시아를 통해 회복하게될 이스라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곧 평안으로 가는 방법이기에 구원과 평안이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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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신들, 우상들

    성경 속 우상과 신들

    성경에는 수많은 우상들이 등장한다. 주요한 신들은 바알과 아스다롯, 아세라, 다곤 등이지만 간접적으로 소개되는 신들까지 합하며 수십 개가 등장한다. 우상은 유일신관점에서 표현이고, ‘신들’은 ‘야훼 신앙’의 관점에서 표현된 것이다. 유일신은 그 어떤 신들도 용납하지 않지만 야훼 신앙은 야훼의 우월성을 강조할 때 사용된다. 야훼는 유일하지만, 이방 신들 복수형으로 ‘신들’이다. 이러한 우상 또는 신들은 전세계를 통치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과 대비 또는 대치 된다. 이후에 성경의 신들에 대해 소개하고 여기서는 이름과 간략한 소개만 올린다.

    엘(El)

    구약에서 하나님은 엘의 복수 형태인 ‘엘로힘’이다. 우가릿 문헌에 ‘엘’이 등장한다. 엘은 창조주이며, 인간의 출생에 관여하는 신으로 알려져 있다. 바알의 아버지로 소개되기도 하지만 바알처럼 소개되기도 한다.

    바알(Baal)

    바알은 ‘주인’이란 뜻이다. 가나안에서 섬기던 주신으로 번개와 천둥을 부린다. 비를 내리는 신이다. 강수량이 적고 농사를 짓는 고대 팔레스타인에서 바알은 비를 내리고, 부활을 하는 신이였기에 절대적 힘을 발휘했다. 바알은 농사의 신 뿐 아니라 전쟁의 신이며, 가뭄을 가져오는 파괴의 신이기도 하다. 신들이 갖는 상대적 표현이다. 가나안의 바알은 고대 비빌로니아의 ‘벨’신이었다고 학자들은 거의 확신한다. 바알은 땅의 신이자 하늘의 신이다. 바다의 신인 얌과 대적한다. 바알이 얌(대양 또는 혼돈)과 싸워 이긴 것처럼 하나님도 바다의 신과 싸워 이긴다.

    바알은 다양한 이름으로 현현한다. 치료의 신인 바알세불, 바엘, 바알제붑이 그들이다. 힛타히트에서 주신으로 섬긴 하가드도 동일한 신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다곤의 아들이거나, 다곤의 다른 이름이다. 아내의 이름은 아낫이나 어떤 곳은 아스다롯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바알은 엘과 아스다롯(아세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바알은 다곤의 아들이거나 다곤의 다른 이름이다.

    바알은 구 바빌로니아의 벨이다.

    야암은 바알의 어머니이자 바다의 신이다. 이 부분은 바빌로니아 신화에서 다시 다룬다. 바빌로니아 신화는 수메르 신화에서 왔으나 변형시켜 역전시킨다.

    아스다롯(Ashtaroth)

    아세라(Asherah)

    아낫(Anath)

    아낫은 성경에서 4번 사용된다. 수 19:38, 삿 1:33, 삿 3:31, 삿 5:6이다. 사사시대 사사였던 삼갈은 ‘아낫의 아들’로 소개된다.(삿 3:31, 5:6) 아낫에게 철저히 종속된 존재라는 뜻이다. 아낫은 바알의 아내로 소개되기도한다. 하지만 아스다롯과 아세라, 아낫은 정확히 다른 신들인지 같은 신을 다르게 부르는지 모호한 부분이 적지 않다.

    다곤(Dagon)

    다곤은 물고기 신으로 블레셋 민족이 섬긴 주신이다. 다곤은 농사의 신이었으나 블레셋으로 넘어오면서 물고기 신으로 바뀌었다. 수메르에서 주신으로 섬기던 신이 지중해로 넘어오면서 분화된 것으로 보인다. 가나안 주민들은 바알로, 에게해서 넘어온 해양 민족인 블레셋은 다곤으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다곤이 ‘주인’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더욱 분명하다.

    몰렉(Molech)

    몰렉은 모압과 암몬에서 주신으로 섬겨진 신이다. 특히 암몬족속들이 섬긴 신이다. 고대근동과 북아프리카에서도 신으로 숭배되었다고 한다. 모양은 가슴 아래로는 사람이지만 위로는 황소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바알이 황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때 바알의 또 다른 현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바알의 제사가 여사제들과 음란한 교합이었다면, 몰렉의 경우는 아이를 바치는 인신공양의 형태로 드려진다. 페니키아와 북아프리카에 인신공양이 행해졌다는 것을 유추해 보다면 동일한 신으로 보인다. 카르타고를 침략한 로마인들이 인신공양의 모습을 보고 경멸했다는 기록이 아직도 남아 있다.1 인신공양은 대부분 페니키아와 카르타고처럼 항구 도시에서 성행한다. 우리나라 심청이가 삼백석으로 인신공양한 것 역시 바다의 신을 노여움에서 풀게 하려는 것이다. 요나 1장에서 요나가 바다 신의 노염을 풀기 위해 바다에 던져진다.

    몰렉에게 아기를 바치는 모습2

    그모스(Chemosh)

    그모스는 모압에서 주신으로 섬긴 신이다. 기록된 것을 토대로 하며 몰렉과 암몬을 정확히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그모스는 모압어, 아카드어, 에블라어 등이 남겨진 것으로 볼 때 바빌로니아에서 전래한 신으로 보인다. 성경에서는 그모스 또는 밀곰으로 번역되어 있다. 성경은 모압을 그모스의 아들로 소개한다.(민 21:293 렘 48:464) 사사기 11장에서도 입다가 논쟁할 때도 ‘네 신 그모스’라고 표현한다. 왕하 23:13에서는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가증한 밀곰으로 표현된다. 그모스와 밀곰이 완전히 동일한 신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림몬(Rimmon)

    바알세붑(Baal-zebub)

    쓰스(Zeus)

    허메(Hermes)

    아데미(Artemis)

    아데미(Artemis, 아르테미스) 그리스의 여신 아르테미스로 로마의 여신 디아나(Diana)이다.

     아레스(Ares)

    디오스구로(Dioscuri)

    1. 디오도로스 사켈로스(Diodorus Siculus, Διόδωρος Σικελιώτης)는 기원전 1세기 작가이며 시칠리아 출신이다. 그는 비블리오테카 히스토리아(Βιβλιοθήκη Ἱστορική)를 기록했다고 한다. 비블리오테카 히스토리아(Βιβλιοθήκη Ἱστορική)는 그의 유일한 저작으로 초 40권이지만 현재 1-5권, 11-20권만 남아 있다고 한다. 로마의 신화부터 기원전 59년까지 기록된 로마의 연대기 기록으로 볼 수 있다. ↩︎
    2. 그림 출처 위키백과 몰렉 ↩︎
    3. 민 21:29 모압아 네가 화를 당하였도다 그모스의 백성아 네가 멸망하였도다 그가 그의 아들들을 도망하게 하였고 그의 딸들을 아모리인의 왕 시혼의 포로가 되게 하였도다 ↩︎
    4. 렘 48:46 모압이여 네게 화가 있도다 그모스의 백성이 망하였도다 네 아들들은 사로잡혀 갔고 네 딸들은 포로가 되었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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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상칠언(架上七言)



    가상칠언(架上七言) The Seven Words

    A.D. 33년 4월 초순 금요일 일기 화창한 어떤 봄날 예루살렘성 밖으로 세 사람의 십자가의 죽음 행렬이 엄숙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목적지는 히브리말로 골고다요, 아람어로 된 말을 해석하면 해골이란 동산인데 여기까지 와서 각자가 메고 온 십자가에 이 세 사람을 달았습니다.
    그 중에 중앙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본질에 대한 조직신학적 고찰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구속사 전체를 관통하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이는 단순한 형벌의 도구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언약적 구속의 정점이다.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십자가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 인간의 타락, 언약의 성취, 그리고 구속의 적용이라는 큰 구조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이 역사 가운데 실현된 사건이며, 교회는 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구원이 어떻게 만나는지를 해석해왔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단지 고난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자비가 충돌하며 완전하게 화해된 은혜의 자리이다.

    1. 삼위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의 십자가

    십자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이 영원 전에 계획하신 구속 사역의 중심에 있다. 에베소서 1장 4절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말씀한다. 이는 단지 인간의 반응에 따라 계획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작정된 영원한 언약(pactum salutis)에 따른 것이다. 이 언약 안에서 성부는 구속을 계획하시고, 성자는 구속을 성취하시며, 성령은 구속을 적용하신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성자의 독립적 고난이 아닌, 삼위 하나님의 연합된 사역의 성취이다.

    특히 성자의 순종은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나뉘는데, 십자가는 그의 수동적 순종의 극치이다. 필립보서 2장 8절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선언한다. 이 복종은 단지 외적인 고난을 감내한 것이 아니라, 죄 없으신 분이 율법의 저주 아래 들어가신 사건이다. 성자는 인류의 대표로서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행하셨고, 그 결과로 십자가에서 모든 죄값을 단번에 치르셨다.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역할 분담 속에서 우리는 구속의 섭리가 하나님의 내적인 본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작정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십자가는 그 작정의 시간 속 실현이다. 창세 전부터 준비된 이 구속의 방식은 인간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으며, 인간의 지혜로는 결코 예측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은혜의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사랑과 공의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롭게 나타난 사건임을 증명한다.

    2. 인간의 타락과 십자가의 필요성

    조직신학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전제로 한다. 이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전 인류가 원죄 아래 있으며,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교리이다. 로마서 3장 10절 이하의 말씀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이러한 절망적 상황 속에서, 십자가는 유일한 구원의 길로 나타난다.

    아담 안에서 인류 전체가 죄 가운데 빠졌으며, 이 죄는 단순한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 존재의 문제이다. 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시켰고,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존재는 외부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생명에 이를 수 없다. 여기서 구속의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이 되셔서, 그분이 마련하신 방법으로 구속을 이루시는 것이다.

    십자가 없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될 수 없으며, 죄인은 결코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 죄에 대한 형벌은 반드시 집행되어야 하며, 그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하셨다는 사실은 십자가의 필연성을 말해준다. 이는 대속적 속죄(substitutionary atonement)의 교리이며,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핵심 진술이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실 수 있지만, 공의로운 방식으로만 그 용서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비가 단순히 감정적 동정심이 아니라, 공의의 기준을 만족시키며 나타난 사랑임을 드러낸다.

    3. 십자가와 언약의 성취

    구약 성경 전체는 메시아적 언약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하신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라고 증거한다. 이는 신명기 21장에서 말하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율법의 선언을 그리스도께서 친히 감당하신 것을 말한다.

    언약의 성취로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도구이며, 동시에 그 약속의 성격을 규명하는 계시적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언약의 중보자로서 자신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셨다. 히브리서 9장 15절은 "이는 죽으심으로써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한다. 이처럼 십자가는 단순한 고난의 순간이 아니라, 구속사의 전환점이며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이 극대화된 지점이다.

    언약적 배경에서 십자가는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닌, 영원한 언약의 실현이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쪼갠 짐승 사이를 홀로 지나가심으로 인간의 책임까지 자신이 짊어지셨던 장면은 십자가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와 언약의 신실함을 위하여, 친히 자신을 찢기게 하셨다. 이는 전 우주에서 단 한 번 일어난, 완전한 사랑과 공의의 표현이다.

    4. 십자가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나타난 사건이다. 로마서 3장 26절은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죄를 단순히 용서하지 않으시고, 공의의 기준을 만족시키면서 죄인을 의롭다 하신다는 점이다.

    이때 나타나는 것이 화목제물(hilastērion) 개념이다. 이는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는 희생 제사를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제물로 드려지셨다는 것이다. 헬라어 단어 hilastērion은 구약 성소의 속죄소와 동일한 단어로, 이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임재와 진노 사이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사건ㄴ임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에 죄를 무시할 수 없으나, 동시에 사랑이시기에 죄인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이 두 속성이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 장소가 바로 십자가이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이 십자가를 통해 계시되었음을 의미하며, 단순한 인간 중심의 구원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구속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 감상적인 차원을 넘어서, 희생적이며 철저히 거룩한 사랑으로 드러난다. 이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겁고도 실재적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동시에 드러낸다. 이 사랑은 단순한 허용이 아닌,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죄인을 품으시는 사랑이다.

    5. 십자가의 적용과 성화의 근거

    십자가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 신자의 삶에 실재하는 능력이다.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자에게 적용하신다. 이는 칭의와 더불어 성화를 이루는 근거가 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고백하며, 신자의 존재가 십자가와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신자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를 위하여 사는 삶으로 전환된다. 이 변화는 단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 자체의 변화이며, 이는 십자가와 연합함으로 가능하다. 십자가는 신자의 삶에서 자기 부인의 근거가 된다. 이는 단순히 감정적 헌신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옛 자아의 죽음을 포함한 존재적 변화이다.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참된 회개는 날마다의 죽음과 부활을 포함하며, 이는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또한 십자가는 고난 중에도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로마서 8장은 십자가에서 시작된 사랑이 어떤 것도 끊을 수 없음을 선포한다. 신자는 세상의 고난 속에서도 결코 버림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는 영광의 여정을 걷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결언(結言)

    조직신학적으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서 이루어진 언약의 성취이며, 구속의 중심 사건이다.
    이는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일치하는 지점이다.
    십자가신자의 삶과 신앙,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기반이 된다.
    신자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자신이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를 기억하고, 그 사랑에 응답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십자가는 삼위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성취된 구속의 중심이다.
    이는 인간의 전적 타락에 대한 유일한 해결이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완전하게 만나는 자리이다.
    신자는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고, 십자가를 따라 살아가며, 십자가 안에서 생명과 소망을 얻는다.


    가상칠언(架上七言)

    04-14-2025(월)

    제1언 / 용서와 간구(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용서(容恕)라는 한문자의 의미를 소개합니다.
    용서라는 한자의 훈(訓)은 “얼굴 용(容)”“용서할 서(恕)”라고 합니다.
    얼굴이란 “담는다”는 의미이며, 용서는 “같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한문자의 용서는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고난주간 월요일을 지내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심으로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은 죄인이었던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고난주간 월요일의 기도
    다섯 손가락 중에 엄지 손가락은 “으뜸”을 의미합니다.
    음뜸이 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나라의 으뜸이 되는 대통령을 위하여!
    국회의 으뜸이 되는 국회의장을 위하여!
    법원의 으뜸이 되는 대법원장을 위하여!
    행정부의 으뜸이 되는 국무총리를 위하여!
    가정의 으뜸이 되는 가장을 위하여!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지만 지도자로 세워주신 목사를 위하여!
    각자의 직장에 머리를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며 고난주간 월요일을 신앙적으로 맞이합시다.

    04-15-2025(화)

    제2언 / 구원의 선언(누가복음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Jesus answered him, "I tell you the truth,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두 강도가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두 강도의 이름을 외경에서 “디스마”와 “게스다”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어느 편 강도가 구원을 받았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오른편 강도가 구원을 받았다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마지막 때에 오른 편에 양의 무리들을 왼편에 염소의 무리들로 구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25:33).

    용서의 선언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받은 삶을 고백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삶의 모습을 양과 염소의 습성에서 소개합니다.
    더운 여름철이면 양들을 뿔뿔이 흩어져서 지내고 추운 겨울이 되면 모두 한몸이 되듯 밀착하여 긴 겨울밤을 보낸다고 합니다.
    반면에 염소는 양들처럼 지내는 것이 좋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지만 상대방이 시원하고 상대방이 덥게 지내는 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여름에는 악착같이 달라붙고 겨울철에는 멀찍이서 지낸다고 합니다.

    염소의 성질머리가 참 고약합니다.

    죄를 용서받지 못한 인생은 염소와 같이 이기적인 삶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용서 받았기 때문에 양과 같이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삶을 좋아합니다.

    구원받았다는 감격을 구원받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믿음으로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고난주간 둘째날 화요일을 맞이하여 두 번째 손가락 검지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검지는 무엇을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리켜야 할 거리의 교통 경찰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공의로운 판단으로 시시비비를 가리쳐야 할 법관들 판사와 검사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과 교수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교회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교사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가정에서 자녀들을 가르치는 부모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이렇게 기도하며 고난주간 둘째날 화요일을 즐겁게 살아봅시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가상칠언, 십자가상의 일곱 마디. ​
    가상칠언 架上七言.  the Seven Words
    예수께서 죽음 직전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

    ​1.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가상칠언 제1언 / 용서(容恕)와 간구(懇求)

    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Jesus said, "Father, forgive them, for they do not know what they are doing." And they divided up his clothes by casting lots.

    1. 용서의 사전적 의미

    한자의 용서(容恕)에서 容은 얼굴 용(容)이란 훈으로 ‘담다’는 의미라고 하며, 恕는 용서 할 서(恕)라는 훈으로 ‘같은 마음’ 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용서의 한문자적 의미는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용서를 ‘놓아 줌,’ ‘죄를 면하여 줌,’ 또는 ‘꾸짖지 아니함’이라고 정의합니다.

    2. forgive 의 어원적 의미

    forgive에서 for 는 ‘전적으로(completely),’ give(고대 영어 giefan)는 ‘주다’를 뜻하여 forgive는 ‘전적 시여(全的 施與)' 또는 '완벽하게 주는 것’을 말합니다.

    라틴어 “perdonare”, 독일어 "vergeben", 프랑스어 "pardonner"는 영어의 풀이와 같은 뜻을 갖습니다. 

    따라서 용서의 의미는 ‘유보 없이 전적으로 주는 것(to give completely, without reservation),’ 즉 ‘벌주고자 하는 욕망도 힘도 포기한다’는 의미로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3. 논어에 나오는 서(恕)

    공자의 여러 제자들의 모였을 때 "자공(子貢)"아 스승에게 질문하였지요.  
    "선생님, 평생을 두고 마음에 담아 실천할 만한 좌우명 하나가 무엇인가요?"
    자공의 질문에 공자님은 "그것은 바로 서(恕)니라"고 곧 대답하시면서 ‘상대방이 원치 않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子貢이 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잇가 子曰 其恕乎인저 己所不欲을 勿施於 人.

    공자와 그의 제자 사이의 질문과 응답은 차원 높은 혜안적인 통찰이었지만 그러나 용서를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덧부친 말도 부정적 어휘가 사용되어 있어서 소극적이다.

    4. 용서의 신학적 의미

    (1) 아담 타락 이래 인간은 죄인으로 전락되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의인은 없나 니 하나도 없나니”(롬 3:11; 시 14: 1-2)에서 보듯이 인간에게는 죄인이라는 낙 인이 찍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용서의 길을 마련하셨다. 흔히 ‘잘못은 인 간이 저지르지만,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 (To err is human. to forgive, divine.)이라는 격언이 이를 압축하여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2) 히브리어에서 용서를 두고 세 개의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즉, 'kipper(덮다),' 'nasa(죄책을 짊어져 없이하다),' 'salah(용서하다)이다. ‘나사’는 하나님이나 인간 의 용서에 사용되었으나 나머지 두 개의 단어는 하나님의 용서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헬라어에서는 4 개의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곧, 'apolyein(ἀπολύω, 마 5;31; 눅 6:37), charizesthat(χαρίζομαι, 눅 7:21, 엡 4:32), paresis(πάρεσις, 롬 3:25 ‘간 과함), 및 aphesis 이다. 마지막 단어 aphesis(ἄφεσις)가 신약성경에서 가장 일반 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용서를 두고 사용되고 있다.

    (2) 용서의 원천-엡 1:7

    죄 용서를 주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고후 12:13; 골 2:13).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ἄφεσις)을 받았느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죄 용서는 그리스 도의 보배로운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온다(히 9:22, 26; 롬 4:25).

    본문에서 ‘죄 사함 ἄφεσις’ 는 “해방, 면제, 용서”를 뜻한다.

    하나님의 용서는 칭의 메시지이다. 엘렌 화잇 여사는 죄 용서를 ‘오로지 하나님 께서만 하시는 용서’로 진술하고 있다(SC 37; 9T 63). 이 하나님의 용서는 인류 모두에게 주어진 객관적, 보편적 칭의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는 인간 편의 죄의 자복, 회개라는 조건이 달려 있다(눅 17:3-4).

    “죄인을 위하여는 한 길 밖에 없다. 신실한 회개와 죄의 고백, 깨끗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믿음이 용서를 가져달 줄 것이며”(2T 293).

    용서의 조건성은 인간의 선택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3) 인간 사이의 용서- 엡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 안에서 너희 를 용서함 같이 하라.” -> “서로”에 비추어 용서는 상호적이어야 한다.

    용서는 자기에게 잘못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태도, 물론 상대방의 죄된 행동을 정당화시켜 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정죄하는 태도를 버리고 잘못하였음에도 불구 하고 친절하게 대하여 주는 것이다.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 아니다. 이 용서는 공동체 내 안식, 관계 회복 및 치유를 일으킨다.

    “용서라는 것은 피해자의 의도적인 노력이다. 그것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 다.”(안교 교재 제3기 제7과))

    용서는 저지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다. 용서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계속해서 그 잘못을 저지르도록 묵인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란 우리의 억울함과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 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서로 용서하는 일을 랍비들의 3회에서 7회로 확대 제안하였지만, 그리스 도께서는 70번의 7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여 그 범위를 무제한으로 확대하셨다. 햇볕이나 비를 의인이나 악인에게 골고루 내려주시는 예를 제시하기도 하셨고, 심 지어는 원수까지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마 7:12). 이는 공자님의 부정적 언어로 제시한 己所不欲 勿 施於人을 넘어선 적극적이고 긍정적, 진취적이어서 유교 윤리를 뛰어 넘는 특성을 보여 주고 있다.

    (4) 주기도문에 나오는 용서기도

    마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 옵고”(6:12)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셨으니 우리도 형제의 죄를 용서하여야 한다.

    “사하다”는 ἀφίημι (aphie-mi)는 “내보내다, 버려두다, 용서하다. 가게하다, 보 내버리다, 취소하다, 탕감하다, 용서하다”의 뜻이다.

    누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 시고”(12:4 ).

    (5) 주의 기도문의 용서기도에 있어서 선행성 이해

    두 기도문의에서 하나님의 사죄와 인간의 사죄 중에 어떤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가?

    ㉠ 마 6:12 마태의 기록은 분명히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근거로써 제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용서에는 인간의 용서라는 선행적 조건성을 함축하고 있다.

    ㉡ 눅 12: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이 번역에는 마치 “우리가” 용서의 주체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 점이 있어 보여 2인층 단수 능동태인 αφες의 주어 “주께서” 또는 “당신께서”가 잘 안 보인다.

    누가는 ἀφίημι의 2인층 단수 2aorist 능동태 명령법, αφες를 사용하고 있다. 따 라서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여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시역>

    “우리에게 우리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그 때에 진실로 우리도 우리에게 죄를 지 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겠나이다.”

    <원문>

    και αφες ημιν τας αμαρτιας ημων και γαρ αυτοι αφιεμεν παντι οφειλοντι ημιν.

    이 본문에 나오는 και γαρ를 ‘그리고 진실로’로 번역 이해가 가능하다. ‘γαρ’는 ‘then, indeed, since, for’를 뜻한다.

    2인층 단수인 “주께서”가 주어가 되어 용서의 원천이 되고 인간 용서에 선행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용서의 선행성이 명확하여지기 때문이다.



    일언은 '용서(容恕)와 간구(懇求)',
    주님께서 십자가의 그 고통 중에서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군병과 인류의 죄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인류의 구원과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님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분입니다.
    구약에는 아버지란 말이 없으나 예수님은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우리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주기도문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도는 아버지가 두 분이십니다.
    육신의 아버지와 영혼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은 사랑의 인격적 참여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게 될 때 내 모든 문제는 해결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 번째 말씀은 용서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난 인간에 대한 심판의 집행인 동시에 용서인 것을 압니다. 구약 시대 사람이 죄를 지으면 자신의 죄를 대신할 제물을 성막에 가져갔습니다. 죄인은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각을 떠서 제사장에게 드립니다. 제사장은 더러운 것을 제하고 모두 제단 위에 올려놓고 번제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번제와 속죄제는 직접인 죄를 사하는 제사입니다. 소제는 감사, 화목제는 감사와 평화를 위한 제사입니다. 모든 제사들은 직접적으로 다른 목적을 갖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화평하고, 죄 용서에 대한 감사를 전제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처음 하신 말씀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중보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용서해 달라고 한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하고 따랐던 사람들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류를 말합니다. 자신을 배신한 제자들, 자신을 채찍질하고 모욕한 로마군사들, 지나가면서 조롱한 행인들과 구경꾼들가지 포함합니다. 심지어 자신을 십자가에 넘긴 유대관원들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한 빌라도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원수가 누구입니까? 그는 단순한 괴롭힘의 주체가 아닙니다. 존재의 부정과 멸망으로 이끌고 가는 모든 사람들과 환경까지 포함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용납은 아닙니다. 그들의 폭력과 비방을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죄성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죄는 대항하지만, 죄인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아버지라는 부름에도 유의해 봅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주기도문에서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는 친밀함과 아들됨의 표지입니다. 구하기 전에 먼저 준비되어야할 것은 관계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아들의 자격으로 죄인들을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용서에 대한 기도는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며, 기꺼이 용서하실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구하는 기도는 모두 응답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간구의 전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누가복음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Jesus answered him, I tell you the truth,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이언은 '구원', 오른편 강도에게, 십자가 위에서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한 오른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서도 주님께서는 영혼을 사랑하시고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영혼이 들어갑니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고백할 때에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었던 강도가 낙원을 허락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씀을 오해하여 구원이 똑 같은 구원이라고 생각하면 자신의 인생을 살면서 많은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 중 구원에 관한 말씀은 크게 초대 손님으로서 구원과 하나님의 신부로서 구원을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양쪽에 달린 두 강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양쪽에 십자가에 달리고서도 그 죄를 깨닫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림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절)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진심이면 얼마나 다행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에 보면 비방하였다고 했습니다.
    객관적이요, 비판적이요, 야욕적인 말이었으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현재도 십자가를 신앙적으로, 주관적으로, 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강도처럼 비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지금도 강도처럼 죽어가면서도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비방하는 자가 많습니다.
    고난과 십자가에서는 선한 말이 나오기 힘든 모양입니다만 중앙에 계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고 구세주임을 알았다면 구원을 호소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강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2언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눅 23:43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두 번째 말씀은 ‘약속’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낙원을 약속한 강도가 한 때 주님을 조롱했다는 것을 압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두 명의 강도 중 한 명이 도중에 비방하기를 멈추고 예수님을 변호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의탁했습니다. 주님은 강도를 용서하고, 낙원을 허락하십니다.

    행악자(κακοῦργος)라고 표현된 헬라어 단어는 ‘범죄자’ ‘강도’ 등을 뜻하지만, 이들은 반란을 위해 살인한 자들입니다. 당시 로마는 극악무도(極惡無道)한 살인자와 국가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두 부류의 죄인들은 십자가형을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이유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의 왕이 아님을 빌라도에게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왕이기 때문에,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십자가형을 당한 것입니다.

    행악자의 간청을 들어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그가 어떻게 ‘당신의 나라’라고 말했을까요? 제자들을 비롯한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한 ‘나라’는 육적인 나라이며, 로마의 압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회개한 행악자는 죽어가면서 ‘당신의 나라’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 새로운 영적인 세계를 발견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돌아섰습니다. 이 땅의 것들로부터 벗어나 바로 곁에서 죽어가는 예수님께로 돌아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발견입니까? 한 행악자는 아직도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비방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다른 사람은 구하면서 왜 너는 네 자신을 구하지 못하느냐?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합니다. 자연인의 관점입니다. 그들이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현실 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그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강도는 영적인 눈을 떴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즉각적으로 반응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게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천국은 지식적인 장소가 아니가 아닙니다. 거듭난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니고데모처럼 거듭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만 볼 수 있습니다.






    3. "여자여 보소서 아들 이니이다 ··· 보라 네 어머니라"(요한복음 19:26~27)

  •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 When Jesus saw his mother there, and the disciple whom he loved standing nearby, he said to his mother, "Dear woman, here is your son,"
  • and to the disciple, "Here is your mother." From that time on, this disciple took her into his home.


  • 제3언은 "효도(孝道)"에 대한 외침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 중에서도 메시아로서 십자가 위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시는 아들의 고통을 바라보시는 어머니를 생각하시고 위로하시며 효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 사도에게 “내 어머니 네 어머니”라고 말씀 하시며 어머니를 요한 사도에게 모시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요한 사도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잘 모셨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들이 있었지만, 열 두 제자 중,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했었고, 사랑의 사도이었던 요한에게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시고 계시는 삼 언의 말씀이 확인하여 주십니다.
    즉 부모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과 같이 자녀로 살면서 보이는 육신의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을 인정하고, 알 수 있으며, 부모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만 하나님의 말씀에도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가운데 손가락 중지(middle finger) 기도를 합니다.



    세 번째 주님의 눈동자가 집중된 것은 여기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계신 곳입니다.
    25절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클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등 네 여인이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울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면서 부탁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격은 여인입니다.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게 되어 남편에게 송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제 예수님을 먼저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한없는 슬픔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3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27)

  •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 When Jesus saw his mother there, and the disciple whom he loved standing nearby, he said to his mother, "Dear woman, here is your son,"
  • and to the disciple, "Here is your mother." From that time on, this disciple took her into his home


  • 바울은 놀랍게도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약속이 있는 첫 계명’(엡 6:2)으로 말합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1-3)

    바울이 첫 계명이라 말한 것에는 사람과 관련된 첫 계명으로서 부모 공경을 말합니다. 십계명의 1-4 계명은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오직 하나님께만 향한 계명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계명은 하나님을 섬기라는 첫 계명에 종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구체적으로 구분한다면 다섯 번째 계명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첫 계명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부모에 대한 계명에 약속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근거를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한다’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문제는 간음과 살인, 탐욕의 계명보다 앞선다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만큼 부모에 대한 공경의 문제는 물러설 수 없는 중요한 문제로 보았습니다. 또한 다른 계명에 비해 약속을 더하심으로 의미를 가중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곁에 요한이 있는 것도 봅니다. 주님은 입을 열어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여자(Γύναι)란 단어는 결혼한 여자나 여성을 높여 부르는 존칭입니다. 여자라는 번역은 그리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쨌든 주님은 마라아를 부르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숨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인 시기에 어머니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아무 감정도 없는 그런 초월적 존재로만 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육신을 입었으며, 여자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체휼(體恤)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피곤하고, 배고프고, 슬픈 감정을 느끼십니다. 인간이 가진 아픔과 고통을 직접 체험하셨습니다. 또한 죽어가는 아들을 보며 고통스러워하는 육신의 어머니가 갖는 고통을 이해하십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낳아 할례를 받으러 갔을 때 시므이는 마리아에게 칼이 마음을 찌르듯 아플 것이라고 예언합니다.(눅 2:35) 예수의 육신적 어머니가 지고 가야 할 고통의 짐입니다. 주님은 이 모든 아픔을 아시며, 마리아를 위로하며 요한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부모 공경하기를 멈추지 않는 주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저는 가끔 야고보와 같은 동생들이 있는데 왜 요한일까? 궁금한 적이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직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동생 야고보보다는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했던 요한에게 마리아를 부탁한 것은 잘 한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맡은 것은 짐이지만 영광스러운 짐입니다. 우리는 종종 주의 일을 감당할 때 영광을 보지 못하고 무게만을 봅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을 들어 영광의 무게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친동생이지만 어머니를 맡길 수 없는 야고보인지, 마음 편하게 맡길 수 있는 요한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어떤 존재입니까?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 : 46, 마가복음 15:3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은 시편 22:1절을 인용하셨는데,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아람어로 예수님은 일상적인 언어로 아람어와 히브리어를 같이 사용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성경 전체에서 가장 신비로운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견디고 있었기 때문에 영원 전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성부의 사랑과 성부와의 교제에서 끊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편 22:1을 인용하시면서 아마도 승리의 외침으로 바뀌는 이 시편의 나머지 내용(시 22:21~31)도 염두에 두셨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믿음을 표현하며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왜 자신이 죽어 가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말할 수 없는 고뇌에서 비롯된 절규였습니다. 죄 없는 자가 정죄를 당하고 허물없는 자가 박해를 받으며 은혜 베푸는 자가 잔인하게 죽어가는 일이 역사상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홀로 지시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시는 순간 주님으로서는 매우 심각한 세 시간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주님은 세상에 대하여는 더 할 말씀이 없고 성경에 응하기 위한 말씀을 하실 뿐이었습니다. 이런 절규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


    4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 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About the ninth hour Jesus cried out in a loud voice, "Eloi, Eloi, lama sabachthani?"--which means,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주님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말씀하십니다.
    언뜻 보면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읽어 보십시오.
    입술로 되뇌어 보십시오.
    저도 한동안 이 말씀이 이해되지 않아 몇 번을 읊조려 보았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하고 나니,, 예수님의 음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 죽여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요?

    주님은 철저히 버림받았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겠다는 장담도 허공에 흩어져 버렸습니다.
    끝까지 주님을 지키겠다는 다짐도 아침이슬처럼 사그라졌습니다.
    자신들의 구차한 목숨을 위해 주님을 버린 것입니다.
    고독, 소외, 배신이 주님을 엄습했습니다.
    이 모든 모습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보고 계십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으며, 광대합니다.
    우리의 작은 마음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버렸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왜 나를 버리십니까?’
    ‘저를 버리실 만큼 죄인들이 가치가 있습니까?’
    그렇게 묻습니다.
    그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해 봅시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아들과 맞바꿀 만큼 제가 가치 있는 인간입니까?”

    이곳에서 마태는 아들을 버리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아버지의 역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버리고 죄인을 구하는 광인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신비이며, 아이러니입니다.
    아들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어야 한다며, 주님의 외침을 들을 때 우리는 영원한 침묵으로 일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커서, 내가 과연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야 합니다.

    1.예수님 날 위해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

    2.손과발 날 찢기셨네 왜 날 사랑하나?
    고난을 당하여 구원했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

    3.내 대신 고통을 당하셨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 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

    목요일 : 약지손가락(Ring finger) 기도, 속죄제의 삶

    약지는 손가락 중에서 힘이 가장 약한 손가락입니다.
    병든 분들, 여러 가지 일에 실패한 분들, 삶의 형편에 지쳐서 믿음이 연약해진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한 주간 살아오면서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일이 없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속죄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5. "내가 목마르다" ( 요한복음 19:28 )

    ​내가 목마르다 하심, 십자가 위에서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께서는 목이 타고 어지러우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목이 타도록 목이 마르셨기에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생명수를 먹게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2:1-2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입증하고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심은 곧 목마른 인생을 부르시는 뜻도 있습니다. 인생은 어디서 무슨 물을 마셔도 그 심한 갈증을 해소할 길 없으나 주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한 갈증을 해소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 : 1).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 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5언 내가 목마르다(요 19:28)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말씀입니다. 동일한 사건이지만, 마태복음에서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는 순간, 인간으로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만 생각하려 하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목마름은 당연한 것입니다. 채찍질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몸에서 피와 수분이 빠져나갔습니다. 주님의 목마름은 죽기보다 더한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고통을 당하셔야 합니까?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워하시기 위해 친히 육신을 입었고, 율법 아래에서 나셨습니다. 자기를 비하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주님의 피할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영지주의자들과 같은 이단들은 예수님은 인간과 같은 육신을 입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가현설이라는 주장을 통해 육신이 아닌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의 사랑의 하나님이 악한 육신을 입을 수 없다는 것들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이들의 주장은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먼저 참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대표하는 속죄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고통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의 고통은 가짜가 됩니다.

    정말 주님은 가짜 몸을 가지셨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실제로 목말랐습니다. 그 누구보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주님의 고통을 거짓으로 만들려는 악한 자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요한은 주님의 목마름을 강조하여 우리를 위하여 친히 고통당하셨다고 강조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며,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사 53:5) 주님의 고통은 우리의 고통이며, 주님의 아픔은 우리의 아픔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목마름을 묵상하면서 잊지 말아야한 진정한 목마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육신의 고통을 통해 우리의 고통을 대신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그 고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목마름은 그동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구속에 대한 목마름이었습니다. 주님의 목마름은 육신의 목마름을 넘어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죄인들이 주님 당신을 통해 구원되는 일이 일어나기를 갈망하고 기대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목마름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목마름입니다. 첫 사람들이 범죄 했을 때, 주님은 가죽옷으로 그들의 수치를 가리셨습니다. 또한 여인의 후손을 통해 뱀의 머리가 상하게 될 것을 예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목마름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영혼들이 구원 받기를 갈망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헤아릴 수 없는 목마름이셨습니다.


    6. "다 이루었다" ( 요한복음 19 : 30 )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고 율법을 십자가에 죽으시는 아가페 사랑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시고 인류를 죄와 사망과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해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가죽 채찍으로 서른 아홉 대의 매를 맞으셨습니다. 가죽 채찍 끝에는 다섯 갈래의 가지가 있고 그 가지마다 낚시와 같은 쇠고리가 달려 있어서 가죽 채찍이 살에 닿을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터져 엉켜 붙었습니다.

      또한, 가시관을 쓰신 머리와 대못에 박힌 양손과 양발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무지한 군병의 창에 옆구리를 찔리셔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의 옷은 군병들이 제비 뽑아서 나누어 가졌고, 벗기운 채로 주님은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계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죄도 없으시면서 가장 죄 많은 자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입니다. 그가 하실 일을 이제 다 이루신 것입니다.


    6언 다 이루었다(요 19:30)

    완전한 성공을 이룬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까요? 사람의 성공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살다 보면 실수하기도 하고,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죄를 짓기도 합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꾼 꿈을 완전히 이루기를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주님의 형편을 보십시오. 무엇을 이루었단 말입니까? 제자들은 배신하고 도망갔습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로마의 속국이며, 종노릇 합니다. 악은 여전히 강력한 힘과 권력을 가지고 세상을 지배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계십니다. 누가 봐도 실패한 인생이며, 어떻게 생각해도 제대로 성공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대체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갈 때 ‘영광을 얻을 때가 되었다’(요 12: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압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고난의 길이며, 죽음의 길입니다. 주님은 죽음을 향하여 하루하루 한 발자국 밟고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신 것, 그것은 대속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죽음은 저주 받은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으로 살리는 역설적 죽음입니다. 주님을 오래전 광야에서 들렸던 놋뱀을 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이 하늘에 닿아 하나님은 불뱀을 보냈습니다.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 속에 죽어갔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놋뱀을 만들어 높이 세 우라 하셨습니다. 놋뱀을 본 자마다 살아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놋뱀처럼 높이 들려졌습니다. 나무에 달려 모든 사람들이 보이는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 위에 달리셨습니다. 주님은 죄의 상징이자, 율법의 저주를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홀로 받으셨고, 죄인들이 받아야할 고통과 죽음을 친히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보는 자들은 살아날 것입니다.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의 성공은 사람들이 보기에 명백한 실패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은 언제나 생명을 멸함으로 받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관점으로 이해할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만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감추인 보화처럼 저주와 죽음 속에 자유와 생명이 숨겨져 있습니다. 주님은 실패로 향해 나아갔고, 죽음을 향해 전진했습니다. 모함을 피하지 않았고, 배신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의 광기를 그대로 받았습니다. 세상의 죄와 질병을 안고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든 것을 끝내셨습니다.


    요한복음 헬라어 성경말씀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성경 원어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대속해 주셨는데 특히 선택받은 백성의 죄를 구속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들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헬라어 성경 원문의 단어는 '테텔레스타이'입니다.
    이것은 아무 흠도 없는 것들을 말할 때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무 흠도 없고 죄도 없는 완전한 분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구속의 완성을 완전하게 이루셨습니다.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헬라어(5055, 텔레오) 끝내다 bring to an end, 끝나다 finish, 완성하다 complete, 수행하다 carry out, 성취하다 accomplish.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텔레오(Homer. 이래)는 헬라어 텔로스(5056)에서 유래했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텔레오는 ① 자신의 뜻이나 다른 자의 뜻을 '수행하다', 계획과 목적에 따라 '실행하다, 행하다',

    ② 말한 것을 '수행하다', 약속을 '이루다(성취하다)',

    ③ 가르치는 일을 '수행하다', 군사들의 명령을 '수행한다'를 의미한다. 입법자의 법령이나 하나님의 뜻, 기도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b) 텔레오는 '끝에 오다, 끝나다', 예를 들면 년 수에 대해 사용되었다.

    (c) 텔레오는 '의무를 이행하다'.

    (d) 텔레오는 종교 행위, 예를 들면 '실행하다'를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제사를 드리다', 제사장으로 '봉사하다'를 나타낸다. 다른 의미로는 마술을 '행하다'이다.

    2. 70인역본의 용법

    텔레오는 70인역본에서 약 30회 나오며, 8개의 히브리어 단어들 중 주로 칼라(끝나다, 끝내다, 성취하다)의 역어(7회)로 사용되었다(2:21; 3:18; 삼하 22:39 등). 이 동사는 수동태에서 종교적 술어로 '자신을 헌신하다'를 의미한다(예: 바알 예배에 대해, 25:3; 25:5; 105:28; 4:14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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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신약성경의 용법

    텔레오는 신약성경에서 2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바울 서신.

    고후 12:9에서 텔레오는 '완성에 이르다'를 의미한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실제적 능력인 그리스도의 능력은 약한데서 '완성에 이른다'. 이는 '참으로 효력 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5:16에서 성령의 반대되는 뜻을 텔레오, 즉 '실행하는 것'을 금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2:27에서 텔레오는 '목적이나 끝에 이른다'는 의미에서 '완수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율법을 완수하는 것):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딤후 4:7에서 자신의 행로를 완성하는 것을 나타낸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13:6에서 텔레오는 '세금을 바치다'는 뜻을 지닌다: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b) 공관복음들.

    ① 마태복음의 특징적인 점은 텔레오가 편집 구절들에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다"라는 마태의 공식적인 문구가 5개의 위대한 교훈적 강화들을 종결짓고 있다(7:28; 19:1; 26:1; 11:1; 13:53).

    10:23(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동네들의 끝에 이르기 전에 재림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다)과 12:50(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세례, 즉 자신의 고난[참조: 10:38]이 완성되기까지 큰 근심 중에 계신다)에서 텔레오는 '끝까지 견디다'는 의미를 지닌다.

    ③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텔레오가 수동태로 2회 사용되어 성경의 성취를(18:31; 22:37; 참조: 13:29) 나타내고 능동태로 1회 사용되어 율법의 이행을 나타낸다(2:39).

    (c) 요한의 기록들.

    19:30에서 텔레오는 예수께서 성취하여야 하는 아버지의 일들에 대하여 말하는 곳에서 사용된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그 일들이 완성되었다고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어졌다) 말씀하셨다.

    19:28에서 텔레오는 성경이 성취되는 것에 대해 사용된다: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참조: 22:18).

    (d) 요한계시록에서 텔레오는 '완료하다' 또는 (수동태로) '완료되다'라는 의미로 6회 사용된다. 11:7은 증거의 완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15:1은 하나님의 진노가 완성되는 세상의 7가지 마지막 재앙들을 알린다: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참조: 8절).

    20:3; 20:5; 20:7은 천년 왕국의 종말에 대해 3번 말하고 있다: "3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7 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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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717:17은 하나님의 비밀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됨을 다룬다: 10:7,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17: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전에 결정하신 바가 성취되는 것이다(참조: 18:31; 22:37).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RP Byzantine Majority Text 2005
    Ὅτε οὖν ἔλαβεν τὸ ὄξος ὁ Ἰησοῦς, εἴπεν, Tετέλεσται· καὶ κλίνας τὴν κεφαλήν, παρέδωκεν τὸ πνεῦμα.

    아래 테이어 사전을 보면 이 동사의 원형은 τελέω 텔레오 입니다.
    테텔레스타이완료분사 직설 중간수동태 3인칭 단수입니다.
    그래서 앞에 테 는 완료시제를 나타내는 접두어입니다.
    이미 완성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무언가가 이미 완성이 된 것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구속입니다.

    아래 사전과 같이 이 단어의 첫째 의미는 완성을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일을 끝마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작한 일을 완성한 것을 말합니다. 두번째 의미는 성취한 것을 의미합니다. 임무를 수행한 것을 의미합니다. 충족시킨 것을 의미합니다. 세번째 의미가 갚은 것을 의미합니다. 값을 치룬 것을 의미합니다.

    http://biblehub.com/text/john/19-30.htm

    Thayer's Greek Lexicon

    STRONGS NT 5055: τελέω

    τελέω, τέλω; 1 aorist ἐτελεσα (cf. Winer's Grammar, § 13, 3 c.); perfect τετέλεκα (2 Timothy 4:7); passive, present 3 person singular τελεῖται (2 Corinthians 12:9 L T Tr WH); perfect τετελεσμαι; 1 aorist ἐτελέσθην; 1 future τελεσθήσομαι; (τέλος); from Homer down;

    1. to bring to a close, to finish, to end: ἔτη, passive, passed, finished, Revelation 20:3, 5, 7 ((so from Homer and Hesiod down; Aristotle, h. a. 7, 1 at the beginning, p. 580{a}, 14 ἐν τοῖς ἔτεσι τος δίς ἑπτά τετελεσμενοις); τριῶν τελουμενων ἡμερῶν, Lucian, Alex. 38); τόν δρόμον (Homer, Iliad 23, 373, 768; Sophocles Electr. 726), 2 Timothy 4:7; τούς λόγους, Matthew 7:28 L T Tr WH; ; τάς παραβολάς, Matthew 13:53; (ἄχρι τελεσθῶσιν αἱ πληγαί, Revelation 15:8); a rare use is τέλειν τάς πόλεις, i. e. your flight or journey through the cities (R. V. ye shall not have gone through the cities, etc.), Matthew 10:23 (similar are ἀνύειν τούς τόπους, Polybius 5, 8, 1; τά ἕλη, 3, 79, 5; consummare Italiam, Flor. 1, (13) 18, 1; explere urbes, Tibull. 1, 4, 69; conficere aequor immensum, Vergil Georg. 2, 541; also xii., signorum orbem, Cicero, nat. deor. 2, 20, 52); with the participle of a verb (like ἄρχομαι, παύομαι, cf. Winers Grammar, § 45, 4 a.; Buttmann, § 144, 14), Matthew 11:1.

    2. to perform, execute, complete, fulfill (so that the thing done corresponds to what has been said, the order, command, etc.), i. e. α.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subject-matter, to carry out the contents of a command": τόν νόμον, Romans 2:27 (cf. Winer's Grammar, 134 (127)); James 2:8; τήν ἐπιθυμίαν (i. e. τό ἐπιθυμουμενον), Galatians 5:16. β. with reference also to the form, to do just as commanded, and generally involving a notion of time, to perform the last act which completes a process, to accomplish, fulfill: ἅπαντα (πάντα) τά κατά νόμον, Luke 2:39; τήν μαρτυρίαν, the duty of testifying, Revelation 11:7; τό μυστήριον, passive, Revelation 10:7 (cf. Winer's Grammar, 277 (260)); τό βάπτισμα, passive, Luke 12:50; πάντα, passive, John 19:28 (the distinction between τελέω and τελειόω may be seen in this verse); τούς λόγους (τά ῤήματα) τοῦ Θεοῦ, passive, Revelation 17:17; ἅπαντα (πάντα) τά γεγραμμένα, Acts 13:29; passive, Luke 18:31 (see γράφω, 2 c.); with ἐν ἐμοί (in me) added, in my experience, Luke 22:37; ἐν πληγαῖς, in the infliction of calamities, Revelation 15:1; τετέλεσται (A. V. it is finished) everything has been accomplished which by the appointment of the Father as revealed in the Scriptures I must do and bear, John 19:30. equivalent to τελειόω, 2, which see (made perfect): 2 Corinthians 12:9 L T Tr WH.

    3. to pay: τά δίδραχμα, Matthew 17:24; φόρους, Romans 13:6, (τόν φόρον, Plato, Alc. 1, p. 123 a.; τά τέλη, often in Attic writings). (Compare: ἀποτελέω, διατελέω, ἐκτελέω, ἐπιτελέω, συντελέω.)







    7.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누가복음 23:46 )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음, 생명, 영혼 모두를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우리도 생사화복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사언부터 칠언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모습을 말씀 하시고 계시는 것으로 인생을 살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과 같이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야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이전의 시기를 사는 인생이 버림받은 것과 같이 느껴지고, 갈증이 끝없이 느껴지는 시기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믿음 안에서 끝까지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을 순종적으로 산 사람은 후회 없는 삶을 살았기에 자신에게 맡겨진 삶을 모두 성취한 것이며, 이후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준비하시고, 정하신 때를 따라서 이루실 것을 믿는다고 선포하시고 계시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 생명, 영혼 모두를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생사화복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와 생명과 부활과 영생을 얻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뤄지고 하나님 나라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새 예루살렘과 새 하늘과 새 땅인 하나님 나라로 인도 하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열매를 찾으실 때 성령의 열매를 보여드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을 성령이 임하실 수 있도록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권능과 주님의 보혈로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하심으로 성결케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기도하시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사단과 이단과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구원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구원을 받아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인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란 말씀을 즐겨 사용하셨으니 산상설교 가운데서 17번, 유월절 다락방에서 45번(요 14, 16장), 요한복음 17장에서 6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에서 마지막 말씀을 아버지로 끝맺으셨습니다. 아버지란 명칭은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자신을 갖게 하는 이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들은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해도 아버지 손에 맡기고 부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체로부터 분리되려는 찰나에 있는 그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7언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가장 강하신 주님께서 가장 약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반항하지 않았고, 요동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를 구원할 물과 피를 흘리시고 운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마지막 운명하실 때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는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 손에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무력하고, 무능해 보이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 주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압니다. 병든 자를 치유하였고,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이셨으며, 말씀만으로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무덤을 향해 가던 관을 손을 얻자 과부의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돼지 속에 있던 군대 귀신을 쫓아냈고, 폭풍이 부는 물 위를 걸었고, 삼킬 듯이 공격하는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셨습니다. 주님의 행하신 기적은 셀 수도 없고, 다 기억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강하시고 위대하신 주님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무능은 사람의 어떤 능력보다 위대합니다. 주님의 약함은 인간의 강함보다 더 강력합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영혼을 절대 능력이신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보다 강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천사도, 죽음도, 높음도, 깊음도 그 어떤 것도 주님의 손에서 빼앗지 못합니다. 가장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가장 안전한 곳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함은 전 삶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으로의 성육신, 인간을 창조한 분이 인간을 섬기는 아들의 신분으로 살았습니다. 붙잡히기 하루 전에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발을 씻는 것은 노예들이 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선생으로서 이렇게 했으니 너희들도 그렇게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강함과 권력이 아닙니다. 도리어 종이 되고, 낮아지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약한 것들을 자랑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약할 때 주님의 은혜가 가장 강력하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강함과 지혜를 버리고 낮아지고 약하여짐으로 높음과 강함을 얻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높아지려합니다. 아담 이후 타락한 본성을 지닌 인간들은 자신이 신이 되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럴수록 고독해지고, 불행의 늪에 빠져 들어갑니다. 자신을 약점을 자랑하고, 자신의 허물에 긍지를 갖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려는 약함의 연습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훈련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순간, 하나님께 영혼을 의탁했습니다. 힘이 없어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방법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한 것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은 하나님께 의탁했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신뢰는 믿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고 영혼을 맡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은 위대한 일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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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서의 실천은 성도의 의무

    마태복음 6:14-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태복음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

    예수님은 타인을 용서하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시면서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필수적으로 타인에게 베풀어야할 용서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대교 안에서는 세 번이면 용서의 정신을 보여주기에 충분했고 따라서 베드로(일곱번)는 자신이 관용을 베풀었다고 생각합니다.

    ​참조 아모스 1: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다메섹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아모스 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그러나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횟수를 세지 말고(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야합니다.
    이는 창세기 4:23~24절에 나오는 라멕의 복수에 대한 자랑을 뒤집는 것입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십자가에서 완성됨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브리서 10:20-22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예수님은 대제사장인 동시에 '제물' 그 자체였지만 성령이 어떤 면에서 이 제물을 드리는데 있어서 그리스도를 도우시거나 능력을 부여하셨다고 밝힙니다.
    예수님은 '큰 제사장'이며 탁월한 제사장이십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피'에 힘입어 하나님이 계신 곳에 들어갈 수 있으므로 '담력'을 갖고 신실하게 행동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도들은 하나님께 '복종하고', '깨끗해지고',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야합니다.
    예수님의 속죄 사역은 성도들의 '속사람(영혼. 마음)'을 정결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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