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방기도 / 손가락 기도(패트리셔 존)



골방이란 히브리 단어는 리쉬카라고 합니다.

לִשְׁכָּה 스트롱번호 3957

1. 방.  2. 성전 내의 방.  3. 식당
발음 [ lishkâh ]

어원/  복수 לְשָׁכוֹת, 복수 연계형 לִשְׁכוֹת, ‘넘어지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7회 사용
  • 1. 명사, 여성 방, 객실.
    • a. 명사, 여성 성전 내의 방, 대상9:26, 느10:38이하, 겔40:17,45, 42:1이하.
    • b. 명사, 여성 식당, 삼상9:22.
    • c. 명사, 여성 왕궁의 문서보관소, 렘36:12.
  • 관련 성경 / 객실(삼상9:22), 방(대상9:26, 느13:5, 겔46:19), 골방(대상9:33, 스8:29, 겔41:10), 마을(겔45:5).

골방이란 헬라 단어는 타마이온이라고 합니다.

ταμεῖ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5009


1. 창고.  2. 숨겨진 골방
발음 [ tamĕiŏn ]
어원 / ταμίας ‘조제자’의 파생어의 중성 압축형
  • 1. 창고, 곳간, 눅12:24.
  • 2. 숨겨진 골방, 밀실, 마6:6, 24:26, 눅 12:3.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골방(마 6:6, 24:26, 눅 12:24).

  • 1

    (회사의) 회계원, 회계 담당자, (은행의) 출납계

  • 2

    (호텔, 상점 따위의) 계산원


ταμίας?

1군 변화 명사; 남성 자동번역 로마알파벳 전사: tamias 고전 발음: [따미아스] 신약 발음: [따미아스]

기본형: ταμίας ταμίου

형태분석: ταμι (어간) + ας (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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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 τέμνω

  1. 승무원, 집사
  1. steward, dispenser


타마이온이란 헬라 단어는 "자르다(템노)"라는 동사와 "담아두다, 담다(타미아스)" 라는 동사가 합성하여 만든 단어입니다.
타마이온이란 속뜻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담아두는 것을 말합니다.

τέμνω?

비축약 동사; 자동번역 로마알파벳 전사: temnō 고전 발음: [뗌노:] 신약 발음: [땜노]

기본형: τέμνω τεμέω ἔτεμον τέτμηκα

형태분석: τέμν (어간) + ω (인칭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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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 Root ΤΕΜ, cf. τέμω

  1. 자르다, 베다, 가르다
  2. 아프게 하다, 손상시키다, 손상을 주다
  3. 제물로 바치다, 잡다, 희생하다
  4. 덜다, 잔디를 깎다, 자르다
  5. 전진하다, 나아가다, 행군하다, 행진하다, 가다
  1. I cut, hew
  2. I maim, wound
  3. I butcher, sacrifice
  4. I cut down, reap
  5. I cut through, advance, drive through, plow thr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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δέη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1162

1. 간구.  2. 기도.  3. 눅 1:13
발음 [ dĕēsis ]
어원 / 1189에서 유래
  •  1. 간구, [신약에서는 언제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눅1:13, 2:37, 행1:14, 롬10:1, 고후1:11, 9:14, 엡6:18, 빌1:4,19, 4:6, 딤전2:1, 5:5, 딤후1:3, 히5:7, 약5:16, 벧전3:12.
  • 관련 성경 /  간구함(눅1:13, 고후1:11, 빌1:4), 기도함(눅2:37), 구하는 바(롬10:1, 엡6:18), 간구(엡6:18, 딤전2:1, 벧전3:12), 기도(행1:14)

* 1189.  δέομαι  스트롱번호 1189

1. 구하다.  2. 눅 8:38.  3. δεόμε- νοι ἧμῶν τὴν χάριν : 우리에게서 호의를 구하여
발음 [ dĕŏmai ]
  • I. 구하다[인격명사의 속격이 뒤따른다].
    • 1.
      [부정사와 함께] 눅8:38, 9:38, 행26:3.
    • 2.
      [사물의 대격과 함께] δεόμε- νοι ἧμῶν τὴν χάριν: 우리에게서 호의를 구하여, 고후8:4. [인격 명사의 속격이 없이] 고후10:2.
    • 3.
      [직접화법이 뒤따르는 경우] 제발~ 부탁한다.
      • a.
        δέομαί σου, ἐπίτρεψόν μοι: 제발 허락해다오, 눅8:28, 행8:34, 21:39, 갈4:12.
      • b.
        [λέγων을 덧붙여] 눅5:12.
      • c.
        [인격의 속격은 없지만 ὑπὲρ Χρισ- τοῦ을 덧붙여] 고후5:20.
    • 4.
      [ἵνα과 함께] 눅9:40. 그 외, 마9:38, 눅10:2, 21:36, 22:32, 행4:31, 8:24, 10:2, 롬1:10, 살전3:10.
  • 문법설명 / 디포넌트. 제1부정과거 ἐδεήθην, 명령 δεήθητι, 복수 δεήθητε, 미완료3인칭 단수 ἐδεῖτο, 1210의 중간태
  • 관련 성경 /  청하다(마9:38, 눅10:2), 구하다(눅5:12, 롬1:10, 고후10:2), 간청하다(고후5:20, 살전3:10), 기도하다(눅21:36, 행8:22, 10:2), 빌다(행4:31), 바라다(행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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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리셔 존
유명한 아동문학가인 패트리셔 존은 선교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전쟁 중에 간호사로 일했고, 모로코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 북서부 탕헤르에 학교가 설립되기 전까지 산간 오지 마을에서 의료 사역에 헌신했다.
또한 글로벌 케어의 회장으로 일했으며, 전세계에 걸쳐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기독교 저선 사업을 했다.
존은 25권이 넘는 책을 썼는데, 그 중 어린이를 위한 책이 18권이나 된다.
그 가운데 `탱글우드의 비밀`과 `눈 속의 보물`은 장편특선영화로 제작, BBC 방송에서 방영되기까지 했다.

존은 어린이들의 영적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한번은 유명한 어린이 복음 전도자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어린아이에게는 어린아이의 구세주가 필요하다."
그녀가 전세계의 어린이들과 어른들을 위한 작가가 된 것은, 이야기를 통해 심오한 교훈을 가르치려는 열망 때문이다.

다섯 손가락의 기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섯 손가락을 주셨습니다.

엄지(Thumb)

엄지는 가장 높은 사람을 상징할 때 엄지라고 합니다.
따라서 엄지를 보면서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 가정에서 높은 사람, 학교에서, 직장에서 이렇게 내 주위에서 높은 사람을 생각하며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엄지(Thumb)는 심장에 가장 가깝게 있기에 엄지손가락을 꼽으며 나의 마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지혜입니다. 나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고,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위해, 혈육들과 형제 우애를 위해, 그리고 소중한 친구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합시다.

검지(Pointing Finger, Index Finger)

검지는 무엇을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나를 가르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검지(Index or pointing finger)는 무엇을 가리키는데 사용하는 손가락입니다.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내게 진리와 지식을 가르쳐주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지혜입니다.
학교 선생님, 직장 상사, 선배, 전문가, 주치의, 주일학교 교사, 또는 성경공부 인도자들 위해 기도합시다.
나를 바르고 선한 길로 이끌어주며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 주시는 분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중지(Middle Finger)

가장 가운데 있는 손가락은 가장 긴 손가락입니다.
가장 중심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중지(Middle finger)는 일반적으로 가장 긴 손가락입니다.
가운데 손가락을 세면서 각 분야에서 책임을 맡은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지혜입니다.
직장의 사장이나 회장이 회사를 지혜롭게 경영하도록,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인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겸손한 종들이 되도록, 그리고 대통령과 위정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바른 정책과 국정 운영을 할 수 있도록, 이 세상의 모든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약지(Ring Finger)


사회적인 약자들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또는 내가 도와야 할 대상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약지(Ring finger)는 결혼반지를 끼는 손가락입니다.
약지를 볼 때마다 하나님 안에서 맺은 약속을 기억하며 기도하라는 지혜입니다.
어떤 분이 엄지는 아버지, 검지는 어머니, 중지는 나, 약지는 배우자, 그리고 소지는 자식을 의미하기에 넷째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에 동반자가 되어준 배우자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맺은 언약을 기억하며 기도합시다.
또한 약지는 손가락 중에 제일 힘이 약한 손가락이기도 합니다.
약지를 세면서 육체적 질병이나 경제적 문제로 고통 중에 있는 이웃들, 어떤 이유에서든지 곤경에 처한 형제와 자매들,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여 소망이 없이 불안과 초조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애기지, 소지(Pinky)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을 생각합시다.
북한의 주민들, 남미 지역의 굶주린 아이들, 피난민들............

소지(Pinky)인 새끼손가락은 제일 작습니다.
이 세상에서 작고 보잘것없이 보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지혜입니다.
그늘진 곳에서 소외된 사람들, 배고픔과 학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리하는 탈북자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심한 종교적인 핍박을 받는 성도들, 또는 인권 침해를 당하지만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제 3세계의 어린이들, 사회의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장애우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섯 손가락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동심으로 돌아가 주께서 주신 손가락을 세면서 기도하면 어떨까요?
우리의 연약한 손이 기도의 손으로 바뀔 때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축복의 손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예레미야 29:12-13)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기도의 비결을 알고 싶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기술이나 법칙이 아닙니다. 기도에는 어떤 공식이나 비법이 없습니다. 기도는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정직하고 겸손한 응답입니다. 말씀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시편은 기도문입니다. 수많은 기도문이 있지만 여기서 기도의 공식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말씀 앞에서의 다양한 응답들이 있을 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느끼는 정직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 반응들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찬양, 감사, 소원, 간절한 간구, 기쁨과 같은 긍정적 반응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평, 투정, 분노, 안타까움,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 반응도 있습니다. 시편은 기도는 기술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우리의 정직한 응답이며 반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직한 반응을 들으십니다.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가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목을 정해서 조목조목 하나님께 아뢸 수도 있습니다. 여러 기도의 제목들을 다섯 손가락을 따라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다섯 손가락 기도입니다.


손바닥입니다.
손바닥은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동시에 나에게 가까이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나와 가까이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분께 나아갑니다. 주기도문도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며 나아가도록 가르칩니다.


다섯 손가락입니다.
엄지는 찬양기도입니다. 자연광경이나 최고의 예술품을 보면 자연스레 경탄이 생겨나는 것처럼,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분께 찬양이 생겨납니다. 하나님께 먼저 찬양과 영광을 돌리면서 가장 먼저 하나님을 주목해서 바라보십시오. 인지는 감사기도입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손가락을 보십시오. 내 삶에서 감사할 것을 찾아내십니다. 감사할 것을 보게 하시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십시오. 중지는 회개기도입니다.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범죄한 것을 찾아 회개하면서 기도합니다. 약지는 간구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삶의 여러 간구를 드립니다. 무엇이든지 염려하지 않고 다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습니다. 소지는 중보기도입니다. 기도가 필요한 구역식구들, 환우들과 선교사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손등입니다.
손등은 우리를 초월하시는 왕이신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 하나님께 우리의 기도제목을 다 맡기고 편안함과 확신으로 일어섭니다. 주기도문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있으신 하나님께 기도제목을 다 맡기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는 손과 다섯 손가락으로 말씀을 읽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먹습니다. 밖의 말씀을 안의 말씀이 됩니다.
다시 손과 다섯 손가락으로 기도합니다. 찬양, 감사, 회개, 간구,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오른손은 말씀의 손이고, 왼손은 기도의 손입니다.
두 손을 붙잡습니다.
말씀의 오른손과 기도의 왼손이 만납니다.
그러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도로 말씀을 먹고, 말씀으로 기도를 드립시다. 





말세(末世)


말세(末世)


대한성서공회 검색란에서 "말세"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여덟 구절을 소개합니다.

신명기 31:29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한 길을 떠나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케 하므로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 하니라.

사도행전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고린도전서 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디모데후서 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말세(에스카타이스 헤메라이스)  εσχαταις ημεραις 

말(2078)
세(2250)

ἔσχατος, η, ον 스트롱번호 2078

1. 마지막.  2. 장소에 대하여.  3. 지위나 서열에 있어서 마지막
발음 [ ĕschatŏs ]
어원 / 최상급, 2192에서 유래한 듯
  • I. 마지막, 최후의.
    • 1.  장소에 대하여, 눅14:9이하, [명사적으로] τὸ ἔρχατον: 끝, 행1:8, 13:47.
    • 2.  지위나 서열에 있어서 마지막, 맨 끝, 제일 보잘것없는, 마19:30, 20:16, 막9:35, 10:31, 눅13:30, 사도들에 대하여, 고전4:9.
    • 3.  [시간에 대하여] 제일 늦은, ~의 끝.
      • a.  [앞선 것과의 관계를 나타낼 때] 마20:12,14, 막12:6, 요8:9, τὰ ἔσχατα: 마지막 일, 마12:45, 눅11:26, 벧후2:20.
      • b.  [길 뒤에 아무 것도 뒤따라 올 것이 없는 정황을 나타낼 때] 마5:26, 눅 12:59등, ὁ πρῶτος καὶ ὁ ἔ.: 처음과 마지막, 계1:17, 2:8, 22:13, ἡ ἐ. ἡμέρα: 마지막 날, 요6:39, 11:24, 12:48등.
  • 관련 성경 / 가장 멀리(까지)의, 마지막의, 최후의, 가장 낮은, 가장 어려운 곤경[입장, 처지] 의.


ἡμέρα, ας, ἡ 스트롱번호 2250

1. 날.  2. 마 4:2.  3. ἡμέρα γίνε- ται: 날이 밝아온다
발음 [ hēmĕra ]
  •  I. 날.
  •  II. [해가 떠서 질 때까지의 자연적인] 날.
    •  1. [문자적으로] 마4:2.
      •  a. ἡμέρα γίνε- ται: 날이 밝아온다, 눅4:42, 6:13, 22:66, 행12:18, 16:35, 27:29,33.
      •  b. ἡμέρας μέσης: 대낮에, 정오에, 행26:13.
      •  c. ἡμέρας καὶ νυκτός: 낮과 밤, 막5:5, 눅18:7, 행9:24, 살전2:9, 3:10, 살후3:8.
      •  d. τάς ἡμέρας: 매일, 눅21:37.
      •  e. πᾶσαν ἡμέραν: 날마다, 행5:42.
      •  f. [개별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대격] συμφωνεῖν ἐκ δηναρίου τὴν ἡμέρα: 하루에 대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다, 마20:2.
    •  2. [상징적으로] 하룻길, 눅2:44, υἱοὶφωτὸς καὶ υἱοὶ ἡμὲ- ρας: 빛과 낮의 아들들, 살전5:5.
  •  III. [밤까지를 포함한] 하루, 마6:34, 15: 32, 막6:21, 눅13:14, [시간의 반대어] 마25:13, τεσσεράκοντα ἡμερῶν:40일 동안, 행1:3, μιᾷ ἡμέρᾳ : 하루에, 고전10:8, ὅλην τ. ἡμέραν; 하루 온종일, 롬10:21. [주] 전치사와 함께 쓰일 경우:
    •  1. [ἀπό와 함께] 마22:46, 요11:53, 행20:18.
    •  2. [διὰ와 함께] 막2:1, 14:58, 행1:3.
    •  3. [ἐν과 함께] 눅5:17, 8:22, 요5:9등.
    •  4. [ἐπί와 함께] 행13:31, 히11:30등.
    •  5. [κατὰ와 함께] 마26:55, 눅11:3, 히3:13등.
    •  6. [πρό와 함께] 요12:1등.
  •  IV. [매우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지정된] 날.
    •  1. τακτῇ ἡμέρᾳ, 행12:21, ἡ- μέραν τά ξασθαι, 행28:23, στῆσαι, 행17:31등.
    •  2. 심판의 날.
      •  a. ἀνθρωπί- νη ἡμ.: 인간의 법정이 지정한 날, 고전4:3.
      •  b.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의 날, 눅17:30, 벧후3:12, 계16:14등, 예수가 심판주로 나타남, 고전5:5, 살전5: 2, 살후2:2, 벧후3:10.
  •  V. [긴 시간을 가리킬 때] 시간, 시대.
    •  1. [단수로] ἐν τ. ἡμέρᾳ τ. πονηρᾷ: 악한 날에, 엡6:13, ἐν ἡμ. σωτηρίας: 구원의 때에, 고후6:2, 이집트로부터 구출되던 때, 히8:9.
    •  2. [주로 복수로 나타난다] ἐν ἡμέραις Ἡρῴδου: 헤롯의 통치시대에, 마2:1, 눅1:5, Νῶε: 노아의 때, 눅17:26, 벧전3:20, πάσας τὰς ἡμ έρας: 언제나, 마28:20, ἐν τ. ἡμέραις ἐκεί- ναις: 그때에, 마3:1, 24:29,38, 막1:9, 눅2:1, 4:2, 5:35, πρὸς ὀλ ίγας ἡμ.: 잠깐 동안, 히12:10, [특별히 생애를 나타냄] πάσαις τ. ἡμέραις ἡμῶν: 우리의 일생동안에, 눅1:75, μήτε ἀρ- χὴν ἡμερῶν μήτε ζωῆς τέλος ἔχων: 생애의 시작도 끝도 없는, 히7:3.
  • 문법설명 / ‘앉다’의 파생어의 여성형
  • 관련 성경 / 때(마2:1, 막1:9, 눅23:7), 날(마7:22, 막2: 20, 눅4:2), 하루(눅2:44, 8:22), 시대(눅4:25), 낮(요11:9, 살전5:5), 나이(눅1:7), 세(눅2:37), 오래(행15:7), 날짜(행28:23), 주(살후3:8), 무렵(막8:1).




󰃨 말세에 - 구약에서 '말세'는 메시야가 오시기 바로 직전의 때를 의미한다(창 49:1;민 24:14;사 2:2;렘 23:20;겔 38:16;단 2:28). 그러나 신약에서(행 2:17;약 5:3) 이 말이 갖는 의미에 대하여 학자들의 견해는 두가지로 나뉜다. (1)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의 시기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장래에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Scott). (2)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후의 시대, 즉 메시야의 도래(到來)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진 시대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그시대가 종료될 때까지를 의미한다(Lenski). 두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히 9:16;벧전 1:20).

󰃨 고통하는 때 - '고통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레포이(*)는 '위협하는'의 뜻으로서 이곳 외에 마 8:28에서만 나온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가다라 지방으로 가실 때 만난 귀신 들린 자 두 명의 사나운 모습을 표현할때 본 단어를 사용하였다.


야고보서 5: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베드로전서 1: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베드로전서 1: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베드로후서 3:3 /  자기 정욕을 좇아 행하는 시대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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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末世, end-time)는 세계 대부분의 종교 및 신화에 등장하는 종말론(終末論)이다.

기독교에서 "마지막 날"은 구원자이자 메시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우선되는 환난 시대를 언급하기도 한다. 이슬람에서는 부활의 날(Yawm al-Qiyāmah), 심판의 날(Yawm ad-Din)이 세상의 마지막 이전에 선행된다. 유다교에서 "마지막 날"이라는 용어는 타나크민수기 24장 4절에서 메시아 시대에 대한 언급과 메시아가 도래할 것이라는 유다인들의 믿음을 상징한다.[1] 이후 요엘이나 스바니야 등도 '야훼의 날, 또는 주님의 날(가톨릭) 등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심판의 날이 찾아올 것을 경고하였다. 다른 다양한 종교도 환생과 구속에 관한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출처 필요]

마태복음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말세에는 넘치는 성욕으로 말미암아 동성애를 한다고 한다. 동성애는 안된다.

그러므로 다니엘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 읽는 이는 알아들으라. ─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라. 옥상에 있는 이는 물건을 꺼내러 집 안으로 내려가지 말고, 들에 있는 이는 겉옷을 가지러 가려고 뒤로 돌아서지 마라.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너희가 달아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그때에 큰 환난이 닥칠 터인데, 그러한 환난은 세상 시초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 그 날수를 줄여 주지 않으시면 어떠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그 날수를 줄여 주실 것이다.

— 마태오 복음서(마태복음) 24장 15-22절

있어서는 안 될 곳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서 있는 것을 보거든 ─ 읽는 이는 알아들으라. ─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라. 옥상에 있는 이는 내려가지도 말고 무엇을 꺼내러 집 안으로 들어가지도 마라. 들에 있는 이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아서지 마라.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그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그 무렵에 환난이 닥칠 터인데, 그러한 환난은 하느님께서 이룩하신 창조 이래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그 날수를 줄여 주지 않으셨으면, 어떠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몸소 선택하신 이들을 위하여 그 날수를 줄여 주셨다.

— 마르코 복음서(마가복음) 13장 14-20절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루카 복음서(누가복음) 21장 20-33절


성경에서 말하는 말세

지구의 멸망, 말세, 지구의 마지막 날 이런 말들은 참 우리를 두렵게 만듭니다.
수많은 예언가들이 말세를 주장하기도 하니 언젠가는 마지막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성경에 나오는 말세에 대해 알아보고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말세를 맞이해야 할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기독교의 말세관 

(벧후 3:8-13, 개정)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계 6:12-14, 개정)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마 24:29-30, 개정)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성경에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 즉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해가 검어지고 달이 피같이 되고 별들이 떨어지고 불로 세상을 심판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런 근거로 말세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2. 과학적 입장의 말세관

과학자들은 전쟁으로 인한 핵폭발, 인구증가, 식량위기, 자원고갈, 환경파괴등으로 지구가 멸망할 것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과연 멸망으로 끝이 날까요?

성경을 통해 본 말세의 의미

성경을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전 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전 3:15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이 두 구절을 통해 볼 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역사는 돌고 돈다." 라는 얘기가 합당한 듯 합니다.
구약은 오래된 약속입니다.
내가 메시야를 땅에 보내 주겠다는 혹은 하나님이 심판하러 오신다는 약속의 말씀이 구약의 핵심입니다.
신약은 구약의 약속대로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의 예언을 다 이루고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리라 말씀하십니다. 
다시 오실 때 양과 염소를 가르듯 선과 악을 쪼개고 구원 받을 사람을 휴거시키고 세상은 심판하신다는 내용인 것 같아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구약의 약속 -> 예수님이 오심으로 약속의 성취
신약의 약속 ->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약속의 성취

역사는 돌고 돈다는 관점에서 볼 때 만약 구약의 약속과 신약의 약속이 같다면 구약의 성취와 신약의 성취도 같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오늘 살펴볼 말세에 관한 예언도 만약 구약에 말세에 관한 구절이 있고 신약에도 말세에 관한 구절이 비슷하게 있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신 말세에 관한 성취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도 동일한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럼 구약 성경에 말세에 관한 말씀이 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1.구약예언

(겔 7:3, 개정) 『이제는 네게 끝이 이르렀나니 내가 내 진노를 네게 나타내어 네 행위를 심판하고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보응하리라』


(겔 7:6-7, 개정) 『[6] 끝이 왔도다, 끝이 왔도다 끝이 너에게 왔도다 볼지어다 그것이 왔도다 
[7] 이 땅 주민아 정한 재앙이 네게 임하도다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웠으니 요란한 날이요 산에서 즐거이 부르는 날이 아니로다』


(창 6:13, 개정)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겔 38:16, 개정) 『구름이 땅을 덮음 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오리라 곡아 끝 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눈 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이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라』

(단 12:4, 개정)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단 12:13, 개정)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다니엘서, 에스겔서에 보면 끝이 이르렀다, 끝이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끝 즉, 말세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노아 때도 하나님은 끝날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셨고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아직도 우리 인간들이 지구에 살고 있는 것을 볼 때 말세는 완전한 지구의 멸망이 아니라 다른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신약성취

예수님이 오신 때가 말세였습니다.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과연 세상을 끝내버렸는가 성경을 통해서 알아볼까요?  
말세는 현세계의 마지막이 아니라 좀더 나은 세계로의 전환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구약이라는 시대의 말세를 보내고 신약이라는 새로운 이상세계로의 전환을 시켰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말세는 무섭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새롭게 변화되는 알고 보면 좋은 것입니다.

(히 1:2, 개정)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예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 즉, 말세에 우리에게 말씀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 9:26, 개정)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님이 세상 끝, 말세에 나타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전 1:20, 개정)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베드로전서에는 아예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예수님이 나타나신 바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일 2:18, 개정)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말세 때 적그리스도, 이단이 많이 나타난다고 하고 있고 예수님 당세 때 수많은 이단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계 1:17, 개정)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예수님은 처음이고 마지막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이 곧 신약의 시작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은 바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나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서기 2024년도 알고 보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카운트를 하고 있는 달력입니다.

(고후 5:17, 개정)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즉, 그리스도의 사람, 온전한 신앙인이 된다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육신이 바뀐 것이 아니라 그 마음, 정신, 생각, 영혼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새롭게 변화된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역사를 이해하는 방법

역사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크게 두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직선적 사고 방식(천동설적 입장)      

시작과 끝이 일직선으로 되어 있다는 관점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함으로 시작되었고 심판함으로 끝이 난다는 입장입니다.


*순환론적 사고방식(지동설적 입장)

봄이 끝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끝나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오면 겨울이 오고 또 겨울이 끝나면 다시 봄이 오는 것처럼 세상이 순환된다는 입장입니다.
        

유대교의 말세관

유대교는 문자그대로 이와 같은 천재지변적인 종말이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유대교는 아직도 초림주를 기다리고 있고 기독교는 신약때 이루어 지지 않았으니까 구약의 말세에 대한 예언은 모두 재림 때를 예언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재림때는 반드시 천재지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죠.

유대인은 그들의 고정관념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 들이지 못했습니다. 
맹목적인 이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직선적인 말세관에서 벗어 나야 합니다.

             봄 말세→여름시작↘            가을말세→겨울시작↘ 
     봄 시작↗              여름말세→가을시작↗             겨울말세

             국민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  ->  대학교 

말세의 진정한 의미

즉, 말세는 
① 구시대의 끝이자 신시대의 시작입니다.
② 말세는 순환적이며 보다 새로운 차원으로의 전환 되는 것입니다.
③ 말세는 죽음이 아니라 더 나은 세계로의 나아가는 변화입니다.
④ 말세는 실제로 하늘과 땅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변화됨으로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줍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한 때 삐삐라는 통신기기가 유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핸드폰이 발명이 되고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면서 삐삐는 말세를 맞이하게 됩니다.
지금은 2G로 대변되면 핸드폰도 말세를 맞이하고 스마트폰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스마트폰도 점점 AI폰으로 진화가 되고 있는데 언젠가 스마트폰도 말세를 맞이하고 AI폰의 시대를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봐도 성경을 봐도 근본적인 말세는 우리 인생들이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세상의 물질세계는 유한하니 언젠가는 지구가 사라질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세의 근본은 새로운 차원으로 거듭나는 것이 말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각자의 차원에서 말세를 맞이하시고 새로운 차원으로 거듭나는 귀한 날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말세란 무엇인가?

말세는 성경에서 마지막 시대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마지막 때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초림 이후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을 포함하며, 최종적인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시기를 포함한다. 성경은 말세에 대해 경고하면서도, 성도들이 가져야 할 믿음과 소망을 강조한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말세의 특징과 신앙인의 태도에 대해 살펴보자.


성경에서의 말세

성경에서는 말세를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첫째, 예수님의 초림 이후부터 재림까지의 시대이다. 히브리서 1장 2절에서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이미 말세 속에 살고 있다.

둘째,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지는 최종적인 종말의 시기이다. 디모데후서 3장 1절에서는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마태복음 24장 3절에서는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어떤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묻고 있다. 이처럼 성경은 마지막 때에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말세의 특징

성경에서는 말세의 주요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도덕적, 영적 타락이 심해진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서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라고 경고한다.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신과 세상을 더 사랑하며, 죄악이 만연한 시대가 될 것이다.

둘째, 거짓 교사와 미혹이 증가한다. 마태복음 24장 24절에서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적을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고 말한다. 말세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등장하여 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다.

셋째, 재난과 전쟁이 잦아진다. 마태복음 24장 6~7절에서는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겠으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말세에는 전쟁, 기근, 지진과 같은 재난이 증가할 것이다.

넷째, 복음이 세계적으로 전파된다. 마태복음 24장 14절에서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한다. 말세에는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다.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준비와 믿음의 삶이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명확하게 가르친다.

첫째, 깨어 기도해야 한다. 누가복음 21장 36절에서는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기록되어 있다.

둘째, 말씀에 굳게 서야 한다. 요한계시록 3장 10절에서는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고 말씀한다.

셋째,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명령한다.

넷째, 세속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말씀한다.


말세와 재림의 소망

말세는 단순히 두려운 시간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소망의 때이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서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서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도들은 그날에 영광스럽게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할 것이다.


결론

말세는 죄악과 심판의 때이지만, 동시에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는 시간이다. 성도들은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깨어 기도하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20)




한 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여러 날들’ 또는 ‘특정한 기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말세는 어떤 기간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 요엘서를 인용한 사도 베드로의 증언에 따르면, 오순절 성령강림 때 말세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로부터 시간이 좀 지나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기록할 때도,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말세’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순절 성령강림 때처럼 하나님의 성령이 디모데가 목회하던 에베소 교회에도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증언대로,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시는 때가 곧 말세라고 했으니,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셨으므로 그때에도 여전히 말세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께서 그때와 동일한 방식으로 거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도 말세에 살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말세는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전까지 처하게 되는 ‘모든 현재’를 뜻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 보면, 이 본문은 2천 년 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말세에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2절)라고 말씀합니다. 말세의 뜻을 잘 몰라도 사도가 증언하는 내용만 봐도,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당시처럼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합니다.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지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얼짱’과 ‘몸짱’이 되기 위해 자기 얼굴과 몸을 뜯어 고치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 완전히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돈을 사랑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돈이라면 완전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험금을 노리고 자기 가족을 죽이기도 하고, ‘목사’를 사칭하는 사기꾼들이 헌금을 횡령하는 어처구니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랑하고 교만하며 남을 비방하는 일에 능숙합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물론,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한 삶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사람들이 절제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스마트 기기를 사용하면서 즉흥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소셜 미디어(Social Media) 문화’가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절제하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점점 사나워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육신적 쾌락에 빠져 급기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망각해 버립니다. 

사랑하는 청년(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바울 당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경고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똑같이 “말세에” 살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말세의 특징을 보면서 오늘 한국 교회와 우리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게다가 더욱 충격적인 사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은 일차적으로 불신자들에 대한 묘사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거짓 교사 또는 거짓 신자들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는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라는 5절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따라서 “경건의 모양” 따위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경고는 일차적으로 교회 공동체를 겨냥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로 치면, 한국 교회와 그 밖의 모든 기독 단체 및 캠퍼스 기독 동아리를 향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 교회도 결코 예외일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참 신자인 척하면서 그냥 ‘가라지’로 앉아 있는 교인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단 한 번도 예수님과 만남의 경험이 없이 부모 또는 친구의 권유로 마지못해 교회당에 출입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리스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반면에 과거에 거듭난 체험은 있지만, 세상 가운데 불신자 친구들의 틈바구니에 살면서,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거의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칭의(의롭다 하심)의 은혜에서 결코 떨어져 나가지는 않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는 불신자와 거의 다를 바가 없이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굴복시키려는 선한 의지를 거의 소멸한 채, 언제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보다 육신적 쾌락에 매몰되어 온갖 욕심에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제가 볼 때 오늘 본문에 언급되는 사람들은 방금 말씀드린, 교회 안의 두 부류에 모두 해당됩니다. 다시 말해, 애초부터 거듭나지도 않았으면서 어릴 적부터 부모나 친구의 권유로 마지못해 종교 생활하는 자들과, 그리고 예전에 분명하게 거듭난 체험은 있지만 현재 세상의 영에 미혹되어 일시적으로 거의 불신자처럼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는 당시 디모데가 목회하던 에베소 교회 안의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이 앞서 말한 그 두 부류 모두에 해당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없으면서 참 신자인 척하는 부류, 또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이단자들에게 미혹되어 일시적으로 진리를 대적하게 된 부류를 가리킵니다. 

아무튼 이 두 부류의 특징은 우선 “경건의 모양”(μόρφωσιν εὐσεβείας)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애초부터 거듭난 체험이 없는 사람도 오랜 기간 동안 교회의 예배행위나 여러 의식에 노출되다 보면, 참 신자와 거의 동일한 모습으로 “경건의 모양”을 무의식중에 습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경건의 모양을 보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닥쳐오면, 항상 자신의 욕망을 위해 무언가를 선택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마저도 자신의 양심을 평안하게 해 주는 수단 정도로 생각해 버립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주님의 십자가가 자기 위안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역시 경건의 모양은 갖추고 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경건의 모양이 어떤 것인지 알며, 한때 경건의 능력을 가지고자 노력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거짓 교사들, 즉 이단자들의 거짓 가르침에 미혹되어 일시적으로, (물론 그 기간이 언제까지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불신자의 영적 상태와 거의 다를 바가 없이 살아갑니다. 자기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채, 자신의 욕망에 따라 무언가를 선택합니다. 말씀을 향한 선한 의지가 조금 살아 있을 때에는 양심의 가책이라도 받는데, 그 선한 의지가 거의 소멸된 상태가 되면, 신앙적 양심의 가책도 거의 받지 않습니다. 참으로 자기 양심에 화인 맞은 것처럼 살아갑니다. 

아무튼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6절에 나오듯이,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그런 부류에 속한 자들입니다. 여기에서 “어리석은 여자”(γυναικάρια)란, 거짓 교사들에게 ‘잘 속아 넘어가는 여인들’(gullible women, NKJV)을 가리킵니다(Thomas D. Lea, NAC: 1,2 Timothy, Titus).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남편이 밖에 일하러 나간 사이에, 거짓 교사들이 집요하게 집으로 침투해서 여인들을 교묘하게 미혹하는 행태가 있었습니다(존 스토트, 『BST 시리즈: 디모데후서 강해』). 그들의 이런 은밀한 수법은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를 미혹했던 뱀의 수법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사탄에 사로잡힌 멸망의 자식들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여인들은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긴 하지만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6-7절). 그렇기 때문에 이런 어리석은 여자들도 (일시적이면 좋겠지만) 같은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8절에 나오는 얀네와 얌브레 같은 사람들도 동일한 부류에 속합니다. 모세를 대적한 그들의 이름이 구약성경에 나오진 않지만, 바울은 유대인의 전통 문서들을 통해 그들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John Calvin, William Hendricksen).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대적하고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며, 또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입니다(8절). 오늘날로 치면, ‘ㅅㅊㅈ’와 같은 사악한 이단들을 가리킵니다.

놀랍게도(?) 본문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나타낼 때는 특별한 외적 형식을 가지게 됩니다. 외적 형식과 참된 경건의 관계는 몸과 영혼의 관계와 비슷합니다(Charles H. Spurgeon). 다시 말해, 참된 경건은 외적인 형식이 없이 표현될 수 없으며, 외적인 형식만 있는 참된 경건도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청년(성도) 여러분, 우리는 ‘교회 개혁’이라는 명분 아래, 형식을 무조건 좋지 않은 것이라 하여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형식적’이라는 말 자체를 굉장히 부정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우리의 신앙에는 ‘형식’이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신앙의 형식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3장과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화 있을진저”라는 강한 어조로 질책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11:42). 

여기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이것도 행하고”, 즉 경건을 표현하는 외적 형식인 “십일조”도 행하고, 또한 “저것도”, 즉 그 외적 형식에 담긴 경건의 의미인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경건을 담아내는 외적 형식(경건의 모양)이 필요 없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본질’이라는 명분 아래 ‘형식’ 자체를 거부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교회 개혁’이라고 생각하면 완전히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물론 성경에도 없는 온갖 외적 형식으로 경건의 능력과 전혀 상관없는 것들은 당연히 없애 버려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경건에 유익이 되는 외적 형식들을 모두 없애 버리면 참으로 곤란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한번 적용해 봅시다. 사랑하는 청년(성도)들이여, 여러분은 과연 경건의 능력을 드러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 다시 한 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내 삶에 과연 “경건의 모양”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거짓 교사들과 거짓 신자들은 경건의 모양이라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여러 규례들을 지켰고, 온갖 율법 조항들을 만들어 내어 금욕주의적 삶을 살았으며, 외적으로 볼 때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종교적 행위들은 철저히 자신들의 의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도 그들이 갖추었던 외적 형식, 즉 “경건의 모양”이라도 갖추고 있는지부터 한번 살펴봐야 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5절)라는 사도의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경건의 모양은 필요 없고 경건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경건의 능력을 담아내는 최소한의 경건의 모양이 당연히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당시 사도가 보기에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누구나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 속에 몰래 침투한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도 참 성도들과 동일하게(?)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음을 그가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는 경건의 모양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생활’에 열중하는 모습입니다. 매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고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헌금생활도 열심히 하는데, 이것들은 그들에게 신앙이 아니라 종교일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런 행위들을 다른 사람에게 ‘신실하게’ 보여 줌으로써 존경과 좋은 평판을 얻으려는 데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

바울 당시에도 그랬겠지만, 오늘날에도 몰래 침투한 거짓 교사들은 보통 더 뜨겁게 교회생활을 합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 저희 학교에 ‘대학교회’가 세워졌는데, 이곳을 섬기려고 찾아온 두 명의 청년이 처음부터 굉장히 뜨겁게 교회를 섬겼습니다. 여느 청년들과는 달리 찬양 팀 멤버로서 참 헌신적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몰래 침투한 ㅅㅊㅈ 추수꾼이었습니다. 이들은 본문에서 사도의 증언대로, 경건의 모양을 뚜렷하게 갖추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참 신자들과 비교해 봐도 전혀 차이가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관심사는 경건의 모양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행위에만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엇비슷한 모양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의 관심은 경건의 모양을 드러내게 하는, 기저(基底)에 깔린 경건의 능력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계신 청년(성도)들에게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과연 경건의 능력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경건의 능력이라고 해서 뭔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칼빈의 말대로, 경건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이 하나로 결합된 것입니다. 따라서 경건의 능력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일상생활 가운데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도 겉보기에는 참 신자들과 동일한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증언대로, 사람은 외모를 보기 때문에(삼상16:7) 그런 자들의 중심을 정확히 꿰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자들에게 속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추수 때까지 많은 경우에 그런 가라지들이 교회당에 나오도록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마13:29).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결정적인 한 가지 증상이 나타납니다. 일단 참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 없는 증상이 나타납니다. 이런 성도들은 주일 성수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마치 어린아이가 밥을 굶은 것처럼 영적 결핍에 허덕이게 됩니다. 그런데 경건의 능력이 없는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은 말씀을 듣지 않고 기도를 하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바른 말씀과 바른 교리와 참된 경건생활을 누리지 못하는데도 이들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증상을 보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안에서 결코 거듭난 적이 없기 때문에, 영적 양식을 공급 받지 못해도 자신이 굶어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항상 배우긴 하지만 자기 욕심대로 생활할 뿐이며,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처음부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이들은 우리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고 책망 받을 사악한 자들입니다.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계신 청년(성도)들이여, 여러분이 소유한 경건의 능력이 일상생활 가운데 더욱 드러나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날마다 살피며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또 자기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거짓 교사들처럼 경건의 능력을 부인한 채, 자기 욕심에 사로잡힌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일이면 또 다른 한 주가 세상 가운데 시작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경건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지, 이번 한 주간에 또다시 판가름 나게 될 것입니다. 매주 교회당에 있을 때는 경건의 모양으로 서로를 대하지만, 세상 가운데 여러분이 살아갈 때는 경건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대할 것입니다. 본문 8-9절에 나오듯이, 믿음에 관하여 버림받은 자처럼 살다가 자신의 어리석음이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폭로되지 않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겸손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적인 경건의 모양과 함께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경건의 능력을 아울러 겸비(兼備)하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잃어버린 시간 / 난제해설 - 여호수아서 10:12-14 태양 정지 명령의 과학성


NASA는 "잃어버린 하루"를 찾았는가?

NASA는 "잃어버린 하루"를 찾았는가?
Has NASA Discovered a "Missing Day"?

Bert Thomson
First published in : Reason & Revelation
(A Monthly Journal on Christian Evidence)
May 1991, 11(5):17-19
http://www.answersingenesis.org/docs/1117.asp
번역 : IT 사역위원회

Q. 태양이 "멈추었다" 라는 여호수아 이야기에 대한 근거가 나돌고 있다. 지구와 태양의 궤도를 컴퓨터를 사용하여 계산하던 NASA의 과학자들이 인류 역사에서 "잃어버린 하루"를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내가 이것을 추적해본 결과, NASA의 과학자들이 잃어버린 하루를 찾는데 사용한 컴퓨터가 성경의 기록이 옳았음을 증명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과연 그것은 정말일까?

A. 위의 내용과 같은 이야기들이 오가면 심심치않게 (통상 교회의 주보나 종교 출판물에) 실제 사건인양 나돌곤 한다. 이 정보의 최초 발언자는 신실한 의도에서 출발하였다는 것과, 불신자의 화살과 돌팔매로부터 성경을 지키고자 하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렇지만, 과학자들이 여호수아의 "긴 하루"를 찾아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 이야기를 조사해본 결과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밝혀졌다.

어쨌거나 엇비슷한 이야기들이 나돌고 있는지도 이럭저럭 반세기가 되었다. 해리 림머 (Harry Rimmer)는 1936년에 처음 출판된 자신의 저서 '과학과 성경의 조화 (Harmoney of Science and Scripture)' 의 마지막 장(章) 전부를 "현대과학과 여호수아의 긴 하루"에 관한 내용을 위하여 할애하였다. 림머는 이 장에서 하나님이 태양의 운행을 멈추게 하였다는 (여호수아 10장) 이야기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기적적인 그 하루에 대해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즉, "그 날의 기록은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라고 과학은 증언할 것이다. 시간이 엄연히 존속하는 이상, 그 날의 기록은 남는다.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증언한 저명한 과학자가 있다. 나는 이름이 알려진 두 사람의 증언을 여기서 인용하고자 한다." (1936, p280).

그리고 림마 박사는 영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볼 경(Sir Edwin Ball)과 예일 대학교의 토튼(C.A. Totten) 교수를 소개했다. 그는 "태양계의 시간 체계에서 24 시간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하였다는 볼 경의 말을 믿는다고 했다. 림마는 이어서 이렇게 묻는다.

"그 24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 이 불가사의한 시간이 사라진 원인은 무엇일까? 또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을까?" (p 280). 바로 다음 단락에서 그는,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확실히 있다. 현직에 있는 과학자가 증언한 내용이다. 예일 대학교의 토튼 교수는 1890에 출판한 책에서 이 사건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p 281)라는 말을 인용한 다음, 림마는 토튼의 책의 "요약"이라고 하며 제시한 글에서, 토튼이 "사라진" 날을 찾아낸 정확한 경로라는 것을 제시하였다. 림마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여호수아가 전투를 벌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정확한 달과 날이라고 하면서, 그 날을 7월 22일 화요일이라고 추정하였다. (p 266)!

여호수아의 잃어버린 하루를 찾아냈다는 이야기는 과연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우선 이 해묵은 이야기부터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그러면 새로운 이야기가 옛날의 이야기를 분명히 각색해 내놓은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림마 박사는 볼 경과 토튼 교수의 책을 인용한다는 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따옴표로 표시한 인용 구절은 하나도 없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림마 박사는 1890년에 토튼 교수가 저술하였다는 책의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 림마 박사는 자기 책의 한 장(章) 전체를 할애할 정도로 중요하게 다룬 주제임을 고려해보면, 이 것은 어딘가 좀 이상하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셋째로, 림마 박사는 볼 경과 토튼 교수의 책이라고 하면서, 그 책들에 관한 서지학적 정보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 학자들의 책들이 림마 박사의 논거일진대, 당연히 신빙성을 확실히 해야할 필요가 있을 텐데, 그의 모호한 주장이 여기서도 또 다시 비상식적이 아닐 수 없다.

넷째로, 볼 경이나 토튼 교수의 주장을 앞세운 림마 박사의 주장은 그 신빙성을 확실히 하려는 노력을 경주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그 한 예로, 버나드 람 (Bernard Ramm)은 The Christian View of Science and Scripture에서 림마의 주장과 토튼의 주장에 대한 림마의 해설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면서, 그들이 제시하였다는 "증거"에 대해 아주 정선(精選)한 어휘로 점잖게 결론을 이렇게 내리고 있다. "나는 이 증거를 확인할 수 없었다..... 쿨프 박사 (Dr. Kulp)는 예일 대학교에서는 토튼의 주장을, 그리고 영국에서는 에드윈 볼 경의 이론을 자세히 조사했으나 그 증거를 확인할 수 없었다." 라고 했다. (1954, pp 109,117)

림마 박사는 이 이야기를 말할 때 그 진실성을 확실히 믿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입증할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문서적 배경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런 이야기들의 발원지를 찾아내기란 떠돌고 있는 경로를 찾아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일단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믿을 만한 인사들과 관련된 사실들에 의해서 "보강되면", 선의의 사람들은 철저한 조사를 해보기도 전에 그것을 진실로 수용하기 쉽다. 일단 수용되고 나면,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옹호하는 데 쓰일 좋은 합리적 방패로 삼으려 한다. 현재 찾아볼 수 있는 관련된 모든 자료를 검토해 본 결과, 볼과 토튼의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이야기를 가지고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앞부분에서 NASA의 이야기에 관한 질문에서도 같은 대답 패턴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여기서도 이 이야기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림마 박사가 말하던 그 이야기가 처음 출판되었을 때, 모두 크게 흥분했었다. 그래서 성경의 진실성을 "간증"하는 과학을 고대해 마지않던 사람들은 무비판적으로 그의 말을 수용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애초의 흥분이 가라앉고 나서, 그 이야기는 곧 잊혀지고, 거들떠보는 이 없는 가운데 역사유물 창고에 처박히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그 상태로 처박혀있지는 않았다. 누군가 (이 순간까지도 그 사람이 누군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이야기를 다시 찾아내어 "먼지를 털고" (틀림없이 오늘날의 사회와 사람들의 마음에 더 호소력을 갖게 하기 위하여) 얼마쯤은 각색하여, (관련 있는 개개인들과 회사들, 그리고 도시들의) 이름을 연관시켜놓고는, 상당부분 의도적으로 일반 대중의 신임이 두터운 유명한 정부기관 (NASA)과 결부시켰다. 그 이야기의 "배경설명"은 언뜻 보기에 완전하리 만치 그럴싸하게 잘 짜여져서 의심하거나 미심쩍어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NASA에서 일하고 있는 과학자들이 우주선의 탄도궤적을 계산하기 위하여,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태양, 달, 그리고 별들의 위치를 추적하고는, 더 나아가 1000년 전의 것도 추적하고 있었다.
정부기관의 정교한 컴퓨터들이 입력된 데이터를 계산하다가, 전혀 예상 밖으로 갑자기 삐걱거리며 작동을 멈췄다. 하지만 달려온 정비기술자들은 아무런 기계적 하자를 찾아낼 수 없었다. 여기서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즉, 컴퓨터들은 하루에 해당하는 시간을 잃어버린 사실을 발견한 것이 알려졌다. 어느 누구도 컴퓨터가 왜 그렇게 멈춰야 했었던가, 또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과학자 팀에 소속했던 어느 과학자가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배웠던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특히 하나님이 하루 동안, 대강 그 정도의 시간 동안, 태양을 멈췄다는 이야기를 기억 속에 떠올렸다. 하나님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믿지 않는 나머지 NASA의 과학자들은 그 따위 "정보"를 가지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 그 자체를 비웃었다. 하지만 그 과학자는 여호수아 10장을 펴들고 성경을 읽었다. 그런 다음 정비기술자들이 컴퓨터의 입력 데이터 안에 여호수아의 잃어버린 하루를 입력하자 컴퓨터는 거의 완벽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컴퓨터가 또 다시 멈췄다. 컴퓨터가 찾아낸 잃어버린 시간은 만 하루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는 다시 이렇게 이어졌다) 컴퓨터가 찾아냈던 잃어버린 시간은 23시간 하고 20분이었다. 다시 말해서 40분이 모자랐었다는 것이다. 그 때, 성경을 참조해보자고 건의하였던 그 과학자는 이 수수께끼를 다시 한번 성경 안에서 찾아보자고 제의했다. 그는 주일학교에서 배웠던 내용 중에 뭔가 다른 내용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었다. 열왕기하 20장에 있는 이야기를 생각했던 것이다.
성경기록에 의하면, 히스기야 (Hezekiah) 왕이, 병이 나을 것이며 장수를 약속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약속의 징표를 요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해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가게 하였다는 이야기다. 해그림자의 10도 후퇴는 정확하게 40분에 해당한다고 그 과학자는 계산했다. 그래서 이 두 사건이 컴퓨터가 필요한 24시간을 채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이 컴퓨터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다 채웠다는 것이다!

위 이야기는 여러 정보통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예컨대,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 있는 커티스 엔진 회사 (Curtis Engine Company)의 사장 해롤드 힐 (Mr. Harold Hill) 씨는 그 정보가 정말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이 사건이 벌어졌다고 알려지고 있는 NASA 시험장이 위치하고 있는 도시 이름도 알고 있었다. 그는 잃어버린 하루를 찾아낸 곳이 메릴랜드의 그린벨트에 있는 NASA 시험장이라고 했다. 그밖에 다른 "사실들"도 알려지고 있으나 지면관계상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겠다. 어떤 설명에 의하면 힐 씨 자신이 어린 시절 주일학교엘 다녔다던 그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사람이 NASA의 컴퓨터가 여호수아의 잃어버린 하루를 찾아내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으리라고 하는 말은 재미있다. 다른 설명들도 없지는 않았는데, 대개 이렇게 이어지는 이야기들이다. 즉, 힐 씨는 NASA에서 그 사건들이 벌어졌을 때 그냥 그 곳에 참석한 것말고는 특별한 것은 없었다는 이야기다. 혼란스럽게도, 어떤 이야기 속에는 힐 씨의 이름을 전혀 거론되지도 않았으며, 또 그가 그 일에 아무런 참견도 한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어보려는 기도는 모두 실패했다. 19870년 4월에 Bible-Science Newsletter 지에 이 이야기가 출판된 이후 수많은 독자들이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 있다는 커티스 엔진 회사의 힐 씨 앞으로 편지를 띄웠다. 그런데 그 편지들은 우체국의 '수취인 불명'이라는 딱지를 달고 죄다 되돌아왔다. Bible-Science Newsletter 1989년 7월호에 실린 기사에 1970년 4월 호의 출판 이후 몇몇 독자들이 마침내 힐 씨로부터 회신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 내용인즉슨, 힐 씨는 자신이 그 이야기를 처음 쓰지 않았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직접 힐 씨와 연결이 된 적이 있다는 어느 독자는, 힐 씨가 자신이 그 이야기를 쓰지 않았음은 물론, 그 정보를 들은 기억조차 없다." (Bartz, 1989, p 12)고 했다.

1989년도 7월판 Bible-Science Newsletter는 이런 기사내용이 실었다. 즉, 볼튼 데이비다이샤 (Bolton Davidheiser) 박사가 메릴랜드 주 그린벨트에 있는 NASA 사무소에 편지를 보내어 이 이야기가 일어났다는 곳이 어딘 지를 물었다고 한다. NASA는 해롤드 힐 씨에 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으며, 또 '잃어버린 하루' 이야기를 전혀 확증할 수 없다는 회신을 보냈다고 했다.

그 NASA의 편지 결론 단락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비록 우리는 우주선의 궤도를 확정하기 위하여 컴퓨터를 사용하여 행성들의 위치를 계산하지만, 그린벨트의 우리 기관에서 일하는 그 어떤 우주비행사나 과학자도 힐 씨와 관련이 있는 그 "잃어버린 하루" 문제에 개입된 적이 없다."' (p12). 결국 이 이야기의 순수성을 확증하려하였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만 것이다. 어쨌거나 그 이야기의 출처가 의심스럽다. 이야기에서 거론된 사실들은 문제의 실질적인 진실에 부합되지 않는다. 여호수아 10절의 "잃어버린" 하루를 찾는 일에 개입돼 있을 법한 사람들은 NASA에서 있었다는 사건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컴퓨터가 잃어버린 하루를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다" 라고 하는 주장만 해도 믿을만한 사람들은 죄다 컴퓨터가 어떻게 작동하여야 하는가를 알지 못했다.


여기서 도출될 수 있는 단 하나의 결론은 이런 것이 될 것이다. 즉 이 이야기는 허위라는 것이다. 이 결론이 사실일진대 더 이상 이 이야기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상시적인 안목으로 조금만 깊이 조사해보면 전혀 현실적인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이런 이야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상케 할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킬 수 있으며, 지켜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하자. 즉, 하나님의 말씀을 "부러진 검"을 들고 지키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References

1. Bartz, Paul (1989), "Qustions and Answeres", Bible-Science Newsletter, 27(7):12

2. Ramm, Bernard (1954), The Christian View of Science and Scripture (Grand Rapids, MI: Eerdmans).

3. Rimmer, harry (1936), The Harmony of Science and Scripture (Grand Rapids, MI: Eerdmans).



잃어버린 23시간 20분과 40분 다시 찾다

성경의 기록이 전자계산기에 의해 입증된 놀라운 사실이 있다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시에 있는 커티스 기계회사 사장이며 우주계획 고문인 헤롤드힐씨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메릴랜드주의 그린벨트에서 연구하고 있는 우리회사 우주 관계과학자들에게 놀라운 사실을 알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전자계산기 앞에서 지금부터 10만년전까지 소급하여 올라가면서 그 사이의 태양과 달의 괘도 진행을 살폈습니다 인공위성이 가는 궤도상에 어떤일이 일어날찌 모르기 때문에 태양과 달의 궤도를 자세히 알지 못하면 인공위성을 발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태양 및 달과 그 주변의 혹성들의 궤도조사가 끝나야만 우리가 발사 할 인공위성의 궤도를 작성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조사를 하던 중에 갑자기 기계가 정지해 버렸습니다전자계산기의 동작이 정지되고 적신호가 켜졌습니다. 모든 기사들은 긴장되었습니다그것은 전자계산기에 제공한 정보에 이상이 있든지 기계에 이상이 생겼다는 신호였습니다. 과학자들은 곧 기계 기술자들을 불러서 조사를 의뢰하였습니다. 그 결과 기계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이 판명 되었습니다.


우주 과학자들은 전자계산기가 지시하는 적신호의 원인을 다시금 면밀히 조사했습니다. 결국 그 궤도 진행상에 꼭 하루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과학자들에 의해서 판명되었습니다. 하루가 없어진채 궤도가 진행되어도 별 문제거 없다는 사실을 알기는 하였으나 그 하루 즉 24시간이 어디로 가 버렸는지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아무리 계산해 보아도 하루가 모자라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의 머리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습니다.


며칠 후 교회에 다니는 청년이 일어나 여러분 제가 어렸을 때 교회에 다니면서 들은 이야기인데 옛날 여호수아 때에 태양이 하루동안 정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 웃어 넘겼습니다. 그러나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한 노련한 과학자가 자 우리가 이렇게 앉아 있기만 할게 아니라 성경책을 가져다 자세히 조사하여 그 시대의 궤도를 전자계산기로 조사해 봅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성경 여호수아 10장12-14절에서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는 내용을 찾았습니다.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한 이스라엘 민족과 아모리족속들간의 전쟁은 아주 치열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여호수아가 이끄는 군사에게는 매우 불리한 전쟁이었으므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물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 할지어다 라고 외쳤습니다. 정말 여호수아가 기도하고 외친대로 해와 달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거의 하루 동안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할렐루야!


우주 과학자들이 잃어버린 하루를 찾기 위해 전자 계산기를 그 당시로 돌려 여호수아시대의 궤도를 조사한 결과 23시간 20분이라는 계산은 정확한 것이기는 했으나 아직도 40분이라는 시간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바로 그 청년이 다시 말했습니다.내가 기억하기로는 성경 어딘가에 태양이 뒤로 물러 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주 과학자들은 곧 성경에서 열왕기하 20장3-10절의 히스기야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 냈습니다.거기에는 태양의 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 갔다는 내용이 기록 되어 있는데 10도를 시간으로 계산하면 40분에 해당합니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24시간의 행방을 찾아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천년전에 기록 된 성경의 기록을 신화처럼 여겼던 과학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시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참으로 천지창조를 이루시고 그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천국과 지옥을 만드시고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대속의 재물로 삼으시고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 주님을 통해 영생의 소망을 주시며 우리 안에 내재하셔서 우리를 항상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인하여 모든 찬양과 경배를 올려 드립니다. 



난제해설 - 여호수아서 10:12-14 태양 정지 명령의 과학성

본문에는 여호수아가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 할지어다'라고 명함으로써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내려가지 아니한' 이적이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태양을 멈추도록 명한 여호수아의 이러한 말은 극히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성경 비평가들은 지적했다. 즉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이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지구야 멈추어라'라고 말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 여호수아가 과학적 모순의 우를 범한 것이 아님을 살펴볼 수 있다.

1. 행성 운동의 과학적 이치

현대 과학은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으며, 이 운동이 태양의 중력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냈다. 그러므로 지구가 그 궤도 진행을 멈추기 위해서는 먼저 태양의 중력, 곧 인력(引力)이 중단되어야 한다. 즉 태양의 인력이 감소해야 만이 1초에 30만km 달리고 있는 지구의 자전이 감소되어져, 결과적으로 날 혹은 시간이 연장되는 것이다. 한편 당시의 여호수아는 지구의 30만km 저편에 태양이 있으며, 지구 스스로 자전을 하기 때문에 낮과 밤이 생긴다는 등의 정확한 과학적 사실을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승리를 주실 것을 약속하신 말씀만을 믿고(8절) 태양의 멈춤을 기도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말속에는, 성경 비판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오늘날의 과학이 인정하는 질서 체제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2. 과학적인 여호수아의 명령

먼저 여호수아가 명한바 '태양아 멈추어라'는 말은 원어적으로 볼 때 '태양아 일하기를 멈추어라'는 뜻이다. 이는 곧 태양이 멈춰 설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지구에 대한 태양의 인력을 중단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바로 그 때에 태양 인력이 멈추었고, 그래서 지구의 궤도 속도가 줄게 되어 시간이 지연된 것이다. 또한 태양도 지구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에 '태양아‥멈추어라'는 말은 전혀 어폐가 없다. 왜냐하면 태양이 실제로 어느 정도 움직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구에서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태양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여호수아가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라고 기록한 것도 위와 같은 관점에서 지구를 고정시킨 채 태양의 속도를 평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튼 달도 역시 멈추었다는 기록처럼(13절) 실상 그 날에는 전체 태양계가 그 궤도를 멈추어 모든 행성의 동작이 멈추게 되었다.

3. 교훈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여호수아의 긴 날'에 지구와 전체 태양계가 그 궤도에서 23시간 20분 동안(본장 자료노트 '태양의 정지' 참조) 회전을 중단한 사실은 참으로 경이로운 기적이다. 더욱이 긴 낮의 초자연적 현상으로 말미암아 파괴적 우박이 수반되었다(11절). 이에 대해서 성경 자체도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4절). 또한 이는 성경의 증거 외에도 고대 중국의 문헌과 페루의 잉카(Inca), 맥시코의 아즈텍(Aztecs) 및 고대 바벨론(Babilon)과 페르시아(Pelsia) 등의 문헌에도 분명히 기록되어져 있다. 이처럼 이 사건은 과학적으로도 모순이 없고, 역사적으로도 틀림없는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한편 본문과 같은 기적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느냐고 하면서 믿지 않으려는 자에게는 아무리 증거를 제시한다 해도 결코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과학적인 증명이 없다 해도 이 사건이 분명히 일어났음을 충분히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천지를 만드시고 회전 운동을 허락하신 창조주께서 원하시면 이를 멈추게도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창1:1). 또한 자연 현상을 과학적으로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어찌 그의 말씀이 비과학적일 수 있겠는가! 

또한 성경은 과학으로만 모두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과학으로만 세상이 만들어지고, 사람이 창조되고, 역사가 흘러왔다면 과학 자체가 신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일들을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처리하시지만, 때로는 신적 능력으로 기적을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의 신적 기적을 믿지 못한다면 성경은 맨 처음부터 믿을 수 없는 말로 기록되었으며, 그러한 기적을 행하실 수 없다면 완전한 신앙의 대상으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 - 여호수아서 10:12-14 태양의 정지

기브온과의 전투가 벌어진 날에 여호수아가 태양이 멈추도록 기도함으로써 하루가 연장되었다는 본장의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과 논란을 가져왔다. 왜냐하면 만약에 태양이 실제로 정지했다면 물리적 법칙에 따라 지구 전체와 그 위의 모든 생물에 상상할 수 없는 파국을 가져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비평가들은 '여호수아의 긴 날'을 한낱 전설로 인식하고자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수천 년이 지난 현대의 과학은 다음과 같이 성경의 기록과 완전 합치되는 수치를 계산해 냄으로써 성경 기록의 사실성을 확증하고 있다.

1. 지구 공전과정에서 없어진 하루

우주 개발 관계 과학자들인 해롤드 힐(Harold Hill)의 연구팀은 인공위성의 궤도를 작성하기 위하여. 전자계산기로 지금부터 10만 년 전까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 사이의 태양과 달의 궤도 진행을 살피던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 궤도 진행상에 '꼭 하루가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하루, 즉 24시간이 어디로 가버렸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아무리 계산을 해보아도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옛날 여호수아 때에 태양이 정지했다는 성경의 기록을 바탕으로 잃어버린 하루를 찾기 위해 전자계산기를 그 당시로 돌려 여호수아 시대의 궤도를 조사한 결과 정확히 23시간 20분 동안 궤도가 정지했었던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이는 없어진 하루와 완전히 일치하는 수치가 아니었다. 아직도 40분의 행방이 묘연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그들은 곧 성경에서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태양의 그림자를 10도 뒤로 물러가게 하신 사실을 찾아냈다(왕하20:8-17). 그런데 놀랍게도 그 10도는 시간으로 계산할 때 정확히 40분에 해당된다. 이로써 그들은 여호수아 때의 23시간 20분과 합하여 정확히 궤도 진행상에 없어진 하루의 원인을 알게 된 것이다.

2. 없어진 하루의 교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의 기록을 전설로만 여기던 과학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과학의 계산을 통해 태양의 궤도 진행상에 24시간이 비어있음을 보이셨고, 또 그 근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친히 증거하신 것이다. 아무튼 과학자들은 성경의 기록 가운데 잃어버린 하루를 발견함으로써 주권자 되신 하나님 앞에 경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여호수아의 긴 날'이 과학적으로 규명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는 몇 천 년이 지난 후대에 와서도 전혀 오류가 없는 과학적 사실로써 규명되고 있다. 우리 창조주 하나님은 실로 능치 못함이 없는 것이다(사40:13).







새 언약의 일군(고린도후서 3:6) 프뉴마(영) & 그람마(의문, 문자, 율법)




새 언약의 일군(고린도후서 3:6)

새번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πνεῦ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151

1. 불기.   2. 바람.  3. 숨 내쉬기
발음 [ pnĕnuma ]

어원  /  4154에서 유래
γράμ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1121

1. 알파벳의 글자.   2. 문서.  3. 편지
발음 [ gramma ] 
어원  /  1125에서 유래


새 언약의 일군 

- '돌비와 심비'의 대조(3절)가 '율법과 복음'의 대비를 나타낸다는 것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바울은 자신을 '새 언약의 일군'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옛 언약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적대자들과 자신을 뚜렷이 구별시키고 있다.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 '의문'(그람마)은 본래 알파벳의 '문자'를 나타내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점차 `기록된 것' 즉 '문서'나'책'을 의미하는 말로 발전되었다. 
이 말이 본문에서 뜻하는 바는 '율법'이라고 할 수있다. 
반면 '영'(*,프뉴마)은 썩어질 육과 대비되는 `영혼', 혹은 '생명'을 뜻하며 본문에서는 `복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바울은 본문에서 '의문'과 '영'이라는 상징적 개념을 통해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비시키고 있음을 알수 있다. 
우리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들을 다음과 같이 구체화 시킬 수 있다. 

(1) 적응 대상에 있어서. 
옛 언약은 육적 이스라엘(출 19:5, 6)에 적용됨로써 민족적 한계를 갖는 반면, 새 언약은 영적 이스라엘, 즉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됨으로써 민족적 한계를 넘어선다. 

(2) 언약의 성립 과정에 있어서. 
옛언약은 하나님께 대해 순종을 맹세하고 피의 희생제사를 드림으로써 성립된 반면, 새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의 제물이 되심으로써 성립되었다. 

(3) 언약을 수행하는 방법에 있어서. 
옛 언약은 행함으로 하나 새 언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한다(롬 10:9, 10;히 10:39). (4)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언약의 결과에 있어서. 
옛언약은 죽음을 낳지만 새 언약은 생명을 낳는다. 따라서 옛 언약에 대해 새 언약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히 시간적인 차이를 넘어 완전한 질적 차이를 가진다. 한편 혹자는 본문의 '의문'과 '영'을 '인간적인 것'과 '신적(神的)인 것'의 대비로 이해하기도 한다(Barrett). 전자는 삶의 중심을 인간에 둠으로 인해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되고 후자는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둠으로써 생명을 얻는것이다. 또한 칼빈(Calvin)은 '의문'이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외적인 설교'를 뜻하고, '영'이란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사람의 마음 속에 실제로 작용하는 '생명력있는 가르침'을 뜻한다고 본다.




고린도후서 3장 1–18절
중심 구절 : “우리가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함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라” (고후 3:5)

우리는 때때로
“나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자격이 있을까?”
“내가 과연 복음을 전하고, 누군가를 섬길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의 부담과 주저함을 느낍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자신이 어떤 증명서나 추천서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새 언약 안에서 역사하시는 증거로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떤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인지,
그리고 새 언약의 일꾼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1. 진정한 추천서는 사람의 편지가 아니라, 삶입니다 (1–3절)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너희에게 시작하겠느냐
혹은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붙이거나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1절)

바울은 자신을 의심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내 추천서는 바로 너희다.”

  • 바울의 사역이 남긴 가장 큰 증거는 변화된 성도들의 삶이었습니다.
  • 그들은 먹으로 쓴 글이 아니라,
    성령으로 새겨진 살아 있는 편지
    였습니다. (3절)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자격증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편지입니다.

2.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4–6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느니라.” (5절)

바울은 사역자로서의 자신감과 능력이 자기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분명히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정의합니다.

  • 옛 언약은 돌에 새겨졌고, 죽이는 역할을 했지만,
  • 새 언약은 성령으로 새겨져 사람을 살리는 사역입니다. (6절)

우리는 율법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생명을 전하고 변화시키는 복음의 일꾼입니다.

3. 영광이 더 큰 새 언약의 사역을 맡았습니다 (7–11절)

바울은 모세가 돌판을 들고 나왔을 때 그 얼굴에 나타났던 옛 언약의 영광을 언급합니다.
하지만 그 영광은 잠시였고, 사라질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즉 성령의 사역

  • 더 큰 영광을 가지며,
  • 점점 더 밝아지고,
  •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사역입니다.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나니…
이 영광은 더 넘치는 영광이라.”
(8–9절)

오늘 우리도
이 영광의 사역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비록 연약하지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러운 복음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4. 우리는 담대하게, 그리고 열린 얼굴로 주님을 바라보며 변화받는 자입니다 (12–18절)

“우리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2절)

  •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 율법의 그늘 아래 머물지도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난 뒤 자신의 얼굴에 수건을 썼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건 없이, 하나님을 직접 바라보며 변화되어 갑니다. (18절)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며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18절)

복음은 단지 ‘지식’이 아니라,
우리를 점점 더 예수님 닮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적용 /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 나는 사람에게 인정받는 추천서를 구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 나의 삶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편지가 되고 있는가?
  • 복음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전하고 있는가?
  • 성령의 역사로 날마다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을 보고 쓰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으로 세우십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새 언약의 일꾼이다.
이 사명은 내 힘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감당하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나의 부족함과 한계를 뛰어넘어 복음의 편지로 살아가고,  예수님의 형상으로 점점 변화되어 가는 새 언약의 일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님,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으로 세우시고 복음을 맡겨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나의 자격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가 되게 하옵소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날마다 주의 형상으로 변화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역사 이래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해왔습니다. 
과연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찰스 다윈은 인간을 가리켜 “고등한 존재이지만 본질적으로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고 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인간을 “경제적 동기에 의해 조작되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인간과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찰스 다윈의 주장은 인간을 동물과 같은 광기로 만들었고, 칼 마르크스의 주장은 인간을 물질로 전락시켰습니다.

다윗은 시편 8편에서 광대 불변한 자연 앞에 무력감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무엇이관대”(What is man)”, “인자가 무엇이관대(What is the son of man)”를 물었습니다. 
그는 인간이란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쉽게 더럽혀지고, 쉽게 상처받고, 쉽게 넘어지고,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성도를 어떤 존재로 보았습니까? 
바울은 성도를 그리스도의 편지,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새 언약의 직분의 영광스러움을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우리는 새 언약의 직분의 영광스러움을 알아 영광스러운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1.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1-5)

고린도교회에는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고 비방하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미혹하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습니다(고후 3:1). 그들은 어떤 추천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파 출신 교사들로(행 15:5),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추천서가 없는 바울을 비방하고 그가 전한 복음까지 의심을 품도록 했습니다(고후 2:17). ‘추천서(recommendation)’란 권위가 있는 기관이나 이름 있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으로 사람들에게 공인되고 보증하는 증표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도로서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믿음이 어린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과 구원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은 추천서를 보낼 필요도 없고 받을 필요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2-3)

바울 자신은 추천서가 없지만 너희가 우리의 편지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편지를 즐겨 쓰지 않지만 전에는 편지를 즐겨 썼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서 소식을 전하고 자신의 마음을 전달했습니다. 제 아내는 지금도 그러하지만 이전에는 선교사님들과 형제자매들에게 편지를 많이 썼습니다. 그 우편요금도 꽤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를 우리의 편지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성도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소식,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신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 것은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간 생명을 바쳐서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심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그들의 마음판에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심을 새겼습니다. 또한 바울의 마음판에 고린도교회의 개척사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이름과 기도 제목과 그들의 변화된 모습이 일일이 다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바울의 마음에 기록된 그 편지로 바울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추천서는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먹으로 종이나 돌판에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추천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마음판에 쓰여 있었습니다. 이 편지야말로 바울이 사도임을 확실하게 보증하는 추천서였습니다.

단체나 기관이나 사람이 써주는 추천서는 100% 믿고 신뢰할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가짜가 너무 많고 과장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가짜 신분증을 들고 다니며 사칭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돌판에 쓴 추천서는 세월이 흐르다보면 풍화작용에 의해 희미해지거나 사라지고 또 깨질 수도 있습니다. 모세의 십계명은 돌에 새겨졌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다시 시내 산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육의 마음판에 쓰인 편지는 성령으로 각 사람들의 마음판에 쓰인 것이기 때문에 깨지거나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추천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로마서 16장 1절을 보면 바울은 겐그리아에 있는 뵈뵈 자매를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보낼 때 추천서를 써서 보냈습니다. 때로는 추천서도 필요합니다. 선교사를 파송할 때 선교사 패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추천서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써 주신 살아있는 추천서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무는 속일 수 있지만, 그 열매는 속일 수 없습니다. 바울이 전한 구원의 열매가 바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선교사들은 추천서 문제로 무시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거의가 평신도 선교사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보다 추천서를 가지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1990년대 황돈연 선교사가 수교도 되기 전에 유학생 선교사로 파송 받아 러시아의 재원인 물리학과 레나 자매를 비롯하여 많은 모스크바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기숙사에서 2,30여명이 러시아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기관에서 파송된 목사는 황돈연 선교사를 꼭 황돈연씨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황선교사는 신학교를 나오지 않았고 또 목사 안수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선교사들의 추천서는 그들이 맺는 성령의 열매, 구원의 열매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함부로 추천서를 써주시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 받고 추천서를 써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헌금을 많이 낸다고 추천서를 써주시지 않습니다. 스팩이 좋다고 추천서를 써주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과 신앙의 인격과 삶을 보시고 써주십니다. 사람들이 써 주는 추천서는 조금만 노력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는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 받고 분명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추천서를 써주십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추천서라고 확신했습니다(고후 3:4-5). 바울은 그의 추천서가 자신의 능력과 자격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나의 능력과 자격, 그리고 사람이나 기관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면 사람이나 기관 앞에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기관이나 조직이 깨지게 되면 자격과 능력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확신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환경과 상황을 넘어서서 변함없이 주님께 충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격과 능력도 영원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아름다운 삶과 복음 증거를 통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너는 분명 예수님을 믿는 성도다.” “너는 주님께 진짜 헌신하는 집사다.” “너는 양무리를 돕는 정말 목사다.” “너는 진짜 선교사다”라는 그리스도의 편지요 주님의 추천서를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 새 언약의 일꾼(고후 3:6-18)

첫째, 새 언약(고후 3:6)

바울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새 언약의 일꾼으로 삼으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습니까?

“그가 또 우리를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후 3:6)

우리가 새 언약의 일꾼이 된 것은 율법 조문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인함입니다. ‘율법 조문’은 의식과 율법을 가리킵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입니다(갈 3:24). ‘초등교사’란 헬라 시대에 주인의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후견인으로서 책임을 맡았던 전문노예를 말합니다.

바울은 이 용어를 율법에 적용하여 율법의 역할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신령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이 연약하여 거룩한 율법을 지킬 힘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를 통해 한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선을 행하고자 하지만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절망의 늪에 빠져 ‘누가 나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의 순간에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감사 찬양이 나왔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7:24, 8:1-2)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나 생명을 주는 성령의 세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성령은 항상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나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새 언약의 기원은 예레미야 31장 31-34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달리 돌판에 기록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판에 기록합니다. 또한 새 언약을 믿을 때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게 됩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성만찬을 하실 때 포도주 잔을 그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하)

옛 언약에도 죄를 사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정결한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면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일시적이고 불완전하여서 죄를 지을 때마다 번거롭게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옛 언약의 제도는 구원역사의 모형으로서 장차 올 참된 것의 그림자였습니다.

새 언약은 짐승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피는 아무 죄가 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피이기 때문에 죄 사함의 효과가 완전하고 영원합니다(히 9:12). 베드로는 예수님의 피의 효력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이제 우리는 죄를 지을 때마다 번거롭게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를 지을 때마다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를 힘입어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죄를 진실하게 회개하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셨음을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새 언약은 십자가의 보혈의 피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가기만 하면 어떤 몹쓸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다 용서해 주십니다. 나의 지은 죄가 중하고 추하여서 내가 어느 정도 씻고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여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눈과 같이 양털 같이 희게 해주십니다(사 1:18).

둘째, 새 언약의 일꾼(고후 3:7-11)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새 언약의 일꾼의 영광이 어떠합니까?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후 3:7-9)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십계명을 들고 내려왔을 때에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이 영광은 곧 없어질 영광이었습니다. 모세의 직분은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이었습니다(출 34:29-30). 사람들은 이런 직분을 가진 모세를 감히 주목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물며 사람을 살리는 영의 직분은 얼마나 영광스럽겠는가를 감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하면 요즘 유명한 목사들처럼 존경을 한 몸으로 받으며 복음을 전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추천서가 없다고 사도로 인정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노예들이나 하는 천막을 만들며 복음을 전하는 무명의 전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내면에는 새 언약의 직분의 영광으로 인해 감사와 찬양이 흘러 넘쳤습니다.

바울은 이 직분이 영광스럽고 귀하기 때문에 이 직분을 감당하기 위하여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습니다(고전 4:13).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행 20:24). 이를 위해 몸을 던져 충성했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이 직분은 죽은 영혼을 살리고 영생을 얻게 하고 영원히 살게 하는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직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직분입니다.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고후 3:10-11)

세상에는 영광스러운 직분들이 많습니다. 한 나라를 통치하는 대통령의 직분도 영광스럽게 보입니다. 시장이나 구청장이나 국회의원의 직분도 영광스럽게 보입니다. 그리고 직장의 장도 영광스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이런 직분에 오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직분들은 죽어가는 사람의 영혼을 살리고 의롭게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직분들은 영광이 풀의 꽃과 같아서 얼마 못가서 시들고 맙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직분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치가 있고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새 언약은 사람을 살리고 의롭다 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새 언약으로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고 더 나아가 사람을 살리는 새 언약의 직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를 찬송가 저자는 천사도 흠모하는 귀한 직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새 언약의 일꾼의 복(고후 3:12-18)

일꾼이 누릴 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첫째는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자기 얼굴의 영광이 결국에는 사라져 없어질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도록 수건을 썼습니다. 이는 백성들이 율법의 한계를 알게 되면 율법을 순종하지 않게 될 위험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지금까지 이 사실은 알지 못하고 율법의 영광이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고 율법을 사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과 강박감, 또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으로 인한 죄의식에 늘 시달렸습니다. 이러한 율법에 대한 매임은 그리스도께로 돌아갈 때만이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고후 3:17).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죄와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십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율법의 수건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면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점점 변화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를 의미합니다. 성화의 절정은 영화입니다. 우리는 점점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예수님이 재림하실 최후의 날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광스러운 희망을 바라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 언약의 일군입니다. 
우리는 이 귀한 직분을 귀히 여기어 주님이 오시는 날에 영화롭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경건의 능력을 부인 하는 것(딤후 3:5)


경건의 능력

자료 / https://m.blog.naver.com/josephclass/223048135541


경건(敬虔)하다 

경건(敬虔)은 ‘경건하다’의 어근이다. 

형용사 겅건하다의 뜻은 ‘공경하며 삼가고 엄숙하다’이다. 경건주의(敬虔主義)는 17세기 말 독일의 개신교가 교의(敎儀)와 형식에 치우치는 것에 반대하여 일어난 신앙 운동이다. 스페너(Spener, P. J.)가 창시한 운동이며, 성경을 중심으로 한 개인의 영적 생활의 체험과 실천을 중요시하여 경건한 생활을 하자고 주장하였다. 모습이란 ‘다른 것을 본뜨거나 본받음’을 말한다. 능력이란 ‘일을 감당해 낼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디모데후서 3장 5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와 디모데후서 3장 16절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말씀에서 경건의 모양과 능력에 대하여 묵상하려고 한다.

디모데전서 3장 2~4절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에서 경건하게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 ‘감독과 집사의 덕목’으로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다. 야고보서 1장 26~27절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에서 경건의 참 모습이 무엇이며 경건의 능력을 어떻게 기를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50년 이상한 사람으로서 경건의 모습과 능력이 얼마나 삶에서 나타나고 있는가를 돌아본다. 주일이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고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며 생활하고 있다. 나의 내면 모습이 과연 성경 말씀대로 변화하여 성장과 성숙의 길로 가고 있는가를 돌아보면서 허물과 흠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이 아니면 하루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음을 느끼고 있다. 밖으로 들어나는 모습에서 어느 정도 경건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내면의 성숙한 변화와 변혁이 없다면 근본적인 경건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혀에 재갈을 물리고 말의 절제가 있었는가 생각하며 말하기보다는 듣는 일에 치중하려고 다짐을 해본다. 내 양심을 속이면서 인간관계를 하였던 적도 있었음을 고백한다. 또한 경제적 이익을 취하려고 제도를 악용한 적도 있었다. 

형제자매와 이웃의 어려움을 보고도 보지 못한 척한 적이 있었다. 세상 쾌락을 찾으면서 세속에 물들어간 적도 있었다. 앞으로 겉으로 나타나는 경건의 모습보다 내면에서 나오는 경건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한다. 우리 모두 경건의 능력자로서 지역사회에 덕과 유익을 끼치면 좋겠다.
 



경건의 모양과 경건의 능력(디모데후서 3:1-9)

헬라어 원문에 의하면, 오늘 본문은 지시대명사 “이것을”(Τοῦτο)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 다음으로 접속사 “그러나”(δὲ)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접속사가 빠져 있지만, 헬라어 원문과 영어 성경에도 분명히 들어가 있습니다. 
제가 볼 때는 이 접속사가 중요하게 보이는데, 왜냐하면 이 단어 안에 사도의 안타까운 심정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앞 장에서 사도는 거역하자는 자들, 즉 거짓 교사 또는 이단자들을 온유함으로 대할 것을 디모데에게 권면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을 그렇게 온유한 태도로 대할지라도, 그들의 행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오늘 본문 1-9절에 걸쳐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을 온유함으로 대할지라도 그들이 얼마나 간교하고 회심하기 어려운 자들인지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디모데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여, 에베소 교회 안에 있는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을 온유함으로 훈계할 때 혹시 하나님이 그들을 돌이켜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시오. 그러나 그대는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간교하고 회심하기 어려운 자들인지를.

여하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러나 너는 이것을 알라”(Τοῦτο δὲ γίνωσκε)고 명령하며,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세’라 함은, 예수님의 재림이나 재림 직전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말세’라는 말을 종종 접하는데, 이것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말세’는 단수가 아니라 언제나 복수로 표현됩니다(행 2:17; 딤후 3:1; 약 5:3; 벧후 3:3). 
본문 1절에서도 “말세에”(ἐν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라는 말이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는데, 풀어서 번역하자면, “마지막 날들에”(in the last days) 또는 “마지막 기간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한 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여러 날들’ 또는 ‘특정한 기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말세는 어떤 기간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 요엘서를 인용한 사도 베드로의 증언에 따르면, 오순절 성령강림 때 말세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로부터 시간이 좀 지나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기록할 때도,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말세’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순절 성령강림 때처럼 하나님의 성령이 디모데가 목회하던 에베소 교회에도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증언대로,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시는 때가 곧 말세라고 했으니,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셨으므로 그때에도 여전히 말세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께서 그때와 동일한 방식으로 거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도 말세에 살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말세는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전까지 처하게 되는 ‘모든 현재’를 뜻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 보면, 이 본문은 2천 년 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말세에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2절)라고 말씀합니다. 말세의 뜻을 잘 몰라도 사도가 증언하는 내용만 봐도,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당시처럼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합니다.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지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얼짱’과 ‘몸짱’이 되기 위해 자기 얼굴과 몸을 뜯어 고치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 완전히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돈을 사랑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돈이라면 완전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험금을 노리고 자기 가족을 죽이기도 하고, ‘목사’를 사칭하는 사기꾼들이 헌금을 횡령하는 어처구니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랑하고 교만하며 남을 비방하는 일에 능숙합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물론,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한 삶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사람들이 절제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스마트 기기를 사용하면서 즉흥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소셜 미디어(Social Media) 문화’가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절제하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점점 사나워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육신적 쾌락에 빠져 급기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망각해 버립니다. 

사랑하는 청년(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바울 당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경고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똑같이 “말세에” 살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말세의 특징을 보면서 오늘 한국 교회와 우리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게다가 더욱 충격적인 사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은 일차적으로 불신자들에 대한 묘사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거짓 교사 또는 거짓 신자들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는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라는 5절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따라서 “경건의 모양” 따위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경고는 일차적으로 교회 공동체를 겨냥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로 치면, 한국 교회와 그 밖의 모든 기독 단체 및 캠퍼스 기독 동아리를 향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 교회도 결코 예외일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참 신자인 척하면서 그냥 ‘가라지’로 앉아 있는 교인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단 한 번도 예수님과 만남의 경험이 없이 부모 또는 친구의 권유로 마지못해 교회당에 출입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리스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반면에 과거에 거듭난 체험은 있지만, 세상 가운데 불신자 친구들의 틈바구니에 살면서,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거의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칭의(의롭다 하심)의 은혜에서 결코 떨어져 나가지는 않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는 불신자와 거의 다를 바가 없이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굴복시키려는 선한 의지를 거의 소멸한 채, 언제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보다 육신적 쾌락에 매몰되어 온갖 욕심에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제가 볼 때 오늘 본문에 언급되는 사람들은 방금 말씀드린, 교회 안의 두 부류에 모두 해당됩니다. 다시 말해, 애초부터 거듭나지도 않았으면서 어릴 적부터 부모나 친구의 권유로 마지못해 종교 생활하는 자들과, 그리고 예전에 분명하게 거듭난 체험은 있지만 현재 세상의 영에 미혹되어 일시적으로 거의 불신자처럼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는 당시 디모데가 목회하던 에베소 교회 안의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이 앞서 말한 그 두 부류 모두에 해당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없으면서 참 신자인 척하는 부류, 또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이단자들에게 미혹되어 일시적으로 진리를 대적하게 된 부류를 가리킵니다. 

아무튼 이 두 부류의 특징은 우선 “경건의 모양”(μόρφωσιν εὐσεβείας)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애초부터 거듭난 체험이 없는 사람도 오랜 기간 동안 교회의 예배행위나 여러 의식에 노출되다 보면, 참 신자와 거의 동일한 모습으로 “경건의 모양”을 무의식중에 습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경건의 모양을 보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닥쳐오면, 항상 자신의 욕망을 위해 무언가를 선택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마저도 자신의 양심을 평안하게 해 주는 수단 정도로 생각해 버립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주님의 십자가가 자기 위안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역시 경건의 모양은 갖추고 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경건의 모양이 어떤 것인지 알며, 한때 경건의 능력을 가지고자 노력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거짓 교사들, 즉 이단자들의 거짓 가르침에 미혹되어 일시적으로, (물론 그 기간이 언제까지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불신자의 영적 상태와 거의 다를 바가 없이 살아갑니다. 자기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채, 자신의 욕망에 따라 무언가를 선택합니다. 말씀을 향한 선한 의지가 조금 살아 있을 때에는 양심의 가책이라도 받는데, 그 선한 의지가 거의 소멸된 상태가 되면, 신앙적 양심의 가책도 거의 받지 않습니다. 참으로 자기 양심에 화인 맞은 것처럼 살아갑니다. 

아무튼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6절에 나오듯이,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그런 부류에 속한 자들입니다. 여기에서 “어리석은 여자”(γυναικάρια)란, 거짓 교사들에게 ‘잘 속아 넘어가는 여인들’(gullible women, NKJV)을 가리킵니다(Thomas D. Lea, NAC: 1,2 Timothy, Titus).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남편이 밖에 일하러 나간 사이에, 거짓 교사들이 집요하게 집으로 침투해서 여인들을 교묘하게 미혹하는 행태가 있었습니다(존 스토트, 『BST 시리즈: 디모데후서 강해』). 그들의 이런 은밀한 수법은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를 미혹했던 뱀의 수법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사탄에 사로잡힌 멸망의 자식들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여인들은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긴 하지만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6-7절). 그렇기 때문에 이런 어리석은 여자들도 (일시적이면 좋겠지만) 같은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8절에 나오는 얀네와 얌브레 같은 사람들도 동일한 부류에 속합니다. 모세를 대적한 그들의 이름이 구약성경에 나오진 않지만, 바울은 유대인의 전통 문서들을 통해 그들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John Calvin, William Hendricksen).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대적하고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며, 또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입니다(8절). 오늘날로 치면, ‘ㅅㅊㅈ’와 같은 사악한 이단들을 가리킵니다.

놀랍게도(?) 본문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나타낼 때는 특별한 외적 형식을 가지게 됩니다. 외적 형식과 참된 경건의 관계는 몸과 영혼의 관계와 비슷합니다(Charles H. Spurgeon). 다시 말해, 참된 경건은 외적인 형식이 없이 표현될 수 없으며, 외적인 형식만 있는 참된 경건도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청년(성도) 여러분, 우리는 ‘교회 개혁’이라는 명분 아래, 형식을 무조건 좋지 않은 것이라 하여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형식적’이라는 말 자체를 굉장히 부정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우리의 신앙에는 ‘형식’이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신앙의 형식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3장과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화 있을진저”라는 강한 어조로 질책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11:42). 

여기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이것도 행하고”, 즉 경건을 표현하는 외적 형식인 “십일조”도 행하고, 또한 “저것도”, 즉 그 외적 형식에 담긴 경건의 의미인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경건을 담아내는 외적 형식(경건의 모양)이 필요 없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본질’이라는 명분 아래 ‘형식’ 자체를 거부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교회 개혁’이라고 생각하면 완전히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물론 성경에도 없는 온갖 외적 형식으로 경건의 능력과 전혀 상관없는 것들은 당연히 없애 버려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경건에 유익이 되는 외적 형식들을 모두 없애 버리면 참으로 곤란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한번 적용해 봅시다. 사랑하는 청년(성도)들이여, 여러분은 과연 경건의 능력을 드러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 다시 한 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내 삶에 과연 “경건의 모양”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거짓 교사들과 거짓 신자들은 경건의 모양이라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여러 규례들을 지켰고, 온갖 율법 조항들을 만들어 내어 금욕주의적 삶을 살았으며, 외적으로 볼 때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종교적 행위들은 철저히 자신들의 의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도 그들이 갖추었던 외적 형식, 즉 “경건의 모양”이라도 갖추고 있는지부터 한번 살펴봐야 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5절)라는 사도의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경건의 모양은 필요 없고 경건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경건의 능력을 담아내는 최소한의 경건의 모양이 당연히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당시 사도가 보기에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누구나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 속에 몰래 침투한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도 참 성도들과 동일하게(?)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음을 그가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는 경건의 모양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생활’에 열중하는 모습입니다. 매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고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헌금생활도 열심히 하는데, 이것들은 그들에게 신앙이 아니라 종교일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런 행위들을 다른 사람에게 ‘신실하게’ 보여 줌으로써 존경과 좋은 평판을 얻으려는 데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

바울 당시에도 그랬겠지만, 오늘날에도 몰래 침투한 거짓 교사들은 보통 더 뜨겁게 교회생활을 합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 저희 학교에 ‘대학교회’가 세워졌는데, 이곳을 섬기려고 찾아온 두 명의 청년이 처음부터 굉장히 뜨겁게 교회를 섬겼습니다. 여느 청년들과는 달리 찬양 팀 멤버로서 참 헌신적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몰래 침투한 ㅅㅊㅈ 추수꾼이었습니다. 이들은 본문에서 사도의 증언대로, 경건의 모양을 뚜렷하게 갖추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참 신자들과 비교해 봐도 전혀 차이가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관심사는 경건의 모양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행위에만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엇비슷한 모양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의 관심은 경건의 모양을 드러내게 하는, 기저(基底)에 깔린 경건의 능력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계신 청년(성도)들에게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과연 경건의 능력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경건의 능력이라고 해서 뭔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칼빈의 말대로, 경건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이 하나로 결합된 것입니다. 따라서 경건의 능력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일상생활 가운데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도 겉보기에는 참 신자들과 동일한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증언대로, 사람은 외모를 보기 때문에(삼상16:7) 그런 자들의 중심을 정확히 꿰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자들에게 속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추수 때까지 많은 경우에 그런 가라지들이 교회당에 나오도록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마13:29).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결정적인 한 가지 증상이 나타납니다. 일단 참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 없는 증상이 나타납니다. 이런 성도들은 주일 성수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마치 어린아이가 밥을 굶은 것처럼 영적 결핍에 허덕이게 됩니다. 그런데 경건의 능력이 없는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은 말씀을 듣지 않고 기도를 하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바른 말씀과 바른 교리와 참된 경건생활을 누리지 못하는데도 이들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증상을 보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안에서 결코 거듭난 적이 없기 때문에, 영적 양식을 공급 받지 못해도 자신이 굶어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항상 배우긴 하지만 자기 욕심대로 생활할 뿐이며,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처음부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이들은 우리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고 책망 받을 사악한 자들입니다.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계신 청년(성도)들이여, 여러분이 소유한 경건의 능력이 일상생활 가운데 더욱 드러나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날마다 살피며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또 자기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거짓 교사들처럼 경건의 능력을 부인한 채, 자기 욕심에 사로잡힌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청년(성도) 여러분, 내일이면 또 다른 한 주가 세상 가운데 시작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경건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지, 이번 한 주간에 또다시 판가름 나게 될 것입니다. 매주 교회당에 있을 때는 경건의 모양으로 서로를 대하지만, 세상 가운데 여러분이 살아갈 때는 경건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대할 것입니다. 본문 8-9절에 나오듯이, 믿음에 관하여 버림받은 자처럼 살다가 자신의 어리석음이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폭로되지 않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겸손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적인 경건의 모양과 함께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경건의 능력을 아울러 겸비(兼備)하시는 복된 청년(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경건의 모양과 능력(디모데후서 3:1-7)


여러분은 왜 예수를 믿으십니 까? 저는 제가 삶에 대하여 무지하 고 무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다른 피조 물에 비교하면 제법 아는 것도 많고 할 줄 아는 것도 많습니다. 그런면 에서 사실 우리 인간과 비교될 수 있는 피조물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 습니다. 인간 다음으로 똑똑하고 유 능한 피조물이 무엇인지 정확히 잘 모르지만 그것이 아무리 똑똑하고 유능하다고 하여도 우리 인간과는 정말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 인간은 아주 월등한 존재요 탁 월한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을 가리 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 말이 맞습 니다.

사람은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동물은 아니지만 자동자라는 것을 만들어 세상에서 가장 빨리 달 릴 수 있는 동물이 되었습니다. 사 람은 날지 못하는 동물이지만 비행 기를 만들어 세상의 그 어느새 보다 더 높이 더 멀리 그리고 더 빨리 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강과 바다를 헤엄치는데 있어서 강과 바 다의 그 어떤 물고기보다 무능하지 만 우리 사람들은 배와 잠수함을 만 들어 강과 바다의 그 어떤 물고기 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멀리 그리 고 더 많은 짐을 싣고 물위와 물속 을 다닐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 다.

정말 우리 인간들이 하는 일들과 만들 것들을 생각해보면 우 리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에 스스로 놀랄때가 많습니다. 우주를 날아 다니는 위성 들. 컴퓨터와 그 컴퓨터가 수행하는 여러 가지 기가막힌 일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전쟁 무기들과 그 무기들의 파괴력과 정확함만 생각하 여도 우리 인간의 능력이 얼마나 뛰 어난 것인가를 금방 알 수 있습니 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치명적이리만큼 무지하 고 무능합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가 구원이라고 부르는 생명과 그 생명 의 질 즉 다시 말해서 행복하고 만 족한 삶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능하 고 무지한 존재들입니다.

컴퓨터 대단한 물건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기쁨과 평 안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 엄청 난 기능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컴퓨 터가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는 것입 니다. 우주를 날아 다니는 여러 위 성들 참으로 대단한 것들이지만, 그 높은 곳에서 땅에 있는 개미까지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 만 그 또한 우리의 생명과 행복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고통을 받으며 불행하게 사는 이유 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다시한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 니하며 배반 하여 팔며 조급하 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 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 의 모 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격 게 되는 이유는 자기만 사랑하여 자 기를 사랑하기 위하여 남을 미워하 고 훼방하며, 돈을 사랑하여 돈 때 문에 나쁜 짓을 하고 그 때문에 다 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고, 교만 하여 남을 깔보아 다른 사람의 마음 에 깊은 상처를 입히며, 자기를 사 랑하여 모든 것을 희생한 부모에게 까지도 불순종하고 감사할 줄 모름 으로 사랑과 희생을 우스운 것으로 만들며, 거룩하지 못한 것을 좋아하 여 스스로의 삶을 돼지 우리의 돼지 보다 더 더럽히며, 무정하여 외로운 세상을 만들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 하여 언제나 지나친 복수로 불안한 세상을 만들며, 절제할 줄 모르는 끝없는 욕심으로 환경을 파괴하고 경제 질서를 어지럽히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악한 세상을 만들어 세상과 사람을 악의 노예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그와 같은 문제는 컴퓨터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하늘 높은 곳에 떠있는 위성으로도 해결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인간은 생 활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능력이 있 으나 보다 근본적인 생명에 대하여 는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입니다.

욥기 38장에 보면 욥에 대 한 하나님의 질문이 나옵니다. 퍼 부으시듯 여러 가지 질문을 욥에게 하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그 준승을 어디에 띄웠는 지 네가 아느냐?"

"까마귀 새끼가 배가 고파 오락 가락 할 때 네가 그에게 먹을 것을 주었느냐?"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 느냐?"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 같 이 넘쳐 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

이 모든 질문을 요약하면 질문은 크게 두가지 유형으로 구분 됩니다. 첫째는 '네가 할 수 있느 냐?'는 유형의 질문이고, 둘째는 ' 네가 아느냐?'는 유형의 질문입니 다. 그와 같으신 질문에 대하여 욥 과 우리가 하나님께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무지함과 무능함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무지함과 무능함을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그 와 같은 질문을 욥과 우리에게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질문을 하시는 도중 욥기 40장 14절에서 하나님은

"그리하다면 네 오른 손이 너를 구 원 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다면'의 뜻 이 무엇입니까? 네가 이 모든 것을 알고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면, 다시말해서 네가 모든 것을 알고 모 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라면 이라 는 뜻입니다. 네가 정말 그렇다면 네가 말하는대로 네 오른 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나도 인정해 주시 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컴퓨터와 위성과 비 행기와 자동차와 같은 것들을 만들 어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 들을 하면서 살아도 우리 인간은 여 전히 생명과 그 생명의 구원에 대하 여 전적으로 무지하고 무능한 존재 입니다. 저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저 는 제가 제 삶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능하고 무지한 존재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나와 우리 인간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나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항상 기뻐하 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사는 축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저는 이 세상이 절대로 우 연히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 습니다. 저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믿고 있습니 다. 이토록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살 아있는 것들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그리고 진화한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은 정말 마귀가 들리지 않고는 생 각할 수 없는 억지입니다.

저는 이 세상이 한 분 창조 주에 의하여 창조된 것임을 믿습니 다. 저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 주가 계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 렇지 않으면 이 세상을,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존재와 생 명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세상이 한 분 창조주에 의 하여 창조된 것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창조주가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로 시작되는 사도신경은 정말 저의 신 앙고백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 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습니 다.

나는 하나님께 능력이 있으 심을 믿습니다. 때문에 내가 하나님 을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면 비록 나 는 약해도 하나님의 강하신 능력이 나의 것이 되어 골리앗과 같은 세상 도 이겨내며 사망의 움침한 골짜기 와 같은 곳에서도 해 받음음을 두려 워하지 아니하고 푸른 초장의 양과 같이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믿습니다.

나는 생명이 주께 있음을 믿습니다. 나는 능력이 주께 있음을 믿습니다. 나는 나의 구원이 하나님 께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세상과 환경을 바꾸실 수 있는 능력 이 있으십니다. 때문에 나는 나의 세상과 나의 삶의 환경을 위해 하나 님께 기도합니다. 몸이 약할 때 건 강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나는 하나 님께 치유의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 다. 암과 같이 무서운 질병도 하나 님이 한 번만 손대 주시면 단번에 나을 줄을 저는 믿습니다. 저는 성 경에 예수님께서 귀머거리와 소경과 문둥병자와 그밖의 모든 병자들을 고쳐주셨다는 것을 믿으며 예수님께 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때문 에 저는 물질이 부족할 때 물질의 넉넉함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저는 저에게도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났 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저는 늘 가 난하고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 님께서 때마다 시마다 먹여주시고 입혀주시고 인도해 주셔서 오늘 여 기에 까지 이르를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세상과 환경 을 바꾸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 음을 믿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합니다. 미신적이라고 생각하실는지 모르나 저는 아이들이 수양회를 할 때 날씨를 위하여 기도 하고 길이 막혀서 중요한 약속 시간 에 늦게 될 경우는 시간에 늦지 않 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게 해달라 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 세상 과 환경 보다 더 중요한 사람을 바 꾸시고 변화시키시는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삭개오를 변화 시키시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변화 시키시는 능력이 주께 있음을 믿습니다. 다말과 라합과 룻 그리고 밧세바를 변화시켜 예수님의 족보에 오를 만큼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시 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바 로 능력이 나 같은 사람을 목사가 되게하여 하나님의 귀한 사역자가 되게하셨음을 저는 믿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어도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지 않습니 다. 하나님께는 십자가상의 강도를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하시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구원은, 기쁨과 감 격이 넘치는 천국의 생활은 환경이 바뀔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 리 사람이 거듭나고 변화할 때 이루 어지는 것입니다.

자기만 사랑하던 사람이 하 나님과 세상과 이웃을 사랑할 줄 아 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악 한 사람이 선하게 세상 욕심으로 무 절제한 생활을 하던 사람이 경건하 고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 바뀌 어 질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이 하나 님께 있으며 그와 같은 변화가 정말 우리의 삶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 꾸어 놓는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구원의 능력이 주께 있음을 저는 믿 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세상의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 상은 우리에게 재미와 편안함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에게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주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 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 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하나님의 능력은 믿음의 생 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 믿음의 생활을 오늘 본문은 경건 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 건한 믿음의 생활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경건한 생활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쉽게 기도와 말씀과 찬송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찾는 자에게게 찾게 하시고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문을 열어 주 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였습니 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능력을 간증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기도 에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찾을 수 있 습니다. 기도하면 세상의 그 어떤 문도 열 수 있습니다. 기도에 하나 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사람의 심령 골수를 쪼개 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은 이 우주 만물의 식입니다. 식을 세우면 답은 저절로 나옵니다. 길을 찾으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시 간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 들은 도를 닦고 철학을 하였던 것입 니다. 도를 닦음은 길을 찾음으로 철학을 함은 삶의 식을 찾고자 함이 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찾던 그 식과 길이 바로 말씀안에 있습니다. 말씀이 곧 길이고 말씀이 곧 식입니 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때로는 어렵고 힘들지만 그러나 말씀대로 살면 결국 모든 삶의 문제가 풀립니 다. 저는 말씀이 능력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씨름을 할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을 저는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사탄은 말씀대로 살다가믄 밥굶기 딱 좋다 고 우리를 속이지만 아닙니다. 그렇 지 않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 력은 말씀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기를 원하신다면 말씀 에 집착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속에서 길을 찾고 말씀 속에서 식을 찾을 실 수 있기를 바 랍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읽고 듣고 암송하고 묵상하며 공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 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에 감동 하며 감동할 때 그리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 때 천지를 창조하 신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줄을 저는 믿습니다.

찬송에 능력이 있습니다. 경건의 능력을 이야기할 때 찬송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찬송을 빼놓 고 경건의 능력을 이야기 한다는 것 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뜨겁고 은혜 스러운 찬양을 사모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한국 교회가 이 찬양을 통하여 다시 살아 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찬양 이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을 교회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저는 앞으로 전문목회를 하 려고 합니다. 내년부터 전문목회가 시작될 것입니다. 저는 목회에 은사 가 있는 여러분들과 함께 교회를 목 회하고 싶습니다. 제가 함께 동역하 려고 하는 목회자는 저에게 없는 은 사를 가진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기도의 은사가 있는 동역자 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교구 관리 와 심방에 은사가 있는 동역자가 있 었으면 좋겠습니다. 구제와 봉사에 은사가 있는 동역자도 필요하고 선 교에 은사가 있는 동역자도 필요합 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제가 간절 히 바라고 기도하는 동역자중에 하 나는 찬양에 은사를 받은 목회자입 니다. 찬양만 전문으로 하는 사역자 가 능력있는 교회를 위하여 절대적 으로 필요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 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 다. 비록 우리는 약하지만 그래서 이 강하고 무서운 세상에서 늘 넘어 지고 실패하는 존재들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모든 부족한 것 을 채우시고 모든 잃어 버린 것들을 찾게 하시며 모든 닫힌 문들을 열게 하시는 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경건한 생 활을 통하여 우리의 것으로 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생활을 통하여 말 씀의 생활을 통하여 찬양의 생활을 통하여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 나님의 능력에 접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와 같 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 고 세상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 저들이 당하는 고통을 그대로 당하 면서 사는 까닭이 무엇인줄 여러분 아십니까? 오늘 본문은 그것을 경건 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 어서 그렇다고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신앙이 너무 형식적이어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너무 건 성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씀입니 다.

하나님을 믿으십시다. 하나 님만 믿으십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좀더 진지해지고 정직해 지십 시다. 그리고 좀더 간절해 지십시다. 좀더 깊은 기도에 들어가십시다. 좀 더 깊은 말씀에 들어가십시다. 좀더 깊은 찬송에 들어가십니다. 경건의 모양만 갖추지 말고 경건의 능력을 경험하십시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면 모르나 그렇지 않다면 이왕 믿는 하나님께 인생을 걸고, 생명을 걸고 매달리십시다. 하 나님의 능력을 구하십시다. 사모하 십시다. 그리하여 경건의 모양만 있 는 교인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소유한 축복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 다. 그리하여 그 하나님의 능력의 증인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