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와 들보


마태복음 7:1-5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누가복음 6:41-42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티는 보라(991) βλέπω Storng number 991

1. 보다.  2. 들보.  3. 큰 건물들
관련 성경 / 보다(마5:28, 눅6:41, 요1:29), 보게 되다 (마12:22), 뵙다(마18:10), 주의하다(마24:4, 막8:15, 눅21:18), 삼가다(막4:24, 눅8:18), 보이다(막8:23), 조심하다(막13:9, 고전8:9), 돌아보다(눅9:62), (눈이)밝아지다(요9:7).

들보는 깨달으라(2657) κατανοέω Storng number2657

1. 주목해보다.  2. 보다.  3. 생각하다  
Pronunciation [ katanŏĕō ]  
Etymology  / 미완료 κατενόουν, 제1부정과거 κατενόηασ, 2596과 3539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깨닫다(마7:3, 눅6:41), 생각하다(눅12:24, 27, 히3:1), 알아보다(행7:31,32), 보다(행11: 6, 약1:23,24), 알다(행27:39, 롬4:19), 돌아보다(히10:24).

  • 티는 작은 것이고 들보는 큰 것이다. 
    남을 아주 정죄하는 그것은 벌써 큰 죄이다. 
    그 뿐 아니라 그가 남을 아주 정죄하기 좋아하는 것을 봄녀 그의 생활이면에도 여러가지 다른 죄과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업을 위하여 인물을 비판하여 혹은 채용 혹은 퇴직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아주 정죄하는 것은 죄이다.

    헬라어의 ‘크리노’(비판하다, 판단하다)의 뜻은 ‘정죄하다’라는 의미를 동반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행위는 결국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여 잘잘못으로, ‘정죄’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평가하다 보면 결국 행위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사람됨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게 마련이고요. 그러나 사람을 정죄하고 평가하는 권한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까요. 1절의 “너희가 비판(‘판단’이라는 번역이 더 적실)을 받지 아니하려거든...”이라는 종속절은 사람으로부터의 판단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판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심판과 정죄를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κρίνω Strong number2919

    1. 나누다.  2. 판단하다.  3. 결정하다
    Pronunciation [ krinō ] 
    관련 성경  /  고발하다(마5:40, 고전6:6), 비판하다(마7:1), 심판하다(마19:28, 눅19:22, 요3:17, 계18:8), 정죄받다(눅6:37), 판단하다(요8:16, 롬2:1), 다스리다(눅22:30), 심판받다(요3:18, 벧전4:6, 계20:12), 재판하다(요18:31), 결의하다(행3:13, 21:25), 작정하다(행20:16, 고전2:2, 딛3:12), 심문받다(행23:6, 24:21, 25:20), 판단받다(롬3:4, 고전11:32), 정죄하다(롬14:22), 결심하다(고후2:1).

    티와 들보의 교훈

    1.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라
        - 다른 사람의 티는 보고 나의 들보는 깨달아야 한다.
       - 소크라테스 ; 너 자신을 알라(know thyself) 그노티 쎄아우톤(γνῶθι σεαυτόν)

    2. 비판하는 것은 정죄하는 것이다
       -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없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  공자 ;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곧 앎이다.

    metacongnition
    ˌmedəˌkäɡˈniSH(ə)n
    메타인지 

    자기객관화. 1970년대에 발달심리학자인 존 플라벨(J. H. Flavell)이 창안한 용어로, 남의 지시 이전에 스스로 자기 생각· 평가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을 말한다. 상위인지, 초인지라고도 한다. 갈등 관계에서 이 능력이 발휘될 경우 반성, 사과, 화해 등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고, 메타인지가 전략적 사고와 합쳐 이상적으로 발휘된다면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다.

    자기 성찰과도 연결된다.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이나 지식이나 말·행동 등에 대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게 맞는가 아닌가 스스로 검증을 거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내가 맞는 건가 하면서 스스로 의심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자신의 정신 상태, 곧 기억력이나 판단력이 정상인지를 판단하는 데에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술을 먹었을 때 자신의 발언과 행동이 혹시 잘못되지는 않을지 생각해 보는 사람이라면 뛰어난 지성을 발휘한 것이다.

    이 능력이 부족할 경우 암기력과 무관하게 학습 능력에 관련하여 장애가 생길 수 있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판단했으므로 암기나 기억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자칫 잘못 실행하면 셀프 가스라이팅을 거쳐 올바르지 못한 가치관을 가질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일곱
    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습니다.

    1. 우리는 모든 사실을 다 알지는 못한다

    정당한 비판을 위해서는 모든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제한된 사실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제한된 사실만 알고 있다면, 우리는 비판은 늘 불완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비판은 사실에 기초해야 하는데, 제한된 사실로 어떻게 올바른
    비판을 할 수 있겠습니까?

    2. 우리는 그 동기를 다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누군가를 비판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동기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나 말, 표정을 통해서 그 동기를 100%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동기란 내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기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비판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동기를 다 이해할 수 없는 만큼 우리는 비판을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3. 완전히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

    인간의 판단은 항상 객관성과 주관성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판단이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각자의 판단은 늘 어느정도 주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의 판단처럼 다른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판단을 할 때에만 그것은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을 비판하고자 할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의 주관성이
    개입된 것이라는 점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4. 상황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

    어떤 사실이나 사건은 모두 상황맥락적입니다.
    동일한 사실도 어떤 상황에서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유명한 비트겐슈타인의 예를 봅시다. 미장이가 벽돌을 쌓다가 조수에게 “벽돌!”
    하고 외치면 그것은 “벽돌을 가져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만약 공사장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에게 “벽돌!”하고 외치면 그것은
    “떨어지는 벽돌을 피하라”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쉽게 누군가를 비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5. 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

    우리의 인식은 늘 제한적입니다.
    제한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자 할 때 우리는 늘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지 못한 어떤 부분들이 있고 그것이 칭찬받아야 할 부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불쌍히 여겨야 할 부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이 정말 드러내기 힘든 장애를 가졌거나
    남모르는 고통을 가졌다면, 우리의 비판은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6. 우리는 편견이 있으며 시야가 흐려질 수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편견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관성보다 훨씬 더 우리자신을 슬프게 하는 모습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비판하려고 하는 상대방에 대한 첫인상이 편견으로 작용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비판하려는 상대방에 대해서 주위 사람들이 평가를 내린 것이
    편견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편견이 있는 한 우리의 평가는 사실에
    근거한 평가가 될 수 없습니다. 이미 평가를 내려놓고 거기에 필요한 사실들만을
    열거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7. 우리 자신은 불완전하며 일관성이 없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늘 불완전합니다. 특별히 일관성이 없습니다.
    C S 루이스는 자신이 가르치던 옥스퍼드 대학원 학생이 일관성없는 태도를
    가졌던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 학생은 저명정치인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떤 파티에서 그 정치인이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 칭찬하자, 그 다음부터는
    그 정치인에 대해서 우호적인 시각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완전하며 일관성이 없는 것이 그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은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중에 아무도 비판하고자 하는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 유혹 속에서 쉽게 험담과 비판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비판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을 간단히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다면, 위에서 언급한 일곱가지 근거를 늘 생각하십시오.
    비판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특징 말씀의 기갈 사랑의 고갈 믿음의 결핍


    마지막 시대의 특징

    사랑의 고갈(苦渴) 마태복음 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Because of the increase of wickedness, the love of most will grow cold.




    불법(*, 아노미아) -
     부도덕성과 무질서적인 방종을 가리키는 말로서 전통적 규범이나 윤리적 가치 기준이 상실됨을 말한다. 
    특히 본문에서는 진리와 신앙이라는 미명하의 온갖 비신앙적 작태(作態)와 방종과 타락을 가리킨다(살후 2:3, 7, 8). 
    한편 오늘날 이러한 부도덕적 사회 현상을 가리켜 '아노미현상'이라고 지칭한다.

    사랑이 식어지리라
    여기서 '식어지다'(*, 프쉬게세타이)는 '숨쉬다', '싸늘해지다'는 뜻의 '프쉬코'(*)에서 나온 말로서 '싸늘한 숨을 쉬다' 또는 '차가워지다', 
    그리고 좀 더 심층적으로 '해로운 바람으로 인해 영적 열성이 식어지다'(Vincent)등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는 이유는 '아노미 현상', 곧 불법으로 인한 내적인 불화와 균열(龜裂)때문이다. 
    실로 이 구절은 9-11절까지 나타난 교회분열로 인한 결과이며 결론이다. 
    결국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식어지면 8절의 내용처럼 세상의 끝날이 되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된 '사랑'(*, 아가페)이라는 명사는 공관 복음서에서는 눅 11:42과 여기서만 사용되는 말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설명된 데 비해 본문은 형제상호간의 사랑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차이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서 성도가 추구해야만 하는 형제 사랑은 오직 하나님 사랑에 그 기초와 뿌리를 두어야 하는것이다(요일 4:10, 19). 
    그리고 형제 사랑은 곧 하나님 사랑의 확실한 발로인 것이다. 
    여하튼 모든 율법, 모든 의식(儀式), 모든 성전의 화려함과 웅장함도 사랑이 식어지면 끝이 되고 만다(고전 13장).

    믿음의 결핍(缺乏)누가복음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I tell you, he will see that they get justice, and quickly. However, when the Son of Man comes, will he find faith on the earth?



    속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타케이'(*)는 일반적으로는 아주 짧은 간격 뒤에 곧 일어날 사건을 지시한다. 
    그러나 때로는 어느 정도의 기간이 흐른 후 '갑자기' 어떤 일이 발생하리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비교, 계 22:20의 '타퀴'(*). 어쨌든 이 말은 하나님의 응답이 조속히 혹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을 시사한다.

    믿음을 보겠느냐 

    - 여기서의 믿음은 풀루머(Plummer)의 주장대로 그리스도로서의 인자에 대한 믿음일 수도 있고 
    또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않는 기도의 자세를 견지하는 실천적 믿음일 수도 있다. 
    또한 이 말은 인자의 재림이 지연됨에 따라 많은 주의 제자들이 박해의 시대 속에서 낙망하여 허탄함에 빠지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결국 이 말 속에는 주의 재림이 늦어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세상 풍조에 휩쓸려 신령한 믿음의 길을 포기하게 되리라는 예측이 담겨 있다. 
    이 점에 관해 주님은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경고하신 바 있다(마 25:5). 
    하지만 애굽에서의 오랜 종살이로 인해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렸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끝내 출애굽을 명하셨으며(출 3:10) 
    또한 바벧론 유수(幽囚)로 말미암아 다윗 왕국에 대한 언약이 끊긴 것으로 알고 소망을 잃었던 백성들에게 위대한 귀환은 기필코 성취되고 말았다(출 12:51).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 계획을 만세 전으로부터 차질 없이 하나 하나 성취해 나가셨고 지금도 그 과정에 있는 것이다.

    * 유수(幽囚) / 그윽할 유(), 가둘 수()  
    - 잡아 가둠, 구금(拘禁)


    말씀의 기갈(飢渴) 아모스 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The days are coming," declares the Sovereign LORD, "when I will send a famine through the land-- not a famine of food or a thirst for water, but a famine of hearing the words of the LORD.


    본절은 보다 본질적인 기근의 문제르를 다룬다. 
    즉, 외적인 기근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여호와의 말씀의 기근이라는 것이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 

    '이를지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임'(*)은 '들어오다'는 의미를 가진 '보'(*)의 분사형으로 역동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큰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사람들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셨다. 
    백성들은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상태이다. 
    왜냐하면, 말씀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시 74:9; 애 2:9; 겔 7:26; 호 5:6).
















    은사(恩賜)



    성령의 은사 종류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이사야 11장에 언급된 은사들

    성령의 은사(영적 선물)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교회의 유익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주신 특별한 능력과 기능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곳에서 다양한 종류의 성령 은사가 언급되어 있으며, 주로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그 목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은사들은 개인적 영광이 아닌 공동체의 건덕과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주어진 것으로, 모든 신자는 최소한 하나 이상의 은사를 받았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 목록

    성경에는 성령의 은사에 관한 세 가지 주요 목록이 있으며, 각각은 다른 측면과 기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목록들을 살펴보면 성령의 다양한 은사와 그 목적을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의 은사들

    로마서 12:6-8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은사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1. 예언: "즉석에서 말을 꺼내다" 또는 "하나님의 목적을 해석하기 위해 거룩한 뜻을 선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단순히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은사입니다.
    2. 섬기는 일(봉사): 헬라어 '디아코니안'에서 유래했으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은사입니다.
    3. 가르치는 일: 하나님의 말씀을 분석하고 선포하며, 의미와 맥락을 설명하고 적용점을 알려주는 은사입니다.
    4. 위로(권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따르도록 권면하며, 약해진 믿음을 강건하게 해주는 은사입니다.
    5. 구제(나눔): 자신의 재정, 물질, 시간 등을 다른 사람들과 기쁘게 나누는 은사입니다.
    6. 다스림(지도력):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은사로, 배를 조종하는 사람과 같은 개념을 내포합니다.
    7. 긍휼(자비):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갖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은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의 은사들

    고린도전서 12:4-11과 12:28에서는 더 많은 은사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1. 지혜의 말씀: 삶의 상황 속에서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2. 지식의 말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얻는 통찰력으로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관련된 은사입니다.
    3. 믿음: 하나님과 그의 말씀, 약속에 대한 강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은사입니다.
    4. 병 고치는 은사: 하나님의 능력으로 질병을 치유하는 은사입니다.
    5. 능력 행함(기적):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은사입니다.
    6. 예언: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 전달하는 은사입니다.
    7. 영들 분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인간에게서 온 것인지, 사탄에게서 온 것인지를 분별하는 은사입니다.
    8. 방언: 배우지 않은 언어로 하나님께 말하거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은사입니다.
    9. 방언 통역: 방언으로 말해진 메시지를 일상어로 해석하는 은사입니다.
    10. 사도: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역할을 하는 은사입니다.
    11. 돕는 것(서로 돕는 것): 다른 사람들을 보조하고 지원하는 은사입니다.

    이사야서에 나타난 성령의 일곱 은사

    이사야 11:2-3에서는 메시아(그리스도)에게 부어질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가 언급되며, 특히 가톨릭 전통에서 중요시됩니다:

    1. 슬기(지혜): 하나님과 하나님에 관한 것들을 올바로 판단하고 실천하도록 돕는 은혜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2. 통달(깨달음): 신앙의 진리와 자연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은사로, 성경과 교리의 숨은 뜻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3. 의견(일깨움): 신앙인이 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을 올바로 판단하게 해주는 은혜입니다.
    4. 굳셈(용기): 신앙생활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은사입니다.
    5. 지식: 피조물의 공허함을 깨닫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게 해주는 은혜입니다.
    6. 효경(공경):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자녀로서의 사랑과 모든 사람에 대한 보편적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은혜입니다.
    7. 두려워함(경외):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죄를 피하게 하고 절제의 덕을 실천하도록 돕는 은사입니다.

    성령 은사의 특성과 분류

    성령의 은사들은 그 특성과 기능에 따라 여러 범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은사의 성격에 따른 분류

    1. 말씀 관련 은사: 예언, 가르침, 권면 등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전달하고 설명하는 은사들입니다.
    2. 봉사 관련 은사: 섬김, 돕는 것, 구제 등 실질적인 도움을 통해 공동체를 섬기는 은사들입니다.
    3. 초자연적 은사: 방언, 병 고침, 기적 등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은사들입니다.
    4. 지식 관련 은사: 지혜, 지식, 분별 등 영적 통찰력과 이해를 제공하는 은사들입니다.

    관계에 따른 성령의 열매 분류

    가톨릭에서는 성령의 열매(갈라디아서 5:22-23)도 관계에 따라 분류합니다:

    1.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맺는 열매: 사랑, 기쁨, 평화.
    2. 이웃과의 관계에서 맺는 열매: 인내, 친절, 착함.
    3. 자신 안에서 맺는 열매: 믿음(신뢰), 온유, 절제.

    성령 은사의 목적과 의미

    공동체를 위한 은사

    성령의 은사는 개인의 영광이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유익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주어집니다. 고린도전서 12:7에서는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

    성령의 은사는 다양하지만, 그 출처는 한 분 성령이십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4-6).

    모든 신자를 위한 은사

    성령은 모든 신자에게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는 마치 태양빛이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동일하게 비추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은사와 사역의 연결

    에베소서 4:11-13에서는 사역자들(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이 성도들을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은사가 단순히 개인적 능력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내에서 기능하는 사역적 역할임을 보여줍니다.

    결론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강화하기 위한 목적을 가집니다. 성경에 나타난 다양한 은사 목록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도구로 사용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보여줍니다.

    중요한 점은 모든 은사가 같은 성령으로부터 나온다는 것과,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발견하고 발전시켜 공동체를 섬기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또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는 말씀처럼 더 큰 유익을 위한 은사를 추구하되, 모든 은사 중에서도 사랑이 가장 중요한 열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확장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건설하며,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 4:13) 성장하도록 돕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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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사의 여러 가지 종류와 정의

    A. 은사들의 종류

    <고전 12:8-10>에 기록되어 있는 '영적인 은사'들은 일차적으로 교회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현이며,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행해지는 사역에 필요한 그분의 능력이 초이성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신약에 나타나 있는 '은사들'은 크게 4가지 종류로 구분될 수 있다.

    성경적 맥락에서 헬라어의 용어에 따라 분류해 본다.

    1. "파네로시스" (Phanerosis)/ '성령의 나타남'(고전 12:8-10)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 믿음 치유, 기적, 예언, 영분별, 방언, 방언통역 등.

    2. "디아코니아" (Diakonia)/ '성령의 사역' (고전 12:28)

      :사도, 선지자, 교사, 기적, 치유, 서로 돕는 일, 행정, 방언.

    3. "카리스마타" (Charismata)/ '은혜대로 받은 은사' (롬 12:3-8)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4 ."도마타" (Domata) '성도들을 준비시키는 자들' (엡 4:8-14)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교사.

    5. 기타: 독신 (고전 7:7,8), 자선 (고전 3:3), 손님을 대접하는 일 (벧전 4:9) 등

    B. 각 은사에 대한 정의

    아래에 열거된 27가지 은사는(피터 와그너 박사) 성령의 은사에 대한 정의이다.

    1. 예언 /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하나님의 즉각적인 메세지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성별된 말로 전달하는 역량이다.

    2. 섬기는 일 / 섬기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하나님의 일과 연관된 과업 가운데 충족되지 못한 요청 사항을 확인하고, 그 요청 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자원을 사용하여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돕는 역량이다.

    3. 가르치는 일 / 가르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배울 수 있도록, 몸과 그 지체들의 건강 및 직임에 관계되는 지식을 전달하는 역량이다.

    4. 권면 / 권면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몸의 다른 지체들에게 위로의 말과 조언의 말을 해주어 그들이 실제로 도움이나 치유를 받았다고 느끼게 해주는 역량이다.

    5. 헌금 / 헌금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들이 물질적인 자원을 관대함과 기쁨으로 주님의 일을 위해 바치는 것이다.

    6.지도력 / 지도력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 하는 목표들을 설정하고, 이 목표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되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발적으로 협동하여 이 목표를 달성하도록 하는 역량이다.

    7. 긍휼 / 긍휼을 베푸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리스도인이든 비 그리스도인이든 육체적 정신적 문제를 가지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순수한 자비를 느끼고, 그 순수한 자비를 행동으로 옮겨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반영하는 역량이다.

    8. 지혜 / 지혜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성령님의 마음을 알아서, 주어진 지식을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발생하는 요구 사항에 가장 잘 적용할 수 있는지를 아는 역량이다.

    9. 지식 / 지식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몸의 성장과 번영에 관한 정보와 사상을 발견하고 쌓고 분석하고 명료하게 하는 역량이다.

    10. 믿음 / 믿음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놀라운 확신을 가지고 미래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분간하는 역량이다.

    11. 신유 / 신유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연적인 방법이 아닌, 하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건강을 회복케 하시는 일의 중개자로서 봉사하는 역량이다.

    12. 기적 / 기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관측자들에게는 자연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일로, 지각되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행동의 중개자로 봉사는 역량이다.

    13. 영 분별 / 영 분별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 지체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지 혹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인지 혹은 사단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14.방언 /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신들이 배우지 않은 언어로 하나님께 말하는 역량이고,하나님의 즉각적인 메세지를 받아서 배우지 않은 언어인데도 하나님의 성별된 말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역량이다.

    15. 방언 통역 / 방언 통역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방언을 말하는 사람의 메세지를 일상어로 알려 주는 것이다.

    16. 사도 / 사도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특히 영적인 일애 놀라운 권위를 가지고 여러 교회들을 다스리는 지도자를 맡아 실행할 수 있는 역량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영적인 일의 놀라운 권위란 그 여러 교회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인정되고 평가되는 영적 권위를 말한다.

    17. 서로 돕는 일 / 서로 돕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몸의 다른 지체들의 활동에 주어, 그 다른 지체들로 하여금 그들의 은사의 효율을 증대시키도록 돕는 것이다.

    18. 행정 / 행정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이 역량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한 구성 단위의 장기적, 단기적 목표를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하여 효과적인 계획을 기안하여 실행할 줄 안다.

    19. 복음 전하는 일 / 복음을 전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여량으로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또 그리스도의 몸의 책임 있는 지체가 되도록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역량이다.

    20. 목사 / 목사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신자들의 영적 번영에 대한 책임을 장기간에 걸쳐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이다.

    21. 독신 / 독신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독신 생활을 아무런 지장 없이 할 수 있고, 성적 유혹도 받지 않는 것이다.

    22. 자원하여 궁핍하게 되는 일 / 자원하여 궁핍하게 되는 일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하나님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섬기기 위하여 물질적인 즐거움을 포기하고, 그 특정 사회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동등한 생활 양식을 택하여 사는 것이다.

    23. 순교 / 순교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믿음을 위해서는 죽기까지 고난을 당하면서 기쁨과 승리의 자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24. 대접하는 일 / 대접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숙식의 요구되는 사람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환대하는 것이다.

    25. 선교사 / 선교사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밖의 다른 은사들이 어떠한 것이든, 제2의 문화권에서 전도 활동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역량이다.

    26. 남을 위한 기도 / 남을 위한 기도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이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오랜 기간동안 기도하고, 보통 그리스도인에게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특별한 응답을 많이 받는다.

    27. 귀신을 쫓아내는 일 /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마귀와 악령을 쫓아내는 역량이다.

    각 은사에 대한 정의

    아래에 열거된 27가지 은사는 C.Peter Wagner교수가 분류한 성령의 은사에 대한 정의이다. 

    1.예언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하나님의 즉각적인 메세지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성별된 말로 전달하는 역량이다. 

    2.섬기는 일 

    섬기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하나님의 일과 연관된 과업 가운데 충족되지 못한 요청 사항을 확인하고, 

    그 요청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자원을 사용하여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돕는 역량이다. 

    3. 가르치는 일 

    가르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배울 수 있도록,몸과 그 지체들의 건강 및 직임에 관계되는 지식을 전달하는 역량이다. 

    4.권면 

    권면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몸의 다른 지체들에게 위로의 말과 조언의 말을 해주어 그들이 실제로 도움이나 치유를 받았다고 

    느끼게 해주는 역량이다. 

    5.헌금 

    헌금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들이 물질적인 자원을 관대함과 기쁨으로 주님의 일을 위해 바치는 것이다. 

    6.지도력 

    지도력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 하는 목표들을 설정하고, 이 목표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되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발적으로 협동하여 이 목표를 달성하도록 하는 역량이다. 

    7.긍휼 

    긍휼을 베푸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육체적 정신적 문제를 가지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순수한 자비를 느끼고, 그 순수한 자비를 행동으로 옮겨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반영하는 역량이다. 

    8.지혜 

    지혜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성력님의 마음을 알아서, 주어진 지식을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발생하는 요구 사항에 

    가장 잘 적용할 수 있는지를 아는 역량이다. 

    9.지식 

    지식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몸의 성장과 번영에 관한 정보와 사상을 발견하고 쌓고 분석하고 명료하게 하는 역량이다. 

    10.믿음 

    믿음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놀라운 확신을 가지고 미래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분간하는 역량이다. 

    11.신유 

    신유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연적인 방법이 아닌, 하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건강을 회복케 하시는 일의 중개자로서

    봉사하는 역량이다. 

    12.기적 

    기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관측자들에게는 자연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일로, 지각되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행동의 중개자로 

    봉사는 역량이다. 

    13.영 분별 

    영 분별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 지체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지 혹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인지 혹은 사단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14.방언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신들이 배우지 않은 언어로 하나님께 말하는 역량이고,하나님의 즉각적인 메세지를 받아서 

    배우지 않은 언어인데도 하나님의 성별된 말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역량이다. 

    15.방언 통역 

    방언 통역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방언을 말하는 사람의 메세지를 일상어로 알려 주는 것이다. 

    16.사도 

    사도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특히 영적인 일애 놀라운 권위를 가지고 여러 교회들을 다스리는 지도자를 맡아 실행할 수 있는 역량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영적인 일의 놀라운 권위란 그 여러 교회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인정되고 평가되는 

    영적 권위를 말한다. 

    17.서로 돕는 일 

    서로 돕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몸의 다른 지체들의 활동에 주어, 그 다른 지체들로 하여금 그들의 은사의 

    효율을 증대시키도록 돕는 것이다. 

    18.행정 

    행정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이 역량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한 구성 단위의 장기적, 단기적 목표를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하여 효과적인 계획을 기안하여 실행할 줄 안다. 

    19.복음 전하는 일 

    복음을 전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여량으로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또 그리스도의 몸의 책임 있는 지체가 되도록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역량이다. 

    20.목사 

    목사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신자들의 영적 번영에 대한 책임을 장기간에 걸쳐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이다. 

    21.독신 

    독신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독신 생활을 아무런 지장 없이 할 수 있고, 성적 유혹도 받지 않는 것이다. 

    22.자원하여 궁핍하게 되는 일 

    자원하여 궁핍하게 되는 일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하나님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섬기기 위하여 물질적인 즐거움을 포기하고, 그 특정 사회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동등한 생활양식을 택하여 사는 것이다. 

    23.순교 

    순교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믿음을 위해서는 죽기까지 고난을 당하면서 기쁨과 승리의 자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24.대접하는 일 

    대접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숙식의 요구되는 사람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환대하는 것이다. 

    25.선교사 

    선교사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밖의 다른 은사들이 어떠한 것이든, 제2의 문화권에서 전도 활동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역량이다. 

    26.남을 위한 기도 

    남을 위한 기도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이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오랜 기간동안 기도하고, 보통 그리스도인에게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특별한 응답을 많이 받는다. 

    27.귀신을 쫓아내는 일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마귀와 악령을 쫓아내는 역량이다. 

    은사에 대한 바른 이해

    은사의 정의와 목적, 성경에 나타난 은사

    1. 은사의 정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며 특히 신약의 바울서신에 주로 사용된 언어로서 구원받은 백성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며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 그리고 그리스도를 확연히 드러내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자체의 일원에게 섬김을 위한 특별한 재능의 거룩한 증여라고 정의할수 있다. William. McRae, 『교회에서의 은사활용』. 김의장 옮김. (서울: 엠마오, 1985), 16쪽. 

    이렇게 정의한 근거는 성경에 은사로 표현된 단어가 두 가지 어원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은사’로 번역된 단어가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ος)이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고전12:1) 여기에서 신령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은사의 어원으로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곧 은사는 ‘영적인 것’으로서 신령함이 그 근원이라는 말이다. 두 번째 ‘은사’로 번역된 단어는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12:4)에 카리스마(χαρισμα)인데 그 요소에 있어서 영적 은사는 재능을 말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영적 은사는 재능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William. McRae, 『교회에서의 은사활용』, 17쪽.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은사가 있다’ 롬 12:6 

    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어떤 면에서건 그들이 탁월하게 머리가 좋다거나 일을 효율적으로 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사용하여 주목할 만한 덕을 세우셨고, 그 일이 하나님이 동일한 사역을 다시 하시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 보증이 된다는 뜻이다. J. I. Packer,『성령을 아는지식』, 117쪽. 

    즉 우리의 능력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능력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이 은사이다. 성도가 하는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자신에게 분명하게 덕을 끼치지 못한다면, 그 일을 해내는 우리의 역량을 영적인 은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2. 은사의 목적

    성령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다. 박형용,『교회와 성령』, 148쪽. 

    이는 성도 각자에게 한 가지 이상씩 은사를 주셨다는 사실이 이미 증거하고 있다. 성령의 은사들이 집중적으로 언급된 바울 서신들은 신약의 다른 어떤 책보다 교회를 위해서 기록된 서신들이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설명하는 서신으로 은사를 주신 목적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2) 고 말씀하신다. 이는 성령의 은사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연결시킨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엡 4:13)하게 될 때까지 세워져야 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성령의 은사들을 필요에 따라 주신 것이다. 

    로마서(12:4-8)에서 은사들이 집중적으로 언급된 구절들은 성도들의 활동과 삶을 설명하는 부분중 몸과 지체의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이 되어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4-5).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서로 다른 은사를 주신 것은 다른 직분을 바로 실행함으로 하나의 몸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이다. 

    고린도 전서는 은사 및 다른 문제들로 혼란에 빠진 고린도 교회를 바로 지도하기 위해 쓴 서신으로 은사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풍성을 구하라”(고전 12:7, 14:12)고 하였다. 이 사실은 각 지체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주어졌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 12:12-26절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각 지체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설명하고 있다. 몸의 각 지체들은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몸의 활동을 원활하게 해야 한다. 각 지체들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지체를 위해 존재하며 다른 지체를 경쟁관계로 생각하지 않는다. 각 지체 간에 시기와 분쟁이 있을수 없고 서로 협력하여 몸의 활동을 도와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바울이 신자됨의 믿음을 먼저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영으로 말하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구원은 성도에게 있어서 누구에게나 필수적이요 종말론적이다. 또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한몸이 되었다는 것이다(고전12:13) 성령의 은사와 활용에 앞서 성령과의 인격적 관계를 먼저 언급함으로써 은사의 목적을 좀더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보편적이다. 

    3. 성경에 나타난 은사 

    a.신약성경에 나타난 은사 

    사도바울에 의하여 거의 전문적으로 사용되어 온 이 은사는 죄인을 용서하사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영생을 지칭한 말이다. 롬 6:23 

    이 말은 은혜와는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고 이 은혜는 성령의 역사와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Gehard Kittel,(ed),trans,Geoffery W.Bromiley,『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Vol.Ⅸ(Grand Papids Eerdmans,1974), p. 403. 

    신약은 성령의 은사에 관한 포괄적인 목록을 구체적으로 나누고 있다. 성령의 은사라는 개념이 신약에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실현으로 나타나 있다. 사실 은사는 그 직무가 평범한 것이든 특별한 것이든 간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나타나는 직무의 일종이다. 바울이 은사를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로 사용할때는 이 의미는 하나님의 심판과 유죄 판결에 대치되는 개념으로 사용했으며 이같은 주장이 로마서에 자주 나타난다. William Barklay,『New Testament Words』,(London : S.C.M, 1971),pp.62-63. 

    사람이 하나님에 의하여 본래적으로 타고난 재주를 은사라고 고린도전서 7:7을 들어 말한 윌리암 바클레이의 주장 William Barklay,『New Testament Words』, p 63. 

    에 대하여 윌리암 매크래는 재능 역시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어지는가의 여부에 있어서 재능은 하나님의 은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William. McRae, 『교회에서의 은사활용』, 19쪽. 

    즉 성령을 모르는 불신자들에게도 좋은 재주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교회의 구성원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봉사함에 있어서 직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에 중생한 자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논술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선물로서 교회 봉사에 필수 불가결한 요인이며 이 은사는 사람에게 의해서는 결코 베풀어질수 없고, 예수의 신령한 몸인 교회를 위한 선물이므로 예수께로부터 받을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 교회의 구조적인 조직을 인체 조직에 비교하며 은사의 다양성과 그리고 사역의 다양성을 진술했다. 롬 12:4, 고전 12:12-27 

    은사가 각각 다른 것은 몸의 각 부분이 다른 것처럼 믿음의 공동체 전부를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성도는 한 성령, 한 주님을 모시고 있으며 세례도 하나이기 때문이다.(고전12:4-13) Mack B. stockes,『성령과 크리스챤의 체험』,박선균옮김(서울:성광문화사,1984),58쪽. 

    신약에서 은사에 관하여는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12장, 에베소서4장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 은사들이 잘못 사용되게 되면 교회는 큰 혼란에 빠질 위험에 따르게 된다. 성령에 의해서 성도들에게 필요에 따라 주어지는 은사는 하나님의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다양하게 주어지지만 모든 은사는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에 대하여 통일성을 지녀야 된다고 본다. 

    b. 구약성경에 나타난 은사 

    구약에서 은사라고 부를 수 있는 표현들은 “여호와의 영의 강림”이나 “현존”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서대백과사전 제4권,(서울: 기독지혜사,1977), 98 쪽. 

    . 구약성경에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길게 혹은 짧게 예언의 은사, 기적의 은사, 재능의 은사, 지혜의 은사를 주어 일하게 하셨음을 알 수 있다. 

    4.은사와 재능 

    은사에 대한 정의와 그 구체적인 표현에 비추어 보면 영적 은사와 선천적 재능 사이에는 뚜렷한 구분이 지어진다. 재능을 “어떤 개인의 일정한 소질적, 정신적 능력, 또는 훈련에 의해서 얻는 정신 실현의 능력” 국어사전편찬위원회,『국어대사전』,(서울: 삼성문화사,1988),1397쪽. 

    이라고 볼 때 재능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노력을 통하여 발전시킬수 있으며, 인생의 목표를 효율적으로 성취하는데 큰 유익을 준다는 점에 있어서는 은사와 비슷하다고 볼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능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 것임에 반하여, 은사는 성도들에게만 있고, 재능이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은사는 중생과 더불어서만 주어지는 것이며, 재능이 인간의 육체를 위하여 악의 도구로 사용될수 있는 반면에 은사는 반드시 하나님의 덕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 있어 재능과 다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무엇은 재능이며, 무엇은 은사에 속한 것인가를 구별하기란 매우 힘들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은사와 재능은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퇴폐적인 대중가요 가수가 뛰어난 음악적 재능으로 명성을 얻었다가 그후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회개하여 이번에는 훌륭한 복음성가 가수로 하나님을 찬양했다면 그의 음악적 재능은 어디까지이며, 어디까지가 은사에 속하는가? 이러한 경우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은 “하나님께서 어떤 재능을 택하셔서 그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바꾼후 영적인 은사로 사용한 것 같다”고 말한다. 물론 이는 의미 있는 판단이기는 하지만, 은사란 선천적 재능의 발전된 형태라고 볼수는 없다는 데에 문제가 된다. 박창환 교수는 “재능은 하나님의 제 일차 창조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위하여 주신 것들이고 은사는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새롭게 창조하시는 새 세계에서, 즉 그리스도가 주관하시는 사회에서 작용하게 하시려고 주시는 기능과 역량과 재능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박창환,『성령의 은사와 신앙생활』,(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출판국,1987),24쪽. 

    고 정의 한다. 

    윌리엄 매크래는 다음과 같이 재능과 은사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분류하고 있다. William. McRae, 『교회에서의 은사활용』, 19쪽. 

    결과적으로 은사와 재능을 구별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내용적인 기준을 통한 원칙을 갖는데는 별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본다. 즉 어떤 이의 재능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성령의 능력과 관련될 것일 때 그것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은사인 것이며, 아무리 탁월하고 커다란 유익을 주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밖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재능에 속한 것이다. 즉 관찰할 때 어떤 은사들은 초자연적인 측면이 표면에 나타나고 어떤 은사들은 자연적이요 일상적인 측면이 부각되어, 인간의 재능을 실천하는 것에 불과하게 보일지라도, 그 속에서 성령의 임재를 느끼며,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며,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라면 성령의 은사라고 부를수 있다. 오성춘,『영성과 목회』(서울: 장신대 출판부,1989),160쪽. 

    5.은사의 종류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3-8, 고린도전서 12:8,10, 28-30, 에베소서 4:11에서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4:11에서 은사의 다양한 종류들을 언급하고 있다. William. McRae, 『교회에서의 은사활용』, 44쪽. 

    이중에서 은사주의자들의 주장과 개혁주의 주장과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은사 몇가지에 대해서만 구체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a.예언의 은사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진 계시의 진리를 받아서 말하는 역량이다. William. McRae, 『교회에서의 은사활용』, 46쪽.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만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로 하나님의 뜻을 공포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고영민,『성서원어대사전』,제9권(서울: 기독교문화사,1973),440쪽. 
    “예언”이라는 말의 의미는 “말을 토해 낸다” 혹은 “미리 예고하고 경고하다” 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말한다” 고영민,『성서원어대사전』,252쪽. 
    는 것으로, 미래의 사건과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 전달한다는 뜻이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304쪽. 
    즉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이며,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인간이나 그가 속한 사회의 문제를 드러내어 폭로하며 현재의 각성을 호소하고 미래의 새 일을 선포하며 그 사회속의 실망자에는 위로와 소망을 주고, 무지하고 힘이 없는 자에게는 교육을 담당하며, 우매하고 흔들리는 자에게는 권면과 권고를 주는 사람이다.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예언의 특징들은 첫째. 하나님이 우리의 머릿속에 직접 계시해 주시는 생각이며 다른 방법으로는 그 생각을 알수 없으며 둘째. 예언은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해서 구체적인 지시를 포함할때도 많으며 셋째. 예언을 할때는 구약성경에서 계시를 받을때처럼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인칭 ‘나’를 사용해야 적절하다. 넷째. 예언은 사도시대 교회의 표적 은사였지만 중세교부시대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치유 등 다른 표적 은사들과 함께 교회에서 정지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305쪽. 
    이에 대하여 패커 교수는 예언하는 일은 보편적인 그리스도인의 활동이며, 사도시대에만 예언이 있었다든지 예언이 없었던 시대가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반박한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305쪽. 
    또한 그는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에 선지자들이 때때로 감동을 받아 미래에 대해 말한적이 있지만 마24:15, 행11:28, 21:10, 벧전1:10-12, 계1:3, 22:18 
    예언사역의 본질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이 지금 하시는 말씀을 분명히 전하는 일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예언은 성경시대에는 새로운 계시의 일부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새로운 계시가 아니다고 말한다. 단지 사람들에게 이미 계시된 진리를 적용하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323쪽. 

    b.방언의 은사 
    성령강림의 결과로 방언을 말한 것은 신약성경의 네곳에서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는 오순절에 행2:4,11 
    고넬료의 집에서 행19:6 
    요한의 세례만을 받았던 에베소에 사는 제자들에게 행19:6 
    그리고 고린도에 있는 교회 고전12, 14장 
    에서 일어난 일이다. 
    고넬료의 집과 에베소에서 제자들이 한 방언들은 오순절에 있었던 방언들과 성격상 일치한다. 싱클레어퍼거슨,『성령』김재성 옮김(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1), 243쪽. 
    그러나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에 관해서는 많은 의견들이 있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오순절날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은 모두다 통역과 해석이 요구되어지는 외국어로 보고 있으며 싱클레어퍼거슨,『성령』, 245쪽. 
    찰스 하지 역시 같은 입장에 서 있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295쪽. 
    반면 아브라함 카이퍼는 두 방언 모두를 이해할수 없는 소리로 보았다. 그러나 한가지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의 경우 바울은 방언의 사용을 공적인 용도로 말하고 있으며,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깊은 기도를 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용도로서의 방언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298쪽. 
    또한 패커 교수는 방언에 대한 관련 구절을 다룰 때 최악의 실수는 자기 자신의 견해가 완벽하게 명료하거나 확실하다고 직간접적으로 주장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295쪽. 
    여하튼 방언이 하나님께 집중하고 그분의 임재를 훈련하며 우리 자신을 그분의 영향력 앞에 열어 드리는데 도움을 준다는 면에서 일부 사람들에게는 유익한 하나님의 선물일수 있다고 패커 교수는 지적한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318쪽. 
    또한 그는 설령 오늘날의 방언사용자들이 사용하는 방언이 고린도교회에서 쓰던 방언과 다르다 해도 아무도 그들의 방언을 금해서는 안될 것 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325쪽. 

    c.방언통역의 은사 
    방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말할때에 그것은 알아듣지 못하는 다른 사람을 위해 통역함이 필요했고, 이것도 은사에 속한 것으로 성경은 말하고 있다. 방언 통역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에게 주신 특수한 능력으로서 방언을 하는 사람의 메시지를 일방적인 말로 알려주는 역량이다. 
    즉 이 은사는 결코 배우지 않은 외국의 언어를 자기 나라의 말로 통역하거나 해석할수 있는 능력의 은사이다. William. McRae, 『교회에서의 은사활용』, 91쪽. 
    고린도전서 14:13에서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권면했다. 어째든 바울은 분명히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이 번역이 가능한 의미를 전달하는 듯이 말한다. 고전14:9-13 
    패커 교수는 바울이 기록한 통역의 은사가 회복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위험하기 그지없다라고 평한다. J.I.Packer,『성령을 아는지식』,302쪽. 
    증거가 너무나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은사의 여러 가지 종류와 정의.


    A. 은사들의 종류


    <고전 12:8-10>에 기록되어 있는 '영적인 은사'들은 일차적으로 교회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현이며,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행해지는 사역에 필요한 그분의 능력이 초이성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신약에 나타나 있는 '은사들'은 크게 4가지 종류로 구분될 수 있다.

    성경적 맥락에서 헬라어의 용어에 따라 분류해 본다.


    1. "파네로시스" (Phanerosis)/ '성령의 나타남'(고전 12:8-10)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 믿음 치유, 기적, 예언, 영분별, 방언, 방언통역 등.


    2. "디아코니아" (Diakonia)/ '성령의 사역' (고전 12:28)

      :사도, 선지자, 교사, 기적, 치유, 서로 돕는 일, 행정, 방언.


    3. "카리스마타" (Charismata)/ '은혜대로 받은 은사' (롬 12:3-8)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4 ."도마타" (Domata) '성도들을 준비시키는 자들' (엡 4:8-14)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교사.


    5. 기타: 독신 (고전 7:7,8), 자선 (고전 3:3), 손님을 대접하는 일 (벧전 4:9) 등


    B. 각 은사에 대한 정의


    아래에 열거된 27가지 은사는(피터 와그너 박사) 성령의 은사에 대한 정의이다.


    1. 예언 /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하나님의 즉각적인 메세지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성별된 말로 전달하는 역량이다.


    2. 섬기는 일 / 섬기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하나님의 일과 연관된 과업 가운데 충족되지 못한 요청 사항을 확인하고, 그 요청 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자원을 사용하여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돕는 역량이다.


    3. 가르치는 일 / 가르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배울 수 있도록, 몸과 그 지체들의 건강 및 직임에 관계되는 지식을 전달하는 역량이다.


    4. 권면 / 권면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몸의 다른 지체들에게 위로의 말과 조언의 말을 해주어 그들이 실제로 도움이나 치유를 받았다고 느끼게 해주는 역량이다.


    5. 헌금 / 헌금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들이 물질적인 자원을 관대함과 기쁨으로 주님의 일을 위해 바치는 것이다.


    6.지도력 / 지도력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 하는 목표들을 설정하고, 이 목표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되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발적으로 협동하여 이 목표를 달성하도록 하는 역량이다.


    7. 긍휼 / 긍휼을 베푸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리스도인이든 비 그리스도인이든 육체적 정신적 문제를 가지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순수한 자비를 느끼고, 그 순수한 자비를 행동으로 옮겨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반영하는 역량이다.


    8. 지혜 / 지혜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성령님의 마음을 알아서, 주어진 지식을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발생하는 요구 사항에 가장 잘 적용할 수 있는지를 아는 역량이다.


    9. 지식 / 지식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몸의 성장과 번영에 관한 정보와 사상을 발견하고 쌓고 분석하고 명료하게 하는 역량이다.


    10. 믿음 / 믿음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놀라운 확신을 가지고 미래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분간하는 역량이다.


    11. 신유 / 신유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연적인 방법이 아닌, 하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건강을 회복케 하시는 일의 중개자로서 봉사하는 역량이다.


    12. 기적 / 기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관측자들에게는 자연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일로, 지각되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행동의 중개자로 봉사는 역량이다.


    13. 영 분별 / 영 분별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 지체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지 혹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인지 혹은 사단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14.방언 /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신들이 배우지 않은 언어로 하나님께 말하는 역량이고,하나님의 즉각적인 메세지를 받아서 배우지 않은 언어인데도 하나님의 성별된 말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역량이다.


    15. 방언 통역 / 방언 통역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방언을 말하는 사람의 메세지를 일상어로 알려 주는 것이다.


    16. 사도 / 사도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특히 영적인 일애 놀라운 권위를 가지고 여러 교회들을 다스리는 지도자를 맡아 실행할 수 있는 역량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영적인 일의 놀라운 권위란 그 여러 교회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인정되고 평가되는 영적 권위를 말한다.


    17. 서로 돕는 일 / 서로 돕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몸의 다른 지체들의 활동에 주어, 그 다른 지체들로 하여금 그들의 은사의 효율을 증대시키도록 돕는 것이다.


    18. 행정 / 행정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이 역량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한 구성 단위의 장기적, 단기적 목표를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하여 효과적인 계획을 기안하여 실행할 줄 안다.


    19. 복음 전하는 일 / 복음을 전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여량으로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또 그리스도의 몸의 책임 있는 지체가 되도록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역량이다.


    20. 목사 / 목사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신자들의 영적 번영에 대한 책임을 장기간에 걸쳐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이다.


    21. 독신 / 독신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독신 생활을 아무런 지장 없이 할 수 있고, 성적 유혹도 받지 않는 것이다.


    22. 자원하여 궁핍하게 되는 일 / 자원하여 궁핍하게 되는 일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하나님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섬기기 위하여 물질적인 즐거움을 포기하고, 그 특정 사회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동등한 생활 양식을 택하여 사는 것이다.


    23. 순교 / 순교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믿음을 위해서는 죽기까지 고난을 당하면서 기쁨과 승리의 자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24. 대접하는 일 / 대접하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숙식의 요구되는 사람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환대하는 것이다.


    25. 선교사 / 선교사직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밖의 다른 은사들이 어떠한 것이든, 제2의 문화권에서 전도 활동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역량이다.


    26. 남을 위한 기도 / 남을 위한 기도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이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오랜 기간동안 기도하고, 보통 그리스도인에게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특별한 응답을 많이 받는다.


    27. 귀신을 쫓아내는 일 /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마귀와 악령을 쫓아내는 역량이다. .






    여호와, 야훼 - 엘로힘, 엘 샤다이 / 여호와 라파, 이레, 샬롬,


    여호와 의미

    여호와는 히브리어 יהוה (YHWH)에서 유래했으며, 뜻은 ‘독립적인 존재’ ‘스스로 있는 자’이다. 
    이것을 자존이라 부른다. 
    여호와는 자존자이시다. 
    출애굽기 3:14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의 표현이 ‘야훼’이다.

    •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ויאמר אלהים אל־משה אהיה אשר אהיה ויאמר כה תאמר לבני ישראל אהיה שלחני אליכם׃
    출 3:14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구약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름은 ‘엘’ 과 ‘엘로힘’이다. 
    엘과 복수형인 ‘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능력과 위험을 나타낸다. 
    하지만 여호와는 구원과 심판의 의미가 강하다. 
    종종 ‘야훼 엘로힘’ 처럼 ‘여호와 하나님’으로 함께 나타날 때가 많다.

    יהוה는 자음만 존재하다. 
    원래 히브리어는 모음 없는 자음만 존재한다. 
    2세기 이후 랍비들이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디아스포라 시대가 되면서 히브리음을 잊을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모음을 표기하여 지금이 이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정확한 발음인지도 사실 알지 못한다.

    히브리어 자음 네 개로 이루어진 יהוה는 테트라그라마톤으로 불리며 신성시 되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주님이란 뜻으로 아도나이(אֲדֹנָי)로 표기하고 읽었다. 
    יהוה를 야훼(Yahweh)로 발음할지, 여호와(Jehovih)로 발음할지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여호와는 이름인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의 하나가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름이 갖는 속성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에게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순간 신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위 ‘이름’이란 이름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 사사기 13장 18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 이사야 9장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표기를 하지만 그것은 대명사이지 고유명사가 아니다.

    야훼(Yahweh), 여호와(Jehova)

    ‘야훼’ 또는 ‘여호와’의 뜻은 ‘스스로 있는 자’ ‘자존하는 자’이다. 출애굽기 3:15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라는 구절이 야훼이다. ‘나는 ~이다’는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께 ‘나는 ~’이다’를 사용하면 구약의 여호와를 예수 그리스도로 소개했다.

    • [개역 개정]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NIV] 출 3:14 God said to Moses, “I AM WHO I AM. This is what you are to say to the Israelites: ‘I AM has sent me to you.'”





    엘로힘(אֱלֹהִים, Elohim)

    엘로힘 (Elohim)은 성경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엘' (אל)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복수형으로, 그 뜻과 용법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2. 엘로힘의 뜻과 유래

    • '엘로힘'히브리어에서 '엘'(El, אל)과 복수형 어미 '힘'(im, ים)이 결합된 형태입니다.
    • '엘'은 '강한 자', '신', 또는 '하나님'을 의미하며, 주로 힘과 능력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고대 근동의 다른 민족들이 사용했던 신들의 이름에서도 발견됩니다.
    • 복수형 '힘'은 단순히 복수형의 뜻을 가지기보다는, 존경과 경외를 표현하는 복수형으로 사용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 위대함과 경외를 강조하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엘로힘강력하고 전능한 하나님을 의미하며, 그분이 가진 모든 능력과 신적 특성을 나타냅니다. 히브리어 문법에서 복수형은 하나님이 여러 면에서 능력이 무한하고, 전지전능하신 분임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3. 엘로힘의 용례

    엘로힘은 구약 성경에서 매우 자주 등장하며, 하나님을 지칭할 때 주로 사용됩니다. 또한, 엘로힘은 하나님의 성품, 권능, 그리고 하나님과 관련된 다른 신학적 개념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3.1. 창세기 1:1 (하나님의 창조)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여기서 "하나님"은 엘로힘입니다. 이 구절에서 엘로힘은 창조주로서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고 전지전능한 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2. 창세기 1:26 (하나님의 형상)

    •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창 1:26)

    이 구절에서도 엘로힘이 사용되며, 하나님의 다수성 또는 삼위일체적인 성격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내적 관계다양성을 강조하는 구절로 이해됩니다.

    3.3. 시편 19:1 (하나님의 창조)

    •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 19:1)

    여기서 엘로힘하늘과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와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 구절에서 엘로힘은 창조의 주체로서, 하나님이 만물에 드러난 능력과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3.4. 출애굽기 3:14 (하나님의 이름)

    •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출 3:14)

    이 구절에서 하나님"I AM"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셨고, 이 "I AM"의 개념은 엘로힘자존적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로서 모든 것을 지배하고 주관하는 전능한 분임을 보여줍니다.

    4. 엘로힘의 신학적 의미

    엘로힘은 하나님을 지칭하는 이름 중에서 전능하고, 창조적인 힘을 강조하는 이름입니다. 특히, 구약 성경에서 엘로힘하나님의 창조자, 심판자, 그리고 전능한 통치자로서 나타납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이 창조의 주체로서, 모든 생명과 세계를 지배하시는 주권자임을 강조하며, 그분의 능력, 위대함, 거룩함을 묘사합니다.

    4.1. 하나님의 전능성

    엘로힘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을 상징하며, 그분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고 유지하시는 능력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엘로힘으로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며, 그들의 삶을 주관하십니다. 이 전능함은 하나님의 주권능력을 나타내는 중요한 신학적 개념입니다.

    4.2. 삼위일체와의 관계

    엘로힘의 복수형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본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라고 표현되는 부분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대화와 관계를 의미한다고 이해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26에서 "우리"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임을 암시합니다.

    4.3. 창조와 심판

    엘로힘은 창조주로서 만물의 근원이자 심판자로서도 등장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심판하시며 구속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엘로힘은 이 모든 과정에서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행하시며, 때로는 심판을 통해 죄를 처리하시고, 때로는 구속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5. 엘로힘의 결론적 의미

    엘로힘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전능성, 창조적 힘, 주권을 표현하는 중요한 신학적 이름입니다. 엘로힘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주관하시며, 전능한 심판자로서 모든 일에 대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신 분임을 드러냅니다. 또한, 이 이름은 하나님의 본질적 능력을 나타내며,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내적 관계를 암시하는 중요한 신학적 요소로 작용합니다.

    엘로힘은 단순히 "하나님"을 의미하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함, 창조의 주체로서의 신적 본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단어로,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위엄과 전능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엘로힘(Elohim)

    엘의 복수형으로 창세기 1:1을 비롯하여 수많은 구약에서 사용되었으며, 창조적 능력을 소개하는 곳이나 능력과 위엄을 드러내실 때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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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샤다이(Elohim Shaddai)

    ‘엘샤다이’(Hebrew: אֵלוֹהִים שַׁדַּי, Elōhîm Shaddai)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표현 중 하나입니다. 이 이름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다양한 이름들 중 하나로, 하나님에 대한 심오한 신학적 이해를 제공하며 그 분의 성격과 속성을 나타냅니다. ‘엘샤다이’라는 이름은 여러 가지 신학적 의미와 상징을 내포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1. 엘샤다이의 히브리어 뜻

    ‘엘샤다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에서 엘과 샤다이 두 단어가 합성된 합성어입니다.

    엘(El, אֵל): 이 단어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로, 일반적으로 모든 신성한 존재를 지칭할 때 사용됩니다. 이는 ‘능력 있는 존재’, ‘힘 있는 자’, 또는 ‘권능을 가진 자’를 의미하며, 고대 근동 문화에서 신을 표현할 때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엘’이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권위를 나타내는 핵심 단어로 등장합니다.

    샤다이(Shaddai, שַׁדַּי): ‘샤다이’는 ‘전능한’, ‘모든 것을 충분히 공급하는’, 또는 ‘완전한 능력’을 의미하는 단어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단어는 원래 ‘젖을 먹이는 자’ 혹은 ‘영양을 공급하는 자’와 관련이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과 보호를 상징합니다. ‘샤다이’는 때때로 하나님의 보호자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며, 그 분이 온전한 능력으로 믿는 자들을 보살피고 인도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엘샤다이’는 "능력 있는 하나님", "전능한 하나님"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이는 하나님이 가진 무한한 능력과 전능함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2. 엘샤다이의 성경 용례

    ‘엘샤다이’라는 이름은 주로 구약 성경에서 등장합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방식에서 강력한 존재로 드러나며, 그 분의 전능함을 나타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엘샤다이의 이름은 전능함, 보호, 생명의 공급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하는 구절에 자주 나타납니다.

    2.1. 창세기에서의 엘샤다이

    ‘엘샤다이’는 창세기에서 중요한 용례를 찾을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엘샤다이’로 소개하신 장면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창세기 17:1
      "아브라함이 구십 구 세 되던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엘샤다이)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엘샤다이로 소개하며, 그에게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엘샤다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축복의 근원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다면 그에게 이루어질 약속을 확신할 수 있다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어떻게 그들의 삶을 이끌어갈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2.2. 창세기 28:3에서의 엘샤다이

    • 창세기 28:3
      "그가 하늘의 하나님, 곧 전능하신 하나님(엘샤다이)이 너에게 복을 주사..."

    이 구절에서 이삭은 야곱에게 엘샤다이의 축복을 구합니다. 여기서 엘샤다이복의 근원이자 능력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의 보호복을 주시는 능력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며, 전능한 능력으로 그들을 지키실 것임을 의미합니다.

    2.3. 욥기에서의 엘샤다이

    욥기에서도 ‘엘샤다이’라는 이름은 종종 등장합니다. 욥기에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심판의 능력을 강조하는 중요한 책입니다. 욥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엘샤다이로 부르면서 욥은 그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을 느끼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복하는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 욥기 5:17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전능자(엘샤다이)의 꾸짖음을 피하지 말라."

    여기서 엘샤다이는 하나님의 전능함과 그 분의 주권적 심판을 나타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그분의 뜻에 맞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징계하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욥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엘샤다이의 상징과 신학적 의미

    ‘엘샤다이’는 단순히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하나님의 능력보호, 그리고 풍성한 공급자로서의 역할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이 이름을 통해 자신이 단순히 능력만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과 자비, 보호와 공급이 결합된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나타냅니다.

    3.1. 전능하신 하나님

    ‘엘샤다이’의 핵심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권능을 나타냅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엘샤다이’로 소개하신 장면에서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삶에서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존재로 나타나십니다. 이 이름을 통해 신자들에게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일으킬 수 있는 변화약속을 이루시는 능력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고자 하셨습니다.

    3.2. 공급자와 보호자

    ‘엘샤다이’는 또한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샤다이’라는 단어가 원래 젖을 먹이는 자, 즉 영양을 공급하는 자와 연결되는 것을 감안할 때, 하나님은 단지 능력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는 존재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이 이름을 통해 그 분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히 공급하시며, 그들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3.3. 믿음의 여정에서의 하나님

    ‘엘샤다이’는 또한 신자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신뢰믿음을 표현하는 중요한 이름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는 이 이름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순종의 기초가 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엘샤다이로서 우리의 삶을 능히 인도하시며,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결론

    ‘엘샤다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전능하시며, 그분의 능력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강력한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성경에서 이 이름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며,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능력을 강조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엘샤다이’는 단순한 힘의 표현이 아니라 사랑과 보호, 복의 공급자로서 하나님을 묘사하는 중요한 이름으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신뢰할 수 있는 성품을 이해하도록 돕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엘 샤다이(El Shaddai)

    원어상으로는 모든 것을 충족시키시는 하나님이지만 문맥상 ‘강하고 능하신 하나님’으로 사용되었다. 번역할 때는 대부분 ‘전능하신 하나님(Almighty God)’을 사용한다. 대부분 ‘엘샤다이’로 사용되었지만 창 49:25처럼 샤다이로만 사용되면 ‘전능자’로 번역된다. 여기서도 역시 채우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미가 강하게 드러난다.

    샤다이만 사용된 구절 : 민 24:4, 민 24:16, 룻 1:20, 룻 1:21, 욥 5:17, 욥6:14,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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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이름

    신학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주제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이름이다. 보통 이름의 신학으로 불리는 이 주제는 교리와는 거리가 있고,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주제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엄밀하게 하나님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은 존재를 규명하고 속성을 한계 짓는 것이기에 하나님은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후에 따로 다루고 오늘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식 또는 이해하는 방식으로서의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자. 각각의 이름은 후에 더 자세히 다루고 여기서는 일반적인 의미 만을 소개한다.

    하나님 이름의 구분

    하나님의 이름은 크게 ‘엘’ 계통과 ‘여호와(야훼)’ 계통으로 나누어져 있다. 여기서 별칭으로 불리는 임마누엘이나 퀴리오스 등은 성부 하나님을 가르키는 동시에 성자 예수님의 별명이기도 하다.

    엘 계통의 이름들

    엘(El)

    창조적 능력을 가진 이름입니다. 엘은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과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신’으로 부르는 단어와 비슷하다. 고대 레반트 문화권에서 엘이라는 단어는 매우 흔하다.

    엘로힘(Elohim)

    엘의 복수형으로 창세기 1:1을 비롯하여 수많은 구약에서 사용되었으며, 창조적 능력을 소개하는 곳이나 능력과 위엄을 드러내실 때 사용합니다.

    엘 엘리욘 / 엘 엘룐 (El Elyon)

    뜻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다. 강력한 하나님을 한 번 더 강조한 것으로 의미는 ‘더욱 강력한 하나님’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창 14:18, 민 24:16, 사 14:13-14

    • 창 14: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엘 로이(El Roi)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창세기 16:32에서 한 번 사용된 것으로 하갈이 도망갈 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그를 돕는다. 이때 하갈은 하나님을 향해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감찰하다는 ‘보다’는 뜻이다. 보다는 뜻의 로이는 성경에서 모두 다섯번 사용되었다. 창 16:13, 삼상 16:12, 욥 7:8, 욥 33:21, 나 3:6,

    • [개역 개정] 창 16: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NIV] 창 16:13 She gave this name to the LORD who spoke to her: “You are the God who sees me,” for she said, “I have now seen the One who sees me.”

    엘 샤다이(El Shaddai)

    원어상으로는 모든 것을 충족시키시는 하나님이지만 문맥상 ‘강하고 능하신 하나님’으로 사용되었다. 번역할 때는 대부분 ‘전능하신 하나님(Almighty God)’을 사용한다. 대부분 ‘엘샤다이’로 사용되었지만 창 49:25처럼 샤다이로만 사용되면 ‘전능자’로 번역된다. 여기서도 역시 채우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미가 강하게 드러난다.

    샤다이만 사용된 구절 : 민 24:4, 민 24:16, 룻 1:20, 룻 1:21, 욥 5:17, 욥6:14, 그 외 다수

    엘 올람(El Olam)

    엘 올람의 뜻은 ‘영원하신 하나님’ 또는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다. 창세기 21장 33절과 이사야 40장 28절에서 사용되었다.

    엘 엘로헤 이스라엘(El Elohe Israel)

    엘 엘로헤 이스라엘의 뜻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야곱이 얍복강을 건넌 후 형 에서를 무사히 만난 후 홀로 남았을 때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그곳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로 붙인 것이다. 하나니님을 부르는 이름이지만 묘한 분위기를 느낀다. 이후 야곱은 디나의 강건 사건이 일어나고 벧엘로 올라가게 된다.

    • 창세기 33장 20절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여호와 의미

    여호와는 히브리어 יהוה (YHWH)에서 유래했으며, 뜻은 ‘독립적인 존재’ ‘스스로 있는 자’이다. 
    이것을 자존이라 부른다. 
    여호와는 자존자이시다. 
    출애굽기 3:14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의 표현이 ‘야훼’이다.

    •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ויאמר אלהים אל־משה אהיה אשר אהיה ויאמר כה תאמר לבני ישראל אהיה שלחני אליכם׃
    출 3:14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구약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름은 ‘엘’ 과 ‘엘로힘’이다. 
    엘과 복수형인 ‘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능력과 위험을 나타낸다. 
    하지만 여호와는 구원과 심판의 의미가 강하다. 
    종종 ‘야훼 엘로힘’ 처럼 ‘여호와 하나님’으로 함께 나타날 때가 많다.

    יהוה는 자음만 존재하다. 
    원래 히브리어는 모음 없는 자음만 존재한다. 
    2세기 이후 랍비들이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디아스포라 시대가 되면서 히브리음을 잊을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모음을 표기하여 지금이 이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정확한 발음인지도 사실 알지 못한다.

    히브리어 자음 네 개로 이루어진 יהוה는 테트라그라마톤으로 불리며 신성시 되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주님이란 뜻으로 아도나이(אֲדֹנָי)로 표기하고 읽었다. 
    יהוה를 야훼(Yahweh)로 발음할지, 여호와(Jehovih)로 발음할지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여호와는 이름인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의 하나가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름이 갖는 속성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에게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순간 신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위 ‘이름’이란 이름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 사사기 13장 18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 이사야 9장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표기를 하지만 그것은 대명사이지 고유명사가 아니다. 
    여호와 엘로힘 엘룐 등은 아버지 선생인 사장님이지 ‘김소똥’ ‘박개똥’이 아닌 것이다.



    야훼 / 여호와

    야훼(Yahweh), 여호와(Jehova)

    ‘야훼’ 또는 ‘여호와’의 뜻은 ‘스스로 있는 자’ ‘자존하는 자’이다. 출애굽기 3:15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라는 구절이 야훼이다. ‘나는 ~이다’는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께 ‘나는 ~’이다’를 사용하면 구약의 여호와를 예수 그리스도로 소개했다.

    • [개역 개정]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NIV] 출 3:14 God said to Moses, “I AM WHO I AM. This is what you are to say to the Israelites: ‘I AM has sent me to you.'”

    여호와 이레(Yahweh Yireh)

    여호와의 이레의 뜻은 ‘여호와께서 나타나신다’이다. 준비되신다는 의역된 것이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치면서 이삭을 대신해 숫염소를 드리면서 부르는 이름이다.

    • 창세기 22장 14절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 닛시(Yahweh Nissi)

    여호와 닛시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시다’이다. 깃발은 승리를 하므로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출애굽시 17장에서 여호수아 아멜렉과 싸울 때 모세가 산에서 기도할 때 승리하였다. 후에 모세는 승리를 기념하여 제단을 쌓고 ‘여호와 닛시'(출 17:15)라 부른다.

    • 출애굽기 17장 15절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여호와 살롬(Yahweh Shalom)

    여호와 살롬 또는 ‘여호와 샬롬’은 ‘여호와는 평화이시다’는 뜻이다. 사사기 6장 24에서 사용되었다.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죽지 않은 것을 보고 놀람과 감사함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을 보는 자는 모두 죽지만 자신이 죽지 않아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부분이다.

    • 사사기 6장 24절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여호와 사바오트(Yahweh Sabbaoth)

    여호와 사바오트는 ‘만군의 여호와’라는 뜻이다. 만군은 수많은 군대, 이스라엘의 전체를 뜻한다. 이스라엘은 군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 출애굽기 7장 4절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여호와 마카데쉠(Yahweh Maccaddeshem)

    여호와 라아(Yahweh Raah)

    여호오 라아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뜻이며 시편 23편 1절에서 다윗이 고백한 표현이다. 하나님을 목자로 이스라엘을 양으로 비유하는 부분은 성경에 상당히 빈번하게 등장한다.

    • 시편 23장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 라파(Jehovah Rapha)

    치료하시는 여호와이다. 출애굽기 15:26에서 사용된 표현이다. 마라의 쓴 물 사건(출 15:22-27)에서 나오는 호칭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을 치료하신다는 표현이다.

    • 출 15: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여호와 치드케누(Yahweh Tsidkenu)

    여호와 치드케누는 ‘여호와는 우리의 의가 되신다’이다.

    여호와 엘 게몰라(Yahweh El Gemola)

    여호와 엘 게몰라는 ‘여호와 보복하시는 하나님’이다. 예레미야 51:56에서 사용된었다.

    • 렘 51:56 곧 멸망시키는 자가 바벨론에 이르렀음이라 그 용사들이 사로잡히고 그들의 활이 꺾이도다 여호와는 보복의 하나님이시니 반드시 보응하시리로다

    보수 또는 보복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 로마서 12장19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하나님은 보복하신다. 보복은 악에 대한 징벌이다.

    • 신명기 32장 41절 내가 내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이 정의를 붙들고 내 대적들에게 복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할 것이라
    • 신명기 32장 35절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여호와 나케(Yahweh Nakeh)

    치시는 여호와 겔 7:9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뜻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말씀에 대한 불순종, 곧 죄와 악에 대한 심판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 당한다.

    • 에스겔 7장 9절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때리는 이임을 네가 알리라

    여호와 삼마(Yahweh Shamma)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는 거기 게시다’는 뜻이다. 에스겔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으시고 친히 그곳에 계신다 선언하신다. 여호와의 삼마가 의미하는 것은

    • 에스겔 48장 35절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여호와 라파(Yahweh Rapha)

    치료하시는 여호와

    • 출애굽기 15장 26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여호와 엘로힘(Yahweh Elohim) 

    그 외 이름 / 별명들

    아도나이(Adonai)

    아도나이는 히브리인들이 ‘여호와’를 입으로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신하여 사용된 호칭이다.

    임마누엘(Emmanuel)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에 나오는 이 단어는 후에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과 연결한다. 성자 예수님은 성육신을 통하여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심으로영원히 함께 하시게 된다.

    •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크리스토스(Christos)

    메시야의 헬라어가 크리스토스이다. 지금의 그리스도를 말한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1세기 에 태어난 갈릴리 청년이 구약에서 예언한 ‘그 메시아’라는 뜻이다.

    •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 마 27: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 행 5: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퀴리오스(Kurios)

    퀴리오스는 헬라어 ‘주인’이란 뜻이다. 보편적 용어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주’로 종종 부르고 있다. 주인은 하나님께도 사용하고 있다.

    •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마 22: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 요 11: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소테르(Soter)

    소테르는 헬라어로 ‘구주’라는 뜻이다.

    데오스(Theos)

    데오스는 헬라어이며, 구약의 엘로힘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 ‘하느님’ ‘하나님’이란 뜻이다.







    창세기 1장과 예수 그리스도

    성경을 해석하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는 예표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담긴 그리스도를 찾아 해석해 보려고 합니다. 창세기 1장은 천지 창조를 다루는 장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신약 성경과 연결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역할이 담겨 있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창세기 1장에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과 예표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의 주체이심

    창세기 1:1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요한복음 1:1-3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구절은 창세기의 "태초에"와 연결됩니다.
    • 요한복음 1:3은 예수님이 창조의 도구(말씀)로 활동하셨음을 보여줍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 골로새서 1:16-17은 "그(예수님) 안에서 만물이 창조되었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에서 언급되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개념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직결됩니다. 예수님이 말씀(로고스)이시기 때문에 온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 성경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후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2. 빛의 상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창세기 1:3 -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 요한복음 8:12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 창세기의 빛은 물리적 빛만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질서를 가져오시는 하나님의 구속적 역할을 상징하며, 이는 예수님께서 영적 어둠을 몰아내시는 역할과 연결됩니다.
    • 고린도후서 4:6에서는 "빛을 비추셨느니라"는 구절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신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빛'으로 소개합니다. 빛은 진리이며 생명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빛은 피조물로 나타나지만 예수님은 창조되지 않은 빛 그 자체이십니다. 빛은 비추심으로 어둠을 몰아내고 모든 것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그래서 빛은 진리이며, 악(어둠)과 싸우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3.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창세기 1:11 -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 창조 이야기에서 씨앗과 생명체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의 생명 원리를 상징합니다.
    • 요한복음 1:4에서 예수님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묘사됩니다.
    • 요한복음 10:10은 예수님께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4. 하나님의 형상과 예수 그리스도

    창세기 1:26 -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우리"라는 표현은 삼위일체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의 공동 활동을 암시합니다.
    •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소개됩니다(골로새서 1:15).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류와 교제하기 원하셨음을 보여줍니다. '형상'이란 히브리어 첼렘이나 데무쓰는 모두 형상과 이미지로 번역이 되는 단어들로 '닮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육체를 입으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드러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 요 14: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 요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요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 요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5. 안식과 예수 그리스도

    창세기 2:2 -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시니라"

    • 창조의 완성과 안식은 장차 예수님을 통해 제공될 영원한 안식을 예표합니다.
    • 히브리서 4:9-10은 예수님을 통해 참된 안식이 성취됨을 설명합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말씀 "다 이루었다"는 창조의 완성에서 나타난 안식과 연결됩니다.

    6. 성령과 함께 사역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창세기 1:2 -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 성령의 운행은 창조의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그분의 사역을 시작하십니다(누가복음 4:18).
    • 성령과 예수님의 협력은 창조와 구속에서 일관되게 나타납니다.

    7.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구절은 창조의 핵심 도구로 "말씀"을 강조합니다.

    •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Logos)으로 소개되며, 이를 통해 창조와 구속이 이루어짐을 나타냅니다(요한복음 1:1).

    결론:

    창세기 1장은 창조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창조의 주체로서 빛, 생명, 말씀, 안식,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구속의 그림자를 드러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궁극적 구원 계획을 구약의 첫 장부터 우리에게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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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형론과 예표론에 대하여

    성경을 깊이 공부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접하게 되는 것이 모형론과 예표론입니다. 둘은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존재합니다. 모형론(Typology)예표론(Foretelling)은 성경 해석에서 매우 밀접한 개념이지만, 각각 고유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은 성경 해석의 방법인 모형론과 예표론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모형론(Typology)

    • 정의: 구약의 특정 인물, 사건, 제도, 또는 물건이 신약에서 성취될 영적 진리(특히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구속사적 사건)를 미리 보여주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 예를들면
      • 아담 → "둘째 아담"으로 불리는 예수님(로마서 5:14).
      • 모세 → 중재자로서 예수님의 역할을 예표(신명기 18:15-18).
      • 성막 → 하나님의 임재와 예수님의 성육신(요한복음 1:14).

    모형론은 어떤 모형이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형론은 예표론에 비해 정적이며, 존재하는 어떤 형태의 물질과 연관이 깊습니다. 모형론(Typology)은 성경 해석에서 구약의 특정 인물, 사건, 제도, 또는 물건이 신약에서 성취될 영적 진리나 구속사적 사건의 "모형"(type)으로 이해되는 개념입니다. 모형은 실체를 예고하거나 그림자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며, 신약에서 그 실체(antitype)가 완전하게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아담은 “둘째 아담”인 예수님(로마서 5:14)의 모형으로, 아담이 인류의 죄의 원인이 된 것처럼 예수님은 인류를 의로 이끄는 새 창조의 시작을 상징합니다. 또 다른 예로, 구약의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모형으로,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를 보여줍니다(요한복음 1:14, 히브리서 9:11). 모형론은 구약과 신약 간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점진적으로 계시되었음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생각합시다. 모형이 있고, 그 모형은 실체를 반영한다고. 모형은 다양하지만 실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모형론은 그리스도적 성경 해석에 가깝습니다. 아마 아래의 글을 읽어 보시면 좀더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자, 이제 예표론으로 가 보겠습니다. 예표론은 말 그대로 구약의 어떤 사건들이 장차 이루어질 어떤 일에 대한 '예표'라고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표론은 동적이고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2. 예표론(Foretelling)

    • 정의: 구약 성경에서 예언적인 말씀이나 사건이 장차 이루어질 미래의 일을 명확히 지시하거나 상징하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 예를 들면
      • 이사야 53장 → 예수님의 고난과 속죄를 명시적으로 예언.
      • 미가 5:2 → 예수님의 탄생지가 베들레헴임을 예언.
      • 스가랴 9:9 →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것을 예언.

    3. 공통점

    이제 공통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모형론과 예표론의 공통점은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해석이라는 점은 거의 비슷합니다. 방식이 다를 뿐 비슷한 의미로 해석을 하기 때문입니다.

    구속사적 관점

    • 둘 다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며,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보여줍니다.
    • 구약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드러낸다고 봅니다.

    상징과 성취

    • 구약의 인물, 사건, 제도 등이 신약에서 성취되거나 설명됩니다.
    • 구약에서 불완전하거나 그림자처럼 보였던 것이 신약에서 온전한 실체로 드러남.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석

    •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전제(누가복음 24:27, 44)를 바탕으로 합니다.

    이렇게 보면 모형론이든 예표론이든 과거의 모양이나 사건은 모두 실체가 아닌 모형과 예표이고,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또한 과거의 어떤 것들은 실체나 본체인 그리스도를 본떠 만들었거나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법은 구약의 율법이나 모형들은 임시적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현현 또는 강림하셨을 때 모든 것은 빛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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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 vs 야훼

    여호와와 야훼는 둘 다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로, 원어는 히브리어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들을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자음 4글자로만 이루어진 단어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그 단어를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고, 그렇게 수천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원래 그 4단어의 발음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와 야훼는 둘 다 그 4글자의 자음에 모음을 붙여서 읽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둘 다 그 4글자의 단어를 발음했는지 확실하지 않죠. 단지 신학자들은 여호와보다 야훼가 그 4글자의 발음에 더 가깝다고 추측할 뿐입니다. 결국 여호와와 야훼는 둘 다 하나님을 뜻하는 4글자를 추측해서 읽어낸 것으로, 둘 다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1장 7절-

    예수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의 고대 그리스어 (헬라어) 이며, 히브리어로는 여호수와 라고 발음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태복음 1장 21절-



    하나님이 가지신 각각의 많은 이름들은 하나님의 다면적인 특징들 중 각각 다른 측면을 보여줍니다. 성경에 나오는 잘 알려진 하나님의 이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엘 엘로하(EL, ELOAH): “강하고, 능하시고, 뛰어나신” 하나님 (창세기 7:1; 이사야 9:6) –어원학적으로 엘은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창세기 31:29)와 같이 “능력”을 의미하는 데 쓰입니다. 엘은 진실함 (민수기 23:19), 질투 (신명기 5:9), 긍휼 (느헤미야 9:31) 같은 다른 자질들과 연관되지만, 능력을 근본 개념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엘로힘 (ELOHIM): “창조주, 강하고 능하신” 하나님 (창세기 17:7; 예레미야 31:33) – 엘로하의 복수형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수용하는 이름입니다. 성경 첫 문장, 하나님(엘로힘)께서 세상이 있으라 말씀하실 때부터 하나님 능력의 우월성은 명백히 증거됩니다 (창세기 1:1).

    엘 샤다이 (EL SHADDAI): “전능자 하나님”, “야곱의 전능자” (창세기 49:24; 시편 132:2, 5) – 모두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궁극적 권능에 대해 말합니다.

    아도나이 (ADONAI): “주(Lord)” (창세기 15:2; 사사기 6:15) – 유대인들에 의해 죄 많은 인간이 입 밖으로 소리내기엔 너무도 신성한 이름이라고 여겨졌던 야훼 (YHWH)를 대신하여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야훼는 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다루실 때 사용되는 반면, 아도나이는 이방인들을 다루실 때 주로 사용됩니다.

    야훼/여호와 (YHWH / YAHWEH / JEHOVAH): “하나님 (LORD)” (신명기 6:4; 다니엘 9:14) –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의 유일한 참된 이름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주(Lord), 아도나이와 구분하기 위해 “LORD” (모두 대문자)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 이름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출애굽기 3:14)로 처음 밝혀졌습니다. 이 이름은 구체적으로 즉각성, 현재성을 나타냅니다. 야훼는 구원과 (시편 107:13), 죄 사함 (시편 25:11), 인도하심 (시편 31:3)을 구하는 자들 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곳에, 지금, 계십니다.

    여호와 이레 (YAHWEH-JIREH):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것이다” (창세기 22:14) –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 제물로 바칠 양을 준비해주셨을 때 아브라함이 기념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여호와 라파 (YAHWEH-RAPHA): “치료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15:26) – “나는 너희를 [영육 간에]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육적으로는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고 치료하시고, 영적으로는 부당함을 용서하십니다.

    여호와 닛시 (YAHWEH-NISSI): “하나님 우리의 깃발” (출애굽기 17:15). 깃발은 전장에 세워지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 이름은 출애굽기 17장 아말렉과의 사막전 승리를 기념합니다.

    여호와 마카데쉬 (YAHWEH-M'KADDESH): “성스럽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 (레위기 20:8; 에스겔 37:28) –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아니라, 오직 당신만이 당신의 백성을 정결하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여호와 샬롬 (YAHWEH-SHALOM): “하나님 우리의 평화” (사사기 6:24) – 기드온이 하나님의 천사로부터 그를 본 이후에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답을 듣고 나서 자신이 지은 제단에 붙인 이름입니다.

    여호와 엘로힘 (YAHWEH-ELOHIM): “여호와 하나님” (창세기 2:4; 시편 59:5) – 하나님의 유일한 이름 여호와 (YHWH)와 포괄적인 “하나님”의 합성어로 여호와가 하나님 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여호와 트시드케누 (YAHWEH-TSIDKENU): “여호와 우리의 의” (예레미야 33:16) – 여호와 마카데쉬에서와 같이 하나님 한 분만이 사람에게 의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고 (고린도후서 5:21)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습니다.

    여호와 로이 (YAHWEH-ROHI): “하나님 우리의 목자” (시편 23:1) – 다윗은 목자인 자신과 자기 양과 의 관계를 숙고한 이후에 하나님과 자기의 관계가 정확히 그것과 같다는 것을 깨닫고, “여호와 로이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선포합니다 (시편 23:1).

    여호와 삼마 (YAHWEH-SHAMMAH):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다” (에스겔 48:35) – 예루살렘과 그곳에 있는 성전에 대해 주어진 이름으로, 한 때 떠났던 주님의 영광이 (에스겔 8-11장) 다시 돌아왔음을 나타냅니다 (에스겔 44:1-4).

    여호와 사바오트 (YAHWEH-SABAOTH): “만군의 하나님” (이사야 1:24; 시편 46:7) – 만군은 천사와 사람의 “무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무리뿐만 아니라 지상의 거주자들에 대해서도 , 또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주인과 종 모두에게 하나님 되십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과 권위를 나타내며 하나님께서 하시기로 결정한 것은 무엇이든 성취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엘 엘룐 (EL ELYON): “지극히 높은” (신명기 26:19) – “위로 가다” 또는 “올라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근어에서 파생된 말로 함축 의미는 지극히 높은 것을 의미합니다. 엘 엘룐은 승격을 암시하며 군주의 절대적 권리를 일컫는 데 사용됩니다.

    엘 로이 (EL ROI): “살피시는 하나님” (창세기 16:13) – 사라에 의해 광야로 쫓겨나 외롭고 절망적인 가운데서 하갈이 하나님께 붙여드린 이름입니다 (창세기 16:1-14). 하갈은 하나님의 천사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직접 현현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하갈은 자신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엘 로이가 자신을 살피셨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을 살피신다고 증언했습니다.

    엘 오람 (EL-OLAM): “영원하신 하나님” (시편 90:1-3) – 하나님은 본래 시작도 끝도 없으시며, 시간의 제약으로부터도 자유로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안에 시간 그 자체의 원인을 가지고 계십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엘 깁보르 (EL-GIBHOR): “전능하신 하나님” (이사야 9:6) – 이사야의 예언 부분에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이름입니다. 강력하고 전능하신 전사, 전능하신 하나님 메시아가 하나님의 원수를 멸하시고 철장으로 다스리시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15).





    엘로힘

    엘로힘은 히브리어로 신을 가리키는 엘의 복수명사이며, 직역하면 신들, 성경 번역으로는 하나님 입니다. 여기서 엘로힘이라는 단어 자체는 복수명사지만, 엘로힘이 유일신인 하나님을 나타내는 경우, 단수명사로 취급합니다. 여기서 삼위일체 (세 분이지만 한 분이다) 가 나온 것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한편 엘로힘이 말 그대로 복수형으로 취급되기도 하는데, 이 때는 말 그대로 '신들' 이라는 뜻으로 유일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 (엘로힘 - 유일신 하나님) 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애굽기 3장 4절-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 (엘로힘 - 다른 신들) 을 네게 두지 말라"

    -출애굽기 20장 7절-

    엘샤다이

    엘샤다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아브람이 99세 때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와 언약을 세우시며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실 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이 때 언약의 표징으로 남자는 모두 할례를 받을 것을 명하시기도 합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세기 17장 1절-

    여디디야

    여디디야는 여호와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 이라는 뜻으로, 선지자 나단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게 붙여 준 별명입니다.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사무엘하 12장 24~25절-

    글로리아

    글로리아는 '영광' 이라는 뜻으로, 종교개혁자 칼빈이 늘 묵상하던 시편 115편 1절 말씀에 등장하는 단어 입니다. 그래서 칼빈의 종교 개혁의 주축이 되는 구절이 바로 '솔리 데오 글로리아 (Soli Deo Gloria -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입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시편 115편 1절-

    브니엘

    브네엘은 '하나님의 얼굴' 이라는 뜻으로, 야곱이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그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하여 그 땅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창세기 32장 24~30절-






    코람 데오(Coram Deo, 神前意識, 하나님 앞에서), coram hominibus(before men, 인간 앞에서)



    코람 데오(Coram Deo, 신전의식, 神前意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임재
    신전사상(神前思想)를 의미

    라틴어 2개 단어인 코람(coram)과 데우스(Deus)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라틴어 coram은 '면전에서 혹은 앞에서'(in the presence of) 라는 의미
    Deo라는 단어는 Deus(God, 하나님)의 탈격(ablative, 명사를 부사처럼 사용하기 위한것)이다. 
    이 두 단어가 결합하여 Coram Deo가 되었다. 
    이 말은 영어 before God(하나님 앞에)인데 coram hominibus(before men, 인간 앞에서)와 대비되는 말이다.

  • Richard A. Muller, Dictionary of Latin and Greek Theological Terms, Baker, 1985, 84

  • 주로 기독교 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다.[4]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권위 아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신학사상이다. 인간을 지켜보시는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임재라는 말로도 쓰인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의 영역안에서 자신을 친히 나타내시는 거룩한 행위이다.독일의 신학자 게하르트 에벨링은 코람 데오와 비슷한 의미로서 임재관계(Coram-Rel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는 이 개념을 마르틴 루터의 생각으로부터 가져왔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면전에서 그리고 세상의 면전에서 인간의 상황을 다루는 것이며 동시에 물질적 존재론에 대해서 관계적 존재론의 대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모세(출 18: 12)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이 친히 시내산에서 구름 가운데 임하시고(출 19: 9, 11; 20: 18), 광야에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하시며(출 13: 21-22), 또 회막에 구름기둥으로 임재하셨다(출 33: 9-11). 사무엘 상 12장 3절에 사무엘이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 ."라고 말하였다. 구약성경 시편 139편은 대표적으로 코람 데오의 정신을 보여주는 시이다.

    • (시 139:1)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 (시 139:2)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 (시 139:3)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 (시 139:4)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 라틴어 성경 불가타역에 사용된 성구들-구약 - 창 6:11, 민 10:9, 신 4:10, 12:18, 16:11, 26:3, 대상 13:8, 10, 16:1, 대하 33;12, 왕상 8:65, 에 8:21, 욥 15:4, 32:2, 시56:13, 잠 3:4, 전 5:2, 단 6:10, 말 3:14.

    신약에서는 제 2위 하나님되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셨다.[5] 그리스도임마누엘이 되시는데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런 임재적 사건은 사도 행전 4장 19절, 8장 21절, 10장 33절등에 나온다. 사도행전 10장 33절에서는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하였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9절은 주의 얼굴(임재, in the presence of the Lord)과 그의 힘의 영광(위엄, the majesty of his power)이 함께 사용되었는데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낸다는 의미이다. 임재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 위에 존재하다'(겔37:1), '오다'(요이1:7), '이르다, 만나다'(삼상3:10), '방문하다, 도착하다'(마24:27)는 뜻한다. 성경에서 '임재'란 주로,

    1. 하나님의 초월한 권능이 나타나는 때(겔37:1)
    2.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계시하실 때(삼상3:10)
    3.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요이1:7)이나
    4. 그분의 재림의 때(마24:27)를 두고 하는 표현이다.[6]
    5. 불가타 역 성경에 나오는 코람 데오 구절들-신약- 눅 12;6, 24:19, 행 8:21, 롬 4;22, 고후 2:17, 4;2, 7:12, 12:19, 갈 1:20, 딤전 5:4, 5:21, 6:13, 딤후 4;11, 계 3:2, 8:4

    최승락 교수는 바울의 사상에도 코람데오가 나오는데 코람과 의미가 같은 헬라어 전치사들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성경에서 코람 데오는 단지 전치사(coram = before)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헬라어에서 라틴어의 ‘코람’에 해당되는 전치사는 여러 가지가 있다. 카테난티(katenanti)나 에난티(enanti)도 그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는 상황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의 말씀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katenanti theou) 말하고자 하는 결단을 밝힌다(고후 2:17, 12:19). 엠프로스텐(emprosthen) 역시 유사한 의미를 가진 전치사이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그를 시인하거나 부인하는 것에 따라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하거나 부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마 10:32-33). 그러나 이런 전치사들 보다 더 특징적인 전치사로 에노피온(enōpion)이 있는데, 예를 들어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enōpion tou theou) 자신이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밝힌다(갈 1:20). 에노피온은 엔(en)과 옵탈모스(ophthalmos 눈)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전치사로서 ‘안전’(眼前)의 의미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는 히브리어의 리프네(li-pnê)나 엣프네(et-pnê), 엘프네(el-pnê) 등에 맞먹는 전치사이다. 히브리어에 있어서 이 전치사들은 모두 파네(pane 얼굴)와 연결된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34:23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일 년에 세 차례 ‘하나님 앞에’ 보이도록 명할 때 엣프네 전치사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70인경에서는 헬라어 에노피온으로 번역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전치사들이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는 하나님 앞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면전(面前), 또는 하나님의 안전(眼前)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7] 야고보서 4장 10절 본문 "주님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에서 주님 앞에서 (in the presence of the Lord, ἐνώπιονΚυρίου)라는 코람데오는 인간의 자신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교만하지 말 것을 교훈한다.이 본문과 4장 6절에 있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히에로니무스(제롬)가 번역한 라틴어 성경 불가타역에 따른 코람 데오(coram Deo)에 사용된 성경구절은 다음과 같다.

    • 구약성경 - 창 6:11, 민 10:9, 신 4:10, 12:18, 16:11, 26:3, 대상 13:8, 10, 16:1, 대하 33;12, 왕상 8:65, 에 8:21, 욥 15:4, 32:2, 시56:13, 잠 3:4, 전 5:2, 단 6:10, 말 3:14
    • 신약성경- 눅 12;6, 24:19, 행 4:19,, 행 8:21, 롬 4;22, 고후 2:17, 4;2, 7:12, 12:19, 갈 1:20, 딤전 5:4, 5:21, 6:13, 딤후 4;11, 계 3:2, 8:4

    종교개혁가들에게도 이 표현은 자주 발견된다.

    마르틴 루터는 코람 데오를[8] 즐겨사용했는데 에벨링은 이 개념을 루터의 사상체계의 참된 근거(the very basis of Luther's mode of thought)라고 말한다.[9] 성경환 목사에 따르면 루터의 저서 《식탁대담》 중 〈세상의 본질에 관하여〉라는 장에서는 루터는 이 세상의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누고 있다.[10]

    • 첫째 부류는 자신의 부패한 본성과 행동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채 양심의 가책없이 태평스럽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 둘째 부류는 율법앞에서 두려워 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며 좌절감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 셋째 부류는 자기 죄를 인정하고, 죄로 인하여 멸망할 자임을 잘 알면서 복음에 귀기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죄사함 받음을 믿고 하나님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으며 온갖 선행으로 믿음의 열매를 나타내며 사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울리히 츠빙글리의 신학사상에도 나타난다.[11]

    요한 칼빈은 코람 데오를 통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고 그의 신학의 중요한 사상을 형성하였다.[12] 그의 명저 기독교강요 1권 2장에서 하나님의 얼굴 (the face of God)을 먼저 보지않고서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질수 없다고 한다.[13] 칼뱅은 베드로 전서 3장 4절 주석에서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속사람(중생한 사람)이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은 인간의 눈(코람 호미니부스)에만 치장하지 않는 값진 것(pretiosus)이라고 한다. 하나님앞에 값진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더 염려하는 것이라고 한다.[14]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때는 두려움과 전율을 느낀다고 한다. 하나님의 위엄이 인간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마다 언제나 충격을 받고 압도당했던 것으로 성경이 일반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그 두려움과 놀람은 바로 여기서부터 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臨在)를 모를 때는 굳건히 그리고 꿋꿋하게 서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것처럼 전율하고 경악하여 비참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고 거의 혼비백산이 된 것이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위엄과 자신들을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코 자신의 비천함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하고 깊이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우기 우리는 이러한 놀라운 사건의 실례가 사사기와 예언서에 무수히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었다(삿 13:22; 사 6:5; 겔 2:1; 1:28; 삿 6:22 등). 욥기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순전하심을 묘사함에 있어서 항상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능함과 부패를 깨닫게 함으로써 인간을 압도하는 강력한 주장을 하고 있다(참조, 욥 38:1 이하). 이것은 충분한 증거가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하여 가까이 나아갔을 때, 자신이 흙이요, 티끌에 불과함을 더욱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던 것을 볼 수 있고(창 18:27), 엘리야도 얼굴을 가리우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서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이렇게 두려운 일이다(왕상 19:13). 그룹들까지 두려움으로 그들의 얼굴을 가리웠는데(사 6:2), 하물며 후패하고(욥 13:28) 벌레에 지나지 않는(욥 7:5; 시 22:6) 인간이야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하여 선지자 이사야는 "그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왕이 되시고…"(사 24:23)라고 말한다. 즉 그가 그의 광채를 발하시고, 더 가까이 다가서게 하면, 가장 빛이 나던 것들도 그 앞에서는 캄캄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사 2:10,19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가르치는 올바른 순서는 전자를 먼저 논하고 다음에 후자를 논하는 것이라 하겠다.

    — 《기독교강요》 1:1:3, 장 칼뱅

    디모데 전서 6장 13절 주석에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앞에서"라는 것의 의미는 우리의 눈을 세상에서 돌려 만물을 살게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을 배워는 것이라고 한다.[15] 이승구 박사에 따르면 코람 데오의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한다.[16]

    윌리엄 틴데일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는 신념 때문에 그 유능한 생애를 화형으로 마감해야 했다. 만일 그가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길을 택했다면 그는 당대 최고의 성경학자로서 존경을 받으며 장수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17]

    A.T. 피어선은 하나님과 관계속에서 거룩한 삶이란 코람데오(coram Deo)의 삶이라고 한다. 의식적이며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눈앞에서 살아가는 삶이며, 하나님의 눈앞에 자신을 직접적으로 두는 삶이며, 그리고 그 분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동시에 우리도 그와 함께 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숨겨진 불경건한 삶의 모든 감추어진 것들을 청소하는 것이며 우리가 우상을 포기하고 그 자리가 하나님의 임재와 교재의 성소로 바꿔어지는 삶이라고 한다.[18]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와 더불어서 세계 3대 칼빈주의자인 미국의 벤저민 워필드는 모든 관점에서 하나님이 보고 있다라는 것을 삶의 원리로 살아가는 것이 코람 데오의 삶이라고 한다.

    칼뱅주의자는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다. 그는 자연에서 하나님을 보고, 역사에서 하나님을 보며, 은혜에서 하나님을 본다.

    칼뱅주의자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발자국을 보고, 모든 곳에서 그 전능하신 팔의 역사하심을 느끼며, 하나님의 위대하신 심장 박동 소리를 듣는다. 이 모든 사실에서 칼뱅주의를 구성하는 원리가 나타난다.

    칼뱅주의자는 모든 현상의 배후에서 하나님의 손을 발견하며, 이 모든 현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며, 기도하는 태도로 자기의 전 생애를 살아가고, 구원 문제에 있어서 자신을 전혀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다.

    안명준 교수는 성경해석과 관련하여 코람데오를 말한다.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특별히 인간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하여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coram Deo)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고 한다.[19] 그리고 그에 따르면 다음의 몇 가지로 코람 데오의 특징을 설명한다.

    • 코람 데오는 경건한 신앙의 근본적이 원리이다. 신앙의 시작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 코람 데오는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만들어 준다. 그의 뜻을 분별하고 삶을 살펴서 거룩한 영적 삶을 살게된다,(롬 12:1-2)
    • 코람 데오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강하게 보여주는 성경의 일관된 주장이다.
    • 코람 데오의 정신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실천하는 삶으로 연결된다.
    • 코람 데오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지혜의 근본이다.
    • 코람 데오는 만물의 통치하시는 눈동자처럼 살피시는 여호와의 눈을 언제나 주목하는 것이다.

    코람 호미니부스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인간들 앞에서)는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신학적 용어이다. 이말은 코람 데오(라틴어: Coram Deo, 신전의식(神前意識,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과 반대되는 말이다. 리차드 멀러는 이 두 용어는 서로 대조되는 것으로 본다.[1] 하나님의 임재와 반대되게 인간 중심으로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코람호미니부스는 기독교 신앙에 유혹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신앙을 파괴한다고 본다. 텍사스의 번영신학의 주창자 조엘 오스틴로버트 슐러는 인간 중심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것은 코람 데오와 반대적인 메세지이다. 인간중심적 메세지와 인간이 원하는 내용을 전하는 것은 전형적으로 인간 앞에서 효과를 추구하는 인본주의적 사상이다.[2] 여호와의 눈을 약화시키는 신앙적 이탈로 인간의 이성과 자율성에 대한 주도적인 역할을 강조할 뿐이다. 종교 개혁가 장 칼뱅은 인간이 먼저 하나님의 얼굴(coram deo)을 먼저 보고 인간 자신을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는다면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한다.(존 칼빈, 기독교강요 1:1:2)




    주와 동행하는 삶(창세기 5:21-23) / 설교원고(2018-12-30) 송구영신

    파트리스교회 주일 설교 / 2018-12-30 송구영신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지혜로운 사람은 두 가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알아야 할 두 가지는 나의 남은 날 수와 남은 날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아는 것입니다.

    시편 90: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2018년을 마감하는 송년주일의 설교 제목은 ‘주와 동행하는 삶(Live with the Lord)’ 이라고 정했습니다. 주와 동행하는 삶이란 설교 제목을 정하게 된 이유는
    나의 남은 날은 얼마나 될까? 남은 날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하면서 얻은 결론은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기독교 윤리학자 리차드 니버(Helmut Richard Niebuhr, 1894∼1962)는 인간의 이상형은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두 가지를 본받아야 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이며, 또 하나는 인간을 향한 절대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과 인간을 향한 절대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세상은 온갖 부조리와 갈등의 구조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현실입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사도 바울은 주와 동행하기 위해서 이렇게 고민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할까요?

    이 말씀을 다른 성경으로 읽어보면 이렇게 번역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할까?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까?

    신앙생활의 자세를 두 가지로 소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코람 데오(Coram Deo)’는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 라는 뜻이며, 또 다른 하나는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는 ‘사람 앞에서(Before Men)’ 라는 뜻입니다.

    코람 데오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주와 동행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주와 동행하는 삶을 ‘코람 데오(Coram Deo)’ 라고 합니다.
    ‘코람 데오(Coram Deo)’는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 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주와 동행하는 삶은 나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생각하며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런 기도가 ‘코람 데오(Coram Deo)’의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느 목회자가 여러 지역을 순회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사택에 불이 나서 모든 것이 타버렸고 심지어 두 아들마저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그 때가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개신교회가 활발하게 번성하던 시기였습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결코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낙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목회자는 아무도 없는 숲속으로 들어가서 기도합니다. 그때 그 목회자의 마음에 참 평강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놀라운 찬송을 불렀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2019년 신앙생활에 은혜가 넘쳐나는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코람 데오(Coram Deo)’ 즉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 라는 신앙생활을 위한 명제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면에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라고 합니다.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는 ‘사람 앞에서(Before Men)’ 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가룟 유다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를 팔아넘길 음모가 드러났습니다. 이때 가룟 유다는 ‘코람 데오(Coram Deo)’의 길을 포기하고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를 팔아넘긴 후 스스로 목매어 죽는 죽음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과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의 결과는 이미 가룟 유다의 선택에 의해서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코람 데오(Coram Deo)’ 즉 ‘주와 동행하는 삶’을 위하여 함께 경주하는 2019년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와 동행하는 삶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오늘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 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를 에녹이란 이름과 므두셀라 라는 이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에녹(Enoch)이란 이름은 ‘바친다’는 뜻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에게 바쳐진 인생 이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에게 바쳐진 인생으로 2019년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에게 바쳐진 삶이 곧 에녹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온전하게 바쳐졌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누구나 경험하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왜 에녹은 하나님에게 바쳐질 수 있었을까요?

    에녹 당시의 평균 수명은 대략 630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365년을 살았습니다. 평균 수명보다 훨씬 적게 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평균 수명보다 적게 살았다고 하면 무슨 몹쓸 질병에 걸렸거나 아니면 사고를 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몹쓸 질병에 걸린 것도 아니었고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던 에녹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서 영원한 동행을 하고 있습니다.

    므두셀라(Methuselah)라는 이름은 ‘창을 던지는 사람’ 이란 뜻입니다.

    므두셀라는 성경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를 살았다고 합니까? 969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에녹은 365년을 살았는데 므두셀라는 969년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오래 살았던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에녹은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영원한 것은 없다!

    에녹이 살았던 시대에 창을 던지는 사람이란 성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성을 지키는 사람이 969년 동안 그 성을 지켰다면 잘 지킨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969년 보다 더 많은 2천년 동안 성을 지킨 사람과 비교할 때는 잘한 것이 아닙니다. 에녹은 므두셀라가 969년 동안 육체라는 성을 지키지만 결국은 죽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죽는다는 것은 성을 빼앗기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에녹을 깨달았습니다.

    시편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둘째는 심판이 다가올 것이다!

    므두셀라는 이름은 므두(무투, death)와 셀라(살라크, send)가 합성한 이름으로 므두셀라가 죽으면 심판을 보낸다는 뜻입니다. 이때 심판은 노아의 홍수를 말합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원한 것은 없으며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주와 동행하는 삶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삶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버렸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이었습니다.

    에녹처럼 살아서 주님 앞으로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에녹과 같이 될 수 없다면 건강하고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주와 동행하다가 어느 날 잠을 자는 것처럼 고요하게 주님 앞으로 가는 것을 기도합니다.

    에녹과 같은 삶을 원하신다면 주와 동행하는 삶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거룩한 동행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2019년 파트리스교회 모든 가족들이 거룩한 동행자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거룩한 동행자가 될 수 있는 말씀을 소개합니다.

    디모데전서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It is consecrat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무엇일까요?

    기도는 성경대로 살아가는 힘을 공급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왜 기도합니까?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기 위한 힘을 공급받기 위한 것입니다. 현실에서 부딪친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우려는 힘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는 고통스런 현장에서 스데반은 ‘주여,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저 돌이 방향을 바꿔 돌을 던진 사람의 이마에 맞아 마치 골리앗이 쓰러지듯 넘어지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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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코람 문도(coram Mundo) 


    사순절 다섯째 주일, 다음주일은 종려주일, 그리고 고난주간입니다. 주님 십자가 지시고 나를 위해 고난당하신 그 고난주간, 한주간 동안 전교인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주님 가신 그 십자가의 길에 동참할 작정입니다. 그 잔을 함께 마시고 주님과 함께 깨어있기를 원합니다^^  

    본당의 사순절 플래카드 "코람데오"처럼 하나님 앞에 서고 싶습니다!

    Coram Deo 코람 데오는 라틴어로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신전의식(神前意識)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16세기 당시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변질되어가던 교회에 개혁을 일으켰던 종교개혁자 루터와 그리고 칼빈이 이 단어 하나를 붙잡고 평생 개혁의 길을 갔습니다! 실종된 코람데오 정신을 되찾자고 다시! 코람데오!를 외쳤습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 앞에 섭시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 코람데오는 신학대학교의 교훈이기도합니다.


    ▶ 존 웨슬리도 코람 데오의 정신으로 스스로의  경건생활을 점검하곤 했습니다.
    1. 난 항상 기도하고 있는가?

    2. 난 항상 기뻐하고 있는가?

    3. 난 항상 감사하고 있는가?

    4. 난 욕심내고 있지 않은가?

    5. 난 하나님 앞에 두려운 일은 없는가?

    6. 난 연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가?

    7. 나의 말과 행동은 진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진실인가?


    내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순간은 어떤 순간일까요? 종말론적이라고 느낍니다.

    하나님과 나는 운명적으로 숙명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입니다. 태아가 어머니과 탯줄로 연결되어 있듯이 하나님과 우리는 영혼이 엮여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선 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순간, 평생 동안 써왔던 수많은 가면을 벗어버리고 내 존재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서는 것이 바로 코람데오 정신일 것입니다. 가면 속의 내 얼굴을 아시는 주님 앞에 이 사순절! 무릎을 꿇습니다!
    자아를 내려놓고,

    집착을 내려놓고,

    욕심을 내려놓고,

    변명도 내려놓고,

    핑계도 내려놓고...

    그리고 치유받고 위로받고 용서받고 새 힘을 얻기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다시 힘을 얻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지난주 라틴어 성경 Vulgate에 나타난 28개(58)의 코람 데오 본문을 찾아서 읽어보았습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본문들이었습니다.

    맨 먼저 나오는 코람데오는 하나님 앞에서 부패한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Gen 6:11] corrupta est autem terra coram Deo et repleta est iniquitate
    [창6: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그 뒤로 이어지는 모든 코람 데오들!
    성경의 모든 인물들, 다윗, 욥, 다니엘도 코람데오의 자세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선 자에게 주시는 축복과 감사와 찬양과 두려움과 떨림과 사랑받음과 위로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유다왕국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알려진 유다의 왕 므낫세의 기도에도 코람데오가 나타납니다.[대하33:12] 므낫세가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에 끌려가 감옥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들어주신 것입니다.


    코람데오!


    2016년 이 봄날, 사순절의 5번째 주일, 고난주간을 앞두고 생각합니다.
    나의 삶을 지금까지 이끌어온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사랑?

    성공을 위한 투쟁?

    내 집 한칸 마련을 위한 투쟁?

    진실했었는가? 정직했는가? 최선을 다했는가? 사랑했는가?

    나는 과연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가?

    때로는 거울을 보며 명상하듯이 내 모습을 오래 바라보며 명상하듯이, 이 글자를 붙들고 명상하고 싶기도합니다.

    어느 분의 글을 인용합니다.


    “신의 실재는 내게 가장 거대한 벽이었다. 나는 그 진실을 코람 데오라는 말을 붙잡고 삶의 길을 통해 확인하고 싶다.”  


    성경에 나타난 28번의 코람데오 중 계시록에 마지막으로 두번 나타나는데 먼저 사데교회에 대한 경고에 나타납니다. 코람데오 정신이 실종된 사데교회에 대한 경고입니다!


    [계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현대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나는 네가 살아 있고 활동적이라는 평판과는 달리 실제로는 죽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계3: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coram Deo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계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코람 데오로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하나요?

    그런데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남은 바 사람들을, 그들의 가능성을, 그들의 아름다움을 살려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 원한다면  코람데오의 정신으로 살려한다면 죽어가는 내 옆의 사람들에게 힘을 넣어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경>

    [계3:2] Wake up! Strengthen 그러므로 깨어나거라. 너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완전히 숨지기 전에 힘을 북돋아 주어라.

    <한글 KJV>

    [계3:2] 깨어 있으라. 그리고 남아 있으나 죽어가는 것들에게 힘을 돋우어 주라. 

    <현대어>

    [계3:2] 이제 일어나라. 불과 얼마 남지 않은 자들에게 힘을 넣어 주어라. 그들은 거의 다 죽어가고 있다.

     성경을 읽어가다가 코람데오 Coram Deo,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코람 문도(coram Mundo)가 하나가 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코람데오 (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사람 앞에서

    코람 문도(Coram Mundo) 세상 앞에서!!


    이 세가지 개념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이며 하나이어야 한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있는 자는 곧 사람과 세상 앞에 바로 서야한다는 것! 그것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내는 곳, 이루어내야 하는 곳이 바로 사데교회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교회라는 것을 깊이 가르쳐주고 있는 본문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바로 우암교회 안에서 바로 코람데오 (Coram Deo)와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와 코람 문도(coram Mundo)가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어제 있었던 우암가족 성경공부 만남의 시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는 이 시간이 가장 좋습니다! 고백이 첫사랑 고백의 순간같이 설렙니다! 가슴을 울리고 한없이 울리고 글썽합니다! 이 순간처럼 가슴 뭉클한 순간이 없습니다. 이렇게 늘 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얘기하는 것이 역시 가장 재밌습니다. 간증이 가장 즐겁습니다.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눈물, 간증, 세월, 기도를 존중합니다! 가벼운 생애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영혼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합니다. 여러분의 생을 존중합니다. 사람을 알고 사귀게 되고 사랑하는 것의 기쁨과 감사가 진실로 큽니다! 

    여러분들의 간증 요약입니다! 


    ♥ 주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가까이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과의 친밀성을 기대하고 사모합니다! 사랑받기 원합니다. 내 인생 모두가 응답되게 해주세요!! 

    ♥ 하나님을 연인처럼 대했으면 좋겠습니다.

    ♥ 가장 힘들 때 함께 계셨던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 오00성도 50대 후반;남자 / " 그동안 가족들의 권유에도 긴 세월 혼자서 버티고 안나왔다. 전도초청 주일에 와서 찬송을 부르는데 느닷없이 눈물이 났다. 아내가 눈치채지 않도록 고개를 돌리고 울었다. 예배 후 교회 식당에서 점심먹자는 아내 말을 거부하고 집으로 가는데 왠지 마음이 너무 개운하고 후련했다. 이제는 교회에 가야겠다, 믿고 살아야겠다... 결심하고 주일마다 온다. 주일은 부활의 날이라고 배웠다. 과연 주일마다 부활을 느낀다.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느낌이다. 교회에 열심히 다녀야 되겠다고 생각한다.


    ♥ 교회에 열심히 다녀서 하나님께 사랑받는 예쁜이가 되겠습니다!(장00)

    ♥ 사랑받고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 어린 시절부터 우암교회를 다녔고 그동안 몇십년의 길고 긴 세월 속에서도 앞으로 나서지 않고 왠지  늘 뒷전에 있었다. 왜 그랬는지 스스로 생각해본다. 왜 그랬을까? 왜? 이젠 조금씩 달라지고 싶다.  사실 교회역사철을 보면서 깜짝 놀라는게 많습니다! 지금 조용히 계시는 분들이 불꽃처럼 일했던 기록에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왜 지금은 조용히 뒤에 계시는 것일까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무엇이 나를 방해합니까? 이겨내시고 불꽃같이 일하시다가 주님 만납시다!


    다른 분의 간증입니다.
    ♥ 사실 교회에 오면 뭔가 서먹했습니다. 제 성격이 내성적이라 그런지 오랫동안 교회가 적응되지 않고 많이 부담스러웠으나 이젠 마음이 열렸습니다. 도우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도우신 리더분들과 서로 진지하게, 진실하게, 같이 울고, 같이 붙잡고, 같이 기뻐하며 가겠습니다.


    ♥ 어느 교회나 많은 분들이 익숙해지고 적응하는데 힘들었다고 말합니다. 속히 익숙해지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어색하지 않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주인이 따로 없습니다. 몇십년 나오면 주인이 되겠습니까? 또 몇십년 나온다고 주인이 되는 것이긴 합니까? 지금 교회당 앞자리에 앉는 분이 주인입니다. 지금 웃고 맞이하시는 분이 주인입니다. 지금 먼저 인사하는 분이 주인입니다. 오늘 그러면 내가 주인입니다. 주인 어딨나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인입니다. 식당에 가면 주인들이 먼저 인사하고 어서 오라고 말하지 손님들이 인사합니까? 인사하고 웃으면 오늘 지금 나는 주인입니다. 주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젊은 학생; 상담 한번 해주지 않으시렵니까?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나서 식판을 들고 밥을 담았는데, 너무 많이 담아서 빼려는데, 이미 줄이 너무 길어서, 그냥 먹기로하고 가는데, 한 분(아줌마,권사,집사)이 저보고 집에 밥이 없느냐고 물으시는겁니다. 그때는 웃고 지나갔지만, 집에 가서 생각해보니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생각이 나고 기분이 점점 나빠지고 화가 납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A 그 아줌마집사님은 비꼬는 마음만 가득하고 교만하고 사랑이 없는 마음입니다. 오히려 형제님이 예수님의 긍휼한 마음으로 품고 기도하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분을 품으면 사탄에게 지는 겁니다. 즉 그 날의 예배에 실패하는 것이니 작은 일에 매이지 말고 당당하십시오...


    B 그 분(아줌마권사님,집사님)이 잠시 실수하신듯ㆍ사람은 누구나 실수합니다. 원래 사소한걸로 맘이 상하죠. 주님의 사랑으로 너그럽게 용납하길 바래요^^


    C 여러분들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예배 후의 예배, 식당에서의 멸치조림, 깍두기 국물 예배에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기분나쁜 것을 금방 잊을 수 있는 능력, 말을 참을 수 있는 능력, 덮어줄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 다른 분의 고백입니다! 

    ♥ 6개월! 사실 조금씩 나태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기회가 다시 새로워지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아, 소중한 고백! 우리가 점점, 조금씩 나태해지는 바로 그 순간을 지켜주기 바랍니다. 서로 도와주기 바랍니다.


    코람데오 Coram Deo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코람 문도(coram Mun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