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옮겨 놓으라(요한복음 11:39)


돌(리도스) 3037

λίθος, ου, ὁ Storng number  3037

1. 돌.   2. 마 3:9.  3. 마 24:2 
Pronunciation [ lithŏs ]
  • I. 돌
    •  1. [문자적으로]
      •  a. [일반적인] 돌, 마3:9, 막5:5, 눅3: 8, 요8:7.
      •  b. [건축에 쓰이는] 돌, 마24:2, 막13:1, 눅19:44.
      •  c. 보석[금, 은, 진주 이외의 것], 고전3:12, 계17:4, 18:12.
      •  d. 맷돌, 눅17:2, 계18:21.
      •  e. 무덤을 막은 큰 돌, 막15:46, 마27: 60,66, 눅24:2, 요11:38, 고후3:7.
      •  f. 돌우상, 행17:29.
    •  2. [비유적] 그리스도, 그리스도인, 막12:10, 마21:42, 눅20:17, 롬9:32, 벧전2:4,5.
  • 관련 성경  / 
    돌(마3:9, 눅24:2, 계18:21), 벽옥(계21:11), 맷돌(막9:42), 아름다운 돌(눅21:5), 보석(고전3:12), 홍보석(계4:3), (건축)돌(막13:1), 산 돌(벧전2:4).



옮겨놓으라(아이로) 142

αἴρω Storng number142

1. 들어올리다.  2. 돌을 올리다.  3. 뱀을 집어 올리다
Pronunciation [ airō ]
  • I. 들어올리다, 높이다, 집어 올리다, 데리고 올라가다.
    • 1.  [문자적으로]
      • a.  돌을 올리다, 요8:59, 계18:21.
      • b.  뱀을 집어 올리다, 막16:18.
    • 2. [상징적으로]
      • a.  αἴτοὺς ὀ- φθαλμοὺς ἄνω: [기도 중에] 눈을 들어 우러러 보다, 요11:41.
      • b. 소리를 높여, 눅17:13.
  • II.  가지고 가다, 메고 가다, 마16:24, 막8:34, 눅9:23, 3. 들어올려서, 가져가 버리다, 옮기다, 치우다, 요2:16, 19:38.
  • III.  [들어올리지 않고] 치우다, 제거하다, 눅11:22, 23:18, 요19:15, 고전5:2, 6:15, 요일3:5.
Grammar Explanation

[기본형] 미래 ἀρῶ , 제1부정과거 ἦρα, 완료 ἦρκα[골2:14], 완료수동태 ἦρμαι [요20:1], 제1부정과거수동태 ἤρθην, 미래수동태, ἀρθήσομαι, 히브리어 5375 참조

  • 문법설명

    [기본형] 미래 ἀρῶ , 제1부정과거 ἦρα, 완료 ἦρκα[골2:14], 완료수동태 ἦρμαι [요20:1], 제1부정과거수동태 ἤρθην, 미래수동태, ἀρθήσομαι, 히브리어 5375 참조

  • 관련 성경  /  받들다(마4:6), 가지다(마20:14, 막2:11), 당기다(마9:16), 메다(마11:29), 빼앗다(마25:29), 가져가다(마14:12), 거두다(마15:37, 막8:8), 지다(마16:24, 요1:29), 던지다(막11:23), 깨닫다(마24:39), 뽑다(막15:24), 집다(막16:18), 높이다(눅17:13), 취하다(눅19: 21), 없이하다(눅23:18, 요19:15), 들다(요5:9), 끌어올리다(행27:17), 옮겨놓다(요11: 39), 제하다(요15:2), 데려가다(요17:15), 치우다(요19:31).



Μαραναθα



마라나타(Maranatha, 아람어: מרנא תא: maranâ thâ'  또는 מרן אתא: maran 'athâ' , 그리스: Μαραναθα, Our Lord has come,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2개의 아람어가 합쳐진 공식인데 신약성경에 두 번 나온다. 
성경에서 "마라나타(מרנא תא, maranâ thâ)"라고 하는 용어

고린도전서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If anyone does not love the Lord--a curse be on him. Come, O Lord.

ει τις ου φιλει τον κυριον ιησουν χριστον ητω αναθεμα μαραν αθα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He who testifies to these things says, "Yes, I am coming soon." Amen. Come, Lord Jesus. 

이것은 본래는 아람어로 기도문에 쓰인 것으로 헬라어로 표기한 것이다.
이 용어는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디다케(가르침이라는 뜻)"의 예식문(10:14)에서도 발견되며,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우리 주여 오소서(Our Lord(10:14) 
come Our Lord has come . 




󰃨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 바울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저주'를 대비시켜 주님께 대한 사랑이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저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데마'(*)는 어떤 사건과 관련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노여움 아래 맡겨진 것'을 의미한다(Boice). 본절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르치는 바는 주님께 대한 사랑도 없이 자기 생각과 행동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주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할 것임을 경고하는 것이다(Lenski, Edwards).

󰃨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 바울은 '저주'에 이어 곧바로 '소망'의 말을 잇는다.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라나다'(*)는 아랍어 '마라나타'(*)의 음역이며 어떤 사본에서는 '마란아다'(*)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랍어 '마란아타'(*)의 음역이다. 양자는 시제 상의 차이를 보이는데, 전자의 경우 '우리 주님이시여 오시옵소서'(our Lord, Come!)라고 번역할 수 있고, 후자의 경우는 '우리 주님께서 오셨다'(our Lord has come)라고 번역할 수 있다(Chrysostom). 계 22:20에 나오는 헬라어 번역 '에르쿠퀴리에'(*, '오소서 주여')는 명령형으로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본절에서는 두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한데 전자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역점을 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역점을 둔 것이다. 여기서 후자의 표기를 따라 완료형으로 해석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심판을 담당하러 오셨다는 사실을 담고 있고 예언적 과거(prophetic past)의 용법으로서 미래적 사건을 과거시제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명령형으로 사용된 경우는 주의 재림을 촉구하는 의미로 모든 분쟁과 불의를 종식(終熄)시켜 고난을 없애주실 것을 소원하는 의미가 된다(Godet, Lenski).









가상칠언(架上七言) The Seven Last Words of Jesus on the Cross


가상칠언(架上七言)  The Seven Last Words of Jesus on the Cross


1.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누가복음 23:3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은 자신을 향해 죄악을 행하는 이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인간적인 동정이나 자비를 넘어, 십자가의 중심 메시지가 ‘용서’임을 보여줍니다. 이때 사용된 헬라어 aphiemi는 죄의 짐을 풀어주고 자유케 하며 법적인 의미에서 죄책을 면제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구속의 문을 여는 첫 열쇠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선 인류에게 극휼의 기회가 주어졌음을 선언하는 사건입니다. 즉, 십자가는 심판의 자리이자 동시에 용서의 문이 열리는 자리이며, 예수님은 인류 전체를 위한 대제사장으로서 그 첫 중보적 사명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 가상칠언 1)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누가복음 23:43)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강도에게 예수님은 “오늘” 그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회개와 믿음을 통한 즉각적인 구원의 원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종말론에서 낙원(paradeisos)은 의인들이 안식하는 곳으로 이해되었으며, 예수님은 단순히 위로의 말을 한 것이 아니라 구속의 실제적 적용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가 아닌, 전적인 은혜와 믿음에 근거한 구원이 가능함을 증거합니다. 죽음을 앞둔 이 강도에게 주어진 구원은 모든 죄인에게 열려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상징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단지 선택된 자만이 아닌 모든 회개자에게 유효함을 보여줍니다.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요한복음 19:26–27)

예수님은 고통의 절정 속에서도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염려하시며,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그녀를 부탁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가족적 책임을 넘어, 새 언약 공동체의 형성을 상징적으로 선포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새로운 ‘가족’을 세우시며, 육신의 혈통이 아닌 믿음 안에서 하나 되는 교회 공동체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는 말씀은 교회의 상징인 마리아와 사도의 대표인 요한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됨을 의미하며, 이로써 십자가는 새로운 언약 공동체의 출발점이 됩니다. 또한,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구속은 관계의 회복과 새로운 공동체의 창출을 포함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태복음 27:46, 마가복음 15:3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님의 부르짖음은 시편 22편 1절의 인용으로, 구약 예언의 성취이자 그 깊이를 더한 신비입니다. 이는 인류의 죄를 짊어진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는 경험을 상징하며, 죄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를 보여줍니다. 이 절규는 하나님의 공의가 예수님 위에 임한 장면이며, 예수님은 우리 대신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라는 형벌을 온몸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이는 속죄론의 핵심으로, 예수님이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셨다는 대속적 죽음의 가장 극적인 표현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고통 중에도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시는 예수님의 신뢰와 순종을 통해,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끝까지 순복하신 모습을 드러냅니다.

5. 내가 목마르다 (요한복음 19:28)

이 말씀은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을 나타내는 동시에,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완성을 향한 갈망을 표현합니다. “목마르다”는 표현은 시편 69편 21절의 예언 성취이며, 고난받는 메시아의 고통에 대한 표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에게 생수를 주시는 분(요 4:14)이시지만, 이 순간에는 스스로 생명의 근원을 내려놓고 철저히 인간의 연약함을 겪으십니다. 이는 그분이 진정한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와 동일한 고통을 당하셨다는 성육신의 실제성을 드러내며, 동시에 예언된 메시아의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한 마지막 고백으로 나타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이루시는 예수님의 신실함과, 고통 가운데서도 성경의 성취를 완전하게 하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6.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

헬라어 tetelestai는 상업적, 법적 문맥에서 “완불되었다”는 뜻으로 쓰이며,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완전하게 끝났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구속사의 완성 선언으로, 죄에 대한 속죄, 율법의 성취, 예언의 완성,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모두 이루어졌음을 알리는 말입니다. 이 한 마디는 구약의 모든 제사제도와 성막 시스템이 예수 안에서 실체를 드러내며 종결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 없이 완전하게 성취되었음을 밝히는 선언이며, 인간이 더 이상 율법이나 행위로 구원받을 필요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은혜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7.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누가복음 23:46)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하는 기도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31편 5절의 인용으로, 믿음과 순종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강탈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어주셨습니다(요 10:18). 이는 죽음마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선언이며, 구속 사역의 마지막 단계로서 그분의 전 생애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순종으로 마무리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순간은 예수님께서 대속의 죽음을 완성하고,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긴 사건으로, 부활을 향한 소망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도, 죽음 너머의 하나님 나라를 향한 확신과 위로를 전해주는 복음의 선포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 선언의 의미와 우리의 완성된 구원

서론: 십자가 위의 완성

  • 요한복음 19장 30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 중 하나인 "다 이루었다"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한마디는 인류의 구원 역사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있어 가장 결정적이고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구절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의미와 그 안에 담긴 놀라운 구원의 선물에 대해 깊이 탐구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 분석: "다 이루었다"의 의미

  •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 이 구절은 예수님의 극심한 고난과 인내를 보여줍니다. 십자가형은 엄청난 갈증을 유발했으며, 신 포도주는 당시 관례상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제공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고통까지도 감내하시며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이는 그분께서 모든 예언과 고난의 과정을 완전히 이루셨음을 나타내는 서곡입니다.

  •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 Τετέλεσται):

    • 이 한마디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완료되었음을 선포하는 승리의 외침입니다. 이는 단순히 할 일을 마쳤다는 의미를 넘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완벽하게 성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단어를 계약이 완료되거나 빚이 완전히 갚아졌을 때 사용했습니다. 우리 죄의 빚이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청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 예언의 성취:

  • 구약의 수많은 예언들이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선지자가 아니라, 구약의 모든 예언이 가리키는 메시아셨습니다.

  • 이사야 53장 5-6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고난과 대속적 죽음이 인류의 죄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말하며, 예수님께서 이 예언을 완전히 이루셨음을 보여줍니다.

  • 시편 22편 18절: "내 겉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이 예언 역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병사들이 그분의 옷을 나눈 사건으로 완벽하게 성취되었습니다.

2. 구원 사역의 완성:

  •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고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더 이상 죄를 씻기 위한 반복적인 제사가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 히브리서 9장 12절: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님의 단 한 번의 희생으로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졌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다 이루었다"는 말씀의 핵심적 의미입니다.

  •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구절은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의 증거이자, 구원의 완성을 위한 사랑의 행위였음을 보여줍니다.

3. 죄와 사망 권세의 폐지:

  • "다 이루었다"는 선언은 죄와 사망의 권세가 예수님의 죽음으로 완전히 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에게는 죄의 삯인 사망이 아닌, 영생의 길이 열렸습니다.

  • 로마서 6장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죄의 삯인 사망을 무력화하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했습니다.

  • 고린도전서 15장 54-57절: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 말씀은 예수님으로 인해 사망에 대한 완전한 승리가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며, "다 이루었다"는 승리의 선언을 뒷받침합니다.

4. 새 언약의 성취:

  •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구약의 율법 언약과는 다른 새 언약을 체결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이 새 언약은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외부에 새겨진 것이 아닌 마음에 새겨지는 언약입니다.

  • 예레미야 31장 31-34절: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약의 이 예언은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새 언약을 통해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 누가복음 22장 20절: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 자신이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음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내어주셨음을 보여줍니다. 그분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사랑순종으로 이루어진 대속적 희생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이루신 후, 그분은 고통 속에서도 평안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는 사망을 이긴 승리자의 모습입니다.

결론: 완성된 구원 속에서 살아가는 삶

  •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는 선언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계속해서 효력을 발휘하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더 이상 죄책감에 묶여 살 필요가 없으며,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벽하게 완성되었음을 선포합니다.

  • 우리는 이 완성된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셨기에 우리는 그저 그분의 사랑은혜 안에서 자유롭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십자가 위의 "다 이루었다"는 외침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승리의 함성입니다. 이 진리 안에서 참된 평안희망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패러독스(paradox) 유래, 어원



παρά Storng number3844
1.

~에게서

2.

막14:43

3.

παρὰ κυρί- ου ἐγένετο αὕτη: 이것은 주께서 하시는 일이었다

Pronunciation [ para ]
관련 성경
«전치사»«속격»~에게서(마21:42),«여격»같이, 곁에(마6:1),«대격»곁에, 가까이, 따라서(마13:1).
δόξα, ης, ἡ Storng number1391
1.

광명

2.

눅2:9

3.

위엄

Pronunciation [ dŏxa ]
Etymology
1380의 어간에서 유래
  • 관련 성경

    영광(마4:8, 막8:38, 눅2:9), 광채(행22:11), 영화(榮華)(요17:5).


  • 패러독스(paradox) 유래, 어원

    패러독스(paradox)라는 말의 어원은 그리스어 파라독사(paradoxa)이다. 이는 '초월' 또는 '~너머'의 뜻을 지닌 파라(para)와 '견해'라는 뜻을 지닌 독사(doxa)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이다. 이는 패러독스가 일반적인 사고나 신념 체계와는 다른, 예상치 못한 결론이나 명제를 제시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패러독스라는 개념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은 패러독스를 사용하여 철학적 문제를 탐구하고, 논리와 진리의 본성에 대해 심층적으로 논의했다. 이들은 패러독스를 통해 당시의 일반적인 믿음이나 가정에 도전하며, 지식의 근본을 탐구하는 도구로 활용했다.

    패러독스의 사용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중세, 르네상스,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상가들과 학자들이 패러독스를 중요한 사고 도구로 활용해 왔다. 예를 들어,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는 신학적 문제를 탐구하는 데 패러독스가 사용되었으며, 근대 과학에서는 패러독스를 통해 과학적 이론의 한계와 가능성을 탐구하는 데 기여했다.

    패러독스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철학, 수학, 물리학, 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패러독스는 우리의 사고를 넓혀주고, 기존의 지식과 신념에 도전하며, 새로운 진리와 이해를 탐구하는 데 중요한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이처럼 패러독스는 인간 지식의 발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며,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패러독스(paradox) 뜻, 의미

    패러독스는 일반적인 논리나 상식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하거나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명제나 상황을 말한다. 즉, 논리적으로 모순되어 보이지만 사실이거나 깊은 진리를 담고 있는 진술 또는 상황을 의미한다. 일상적으로는  '모순된 의견' 또는 '역설' 등으로 사용된다. 

    이 용어는 그리스어의 '파라' (para, 너머의)와 '독사' (doxa, 의견)의 합성어에서 유래되었으며, 문자 그대로 '정상적인 의견을 넘어선 것'이라는 뜻을 지닌다. 패러독스는 철학, 수학, 과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나타나며, 일반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어 패러독스(paradox)를 우리말로는 역설(逆說)로 번역할 수 있다. 역설은 외면상의 모순된 논리를 통해 오히려 더 크고 깊은 진실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주장을 말한다. 

    패러독스는 보통 모순어법을 통해 의도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시인 유치환이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을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은유하여 의도를 드러내는 경우라던가, 불교의 가르침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다'라는 모순적 어법을 통해 진실을 드러내는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패러독스는 단순한 언어적 놀이나 철학적 질문에 그치지 않는다. 과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쌍둥이 패러독스'는 상대성 이론에서 중요한 실험적 사고 실험으로, 시간의 상대성을 설명하는 데 기여한다. 패러독스는 모든 존재나 인간 실존이 모순되고 대립되어 있다는 철학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패러독스는 모순적인 상황이나 명제를 통해 우리의 사고방식을 확장시키고, 지식의 경계를 넓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학문적 탐구를 넘어 일상에서도 우리가 직면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게 한다.

    국어사전은 '패러독스(paradox)'를 '일반적으로는 모순을 야기하지 아니하나 특정한 경우에 논리적 모순을 일으키는 논증, 모순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그 속에 중요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티와 들보


    마태복음 7:1-5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누가복음 6:41-42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티는 보라(991) βλέπω Storng number 991

    1. 보다.  2. 들보.  3. 큰 건물들
    관련 성경 / 보다(마5:28, 눅6:41, 요1:29), 보게 되다 (마12:22), 뵙다(마18:10), 주의하다(마24:4, 막8:15, 눅21:18), 삼가다(막4:24, 눅8:18), 보이다(막8:23), 조심하다(막13:9, 고전8:9), 돌아보다(눅9:62), (눈이)밝아지다(요9:7).

    들보는 깨달으라(2657) κατανοέω Storng number2657

    1. 주목해보다.  2. 보다.  3. 생각하다  
    Pronunciation [ katanŏĕō ]  
    Etymology  / 미완료 κατενόουν, 제1부정과거 κατενόηασ, 2596과 3539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깨닫다(마7:3, 눅6:41), 생각하다(눅12:24, 27, 히3:1), 알아보다(행7:31,32), 보다(행11: 6, 약1:23,24), 알다(행27:39, 롬4:19), 돌아보다(히10:24).

  • 티는 작은 것이고 들보는 큰 것이다. 
    남을 아주 정죄하는 그것은 벌써 큰 죄이다. 
    그 뿐 아니라 그가 남을 아주 정죄하기 좋아하는 것을 봄녀 그의 생활이면에도 여러가지 다른 죄과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업을 위하여 인물을 비판하여 혹은 채용 혹은 퇴직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아주 정죄하는 것은 죄이다.

    헬라어의 ‘크리노’(비판하다, 판단하다)의 뜻은 ‘정죄하다’라는 의미를 동반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행위는 결국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여 잘잘못으로, ‘정죄’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평가하다 보면 결국 행위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사람됨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게 마련이고요. 그러나 사람을 정죄하고 평가하는 권한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까요. 1절의 “너희가 비판(‘판단’이라는 번역이 더 적실)을 받지 아니하려거든...”이라는 종속절은 사람으로부터의 판단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판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심판과 정죄를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κρίνω Strong number2919

    1. 나누다.  2. 판단하다.  3. 결정하다
    Pronunciation [ krinō ] 
    관련 성경  /  고발하다(마5:40, 고전6:6), 비판하다(마7:1), 심판하다(마19:28, 눅19:22, 요3:17, 계18:8), 정죄받다(눅6:37), 판단하다(요8:16, 롬2:1), 다스리다(눅22:30), 심판받다(요3:18, 벧전4:6, 계20:12), 재판하다(요18:31), 결의하다(행3:13, 21:25), 작정하다(행20:16, 고전2:2, 딛3:12), 심문받다(행23:6, 24:21, 25:20), 판단받다(롬3:4, 고전11:32), 정죄하다(롬14:22), 결심하다(고후2:1).

    티와 들보의 교훈

    1.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라
        - 다른 사람의 티는 보고 나의 들보는 깨달아야 한다.
       - 소크라테스 ; 너 자신을 알라(know thyself) 그노티 쎄아우톤(γνῶθι σεαυτόν)

    2. 비판하는 것은 정죄하는 것이다
       -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없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  공자 ;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곧 앎이다.

    metacongnition
    ˌmedəˌkäɡˈniSH(ə)n
    메타인지 

    자기객관화. 1970년대에 발달심리학자인 존 플라벨(J. H. Flavell)이 창안한 용어로, 남의 지시 이전에 스스로 자기 생각· 평가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을 말한다. 상위인지, 초인지라고도 한다. 갈등 관계에서 이 능력이 발휘될 경우 반성, 사과, 화해 등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고, 메타인지가 전략적 사고와 합쳐 이상적으로 발휘된다면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다.

    자기 성찰과도 연결된다.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이나 지식이나 말·행동 등에 대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게 맞는가 아닌가 스스로 검증을 거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내가 맞는 건가 하면서 스스로 의심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자신의 정신 상태, 곧 기억력이나 판단력이 정상인지를 판단하는 데에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술을 먹었을 때 자신의 발언과 행동이 혹시 잘못되지는 않을지 생각해 보는 사람이라면 뛰어난 지성을 발휘한 것이다.

    이 능력이 부족할 경우 암기력과 무관하게 학습 능력에 관련하여 장애가 생길 수 있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판단했으므로 암기나 기억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자칫 잘못 실행하면 셀프 가스라이팅을 거쳐 올바르지 못한 가치관을 가질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일곱
    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습니다.

    1. 우리는 모든 사실을 다 알지는 못한다

    정당한 비판을 위해서는 모든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제한된 사실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제한된 사실만 알고 있다면, 우리는 비판은 늘 불완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비판은 사실에 기초해야 하는데, 제한된 사실로 어떻게 올바른
    비판을 할 수 있겠습니까?

    2. 우리는 그 동기를 다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누군가를 비판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동기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나 말, 표정을 통해서 그 동기를 100%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동기란 내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기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비판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동기를 다 이해할 수 없는 만큼 우리는 비판을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3. 완전히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

    인간의 판단은 항상 객관성과 주관성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판단이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각자의 판단은 늘 어느정도 주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의 판단처럼 다른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판단을 할 때에만 그것은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을 비판하고자 할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의 주관성이
    개입된 것이라는 점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4. 상황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

    어떤 사실이나 사건은 모두 상황맥락적입니다.
    동일한 사실도 어떤 상황에서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유명한 비트겐슈타인의 예를 봅시다. 미장이가 벽돌을 쌓다가 조수에게 “벽돌!”
    하고 외치면 그것은 “벽돌을 가져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만약 공사장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에게 “벽돌!”하고 외치면 그것은
    “떨어지는 벽돌을 피하라”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쉽게 누군가를 비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5. 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

    우리의 인식은 늘 제한적입니다.
    제한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자 할 때 우리는 늘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지 못한 어떤 부분들이 있고 그것이 칭찬받아야 할 부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불쌍히 여겨야 할 부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이 정말 드러내기 힘든 장애를 가졌거나
    남모르는 고통을 가졌다면, 우리의 비판은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6. 우리는 편견이 있으며 시야가 흐려질 수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편견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관성보다 훨씬 더 우리자신을 슬프게 하는 모습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비판하려고 하는 상대방에 대한 첫인상이 편견으로 작용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비판하려는 상대방에 대해서 주위 사람들이 평가를 내린 것이
    편견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편견이 있는 한 우리의 평가는 사실에
    근거한 평가가 될 수 없습니다. 이미 평가를 내려놓고 거기에 필요한 사실들만을
    열거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7. 우리 자신은 불완전하며 일관성이 없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늘 불완전합니다. 특별히 일관성이 없습니다.
    C S 루이스는 자신이 가르치던 옥스퍼드 대학원 학생이 일관성없는 태도를
    가졌던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 학생은 저명정치인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떤 파티에서 그 정치인이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 칭찬하자, 그 다음부터는
    그 정치인에 대해서 우호적인 시각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완전하며 일관성이 없는 것이 그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은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중에 아무도 비판하고자 하는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 유혹 속에서 쉽게 험담과 비판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비판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을 간단히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다면, 위에서 언급한 일곱가지 근거를 늘 생각하십시오.
    비판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