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末世)
대한성서공회 검색란에서 "말세"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여덟 구절을 소개합니다.
신명기 31:29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한 길을 떠나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케 하므로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 하니라.
사도행전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고린도전서 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디모데후서 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말세(에스카타이스 헤메라이스) εσχαταις ημεραις
말(2078)
세(2250)
ἔσχατος, η, ον
스트롱번호 2078
1. 마지막. 2. 장소에 대하여. 3. 지위나 서열에 있어서 마지막
발음
[ ĕschatŏs ]
어원 / 최상급, 2192에서 유래한 듯
-
I. 마지막, 최후의.
-
1. 장소에 대하여, 눅14:9이하, [명사적으로] τὸ ἔρχατον: 끝, 행1:8, 13:47.
-
2. 지위나 서열에 있어서 마지막, 맨 끝, 제일 보잘것없는, 마19:30, 20:16, 막9:35, 10:31, 눅13:30, 사도들에 대하여, 고전4:9.
-
3. [시간에 대하여] 제일 늦은, ~의 끝.
-
a. [앞선 것과의 관계를 나타낼 때] 마20:12,14, 막12:6, 요8:9, τὰ ἔσχατα: 마지막 일, 마12:45, 눅11:26, 벧후2:20.
-
b. [길 뒤에 아무 것도 뒤따라 올 것이 없는
정황을 나타낼 때] 마5:26, 눅 12:59등, ὁ πρῶτος καὶ ὁ ἔ.: 처음과 마지막, 계1:17, 2:8,
22:13, ἡ ἐ. ἡμέρα: 마지막 날, 요6:39, 11:24, 12:48등.
-
관련 성경 / 가장 멀리(까지)의, 마지막의, 최후의, 가장 낮은, 가장 어려운 곤경[입장, 처지] 의.
ἡμέρα, ας, ἡ
스트롱번호 2250
1. 날. 2. 마 4:2. 3. ἡμέρα γίνε- ται: 날이 밝아온다
발음
[ hēmĕra ]
-
-
I. 날.
-
II. [해가 떠서 질 때까지의 자연적인] 날.
-
III. [밤까지를 포함한] 하루, 마6:34, 15: 32,
막6:21, 눅13:14, [시간의 반대어] 마25:13, τεσσεράκοντα ἡμερῶν:40일 동안, 행1:3, μιᾷ
ἡμέρᾳ : 하루에, 고전10:8, ὅλην τ. ἡμέραν; 하루 온종일, 롬10:21. [주] 전치사와 함께 쓰일 경우:
-
1. [ἀπό와 함께] 마22:46, 요11:53, 행20:18.
-
2. [διὰ와 함께] 막2:1, 14:58, 행1:3.
-
3. [ἐν과 함께] 눅5:17, 8:22, 요5:9등.
-
4. [ἐπί와 함께] 행13:31, 히11:30등.
-
5. [κατὰ와 함께] 마26:55, 눅11:3, 히3:13등.
-
6. [πρό와 함께] 요12:1등.
-
IV. [매우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지정된] 날.
-
1. τακτῇ ἡμέρᾳ, 행12:21, ἡ- μέραν τά ξασθαι, 행28:23, στῆσαι, 행17:31등.
-
2. 심판의 날.
-
a. ἀνθρωπί- νη ἡμ.: 인간의 법정이 지정한 날, 고전4:3.
-
b.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의 날, 눅17:30, 벧후3:12, 계16:14등, 예수가 심판주로 나타남, 고전5:5, 살전5: 2, 살후2:2, 벧후3:10.
-
V. [긴 시간을 가리킬 때] 시간, 시대.
-
1. [단수로] ἐν τ. ἡμέρᾳ τ. πονηρᾷ: 악한 날에, 엡6:13, ἐν ἡμ. σωτηρίας: 구원의 때에, 고후6:2, 이집트로부터 구출되던 때, 히8:9.
-
2. [주로 복수로 나타난다] ἐν ἡμέραις
Ἡρῴδου: 헤롯의 통치시대에, 마2:1, 눅1:5, Νῶε: 노아의 때, 눅17:26, 벧전3:20, πάσας τὰς ἡμ
έρας: 언제나, 마28:20, ἐν τ. ἡμέραις ἐκεί- ναις: 그때에, 마3:1, 24:29,38, 막1:9,
눅2:1, 4:2, 5:35, πρὸς ὀλ ίγας ἡμ.: 잠깐 동안, 히12:10, [특별히 생애를 나타냄] πάσαις
τ. ἡμέραις ἡμῶν: 우리의 일생동안에, 눅1:75, μήτε ἀρ- χὴν ἡμερῶν μήτε ζωῆς τέλος
ἔχων: 생애의 시작도 끝도 없는, 히7:3.
-
문법설명 / ‘앉다’의 파생어의 여성형
-
관련 성경 / 때(마2:1, 막1:9, 눅23:7), 날(마7:22,
막2: 20, 눅4:2), 하루(눅2:44, 8:22), 시대(눅4:25), 낮(요11:9, 살전5:5), 나이(눅1:7),
세(눅2:37), 오래(행15:7), 날짜(행28:23), 주(살후3:8), 무렵(막8:1).
말세에 - 구약에서 '말세'는 메시야가 오시기 바로 직전의 때를 의미한다(창 49:1;민 24:14;사 2:2;렘 23:20;겔 38:16;단 2:28). 그러나 신약에서(행 2:17;약 5:3) 이 말이 갖는 의미에 대하여 학자들의 견해는 두가지로 나뉜다. (1)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의 시기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장래에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Scott). (2)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후의 시대, 즉 메시야의 도래(到來)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진 시대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그시대가 종료될 때까지를 의미한다(Lenski). 두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히 9:16;벧전 1:20).
고통하는 때 - '고통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레포이(*)는 '위협하는'의 뜻으로서 이곳 외에 마 8:28에서만 나온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가다라 지방으로 가실 때 만난 귀신 들린 자 두 명의 사나운 모습을 표현할때 본 단어를 사용하였다.
야고보서 5: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베드로전서 1: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베드로전서 1: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베드로후서 3:3 / 자기 정욕을 좇아 행하는 시대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말세(末世, end-time)는 세계 대부분의 종교 및 신화에 등장하는 종말론(終末論)이다.
기독교에서 "마지막 날"은 구원자이자 메시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우선되는 환난 시대를 언급하기도 한다. 이슬람에서는 부활의 날(Yawm al-Qiyāmah), 심판의 날(Yawm ad-Din)이 세상의 마지막 이전에 선행된다. 유다교에서 "마지막 날"이라는 용어는 타나크의 민수기 24장 4절에서 메시아 시대에 대한 언급과 메시아가 도래할 것이라는 유다인들의 믿음을 상징한다.[1] 이후 요엘이나 스바니야 등도 '야훼의 날, 또는 주님의 날(가톨릭) 등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심판의 날이 찾아올 것을 경고하였다. 다른 다양한 종교도 환생과 구속에 관한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출처 필요]
마태복음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말세에는 넘치는 성욕으로 말미암아 동성애를 한다고 한다. 동성애는 안된다.
그러므로 다니엘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 읽는 이는
알아들으라. ─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라. 옥상에 있는 이는 물건을 꺼내러 집 안으로 내려가지 말고, 들에 있는
이는 겉옷을 가지러 가려고 뒤로 돌아서지 마라.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너희가 달아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그때에 큰 환난이 닥칠 터인데, 그러한 환난은 세상 시초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 그 날수를 줄여 주지 않으시면 어떠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그
날수를 줄여 주실 것이다.
— 마태오 복음서(마태복음) 24장 15-22절
있어서는 안 될 곳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서 있는 것을 보거든 ─ 읽는 이는
알아들으라. ─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라. 옥상에 있는 이는 내려가지도 말고 무엇을 꺼내러 집 안으로 들어가지도
마라. 들에 있는 이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아서지 마라.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그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그 무렵에 환난이 닥칠 터인데, 그러한 환난은 하느님께서 이룩하신 창조 이래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그 날수를 줄여 주지 않으셨으면, 어떠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몸소 선택하신 이들을 위하여 그 날수를 줄여 주셨다.
— 마르코 복음서(마가복음) 13장 14-20절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루카 복음서(누가복음) 21장 20-33절
성경에서 말하는 말세
지구의 멸망, 말세, 지구의 마지막 날 이런 말들은 참 우리를 두렵게 만듭니다.
수많은 예언가들이 말세를 주장하기도 하니 언젠가는 마지막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성경에 나오는 말세에 대해 알아보고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말세를 맞이해야 할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기독교의 말세관
(벧후 3:8-13, 개정)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계 6:12-14, 개정)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마 24:29-30, 개정)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성경에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 즉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해가 검어지고 달이 피같이 되고 별들이 떨어지고 불로 세상을 심판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런 근거로 말세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2. 과학적 입장의 말세관
과학자들은 전쟁으로 인한 핵폭발, 인구증가, 식량위기, 자원고갈, 환경파괴등으로 지구가 멸망할 것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과연 멸망으로 끝이 날까요?
성경을 통해 본 말세의 의미
성경을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전 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전 3:15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이 두 구절을 통해 볼 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역사는 돌고 돈다." 라는 얘기가 합당한 듯 합니다.
구약은 오래된 약속입니다.
내가 메시야를 땅에 보내 주겠다는 혹은 하나님이 심판하러 오신다는 약속의 말씀이 구약의 핵심입니다.
신약은 구약의 약속대로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의 예언을 다 이루고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리라 말씀하십니다.
다시 오실 때 양과 염소를 가르듯 선과 악을 쪼개고 구원 받을 사람을 휴거시키고 세상은 심판하신다는 내용인 것 같아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구약의 약속 -> 예수님이 오심으로 약속의 성취
신약의 약속 ->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약속의 성취
역사는 돌고 돈다는 관점에서 볼 때 만약 구약의 약속과 신약의 약속이 같다면 구약의 성취와 신약의 성취도 같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오늘
살펴볼 말세에 관한 예언도 만약 구약에 말세에 관한 구절이 있고 신약에도 말세에 관한 구절이 비슷하게 있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신 말세에 관한 성취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도 동일한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럼 구약 성경에 말세에 관한 말씀이 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1.구약예언
(겔 7:3, 개정) 『이제는 네게 끝이 이르렀나니 내가 내 진노를 네게 나타내어 네 행위를 심판하고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보응하리라』
(겔 7:6-7, 개정) 『[6] 끝이 왔도다, 끝이 왔도다 끝이 너에게 왔도다 볼지어다 그것이 왔도다
[7] 이 땅 주민아 정한 재앙이 네게 임하도다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웠으니 요란한 날이요 산에서 즐거이 부르는 날이 아니로다』
(창 6:13, 개정)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겔 38:16, 개정) 『구름이 땅을 덮음 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오리라 곡아 끝 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눈 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이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라』
(단 12:4, 개정)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단 12:13, 개정)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다니엘서, 에스겔서에 보면 끝이 이르렀다, 끝이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끝 즉, 말세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노아 때도 하나님은 끝날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셨고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아직도 우리 인간들이 지구에 살고 있는 것을 볼 때 말세는 완전한 지구의 멸망이 아니라 다른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신약성취
예수님이 오신 때가 말세였습니다.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과연 세상을 끝내버렸는가 성경을 통해서 알아볼까요?
말세는 현세계의 마지막이 아니라 좀더 나은 세계로의 전환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구약이라는 시대의 말세를 보내고 신약이라는 새로운 이상세계로의 전환을 시켰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말세는 무섭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새롭게 변화되는 알고 보면 좋은 것입니다.
(히 1:2, 개정)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예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 즉, 말세에 우리에게 말씀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 9:26, 개정)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님이 세상 끝, 말세에 나타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전 1:20, 개정)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베드로전서에는 아예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예수님이 나타나신 바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일 2:18, 개정)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말세 때 적그리스도, 이단이 많이 나타난다고 하고 있고 예수님 당세 때 수많은 이단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계 1:17, 개정)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예수님은 처음이고 마지막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이 곧 신약의 시작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은 바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나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서기 2024년도 알고 보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카운트를 하고 있는 달력입니다.
(고후 5:17, 개정)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즉, 그리스도의 사람, 온전한 신앙인이 된다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육신이 바뀐 것이 아니라 그 마음, 정신, 생각, 영혼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새롭게 변화된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역사를 이해하는 방법
역사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크게 두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직선적 사고 방식(천동설적 입장)
시작과 끝이 일직선으로 되어 있다는 관점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함으로 시작되었고 심판함으로 끝이 난다는 입장입니다.
*순환론적 사고방식(지동설적 입장)
봄이 끝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끝나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오면 겨울이 오고 또 겨울이 끝나면 다시 봄이 오는 것처럼 세상이 순환된다는 입장입니다.
유대교의 말세관
유대교는 문자그대로 이와 같은 천재지변적인 종말이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유대교는 아직도 초림주를 기다리고 있고 기독교는 신약때 이루어 지지 않았으니까 구약의 말세에 대한 예언은 모두 재림 때를 예언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재림때는 반드시 천재지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죠.
유대인은 그들의 고정관념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 들이지 못했습니다.
맹목적인 이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직선적인 말세관에서 벗어 나야 합니다.
봄 말세→여름시작↘ 가을말세→겨울시작↘
봄 시작↗ 여름말세→가을시작↗ 겨울말세
국민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 -> 대학교
말세의 진정한 의미
즉, 말세는
① 구시대의 끝이자 신시대의 시작입니다.
② 말세는 순환적이며 보다 새로운 차원으로의 전환 되는 것입니다.
③ 말세는 죽음이 아니라 더 나은 세계로의 나아가는 변화입니다.
④ 말세는 실제로 하늘과 땅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변화됨으로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줍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한 때 삐삐라는 통신기기가 유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핸드폰이 발명이 되고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면서 삐삐는 말세를 맞이하게 됩니다.
지금은 2G로 대변되면 핸드폰도 말세를 맞이하고 스마트폰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스마트폰도 점점 AI폰으로 진화가 되고 있는데 언젠가 스마트폰도 말세를 맞이하고 AI폰의 시대를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봐도 성경을 봐도 근본적인 말세는 우리 인생들이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세상의 물질세계는 유한하니 언젠가는 지구가 사라질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세의 근본은 새로운 차원으로 거듭나는 것이 말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각자의 차원에서 말세를 맞이하시고 새로운 차원으로 거듭나는 귀한 날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말세란 무엇인가?
말세는 성경에서 마지막 시대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마지막 때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초림 이후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을 포함하며, 최종적인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시기를 포함한다. 성경은
말세에 대해 경고하면서도, 성도들이 가져야 할 믿음과 소망을 강조한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말세의 특징과 신앙인의 태도에 대해
살펴보자.
성경에서의 말세
성경에서는 말세를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첫째, 예수님의 초림 이후부터 재림까지의 시대이다. 히브리서 1장 2절에서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이미 말세 속에 살고 있다.
둘째,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지는 최종적인 종말의 시기이다. 디모데후서 3장 1절에서는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마태복음 24장 3절에서는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어떤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묻고 있다. 이처럼 성경은 마지막 때에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말세의 특징
성경에서는 말세의 주요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도덕적, 영적 타락이 심해진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서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라고 경고한다.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신과 세상을 더 사랑하며, 죄악이 만연한 시대가 될 것이다.
둘째, 거짓 교사와 미혹이 증가한다. 마태복음 24장 24절에서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적을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고 말한다. 말세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등장하여 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다.
셋째, 재난과 전쟁이 잦아진다. 마태복음 24장 6~7절에서는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겠으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말세에는
전쟁, 기근, 지진과 같은 재난이 증가할 것이다.
넷째, 복음이 세계적으로 전파된다. 마태복음 24장 14절에서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한다. 말세에는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다.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준비와 믿음의 삶이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명확하게 가르친다.
첫째, 깨어 기도해야 한다. 누가복음 21장 36절에서는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기록되어 있다.
둘째, 말씀에 굳게 서야 한다. 요한계시록 3장 10절에서는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고 말씀한다.
셋째,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명령한다.
넷째, 세속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말씀한다.
말세와 재림의 소망
말세는 단순히 두려운 시간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소망의 때이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서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서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도들은 그날에 영광스럽게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할 것이다.
결론
말세는 죄악과 심판의 때이지만, 동시에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는 시간이다. 성도들은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깨어 기도하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20)
한 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여러 날들’ 또는 ‘특정한 기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말세는 어떤 기간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 요엘서를 인용한 사도 베드로의 증언에 따르면, 오순절 성령강림 때 말세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로부터 시간이 좀 지나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기록할 때도,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말세’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순절 성령강림 때처럼 하나님의 성령이 디모데가 목회하던 에베소 교회에도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증언대로,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시는 때가 곧 말세라고 했으니,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셨으므로 그때에도 여전히 말세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께서 그때와 동일한 방식으로 거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도 말세에 살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말세는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전까지 처하게 되는 ‘모든 현재’를 뜻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 보면, 이 본문은 2천 년 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말세에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2절)라고 말씀합니다. 말세의
뜻을 잘 몰라도 사도가 증언하는 내용만 봐도,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당시처럼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합니다.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지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얼짱’과 ‘몸짱’이 되기 위해 자기 얼굴과 몸을 뜯어 고치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 완전히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돈을 사랑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돈이라면 완전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험금을 노리고 자기 가족을
죽이기도 하고, ‘목사’를 사칭하는 사기꾼들이 헌금을 횡령하는 어처구니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랑하고 교만하며
남을 비방하는 일에 능숙합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물론,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한 삶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사람들이 절제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스마트 기기를 사용하면서 즉흥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소셜 미디어(Social Media) 문화’가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절제하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점점 사나워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육신적 쾌락에 빠져 급기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망각해 버립니다.
사랑하는 청년(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바울 당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경고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똑같이 “말세에” 살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말세의 특징을 보면서 오늘 한국 교회와 우리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게다가 더욱 충격적인 사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은 일차적으로 불신자들에 대한 묘사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거짓 교사 또는 거짓 신자들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는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라는 5절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따라서 “경건의 모양” 따위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경고는 일차적으로 교회 공동체를 겨냥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로 치면, 한국 교회와 그 밖의 모든 기독 단체 및 캠퍼스 기독 동아리를 향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 교회도 결코 예외일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참 신자인 척하면서 그냥 ‘가라지’로 앉아 있는 교인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단 한 번도 예수님과 만남의 경험이 없이 부모 또는 친구의 권유로 마지못해 교회당에 출입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리스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반면에 과거에 거듭난 체험은 있지만, 세상 가운데 불신자 친구들의 틈바구니에 살면서,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거의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칭의(의롭다 하심)의
은혜에서 결코 떨어져 나가지는 않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는 불신자와 거의 다를 바가 없이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굴복시키려는 선한 의지를 거의 소멸한 채, 언제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보다 육신적 쾌락에 매몰되어
온갖 욕심에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제가 볼 때 오늘 본문에 언급되는 사람들은 방금 말씀드린, 교회 안의 두 부류에
모두 해당됩니다. 다시 말해, 애초부터 거듭나지도 않았으면서 어릴 적부터 부모나 친구의 권유로 마지못해 종교 생활하는 자들과,
그리고 예전에 분명하게 거듭난 체험은 있지만 현재 세상의 영에 미혹되어 일시적으로 거의 불신자처럼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는 당시 디모데가 목회하던 에베소 교회 안의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이
앞서 말한 그 두 부류 모두에 해당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없으면서 참 신자인 척하는 부류, 또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이단자들에게 미혹되어 일시적으로 진리를 대적하게 된 부류를 가리킵니다.
아무튼 이 두 부류의 특징은 우선 “경건의 모양”(μόρφωσιν εὐσεβείας)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애초부터 거듭난 체험이 없는 사람도 오랜 기간 동안 교회의 예배행위나 여러 의식에 노출되다 보면, 참 신자와 거의 동일한 모습으로 “경건의 모양”을 무의식중에 습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경건의 모양을 보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닥쳐오면, 항상 자신의 욕망을 위해 무언가를 선택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마저도 자신의 양심을 평안하게 해 주는 수단 정도로 생각해 버립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주님의 십자가가 자기 위안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역시 경건의 모양은 갖추고 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경건의 모양이 어떤 것인지 알며, 한때 경건의 능력을
가지고자 노력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거짓 교사들, 즉 이단자들의 거짓 가르침에 미혹되어 일시적으로, (물론 그 기간이
언제까지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불신자의 영적 상태와 거의 다를 바가 없이 살아갑니다. 자기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채, 자신의 욕망에 따라 무언가를 선택합니다.
말씀을 향한 선한 의지가 조금 살아 있을 때에는 양심의 가책이라도 받는데, 그 선한 의지가 거의 소멸된 상태가 되면, 신앙적
양심의 가책도 거의 받지 않습니다. 참으로 자기 양심에 화인 맞은 것처럼 살아갑니다.
아무튼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6절에 나오듯이,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그런 부류에 속한 자들입니다. 여기에서 “어리석은 여자”(γυναικάρια)란, 거짓 교사들에게 ‘잘 속아 넘어가는 여인들’(gullible women, NKJV)을 가리킵니다(Thomas D. Lea, NAC: 1,2 Timothy, Titus).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남편이 밖에 일하러 나간 사이에, 거짓 교사들이 집요하게 집으로 침투해서 여인들을 교묘하게 미혹하는 행태가 있었습니다(존 스토트, 『BST 시리즈: 디모데후서 강해』). 그들의 이런 은밀한 수법은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를 미혹했던 뱀의 수법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사탄에 사로잡힌 멸망의 자식들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여인들은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긴 하지만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6-7절). 그렇기 때문에 이런 어리석은 여자들도 (일시적이면 좋겠지만) 같은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8절에 나오는 얀네와 얌브레 같은 사람들도 동일한 부류에 속합니다. 모세를 대적한 그들의 이름이 구약성경에 나오진 않지만, 바울은 유대인의 전통 문서들을 통해 그들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John Calvin, William Hendricksen).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대적하고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며, 또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입니다(8절). 오늘날로 치면, ‘ㅅㅊㅈ’와 같은 사악한 이단들을 가리킵니다.
놀랍게도(?) 본문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나타낼 때는 특별한 외적 형식을 가지게 됩니다. 외적 형식과 참된 경건의 관계는 몸과 영혼의 관계와 비슷합니다(Charles H. Spurgeon). 다시 말해, 참된 경건은 외적인 형식이 없이 표현될 수 없으며, 외적인 형식만 있는 참된 경건도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청년(성도) 여러분,
우리는 ‘교회 개혁’이라는 명분 아래, 형식을 무조건 좋지 않은 것이라 하여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형식적’이라는 말 자체를 굉장히 부정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우리의 신앙에는 ‘형식’이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신앙의 형식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3장과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화 있을진저”라는 강한 어조로 질책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11:42).
여기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이것도 행하고”, 즉 경건을 표현하는 외적 형식인 “십일조”도 행하고, 또한 “저것도”, 즉 그 외적 형식에 담긴 경건의 의미인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경건을 담아내는 외적 형식(경건의 모양)이 필요 없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본질’이라는 명분 아래 ‘형식’ 자체를 거부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교회 개혁’이라고 생각하면 완전히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물론 성경에도 없는 온갖 외적 형식으로 경건의 능력과 전혀 상관없는 것들은 당연히 없애 버려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경건에 유익이 되는 외적 형식들을 모두 없애 버리면 참으로 곤란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한번 적용해 봅시다. 사랑하는 청년(성도)들이여, 여러분은 과연 경건의 능력을 드러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 다시 한 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내 삶에 과연 “경건의 모양”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거짓 교사들과 거짓 신자들은 경건의 모양이라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여러 규례들을 지켰고, 온갖 율법 조항들을 만들어 내어 금욕주의적 삶을 살았으며, 외적으로 볼
때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종교적 행위들은 철저히 자신들의 의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도 그들이 갖추었던 외적 형식, 즉 “경건의 모양”이라도 갖추고 있는지부터 한번 살펴봐야 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5절)라는 사도의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경건의 모양은 필요 없고 경건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경건의 능력을 담아내는 최소한의 경건의 모양이 당연히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당시 사도가 보기에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누구나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 속에 몰래 침투한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도 참 성도들과 동일하게(?)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음을 그가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는 경건의 모양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생활’에 열중하는
모습입니다. 매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고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헌금생활도 열심히 하는데, 이것들은 그들에게 신앙이 아니라 종교일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런 행위들을 다른 사람에게 ‘신실하게’ 보여 줌으로써 존경과 좋은 평판을 얻으려는 데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
바울
당시에도 그랬겠지만, 오늘날에도 몰래 침투한 거짓 교사들은 보통 더 뜨겁게 교회생활을 합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 저희 학교에
‘대학교회’가 세워졌는데, 이곳을 섬기려고 찾아온 두 명의 청년이 처음부터 굉장히 뜨겁게 교회를 섬겼습니다. 여느 청년들과는
달리 찬양 팀 멤버로서 참 헌신적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몰래 침투한 ㅅㅊㅈ 추수꾼이었습니다. 이들은 본문에서 사도의
증언대로, 경건의 모양을 뚜렷하게 갖추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참 신자들과 비교해 봐도 전혀 차이가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관심사는 경건의 모양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행위에만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엇비슷한 모양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의 관심은 경건의 모양을 드러내게 하는, 기저(基底)에 깔린 경건의 능력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계신 청년(성도)들에게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과연 경건의 능력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경건의 능력이라고 해서 뭔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칼빈의 말대로, 경건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이 하나로 결합된 것입니다. 따라서 경건의 능력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일상생활 가운데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도 겉보기에는 참 신자들과 동일한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증언대로, 사람은 외모를 보기 때문에(삼상16:7)
그런 자들의 중심을 정확히 꿰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자들에게 속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추수
때까지 많은 경우에 그런 가라지들이 교회당에 나오도록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마13:29).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결정적인 한 가지 증상이 나타납니다. 일단 참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 없는 증상이 나타납니다. 이런 성도들은 주일 성수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마치 어린아이가 밥을
굶은 것처럼 영적 결핍에 허덕이게 됩니다. 그런데 경건의 능력이 없는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은 말씀을 듣지 않고 기도를 하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바른 말씀과 바른 교리와 참된 경건생활을 누리지 못하는데도 이들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증상을 보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안에서 결코 거듭난 적이 없기 때문에, 영적 양식을 공급 받지 못해도 자신이 굶어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항상 배우긴 하지만 자기 욕심대로 생활할 뿐이며,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처음부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이들은 우리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고 책망 받을 사악한 자들입니다.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계신 청년(성도)들이여,
여러분이 소유한 경건의 능력이 일상생활 가운데 더욱 드러나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날마다 살피며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또 자기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거짓 교사들처럼 경건의
능력을 부인한 채, 자기 욕심에 사로잡힌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일이면 또 다른 한 주가 세상 가운데 시작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경건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지, 이번 한 주간에 또다시 판가름 나게 될 것입니다. 매주 교회당에 있을 때는 경건의 모양으로 서로를 대하지만, 세상 가운데 여러분이 살아갈 때는 경건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대할 것입니다.
본문 8-9절에 나오듯이, 믿음에 관하여 버림받은 자처럼 살다가 자신의 어리석음이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폭로되지 않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겸손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적인 경건의 모양과 함께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경건의 능력을 아울러 겸비(兼備)하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