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람 데오(Coram Deo, 신전의식, 神前意識, 하나님 앞에서)
신전사상(神前思想)를 의미
라틴어 2개 단어인 코람(coram)과 데우스(Deus)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라틴어 coram은 '면전에서 혹은 앞에서'(in the presence of) 라는 의미
Deo라는 단어는 Deus(God, 하나님)의 탈격(ablative, 명사를 부사처럼 사용하기 위한것)이다.
이 두 단어가 결합하여 Coram Deo가 되었다.
구약에서 모세(출 18: 12)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이 친히 시내산에서 구름 가운데 임하시고(출 19: 9, 11; 20: 18), 광야에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하시며(출 13: 21-22), 또 회막에 구름기둥으로 임재하셨다(출 33: 9-11). 사무엘 상 12장 3절에 사무엘이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 ."라고 말하였다. 구약성경 시편 139편은 대표적으로 코람 데오의 정신을 보여주는 시이다.
- (시 139:1)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 (시 139:2)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 (시 139:3)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 (시 139:4)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 라틴어 성경 불가타역에 사용된 성구들-구약 - 창 6:11, 민 10:9, 신 4:10, 12:18, 16:11, 26:3, 대상 13:8, 10, 16:1, 대하 33;12, 왕상 8:65, 에 8:21, 욥 15:4, 32:2, 시56:13, 잠 3:4, 전 5:2, 단 6:10, 말 3:14.
신약에서는 제 2위 하나님되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셨다.[5] 그리스도는 임마누엘이 되시는데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런 임재적 사건은 사도 행전 4장 19절, 8장 21절, 10장 33절등에 나온다. 사도행전 10장 33절에서는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하였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9절은 주의 얼굴(임재, in the presence of the Lord)과 그의 힘의 영광(위엄, the majesty of his power)이 함께 사용되었는데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낸다는 의미이다. 임재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 위에 존재하다'(겔37:1), '오다'(요이1:7), '이르다, 만나다'(삼상3:10), '방문하다, 도착하다'(마24:27)는 뜻한다. 성경에서 '임재'란 주로,
- 하나님의 초월한 권능이 나타나는 때(겔37:1)
-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계시하실 때(삼상3:10)
-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요이1:7)이나
- 그분의 재림의 때(마24:27)를 두고 하는 표현이다.[6]
- 불가타 역 성경에 나오는 코람 데오 구절들-신약- 눅 12;6, 24:19, 행 8:21, 롬 4;22, 고후 2:17, 4;2, 7:12, 12:19, 갈 1:20, 딤전 5:4, 5:21, 6:13, 딤후 4;11, 계 3:2, 8:4
최승락 교수는 바울의 사상에도 코람데오가 나오는데 코람과 의미가 같은 헬라어 전치사들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성경에서 코람 데오는 단지 전치사(coram = before)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헬라어에서 라틴어의 ‘코람’에 해당되는 전치사는 여러 가지가 있다. 카테난티(katenanti)나 에난티(enanti)도 그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는 상황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의 말씀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katenanti theou) 말하고자 하는 결단을 밝힌다(고후 2:17, 12:19). 엠프로스텐(emprosthen) 역시 유사한 의미를 가진 전치사이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그를 시인하거나 부인하는 것에 따라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하거나 부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마 10:32-33). 그러나 이런 전치사들 보다 더 특징적인 전치사로 에노피온(enōpion)이 있는데, 예를 들어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enōpion tou theou) 자신이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밝힌다(갈 1:20). 에노피온은 엔(en)과 옵탈모스(ophthalmos 눈)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전치사로서 ‘안전’(眼前)의 의미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는 히브리어의 리프네(li-pnê)나 엣프네(et-pnê), 엘프네(el-pnê) 등에 맞먹는 전치사이다. 히브리어에 있어서 이 전치사들은 모두 파네(pane 얼굴)와 연결된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34:23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일 년에 세 차례 ‘하나님 앞에’ 보이도록 명할 때 엣프네 전치사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70인경에서는 헬라어 에노피온으로 번역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전치사들이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는 하나님 앞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면전(面前), 또는 하나님의 안전(眼前)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7] 야고보서 4장 10절 본문 "주님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에서 주님 앞에서 (in the presence of the Lord, ἐνώπιονΚυρίου)라는 코람데오는 인간의 자신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교만하지 말 것을 교훈한다.이 본문과 4장 6절에 있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히에로니무스(제롬)가 번역한 라틴어 성경 불가타역에 따른 코람 데오(coram Deo)에 사용된 성경구절은 다음과 같다.
- 구약성경 - 창 6:11, 민 10:9, 신 4:10, 12:18, 16:11, 26:3, 대상 13:8, 10, 16:1, 대하 33;12, 왕상 8:65, 에 8:21, 욥 15:4, 32:2, 시56:13, 잠 3:4, 전 5:2, 단 6:10, 말 3:14
- 신약성경- 눅 12;6, 24:19, 행 4:19,, 행 8:21, 롬 4;22, 고후 2:17, 4;2, 7:12, 12:19, 갈 1:20, 딤전 5:4, 5:21, 6:13, 딤후 4;11, 계 3:2, 8:4
종교개혁가들에게도 이 표현은 자주 발견된다.
마르틴 루터는 코람 데오를[8] 즐겨사용했는데 에벨링은 이 개념을 루터의 사상체계의 참된 근거(the very basis of Luther's mode of thought)라고 말한다.[9] 성경환 목사에 따르면 루터의 저서 《식탁대담》 중 〈세상의 본질에 관하여〉라는 장에서는 루터는 이 세상의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누고 있다.[10]
- 첫째 부류는 자신의 부패한 본성과 행동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채 양심의 가책없이 태평스럽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 둘째 부류는 율법앞에서 두려워 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며 좌절감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 셋째 부류는 자기 죄를 인정하고, 죄로 인하여 멸망할 자임을 잘 알면서 복음에 귀기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죄사함 받음을 믿고 하나님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으며 온갖 선행으로 믿음의 열매를 나타내며 사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울리히 츠빙글리의 신학사상에도 나타난다.[11]
요한 칼빈은 코람 데오를 통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고 그의 신학의 중요한 사상을 형성하였다.[12] 그의 명저 기독교강요 1권 2장에서 하나님의 얼굴 (the face of God)을 먼저 보지않고서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질수 없다고 한다.[13] 칼뱅은 베드로 전서 3장 4절 주석에서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속사람(중생한 사람)이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은 인간의 눈(코람 호미니부스)에만 치장하지 않는 값진 것(pretiosus)이라고 한다. 하나님앞에 값진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더 염려하는 것이라고 한다.[14]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때는 두려움과 전율을 느낀다고 한다. 하나님의 위엄이 인간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마다 언제나 충격을 받고 압도당했던 것으로 성경이 일반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그 두려움과 놀람은 바로 여기서부터 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臨在)를 모를 때는 굳건히 그리고 꿋꿋하게 서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것처럼 전율하고 경악하여 비참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고 거의 혼비백산이 된 것이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위엄과 자신들을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코 자신의 비천함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하고 깊이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우기 우리는 이러한 놀라운 사건의 실례가 사사기와 예언서에 무수히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었다(삿 13:22; 사 6:5; 겔 2:1; 1:28; 삿 6:22 등). 욥기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순전하심을 묘사함에 있어서 항상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능함과 부패를 깨닫게 함으로써 인간을 압도하는 강력한 주장을 하고 있다(참조, 욥 38:1 이하). 이것은 충분한 증거가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하여 가까이 나아갔을 때, 자신이 흙이요, 티끌에 불과함을 더욱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던 것을 볼 수 있고(창 18:27), 엘리야도 얼굴을 가리우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서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이렇게 두려운 일이다(왕상 19:13). 그룹들까지 두려움으로 그들의 얼굴을 가리웠는데(사 6:2), 하물며 후패하고(욥 13:28) 벌레에 지나지 않는(욥 7:5; 시 22:6) 인간이야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하여 선지자 이사야는 "그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왕이 되시고…"(사 24:23)라고 말한다. 즉 그가 그의 광채를 발하시고, 더 가까이 다가서게 하면, 가장 빛이 나던 것들도 그 앞에서는 캄캄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사 2:10,19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가르치는 올바른 순서는 전자를 먼저 논하고 다음에 후자를 논하는 것이라 하겠다.
— 《기독교강요》 1:1:3, 장 칼뱅
디모데 전서 6장 13절 주석에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앞에서"라는 것의 의미는 우리의 눈을 세상에서 돌려 만물을 살게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을 배워는 것이라고 한다.[15] 이승구 박사에 따르면 코람 데오의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한다.[16]
윌리엄 틴데일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는 신념 때문에 그 유능한 생애를 화형으로 마감해야 했다. 만일 그가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길을 택했다면 그는 당대 최고의 성경학자로서 존경을 받으며 장수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17]
A.T. 피어선은 하나님과 관계속에서 거룩한 삶이란 코람데오(coram Deo)의 삶이라고 한다. 의식적이며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눈앞에서 살아가는 삶이며, 하나님의 눈앞에 자신을 직접적으로 두는 삶이며, 그리고 그 분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동시에 우리도 그와 함께 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숨겨진 불경건한 삶의 모든 감추어진 것들을 청소하는 것이며 우리가 우상을 포기하고 그 자리가 하나님의 임재와 교재의 성소로 바꿔어지는 삶이라고 한다.[18]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와 더불어서 세계 3대 칼빈주의자인 미국의 벤저민 워필드는 모든 관점에서 하나님이 보고 있다라는 것을 삶의 원리로 살아가는 것이 코람 데오의 삶이라고 한다.
칼뱅주의자는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다. 그는 자연에서 하나님을 보고, 역사에서 하나님을 보며, 은혜에서 하나님을 본다.
칼뱅주의자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발자국을 보고, 모든 곳에서 그 전능하신 팔의 역사하심을 느끼며, 하나님의 위대하신 심장 박동 소리를 듣는다. 이 모든 사실에서 칼뱅주의를 구성하는 원리가 나타난다.
칼뱅주의자는 모든 현상의 배후에서 하나님의 손을 발견하며, 이 모든 현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며, 기도하는 태도로 자기의 전 생애를 살아가고, 구원 문제에 있어서 자신을 전혀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다.
안명준 교수는 성경해석과 관련하여 코람데오를 말한다.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특별히 인간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하여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coram Deo)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고 한다.[19] 그리고 그에 따르면 다음의 몇 가지로 코람 데오의 특징을 설명한다.
- 코람 데오는 경건한 신앙의 근본적이 원리이다. 신앙의 시작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 코람 데오는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만들어 준다. 그의 뜻을 분별하고 삶을 살펴서 거룩한 영적 삶을 살게된다,(롬 12:1-2)
- 코람 데오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강하게 보여주는 성경의 일관된 주장이다.
- 코람 데오의 정신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실천하는 삶으로 연결된다.
- 코람 데오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지혜의 근본이다.
- 코람 데오는 만물의 통치하시는 눈동자처럼 살피시는 여호와의 눈을 언제나 주목하는 것이다.
코람 호미니부스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인간들 앞에서)는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신학적 용어이다. 이말은 코람 데오(라틴어: Coram Deo, 신전의식(神前意識,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과 반대되는 말이다. 리차드 멀러는 이 두 용어는 서로 대조되는 것으로 본다.[1] 하나님의 임재와 반대되게 인간 중심으로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코람호미니부스는 기독교 신앙에 유혹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신앙을 파괴한다고 본다. 텍사스의 번영신학의 주창자 조엘 오스틴과 로버트 슐러는 인간 중심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것은 코람 데오와 반대적인 메세지이다. 인간중심적 메세지와 인간이 원하는 내용을 전하는 것은 전형적으로 인간 앞에서 효과를 추구하는 인본주의적 사상이다.[2] 여호와의 눈을 약화시키는 신앙적 이탈로 인간의 이성과 자율성에 대한 주도적인 역할을 강조할 뿐이다. 종교 개혁가 장 칼뱅은 인간이 먼저 하나님의 얼굴(coram deo)을 먼저 보고 인간 자신을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는다면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한다.(존 칼빈, 기독교강요 1:1:2)
주와 동행하는 삶(창세기 5:21-23) / 설교원고(2018-12-30) 송구영신
파트리스교회 주일 설교 / 2018-12-30 송구영신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지혜로운 사람은 두 가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알아야 할 두 가지는 나의 남은 날 수와 남은 날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아는 것입니다.
시편 90: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2018년을 마감하는 송년주일의 설교 제목은 ‘주와 동행하는 삶(Live with the Lord)’ 이라고 정했습니다. 주와 동행하는 삶이란 설교 제목을 정하게 된 이유는
나의 남은 날은 얼마나 될까? 남은 날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하면서 얻은 결론은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기독교 윤리학자 리차드 니버(Helmut Richard Niebuhr, 1894∼1962)는 인간의 이상형은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두 가지를 본받아야 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이며, 또 하나는 인간을 향한 절대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과 인간을 향한 절대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세상은 온갖 부조리와 갈등의 구조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현실입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사도 바울은 주와 동행하기 위해서 이렇게 고민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할까요?
이 말씀을 다른 성경으로 읽어보면 이렇게 번역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할까?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까?
신앙생활의 자세를 두 가지로 소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코람 데오(Coram Deo)’는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 라는 뜻이며, 또 다른 하나는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는 ‘사람 앞에서(Before Men)’ 라는 뜻입니다.
코람 데오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주와 동행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주와 동행하는 삶을 ‘코람 데오(Coram Deo)’ 라고 합니다.
‘코람 데오(Coram Deo)’는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 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주와 동행하는 삶은 나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생각하며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런 기도가 ‘코람 데오(Coram Deo)’의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느 목회자가 여러 지역을 순회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사택에 불이 나서 모든 것이 타버렸고 심지어 두 아들마저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그 때가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개신교회가 활발하게 번성하던 시기였습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결코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낙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목회자는 아무도 없는 숲속으로 들어가서 기도합니다. 그때 그 목회자의 마음에 참 평강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놀라운 찬송을 불렀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2019년 신앙생활에 은혜가 넘쳐나는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코람 데오(Coram Deo)’ 즉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 라는 신앙생활을 위한 명제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면에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라고 합니다.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는 ‘사람 앞에서(Before Men)’ 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가룟 유다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를 팔아넘길 음모가 드러났습니다. 이때 가룟 유다는 ‘코람 데오(Coram Deo)’의 길을 포기하고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를 팔아넘긴 후 스스로 목매어 죽는 죽음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과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의 결과는 이미 가룟 유다의 선택에 의해서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코람 데오(Coram Deo)’ 즉 ‘주와 동행하는 삶’을 위하여 함께 경주하는 2019년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와 동행하는 삶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오늘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 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를 에녹이란 이름과 므두셀라 라는 이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에녹(Enoch)이란 이름은 ‘바친다’는 뜻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에게 바쳐진 인생 이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에게 바쳐진 인생으로 2019년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에게 바쳐진 삶이
곧 에녹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온전하게 바쳐졌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누구나 경험하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왜 에녹은 하나님에게 바쳐질 수 있었을까요?
에녹 당시의 평균 수명은 대략 630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365년을 살았습니다. 평균 수명보다 훨씬 적게 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평균 수명보다 적게 살았다고 하면 무슨 몹쓸 질병에 걸렸거나 아니면 사고를 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몹쓸 질병에 걸린 것도 아니었고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던 에녹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서 영원한 동행을 하고 있습니다.
므두셀라(Methuselah)라는 이름은 ‘창을 던지는 사람’ 이란 뜻입니다.
므두셀라는 성경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를 살았다고 합니까? 969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에녹은 365년을 살았는데 므두셀라는 969년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오래 살았던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에녹은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영원한 것은 없다!
에녹이 살았던 시대에 창을 던지는 사람이란 성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성을 지키는 사람이 969년 동안 그 성을 지켰다면 잘 지킨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969년 보다 더 많은 2천년 동안 성을 지킨 사람과 비교할 때는 잘한 것이 아닙니다. 에녹은 므두셀라가 969년 동안 육체라는 성을 지키지만 결국은 죽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죽는다는 것은 성을 빼앗기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에녹을 깨달았습니다.
시편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둘째는 심판이 다가올 것이다!
므두셀라는 이름은 므두(무투, death)와 셀라(살라크, send)가 합성한 이름으로 므두셀라가 죽으면 심판을 보낸다는 뜻입니다. 이때 심판은 노아의 홍수를 말합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원한 것은 없으며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주와 동행하는 삶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삶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버렸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이었습니다.
에녹처럼 살아서 주님 앞으로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에녹과 같이 될 수 없다면 건강하고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주와 동행하다가 어느 날 잠을 자는 것처럼 고요하게 주님 앞으로 가는 것을 기도합니다.
에녹과 같은 삶을 원하신다면 주와 동행하는 삶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거룩한 동행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2019년 파트리스교회 모든 가족들이 거룩한 동행자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거룩한 동행자가 될 수 있는 말씀을 소개합니다.
디모데전서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It is consecrat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무엇일까요?
기도는 성경대로 살아가는 힘을 공급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왜 기도합니까?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기 위한 힘을 공급받기 위한 것입니다. 현실에서 부딪친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우려는 힘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는 고통스런 현장에서 스데반은 ‘주여,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저 돌이 방향을 바꿔 돌을 던진 사람의 이마에 맞아 마치 골리앗이 쓰러지듯 넘어지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코람 문도(coram Mundo)
사순절 다섯째 주일, 다음주일은 종려주일, 그리고 고난주간입니다. 주님 십자가 지시고 나를 위해 고난당하신 그 고난주간, 한주간 동안 전교인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주님 가신 그 십자가의 길에 동참할 작정입니다. 그 잔을 함께 마시고 주님과 함께 깨어있기를 원합니다^^
본당의 사순절 플래카드 "코람데오"처럼 하나님 앞에 서고 싶습니다!
Coram Deo 코람 데오는 라틴어로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신전의식(神前意識)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16세기 당시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변질되어가던 교회에 개혁을 일으켰던 종교개혁자 루터와 그리고 칼빈이 이 단어 하나를 붙잡고 평생 개혁의 길을 갔습니다! 실종된 코람데오 정신을 되찾자고 다시! 코람데오!를 외쳤습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 앞에 섭시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 코람데오는 신학대학교의 교훈이기도합니다.
▶ 존 웨슬리도 코람 데오의 정신으로 스스로의 경건생활을 점검하곤 했습니다.
1. 난 항상 기도하고 있는가?
2. 난 항상 기뻐하고 있는가?
3. 난 항상 감사하고 있는가?
4. 난 욕심내고 있지 않은가?
5. 난 하나님 앞에 두려운 일은 없는가?
6. 난 연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가?
7. 나의 말과 행동은 진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진실인가?
내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순간은 어떤 순간일까요? 종말론적이라고 느낍니다.
하나님과 나는 운명적으로 숙명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입니다. 태아가 어머니과 탯줄로 연결되어 있듯이 하나님과 우리는 영혼이 엮여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선 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순간, 평생 동안 써왔던 수많은 가면을 벗어버리고 내 존재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서는 것이 바로 코람데오 정신일 것입니다. 가면 속의 내 얼굴을 아시는 주님 앞에 이 사순절! 무릎을 꿇습니다!
자아를 내려놓고,
집착을 내려놓고,
욕심을 내려놓고,
변명도 내려놓고,
핑계도 내려놓고...
그리고 치유받고 위로받고 용서받고 새 힘을 얻기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다시 힘을 얻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지난주 라틴어 성경 Vulgate에 나타난 28개(58)의 코람 데오 본문을 찾아서 읽어보았습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본문들이었습니다.
맨 먼저 나오는 코람데오는 하나님 앞에서 부패한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Gen 6:11] corrupta est autem terra coram Deo et repleta est iniquitate
[창6: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그 뒤로 이어지는 모든 코람 데오들!
성경의 모든 인물들, 다윗, 욥, 다니엘도 코람데오의 자세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선 자에게 주시는 축복과 감사와 찬양과 두려움과 떨림과 사랑받음과 위로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유다왕국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알려진 유다의 왕 므낫세의 기도에도 코람데오가 나타납니다.[대하33:12] 므낫세가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에 끌려가 감옥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들어주신 것입니다.
코람데오!
2016년 이 봄날, 사순절의 5번째 주일, 고난주간을 앞두고 생각합니다.
나의 삶을 지금까지 이끌어온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사랑?
성공을 위한 투쟁?
내 집 한칸 마련을 위한 투쟁?
진실했었는가? 정직했는가? 최선을 다했는가? 사랑했는가?
나는 과연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가?
때로는 거울을 보며 명상하듯이 내 모습을 오래 바라보며 명상하듯이, 이 글자를 붙들고 명상하고 싶기도합니다.
어느 분의 글을 인용합니다.
“신의 실재는 내게 가장 거대한 벽이었다. 나는 그 진실을 코람 데오라는 말을 붙잡고 삶의 길을 통해 확인하고 싶다.”
성경에 나타난 28번의 코람데오 중 계시록에 마지막으로 두번 나타나는데 먼저 사데교회에 대한 경고에 나타납니다. 코람데오 정신이 실종된 사데교회에 대한 경고입니다!
[계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현대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나는 네가 살아 있고 활동적이라는 평판과는 달리 실제로는 죽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계3: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coram Deo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계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코람 데오로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하나요?
그런데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남은 바 사람들을, 그들의 가능성을, 그들의 아름다움을 살려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 원한다면 코람데오의 정신으로 살려한다면 죽어가는 내 옆의 사람들에게 힘을 넣어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경>
[계3:2] Wake up! Strengthen 그러므로 깨어나거라. 너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완전히 숨지기 전에 힘을 북돋아 주어라.
<한글 KJV>
[계3:2] 깨어 있으라. 그리고 남아 있으나 죽어가는 것들에게 힘을 돋우어 주라.
<현대어>
[계3:2] 이제 일어나라. 불과 얼마 남지 않은 자들에게 힘을 넣어 주어라. 그들은 거의 다 죽어가고 있다.
성경을 읽어가다가 코람데오 Coram Deo,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코람 문도(coram Mundo)가 하나가 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코람데오 (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사람 앞에서
코람 문도(Coram Mundo) 세상 앞에서!!
이 세가지 개념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이며 하나이어야 한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있는 자는 곧 사람과 세상 앞에 바로 서야한다는 것! 그것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내는 곳, 이루어내야 하는 곳이 바로 사데교회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교회라는 것을 깊이 가르쳐주고 있는 본문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바로 우암교회 안에서 바로 코람데오 (Coram Deo)와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와 코람 문도(coram Mundo)가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어제 있었던 우암가족 성경공부 만남의 시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는 이 시간이 가장 좋습니다! 고백이 첫사랑 고백의 순간같이 설렙니다! 가슴을 울리고 한없이 울리고 글썽합니다! 이 순간처럼 가슴 뭉클한 순간이 없습니다. 이렇게 늘 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얘기하는 것이 역시 가장 재밌습니다. 간증이 가장 즐겁습니다.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눈물, 간증, 세월, 기도를 존중합니다! 가벼운 생애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영혼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합니다. 여러분의 생을 존중합니다. 사람을 알고 사귀게 되고 사랑하는 것의 기쁨과 감사가 진실로 큽니다!
여러분들의 간증 요약입니다!
♥ 주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가까이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과의 친밀성을 기대하고 사모합니다! 사랑받기 원합니다. 내 인생 모두가 응답되게 해주세요!!
♥ 하나님을 연인처럼 대했으면 좋겠습니다.
♥ 가장 힘들 때 함께 계셨던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 오00성도 50대 후반;남자 / " 그동안 가족들의 권유에도 긴 세월 혼자서 버티고 안나왔다. 전도초청 주일에 와서 찬송을 부르는데 느닷없이 눈물이 났다. 아내가 눈치채지 않도록 고개를 돌리고 울었다. 예배 후 교회 식당에서 점심먹자는 아내 말을 거부하고 집으로 가는데 왠지 마음이 너무 개운하고 후련했다. 이제는 교회에 가야겠다, 믿고 살아야겠다... 결심하고 주일마다 온다. 주일은 부활의 날이라고 배웠다. 과연 주일마다 부활을 느낀다.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느낌이다. 교회에 열심히 다녀야 되겠다고 생각한다.
♥ 교회에 열심히 다녀서 하나님께 사랑받는 예쁜이가 되겠습니다!(장00)
♥ 사랑받고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 어린 시절부터 우암교회를 다녔고 그동안 몇십년의 길고 긴 세월 속에서도 앞으로 나서지 않고 왠지 늘 뒷전에 있었다. 왜 그랬는지 스스로 생각해본다. 왜 그랬을까? 왜? 이젠 조금씩 달라지고 싶다. 사실 교회역사철을 보면서 깜짝 놀라는게 많습니다! 지금 조용히 계시는 분들이 불꽃처럼 일했던 기록에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왜 지금은 조용히 뒤에 계시는 것일까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무엇이 나를 방해합니까? 이겨내시고 불꽃같이 일하시다가 주님 만납시다!
다른 분의 간증입니다.
♥
사실 교회에 오면 뭔가 서먹했습니다. 제 성격이 내성적이라 그런지 오랫동안 교회가 적응되지 않고 많이 부담스러웠으나 이젠 마음이
열렸습니다. 도우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도우신 리더분들과 서로 진지하게, 진실하게, 같이 울고, 같이 붙잡고, 같이 기뻐하며
가겠습니다.
♥ 어느 교회나 많은 분들이 익숙해지고 적응하는데 힘들었다고 말합니다. 속히 익숙해지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어색하지 않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주인이 따로 없습니다. 몇십년 나오면 주인이 되겠습니까? 또 몇십년 나온다고 주인이 되는 것이긴 합니까? 지금 교회당 앞자리에 앉는 분이 주인입니다. 지금 웃고 맞이하시는 분이 주인입니다. 지금 먼저 인사하는 분이 주인입니다. 오늘 그러면 내가 주인입니다. 주인 어딨나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인입니다. 식당에 가면 주인들이 먼저 인사하고 어서 오라고 말하지 손님들이 인사합니까? 인사하고 웃으면 오늘 지금 나는 주인입니다. 주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젊은 학생; 상담 한번 해주지 않으시렵니까?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나서 식판을 들고 밥을 담았는데, 너무 많이 담아서 빼려는데, 이미 줄이 너무 길어서, 그냥 먹기로하고 가는데, 한 분(아줌마,권사,집사)이 저보고 집에 밥이 없느냐고 물으시는겁니다. 그때는 웃고 지나갔지만, 집에 가서 생각해보니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생각이 나고 기분이 점점 나빠지고 화가 납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A 그 아줌마집사님은 비꼬는 마음만 가득하고 교만하고 사랑이 없는 마음입니다. 오히려 형제님이 예수님의 긍휼한 마음으로 품고 기도하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분을 품으면 사탄에게 지는 겁니다. 즉 그 날의 예배에 실패하는 것이니 작은 일에 매이지 말고 당당하십시오...
B 그 분(아줌마권사님,집사님)이 잠시 실수하신듯ㆍ사람은 누구나 실수합니다. 원래 사소한걸로 맘이 상하죠. 주님의 사랑으로 너그럽게 용납하길 바래요^^
C 여러분들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예배 후의 예배, 식당에서의 멸치조림, 깍두기 국물 예배에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기분나쁜 것을 금방 잊을 수 있는 능력, 말을 참을 수 있는 능력, 덮어줄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 다른 분의 고백입니다!
♥ 6개월! 사실 조금씩 나태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기회가 다시 새로워지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아, 소중한 고백! 우리가 점점, 조금씩 나태해지는 바로 그 순간을 지켜주기 바랍니다. 서로 도와주기 바랍니다.
코람데오 Coram Deo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코람 문도(coram Mun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