σώμα(소마)와 σaρξ(사르크스)의 차이


  • σώμα(소마)와 σaρξ(사르크스)의 차이

  • 두 가지 용어가 종종 혼용해서 사용된다. 
    그러므로 크게 두드러지는 차이는 없다.  
    하지만 엄밀하게 구분하자면 

    σώμα(소마)는 영혼 정신 등과 대비되는 신체(身體)를 일컬을 때 사용한다. 

    σaρξ(사르크스)는 신체에서 뼈, 살, 피 등을 이야기할 때 ‘살’을 가리킨다.

  • 몸(소마 - σŵμα )과 육신(사르크스 - σάρξ )

    바울은 그의 영이 기운을 낸다든지 안심 한다고 말했을 때, 자신의 내적인 평안을 발견하였음을 의미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영(프뉴마 - πνεύμα)을 소유하는지 아니면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을 받음으로 소유하게 된 독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볼트만(Bultmann)은 인간이 구분되거나 분리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며, 몸 (소마–σώμα), 영(프뉴마), 그리고 혼(프쉬케 - ψυχὴ)은 인간 전체를 여러 방식으로 보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은 몸(소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바로 몸(소마)이다”라고 주장한다.

    인간, 그의 인격 전체는 소마로 지칭될 수 있다.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히 되게 하는 것은 나의 인격, 나 자신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 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관련 구절들을 출발점으로 삼는 불트만은 몸이란 “자신을 자신의 행위의 대상으로 삼거나 또는 자신을 어떤 상태의 주체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부장했다. 소마적인 존재는 표준적이며 고유한 존재양식으로 생각된다.

    소마는 인간존재의 덜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 본질적인 요소이다 혼 또는 영의 생명은 참되고 본질적인 생명이지만, 외적이며 우연적인 몸의 생명은 마치 인간의 참된 생명을 실현하는데 방해거리나 되는 것처럼 서로 대조되는 것이 아니다. 구속사역은 단순히 혼 또는 영의 구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몸의 구속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완전한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고안한 궁극적이며 완전한 삶의 양식은 소마적인 존재이다. 몸에 대해서 취하여야 할 태도를 가르친 바울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1. 몸은 비록 인간존재의 완전한 부분이지만 육의 몸은 부패하고 죽는 사망의 몸(롬7:24).

     2. 죄는 죽을 몸에 왕노릇 할 수 있기 때문에(롬6:31), 죄의 도구인 몸은 죄의 몸으로 불리울 수 있으며, 따라서 영이 거주하는 인간은 몸의 죄된 행실을 죽여야 한다(롬8:14)[본문 롬8:13의 사르크스를 우리말 개역성경에서는 육신(flesh)으로 번역하였다. 영어성경에서도 육신으로 번역한 경우가 많다. NIV에서는 죄의 본성(sinful nature)으로, GNB(TEV)에서는 인간본성(human nature)으로 번역하였다.]

      3. 몸은 굴복되어야 한다. 사람의 영적인 생활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훈련받아야 한다. 인간 존재의 최고 목적은 영의 영역에서 발견되어야 하며 따라서 몸은 영, 참된 자아의 종이 되어야 한다. 몸 그 자체는 참된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주인 행세를 할 수 없다. 몸이 훈련받아야 하는 것은 그것이 영적인 목적들을 좌절시키기 때문이다.

      4. 몸에 대한 자기 통제는 그것이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져야 한다(롬12:1). 그리스도인은 그의 몸 안에 성령이 내주(內住)하고 있음을 인정하여야 한다(고전6:19). 그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다(고전6:15).

      5. 몸 자체는 구원이 완성되는 날에 구속될 것이다(롬8:23). 육신(사르크스-σὰρξ)은 몸의 조직들이다. 육신은 흔히 몸을 구성하며 따라서 뼈와 피에 대조되는 조직들을 묘사 할 때 사용된다. 사르크스는 몸 자체이다. 자연적인 변화를 거치는 동안 부분은 전체를 지칭하게 되었고, 여러 구절에서 사르크스는 몸의 육적인 부분을 가리키기보다는 몸 전체의 동의어처럼 사용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몸으로 떠나 있다”고 말하든지(고전5:3), 아니면 “육신은 떠나 있다”(골2:5)라고 말할 수 있었다. 사르크스는 혈통과 관계를 맺은 인간이다. 구약의 용법에 따르면, 사르크스는 몸의 요소 또는 몸 자체를 지칭할 뿐만 아니라, 육으로 구성된 인간을 구체적으로 지칭할 때 사용된다. 이러한 용법에서 보면 사르크스는 특별히 인간적인 관계들,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묶어 두는 육신적인 가문과 자연적인 인연들을 지칭할 수 있다. 사르크스는 외적인 모습과 조건에서 본 인간이다.

    사르크스의 뜻은 인간의 육신적인 생명 너머로 확대되어 인간 존재에 있어서 불가분리적인 다른 요소들을 포함하게 되었다. “육체를 신뢰하는 것”(빌3:3)은 몸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외부 영역에 속하는 복합적인 모든 것들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의 유대적인 혈통, 그의 엄격한 종교교육, 유대 종교단체들 가운데서 뛰어난 그의 열심과 그의 탁월성 등을 포함한다. 사르크스의 윤리적 용법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육이 영과 대조되는 것처럼 인간은 악하며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육에 속한’ 자들과 ‘영에 속한’ 자들을 날카롭게 대조시킨다. 육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 하고 영에 있나니…”(롬8:9) 로마서 8:8절에 ‘육신에’ 라는 말은 9절에 의하면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 자, 즉 중생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킨다.




  •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 May God himself, the God of peace, sanctify you through and through. May your whole spirit, soul and body be kept blameless at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 평강의 하나님 - 이 문구는 바울 서신의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롬 15:33;16:20;빌4:9;고후 13:11;히 13:20). 바울이 하나님을 '평강'(*, 에이레네스)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과 자신 사이에 평화를 이룩하신 평화의 근원이시기 때문이었다(골 1:20).

    󰃨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 '온전히'의 헬라어 '홀로텔레이스'(*)는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됨을 가리킨다. 이러한 '성화'(sanctification)는 내주(內住)하는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4:8;롬 15:16).

    󰃨 영과 혼과 몸 - 인간의 보편적 구성 요소와 관련되는 본문은 소위 말하는 삼분설 또는 이분설 논쟁이 제기되는 구절이다. 우선 몸은 순수하게 물질적인 부분, 즉 육신을 가리킨다. 다만 여기서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영'(*, 프뉴마) 과'혼'(*, 프쉬케)의 차이점이다. (1) 삼분설. 그리스 계통의 교부들(Irenaeus,Chrysostom)은 영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인간의 이성적 부분, 즉 양심이나 의지와 관련되어 있는 것에 반해, 혼은 동물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될 수 있는 생명이나 감정, 감각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하였다. (2) 이분설. 성경에는 인간의 본성을 거의 대부분 혼과 몸(창 2: 7; 마 6:25), 영과 몸(전 12:7;고전 5:3, 5)으로 구분하여 이분법적인 분류법을 말함으로 혼과 영을 혼용하고 있다. 바울은 본절에서 인간의 본성을 영과 혼과 몸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것은 당시 그리스의 사고 방식에 젖어있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삼분법적인 표현을 사용했거나 또는 수사학적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서, 실상은 성도들의 전인격(全人格)을 가리킨 말이다. 이의견에 대해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동의한다(Morris, Bruce, Milligan).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For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active. Sharper than any double-edged sword, it penetrates even to dividing soul and spirit, joints and marrow; it judges the thoughts and attitudes of the heart.





  •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 '하나님의 말씀'은 앞에서 인용된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키고 있으나(Hewitt),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해진 하나님 말씀 전체를 가리킨다(Robertson, Morris).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라는 표현은 그 '말씀'이 '인격성'과 '역동성'을 지녀서 행위를 동반함을 암시한다. 즉 하나님에게 불순종한 이들에게는 경고와 심판을 행하게 되며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에게 약속된 말씀을 성취케 하는 말씀이다(Hewitt, Morris).

    󰃨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 하나님의 말씀은 출애굽 세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수신자들에게도 동일한 효력을 지닌 말씀으로서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에 따라 안식과 진노를 행한다(Trompf). 그 말씀은 '검'과 같아서 하나님의 음성에 계속 불순종할 때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거 역하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아말렉과 가나안인들의 '검'(*, 마카이란)에 패배(敗北)하여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민14:43-45).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심성에 내재하는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악독(롬1:29) 등의 온갖 죄악을 예리하게 심판하는 '검'이 된다(Hofius, Lane).

    󰃨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 '혼과 영'(*, 프쉬케스 카이 프뉴마토스), '관절과골수'(*, 하르몬 테 카이 뮈엘론)는 인간의 구조로 명명되는 '삼분법'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인간 정신의 전체적인 본성을 말하는 수사학적(修辭學的)인 표현이다(Bruce, Morris, Robertson). 한편 '찔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이이크누메노스'(*)는 '꿰뚫다'라는 의미로 인간의 영혼과 육을 분할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깊은 내면을 꿰뚫어 잠재된 의식까지 들춰내는 능력이 있음을 시사한다(Bruce, Robertson). 또한 '감찰하나니'의 헬라어 '크리티코스'(*)는 법정 용어로서 '판단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인격의 가장 깊은 곳까지 통찰할 수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순종 여부에 따라 안식과 진노를 행함을 시사한다(시95:11, Lane).





  • 성경에서 몸을 지칭하는 단어는 '소마, 사륵스'로 구분되어 사용되었다. 

    헬라어 '소마'(Soma)는 육체적 몸뿐만 아니라 인격적 구성체 등을 포함하는 의미로 쓰였다. 
    '사르크스'(Sarx)는 육체적 연약성, 영과 대립하는 죄성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몸, 육체, 육신’이라는 세 가지의 단어로 혼용되면서 몸을 지칭하는 ‘소마와 사륵스’의 각각 다른 의미를 구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어느 날 주일, '소마'(Soma)의 의미로 쓰인 대표적인 성경구절인 로마서 12장 1절을 ‘산 제물’(Living sacrifices)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들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롬 12:1).
    'Therefore, I urge you, brothers, in view of Gods mercy, to offer your bodies as living sacrifices, holy and pleasing to God -- this is your spiritual act of worship.'


    로마서 12장 1절에서 거룩한 산 제물(living sacrifices)로 드리라고 하는 '몸'은 우리의 영, 혼, 육을 모두 다 포함한다.

    신명기 6장 5절에서 말하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처럼 ‘나의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몸을 드린다는 것은 나의 전부를 드리는 것과 같다. 우리 인간은 나의 모든 것이 몸 안에 들어있고, 몸으로 존재하며 소통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기쁨과 감격을 표현할 때에도 몸을 사용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몸은 나의 육체, 육신, 껍데기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에 허락하신 삶을 살아가는 나, 그 자체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몸을 드리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할 영적 예배'라고 말한다. 우리의 몸이 영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 역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Soma)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한다.

    몸이 악하고 정신, 혼, 영 보다 못한 것이라면 어찌 감히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여기서 말하는 몸 역시 우리의 영혼육을 모두 포함한 '나'라는 존재 자체를 말한 것일테다.

    나의 관심사와 시간, 나의 애정과, 나의 생각까지, 나의 몸을 드린다는 것은 ‘나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단순히 육체, 껍데기, 썩어 없어질 것, 정신보다 못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그렇게 경히 여기지 않으셨다.

    그분은 직접 피조물을 만드셨고 보기에 좋다 하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의 모든 물질들을 인간에게 좋은 것이라 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몸으로 그것들을 감각하고 누리며 더욱 충만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

    태초에 지으신 의미에서 변질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의미로 되돌려야할 것이다(예술과 영혼 중).

    하나님이 지으신 몸에 대한 원래의 선한 의미를 이분법으로 나누어 비하할 수는 없다. 몸은 논의하기 껄끄러운 대상이 아니라 회복해야 할 대상이다.










  • 영생(永生, ETERNAL LIFE)




    영생(永生, ETERNAL LIFE)

    하나님과 더불어 온전하게 살아가는 것.





    요한복음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Simon Peter answered him, "Lord, to whom shall we go? You have the words of eternal life.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영생(조에. zōē)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 I.  생명.
    • II.  [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 1.  [반] θάνατος, 롬8:38, 고전3:22, 빌1:20, [때]
        • a.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눅16:25, 행8:33, 약4:14.
        • b.  ἐν τῇ ζ. ταύτῃ: 이생에, 고전15:19.
        • c.  τέλος ζωῆς: 생의 마지막, 히7:3.
        •  d. ζωὴ κ. πνοή: 생명과 숨, 행17:25.

        • e.  πνεῦμα ζωῆς: 생기, 계11:11.
        • f.  ψυχὴ ζωῆς; 살아있는 것, 계16:3. ㉠ [하늘의 몸으로 옷 입은 사람에 대하여] 고후5:4.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하여] 롬5:10, 고후4:10.
      • 2.  생의 도구, 생계.
    • III.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초자연적인 생명에 대하여]
      • 1.  하나님과 그리스도.
        • a.  [하나님에 대하여] 요5:26, 12:50, 요일5:20.
        • b. [그리스도에 대하여] 요1:4, 5:26, 행3:15등, 요일5:11.
      • 2.
        • a.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ἐν καινότητι ζωῆς περιπατεῖν: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 롬6:4. ㉡ ἀπηλλοτριωμένοι τ. ζωῆς τ. θεοῦ: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 엡4:18. ㉢ ἡ ζωὴ τ. ἀνθρώπων [사랑의 생명, 구원과 영광의 생명에 대하여] 요6:68, 행5:20, 고후4:12, 빌2:16, 딤후1:1,10등.
        • b.  [종말의 축복된 시기에 있을 생명에 대하여] ㉠ ἐν τῷ αἰῶνι τῷ ἐρχομένῳ ζ. αἰ: 내세에서의 영생, 마19:29등, 막10:30, 눅18:30. ㉡ ζ. ἐκ νεκρῶν: 죽은 상태로부터 벗 어난 사람의 생명, 롬11:15, 갈6:8, 딤전1:16등.
    • 관련 성경 /  생명(마 7:14), 이 세상의 삶(고전 15:19), 생기(계 11:11).



    • 생각하는 바가 영에 속한즉 영원한 생이니라. 

    • 그때 너희는 영생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에 있나니. 

    • 그리스도를 믿고 끝까지 견디는 것이 영생임. 

    • 영생을 가진 그가 부자니라. 

    • 의로운 자는 이 세상에서는 평화를, 장차 올 세상에서는 영생을 받으리라. 

    • 끝까지 계속하는 자들은 영생의 면류관을 쓰게 되리라. 

    •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죽은 자로서 만일 머물기를 허락 받았더라면 그것을 받아들였을 자들은 해의 왕국의 상속자가 되리라. 

    • 사람에게 불멸과 영생을 가져다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영광이니라. 

    •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영생을 주심.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영생에 대해 말할 때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로마서 6:23) 나오는 하나님의 선물을 말합니다. 이 선물은 죄의 자연스러운 결과인 “죽음”과는 대조적입니다.

    영생의 은사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1:25). 이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은 그것이 영원한 생명임을 나타냅니다. 이 생명은 끝이 없이 계속 이어지는 생명입니다.

    그러나 영생을 단순히 끝없는 세월의 연장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말로 쓰이는 일반적인 신약 단어는 아이오노스이며, 이는 질과 양을 아울러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실, 영생은 시간과 무관하기 때문에 실제로 “햇수”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영생은 시간 안에서만이 아니라 밖에서도 작동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영생은 기독교인들의 현재 경험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영생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데, 이는 영생이 신자들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발휘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영생은 지금 우리 손 안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3:36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라고 합니다. 신자에게 이 생명이 “있고”(현재시제)라고 했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이 동사는 헬라어에서도 현재형입니다). 요한복음 5:24과 요한복음 6:47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재형 구조가

    발견됩니다. 영생의 초점은 우리의 미래가 아니라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자리에 있습니다.

    성경은 영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합니다. 요한복음 17:3은 이런 관점에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영생”을 하나님과 성자에 대한 지식과 동일시합니다. 아들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해서만 택하신 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7:6; 14:9).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이 생명의 지식은 학문적인 지식뿐만이 아닌 참되고 인격적인 지식을 뜻합니다.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었던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거짓 교사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복음 7:23). 사도 바울은 주님을 아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으며 그 지식을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연결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립보서 3:10-11).

    새 예루살렘에서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은 것을 봅니다.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요한계시록 22:1-2). 에덴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거역해 생명 나무에게서 쫓겨났습니다(창세기 3:24).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가 생명 나무에 갈 수 있게 하십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이 생명 나무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요한복음 1:29).

    모든 죄인은 그리스도를 알고 영생을 얻도록 초청을 받았습니다.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22:17).

    자신이 영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먼저 우리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십시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주신 구세주를 영접하십시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로마서 10:13).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 복된 소식을 믿으십시오. 주 예수님을 당신의 구주로 믿으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구원받을 것입니다(사도행전 16:31; 로마서 10:9-10).

    요한은 간단하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일서 5:11-12).


    우리는 죽게 되는데 어떻게 영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줍니다(요한복음 3:16; 6:47; 요한일서 5:13). "영원"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영속적인, 영원한, 끝없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영속이라는 단어가 영생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일 것입니다. 
    영생은 일단 시작되면 영원토록 계속되는 생명을 뜻합니다. 
    이 말은 사람의 생명이 단순히 신체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참된 생명은 영적 생명이며, 신체적 생명이 끝나지만 영적 생명은 영원토록 지속됩니다. 
    즉 영속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생명 나무와 함께 동산에 두셔서 이들이 신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영원토록 기쁜 마음으로 살기를 바라셨지만, 이들은 범죄하여 자신과 이후의 모든 세대에 신체적, 영적 죽음을 초래했습니다(로마서 5:12–14).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동산에서 내보내시고 그룹을 두셔서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당신의 자비로 인해 인간이 영원토록 죄의 무게에 짓눌려 사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이 용납하실 수 있는 유일한 형벌은 영원한 형벌뿐입니다(마가복음 9:43-48). 
    그러나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완전한 제물로 보내셔서 인류가 죄에 대해 받을 형벌을 단번에 받게 하시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 나무로 가는 완전한 길을 제공해 주셨습니다(요한일서 5:12; 요한계시록 22:14).

    우리는 자신의 공로에 대해서는 죽고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주와 구원자로 영접해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즉시 거듭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나게 됩니다. 
    우리가 즉각적인 변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마음에는 중생이 일어나며(요한복음 3:6-7) 이제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는 결코 죽지 않으며 대신 우리 주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5:9-10). 
    이후 우리가 신체적으로 사망하면 우리의 영혼은 즉시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며, 나중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님께서는 우리 몸을 부활시켜 하늘에서 주님을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재림 때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몸은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되어 신체적 사망조차 경험하지 않을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51-5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성경의 마지막 책을 쓰라고 지시하셨고 그 책에서 우리는 다시 생명 나무에 대해 읽게 됩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요한계시록 2:7).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생명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믿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영생을 확신하고 안식하게 됩니다(베드로전서 1:3-5). 생명과 죽음과 중생을 포함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한 분, 참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십니다(요한복음 1:14).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상태가 보장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한복음 11:25). 
    당신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생을 가지고 있습니까?


    영생이란 무엇인가?

    1. ‘영생’이라는 말,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가요?

    ‘영생’이라고 하면 보통은 “죽은 후에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떠올립니다. 
    맞는 말이지만, 조금 부족한 설명이에요. 
    왜냐하면 성경은 영생을 단지 ‘시간적으로 영원한 삶’이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한 삶으로 설명하거든요. 
    중요한 건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사느냐입니다.

    2.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생’의 정의

    성경에서 영생에 대해 가장 명확하게 정의한 구절은 요한복음 17장 3절이에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영생이란 곧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삶, 그분과 교제하며 사는 삶을 말하는 거죠.

    3. 영생은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생은 죽은 후에나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영생이 이미 예수님을 믿는 자 안에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장 24절)

    예수님을 믿고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이미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생명, 곧 영생을 누리기 시작한 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은 죽음을 이긴 이후의 삶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삶이기도 해요.

    4. 영생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삶

    영생은 또한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전히 누릴 삶을 의미합니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때때로 흔들리고, 죄와 고통, 죽음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는 슬픔도, 고통도, 죽음도 없는 완전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1장 4절).

    그날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되고, 더 이상 믿음이 아니라 영광 가운데 그분과 함께 사는 영원한 삶, 그것이 바로 영생의 완성입니다.

    5. 영생은 ‘삶의 방향’을 바꾸는 힘

    영생이 단지 죽은 후에 누릴 어떤 상태라면, 오늘 우리의 삶과 큰 상관이 없을 수 있겠죠.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지금 우리의 삶을 바꾸는 능력입니다. 
    영생을 가진 사람은 이 땅의 것들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인생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 것 같아도, 사실은 가장 귀한 생명을 이미 소유한 자로 살아가는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마태복음 16장 26절)

    마무리 : 당신은 이미 영생의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은 죽은 뒤에만 시작되는 어떤 ‘미래’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시작되어, 영원까지 이어지는 생명의 이야기
    예요.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풍성한 삶, 사랑과 평안과 소망이 넘치는 삶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이란?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은 단순히 끝이 없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누리는 영원한 삶을 뜻합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로, 죽음 이후에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의미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생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영생은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

    영생은

    단지 죽음 후에 얻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

    영생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입니다.

    3. 현재와 미래의 영생

    영생은 믿음을 통해

    현재의 삶에서부터 시작되며,

    믿는 자들은 이미 영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 5:24).

    동시에, 영생은 미래에 완성될 것이며,

    죽음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요한계시록 21:3-4).

    결론적으로,

    성경에서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영원한 삶을 말하며,

    이는 현재와 미래 모두에서 이루어집니다.




    대한성서공회 영생 검색 결과 / 53구절

    구약 - 7구절 

    창세기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세기 21: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다니엘 4:34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다니엘 12:7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에 있는 자가 그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생하시는 자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반드시 한때 두때 반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까지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신약 - 46구절 

    마태복음 18: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태복음 18: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태복음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태복음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태복음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가복음 9: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14. [마가복음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5. [마가복음 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16. [누가복음 10: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누가복음 18:18]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누가복음 18:30]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19. [요한복음 3: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20.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21. [요한복음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22. [요한복음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23. [요한복음 4: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24.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26. [요한복음 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27. [요한복음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28. [요한복음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29. [요한복음 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30. [요한복음 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31. [요한복음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32. [요한복음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33. [요한복음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34. [요한복음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35. [요한복음 12: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36. [요한복음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7.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38. [사도행전 13: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39. [사도행전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0. [로마서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41. [로마서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42. [로마서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43.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디모데전서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모데전서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디도서 1: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디도서 3: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일서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한일서 5: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요한일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한일서 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유다서 1: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생(永生)(요한복음 17:2-3)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永生)이란 무엇이며? 
    또 어떠한 이가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영생은 지금도 우리가 경험하고 살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죽고 부활한 뒤에나 오는 것인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영생(永生)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그분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사람들은 영생하면, 대개 영원히 사는 것을 이야기해요. 영원히 사는 것! 오래 오래 사는 것! 이런 걸 인제 영생이라고 생각하는데, 부활과 영생을 함께 생각해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존재하는 것을, 영생으로 이해한다 말이에요.

    하지만, 이런 이해는 문제가 있죠. 어떤 문제인가 하면, 현재와 영생을 별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현재는, 나중에 주어질 영생을 위해서, 예수를 믿어주는 과정으로만 여기게 된다 말입니다. 그렇게 영생을 정의하면!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영생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잘못된 것으로 말하고 있어요.

    본문을 다시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해요.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영생은 영원히 죽지 않고 오래 오래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 안 한다 말입니다. 물론 신자(信者)는, 부활해서 영원히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원히 산다는 건, 신자에게만 주어지는 일이 아니에요. 세상 모든 자들이,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 보세요.

    (요한복음 5:29)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뭐 하러? 영원히 살러 나온다는 거예요. 영원히 살기 위해 부활하는 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죠? 요한복음 6장 28절 공부할 때 우리 공부했잖아요? 그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해 주시잖아요?

    그러면 악한 일은 뭐예요? 예수 안 믿는 거예요. 예수 안 믿는 자들은, 악인의, 심판의 부활로 나오고, 선한 일을 행한 자! 예수를 잘 믿은 자는, 이제 생명의 부활로 나온다는 것이죠. 영원히 살기 위해서! 아, 중요한 건, 선한 일을 한 사람! 악한 일을 한 사람! 둘 다 영원히 살기 위해 부활한다는 거예요. 사도행전 24장 15절 보세요.

    (사도행전 24:15)

    15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이 악인의 부활만 없어도, 진짜 한번 멋지게 살다가 가보겠는데…. 허허허 이 악인의 부활이 있어서, 맘대로 못살겠어요. 중요한 건 영원히 사는 게 아니라, ‘어떤 상태로 영원히 존재하느냐?’에, 있는 거예요. 부활은 부활이되, 생명의 부활이 있는 반면, 사망의 부활이 있어요. 때문에, 영생을 단지 시간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돼요.

    그렇다면 영생이라는 것이 도대체 뭔가? 여러분! 혹시 영생복락(永生福樂)이라는 말 아세요? 여러분 좋아하시는 말이잖아요? 영생복락! ‘영생이라는 것이 바로 복(福)이고 즐거움(樂)이다.’라는 뜻이거든요. 영생복락! 도대체 영생이 뭐기에, 신자에게 복이 된다는 것인가? 복이라는 건, ‘바라크’라는 건, 하나님께서 창조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창조에 목적에 맞게, 성실하게 존재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력! 그것을 ‘바라크, 복’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게, 하나님의 뜻대로 존재하고 살아가는 피조물들에게, 충만하게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복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창조주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존재의 상태를, 영생이라고 하는 거예요. 영생은 오래 사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신학에서는, 영생을, 다가올 세대의 생명! 혹은 신적 생명이라고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영생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정의를 해도 맞죠? 예, 영생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목적대로, 그분의 뜻에 맞게,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삶! 그걸 ‘영생’이라고 그래요.

    그 삶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우리가 그분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런 삶이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영생은, 하나님을 알고,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피조물 중, 도덕적 피조물인 천사들과 인간들 사이에서, 불순종의 반란이 일어났죠? 성경은 그것을 죄(罪)라고 불러요. ‘하마르티아!’

    죄는, 영생의 삶을 파괴해 버렸어요. 영생은, 순종을 전제하는 삶인데, 불순종이라는 죄가 들어오면서, 도덕적 피조물에게 주어진 그 영생이, 파괴된 거예요. 영생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삶을, 영생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께 불순종을 해버렸단 말입니다. 죄가 들어왔어요. 그래서 영생이, 도덕적 피조물에게 주어진 영생이 파괴가 된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와 허물로 죽었다!’라고 선언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건, 영생을 소실(消失)했다는 뜻이에요. 그게 ‘죽었다’예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대신에,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하나님마저도 자신의 종으로 삼아 사는, 자아숭배의 삶을 택해버렸기 때문에, 영생은 더 이상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거예요. 그게 바로 죽음입니다. 그러한 자아 숭배의 삶! 불순종의 삶을 사는 죽은 자들에게, 다시, 생명! 그 영생을 허락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다시 한 번 확인할게요. 영생은 뭐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창조의 목적대로 사는 게, 영생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영생을 다시 돌려주러 오셨다는 건 뭐예요? 두들겨 패서라도, 순종하는 자로 다시 만들어내겠다는 거예요. 뭐 대단하게 좋은 거 주러 온 거 아닙니다. 여러분이 기대하는 그런 좋은 거 주러 오신 게 아니라, 두들겨 패서라도, 순종하는 자로 다시 만들어, 영생을 누리게 해주시러 오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 그렇게 하나님의 철장(鐵杖)이, 예수의 철장이 자주 경험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성도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전부 도말하시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의 삶! 그 영생의 삶을 완벽하게 살아내시고는, 이 세상에서도, 그 영생의 삶을 완전히 살아내신 거예요. 그분은요! 살아내시고는, 그 삶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은혜의 선물로 전가(轉嫁)를 시켜주신 것이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전가시켜주시고 가신 거예요.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죄 없는 삶! 순종하는 이의 삶인,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 된 거예요. 요한복음 6장 51절 볼까요?

    (요한복음 6:51, 54)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54절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예수를 믿는 자들은 영생을 가졌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먹여 버리고 올라가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영생을 가졌어요. 거기까진 이해하시죠?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 영생을 얻은 자들이, 여전히 이 죄악의 세상에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일정기간을 살아내야 한다는 거예요. 그들은 이미 영적으로, 죄와 무관한 사람들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한 자들이 되어서,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육신의 몸과, 죄악의 세상의 영향 아래에서, 여기서 살아야 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불순종의 죄를 짓는단 말이에요. 이게 문제에요.

    영생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순종의 삶을 완벽하게 살아내는 걸, 영생이라고 하는데, 영생을 얻었다고 하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죄악의 육신을 입고, 죄악의 세상에서, 여전히 불순종의 삶을 산단 말입니다. 이걸 어떻게 이해를 하실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생을 산다는 거예요? 못산다는 거예요? 영생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계속 불순종의 죄를 지어요. 어떻게 해결해야 돼요? 이걸 어떻게 화해시켜야 되죠? 이제부터 우리가 고민을 좀 한번 해보자고요.

    영생은, 죄가 없는 상태고, 순종의 상태를 말해요. 영생은, 하나님의 성품이 투영된 신적 생명이며, 다가올 세대의 생명이에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영생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어요. 그리고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가셨대요.

    그런데 현실에서 우리는, 영생의 삶과는 전혀 다른, 불순종과 죄악의 삶을 살아요. 순종의 삶보다는 불순종의 삶을 훨씬 더 많이 살잖아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을 좇아 살려고 하기는커녕, 하나님을 종으로 부리며, 우리의 뜻에 그분의 뜻을 맞추려고 하죠. 우리의 뜻을, 그분이 안 쫓아 주면, 우리는 밥을 굶어서라도, 우리의 뜻을 그분에게 관철(貫徹)시키려고 그래요. 아니면, 막 천일 새벽기도도 해버려! 흐흐흐. 내 뜻에 맞춰야 되니까! 그걸 순종이라고 하나요? 그건 순종이 아니잖아요? 순종의 범주를 벗어난 것은, 영생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 성도에게 영생을 살라고, 영생을 취하라고 요구해요. 반복적으로 요구를 해요. 한 군데만 볼까요? 디모데전서 6장 12절.

    (디모데전서 6:12)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영생은 이미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하면서, 한 쪽에서는, 영생을 취하라고 강력하게 요구를 해요.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이를 악물고서라도, 순종의 삶을 살아 내라는 것입니까? 혀를 깨물면서라도, 죄를 멀리하라는 말인가요? 만일 그런 거라면, 어느 정도까지 살아내야, 영생을 취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땅에서, 완전 성화를 이룰 수 없어요. 그러니까 어느 정도, 커트라인이 있을 거 아니에요? 어느 정도까지 살아내어야, 우리가 영생을 취할 수 있는 거예요? 성경에 분명히, 하나님이 요구하는 커트라인이 나와요. 신명기 18장 13절 보세요.

    (신명기 18:13)

    1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이게 하나님의 커트라인입니다. 야고보서 2장 10절 볼까요?

    (야고보서 2:10)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그러니까 하나라도 어기면 안 돼요.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라도 불순종하면 안 돼요. 우리가 한 90살을 산다고 해보자고요. 요즘 명도 길어져서, 하여튼 (허허허허) 90살을 사는데, 90년 동안 죽기 바로 전날까지, 모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다가, 죽기 바로 직전에 정신이 너무 없어서, 하나를 어겼어요. 그러면 그 앞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모든 삶이, 다 헛거가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그렇게 완벽해요. 철저해요. 그러면 영생을 취하라는 말이, 과연, 완전한 순종과, 완전과 율법지킴을 향하여, 분투하며 애를 쓰라는 말일까요? 아니겠죠?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거처럼,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영생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이 땅에 계시하러 내려오시는, 예수님을 아는 거예요. 영생은, 그분이 요구하시는 것을 살아내는 게, 영생이 아니라, 그분을 아는 거예요. 그분이 얼마나 크신 분이며, 그분이 왜 내려오셨으며, 나는 왜 그분의 은혜만을 의지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를, 알아드리는 걸, 영생이라 그래요. (아멘.)

    쉬운 말로, 이 세상에서 죄 없는 자로, 순종한 자로, 영생을 살 수 있는 길은, 이렇게 불가능하고 무력한 나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내신 후에, 우리 성도들에게 무상으로 전가시켜 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성도가 이 땅에서, 영생을 사는 거예요. 그걸 존재 깊숙이 받아들여 버리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당신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라 칭한 곳이 또 있나요? 여기 말고! 지금 예수님이 당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어디 딴 데서 또 예수님이 또 이렇게 자기를 지칭하여, 예수 그리스도라고 자기 계시를 하신 적이 있어요? 여기 한 군데입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당신을 그리스도 메시아라고, 자기 계시를 하신 이유가 뭐겠어요? 영생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오심의 이유를 알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당신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라 칭하신 것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을 사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을 하신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 하나님 앞에, 자발적으로 자원하여 순종을 할 수 없어요.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 앞에서, 무한히 작은 나를 알아야,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살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거구나!’라는, 영생을 살 수 있는 거예요. 그걸 모르고는 절대 영생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는 거!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것을 영생이라고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영생은, 환경과 조건이 변하고, 그로 말미암아 행복과 평안이 오는 그런 것! 혹은 우리의 삶이 순결하게 업그레이드되어서, 경험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라, 불가능하고 무력한 자신의 삶을 폭로당하면서, 면목 없이 사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다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가 전부 사해졌다는 것을 믿는 것! 그리고 완전한 순종의 사람으로 하나님이 나를 여겨 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사는 삶을, 영생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뭔가 하나님 앞에서, 굉장히 훌륭한 자가 되어서, 그 하늘의 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선물 받아, 이 땅에서, 평안과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걸, 영생이라고 하지 않아요. 여러분이 얼마나 많이 고민하셨습니까? ‘나는 영생을 예수님으로부터 선물 받았다고 하는데, 왜 나는 내 삶 속에서, 영생을 이렇게 경험하지 못하며 살까?’ 얼마나 많이 고민했어요?

    영생은, 그렇게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 속에서 경험하며 사는 걸, 영생이라고 하지 않아요. 나는 여전히 이렇게 불순종의 삶을 삶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를 도말하고, 나에게 영생의 삶! 그 의로운 삶을 살아서, 무상으로 전가해줬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그 약속! 그 언약을, 그냥 내가 확 받아들여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이런 모양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나에게 영생을 주셨기 때문에, 나는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이 면목 없음 속에서 꼭 붙드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영생을 허락하신 나의 삶 속에, 여전히 이렇게 내가 고통스러워하고, 내가 외로워하고, 우울해 할 수밖에 없는, 이런 일들을 허락하셨음에도, 나는 영생을 사는 자로서, 이런 일이 나에게 꼭 필요했기 때문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거기에 그냥 순종해 버리는 거예요. 순응해 버리는 거예요. 받아들여 버리는 거예요. 그걸 영생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영생은, 이 땅에서 그렇게, 행복 속에서, 안식 속에서, 그렇게 편안하게 가는 걸, 영생이라고 하지 않아요. 이 세상에서의 영생은, 세상이 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영생은, 여러분에게 고난과 고통으로 올 수 있어요. 하나님나라에서, 모든 죄가 다 제거된 하나님나라에서는, 그 영생의 삶!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삶이, 진짜 완전한 행복의 삶으로, 우리에게 체감이 됩니다.

    그러나 이 땅은, 죄가 가득 차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 영생의 삶을 내어 놓을 때, 우리는 굉장히 힘들고, 어렵고, 고통을 겪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왜 나는 이렇게 영생의 삶을 경험하지 못할까? 영생의 삶을 체감하지 못할까?’ 그리로 가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냥 이렇게 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살아 계신 것 자체가, 영생을 살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철저한 자기부인 속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십자가 뒤로 꼭꼭 숨어 버리는 삶이, 바로 영생인 거예요. 우리는 천국에서, 이제 영원히 그렇게 사는 거예요. 하나님만 의지하며, 절대 타락할 수 없고, 타락하지도 않으며, 타락을 시도하지도 않는, 그냥 십자가만, 하나님의 은혜만 꼭 붙드는 그 삶을, 천국에서 살게 되는 거예요. 그 삶을 이 땅에서 훈련하고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그렇게 사셨잖아요? 하나님께 철저하게 순종했더니, 예수님의 삶이 고난과 수난과 십자가로 드러났잖아요? 여러분의 삶도, 그렇게 드러나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에게 안 주는 걸, 당신의 아들과 연합되어, 당신의 자녀로 양자가 된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뭘 그렇게 대단히 좋은 걸 허락하셨습니까? 이 땅에서? 안 줬습니다. 그냥 순종만 요구하셨어요. 여러분들에게도 하나님이 똑같은 걸 요구하세요. 여러분도 자녀이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도 이 땅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영생을 사는 이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철저한 자기 인식이 꼭 필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뭐 대단하게 이 세상에서 이루어 내려고 하지 마세요. 율법에 묶여서, 자신을 너무 비하(卑下)하지도 마세요. ‘왜 나는 아직도 이 모양이야?’ 예, 반성하는 건 좋아요. 그렇지만 ‘왜 나는 아직도 이 모양이야?’ 그 모양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영생을 거저 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꾸 예수를 아시란 말이에요. 예수를 배우시란 말이에요. 그게 영생을 사는 거라니깐요.

    왜 호세아 선지자가,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며 지켜내려 애를 썼던, 이스라엘에게,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외쳤겠습니까? 율법으로는 너희들! 절대 구원의 도달 못한다는 거예요. 율법을 목숨 걸고 지키는 자들에게,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 너희는 그거 못 지킨다니까! 여호와를 알아야 돼!’ 왜 그렇게 외쳤겠어요? 율법으로는, 제사로는, 우리가 영생에, 생명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목숨을 걸고 행위를 의존하던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를 알아라! 힘써 여호와를 알아라!’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율법의 성격이 그러하듯, 성경은 우리에게 지키라고 준 게 아닙니다. 그 속에서 예수의 필연성을, 십자가의 필연성을 깨달아 알라고 주신 거예요. 그 깨달음이 감사로 드러나게 되고, 그 감사가 우리를 바꾸는 거지, 성경이 요구하는 율법들을 우리가 지켜내라고 주신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율법주의자들은, 유대주의자들은, 그걸 지켜서 구원에 이르려고 했다니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성경에서 영생을 얻으려 하지 말고, 즉 그것 지켜서 영생에 이르려 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계시하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에게 나와야지! 그걸 지켜서 너희들이 구원의 이르려고 하면, 큰 오산이라고 이야기하신 거예요. 요한복음 5장 39절 보세요.

    (요한복음 5:39-40)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예수께 간다는 게 뭐죠? 예수의 공로! 예수의 은혜를 의지한다는 거예요. 예수의 은혜를 꼭 붙들어야 우리는 영생에 이를 수 있는데, 성경을 상고하고 묵상하고 연구하면서, 그걸 지켜서, 유대인들이 구원에, 영생에 이르려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건 안 된다는 거예요.

    성경은, 예수의 필연성을 가르치시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 거기에 적힌 것대로 살아내어서, 구원의 이르라고 주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몇 가지 비유를 들어서, 영생의 본질에 대해 설명을 해 주셨는데, 그 중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영생의 본질을 확인해 보고, 오늘 공부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곡해를 하는 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이웃사랑’으로 해석을 하는 거예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웃사랑에 대한 메시지가 아니라, ‘영생의 본질’에 대한 설명입니다. 누가복음 10장으로 한번 가보세요. 25절.

    (누가복음 10:25-29)

    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자, 잘 보세요.)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자,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물어요. 예수님이 왜 율법사를 등장시키는지,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율법에 능통한, 그 율법사에게, ‘율법에서는 뭐라고 하더냐?’라고 다시 물으셨어요. 그랬더니 율법사가, 훌륭하게도, 신명기 6장의 그 쉐마로, 그 율법을 잘 정리하고 있었어요. 율법이 요구하는 바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아주 잘 대답을 했어요.

    그랬더니 주님께서, ‘네 대답이 옳으니까, 가서 이를 행하라!’라고 이야기를 해요. 거기까지만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우리의 몫인 것처럼 보이죠? ‘그래, 그거 가서 해! 그러면 영생 얻을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 같잖아요? 끝까지 잘 보셔야 돼요.

    이 이야기에는, 커다란 반전이 있어요. 그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즉 자신은 충분히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물어요. 누가 내 이웃입니까? 누가 이웃인지 말만 해주면, 다 사랑해 버리고 말겠다는 그런 기세에요. 그죠?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이웃을 스스로 규정하고 있었어요. 일단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은 절대 이웃이 될 수 없어요. 개니까!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도, 절대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불결하고 순결하지 못한 자들이에요. 유대인들의 이웃은, 자기들과 같은 민족! 혹은 자기들의 종교인 유대교를 믿고, 자기 민족으로 편입이 된 사람들에 한해, 이웃을 삼았어요.

    그러니까 민족과 종교가 같고, 한 가지 뜻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그런 사람들만을, 이웃으로 규정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는 건 너무 쉬웠어요. 우리도 그렇잖아요? 그래서 율법사는 자신 있게, ‘누가 내 이웃입니까? 말만하세요. 내가 가서 죽도록 사랑해 버리겠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 사랑 누가 못해요?

    그때 주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서, 영생의 본질을 설명해 주는 거예요. 30절 이하를 한번 볼게요.

    (누가복음 10:30-37)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어떤 이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을 만치 맞았어요. 여기 ‘거반 죽은’이라고 번역이 된, ‘헤미따데스’라는 단어는, ‘거의 죽다. 완전히 기진하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그 강도만난 사람은, 숨만 겨우 쉬고 있는 상태! 거의 죽은 거예요. 완전히 자아 방어능력을 상실한 상태인 거예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당시에, 아주 유명한 강도의 출몰지역이었어요. 예루살렘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전! 이스라엘 성전이 있는 곳이에요. 율법의 메카죠, 그죠? 성전이 있는 곳이었고, 여리고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약 12,000명이 살고 있는, 성전 섬김이들의 집단 거주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노린 강도들이, 수시로 출몰을 해서,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이, 마차나 말 등에서 절대 내리는 일이 없었어요.

    그리고 도보로 다니는 사람들도, 무리를 지어서 다니거나, 길에서 멈추어서는 일이 없어, 바삐 오가던 그런 길이었어요? 그리고 수시로 강도들의 미끼가 길에 던져져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길에 넘어져 있는 사람들을 만져서는 안 된다는 게, 불문율처럼 지켜지던 그런 곳이었어요. 강도들의 일행이, 강도를 만나 신음하고 있는 여자나 노약자로 가장을 해서, 길거리에 누워있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래요.

    그래서 그들을 도와주러 잠깐 말에서 내리거나, 아니면 멈춰서면, 강도들이 와서 털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는 누가 신음을 하고 있어도, 거의 가짜니까, 그냥 도망가라!’ 이것이 불문율처럼 그들에게 있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길을 가던 사람들이, 길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을 보고서도, 그냥 바삐 지나가고 했던 거예요. 그러나 거기에 강도 만난 사람이 거의 죽어서, 누워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묻는 율법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라고 되물으세요. 다시 한 번,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묻는 율법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라고 물어요. 그러면 지금 예수님이 이 비유에서, 이 율법사를 누구로 비유하고 있는 거예요? 강도만난 자!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물었는데, ‘누가 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라고 되물으시잖아요? 그걸 잘 이해하셔야 돼요. 여러분!

    자금 예수님은, 율법으로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굳게 믿고, 그렇게 실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율법사에게, ‘네가 지금 누구를 사랑할 수 있다고? ‘누가 내 이웃입니까? 말만하세요. 내가 그냥 가서 확 사랑해 버릴게요.’라고,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너는 누구를 사랑하고 도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네가 바로 은혜와 긍휼을 입어야 할, 강도 만난 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가서 그를 사랑해라!’가 아니라, ‘네가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너는 예수에게 사랑을 받아야 되는, 은혜와 긍휼을 받아야 되는 존재인데, 너는 마치 모든 율법사들이 그러는 것처럼, 유대주의와 율법주의가 그러한 것처럼, 인본주의가 그러한 것처럼, 네가 마치 영생에 뭔가를 기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구나! 네가 영생에 본질이 뭔지를 뭔지나 알고나 있는 거냐?’라고 되물으시는 거예요. 그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인 것입니다.

    인본주의에 빠져서, 율법지킴을 구원의 방법으로 알고 있는 이들의 상태! 그게 강도 맞아 거반 죽은 자들의 상태라는 거예요.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상태에요. 그게! ‘죄와 허물로, 거반 죽어있는 너희들이, 도대체 뭘 할 수 있다고 나에게,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묻고 있느냐?’라고 묻는 거예요. 바로 우리 교회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무엇을 하여, 영생에 기여를 할 수 있어?’ 묻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강도 만난 자로 비유되고 있는 율법사는, 무엇을 강탈당한 상태일까? 그 강도 만난 자가,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율법주의! 유대주의! 인본주의에 빠져있는, 모든 죄인들을 상징하는 거라면, 그 강도 만난 자! 그 율법사는 무얼 강탈당한 거예요? 하나님을 빼앗긴 것입니다. 뱀이라는 강도에게, 마귀에게, 하나님을 빼앗긴 상태! 강도 맞은 상태!

    여러분, 사람들이 자꾸 마귀가 우리의 돈이나 건강을 강탈해 갈 거라고 생각을 해요. 마귀는 오히려, 우리 성도에게 그런 거 줘서, 하나님을 향한 관심을 끊게 만들지요. 그런 걸 강탈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달려가게 만들지 않아요. 마귀는 그런 거 강탈하지 않아요. 하나님을 강탈합니다. 오히려 다른 걸 주어서, 하나님을 강탈해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지금, 하나님을 강도당한 거예요.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야 하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가, 뱀이라는 강도의 속임수에 속아,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죽어있는 상태가, 바로 유대주의! 율법주의! 인본주의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강탈당한 채 죽어있는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이 뻗쳐요. 구약의 율법과 제사를 상징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강도 만나 거반 죽은 자를 보고도, 그냥 지나가요. 손도 못 대는 거예요. 그건 율법과 제사로는, 하나님을 잃고 거반 죽어 있는 상태인, 강도 만난 자!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자를, 절대 도울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제사장하고 레위인이 그냥 지나쳤다고 해서, 그들의 매정함을, 무정함을 나무라는 데에만, 집중하면 안 돼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성전으로 제사를 지내러 가는 길 아니면, 제사를 지내고 집으로 내려가는 길이었을 거예요. 그들이 하는 일이 그거니까!

    그리고 그 길은, 성전과 그들의 거주지를 연결하는 길이었잖아요? 그들은 절대 부정한 것을 만져서는 안 되는, 성전의 섬김이들이었고, 율법의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엉뚱한 걸 만지면 안 돼요. 율법을 잘 지켜야 되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나 마차에서 내리거나, 멈추어서 얼쩡거릴 수 없는 그런 위험한 길에 있었단 말이에요.

    뿐만 이니라, 그 강도만난 사람은, 강도들의 미끼일 가능성이 농후한 곳이에요. 만약에 우리가 그 길을 지나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절대 미련하게, 그리고 섣불리, 그 미끼일지도 모르는, 그 사람을 돕기 위해 나서면, 안 되는 거예요. 잘 이해하세요. 또!

    그런 상황에서, 그 길을 지나는 사람을 반응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는 건, 긍휼이라는 마음보다, 두려움이라는 마음이 더 커요. 그러한 상황에서는! 그래서 그 어떤 사람도, 그러한 상황 속에서, 쉽게 그렇게 강도만난 사람을 돕는, 반응과 행위를 행사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함부로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이, 겉으로는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사랑을 행하지 않는 그런 위선자들이었다라고, 이렇게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건, 거기에 초점이 있지 않아요.

    성경이 초점을 두는 곳은, 율법과 제사! 즉 행위는, 절대 강도 만난 자!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율법주의! 유대주의! 인본주의를 도와, 그들을 영생으로, 생명으로 끌어 낼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사 강도 만나 거반 죽어 있는 그 자를, 제사장과 레위인이, 율법과 제사가 못 도와주는 것입니다. 행위는, 절대 인간을, 영생으로, 구원으로 인도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웃사랑이라는 건, 인간의 행위에서, 생산되어져 나올 수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레위인 제사장이, 이웃사랑이라는 행위를 못 내어 놓는 거예요. 율법과 제사를 대표하는, 인본주의를 대표하는 그들이, 진정한 이웃사랑이라는 걸 못 내놓고,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한 자에게, 사마리아인이 다가와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유대 땅이에요. 유대 땅 중에서도, 율법의 핵심! 율법주의, 유대주의의 핵심인 곳이에요. 거기에 사마리아인이 등장해요. 사마리아인은, 유대 땅에서 개취급도 못 받았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사마리아 사람들은, 남 유다 사람들의 원수였어요. 오죽하면 유대인들은 너무나 장사가 안 돼서, 굶어 죽기 일보 직전에도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물건을 팔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러한 위험한 땅에, 율법주의의 이방인이자, 유대주의의 원수인, 사마리아인이 등장한 거예요. 유대주의와 율법주의의, 이방인이며 원수인, 사마리아인이 등장한 거예요. 유대주의와 율법주의와 인본주의의 이방인이며 원수인, 이가 누굴까요? 예수님 한 분입니다. 그분이 등장하는 거예요.

    세상이 개 취급도 안하는 말구유로 와서, 수난을 받다가 십자가에 죽어 버린 그런 나약한 예수! 나약한 메시아! 그런 이방인! 그런 세상의 원수가, 이 땅에 오셔서,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강도 맞아 하나님을 잃어 버려 거반 죽어있는, 그를 살려내는 거예요. 그게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영생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네가 지금 누구를 사랑하겠다고, 네가 사랑할 이웃을 나에게 가르쳐 달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네가 영생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나 있는 거야?’ 그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여러분! 지금 강도 만난 자가 누워있는 것은, 율법의 땅의 상징인 예루살렘과, 여리고를 잇는 유대 땅이에요. 그곳은 성전과 그 성전을 섬기는 제사장들의 거주지를 잇는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강도들의 땅이며, 원수들의 땅이에요. 사마리아인에게 있어서는! 사마리아인은 그곳에서 그 누구에게 붙들려도 죽어요. 강도에게 붙들려도 죽고, 유대인들에게 붙들려도 죽어요. 그 땅에, 자기 발로, 자발적으로 그가 온 것입니다. 그 율법의 땅! 강도들의 땅에, 그들과는 전혀 다른 이방인! 율법의 화신인 유대인들의 원수가, 사마리아인으로, 은혜를 들고, 긍휼을 들고, 등장을 한 거예요.

    자기들의 안위와 유익을 위해서는, 거반 죽어가는 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 형식적인 율법과 제사의 땅에, 진짜 선한 이방인이, 세상의 이방인이, 원수들의 땅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리고는 그 위험을 무릎 쓰고, 목숨을 걸고, 원수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자기를 원수로 여기는 그 강도 만나 거반 죽어간 그 자를, 목숨을 걸고 살려내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영생이며, 그게 바로 구원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시는 거예요.

    구원은, 죄인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이웃인 예수에 의해, 사랑을 받고, 섬김을 받아,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그 구원과 영생의 본질을 설명하는 거예요. 자신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믿는 인본주의의 땅! 죄인들의 땅! 율법의 땅에, 그들과는 전혀 다른 십자가의 삶! 은혜의 삶을 가지고, 원수인 강도 만난 자들을 구원하러 오신, 이 세상의 이방인인 선한 예수가, 바로, 그 사마리아인으로 비유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을 목숨 걸어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그건 요원한 일이에요. 우리는 우리의 선한 이웃으로 오신,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여, 면목 없는, 강도 만난 자의 모습으로, 영생으로 가야 하는 존재들인 거예요.

    그런데 평생을 인본주의라는 뱀의 아가리 속에서 살아온 죄인들은, 예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분이 나쁜 거예요.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자신의 영생에 자기도 뭔가를 기여하고 싶어 해요. 그런 이들에게 오직 은혜만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처럼 낮선 거예요. 미운 것입니다. 아니, 원수처럼 여겨질 때도 있어요. ‘네가 뭔데, 나를 죽은 자로 여기고, 나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그래?’ 기분 나쁜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만일 강도를 만나, 예루살렘 길에 쓰러져 있던 그 사람이, 조금의 힘이라고 남아 있었다면,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았을까요? 절대 안 받습니다. 죽어도 안 받아요. 사마리아인이기 때문에! 개에게 왜 도움을 받습니까? 조금의 힘이라도 남아 있으면,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도망갔을 거예요.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왜 받아요?

    그런데 거반 죽어서, 전혀 의식도 없는 상태예요. 그 상태에서 나는 완전히 무력하고 무기력해요. 나는 완전히 불가능한 존재예요. 그 상태가 되었을 때, 사마리아인이 붕대 붙이면, 가만히 붙이게 놔둬야 되고, ‘뒤집어!’ 그러면 뒤집어야 되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아직도 항복하지 않고 있는 성도들이, 바로 그 자리로 해체되어 가는 거예요. 그걸 자기부인이라 그래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할 때까지,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헤미따네스’ 거반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부인이에요.

    거반 죽어야, 예수님의 도움에 자기 몸을 내 맡긴다니깐요. 아니면, 예수님이 반창고 붙여주면, ‘왜 이걸 여기다 붙이냐?’고 지랄들을 떨고, 또 그런다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거반 죽여 버리는 거예요. 철장을 들고, 백마를 타고!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자로 이 땅에서 완성되어져야 돼요. 완전 성화가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는 그 영생! 온전한 순종의 삶인 영생을, 하늘에서 영원히 살아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은혜를 거부하고, 거기에 우리의 힘을 보태려고 하는 그런 시도! ‘나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될 거야?’라는 그 시도가, 얼마나 패역하고, 무서운 일인지를, 이 땅에서 배우고 가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성도는, 이 땅에서 그렇게 거반 죽어서, 이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의지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만을 의지하여, 자신을 내 맡기는 자로 지어져가는 거예요. 그러한 이들에게, 내 뜻! 내 꿈! 내 비전! 내 야망! 내 소원! 내 의견! 내 주장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그런 것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계속 우리를,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헤미따네스’ 거반 죽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은혜만 붙들라고! 이 세상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십자가라는 하늘의 삶의 원리를 들고 이 땅에 오신, 세상에 이방인이신 예수를 붙들라고, 우리를 거반 죽이는 거예요.

    왜? 죽은 자들이 죽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마치 산 자처럼, 강시처럼 통통 튀며 사냐는 거예요? 그 삶이 바로 하나님에 대하여 죽고, 세상에 대하여 산 삶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로, 티끌로 살아야, 진짜 하늘에 대하여 산 자! 영생을 소유한 자로 살게 되는 것이니까, 절대로 너희들은 나에게 항복해야 돼! 왜 자꾸 살아서 강시처럼 통통 튀고 있어? 죽어!’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이에요.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그냥 죽고 가는 거예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가는 거예요. 그거 거부하시면 안 되는 겁니다. 우리가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져주라고, 당해주라고, 섬겨주라고, 십자가를 지라고, 용서해 주라고 요구하시면서, 우리를 치유하고 계시는, 그 선한 사마리아인인, 예수의 말씀을 듣고도, ‘이 이방인이 왜 이렇게 낮선 나라말만 하고 있냐? 응 이 이방인이 왜 이렇게 낮선 나라말만 하고 있어?’ 그렇게 계속 거부하다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철장으로, 거반 죽이실 수밖에 없어요.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시키시는 예수님의 치료를, 순순히 받게 되는 거니깐요.

    예수님이 강도 만난 자에게 지금 하늘의 생명! 하나님을 선물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받기 위해서는, 내 안에 나가 자꾸 해체 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안 죽었어요. 이게! 그래서 자꾸 사마리아인으로 오신, 그렇게 십자가의 모습으로, 당해주라고, 약한 모습으로 살라고, 섬기라고, 나에게 오는 그 선한 사마리아인을, 거부해 버리는 거예요. 이 인본주의! 유대주의! 율법주의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완전히 죽은 상태! 거반 죽은 상태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덮쳐 버리는 거예요. 선한 사마리아인인 예수가 덮쳐 버리는 거예요. 그때에 우리에게, 온전한 하나님나라의 생명이 주어져요. 그래서 이 가시적인 우리의 인생 속에서, 우리가 그 영생을 온전히 받을 수 있는 자로, 지금 무장해제가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으셔야 돼요. 자꾸 죽으셔야 돼요. 그러나 그 삶이 힘들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반드시 그리로 우리를 끌고 가셔야 돼요. 영생 주셔야 되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하나님의 의해 순종하는 자로 끌려가는 상태! 그게 이 땅에서의 성도의 영생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지금 영생 잘 살고 계시는 거예요. 목매달아 죽지 마세요. 그거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입니다. ‘난 절대 용납 못 해! 난 당신이 하나님이라도, 이런 상황 나에게 허락한 당신! 절대 용납 못해!’ 콱 목매달아 죽어 버리는 거, 반항인 거예요.

    인정하세요. 받아드리세요. 순종하세요. 하나님께서 많이 주시면, 많이 주시는 상태에서 순종하세요. 많이 거두어 가셨으면, 그 상태에서, 순종하고 인정하세요. 그게 영생을 사는 거예요. 여러분! 마태복음 18장 8절 보세요. 마지막으로 한번 보죠.

    (마태복음 18:8-9)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것 이외의, 그 어떤 것을 의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다 잘라내시겠다는 거예요. 그게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팔! 다리! 눈! 다 뽑아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에 들어가는데 방해가 되는 거라면, 우리가 거기에 조금이라도 마음을 두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고, 그분께 온전히 순종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게 있다면, 그게 팔 다리라 할지라도 잘라버리고, 그 상태로 끌고 들어가겠다는 거예요. 하물며, 재산! 돈! 가족! 건강! 이런 것이 여러분과 하나님의 관계를 방해한다면, 하나님이 잘라버려야 됩니다. 그게 복인 거예요. 여러분!

    자,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이제! 예? 그러니까 예수를 힘써 배우세요. 하나님을 힘써 아세요.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티끌 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공로만을, 꼭 붙들어야 돼요. 그때 우리의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 우리를 변화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복음에 항복하세요. 그러면 행복합니다. 항복하면 행복해져요. 기도하겠습니다.




















    헤세드, 제바흐


    חֵסֵד 스트롱번호2617
    1.

    욕구

    2.

    열심

    3.

    인자함

    발음 [ chêçêd ]
    어원
    2616에서 유래
    구약 성경
    246회 사용
    • I.
      명사 욕구, 바람, 열정, 열의
      • 1.
        명사 열의, 열심, 열정, 사랑, 친절.
        • a.
          명사 [사람들 사이에] 인자함, 친절함, 은혜, 자비, 창21:23, 24:49, 39:21,47:29, 수2:14, 삼상10:8, 삼하3:8,9:1,7, 10:2, 스7:28, 욥6:14, 슥7:9.
        • b.
          명사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건, 사57:1.
        • c.
          명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은총, 자비, 호의, 창24:12, 출20:6, 신5:10, 삼하2:6, 15:20, 시5:8(7),36:6(5), 48:10(9).
        • d.
          명사 [주]복수 חֲסָדִים: [하나님의] 자비, 은총, 시89:2(1),50(49), 107:43, 사55:3
      • 2.
        명사 질투, 시기, 시샘, 비난, 질책, 잠14:34, 레20:17.

    참고 정보

    문법설명

    어미활용 חַסְדִּי, 복수 חֲסָדִיס, 복수 연계형 חַסְדֵי

    연관 단어

    • 문법설명
      어미활용 חַסְדִּי, 복수 חֲסָדִיס, 복수 연계형 חַסְדֵי
      관련 성경
      ☞인자(창19:19, 민14:18, 시18:50), 은혜(창20:13, 삼하3:8, 렘32:18), 인애(창47:29, 신7:9, 렘2:2), 은총(창32:10, 삼하9:1, 호2:19), 성실(왕상3:6), 긍휼(느1:5, 시85:10), 아름다움(사40:6). [동] 영화롭게 하다(잠14:34), 선대하다(수2:12, 삿1:24, 룻1:8), 은혜를 베풀다(룻2:20), 인자하다(대상16:34, 대하7:3,시59:10), 자비하다(대상16:41, 대하5:13), 선하다(대하32:32, 느13:14), 긍휼히 여기다(스9:9, 시59:17), 불쌍히 여기다(욥6:14).


    זֶבַח 스트롱번호2077
    1.

    살륙

    2.

    희생

    3.

    출10:25

    발음 [ zebach ]
    어원
    2076에서 유래
    구약 성경
    162회 사용
    • 1.
      명사, 남성 살륙, 도살된 동물의 육체, 제사, 창31:54, 겔39:17, 잠17:1
    • 2.
      명사, 남성 희생, 제사, 제물.
      • a.
        명사, 남성 [속죄나 성체의 의도를 지님] 출10:25, 레3:1, 4:10, 17:8, 민15:5.
      • b.
        명사, 남성 [중요하고 엄숙한 제사의 뜻을 지님]삼상1:21, 20:6,29.

    참고 정보

    문법설명

    어미활용 זִבְחִי, 복수 זְבָחִים, 복수 연계형 זְבָחוֹת ,זְבְחֵי[한 번만 사용됨, 호4:19]

    연관 단어

    • 문법설명
      어미활용 זִבְחִי, 복수 זְבָחִים, 복수 연계형 זְבָחוֹת ,זְבְחֵי[한 번만 사용됨, 호4:19]
      관련 성경
      ☞제사(창31:54, 출12:27, 민15:5), 희생(창46:1, 레3:1, 신12:11), 제물(레19:6, 신18:3), 제육(祭肉)(잠17:1), 잔치(겔39:17,19), 제사를 드림(삼상10:8).




    רַחוּם 스트롱번호7349
    1.

    인정 많은

    2.

    동정심이 많은

    3.

    신4:31

    발음 [ rachûwm ]
    어원
    7355에서 유래
    구약 성경
    13회 사용
    • 1.
      형용사, 남성 인정 많은, 동정심이 많은[하나님께만 사용됨], 신4:31, 시86:1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자비로운(출34:6, 시103:8, 욘4:2), 자비한(신4:31, 시78:38, 145:8), 긍휼히 여기는(느9:17). [부] 긍휼히(느9:31). [명] 자비(대하30:9), 진실(시86:15).
    רָחַם 스트롱번호7355
    1.

    사랑하다

    2.

    피엘형

    3.

    푸알형 ׃רֻחַם 자비를 얻다

    발음 [ râcham ]
    구약 성경
    47회 사용
    • 1.
      원형 사랑하다, 귀여워하다, 시18:2(1).
      • a.
        원형 피엘형 ,רִחַם 미완료형 יְרַחֵם, 부정사형 ׃רַחֵם측은히 여기다, 사랑하다, 출33:19, 신13:18(17), 시103:13, 사49:15.
      • b.
        원형 푸알형 ׃רֻחַם 자비를 얻다, 잠28:13, 호14:4(3).

    참고 정보

    문법설명

    미완료형 ׃יִרְחֹם

    연관 단어

    • 문법설명
      미완료형 ׃יִרְחֹם
      관련 성경
      ☞사랑하다(시18:1), 긍휼히 여기다(신13:17,왕하13:23, 사49:10), 자비하다(시116:5), 불쌍히 여기다(왕상8:50, 시103:13, 사27:11).[명] 자비(렘6:23, 애3:32), 긍휼(겔39:25, 합3:2), 로루하마(호1:8), 루하마(호2:1).


    고치소서(라파. râphâʼ)  רָפָא 스트롱번호 7495

    1. 수선하다.   2. 고치다.  3. 신 32:39  
    발음 [ râphâʼ ] 
    구약 성경  /  67회 사용

    • 1. 원형 수선하다
    • 2. 원형 고치다, 치료하다, 욥5:18, 사19:22,전3:3, [분사로] 의사, 창50:2, 대하16:12.
    • 관련 성경  / 고치다(시107:20, 사19:22, 겔34:4), 고침받다(사6:10), 치료하다(창20:17, 왕하8:29, 렘33:6), 고쳐주다(민12:13, 렘6:14, 8:11), 낫게 하다(왕하20:8), 싸매다(호6:1), 낫다(레13:18, 삼상6:3, 렘51:9), 완전하다(렘9:11),되살아나다(겔47:9), 완치되다(출21:19), 수축(修築)하다(왕상18:30). [명] 의원(창50:2),의사(렘8:22)


    구원하소서(야솨.  yâshaʽ) / יָשַׁע
    스트롱번호 3467

    1. 넓다.   2. 히필형 הוֹשִׁיעַ. 미완료형 יוֹשִׁיעַ
    3. 해방하다 
    발음 [ yâshaʽ ]

    구약 성경 / 205회 사용
    관련 성경 / ☞구원하다(민10:9, 삼하22:42, 렘17:14), 구원을 얻다(렘8:20, 삼하22:4, 렘4:14), 구하다(렘30:7), 돕다(삼하10:19, 대상19:12), 보복하다(삼상25:26,31), 건져내다(삿2:16), 이기게 하다(대상18:6), 보호하다(시36:6), 도와주다(신28:31). 
    [명] 구원(사45:17, 신32:29, 습3:17), 구원자(삿3:9, 왕하13:5, 시106:21).



    찬송 / 트힐라(tehillâh ) תְּהִלָּה 스트롱번호 8416

    1. 찬양.   2. 열광.  3. 찬양 받을 자
    발음 [ tehillâh ]
    어원  /  1984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7회 사용
    • 1.  명사, 여성 찬양, 시22:26(25), 48:11(10), 51:17(16),찬송곡, 찬송가, 시22:4, 66:2, 145:1
    • 2.  명사, 여성 찬양, 열광, 시9:15(14), 사42:8.
    • 3.  명사, 여성 찬양 받을 자, 신10:21, 렘17:14.
    • 관련 성경 /  찬송(신10:21, 대하20:22, 시22:3), 칭찬(습3:19,20), 찬양(느9:5), 영예(시78:4, 102:21),명예(렘13:11). 
      [동] 찬송하다(출15:11, 느12:46, 시111:10), 찬양하다(대상16:35, 시149:1), 송축하다(느9:5, 시34:1, 145:21), 칭찬받다(렘51:41).


    πειθώ 스트롱번호 3982

    1. 확신을 가지게 하다.  2. 설복하다. 3. 끌어들이다
    발음 [ pĕithō ]

    • 1.
      [현재완료, 과거완료 외의 능동태]
      • a.
        확신을 가지게 하다, 수긍시키다, 행18:4, 19:29.
      • b.
        설복하다, 호소하다, 애원하다, [나쁜 의미로] 감언으로 속이다, 그릇 인도하다, 고후5:11, 갈1:10.
      • c.
        끌어들이다, 기쁘게 하려고 애쓰다, 행12:20, 14:19, 갈1:10.
      • d.
        화해하게 하다, 만족시키다, 마28:14, 달래다, 요일3:19.
    • 2.
      [현재완료가 현재의 뜻을 가진다]
      • a.
        의뢰하다, 의지하다, 신뢰하다, 믿다, 눅11:22, 갈5:10, 빌1:14.
      • b.
        확신을 가지다, 확신하다, 롬2:19, 히13:18, 빌1:6.
    • 3.
      [수동완료형 이외의 수동태]
      • a.
        설복을 당하다, 확신을 가지다, 믿게 되다, 믿다, 행17:4.
      • b.
        복종하다, 따르다, 롬2:8, 갈3:1, 히13:17.
    • 4.
      [완료수동태 πέπεισμαι] 확신하다, 확실하다, 눅20:6, 롬8:38, 히6:9.

    참고 정보

    문법설명

    [기본형] 미완료 ἔπειθον, 미래 πε- ίσω, 제1부정과거 ἔπεισα, 명령 πεῖ- σον, 완료 πέποιθα, 과거완료 ἐπεποί- θειν, 미완료 중간태 또는 수동태 ἐ- πειθόμην, 완료수동태 πέπεισμαι, 제 1부정과거 ἐπείσθην, 미래 πεισθήσο- μαι

    연관 단어

    • 문법설명
      [기본형] 미완료 ἔπειθον, 미래 πε- ίσω, 제1부정과거 ἔπεισα, 명령 πεῖ- σον, 완료 πέποιθα, 과거완료 ἐπεποί- θειν, 미완료 중간태 또는 수동태 ἐ- πειθόμην, 완료수동태 πέπεισμαι, 제 1부정과거 ἐπείσθην, 미래 πεισθήσο- μαι 더보기
      관련 성경
      권하다(마27:20, 행13:43, 고후5:11), 신뢰 하다(마27:43, 빌1:14, 3:4), 믿다(눅11:22, 행26:26, 롬2:19), 인정하다(눅20:6), 따르다(행5:36,37, 롬2:8), 옳게 여기다(행5:40), 화목하다(행12:20), 권면하다(행18:4, 19:8), 권유하다(행19:26), 순종하다(히13:17), 확신하다(롬8:38, 고후2:3, 빌2:24), 의지하다(고후1:9, 히2:13).



    προσέρχομαι 스트롱번호 4334

    1. ~에게 오다.  2. 마 5:1.  3. 나아가다
    발음 [ prŏsĕrchŏmai ]

    어원 / 디포넌트. 미완료 προσηρ- χ όμην, 미래 προσελεύσομαι, 제2부정과거 προσῆλθον, 완료 προσελήλυ- θα, 4314와 2064에서 유래
    •  I.  ~에게 오다, 가다, 접근하다.
      •  1. [문자적으로] 마5:1, 눅23:52, 요12: 21, 행9:1.
      •  2. [비유적으로]
        •  a. 나아가다, 나아오다, 히4:16, 7:25, 벧전2:4.
        •  b. ~에 동의하다, ~에 종사하다, 딤전6:3.
    • 문법설명 / 중간태.
    • 관련 성경 /  나아오다(마4:3, 막14:45, 벧전2:4), 오다(마9:20, 눅7:14, 행28:9), 가다(마21:28, 눅23:52, 행22:26), 내려오다(마28:2), 나아가다(막1:31, 행8:29, 히7:25), 따르다(딤전6:3), 이르다(히12:22).







    찬송(휨노스) ὕμνος



    찬송(휨노스. hümnŏs)  ὕμνος, ου, ὁ   스트롱번호5215

    1. 찬송.  2. 노래. 3. 엡 5:19
    발음 [ hümnŏs ]
    • 1.  찬송, 노래, 엡 5:19, 골 3:16.

    ὕδέω ‘찬양하다’의 축약형

    • 문법설명  /  ὕδέω ‘찬양하다’의 축약형
      관련 성경  찬송(엡5:19, 골3:16).


    찬송(3034) 야다(yâdâh)  יָדָה   

    1. 던지다.  2. 피엘형 : 미완료형  וַיַדּוּ
    3. 히필형 미완료형 יְהוֹדֶה
    발음 [ yâdâh ]
    구약 성경  / 117회 사용
    관련 성경  /  쏘다(렘 50:14), 떨어지다(슥 1:21), 던지다(애 3:53), 인정하다(왕상 8:33, 대하 6:24), 감사하다(시 75:1, 대상 16:4, 23:30, 느12:24), 찬송하다(창 29:35, 대하 7:6, 시 45:17), 자복하다(민 5:7, 시 32:5, 단 9:4), 찬양하다(시 43:4, 71:22, 사 38:18), 칭찬을 받다(시49:18), 아뢰다(레 16: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리스도인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있다면 단연 찬송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노래하기를 좋아한다.

    그리스도인은 찬송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매주 예배에서 찬송을 몇 곡이나 부른다. 
    무슨 모임을 시작하기 전과 중간에 수시로 노래를 부른다. 
    기도회 때에도 찬송은 반드시 있다. 
    가정예배에서도 찬송을 부른다. 개인적으로도 찬송을 수시로 부른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은 장례식에서도 찬송을 부른다.
    불신자들이 볼 때 장례식의 노래는 경망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기독교 장례식은 그러려니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옥에서도 부르는 찬송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중 빌립보 감옥에 갇혔다. 
    점치는 귀신들린 여자를 구해주었다는 것 때문에 억울하게 매를 맞고 쇠사슬에 묶였다. 
    그런데 이런 암울하고 칙칙한 옥에서도 바울과 실라는 찬송을 불렀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바울은 또 다른 옥에서 찬송을 부른다. 
    그것은 에베소서에서 잘 나타난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 기록한 편지다(기원후 60년 경, 엡 3:1; 4:1; 6:20). 
    바울은 로마에 죄인의 신분으로 잡혀 있을 때 찬송을 한 것이다.

    에베소서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그리스도인은 슬픔과 고통스런 환경 가운데서도 찬송을 하는 특별한 사람들이다. 그러면 찬송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이 자주 부르고 좋아하는 찬송은 무엇인가? 우리는 찬송이 좋아서 부르긴 하지만, 찬송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를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찬송의 의미를 살펴보자.

    ‘찬송’의 의미

         도대체 ‘찬송’이 무엇이기에 그리스도인은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노래할 수 있을까? 바울이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할 때 헬라어는 ‘유로게토스’(eulogetos)이다. ‘유로게토스’는 ‘좋은 것을 말하다’는 의미에서 온 단어이다. 한글로 번역하자면, ‘덕담’(德談) 같은 것이다. ‘유로게토스’에 해당되는 단어가 구약 히브리어에는 ‘바룩’(baruk)이다. 이 단어들이 하나님 편에서 사용될 때는 ‘복을 주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좋은 말을 하시는 것이니, 복을 주신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사람 편에게 하나님을 향해 사용될 때에는 ‘찬송하다’라는 뜻이 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좋은 것을 말하게 되니, 그것이 ‘찬양하다’라는 의미가 된다.

    찬송은 감사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것이 뭐가 있을까? 인간은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 스스로 만든 뭔가를 드릴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드릴 뿐이다. 우리는 매 주일 모여 하나님께 예배한다. 그 때 우리가 드리는 것이 ‘찬송, 기도, 봉헌’이다. 그 가운데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이 드릴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여기 히브리서 13:15에 나오는 “찬송의 제사”는 레위기 7:11-15에 나오는 ‘화목 제사’와 ‘감사 제사’와 같은 말이다. ‘감사하다’는 ‘찬양하다’는 말이고, ‘찬양’은 ‘감사’이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감사와 찬양의 제사를 드렸을까?(레 7:11-15)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께 먼저 번제(희생 제사)를 드린다. 그 위에 감사제물의 일부를 태운다. 그러면서 감사제목을 말한다. 감사를 고백한다. 그렇게 희생 제사를 드릴 뿐만 아니라, 기름 섞은 무교병, 즉 이스트를 넣지 않은 딱딱한 빵도 드린다. 그리고 기름 바른 무교전병, 즉 이스트를 넣지 않고 기름을 발라 구운 맛있는 과자도 드린다. 마지막으로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구운 또 다른 종류의 과자를 함께 드린다(12절).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스트를 넣어 구운 빵도 감사 제사를 할 때 드린다(13절). 이 모든 것들을 ‘거제’로 하나님께 드린다. 곧 빵과 과자를 하나씩 좌우로 흔들어 하나님께 드린다. 그 후 그것을 제사장들에게 준다(14절). 이 맛난 것은 모두 제사장이 먹는다. 동시에 빠뜨리지 않고 했던 것이 있는데 그것은 ‘찬송을 부른 것’이다. 아마도 화목제사 가운데 감사 제사를 ‘찬양의 제사’라고 부른 것은 찬송이 포함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화목제사 가운데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송을 부른 것이 감사제사의 특징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통적으로 화목제사 가운데 감사 제사를 드릴 때 불렀던 찬양은 시편 42편 5절로 알려져 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또 한 편의 노래는 시편 100:4이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구약 시대의 ‘감사 제사’에서 잘 나타나고, 신약 시대에도 그런 의미를 살려 예배 가운데 실현하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 5:18-20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말씀에서 봐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의 증거로, 시와 찬송, 신령한 노래가 나타난다. ‘시’는 구약의 시편을 의미하고, ‘찬송’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새롭게 만들어 부른 노래인 것으로 보이며, ‘(신령한) 노래들’은 성경에 나오는 시편 이외의 여러 노래들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 세 가지는 모두 ‘찬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종합할 수 있다. 여하튼 그 찬양의 내용과 형식은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로 표현된다. 감사는 찬양이고, 찬양은 감사인 것이다. 그것은 구약의 감사 제사와도 연결되고 에베소서 5:20에 나타난 말씀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찬양은 삶으로

         그리스도인의 찬양은 베짱이처럼 일을 안 하고 노래만 부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일과 공부에는 게으르면서 노래하는 일은 좋아서 앞장서기도 한다. 노래를 인도하는 찬양 팀은 그런 점에서도 인기가 많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찬양은 단순히 노래를 즐긴다는 의미 이상이다. 물론 노래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하지만 칼빈이 ‘음악’을 ‘괴물’이라고까지 얘기할 정도로 위험한 요소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부르는 찬양은 온 회중이 함께 하는 것이어야 하고(엡 5:19), 또 교회의 찬양은 악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대상 16:6), 기교가 아니라 마음으로 노래해야 한다는 점을 종교 개혁가들은 분명히 했다.

         그러므로 찬양은 찬양 자체를 위한 것이면 안 된다. 찬양은 신앙인의 삶의 반영이며, 신앙과 삶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움이다. 찬양이 전체 삶과 연결되지 않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말 것이다. 찬양은 자연스럽게 삶으로 나아간다.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은 입술의 제사인 찬양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삶이 없는 찬양은 의미가 없다. 찬양은 감사와 복종과 순종으로 나아간다.



    찬송의 정의 

    1. 찬송이란 곡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또 곡이 찬송의 일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찬송 가사가 없는 곡만을 가지고는 찬송이라 할 수 없다. 
    찬송가란 노래가 붙은 찬송일 뿐이지 찬송은 꼭 노래가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곡이 없는 찬송을 해본 일이 없고 찬송이라면 가사보다 곡을 중점적으로 생각해왔고 좋아하는 찬송이란 좋은 곡의 찬송이지 좋은 가사의 찬송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찬송이란 곡만 가지고서는 찬송인지 보통 노래인지를 구 분할 수가 없다. 
    비록 찬송가책에 있는 어떤 것을 택하여 피아노나 다른 악기로 그 곡을 연주한다 하더라도, 아니 가사를 생각지 아니하고 곡만 허밍으로 부른 다해도 그 자체가 찬송이 될 수 없다. 
    가사가 없이 곡만으로는 찬송이 존재할 수 없다. 
    물론 어떤 이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한 곡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제 삼자가 이 곡만을 연주하거나 콧노래를 부른다고 해도 찬송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찬송가에 보면 명곡이나 민요나 국가에 찬송 가사를 붙여 놓고 찬송가책에 수록해 놓은 것들이 있다. 
    그러므로 그 곡에 어떤 가사가 붙어 있느냐에 따라 명곡, 국가, 찬송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찬송가 79, 287, 245 참조)

    2. 찬송이란 하나님의 속성(전능, 전지, 무소부재, 사랑, 자비)과 그가 하신 일(창조와 구원의 계획)을 알고 마음으로 부터 우러나온 감사와 찬양의 표현이다. 

    그런 면에서 누구나 찬송 가사를 지을 수 있고, 찬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찬송가사란 특수인만이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 개인에 따라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지은 찬양의 가사를 마음으로 이해하고 공감하여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여 표현하므로 찬송이 될 수 있는 것 이다. 
    즉 남이 지은 가사를 내가 그 뜻을 이해하고 마음으로 영으로 하나님을 향해 표현하므로 훌륭한 찬양이 가능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한 기도에 따라 아멘으로 동참하므로 다른 사람의 기도가 바로 내가 드린 기도가 될 수 있는 거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찬양이란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의 표현을 말하는 것으로 곡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즉 가사가 없는 찬송은 존재할 수 없지만 곡이 없는 찬양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3. 곡이란 전 교인이 함께 부를 수 있도록 하는 편의이고 필수는 아닌 것이다. 

    혼자 부른다면 무곡이 가능하나 여러 명이 함께 부르기 위해 박자로, 또 쉼표를 통해 같은 템포로 시작하고 마칠 수 있는 약속이 주어진 것이다. 
    같은 가사에 다른 곡을 붙여 더 느리게 부르거나 더 높게 불러도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으나 같은 곡이지만 가사를 바꾸어 준다면 전연 다른 내용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곡은 틀리게 부른다 해도 가사를 하나님께 전달하는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가사의 뜻을 이해 못하거나 가사를 틀리게 부른 다면 마음이 하나님께 전달되는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사는 성서적이어야 하고, 또 그 가사의 뜻을 명확히 이해하고 마음으로 불러야 하는 것이다. 곡이란 가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며 목적이 아닌 것이다. 곡이란 상품을 포장한 포장지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찬송가책 안에도 비 성서적인 가사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하고 비성서적인 가사는 고쳐 부르거나 피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하나님께는 음악적 요소가 전연 무시된 음치의 찬송이나 음악 전문가의 찬송이나 동질의 찬송으로 인정되어질 수 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4. 시, 찬미, 신령 란 노래(엡 5:19; 골 3:16), 찬송(약 5:13): 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글(시편이나 기타 시) 즉 곡이 붙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고, 찬미란 하나님을 찬양하는 글에 곡을 붙여 드려진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신령한 노래란 하나님을 찬양하는 글이 아닌 신앙적인 가사가 붙은 노래라고 구분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고전 14:26의 "찬송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로 위의 시(엡 5:19)과 동질의 것일 것이다.

    5. 찬송에서의 사부 찬송의 의미는 남녀 그리고 높은 음과 낮음을 가진 성도들 각자가 노래하기 편한 음역에서 노래하도록 하는 편의이며, 또 자기의 목소리를 이웃 사람의 목소리 크기와 밸런스를 유지케 하므로 회중 예배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게 하여 주므로 좋은 점이 있다. 

    통성 기도 시에 목소리 큰 자의 횡포를 생각하면 4부의 찬송의 장점이 많이 강조되리라 믿는다. 어떤 경우에도 사부의 찬송과 단음의 찬송이 찬송의 질을 구별해 주는 것은 아니다.

    6. 성가대의 찬양과 중창, 독창자의 찬양이 위에서 언급한 정도의 수준이 된다면 찬송으로서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하겠으나 만일 합창이 곡을 중심해 있거나 사람의 귀를 위한 발표용(자랑)으로 된다면 찬송으로서의 수준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향한 기도와 찬송을 했던 거와 같은 수준으로 인간의 귀를 의식하지 말고 하는 찬양이어야 할 것이며, 악기의 도움을 전연 느끼지 않는 수준의 찬송을 할 수 있어야 하겠다.

    7. 찬송은 가사에 있다고 강조한 대로 찬송에 있어서의 가사에 많은 사람들이 심혈을 기울여 가사 부문에 많은 진전이 있어야 마땅하며, 교계에서는 음악인 보다는 오히려 문인들이 더 존중 되어져야 마땅할 것 같으나 교회마다 음악인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문인들은 교회에서 전연 그들의 직무가 부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찬송은 바로 곡(음악)으로 오해 하고 있는 부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8. 기도를 문인들에게만 맡겨도 잘못이려니와 독창, 중창, 합창을 음악인들에게만 전담시키는 것은 찬송의 질을 점점 저하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며, 더욱 일반 성도들에게 넓게 보급 시켜야 할 찬송의 특권을 점점 빼앗고 목소리 나쁜 사람은 늘 찬송을 못한다고 사양케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결과를 낳게 할 것이다.

    9. 교회 안에 음악이 치중되면 될수록 하나님이 받으실 몫은 줄어들고 인간들이 받을 양은 많아지게 될 가능성이 있어서 주님께서는 저희더러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실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10.훌륭한 반주자의 반주만으로는 본인이 입술로 또는 마음으로 가사를 생각하며 부를 수 없을 때는 찬송을 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일평생 반주자로 수고로운 봉사는 했지만 찬송면에 서는 게을리 한 결과가 될 것이다. 
    지휘자도 훌륭한 합창을 창조해 냈다 하더라도 그 본인이 입술로 가사를 생각하며 부를 수 없었다면 성가대원에게는 찬송을 하도록 했을지 모르나 본인은 찬송을 했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는 모든 성도 각자에게 무엇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는데 가장 찬송을 위해 큰일을 한 지휘자나 반주자는 찬송을 개을리 했음을 시인하지 않으면 찬송의 의미도 모르고 찬양대를 이끌었다는 결론이 될 것이다. 
    교회에서 흔히 듣게 되는 악기의 독주가 듣는 이의 마음에 와 닿았다 하더라도 곡조만 보고 곡만이 들려진 연주라면 찬양으로서는 가치가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수많은 지휘자, 반주자, 악기 연주가들이 음악에만 몰두해 있다고 한다면 찬송과는 거리가 먼 것이나 누가 그렇게 생각을 하겠는가? 
    사실상 어려운 곡을 4부로 반주하는 반주자는 가사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 
    성가대 지휘자는 사부 합창을 살리는 것이 목적이지 가사의 바른 이해와 바른 전달에 목적을 두고 있지 못 한다. 
    합창에서는 부르는 이나 듣는 이가 화음이 잘 맞았으면 찬송을 잘 한 것으로 평가가 되고 혹시라도 화음에 차질이 났으면 잘못 했다고 평가를 받는 것이다. 
    즉 찬송을 인간이 평가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찬송은 인간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임을 다시 강조한다.

    성구

    에베소서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 하며.

    골로새서 3:16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고린도전서 14:15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히브리서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에베소서 1:5-6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 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로마서 15:11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야고보서 5: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 할지니라




    알파벳 시 말씀 / 답관체(아크로스틱), 아합체



    알파벳 시-예수님을 앙망하라(시 34:5)


    시편 34편은 다윗의 시로서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알파벳 시입니다. 22절이 한 구절마다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5절은 히브리어 알파벳 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헤는 숨구멍을 상징하는 상형문자입니다. 다윗이 헤로 시작하는 의미를 살펴보면서 우리들도 하나님과 숨구멍이 열려서 교제가 일어나야 합니다. 영혼이 복음을 듣지 않으면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단절되어 영혼은 죽게 됩니다. 원죄의 죄인은 예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다윗은 예수님을 앙망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매일같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숨구멍이 열려서 항상 영혼이 숨을 쉬는 크리스천이 되어야 합니다.

    알파벳 헤는 창문이라는 상형에서 온 글자입니다. 고대근동의 사람들은 장막을 짓고 살았기 때문에 숨구멍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장막의 꼭대기에 구멍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공기가 순환하여 장막 안에 공기를 정화시키는 작용을 했던 것입니다. 또한 이 헤라는 글자는 사람이 하늘을 향하여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모습을 하고 있는 글자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예배를 드려야 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헤는 죽었던 자들이 숨을 쉬고 살아나기 때문에 숨결, 호흡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난 자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계시하는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헤는 영원히 살아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나타내는 단어에 쓰이고 있습니다. (헤이칼 1964) 성전, 궁전,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곳인 성전도 헤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죄로 죽어서 숨을 쉬지 못했던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숨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시34:5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5절 히비투 엘라이브 베나하루 우페네헴 알 예흐파루

    주를 앙망하라(5절)

    ♣명제: 주를 앙망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목적: 구원받은 백성들도 주님을 앙망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다윗은 주님의 십자가 문을 통과하여 들어와 안식을 누리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죄악의 두려움과 육체의 두려움에서 자신을 건져주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의 십자를 통과하면 죄악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이제 5절을 시작하면서 헤라는 알파벳으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 숨을 쉴 수가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주를 앙망하게 된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숨구멍이 열려 살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으로 인하여 영원히 죽었던 인생들이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호흡이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앙망하고’ (나바트 5027 VHACZP 동사, 히필, 완료, 공성, 3인칭, 복수) 보다, 바라보다, 우러러보다, 살펴보다, 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주변에 있었던 자들이 주를 앙망하면서 우러러보고 살펴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단어는 유심히 주목하여 보는 것을 나타낼 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심히 주목하여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민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 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원망 불평할 때에 불 뱀이 이들을 물어 죽이고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불 뱀을 달라고 명령하셨고 모세는 믿음으로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았습니다. 이 놋 뱀을 바라본 자들은 모두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쳐다본즉’ 이라는 단어가 (나바트)입니다. 이들은 놋 뱀을 유심히 관찰하여 쳐다봄으로 죽음에서 살아났습니다. 여기에서 놋 뱀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요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주를 앙망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게 하는 자가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구원은 아무나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들이 주님의 십자가 놋 뱀을 바라보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히필 사역 능동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라보게 한 자들만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광야에서 불 뱀에 물려 죽어가던 자들이 바라보았던 뱀도 히필형을 사용함으로 하나님께서 보게 한 자들이 놋 뱀을 바라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완료 시제를 사용함으로 이들은 확실하게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며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구원받은 자들이 주님을 앙망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숨구멍이 열린 자들이 숨을 쉬고 호흡하여 살아남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5절을 시작하면서 숨구멍의 상형에서 온 헤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원죄의 죽음에서 주님의 죽으심 때문에 숨구멍이 열려 주님을 앙망하면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들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자들로서 예수님을 모욕하고 핍박하게 됩니다.

    ‘광채를 내었으니’ (나하르 5102 VQACZP 동사, 칼, 완료, 공성, 3인칭, 복수) 모여 들다, 빛나다, 빛을 발하다, 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가 아닙니다. 또한 스스로 살아날 수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앙망하고 바라보는 자들은 주님의 빛이 임하여 빛을 발산하게 됩니다. 구원을 받아 영적으로 살아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을 발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빛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는 것입니다. 광채를 내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을 전할 때에 영혼이 죽었던 생명들이 빛을 보면서 몰려들게 되는 것입니다.

    광채를 내는 자들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빛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에서도 빛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나오게 됩니다. 주님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전입니다. 성막에는 ‘메노라’라고 하는 금등대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성막의 기구입니다. 반면에 구원받은 백성들도 예표 하는 기구입니다. 이 등대는 올리브기름을 계속해서 공급받아야 만이 빛을 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름부음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공급받을 때에 계속해서 어둠을 밝히는 빛이 발산되는 것입니다.

    금등대가 교만하여 자신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금 등대 자체로는 스스로 빛을 낼 수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기름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기름이 내 안에 공급되면 빛은 자연스럽게 발산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얼굴에서 광채가 날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도 두 번째 돌 판을 가슴에 품고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얼굴에서 빛이 났습니다. 두 번째 돌 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상징하고 있는 돌 판입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이 내 심비의 판에 새겨져 있으면 얼굴에서 빛이 나오는 것입니다.

    ‘부끄럽지’ (하페르 2659 VQIMZP 동사, 칼, 미완료, 남성, 3인칭, 복수) 무안을 당하다, 수치를 당하다, 낭패를 당하다, 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앙망하고 바라보는 자들은 얼굴에서 빛이 나와 무안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들은 사람이 많은 곳에서 실수를 하면 무안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창피를 당하여 수치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상태가 언제입니까? 죄악 가운데 있었을 때입니다.

    롬10: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수치를 가져가셨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움을’ (카타이스퀴노 2617 VIFPS3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 단수, 3인칭) 모욕을 주다, 욕되게 하다, 부끄럽게 하다, 라는 뜻입니다. 원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사탄으로부터 정죄를 받아 모욕을 당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더 이상 모욕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모욕과 부끄러움을 십자가에서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확실히 예수님을 믿으면 부끄러움과 모욕받는 것이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직설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적 사건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믿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반드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믿었다면 앞으로 계속해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미래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내 힘으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 때문에 모욕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동태는 내 힘으로 부끄러운 수치를 씻을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지금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앙망하면 계속해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원죄의 고통과 부끄러움과 수치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을 통해서 숨을 쉬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마포 옷을 입어야 합니다. 어린양의 세마포 옷을 입은 자들은 더 이상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22:11-13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 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임금이 혼인잔치를 준비했는데 임금이 준비한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준비된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와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임금은 사환들에게 말하여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지옥의 불 못에 던져 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마포 옷을 입지 않은 자들은 이렇게 수치를 당하여 지옥의 불 못으로 던져지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숨구멍이 열려 호흡하는 자가 되었으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 주님만을 앙망하여 바라보아야 합니다. 호흡이 있는 자들은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계시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이제부터 주님과 호흡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답관체(踏冠體 acrostic/아크로스틱)

    한국 이스라엘 학회/연구소
    ~2분

    답관체(踏冠體 acrostic/아크로스틱)는 히브리 문학의 표현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답관체는 이렇습니다. 예로 우리나라의 글자순서는 ㄱ ㄴ ㄷ ㄹ라고 했을 때

    가지 마세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싫어한다해도

    내가있지 않습니까? 만일에 지금

    당신이 나를 멀리 떠난다하면 우리가 날마다 보아왔던

    라일락의 향기가 멀리 떠나버릴 것입니다.

    글자순서대로 가(ㄱ), 내(ㄴ), 당(ㄷ), 라(ㄹ)처럼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대로 시편이 구성된 것입니다.

    답관체는 히브리 문학의 표현 방법 중의 하나로서, 각 절의 첫 글자를 히브리 알파벳 순서를 따라 배열하는 형식을 말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우리 말로 표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절(ㄱ) 가장 높으신 주님을 찬양함이 마땅하도다!

    2절(ㄴ)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찬양하리이다.

    3절(ㄷ) 다함께 모여 성소에서 함께 주를 찬양하세!

    .......

    위의 경우 1절의 첫 글자는 우리 말 자음의 첫 글자인 (ㄱ)으로 시작하고 있으며(“가장”), 2절은 (ㄴ)으로 시작하고(“내가”), 3절은 (ㄷ)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다함께”). 이와 같이 히브리 알파벳 순서를 따라 시를 배열하는 것을 답관체 형식의 시라고 합니다.

    이런 형식의 시편이 몇 편 있습니다. 25편 34편 37편 111편 112편 119편 145편 등입니다. 
    히브리 시 중에는 이와 같이 각 절의 첫 글자를 히브리 알파벳 순서에 따라 배열한 시가 많이 있습니다. 시편 119편의 경우에는 각 알파벳 글자마다 8절씩 배열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8절)은 히브리 알파벳의 첫 글자인 “알렢”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9~16절)은 히브리 알파벳의 두 번째 글자인 “베트”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시를 배열하다 보니 시편 119편은 176절(22개의 알파벳 × 8절씩 = 총 176절)이나 되는 긴 시가 되었습니다.

    시편 119편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마치 수를 놓는 사람이 색실로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한땀 한땀씩 수를 놓는 것처럼, 한 절 한 절을 매우 정교하고 신중하게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 형식은 시인이 표현하려는 내용을 보다 극적이고 효과적으로 만들어주며, 그 시의 의미를 더욱 깊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답관체”의 형식은 히브리어 알파벳을 가지고 썼기 때문에, 이것은 히브리 문학에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어나 한글 성경으로 번역할 경우에는 영어 알파벳이나 한글 자모음의 순서대로 시를 번역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의미만을 바꾸어 번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답관체 형식은 단지 첫 글자를 히브리 알파벳 순서대로 사용해서 쓰는 히브리 시의 형식이라고만 이해하면 됩니다. 여기에는 더 이상 깊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1장, 2장, 3장, 4장과 잠언 31장 “현숙한 여인”에 대한 말씀도 답관체(踏冠體 acrostic) 형식으로 기록된 문학적 표현입니다.

    답관=머릿 장단을 맞추다  밟을 답, (장단을) 맞추다 답... 갓 관, 머리 관...그래서 머릿 장단을 맞추다...한글사전에 없어서요.


    알파벳순으로 구성된 것들


      시111, 시112, 시119,  애1.2.3.4

      우리말에 가.나.다.라. 각행의 첫머리로 시작되는 시가 있다.

    그런데 성경에도 알파벳 순서에 따라 각 행의 첫머리로 시작되는

    답관체 시가 있다(단 히브리어 성경). 


       1.각 절의 첫 글자를 히브리 알파벳 순서를 따라 배열하는 형식을 답관체라 말한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우리 말로   표현해보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우리말에

       가-가난한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어도

       나-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서 이를 갈 것이라

       다-다른 복음에는 구원이 없나니

       라-라마에서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

       마-마른 땅과 같아 목말라 죽게 할 것이다. 등  이다.


    1절(ㄱ) 가장 높으신 주님을 찬양함이 마땅하도다!
    2절(ㄴ)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찬양하리이다.
    3절(ㄷ) 다함께 모여 성소에서 함께 주를 찬양하세!


    ...........
    위의 경우

    1절의 첫 글자는 우리 말 자음의 첫 글자인 (ㄱ)으로 시작하고 있으며("가장"),

    2절은 (ㄴ)으로 시작하고("내가),

    3절은 (ㄷ)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다함께").

    이와 같이 히브리 알파벳 순서를 따라 시를 배열하는 것을 답관체(踏冠體)

    형식의 시라고 한다.


    2. 그런데 성경가운데는  이와 같이 각 절의 첫 글자를 히브리 알파벳 순서에

    따라 배열한 시가  답관체 형식으로 4권이 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시편에서 가장 긴 시편 119편이다.

    시 119편의 경우에는 각 알파벳 글자마다 한연에 8절씩 배열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1-8절)은 히브리 알파벳의 첫 글자인 "알렢"(א)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9-16절)은 히브리 알파벳의 두 번째 글자인 "베트"(ב)로 시작하고

    (17-24절)은 히브리 알파벳의 세 번째 글자인 "끼멜"(נ)로 시작하고있다.

    이런 식으로 시를 배열하다 보니 시119편은 무려 176절 22연으로 되는 긴 시가 되었다.

    시 119편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마치 수를 놓는 사람이 색실로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한땀 한땀씩 수를 놓는 것처럼, 한 절 한절을 매우 정교하고 신중하게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형식은 시인이 표현하려는 내용을 보다 극적이고 효과적으로 만들어주며,

    그 시의 의미를 더욱 깊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예례미아 애가도 5장까지 됐는데 1장2장의 1절은 히브리어 알파벳 첫글자인 알렢(א)으로

    시작하고 22절 끝절은 타우(ת)로 끝난다.

    우리말 성경에는 평이하게 보일지라도 히브리어 원문에는 글자 하나하나에 자음하나하나에

    까지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가 녹아있고 시적 표현과 음률이 잘 배합되어있는 것을 볼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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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파벳순으로 구성된 시편  111편,  

    112편,   119편,   애1.2.3.4

         시편 111편 내용

       הללו יה  

    1  אודה יהוה בכל־לבב  A 알렢

           캅레     칼베   웨야       데오

       heart with-all-of Yahweh I-will-extol

         내가 전심으로 야웨를 높이리로다

              בסוד ישרים ועדה׃   B 뻬트 

           데에우      림사여      드소베

     and-assembly upright-ones in-council-of

       내가 정직한자의 회와 공회중에서

     2   גדלים מעשי יהוה  G 끼멜

           여호바     마아세   게도림

       Yahweh    works-of  great-ones

          여호와께서 하시는일이 크니

    דרושים לכל־חפציהם׃  D 달렏

          헤페체헴    르칼      데루쉼

     delighters-of-them  by-all-of  

     ones-being-pondered

     이를 즐거워하는 모든자가 탐구하는구나

     3  הוד־והדר פעלו H헤

                로아포 달호여 드호

         deed-of him  and-majestic  glorious

              그 행사가 존귀하며 엄위하며

       וצדקתו עמדת לעד׃  W 와우

           드아라    트데메오  토카데치여

            to-forever  one-enduring  

            and-righteousness-of-him

         그의 의가 영원히 있도다.          

    זכר עשה לנפלאתיו  Z 자인 

            우티로페니레  사아    켈제

    for-deeds-being-wonders-of-him  

    he-caused remembrance

    그가 기이한 일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으니

        חנון ורחום יהוה׃  H 헤드 

        웨야     훔라여        눈한

    Yahweh  and-compassionate  gracious

           야웨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도다.

    5  טרף נתן ליראיו  T 테드

              우이아레리  탄나  프레테

      for-ones-fearing-him  he-provides  food

     야웨께서 자기를 경외하는자에게 양식을 주시며
      יזכר לעולם בריתו׃   Y 요드

       토리베     람오레      콜지이

    covenant-of-him to-forever  he-remembers

            그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6  כח מעשיו הגיד    K 카프

            드닌히  우차아마  흐아코

        he-showed   works-of him   power-of

         그 행사의 능을 저희에게 보이셨도다.

    לעמו לתת להם נחלת גוים׃   L 라멧

    임고  트라하나  헴라  트테라      모암레

    nations  land-of to-them to-give to-people-of him

           저가 자기 백성에게 열방을 기업으로 주사

    מעשי ידיו אמת ומשפט M 멤

           트밧사미우  트멤에  우디야   쉐아마

        and-just   fathful   hands-of-him  works-of

             그 손의 행사는 진실과 공의이며 
           נאמנים כל־פקודיו׃    N 눈

             우이다쿠피   콜   님마에네

     precepts-of-him all-of ones-being-trustworthy

                그 법도는 다 확실하니

    סמוכים לעד לעולם  S 싸멕

               람오레   드아레       킴무쎄

         to-forever for-ever one-being-steadfast

                영원  무궁히   정하신 바요
         עשוים באמת וישר׃  Y 아인

              살이여  트메에베    임수아

    and-uprightness in-fathfulness one-being-done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פדות שלח לעמו   P 페

            모암레      라사   트두페

     for-people-of-him   he-provided  redemption

        야웨께서 그 백성에게 구속을 베푸시며
     צוה־לעולם בריתו   TS 차데

          토리베   람오레  아흐우치

    covenant-of-him  to-forever  he-ordained

           그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קדוש ונורא שמ   Q 코프

         모세  라노여      쉬도카

     name-of-him  and-being-awesome holy

          그 이름이 거룩하시고 지존 하시도다

    10 ראשית חכמה יראת יהו R 레쉬

            웨야   트아레이   마크호    트쉬레

      Yahweh  fear-of   wisdome    beginning-of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שכל טוב לכל־עשיהם S 신 

             헴쉐이  콜레  토브        켈쉐

    ones-following-them  to-all-of   good  understading

        그 계명을 따르는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이                      

     תהלתו עמדת לעד׃  T 타우

    드아라    트데메오  토라힐

    to-eternity   one-enduring   praise-of-him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 

     

    Psalms 119

    אַשְׁרֵי תְמִימֵי־דָרֶךְ הַהֹלְכִים בְּתֹורַת יְהוָה׃

    1

    אַשְׁרֵי נֹצְרֵי עֵדֹתָיו בְּכָל־לֵב יִדְרְשׁוּהוּ׃

    2

    אַף לֹא־פָעֲלוּ עַוְלָה בִּדְרָכָיו הָלָכוּ׃

    3

    אַתָּה צִוִּיתָה פִקֻּדֶיךָ לִשְׁמֹר מְאֹד׃

    4

    אַחֲלַי יִכֹּנוּ דְרָכָי לִשְׁמֹר חֻקֶּיךָ׃

    5

    אָז לֹא־אֵבֹושׁ בְּהַבִּיטִי אֶל־כָּל־מִצְוֹתֶיךָ׃

    6

    אֹודְךָ בְּיֹשֶׁר לֵבָב בְּלָמְדִי מִשְׁפְּטֵי צִדְקֶךָ׃

    7

    אֶת־חֻקֶּיךָ אֶשְׁמֹר אַל־תַּעַזְבֵנִי עַד־מְאֹד׃

    8

    בַּמֶּה יְזַכֶּה־נַּעַר אֶת־אָרְחֹו לִשְׁמֹר כִּדְבָרֶךָ׃

    9

    בְּכָל־לִבִּי דְרַשְׁתִּיךָ אַל־תַּשְׁגֵּנִי מִמִּצְוֹתֶיךָ׃

    10

    בְּלִבִּי צָפַנְתִּי אִמְרָתֶךָ לְמַעַן לֹא אֶחֱטָא־לָךְ׃

    11

    בָּרוּךְ אַתָּה יְהוָה לַמְּדֵנִי חֻקֶּיךָ׃

    12

    בִּשְׂפָתַי סִפַּרְתִּי כֹּל מִשְׁפְּטֵי־פִיךָ׃

    13

    בְּדֶרֶךְ עֵדְוֹתֶיךָ שַׂשְׂתִּי כְּעַל כָּל־הֹון׃

    14

    בְּפִקֻּדֶיךָ אָשִׂיחָה וְאַבִּיטָה אֹרְחֹתֶיךָ׃

    15

    בְּחֻקֹּתֶיךָ אֶשְׁתַּעֲשָׁע לֹא אֶשְׁכַּח דְּבָרֶךָ׃

    16

    גְּמֹל עַל־עַבְדְּךָ אֶחְיֶה וְאֶשְׁמְרָה דְבָרֶךָ׃

    17

    גַּל־עֵינַי וְאַבִּיטָה נִפְלָאֹות מִתֹּורָתֶךָ׃

    18

    גֵּר אָנֹכִי בָאָרֶץ אַל־תַּסְתֵּר מִמֶּנִּי מִצְוֹתֶיךָ׃

    19

    גָּרְסָה נַפְשִׁי לְתַאֲבָה אֶל־מִשְׁפָּטֶיךָ בְכָל־עֵת׃

    20

    גָּעַרְתָּ זֵדִים אֲרוּרִים הַשֹּׁגִים מִמִּצְוֹתֶיךָ׃

    21

    גַּל מֵעָלַי חֶרְפָּה וָבוּז כִּי עֵדֹתֶיךָ נָצָרְתִּי׃

    22

    גַּם יָשְׁבוּ רִים בִּי נִדְבָּרוּ עַבְדְּךָ יָשִׂיחַ בְּחֻקֶּיךָ׃

    23

    גַּם־עֵדֹתֶיךָ שַׁעֲשֻׁעָי אַנְשֵׁי עֲצָתִי׃

    24

    דָּבְקָה לֶעָפָר נַפְשִׁי חַיֵּנִי כִּדְבָרֶךָ׃

    25

    דְּרָכַי סִפַּרְתִּי וַתַּעֲנֵנִי לַמְּדֵנִי חֻקֶּיךָ׃

    26

    דֶּרֶךְ־פִּקּוּדֶיךָ הֲבִינֵנִי וְאָשִׂיחָה בְּנִפְלְאֹותֶיךָ׃

    27

    דָּלְפָה נַפְשִׁי מִתּוּגָה קַיְּמֵנִי כִּדְבָרֶךָ׃

    28

    דֶּרֶךשְֶׁ־קֶר הָסֵר מִמֶּנִּי וְתֹורָתְךָ חָנֵּנִי׃

    29

    דֶּרֶךְ־אֱמוּנָה בָחָרְתִּי מִשְׁפָּטֶיךָ שִׁוִּיתִי׃

    30

    דָּבַקְתִּי בְעֵדְוֹתֶיךָ יְהוָה אַל־תְּבִישֵׁנִי׃

    31

    דֶּרֶךְ־מִצְוֹתֶיךָ אָרוּץ כִּי תַרְחִיב לִבִּי׃

    32

    הֹורֵנִי יְהוָה דֶּרֶךְ חֻקֶּיךָ וְאֶצְּרֶנָּה עֵקֶב׃

    33

    הֲבִינֵנִי וְאֶצְּרָה תֹורָתֶךָ וְאֶשְׁמְרֶנָּה בְכָל־לֵב׃

    34

    הַדְרִיכֵנִי בִּנְתִיב מִצְוֹתֶיךָ כִּי־בֹו חָפָצְתִּי׃

    35

    הַט־לִבִּי אֶל־עֵדְוֹתֶיךָ וְאַל אֶל־בָּצַע׃

    36

    הַעֲבֵר עֵינַי מֵרְאֹות שָׁוְא בִּדְרָכֶךָ חַיֵּנִי׃

    37

    הָקֵם לְעַבְדְּךָ אִמְרָתֶךָ אֲשֶׁר לְיִרְאָתֶךָ׃

    38

    הַעֲבֵר חֶרְפָּתִי אֲשֶׁר יָגֹרְתִּי כִּי מִשְׁפָּטֶיךָ טֹובִים׃

    39

    הִנֵּה תָּאַבְתִּי לְפִקֻּדֶיךָ בְּצִדְקָתְךָ חַיֵּנִי׃

    40

    וִיבֹאֻנִי חֲסָדֶךָ יְהוָה תְּשׁוּעָתְךָ כְּאִמְרָתֶךָ׃

    41

    וְאֶעֱנֶה חֹרְפִי דָבָר כִּי־בָטַחְתִּי בִּדְבָרֶךָ׃

    42

    וְאַל־תַּצֵּל מִפִּי דְבַר־אֱמֶת עַד־מְאֹד כִּי לְמִשְׁפָּטֶךָ יִחָלְתִּי׃

    43

    וְאֶשְׁמְרָה תֹורָתְךָ תָמִיד לְעֹולָם וָעֶד׃

    44

    וְאֶתְהַלְּכָה בָרְחָבָה כִּי פִקֻּדֶיךָ דָרָשְׁתִּי׃

    45

    וַאֲדַבְּרָה בְעֵדֹתֶיךָ נֶגֶד מְלָכִים וְלֹא אֵבֹושׁ׃

    46

    וְאֶשְׁתַּעֲשַׁע בְּמִצְוֹתֶיךָ אֲשֶׁר אָהָבְתִּי׃

    47

    וְאֶשָּׂא־כַפַּי אֶל־מִצְוֹתֶיךָ אֲשֶׁר אָהָבְתִּי וְאָשִׂיחָה בְחֻקֶּיךָ׃

    48

    זְכֹר־דָּבָר לְעַבְדֶּךָ עַל אֲשֶׁר יִחַלְתָּנִי׃

    49

    זֹאת נֶחָמָתִי בְעָנְיִי כִּי אִמְרָתְךָ חִיָּתְנִי׃

    50

    זֵדִים הֱלִיצֻנִי עַד־מְאֹד מִתֹּורָתְךָ לֹא נָטִיתִי׃

    51

    זָכַרְתִּי מִשְׁפָּטֶיךָ מֵעֹולָם ׀ יְהוָה וָאֶתְנֶחָם׃

    52

    זַלְעָפָה אֲחָזַתְנִי מֵרְשָׁעִים עֹזְבֵי תֹּורָתֶךָ׃

    53

    זְמִרֹות הָיוּ־לִי חֻקֶּיךָ בְּבֵית מְגוּרָי׃

    54

    זָכַרְתִּי בַלַּיְלָה שִׁמְךָ יְהוָה וָאֶשְׁמְרָה תֹּורָתֶךָ׃

    55

    זֹאת הָיְתָה־לִּי כִּי פִקֻּדֶיךָ נָצָרְתִּי׃

    56

    חֶלְקִי יְהוָה אָמַרְתִּי לִשְׁמֹר דְּבָרֶיךָ׃

    57

    חִלִּיתִי פָנֶיךָ בְכָל־לֵב חָנֵּנִי כְּאִמְרָתֶךָ׃

    58

    חִשַּׁבְתִּי דְרָכָי וָאָשִׁיבָה רַגְלַי אֶל־עֵדֹתֶיךָ׃

    59

    חַשְׁתִּי וְלֹא הִתְמַהְמָהְתִּי לִשְׁמֹר מִצְוֹתֶיךָ׃

    60

    חֶבְלֵי רְשָׁעִים עִוְּדֻנִי תֹּורָתְךָ לֹא שָׁכָחְתִּי׃

    61

    חֲצֹות־לַיְלָה אָקוּם לְהֹודֹות לָךְ עַל מִשְׁפְּטֵי צִדְקֶךָ׃

    62

    חָבֵר אָנִי לְכָל־אֲשֶׁר יְרֵאוּךָ וּלְשֹׁמְרֵי פִּקּוּדֶיךָ׃

    63

    חַסְדְּךָ יְהוָה מָלְאָה הָאָרֶץ חֻקֶּיךָ לַמְּדֵנִי׃

    64

    טֹוב עָשִׂיתָ עִם־עַבְדְּךָ יְהוָה כִּדְבָרֶךָ׃

    65

    טוּב טַעַם וָדַעַת לַמְּדֵנִי כִּי בְמִצְוֹתֶיךָ הֶאֱמָנְתִּי׃

    66

    טֶרֶם אֶעֱנֶה אֲנִי שֹׁגֵג וְעַתָּה אִמְרָתְךָ שָׁמָרְתִּי׃

    67

    טֹוב־אַתָּה וּמֵטִיב לַמְּדֵנִי חֻקֶּיךָ׃

    68

    טָפְלוּ עָלַי שֶׁקֶר זֵדִים אֲנִי בְּכָל־לֵב ׀ אֱצֹּר פִּקּוּדֶיךָ׃

    69

    טָפַשׁ כַּחֵלֶב לִבָּם אֲנִי תֹּורָתְךָ שִׁעֲשָׁעְתִּי׃

    70

    טֹוב־לִי כִי־עֻנֵּיתִי לְמַעַן אֶלְמַד חֻקֶּיךָ׃

    71

    טֹוב־לִי תֹורַת־פִּיךָ מֵאַלְפֵי זָהָב וָכָסֶף׃

    72

    יָדֶיךָ עָשׂוּנִי וַיְכֹונְנוּנִי הֲבִינֵנִי וְאֶלְמְדָה מִצְוֹתֶיךָ׃

    73

    יְרֵאֶיךָ יִרְאוּנִי וְיִשְׂמָחוּ כִּי לִדְבָרְךָ יִחָלְתִּי׃

    74

    יָדַעְתִּי יְהוָה כִּי־צֶדֶק מִשְׁפָּטֶיךָ וֶאֱמוּנָה עִנִּיתָנִי׃

    75

    יְהִי־נָא חַסְדְּךָ לְנַחֲמֵנִי כְּאִמְרָתְךָ לְעַבְדֶּךָ׃

    76

    יְבֹאוּנִי רַחֲמֶיךָ וְאֶחְיֶה כִּי־תֹורָתְךָ שַׁעֲשֻׁעָי׃

    77

    יֵבֹשׁוּ זֵדִים כִּי־שֶׁקֶר עִוְּתוּנִי אֲנִי אָשִׂיחַ בְּפִקּוּדֶיךָ׃

    78

    יָשׁוּבוּ לִי יְרֵאֶיךָ [וְיָדְעוּ כ] (וְיֹדְעֵי ק) עֵדֹתֶיךָ׃

    79

    יְהִי־לִבִּי תָמִים בְּחֻקֶּיךָ לְמַעַן לֹא אֵבֹושׁ׃

    80

    כָּלְתָה לִתְשׁוּעָתְךָ נַפְשִׁי לִדְבָרְךָ יִחָלְתִּי׃

    81

    כָּלוּ עֵינַי לְאִמְרָתֶךָ לֵאמֹר מָתַי תְּנַחֲמֵנִי׃

    82

    כִּי־הָיִיתִי כְּנֹאד בְּקִיטֹור חֻקֶּיךָ לֹא שָׁכָחְתִּי׃

    83

    כַּמָּה יְמֵי־עַבְדֶּךָ מָתַי תַּעֲשֶׂה בְרֹדְפַי מִשְׁפָּט׃

    84

    כָּרוּ־לִי זֵדִים שִׁיחֹות אֲשֶׁר לֹא כְתֹורָתֶךָ׃

    85

    כָּל־מִצְוֹתֶיךָ אֱמוּנָה שֶׁקֶר רְדָפוּנִי עָזְרֵנִי׃

    86

    כִּמְעַט כִּלּוּנִי בָאָרֶץ וַאֲנִי לֹא־עָזַבְתִּי פִקֻּודֶיךָ ׃

    87

    כְּחַסְדְּךָ חַיֵּנִי וְאֶשְׁמְרָה עֵדוּת פִּיךָ׃

    88

    לְעֹולָם יְהוָה דְּבָרְךָ נִצָּב בַּשָּׁמָיִם׃

    89

    לְדֹר וָדֹר אֱמוּנָתֶךָ כֹּונַנְתָּ אֶרֶץ וַתַּעֲמֹד׃

    90

    לְמִשְׁפָּטֶיךָ עָמְדוּ הַיֹּום כִּי הַכֹּל עֲבָדֶיךָ׃

    91

    לוּלֵי תֹורָתְךָ שַׁעֲשֻׁעָי אָז אָבַדְתִּי בְעָנְיִי׃

    92

    לְעֹולָם לֹא־אֶשְׁכַּח פִּקּוּדֶיךָ כִּי בָם חִיִּיתָנִי׃

    93

    לְךָ־אֲנִי הֹושִׁיעֵנִי כִּי פִקּוּדֶיךָ דָרָשְׁתִּי׃

    94

    לִי קִוּוּ רְשָׁעִים לְאַבְּדֵנִי עֵדֹתֶיךָ אֶתְבֹּונָן׃

    95

    לְכָל תִּכְלָה רָאִיתִי קֵץ רְחָבָה מִצְוָתְךָ מְאֹד׃

    96

    מָה־אָהַבְתִּי תֹורָתֶךָ כָּל־הַיֹּום הִיא שִׂיחָתִי׃

    97

    מֵאֹיְבַי תְּחַכְּמֵנִי מִצְוֹתֶךָ כִּי לְעֹולָם הִיא־לִי׃

    98

    מִכָּל־מְלַמְּדַי הִשְׂכַּלְתִּי כִּי עֵדְוֹתֶיךָ שִׂיחָה לִי׃

    99

    מִזְּקֵנִים אֶתְבֹּונָן כִּי פִקּוּדֶיךָ נָצָרְתִּי׃

    100

    מִכָּל־אֹרַח רָע כָּלִאתִי רַגְלָי לְמַעַן אֶשְׁמֹר דְּבָרֶךָ׃

    101

    מִמִּשְׁפָּטֶיךָ לֹא־סָרְתִּי כִּי־אַתָּה הֹורֵתָנִי׃

    102

    מַה־נִּמְלְצוּ לְחִכִּי אִמְרָתֶךָ מִדְּבַשׁ לְפִי׃

    103

    מִפִּקּוּדֶיךָ אֶתְבֹּונָן עַל־כֵּן שָׂנֵאתִי ׀ כָּל־אֹרַח שָׁקֶר׃

    104

    נֵר־לְרַגְלִי דְבָרֶךָ וְאֹור לִנְתִיבָתִי׃

    105

    נִשְׁבַּעְתִּי וָאֲקַיֵּמָה לִשְׁמֹר מִשְׁפְּטֵי צִדְקֶךָ׃

    106

    נַעֲנֵיתִי עַד־מְאֹד יְהוָה חַיֵּנִי כִדְבָרֶךָ׃

    107

    נִדְבֹות פִּי רְצֵה־נָא יְהוָה וּמִשְׁפָּטֶיךָ לַמְּדֵנִי׃

    108

    נַפְשִׁי בְכַפִּי תָמִיד וְתֹורָתְךָ לֹא שָׁכָחְתִּי׃

    109

    נָתְנוּ רְשָׁעִים פַּח לִי וּמִפִּקּוּדֶיךָ לֹא תָעִיתִי׃

    110

    נָחַלְתִּי עֵדְוֹתֶיךָ לְעֹולָם כִּי־שְׂשֹׂון לִבִּי הֵמָּה׃

    111

    נָטִיתִי לִבִּי לַעֲשֹׂות חֻקֶּיךָ לְעֹולָם עֵקֶב׃

    112

    סֵעֲפִים שָׂנֵאתִי וְתֹורָתְךָ אָהָבְתִּי׃

    113

    סִתְרִי וּמָגִנִּי אָתָּה לִדְבָרְךָ יִחָלְתִּי׃

    114

    סוּרוּ־מִמֶּנִּי מְרֵעִים וְאֶצְּרָה מִצְוֹת אֱלֹהָי׃

    115

    סָמְכֵנִי כְאִמְרָתְךָ וְאֶחְיֶה וְאַל־תְּבִישֵׁנִי מִשִּׂבְרִי׃

    116

    סְעָדֵנִי וְאִוָּשֵׁעָה וְאֶשְׁעָה בְחֻקֶּיךָ תָמִיד׃

    117

    סָלִיתָ כָּל־שֹׁוגִים מֵחֻקֶּיךָ כִּישֶׁ־קֶר תַּרְמִיתָם׃

    118

    סִגִים הִשְׁבַּתָּ כָל־רִשְׁעֵי־אָרֶץ לָכֵן אָהַבְתִּי עֵדֹתֶיךָ׃

    119

    סָמַר מִפַּחְדְּךָ בְשָׂרִי וּמִמִּשְׁפָּטֶיךָ יָרֵאתִי׃

    120

    עָשִׂיתִי מִשְׁפָּט וָצֶדֶק בַּל־תַּנִּיחֵנִי לְעֹשְׁקָי׃

    121

    עֲרֹב עַבְדְּךָ לְטֹוב אַל־יַעַשְׁקֻנִי זֵדִים׃

    122

    עֵינַי כָּלוּ לִישׁוּעָתֶךָ וּלְאִמְרַת צִדְקֶךָ׃

    123

    עֲשֵׂה עִם־עַבְדְּךָ כְחַסְדֶּךָ וְחֻקֶּיךָ לַמְּדֵנִי׃

    124

    עַבְדְּךָ־אָנִי הֲבִינֵנִי וְאֵדְעָה עֵדֹתֶיךָ׃

    125

    עֵת לַעֲשֹׂות לַיהוָה הֵפֵרוּ תֹּורָתֶךָ׃

    126

    עַל־כֵּן אָהַבְתִּי מִצְוֹתֶיךָ מִזָּהָב וּמִפָּז׃

    127

    עַל־כֵּן ׀ כָּל־פִּקּוּדֵי כֹל יִשָּׁרְתִּי כָּל־אֹרַח שֶׁקֶר שָׂנֵאתִי׃

    128

    פְּלָאֹות עֵדְוֹתֶיךָ עַל־כֵּן נְצָרָתַם נַפְשִׁי׃

    129

    פֵּתַח דְּבָרֶיךָ יָאִיר מֵבִין פְּתָיִים׃

    130

    פִּי־פָעַרְתִּי וָאֶשְׁאָפָה כִּי לְמִצְוֹתֶיךָ יָאָבְתִּי׃

    131

    פְּנֵה־אֵלַי וְחָנֵּנִי כְּמִשְׁפָּט לְאֹהֲבֵי שְׁמֶךָ׃

    132

    פְּעָמַי הָכֵן בְּאִמְרָתֶךָ וְאַל־תַּשְׁלֶט־בִּי כָל־אָוֶן׃

    133

    פְּדֵנִי מֵעֹשֶׁק אָדָם וְאֶשְׁמְרָה פִּקּוּדֶיךָ׃

    134

    פָּנֶיךָ הָאֵר בְּעַבְדֶּךָ וְלַמְּדֵנִי אֶת־חֻקֶּיךָ׃

    135

    פַּלְגֵי־מַיִם יָרְדוּ עֵינָי עַל לֹא־שָׁמְרוּ תֹורָתֶךָ׃

    136

    צַדִּיק אַתָּה יְהוָה וְיָשָׁר מִשְׁפָּטֶיךָ׃

    137

    צִוִּיתָ צֶדֶק עֵדֹתֶיךָ וֶאֱמוּנָה מְאֹד׃

    138

    צִמְּתַתְנִי קִנְאָתִי כִּי־שָׁכְחוּ דְבָרֶיךָ צָרָי׃

    139

    צְרוּפָה אִמְרָתְךָ מְאֹד וְעַבְדְּךָ אֲהֵבָהּ׃

    140

    צָעִיר אָנֹכִי וְנִבְזֶה פִּקֻּדֶיךָ לֹא שָׁכָחְתִּי׃

    141

    צִדְקָתְךָ צֶדֶק לְעֹולָם וְתֹורָתְךָ אֱמֶת׃

    142

    צַר־וּמָצֹוק מְצָאוּנִי מִצְוֹתֶיךָ שַׁעֲשֻׁעָי׃

    143

    צֶדֶק עֵדְוֹתֶיךָ לְעֹולָם הֲבִינֵנִי וְאֶחְיֶה׃

    144

    קָרָאתִי בְכָל־לֵב עֲנֵנִי יְהוָה חֻקֶּיךָ אֶצֹּרָה׃

    145

    קְרָאתִיךָ הֹושִׁיעֵנִי וְאֶשְׁמְרָה עֵדֹתֶיךָ׃

    146

    קִדַּמְתִּי בַנֶּשֶׁף וָאֲשַׁוֵּעָה [לִדְבָרֶיךָ כ] (לִדְבָרְךָ ק) יִחָלְתִּי׃

    147

    קִדְּמוּ עֵינַי אַשְׁמֻרֹות לָשִׂיחַ בְּאִמְרָתֶךָ׃

    148

    קֹולִי שִׁמְעָה כְחַסְדֶּךָ יְהוָה כְּמִשְׁפָּטֶךָ חַיֵּנִי׃

    149

    קָרְבוּ רֹדְפֵי זִמָּה מִתֹּורָתְךָ רָחָקוּ׃

    150

    קָרֹוב אַתָּה יְהוָה וְכָל־מִצְוֹתֶיךָ אֱמֶת׃

    151

    קֶדֶם יָדַעְתִּי מֵעֵדֹתֶיךָ כִּי לְעֹולָם יְסַדְתָּם׃

    152

    רְאֵה־עָנְיִי וְחַלְּצֵנִי כִּי־תֹורָתְךָ לֹא שָׁכָחְתִּי׃

    153

    רִיבָה רִיבִי וּגְאָלֵנִי לְאִמְרָתְךָ חַיֵּנִי׃

    154

    רָחֹוק מֵרְשָׁעִים יְשׁוּעָה כִּי־חֻקֶּיךָ לֹא דָרָשׁוּ׃

    155

    רַחֲמֶיךָ רַבִּים ׀ יְהוָה כְּמִשְׁפָּטֶיךָ חַיֵּנִי׃

    156

    רַבִּים רֹדְפַי וְצָרָי מֵעֵדְוֹתֶיךָ לֹא נָטִיתִי׃

    157

    רָאִיתִי בֹגְדִים וָאֶתְקֹוטָטָה אֲשֶׁר אִמְרָתְךָ לֹא שָׁמָרוּ׃

    158

    רְאֵה כִּי־פִקּוּדֶיךָ אָהָבְתִּי יְהוָה כְּחַסְדְּךָ חַיֵּנִי׃

    159

    רֹאשׁ־דְּבָרְךָ אֱמֶת וּלְעֹולָם כָּל־מִשְׁפַּט צִדְקֶךָ׃

    160

    רִים רְדָפוּנִי חִנָּם [וּמִדְּבָרֶיךָ כ] (וּמִדְּבָרְךָ ק) פָּחַד לִבִּי׃

    161

    שָׂשׂ אָנֹכִי עַל־אִמְרָתֶךָ כְּמֹוצֵא שָׁלָל רָב׃

    162

    שֶׁקֶר נֵאתִי וַאֲתַעֵבָה תֹּורָתְךָ אָהָבְתִּי׃

    163

    שֶׁבַע בַּיֹּום הִלַּלְתִּיךָ עַל מִשְׁפְּטֵי צִדְקֶךָ׃

    164

    שָׁלֹום רָב לְאֹהֲבֵי תֹורָתֶךָ וְאֵין־לָמֹו מִכְשֹׁול׃

    165

    שִׂבַּרְתִּי לִישׁוּעָתְךָ יְהוָה וּמִצְוֹתֶיךָ עָשִׂיתִי׃

    166

    שָׁמְרָה נַפְשִׁי עֵדֹתֶיךָ וָאֹהֲבֵם מְאֹד׃

    167

    שָׁמַרְתִּי פִקּוּדֶיךָ וְעֵדֹתֶיךָ כִּי כָל־דְּרָכַי נֶגְדֶּךָ׃

    168

    תִּקְרַב רִנָּתִי לְפָנֶיךָ יְהוָה כִּדְבָרְךָ הֲבִינֵנִי׃

    169

    תָּבֹוא תְּחִנָּתִי לְפָנֶיךָ כְּאִמְרָתְךָ הַצִּילֵנִי׃

    170

    תַּבַּעְנָה שְׂפָתַי תְּהִלָּה כִּי תְלַמְּדֵנִי חֻקֶּיךָ׃

    171

    תַּעַן לְשֹׁונִי אִמְרָתֶךָ כִּי כָל־מִצְוֹתֶיךָ צֶּדֶק׃

    172

    תְּהִי־יָדְךָ לְעָזְרֵנִי כִּי פִקּוּדֶיךָ בָחָרְתִּי׃

    173

    תָּאַבְתִּי לִישׁוּעָתְךָ יְהוָה וְתֹורָתְךָ שַׁעֲשֻׁעָי׃

    174

    תְּחִי־נַפְשִׁי וּתְהַלְלֶךָּ וּמִשְׁפָּטֶךָ יַעֲזְרֻנִי׃

    175

    תָּעִיתִי כְּשֶׂה אֹבֵד בַּקֵּשׁ עַבְדֶּךָ כִּי מִצְוֹתֶיךָ לֹא שָׁכָחְתִּי׃

    176





    이합체(離合體), 답관체(踏冠體), 알파벳 시

    예레미야애가의 묵상을 시작하면서 많이 듣는 이야기가 이 책의 구조에 관한 것이다.

    그 중에서 특히 Acrostics 구조는 히브리어를 모르는 나로서는 이런 구조를 알아채지 못하니 이렇게라도 찾아봄으로 시가서 형식의 글을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일명 알파벳 시라고도 하는 Acrostics는 구약 시가 지닌 또 다른 매혹적인 구조상의 특징으로 종종 사용된다는 점이다.
    알파벳시란 하나의 시 안에 있는 연속되는 행들의 첫 글자가 모두 히브리어 알파벳의 순서대로 시작되는 시를 가리킨다.
    구약에는 수많은 알파벳 시들이 존재한다. 시편 25, 34, 111, 112, 그리고 145편은 모두 알파벳 시다. 25편과 145편의 경우, 이 문학기법이 매 구절의 첫 글자에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이 두 시편은 모두 히브리어 알파벳의 22글자와 똑같이 22절로 되어 있다.
    (실제로는 히브리어 알파벳은 23글자이지만, 알파벳 시의 경우 저자들은 "s"와 "sh"에 해당하는 글자를 한 글자로 결합시키고 있다.) 그러나 111편과 112편의 경우, 이 문학 기법은 매 행의 첫 글자에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이 두 시편 모두 22행으로 이루어진 알파벳 시형을 갖고 있는데, 각 행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연속적인 글자로 시작하고 있다.

    아마도 구약에서 가장 흥미로운 알파벳 시는 시편 119편일 것이다.
    처음 여덟 구절의 첫 단어는 모두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글자인 알렙(aleph)으로 시작된다. 마찬가지로 9절부터 16절까지는 모두 히브리어 알파벳의 둘째 글자인 베트(beth)로 시작된다. 이런 형태가 8행에 한 번씩 계속되어 119편 끝까지 그리고 히브리어 알파벳 끝 글자까지 이어진다. (성경해석/J.스코드 듀발; J.다니엘 헤이즈/성서유니온선교회 p571~572)

         예레미야애가의 경우 1장, 2장, 3장 그리고 4장은 알파벳 시이지만, 5장은 아니다.

    애가의 Acrostics 구조는 이렇다.

    1번시(22행시)                        2번시(22행시)                        3번시(22행시)                     4번시(22행시)

    a........                                  a.........                                a..........                            a...........
      ........                                    ........                                a.........                                 .........
      ........                                    .........                               a..........                             b..........
    b........                                  b........                                 b.........                                .........
      ........                                    .........                               b.........                              c..........
      ........                                    .........                               b..........                                .........   

    애가에 있어서 Acrostics를 이룬 목적은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1) 암기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 시인은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기억을 Acrostics를 통하여 보존토록 하고 있다.
     (2) 시온의 멸망에 대한 애도의 완전한 표현을 전달한다. - 즉, "처음부터 끝까지" 정화(catharsis)의 효과를 가지게 한다.
     (3) Acrostics 형태의 엄격한 표현법은, 기교적 표현의 범위를 압축해 줌으로써 시인으로 하여금 해당 주제 혹은 제목에 보다 집
         중적이고 밀도 높은 표현을 하도록 해준다. (구약개론/앤드류 E.힐;존 H.월튼/은성 p4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