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야훼 - 엘로힘, 엘 샤다이 / 여호와 라파, 이레, 샬롬,


여호와 의미

여호와는 히브리어 יהוה (YHWH)에서 유래했으며, 뜻은 ‘독립적인 존재’ ‘스스로 있는 자’이다. 
이것을 자존이라 부른다. 
여호와는 자존자이시다. 
출애굽기 3:14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의 표현이 ‘야훼’이다.

  •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ויאמר אלהים אל־משה אהיה אשר אהיה ויאמר כה תאמר לבני ישראל אהיה שלחני אליכם׃
출 3:14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구약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름은 ‘엘’ 과 ‘엘로힘’이다. 
엘과 복수형인 ‘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능력과 위험을 나타낸다. 
하지만 여호와는 구원과 심판의 의미가 강하다. 
종종 ‘야훼 엘로힘’ 처럼 ‘여호와 하나님’으로 함께 나타날 때가 많다.

יהוה는 자음만 존재하다. 
원래 히브리어는 모음 없는 자음만 존재한다. 
2세기 이후 랍비들이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디아스포라 시대가 되면서 히브리음을 잊을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모음을 표기하여 지금이 이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정확한 발음인지도 사실 알지 못한다.

히브리어 자음 네 개로 이루어진 יהוה는 테트라그라마톤으로 불리며 신성시 되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주님이란 뜻으로 아도나이(אֲדֹנָי)로 표기하고 읽었다. 
יהוה를 야훼(Yahweh)로 발음할지, 여호와(Jehovih)로 발음할지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여호와는 이름인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의 하나가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름이 갖는 속성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에게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순간 신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위 ‘이름’이란 이름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 사사기 13장 18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 이사야 9장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표기를 하지만 그것은 대명사이지 고유명사가 아니다.

야훼(Yahweh), 여호와(Jehova)

‘야훼’ 또는 ‘여호와’의 뜻은 ‘스스로 있는 자’ ‘자존하는 자’이다. 출애굽기 3:15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라는 구절이 야훼이다. ‘나는 ~이다’는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께 ‘나는 ~’이다’를 사용하면 구약의 여호와를 예수 그리스도로 소개했다.

  • [개역 개정]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NIV] 출 3:14 God said to Moses, “I AM WHO I AM. This is what you are to say to the Israelites: ‘I AM has sent me to you.'”





엘로힘(אֱלֹהִים, Elohim)

엘로힘 (Elohim)은 성경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엘' (אל)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복수형으로, 그 뜻과 용법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2. 엘로힘의 뜻과 유래

  • '엘로힘'히브리어에서 '엘'(El, אל)과 복수형 어미 '힘'(im, ים)이 결합된 형태입니다.
  • '엘'은 '강한 자', '신', 또는 '하나님'을 의미하며, 주로 힘과 능력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고대 근동의 다른 민족들이 사용했던 신들의 이름에서도 발견됩니다.
  • 복수형 '힘'은 단순히 복수형의 뜻을 가지기보다는, 존경과 경외를 표현하는 복수형으로 사용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 위대함과 경외를 강조하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엘로힘강력하고 전능한 하나님을 의미하며, 그분이 가진 모든 능력과 신적 특성을 나타냅니다. 히브리어 문법에서 복수형은 하나님이 여러 면에서 능력이 무한하고, 전지전능하신 분임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3. 엘로힘의 용례

엘로힘은 구약 성경에서 매우 자주 등장하며, 하나님을 지칭할 때 주로 사용됩니다. 또한, 엘로힘은 하나님의 성품, 권능, 그리고 하나님과 관련된 다른 신학적 개념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3.1. 창세기 1:1 (하나님의 창조)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여기서 "하나님"은 엘로힘입니다. 이 구절에서 엘로힘은 창조주로서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고 전지전능한 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2. 창세기 1:26 (하나님의 형상)

  •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창 1:26)

이 구절에서도 엘로힘이 사용되며, 하나님의 다수성 또는 삼위일체적인 성격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내적 관계다양성을 강조하는 구절로 이해됩니다.

3.3. 시편 19:1 (하나님의 창조)

  •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 19:1)

여기서 엘로힘하늘과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와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 구절에서 엘로힘은 창조의 주체로서, 하나님이 만물에 드러난 능력과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3.4. 출애굽기 3:14 (하나님의 이름)

  •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출 3:14)

이 구절에서 하나님"I AM"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셨고, 이 "I AM"의 개념은 엘로힘자존적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로서 모든 것을 지배하고 주관하는 전능한 분임을 보여줍니다.

4. 엘로힘의 신학적 의미

엘로힘은 하나님을 지칭하는 이름 중에서 전능하고, 창조적인 힘을 강조하는 이름입니다. 특히, 구약 성경에서 엘로힘하나님의 창조자, 심판자, 그리고 전능한 통치자로서 나타납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이 창조의 주체로서, 모든 생명과 세계를 지배하시는 주권자임을 강조하며, 그분의 능력, 위대함, 거룩함을 묘사합니다.

4.1. 하나님의 전능성

엘로힘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을 상징하며, 그분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고 유지하시는 능력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엘로힘으로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며, 그들의 삶을 주관하십니다. 이 전능함은 하나님의 주권능력을 나타내는 중요한 신학적 개념입니다.

4.2. 삼위일체와의 관계

엘로힘의 복수형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본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라고 표현되는 부분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대화와 관계를 의미한다고 이해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26에서 "우리"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임을 암시합니다.

4.3. 창조와 심판

엘로힘은 창조주로서 만물의 근원이자 심판자로서도 등장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심판하시며 구속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엘로힘은 이 모든 과정에서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행하시며, 때로는 심판을 통해 죄를 처리하시고, 때로는 구속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5. 엘로힘의 결론적 의미

엘로힘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전능성, 창조적 힘, 주권을 표현하는 중요한 신학적 이름입니다. 엘로힘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주관하시며, 전능한 심판자로서 모든 일에 대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신 분임을 드러냅니다. 또한, 이 이름은 하나님의 본질적 능력을 나타내며,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내적 관계를 암시하는 중요한 신학적 요소로 작용합니다.

엘로힘은 단순히 "하나님"을 의미하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함, 창조의 주체로서의 신적 본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단어로,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위엄과 전능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엘로힘(Elohim)

엘의 복수형으로 창세기 1:1을 비롯하여 수많은 구약에서 사용되었으며, 창조적 능력을 소개하는 곳이나 능력과 위엄을 드러내실 때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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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샤다이(Elohim Shaddai)

‘엘샤다이’(Hebrew: אֵלוֹהִים שַׁדַּי, Elōhîm Shaddai)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표현 중 하나입니다. 이 이름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다양한 이름들 중 하나로, 하나님에 대한 심오한 신학적 이해를 제공하며 그 분의 성격과 속성을 나타냅니다. ‘엘샤다이’라는 이름은 여러 가지 신학적 의미와 상징을 내포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1. 엘샤다이의 히브리어 뜻

‘엘샤다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에서 엘과 샤다이 두 단어가 합성된 합성어입니다.

엘(El, אֵל): 이 단어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로, 일반적으로 모든 신성한 존재를 지칭할 때 사용됩니다. 이는 ‘능력 있는 존재’, ‘힘 있는 자’, 또는 ‘권능을 가진 자’를 의미하며, 고대 근동 문화에서 신을 표현할 때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엘’이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권위를 나타내는 핵심 단어로 등장합니다.

샤다이(Shaddai, שַׁדַּי): ‘샤다이’는 ‘전능한’, ‘모든 것을 충분히 공급하는’, 또는 ‘완전한 능력’을 의미하는 단어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단어는 원래 ‘젖을 먹이는 자’ 혹은 ‘영양을 공급하는 자’와 관련이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과 보호를 상징합니다. ‘샤다이’는 때때로 하나님의 보호자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며, 그 분이 온전한 능력으로 믿는 자들을 보살피고 인도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엘샤다이’는 "능력 있는 하나님", "전능한 하나님"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이는 하나님이 가진 무한한 능력과 전능함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2. 엘샤다이의 성경 용례

‘엘샤다이’라는 이름은 주로 구약 성경에서 등장합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방식에서 강력한 존재로 드러나며, 그 분의 전능함을 나타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엘샤다이의 이름은 전능함, 보호, 생명의 공급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하는 구절에 자주 나타납니다.

2.1. 창세기에서의 엘샤다이

‘엘샤다이’는 창세기에서 중요한 용례를 찾을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엘샤다이’로 소개하신 장면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창세기 17:1
    "아브라함이 구십 구 세 되던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엘샤다이)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엘샤다이로 소개하며, 그에게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엘샤다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축복의 근원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다면 그에게 이루어질 약속을 확신할 수 있다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어떻게 그들의 삶을 이끌어갈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2.2. 창세기 28:3에서의 엘샤다이

  • 창세기 28:3
    "그가 하늘의 하나님, 곧 전능하신 하나님(엘샤다이)이 너에게 복을 주사..."

이 구절에서 이삭은 야곱에게 엘샤다이의 축복을 구합니다. 여기서 엘샤다이복의 근원이자 능력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의 보호복을 주시는 능력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며, 전능한 능력으로 그들을 지키실 것임을 의미합니다.

2.3. 욥기에서의 엘샤다이

욥기에서도 ‘엘샤다이’라는 이름은 종종 등장합니다. 욥기에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심판의 능력을 강조하는 중요한 책입니다. 욥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엘샤다이로 부르면서 욥은 그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을 느끼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복하는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 욥기 5:17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전능자(엘샤다이)의 꾸짖음을 피하지 말라."

여기서 엘샤다이는 하나님의 전능함과 그 분의 주권적 심판을 나타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그분의 뜻에 맞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징계하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욥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엘샤다이의 상징과 신학적 의미

‘엘샤다이’는 단순히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하나님의 능력보호, 그리고 풍성한 공급자로서의 역할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이 이름을 통해 자신이 단순히 능력만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과 자비, 보호와 공급이 결합된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나타냅니다.

3.1. 전능하신 하나님

‘엘샤다이’의 핵심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권능을 나타냅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엘샤다이’로 소개하신 장면에서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삶에서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존재로 나타나십니다. 이 이름을 통해 신자들에게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일으킬 수 있는 변화약속을 이루시는 능력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고자 하셨습니다.

3.2. 공급자와 보호자

‘엘샤다이’는 또한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샤다이’라는 단어가 원래 젖을 먹이는 자, 즉 영양을 공급하는 자와 연결되는 것을 감안할 때, 하나님은 단지 능력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는 존재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이 이름을 통해 그 분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히 공급하시며, 그들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3.3. 믿음의 여정에서의 하나님

‘엘샤다이’는 또한 신자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신뢰믿음을 표현하는 중요한 이름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는 이 이름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순종의 기초가 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엘샤다이로서 우리의 삶을 능히 인도하시며,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결론

‘엘샤다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전능하시며, 그분의 능력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강력한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성경에서 이 이름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며,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능력을 강조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엘샤다이’는 단순한 힘의 표현이 아니라 사랑과 보호, 복의 공급자로서 하나님을 묘사하는 중요한 이름으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신뢰할 수 있는 성품을 이해하도록 돕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엘 샤다이(El Shaddai)

원어상으로는 모든 것을 충족시키시는 하나님이지만 문맥상 ‘강하고 능하신 하나님’으로 사용되었다. 번역할 때는 대부분 ‘전능하신 하나님(Almighty God)’을 사용한다. 대부분 ‘엘샤다이’로 사용되었지만 창 49:25처럼 샤다이로만 사용되면 ‘전능자’로 번역된다. 여기서도 역시 채우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미가 강하게 드러난다.

샤다이만 사용된 구절 : 민 24:4, 민 24:16, 룻 1:20, 룻 1:21, 욥 5:17, 욥6:14,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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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

신학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주제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이름이다. 보통 이름의 신학으로 불리는 이 주제는 교리와는 거리가 있고,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주제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엄밀하게 하나님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은 존재를 규명하고 속성을 한계 짓는 것이기에 하나님은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후에 따로 다루고 오늘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식 또는 이해하는 방식으로서의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자. 각각의 이름은 후에 더 자세히 다루고 여기서는 일반적인 의미 만을 소개한다.

하나님 이름의 구분

하나님의 이름은 크게 ‘엘’ 계통과 ‘여호와(야훼)’ 계통으로 나누어져 있다. 여기서 별칭으로 불리는 임마누엘이나 퀴리오스 등은 성부 하나님을 가르키는 동시에 성자 예수님의 별명이기도 하다.

엘 계통의 이름들

엘(El)

창조적 능력을 가진 이름입니다. 엘은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과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신’으로 부르는 단어와 비슷하다. 고대 레반트 문화권에서 엘이라는 단어는 매우 흔하다.

엘로힘(Elohim)

엘의 복수형으로 창세기 1:1을 비롯하여 수많은 구약에서 사용되었으며, 창조적 능력을 소개하는 곳이나 능력과 위엄을 드러내실 때 사용합니다.

엘 엘리욘 / 엘 엘룐 (El Elyon)

뜻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다. 강력한 하나님을 한 번 더 강조한 것으로 의미는 ‘더욱 강력한 하나님’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창 14:18, 민 24:16, 사 14:13-14

  • 창 14: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엘 로이(El Roi)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창세기 16:32에서 한 번 사용된 것으로 하갈이 도망갈 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그를 돕는다. 이때 하갈은 하나님을 향해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감찰하다는 ‘보다’는 뜻이다. 보다는 뜻의 로이는 성경에서 모두 다섯번 사용되었다. 창 16:13, 삼상 16:12, 욥 7:8, 욥 33:21, 나 3:6,

  • [개역 개정] 창 16: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NIV] 창 16:13 She gave this name to the LORD who spoke to her: “You are the God who sees me,” for she said, “I have now seen the One who sees me.”

엘 샤다이(El Shaddai)

원어상으로는 모든 것을 충족시키시는 하나님이지만 문맥상 ‘강하고 능하신 하나님’으로 사용되었다. 번역할 때는 대부분 ‘전능하신 하나님(Almighty God)’을 사용한다. 대부분 ‘엘샤다이’로 사용되었지만 창 49:25처럼 샤다이로만 사용되면 ‘전능자’로 번역된다. 여기서도 역시 채우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미가 강하게 드러난다.

샤다이만 사용된 구절 : 민 24:4, 민 24:16, 룻 1:20, 룻 1:21, 욥 5:17, 욥6:14, 그 외 다수

엘 올람(El Olam)

엘 올람의 뜻은 ‘영원하신 하나님’ 또는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다. 창세기 21장 33절과 이사야 40장 28절에서 사용되었다.

엘 엘로헤 이스라엘(El Elohe Israel)

엘 엘로헤 이스라엘의 뜻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야곱이 얍복강을 건넌 후 형 에서를 무사히 만난 후 홀로 남았을 때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그곳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로 붙인 것이다. 하나니님을 부르는 이름이지만 묘한 분위기를 느낀다. 이후 야곱은 디나의 강건 사건이 일어나고 벧엘로 올라가게 된다.

  • 창세기 33장 20절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여호와 의미

여호와는 히브리어 יהוה (YHWH)에서 유래했으며, 뜻은 ‘독립적인 존재’ ‘스스로 있는 자’이다. 
이것을 자존이라 부른다. 
여호와는 자존자이시다. 
출애굽기 3:14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의 표현이 ‘야훼’이다.

  •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ויאמר אלהים אל־משה אהיה אשר אהיה ויאמר כה תאמר לבני ישראל אהיה שלחני אליכם׃
출 3:14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구약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름은 ‘엘’ 과 ‘엘로힘’이다. 
엘과 복수형인 ‘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능력과 위험을 나타낸다. 
하지만 여호와는 구원과 심판의 의미가 강하다. 
종종 ‘야훼 엘로힘’ 처럼 ‘여호와 하나님’으로 함께 나타날 때가 많다.

יהוה는 자음만 존재하다. 
원래 히브리어는 모음 없는 자음만 존재한다. 
2세기 이후 랍비들이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디아스포라 시대가 되면서 히브리음을 잊을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모음을 표기하여 지금이 이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정확한 발음인지도 사실 알지 못한다.

히브리어 자음 네 개로 이루어진 יהוה는 테트라그라마톤으로 불리며 신성시 되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주님이란 뜻으로 아도나이(אֲדֹנָי)로 표기하고 읽었다. 
יהוה를 야훼(Yahweh)로 발음할지, 여호와(Jehovih)로 발음할지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여호와는 이름인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의 하나가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름이 갖는 속성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에게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순간 신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위 ‘이름’이란 이름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 사사기 13장 18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 이사야 9장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표기를 하지만 그것은 대명사이지 고유명사가 아니다. 
여호와 엘로힘 엘룐 등은 아버지 선생인 사장님이지 ‘김소똥’ ‘박개똥’이 아닌 것이다.



야훼 / 여호와

야훼(Yahweh), 여호와(Jehova)

‘야훼’ 또는 ‘여호와’의 뜻은 ‘스스로 있는 자’ ‘자존하는 자’이다. 출애굽기 3:15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라는 구절이 야훼이다. ‘나는 ~이다’는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께 ‘나는 ~’이다’를 사용하면 구약의 여호와를 예수 그리스도로 소개했다.

  • [개역 개정]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NIV] 출 3:14 God said to Moses, “I AM WHO I AM. This is what you are to say to the Israelites: ‘I AM has sent me to you.'”

여호와 이레(Yahweh Yireh)

여호와의 이레의 뜻은 ‘여호와께서 나타나신다’이다. 준비되신다는 의역된 것이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치면서 이삭을 대신해 숫염소를 드리면서 부르는 이름이다.

  • 창세기 22장 14절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 닛시(Yahweh Nissi)

여호와 닛시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시다’이다. 깃발은 승리를 하므로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출애굽시 17장에서 여호수아 아멜렉과 싸울 때 모세가 산에서 기도할 때 승리하였다. 후에 모세는 승리를 기념하여 제단을 쌓고 ‘여호와 닛시'(출 17:15)라 부른다.

  • 출애굽기 17장 15절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여호와 살롬(Yahweh Shalom)

여호와 살롬 또는 ‘여호와 샬롬’은 ‘여호와는 평화이시다’는 뜻이다. 사사기 6장 24에서 사용되었다.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죽지 않은 것을 보고 놀람과 감사함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을 보는 자는 모두 죽지만 자신이 죽지 않아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부분이다.

  • 사사기 6장 24절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여호와 사바오트(Yahweh Sabbaoth)

여호와 사바오트는 ‘만군의 여호와’라는 뜻이다. 만군은 수많은 군대, 이스라엘의 전체를 뜻한다. 이스라엘은 군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 출애굽기 7장 4절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여호와 마카데쉠(Yahweh Maccaddeshem)

여호와 라아(Yahweh Raah)

여호오 라아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뜻이며 시편 23편 1절에서 다윗이 고백한 표현이다. 하나님을 목자로 이스라엘을 양으로 비유하는 부분은 성경에 상당히 빈번하게 등장한다.

  • 시편 23장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 라파(Jehovah Rapha)

치료하시는 여호와이다. 출애굽기 15:26에서 사용된 표현이다. 마라의 쓴 물 사건(출 15:22-27)에서 나오는 호칭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을 치료하신다는 표현이다.

  • 출 15: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여호와 치드케누(Yahweh Tsidkenu)

여호와 치드케누는 ‘여호와는 우리의 의가 되신다’이다.

여호와 엘 게몰라(Yahweh El Gemola)

여호와 엘 게몰라는 ‘여호와 보복하시는 하나님’이다. 예레미야 51:56에서 사용된었다.

  • 렘 51:56 곧 멸망시키는 자가 바벨론에 이르렀음이라 그 용사들이 사로잡히고 그들의 활이 꺾이도다 여호와는 보복의 하나님이시니 반드시 보응하시리로다

보수 또는 보복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 로마서 12장19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하나님은 보복하신다. 보복은 악에 대한 징벌이다.

  • 신명기 32장 41절 내가 내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이 정의를 붙들고 내 대적들에게 복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할 것이라
  • 신명기 32장 35절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여호와 나케(Yahweh Nakeh)

치시는 여호와 겔 7:9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뜻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말씀에 대한 불순종, 곧 죄와 악에 대한 심판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 당한다.

  • 에스겔 7장 9절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때리는 이임을 네가 알리라

여호와 삼마(Yahweh Shamma)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는 거기 게시다’는 뜻이다. 에스겔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으시고 친히 그곳에 계신다 선언하신다. 여호와의 삼마가 의미하는 것은

  • 에스겔 48장 35절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여호와 라파(Yahweh Rapha)

치료하시는 여호와

  • 출애굽기 15장 26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여호와 엘로힘(Yahweh Elohim) 

그 외 이름 / 별명들

아도나이(Adonai)

아도나이는 히브리인들이 ‘여호와’를 입으로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신하여 사용된 호칭이다.

임마누엘(Emmanuel)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에 나오는 이 단어는 후에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과 연결한다. 성자 예수님은 성육신을 통하여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심으로영원히 함께 하시게 된다.

  •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크리스토스(Christos)

메시야의 헬라어가 크리스토스이다. 지금의 그리스도를 말한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1세기 에 태어난 갈릴리 청년이 구약에서 예언한 ‘그 메시아’라는 뜻이다.

  •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 마 27: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 행 5: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퀴리오스(Kurios)

퀴리오스는 헬라어 ‘주인’이란 뜻이다. 보편적 용어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주’로 종종 부르고 있다. 주인은 하나님께도 사용하고 있다.

  •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마 22: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 요 11: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소테르(Soter)

소테르는 헬라어로 ‘구주’라는 뜻이다.

데오스(Theos)

데오스는 헬라어이며, 구약의 엘로힘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 ‘하느님’ ‘하나님’이란 뜻이다.







창세기 1장과 예수 그리스도

성경을 해석하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는 예표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담긴 그리스도를 찾아 해석해 보려고 합니다. 창세기 1장은 천지 창조를 다루는 장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신약 성경과 연결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역할이 담겨 있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창세기 1장에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과 예표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의 주체이심

창세기 1:1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요한복음 1:1-3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구절은 창세기의 "태초에"와 연결됩니다.
  • 요한복음 1:3은 예수님이 창조의 도구(말씀)로 활동하셨음을 보여줍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 골로새서 1:16-17은 "그(예수님) 안에서 만물이 창조되었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에서 언급되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개념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직결됩니다. 예수님이 말씀(로고스)이시기 때문에 온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 성경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후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2. 빛의 상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창세기 1:3 -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 요한복음 8:12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 창세기의 빛은 물리적 빛만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질서를 가져오시는 하나님의 구속적 역할을 상징하며, 이는 예수님께서 영적 어둠을 몰아내시는 역할과 연결됩니다.
  • 고린도후서 4:6에서는 "빛을 비추셨느니라"는 구절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신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빛'으로 소개합니다. 빛은 진리이며 생명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빛은 피조물로 나타나지만 예수님은 창조되지 않은 빛 그 자체이십니다. 빛은 비추심으로 어둠을 몰아내고 모든 것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그래서 빛은 진리이며, 악(어둠)과 싸우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3.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창세기 1:11 -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 창조 이야기에서 씨앗과 생명체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의 생명 원리를 상징합니다.
  • 요한복음 1:4에서 예수님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묘사됩니다.
  • 요한복음 10:10은 예수님께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4. 하나님의 형상과 예수 그리스도

창세기 1:26 -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우리"라는 표현은 삼위일체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의 공동 활동을 암시합니다.
  •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소개됩니다(골로새서 1:15).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류와 교제하기 원하셨음을 보여줍니다. '형상'이란 히브리어 첼렘이나 데무쓰는 모두 형상과 이미지로 번역이 되는 단어들로 '닮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육체를 입으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드러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 요 14: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 요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요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 요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5. 안식과 예수 그리스도

창세기 2:2 -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시니라"

  • 창조의 완성과 안식은 장차 예수님을 통해 제공될 영원한 안식을 예표합니다.
  • 히브리서 4:9-10은 예수님을 통해 참된 안식이 성취됨을 설명합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말씀 "다 이루었다"는 창조의 완성에서 나타난 안식과 연결됩니다.

6. 성령과 함께 사역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창세기 1:2 -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 성령의 운행은 창조의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그분의 사역을 시작하십니다(누가복음 4:18).
  • 성령과 예수님의 협력은 창조와 구속에서 일관되게 나타납니다.

7.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구절은 창조의 핵심 도구로 "말씀"을 강조합니다.

  •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Logos)으로 소개되며, 이를 통해 창조와 구속이 이루어짐을 나타냅니다(요한복음 1:1).

결론:

창세기 1장은 창조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창조의 주체로서 빛, 생명, 말씀, 안식,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구속의 그림자를 드러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궁극적 구원 계획을 구약의 첫 장부터 우리에게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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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론과 예표론에 대하여

성경을 깊이 공부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접하게 되는 것이 모형론과 예표론입니다. 둘은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존재합니다. 모형론(Typology)예표론(Foretelling)은 성경 해석에서 매우 밀접한 개념이지만, 각각 고유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은 성경 해석의 방법인 모형론과 예표론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모형론(Typology)

  • 정의: 구약의 특정 인물, 사건, 제도, 또는 물건이 신약에서 성취될 영적 진리(특히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구속사적 사건)를 미리 보여주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 예를들면
    • 아담 → "둘째 아담"으로 불리는 예수님(로마서 5:14).
    • 모세 → 중재자로서 예수님의 역할을 예표(신명기 18:15-18).
    • 성막 → 하나님의 임재와 예수님의 성육신(요한복음 1:14).

모형론은 어떤 모형이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형론은 예표론에 비해 정적이며, 존재하는 어떤 형태의 물질과 연관이 깊습니다. 모형론(Typology)은 성경 해석에서 구약의 특정 인물, 사건, 제도, 또는 물건이 신약에서 성취될 영적 진리나 구속사적 사건의 "모형"(type)으로 이해되는 개념입니다. 모형은 실체를 예고하거나 그림자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며, 신약에서 그 실체(antitype)가 완전하게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아담은 “둘째 아담”인 예수님(로마서 5:14)의 모형으로, 아담이 인류의 죄의 원인이 된 것처럼 예수님은 인류를 의로 이끄는 새 창조의 시작을 상징합니다. 또 다른 예로, 구약의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모형으로,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를 보여줍니다(요한복음 1:14, 히브리서 9:11). 모형론은 구약과 신약 간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점진적으로 계시되었음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생각합시다. 모형이 있고, 그 모형은 실체를 반영한다고. 모형은 다양하지만 실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모형론은 그리스도적 성경 해석에 가깝습니다. 아마 아래의 글을 읽어 보시면 좀더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자, 이제 예표론으로 가 보겠습니다. 예표론은 말 그대로 구약의 어떤 사건들이 장차 이루어질 어떤 일에 대한 '예표'라고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표론은 동적이고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2. 예표론(Foretelling)

  • 정의: 구약 성경에서 예언적인 말씀이나 사건이 장차 이루어질 미래의 일을 명확히 지시하거나 상징하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 예를 들면
    • 이사야 53장 → 예수님의 고난과 속죄를 명시적으로 예언.
    • 미가 5:2 → 예수님의 탄생지가 베들레헴임을 예언.
    • 스가랴 9:9 →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것을 예언.

3. 공통점

이제 공통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모형론과 예표론의 공통점은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해석이라는 점은 거의 비슷합니다. 방식이 다를 뿐 비슷한 의미로 해석을 하기 때문입니다.

구속사적 관점

  • 둘 다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며,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보여줍니다.
  • 구약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드러낸다고 봅니다.

상징과 성취

  • 구약의 인물, 사건, 제도 등이 신약에서 성취되거나 설명됩니다.
  • 구약에서 불완전하거나 그림자처럼 보였던 것이 신약에서 온전한 실체로 드러남.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석

  •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전제(누가복음 24:27, 44)를 바탕으로 합니다.

이렇게 보면 모형론이든 예표론이든 과거의 모양이나 사건은 모두 실체가 아닌 모형과 예표이고,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또한 과거의 어떤 것들은 실체나 본체인 그리스도를 본떠 만들었거나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법은 구약의 율법이나 모형들은 임시적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현현 또는 강림하셨을 때 모든 것은 빛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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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vs 야훼

여호와와 야훼는 둘 다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로, 원어는 히브리어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들을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자음 4글자로만 이루어진 단어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그 단어를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고, 그렇게 수천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원래 그 4단어의 발음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와 야훼는 둘 다 그 4글자의 자음에 모음을 붙여서 읽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둘 다 그 4글자의 단어를 발음했는지 확실하지 않죠. 단지 신학자들은 여호와보다 야훼가 그 4글자의 발음에 더 가깝다고 추측할 뿐입니다. 결국 여호와와 야훼는 둘 다 하나님을 뜻하는 4글자를 추측해서 읽어낸 것으로, 둘 다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1장 7절-

예수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의 고대 그리스어 (헬라어) 이며, 히브리어로는 여호수와 라고 발음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태복음 1장 21절-



하나님이 가지신 각각의 많은 이름들은 하나님의 다면적인 특징들 중 각각 다른 측면을 보여줍니다. 성경에 나오는 잘 알려진 하나님의 이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엘 엘로하(EL, ELOAH): “강하고, 능하시고, 뛰어나신” 하나님 (창세기 7:1; 이사야 9:6) –어원학적으로 엘은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창세기 31:29)와 같이 “능력”을 의미하는 데 쓰입니다. 엘은 진실함 (민수기 23:19), 질투 (신명기 5:9), 긍휼 (느헤미야 9:31) 같은 다른 자질들과 연관되지만, 능력을 근본 개념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엘로힘 (ELOHIM): “창조주, 강하고 능하신” 하나님 (창세기 17:7; 예레미야 31:33) – 엘로하의 복수형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수용하는 이름입니다. 성경 첫 문장, 하나님(엘로힘)께서 세상이 있으라 말씀하실 때부터 하나님 능력의 우월성은 명백히 증거됩니다 (창세기 1:1).

엘 샤다이 (EL SHADDAI): “전능자 하나님”, “야곱의 전능자” (창세기 49:24; 시편 132:2, 5) – 모두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궁극적 권능에 대해 말합니다.

아도나이 (ADONAI): “주(Lord)” (창세기 15:2; 사사기 6:15) – 유대인들에 의해 죄 많은 인간이 입 밖으로 소리내기엔 너무도 신성한 이름이라고 여겨졌던 야훼 (YHWH)를 대신하여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야훼는 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다루실 때 사용되는 반면, 아도나이는 이방인들을 다루실 때 주로 사용됩니다.

야훼/여호와 (YHWH / YAHWEH / JEHOVAH): “하나님 (LORD)” (신명기 6:4; 다니엘 9:14) –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의 유일한 참된 이름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주(Lord), 아도나이와 구분하기 위해 “LORD” (모두 대문자)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 이름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출애굽기 3:14)로 처음 밝혀졌습니다. 이 이름은 구체적으로 즉각성, 현재성을 나타냅니다. 야훼는 구원과 (시편 107:13), 죄 사함 (시편 25:11), 인도하심 (시편 31:3)을 구하는 자들 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곳에, 지금, 계십니다.

여호와 이레 (YAHWEH-JIREH):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것이다” (창세기 22:14) –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 제물로 바칠 양을 준비해주셨을 때 아브라함이 기념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여호와 라파 (YAHWEH-RAPHA): “치료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15:26) – “나는 너희를 [영육 간에]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육적으로는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고 치료하시고, 영적으로는 부당함을 용서하십니다.

여호와 닛시 (YAHWEH-NISSI): “하나님 우리의 깃발” (출애굽기 17:15). 깃발은 전장에 세워지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 이름은 출애굽기 17장 아말렉과의 사막전 승리를 기념합니다.

여호와 마카데쉬 (YAHWEH-M'KADDESH): “성스럽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 (레위기 20:8; 에스겔 37:28) –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아니라, 오직 당신만이 당신의 백성을 정결하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여호와 샬롬 (YAHWEH-SHALOM): “하나님 우리의 평화” (사사기 6:24) – 기드온이 하나님의 천사로부터 그를 본 이후에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답을 듣고 나서 자신이 지은 제단에 붙인 이름입니다.

여호와 엘로힘 (YAHWEH-ELOHIM): “여호와 하나님” (창세기 2:4; 시편 59:5) – 하나님의 유일한 이름 여호와 (YHWH)와 포괄적인 “하나님”의 합성어로 여호와가 하나님 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여호와 트시드케누 (YAHWEH-TSIDKENU): “여호와 우리의 의” (예레미야 33:16) – 여호와 마카데쉬에서와 같이 하나님 한 분만이 사람에게 의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고 (고린도후서 5:21)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습니다.

여호와 로이 (YAHWEH-ROHI): “하나님 우리의 목자” (시편 23:1) – 다윗은 목자인 자신과 자기 양과 의 관계를 숙고한 이후에 하나님과 자기의 관계가 정확히 그것과 같다는 것을 깨닫고, “여호와 로이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선포합니다 (시편 23:1).

여호와 삼마 (YAHWEH-SHAMMAH):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다” (에스겔 48:35) – 예루살렘과 그곳에 있는 성전에 대해 주어진 이름으로, 한 때 떠났던 주님의 영광이 (에스겔 8-11장) 다시 돌아왔음을 나타냅니다 (에스겔 44:1-4).

여호와 사바오트 (YAHWEH-SABAOTH): “만군의 하나님” (이사야 1:24; 시편 46:7) – 만군은 천사와 사람의 “무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무리뿐만 아니라 지상의 거주자들에 대해서도 , 또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주인과 종 모두에게 하나님 되십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과 권위를 나타내며 하나님께서 하시기로 결정한 것은 무엇이든 성취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엘 엘룐 (EL ELYON): “지극히 높은” (신명기 26:19) – “위로 가다” 또는 “올라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근어에서 파생된 말로 함축 의미는 지극히 높은 것을 의미합니다. 엘 엘룐은 승격을 암시하며 군주의 절대적 권리를 일컫는 데 사용됩니다.

엘 로이 (EL ROI): “살피시는 하나님” (창세기 16:13) – 사라에 의해 광야로 쫓겨나 외롭고 절망적인 가운데서 하갈이 하나님께 붙여드린 이름입니다 (창세기 16:1-14). 하갈은 하나님의 천사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직접 현현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하갈은 자신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엘 로이가 자신을 살피셨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을 살피신다고 증언했습니다.

엘 오람 (EL-OLAM): “영원하신 하나님” (시편 90:1-3) – 하나님은 본래 시작도 끝도 없으시며, 시간의 제약으로부터도 자유로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안에 시간 그 자체의 원인을 가지고 계십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엘 깁보르 (EL-GIBHOR): “전능하신 하나님” (이사야 9:6) – 이사야의 예언 부분에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이름입니다. 강력하고 전능하신 전사, 전능하신 하나님 메시아가 하나님의 원수를 멸하시고 철장으로 다스리시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15).





엘로힘

엘로힘은 히브리어로 신을 가리키는 엘의 복수명사이며, 직역하면 신들, 성경 번역으로는 하나님 입니다. 여기서 엘로힘이라는 단어 자체는 복수명사지만, 엘로힘이 유일신인 하나님을 나타내는 경우, 단수명사로 취급합니다. 여기서 삼위일체 (세 분이지만 한 분이다) 가 나온 것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한편 엘로힘이 말 그대로 복수형으로 취급되기도 하는데, 이 때는 말 그대로 '신들' 이라는 뜻으로 유일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 (엘로힘 - 유일신 하나님) 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애굽기 3장 4절-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 (엘로힘 - 다른 신들) 을 네게 두지 말라"

-출애굽기 20장 7절-

엘샤다이

엘샤다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아브람이 99세 때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와 언약을 세우시며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실 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이 때 언약의 표징으로 남자는 모두 할례를 받을 것을 명하시기도 합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세기 17장 1절-

여디디야

여디디야는 여호와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 이라는 뜻으로, 선지자 나단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게 붙여 준 별명입니다.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사무엘하 12장 24~25절-

글로리아

글로리아는 '영광' 이라는 뜻으로, 종교개혁자 칼빈이 늘 묵상하던 시편 115편 1절 말씀에 등장하는 단어 입니다. 그래서 칼빈의 종교 개혁의 주축이 되는 구절이 바로 '솔리 데오 글로리아 (Soli Deo Gloria -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입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시편 115편 1절-

브니엘

브네엘은 '하나님의 얼굴' 이라는 뜻으로, 야곱이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그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하여 그 땅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창세기 32장 24~30절-






코람 데오(Coram Deo, 神前意識, 하나님 앞에서), coram hominibus(before men, 인간 앞에서)



코람 데오(Coram Deo, 신전의식, 神前意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임재
신전사상(神前思想)를 의미

라틴어 2개 단어인 코람(coram)과 데우스(Deus)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라틴어 coram은 '면전에서 혹은 앞에서'(in the presence of) 라는 의미
Deo라는 단어는 Deus(God, 하나님)의 탈격(ablative, 명사를 부사처럼 사용하기 위한것)이다. 
이 두 단어가 결합하여 Coram Deo가 되었다. 
이 말은 영어 before God(하나님 앞에)인데 coram hominibus(before men, 인간 앞에서)와 대비되는 말이다.

  • Richard A. Muller, Dictionary of Latin and Greek Theological Terms, Baker, 1985, 84

  • 주로 기독교 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다.[4]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권위 아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신학사상이다. 인간을 지켜보시는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임재라는 말로도 쓰인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의 영역안에서 자신을 친히 나타내시는 거룩한 행위이다.독일의 신학자 게하르트 에벨링은 코람 데오와 비슷한 의미로서 임재관계(Coram-Rel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는 이 개념을 마르틴 루터의 생각으로부터 가져왔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면전에서 그리고 세상의 면전에서 인간의 상황을 다루는 것이며 동시에 물질적 존재론에 대해서 관계적 존재론의 대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모세(출 18: 12)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이 친히 시내산에서 구름 가운데 임하시고(출 19: 9, 11; 20: 18), 광야에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하시며(출 13: 21-22), 또 회막에 구름기둥으로 임재하셨다(출 33: 9-11). 사무엘 상 12장 3절에 사무엘이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 ."라고 말하였다. 구약성경 시편 139편은 대표적으로 코람 데오의 정신을 보여주는 시이다.

    • (시 139:1)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 (시 139:2)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 (시 139:3)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 (시 139:4)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 라틴어 성경 불가타역에 사용된 성구들-구약 - 창 6:11, 민 10:9, 신 4:10, 12:18, 16:11, 26:3, 대상 13:8, 10, 16:1, 대하 33;12, 왕상 8:65, 에 8:21, 욥 15:4, 32:2, 시56:13, 잠 3:4, 전 5:2, 단 6:10, 말 3:14.

    신약에서는 제 2위 하나님되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셨다.[5] 그리스도임마누엘이 되시는데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런 임재적 사건은 사도 행전 4장 19절, 8장 21절, 10장 33절등에 나온다. 사도행전 10장 33절에서는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하였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9절은 주의 얼굴(임재, in the presence of the Lord)과 그의 힘의 영광(위엄, the majesty of his power)이 함께 사용되었는데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낸다는 의미이다. 임재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 위에 존재하다'(겔37:1), '오다'(요이1:7), '이르다, 만나다'(삼상3:10), '방문하다, 도착하다'(마24:27)는 뜻한다. 성경에서 '임재'란 주로,

    1. 하나님의 초월한 권능이 나타나는 때(겔37:1)
    2.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계시하실 때(삼상3:10)
    3.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요이1:7)이나
    4. 그분의 재림의 때(마24:27)를 두고 하는 표현이다.[6]
    5. 불가타 역 성경에 나오는 코람 데오 구절들-신약- 눅 12;6, 24:19, 행 8:21, 롬 4;22, 고후 2:17, 4;2, 7:12, 12:19, 갈 1:20, 딤전 5:4, 5:21, 6:13, 딤후 4;11, 계 3:2, 8:4

    최승락 교수는 바울의 사상에도 코람데오가 나오는데 코람과 의미가 같은 헬라어 전치사들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성경에서 코람 데오는 단지 전치사(coram = before)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헬라어에서 라틴어의 ‘코람’에 해당되는 전치사는 여러 가지가 있다. 카테난티(katenanti)나 에난티(enanti)도 그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는 상황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의 말씀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katenanti theou) 말하고자 하는 결단을 밝힌다(고후 2:17, 12:19). 엠프로스텐(emprosthen) 역시 유사한 의미를 가진 전치사이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그를 시인하거나 부인하는 것에 따라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하거나 부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마 10:32-33). 그러나 이런 전치사들 보다 더 특징적인 전치사로 에노피온(enōpion)이 있는데, 예를 들어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enōpion tou theou) 자신이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밝힌다(갈 1:20). 에노피온은 엔(en)과 옵탈모스(ophthalmos 눈)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전치사로서 ‘안전’(眼前)의 의미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는 히브리어의 리프네(li-pnê)나 엣프네(et-pnê), 엘프네(el-pnê) 등에 맞먹는 전치사이다. 히브리어에 있어서 이 전치사들은 모두 파네(pane 얼굴)와 연결된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34:23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일 년에 세 차례 ‘하나님 앞에’ 보이도록 명할 때 엣프네 전치사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70인경에서는 헬라어 에노피온으로 번역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전치사들이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는 하나님 앞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면전(面前), 또는 하나님의 안전(眼前)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7] 야고보서 4장 10절 본문 "주님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에서 주님 앞에서 (in the presence of the Lord, ἐνώπιονΚυρίου)라는 코람데오는 인간의 자신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교만하지 말 것을 교훈한다.이 본문과 4장 6절에 있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히에로니무스(제롬)가 번역한 라틴어 성경 불가타역에 따른 코람 데오(coram Deo)에 사용된 성경구절은 다음과 같다.

    • 구약성경 - 창 6:11, 민 10:9, 신 4:10, 12:18, 16:11, 26:3, 대상 13:8, 10, 16:1, 대하 33;12, 왕상 8:65, 에 8:21, 욥 15:4, 32:2, 시56:13, 잠 3:4, 전 5:2, 단 6:10, 말 3:14
    • 신약성경- 눅 12;6, 24:19, 행 4:19,, 행 8:21, 롬 4;22, 고후 2:17, 4;2, 7:12, 12:19, 갈 1:20, 딤전 5:4, 5:21, 6:13, 딤후 4;11, 계 3:2, 8:4

    종교개혁가들에게도 이 표현은 자주 발견된다.

    마르틴 루터는 코람 데오를[8] 즐겨사용했는데 에벨링은 이 개념을 루터의 사상체계의 참된 근거(the very basis of Luther's mode of thought)라고 말한다.[9] 성경환 목사에 따르면 루터의 저서 《식탁대담》 중 〈세상의 본질에 관하여〉라는 장에서는 루터는 이 세상의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누고 있다.[10]

    • 첫째 부류는 자신의 부패한 본성과 행동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채 양심의 가책없이 태평스럽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 둘째 부류는 율법앞에서 두려워 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며 좌절감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 셋째 부류는 자기 죄를 인정하고, 죄로 인하여 멸망할 자임을 잘 알면서 복음에 귀기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죄사함 받음을 믿고 하나님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으며 온갖 선행으로 믿음의 열매를 나타내며 사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울리히 츠빙글리의 신학사상에도 나타난다.[11]

    요한 칼빈은 코람 데오를 통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고 그의 신학의 중요한 사상을 형성하였다.[12] 그의 명저 기독교강요 1권 2장에서 하나님의 얼굴 (the face of God)을 먼저 보지않고서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질수 없다고 한다.[13] 칼뱅은 베드로 전서 3장 4절 주석에서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속사람(중생한 사람)이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은 인간의 눈(코람 호미니부스)에만 치장하지 않는 값진 것(pretiosus)이라고 한다. 하나님앞에 값진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더 염려하는 것이라고 한다.[14]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때는 두려움과 전율을 느낀다고 한다. 하나님의 위엄이 인간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마다 언제나 충격을 받고 압도당했던 것으로 성경이 일반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그 두려움과 놀람은 바로 여기서부터 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臨在)를 모를 때는 굳건히 그리고 꿋꿋하게 서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것처럼 전율하고 경악하여 비참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고 거의 혼비백산이 된 것이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위엄과 자신들을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코 자신의 비천함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하고 깊이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우기 우리는 이러한 놀라운 사건의 실례가 사사기와 예언서에 무수히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었다(삿 13:22; 사 6:5; 겔 2:1; 1:28; 삿 6:22 등). 욥기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순전하심을 묘사함에 있어서 항상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능함과 부패를 깨닫게 함으로써 인간을 압도하는 강력한 주장을 하고 있다(참조, 욥 38:1 이하). 이것은 충분한 증거가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하여 가까이 나아갔을 때, 자신이 흙이요, 티끌에 불과함을 더욱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던 것을 볼 수 있고(창 18:27), 엘리야도 얼굴을 가리우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서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이렇게 두려운 일이다(왕상 19:13). 그룹들까지 두려움으로 그들의 얼굴을 가리웠는데(사 6:2), 하물며 후패하고(욥 13:28) 벌레에 지나지 않는(욥 7:5; 시 22:6) 인간이야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하여 선지자 이사야는 "그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왕이 되시고…"(사 24:23)라고 말한다. 즉 그가 그의 광채를 발하시고, 더 가까이 다가서게 하면, 가장 빛이 나던 것들도 그 앞에서는 캄캄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사 2:10,19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가르치는 올바른 순서는 전자를 먼저 논하고 다음에 후자를 논하는 것이라 하겠다.

    — 《기독교강요》 1:1:3, 장 칼뱅

    디모데 전서 6장 13절 주석에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앞에서"라는 것의 의미는 우리의 눈을 세상에서 돌려 만물을 살게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을 배워는 것이라고 한다.[15] 이승구 박사에 따르면 코람 데오의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한다.[16]

    윌리엄 틴데일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는 신념 때문에 그 유능한 생애를 화형으로 마감해야 했다. 만일 그가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길을 택했다면 그는 당대 최고의 성경학자로서 존경을 받으며 장수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17]

    A.T. 피어선은 하나님과 관계속에서 거룩한 삶이란 코람데오(coram Deo)의 삶이라고 한다. 의식적이며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눈앞에서 살아가는 삶이며, 하나님의 눈앞에 자신을 직접적으로 두는 삶이며, 그리고 그 분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동시에 우리도 그와 함께 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숨겨진 불경건한 삶의 모든 감추어진 것들을 청소하는 것이며 우리가 우상을 포기하고 그 자리가 하나님의 임재와 교재의 성소로 바꿔어지는 삶이라고 한다.[18]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와 더불어서 세계 3대 칼빈주의자인 미국의 벤저민 워필드는 모든 관점에서 하나님이 보고 있다라는 것을 삶의 원리로 살아가는 것이 코람 데오의 삶이라고 한다.

    칼뱅주의자는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다. 그는 자연에서 하나님을 보고, 역사에서 하나님을 보며, 은혜에서 하나님을 본다.

    칼뱅주의자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발자국을 보고, 모든 곳에서 그 전능하신 팔의 역사하심을 느끼며, 하나님의 위대하신 심장 박동 소리를 듣는다. 이 모든 사실에서 칼뱅주의를 구성하는 원리가 나타난다.

    칼뱅주의자는 모든 현상의 배후에서 하나님의 손을 발견하며, 이 모든 현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며, 기도하는 태도로 자기의 전 생애를 살아가고, 구원 문제에 있어서 자신을 전혀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다.

    안명준 교수는 성경해석과 관련하여 코람데오를 말한다.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특별히 인간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하여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coram Deo)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고 한다.[19] 그리고 그에 따르면 다음의 몇 가지로 코람 데오의 특징을 설명한다.

    • 코람 데오는 경건한 신앙의 근본적이 원리이다. 신앙의 시작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 코람 데오는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만들어 준다. 그의 뜻을 분별하고 삶을 살펴서 거룩한 영적 삶을 살게된다,(롬 12:1-2)
    • 코람 데오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강하게 보여주는 성경의 일관된 주장이다.
    • 코람 데오의 정신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실천하는 삶으로 연결된다.
    • 코람 데오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지혜의 근본이다.
    • 코람 데오는 만물의 통치하시는 눈동자처럼 살피시는 여호와의 눈을 언제나 주목하는 것이다.

    코람 호미니부스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인간들 앞에서)는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신학적 용어이다. 이말은 코람 데오(라틴어: Coram Deo, 신전의식(神前意識,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과 반대되는 말이다. 리차드 멀러는 이 두 용어는 서로 대조되는 것으로 본다.[1] 하나님의 임재와 반대되게 인간 중심으로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코람호미니부스는 기독교 신앙에 유혹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신앙을 파괴한다고 본다. 텍사스의 번영신학의 주창자 조엘 오스틴로버트 슐러는 인간 중심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것은 코람 데오와 반대적인 메세지이다. 인간중심적 메세지와 인간이 원하는 내용을 전하는 것은 전형적으로 인간 앞에서 효과를 추구하는 인본주의적 사상이다.[2] 여호와의 눈을 약화시키는 신앙적 이탈로 인간의 이성과 자율성에 대한 주도적인 역할을 강조할 뿐이다. 종교 개혁가 장 칼뱅은 인간이 먼저 하나님의 얼굴(coram deo)을 먼저 보고 인간 자신을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는다면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한다.(존 칼빈, 기독교강요 1:1:2)




    주와 동행하는 삶(창세기 5:21-23) / 설교원고(2018-12-30) 송구영신

    파트리스교회 주일 설교 / 2018-12-30 송구영신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지혜로운 사람은 두 가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알아야 할 두 가지는 나의 남은 날 수와 남은 날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아는 것입니다.

    시편 90: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2018년을 마감하는 송년주일의 설교 제목은 ‘주와 동행하는 삶(Live with the Lord)’ 이라고 정했습니다. 주와 동행하는 삶이란 설교 제목을 정하게 된 이유는
    나의 남은 날은 얼마나 될까? 남은 날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하면서 얻은 결론은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기독교 윤리학자 리차드 니버(Helmut Richard Niebuhr, 1894∼1962)는 인간의 이상형은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두 가지를 본받아야 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이며, 또 하나는 인간을 향한 절대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과 인간을 향한 절대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세상은 온갖 부조리와 갈등의 구조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현실입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사도 바울은 주와 동행하기 위해서 이렇게 고민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할까요?

    이 말씀을 다른 성경으로 읽어보면 이렇게 번역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할까?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까?

    신앙생활의 자세를 두 가지로 소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코람 데오(Coram Deo)’는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 라는 뜻이며, 또 다른 하나는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는 ‘사람 앞에서(Before Men)’ 라는 뜻입니다.

    코람 데오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주와 동행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주와 동행하는 삶을 ‘코람 데오(Coram Deo)’ 라고 합니다.
    ‘코람 데오(Coram Deo)’는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 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주와 동행하는 삶은 나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생각하며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런 기도가 ‘코람 데오(Coram Deo)’의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느 목회자가 여러 지역을 순회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사택에 불이 나서 모든 것이 타버렸고 심지어 두 아들마저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그 때가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개신교회가 활발하게 번성하던 시기였습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결코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낙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목회자는 아무도 없는 숲속으로 들어가서 기도합니다. 그때 그 목회자의 마음에 참 평강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놀라운 찬송을 불렀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2019년 신앙생활에 은혜가 넘쳐나는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코람 데오(Coram Deo)’ 즉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 라는 신앙생활을 위한 명제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면에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라고 합니다.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는 ‘사람 앞에서(Before Men)’ 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가룟 유다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를 팔아넘길 음모가 드러났습니다. 이때 가룟 유다는 ‘코람 데오(Coram Deo)’의 길을 포기하고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를 팔아넘긴 후 스스로 목매어 죽는 죽음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과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의 결과는 이미 가룟 유다의 선택에 의해서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코람 데오(Coram Deo)’ 즉 ‘주와 동행하는 삶’을 위하여 함께 경주하는 2019년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와 동행하는 삶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오늘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 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를 에녹이란 이름과 므두셀라 라는 이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에녹(Enoch)이란 이름은 ‘바친다’는 뜻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에게 바쳐진 인생 이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에게 바쳐진 인생으로 2019년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에게 바쳐진 삶이 곧 에녹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온전하게 바쳐졌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누구나 경험하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왜 에녹은 하나님에게 바쳐질 수 있었을까요?

    에녹 당시의 평균 수명은 대략 630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365년을 살았습니다. 평균 수명보다 훨씬 적게 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평균 수명보다 적게 살았다고 하면 무슨 몹쓸 질병에 걸렸거나 아니면 사고를 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몹쓸 질병에 걸린 것도 아니었고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던 에녹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서 영원한 동행을 하고 있습니다.

    므두셀라(Methuselah)라는 이름은 ‘창을 던지는 사람’ 이란 뜻입니다.

    므두셀라는 성경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를 살았다고 합니까? 969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에녹은 365년을 살았는데 므두셀라는 969년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오래 살았던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에녹은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영원한 것은 없다!

    에녹이 살았던 시대에 창을 던지는 사람이란 성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성을 지키는 사람이 969년 동안 그 성을 지켰다면 잘 지킨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969년 보다 더 많은 2천년 동안 성을 지킨 사람과 비교할 때는 잘한 것이 아닙니다. 에녹은 므두셀라가 969년 동안 육체라는 성을 지키지만 결국은 죽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죽는다는 것은 성을 빼앗기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에녹을 깨달았습니다.

    시편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둘째는 심판이 다가올 것이다!

    므두셀라는 이름은 므두(무투, death)와 셀라(살라크, send)가 합성한 이름으로 므두셀라가 죽으면 심판을 보낸다는 뜻입니다. 이때 심판은 노아의 홍수를 말합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원한 것은 없으며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주와 동행하는 삶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삶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버렸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이었습니다.

    에녹처럼 살아서 주님 앞으로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에녹과 같이 될 수 없다면 건강하고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주와 동행하다가 어느 날 잠을 자는 것처럼 고요하게 주님 앞으로 가는 것을 기도합니다.

    에녹과 같은 삶을 원하신다면 주와 동행하는 삶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거룩한 동행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2019년 파트리스교회 모든 가족들이 거룩한 동행자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거룩한 동행자가 될 수 있는 말씀을 소개합니다.

    디모데전서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It is consecrat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무엇일까요?

    기도는 성경대로 살아가는 힘을 공급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왜 기도합니까?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기 위한 힘을 공급받기 위한 것입니다. 현실에서 부딪친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우려는 힘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는 고통스런 현장에서 스데반은 ‘주여,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저 돌이 방향을 바꿔 돌을 던진 사람의 이마에 맞아 마치 골리앗이 쓰러지듯 넘어지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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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코람 문도(coram Mundo) 


    사순절 다섯째 주일, 다음주일은 종려주일, 그리고 고난주간입니다. 주님 십자가 지시고 나를 위해 고난당하신 그 고난주간, 한주간 동안 전교인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주님 가신 그 십자가의 길에 동참할 작정입니다. 그 잔을 함께 마시고 주님과 함께 깨어있기를 원합니다^^  

    본당의 사순절 플래카드 "코람데오"처럼 하나님 앞에 서고 싶습니다!

    Coram Deo 코람 데오는 라틴어로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신전의식(神前意識)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16세기 당시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변질되어가던 교회에 개혁을 일으켰던 종교개혁자 루터와 그리고 칼빈이 이 단어 하나를 붙잡고 평생 개혁의 길을 갔습니다! 실종된 코람데오 정신을 되찾자고 다시! 코람데오!를 외쳤습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 앞에 섭시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 코람데오는 신학대학교의 교훈이기도합니다.


    ▶ 존 웨슬리도 코람 데오의 정신으로 스스로의  경건생활을 점검하곤 했습니다.
    1. 난 항상 기도하고 있는가?

    2. 난 항상 기뻐하고 있는가?

    3. 난 항상 감사하고 있는가?

    4. 난 욕심내고 있지 않은가?

    5. 난 하나님 앞에 두려운 일은 없는가?

    6. 난 연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가?

    7. 나의 말과 행동은 진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진실인가?


    내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순간은 어떤 순간일까요? 종말론적이라고 느낍니다.

    하나님과 나는 운명적으로 숙명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입니다. 태아가 어머니과 탯줄로 연결되어 있듯이 하나님과 우리는 영혼이 엮여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선 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순간, 평생 동안 써왔던 수많은 가면을 벗어버리고 내 존재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서는 것이 바로 코람데오 정신일 것입니다. 가면 속의 내 얼굴을 아시는 주님 앞에 이 사순절! 무릎을 꿇습니다!
    자아를 내려놓고,

    집착을 내려놓고,

    욕심을 내려놓고,

    변명도 내려놓고,

    핑계도 내려놓고...

    그리고 치유받고 위로받고 용서받고 새 힘을 얻기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다시 힘을 얻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지난주 라틴어 성경 Vulgate에 나타난 28개(58)의 코람 데오 본문을 찾아서 읽어보았습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본문들이었습니다.

    맨 먼저 나오는 코람데오는 하나님 앞에서 부패한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Gen 6:11] corrupta est autem terra coram Deo et repleta est iniquitate
    [창6: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그 뒤로 이어지는 모든 코람 데오들!
    성경의 모든 인물들, 다윗, 욥, 다니엘도 코람데오의 자세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선 자에게 주시는 축복과 감사와 찬양과 두려움과 떨림과 사랑받음과 위로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유다왕국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알려진 유다의 왕 므낫세의 기도에도 코람데오가 나타납니다.[대하33:12] 므낫세가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에 끌려가 감옥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들어주신 것입니다.


    코람데오!


    2016년 이 봄날, 사순절의 5번째 주일, 고난주간을 앞두고 생각합니다.
    나의 삶을 지금까지 이끌어온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사랑?

    성공을 위한 투쟁?

    내 집 한칸 마련을 위한 투쟁?

    진실했었는가? 정직했는가? 최선을 다했는가? 사랑했는가?

    나는 과연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가?

    때로는 거울을 보며 명상하듯이 내 모습을 오래 바라보며 명상하듯이, 이 글자를 붙들고 명상하고 싶기도합니다.

    어느 분의 글을 인용합니다.


    “신의 실재는 내게 가장 거대한 벽이었다. 나는 그 진실을 코람 데오라는 말을 붙잡고 삶의 길을 통해 확인하고 싶다.”  


    성경에 나타난 28번의 코람데오 중 계시록에 마지막으로 두번 나타나는데 먼저 사데교회에 대한 경고에 나타납니다. 코람데오 정신이 실종된 사데교회에 대한 경고입니다!


    [계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현대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나는 네가 살아 있고 활동적이라는 평판과는 달리 실제로는 죽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계3: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coram Deo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계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코람 데오로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하나요?

    그런데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남은 바 사람들을, 그들의 가능성을, 그들의 아름다움을 살려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 원한다면  코람데오의 정신으로 살려한다면 죽어가는 내 옆의 사람들에게 힘을 넣어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경>

    [계3:2] Wake up! Strengthen 그러므로 깨어나거라. 너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완전히 숨지기 전에 힘을 북돋아 주어라.

    <한글 KJV>

    [계3:2] 깨어 있으라. 그리고 남아 있으나 죽어가는 것들에게 힘을 돋우어 주라. 

    <현대어>

    [계3:2] 이제 일어나라. 불과 얼마 남지 않은 자들에게 힘을 넣어 주어라. 그들은 거의 다 죽어가고 있다.

     성경을 읽어가다가 코람데오 Coram Deo,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코람 문도(coram Mundo)가 하나가 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코람데오 (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사람 앞에서

    코람 문도(Coram Mundo) 세상 앞에서!!


    이 세가지 개념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이며 하나이어야 한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있는 자는 곧 사람과 세상 앞에 바로 서야한다는 것! 그것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내는 곳, 이루어내야 하는 곳이 바로 사데교회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교회라는 것을 깊이 가르쳐주고 있는 본문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바로 우암교회 안에서 바로 코람데오 (Coram Deo)와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와 코람 문도(coram Mundo)가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어제 있었던 우암가족 성경공부 만남의 시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는 이 시간이 가장 좋습니다! 고백이 첫사랑 고백의 순간같이 설렙니다! 가슴을 울리고 한없이 울리고 글썽합니다! 이 순간처럼 가슴 뭉클한 순간이 없습니다. 이렇게 늘 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얘기하는 것이 역시 가장 재밌습니다. 간증이 가장 즐겁습니다.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눈물, 간증, 세월, 기도를 존중합니다! 가벼운 생애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영혼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합니다. 여러분의 생을 존중합니다. 사람을 알고 사귀게 되고 사랑하는 것의 기쁨과 감사가 진실로 큽니다! 

    여러분들의 간증 요약입니다! 


    ♥ 주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가까이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과의 친밀성을 기대하고 사모합니다! 사랑받기 원합니다. 내 인생 모두가 응답되게 해주세요!! 

    ♥ 하나님을 연인처럼 대했으면 좋겠습니다.

    ♥ 가장 힘들 때 함께 계셨던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 오00성도 50대 후반;남자 / " 그동안 가족들의 권유에도 긴 세월 혼자서 버티고 안나왔다. 전도초청 주일에 와서 찬송을 부르는데 느닷없이 눈물이 났다. 아내가 눈치채지 않도록 고개를 돌리고 울었다. 예배 후 교회 식당에서 점심먹자는 아내 말을 거부하고 집으로 가는데 왠지 마음이 너무 개운하고 후련했다. 이제는 교회에 가야겠다, 믿고 살아야겠다... 결심하고 주일마다 온다. 주일은 부활의 날이라고 배웠다. 과연 주일마다 부활을 느낀다.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느낌이다. 교회에 열심히 다녀야 되겠다고 생각한다.


    ♥ 교회에 열심히 다녀서 하나님께 사랑받는 예쁜이가 되겠습니다!(장00)

    ♥ 사랑받고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 어린 시절부터 우암교회를 다녔고 그동안 몇십년의 길고 긴 세월 속에서도 앞으로 나서지 않고 왠지  늘 뒷전에 있었다. 왜 그랬는지 스스로 생각해본다. 왜 그랬을까? 왜? 이젠 조금씩 달라지고 싶다.  사실 교회역사철을 보면서 깜짝 놀라는게 많습니다! 지금 조용히 계시는 분들이 불꽃처럼 일했던 기록에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왜 지금은 조용히 뒤에 계시는 것일까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무엇이 나를 방해합니까? 이겨내시고 불꽃같이 일하시다가 주님 만납시다!


    다른 분의 간증입니다.
    ♥ 사실 교회에 오면 뭔가 서먹했습니다. 제 성격이 내성적이라 그런지 오랫동안 교회가 적응되지 않고 많이 부담스러웠으나 이젠 마음이 열렸습니다. 도우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도우신 리더분들과 서로 진지하게, 진실하게, 같이 울고, 같이 붙잡고, 같이 기뻐하며 가겠습니다.


    ♥ 어느 교회나 많은 분들이 익숙해지고 적응하는데 힘들었다고 말합니다. 속히 익숙해지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어색하지 않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주인이 따로 없습니다. 몇십년 나오면 주인이 되겠습니까? 또 몇십년 나온다고 주인이 되는 것이긴 합니까? 지금 교회당 앞자리에 앉는 분이 주인입니다. 지금 웃고 맞이하시는 분이 주인입니다. 지금 먼저 인사하는 분이 주인입니다. 오늘 그러면 내가 주인입니다. 주인 어딨나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인입니다. 식당에 가면 주인들이 먼저 인사하고 어서 오라고 말하지 손님들이 인사합니까? 인사하고 웃으면 오늘 지금 나는 주인입니다. 주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젊은 학생; 상담 한번 해주지 않으시렵니까?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나서 식판을 들고 밥을 담았는데, 너무 많이 담아서 빼려는데, 이미 줄이 너무 길어서, 그냥 먹기로하고 가는데, 한 분(아줌마,권사,집사)이 저보고 집에 밥이 없느냐고 물으시는겁니다. 그때는 웃고 지나갔지만, 집에 가서 생각해보니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생각이 나고 기분이 점점 나빠지고 화가 납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A 그 아줌마집사님은 비꼬는 마음만 가득하고 교만하고 사랑이 없는 마음입니다. 오히려 형제님이 예수님의 긍휼한 마음으로 품고 기도하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분을 품으면 사탄에게 지는 겁니다. 즉 그 날의 예배에 실패하는 것이니 작은 일에 매이지 말고 당당하십시오...


    B 그 분(아줌마권사님,집사님)이 잠시 실수하신듯ㆍ사람은 누구나 실수합니다. 원래 사소한걸로 맘이 상하죠. 주님의 사랑으로 너그럽게 용납하길 바래요^^


    C 여러분들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예배 후의 예배, 식당에서의 멸치조림, 깍두기 국물 예배에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기분나쁜 것을 금방 잊을 수 있는 능력, 말을 참을 수 있는 능력, 덮어줄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 다른 분의 고백입니다! 

    ♥ 6개월! 사실 조금씩 나태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기회가 다시 새로워지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아, 소중한 고백! 우리가 점점, 조금씩 나태해지는 바로 그 순간을 지켜주기 바랍니다. 서로 도와주기 바랍니다.


    코람데오 Coram Deo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코람 문도(coram Mundo)












    σώμα(소마)와 σaρξ(사르크스)의 차이


  • σώμα(소마)와 σaρξ(사르크스)의 차이

  • 두 가지 용어가 종종 혼용해서 사용된다. 
    그러므로 크게 두드러지는 차이는 없다.  
    하지만 엄밀하게 구분하자면 

    σώμα(소마)는 영혼 정신 등과 대비되는 신체(身體)를 일컬을 때 사용한다. 

    σaρξ(사르크스)는 신체에서 뼈, 살, 피 등을 이야기할 때 ‘살’을 가리킨다.

  • 몸(소마 - σŵμα )과 육신(사르크스 - σάρξ )

    바울은 그의 영이 기운을 낸다든지 안심 한다고 말했을 때, 자신의 내적인 평안을 발견하였음을 의미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영(프뉴마 - πνεύμα)을 소유하는지 아니면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을 받음으로 소유하게 된 독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볼트만(Bultmann)은 인간이 구분되거나 분리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며, 몸 (소마–σώμα), 영(프뉴마), 그리고 혼(프쉬케 - ψυχὴ)은 인간 전체를 여러 방식으로 보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은 몸(소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바로 몸(소마)이다”라고 주장한다.

    인간, 그의 인격 전체는 소마로 지칭될 수 있다.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히 되게 하는 것은 나의 인격, 나 자신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 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관련 구절들을 출발점으로 삼는 불트만은 몸이란 “자신을 자신의 행위의 대상으로 삼거나 또는 자신을 어떤 상태의 주체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부장했다. 소마적인 존재는 표준적이며 고유한 존재양식으로 생각된다.

    소마는 인간존재의 덜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 본질적인 요소이다 혼 또는 영의 생명은 참되고 본질적인 생명이지만, 외적이며 우연적인 몸의 생명은 마치 인간의 참된 생명을 실현하는데 방해거리나 되는 것처럼 서로 대조되는 것이 아니다. 구속사역은 단순히 혼 또는 영의 구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몸의 구속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완전한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고안한 궁극적이며 완전한 삶의 양식은 소마적인 존재이다. 몸에 대해서 취하여야 할 태도를 가르친 바울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1. 몸은 비록 인간존재의 완전한 부분이지만 육의 몸은 부패하고 죽는 사망의 몸(롬7:24).

     2. 죄는 죽을 몸에 왕노릇 할 수 있기 때문에(롬6:31), 죄의 도구인 몸은 죄의 몸으로 불리울 수 있으며, 따라서 영이 거주하는 인간은 몸의 죄된 행실을 죽여야 한다(롬8:14)[본문 롬8:13의 사르크스를 우리말 개역성경에서는 육신(flesh)으로 번역하였다. 영어성경에서도 육신으로 번역한 경우가 많다. NIV에서는 죄의 본성(sinful nature)으로, GNB(TEV)에서는 인간본성(human nature)으로 번역하였다.]

      3. 몸은 굴복되어야 한다. 사람의 영적인 생활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훈련받아야 한다. 인간 존재의 최고 목적은 영의 영역에서 발견되어야 하며 따라서 몸은 영, 참된 자아의 종이 되어야 한다. 몸 그 자체는 참된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주인 행세를 할 수 없다. 몸이 훈련받아야 하는 것은 그것이 영적인 목적들을 좌절시키기 때문이다.

      4. 몸에 대한 자기 통제는 그것이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져야 한다(롬12:1). 그리스도인은 그의 몸 안에 성령이 내주(內住)하고 있음을 인정하여야 한다(고전6:19). 그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다(고전6:15).

      5. 몸 자체는 구원이 완성되는 날에 구속될 것이다(롬8:23). 육신(사르크스-σὰρξ)은 몸의 조직들이다. 육신은 흔히 몸을 구성하며 따라서 뼈와 피에 대조되는 조직들을 묘사 할 때 사용된다. 사르크스는 몸 자체이다. 자연적인 변화를 거치는 동안 부분은 전체를 지칭하게 되었고, 여러 구절에서 사르크스는 몸의 육적인 부분을 가리키기보다는 몸 전체의 동의어처럼 사용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몸으로 떠나 있다”고 말하든지(고전5:3), 아니면 “육신은 떠나 있다”(골2:5)라고 말할 수 있었다. 사르크스는 혈통과 관계를 맺은 인간이다. 구약의 용법에 따르면, 사르크스는 몸의 요소 또는 몸 자체를 지칭할 뿐만 아니라, 육으로 구성된 인간을 구체적으로 지칭할 때 사용된다. 이러한 용법에서 보면 사르크스는 특별히 인간적인 관계들,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묶어 두는 육신적인 가문과 자연적인 인연들을 지칭할 수 있다. 사르크스는 외적인 모습과 조건에서 본 인간이다.

    사르크스의 뜻은 인간의 육신적인 생명 너머로 확대되어 인간 존재에 있어서 불가분리적인 다른 요소들을 포함하게 되었다. “육체를 신뢰하는 것”(빌3:3)은 몸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외부 영역에 속하는 복합적인 모든 것들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의 유대적인 혈통, 그의 엄격한 종교교육, 유대 종교단체들 가운데서 뛰어난 그의 열심과 그의 탁월성 등을 포함한다. 사르크스의 윤리적 용법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육이 영과 대조되는 것처럼 인간은 악하며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육에 속한’ 자들과 ‘영에 속한’ 자들을 날카롭게 대조시킨다. 육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 하고 영에 있나니…”(롬8:9) 로마서 8:8절에 ‘육신에’ 라는 말은 9절에 의하면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 자, 즉 중생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킨다.




  •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 May God himself, the God of peace, sanctify you through and through. May your whole spirit, soul and body be kept blameless at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 평강의 하나님 - 이 문구는 바울 서신의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롬 15:33;16:20;빌4:9;고후 13:11;히 13:20). 바울이 하나님을 '평강'(*, 에이레네스)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과 자신 사이에 평화를 이룩하신 평화의 근원이시기 때문이었다(골 1:20).

    󰃨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 '온전히'의 헬라어 '홀로텔레이스'(*)는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됨을 가리킨다. 이러한 '성화'(sanctification)는 내주(內住)하는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4:8;롬 15:16).

    󰃨 영과 혼과 몸 - 인간의 보편적 구성 요소와 관련되는 본문은 소위 말하는 삼분설 또는 이분설 논쟁이 제기되는 구절이다. 우선 몸은 순수하게 물질적인 부분, 즉 육신을 가리킨다. 다만 여기서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영'(*, 프뉴마) 과'혼'(*, 프쉬케)의 차이점이다. (1) 삼분설. 그리스 계통의 교부들(Irenaeus,Chrysostom)은 영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인간의 이성적 부분, 즉 양심이나 의지와 관련되어 있는 것에 반해, 혼은 동물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될 수 있는 생명이나 감정, 감각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하였다. (2) 이분설. 성경에는 인간의 본성을 거의 대부분 혼과 몸(창 2: 7; 마 6:25), 영과 몸(전 12:7;고전 5:3, 5)으로 구분하여 이분법적인 분류법을 말함으로 혼과 영을 혼용하고 있다. 바울은 본절에서 인간의 본성을 영과 혼과 몸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것은 당시 그리스의 사고 방식에 젖어있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삼분법적인 표현을 사용했거나 또는 수사학적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서, 실상은 성도들의 전인격(全人格)을 가리킨 말이다. 이의견에 대해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동의한다(Morris, Bruce, Milligan).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For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active. Sharper than any double-edged sword, it penetrates even to dividing soul and spirit, joints and marrow; it judges the thoughts and attitudes of the heart.





  •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 '하나님의 말씀'은 앞에서 인용된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키고 있으나(Hewitt),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해진 하나님 말씀 전체를 가리킨다(Robertson, Morris).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라는 표현은 그 '말씀'이 '인격성'과 '역동성'을 지녀서 행위를 동반함을 암시한다. 즉 하나님에게 불순종한 이들에게는 경고와 심판을 행하게 되며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에게 약속된 말씀을 성취케 하는 말씀이다(Hewitt, Morris).

    󰃨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 하나님의 말씀은 출애굽 세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수신자들에게도 동일한 효력을 지닌 말씀으로서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에 따라 안식과 진노를 행한다(Trompf). 그 말씀은 '검'과 같아서 하나님의 음성에 계속 불순종할 때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거 역하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아말렉과 가나안인들의 '검'(*, 마카이란)에 패배(敗北)하여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민14:43-45).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심성에 내재하는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악독(롬1:29) 등의 온갖 죄악을 예리하게 심판하는 '검'이 된다(Hofius, Lane).

    󰃨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 '혼과 영'(*, 프쉬케스 카이 프뉴마토스), '관절과골수'(*, 하르몬 테 카이 뮈엘론)는 인간의 구조로 명명되는 '삼분법'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인간 정신의 전체적인 본성을 말하는 수사학적(修辭學的)인 표현이다(Bruce, Morris, Robertson). 한편 '찔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이이크누메노스'(*)는 '꿰뚫다'라는 의미로 인간의 영혼과 육을 분할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깊은 내면을 꿰뚫어 잠재된 의식까지 들춰내는 능력이 있음을 시사한다(Bruce, Robertson). 또한 '감찰하나니'의 헬라어 '크리티코스'(*)는 법정 용어로서 '판단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인격의 가장 깊은 곳까지 통찰할 수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순종 여부에 따라 안식과 진노를 행함을 시사한다(시95:11, Lane).





  • 성경에서 몸을 지칭하는 단어는 '소마, 사륵스'로 구분되어 사용되었다. 

    헬라어 '소마'(Soma)는 육체적 몸뿐만 아니라 인격적 구성체 등을 포함하는 의미로 쓰였다. 
    '사르크스'(Sarx)는 육체적 연약성, 영과 대립하는 죄성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몸, 육체, 육신’이라는 세 가지의 단어로 혼용되면서 몸을 지칭하는 ‘소마와 사륵스’의 각각 다른 의미를 구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어느 날 주일, '소마'(Soma)의 의미로 쓰인 대표적인 성경구절인 로마서 12장 1절을 ‘산 제물’(Living sacrifices)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들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롬 12:1).
    'Therefore, I urge you, brothers, in view of Gods mercy, to offer your bodies as living sacrifices, holy and pleasing to God -- this is your spiritual act of worship.'


    로마서 12장 1절에서 거룩한 산 제물(living sacrifices)로 드리라고 하는 '몸'은 우리의 영, 혼, 육을 모두 다 포함한다.

    신명기 6장 5절에서 말하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처럼 ‘나의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몸을 드린다는 것은 나의 전부를 드리는 것과 같다. 우리 인간은 나의 모든 것이 몸 안에 들어있고, 몸으로 존재하며 소통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기쁨과 감격을 표현할 때에도 몸을 사용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몸은 나의 육체, 육신, 껍데기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에 허락하신 삶을 살아가는 나, 그 자체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몸을 드리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할 영적 예배'라고 말한다. 우리의 몸이 영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 역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Soma)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한다.

    몸이 악하고 정신, 혼, 영 보다 못한 것이라면 어찌 감히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여기서 말하는 몸 역시 우리의 영혼육을 모두 포함한 '나'라는 존재 자체를 말한 것일테다.

    나의 관심사와 시간, 나의 애정과, 나의 생각까지, 나의 몸을 드린다는 것은 ‘나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단순히 육체, 껍데기, 썩어 없어질 것, 정신보다 못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그렇게 경히 여기지 않으셨다.

    그분은 직접 피조물을 만드셨고 보기에 좋다 하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의 모든 물질들을 인간에게 좋은 것이라 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몸으로 그것들을 감각하고 누리며 더욱 충만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

    태초에 지으신 의미에서 변질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의미로 되돌려야할 것이다(예술과 영혼 중).

    하나님이 지으신 몸에 대한 원래의 선한 의미를 이분법으로 나누어 비하할 수는 없다. 몸은 논의하기 껄끄러운 대상이 아니라 회복해야 할 대상이다.










  • 영생(永生, ETERNAL LIFE)




    영생(永生, ETERNAL LIFE)

    하나님과 더불어 온전하게 살아가는 것.





    요한복음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Simon Peter answered him, "Lord, to whom shall we go? You have the words of eternal life.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영생(조에. zōē)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 I.  생명.
    • II.  [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 1.  [반] θάνατος, 롬8:38, 고전3:22, 빌1:20, [때]
        • a.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눅16:25, 행8:33, 약4:14.
        • b.  ἐν τῇ ζ. ταύτῃ: 이생에, 고전15:19.
        • c.  τέλος ζωῆς: 생의 마지막, 히7:3.
        •  d. ζωὴ κ. πνοή: 생명과 숨, 행17:25.

        • e.  πνεῦμα ζωῆς: 생기, 계11:11.
        • f.  ψυχὴ ζωῆς; 살아있는 것, 계16:3. ㉠ [하늘의 몸으로 옷 입은 사람에 대하여] 고후5:4.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하여] 롬5:10, 고후4:10.
      • 2.  생의 도구, 생계.
    • III.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초자연적인 생명에 대하여]
      • 1.  하나님과 그리스도.
        • a.  [하나님에 대하여] 요5:26, 12:50, 요일5:20.
        • b. [그리스도에 대하여] 요1:4, 5:26, 행3:15등, 요일5:11.
      • 2.
        • a.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ἐν καινότητι ζωῆς περιπατεῖν: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 롬6:4. ㉡ ἀπηλλοτριωμένοι τ. ζωῆς τ. θεοῦ: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 엡4:18. ㉢ ἡ ζωὴ τ. ἀνθρώπων [사랑의 생명, 구원과 영광의 생명에 대하여] 요6:68, 행5:20, 고후4:12, 빌2:16, 딤후1:1,10등.
        • b.  [종말의 축복된 시기에 있을 생명에 대하여] ㉠ ἐν τῷ αἰῶνι τῷ ἐρχομένῳ ζ. αἰ: 내세에서의 영생, 마19:29등, 막10:30, 눅18:30. ㉡ ζ. ἐκ νεκρῶν: 죽은 상태로부터 벗 어난 사람의 생명, 롬11:15, 갈6:8, 딤전1:16등.
    • 관련 성경 /  생명(마 7:14), 이 세상의 삶(고전 15:19), 생기(계 11:11).



    • 생각하는 바가 영에 속한즉 영원한 생이니라. 

    • 그때 너희는 영생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에 있나니. 

    • 그리스도를 믿고 끝까지 견디는 것이 영생임. 

    • 영생을 가진 그가 부자니라. 

    • 의로운 자는 이 세상에서는 평화를, 장차 올 세상에서는 영생을 받으리라. 

    • 끝까지 계속하는 자들은 영생의 면류관을 쓰게 되리라. 

    •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죽은 자로서 만일 머물기를 허락 받았더라면 그것을 받아들였을 자들은 해의 왕국의 상속자가 되리라. 

    • 사람에게 불멸과 영생을 가져다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영광이니라. 

    •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영생을 주심.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영생에 대해 말할 때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로마서 6:23) 나오는 하나님의 선물을 말합니다. 이 선물은 죄의 자연스러운 결과인 “죽음”과는 대조적입니다.

    영생의 은사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1:25). 이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은 그것이 영원한 생명임을 나타냅니다. 이 생명은 끝이 없이 계속 이어지는 생명입니다.

    그러나 영생을 단순히 끝없는 세월의 연장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말로 쓰이는 일반적인 신약 단어는 아이오노스이며, 이는 질과 양을 아울러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실, 영생은 시간과 무관하기 때문에 실제로 “햇수”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영생은 시간 안에서만이 아니라 밖에서도 작동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영생은 기독교인들의 현재 경험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영생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데, 이는 영생이 신자들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발휘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영생은 지금 우리 손 안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3:36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라고 합니다. 신자에게 이 생명이 “있고”(현재시제)라고 했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이 동사는 헬라어에서도 현재형입니다). 요한복음 5:24과 요한복음 6:47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재형 구조가

    발견됩니다. 영생의 초점은 우리의 미래가 아니라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자리에 있습니다.

    성경은 영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합니다. 요한복음 17:3은 이런 관점에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영생”을 하나님과 성자에 대한 지식과 동일시합니다. 아들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해서만 택하신 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7:6; 14:9).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이 생명의 지식은 학문적인 지식뿐만이 아닌 참되고 인격적인 지식을 뜻합니다.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었던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거짓 교사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복음 7:23). 사도 바울은 주님을 아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으며 그 지식을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연결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립보서 3:10-11).

    새 예루살렘에서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은 것을 봅니다.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요한계시록 22:1-2). 에덴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거역해 생명 나무에게서 쫓겨났습니다(창세기 3:24).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가 생명 나무에 갈 수 있게 하십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이 생명 나무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요한복음 1:29).

    모든 죄인은 그리스도를 알고 영생을 얻도록 초청을 받았습니다.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22:17).

    자신이 영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먼저 우리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십시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주신 구세주를 영접하십시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로마서 10:13).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 복된 소식을 믿으십시오. 주 예수님을 당신의 구주로 믿으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구원받을 것입니다(사도행전 16:31; 로마서 10:9-10).

    요한은 간단하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일서 5:11-12).


    우리는 죽게 되는데 어떻게 영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줍니다(요한복음 3:16; 6:47; 요한일서 5:13). "영원"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영속적인, 영원한, 끝없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영속이라는 단어가 영생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일 것입니다. 
    영생은 일단 시작되면 영원토록 계속되는 생명을 뜻합니다. 
    이 말은 사람의 생명이 단순히 신체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참된 생명은 영적 생명이며, 신체적 생명이 끝나지만 영적 생명은 영원토록 지속됩니다. 
    즉 영속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생명 나무와 함께 동산에 두셔서 이들이 신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영원토록 기쁜 마음으로 살기를 바라셨지만, 이들은 범죄하여 자신과 이후의 모든 세대에 신체적, 영적 죽음을 초래했습니다(로마서 5:12–14).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동산에서 내보내시고 그룹을 두셔서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당신의 자비로 인해 인간이 영원토록 죄의 무게에 짓눌려 사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이 용납하실 수 있는 유일한 형벌은 영원한 형벌뿐입니다(마가복음 9:43-48). 
    그러나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완전한 제물로 보내셔서 인류가 죄에 대해 받을 형벌을 단번에 받게 하시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 나무로 가는 완전한 길을 제공해 주셨습니다(요한일서 5:12; 요한계시록 22:14).

    우리는 자신의 공로에 대해서는 죽고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주와 구원자로 영접해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즉시 거듭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나게 됩니다. 
    우리가 즉각적인 변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마음에는 중생이 일어나며(요한복음 3:6-7) 이제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는 결코 죽지 않으며 대신 우리 주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5:9-10). 
    이후 우리가 신체적으로 사망하면 우리의 영혼은 즉시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며, 나중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님께서는 우리 몸을 부활시켜 하늘에서 주님을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재림 때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몸은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되어 신체적 사망조차 경험하지 않을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51-5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성경의 마지막 책을 쓰라고 지시하셨고 그 책에서 우리는 다시 생명 나무에 대해 읽게 됩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요한계시록 2:7).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생명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믿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영생을 확신하고 안식하게 됩니다(베드로전서 1:3-5). 생명과 죽음과 중생을 포함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한 분, 참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십니다(요한복음 1:14).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상태가 보장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한복음 11:25). 
    당신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생을 가지고 있습니까?


    영생이란 무엇인가?

    1. ‘영생’이라는 말,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가요?

    ‘영생’이라고 하면 보통은 “죽은 후에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떠올립니다. 
    맞는 말이지만, 조금 부족한 설명이에요. 
    왜냐하면 성경은 영생을 단지 ‘시간적으로 영원한 삶’이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한 삶으로 설명하거든요. 
    중요한 건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사느냐입니다.

    2.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생’의 정의

    성경에서 영생에 대해 가장 명확하게 정의한 구절은 요한복음 17장 3절이에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영생이란 곧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삶, 그분과 교제하며 사는 삶을 말하는 거죠.

    3. 영생은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생은 죽은 후에나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영생이 이미 예수님을 믿는 자 안에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장 24절)

    예수님을 믿고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이미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생명, 곧 영생을 누리기 시작한 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은 죽음을 이긴 이후의 삶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삶이기도 해요.

    4. 영생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삶

    영생은 또한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전히 누릴 삶을 의미합니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때때로 흔들리고, 죄와 고통, 죽음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는 슬픔도, 고통도, 죽음도 없는 완전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1장 4절).

    그날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되고, 더 이상 믿음이 아니라 영광 가운데 그분과 함께 사는 영원한 삶, 그것이 바로 영생의 완성입니다.

    5. 영생은 ‘삶의 방향’을 바꾸는 힘

    영생이 단지 죽은 후에 누릴 어떤 상태라면, 오늘 우리의 삶과 큰 상관이 없을 수 있겠죠.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지금 우리의 삶을 바꾸는 능력입니다. 
    영생을 가진 사람은 이 땅의 것들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인생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 것 같아도, 사실은 가장 귀한 생명을 이미 소유한 자로 살아가는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마태복음 16장 26절)

    마무리 : 당신은 이미 영생의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은 죽은 뒤에만 시작되는 어떤 ‘미래’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시작되어, 영원까지 이어지는 생명의 이야기
    예요.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풍성한 삶, 사랑과 평안과 소망이 넘치는 삶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이란?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은 단순히 끝이 없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누리는 영원한 삶을 뜻합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로, 죽음 이후에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의미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생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영생은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

    영생은

    단지 죽음 후에 얻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

    영생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입니다.

    3. 현재와 미래의 영생

    영생은 믿음을 통해

    현재의 삶에서부터 시작되며,

    믿는 자들은 이미 영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 5:24).

    동시에, 영생은 미래에 완성될 것이며,

    죽음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요한계시록 21:3-4).

    결론적으로,

    성경에서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영원한 삶을 말하며,

    이는 현재와 미래 모두에서 이루어집니다.




    대한성서공회 영생 검색 결과 / 53구절

    구약 - 7구절 

    창세기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세기 21: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다니엘 4:34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다니엘 12:7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에 있는 자가 그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생하시는 자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반드시 한때 두때 반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까지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신약 - 46구절 

    마태복음 18: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태복음 18: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태복음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태복음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태복음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가복음 9: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14. [마가복음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5. [마가복음 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16. [누가복음 10: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누가복음 18:18]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누가복음 18:30]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19. [요한복음 3: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20.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21. [요한복음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22. [요한복음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23. [요한복음 4: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24.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26. [요한복음 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27. [요한복음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28. [요한복음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29. [요한복음 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30. [요한복음 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31. [요한복음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32. [요한복음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33. [요한복음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34. [요한복음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35. [요한복음 12: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36. [요한복음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7.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38. [사도행전 13: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39. [사도행전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0. [로마서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41. [로마서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42. [로마서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43.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디모데전서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모데전서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디도서 1: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디도서 3: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일서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한일서 5: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요한일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한일서 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유다서 1: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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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생(永生)(요한복음 17:2-3)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永生)이란 무엇이며? 
    또 어떠한 이가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영생은 지금도 우리가 경험하고 살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죽고 부활한 뒤에나 오는 것인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영생(永生)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그분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사람들은 영생하면, 대개 영원히 사는 것을 이야기해요. 영원히 사는 것! 오래 오래 사는 것! 이런 걸 인제 영생이라고 생각하는데, 부활과 영생을 함께 생각해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존재하는 것을, 영생으로 이해한다 말이에요.

    하지만, 이런 이해는 문제가 있죠. 어떤 문제인가 하면, 현재와 영생을 별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현재는, 나중에 주어질 영생을 위해서, 예수를 믿어주는 과정으로만 여기게 된다 말입니다. 그렇게 영생을 정의하면!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영생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잘못된 것으로 말하고 있어요.

    본문을 다시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해요.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영생은 영원히 죽지 않고 오래 오래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 안 한다 말입니다. 물론 신자(信者)는, 부활해서 영원히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원히 산다는 건, 신자에게만 주어지는 일이 아니에요. 세상 모든 자들이,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 보세요.

    (요한복음 5:29)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뭐 하러? 영원히 살러 나온다는 거예요. 영원히 살기 위해 부활하는 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죠? 요한복음 6장 28절 공부할 때 우리 공부했잖아요? 그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해 주시잖아요?

    그러면 악한 일은 뭐예요? 예수 안 믿는 거예요. 예수 안 믿는 자들은, 악인의, 심판의 부활로 나오고, 선한 일을 행한 자! 예수를 잘 믿은 자는, 이제 생명의 부활로 나온다는 것이죠. 영원히 살기 위해서! 아, 중요한 건, 선한 일을 한 사람! 악한 일을 한 사람! 둘 다 영원히 살기 위해 부활한다는 거예요. 사도행전 24장 15절 보세요.

    (사도행전 24:15)

    15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이 악인의 부활만 없어도, 진짜 한번 멋지게 살다가 가보겠는데…. 허허허 이 악인의 부활이 있어서, 맘대로 못살겠어요. 중요한 건 영원히 사는 게 아니라, ‘어떤 상태로 영원히 존재하느냐?’에, 있는 거예요. 부활은 부활이되, 생명의 부활이 있는 반면, 사망의 부활이 있어요. 때문에, 영생을 단지 시간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돼요.

    그렇다면 영생이라는 것이 도대체 뭔가? 여러분! 혹시 영생복락(永生福樂)이라는 말 아세요? 여러분 좋아하시는 말이잖아요? 영생복락! ‘영생이라는 것이 바로 복(福)이고 즐거움(樂)이다.’라는 뜻이거든요. 영생복락! 도대체 영생이 뭐기에, 신자에게 복이 된다는 것인가? 복이라는 건, ‘바라크’라는 건, 하나님께서 창조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창조에 목적에 맞게, 성실하게 존재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력! 그것을 ‘바라크, 복’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게, 하나님의 뜻대로 존재하고 살아가는 피조물들에게, 충만하게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복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창조주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존재의 상태를, 영생이라고 하는 거예요. 영생은 오래 사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신학에서는, 영생을, 다가올 세대의 생명! 혹은 신적 생명이라고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영생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정의를 해도 맞죠? 예, 영생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목적대로, 그분의 뜻에 맞게,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삶! 그걸 ‘영생’이라고 그래요.

    그 삶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우리가 그분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런 삶이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영생은, 하나님을 알고,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피조물 중, 도덕적 피조물인 천사들과 인간들 사이에서, 불순종의 반란이 일어났죠? 성경은 그것을 죄(罪)라고 불러요. ‘하마르티아!’

    죄는, 영생의 삶을 파괴해 버렸어요. 영생은, 순종을 전제하는 삶인데, 불순종이라는 죄가 들어오면서, 도덕적 피조물에게 주어진 그 영생이, 파괴된 거예요. 영생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삶을, 영생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께 불순종을 해버렸단 말입니다. 죄가 들어왔어요. 그래서 영생이, 도덕적 피조물에게 주어진 영생이 파괴가 된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와 허물로 죽었다!’라고 선언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건, 영생을 소실(消失)했다는 뜻이에요. 그게 ‘죽었다’예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대신에,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하나님마저도 자신의 종으로 삼아 사는, 자아숭배의 삶을 택해버렸기 때문에, 영생은 더 이상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거예요. 그게 바로 죽음입니다. 그러한 자아 숭배의 삶! 불순종의 삶을 사는 죽은 자들에게, 다시, 생명! 그 영생을 허락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다시 한 번 확인할게요. 영생은 뭐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창조의 목적대로 사는 게, 영생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영생을 다시 돌려주러 오셨다는 건 뭐예요? 두들겨 패서라도, 순종하는 자로 다시 만들어내겠다는 거예요. 뭐 대단하게 좋은 거 주러 온 거 아닙니다. 여러분이 기대하는 그런 좋은 거 주러 오신 게 아니라, 두들겨 패서라도, 순종하는 자로 다시 만들어, 영생을 누리게 해주시러 오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 그렇게 하나님의 철장(鐵杖)이, 예수의 철장이 자주 경험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성도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전부 도말하시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의 삶! 그 영생의 삶을 완벽하게 살아내시고는, 이 세상에서도, 그 영생의 삶을 완전히 살아내신 거예요. 그분은요! 살아내시고는, 그 삶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은혜의 선물로 전가(轉嫁)를 시켜주신 것이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전가시켜주시고 가신 거예요.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죄 없는 삶! 순종하는 이의 삶인,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 된 거예요. 요한복음 6장 51절 볼까요?

    (요한복음 6:51, 54)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54절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예수를 믿는 자들은 영생을 가졌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먹여 버리고 올라가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영생을 가졌어요. 거기까진 이해하시죠?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 영생을 얻은 자들이, 여전히 이 죄악의 세상에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일정기간을 살아내야 한다는 거예요. 그들은 이미 영적으로, 죄와 무관한 사람들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한 자들이 되어서,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육신의 몸과, 죄악의 세상의 영향 아래에서, 여기서 살아야 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불순종의 죄를 짓는단 말이에요. 이게 문제에요.

    영생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순종의 삶을 완벽하게 살아내는 걸, 영생이라고 하는데, 영생을 얻었다고 하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죄악의 육신을 입고, 죄악의 세상에서, 여전히 불순종의 삶을 산단 말입니다. 이걸 어떻게 이해를 하실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생을 산다는 거예요? 못산다는 거예요? 영생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계속 불순종의 죄를 지어요. 어떻게 해결해야 돼요? 이걸 어떻게 화해시켜야 되죠? 이제부터 우리가 고민을 좀 한번 해보자고요.

    영생은, 죄가 없는 상태고, 순종의 상태를 말해요. 영생은, 하나님의 성품이 투영된 신적 생명이며, 다가올 세대의 생명이에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영생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어요. 그리고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가셨대요.

    그런데 현실에서 우리는, 영생의 삶과는 전혀 다른, 불순종과 죄악의 삶을 살아요. 순종의 삶보다는 불순종의 삶을 훨씬 더 많이 살잖아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을 좇아 살려고 하기는커녕, 하나님을 종으로 부리며, 우리의 뜻에 그분의 뜻을 맞추려고 하죠. 우리의 뜻을, 그분이 안 쫓아 주면, 우리는 밥을 굶어서라도, 우리의 뜻을 그분에게 관철(貫徹)시키려고 그래요. 아니면, 막 천일 새벽기도도 해버려! 흐흐흐. 내 뜻에 맞춰야 되니까! 그걸 순종이라고 하나요? 그건 순종이 아니잖아요? 순종의 범주를 벗어난 것은, 영생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 성도에게 영생을 살라고, 영생을 취하라고 요구해요. 반복적으로 요구를 해요. 한 군데만 볼까요? 디모데전서 6장 12절.

    (디모데전서 6:12)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영생은 이미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하면서, 한 쪽에서는, 영생을 취하라고 강력하게 요구를 해요.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이를 악물고서라도, 순종의 삶을 살아 내라는 것입니까? 혀를 깨물면서라도, 죄를 멀리하라는 말인가요? 만일 그런 거라면, 어느 정도까지 살아내야, 영생을 취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땅에서, 완전 성화를 이룰 수 없어요. 그러니까 어느 정도, 커트라인이 있을 거 아니에요? 어느 정도까지 살아내어야, 우리가 영생을 취할 수 있는 거예요? 성경에 분명히, 하나님이 요구하는 커트라인이 나와요. 신명기 18장 13절 보세요.

    (신명기 18:13)

    1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이게 하나님의 커트라인입니다. 야고보서 2장 10절 볼까요?

    (야고보서 2:10)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그러니까 하나라도 어기면 안 돼요.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라도 불순종하면 안 돼요. 우리가 한 90살을 산다고 해보자고요. 요즘 명도 길어져서, 하여튼 (허허허허) 90살을 사는데, 90년 동안 죽기 바로 전날까지, 모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다가, 죽기 바로 직전에 정신이 너무 없어서, 하나를 어겼어요. 그러면 그 앞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모든 삶이, 다 헛거가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그렇게 완벽해요. 철저해요. 그러면 영생을 취하라는 말이, 과연, 완전한 순종과, 완전과 율법지킴을 향하여, 분투하며 애를 쓰라는 말일까요? 아니겠죠?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거처럼,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영생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이 땅에 계시하러 내려오시는, 예수님을 아는 거예요. 영생은, 그분이 요구하시는 것을 살아내는 게, 영생이 아니라, 그분을 아는 거예요. 그분이 얼마나 크신 분이며, 그분이 왜 내려오셨으며, 나는 왜 그분의 은혜만을 의지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를, 알아드리는 걸, 영생이라 그래요. (아멘.)

    쉬운 말로, 이 세상에서 죄 없는 자로, 순종한 자로, 영생을 살 수 있는 길은, 이렇게 불가능하고 무력한 나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내신 후에, 우리 성도들에게 무상으로 전가시켜 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성도가 이 땅에서, 영생을 사는 거예요. 그걸 존재 깊숙이 받아들여 버리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당신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라 칭한 곳이 또 있나요? 여기 말고! 지금 예수님이 당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어디 딴 데서 또 예수님이 또 이렇게 자기를 지칭하여, 예수 그리스도라고 자기 계시를 하신 적이 있어요? 여기 한 군데입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당신을 그리스도 메시아라고, 자기 계시를 하신 이유가 뭐겠어요? 영생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오심의 이유를 알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당신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라 칭하신 것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을 사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을 하신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 하나님 앞에, 자발적으로 자원하여 순종을 할 수 없어요.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 앞에서, 무한히 작은 나를 알아야,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살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거구나!’라는, 영생을 살 수 있는 거예요. 그걸 모르고는 절대 영생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는 거!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것을 영생이라고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영생은, 환경과 조건이 변하고, 그로 말미암아 행복과 평안이 오는 그런 것! 혹은 우리의 삶이 순결하게 업그레이드되어서, 경험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라, 불가능하고 무력한 자신의 삶을 폭로당하면서, 면목 없이 사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다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가 전부 사해졌다는 것을 믿는 것! 그리고 완전한 순종의 사람으로 하나님이 나를 여겨 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사는 삶을, 영생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뭔가 하나님 앞에서, 굉장히 훌륭한 자가 되어서, 그 하늘의 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선물 받아, 이 땅에서, 평안과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걸, 영생이라고 하지 않아요. 여러분이 얼마나 많이 고민하셨습니까? ‘나는 영생을 예수님으로부터 선물 받았다고 하는데, 왜 나는 내 삶 속에서, 영생을 이렇게 경험하지 못하며 살까?’ 얼마나 많이 고민했어요?

    영생은, 그렇게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 속에서 경험하며 사는 걸, 영생이라고 하지 않아요. 나는 여전히 이렇게 불순종의 삶을 삶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를 도말하고, 나에게 영생의 삶! 그 의로운 삶을 살아서, 무상으로 전가해줬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그 약속! 그 언약을, 그냥 내가 확 받아들여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이런 모양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나에게 영생을 주셨기 때문에, 나는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이 면목 없음 속에서 꼭 붙드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영생을 허락하신 나의 삶 속에, 여전히 이렇게 내가 고통스러워하고, 내가 외로워하고, 우울해 할 수밖에 없는, 이런 일들을 허락하셨음에도, 나는 영생을 사는 자로서, 이런 일이 나에게 꼭 필요했기 때문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거기에 그냥 순종해 버리는 거예요. 순응해 버리는 거예요. 받아들여 버리는 거예요. 그걸 영생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영생은, 이 땅에서 그렇게, 행복 속에서, 안식 속에서, 그렇게 편안하게 가는 걸, 영생이라고 하지 않아요. 이 세상에서의 영생은, 세상이 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영생은, 여러분에게 고난과 고통으로 올 수 있어요. 하나님나라에서, 모든 죄가 다 제거된 하나님나라에서는, 그 영생의 삶!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삶이, 진짜 완전한 행복의 삶으로, 우리에게 체감이 됩니다.

    그러나 이 땅은, 죄가 가득 차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 영생의 삶을 내어 놓을 때, 우리는 굉장히 힘들고, 어렵고, 고통을 겪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왜 나는 이렇게 영생의 삶을 경험하지 못할까? 영생의 삶을 체감하지 못할까?’ 그리로 가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냥 이렇게 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살아 계신 것 자체가, 영생을 살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철저한 자기부인 속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십자가 뒤로 꼭꼭 숨어 버리는 삶이, 바로 영생인 거예요. 우리는 천국에서, 이제 영원히 그렇게 사는 거예요. 하나님만 의지하며, 절대 타락할 수 없고, 타락하지도 않으며, 타락을 시도하지도 않는, 그냥 십자가만, 하나님의 은혜만 꼭 붙드는 그 삶을, 천국에서 살게 되는 거예요. 그 삶을 이 땅에서 훈련하고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그렇게 사셨잖아요? 하나님께 철저하게 순종했더니, 예수님의 삶이 고난과 수난과 십자가로 드러났잖아요? 여러분의 삶도, 그렇게 드러나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에게 안 주는 걸, 당신의 아들과 연합되어, 당신의 자녀로 양자가 된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뭘 그렇게 대단히 좋은 걸 허락하셨습니까? 이 땅에서? 안 줬습니다. 그냥 순종만 요구하셨어요. 여러분들에게도 하나님이 똑같은 걸 요구하세요. 여러분도 자녀이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도 이 땅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영생을 사는 이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철저한 자기 인식이 꼭 필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뭐 대단하게 이 세상에서 이루어 내려고 하지 마세요. 율법에 묶여서, 자신을 너무 비하(卑下)하지도 마세요. ‘왜 나는 아직도 이 모양이야?’ 예, 반성하는 건 좋아요. 그렇지만 ‘왜 나는 아직도 이 모양이야?’ 그 모양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영생을 거저 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꾸 예수를 아시란 말이에요. 예수를 배우시란 말이에요. 그게 영생을 사는 거라니깐요.

    왜 호세아 선지자가,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며 지켜내려 애를 썼던, 이스라엘에게,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외쳤겠습니까? 율법으로는 너희들! 절대 구원의 도달 못한다는 거예요. 율법을 목숨 걸고 지키는 자들에게,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 너희는 그거 못 지킨다니까! 여호와를 알아야 돼!’ 왜 그렇게 외쳤겠어요? 율법으로는, 제사로는, 우리가 영생에, 생명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목숨을 걸고 행위를 의존하던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를 알아라! 힘써 여호와를 알아라!’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율법의 성격이 그러하듯, 성경은 우리에게 지키라고 준 게 아닙니다. 그 속에서 예수의 필연성을, 십자가의 필연성을 깨달아 알라고 주신 거예요. 그 깨달음이 감사로 드러나게 되고, 그 감사가 우리를 바꾸는 거지, 성경이 요구하는 율법들을 우리가 지켜내라고 주신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율법주의자들은, 유대주의자들은, 그걸 지켜서 구원에 이르려고 했다니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성경에서 영생을 얻으려 하지 말고, 즉 그것 지켜서 영생에 이르려 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계시하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에게 나와야지! 그걸 지켜서 너희들이 구원의 이르려고 하면, 큰 오산이라고 이야기하신 거예요. 요한복음 5장 39절 보세요.

    (요한복음 5:39-40)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예수께 간다는 게 뭐죠? 예수의 공로! 예수의 은혜를 의지한다는 거예요. 예수의 은혜를 꼭 붙들어야 우리는 영생에 이를 수 있는데, 성경을 상고하고 묵상하고 연구하면서, 그걸 지켜서, 유대인들이 구원에, 영생에 이르려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건 안 된다는 거예요.

    성경은, 예수의 필연성을 가르치시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 거기에 적힌 것대로 살아내어서, 구원의 이르라고 주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몇 가지 비유를 들어서, 영생의 본질에 대해 설명을 해 주셨는데, 그 중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영생의 본질을 확인해 보고, 오늘 공부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곡해를 하는 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이웃사랑’으로 해석을 하는 거예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웃사랑에 대한 메시지가 아니라, ‘영생의 본질’에 대한 설명입니다. 누가복음 10장으로 한번 가보세요. 25절.

    (누가복음 10:25-29)

    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자, 잘 보세요.)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자,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물어요. 예수님이 왜 율법사를 등장시키는지,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율법에 능통한, 그 율법사에게, ‘율법에서는 뭐라고 하더냐?’라고 다시 물으셨어요. 그랬더니 율법사가, 훌륭하게도, 신명기 6장의 그 쉐마로, 그 율법을 잘 정리하고 있었어요. 율법이 요구하는 바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아주 잘 대답을 했어요.

    그랬더니 주님께서, ‘네 대답이 옳으니까, 가서 이를 행하라!’라고 이야기를 해요. 거기까지만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우리의 몫인 것처럼 보이죠? ‘그래, 그거 가서 해! 그러면 영생 얻을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 같잖아요? 끝까지 잘 보셔야 돼요.

    이 이야기에는, 커다란 반전이 있어요. 그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즉 자신은 충분히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물어요. 누가 내 이웃입니까? 누가 이웃인지 말만 해주면, 다 사랑해 버리고 말겠다는 그런 기세에요. 그죠?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이웃을 스스로 규정하고 있었어요. 일단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은 절대 이웃이 될 수 없어요. 개니까!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도, 절대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불결하고 순결하지 못한 자들이에요. 유대인들의 이웃은, 자기들과 같은 민족! 혹은 자기들의 종교인 유대교를 믿고, 자기 민족으로 편입이 된 사람들에 한해, 이웃을 삼았어요.

    그러니까 민족과 종교가 같고, 한 가지 뜻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그런 사람들만을, 이웃으로 규정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는 건 너무 쉬웠어요. 우리도 그렇잖아요? 그래서 율법사는 자신 있게, ‘누가 내 이웃입니까? 말만하세요. 내가 가서 죽도록 사랑해 버리겠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 사랑 누가 못해요?

    그때 주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서, 영생의 본질을 설명해 주는 거예요. 30절 이하를 한번 볼게요.

    (누가복음 10:30-37)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어떤 이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을 만치 맞았어요. 여기 ‘거반 죽은’이라고 번역이 된, ‘헤미따데스’라는 단어는, ‘거의 죽다. 완전히 기진하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그 강도만난 사람은, 숨만 겨우 쉬고 있는 상태! 거의 죽은 거예요. 완전히 자아 방어능력을 상실한 상태인 거예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당시에, 아주 유명한 강도의 출몰지역이었어요. 예루살렘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전! 이스라엘 성전이 있는 곳이에요. 율법의 메카죠, 그죠? 성전이 있는 곳이었고, 여리고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약 12,000명이 살고 있는, 성전 섬김이들의 집단 거주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노린 강도들이, 수시로 출몰을 해서,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이, 마차나 말 등에서 절대 내리는 일이 없었어요.

    그리고 도보로 다니는 사람들도, 무리를 지어서 다니거나, 길에서 멈추어서는 일이 없어, 바삐 오가던 그런 길이었어요? 그리고 수시로 강도들의 미끼가 길에 던져져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길에 넘어져 있는 사람들을 만져서는 안 된다는 게, 불문율처럼 지켜지던 그런 곳이었어요. 강도들의 일행이, 강도를 만나 신음하고 있는 여자나 노약자로 가장을 해서, 길거리에 누워있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래요.

    그래서 그들을 도와주러 잠깐 말에서 내리거나, 아니면 멈춰서면, 강도들이 와서 털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는 누가 신음을 하고 있어도, 거의 가짜니까, 그냥 도망가라!’ 이것이 불문율처럼 그들에게 있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길을 가던 사람들이, 길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을 보고서도, 그냥 바삐 지나가고 했던 거예요. 그러나 거기에 강도 만난 사람이 거의 죽어서, 누워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묻는 율법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라고 되물으세요. 다시 한 번,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묻는 율법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라고 물어요. 그러면 지금 예수님이 이 비유에서, 이 율법사를 누구로 비유하고 있는 거예요? 강도만난 자!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물었는데, ‘누가 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라고 되물으시잖아요? 그걸 잘 이해하셔야 돼요. 여러분!

    자금 예수님은, 율법으로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굳게 믿고, 그렇게 실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율법사에게, ‘네가 지금 누구를 사랑할 수 있다고? ‘누가 내 이웃입니까? 말만하세요. 내가 그냥 가서 확 사랑해 버릴게요.’라고,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너는 누구를 사랑하고 도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네가 바로 은혜와 긍휼을 입어야 할, 강도 만난 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가서 그를 사랑해라!’가 아니라, ‘네가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너는 예수에게 사랑을 받아야 되는, 은혜와 긍휼을 받아야 되는 존재인데, 너는 마치 모든 율법사들이 그러는 것처럼, 유대주의와 율법주의가 그러한 것처럼, 인본주의가 그러한 것처럼, 네가 마치 영생에 뭔가를 기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구나! 네가 영생에 본질이 뭔지를 뭔지나 알고나 있는 거냐?’라고 되물으시는 거예요. 그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인 것입니다.

    인본주의에 빠져서, 율법지킴을 구원의 방법으로 알고 있는 이들의 상태! 그게 강도 맞아 거반 죽은 자들의 상태라는 거예요.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상태에요. 그게! ‘죄와 허물로, 거반 죽어있는 너희들이, 도대체 뭘 할 수 있다고 나에게,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묻고 있느냐?’라고 묻는 거예요. 바로 우리 교회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무엇을 하여, 영생에 기여를 할 수 있어?’ 묻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강도 만난 자로 비유되고 있는 율법사는, 무엇을 강탈당한 상태일까? 그 강도 만난 자가,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율법주의! 유대주의! 인본주의에 빠져있는, 모든 죄인들을 상징하는 거라면, 그 강도 만난 자! 그 율법사는 무얼 강탈당한 거예요? 하나님을 빼앗긴 것입니다. 뱀이라는 강도에게, 마귀에게, 하나님을 빼앗긴 상태! 강도 맞은 상태!

    여러분, 사람들이 자꾸 마귀가 우리의 돈이나 건강을 강탈해 갈 거라고 생각을 해요. 마귀는 오히려, 우리 성도에게 그런 거 줘서, 하나님을 향한 관심을 끊게 만들지요. 그런 걸 강탈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달려가게 만들지 않아요. 마귀는 그런 거 강탈하지 않아요. 하나님을 강탈합니다. 오히려 다른 걸 주어서, 하나님을 강탈해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지금, 하나님을 강도당한 거예요.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야 하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가, 뱀이라는 강도의 속임수에 속아,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죽어있는 상태가, 바로 유대주의! 율법주의! 인본주의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강탈당한 채 죽어있는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이 뻗쳐요. 구약의 율법과 제사를 상징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강도 만나 거반 죽은 자를 보고도, 그냥 지나가요. 손도 못 대는 거예요. 그건 율법과 제사로는, 하나님을 잃고 거반 죽어 있는 상태인, 강도 만난 자!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자를, 절대 도울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제사장하고 레위인이 그냥 지나쳤다고 해서, 그들의 매정함을, 무정함을 나무라는 데에만, 집중하면 안 돼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성전으로 제사를 지내러 가는 길 아니면, 제사를 지내고 집으로 내려가는 길이었을 거예요. 그들이 하는 일이 그거니까!

    그리고 그 길은, 성전과 그들의 거주지를 연결하는 길이었잖아요? 그들은 절대 부정한 것을 만져서는 안 되는, 성전의 섬김이들이었고, 율법의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엉뚱한 걸 만지면 안 돼요. 율법을 잘 지켜야 되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나 마차에서 내리거나, 멈추어서 얼쩡거릴 수 없는 그런 위험한 길에 있었단 말이에요.

    뿐만 이니라, 그 강도만난 사람은, 강도들의 미끼일 가능성이 농후한 곳이에요. 만약에 우리가 그 길을 지나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절대 미련하게, 그리고 섣불리, 그 미끼일지도 모르는, 그 사람을 돕기 위해 나서면, 안 되는 거예요. 잘 이해하세요. 또!

    그런 상황에서, 그 길을 지나는 사람을 반응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는 건, 긍휼이라는 마음보다, 두려움이라는 마음이 더 커요. 그러한 상황에서는! 그래서 그 어떤 사람도, 그러한 상황 속에서, 쉽게 그렇게 강도만난 사람을 돕는, 반응과 행위를 행사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함부로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이, 겉으로는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사랑을 행하지 않는 그런 위선자들이었다라고, 이렇게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건, 거기에 초점이 있지 않아요.

    성경이 초점을 두는 곳은, 율법과 제사! 즉 행위는, 절대 강도 만난 자!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율법주의! 유대주의! 인본주의를 도와, 그들을 영생으로, 생명으로 끌어 낼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사 강도 만나 거반 죽어 있는 그 자를, 제사장과 레위인이, 율법과 제사가 못 도와주는 것입니다. 행위는, 절대 인간을, 영생으로, 구원으로 인도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웃사랑이라는 건, 인간의 행위에서, 생산되어져 나올 수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레위인 제사장이, 이웃사랑이라는 행위를 못 내어 놓는 거예요. 율법과 제사를 대표하는, 인본주의를 대표하는 그들이, 진정한 이웃사랑이라는 걸 못 내놓고,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한 자에게, 사마리아인이 다가와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유대 땅이에요. 유대 땅 중에서도, 율법의 핵심! 율법주의, 유대주의의 핵심인 곳이에요. 거기에 사마리아인이 등장해요. 사마리아인은, 유대 땅에서 개취급도 못 받았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사마리아 사람들은, 남 유다 사람들의 원수였어요. 오죽하면 유대인들은 너무나 장사가 안 돼서, 굶어 죽기 일보 직전에도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물건을 팔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러한 위험한 땅에, 율법주의의 이방인이자, 유대주의의 원수인, 사마리아인이 등장한 거예요. 유대주의와 율법주의의, 이방인이며 원수인, 사마리아인이 등장한 거예요. 유대주의와 율법주의와 인본주의의 이방인이며 원수인, 이가 누굴까요? 예수님 한 분입니다. 그분이 등장하는 거예요.

    세상이 개 취급도 안하는 말구유로 와서, 수난을 받다가 십자가에 죽어 버린 그런 나약한 예수! 나약한 메시아! 그런 이방인! 그런 세상의 원수가, 이 땅에 오셔서,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강도 맞아 하나님을 잃어 버려 거반 죽어있는, 그를 살려내는 거예요. 그게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영생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네가 지금 누구를 사랑하겠다고, 네가 사랑할 이웃을 나에게 가르쳐 달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네가 영생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나 있는 거야?’ 그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여러분! 지금 강도 만난 자가 누워있는 것은, 율법의 땅의 상징인 예루살렘과, 여리고를 잇는 유대 땅이에요. 그곳은 성전과 그 성전을 섬기는 제사장들의 거주지를 잇는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강도들의 땅이며, 원수들의 땅이에요. 사마리아인에게 있어서는! 사마리아인은 그곳에서 그 누구에게 붙들려도 죽어요. 강도에게 붙들려도 죽고, 유대인들에게 붙들려도 죽어요. 그 땅에, 자기 발로, 자발적으로 그가 온 것입니다. 그 율법의 땅! 강도들의 땅에, 그들과는 전혀 다른 이방인! 율법의 화신인 유대인들의 원수가, 사마리아인으로, 은혜를 들고, 긍휼을 들고, 등장을 한 거예요.

    자기들의 안위와 유익을 위해서는, 거반 죽어가는 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 형식적인 율법과 제사의 땅에, 진짜 선한 이방인이, 세상의 이방인이, 원수들의 땅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리고는 그 위험을 무릎 쓰고, 목숨을 걸고, 원수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자기를 원수로 여기는 그 강도 만나 거반 죽어간 그 자를, 목숨을 걸고 살려내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영생이며, 그게 바로 구원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시는 거예요.

    구원은, 죄인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이웃인 예수에 의해, 사랑을 받고, 섬김을 받아,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그 구원과 영생의 본질을 설명하는 거예요. 자신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믿는 인본주의의 땅! 죄인들의 땅! 율법의 땅에, 그들과는 전혀 다른 십자가의 삶! 은혜의 삶을 가지고, 원수인 강도 만난 자들을 구원하러 오신, 이 세상의 이방인인 선한 예수가, 바로, 그 사마리아인으로 비유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을 목숨 걸어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그건 요원한 일이에요. 우리는 우리의 선한 이웃으로 오신,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여, 면목 없는, 강도 만난 자의 모습으로, 영생으로 가야 하는 존재들인 거예요.

    그런데 평생을 인본주의라는 뱀의 아가리 속에서 살아온 죄인들은, 예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분이 나쁜 거예요.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자신의 영생에 자기도 뭔가를 기여하고 싶어 해요. 그런 이들에게 오직 은혜만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처럼 낮선 거예요. 미운 것입니다. 아니, 원수처럼 여겨질 때도 있어요. ‘네가 뭔데, 나를 죽은 자로 여기고, 나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그래?’ 기분 나쁜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만일 강도를 만나, 예루살렘 길에 쓰러져 있던 그 사람이, 조금의 힘이라고 남아 있었다면,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았을까요? 절대 안 받습니다. 죽어도 안 받아요. 사마리아인이기 때문에! 개에게 왜 도움을 받습니까? 조금의 힘이라도 남아 있으면,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도망갔을 거예요.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왜 받아요?

    그런데 거반 죽어서, 전혀 의식도 없는 상태예요. 그 상태에서 나는 완전히 무력하고 무기력해요. 나는 완전히 불가능한 존재예요. 그 상태가 되었을 때, 사마리아인이 붕대 붙이면, 가만히 붙이게 놔둬야 되고, ‘뒤집어!’ 그러면 뒤집어야 되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아직도 항복하지 않고 있는 성도들이, 바로 그 자리로 해체되어 가는 거예요. 그걸 자기부인이라 그래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할 때까지,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헤미따네스’ 거반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부인이에요.

    거반 죽어야, 예수님의 도움에 자기 몸을 내 맡긴다니깐요. 아니면, 예수님이 반창고 붙여주면, ‘왜 이걸 여기다 붙이냐?’고 지랄들을 떨고, 또 그런다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거반 죽여 버리는 거예요. 철장을 들고, 백마를 타고!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자로 이 땅에서 완성되어져야 돼요. 완전 성화가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는 그 영생! 온전한 순종의 삶인 영생을, 하늘에서 영원히 살아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은혜를 거부하고, 거기에 우리의 힘을 보태려고 하는 그런 시도! ‘나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될 거야?’라는 그 시도가, 얼마나 패역하고, 무서운 일인지를, 이 땅에서 배우고 가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성도는, 이 땅에서 그렇게 거반 죽어서, 이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의지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만을 의지하여, 자신을 내 맡기는 자로 지어져가는 거예요. 그러한 이들에게, 내 뜻! 내 꿈! 내 비전! 내 야망! 내 소원! 내 의견! 내 주장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그런 것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계속 우리를,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헤미따네스’ 거반 죽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은혜만 붙들라고! 이 세상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십자가라는 하늘의 삶의 원리를 들고 이 땅에 오신, 세상에 이방인이신 예수를 붙들라고, 우리를 거반 죽이는 거예요.

    왜? 죽은 자들이 죽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마치 산 자처럼, 강시처럼 통통 튀며 사냐는 거예요? 그 삶이 바로 하나님에 대하여 죽고, 세상에 대하여 산 삶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로, 티끌로 살아야, 진짜 하늘에 대하여 산 자! 영생을 소유한 자로 살게 되는 것이니까, 절대로 너희들은 나에게 항복해야 돼! 왜 자꾸 살아서 강시처럼 통통 튀고 있어? 죽어!’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이에요.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그냥 죽고 가는 거예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가는 거예요. 그거 거부하시면 안 되는 겁니다. 우리가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져주라고, 당해주라고, 섬겨주라고, 십자가를 지라고, 용서해 주라고 요구하시면서, 우리를 치유하고 계시는, 그 선한 사마리아인인, 예수의 말씀을 듣고도, ‘이 이방인이 왜 이렇게 낮선 나라말만 하고 있냐? 응 이 이방인이 왜 이렇게 낮선 나라말만 하고 있어?’ 그렇게 계속 거부하다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철장으로, 거반 죽이실 수밖에 없어요.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시키시는 예수님의 치료를, 순순히 받게 되는 거니깐요.

    예수님이 강도 만난 자에게 지금 하늘의 생명! 하나님을 선물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받기 위해서는, 내 안에 나가 자꾸 해체 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안 죽었어요. 이게! 그래서 자꾸 사마리아인으로 오신, 그렇게 십자가의 모습으로, 당해주라고, 약한 모습으로 살라고, 섬기라고, 나에게 오는 그 선한 사마리아인을, 거부해 버리는 거예요. 이 인본주의! 유대주의! 율법주의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완전히 죽은 상태! 거반 죽은 상태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덮쳐 버리는 거예요. 선한 사마리아인인 예수가 덮쳐 버리는 거예요. 그때에 우리에게, 온전한 하나님나라의 생명이 주어져요. 그래서 이 가시적인 우리의 인생 속에서, 우리가 그 영생을 온전히 받을 수 있는 자로, 지금 무장해제가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으셔야 돼요. 자꾸 죽으셔야 돼요. 그러나 그 삶이 힘들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반드시 그리로 우리를 끌고 가셔야 돼요. 영생 주셔야 되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하나님의 의해 순종하는 자로 끌려가는 상태! 그게 이 땅에서의 성도의 영생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지금 영생 잘 살고 계시는 거예요. 목매달아 죽지 마세요. 그거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입니다. ‘난 절대 용납 못 해! 난 당신이 하나님이라도, 이런 상황 나에게 허락한 당신! 절대 용납 못해!’ 콱 목매달아 죽어 버리는 거, 반항인 거예요.

    인정하세요. 받아드리세요. 순종하세요. 하나님께서 많이 주시면, 많이 주시는 상태에서 순종하세요. 많이 거두어 가셨으면, 그 상태에서, 순종하고 인정하세요. 그게 영생을 사는 거예요. 여러분! 마태복음 18장 8절 보세요. 마지막으로 한번 보죠.

    (마태복음 18:8-9)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것 이외의, 그 어떤 것을 의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다 잘라내시겠다는 거예요. 그게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팔! 다리! 눈! 다 뽑아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에 들어가는데 방해가 되는 거라면, 우리가 거기에 조금이라도 마음을 두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고, 그분께 온전히 순종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게 있다면, 그게 팔 다리라 할지라도 잘라버리고, 그 상태로 끌고 들어가겠다는 거예요. 하물며, 재산! 돈! 가족! 건강! 이런 것이 여러분과 하나님의 관계를 방해한다면, 하나님이 잘라버려야 됩니다. 그게 복인 거예요. 여러분!

    자,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이제! 예? 그러니까 예수를 힘써 배우세요. 하나님을 힘써 아세요.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티끌 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공로만을, 꼭 붙들어야 돼요. 그때 우리의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 우리를 변화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복음에 항복하세요. 그러면 행복합니다. 항복하면 행복해져요. 기도하겠습니다.




















    헤세드, 제바흐


    חֵסֵד 스트롱번호2617
    1.

    욕구

    2.

    열심

    3.

    인자함

    발음 [ chêçêd ]
    어원
    2616에서 유래
    구약 성경
    246회 사용
    • I.
      명사 욕구, 바람, 열정, 열의
      • 1.
        명사 열의, 열심, 열정, 사랑, 친절.
        • a.
          명사 [사람들 사이에] 인자함, 친절함, 은혜, 자비, 창21:23, 24:49, 39:21,47:29, 수2:14, 삼상10:8, 삼하3:8,9:1,7, 10:2, 스7:28, 욥6:14, 슥7:9.
        • b.
          명사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건, 사57:1.
        • c.
          명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은총, 자비, 호의, 창24:12, 출20:6, 신5:10, 삼하2:6, 15:20, 시5:8(7),36:6(5), 48:10(9).
        • d.
          명사 [주]복수 חֲסָדִים: [하나님의] 자비, 은총, 시89:2(1),50(49), 107:43, 사55:3
      • 2.
        명사 질투, 시기, 시샘, 비난, 질책, 잠14:34, 레20:17.

    참고 정보

    문법설명

    어미활용 חַסְדִּי, 복수 חֲסָדִיס, 복수 연계형 חַסְדֵי

    연관 단어

    • 문법설명
      어미활용 חַסְדִּי, 복수 חֲסָדִיס, 복수 연계형 חַסְדֵי
      관련 성경
      ☞인자(창19:19, 민14:18, 시18:50), 은혜(창20:13, 삼하3:8, 렘32:18), 인애(창47:29, 신7:9, 렘2:2), 은총(창32:10, 삼하9:1, 호2:19), 성실(왕상3:6), 긍휼(느1:5, 시85:10), 아름다움(사40:6). [동] 영화롭게 하다(잠14:34), 선대하다(수2:12, 삿1:24, 룻1:8), 은혜를 베풀다(룻2:20), 인자하다(대상16:34, 대하7:3,시59:10), 자비하다(대상16:41, 대하5:13), 선하다(대하32:32, 느13:14), 긍휼히 여기다(스9:9, 시59:17), 불쌍히 여기다(욥6:14).


    זֶבַח 스트롱번호2077
    1.

    살륙

    2.

    희생

    3.

    출10:25

    발음 [ zebach ]
    어원
    2076에서 유래
    구약 성경
    162회 사용
    • 1.
      명사, 남성 살륙, 도살된 동물의 육체, 제사, 창31:54, 겔39:17, 잠17:1
    • 2.
      명사, 남성 희생, 제사, 제물.
      • a.
        명사, 남성 [속죄나 성체의 의도를 지님] 출10:25, 레3:1, 4:10, 17:8, 민15:5.
      • b.
        명사, 남성 [중요하고 엄숙한 제사의 뜻을 지님]삼상1:21, 20:6,29.

    참고 정보

    문법설명

    어미활용 זִבְחִי, 복수 זְבָחִים, 복수 연계형 זְבָחוֹת ,זְבְחֵי[한 번만 사용됨, 호4:19]

    연관 단어

    • 문법설명
      어미활용 זִבְחִי, 복수 זְבָחִים, 복수 연계형 זְבָחוֹת ,זְבְחֵי[한 번만 사용됨, 호4:19]
      관련 성경
      ☞제사(창31:54, 출12:27, 민15:5), 희생(창46:1, 레3:1, 신12:11), 제물(레19:6, 신18:3), 제육(祭肉)(잠17:1), 잔치(겔39:17,19), 제사를 드림(삼상10:8).




    רַחוּם 스트롱번호7349
    1.

    인정 많은

    2.

    동정심이 많은

    3.

    신4:31

    발음 [ rachûwm ]
    어원
    7355에서 유래
    구약 성경
    13회 사용
    • 1.
      형용사, 남성 인정 많은, 동정심이 많은[하나님께만 사용됨], 신4:31, 시86:1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자비로운(출34:6, 시103:8, 욘4:2), 자비한(신4:31, 시78:38, 145:8), 긍휼히 여기는(느9:17). [부] 긍휼히(느9:31). [명] 자비(대하30:9), 진실(시86:15).
    רָחַם 스트롱번호7355
    1.

    사랑하다

    2.

    피엘형

    3.

    푸알형 ׃רֻחַם 자비를 얻다

    발음 [ râcham ]
    구약 성경
    47회 사용
    • 1.
      원형 사랑하다, 귀여워하다, 시18:2(1).
      • a.
        원형 피엘형 ,רִחַם 미완료형 יְרַחֵם, 부정사형 ׃רַחֵם측은히 여기다, 사랑하다, 출33:19, 신13:18(17), 시103:13, 사49:15.
      • b.
        원형 푸알형 ׃רֻחַם 자비를 얻다, 잠28:13, 호14:4(3).

    참고 정보

    문법설명

    미완료형 ׃יִרְחֹם

    연관 단어

    • 문법설명
      미완료형 ׃יִרְחֹם
      관련 성경
      ☞사랑하다(시18:1), 긍휼히 여기다(신13:17,왕하13:23, 사49:10), 자비하다(시116:5), 불쌍히 여기다(왕상8:50, 시103:13, 사27:11).[명] 자비(렘6:23, 애3:32), 긍휼(겔39:25, 합3:2), 로루하마(호1:8), 루하마(호2:1).


    고치소서(라파. râphâʼ)  רָפָא 스트롱번호 7495

    1. 수선하다.   2. 고치다.  3. 신 32:39  
    발음 [ râphâʼ ] 
    구약 성경  /  67회 사용

    • 1. 원형 수선하다
    • 2. 원형 고치다, 치료하다, 욥5:18, 사19:22,전3:3, [분사로] 의사, 창50:2, 대하16:12.
    • 관련 성경  / 고치다(시107:20, 사19:22, 겔34:4), 고침받다(사6:10), 치료하다(창20:17, 왕하8:29, 렘33:6), 고쳐주다(민12:13, 렘6:14, 8:11), 낫게 하다(왕하20:8), 싸매다(호6:1), 낫다(레13:18, 삼상6:3, 렘51:9), 완전하다(렘9:11),되살아나다(겔47:9), 완치되다(출21:19), 수축(修築)하다(왕상18:30). [명] 의원(창50:2),의사(렘8:22)


    구원하소서(야솨.  yâshaʽ) / יָשַׁע
    스트롱번호 3467

    1. 넓다.   2. 히필형 הוֹשִׁיעַ. 미완료형 יוֹשִׁיעַ
    3. 해방하다 
    발음 [ yâshaʽ ]

    구약 성경 / 205회 사용
    관련 성경 / ☞구원하다(민10:9, 삼하22:42, 렘17:14), 구원을 얻다(렘8:20, 삼하22:4, 렘4:14), 구하다(렘30:7), 돕다(삼하10:19, 대상19:12), 보복하다(삼상25:26,31), 건져내다(삿2:16), 이기게 하다(대상18:6), 보호하다(시36:6), 도와주다(신28:31). 
    [명] 구원(사45:17, 신32:29, 습3:17), 구원자(삿3:9, 왕하13:5, 시106:21).



    찬송 / 트힐라(tehillâh ) תְּהִלָּה 스트롱번호 8416

    1. 찬양.   2. 열광.  3. 찬양 받을 자
    발음 [ tehillâh ]
    어원  /  1984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7회 사용
    • 1.  명사, 여성 찬양, 시22:26(25), 48:11(10), 51:17(16),찬송곡, 찬송가, 시22:4, 66:2, 145:1
    • 2.  명사, 여성 찬양, 열광, 시9:15(14), 사42:8.
    • 3.  명사, 여성 찬양 받을 자, 신10:21, 렘17:14.
    • 관련 성경 /  찬송(신10:21, 대하20:22, 시22:3), 칭찬(습3:19,20), 찬양(느9:5), 영예(시78:4, 102:21),명예(렘13:11). 
      [동] 찬송하다(출15:11, 느12:46, 시111:10), 찬양하다(대상16:35, 시149:1), 송축하다(느9:5, 시34:1, 145:21), 칭찬받다(렘51:41).


    πειθώ 스트롱번호 3982

    1. 확신을 가지게 하다.  2. 설복하다. 3. 끌어들이다
    발음 [ pĕithō ]

    • 1.
      [현재완료, 과거완료 외의 능동태]
      • a.
        확신을 가지게 하다, 수긍시키다, 행18:4, 19:29.
      • b.
        설복하다, 호소하다, 애원하다, [나쁜 의미로] 감언으로 속이다, 그릇 인도하다, 고후5:11, 갈1:10.
      • c.
        끌어들이다, 기쁘게 하려고 애쓰다, 행12:20, 14:19, 갈1:10.
      • d.
        화해하게 하다, 만족시키다, 마28:14, 달래다, 요일3:19.
    • 2.
      [현재완료가 현재의 뜻을 가진다]
      • a.
        의뢰하다, 의지하다, 신뢰하다, 믿다, 눅11:22, 갈5:10, 빌1:14.
      • b.
        확신을 가지다, 확신하다, 롬2:19, 히13:18, 빌1:6.
    • 3.
      [수동완료형 이외의 수동태]
      • a.
        설복을 당하다, 확신을 가지다, 믿게 되다, 믿다, 행17:4.
      • b.
        복종하다, 따르다, 롬2:8, 갈3:1, 히13:17.
    • 4.
      [완료수동태 πέπεισμαι] 확신하다, 확실하다, 눅20:6, 롬8:38, 히6:9.

    참고 정보

    문법설명

    [기본형] 미완료 ἔπειθον, 미래 πε- ίσω, 제1부정과거 ἔπεισα, 명령 πεῖ- σον, 완료 πέποιθα, 과거완료 ἐπεποί- θειν, 미완료 중간태 또는 수동태 ἐ- πειθόμην, 완료수동태 πέπεισμαι, 제 1부정과거 ἐπείσθην, 미래 πεισθήσο- μαι

    연관 단어

    • 문법설명
      [기본형] 미완료 ἔπειθον, 미래 πε- ίσω, 제1부정과거 ἔπεισα, 명령 πεῖ- σον, 완료 πέποιθα, 과거완료 ἐπεποί- θειν, 미완료 중간태 또는 수동태 ἐ- πειθόμην, 완료수동태 πέπεισμαι, 제 1부정과거 ἐπείσθην, 미래 πεισθήσο- μαι 더보기
      관련 성경
      권하다(마27:20, 행13:43, 고후5:11), 신뢰 하다(마27:43, 빌1:14, 3:4), 믿다(눅11:22, 행26:26, 롬2:19), 인정하다(눅20:6), 따르다(행5:36,37, 롬2:8), 옳게 여기다(행5:40), 화목하다(행12:20), 권면하다(행18:4, 19:8), 권유하다(행19:26), 순종하다(히13:17), 확신하다(롬8:38, 고후2:3, 빌2:24), 의지하다(고후1:9, 히2:13).



    προσέρχομαι 스트롱번호 4334

    1. ~에게 오다.  2. 마 5:1.  3. 나아가다
    발음 [ prŏsĕrchŏmai ]

    어원 / 디포넌트. 미완료 προσηρ- χ όμην, 미래 προσελεύσομαι, 제2부정과거 προσῆλθον, 완료 προσελήλυ- θα, 4314와 2064에서 유래
    •  I.  ~에게 오다, 가다, 접근하다.
      •  1. [문자적으로] 마5:1, 눅23:52, 요12: 21, 행9:1.
      •  2. [비유적으로]
        •  a. 나아가다, 나아오다, 히4:16, 7:25, 벧전2:4.
        •  b. ~에 동의하다, ~에 종사하다, 딤전6:3.
    • 문법설명 / 중간태.
    • 관련 성경 /  나아오다(마4:3, 막14:45, 벧전2:4), 오다(마9:20, 눅7:14, 행28:9), 가다(마21:28, 눅23:52, 행22:26), 내려오다(마28:2), 나아가다(막1:31, 행8:29, 히7:25), 따르다(딤전6:3), 이르다(히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