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1-5
-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누가복음 6:41-42
티는 보라(991) βλέπω Storng number 991
들보는 깨달으라(2657) κατανοέω Storng number2657
Pronunciation [ katanŏĕō ]
Etymology / 미완료 κατενόουν, 제1부정과거 κατενόηασ, 2596과 3539에서 유래
티는 작은 것이고 들보는 큰 것이다.
남을 아주 정죄하는 그것은 벌써 큰 죄이다.
그 뿐 아니라 그가 남을 아주 정죄하기 좋아하는
것을 봄녀 그의 생활이면에도 여러가지 다른 죄과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업을 위하여 인물을 비판하여 혹은 채용 혹은
퇴직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아주 정죄하는 것은 죄이다.
헬라어의 ‘크리노’(비판하다, 판단하다)의 뜻은 ‘정죄하다’라는 의미를 동반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행위는 결국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여 잘잘못으로, ‘정죄’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평가하다 보면 결국 행위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사람됨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게 마련이고요. 그러나 사람을 정죄하고 평가하는 권한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까요. 1절의 “너희가 비판(‘판단’이라는 번역이 더 적실)을 받지 아니하려거든...”이라는 종속절은 사람으로부터의 판단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판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심판과 정죄를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티와 들보의 교훈
자기객관화. 1970년대에 발달심리학자인 존 플라벨(J. H. Flavell)이 창안한 용어로, 남의 지시 이전에 스스로 자기 생각· 평가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을 말한다. 상위인지, 초인지라고도 한다. 갈등 관계에서 이 능력이 발휘될 경우 반성, 사과, 화해 등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고, 메타인지가 전략적 사고와 합쳐 이상적으로 발휘된다면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다.
자기 성찰과도 연결된다.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이나 지식이나 말·행동 등에 대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게 맞는가 아닌가 스스로 검증을 거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내가 맞는 건가 하면서 스스로 의심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자신의 정신 상태, 곧 기억력이나 판단력이 정상인지를 판단하는 데에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술을 먹었을 때 자신의 발언과 행동이 혹시 잘못되지는 않을지 생각해 보는 사람이라면 뛰어난 지성을 발휘한 것이다.
이 능력이 부족할 경우 암기력과 무관하게 학습 능력에 관련하여 장애가 생길 수 있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판단했으므로 암기나 기억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자칫 잘못 실행하면 셀프 가스라이팅을 거쳐 올바르지 못한 가치관을 가질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일곱
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습니다.
1. 우리는 모든 사실을 다 알지는 못한다
정당한 비판을 위해서는 모든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제한된 사실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제한된 사실만 알고 있다면, 우리는 비판은 늘 불완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비판은 사실에 기초해야 하는데, 제한된 사실로 어떻게 올바른
비판을 할 수 있겠습니까?
2. 우리는 그 동기를 다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누군가를 비판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동기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나 말, 표정을 통해서 그 동기를 100%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동기란 내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기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비판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동기를 다 이해할 수 없는 만큼 우리는 비판을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3. 완전히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
인간의 판단은 항상 객관성과 주관성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판단이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각자의 판단은 늘 어느정도 주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의 판단처럼 다른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판단을 할 때에만 그것은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을 비판하고자 할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의 주관성이
개입된 것이라는 점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4. 상황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
어떤 사실이나 사건은 모두 상황맥락적입니다.
동일한 사실도 어떤 상황에서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유명한 비트겐슈타인의 예를 봅시다. 미장이가 벽돌을 쌓다가 조수에게 “벽돌!”
하고 외치면 그것은 “벽돌을 가져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만약 공사장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에게 “벽돌!”하고 외치면 그것은
“떨어지는 벽돌을 피하라”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쉽게 누군가를 비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5. 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
우리의 인식은 늘 제한적입니다.
제한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자 할 때 우리는 늘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지 못한 어떤 부분들이 있고 그것이 칭찬받아야 할 부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불쌍히 여겨야 할 부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이 정말 드러내기 힘든 장애를 가졌거나
남모르는 고통을 가졌다면, 우리의 비판은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6. 우리는 편견이 있으며 시야가 흐려질 수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편견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관성보다 훨씬 더 우리자신을 슬프게 하는 모습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비판하려고 하는 상대방에 대한 첫인상이 편견으로 작용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비판하려는 상대방에 대해서 주위 사람들이 평가를 내린 것이
편견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편견이 있는 한 우리의 평가는 사실에
근거한 평가가 될 수 없습니다. 이미 평가를 내려놓고 거기에 필요한 사실들만을
열거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7. 우리 자신은 불완전하며 일관성이 없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늘 불완전합니다. 특별히 일관성이 없습니다.
C S 루이스는 자신이 가르치던 옥스퍼드 대학원 학생이 일관성없는 태도를
가졌던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 학생은 저명정치인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떤 파티에서 그 정치인이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 칭찬하자, 그 다음부터는
그 정치인에 대해서 우호적인 시각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완전하며 일관성이 없는 것이 그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은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중에 아무도 비판하고자 하는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 유혹 속에서 쉽게 험담과 비판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비판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을 간단히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다면, 위에서 언급한 일곱가지 근거를 늘 생각하십시오.
비판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