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조에 ζωή, 푸쉬케 ψυχή, 사르크스 σάρξ)


육체적인 생명 / 사르크스(sarx) σάρξ, σαρκός, ἡ 스트롱번호  4561

1. 육체.  2. 인간이나 동물의 뼈를 덮고 있는 물질을 총칭.  3. 몸
발음 [ sarx ]
어원  / 4563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함
  • 1. 육체.
    • a. [문자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의 뼈를 덮고 있는 물질을 총칭, 살, 고전15:39, 계19:18, 눅24:39, 약5:3.
    • b. 몸, 신체, 행2:31, 2:26, 고전5:5, 고후7:1, 히9:13, 벧전3:21, 히10:20, 벧전3:18.
    • c. 육신, 혈육을 가진 인간, 마16:17, 24: 22, 막13:20, 눅3:6, 요17:2, 행2:17, 롬3:20, 고전1:29, 갈1:16, 2:16, 엡6:12, 벧전1:24.
    • d. 인간성, 세상적 혈통, 고전10:18, 롬4:1, 8:3, 히9:8, 11:14, 5:7, 12:9.
    • e. 유형성, 구체성, 육체적 제한성, 이 세상 생활, 고전7:28, 고후10:3, 갈2:20, 빌1:24.
    • f. 생의 외부적인면 [인간적 표준에 의하여], 외부적 환경, 고전1:26, 고후1:18.
    • g. [바울 사상에 있어서] 육신[육신은 죄를 의도하는 기관으로 육신이 있는 곳에는 죄가 있다, 즉 육신대로 살면 좋은 것이 없다], 롬7:18, 7:25, 갈5:13, 골2:23.
    • h. [성적 충동의 근원으로서] 육체, 요1:13.
  • 관련 성경  /  몸(마19:5, 막10:8), 육체(마24:22, 요8:15, 고후1:17), 육신(마26:41, 롬1:3, 딤전3:16), 살 (눅24:39, 요6:55,56), 육정(요1:13), 육(요3:6, 6:63, 고전15:50), 골육(롬11:14).

정신적 생명 / 푸쉬케(psüchē) ψ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 5590

1. 영혼.  2. 생명력. 3. 혼
발음 [ psüchē ]
어원  / 5594에서 유래
  • I. 영혼, 목숨, 생명:
    • 1.  [문자적으로]
      • a. [땅에서의 외면적이거나 육체적인 생에 대해서] 목숨, 생명력, 흙, 눅 12:20, 행2:27, 20:10, 계6:9, 20:4. [주] 세상의 목숨, 지상의 목숨, 마2:20, 막10:45, 빌2:30, 계12:11.
      • b. [사람의 내적 생활의 중심으로서의] 영혼, 혼, 마26:38, 막14:34, 눅12:19, 요12:27, 계18:14.
      • c. [지상의 생을 초월한 생의 중심이 되는] 영, 영혼, 마16:26, 막8:37, 고후1:23, 12:15, 약1:21, 벧전1:9.
    • 2.  [환유적으로] 목숨을 가진 것, 생물, 생명체, 고전15:45, 계16:3.
  • 관련 성경 /  목숨(마2:20, 막8:35, 롬11:3), 영혼(마10: 28, 눅12:20, 고후12:15), 마음(마11:29, 막14: 34, 행14:22), 생명(막3:4, 요12:25, 행20:10), 힘(막12:33), 뜻(행4:32), 인(행27:37), 영(고전15:45), 혼(살전5:23, 히4:12), 명(벧전3:20), 심령(벧후2:8), 사람(행7:14, 롬13:1).
영원한 생명 / 조에(zōē)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 I.  생명.
  • II. [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 1.  [반] θάνατος, 롬8:38, 고전3:22, 빌1:20, [때]
      • a.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눅16:25, 행8:33, 약4:14.
      • b. ἐν τῇ ζ. ταύτῃ: 이생에, 고전15:19.
      • c. τέλος ζωῆς: 생의 마지막, 히7:3.
      • d. ζωὴ κ. πνοή: 생명과 숨, 행17:25.
      • e. πνεῦμα ζωῆς: 생기, 계11:11.
      • f. ψυχὴ ζωῆς; 살아있는 것, 계16:3. ㉠ [하늘의 몸으로 옷 입은 사람에 대하여] 고후5:4.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하여] 롬5:10, 고후4:10.
    • 2. 생의 도구, 생계.
  • III.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초자연적인 생명에 대하여]
    • 1. 하나님과 그리스도.
      • a.  [하나님에 대하여] 요5:26, 12:50, 요일5:20.
      • b.  [그리스도에 대하여] 요1:4, 5:26, 행3:15등, 요일5:11.
    • 2. a.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ἐν καινότητι ζωῆς περιπατεῖν: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 롬6:4. ㉡ ἀπηλλοτριωμένοι τ. ζωῆς τ. θεοῦ: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 엡4:18. ㉢ ἡ ζωὴ τ. ἀνθρώπων [사랑의 생명, 구원과 영광의 생명에 대하여] 요6:68, 행5:20, 고후4:12, 빌2:16, 딤후1:1,10등.

      • b. [종말의 축복된 시기에 있을 생명에 대하여] ㉠ ἐν τῷ αἰῶνι τῷ ἐρχομένῳ ζ. αἰ: 내세에서의 영생, 마19:29등, 막10:30, 눅18:30. ㉡ ζ. ἐκ νεκρῶν: 죽은 상태로부터 벗 어난 사람의 생명, 롬11:15, 갈6:8, 딤전1:16등.
  • 관련 성경  /  생명(마 7:14), 이 세상의 삶(고전 15:19), 생기(계 11:11).


새 계명과 옛 계명(요 13:34, 요일 2:7-8, 요이 1:5) - 4구절


한글 개역 성경에서 "새 계명"이란 구절을 대한성서공회 인터넷 검색창에서 검색한 결과 4구절을 소개합니다.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A new command I give you: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so you must love one another.

엔톨렌 카이넨 디도미 휘민 히나 아가파테 알렐루스 카도스 에가페사 휘마스 히나 카이 휘메이스 아가파테 알렐루스
εντολην καινην διδωμι υμιν ινα αγαπατε αλληλους καθως ηγαπησα υμας ινα και υμεις αγαπατε αλληλους  

새 계명(A new command. 엔톨렌 카이넨. εντολην καινην)

* 새(2537) 카이노스() καινός, ἡ, όν 

1. 새로운.  2. 쓰지 않은. 3. 알려지지 않은
발음 [ kain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 1. 새로운.
    • a. 쓰지 않은, 써보지 않은, 마9:17, 막2:22, 눅5:38.
    • b. [전에는 없었던 이라는 뜻으로] 알려지지 않은, 낯설은, 놀라운, 막1:27, 요13:34, 행17:19, 계2:17.
    • c. [옛 이나 낡은 것의 반대] 마26:28, 막14:24, 눅22:20, 고전11:25, 고후5:17, 갈6:15, 엡4:24, 벧후3:13, 계21:1.

  • 관련 성경 /  새(마9:17, 눅5:36, 계2:17, 마13:52, 막2:21, 고후5:17), 새로운(고후5:17, 계21:5), 새로 되는(행17:21).



* 계명(1785) 엔토래() ἐντολή, ῆς, ἡ 

1. 계명.  2. 요 11:57.  3. 눅 23:56
발음 [ ĕntŏlē ]
어원  / 1781에서 유래
  • 1.  계명, 명령.
    • a.  [사람의] 요11:57.
    • b.  [하나님의] 눅23:56, 롬7:8, 고전14: 37, 엡6:2, 딤전6:14, 벧후2:21.
  • 관련 성경  /  계명(마5:19, 막7:8, 눅1:6), 명(눅15:29), 명령(막10:5, 요11:57, 딤전6:14), 명하신 것 (벧후3:2), 말씀(마15:6).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새 계명"이란 말에 대하여 우리가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1. "새 계명"이란 명칭의 이유, 창조 질서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천하만민을 한 혈맥으로 지으셨다고 하였는데(행 17:26),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남들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될 근거를 성립시켰다.

그러므로 구약에도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계명이 있다(레 19:18).
구약의 계명도 사랑 중심의 것이다(롬 13:8-10).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은 독특한 동기들을 제공한다.

종말관적 동기.
그것은, "사랑하라"는 계명이면서도 구약의 예언적인 것이 성취된 종류이다.
그것이야말로 종말관적인 것이다(요일 2:8).
예수님의 보혈로 이루신 속죄를 믿는 자들은, 그가 우리를 사랑하심 같이(34절 하반), 다른 신자들을 위하여 희생하며, 필요하면 그들을 위하여 죽을 처지에 있다.

영원한 기업의 동기.
같은 혈맥에 속한 자들 중에서(행 17:26)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마침내 영원히 나누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하여 구원 받은 형제들은 영원히 나누이지 않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 한 자리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서로끼리 위하여 희생할 처지에 있다.

2. 새 계명을 지키는 방법.
그것은 물론 위에 관설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34절 하반에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그는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시는 것으로써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것이 바로 13장의 제목이 되어 있으니, 곧바로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실이다.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지극한 사랑이라고, 1절은 말하고 있다.
그가 그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겸손이지만(겸손도 사랑임 - 고전 13:4), 그가 그들의 죄를 씻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10-11).
그는, 희생의 정신으로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대속의 희생은 될 수 없으나, 남들의 짐을 자신이 걸머지게 되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그것은 큰 사랑이다(갈 6:2).
우리가 이 진리를 이론으로 배우면서도 실제로 남들을 위해 희생할 줄은 모른다.
우리가 남들에게 대하여 이렇게 무관심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가?
내가 계명을 지켜야만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 나 자신이 머물게 됨을 모르기 때문임.
요 15:10에 말하기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고 하였다.
내가 남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일을 해 보지 않기 때문임. 자식을 기르노라고 온갖 희생을 한 어머니는, 그 기른 자식을 잊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그 자식을 위하여 희생한다.
그러나 어머니를 위하여 희생해 본 일이 없는 그 자식은, 어머니를 쉽게 잊어 버린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사랑하려면 먼저 그를 위한 희생으로 시작해야 된다.
천국 운동의 필요성을 뜨겁게 느끼지 못한 까닭임. 신자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마치, 양 몇 마리가 많은 이리들 가운데 있음과 같고, 몇 백만 군대에게 포위된 것과도 같다.
이 세상엔 불신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가?
우리는 그 세력을 복음으로 이겨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서로 시기하거나 험담하지 말고 서로 아끼고 도와 주어야 된다.
신자가 영원한 나라를 기억하지 못한 까닭.
그리스도께서도 그 백성을 그렇게 사랑하시게 된 동기가 그의 가실 영광의 나라를 생각하심에 있었다(1,3).
32-34절의 문맥도 이 내용을 보여준다.
곧, 그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영광(내세에 들어가심)을 받으시게 될 것을 염두에 두시고(32 절) 이 새 계명을 주셨다.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자는, 이 세상의 것은 그 무엇이든지 초개와 같이 생각하고 희생한다.
한 번은, 구세군 사관들 109명이 아일란드의 황후(Empress of Ireland)란 배를 타고 가다가 파선되어 다 물에 빠졌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함께 빠진 자들의 구명대(救命袋) 없음을 보고 자기들의 것을 벗어 주면서, "나는 당신보다 잘 죽을 수 있다"라고 하면서 희생하였다.
그들은 내세를 확신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죽기까지 사랑을 베풀었다.
내가 남을 위하여 희생할 의용이 끝까지 생기지 않으면, 한 가지는 해야 됨.
그것은, 내가 남들을 위하여 죽기까지라도 희생할 책임감은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임감을 가진 자는 그대로 행치 못한 처지에도 극도의 겸손을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3.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신 목적. 예수님의 새 계명은 모세의 10계명을 폐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와 그의 사도들은, 모세의 10계명을 그대로 세워 나가셨다(마 22:37-40; 롬 13:8-10).
그는 진리이시니,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계시된 구약의 계명들을 폐지하실 리가 없다.
하나님의 계명은 선(善) 자체이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곧, 선은 피조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본질적 의지이다.
종교와 도덕(선과 관련된 것)은, 서로 달라도 서로 독립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함께,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된 방면이다.
하나님의 의지 자체인 선의 표현 곧, 계명은 어느 시대의 것이든지 페지되지 않는다.
모세의 율법 중 유대인들만을 위한 제도들은 신약 시대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인류 전체를 위한 도덕적인 십계명은 폐지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십계명 중 제 4 계명에, 쉬라고 한 것은 보편적 도덕 요소이다. 쉬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을 위한 것이며, 또한 사람과 집승의 피곤과 쇠약을 막는 자비를 위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 계명은 창조 질서에 속한 선한 제도이다. 곧, 이것은 모세 이전에 온 인류를 위하여 제정된 것이었다. 다만 안식일을 지키는데 관계된 벌칠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므로 변동되었다. 구약 시대에 안식일을 범한 자를 죽인 것은, 신정 국가(神政國家)의 시대, 곧, 정교 일체(政敎一體) 새대에 속한 것이었다. 안식일과 날자 순서도 본질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신약 시대에 그 날자가 변한 것으로 보아서 알 수 있다. 구약 시대에는 제 7일(토요일)이었던 것이, 신약 시대에는 7일 중 첫날(주일)로 변경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된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창조(創造)를 기념했으나, 기독자는 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을 기념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여기 이른바,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인도주의(人道主義)에 속하는 사랑이 아니고 주님을 믿으며 사랑하는 일의 열매이다.
모든 사람들(세상)이 이 사랑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를 실별한다는 것은, 두 가지 내용을 포함한 말씀이다.
1. 예수님의 제자된 표가 사랑이라는 말과 같고,
2. 또한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불신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게 된다는 뜻도 있다. 17:21-23 참조



요한일서 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Dear friends, I am not writing you a new command but an old one, which you have had since the beginning. This old command is the message you have heard.

아가페토이 우크 엔톨렌 카이넨 그라포 휘민 알 엔톨렌 팔라이안 헨 에이케테 앞 아르케스 헤 엔톨레 헤 팔라이아 에스틴 호 로고스 혼 에쿠사테.
αδελφοι ουκ εντολην καινην γραφω υμιν αλλ εντολην παλαιαν ην ειχετε απ αρχης η εντολη η παλαια εστιν ο λογος ον ηκουσατε απ αρχης

사랑하는 자들아.
- 이것은 요한이 수신자들을 부를 때 즐겨 사용하는 호칭으로 새로은 단락이 시작될 때 자주 나타난다. 요한은 이 호칭을 사용하여 두 가지를 암시하고 있다. (1) 하나님 안에 내주하여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삶에는 사랑이 드러나야 함을 암시한다. (2)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고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증거로 사랑을 제시함으로써 도덕폐기론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공격하고자 한다.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 요한은 상호 보완적인 본문의 두 개의 절을 이용해서 이제부터 언급할 '사랑의 계명'이 수신자들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라 잘 알려진 계명임을 밝히고 있다.
즉 '새 계명...이 아니라'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은 동일한 내용을 가리킨다.
여기서 '처음부터 가진'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롬 2:14; 13:8-10) 동시에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사하는 자들이 먼저 갖추어야 할 것임을 암시한다(엡 5:2; 약 2:8; 벧전 2:17).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
본문에서 '계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헤 안토레'(η εντολη)는 단수이다.
'엔토레'가 단수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옛 계명이 의미하는 '사랑의 계명'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완성한 계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십계명을 하나의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고 계신다(마 22:37-39).
한편 '들은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사테'(ηκουσατε)는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는 사랑의 계명이 이미 선포되었으며 수신자들이 사랑의 계명에 대해 과거에 들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사랑의 계명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요 13:34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임을 암시한다.
요한의 수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부터 예수의 가르침을 들었을 것이며 따라서 사랑의 계명은 수신자들에게 결코 생소하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부터 알고 있었던 익숙한 계명이었다.



새 계명과 옛 계명(New command & Old command)






요한일서 2: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요한이서 1: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예배와 예식




기독교에서 예배와 예식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한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최우선적인 종교행위로서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성도들이 그들의 신앙고백을 기초로 기도 찬송 설교 헌금 등 여러 가지 순서를 진행하는 것인데 대해, 예식은 어떤 특별한 인간관계에서 행해지는 한 가지 의식인 점에서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에서는 예배는 그 어떤 행사보다도 최우선적인 것이므로 그들의 모든 행사에 직접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으므로 이 두 가지를 확연히 구별할 수 없는 점에서 그 용어 사용도 애매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어떤 기독교인이 저서를 출판하여 그 축하행사를 하는데 그 순서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기도도 있고, 찬송가도 부르고, 목사의 설교도 있고, 마지막에 축도도 있으니 이는 충분히 하나의 예배인 데도 ‘출판 감사 예식’이라고 하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물론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의 경우에는 약혼식이나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을 행할 때, 무종교인들로서는 순전한 해당 행사에 관한 의식만을 행하게 되겠지만, 그 행사가 특정 종교인을 위한 것일 때는 그의 종교적인 절차를 따라 할 수도 있는 것은 물론이다.

예컨대 불교인의 경우 중요한 의식을 행할 때는 예불(禮佛) 절차를 포함하는 것은 물론이다.

우리가 여기서 알 것은 종교인에게 있어서는 종교적인 요소는 다른 모든 행사에 관련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의 경우에는 어떤 기념식이나, 축하식(혹은 축하연)이나, 혼례나, 상례나, 모든 행사를 하나님(성삼위) 앞에서 행하는 것이므로, 그 절차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도하고, 영광을 돌리는 등의 순서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신학교에서는 한 시간의 강의를 하는 데도 시작하는 시간에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의 통례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결혼식, 약혼식, 장례식, 졸업식, 취임식, 생일 축하, 고희연, 승진 감사 또는 축하, 출판 감사 또는 축하행사, 수상(受賞) 감사 등, 어떤 특정인을 위한 행사를 사람을 중심으로 하니 순전한 예배가 아니므로 ‘예식’으로 해야 하고 ‘예배’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견지에서는 도무지 성립될 수 없는 주장인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기독교인이면서 모든 행사를 하나님 본위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인간본위로, 인본주의적으로 생각하는, 비신앙적인 사고가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인 경우 그 실제(기도, 찬송, 설교, 축도 등의 절차) 대로 ‘결혼예배’ ‘졸업예배’ ‘취임 감사예배’ ‘수상감사예배’ 등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얼마나 더 신앙적인가?
반대로 그 행사 절차에 기도, 찬송, 설교, 축도 등의 순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행사 명칭을 ‘개교 감사예식’ ‘수상감사예식’ ‘취임감사예식’ ‘생일 축하예식’ 등으로 부를 때에 우리의 신앙과 언어감각에 얼마나 어색한 것인가?

미국의 프린스턴신학교 한국인 졸업생이 교내 Miller Chaple 에서 결혼식을 하는데 ‘결혼예배’(Wedding Service)라고 한 것은 물론, 그 순서 중에 프린스턴신학교 총장이 집례하는 성찬예식까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에서 예배는 모든 일에 우선하는 행사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어떤 행사를 하든지(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개인의 인간적인 차원의 행사로보다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되어진 일로 생각하여 그것을 ‘예배’의 범주 안에 넣어, 그 행사의 명칭도 하나님 본위로 ‘예배’라는 말을 쓰는 것이 얼마나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인가?

영어에서 예배를 ‘worship,’ ‘service’ 또는 ‘worship service’라고 하는 것이나, 독일어에서 ‘die Andacht’ 외에 ‘Gottesdienst’(하나님 섬김)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일면을 나타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멘의 신앙



아멘의 신앙

אָמֵן 스트롱번호 543

1. 확고한. 2. 참으로
발음 [ ’âmên ]
어원  / 53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0회 사용
  • 1. 형용사 확고한, 성실한[비유적으로 사용될 경우].
  • 2. 부사 참으로, 진실로.
  • 3.부사 아멘, 렘 28:6, 시 41:14(13).
  관련 성경 ☞아멘(민 5:22, 왕상 1:36, 렘 11:5),


ἀμήν 스트롱번호 281

1. 굳건한.  2. 고전 14:16. 3. 마 5:18
발음 [ amēn ]
어원  / 히브리어 543에서 유래
  • 1.  ‘굳건한’, ‘믿을 수 있는’의 뜻: 그렇게 되소서, 진실로, 아멘.
    • a.  [예배의식의 마지막에 회중이 말하는 예전 형식] 고전14:16, 계5:14.
    • b.  [예수께만 사용되며 λέγω ‘언제’와 함께 쓰여 엄숙한 선언을 시작할 때 쓰임] 진실로, 마5:18, 6:2,5,16, 8:10.
    • c. [정관사 τὸ가 붙어 ναί와 함께]: διὸκαί δι᾿ αὐτοῦ τὸ ἀ. τῷ θεῷ: 그러므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아멘을 부른다, 고후1:20.
    • d. [정관사 ὁ가 붙는 경우] 그리스도께 사용되어 그리스도를 지칭함, 계3:14.
  • 관련 성경
    진실로(눅 4:24), 아멘(계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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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홀리넷(Holynet)에서 '아멘'을 검색한 결과
구약에서 23구절, 신약에서 27구절
성경 전체에서 아멘이란 용어가 사용된 구절은 모두 50구절이라고 합니다.

아멘 할머니 예화

목사의 설교에 '아멘'이 있으면 설교하는 목사에 힘이 된다.
'아멘'은 목사에게 영적비타민이다.
설교하는 목사도, 말씀을 듣는 성도들에게도 '아멘'은 은혜의 자리로, 영적인 하늘의 힘을 느끼게 한다. 주일예배를 위해 최선을 다해 말씀을 준비하고 설교를 시작한다.
말씀과 관계없이 특별히 '아멘'을 자주, 많이 하시는 할머니가 있었다.
나도, 성도들도 그분을 '아멘 할머니'라 불렀다.

'아멘'하면 아니 되는 때에도 '아멘'을 하여 성도들을 웃게 하고 설교 분위기를 흩트러 놓기도 했다.
그러나 아멘 할머니의 '아멘' 소리가 모두에게 '아멘'하게 하는 은혜를 줄때가 더 많았다.

성전건축 기공을 앞두고 김옥경 권사가 기증한 1,500평 귤 밭에 귤나무를 뽑고 울퉁불퉁한 귤 밭에 천막을 치고 정기적으로 남ㆍ녀 선교회 별로 기도를 했다.
목사인 나도 그 누구보다 간절히 기도했다.
드디어 2000년 10월22일 기공예배를 드렸다.
기공예배를 드리고 교회에 어려운 일이 생겼다.
교회에 사표를 쓰고 영락교회 출신이었던 나는 영락기도원에 올라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다.
"하나님! 어찌해야 됩니까? 이 종에게 길을 보여 주시옵소서!"

어느 날 전도사가 전화를 하였다. "목사님! 빨리 내려 오셔야겠습니다. 아멘 할머니가 교통사고로 천국 가셨습니다"하는 것이었다. "교회 사표 냈으니 전도사님이 장례를 치르세요"라고 하니 "아닙니다. 목사님이 꼭 장례를 인도하셔야 합니다. 이유는 내려오시면 말씀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내려와 아멘 할머니의 천국환송예배를 드리고 아멘 할머니의 돌아가신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도 없이 가난하게 홀로 살며, 귤 밭 창고를 얻어 집으로 쓰시는 아멘 할머니는 교회가 건축하겠다는데 건축헌금 할 돈이 없어 생각한 것이 기도였다.
창고 집에서 20분 걸어 내려와 울퉁불퉁한 성전대지 1,500평을 한 시간씩 걸으며 기도하시고 다시 20분 걸어 올라가시는 성전건축 기도를 아무에게도 알리거나 말하지 않고 묵묵히 성전건축기도를 하나님께 올려 드린 것이다.
"하나님! 나는 없어요, 있으면 다 드리고 싶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성전 터에 성전이 잘 건축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 밖에 없어요." 2000년 11월28일 저녁, 성전건축을 위해 기도하고 창고 집으로 올라가다가 과속으로 달리던 택시에 치어 천국가신 것이다.

아멘 할머니의 죽음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다. 성전건축을 위해 내가 제일 기도 많이 하고, 제일 많이 수고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교만함이 아멘 할머니의 간절함과 교회 사랑이 담긴 강력한 기도 앞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기공예배 후 시작하지 못한 건축역사는 곧 시작되었고 입당할 때까지 작은일 하나도 문제없이 잘 진행될 수 있었다. 하나님만 아시는 아멘 할머니의 기도 때문에. 오늘 유난히도 아멘 할머니의 "아멘" 소리가 마음에 내려앉는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출 17:11)

* 자료출처 /  신관식 목사(법환교회)

 

 

1. 아멘의 뜻

아멘 (티베리아 히브리어 אָמֵן ’Āmēn, 히브리어 אמן Amen 아라비아어 آمين ’Āmīn Ge'ez' አሜን ’Āmēn)은 긍정을 나타내는 낱말이며, "정말로 그렇다"라는 뜻이다. 기독교 성경과 유대교 성경 전반에 걸쳐 등장한다. 아멘은 기도나 찬송의 마지막을 맺는 구절로 자주 사용되며, 예배를 드릴 때나 기도할 때에 동감을 나타내는 방식으로도 사용된다. 아멘은 또한 "그렇게 될지어다"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아멘은 영어권에서는 "에이멘"이라고 발음하기도 한다. 클래식 음악이나 정형화된 예식, 기도문에서는 "아멘"이라 발음하는 경우가 많으며, 복음주의와 영어 복음성가에서는 에미멘으로 많이 발음한다. 한국어에서도 드물게 에이멘이라 발음하는 경우가 있다.

고대 유대 교회에서는 랍비가 성경의 한 구절을 읽을 때, 성도들이 그 구절을 따라 말함으로써 성서 교육을 베풀었다. 그러나 점차 구절을 되풀이하여 따라 말하는 것이 귀찮게 되어 성도들은 "아멘!"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것이 유대교부터 파생한 기독교까지 그대로 이어져 목사가 설교의 중요한 구절을 말하거나 신부가 기원의 말을 한 뒤에 성도들이 "아멘"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기독교에서는 찬송(찬미)의 마지막에 두는 말로 자주 쓰인다.

 

2. 할렐루야와 아멘

윗마을 목사님이 하루는 아랫마을 목사님의 말을 빌리러 왔다 아랫마을 목사님은 말을 빌려주면서 이런 부탁을 하였는데 이 말은 "할렐루야"하면 달리고 "아멘" 하면 선다는 것이었다.

윗마을 목사님은 잘 알겠다고 인사하고 말에 올라 할렐루야 하니 말이 달리기 시작하였다. 한참 달리다보니 저앞에 낭떠러지가 보이는데 말을 멈추는 단어가 생각이 안 났다.

이제 죽었구나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 하고 아멘 하니

말이 낭떠러지 바로 앞에서 딱 멈추었다. 목사님은 너무 기쁜 나머지

할렐루야! 하고 외쳤다......

 

3. 아멘

어떤 목사님이 설교 중에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모든 성도들이 “아멘! 아멘!” 했다. 그러던 어느날 목사님의 마음에 성도들이 정말 믿음이 있어 아멘을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주일,목사님은 설교를 시작하기 전 무조건 “믿습니까?”라고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모두 아멘이었다. 그러자 목사님이 “확신하십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런데 아무도 아멘을 하지 않았다. 목사님은 다시 “믿습니까?”라고 물었다. 역시 모두 아멘이었다. 목사님은 또 “확신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역시 아멘은 없었다.

“여러분! ‘믿습니까’와 ‘확신합니까’가 무엇이 다릅니까? 그리고 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했는데 아멘이라고들 하셨습니까? 나는 아직 설교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이다.

 

4. 아멘을 잘하는 성도가 공부도 잘한다”

신경학적음악치료연구소 원장인 차영아 교수는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학교 음악석사, 순천향대학교 교육학 박사 수료,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M.div(영어과정), CBRM 신경학적 음악치료사 전문가 과정 수료 등을 마치고 서울대학교 협력병원 소아청소년 정신과 심리상담사, 전 영동세브란스 근육병 재단 음악치료사 등으로 활동했다.

차영아 교수는 특히 뇌는 반응을 하고 자극을 줄수록 활성화된다고 설명하며 “교회에서 아멘 잘하는 성도가 뇌도, 신앙도, 건강도 좋아진다.”고 강조했다. 뇌는 외부의 자극에 적극적으로 반응할수록 활성화되고 호르몬도 활발히 분비된다는 것.

 

5. 명약중의 명약 ' 아멘약 '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강하게 지으셨기에 우리 몸은 항상 건강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운동 후 한껏 올라갔던 혈압과 맥박이 정상으로 내려가고 체온이 올라가면 땀을 내서 체온을 올려서 몸이 건강하게 유지되도록 하는 것은, 체내 항상성(Homeostasis)이 몸의 균형을 조절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건강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기쁜 일이 생기면 즐거워하고 보고 싶음 사람을 만나면 반가워하는 그 마음이 바로 정상적인 마음입니다. 우스운 얘기가 나오면 웃고 슬픈 얘기가 나오면 눈물이 나오는 것, 우리의 몸이 이미 건강하기를 원하고 정상을 유지하려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표시입니다.

 

6. 아멘약 주세요.

한번은 황교수에게 어느 부부가 진료를 받기 위해 찾아와서 하는 말이, “박사님, 아멘 약 주세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분들은 실제로 아멘 약이라는 이름의 약이 있어서 자기가 그 약을 처방해 줄줄 알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들에게 한 10분쯤 아멘 약에 대해 설명하자 그 부인 입에서 연신 아멘 소리가 났습니다. 그 부인은 심장이 몹시 나빠 수술하기도 어려운 상태였는데, 이 아멘 약 처분을 받고 가서 8일 후에 다시 왔는데 완전 얼굴이 좋아졌고, 아멘 약 덕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부인은 계단을 오르면서도 아멘, 화장실에서도 아멘, 설거지하면서 아멘, 이렇게 3일쯤 계속하고 나니 얼굴에 윤기가 돌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부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분이셨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계속 아멘, 아멘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이 복음으로 여러분 인생 모든 문제가 처리되고 해답을 얻습니다. 아멘'하십시요. 명약 중의 명약이 ’아멘약‘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은 최고의 명약입니다. 이 복음을 받아 먹으십시요. 아멘하십시요. ‘아멘’이라는 이름을 가지신 예수님(계 3:14)은 즉시 치료를 시작하실 것입니다. 즉시 기도하고, 아멘의 삶을 사십시오. 여러분의 고질병이 치료되고 ‘아멘약’의 전도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7. 세 종류의 아멘 - 입술로 하는 아멘, 마음으로 하는 아멘, 행동으로 하는 아멘

성경에 보면 어느 때 '아멘' 하고 소리쳤습니까?

  ⑴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아멘'을 합니다(느 5:13).
  ⑵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기 위해서도 '아멘'을 합니다(고후 1:20).
  ⑶하나님 앞에 축복 받기 위해 믿음으로 '아멘'을 합니다(엡 6:24).
  ⑷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확신할 때 '아멘'을 합니다(계 1:7; 22:20).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아무 일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아멘'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역경 속에서도 '아멘' 하고, 축복 속에서도 '아멘'해야 합니다.
건강할 때도 '아멘'이요, 아플 때도 '아멘'입니다.
'아멘'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삼상 15:22절에서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낳다"고 했습니다.
순종한 다윗은 복을 받았지만, 불순종한 사울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8. 아멘과 순종 ‘포테이토칩’

뉴욕에 한 레스토랑이 있었습니다. 이 레스토랑에는 그 주변의 나이 드신 까다로운 손님들이 많이 왔는데, 주방장이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라, 때때로 손님들하고 다투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항상 주방장을 불러 놓고 “손님은 왕이다. 절대로 싸우지 말아라. 손님들이 요구하는 대로 다 해 주어라”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한 점잖은 할아버지가 오더니, 감자튀김을 주문했습니다.

감자를 튀겨 오니까, 너무 두껍다고, 다시 썰어서 튀겨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썰어서 튀겨 오니까, 이번에는 더 얇게 썰어서 튀겨 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몇 번에 걸쳐서 주문을 하니 주방장이 화가 나서 씩씩거렸습니다. 그래도 주인은 옆에서 “순종, 순종, 순종” 하고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하는 수 없이 종잇장처럼 아주 얇게, 한 입에 쏙 들어가게 다시 튀겨서 갖다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손님이 감자튀김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가 먹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그 감자 튀김을 주문했습니다. 그래서 이 레스토랑은 그 감자튀김 때문에 유명해져서 손님이 많이 오게 되었고, 그로 인해 ‘포테이토칩’이라는 새로운 메뉴가 생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9. 순종과 아멘과 축복

우리가 성공하고 승리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모님께 순종, 학교에서는 선생님께 순종, 사회에 나가면 직장에서 상사에게도 순종, 국민들은 대통령과 위정자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은 권위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첫째로 믿음의 종교이며 둘째는 ‘순종’의 종교입니다.

순종이란 믿고 아멘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아무 일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아멘’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역경 속에서도 ‘아멘’ , 축복 속에서도 ‘아멘’, 건강할 때도 ‘아멘’ 아플 때도 ‘아멘’입니다. 특별히 기적의 말씀을 듣고서 ‘아멘’ ,‘축복’의 말씀에 아멘 하는 것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축복과 약속의 말씀을 이루어 주십니다.

 

10.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아멘 하십시오. 그리고 그대로 따르십시오.

당신 바로 앞에 있는 난로에 불이 났습니다. 당황한 당신의 눈에 소화기가 보였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소화기 사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불꽃은 계속 오르는데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당신은 소화기에 나온 사용법 설명대로 한 가지씩 따르면 됩니다. 소화기의 어떤 성분이 불을 끄게 하는지, 소화기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런 것들을 알 필요는 없습니다. 불이 난 지금은 그 소화기로 불을 끄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 생기는 크고 작은 많은 문제들, 왜 발생했는지 분석하고 대책을 간구하고, 그 결과 잘 수습될 지 예상해 볼 그럴 여유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대로 따르십시오.

그 명령들이 적당한 처방인지 확인하고 점검해 보시렵니까? 평온한 때에 하십시오.

그것이 결정되었다면 그대로 돌격하십시오. 이것이 지금 당장 당신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사야 65:16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앞에 숨겨졌음이니라.
Whoever invokes a blessing in the land will do so by the God of truth; he who takes an oath in the land will swear by the God of truth. For the past troubles will be forgotten and hidden from my eyes.


첫째,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아멘’

1. ‘아멘’은 여호와께 대한 답변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표현으로 상대방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자신이 공감하였을 때 사용했다.(예레미야가 말하되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소서…, 렘  28:6)

2. ‘아멘’은 유대교나 기독교의 종교적 용어다.
여호와께 대한 사람의 기도를 개인적으로, 공중으로 동의한다는 의미로, 여호와께 대한 찬미를 화답하여 드릴 때 사용했다

.(모든 백성이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더라, 대상 16:36, 시 72:19, 시 89:52, 시 106:48)

3. ‘아멘’은 하나님께 대한 법령을 준수하겠다는 서약과 위반할 때는 처벌을 받겠다는 맹세로서 사용했다.

(회중이 다 아멘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느 5:13 / 여인이 아멘 아멘 할찌니라…, 민 5:22 /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어다,

신 27:15)

4. ‘아멘’은 충성과 헌신을 표현할 때 사용했다.

둘째, 신약 성경에 나타나는 ‘아멘’

1. 하나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약속에 대한 응답이다.(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우리가 아멘 하여, 고후 1:20)

2. 기도에 대한 응답이다.(…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고전 14:16 /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롬 15:33)

3. 송영의 처음과 마지막에 ‘아멘’ 한다.(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계 7:12) 이처럼 사도들의 서신 대부분이 송영 끝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있다.(롬 9:5, 갈 1:5, 빌 4:20, 딤전 1:17, 벧전 4:11,

히 13:2)

4. 서신(書信)의 끝부분에(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계 22:21)

셋째, 이처럼 성경 전반에 걸쳐서 기록된 아멘은 몇 가지 부류로 나누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1. 말씀을 시작하면서 부르는 아멘은 다른 사람의 말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왕께 대답하여

가로되 아멘 내 주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왕상 1:36)

2. 혼자서 아멘을 하게 될 때 진실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 주로 구약 성경에 많이 보인다. 성도들의 고백과 찬양 속에 나타난다.

(민 5:22, 신 27:15~17, 렘 28:6)

3. 대중과 함께 ‘아멘’하게 될 때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고 영광 돌리며 감사할 때 사용했다.

4. 말씀이 끝나면서 후렴처럼 ‘아멘’을 붙이는 경우에서는 주로 신약시대 예배 시에도 사용되었다. 이것은 서신 여러 곳에

기록되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송영이나 간구 화답으로 사용 되었다.(롬 1:25, 빌 4:20, 딤전 1:17)

넷째, ‘아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살펴보자.

1. ‘아멘’의 기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의 이름(호칭)이기도 하다.(계 3:14 /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계 22:20∼21).

2. ‘아멘’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곧 ‘진실’이 되심을 알려준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실 때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아멘을 진실의 뜻으로 사용하셨다.

요한복음에는 ‘아멘’이 ‘진실로, 진실로’라는 중복된 말로 25회나 기록된다. 그 처음이 요한복음 1장 51절에 기록되고,

맨 마지막 것은 요한복음 21장 8절에 있다. 요한이 복음서와 함께 그의 서신에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아멘을 적용한 특징 몇 가지가 있다.

은혜롭고 확인하는 ‘아멘’으로(요한복음에 50회 기록), 감격과 경배의 ‘아멘’으로(계 1:6∼7), 영광스러운 예고의

‘아멘’으로 (계 3:14), 즐거운 기다림의 ‘아멘’(계 22:20) 등으로 기록됐다.

3. ‘아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심에 대한 응답으로 적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기도의 중보자이시다.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와 찬양할 때 아멘으로 화답해야 한다.

(롬 1:25, 갈 1:5 /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딤후 4:18)

4. ‘아멘’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계 3:14)으로 사셨다. 참된 증인을 따르는 증인의 삶은 ‘아멘’으로 살아야 한다.

지금까지 주기도문의 송영 맨 마지막에 ‘아멘’이라는 어휘가 성경 전반적으로 어떻게 적용되었는가를 다루어 보았다.

이제 우리는 삶과 신앙에 성경적인 의미를 담고 ‘아멘’을 실천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아멘의 삶에 선두 주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닮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고 했다.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아멘의 신앙으로 살았다.

바울 사도는 모든 믿는 자는 ‘예, 아멘’만 있다고 선언한다. 「아멘의 신앙」은 다음과 같다.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예(Yes),

즉 아멘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나니, 고후 1:20) 이 신앙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사는 사고와 함께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신앙이다. ‘하나님의 약속은…’(고후 1:20)이라고 기록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고 변함이 없으시다.

약속을 믿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심을 믿는 자가 아멘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다.

3. 전 삶의 영역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간다.

아멘의 신앙은 신앙의 역경과 고난 속에 소망을 잃지 않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며 사는 자에게 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 바울은 아멘의 신앙으로 ‘고난’ 가운데도 미래 영광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리고 믿음의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아멘의 삶은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 5:8)라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됐다. 고난당하는 것을 유익으로 아는 삶(시 119:71),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딤후 2:1∼2),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벧전 4:19)은 분명히 아멘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멘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고후 1:20)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된 주기도문은 송영의 ‘아멘’으로 끝마치게 된다.

‘아멘’은 주기도문 본문과 송영을 ‘진실로 그리합니다’,

‘그렇게 이루어 주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도록 기도의 확신을 준다. ‘아멘’은 신앙의 참된 고백을 기도 속에 담아 드리는

보증이 된다.

 ‘아멘’은 예수 그리스도께 가르쳐 주신 모범적인 기도와 사도들이 전승해 준 송영의 조화로, 주님이 다시 오실 날까지

우리가 변함없이 진실 되도록 열쇠처럼, 고리처럼 연결해 준다.

‘아멘’은 하나님의 응답의 확실성, 우리의 간구나 소원에 대하여 우리 자신이 느끼고 품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청원에

대해서 더 큰 확실성을 하나님께 갖도록 한다.

‘아멘의 신앙’은 모범적인 기도를 드리고, 삶의 현장 속에서 그대로 복사하여 옮겨 사는 자녀들을 통해서 그 빛이 드러난다.

예수님이 친히 가르치신 주기도문의 본문과 사도들에 의해 전수된 송영은 하나님의 뜻과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드러나는, 생명력이 새롭게 창조되는 산 역사의 현장들이 될 것이다.

그럴 때 ‘아멘’은 문자 그대로 제롬이 “초대교회의 공중기도와 찬송가 끝에 백성들의 아멘 소리는 바다의 파도 소리와 우레

소리 같았다”는 말과 같을 것이다.

‘아멘’의 입술의 고백과 ‘아멘 신앙’의 현주소를 주기도문과 함께 송영을 드리면서 점검해 보자.


주기도문 송영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스런 만왕의 왕으로 찬양 드리며 ‘아멘’으로 화답하고 감사드림으로 끝맺는다.

여기에서 찬양과 감사는 모든 기도의 필수적 요소가 되어야 함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아더 핑크(A. W. Pink)는 거룩하고 기쁜 찬양의 표현이자 모든 기원을 실행하기를 탄원하고 논증하는 것으로서, 또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는 확신과 확인과 천명으로서 찬양과 감사가 필수임을 말한다.

주기도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참된 기도의 진수를 제시하신다. 성령에 의하여 쓰인 구약 시편의 기도에는 기도와 찬양이

끊임없이 결합되어 있어, 그 완결성과 탁월성을 나타낸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주기도문과 송영의 관계를 통하여 귀한 가르침과 진리가 우리의 삶의 영역에 어떻게 적용되며

교훈하고 있는지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주기도문의 간구와 송영의 찬양을 감사의 고리로 연결하여 서로 상호결합되어야 함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

둘째, 송영의 찬양은 주기도문 본문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Thou-Petition)를 최고의 경배심을 가지고 예배할 것을 제시한다.

셋째, 송영의 찬양을 통하여 찬양 받으시는 주님께 완전히 복종하며, 겸손하므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며 드리는 삶으로

나아가야 함을 보여준다.

넷째, 송영의 찬양을 통하여 찬양을 받으시는 주님을 위해 진실과 성실의 마당에서 죽도록 충성을 드림이 나의 간증이 되어야

함을 보여 준다.

다섯째, 송영의 찬양을 통하여 우리의 대부분의 기도는 이전의 단순한 구함에 머물지 않고, 보좌의 영광을 찬양하며

감사함으로 축복의 문에 들어가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축복해 달라고(Bless) 요청할 때, 적어도 하나님을 송축(Bless)할 수 있어야 한다.

송영의 위치와 중요성을 확인하면, 우리의 모든 간구는 송영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해 드리며, 그분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있다고 고백하고 감사, 찬양하는 것이 신자가 마땅히 선택할 지점이 되는 것을 알게 된다.

필자는 이미 송영은 찬송이요, 감사의 묶음이고, 기도의 근본 요소는 찬양이요, 감사라고 말했다.

한국 교인들의 기도 의식을 연구하는 논문에서, 찬송을 포함하여 기도하는 것에 86.4%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왜 자신이 기도 중 찬송을 포함시켜 하느냐는 질문에 ①간절함을 위해(43%) ②성경에 기록된 방법이기 때문에(9.6%)

③더 잘 응답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6.7%) ④상대방이 그렇게 하니까(0.3%) ⑤영적 지도자가 인도하기 때문에(9.3%)

⑥심리적인 이유 때문에(15.4%) 등의 응답이 나왔다.

이상의 결과에 따르면 한국 교인들의 기도 의식은 기도 중에 대부분 찬송을 겸하는 은혜롭고, 감동적이며 영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방법이라는 점을 아는 사람은 10명 중에 1명꼴로 나타났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기도가 찬양으로 이어지고, 찬양이 기도로 연결되는 성경적인 기도 훈련의 성숙이 필요하며, 찬송

신학의 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기도 끝에 첨가되는 ‘아멘’이란 어휘에 대해 한국 교인들은 ①기도와 신자의 삶의 모습이 진실로 그러하다는 의미(77.5%)

②유대인의 방식(0.7%) ③의미를 모른다(1.8%) ④기도의 종결 어미(10%)로 각각 적용하고 있었다.

10명 중에 7명이 ‘아멘’으로 기도의 화답을 드리는 것을 볼 때, 그 의미 그대로 우리의 모든 기도가 진실로, 곧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또 우리의 생애에서 ‘아멘’을 통해 충성과 헌신을 드리는 고백이 되길 바란다.

송영은 부활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와 성도들의 감사의 고백인 동시에 승천하시고 다시 오실(재림),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나라에서 ‘아멘’하는 우리의 참된 신앙의 고백으로 드려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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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한 / 성령



πλήρης, ες 스트롱번호 4134

1.

가득 찬

2.

㉠ 막6:43

3.

눅5:12

발음 [ plērēs ]
어원
4130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가득 찬, 가득한.
    • a.
      [물건에 대해] ㉠ [속격을 가져]막6:43, 8:19. ㉡ [단독으로] 마15:37.
    • b.
      [사람에 대해, 속격을 가져] 눅5:12, 행7:55.
  • 2.
    완전한, 충분한, 충만한, 막4:28, 요1:14, 요이1:8.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찬(마14:20, 막6:43), 충실한(막4:28), 충 만한(눅4:1), 심히 많은(행9:36), 가득한(행13:10, 19:28), 온전한(요이1:8).


πλήθω 스트롱번호4130
1.

채우다

2.

영향을 주다

3.

완수하다

발음 [ plēthō ]

뜻풀이부

  • 1.
    채우다, 영향을 주다, 완수하다, 공급하다, 눅1:15.

참고 정보

문법설명

πλέω의 연장형

연관 단어

  • 문법설명
    πλέω의 연장형
    관련 성경
    가득하다(마22:10, 눅4:28, 행5:17), 적시다(마27:48), 충만함을 받다(눅1:15, 41), 차다(눅1:57, 2:6,22), 채우다(눅5:7), 충만하다(행4:8,31, 13:9).

πληροφορία, ας, ἡ 스트롱번호4136
1.

확신

2.

충만

발음 [ plērŏphŏria ]
어원
4135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확신, 골2:2, 살전1:5, 히6:11, 10:22.
  • 2.
    충만, 골2:2, 히6:11, 10:22.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확신(살전1:5), 풍성함(골2:2, 히6:11), 온 전함(히10:22).


πληροφορέω 스트롱번호4135
1.

온전히 채우다

2.

확신을 가지다

발음 [ plērŏphŏrĕō ]
어원
제1부정과거명령 πληροφόρησον, 제1부정과거부정사 πληροφορῆσαι, 수동태, 1부정과거부정사 πληροφο- ρηθῆσαι, 제 1부정과거수동분사 πλη- ροφορηθείς, 완료수동태 πεπληροφό- ρημαι, 수동태분사 πεπληροφορημέ- νος, 4134와 5409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온전히 채우다, 성취하다, 완성하다, 눅1:1, 딤후4:5, 골4:12.
  • 2.
    [수동] 확신을 가지다, 확신하다, 골4:12, 롬4:21, 14: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이루어지다(눅1:1), 확신하다(롬4:21), 확정하다(롬14:5), 다하다(딤후4:5), 온전히 (이행하다)(딤후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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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가리키는 일곱 가지 상징들

1. 바람,  2. 불,  3. 기름,  4. 물,  5. 인,   6. 검,   7. 비둘기

성경에는 성령을 상징적으로 지칭하는 단어들이 있다. 특

구약에서는 성령은 여호와의 신으로 일컬어지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땅에서 그 거룩한 구속사역을 마치신 후 아버지께로 가고 그를 대신해서 성령이 다른 보혜사로서 이제 각 성도의 마음에 친히 거하고 성도들의 모임 가운데 살고 있다.

여호와의 신(사사기 3:10)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1. 사사기 3:10]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2. [사사기 6:34]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좇고

3. [사사기 11:29]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4. [사사기 13:25]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5. [사사기 14:6]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으나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

6. [사사기 14:19]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크게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 삼십명을 쳐 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아비 집으로 올라갔고

7. [사사기 15:14]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르는 동시에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그 팔 위의 줄이 불탄 삼과 같아서 그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8. [사무엘상 10:6]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9. [사무엘상 16:13]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10. [사무엘상 16:14]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11. [사무엘하 23:2]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12. [열왕기상 18:12]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신이 나의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고하였다가 저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13. [열왕기하 2:16]
가로되 당신의 종들에게 용사 오십인이 있으니 청컨대 저희로 가서 당신의 주를 찾게 하소서 염려컨대 여호와의 신이 저를 들어가다가 어느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을까 하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보내지 말라 하나

14. [역대하 20:14]
여호와의 신이 회중 가운데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셨으니 저는 아삽 자손 맛다냐의 현손이요 여이엘의 증손이요 브나야의 손자요 스가랴의 아들이더라

15. [이사야 11: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16. [이사야 40:13]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17. [이사야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18. [이사야 63:14]
여호와의 신이 그들로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19. [에스겔 11:5]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렇게 말하였도다 너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아노라

20. [미가 2:7]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신이 편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행위 정직한 자에게 유익되지 아니하냐

21. [미가 3:8]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신약에 나타난 성령에 대한 지시어들중 중요한 것 7개를 여기서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바람 :

성령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이고 헬라어로 프뉴마이다.
이 둘다 일차적으로는 바람 혹은 호흡이란 뜻이다.
그러니 바람이란 말은 성령이란 단어가 가지는 원래 의미에 가장 가까운 상징 내지는 지시어일 것이다.
성령은 우리 가운데 바람처럼 오시고 호흡처럼 내주한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한복음 3장 8절),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한복음 20장 21-22절)

바람은 성령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역사를 생각하게 해준다.

2. 불 :

불은 성령의 상징으로 자주 사용된다.
교회에서 아주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성령의 불이라고 말이다.
이는 성령의 세례와 관계가 크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데 이것을 요한은 자신이 주는 물세례에 대해서 그리스도가 주는 성령과 불의 세례라고 말한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태복음 3장 11절)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누가복음 12장 49절)

불은 우리의 죄를 태우고 불꽃이 일어나듯이 우리를 하나님의 은사로 뜨겁게 해주는 모양을 상기시킨다.

특히 위에 바람과 불 두가지는 성령이 처음으로 이 땅에 성도들 가운데 보혜사로 임하실 때 동반된 현상이다.

"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사도행전 2장 1-4절)

3. 기름 :

기름도 성령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하나님의 성신의 임재는 구약에서 종종 기음부음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부르심이나 보내심을 받는 사람은 기르부음의 절차가 뒤따른다.
즉 제사장이나 왕이나 선지자등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그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그에게 자원하는 심령과 지혜를 주어 그 일을 거룩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수행하는 표라고 이해된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종으로 직접 부르심을 받았다는 표징이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사도행전 10장 38절),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고린도후서 1장 21절),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한일서 2장 20절),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한이서 2장 27절)

4. 물 :

물은 세례의 도구이다.
세례 받을 때에 우리는 물세례를 받고 동시에 성령 세례도 받게 된다.
반드시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할수는 없어도 하여튼 우리가 받는 물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세례가 가장 본질적인 차원에서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성령 세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물세례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도 없고 그리스도인으로 불려질 수도 없다.
왜냐하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로마서 8장 9절).
기름이 거룩함을 말한다면 물은 깨끗함 내지는 정결함을 말한다고 볼수 있다.
또 갈망과 및 목마름을 해갈해주는 힘이다.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한복음 7장 37-39절)

5. 인 :

도장을 말한다.
이것은 성령이 우리 구원의 확실한 보장이 된다는 뜻이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듯이 하나님이 우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구원되었다는 증거로 성령으로 도장을 찍었다.
인치다는 도장을 찍고 밀봉을 하는 행위와 비슷하다.
목자들이 자기 양을 표시하기 위해서 불로 지진 도장을 하듯이 하나님은 자기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우리에게 인치심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임을 확증한다.
이는 바로 성령의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구원의 사역이다.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한복음 6장 27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린도후서 1장 22절),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에베소서 1장 13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에베소서 4장 30절)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디모데 2장 19절)

그러므로 인침은 확실한 보증을 뜻한다.

그러기에 배신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가서 8장 6-7절)

6. 검(칼) : 

성도가 가진 유일한 공격용 무기이다.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전신갑주가 다 방어용이면 유일하게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가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서 사용하는 공격용 무기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도 광야에서 사단에게 세번 시험받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즉 성령의 검으로 물리치신 것이다.
무사가 칼다루는데 능하듯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능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브리서 4장 12절)

":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에베소서 6장 10-17절)

성경 말씀은 성령이 주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디모데전서 4장 1절),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히브리서 3장 7절),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브리서 9장 8절),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한일서 5장 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요한계시록 2장 29절)

성령은 친히 말씀하시고 증거하신다.
그래서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은 마귀의 공격을 붕괴시키는 치명적인 공격용 무기가 된다.

7. 비둘기 :

비둘기는 온유하고 평화로운 동물로 이해되어 평화의 상징으로 온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도가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받고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셨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태복음 3장 16절),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누가복음 3장 22절)

이때 성령은 창세기 1장에서 혼돈의 흑암 중에 수면위를 운행하는 성령의 모습을 생각나게 해준다.
날개를 양쪽으로 펴고 품는 듯 하늘을 나는 모습이다.

그리고 비둘기는 순전함 내지는 온유함의 상징이다.

그러기에 예수도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태복음 10장 16절)고 말한다.

비둘기 같이 온유하고 오래참고 사랑과 자비로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성품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말이다.

우리는 위에서 성령의 생각나게 하는 성경의 중요한 표현을 살펴보았다.
이는 모두 성령의 본질적인 사역을 말하면서 동시에 성령의 전으로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각자 혹은 교회로서 사회에서 행해야 하는 삶의 자세를 지시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바람처럼 자유롭고 알수 없는 능력을 입어 불로 죄를 태우고, 물로 깨끗하게 씻어 정결하게 되고, 기름으로 거룩하게 바르고 하나님의 확실한 인침을 받아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담대하고 용감하게 영적 전투를 하되 항상 사랑의 마음으로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 비둘기같이 순결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전에 말한 성도의 길에 도사리고 있는 12가지 덫을 피해갈 수 있다.
오직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라디아서 5장 16-18절), 그러면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 5장 22-23절),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에베소서 1장 13절)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갈라디아서 5장 5절)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갈라디아서 5장 25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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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상징들

물은 성령의 상징이다.
불은 성령의 상징이다.
바람은 성령의 상징이다.
올리브 기름은 성령의 유형이다.
비와 이슬은 성령을 묘사한다.
비둘기는 성령님을 묘사하고 음성은 성령님을 묘사한다.
봉인은 성령님을 묘사한다.
성경을 통하여 이 상징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다.

요한복음 3:16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요한복음 7:38-39
성령님은 사람 안에서 나오는 “생수의 강들”과 같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성령님은 물에 비유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물을 아무런 의미없이 비유로 사용하지 않으신다.
주님께서 드시는 비유들은 항상 정확하며 과학적으로도 오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용된 예표들에는 전혀 오류가 없다.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성령님의 유형으로 물은 적합한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도 증명이 된다.

1. 물은 땅을 기름지게 한다.
땅에서 열매를 거두려면 땅에 물을 주어야 한다. 물은 땅을 기름지게 한다. 사하라 사막이나 웨스트 텍사스나 그와 비슷한 곳에 가 보면 식물이 거의 없는 것을 알게 된다. 무엇이 문제인가? 비가 거의 오지 않기 때문이다. 모하비 사막을 통과하거나 캘리포니아에 있는 데쓰 밸리를 가 보면 거기에 아무것도 살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바위와 모래뿐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물이 없는 것이다. 물은 땅을 기름지게 한다.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시편 1:3에 있는 강가에 심겨진 나무로 비유된다. 경건한 사람은 “...강가에 심겨진 나무 같아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2. 물은 상쾌하게 하고 기운나게 한다. 요한복음 4:7-14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치고 목마르셨을 때 마실 물을 달라고 하셨다. 시편 46:4과 이사야 41:17-18에서 물은 기운나게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물은 지구상에서 공기를 제외하고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필요로 하는 것이다. 사람은 음식보다도 물이 있을 때 더 오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 물은 참으로 기운 나게 한다. 몸은 물을 필요로 한다. 보통 사람의 경우 하루에 물 약 1리터를 필요로 한다.

  3. 물은 값없이 주어진다(사 55:1, 요 4:14, 계 22:17을 보라). 성경은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생명수를 값없이 마시게 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이사야 55:1에서 값없이 물을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물은 값없이 주어진다. 그래서 성령님은 원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사람이 하나님께 성령으로 채워 주시도록 그의 혼을 구원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주시도록 간구할 때 이 일은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라”(롬 6:23). 하나님의 선물은 보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물침례와 연관시키는 성경 변개자들은 자신들이 지금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사도행전 2:38로 어리석게 된 자들이다. 사도행전 2:38을 구원계획으로 믿다가 지옥에 가버린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 수가 엄청나다. 성경을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이 어리석은 자들이 성경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사도행전 2장에서는 성령을 받는 것이 침례받는 것과 연관이 있고 안수와는 무관하다. 사도행전 8장에서는 성령을 받는 것이 안수와 연관이 있고 침례와는 무관하다. 사도행전 10장에서는 구원받은 사람이 방언을 말했으나 사도행전 16장과 사도행전 8장에서는 구원받은 사람이 방언을 말하지 않았다. 사도행전 10장 이후까지는 확실하게 계시된 것이 아무것도 없고 사도행전 15장까지는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성경적 교리가 확인되지 않았는데도 과도기에 해당하는 구원받는 방법이 다섯 가지나 되는 사도행전에서 구원 교리를 증명하기 위한 증거 구절로 사도행전 2:38을 사용하는 사람을 한 번 상상해 보라. 우리는 오늘날도 성령을 받는 것이 사도행전 2:38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눈먼자들을 인도하는 눈먼 안내자들과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 초대 교회 때 유대인들을 위해 주어졌던 방언(외국어)의 은사는 사도들의 사역과 함께 끝이났고 오늘날 교회들에서 하는 이상한 방언(알지 못하는 소리)은 마지막 때 미혹하는 마귀의 영이 준 거짓 은사임

성령의 상징들 (2)

  사람들은 성경 전체에서 다른 어떤 구절보다도 사도행전 2:38을 구원의 구절로 붙듦으로써 지옥에 가게 된다. 사람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1) 사도행전 2:38에는 피의 속죄가 없다. 2) 사도행전 2:38에는 중생이 없다. 3) 사도행전 2:38에는 새로운 출생이 없다. 4) 사도행전 2:38에는 그리스도인이 한 명도 없다. 5) 사도행전 2:38에 나오는 모든 사람은 유대인들이거나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이다. 6) 사도행전 2:38에서는 아무도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7) 사도행전 2:38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아직 계시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어떻게 사도행전 2:38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성령님을 나타내는 물은 값없이 주어진다. 사도행전 2장에는 전제 조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아직 기록되지 않은 때이다. 그리고 바울이 구원받기 전이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사람은 율법 아래 있는 구약 시대의 유대인들이다. 출발을 조심해야 한다.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성령님은 값없이 주어진다. 이것이 믿음에 의한 약속이다(갈 3:14). 성령님은 요청에 의해 값없이 주어진다(계 22:17).

  4. 물은 깨끗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말씀과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고 깨끗하게 된다(엡 5:26). 바울은 사람이 구원받을 때 성령님에 의해 거룩하게 되며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용하시도록 떼어놓으신다고 말했다.  

  5. 물은 풍부하다. 요한복음 7:37-38에서 우리는 물뿐만 아니라 생수의 강을 보게 된다 모든 물이 마시는 물은 아니다. 많은 물은 소금물이다. 물로서의 성령님은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하신다. 소금물의 유형으로서 성령님은 깨끗하게 하시고 불순물들을 제거하신다. 맑은 물의 유형으로서 성령님은 기운나게 하신다.

  마태복음 3:11에서 요한은 주님께서 “성령으로 또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시리라”고 말하였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침례인 요한은 빛나는 빛이었다(요 5:35). 불은 불타고, 정화시키고, 탐색하게 한다. 물론 마태복음 3:11의 불침례는 성령 침례가 아니다. 이는 지옥에서 죄인들이 받는 침례이며 재림 때 믿지 않는 자들이 받는 침례이다. 불과 같은 성령님은 정화시키시고, 깨끗하게 하시며, 정결케 하시고, 빛을 밝히신다. 성령님을 묘사하는 가장 위대한 것들 중 하나인 불은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자녀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하는 불기둥으로 나타난다. 이는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요한복음 3:8을 보자. “바람이 임의로 불어서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모두 그와 같으니라.” 분명히 바람은 성령님의 유형이다.

  바람이 강력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태풍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 위력을 안다. 회오리 폭풍인 토네이도는 집에 있는 온갖 가구와 마루 바닥을 잡아채 가고, 나머지 것들은 그대로 놓아둔다. 이 태풍이 불면 집 반채는 날아가고 반 채는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또 집에 있는 사람들을 날려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집 전체를 계곡 밑으로 날려보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휴거 때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을 들어올리실 때도 비슷한 현상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자들이 있는 곳과 하나님께서 계신 곳 사이에 진공상태를 만드셔서 구원받은 자들은 끌어올리시고 쓰레기와 쭉정이들을 남겨 놓으신다. 바람은 강력하다.   

* 초대 교회 때 유대인들을 위해 주어졌던 방언(외국어)의 은사는 사도들의 사역과 함께 끝이났고 오늘날 교회들에서 하는 이상한 방언(알지 못하는 소리)은 마지막 때 미혹하는 마귀의 영이 준 거짓 은사임.

성령의 상징들 (3)

  바람은 소생하게 한다. 에스겔서 37:9-14에서 에스겔이 바람에게 살해된 자들에게 와서 숨을 쉬라고 말하였다. “숨이 그들 속으로 들어갔고, 그들이 살아나 그들의 발로 서니 심히 큰 군대더라.” 14절에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것들을 해석해 주시는데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들어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바람은 소생하게 한다. 새로운 출생을 주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시고 그리스도인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같은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죽은 몸에 생명을 주신다. “예수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분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분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 분의 영으로 인하여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바람은 독립적으로 행동한다. 요한복음 3:8에는 “바람이 임의로 불어서...”라고 말씀하신다. 성령님은 원하시는 것을 하신다. 성령님은 신격의 세 번째 인격이시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명령에만 순종하신다. 성령님은 사람들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신다. 성령님은 보이시지는 않지만 실제적인 분이시다. “바람이 임의로 불어서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모두 그와 같으니라”(요 3:8). 이것은 단순히 새로운 출생은 정확하게 언제 이루어지는지 알 수 없다는 의미이다.

 

새로운 출생은 요한복음 1:12에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고백하고, 믿고, 침례받는” 것이 전부라면 총알같이 지옥에 가고 만다. 새로운 출생의 조건은 회개도 아니고, 믿음도 아니고, 고백도 아니고, 침례도 아니다. 새로운 출생의 조건은 하나님의 아들을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요 1:12-13). 그러므로 세례받고, 교리문답만 받는다면 성령님께서 언젠가 여러분을 살려주시기 위해 보이지 않게 일하시는 것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 성령님은 여러분을 속이지 않으신다.

 

성령님을 묘사하는 것에는 기름이 있다. 시편 45:7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름 붓는 것을 말씀하신다. “곧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께 기쁨의 기름을 부어 당신의 동료들보다 우위에 두셨나이다.” 기름은 출애굽기 29:7과 누가복음 4:18에 있는 것처럼 헌신을 가져온다. 구약에서 올리브 기름은 헌신의 유형으로 사용되었고 사람을 하나님께 헌신시키는 분은 성령님이다. 이사야 61:3에서 성령님은 위로하신다. 슬픔의 기름 대신 기쁨의 기름을 주셨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9도 읽어 보라. 기름은 빛을 준다.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어리석은 처녀들이 등에 기름이 없어 빛을 비추지 못했다. 기름은 상처를 치유한다. 누가복음 10:34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은 상처에 기름을 부었다. 이는 성령님을 묘사한다.

 

  성령님을 묘사하는 또 다른 상징은 비와 이슬이다. “그가 벤 풀 위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나기같이 내려오리니”(시 72:6). 비는 기운나게 한다. 비는 풍부하다. 특히 시편 68:9과 이사야 18:4을 살펴 보라. 한 성읍에 비가 없는 것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시지 않는 것을 묘사한다. 이것은 하나님께 등을 돌린 나라에는 가뭄이 오기 쉬움을 의미한다. 비는 성령님의 유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땅으로부터 자비를 거두고자 하실 때에는 비를 내리지 않으신다.

성령의 상징들 (4)

  하나님께서 비를 보내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거둘 것이 없다. 주님께서 지상으로부터 비를 삼 년 반 동안 단절시키신다면 (대환란 때에는 이렇게 하실 것이다.) 여러분과 가족 모두는 마치 지금의 아프리카처럼 굶주리게 될 것이다. 어떤 나라든지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처럼 열 세 살도 되기 전에 성적으로 타락해 버리면 비는 오지 않고, 우물도 말라버리고 사람들은 (이 경우는 에디오피아)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 서로를 잡아먹게 된다. 어떤 나라라도 인도처럼 모시는 신들이 수천 개가 될 때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종교는 하나”라든지 “종교적 관용”이라는 말로 시간 낭비하지 말라. 비가 오지 않는 원인은 이단들 때문이며 그들 손이 피를 부른 것이다.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을 믿지 않고, 이교도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자 애쓰는 사역을 믿지 않는 사악하고 타락한 이단들은 그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비를 내리지 않으시는 것이다. 되돌아보면 1933년에 루스벨트가 금주법을 폐지했을 때 극심한 가뭄이 켄사스 서부와 오클라로마 서부와 텍사스를 말려 버렸다. 먼지는 눈더미처럼 쌓여 4-5 피트나 되었다. 누군가 마당 뒤에 세운 간판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당신은 우리에게 맥주를 주었다. 이제 물을 달라.” 우리가 맥주를 선택했을 때 물을 추방한 셈이다. 이로 인해 인플레와 세금은 1933년 이후 두 배가 되었고 다음 10년 안에 또 다시 두 배가 될 것이다. 하나님 없이 풍성한 곡식을 거둘 수 없다. 지금의 타락한 방식대로 살면서 “풍요로운 초원”이나 “서광”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비를 끊으실 것이다. 이 비는 성령님의 유형이다.

 

  비둘기는 마태복음 3:16에서 성령님의 유형이다. 비둘기는 매우 온화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둘기와 같은 눈을 가지셨다. 마태복음 10:16에서 그리스도인은 비둘기와 같이 순수함을 보게 된다. 성령의 열매 중 하나는 친절이다. “그러나 위로부터 오는 지혜(성령님)는 첫째, 순수하고 그 다음은 화평하며, 친절하고, 양순하며, 자비와 선한 열매들로 가득하고...”(약 3:17). 입에 게거품이나 물게 하고 땅바닥에 구르고 중얼중얼 거리며 겁쟁이처럼 흐느껴 울게하는 화 잘 내는 광란적인 영이 아니다. 친절하고 온화한 영이다.

 

성령님은 음성과 같다. 음성은 인도한다(사 30:21). 이 음성은 믿는 자 안에서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증거한다(마 10:20). 이 음성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경고한다(요 16:7-11, 히 3:7-11). 성령님의 음성은 귀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아니라 안에서 들리는 음성이다. 안에서 음성이 들릴 때 그 음성이 성경을 증거하고 있는지 분별하여 영을 분별해야 한다. 내부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성경과 일치하지 않으면 그것은 마귀다. 왜냐하면 마귀는 성경을 기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성령님은 거룩한 성경을 쓰셨다. 한 번은 “거룩한” 사람이 “거룩한” 목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부인이 당신을 떠나 이 부흥회 동안 저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거룩한” 목사가 말했다. “주님은 막대기를 가지고 당신 머리를 부숴 버리라고 말씀하셨소.”

 

  성령님은 에베소서 4:30에 있는 봉인과 같다. “너희가 그로 인해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봉인은 무엇을 확증하는 것이다(요 6:27).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인치시고, 확정하시고, 보증하신다(고후 1:21-22). 봉인은 봉인된 모든 서류를 보증해 준다(엡 1:13-14). 봉인은 그리스도인이 영원에 있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서게 될 때까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확실한 보증이다.

성령의 상징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님 안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을 경배한다(요 4:24).
우리는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경배한다(빌 3:3). 우리는 성경을 쓰신 성령님을 통해서만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고전 2:14). “이는 성령께서는 모든 것 심지어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도 통찰하시기 때문이라”(고전 2:10).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님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 연합은 어찌나 밀접한지 성도는 성령님의 노예라고 불린다. “영 안에” 있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증거이다(롬 8:9). “영 안에” 있게 되는 것은 소리지르고 고함치고 울부짖고 입에 거품을 물며 뒤로 자빠지고 황홀경에 빠지는 체험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아니다.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성령님 안에 있다(롬 8:9). 그리스도인은 성령님 안에서 산다(갈 5:25). 그는 성령 안에서 행한다(갈 5:25). 그의 지혜는 성령님 안에 있다(행 6:3). 그는 성령님 안에서 기도한다(엡 6:18).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의 사람이 아니니라”(롬 8:9). “그러나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7).

 

  “영 안에 있는 것”은 요한계시록 4장에서 요한이 갑자기 영적인 몸으로 변모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로마서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상태가 아니다. 거듭난 사람은 항상 영 안에 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는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고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요 4:24). 그의 머리는 하늘에 있다. 그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 “그러나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7). 그는 그리스도의 뼈와 몸과 살의 일부이다(엡 5장). “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며...”(고전 12:13). 그리스도인들은 영 안에서 산다(갈 5:25). 왜냐하면 그들의 삶이 주 예수님과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안에서 행한다(갈 5:25, 엡 5:8-10). 성령님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인도하시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하는 길을 인도하신다. 그리스도의 봉사는 성령님의 능력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행 6:3, 고전 2:4).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는 “영 안에서” 행해져야 하며 성령님께서 기록하신 내용에 따라 성령님께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신 내용 즉 성령님으로 인도되어져야 한다. 성경 지식 없이는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는 방법도 모르고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방법도 모르고 성령 안에서 행하는 방법도 모르고 “성령 안에서” 행해지는 그 어떤 것도 모른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들이 성령을 좇아서 살기 원하시고 육신을 좇아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은 영이시고 영과 진리 안에서 경배를 드려야만 한다) 어떻게 경배드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지 그 지시사항들을 성경 안에 기록하셨다. 이 지시사항들은 지켜져야만 한다. 사도행전 2:38을 왜곡시켜서는 안된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사도행전 2:38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을 혼잡하게 만들거나 이 구절이 믿는 자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필자가 말하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라.”는 것이다(딤후 2:15).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 말씀의 문맥을 살펴 누구에게 주어진 것인지 정확히 구분하여 그 말씀에 순종해야함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