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의롭다(로마서 5:1, 창세기 15:6)


창세기 12:1 / 개역개정,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가라(3212) - 가라 get 

야라크( ) יָלַךְ
스트롱번호 3212

1. 가다.  2. 1980 참조.
발음 [ yâlak ]
구약 성경  /  1549회 사용  
  • 1. 원형 가다, 걷다, 참조.
    • a. 원형 [주]1980 참조.


떠나(1004) - 집을 떠나 and from house 

בַּיִת 스트롱번호1004
1.

2.

장막

3.

왕하23:7.

발음 [ bayith ]
어원
연계형 בֵּית, 복수 어미활용 בָּתֵּיהֶם ,בָּתֵּיכֶם ,בָּתֵּינוֹ, 1129에서 유래한 약어로 보임
구약 성경
2036회 사용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 일반 사람들도 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아브람의 계시를 받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람의 심령 속에 내적으로 임했는지 분명치 않다. 
다만 '이르시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마르'(*)의 의미가 대개 '말한다', '이야기한다'란 점에 비추어 볼때 전자일 가능성이 크다.

본토 
- 혹자(Calvin)는 이를 '우르'로 이해하고 아브람이 구체적 소명을 받은 것을 우르에 있을 때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1:31). 
그러나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 떠난 곳이 '하란'인 점에 입각할때(4절) 이는 하란 , 더 나아가 우르와 하란을 포함하는 메소포타미아 전지역을 가리키는 것임에 분명하다.

떠나...가라 
- '누가 네 뒤에 남든지 상관 말고 너를 위하여 떠나라' 는 의미이다. 
기독교 역사는 이러한 떠남과 분리의 역사인데 오늘날 우리 성도들 역시 죄악된 이 세상에서 분리되어 의와 거룩을 좇는 순례의 길을 떠나야 한다(롬 12:2).

내가 네게 지시할 땅 
- 직역하면 '내가 네게 보여 줄 그 땅'. 여기서 '보여 줄' 은 미래 미완료형으로 아직까지는 보여지지 않으나 미래에는 구체적으로 보여질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땅'은 아브람으로서는 불명확하나 하나님으로서는 이미 작정해 놓은 가나안 땅을 의미한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Abram believed the LORD, and he credited it to him as righteousness.

 여호와를 믿으니 
- '믿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만'(*)은 '신뢰하다'(대하 20:20; 욥 39:12)는 뜻으로 아브람이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그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했으며 더 나아가 이미 계시된 '여자의 후손' 메시야에 대하여도 신앙하였음을 증거해 준다(요 8:56; 히 11:1).

의(義) 
- '차다크'(*, 의로운 상태가 되다)에서 온 말로 간단히 '의의 옷'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죄인으로(3:10; 사 20:3; 고후 5:3; 계 3:17, 18) 오직 하나님께서 덧입혀 주시는 '의의 옷'으로만 그 죄악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롬 3:23-28; 4:7, 8; 계 19:8).
 
여기시고
 
- '정하다'(시 106:30), '계산하다'(레 27:50), '짊어지게 하다'란 뜻으로 여기서는 곧 전가된 '의(義)'를 나타낸다. 
한편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인 전가(轉嫁)의 예를 살펴보면 
1. 전 인류에게 전가된 아담의 죄(롬 5:12) 
2. 그리스도에게 전가된 인류의 죄(사 53:5, 6; 고후 5:14, 15; 히 2:9) 
3.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죄인에게 전가된 하나님의 의 (롬 4:18-24; 빌 3:9) 

이상에서 우리는 본래 칭의받기에 부족한 죄인이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그에게 전가된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신율(神律) 앞에서 무죄한 상태로 간주됨을 알 수 있는데 본절에 나타난 바 아브람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Therefore, since we have been justified through faith, we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로마서 3:2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갈라디아서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야고보서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025년 7월 6일 성령강림 후 제4주 및 맥추감사주일
설교 : 믿음의 사람(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지난 6월 8일 성령강림주일 설교를 간략하게 요약합니다.
성경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
"새로운 피조물"
즉 "새 사람"에 대하여 소개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려면 세 가지 새로운 것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는 새로운 관계
둘째는 새로운 소유
셋째는 새로운 선택

오늘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중심으로 "믿음의 사람"에 대하여 증거하려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려면 첫째는 영적 연합, 둘째는 영적 생활, 셋째는 영적 믿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영적 연합이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두 강도 뿐이었습니다.
두 강도의 이름을 "디스마"와 "게스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도 아니고 내가 임마누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성별되었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건에 참여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건에 참여한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영적 연합을 의미합니다.

영적 생활이란?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 삶의 주체는 바로 나라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고 합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계신다는 것은 성령이 주체가 되는 삶을 말합니다.
따라서 영적 생활이란 육체의 주인으로 내가 주인이 아니라 영혼의 주인이 되시는 성령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영적 생활이라고 합니다.
영적 생활이란 삶의 주인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 믿음이란?

영적 믿음이란 이미 영적 연합을 이루었고 영적 생활을 하기 때문에 영적 믿음이 아니면 영적 행활도 영적 연합도 불가능하므로 영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영적 믿음만이 영적 연합과 영적 생활을 지탱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영적 믿음이란 영적 연합과 영적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결론 /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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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스라엘 달력 절기

이스라엘 달력

성경에서 사용되는 달력 체계는 매우 복잡하고 어지럽습니다. 성경 안에서도 다양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복잡하고 어지럽습니다. 아래의 표를 통해 대략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태양력과 태음력

성경에서 사용되는 달력은 종교력이든 민간력이든 기본적으로 달을 기준으로 하는 태음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고대에는 시간을 알 수 있는 방법이 하늘의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보고 계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태양력은 그레고리력으로 1582년 교황 그레고리 13세가 도입한 것으로 천문학이 발달한 중세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 이전은 대부분은 태음력이었다. 하지만 태음력은 잘 맞지 않기 때문에 오차들을 수정하기 위해 일부를 태양력을 넣어 오차를 줄이려는 시도를 한다. 이것이 윤달이다. 참고로 이집트를 태양력을,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태음력을 사용한다.

종교력

종교력은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면서 시작된 달이다. 유월절이 시작되는 그 달을 첫 달로 하고 1년을 계산하는 방식이다. 태양력 3월중하순에 걸쳐 있다. 이 때는 늦은비가 내리는 시기로 얼마 후에 보리 추수가 시작되고, 50일은 오술절로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날이기도 하다.

민간력

민간력은 10월 중순경이 1월로 시작한다. 나팔절이 있는 달이다. 나팔절은 첫 시작을 의미하는 달리다. 이 때 대속죄일이 있다. 장막절이 있어 세 절기가 한 달 안에 다 이루어진다. 민간력이 어디서 부터 시작했은지 알 수 없지만 당시 레반트 지역에서 사용하는 달력이었을 것을 보인다.

히브리/바벨론력

히브리 달력이 또 하나 있다. 히브리 달력은 종교력과 대체로 일치한다. 바벨론 포로 이후 바벨론식으로 고쳐 부른다. 아마도 종교력을 주 달력으로 쓰고, 포로이후는 바벨론식 이름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달력

종교력 민간력 태양력 히브리(바벨론) 월력 절기 농사
1월 7월 3-4월 니산(아빕)월 1일 신정
14일 – 유월절(출 12장)21일 – 첫 열매
15일 무교절 7일간
17일 초실절
늦은비, 보리추수 건기
2월 8월 4-5월 이야르월      
3월 9월 5-6월 시반월 6일-칠칠절(오순절,맥추절)(신16:9-12절) 밀 추수
4월 10월 6-7월 탐무스월    첫 포도
5월 11월 7-8월 아브월      
6월 12월 8-9월 엘룰월   14-15일 부림절, 에9:26-28 포도 추수
7월 1월 9-10월 티쉬리월 1일- 나팔절
10일 -대 속죄일(레 16장)
15-21일-장막절(초막절, 7일간)레 23:33-36
경작
8월 2월 10-11월 마르헤스반월    이른 비, 곡물 파종 우기
9월 3월 11-12월 기슬르월(엘롤) 25일- 수전절, 요한복음 10:22   
10월 4월 12-1월 테벳월      
11월 5월 1-2월 스밧월      
12월 6월 2-3월 아다르월 13-14일-부림절(에스더 9장)   
      윤달 아다르세니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에 대한 기본적 정의


한글은 명사와 동사, 또는 동명사 등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고 사용합니다.
물론 저도 그럴 것입니다.
이것은 한글이 갖는 특성 때문에 모든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간략하게 이러한 용어와 사용법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믿음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명사로서의 믿음. 믿음 faith.

믿음은 믿는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동사적 성향이 매우 강합니다.
나는 너를 믿는다고 말할 때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하는 것입니다. 믿는 것, 자체를 믿음으로 규정합니다.

동사로서의 믿음, 믿는다. believe.

동사로서의 믿음은 누군가를 신뢰하는 행위로서의 믿음이다.
명사로서의 믿음을 규정하는 것이라며, 동사로서의 믿음은 관계적입니다.
즉 ‘나는 너를 믿어’라고 말하면,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이 갖추어야할 기본적 요소를 발견합니다.

믿음의 세 가지 요소

첫째는 믿는 사람이 존재
둘째는 믿는 대상이 존재
셋째는 믿는 내용이 존재

예를들어봅시다. ‘나는 너를 믿어’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나는 네가 방금 ‘민수가 학교에 갔어’라고 말한 것을 믿어.
  왜냐하면 너는 지금까지 나에게 거짓말한 적이 없거든.
  그리고 너의 말은 신빙성이 있어 보여 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믿음의 세 가지 요소라고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세 가지 요소를 구분하여 믿음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믿음의 3요소

믿음의 대상은 누구인가?
- 하나님과 그리스도

믿음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할 부분은 믿음의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과 내용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봅시다.

믿음의 대상 하나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시간과 역사를 주관하시며, 만물을 통치하시는 능력의 주인이십니다. 이러한 정의는 과도하게 간략하지만 명확한 정의입니다. 하나님을 계명을 주셨고, 그 계명을 사람들이 어김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작정하시고 보내주십니다. 순종의 삶을 살았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함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죽은 지 사흘만에 살려내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십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인류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 예수 그리스도

예수는 구약 성막에서 드렸던 제물의 본질이십니다. 모든 죄를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하십니다.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에 오르십니다. 천상에 계신 예수님은 보좌에 앉으셔서 영원히 통치하십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믿음의 내용이며 대상입니다.

믿음의 과정 성령의 적용과 신뢰

믿음은 사실의 인지를 너머 확신과 신뢰로 나아가야합니다. 믿음의 과정은 사실의 인지, 사건의 이해, 사건의 확신과 신뢰로 나아갑니다. 이 과정에서 성령이 역사하여 온전한 믿음의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조직신학적 용어로 이 과정을 ‘구원 서정’이라고 부릅니다. 9과정으로 나누어 설명을 하지만 엄밀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명-중생-회심-믿음-칭의-양자됨-성화-성도의 견인-영화

1. 소명(召命)(calling)
2. 중생(重生)(regeneration)
3. 회심(悔心)(conversion)
4. 신앙(信仰)(faith)
5. 칭의(稱義)(justification)
6. 입양(入養)(adoption)
7. 성화(聖化)(sanctfication)
8. 견인(堅忍)(perseverace)
9. 영화(榮華)(glorification)

구원서정은 후에 따로 다루고 오늘은 믿음의 과정만을 간략하게 다룹니다.

1) 사실의 인지 단계

사실의 인지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사실, 또는 성경에 기록된 구속사적 사건들을 말합니다. 역사적 사건을 누구나 믿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성경은 신화나 예수님의 역사적 사건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은 역사적 사건에 뿌리는 둡니다. 가상으로 꾸며낸 이야기에 근거하지 않고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는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믿음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성경의 기록된 사건들이 역사적 사건이란 사실을 믿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2) 확신의 단계

두 번째 확신의 단계는 그 사건이 나를 위한 사건으로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단지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나를 위한 것으로 받아 들아들이는 것으로 확신하기에 이르러야 합니다.

3) 신뢰의 단계

마지막 신뢰의 단계는 나의 삶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삶을 말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하고, 계명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삶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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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역사와 시대 구분

성경의 시대구분

성경의 역사는 창조에서 종말까지 이릅니다. 하지만 모든 세계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입니다. 창조의 시기를 가늠할 수 없으나 아브라함이 살았던 시대는 기원전 2200년 경으로 보입니다. 이후 야곱이 애굽에 내려가고 430년 정도가 흐른 뒤 모세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지내고 요단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이후 사사시대를 거쳐 왕국시대, 그리고 멸망과 포로 시기, 재건시기와 중간기로 넘어가면서 구약은 끝이 납니다. 이후 예수의 탄생과 공생애, 부활 승천 이후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사도들이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사도들 이후 성경의 내용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 시대라고 부르지만 이 부분은 성경에 나와있지 않고 곧바로 요한 계시록의 종말 시대로 넘어갑니다. 엄밀하게 계시록은 장차 일어날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성경 안의 역사로 보기르 힙듭니다. 그러므로 저는 구약과 신약의 역사를 사도행전까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요한계시록이 1세기 말에 기록되었다고 가정할 때의 성경 속의 역사를 아브라함부터 계산한다면 약 2300년 정도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시대를 구분하여 간략하에 서술하겠습니다.

구약

1) 창조시대
2) 족장시대
3) 출애굽시대
4) 정복-정착시대
5) 통일왕국시대
6) 분열왕국시대
7) 단일왕국과 포로기
8) 재건시대

신약

1) 예수의 탄생과 공생애
2) 사도시대
3) 교회 시대
4) 종말

성경의 역사

1) 창조시대

창조시대는 창조로부터 아브라함 직전까지의 역사를 다룹니다. 성경에 기록된 문자적 역사는 대략 기원전 4000년 전까지 이릅니다. 하지만 고대의 표기 방식이 모호하기 때문에 대체로 아브라함이 살았던 기원 2200년 즈음부터 역사의 시대로 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거부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습니다. 그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이후 가인과 아벨을 낳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때려죽이고 하나님께 저주를 받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다시 동침하여 셋을 낳고 살다 죽습니다. 셋의 후손들이 점점 퍼져 나가고, 다른 한쪽은 가인의 후손들이 퍼져 나갑니다. 사람들이 퍼져나갈수록 죄를 짓지 하나님은 홍수로 그들을 멸합니다. 노아는 방주를 짓고 살아남습니다. 홍수 이후 노아는 방주를 나와 포도주 농사를 짓게 되고, 함이 술 취한 노아를 놀리고 저주를 받습니다. 홍수 이후 셈과 함과 야벳을 통해 인류가 다시 번창합니다. 이들 중 일부가 시날 평지로 가다 바벨탑을 쌓게 됩니다.

2) 족장시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열두 아들과 디나를 낳습니다. 형들의 미움을 받은 요셉은 애굽에 팔려 가게 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서른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이후 기근이 전 세계적으로 오면서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가서 곡물을 사는 과정에서 요셉에게 발견됩니다. 요셉은 형들을 테스트하게 되고 결국 형들에게 자신이 요셉인 것을 밝힙니다. 이후 야곱과 가족들을 애굽으로 데려오고 고센 땅에 머물게 되면서 숨을 거둡니다. 요셉 역시 마지막 숨을 거두지만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가나안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3) 출애굽시대

출애굽은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 간 지 430년이 지난 후에 일어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는 성경에 나와 있는 역사나 시기는 현대의 시각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과도하게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려 합니다. 굉장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이 부분도 후에 따로 다루도록 하고 여기서는 넘어갑니다. 하여튼 성경의 문자 대로 400년이 조금 지나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합니다.

처음 소명을 받은 모세는 애굽의 바로를 찾아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내라고 말하지만, 바로는 듣지 않습니다. 저라도 그럴 겁니다. 그렇게 출애굽의 기적이 시작됩니다. 열 가지의 기적은 애굽인들에게는 열 가지의 재앙입니다. 마지막 재앙은 장자의 죽음으로, 유월절이 제정됩니다. 이후 바로는 모세를 불러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나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떠나자 곧바로 후회다고 전차 육백 승을 보내 잡아 오도록 명합니다.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은 앞으로 뒤로도 가지 못하는 상황에 부닥치지만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도 출애굽 시키고, 애굽의 군대는 홍해의 물속에 수장시킵니다.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은 처음 시내 산으로 가서 율법을 받고, 성막을 짓습니다. 이후 38년 동안 광양을 방황하며 출애굽 1세대는 모두 죽게 됩니다. 결국 모세도 모압 광야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고 느보산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후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로 지명을 받게 되면서 광야 시대는 끝이 납니다.

4) 정복-정착시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요단을 건너 길갈에서 숙박합니다. 길갈에서 다시 할례의식을 행하고 유월절을 보냅니다. 광야 40년 동안 기적으로 만나가 내렸지만, 유월절을 맞이해 그 땅의 소산을 먹자 만나가 그칩니다. 이후 7년 동안 정복 전쟁을 하게 되고 열두 지파는 가나안 땅을 분배받습니다. 큰 전쟁은 끝이 났지만 각 지역에서 지파별로 이루어지는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사기는 각 지파가 자신들이 분배받은 땅을 정복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처음은 좋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복에서 실패하게 되고 후에는 오히려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밀리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후에 그들은 가나안 인들과 섞여 살 게 되면서 가나안 인과 친구처럼 지내면서 그들의 악한 관습을 배우면서 타락해 갑니다. 그들이 범죄할 때마다 하나님은 사사들을 보내 그들을 구원합니다. 하지만 결국 다시 범죄하는 악순환이 계속 일어납니다. 사사기 마지막 부분에서는 타락한 베냐민 지파를 응징하기 위해 나머지 열 한지 파가 연합하여 공격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5) 통일왕국시대

이스라엘의 왕국(kingdom) 시기는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울과 다윗, 솔로몬은 모든 이스라엘의 왕이기 때문에 통일왕국 시대로 구분합니다. 솔로몬 이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분리되어 분열 왕국 시대가 도래합니다. 명칭에 있어서 정식적으로는 북쪽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왕국’이라 부르고, 남쪽을 ‘유다 왕국’으로 부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종종 이스라엘 전체를 말하기도 하므로 구분하기가 모호해 국가적 의미로 사용될 때는 북이스라엘로 부르기로 합니다. 남쪽 왕국도 유다 지파가 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혼돈하지 않기 위해 ‘남유다’로 부르기도 합니다.

사사 시대 말기에 하나님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나를 통해 사무엘을 낳게 하여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 활동하게 합니다. 사울을 통해 자멸 직전의 이스라엘이 소생하게 됩니다. 장로들이 찾아와 왕을 달라고 하자, 베냐민 지파인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초대 왕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처음 겸손했던 사울은 시기심이 강했고, 곧 교만해지고 말았습니다. 곧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 왕이 되도록 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지만 결국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아들 요나단과 함께 사망합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사울파와 다윗파로 나뉘어 내전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다윗이 승리하게 되고, 다윗의 왕 위에 오름으로 이스라엘의 왕족 전통 가문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다윗 언약을 통해 다윗과 후손들이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할 것이라 약속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납니다.

다윗은 정복 전쟁을 통해 주변의 수많은 나라를 굴복시키고 거대한 왕국을 형성합니다. 이후 솔로몬이 왕위를 물려받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때로 되돌아가자’라고 말할 때는 항상 ‘다윗의 때’라는 관념이 머리에 박혀 있습니다. <지금은 엘리야 때처럼>이란 CCM에도 ‘다윗의 때’에 예배가 회복된다는 가사 들어가 있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수고로 말미암아 최고의 부흥기를 맞이합니다. 전쟁도 일어나지 않고 다윗이 받은 축복을 향유하며 살아갑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고, 성을 건축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 하나님만을 섬기지 못하고 이방의 나라들과 혼인하여 우상들을 들여오는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경고하지만, 말을 듣지 않습니다. 결국 솔로몬이 죽고 나자 이스라엘은 분열하게 됩니다. 북쪽 지파들은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고 독립하고, 남쪽은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왕국을 형성하게 됩니다. 나중에 이 시기를 집중적으로 다룰 때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엄밀하게 북지파가 10지파, 남쪽이 2지파가 아닙니다.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습니다. 일단 남쪽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시므온 지파가 섞여 있으며, 심지어 상당수의 단 지파도 섞여 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레위지파가 남유다에 머뭅니다.


6) 분열왕국시대

분열왕국시대는 초기는 서로 대립, 중반이후 부터는 협력 관계로, 후에는 다시 대립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김으로 완전히 하나님을 떠납니다. 하지만 비록 위기가 있기는 했지만 예루살렘 성전이 있어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으로 남게 됩니다. 분열왕국 시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후에 자세히 다루고 여기서는 그냥 넘아가겠습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함으로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집니다.

7) 단일왕국과 포로기

북왕국이 망한 이후 남유다는 홀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남유다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우상숭배의 길을 걷게 되고 기원전 586년 신흥왕국이던 바벨론(신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유다는 왕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대부분으로 바벨론으로 끌려가 포로로 살게 됩니다. 하지만 완전히 멸망 당하지는 않고 자신들만의 게토(ghetto)를 형성하여 살아남게 됩니다. 포로 초기의 기록은 에스겔서 안에 담겨져 있고, 초기와 이후는 다니엘성서에 대략적으로 기술되어있습니다. 에스더서는 바벨론이 망하고 파사(페르시아) 시대 왕비로 있던 에스더를 중심으로 일어난 포로기의 이야기입니다. 멸망 70년이 차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예언한 대로 다시 이스라엘을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려 보내게 됩니다.

8) 재건시대

예루살렘의 귀환은 모두 세 번에 걸쳐 이루어지며 모든 유대인이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사로잡힌 사람들의 1/5 정도만 돌아왔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남겨진 사람들은 바벨론 회당을 짓고 자신들만의 사회를 일궈나갑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이들은 짐을 정리한 다음 성전을 건축합니다. 하지만 성전 건축은 주변 원수들에 방해 공작에 의해 중단되었다 후에 완전히 마무리됩니다. 느헤미야의 주도 아래 성벽 건축이 완공되고, 에스라와 느헤미야로 더불어 부흥기를 맞이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빛을 보지 못하고 역사의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가면서 소위 신구약 중간기 400년 정도 시작됩니다.

*중간기


중간기는 성경에 기록어 있지 않지만 신약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토대를 제공합니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페르시아가 멸망하고,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정복당하고 헬라 시대가 도래하며, 이후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들이 다스리는 시대가 도래합니다. 이후 약 100년 동안 마카비가문에 의해 독립을 쟁취하고 하스모니안 왕조를 구축합니다. 하지만 다시 로마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이두매인이던 헤롯 가문에 의해 지배를 받는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이때 예수님이 탄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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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아홉 가지 열매


성령의 9가지 열매는 바울의 초기 서신에 속하는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르는 삶에 대해 강조하며, 성령을 따르는 삶은 아래와 같은 9가지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성경 본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Greek NT: Nestle 1904

ὁ δὲ καρπὸς τοῦ Πνεύματός ἐστιν ἀγάπη, χαρά, εἰρήνη, μακροθυμία, χρηστότης, ἀγαθωσύνη, πίστις, πραΰτης, ἐγκράτεια· κατὰ τῶν τοιούτων οὐκ ἔστιν νόμος.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언급하기 전에 먼저 육신의 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앞선 육선의 일과 반대 되는 것이며, 대립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갈 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육체의 일에 대해 말하고 싶지만 그럼 글이 너무 길어지고 여기서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에 대해서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후에 갈라디아서를 묵상하면서 그 부분은 상세하게 다두도록 하겠습니다.

성령이 아홉 가지 열매

열매란 무엇인가?

성령의 열매를 언급하기 전에 먼저 성경 속에서 열매가 갖는 상징에 대해 조금만 언급하고 넘어갑니다. 열매는 결과 결론을 의미합니다. 최종적 결과를 의미하기 때문에 ‘명백함’ ‘확실함’ 등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행위의 최종점, 결과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을 알려면 그들의 ‘열매’를 봐야 한다 하십니다.

마태복음 7:16절에서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는데, 21-23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란 표현이 등장하고 결국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떠나가라 하십니다. 열매는 의인이든 악인이든 행위를 말하고 있음을 분명합니다. 즉 삶으로 드러난 명백한 행위가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잠언 18:21에서는 ‘혀의 열매’를 언급합니다. 말이 곧 행함으로 드러날 때를 말합니다. 호세아 10:13에서는 ‘거짓 열매’란 표현이 소개됩니다. 결국 열매는 먼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최종적인 결론, 확정, 심판 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령의 열매 또한 성령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의 삶 가운데 확정적으로 드러나는 습관, 행위 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열매에 대한 언급은 후에 더 깊이 다루고 여기서는 이러 정도만 이해하고 곧바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로 넘어가 봅시다.

사랑

사랑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아가페(ἀγάπη)’로 가장 흔하게 사랑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구약의 헤세드를 번역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 안에서 아가페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예수님의 자비 등으로 번역되며 일반 사람들의 언어로는 번역되지 않는 특이한 단어 중의 하나입니다.

희락

두 번째 성령의 열매인 희락은 헬라어 ‘카라(χαρά)’를 번역한 단어로, 일반적으로 ‘기쁨’ ‘즐거움’ ‘희락’ 등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기쁨은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이며, 하나님으로 인해 기쁨, 하나님을 향한 기쁨입니다.

화평

세 번째 열매는 화평입니다. 화평은 헬라어 ‘에이레네(εἰρήνη)’를 번역한 단어입니다. 성경은 에에레네를 ‘평화’ ‘화평’ 등으로 번역합니다. 영어 성경은 대부분 peace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바적으로 아는 평화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의 ‘샬롬’을 번역한 단어입니다.

오래참음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마카로수미아(μακροθυμία)’는 ‘멀다’ ‘긴’ 의 뜻을 가진 ‘마카로스(μακρός)’와 ‘전진하다’ ‘화를 내다”분내다’ ‘열정’이란 뜻의 ‘쉬모스(θυμός)’의 합성이 입니다. 갈 5:20에서 ‘분냄’으로 번역되었고, 계 14:19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로 번역되었습니다. 오래 참음은 단순히 버티는 것이 아니라 힘을 내고 열정을 내어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비

자비는 헬라어 ‘카레스토네스(χρηστότης)’를 번역한 것입니다. 롬 11:20에서는 ‘인자’로, 딛 3:4에서는 ‘자비’로 번역했습니다. 대부분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한 태도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자비는 도덕적으로 선하고, 타인에 대해 친절한 태도를 말합니다. 온유한 성품으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는 타인에 대해 친절하고 온유한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양선

양선은 헬라어 ‘아가소쉬네(ἀγαθωσύνη)’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영어를 보면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성경은 Goodness로 원의를 보면 ‘하나님을 닮음’이란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선(good)은 구약의 ‘토브’를 번역할 사용되기도 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토브는 ‘보시기에 좋았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창조의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충성

충성은 헬라어 ‘피스티스(πίστις)’를 번역한 단어입니다. 영어로 faithfulness로 해석해 보면 ‘믿을 수 있는’ 믿음이 충만한’ 등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일관성 성실성이 보장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맡길 때 그대로 해내는 능력인 동시에, 어떤 약속을 할 때 그 시간에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충성은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꾸준함과 성실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영어는 faith 외에도 trust 또는 confidence 등으로 번역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그 말은 변함 없이 삶을 통해 꾸준히 성실히 순종과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온유

온유는 헬라어 ‘프라우테스(πρᾳΰτης)’입니다. 영어로는 gentleness로 신사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온유는 양선과 매우 비슷한 단어입니다. 다만 온유의 경우는 관계적인 의미로 타인을 향한 친절한 태도를 포함한 성품입니다. 고후 10:1에서 바울은 이 단어를 ‘그리스도의 온유’로 사용하고 있으며, 딤전 6:11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성품으로서 ‘온유’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파라우테스의 기본형인 ‘파라우스(πραΰς)’가 사용된 마태복음 5:5에 의하면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마치 바다가 많은 강물을 받는 것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πραΰς는 ‘관용’이란 단어와 친구처럼 사용될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고후 10:1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권한다고 말하며, 디도서 3:2에서 역시 관용하고 온유함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내라 권면하고 있습니다.

절제

절제는 헬라어 ‘엑크라테이아(ἐγκράτεια)’를 번역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복잡한 설명이 필요 없는 단어로 영어로는 ‘self-control’로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성경적 의미에서 절제는 탐욕과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모든 죄는 절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죄의 본질은 탐욕입니다. 우리 안에 죄악된 성향이 남아 있어도 성령을 따르는 자들은 ‘절제’합니다. 이것이 절제의 의미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하나씩 깊이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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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상징 이미지 목록

상징과 이미지

상징과 이미지는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차이에 두지 않고 같은 맥락으로 보겠습니다. 비평이 아닌 이상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여기서는 성경에 나타난 다양한 상징과 이미지에 대한 목록을 제공합니다. 각 목록은 용어, 이미지 관련 글로 이동하여 상세히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워낙 방대한 작업이나 짧은 시간에 완성할 수는 없지만 시간이 되는대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글에 링크가 생성되지 않았다면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곳에 소개된 용어와 단어들은 필요에 따라 비주기적으로 계속하여 수정, 보완, 축소, 삭제 될 수 있습니다.

[참고 도서 및 목록]

이곳에서 사용되는 글은 각 상징과 이미지에 해당되는 글에 소개하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은 아래와 같습니다. 각 도서는 갓피플에서 구입할 수 있도록 링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세세한 내용들은 각 인터넷글과 논문, 주석 등을 참고하였기에 각 글의 내용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킨에 각주 기능이 없어 정확한 출처는 밝힐 수 없지만 가능한 하단에 참고 문헌을 실을 예정입니다.

더 많은 참고 도서들이 있지만 이정도만 소개합니다. 더 깊은 연구를 위해서 필요한 분들은 구입해서 찾아 읽으시면 성경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관련 책과 도서들은 후에 기회가 되면 차례대로 한 권씩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상징목록

사람의 신체와 관련된 상징

머리, 머리카락, 이마, 얼굴, 코, 입, 귀, 목, 가슴, 팔, 손, 손가락, 다리, 발

창자, 뼈, 이, 눈물,

성경속의 신체와 기관 에 관련된 상징적 의미와 내용들은 아래의 글에서 더욱 상세히 다룹니다.

생활과 문화에 대한 상징들

이 부분은 아래의 링크를 통해 목록을 확인하십시오. 내용이 광대하고 복잡하여 따로 구분하여 올립니다. 이곳에 실린 내용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주거용

집, 천막, 움막, 동굴, 왕궁, 성막과 성전(성막과 성전은 하단의 <성막과 성전> 관련 상징 참고 바람)

음식과 식생활

빵, 전, 나물, 육류, 생선, 부정한 음식과 정한 음식

생활과 마을과 관련된 상징들

의류, 마을, 거리, 행위들, 탄생과 죽음, 가족, 배신, 우정, 의리, 사랑, 결혼

자연과 계절과 관련된 상징

[자연]

산, , 바위, 흙,

[계절]

봄, 여름, 가을, 겨울

[날씨]

맑음, 흐림, 바람, 구름,

[우주/하늘]

빛, 어둠, 태양, 달과 별, 우주, 하늘

동물과 관련된 상징

포유류

조류

비둘기 까마귀 독수리 갈매기 참새

파충류 및 그 외 동물

뱀, 도마뱀, 거미,

식물과 관련된 상징과 이미지

식량으로 사용되는 식물들

[가나안 7대 소산물] 밀, 보리, 올리브, 포도, 무화과, 석류, 대추야자, 나물, 쓴나물,

독초 / 가시류

성막 / 성막 관련된 상징과 이미지

성막 : 뜰, 테두리, 줄, 기둥, 성소, 지성소,

성막뜰 : 제단, 물두멍

성소 : 등잔대, 떡상, 향단, 휘장

지성소 : 법궤

성경 속 숫자 상징

숫자와 관련된 상징들을 소개합니다. 이 부분 소개란은 따로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간략한 소개글로 대신하고, 각 숫자에 대한 상징들은 개별 글에서 소개합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에서 1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경우가 흔하며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은 유일(1)하신 분이며, 오직 한 분이십니다. 5는 기본적으로 완전수이자 모세오경을 암시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이스라엘이 절기는 5라는 숫자를 통해 완성되는 경우가 종종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순절은 7의 7곱으로 49일이 지난 다음 날로 50일이 되는 날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렇듯 성경은 숫자를 통해 유의미한 메시지를 전달할 때가 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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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몸, 신체

사람에 신체에 대한 상징들

성경에는 사람의 신체와 관련하여 다양한 상징들이 사용됩니다. 특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람의 신체에 비유하는 사용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사람의 신체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의미를 드러 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머리카락은 존중과 명예를, 팔은 보호와 힘, 뼈는 힘과 중심 등을 뜻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신체의 다양한 지체와 기관을 소개하며, 세세한 내용은 각 글에서 더 자세하 소개합니다.

머리

머리에는 다양한 기관들이 존재하는 곳으로 다양한 의미가 부여됩니다. 단지 머리로만 사용될 경우 ‘처음’ ‘시작’ ‘앞서다’ ‘우두머리’ ‘장자권’ 등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1:1에 사용된 태초에의 히브리어 ‘베로쉬트(בְּרֵאשִׁ֖ית)’는 머리를 뜻하는 ‘로쉬’가 들어가 있으며, 여기서는 ‘처음’ ‘시작’이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머리카락

머리카락은 두상을 덮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에 그 사람의 존재 전체를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명예와 매력 등을 나타 내기도 합니다.

얼굴

얼굴은 숨겨진 마음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교만과 자만, 부끄러움과 수치, 슬픔과 걱정 등 다양한 의미가 얼굴을 통해 표현 됩니다. 하나님께 이 표현이 사용되면 하나님의 임재나 진노, 뜻을 드러내는 계시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얼굴이란 표현보다는 ‘낯’으로 사용하지만 히브리어는 페니로 동일할 단어입니다. 얼굴과 관하여 관용적 표현이 많습니다.

낯을 향하다.

낯을 피하다.

낯을 들다. 낯을 들지 못하다.

낯을 따르다. 낯을 보지 않다.

다양한 의미는 후에 [사람의 신체 상징 – 얼굴]편에서 더 깊이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눈(eye)

눈은 머리 안에 있고, 얼굴에 속해 있습니다. 감각 기관으로는 가장 높은 곳에 있습니다. 눈은 보는 것과 연관되며, 지식과 탐욕과 깊은 연관이 있는 기관입니다. 인류의 최초의 타락은 봄으로 일어났고, 자신의 욕망이 드러나는 곳이 ‘눈’입니다. 즉 눈은 마음이 가는 곳입니다. 종종 보는 행위를 하나님의 지식과 전지함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형벌로서 눈을 뽑기도 하는데, 그가 가진 아름다움과 탐욕, 모든 능력을 소실 시키기 위함입니다.

귀(ear)

귀는 오감 중에서 듣는 역할을 합니다. 청각은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오는 수용적 기관으로 성경 안에서도 수동적인 역할을 합니다.하지만 긍정적 의미로 사용될 때는 의지나 책임의 의미를 갖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보이는 신’을 ‘들리는 신’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존재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듣는’는 존재입니다. 듣는 것은 순종을 의미합니다.

입술(lips)

입술은 독립적으로 사용된 것이 적지 않지만 의미상으로 보면 입이나 혀의 기관처럼 ‘말’ ‘언어’ 등과 관련이 있습니다.

  • 레위기 5장4절 만일 누구든지 입술로 맹세하여 악한 일이든지 선한 일이든지 하리라고 함부로 말하면 그 사람이 함부로 말하여 맹세한 것이 무엇이든지 그가 깨닫지 못하다가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는 그 중 하나에 그에게 허물이 있을 것이니
  • 민수기 30장6절 또 혹시 남편을 맞을 때에 서원이나 결심한 서약을 경솔하게 그의 입술로 말하였으면
  • 욥기 13장6절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이러한 구절들의 맥락을 보면 입술을 말이 나오는 입을 상징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입이 먹는 것과 말하는 것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진 반면 입술은 오직 말하는 것과 언어 등의 의미만을 한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neck)

놀랍게 성경 속에서 신체의 일부인 목은 매우 주의하여 사용됩니다. 속박과 복종의 의미로 사용되기도하며, 목숨과 숨통이란 의미이기도 합니다. 전쟁에서 패한 장수는 적군의 장수에 의해 발로 목을 밟히는데 이것은 완전한 패배와 죽음을 뜻합니다. 단정한 여인들은 목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목을 드러내는 행위는 남성을 유혹하는 방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성적으로 매우 민감한 부분이기도하고, 목을 보이는 행위는 남성을 유혹하는 행위로 간주 되기도 합니다.

배꼽(navel)

성경에서 배꼽은 딱 두 번 언급됩니다. 한 곳은 성적 매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른 한 곳은 생명의 진원지를 의미합니다.

  • 아가 7장 2절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 에스겔 16장 4절 네가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두 가지는 개념이 다른 듯 보이지만 결국 같은 의미입니다. 마치 여성의 가슴이 성적인 부분이자 생명의 힘이 되는 젖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배꼽은 중심이란 의미이자, 시작 출발의 개념이 들어가 있습니다. 배꼽이 있다는 것은 어머니가 있다는 것이고, 어머니를 통해 이 땅에 태어났음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아가 7:2에서 배꼽은 쉬레르(שֹׁרֶר)이고, 에스겔 16:4의 배꼽은 쉐르(שֹׁר)입니다. 쉐레르의 기본은 형은 쉐르로 결국 동일한 단어라할 수 있습니다. 쉐레의 경우 잠 3:8에서 ‘몸’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잠에서는 몸 전체를 뜻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팔(arm)

팔은 특이하게 사람 자체에게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하나님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팔은 대체로 힘과 능력, 또는 보호를 뜻합니다. ‘펴신 팔'(신 11:2)의 경우 하나님의 능력의 현현을 뜻하며, ‘팔 아래'(신 33:27)는 보호를 뜻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21:4-5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뜻하기도 합니다.

다리

다리와 발은 신체 중에서 가장 아랫 부분에 해당됩니다. 발은 종종 다리 안에 포함되거나 따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다리는 움직이는 행위나 이동하기 위한 수단 등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는 표상적 행위이기도 합니다. 걸음과 다리는 혼용되어 사용되며, 대체로 걸음으로 사용됩니다.

발은 신체의 가장 밑바닥 기관입니다. 손과 더불어 다른 외부적 접촉이 불가피하여 정결 의식 때 반드시 씻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가장 더럽기 때문에 발로 사람이나 동물을 밟는 행위는 정복과 모욕을 주는 행위입니다. 발로 상대방의 목을 밟는 행위는 승리 또는 정복을 의미하며, 발을 씻는 행위는 가장 미천하고 천한 자가 해야할 일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긴 이유는 바로 겸손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간은 신체에서 내장기관이며, 몸의 독소를 해독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일부이기도하고, 이방인들이 점을 칠 때도 간의 모양으로 사용합니다. 간은 종종 고통과 슬픔을 뜻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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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구조와 상징

성막이란

성막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시내산에 도착해 하나님의 명령으로 지어진 장소입니다. 성막에 관련된 상징과 신학, 의미들은 후일에 차근차근 다루기로 여기서는 개론적인 이야기만을 소개합니다.

성막과 성전

많은 일반인들이 헷갈려 하는 부분입니다. 사실 간단하고 쉬운 부분이지만 간과하기 쉬운 내용이기도 합니다. 성막은 출애굽 때 만들어진 천과 가죽으로 덮여진 곳이며, 성전은 후에 다윗이 지으려다 하나님의 거절로 하지 못하고 그 아들 솔로몬이 짓게 된 돌과 나무로 지어진 거대한 건축물입니다. 성막은 레위인들에 의해 거두어지고 다시 세워지는 방식으로 옮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전은 건축물이기에 옮겨질 수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지만 여기서는 넘어갑니다. 우리가 주의해야할 부분은 성막이며, 성막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성전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전은 이스라엘의 정체성, 현재 유대인들의 정신적인 장소이기에 따로 주의해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성막의 구조와 크기

성막은 바깥 칸막이로 되어 있고, 그 안에 성막 뜰이 있고, 성막 뜰 안에 성막이 들어가 있습니다. 성막은 성소와 지성소로 되어 있으며, 성소는 매일 들어가 금촛대의 기름을 점검하고 향을 피워야 합니다. 진설병상의 떡도 교환합니다. 지성소에는 일 년에 딱 한 번 대속죄일에 들어가며, 향을 피우고 피를 뿌려 죄를 정결케 합니다.

성막의 바깥 테두리는 가로 100규빗, 세로 50규빗의 장방형(長方形, 직사각형)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방향은 동쪽으며, 출구는 동쪽에 있으며 유일합니다. 동쪽문의 크기는 20규빗입니다. 성막의 크기는 30규빗 10규빗입니다. 성소는 20규빗, 10규빗이며, 지성소는 10규빗 10규빗의 정방형(正方形, 정사각형)입니다.

성막 문

성막 문은 성전 뜰로 들어가는 바깥문이 있고, 뜰에서 성소로 들어가는 문,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있습니다. 성전뜰로 들어가는 문을 동쪽에 있어 종종 동문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뜰에서 성소로 들어가는 문에 대한 호칭은 성경에 없습니다.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은 ‘휘장’으로 되어 있고, 그룹들과 별들이 수 놓아져 있습니다. 이것은 휘장은 하늘을, 지성소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는 문은 오직 하나며 유일하기에 신약의 유일하신 예수님을 뜻한다고 봅니다.

성막뜰

성막 뜰에는 가장 앞에 번제단이 있고, 뒤로는 물두멍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막 뜰에서 제물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다른 도구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제물들은 대체로 번제단의 오른쪽, 즉 북쪽에서 잡았습니다.

번제단

번제다는 정방형으로 되어있고, 정금으로 도금되어 있습니다. 24시간 불이 꺼지면 안 되며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신 불로 불을 지펴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다른 불로 드릴 경우 하나님의 저주를 받습니다.

물두멍

뭉두멍은 놋을 펴서 만든 것인데 유일하게 크기가 지정되어 있습니다. 제사를 마치거나 성소로 들어갈 경우 반드시 물두멍에서 씻어야 합니다.

성소

성소는 장막의 앞 쪽 부분이며, 그곳에는 금등대, 떡상, 분향단이 있습니다. 크기는 20규빗 10규빗입니다.

성소 상상도

금등대 / 금촛대

종종 금촛대로 표현을 하는데 옳지 않습니다. 등대이며, 기름을 넣어 불이 꺼지지 않게 합니다. 모두 7개의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하누카칼로 불리는 마카비 혁명으로 만들어진 수전절에는 8개의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공식 절기는 아니나 예수님이 지킨 것으로 봐서 민족적 성향이 강하지만 모두가 함께 지킨 절기입니다. 금등대는 빛이신 예수님, 하나님의 말씀 등을 상징합니다.

떡상

떡상은 매일 새 떡을 만들어 올려 놓는 것으로 모두 12지파를 상징하여 12개의 떡을 올립니다. 하늘의 만나, 떡으로 내려오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분향단(Altar of incense)

분향단은 휘장 바로 앞에 자리하며 향을 하나님께 올리는 것입니다. 향은 찬양이며 기도입니다. 향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자연현상으로 구름과 같은 의미입니다. 정방형이며, 네 개의 뿔이 달려 있습니다.

휘장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휘장은 천들을 짜서 만들었습니다. 천사의 일종인 그룹과 별 달 등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일반 하늘을 뜻합니다. 성소가 땅이라면 지성소는 하늘의 하늘 속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뜻합니다. 시은소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라는 뜻입니다.

지성소

지성소는 일년 에 한 번, 대제사장만 들어가는 공간입니다. 들어갈 때는 자신을 완전히 정결하게 해야하고, 정해진 복장과 정해진 방식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부정을 타서 죽게 될 수 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방울을 달고 들어가는데 한 동안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죽었다고 생각하고 발에 묶인 밧줄로 끄집어 냅니다.

법궤 / 시은소

법궤(Ark of the Covenant, ארון הברית)는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입니다. 법궤는 뚜껑과 관으로 되어 있습니다. 관에는 만나 항아리, 십계명,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가 있습니다. 뚜껑은 두 명의 그룹이 서로 날개를 합하여 둘러싸는 형태로 그곳을 시은소라고 부릅니다. 법궤는 반드시 네 명의 제사장이 어깨에 메고 옮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후일에 다윗이 법궤를 수레로 옮기다 ‘베레스 웃사’ 사건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법궤를 메고가는 제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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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열두 지파 이름과 기원

이스라엘 열두 지파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르우벤 지파

2. 시므온 지파

3. 유다 지파

4. 잇사갈 지파

5. 스불론 지파

6. 단 지파

7. 납달리 지파

8. 갓 지파

9. 아셀 지파

10. 에브라임 지파

11. 므낫세 지파

12. 베냐민 지파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기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야곱의 열두 아들에게서 기원을 했습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야곱의 손자이며, 요셉의 아들입니다. 레위와 요셉이 빠지고 요셉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추가되어 모두 열두 지파가 형성이 됩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과 아내

야곱의 열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창세기 29장과 30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에게 두 명의 아내가 있었고, 후에 두 명이 추가되어 모두 네 명의 아내에게서 딸 디나를 비롯하여 아들 열두 명이 태어납니다. 순서와 이름, 아내의 이름을 정리해 봤습니다.

순서 이름
어머니
1 르우벤(Reuben)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라도다(창 29:32) 레아
2 시므온(Simeon) 내게 이 아들도 주셨다. 즉 더하다.(창 29:33) 레아
3 레위(Levi) 연합하다 (창 29:34) 레아
4 유다(Judah)  찬송하다 (창 29:35) 레아
5  단(Dan) 내 호소를 듣다 (창 30:6) 빌하(라헬)
6 납달리(Naphtali) 경쟁하여 이겼다 (창 30:8) 빌하(라헬)
7 갓(Gad) 복되도다 (창 30:11) 실바(레아)
8 아셀(Asher) 기쁘다 (창 30:13) 실바(레아)
9 잇사갈(Issachar) 값을 주다 또는 더하다.(창 30:18) 레아
10 스불론(Zebulun) 높이다 (창 30:20) 레아

디나(Dinah) 레아의 딸로 세겜성에서 강간 당한다 (창 34장) 레아
11 요셉(Joseph) 내게 더하다 (창 30:24) 라헬
12 베냐민(Benjamin) 오른손의 아들(창 35:18) 라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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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나

호산나의 뜻과 용례

호산나는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입니다. 성경에는 모두 5번에 걸쳐 사용되지만 시간적 배경은 예수님이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기 위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들어가시는 날 사람들이 환영하며 외친 것입니다.

  • 마태복음 21장 9절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그 외에도 마 21:15, 막 11:9, 막11:10, 요 12:13에 사용되지만 모두 동일한 사건 속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던 용어가 갑자기 등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의 원출처는 구약성경이며, 시편 118:25에 사용된 히브리어입니다.

  • 시 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26절을 함께 읽으면 마태복음의 내용과 거의 흡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시 118: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시 118:25 히브리어

אנא יהוה הושיעה נא אנא יהוה הצליחה נא׃

여기서 호산나는 ”이제 구원하소서’의 부분을 그대로 읽은 것입니다.

나나 야훼 호쉐아 나 난나 야웨 하치리하 나

나는 구한다 야훼께 구원하소서 지금, 나는 기도한다 야훼께 형통을 지금

형통은 ‘짤라(צָלַח)’이며, 구원하다는 ‘아샤(יָשַׁע)’입니다. 호산나는 ‘아샤(יָשַׁע)’ 그대로 발음한 것입니다.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사용된 언어는 아람어(히브리어 방언 정도)였으며, 성경으로 기록할 때 당신 공용어인 헬라어로 적으면서 ‘호산나’가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21:9을 헬라어로 그대로 옮겨 봅니다. 사용한 성경은 NA28 최신판입니다.

οἱ δὲ ὄχλοι οἱ προάγοντες αὐτὸν καὶ οἱ ἀκολουθοῦντες ἔκραζον λέγοντες·

ὡσαννὰ τῷ υἱῷ Δαυίδ·

εὐλογημένος ὁ ἐρχόμενος ἐν ὀνόματι κυρίου·

ὡσαννὰ ἐν τοῖς ὑψίστοις.

호산나(ὡσαννὰ)는 아람어인 ‘아샤(יָשַׁע)’를 그대로 헬라어로 적은 것입니다.

종려가지를 흔다는 것은 제2성전기의 역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후에 따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호산나는 샬롬이 목적이며, 샬롬은 평안의 히브리어입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달라는 간절함은 메시아를 통해 회복하게될 이스라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곧 평안으로 가는 방법이기에 구원과 평안이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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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신들, 우상들

성경 속 우상과 신들

성경에는 수많은 우상들이 등장한다. 주요한 신들은 바알과 아스다롯, 아세라, 다곤 등이지만 간접적으로 소개되는 신들까지 합하며 수십 개가 등장한다. 우상은 유일신관점에서 표현이고, ‘신들’은 ‘야훼 신앙’의 관점에서 표현된 것이다. 유일신은 그 어떤 신들도 용납하지 않지만 야훼 신앙은 야훼의 우월성을 강조할 때 사용된다. 야훼는 유일하지만, 이방 신들 복수형으로 ‘신들’이다. 이러한 우상 또는 신들은 전세계를 통치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과 대비 또는 대치 된다. 이후에 성경의 신들에 대해 소개하고 여기서는 이름과 간략한 소개만 올린다.

엘(El)

구약에서 하나님은 엘의 복수 형태인 ‘엘로힘’이다. 우가릿 문헌에 ‘엘’이 등장한다. 엘은 창조주이며, 인간의 출생에 관여하는 신으로 알려져 있다. 바알의 아버지로 소개되기도 하지만 바알처럼 소개되기도 한다.

바알(Baal)

바알은 ‘주인’이란 뜻이다. 가나안에서 섬기던 주신으로 번개와 천둥을 부린다. 비를 내리는 신이다. 강수량이 적고 농사를 짓는 고대 팔레스타인에서 바알은 비를 내리고, 부활을 하는 신이였기에 절대적 힘을 발휘했다. 바알은 농사의 신 뿐 아니라 전쟁의 신이며, 가뭄을 가져오는 파괴의 신이기도 하다. 신들이 갖는 상대적 표현이다. 가나안의 바알은 고대 비빌로니아의 ‘벨’신이었다고 학자들은 거의 확신한다. 바알은 땅의 신이자 하늘의 신이다. 바다의 신인 얌과 대적한다. 바알이 얌(대양 또는 혼돈)과 싸워 이긴 것처럼 하나님도 바다의 신과 싸워 이긴다.

바알은 다양한 이름으로 현현한다. 치료의 신인 바알세불, 바엘, 바알제붑이 그들이다. 힛타히트에서 주신으로 섬긴 하가드도 동일한 신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다곤의 아들이거나, 다곤의 다른 이름이다. 아내의 이름은 아낫이나 어떤 곳은 아스다롯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바알은 엘과 아스다롯(아세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바알은 다곤의 아들이거나 다곤의 다른 이름이다.

바알은 구 바빌로니아의 벨이다.

야암은 바알의 어머니이자 바다의 신이다. 이 부분은 바빌로니아 신화에서 다시 다룬다. 바빌로니아 신화는 수메르 신화에서 왔으나 변형시켜 역전시킨다.

아스다롯(Ashtaroth)

아세라(Asherah)

아낫(Anath)

아낫은 성경에서 4번 사용된다. 수 19:38, 삿 1:33, 삿 3:31, 삿 5:6이다. 사사시대 사사였던 삼갈은 ‘아낫의 아들’로 소개된다.(삿 3:31, 5:6) 아낫에게 철저히 종속된 존재라는 뜻이다. 아낫은 바알의 아내로 소개되기도한다. 하지만 아스다롯과 아세라, 아낫은 정확히 다른 신들인지 같은 신을 다르게 부르는지 모호한 부분이 적지 않다.

다곤(Dagon)

다곤은 물고기 신으로 블레셋 민족이 섬긴 주신이다. 다곤은 농사의 신이었으나 블레셋으로 넘어오면서 물고기 신으로 바뀌었다. 수메르에서 주신으로 섬기던 신이 지중해로 넘어오면서 분화된 것으로 보인다. 가나안 주민들은 바알로, 에게해서 넘어온 해양 민족인 블레셋은 다곤으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다곤이 ‘주인’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더욱 분명하다.

몰렉(Molech)

몰렉은 모압과 암몬에서 주신으로 섬겨진 신이다. 특히 암몬족속들이 섬긴 신이다. 고대근동과 북아프리카에서도 신으로 숭배되었다고 한다. 모양은 가슴 아래로는 사람이지만 위로는 황소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바알이 황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때 바알의 또 다른 현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바알의 제사가 여사제들과 음란한 교합이었다면, 몰렉의 경우는 아이를 바치는 인신공양의 형태로 드려진다. 페니키아와 북아프리카에 인신공양이 행해졌다는 것을 유추해 보다면 동일한 신으로 보인다. 카르타고를 침략한 로마인들이 인신공양의 모습을 보고 경멸했다는 기록이 아직도 남아 있다.1 인신공양은 대부분 페니키아와 카르타고처럼 항구 도시에서 성행한다. 우리나라 심청이가 삼백석으로 인신공양한 것 역시 바다의 신을 노여움에서 풀게 하려는 것이다. 요나 1장에서 요나가 바다 신의 노염을 풀기 위해 바다에 던져진다.

몰렉에게 아기를 바치는 모습2

그모스(Chemosh)

그모스는 모압에서 주신으로 섬긴 신이다. 기록된 것을 토대로 하며 몰렉과 암몬을 정확히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그모스는 모압어, 아카드어, 에블라어 등이 남겨진 것으로 볼 때 바빌로니아에서 전래한 신으로 보인다. 성경에서는 그모스 또는 밀곰으로 번역되어 있다. 성경은 모압을 그모스의 아들로 소개한다.(민 21:293 렘 48:464) 사사기 11장에서도 입다가 논쟁할 때도 ‘네 신 그모스’라고 표현한다. 왕하 23:13에서는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가증한 밀곰으로 표현된다. 그모스와 밀곰이 완전히 동일한 신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림몬(Rimmon)

바알세붑(Baal-zebub)

쓰스(Zeus)

허메(Hermes)

아데미(Artemis)

아데미(Artemis, 아르테미스) 그리스의 여신 아르테미스로 로마의 여신 디아나(Diana)이다.

 아레스(Ares)

디오스구로(Dioscuri)

  1. 디오도로스 사켈로스(Diodorus Siculus, Διόδωρος Σικελιώτης)는 기원전 1세기 작가이며 시칠리아 출신이다. 그는 비블리오테카 히스토리아(Βιβλιοθήκη Ἱστορική)를 기록했다고 한다. 비블리오테카 히스토리아(Βιβλιοθήκη Ἱστορική)는 그의 유일한 저작으로 초 40권이지만 현재 1-5권, 11-20권만 남아 있다고 한다. 로마의 신화부터 기원전 59년까지 기록된 로마의 연대기 기록으로 볼 수 있다. ↩︎
  2. 그림 출처 위키백과 몰렉 ↩︎
  3. 민 21:29 모압아 네가 화를 당하였도다 그모스의 백성아 네가 멸망하였도다 그가 그의 아들들을 도망하게 하였고 그의 딸들을 아모리인의 왕 시혼의 포로가 되게 하였도다 ↩︎
  4. 렘 48:46 모압이여 네게 화가 있도다 그모스의 백성이 망하였도다 네 아들들은 사로잡혀 갔고 네 딸들은 포로가 되었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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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칠언(架上七言)



가상칠언(架上七言) The Seven Words

A.D. 33년 4월 초순 금요일 일기 화창한 어떤 봄날 예루살렘성 밖으로 세 사람의 십자가의 죽음 행렬이 엄숙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목적지는 히브리말로 골고다요, 아람어로 된 말을 해석하면 해골이란 동산인데 여기까지 와서 각자가 메고 온 십자가에 이 세 사람을 달았습니다.
그 중에 중앙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본질에 대한 조직신학적 고찰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구속사 전체를 관통하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이는 단순한 형벌의 도구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언약적 구속의 정점이다.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십자가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 인간의 타락, 언약의 성취, 그리고 구속의 적용이라는 큰 구조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이 역사 가운데 실현된 사건이며, 교회는 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구원이 어떻게 만나는지를 해석해왔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단지 고난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자비가 충돌하며 완전하게 화해된 은혜의 자리이다.

1. 삼위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의 십자가

십자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이 영원 전에 계획하신 구속 사역의 중심에 있다. 에베소서 1장 4절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말씀한다. 이는 단지 인간의 반응에 따라 계획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작정된 영원한 언약(pactum salutis)에 따른 것이다. 이 언약 안에서 성부는 구속을 계획하시고, 성자는 구속을 성취하시며, 성령은 구속을 적용하신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성자의 독립적 고난이 아닌, 삼위 하나님의 연합된 사역의 성취이다.

특히 성자의 순종은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나뉘는데, 십자가는 그의 수동적 순종의 극치이다. 필립보서 2장 8절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선언한다. 이 복종은 단지 외적인 고난을 감내한 것이 아니라, 죄 없으신 분이 율법의 저주 아래 들어가신 사건이다. 성자는 인류의 대표로서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행하셨고, 그 결과로 십자가에서 모든 죄값을 단번에 치르셨다.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역할 분담 속에서 우리는 구속의 섭리가 하나님의 내적인 본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작정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십자가는 그 작정의 시간 속 실현이다. 창세 전부터 준비된 이 구속의 방식은 인간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으며, 인간의 지혜로는 결코 예측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은혜의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사랑과 공의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롭게 나타난 사건임을 증명한다.

2. 인간의 타락과 십자가의 필요성

조직신학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전제로 한다. 이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전 인류가 원죄 아래 있으며,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교리이다. 로마서 3장 10절 이하의 말씀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이러한 절망적 상황 속에서, 십자가는 유일한 구원의 길로 나타난다.

아담 안에서 인류 전체가 죄 가운데 빠졌으며, 이 죄는 단순한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 존재의 문제이다. 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시켰고,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존재는 외부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생명에 이를 수 없다. 여기서 구속의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이 되셔서, 그분이 마련하신 방법으로 구속을 이루시는 것이다.

십자가 없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될 수 없으며, 죄인은 결코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 죄에 대한 형벌은 반드시 집행되어야 하며, 그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하셨다는 사실은 십자가의 필연성을 말해준다. 이는 대속적 속죄(substitutionary atonement)의 교리이며,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핵심 진술이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실 수 있지만, 공의로운 방식으로만 그 용서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비가 단순히 감정적 동정심이 아니라, 공의의 기준을 만족시키며 나타난 사랑임을 드러낸다.

3. 십자가와 언약의 성취

구약 성경 전체는 메시아적 언약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하신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라고 증거한다. 이는 신명기 21장에서 말하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율법의 선언을 그리스도께서 친히 감당하신 것을 말한다.

언약의 성취로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도구이며, 동시에 그 약속의 성격을 규명하는 계시적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언약의 중보자로서 자신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셨다. 히브리서 9장 15절은 "이는 죽으심으로써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한다. 이처럼 십자가는 단순한 고난의 순간이 아니라, 구속사의 전환점이며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이 극대화된 지점이다.

언약적 배경에서 십자가는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닌, 영원한 언약의 실현이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쪼갠 짐승 사이를 홀로 지나가심으로 인간의 책임까지 자신이 짊어지셨던 장면은 십자가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와 언약의 신실함을 위하여, 친히 자신을 찢기게 하셨다. 이는 전 우주에서 단 한 번 일어난, 완전한 사랑과 공의의 표현이다.

4. 십자가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나타난 사건이다. 로마서 3장 26절은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죄를 단순히 용서하지 않으시고, 공의의 기준을 만족시키면서 죄인을 의롭다 하신다는 점이다.

이때 나타나는 것이 화목제물(hilastērion) 개념이다. 이는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는 희생 제사를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제물로 드려지셨다는 것이다. 헬라어 단어 hilastērion은 구약 성소의 속죄소와 동일한 단어로, 이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임재와 진노 사이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사건ㄴ임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에 죄를 무시할 수 없으나, 동시에 사랑이시기에 죄인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이 두 속성이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 장소가 바로 십자가이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이 십자가를 통해 계시되었음을 의미하며, 단순한 인간 중심의 구원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구속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 감상적인 차원을 넘어서, 희생적이며 철저히 거룩한 사랑으로 드러난다. 이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겁고도 실재적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동시에 드러낸다. 이 사랑은 단순한 허용이 아닌,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죄인을 품으시는 사랑이다.

5. 십자가의 적용과 성화의 근거

십자가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 신자의 삶에 실재하는 능력이다.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자에게 적용하신다. 이는 칭의와 더불어 성화를 이루는 근거가 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고백하며, 신자의 존재가 십자가와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신자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를 위하여 사는 삶으로 전환된다. 이 변화는 단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 자체의 변화이며, 이는 십자가와 연합함으로 가능하다. 십자가는 신자의 삶에서 자기 부인의 근거가 된다. 이는 단순히 감정적 헌신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옛 자아의 죽음을 포함한 존재적 변화이다.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참된 회개는 날마다의 죽음과 부활을 포함하며, 이는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또한 십자가는 고난 중에도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로마서 8장은 십자가에서 시작된 사랑이 어떤 것도 끊을 수 없음을 선포한다. 신자는 세상의 고난 속에서도 결코 버림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는 영광의 여정을 걷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결언(結言)

조직신학적으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서 이루어진 언약의 성취이며, 구속의 중심 사건이다.
이는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일치하는 지점이다.
십자가신자의 삶과 신앙,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기반이 된다.
신자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자신이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를 기억하고, 그 사랑에 응답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십자가는 삼위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성취된 구속의 중심이다.
이는 인간의 전적 타락에 대한 유일한 해결이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완전하게 만나는 자리이다.
신자는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고, 십자가를 따라 살아가며, 십자가 안에서 생명과 소망을 얻는다.


가상칠언(架上七言)

04-14-2025(월)

제1언 / 용서와 간구(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용서(容恕)라는 한문자의 의미를 소개합니다.
용서라는 한자의 훈(訓)은 “얼굴 용(容)”“용서할 서(恕)”라고 합니다.
얼굴이란 “담는다”는 의미이며, 용서는 “같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한문자의 용서는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고난주간 월요일을 지내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심으로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은 죄인이었던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고난주간 월요일의 기도
다섯 손가락 중에 엄지 손가락은 “으뜸”을 의미합니다.
음뜸이 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나라의 으뜸이 되는 대통령을 위하여!
국회의 으뜸이 되는 국회의장을 위하여!
법원의 으뜸이 되는 대법원장을 위하여!
행정부의 으뜸이 되는 국무총리를 위하여!
가정의 으뜸이 되는 가장을 위하여!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지만 지도자로 세워주신 목사를 위하여!
각자의 직장에 머리를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며 고난주간 월요일을 신앙적으로 맞이합시다.

04-15-2025(화)

제2언 / 구원의 선언(누가복음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Jesus answered him, "I tell you the truth,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두 강도가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두 강도의 이름을 외경에서 “디스마”와 “게스다”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어느 편 강도가 구원을 받았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오른편 강도가 구원을 받았다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마지막 때에 오른 편에 양의 무리들을 왼편에 염소의 무리들로 구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25:33).

용서의 선언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받은 삶을 고백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삶의 모습을 양과 염소의 습성에서 소개합니다.
더운 여름철이면 양들을 뿔뿔이 흩어져서 지내고 추운 겨울이 되면 모두 한몸이 되듯 밀착하여 긴 겨울밤을 보낸다고 합니다.
반면에 염소는 양들처럼 지내는 것이 좋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지만 상대방이 시원하고 상대방이 덥게 지내는 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여름에는 악착같이 달라붙고 겨울철에는 멀찍이서 지낸다고 합니다.

염소의 성질머리가 참 고약합니다.

죄를 용서받지 못한 인생은 염소와 같이 이기적인 삶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용서 받았기 때문에 양과 같이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삶을 좋아합니다.

구원받았다는 감격을 구원받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믿음으로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고난주간 둘째날 화요일을 맞이하여 두 번째 손가락 검지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검지는 무엇을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리켜야 할 거리의 교통 경찰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공의로운 판단으로 시시비비를 가리쳐야 할 법관들 판사와 검사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과 교수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교회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교사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가정에서 자녀들을 가르치는 부모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이렇게 기도하며 고난주간 둘째날 화요일을 즐겁게 살아봅시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가상칠언, 십자가상의 일곱 마디. ​
가상칠언 架上七言.  the Seven Words
예수께서 죽음 직전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

​1.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가상칠언 제1언 / 용서(容恕)와 간구(懇求)

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Jesus said, "Father, forgive them, for they do not know what they are doing." And they divided up his clothes by casting lots.

1. 용서의 사전적 의미

한자의 용서(容恕)에서 容은 얼굴 용(容)이란 훈으로 ‘담다’는 의미라고 하며, 恕는 용서 할 서(恕)라는 훈으로 ‘같은 마음’ 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용서의 한문자적 의미는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용서를 ‘놓아 줌,’ ‘죄를 면하여 줌,’ 또는 ‘꾸짖지 아니함’이라고 정의합니다.

2. forgive 의 어원적 의미

forgive에서 for 는 ‘전적으로(completely),’ give(고대 영어 giefan)는 ‘주다’를 뜻하여 forgive는 ‘전적 시여(全的 施與)' 또는 '완벽하게 주는 것’을 말합니다.

라틴어 “perdonare”, 독일어 "vergeben", 프랑스어 "pardonner"는 영어의 풀이와 같은 뜻을 갖습니다. 

따라서 용서의 의미는 ‘유보 없이 전적으로 주는 것(to give completely, without reservation),’ 즉 ‘벌주고자 하는 욕망도 힘도 포기한다’는 의미로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3. 논어에 나오는 서(恕)

공자의 여러 제자들의 모였을 때 "자공(子貢)"아 스승에게 질문하였지요.  
"선생님, 평생을 두고 마음에 담아 실천할 만한 좌우명 하나가 무엇인가요?"
자공의 질문에 공자님은 "그것은 바로 서(恕)니라"고 곧 대답하시면서 ‘상대방이 원치 않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子貢이 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잇가 子曰 其恕乎인저 己所不欲을 勿施於 人.

공자와 그의 제자 사이의 질문과 응답은 차원 높은 혜안적인 통찰이었지만 그러나 용서를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덧부친 말도 부정적 어휘가 사용되어 있어서 소극적이다.

4. 용서의 신학적 의미

(1) 아담 타락 이래 인간은 죄인으로 전락되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의인은 없나 니 하나도 없나니”(롬 3:11; 시 14: 1-2)에서 보듯이 인간에게는 죄인이라는 낙 인이 찍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용서의 길을 마련하셨다. 흔히 ‘잘못은 인 간이 저지르지만,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 (To err is human. to forgive, divine.)이라는 격언이 이를 압축하여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2) 히브리어에서 용서를 두고 세 개의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즉, 'kipper(덮다),' 'nasa(죄책을 짊어져 없이하다),' 'salah(용서하다)이다. ‘나사’는 하나님이나 인간 의 용서에 사용되었으나 나머지 두 개의 단어는 하나님의 용서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헬라어에서는 4 개의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곧, 'apolyein(ἀπολύω, 마 5;31; 눅 6:37), charizesthat(χαρίζομαι, 눅 7:21, 엡 4:32), paresis(πάρεσις, 롬 3:25 ‘간 과함), 및 aphesis 이다. 마지막 단어 aphesis(ἄφεσις)가 신약성경에서 가장 일반 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용서를 두고 사용되고 있다.

(2) 용서의 원천-엡 1:7

죄 용서를 주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고후 12:13; 골 2:13).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ἄφεσις)을 받았느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죄 용서는 그리스 도의 보배로운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온다(히 9:22, 26; 롬 4:25).

본문에서 ‘죄 사함 ἄφεσις’ 는 “해방, 면제, 용서”를 뜻한다.

하나님의 용서는 칭의 메시지이다. 엘렌 화잇 여사는 죄 용서를 ‘오로지 하나님 께서만 하시는 용서’로 진술하고 있다(SC 37; 9T 63). 이 하나님의 용서는 인류 모두에게 주어진 객관적, 보편적 칭의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는 인간 편의 죄의 자복, 회개라는 조건이 달려 있다(눅 17:3-4).

“죄인을 위하여는 한 길 밖에 없다. 신실한 회개와 죄의 고백, 깨끗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믿음이 용서를 가져달 줄 것이며”(2T 293).

용서의 조건성은 인간의 선택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3) 인간 사이의 용서- 엡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 안에서 너희 를 용서함 같이 하라.” -> “서로”에 비추어 용서는 상호적이어야 한다.

용서는 자기에게 잘못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태도, 물론 상대방의 죄된 행동을 정당화시켜 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정죄하는 태도를 버리고 잘못하였음에도 불구 하고 친절하게 대하여 주는 것이다.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 아니다. 이 용서는 공동체 내 안식, 관계 회복 및 치유를 일으킨다.

“용서라는 것은 피해자의 의도적인 노력이다. 그것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 다.”(안교 교재 제3기 제7과))

용서는 저지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다. 용서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계속해서 그 잘못을 저지르도록 묵인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란 우리의 억울함과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 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서로 용서하는 일을 랍비들의 3회에서 7회로 확대 제안하였지만, 그리스 도께서는 70번의 7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여 그 범위를 무제한으로 확대하셨다. 햇볕이나 비를 의인이나 악인에게 골고루 내려주시는 예를 제시하기도 하셨고, 심 지어는 원수까지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마 7:12). 이는 공자님의 부정적 언어로 제시한 己所不欲 勿 施於人을 넘어선 적극적이고 긍정적, 진취적이어서 유교 윤리를 뛰어 넘는 특성을 보여 주고 있다.

(4) 주기도문에 나오는 용서기도

마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 옵고”(6:12)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셨으니 우리도 형제의 죄를 용서하여야 한다.

“사하다”는 ἀφίημι (aphie-mi)는 “내보내다, 버려두다, 용서하다. 가게하다, 보 내버리다, 취소하다, 탕감하다, 용서하다”의 뜻이다.

누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 시고”(12:4 ).

(5) 주의 기도문의 용서기도에 있어서 선행성 이해

두 기도문의에서 하나님의 사죄와 인간의 사죄 중에 어떤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가?

㉠ 마 6:12 마태의 기록은 분명히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근거로써 제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용서에는 인간의 용서라는 선행적 조건성을 함축하고 있다.

㉡ 눅 12: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이 번역에는 마치 “우리가” 용서의 주체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 점이 있어 보여 2인층 단수 능동태인 αφες의 주어 “주께서” 또는 “당신께서”가 잘 안 보인다.

누가는 ἀφίημι의 2인층 단수 2aorist 능동태 명령법, αφες를 사용하고 있다. 따 라서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여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시역>

“우리에게 우리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그 때에 진실로 우리도 우리에게 죄를 지 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겠나이다.”

<원문>

και αφες ημιν τας αμαρτιας ημων και γαρ αυτοι αφιεμεν παντι οφειλοντι ημιν.

이 본문에 나오는 και γαρ를 ‘그리고 진실로’로 번역 이해가 가능하다. ‘γαρ’는 ‘then, indeed, since, for’를 뜻한다.

2인층 단수인 “주께서”가 주어가 되어 용서의 원천이 되고 인간 용서에 선행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용서의 선행성이 명확하여지기 때문이다.



일언은 '용서(容恕)와 간구(懇求)',
주님께서 십자가의 그 고통 중에서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군병과 인류의 죄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인류의 구원과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님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분입니다.
구약에는 아버지란 말이 없으나 예수님은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우리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주기도문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도는 아버지가 두 분이십니다.
육신의 아버지와 영혼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은 사랑의 인격적 참여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게 될 때 내 모든 문제는 해결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 번째 말씀은 용서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난 인간에 대한 심판의 집행인 동시에 용서인 것을 압니다. 구약 시대 사람이 죄를 지으면 자신의 죄를 대신할 제물을 성막에 가져갔습니다. 죄인은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각을 떠서 제사장에게 드립니다. 제사장은 더러운 것을 제하고 모두 제단 위에 올려놓고 번제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번제와 속죄제는 직접인 죄를 사하는 제사입니다. 소제는 감사, 화목제는 감사와 평화를 위한 제사입니다. 모든 제사들은 직접적으로 다른 목적을 갖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화평하고, 죄 용서에 대한 감사를 전제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처음 하신 말씀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중보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용서해 달라고 한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하고 따랐던 사람들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류를 말합니다. 자신을 배신한 제자들, 자신을 채찍질하고 모욕한 로마군사들, 지나가면서 조롱한 행인들과 구경꾼들가지 포함합니다. 심지어 자신을 십자가에 넘긴 유대관원들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한 빌라도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원수가 누구입니까? 그는 단순한 괴롭힘의 주체가 아닙니다. 존재의 부정과 멸망으로 이끌고 가는 모든 사람들과 환경까지 포함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용납은 아닙니다. 그들의 폭력과 비방을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죄성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죄는 대항하지만, 죄인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아버지라는 부름에도 유의해 봅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주기도문에서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는 친밀함과 아들됨의 표지입니다. 구하기 전에 먼저 준비되어야할 것은 관계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아들의 자격으로 죄인들을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용서에 대한 기도는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며, 기꺼이 용서하실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구하는 기도는 모두 응답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간구의 전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누가복음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Jesus answered him, I tell you the truth,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이언은 '구원', 오른편 강도에게, 십자가 위에서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한 오른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서도 주님께서는 영혼을 사랑하시고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영혼이 들어갑니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고백할 때에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었던 강도가 낙원을 허락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씀을 오해하여 구원이 똑 같은 구원이라고 생각하면 자신의 인생을 살면서 많은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 중 구원에 관한 말씀은 크게 초대 손님으로서 구원과 하나님의 신부로서 구원을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양쪽에 달린 두 강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양쪽에 십자가에 달리고서도 그 죄를 깨닫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림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절)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진심이면 얼마나 다행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에 보면 비방하였다고 했습니다.
객관적이요, 비판적이요, 야욕적인 말이었으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현재도 십자가를 신앙적으로, 주관적으로, 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강도처럼 비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지금도 강도처럼 죽어가면서도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비방하는 자가 많습니다.
고난과 십자가에서는 선한 말이 나오기 힘든 모양입니다만 중앙에 계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고 구세주임을 알았다면 구원을 호소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강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2언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눅 23:43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두 번째 말씀은 ‘약속’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낙원을 약속한 강도가 한 때 주님을 조롱했다는 것을 압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두 명의 강도 중 한 명이 도중에 비방하기를 멈추고 예수님을 변호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의탁했습니다. 주님은 강도를 용서하고, 낙원을 허락하십니다.

행악자(κακοῦργος)라고 표현된 헬라어 단어는 ‘범죄자’ ‘강도’ 등을 뜻하지만, 이들은 반란을 위해 살인한 자들입니다. 당시 로마는 극악무도(極惡無道)한 살인자와 국가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두 부류의 죄인들은 십자가형을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이유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의 왕이 아님을 빌라도에게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왕이기 때문에,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십자가형을 당한 것입니다.

행악자의 간청을 들어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그가 어떻게 ‘당신의 나라’라고 말했을까요? 제자들을 비롯한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한 ‘나라’는 육적인 나라이며, 로마의 압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회개한 행악자는 죽어가면서 ‘당신의 나라’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 새로운 영적인 세계를 발견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돌아섰습니다. 이 땅의 것들로부터 벗어나 바로 곁에서 죽어가는 예수님께로 돌아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발견입니까? 한 행악자는 아직도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비방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다른 사람은 구하면서 왜 너는 네 자신을 구하지 못하느냐?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합니다. 자연인의 관점입니다. 그들이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현실 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그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강도는 영적인 눈을 떴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즉각적으로 반응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게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천국은 지식적인 장소가 아니가 아닙니다. 거듭난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니고데모처럼 거듭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만 볼 수 있습니다.






3. "여자여 보소서 아들 이니이다 ··· 보라 네 어머니라"(요한복음 19:26~27)

  •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 When Jesus saw his mother there, and the disciple whom he loved standing nearby, he said to his mother, "Dear woman, here is your son,"
  • and to the disciple, "Here is your mother." From that time on, this disciple took her into his home.


  • 제3언은 "효도(孝道)"에 대한 외침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 중에서도 메시아로서 십자가 위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시는 아들의 고통을 바라보시는 어머니를 생각하시고 위로하시며 효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 사도에게 “내 어머니 네 어머니”라고 말씀 하시며 어머니를 요한 사도에게 모시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요한 사도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잘 모셨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들이 있었지만, 열 두 제자 중,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했었고, 사랑의 사도이었던 요한에게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시고 계시는 삼 언의 말씀이 확인하여 주십니다.
    즉 부모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과 같이 자녀로 살면서 보이는 육신의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을 인정하고, 알 수 있으며, 부모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만 하나님의 말씀에도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가운데 손가락 중지(middle finger) 기도를 합니다.



    세 번째 주님의 눈동자가 집중된 것은 여기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계신 곳입니다.
    25절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클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등 네 여인이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울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면서 부탁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격은 여인입니다.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게 되어 남편에게 송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제 예수님을 먼저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한없는 슬픔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3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27)

  •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 When Jesus saw his mother there, and the disciple whom he loved standing nearby, he said to his mother, "Dear woman, here is your son,"
  • and to the disciple, "Here is your mother." From that time on, this disciple took her into his home


  • 바울은 놀랍게도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약속이 있는 첫 계명’(엡 6:2)으로 말합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1-3)

    바울이 첫 계명이라 말한 것에는 사람과 관련된 첫 계명으로서 부모 공경을 말합니다. 십계명의 1-4 계명은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오직 하나님께만 향한 계명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계명은 하나님을 섬기라는 첫 계명에 종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구체적으로 구분한다면 다섯 번째 계명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첫 계명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부모에 대한 계명에 약속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근거를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한다’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문제는 간음과 살인, 탐욕의 계명보다 앞선다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만큼 부모에 대한 공경의 문제는 물러설 수 없는 중요한 문제로 보았습니다. 또한 다른 계명에 비해 약속을 더하심으로 의미를 가중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곁에 요한이 있는 것도 봅니다. 주님은 입을 열어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여자(Γύναι)란 단어는 결혼한 여자나 여성을 높여 부르는 존칭입니다. 여자라는 번역은 그리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쨌든 주님은 마라아를 부르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숨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인 시기에 어머니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아무 감정도 없는 그런 초월적 존재로만 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육신을 입었으며, 여자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체휼(體恤)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피곤하고, 배고프고, 슬픈 감정을 느끼십니다. 인간이 가진 아픔과 고통을 직접 체험하셨습니다. 또한 죽어가는 아들을 보며 고통스러워하는 육신의 어머니가 갖는 고통을 이해하십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낳아 할례를 받으러 갔을 때 시므이는 마리아에게 칼이 마음을 찌르듯 아플 것이라고 예언합니다.(눅 2:35) 예수의 육신적 어머니가 지고 가야 할 고통의 짐입니다. 주님은 이 모든 아픔을 아시며, 마리아를 위로하며 요한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부모 공경하기를 멈추지 않는 주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저는 가끔 야고보와 같은 동생들이 있는데 왜 요한일까? 궁금한 적이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직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동생 야고보보다는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했던 요한에게 마리아를 부탁한 것은 잘 한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맡은 것은 짐이지만 영광스러운 짐입니다. 우리는 종종 주의 일을 감당할 때 영광을 보지 못하고 무게만을 봅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을 들어 영광의 무게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친동생이지만 어머니를 맡길 수 없는 야고보인지, 마음 편하게 맡길 수 있는 요한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어떤 존재입니까?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 : 46, 마가복음 15:3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은 시편 22:1절을 인용하셨는데,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아람어로 예수님은 일상적인 언어로 아람어와 히브리어를 같이 사용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성경 전체에서 가장 신비로운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견디고 있었기 때문에 영원 전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성부의 사랑과 성부와의 교제에서 끊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편 22:1을 인용하시면서 아마도 승리의 외침으로 바뀌는 이 시편의 나머지 내용(시 22:21~31)도 염두에 두셨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믿음을 표현하며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왜 자신이 죽어 가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말할 수 없는 고뇌에서 비롯된 절규였습니다. 죄 없는 자가 정죄를 당하고 허물없는 자가 박해를 받으며 은혜 베푸는 자가 잔인하게 죽어가는 일이 역사상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홀로 지시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시는 순간 주님으로서는 매우 심각한 세 시간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주님은 세상에 대하여는 더 할 말씀이 없고 성경에 응하기 위한 말씀을 하실 뿐이었습니다. 이런 절규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


    4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 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About the ninth hour Jesus cried out in a loud voice, "Eloi, Eloi, lama sabachthani?"--which means,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주님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말씀하십니다.
    언뜻 보면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읽어 보십시오.
    입술로 되뇌어 보십시오.
    저도 한동안 이 말씀이 이해되지 않아 몇 번을 읊조려 보았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하고 나니,, 예수님의 음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 죽여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요?

    주님은 철저히 버림받았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겠다는 장담도 허공에 흩어져 버렸습니다.
    끝까지 주님을 지키겠다는 다짐도 아침이슬처럼 사그라졌습니다.
    자신들의 구차한 목숨을 위해 주님을 버린 것입니다.
    고독, 소외, 배신이 주님을 엄습했습니다.
    이 모든 모습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보고 계십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으며, 광대합니다.
    우리의 작은 마음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버렸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왜 나를 버리십니까?’
    ‘저를 버리실 만큼 죄인들이 가치가 있습니까?’
    그렇게 묻습니다.
    그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해 봅시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아들과 맞바꿀 만큼 제가 가치 있는 인간입니까?”

    이곳에서 마태는 아들을 버리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아버지의 역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버리고 죄인을 구하는 광인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신비이며, 아이러니입니다.
    아들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어야 한다며, 주님의 외침을 들을 때 우리는 영원한 침묵으로 일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커서, 내가 과연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야 합니다.

    1.예수님 날 위해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

    2.손과발 날 찢기셨네 왜 날 사랑하나?
    고난을 당하여 구원했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

    3.내 대신 고통을 당하셨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 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

    목요일 : 약지손가락(Ring finger) 기도, 속죄제의 삶

    약지는 손가락 중에서 힘이 가장 약한 손가락입니다.
    병든 분들, 여러 가지 일에 실패한 분들, 삶의 형편에 지쳐서 믿음이 연약해진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한 주간 살아오면서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일이 없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속죄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5. "내가 목마르다" ( 요한복음 19:28 )

    ​내가 목마르다 하심, 십자가 위에서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께서는 목이 타고 어지러우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목이 타도록 목이 마르셨기에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생명수를 먹게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2:1-2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입증하고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심은 곧 목마른 인생을 부르시는 뜻도 있습니다. 인생은 어디서 무슨 물을 마셔도 그 심한 갈증을 해소할 길 없으나 주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한 갈증을 해소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 : 1).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 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5언 내가 목마르다(요 19:28)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말씀입니다. 동일한 사건이지만, 마태복음에서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는 순간, 인간으로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만 생각하려 하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목마름은 당연한 것입니다. 채찍질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몸에서 피와 수분이 빠져나갔습니다. 주님의 목마름은 죽기보다 더한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고통을 당하셔야 합니까?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워하시기 위해 친히 육신을 입었고, 율법 아래에서 나셨습니다. 자기를 비하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주님의 피할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영지주의자들과 같은 이단들은 예수님은 인간과 같은 육신을 입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가현설이라는 주장을 통해 육신이 아닌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의 사랑의 하나님이 악한 육신을 입을 수 없다는 것들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이들의 주장은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먼저 참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대표하는 속죄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고통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의 고통은 가짜가 됩니다.

    정말 주님은 가짜 몸을 가지셨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실제로 목말랐습니다. 그 누구보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주님의 고통을 거짓으로 만들려는 악한 자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요한은 주님의 목마름을 강조하여 우리를 위하여 친히 고통당하셨다고 강조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며,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사 53:5) 주님의 고통은 우리의 고통이며, 주님의 아픔은 우리의 아픔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목마름을 묵상하면서 잊지 말아야한 진정한 목마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육신의 고통을 통해 우리의 고통을 대신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그 고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목마름은 그동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구속에 대한 목마름이었습니다. 주님의 목마름은 육신의 목마름을 넘어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죄인들이 주님 당신을 통해 구원되는 일이 일어나기를 갈망하고 기대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목마름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목마름입니다. 첫 사람들이 범죄 했을 때, 주님은 가죽옷으로 그들의 수치를 가리셨습니다. 또한 여인의 후손을 통해 뱀의 머리가 상하게 될 것을 예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목마름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영혼들이 구원 받기를 갈망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헤아릴 수 없는 목마름이셨습니다.


    6. "다 이루었다" ( 요한복음 19 : 30 )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고 율법을 십자가에 죽으시는 아가페 사랑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시고 인류를 죄와 사망과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해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가죽 채찍으로 서른 아홉 대의 매를 맞으셨습니다. 가죽 채찍 끝에는 다섯 갈래의 가지가 있고 그 가지마다 낚시와 같은 쇠고리가 달려 있어서 가죽 채찍이 살에 닿을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터져 엉켜 붙었습니다.

      또한, 가시관을 쓰신 머리와 대못에 박힌 양손과 양발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무지한 군병의 창에 옆구리를 찔리셔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의 옷은 군병들이 제비 뽑아서 나누어 가졌고, 벗기운 채로 주님은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계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죄도 없으시면서 가장 죄 많은 자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입니다. 그가 하실 일을 이제 다 이루신 것입니다.


    6언 다 이루었다(요 19:30)

    완전한 성공을 이룬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까요? 사람의 성공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살다 보면 실수하기도 하고,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죄를 짓기도 합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꾼 꿈을 완전히 이루기를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주님의 형편을 보십시오. 무엇을 이루었단 말입니까? 제자들은 배신하고 도망갔습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로마의 속국이며, 종노릇 합니다. 악은 여전히 강력한 힘과 권력을 가지고 세상을 지배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계십니다. 누가 봐도 실패한 인생이며, 어떻게 생각해도 제대로 성공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대체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갈 때 ‘영광을 얻을 때가 되었다’(요 12: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압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고난의 길이며, 죽음의 길입니다. 주님은 죽음을 향하여 하루하루 한 발자국 밟고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신 것, 그것은 대속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죽음은 저주 받은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으로 살리는 역설적 죽음입니다. 주님을 오래전 광야에서 들렸던 놋뱀을 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이 하늘에 닿아 하나님은 불뱀을 보냈습니다.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 속에 죽어갔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놋뱀을 만들어 높이 세 우라 하셨습니다. 놋뱀을 본 자마다 살아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놋뱀처럼 높이 들려졌습니다. 나무에 달려 모든 사람들이 보이는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 위에 달리셨습니다. 주님은 죄의 상징이자, 율법의 저주를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홀로 받으셨고, 죄인들이 받아야할 고통과 죽음을 친히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보는 자들은 살아날 것입니다.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의 성공은 사람들이 보기에 명백한 실패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은 언제나 생명을 멸함으로 받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관점으로 이해할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만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감추인 보화처럼 저주와 죽음 속에 자유와 생명이 숨겨져 있습니다. 주님은 실패로 향해 나아갔고, 죽음을 향해 전진했습니다. 모함을 피하지 않았고, 배신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의 광기를 그대로 받았습니다. 세상의 죄와 질병을 안고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든 것을 끝내셨습니다.


    요한복음 헬라어 성경말씀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성경 원어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대속해 주셨는데 특히 선택받은 백성의 죄를 구속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들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헬라어 성경 원문의 단어는 '테텔레스타이'입니다.
    이것은 아무 흠도 없는 것들을 말할 때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무 흠도 없고 죄도 없는 완전한 분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구속의 완성을 완전하게 이루셨습니다.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헬라어(5055, 텔레오) 끝내다 bring to an end, 끝나다 finish, 완성하다 complete, 수행하다 carry out, 성취하다 accomplish.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텔레오(Homer. 이래)는 헬라어 텔로스(5056)에서 유래했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텔레오는 ① 자신의 뜻이나 다른 자의 뜻을 '수행하다', 계획과 목적에 따라 '실행하다, 행하다',

    ② 말한 것을 '수행하다', 약속을 '이루다(성취하다)',

    ③ 가르치는 일을 '수행하다', 군사들의 명령을 '수행한다'를 의미한다. 입법자의 법령이나 하나님의 뜻, 기도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b) 텔레오는 '끝에 오다, 끝나다', 예를 들면 년 수에 대해 사용되었다.

    (c) 텔레오는 '의무를 이행하다'.

    (d) 텔레오는 종교 행위, 예를 들면 '실행하다'를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제사를 드리다', 제사장으로 '봉사하다'를 나타낸다. 다른 의미로는 마술을 '행하다'이다.

    2. 70인역본의 용법

    텔레오는 70인역본에서 약 30회 나오며, 8개의 히브리어 단어들 중 주로 칼라(끝나다, 끝내다, 성취하다)의 역어(7회)로 사용되었다(2:21; 3:18; 삼하 22:39 등). 이 동사는 수동태에서 종교적 술어로 '자신을 헌신하다'를 의미한다(예: 바알 예배에 대해, 25:3; 25:5; 105:28; 4:14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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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신약성경의 용법

    텔레오는 신약성경에서 2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바울 서신.

    고후 12:9에서 텔레오는 '완성에 이르다'를 의미한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실제적 능력인 그리스도의 능력은 약한데서 '완성에 이른다'. 이는 '참으로 효력 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5:16에서 성령의 반대되는 뜻을 텔레오, 즉 '실행하는 것'을 금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2:27에서 텔레오는 '목적이나 끝에 이른다'는 의미에서 '완수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율법을 완수하는 것):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딤후 4:7에서 자신의 행로를 완성하는 것을 나타낸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13:6에서 텔레오는 '세금을 바치다'는 뜻을 지닌다: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b) 공관복음들.

    ① 마태복음의 특징적인 점은 텔레오가 편집 구절들에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다"라는 마태의 공식적인 문구가 5개의 위대한 교훈적 강화들을 종결짓고 있다(7:28; 19:1; 26:1; 11:1; 13:53).

    10:23(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동네들의 끝에 이르기 전에 재림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다)과 12:50(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세례, 즉 자신의 고난[참조: 10:38]이 완성되기까지 큰 근심 중에 계신다)에서 텔레오는 '끝까지 견디다'는 의미를 지닌다.

    ③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텔레오가 수동태로 2회 사용되어 성경의 성취를(18:31; 22:37; 참조: 13:29) 나타내고 능동태로 1회 사용되어 율법의 이행을 나타낸다(2:39).

    (c) 요한의 기록들.

    19:30에서 텔레오는 예수께서 성취하여야 하는 아버지의 일들에 대하여 말하는 곳에서 사용된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그 일들이 완성되었다고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어졌다) 말씀하셨다.

    19:28에서 텔레오는 성경이 성취되는 것에 대해 사용된다: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참조: 22:18).

    (d) 요한계시록에서 텔레오는 '완료하다' 또는 (수동태로) '완료되다'라는 의미로 6회 사용된다. 11:7은 증거의 완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15:1은 하나님의 진노가 완성되는 세상의 7가지 마지막 재앙들을 알린다: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참조: 8절).

    20:3; 20:5; 20:7은 천년 왕국의 종말에 대해 3번 말하고 있다: "3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7 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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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717:17은 하나님의 비밀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됨을 다룬다: 10:7,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17: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전에 결정하신 바가 성취되는 것이다(참조: 18:31; 22:37).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RP Byzantine Majority Text 2005
    Ὅτε οὖν ἔλαβεν τὸ ὄξος ὁ Ἰησοῦς, εἴπεν, Tετέλεσται· καὶ κλίνας τὴν κεφαλήν, παρέδωκεν τὸ πνεῦμα.

    아래 테이어 사전을 보면 이 동사의 원형은 τελέω 텔레오 입니다.
    테텔레스타이완료분사 직설 중간수동태 3인칭 단수입니다.
    그래서 앞에 테 는 완료시제를 나타내는 접두어입니다.
    이미 완성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무언가가 이미 완성이 된 것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구속입니다.

    아래 사전과 같이 이 단어의 첫째 의미는 완성을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일을 끝마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작한 일을 완성한 것을 말합니다. 두번째 의미는 성취한 것을 의미합니다. 임무를 수행한 것을 의미합니다. 충족시킨 것을 의미합니다. 세번째 의미가 갚은 것을 의미합니다. 값을 치룬 것을 의미합니다.

    http://biblehub.com/text/john/19-30.htm

    Thayer's Greek Lexicon

    STRONGS NT 5055: τελέω

    τελέω, τέλω; 1 aorist ἐτελεσα (cf. Winer's Grammar, § 13, 3 c.); perfect τετέλεκα (2 Timothy 4:7); passive, present 3 person singular τελεῖται (2 Corinthians 12:9 L T Tr WH); perfect τετελεσμαι; 1 aorist ἐτελέσθην; 1 future τελεσθήσομαι; (τέλος); from Homer down;

    1. to bring to a close, to finish, to end: ἔτη, passive, passed, finished, Revelation 20:3, 5, 7 ((so from Homer and Hesiod down; Aristotle, h. a. 7, 1 at the beginning, p. 580{a}, 14 ἐν τοῖς ἔτεσι τος δίς ἑπτά τετελεσμενοις); τριῶν τελουμενων ἡμερῶν, Lucian, Alex. 38); τόν δρόμον (Homer, Iliad 23, 373, 768; Sophocles Electr. 726), 2 Timothy 4:7; τούς λόγους, Matthew 7:28 L T Tr WH; ; τάς παραβολάς, Matthew 13:53; (ἄχρι τελεσθῶσιν αἱ πληγαί, Revelation 15:8); a rare use is τέλειν τάς πόλεις, i. e. your flight or journey through the cities (R. V. ye shall not have gone through the cities, etc.), Matthew 10:23 (similar are ἀνύειν τούς τόπους, Polybius 5, 8, 1; τά ἕλη, 3, 79, 5; consummare Italiam, Flor. 1, (13) 18, 1; explere urbes, Tibull. 1, 4, 69; conficere aequor immensum, Vergil Georg. 2, 541; also xii., signorum orbem, Cicero, nat. deor. 2, 20, 52); with the participle of a verb (like ἄρχομαι, παύομαι, cf. Winers Grammar, § 45, 4 a.; Buttmann, § 144, 14), Matthew 11:1.

    2. to perform, execute, complete, fulfill (so that the thing done corresponds to what has been said, the order, command, etc.), i. e. α.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subject-matter, to carry out the contents of a command": τόν νόμον, Romans 2:27 (cf. Winer's Grammar, 134 (127)); James 2:8; τήν ἐπιθυμίαν (i. e. τό ἐπιθυμουμενον), Galatians 5:16. β. with reference also to the form, to do just as commanded, and generally involving a notion of time, to perform the last act which completes a process, to accomplish, fulfill: ἅπαντα (πάντα) τά κατά νόμον, Luke 2:39; τήν μαρτυρίαν, the duty of testifying, Revelation 11:7; τό μυστήριον, passive, Revelation 10:7 (cf. Winer's Grammar, 277 (260)); τό βάπτισμα, passive, Luke 12:50; πάντα, passive, John 19:28 (the distinction between τελέω and τελειόω may be seen in this verse); τούς λόγους (τά ῤήματα) τοῦ Θεοῦ, passive, Revelation 17:17; ἅπαντα (πάντα) τά γεγραμμένα, Acts 13:29; passive, Luke 18:31 (see γράφω, 2 c.); with ἐν ἐμοί (in me) added, in my experience, Luke 22:37; ἐν πληγαῖς, in the infliction of calamities, Revelation 15:1; τετέλεσται (A. V. it is finished) everything has been accomplished which by the appointment of the Father as revealed in the Scriptures I must do and bear, John 19:30. equivalent to τελειόω, 2, which see (made perfect): 2 Corinthians 12:9 L T Tr WH.

    3. to pay: τά δίδραχμα, Matthew 17:24; φόρους, Romans 13:6, (τόν φόρον, Plato, Alc. 1, p. 123 a.; τά τέλη, often in Attic writings). (Compare: ἀποτελέω, διατελέω, ἐκτελέω, ἐπιτελέω, συντελέω.)







    7.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누가복음 23:46 )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음, 생명, 영혼 모두를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우리도 생사화복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사언부터 칠언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모습을 말씀 하시고 계시는 것으로 인생을 살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과 같이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야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이전의 시기를 사는 인생이 버림받은 것과 같이 느껴지고, 갈증이 끝없이 느껴지는 시기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믿음 안에서 끝까지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을 순종적으로 산 사람은 후회 없는 삶을 살았기에 자신에게 맡겨진 삶을 모두 성취한 것이며, 이후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준비하시고, 정하신 때를 따라서 이루실 것을 믿는다고 선포하시고 계시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 생명, 영혼 모두를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생사화복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와 생명과 부활과 영생을 얻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뤄지고 하나님 나라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새 예루살렘과 새 하늘과 새 땅인 하나님 나라로 인도 하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열매를 찾으실 때 성령의 열매를 보여드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을 성령이 임하실 수 있도록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권능과 주님의 보혈로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하심으로 성결케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기도하시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사단과 이단과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구원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구원을 받아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인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란 말씀을 즐겨 사용하셨으니 산상설교 가운데서 17번, 유월절 다락방에서 45번(요 14, 16장), 요한복음 17장에서 6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에서 마지막 말씀을 아버지로 끝맺으셨습니다. 아버지란 명칭은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자신을 갖게 하는 이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들은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해도 아버지 손에 맡기고 부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체로부터 분리되려는 찰나에 있는 그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7언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가장 강하신 주님께서 가장 약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반항하지 않았고, 요동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를 구원할 물과 피를 흘리시고 운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마지막 운명하실 때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는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 손에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무력하고, 무능해 보이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 주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압니다. 병든 자를 치유하였고,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이셨으며, 말씀만으로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무덤을 향해 가던 관을 손을 얻자 과부의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돼지 속에 있던 군대 귀신을 쫓아냈고, 폭풍이 부는 물 위를 걸었고, 삼킬 듯이 공격하는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셨습니다. 주님의 행하신 기적은 셀 수도 없고, 다 기억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강하시고 위대하신 주님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무능은 사람의 어떤 능력보다 위대합니다. 주님의 약함은 인간의 강함보다 더 강력합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영혼을 절대 능력이신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보다 강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천사도, 죽음도, 높음도, 깊음도 그 어떤 것도 주님의 손에서 빼앗지 못합니다. 가장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가장 안전한 곳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함은 전 삶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으로의 성육신, 인간을 창조한 분이 인간을 섬기는 아들의 신분으로 살았습니다. 붙잡히기 하루 전에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발을 씻는 것은 노예들이 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선생으로서 이렇게 했으니 너희들도 그렇게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강함과 권력이 아닙니다. 도리어 종이 되고, 낮아지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약한 것들을 자랑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약할 때 주님의 은혜가 가장 강력하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강함과 지혜를 버리고 낮아지고 약하여짐으로 높음과 강함을 얻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높아지려합니다. 아담 이후 타락한 본성을 지닌 인간들은 자신이 신이 되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럴수록 고독해지고, 불행의 늪에 빠져 들어갑니다. 자신을 약점을 자랑하고, 자신의 허물에 긍지를 갖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려는 약함의 연습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훈련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순간, 하나님께 영혼을 의탁했습니다. 힘이 없어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방법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한 것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은 하나님께 의탁했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신뢰는 믿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고 영혼을 맡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은 위대한 일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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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서의 실천은 성도의 의무

    마태복음 6:14-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태복음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

    예수님은 타인을 용서하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시면서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필수적으로 타인에게 베풀어야할 용서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대교 안에서는 세 번이면 용서의 정신을 보여주기에 충분했고 따라서 베드로(일곱번)는 자신이 관용을 베풀었다고 생각합니다.

    ​참조 아모스 1: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다메섹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아모스 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그러나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횟수를 세지 말고(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야합니다.
    이는 창세기 4:23~24절에 나오는 라멕의 복수에 대한 자랑을 뒤집는 것입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십자가에서 완성됨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브리서 10:20-22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예수님은 대제사장인 동시에 '제물' 그 자체였지만 성령이 어떤 면에서 이 제물을 드리는데 있어서 그리스도를 도우시거나 능력을 부여하셨다고 밝힙니다.
    예수님은 '큰 제사장'이며 탁월한 제사장이십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피'에 힘입어 하나님이 계신 곳에 들어갈 수 있으므로 '담력'을 갖고 신실하게 행동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도들은 하나님께 '복종하고', '깨끗해지고',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야합니다.
    예수님의 속죄 사역은 성도들의 '속사람(영혼. 마음)'을 정결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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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법과 율례와 규례


    율법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계명
    율례는 율법(계명)을 지키기 위한 세부 사항
    규례는 율례를 지키지 않을 때 가하는 법적인 제재(심판)

    예를 들면
    율법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Remember the Sabbath day by keeping it holy.


    율례 - 안식일을 지키기 위한 세부 사항
      1. 안식일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사도행전 1:12) / 2천 규빗, 900미터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이라.
         Then they returned to Jerusalem from the hill called the Mount of Olives, a Sabbath day's walk from the city.


      2. 안식일에 음식을 만들지 말라(출애굽기 35:3)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Do not light a fire in any of your dwellings on the Sabbath day.


    규례 - 율례를 지키지 않을 때
     1. 죽이라(출애굽기 31:14-15)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찌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찌며 무릇 그 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찌니라.
    Observe the Sabbath, because it is holy to you. Anyone who desecrates it must be put to death; whoever does any work on that day must be cut off from his people.
    For six days, work is to be done, but the seventh day is a Sabbath of rest, holy to the LORD. Whoever does any work on the Sabbath day must be put to death.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율법(토라) 출 13:9
    계명(미차바) 출 20:6



    토라() 율법

    תּוֹרָה 스트롱번호8451

    1.

    교훈

    2.

    잠1:8

    3.

    선지자를 통한 예언

    발음 [ tôwrâh ]
    어원
    3384에서 유래
    구약 성경
    220회 사용
    계명
    מִצְוָה 스트롱번호4687
    1.

    지휘

    2.

    하나님의 교훈

    3.

    선생의 교훈

    발음 [ mitsvâh ]
    어원
    6680에서 유래
    구약 성경
    181회 사용
    • 1.
      명사, 여성 지휘, 지배, 명령, 가르침, 교훈, 훈계.
      • a.
        명사, 여성 하나님의 교훈, 신6:1,25, 7:11.
      • b.
        명사, 여성 선생의 교훈, 잠7:1,2.

    참고 정보

    문법설명

    복수 מִצְוֹת

    연관 단어

    • 문법설명
      복수 מִצְוֹת
      관련 성경
      ☞명령(창26:5, 레26:14, 느9:34), 계명(출16:28, 왕상2:3, 시19:8), 규례(대하8:14), 법도(단9:5). [동] 명령하다(말2:1, 수22:3, 대하8:15, 29:25).


    מִשְׁפָּט 스트롱번호4941

    1.

    판단

    2.

    레19:15

    3.

    욥9:32

    발음 [ mishpâṭ ]
    어원
    8199에서 유래
    구약 성경
    424회 사용
    규례(호크)

    חֹק 스트롱번호2706
    1.

    제한된 것

    2.

    과업

    3.

    경계

    발음 [ chôq ]
    어원
    2710에서 유래
    구약 성경
    129회 사용












    대머리(케레아흐. qêrêach) קֵרֵחַ


    대머리(케레아흐. qêrêach)  קֵרֵחַ 스트롱번호 7142

    1. 머리의 뒷부분이 벗겨진 대머리의.   2. 레 13:40. 3. 왕하2:23.
    발음 [ qêrêach ]
    어원  /  713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회 사용
    • 1. 형용사, 남성 머리의 뒷부분이 벗겨진 대머리의, 레13:40, 왕하2:23.
    • 관련 성경 /  ☞대머리의(레 13:40). [명] 대머리(왕하 2: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קָרַח 스트롱번호 7139
    1. 대머리로 만들다.  2. 니팔형 : 벗겨지다. 3. 히필형 : 대머리가 되게 하다
    발음 [ qârach ]
    구약 성경  /  5회 사용
    • 1. 원형 대머리로 만들다, 털을 뽑다, 레21:5, 미1:16.

      • a. 원형 니팔형 : 벗겨지다[לְ을 수반하여], 렘16:6.
      • b. 원형 히필형: 대머리가 되게 하다, 겔27:31.
      • c. 원형 호팔분사형: 대머리가 된, 겔29:18.
    • 관련 성경  /  ☞무지러지다(겔29:18), 머리털을 밀다(겔27:31, 렘16:6), 대머리 같게 하다(미1:16, 레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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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머리를 대머리라고 하지만 정확히는 유전적으로 머리카락이 없거나 매우 적어서 뒤통수나 정수리가 드러난 상태를 말한다.
    한마디로 자연적으로 탈모가 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
    일부러 머리를 민 경우는 스킨헤드, 혹은 빡빡이 문서로 가도록 하자.

    탈모가 머리가 빠지는 상태를 말한다면, 대머리는 탈모가 심해져서 머리숱이 거의 없어지고(즉 이미 빠진), 이마선이 뒤로 밀린 상태를 말한다.
    대머리가 심한 경우에는 머리 옆과 뒤쪽에 얇은 띠 모양의 머리털만 남기도 한다. 
    이 경우 정수리까지 벗어졌다 하여 민머리라고 부를 수 있다.

    대머리가 흔히 나이 든 남자의 상징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빠르면 20~30대 초중반에도 대머리가 될 수 있다.
    개인차가 심하기는 하지만 빠른 사람은 정말 빨리 대머리가 된다.
    게다가 대머리까지는 아니지만 머리카락이 가늘어지다가 빠지는 탈모 자체가 아직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에게서 발생하는 빈도가 생각보다 많다.
    10~20대인데 벌써 프로페시아를 복용하고 미녹시딜을 뿌리는 등 탈모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다.
    실제로 탈모를 전문으로 진료하는 피부과 의사의 말에 따르면 특이하다고 넘길 정도로 적은 숫자가 아니라고 한다.

    유심히 보면 한국의 남성 연예인들 중에도 대머리가 의심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일부러 머리를 밀고 다니는 사람도 많지만, 남성형 M자 탈모 등이 젊을 때 발생해서 중장년 헤어스타일을 하는 바에야 밀고 만다는 생각으로 머리를 밀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예 이렇게 밀어버리면 그나마 스트레스를 덜 받는 효과도 있긴 하다.

    국내에서는 승려가 아닌 이상 머리를 삭발한 것을 이상하거나 고깝게 보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기 때문에 10대 고등학생이나 20대 대학생이나 20~30대 초임 직장인들이 1년 365일 삭발을 하고 다닌다면 사회에 불만이 있는 사람으로 찍혀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면접 같은 채용 과정에서도 치명적이다.
    그나마 개방적이고 포용적이고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머리를 삭발한 사람에 대해선 좋은 첫인상을 가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탈모가 심해서 머리를 밀고 다닌다고 설명을 해 줘야 비로소 납득하는 경우가 대다수일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이 동아시아권에서는 삭발이 권위에 대한 도전 및 반대 및 반항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사업자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직장은 직원간에 상하 위계 서열을 정해서 업무를 진행하는데, 권위에 대한 저항감이 크다고 생각해 대머리인 사람에 대해서는 아랫사람으로의 채용을 꺼린다. 문신한 사람을 자기 아랫사람으로 잘 채용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집회, 시위 등에서 특정 사안을 반대하며, 삭발식을 거행하는 것은 매우 흔하다.

    불교를 믿는 승려들도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머리를 미는데, 이는 당연히 탈모가 아니라 일부러 깎아서 만든 머리다. 즉 스님을 보고 대머리다 라고 하는 것은 큰 실례이며 응당 빡빡이로...는 아니고, 삭발하셨다고 함이 옳다.[4] 다만 머리를 밀지 않는 승려도 드물지만 있다. 한편 이슬람교의 행사 하지에서 남자 신도는 머리를 모두 미는 것이 규칙이다. 가끔 큰 시험을 앞둔 사람들은 외출을 자제하기 위해 머리와 눈썹까지 밀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카더라.

    탈모가 시작된 사람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로, 이것이 별명인 사람도 있다. 29만원으로 유명한 모 전직 대통령이라든가... 미국에서는 거의 없던 지도자형이다.[5]

    러시아의 국가지도자에게서 유독 많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심지어 러시아의 지도자는 대머리 황제(알렉산드르 3세)-대머리가 아니었던 마지막 황제(니콜라이 2세)-소련의 첫 번째 지도자 대머리(레닌) - 강철의 비대머리(스탈린)-[6]쿠바에 폭격기 배치한 간큰 대머리(흐루쇼프) - 체코 들쑤셔놓은 비대머리(브레즈네프) - 소련 최후의 희망 대머리(안드로포프) - 존재감 없는 비대머리(체르넨코) - 페레스트로이카 대머리(고르바초프)소련이 해체될때까지 반복되었다. 이후 러시아 연방에서도 옐친은 대머리가 아니지만 푸짜르는 대머리, 다시 바지대통령 메드베데프는 또 대머리가 아니고, 다시 푸틴이 집권하면서 계속 이 패턴이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푸틴의 유력한 후계자 후보들 혹은 그루지닌 같은 경쟁자들도 대부분 대머리가 아니다.[7]

    프랑스의 역대 대통령들도 은근히 대머리가 많다. 샤를 드골,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프랑수아 미테랑, 자크 시라크, 프랑수아 올랑드가 대머리이다.

    한국보다 대머리가 흔한 유럽 축구리그에서는 선수를 교체할 시기를 고를 때, 선수의 현재 컨디션은 어떤가, 그 선수가 이전에 몇시간 출장했는가와 함께 낮 경기라면 그 선수의 머리숱이 얼마나 남았는가도 고려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모자를 쓸 수 없는 축구 경기의 특성상 머리숱이 적으면 따가운 햇살 때문에 피로도가 빨리 오른다고 한다.

    정력과 대머리는 전혀 관계가 없다. 과학적인 인과관계가 전혀 없다.

    남성 호르몬의 양이 많다고 탈모가 생기는 게 아니고 DHT 또한 양이 많다고 탈모가 생기는 게 아니다. DHT는 남성 호르몬이 많다고 그대로 변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남성 호르몬이 많은 사람도 DHT로 잘 변환되지 않는 체질이라면 탈모가 생길 확률이 낮다. 반대로 남성 호르몬이 적은 사람도 DHT로 활발히 변환되는 체질이라면 탈모가 생길 확률이 높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DHT가 많더라도 탈모 유전자가 없다면 탈모가 생길 확률은 낮다.# 흔히 말하는 '탈모 유전자'는 'DHT가 탈모를 유발하게 만드는 유전자'를 말한다.

    이는 머리카락을 제외한 털의 성장도 마찬가지다. 체모가 많은 것은 남성 호르몬과 DHT 양의 많고 적음과는 상관없고, DHT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체모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유전자가 있어야 비로소 체모가 많아지는 것이다.

    참고로 DHT를 잘못 이해하여 DHT가 많으면 힘도 세고 근육도 더 잘 크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DHT는 근육과는 상관없다.다시 말해 많아봤자 아무런 장점이 없다

    남성형 탈모의 가장 주요한 원인은 유전DHT로, 이 두 가지 원인이 동시에 작용해야만 탈모 증상이 발현된다. DHT는 탈모 유전자를 지닌 사람의 모낭에 작용해 모낭을 위축시키고 모발의 성장기를 단축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이는 다름아닌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특정 효소에 의해 변환된 물질이다. 비록 DHT가 테스토스테론 변환 물질이기는 하나, 그 역할은 테스토스테론과 상이해 성인 남성의 근육 및 성징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따라서, 탈모 치료제의 역할 역시 탈모 원인 물질인 DHT의 생성을 억제해 모낭 위축에 따른 모발 연모화 및 탈모를 막는 것이지, 남성호르몬을 자체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다. # 그래서 탈모 치료제를 복용하면 남성 호르몬이 줄어들 것이라는 걱정과는 전혀 다르게, 오히려 남성 호르몬의 양이 증가하기도 한다. 따라서 탈모 치료제는 스포츠에서 금지약물로 분류되기도 한다.[8]

    수많은 사람들이 탈모로 고통받고 있지만 대머리는 그보다 더한 고통을 받는 편이다. 가장 먼저 사람 외모와 성적 매력에서 머리카락과 헤어 스타일이 차지하는 비중(약 50~70% 가량)이 굉장히 큰 편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인식에서도 영향이 크게 오간다. 여자 대머리를 생각하면 확 체감이 되는데, 아무리 이목구비 얼굴형이 절세미인이라 하더라도, 탈모가 있어서, 머리 숱이 별로 없다면, 매력이 폭락하며 남자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을 것이다. 결혼적령기 여성에게 있어, 결혼 상대를 찾는 데 어려움이 따를 수도 있다.

    주로 남성들에게서 대머리가 보이는 경우가 압도적이라서 여자는 대머리가 없을거라는 생각이 많지만, 탈모의 형태와 출현 빈도가 다를뿐이지 여자도 대머리가 있다. 당신이 모르게 가발을 착용하고 있을 뿐이다. 여자도 남자처럼 이마선이 뒤로 완전히 밀리고, 두피색이 피부색으로 완전히 바뀌는 남성형 탈모와는 다른 형태인 숱 자체가 비기 시작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하지만 남자는 탈모가 오면 머리라도 깎을 수 있지만 대한민국에서 여자가 대머리로 다니는 것은 매우 생소한 만큼, 대머리인 여자에게 있어서 가발은 필수품이나 다름 없기에 남자 이상으로 더한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남자 대머리도 젊은 나이에 대머리가 되면 사회 생활에 치명적이며, 애로사항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과거에 비하면 엄청난 이미지 개선이 이루어졌지만 아직 대한민국 사회가 대머리에 매우 익숙한 사회까지는 아니다보니 결혼 상대자를 구하는 것에도 애로사항이 생길 수 있고, 대머리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다른 매력조건이 있음에도 저평가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특히 대머리가 일종의 유전병이라서 자식을 낳을 경우 2세와 3세가 대머리일 확률이 매우 높아서 본능적으로 피하는 이유도 존재한다. 외모를 많이 보는, 서비스 업종에 취직하는 것도 대머리는 굉장히 어렵다. 특별한 전문직이나 거친 육체 노동 분야 등이 아니고, 외모가 중요한 서비스 업종에서는 대머리가 면접을 통과해서 채용되는 것이 매우 어려운게 현실이다.

    때문에 대머리는 건강에는 특별히 문제가 없지만 일종의 사회적 질병 취급을 받는다. 그 때문에 몇 몇 지자체(서울 성동구, 충남 보령시)에서는 탈모 치료 비용을 지원하는 경우가 생겼으며 20대 대선 당시에 탈모 치료의 건강보험 여부로 공약도 여럿 나왔다.

    탈모 및 대머리로 인하여 수많은 상품들이 나와 있으며, 단순히 머리에 검은 가루를 뿌리는 흑채에서 두피를 자극해 모발 성장을 촉진하는 상품이나 모발 이식 수술까지 이어진다.

    모발이식수술 중에서 마치 여성들의 지방이식수술과 똑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수술도 있는데 여성의 지방이식수술이 뱃살을 떼어다 가슴에 붙이는 수술이라면 대머리의 모발이식수술은 수염과 가슴털 등에서 떼어다 머리에 붙이는 수술이다.

    2015년 9월 MBC에서 방송된 다큐스페셜 "대머리라도 괜찮아" 를 보면 대머리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특히 정상인이 대머리로 분장을 한 채 몰래카메라를 촬영하는데, 피실험자는 대머리들이 심리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받는지 느낄 수 있으며, 다큐멘터리를 보는 일반인들은 그것을 관찰할 수 있다. 피실험자나 집에서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는 일반인이나 대머리들이 받는 심리적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이런 종류의 다큐멘터리는 결과를 정해놓고 찍는 일이 많기 때문에 신뢰도가 높은 편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실험 카메라 형식으로 조사한 걸 내보내는 방송 중에서 조작 혹은 왜곡 논란이 있던 사례가 꽤 있다.

    심지어 나이지리아에서는 대머리들 머리에 금이 있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안 자란다는 이상한 믿음에 대머리들이 살인 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한국에서도 대머리라고 놀린 사람이 살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댓글의 반응은 대부분, 남의 민감한 신체를 가지고 놀렸으니 죽을만도 했다는 반응이 많다.

    심지어 모잠비크에선 미신 때문에 살해 당한 후 주술의 재료로 쓰인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50대 이상 고령층 탈모는 외모의 관심이 극도로 줄어드는 연령대인 만큼 그냥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받아들이고,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한창 학교를 다니고, 구직 면접을 보고, 여자를 사귀고, 결혼을 해야하는, 20~30대의 조기 탈모 및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하는 40대에게는 치명적이다. 특히 20대 초반에 탈모가 올 경우, 한창 대학을 다녀야 하는 나이인데, 대인 관계 특히, 이성과의 교류가 매우 어려워지고, 대인 기피증이 생기고, 우울증이 생기고, 여자를 사귀기 힘드는 등 어려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구직 면접에서도 탈모 및 대머리는 치명적이다. 30대를 넘어가면 탈모 인구가 꽤 있는 편이라서 좀 덜하지만, 20대에 탈모가 오면 일자리를 잡는데에도 어려움이 많다. 사람과의 관계가 별로 안 중요한 연구직 등 일부 직종을 제외하고, 대면 영업직군 등에서는 면접에서 탈락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애인이나 아내가 될 예비신부에게 대머리인 사실을 언젠가는 알려야 하는 난감한 상황을 겪는데, 참고로 대머리라고 사실을 알리지 않아도 혼인 취소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 이는 단지 외모적 문제이기 때문에 반드시 고지해야 할 의무 사항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명나라의 태조 주원장은 자신의 옛날 빡빡이 스님 생활에 콤플렉스가 있어서 자신에게 바치는 글에 대머리란 한자(禿)[9]를 쓴 사람을 죽여버렸다. 심지어는 매우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한자인 (빛 광)자도 사용을 금지했을 정도였다.

    로마시대 투석구에 적힌 낙서 중에는[10] "루키우스는 대머리"라는 것이 있었다.[11] 출처는 앤서니 에버렛, 아우구스투스: 로마 최초의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젊은 나이에 탈모가 왔는데 개선식 때 병사들이 바람둥이 대머리라고 놀리자 무척 불쾌해 했다고 전한다. 본디 개선하는 주인공을 일부러 신명나게 놀려먹는 것은 당시의 관습이자 일종의 축하인사인지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놀림을 받든지 그냥 웃어넘겼음에도 불구하고 대머리라는 놀림만은 속이 상했나 보다.

    열왕기에 나오는 예언자 엘리사는 동네 아이들에게 대머리라고 놀림받았는데 갑자기 암곰 2마리가 튀어나와 아이들 중 42명을 찢어 죽였다. 자세한 건 문서 참조.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제사장이 대머리가 되면 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보고 참수했다고 한다.

    그래도 중세 유럽에서는 성직자나 학자가 대머리인 것은 드높은 지성의 상징과도 같았다. 즉 존경의 대상이었던 것.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대머리였을 경우에는 놀림감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유전자 분석 기술이 발달해서, 침 한방울로 유전자 검사만 받아봐도, 탈모 유전자 여부와 탈모가 올 확률을 알 수 있다.

    남녀 모두 탈모 유전자가 유전될 확률은 같다. 하지만 남성이 여성보다 탈모 유병률이 높은데, 여성도 난소와 부신에서 테스토스테론이 발생되기 때문에, 탈모 유전자를 보유했고, DHT가 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탈모가 진행되지만, 여성의 앞머리 헤어라인 쪽에는 탈모 유전자에 반응한 DHT로부터 모낭을 보호하는 아로마타제가 많이 분피되어 있어서 정수리에서 유전성 탈모가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모발의 탈모 진행을 방지하고 모발을 성장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탈모가 대부분 억제된다.

    본인을 기준으로 삼촌 항렬에 대머리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본인도 대머리가 될 확률이 있으며 주변 가족들과 친/외가 친척 중에서 아무도 대머리가 없어도 본인은 얼마든지 대머리가 될 수 있다. 실제 피부과에서도 이미 대머리로 변한 사람이든 아니면 한참 탈모로 스트레스 받는 사람이든 주변 가족이나 친척들 중에서 누군가 탈모로 고생하고 있거나 이미 대머리로 변한 사람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은 하지만,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자신은 가족들도 또 친척들도 아무도 대머리로 변한 사람이 없거나 탈모가 없다는 이유로 안심하면 안된다. 사람마다 헤어 사이클이 존재하는데, 그 사이클의 숫자가 사람마다 다르고 대머리인 사람은 그 사이클의 횟수가 짧아 일정 나이가 되면 머리가 빠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또 직접적인 원인은 유전이 맞지만, 사람이 어제는 멀쩡하다가 오늘 대머리로 변하지는 않으며 머리숱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는데 이렇게 줄어들 때 스트레스, 계절 같은 부차적인 요인도 줄어드는 속도에 분명 영향을 준다. 게다가 고혈압, 당뇨병 같은 만성질환도 영향이 준다.

    여자 쪽의 아버지가 대머리이면 그 자식이 대머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탈모 유전자는 상염색체 중 3번과 20번, 성염색체 X 등에서 나타난다. 탈모는 부계로도 유전되고, 모계로도 유전되지만, 최신 연구에서는 부계유전보다 모계유전이 더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성염색체는 여성 XX, 남성 XY이다. 이는 모계로 유전될 가능성이 더 높음을 의미한다. 외조부의 X염색체 탈모 유전자가 어머니의 X염색체에게 전해지고, 다시 아들의 X염색체에 실릴 수가 있는 것이다.

    노인들이 하는 말에 따르면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된다"고 하는데, 이 말의 유래는 과거 공짜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은 사람들이 이발소의 불결한 이발 도구로 인해 백선균에 걸려 탈모가 되었고, 이를 경계하는 의미에서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된다는 말이 생겨났다는 썰이 있다.

    이미 대머리가 된 상태라면 모발 이식 외엔 답이 없다. 아니면 가발을 쓰던가. 현재 의학계에서 머리카락이 다시 나오긴 힘들지만 적어도 머리카락이 빠지는 건(탈모) 일정 부분 막는다고 인정받은 치료 방법은 딱 두 가지인데, 바로 먹는 약 프로페시아(피나스테리드)와 바르는 약 미녹시딜.

    모발이식 중 하나인데 아예 피부이식을 하는 방법도 있다. 털이 나는 피부를 머리에 이식하는 것.

    만약 모발이식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먹는 약인 피나스테라이드나 두타스테라이드의 복용을 중단해서는 안된다. 공여부 우성의 원리[12]에 따라 이식된 모발들은 빠지지 않지만 이식되지 않은 머리카락들은 약 복용을 중단한다면 탈모가 계속 진행되기 때문이다.

    다만 모발이식도 머리카락이 안 빠지는 옆이나 뒤가 풍성해야 가능하다는 한계점이 있다. 대머리 중 상당수는 뒷머리도 별로 없기 때문에 모발이식도 쉽지 않다. 뒷머리가 풍성하더라도, 특히나 뒤통수에 여분의 살집이 없으면 최악의 경우 불가능할 수도 있다. 모발이식은 빠진 머리카락을 다시 나게 하는게 아니라 있던 머리카락을 다른 곳으로 고르게 분포시키는 수술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머리 클리닉에 괜히 수백만원 주면서 다니는 것은 그야말로 가성비 떨어지는 돈낭비다. 마사지를 하거나 머리에 마찰을 준다거나 해서 머리카락이 다시 나는 경우는 없다. 클리닉에서 두피 세척을 하면서 두피를 깨끗하게 해야 탈모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맞는 말이긴 하지만 집에서 샴푸로 열심히 머리 감으면 될 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대머리 클리닉은 돈낭비이니 가지 않는 것을 권장한다. 차라리 그 돈으로 모발 이식 수술을 하는 편이 백 번 낫다.

    대부분의 탈모 관련 클리닉은 스트레스성 탈모나 지루성 탈모[13] 치료에는 효과를 보일지 몰라도, 유전성 탈모, 즉 대머리에는 아무 효과를 보이지 못한다. 대부분의 치료 사례로 보이는 사진들은 스트레스나 지루로 인한 일시적인 탈모다. 치료 사례 사진이 남성형 탈모, 즉 M자나 복합성보다는 정수리 쪽이 많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거라면 굳이 돈 들여 클리닉 다닐 필요가 없다. 규칙적인 식습관, 수면습관, 청결 유지 등만 해도 충분하기 때문. 즉, 한마디로 잘 먹고 잘 자고 머리 잘 감고 잘 말리면 될 일이다.

    그 외 보톡스가 탈모 방지/재생 효과 기능도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 새로운 방법을 개발 중이라고 하니 지금 젊은 세대들은 조금 기다려보자. 만에 하나 확실한 탈모 치료제가 나온다면 개발자는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부자건 가난하건 탈모는 공평하게 찾아오니까...

    UNIST박종화 교수는, 미래에는 게놈 치료를 통해 치료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프로페시아는 워낙 많은 루머와 사실이 뒤섞여 떠돌아다니고 있다.

    • 프로페시아는 비타민제와 비슷한 정도의 약효만을 가질 뿐이다?
      프로페시아는 의사협회에서 강력권장으로 분류될 만큼 확실한 약효를 가지고 있다.[14] 특히 영양제급 효과라는 건 말이 안 되는 게 성분 자체가 특정 호르몬[15] 생성의 부촉매 역할이지, 영양분이 들어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 프로페시아는 내성이 있다?
      프로페시아에는 내성효과가 없다. 하지만 대개 1~5년 후엔 효과가 조금씩 떨어지는데, 이는 노화로 인한 탈락과 더불어 약이 차단해 주는 호르몬 비율 외 때문이다. 대머리가 아닌 어른도 나이 50이 넘어가면[16] 모발이 현저히 얇아지는데, 대머리는 이게 수배~수십 배는 빠른 상황이기에 내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는 약 복용을 그만두면 더 빨리 대머리가 된다.

    • 프로페시아를 계속 복용하면 고자가 된다?
      소수 부작용이 나타나며, 영구적이지 않다. 매뉴얼을 보면 알겠지만, 2%의 환자에게서 성기능 감퇴가 일어났고[17], 그 중 95%가 넘는 사람들은 다시 성기능이 회복되었다. 즉, 0.1%에 해당되는 사람만이 프로페시아를 복용하면 불임으로 살아야 하는 것. 당연히 복용을 멈추면 정상으로 돌아온다. 일단 이런 루머가 떠도는 이유는 프로페시아가 탈모 호르몬이기도 한 전립선 호르몬 생성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18] 물론 고자는 고환이 제 기능을 못하는 거라 아예 다른 얘기가 되지만 성기능 약화로만 본다면 그 부작용을 아예 없다고 하는 것은 사실 문제가 있다.

    • 프로스카를 쪼개 먹는다면?
      프로스카는 프로페시아의 5배 용량이며 전립선비대증용으로 허가가 난 약이다. 피나스테라이드를 포함한 제제이기 때문에 프로페시아와 성분이 동일하며, 함량이 다를 뿐이다. 약을 쪼개기 때문에 매일매일 먹는 약의 용량이 조금씩 달라질 수는 있지만, 두피에서의 DHT 차단률, 부작용 확률 등은 프로페시아를 복용할 때와 별 차이가 없다. 따라서 안심하고 먹어도 된다. 참고로 프로스카의 경우 인천국제공항 초기 의약분업 예외지역 시절 공항에서 많이 팔린 약 중 하나다. 물론 지금은 인천공항도 의약분업 시행 중이며 오남용 우려약이라서 예외지역에서도 처방전이 필수다. 다만 피나스테리드 특성상 피부흡수가 잘되는 편이며, 임신 중인 여성이 만졌을 경우 태아에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어서 코팅이 잘 되어 있다. 거기다 알약도 그렇게 큰 편이 아니라 쪼개는게 굉장히 불편하다. 실제로 쪼개다보면 가루가 되는 양도 많고 조각끼리 크기도 많이 다르게 된다. 위에 말한 성기능 부작용이 용량에 비례하여 확률이 높아지는지라 부작용 위험이 커진다. 전립선비대증의 경우 보험이 적용되기 때문에 프로스카를 처방받아 먹는 게 비용부담이 적어서 쪼개서 먹는 경우가 많은데, 심평원에 걸리면 처방한 의사도 곤란한지라 되도록 그냥 프로페시아를 먹는 게 낫다.

    대머리들이 애환을 겪는 근본적인 이유가 외모 문제이다. 대머리는 머리카락만 없기 때문에 신체 기능에 심각한 문제를 주지는 않으며 실제로 의료계에서는 급박한 생명의 생존이 아닌, 어디까지나 미용의 영역으로 보는 편이다. 그러므로 일상 생활이 물리적으로 불편할 이유는 없다. 단, 머리카락이 너무 없으면, 겨울에 두피가 춥다는 명백한 단점도 있긴 하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뇌에 대한 완충 작용으로 보호 역할도 하는데, 머리카락이 없으니 군대나 건설 현장 등에서 소위 험한 일을 할 때 부상 위험성이 더 커진다.

    진화심리학적으로 대머리는 기대 수명이 충분히 남아 있어서, 2세가 성년이 되는 시기까지 충분하게 부양이 가능하리라 예상되는 남성을 여성이 선택하는데 도움이 되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대머리라는 기전을 만들어서, 아직 탈모가 진행되지 않고 기대 수명이 충분히 남아있는 젊은 남자들이 우선 순위로 여성들에게 선택받아서, 2세를 가지도록 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남자의 대머리는 외모에는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데, 스킨헤드나 대머리에 익숙하지 않은 대한민국 기준으로는 여성의 남자에 대한 성욕을 심각하게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결혼 적령기 남자가 대머리라면, 연애 대상이 결혼 상대로써는 꺼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결혼정보회사에 등록할 때도, 대머리면, 평가 점수와 매칭 가능 상대 여자의 레벨이 심각하게 떨어지기도 한다. 어쩔 수 없는 것이 대머리는 일종의 유전병이기 때문이다. 예시로, 전두환이 한국인 중에서 대머리로 가장 유명한 인물인데, 아들 전재용도 심각한 대머리다.

    또한 대한민국에서의 머리를 빡빡 깎는 것은 일종의 반항, 사회와 어긋나려는 사람이른 이미지가 박혀있다보니 일반적으로 외모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인식이 있다. 다만, 반대로 대머리가 개성으로 꼽히기도 하는데 대머리가 어울리는 사람들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한국에서는 구준엽, 홍석천 등이 있으며 외국인까지 치면 축구 감독인 지네딘 지단, 펩 과르디올라 등이 여기에 속한다.[19]

    서구권에서는 스킨헤드에 매우 익숙한 만큼 동양권, 특히 대한민국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마찬가지고 머리가 풍성하게 있는 사람보다는 열등감 포인트로 자리잡아있다. 더욱이 서구권이 유전적 탈모 비율이 40~50%대로 집계될 정도로 높기 때문에 탈모로 고민하는 남자들이 매우 많다. 미국의 국민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에서 대머리 캐릭터 호머 심슨은 탈모 컴플렉스와 발모제에 관한 에피소드가 수차례 등장했으며, 그와 정반대 캐릭터인 네드 플랜더스가 풍성한 머리숱에 근육질 몸매인 것을 봐도 대머리의 일반적인 이미지를 알 수 있다. 방송 매체에서도 대머리는 농담거리로 삼는데, 한 예로 머리숱 풍성하기로 유명한 배우 앤드류 가필드스티븐 콜베어 토크쇼에 출연했을때 방청석에 앉아있던 대머리 형과 아버지와 비교되며 머리채를 잡히기도 했다(...).#

    그리고 서구에서 대머리를 미학적으로 높게 쳐주는 것도 어디까지나 그것이 어울리는 사람에 한해서이다. 미드 30Rock에서 대머리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행복한 삶을 살 확률이 현저히 낮아진다며 부하에게 가발을 권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과거 모 결혼알선업체에서 여성회원들에게 한 설문조사 결과 가장 결혼하기 싫은 배우자 1위로 꼽힌 적이 있다.

    탈모가 진행되는 사람들 중엔 모발 이식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20] 오히려 삭발하는게 훨씬 나은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21]중년에게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 중에 가끔 대머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SMP(Scalp Micro-Pigmentation)라는 모근을 한 땀 한 땀 문신을 새겨서 머리숱 자체가 풍성하게 보이는 대머리치료 방법도 있다. 사실 치료는 아니고, 대머리이지만 일부러 삭발을 하고 다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게 착시효과를 노린 시술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다만 이쪽의 경우 또한 단점이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퍼렇게 피부가 물들어 이상한 색이 그대로 피부에 물들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또한 시술자의 경험이 부족하거나 실력이 미숙할 경우 오히려 안 하니만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창작물에서의 대머리 캐릭터는 높은 확률로 악당이며 간지 캐릭터 혹은 네타/개그 캐릭터가 된다는 두 가지 극단적인 스펙트럼이 자주 보인다. 악역이 아니라면 어느 쪽이건 주인공 혹은 일행들의 편이거나 조력자가 될 확률이 높다. 가끔 간지와 개그를 겸비한 대머리 캐릭터도 있겠지만... 과거 라인리그 시절의 게임라인에서는 게임 속 대머리 캐릭터들을 주제로 다룬 특집 기사를 내일은 빛나리라는 제하에 실은 적도 있다.[22] 대머리의 매력을 내세우는 여자 캐릭터는 거의 없다. 그나마 현실에 가까운 세계관에서는 일부 여군 캐릭터들, 사이버펑크포스트 아포칼립스같은 일부 SF장르에서는 해당 작품에 따라 인류의 패션 센스가 현실보다 진보되었거나, 혹은 파격적으로 변형되었다거나 한 경우 대머리까진 아니어도 거의 빡빡 깎은 여캐들이 나오긴 하다만, 매력이라기보다는 작품 배경에 감도는 패션센스적 장치에 가깝다. 사실상 남성 전용 속성으로 굳어진 상태. 다만 원펀맨의 주인공 사이타마 여체화 팬아트 같은 경우가 예외인데 비록 2차 창작이긴 하지만 대머리 여캐임에도 인기가 제법 있는 편이다.

    참고로 1980년부터 1987년까지 대머리를 개그소재로 쓰는 것을 금지했다. 이유는 당시 대통령인 전두환이 대머리라서(...) 방송법상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지만 KBS나 MBC나 전두환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에 알아서 자체검열을 한 것. 이 때문에 박용식이나 이주일도 한 동안 출연금지조치를 먹었다는 웃지 못할 후문도 있었고, 만화도 마찬가지로 고바우 영감의 주인공인 고바우 영감이 대머리를 드러내면서 새해인사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가 한동안 연재가 중단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고, 김수정의 만화가 대머리 악당 캐릭터 때문에 연재가 중단되기도 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일어났다.

    삭발한 대머리는 의외로 여성들이 선호한다. 바버샵 스타일 언더컷하고 전부 삭발한 대머리, 투블럭 바가지머리하고 반삭 헤어스타일과 울프컷, 삭발 모히칸을 포함해 6개의 남자 헤어스타일의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 의외로 여성들 사이에는 빡빡민 대머리가 매력적인 것으로 선호되었다. 조사 자료를 보면 여성들에게 가장 선호가 되었던 남자 헤어스타일은 바버샵 스타일의 슬릭백 언더컷 형태 투블럭이였으며, 반삭, 삭발한 대머리 순으로 선호하였고 투블럭 바가지 머리와 멀릿 헤어스타일은 선호도가 적었으며, 가장 선호도가 낮은 헤어스타일은 모히칸 스타일이였다.[23]

    대머리는 위생에서 보통 머리보다 관리하기 쉬운 편이다.[24] 일단 머리카락이 없으므로 머리를 매만질 필요도 없으며, 온도 또한 차갑기에 진균이 자랄 확률을 낮춘다. 진균은 최적의 온도 및 습도에서 자란다.

    그리고 머리 감는 데 샴푸린스가 필요하지 않다. 얼굴 씻듯이 씻으면 되며, AHA와 같은 크림을 쓰면 비듬도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다. 단, 피부가 연약한 상태에서 쓰는건 금물이다.

    수분의 경우 수분크림을 발라주면 된다. 아래에 나오는 기능적 상실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머리의 두번째 장점은 진드기 예방이다. 상기 내용에 해당돼야 높은 확률로 예방할 수 있다. 진드기는 비듬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피부 진드기 중에서 흔한 집먼지 진드기는 단지 비듬만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최적의 온도와 습도에서 자라기 때문에, 대머리가 될 경우 이 조건들이 줄줄이 깨지게 된다. 비듬이 많아도 온도와 습도가 낮기 때문에 자랄 확률이 낮은데, 이마저도 비듬이 상당 부분 제거되면 아예 사는 것 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의외의 장점으로 생각보다 실제 나이를 맞추거나 가늠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지며, 오히려 젊게 보는 경우도 생긴다. 머리카락이 외모와 인상에 있어서 큰 비중을 주는 만큼, 머리를 밀어버리면 머리카락으로 나이를 판단할 수 없게 되어 얼굴에 집중된다. 여기에 눈가주름을 상대적으로 덜 인식 시키는 두꺼운 뿔테안경을 착용해주면[25] 실제 나이보다 동안처럼 보이는 경우가 매우 많아지기도 한다.

    이는 사람은 타인의 나이를 인상착의나 얼굴형, 얼굴이나 목의 주름 정도로 빠르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노화는 오랜시간동안 천천히 진행되기 때문에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럴 때는 다들 외모가 비슷비슷해 보이는 대머리의 단점이 오히려 장점이기도 한 셈이다.

    하지만 이는 얼굴이 동안인 경우에만 해당된다. 우선 홍석천은 대머리를 떠나서 외모 자체가 동안이라는 점을 상기해두자. 일반적이거나 얼굴이 나이에 비해 삭은 편이라면 오히려 아래의 노안 항목을 참조하는 것이 좋다.

    그나마 나이가 70 이상을 바라보고 흰머리가 나는 케이스라면 이 경우엔 대머리인 쪽이 좀 더 동안으로 보이긴한다. 물론 흰머리가 노인의 대명사라 늙어보여서 그런 거지 대머리가 동안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은 아님을 알아두자. 물론 이정도의 나이가 되면 머리가 시린 게 문제지 동안으로 보이는 것엔 신경도 쓰이지 않을 것이다.

    여름에 피부는 뜨거워지고, 겨울에 피부는 차가워진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머리카락은 일부 보온기능이 있는데, 이게 제거되면 두피는 일반적인 살 이상의 고온과 저온에 노출된다. 두피에 땡볕이 직접 쬐어진다고 생각해보라. 뜨거워 죽을 지경이다. 겨울에는 뜬금없이 맨살을 드러내고 있는 꼴이라 상당히 춥다. 때문에 대머리인 사람은 겨울에 모자를 쓰는 경우가 많다.

    대머리도 반사율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가에 따라 반사율은 큰 차이를 보인다. 매우 흰 편이고, 자외선 차단제 등을 잘 바르면 50%도 가능하다고 한다.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눈부심이 일어난다. 반면, 어둡고 평범한 대머리는 20%에도 못미친다.

    스님들은 여름에도 그대로 절에서 지낸다. 삭발한 사람이 여름에 뜨겁다고 말하지만, 삭발과 대머리는 반사율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난다. 삭발은 어두운 계열에 머리카락이 잔존해 있고, 대머리는 보다 밝은 계열에 모든 곳이 반사지점이기 때문이다.[26]

    머리카락은 단순 장식용이 아니고 엄연히 자체 기능이 있다. 비록 일상생활에 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대머리는 머리카락의 두피 보호, 보온 등의 기능을 상실하는 셈이다.

    자세한 건 머리카락 문서에서 기능 부분을 같이 참조하면 좋다.

    장점 항목에는 동안이 장점이라고 적혀 있지만, 이건 얼굴이 동안인 경우에나 부각되는 거고, 대머리라면 시선이 머리카락으로 분산되지 않고 얼굴에 집중되며 머리가 벗겨졌다는 자체만으로 나이가 많을 거라고 오해를 받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일반적인 사람의 대머리는 오히려 사람을 늙어보이게 만든다. 전술했듯이 사람은 타인의 나이를 외모로 판단하기 때문.

    위에 있는 장점에 있는 영상의 1분 9초대에서 머리를 민 남성이 가발을 쓴 모습을 보고 오자. 여자 가발을 썼음에도 가발을 쓴 모습이 훨씬 더 젊어보일 것이다.

    게다가 머리를 전부 손실한 대머리가 아니라 탈모라면 더욱 노안이 부각된다. 김광규가 가발 쓴 사진을 보면 탈모가 가발을 착용할 경우 노안이 되긴커녕 오히려 더 젊어보이는 효과를 보여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광규의 외모는 준수한 편인데도 말이다. 때문에 두상이 전부 벗겨질 정도로 심각한 탈모를 겪고 있다면 포기하고 머리를 전부 밀어버리는 것도 방법이다.

    서비스업이나 영업사원일 경우 불리할 수 있다. 다만 이부분은 대머리임에도 개성적으로 보이는 외모거나 자연스런 가발을 사용한다면 어느 정도 커버할 수는 있다. 이를 법적으로 제재할 경우 문신 등도 전부 허용해줘야 하기에 법으로 제재하기에는 무리이다.

    로고스(λόγος)와 레마(ῥῆμα)


    인터넷 상에서 "로고스(논리, 원칙, 이성)"와 "레마(대화하는 언어, 말씀)"를 구분하여 이렇게 설명하는 내용을 자주 읽게 됩니다.

    로고스는 논리, 원칙, 이성이란 의미
    레마는 (대화하는) 언어, 말씀이란 의미
    따라서 로고스는 주로 문자로 기록된 말씀
    레마는 언어로 선포된 말씀이라고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로고스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
    레마는 기록된 말씀 중에서 특별히 나에게 영적 감동을 주는 말씀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주관적인 입장입니다.
    성경 전체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고스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대략 331회
    레마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대략 70회
    로고스와 레마를 정확하게 분석하려면 위에 열거된 모든 구절을 읽고 살핀 후에 바르게 해석해야만 합니다.

    어느 특정 선교 단체에서 몇 구절을 인용하여 레마의 의미를 마치 어떤 능력이 임한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신앙에서 이탈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소개합니다.

    마태복음 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레마)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로고스) 받으리니.”

    마태복음 18:15-16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레마) 확증하게 하라.”

    마태복음 12:36-3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하릴없는 레마(말)를 하든지 심판 날에 그것에 대해 로고스(심문으로 번역됨)를 줘야 하리라.
    로고스(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로고스(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누가복음 3: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레마)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요한복음 12: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레마)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로고스)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즉, 예수님의 그 당시 발언 혹은 증언을(레마) 받지 않았던 사람들은 곧 예수님이 한 그 말이(로고스) 그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10:42-44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을(레마) 할 때에 성령이 말씀(로고스)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이 구절에서 보면 오히려 레마는 베드로의 증언(발언)이었고 로고스는 그 내용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6:16-19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레마)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로고스)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λόγ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056

    1. 말하기.   2. 말.  3. ㉠ 너의 말
    발음 [ lŏgŏs ]
    어원  / 3004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말(마5:37, 눅1:20, 행2:22), 말씀(마8:8, 막4:15, 행6:2, 11:19, 14:25, 살전1:6), 소리(눅 3:4), 소문(눅7:17, 행11:22), 이야기(눅24:17), 글(행1:1), 언변(고전1:5), 모양(골2: 23), 일(행15:6, 18:15, 19:40), 고발(행19: 38), 전도(골4:3), 결산(마18:23, 25:19), 전파(막1: 45), 말씀(막2:2, 요2:22, 행20:35), 고(벧전4:5), 예언(벧후1:19), 이유(마5:32, 벧전3:15).

    ῥῆμα 스트롱번호 4487

    1. 말하여진 것.   2. 예언.  3. 명령
    발음 [ rhēma ]
    어원  / 4483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말씀(마4:4, 눅1:37, 행5:20), 말(마5:11, 행2:14, 고후12:4), 일(눅2:15, 행5:3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로고스(λόγος)와 레마(ῥῆμα)  -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λόγος)와 레마(ῥῆμα)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신약 성경은 두 단어 모두 큰 구별 없이, 말 혹은 말씀으로 번역합니다.
    원어로 보지 않는 한 어떤 구절이 로고스이고 어떤 구절이 레마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신약에 331번 등장하는 로고스가 말, 말씀, 이야기, 진술 등을 뜻하는 광범위하고도 포괄적인 단어라면 70번 등장하는 레마는 ‘발언’을 뜻하는 구어(口語)입니다.
    로고스의 숫자를 더하게 되면 7이(3+3+1) 나오고 레마는 70이 됩니다(하나님의 완전수 7과 70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단을 참조).

    ‘로고스’는 성경에 적힌 일반적인 하나님의 말씀
    ‘레마’는 내게 주는 특별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며 계시라고 주장

    레마를 통해 성령의 권능이 강력하게 역사하며 주님을 영적으로 만나게 된다는 근거 없는 주장으로 교회를 미혹하며 혼탁 시킵니다.

    몇 년 전 이런 주장을 하며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던 사람이 가는 곳마다 파탄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레마와 로고스가 들어간 모든 구절을 뽑아 비교 분석하였고 레마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성경이 뒷받침되지 않는 주장임을 발견했었습니다.

    물론 70번 나오는 레마 구절들을 읽다 보면 레마엔 로고스와는 다른 특별하고 비밀스러운 어떤 힘과 능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레마가 나오는 몇 유명 구절 중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레마) 살 것이라(마 4:4)’,
    ‘주의 말씀(레마)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 던져(눅 5:5)’,
    ‘내 말이(레마)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레마)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 5:26)’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로고스가 나오는 331구절을 읽어보지 않기에 오는 착각일 뿐입니다.
    로고스 구절들을 모두 읽어본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로고스든 레마든 살아 움직이는 능력의 말씀임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오해는 그보다도 더 근본적인 어원을 무시한 탓일 것입니다.
    여러 형태의 말(로고스) 중에서도 특별히 레마는 구어(口語)를 뜻하며 여러 사람 앞에서의 공식적인 ‘발언’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정도 차이를 갖고 로고스가 성경에 적힌 문자라면 레마는 살아서 움직이는 ‘로고스’, ‘성령으로 변화 받은 능력 있는 영의 언어’라고 까지 비약하는 건 미혹하는 영의 역사일 뿐입니다.

    레마에 대해 연구하다 얻은 유익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마태복음 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레마)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로고스) 받으리니.”

    이 구절을 그냥 ‘말’의 의미로 읽으면 보통 부담되는 구절이 아닙니다.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실없고 무익한 말을 많이 하나요.
    영어로 직역하면 ‘하릴없는(idle)’인데, 이처럼 마음에도 없고 일없이 괜히 한 말까지도 심판 날에 심문받아야 한다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레마’가 ‘발언’을 뜻한다는 걸 알자 이해가 됐습니다.
    이 구절은 공식적으로 쓸데없는 발언 혹은 증언을 하는 경우이지 일상적인 경우를 말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역시 주님께서 말씀하신 다음 구절에서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레마) 확증하게 하라(마 18:15-16)”

    마태복음 12장 36절엔 레마와 로고스가 같이 쓰였다는 것입니다.
    두 원어를 넣어서 36절과 37절을 직역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하릴없는 레마(말)를 하든지 심판 날에 그것에 대해 로고스(심문으로 번역됨)를 줘야 하리라.
    로고스(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로고스(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사람들 앞에서(주로 공식적인) 하릴없는 발언이나 증언을 한 사람은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서 그것에 대해 말해야(변론 혹은 보고) 할 것입니다.
    그 말에 따라 의롭다 함을 받을 수도 있고 정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레마만 특별한 계시의 말씀인 것처럼 인용되는 구절 중 하나는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레마)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2)” 라는 세례 요한에게 말씀이 임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에 대한 다른 두 구절엔 레마가 아닌 로고스가 쓰입니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로고스)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요 10:35).”
    한국어 번역이 이렇게 되어서 어감이 약간 다르게 느껴집니다.

    영어로는 “If he called them gods, unto whom the word of God came, and the scripture cannot be broken;(요 10:35).”
    누가복음 3장 2절은 “Annas and Caiaphas being the high priests, the word of God came unto John the son of Zacharias in the wilderness.”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인데 예수님이 시편을 인용하신 구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임한 말씀’을 오히려 로고스로 썼고, 세례 요한 부분은 레마로 쓰였습니다.

    또한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고전 14:36)”며 따진 구절도 ‘로고스’가 쓰입니다.
    영어로는 “What? came the word of God out from you? or came it unto you only?”
    직역하면, “무엇이라? 너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나왔더냐? 아니면 너에게만 그것이 임했더냐?”입니다.

    레마(ῥῆμα)와 로고스(λόγος)의 차이가 어떤 신비나 능력에 있지 않고 그저 상황에 맞게 쓰인 것뿐이란 걸 증명하는 좋은 방법은 아무래도 두 단어가 한 구절에 같은 용도로 쓰인 경우를 보는 걸 겁니다.

    다음은 그런 경우의 몇 구절입니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레마)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로고스)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요 12:48).” 즉, 예수님의 그 당시 발언 혹은 증언을(레마) 받지 않았던 사람들은 곧 예수님이 한 그 말이(로고스) 그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을(레마) 할 때에 성령이 말씀(로고스)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 10:42-44).” 이 구절에서 보면 오히려 레마는 베드로의 증언(발언)이었고 로고스는 그 내용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레마)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로고스)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 6:16-19).”
    로고스를 폄하하고 레마를 신비롭고 영화롭게 하려는 사람들은 아마도 엡 6:16-18절까지만 인용할 것 같습니다.
    이 두 구절만 보면 마치 레마가 특별한 것 같지만 이어지는 19절까지 보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는 말씀으로는 ‘로고스’가 쓰였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더하고 빼고 뜻을 왜곡하는 일은 단 에덴동산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마지막 예로,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레마)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로고스)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히 12:18-19).” 이 구절에서도 레마와 로고스는 같은 의미지만 상황에 맞춰 쓰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로고스)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란 구절은 레마가 아닌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그냥 흰 종이에 검은 글씨이고(그들의 말대로), 레마는 살아있는 로고스로서 능력 있는 말씀이란 주장이 얼마나 근거 없는지 잘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또한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로고스)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4).”에서도 청년들 안에 거한 로고스(말씀)로 흉악한 자를 이겼다고 하지 레마로 이겼다고 하지 않습니다. ‘로고스’는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요 1:1, 14)’을 칭하는 표현이기도 한데 이렇게 로고스를 무시하는 생각과 궤변이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이지 깊이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레마가 로고스보다 한 수 아래다’란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로고스는 살아 있는 말씀, 능력의 말씀이 아니라는 주장에 반론을 제시하다 보니 로고스에 치중해서 글을 쓴 것뿐입니다.
    로고스든 레마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면 능력 있고 살아서 역사하는 말씀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저 허공에 흩어지는 말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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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d of Numbers:7(70)이란 숫자의 의미

    “3이란 숫자를 생각하니 베드로의 3번의 부인과 3번의 고백 사이에 예수님의 3개의 못자국도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만났을 때 사랑하느냐 물어보시는 주님의 손과 발에  못자국을 베드로는 어떤 마음으로 보았을까 떠올려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엔 3개의 십자가만 있었던 게 아니라,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의 몸에도 3개의 못이 박혔습니다.
    양손(혹은 손목)과 두발목을 관통한 3개의 못은 4개의 상처를 남기고 옆구리의 찔린 상처까지 더하면 5가 됩니다.
    하나님이(3) 세상을(4) 사랑하신 은혜의 죽음이(5) 십자가였음을 다시 묵상하자니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에 나오는 7개의 간구도 3개는 하나님에 관한 것, 4개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음이 상기되었습니다(마 6장 9-13).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수이면서 안식과 영적 완전함과 완성을 뜻하는 7에 대해 적으려 합니다.
    7은 성경에 자주 등장할 뿐만 아니라 너무도 중요한 숫자이기에 3처럼 일일이 다 적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주요 포인트만 적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6일간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7일째 되던 날 안식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는 창세기 1장 1절은 7단어의 히브리어(바라싯 바라 엘로힘 에트 하샤마임 워에트 하아레스)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총 28개(7×4)의 히브리 알파벳으로 되어 있습니다(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열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구절이 하나님의 수 7과 세상과 창조물의 수인 4의 곱셈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성경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숫자 7은 지난 글에 적었던 것처럼 숫자 3과 같이 일하는 경우를 꽤 발견하는데 숫자 10과도 그러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7단어의 히브리어로 구성된 창세기 1장 1절은 10단어의 영어(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로 번역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 하나님이 데려가신 에녹은 아담의 7대손이었고 심판의 홍수에서 구원을 얻은 노아는 10대손이었습니다.
    그는 정결한 동물은 암수 일곱씩 방주에 들였으며(창 7:2), 방주에 들어간 7일 후에 홍수가 지면을 덮었습니다(창 7:10).
    노아라는 이름이 성경에서 7번째로 등장하는 부분은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입니다.
    이런 7과 10을 더한 17은 부활 승리를 의미하는 중요한 숫자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직접 이름을 지어주시거나 바꿔주신 이름이 몇 번인지 궁금해서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적어도 제가 찾은 것으로는 모두 17번이었습니다.

    또한 7과 10을 곱한 숫자인 70도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7년의 가뭄과 7년의 흉년을 맡아 관장하던 요셉의 초청으로 에굽으로 야곱과 함께 내려간 가족의 수는 모두 70명이었습니다(출1:5). 야곱이 죽자 요셉은 그 몸을 40일간 향으로 처리하게 했고 에굽인들은 70일간 애곡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사역을 도울 70장로를 세우는데(출24:1), 에스겔서에도 70장로가 나오고(겔8:11) 예수님도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70인을 세워 둘씩 짝지어 내보내십니다(눅10:1-17). 그런 반면에 적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아비멜렉은 아버지에게서 난 70명의 형제를 한칼에 죽입니다(삿 9:56). 40이란 수가 주로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개개인의 시험 및 연단의 기간을 뜻하는 수라면, 70이란 기간은 한 나라의 시험 및 연단의 어떤 기간을 뜻합니다. 이스라엘만 우상숭배로 바벨론에 멸망당했다가 70년의 포로 기간이 끝난 후 돌아와 다시 나라를 재건한 게 아닙니다. 이사야서에는 두로에 대한 70년 예언도 나옵니다. 두로는 70년간 잊혀질 것이나 70년 후에는 창녀처럼 노래하고 그 70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찾아오시리니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모든 나라와 음란을 행할 것이라고 합니다(사 23:15-17). 개역개정은 이 부분을 ‘하나님이 돌보신다’로 번역했지만 이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성경에서 쓰이는 ‘하나님이 방문하신다(visit), 찾아오신다’는 표현은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려고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천사가 직접 방문하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복된 약속의 성취일 수도 있고(약속의 자녀인 이삭이나 에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의 경우), 은혜와 구원(룻 1:6), 죽음(민 16:29), 혹은 심판의 때가 임한 것일 수도(출 20:5, 32:34) 있습니다(킹제임스 영어성경에서 ‘visit’을 찾게 되면 모두 80번 나오는데 구절들을 일일이 읽어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의하면 이스라엘에 죄와 허물이 그치고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 환상과 예언이 응하여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시기까지의 70주, 혹은 70개의 7일이 정해져 있습니다(단 9:24). 다니엘이 바벨론의 포로 기간 가운데 받은 이 예언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주님은 내게 죄를 범한 형제를 7번은 용서해야 하는 거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70의 7번이라도 용서해주라고 하십니다(마18:22).

    7은 또한 은혜의 수인 5와도 함께 일해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상징하는 12를 이루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담은 창세기 1장과 2장엔 ‘창조’란 단어가 5구절에 걸쳐 7번 나옵니다(창1:1, 21, 27(3번), 2:3, 2:4).
    킹제임스 영어 성경에서 “사랑하는 아들(beloved son)”을 찾게 되면 11번 나오고 “사랑하는 아들들”이란 복수형까지 포함하면 12번 나온다는 걸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향한 ‘내 사랑하는 아들(my beloved son)’이란 표현은 정확히 7번 나온다는 것입니다.

    모세 5경에도 7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첫째로는 여호와의 7절기가 있습니다.
    7절기 중 무교절은 7일간 무교병을 먹으며(레 23:6) 오순절은 초실절부터 7번의 안식일을 센 다음 날, 즉 50일이 되는 날을 기념하는 절기로 성령이 강림하신 날이기도 합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에녹이 태어나고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신 날 또한 오순절이라고 하는데 전승이니 권위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리고 나팔절은 7번째 달의 첫날이며 장막절은 7번째 달 15일부터 7일을 셉니다(레 23장). 레위기에는 7이 들어간 구절이 57번 나오는데,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으로 섬기기 전에 7일간 거룩히 구별해야 했습니다(레8:31-36). 속죄절에는 대제사장이 속죄소에(긍휼의 자리) 7번 피를 뿌려 속죄해야 했는데(레16:14) 이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피의 속량을 나타냅니다(히 9:12). 성소에 있던 금으로 된 등잔대의 7줄기의 빛도 사람의 혼을 비추는 하나님의 완전한 빛을 상징합니다.

    또한 7일마다 7번째 날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던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7년마다 땅에 안식년을 주어 씨를 뿌리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레25:4). 그리고 7번의 안식년, 즉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을 7번 계수해서 49년이 된 다음 해인 50년은 희년으로 거룩하게 하여 자유를 공포해야 했고 각자 자기 소유지와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했습니다(레25:8-10).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귀한 법은 모두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표하는 것들이기에 지켜졌어야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70년 바벨론의 포로기를 통해 땅이 그동안 도둑맞았었던 안식년을(7년마다 취해야 하는 안식년 70번은 490년의 불법의 세월에 해당합니다) 누리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대하 36:21).

    7과 6의 관계도 하나님의 수와 인간의 수의 합계에서 오는 독특한 의미가 있습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의 첫 전투였던 여리고성을 하나님은 매일 한 번씩 6일을 돌되 7일째 날에는 7번을 돌고 함성을 지르라고 하십니다(수 6:3-4). 즉, 여리고 성은 7 제사장들이 7 나팔을 메고 총 ’13번’을 돌고 무너져내린 게 됩니다. 연약한 인간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승리의 역사를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1장의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 예수님의 계보는 14세대씩 3그룹으로 묶인 42대인데, 7과 6의 곱셈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42는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을 잘 나타내는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12 제자를 두셨는데, 주님까지 합치면 13이 되며 그중 한 제자가 배반합니다. 이처럼 13은 타락과 배반의 숫자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13이란 숫자가 처음 나오는 구절은 창세기 14장 4절인데, 12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던 5 나라가 13년째가 되었을 때 배반해서 4 나라와 전쟁을 일으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대적하는 도시의 상징인 바벨론의 시조는 니므롯인데, 함의 13대손입니다(창 10:9-10). 에스더가 여왕으로 있을 때 하만은 왕을 속여 첫째 달 13일에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라는 왕명에 서명하도록 했고 이를 시행할 날짜는 열두째 달 13일이었습니다(에3:12-13). 마가복음 7장 21-22절에 주님은 부패한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13가지의 죄악들을(악한 생각,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질투, 비방, 교만, 우매함) 열거하십니다.

    솔로몬은 7년간(왕상 6:38) 성전을 지었고 일곱째 달 절기에 궤를 메어 선전의 내소인 지성소로 들였는데, 7일과 7일 도합 14일을 절기로 지켰습니다(왕상 8장). 성경엔 7과 2를 곱한 14란 수도 자주 발견되는데, 14는 구원과 속량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보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14대, 그리고 바벨론 이후 그리스도까지 14대로 총 3번의 14대가 나옵니다(마1:17). 마태복음의 기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하나님의 완벽한 구원 및 속량을 나타내는 14대로 3번 나눠 적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7년 전에 하나님이 사람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신 기록이 성경 전체에 정확히 7번 나온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을 2번씩 7번 부르셨기에 이름의 수로는 14번이 됩니다. 따라서 14는 성령의 증거 및 증언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7은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 중 성령의 일하심이 두드러지는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7영, 하나님의 7눈 등을 떠나서 특별히 성령의 기름 부음이 두드러지는 책은 7이란 숫자로 엮어져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개인적으로 에스겔, 요한복음, 요한계시록). 4 복음서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많은 기적을 담고 있지만, 특별히 요한복음은 7개의 기적을 다루고 있고 7에 대한 숨은 진리가 곳곳에 박혀 있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책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조명은 2018년에 올린 ‘7 I Am, 7 기적, 7 증인’이란 글에 있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에는 7이란 숫자가 36구절에 걸쳐(킹제임스 영어성경) 54번 나오는데, 등장하는 순서대로 적자면, ‘7교회, 7금촛대, 7별, 하나님의 7영, 7등불, 7봉인, 7뿔과 7눈(하나님의 7영)을 가진 죽임당한 양, 7천사, 7나팔, 7천둥, 7머리에 10뿔이 달렸는데 머리마다 7왕관을 쓴 용, 7머리에(그 여자가 앉은 7산과 7왕) 10뿔이(10왕) 달렸는데 뿔마다 10개의 왕관을 쓴 짐승, 7재앙, 하나님의 진노를 담은 7금대접입니다. 에스겔 같은 경우는 여호와의 말씀과 환상이 임한 후 7일간 충격 가운데 놀라 있었다고 나오고(겔3:15-16), 7년째 되던 해 다섯 번째 달 10일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에스겔에게로 나아왔다는 기록이 있으며(겔20:1), 천년왕국이 임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7년간 전쟁 무기들을 태우고 7개월 동안 전쟁으로 죽은 시체들을 묻어 땅을 정결케(깨끗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겔39:9, 12). 천년왕국의 기간에 세워질 에스겔의 성전엔 7계단, 7규빗과 70규빗의 측량이 나오고, 7일동안 매일 염소, 수소, 그리고 숫양의 피를 올려 7일 동안 제단을 정결케 하고 제사장들을 거룩히 구분하라고 합니다(겔 43:25-25). 스가랴에도 7눈을 가진 한 돌(슥 3:9)과 7등잔과 7 관(슥 4:2), 그리고 온 세상을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7눈(슥4:10)이 나옵니다.

    욥에게는 7아들이 있었고, 고난을 받고 있던 그를 3친구가 방문했을 때 7낮과 7밤을 침묵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들은 속죄로 7숫양과 7수소를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나만 장군은 요단강에 7번 몸을 담은 후 나병이 나았는데 레위기 14장에 나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에 대한 규례를 보면, 새 2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고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7번 뿌린 후 놓아줍니다(레 14:2-7). 그 후 정결함을 받은 자는 자기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은 후 진영에 들어와 자기 장막 밖에 7일을 머문 후 7일째 되는 날에 온몸의 모든 털(머리털, 수염, 눈썹)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은 후 정결하게 됩니다(레14:8-9). 그리고 8일째 날에는(새로운 시작, 거듭남, 재생을 의미하는 8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흠 없는 어린 숫양 2마리와 1년 된 암양 1마리, 고운 가루 3/10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속건제와 속죄제로 드리는데, 제사장은 그 기름을 왼쪽 손바닥에 따른 후 오른쪽 손가락으로 찍어 여호와 앞에 7번 뿌립니다(레14:10-16). 이 외에도 집에 생기는 나병에 대한 규례와(레 14:34-57) 몸에 유출병이 생길 때의 규례도 숫자 7과 연관해서 비슷한 과정들을 거칩니다(레 15:13-28).

    마태복음 13장에서 7개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왕국)를 설명하셨던 주님이 십자가 선상에서 말씀하신 횟수는 총 7번인데, 가상칠언으로 불립니다. 주님은 또한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7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막16:9). 이런 주님의 족보는 누가복음 3장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는데, 정확히 77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경 전체에서(영어 킹제임스 성경)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을 찾으면 총 77번 등장한다는 걸 발견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12사도를 뒀던 신약의 초대교회에는 7집사가 선출됩니다(행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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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한 말씀이며, 약속과 생명과 능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믿는다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복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라고 합니다.

    이 ‘로고스’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이 말씀이 우리에게 특별히 주어지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특별히 말씀해 주시고 그 말씀에 의해서 믿음이 생길 때 들려옵니다.

    이 믿음이 생기게 하는 말씀이 헬라어로 ‘레마’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어느 구절이 갑자기 마음에 와 닿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그 말씀이 곧 ‘레마’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레마’를 받게 되면 기적적인 믿음이 생겨나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읽지 말고 살아서 역사하시는 말씀인 ‘레마’를 받기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레마. 모이. 소이
     
     
    레마. 모이. 소이


    요 17:8 - 요 17:10
    (8)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9)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저희’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자들이다.
    아버지는 저희를 아들에게 주면서 저희들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게 하기 위해서 아들에게 말씀을 주었다.
    아버지의 초점은 늘 ‘저희’에게 가 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받은 말씀을 저희에게 가르쳤는데 가르친 결과 저희들이
    자신을 가르친 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하나님께로서 나온 자이며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영생이다. 이것이 거듭남이며 구원이 되는 것이다.


    *영생의 구원에 수준이 있다.
    죄 사함의 영생과 요1:12절의 영생이 있다.
    요 3:15절과 요 3:16절의 영생이 있다.
    이것이 구분되지 않으면 아버지의 것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흐레마; 라는 말씀이 필요하다.
    우리의 생명력은 8절의 아버지가 주신 흐레마에 있다.
    *말씀들을 4487 rJh'ma
    4483에서 유래;‘말’(개인적으로, 집합적으로 혹은 특히), 함축적으로(특히 해설, 명령, 토론의)‘논제‘또는‘주제’<눅 1:65; 롬 10:8>중명. a word, message;


    @말씀은 호 로고스가 되는데 이곳은 왜 로고스를 쓰지 않고 흐레마를 쓴 것일까?
    말씀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생명의 근원지인 씨로서 호 로고스가 있고[종자]
    에너지가 되는 것으로 나에게 이루어진 것으로 아버지가 직접 주시는 흐레마가 있다.[열매]


    *레마는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요4: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4487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된다.
    왜?
    요 6: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4487 영이요 생명이라
    --흐레마가 바로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생명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이것이 들리지 않고 깨달아지지 않으며 믿어지지 않는 자는 아버지가 보낸 자가 아니다
    아버지가 보낸 자는 이것을 알아듣고 깨달아지므로 영생을 얻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되는 호 로고스는 흐레마를 들으면서 생겨지게 된다.
    이것은 도적 같이 오므로 흐레마를 듣고 흘러 보내지 말아야 한다.
    흐레마는 ‘흐레오; 인 ’흐르다; 에서 유래다 되어서 흘러가는 것이 흐레마 이다.
    흐레마를 듣는 자는 생명을 얻어서 이 생명을 흘러 보내야 한다.
    에덴동산에서 강이 흘러 나가는 것처럼 흘러가야 한다.
    흘러 보내지 못하면 고여서 썩게 된다.


    내가 생명을 가진 자인지 알려면 자녀를 낳았는가를 보면 안다.
    생명 있는 자의 증거가 바로 자녀가 있는 가를 보면 안다.
    그래서 구약은 그렇게 생명의 씨를 가진 아들을 원했으며
    신약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모든 교회가 말씀을 증거 하지만 그곳에 정말 생명의 말씀이 있는 가를 알아서 들어서 한다. 인간의 혼을 달래주는 위로의 말이 아니라, 나에게 생명이 되고 에너지가 되는 영의 말을 들어야 한다.


    *주님의 중보기도는 저희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지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
    저희들은 복 받은 자들이다.
    복의 개념을 생각하면 1.내 적인 복을 원하는 자가 있고 2. 외적인 복을 원하는 자가 있다.
    나의 상태가 지금 어떤 것을 추구하고 있는가?
    내적인 것은 영원한 것이지만 외적인 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세상의 외적인 복에 의해서 나의 행, 불행이 좌우된다면 나는 어떤 자인가?
    나는 지금 가난한 자인데 무엇에 가난하다고 생각하는가?
    물질이 없으므로 가난한가?
    하나님이 없으므로 가난한가?
    우리의 의식이 영원한 것을 찾는 의식이 되어야지 일시적인 것을 찾는 것에만 치우쳐 있으면 성장이 없다.[너는 돈 없어도 살 수 있어? 이런 의식 자체가 지금 어린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힘들어서 벌어야 할지라도 나의 의식은 일시적인 것에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 것 ‘소이; 와 내 것 ’모이;
    저희는 주님에게 말씀을 듣지만 소속은 아버지의 것‘소이’ 것이었다.
    과거에는 ‘소이; 것이었지만 지금은 주님의 것’모이; 것이 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과거에는 소이 것이 었는데
    지금은 ‘모이; 것이 되어 가지고 살고 있지만 우리는 모두 ’소이;‘ 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나의 생명까지 모두 ‘소이;에게 넘겨주어야 하는데 이것이 산제사가 되며 이것이 헤렘제사이다. 이것은 하나가 되었기에 이런 현상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10)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내것은 아버지 것, 아버지 것은 내 것으로
    처음에는 구분이 되었지만 조금 지나니 구분이 되지 않고 하나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는다.
    반면에 주님은 저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므로 아버지가 영광을 받는다.
    그렇다면
    저희가 된 자들은 주님이 영광 받게 할려면 십자가에 죽어야 영광 받는다.
    주님이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저희들이 십자가 죽음을 택해서 죽었다는 결론이다.


    우리를, 나를 생각해 봅니다.
    내가 주님의 십자가로 죄사함 받아서 아들로 칭의를 받았습니다.
    이제 생명의 말씀을 듣고 그것이 들려지고 깨달아지므로 나에게도 호 로고스인 생명이 들어가 있습니다. 요 1:12
    즉 십자가의 주님이 아니라 부활한 그리스도의 말슴인 보혜사 성령이 내 안에 내주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우리는 주님이 영광을 받게 해야 할 의무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십자가에 죽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소이’ 것이 ‘모이’ 것이 되었다가 다시 ‘소이’에게 돌려주는 것이 됩니다.
    주인의 물건은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소이; 것을 ’모이; 것인줄 착각하고 가지고 있으면서 누리고 있습니까?
    나의 생명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돌려주었다는 증거가 내가 믿음의 계대를 이어갈 자녀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흐레마;는 ’흐르다; 라는 단어에서 유래 되었으니 생명이 흘러가야 합니다.
    그것을 흘려주기 위해 나는 ,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에게 구하며 긍훌의 은혜가 베풀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레마에 대하여
     
    레마에 대하여 -


    우리는 성경을 사랑의 편지다 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편지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 입니다.


    성경은 적용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고 무조건 믿으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레마는 별다른 뜻이 없고 그저 "입의 말"이라는 뜻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로고스가(하나님) 레마(소리)로 말씀하신 것을 문자로 기록한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믿는 순간 예수님이 제자들의 귀에 말씀하신 것 같이 지금 내 귀에 대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믿는 순간 현재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  
     
    불안의 시대 혼돈의 시대를 능력 있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은
    과연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1)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온다.
    (2) 로고스는 기록된 말씀 전체며 여기서 내게 부딪쳐 오는
    레마의 말씀이 주어진다. 이것이 신앙성장을 가져다 준다.
    (3) 우리의 신앙 경험은 성경에 의해서 시인 혹은 시정된다.
    (4) 가장 건전하고 건강한 신앙생활은 하나님 중심, 성경말씀 중심,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이다..
                       (5)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세상을 이길 수 있다.
     
    기록된 로고스의 말씀을 읽을 때 성령님을 의지함으로,
    그 로고스가 레마가 되어 믿음이 무럭무럭 자라나, 불안과 혼돈이
    팽배한 이 시대에도 평강과 강한 확신을 가지고, 말씀의 약속을
    붙잡고 언제나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자.

     

     

     

     
     
     

     

    로고스와 레마의 차이
     
    로고스와레마의 차이


    헬라어로고스(λόγος)와 레마(ρήμα)는 성경에서 ‘말씀’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이 두 단어의 의미상 차이는 모호하다.
    일반적으로 로고스는 “성경말씀”이며, 레마는 “깨달아진 성경말씀”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이것은 출처불명의 견해이다.
    헬라어원어사전을 보면, 로고스는 “생각의 표현”을 의미하며, 레마는 “말씀되어진 것, 또는 기록되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성경 상에서의 로고스와 레마의 의미상의 차이는 무엇인가?

    먼저 로고스에 대해 살펴보자. 성경 상에 ‘말씀’이라고 번역되는 단어의 약 90% 이상은 로고스이다.
    로고스라는 말의 의미는 헬라어 원어의 의미 그대로 “생각의 표현”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면 “하나님의 생각의 표현”이고, 예수님의 말씀(로고스)이면 “예수님의 생각의 표현”이며, 성령님의 말씀(로고스)이면 “성령님의 생각의 표현”이다.
    즉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성령님이 당신의 생각을 말씀으로 표현한 것이 로고스이다.

    레마 역시 헬라어의 원어적 의미와 연관하여 생각하면 좋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로고스)이 성경으로 기록되어 전해지는 말씀이 레마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다메섹으로 가는 바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말씀(로고스)이며, 그 말씀(로고스)이 성경에 기록되어 우리에게 전해지는 말씀은 레마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40일 금식 후에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마4:4)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말씀(로고스)이지만,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레마)를 사용한 것이며, 또한 본문에 나오는 “모든 말씀(레마)”은 예수님께서 레마로 주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상에서 로고스와 레마는 그 의미가 쉽게 구별되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성경해석 시에는 항상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로고스.포네.레마
     
    로고스.포네.레마

    1. 로고스와 포네와 레마는 모두 말씀이다. 하나님은 신이고 영이시고 말씀이다.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로서 신이며 초월적이고 제한받지 아니하는 영적존재이시고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시기 위해 말씀으로 나타나셨다.

    신과 인간의 만남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영이신 조물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만남은 신과 인간의 상태로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는 방법으로 신이신 하나님이 제한 받지 아니하는 영이신 고로 말씀까지 될 수 있었다. 인간은 인간인 채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설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은 신과 인간의 만남에 있어서 피조물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하시지 않고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말씀이 되어 이 땅에까지 낯아져서인간을 만나러 오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두 존재가 서로 만나야 무엇을 주든지 받든지 하는 거래가 이루어진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지 아니하면 두 존재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날 수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고 받고 하는 일도 일어날 수 없으며 두 존재는 서로 상관이 없는 무관한 관계가 된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양보한 최선의 방법이 말씀이고 하나님이인간을 만나주는 최대한의 노력이 말씀이며 하나님이하나님을 인간에게 나타내는 최선의 수단이 말씀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노력과 양보는 왜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기 위한 오직 하나의 목적 때문이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들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이요 최선의 수단이고 최대의 기회이며 능력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서 예수 곧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말씀이 되셨다. 인간은 예수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예수를 주시기 위해 말씀으로 나아오시고 인간은 하나님에게 예수를 받기 위해 믿음으로 나아간다.
    하나님과 인간은 예수를 주고 받기 위해 말씀으로 나아오시고 믿음으로 나아간다. 하나님과 인간은 예수를 가운데 두고 말씀과 믿음으로 만난다.
    만약 예수가 없다면 아무리 인간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더라도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고 만약 예수가 없다면 아무리 인간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더라도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수가 없다.

    인간이 예수를 전제로 하지 않고 성경말씀을 백번 통독하더라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으며 인간이 예수를 전제로 하지 않고 교회에 백년을 다니더라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을 주실 때 인간은 믿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 예수가 옮겨지고 예수의 거래가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예수 이름의 하나님과 예수이름을 영접하여 소유하게 된 인간이 동일한 예수 이름으로 화목하게 되고 기쁨으로 만나 한 가족이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천국가족이 되는 길이요 수단이다. 예수이름 외에는 천하인간에게 천국가족이 되는 다른 길이 없다(행4:12).

    2. 말씀에서 로고스(Logos)와 포네(Phone)와 레마(Rhema)가 있다.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말씀이며 태초로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말씀이시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요1:1). 포네는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을 인간에게 전해주는 외치는 자의 소리(포네)에 의하여 인간에게 전달되고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을 인간이 적용되며 생명으로 나타나는 말씀이다.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포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말씀이며 아멘으로받아들여져 적용되는 말씀이다.
    로고스와 포네와 레마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현실적인 육신적인 육신으로 나타나 인간이 소유하는 복이 되고 하늘의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요1:14,눅2:14).

    포네의 소리는 선지자,종 또는 전도자들이 전한다.
    로고스가 전기의 발전소이면 포네는 이를 운반하는 전선이고 레마는 전기가 빛으로 나타나는 전등이 된다. 태초에 계신 말씀 로고스(요1:1)를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포네로 전했고 (눅1:26-33)마리아가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로고스 말씀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나님의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되었다(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하나님을 외치는 소리가 있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1-3) 하며 전달하매 이를 명령으로 받아 수용하는 사람에게는 (요12:49-50, 요1:12)구원을 받아 영생하게 된다(요3:16).

    3.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가 외치는 자의 소리 포네로 인간에게 전해졌을 때 이 말씀이 적용되는 레마 말씀으로 되려면 반드시 인간은 그 말씀을 명령으로 받아야 한다.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론이나 학문이나 지식등의 생각으로 분석하지 않고 이 말씀을 통째로 받아들여 자기의 이론과 생각으로 튼튼하게 세워진 인간의 견고한 진(고후10:3-6)을 파하며 말씀을 명령으로 받을 때(요12:50)

    말씀이 영생이 된다(요6:68). 성경말씀은 진리(요17:17)인데 진리는 초자연적법칙은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 이해가 되지 아니한다. 자연 안에 있는 인간은 자연 밖으로부터 온 진리를 결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해가 안되고 납득이 안 되는 진리의 말씀은 인간이 따지지 않고 그대로 명령으로 받아야 된다.

    이렇게 말씀을 명령으로 받으려면그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고 하나님은 무조건 옳고 선하다라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을 때 하나님의 말씀인 초자연적이고 이해가 안되는 진리의 말씀을 명령으로 받을 수가 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사흘을 있다가 나왔다든가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이 바다를육지같이 건넜다든가 사람이 기도하여 해를 중천에 붙들어 매었다든가 하나님이 친지를 창조하셨다는 등의 사실을 인간의 능력으로 어찌 이를 납득하고 이해할 수있겠는가 그러나 이는 사실이니 사람이 이를 믿음으로 받을 때 또한 이 모든 일들이 사실로 나타난다

    이적중에 가장 큰 이적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셨으로 우리의 구세주예수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인간 예수가 인간의 그리스도 곧 메시야이심을 우리 인간의 생각이나 지식으로 어찌 믿을 수가 있겠는가. 도무지 인간의 능력이나 상상으로는 예수가 하나님이시고 인간의 구세주되심을 수용하고 받아들일수가 없는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를 명령으로 받아 믿어야 한다. 이를 믿어야 구원이 이루어지고 영생하게 된다. 이를 받지 아니하면 로고스 말씀이 레마 말씀으로 될수 없고 영생의 복을 소유할 수없다.

    4. 한 율법사가 주님 앞에 나아와 어찌 하면 영생을 얻는지에 대하여 묻고 있는 말씀이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다(눅10:25-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에 율법사는 이웃이 누구인가를 물었고 예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 인을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는데 제사장과 레위인과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를 보고 피하여 가고 사마리아인은 그 불쌍히 여겨 도와 주었다.

    율법박사인 율법사가 율법의 이웃을 묻고 있고 율법에 대하여 너무도 잘 알고 많이 읽고 많이 듣고 있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알고 있는 것을 행하지 않아 율법의 말씀이 저들에게 생명이 되지 못하였고 사마리아 인은 율법을 적게 알고 있었으나 이를 명령으로 받아 아는대로 행한고로 말씀이 생명이 된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말씀을 믿어 명령으로 받지 않고 세상의지식이나 학문과 같이 체세수단으로 받았지만 사마리아 인은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의 말씀을 명령으로 받았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듣고 가르치기만 하였고 믿음으로 받아 행하지 않았으므로 모두 멸망하였던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믿으면 나의 말을 믿을것이요 나의 말을 믿으면 이를 당연히 행하리라(요8:47)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니(약2:26) 하나님의 말씀은 영생인즉 말씀을 명령으로 받아 이를 행할 때 영생하느니라(요12:50) 아멘

     

     

     
     
     

     

     

    성경말씀을 레마로 받을 수 있는 큐티하는 방법
     
    ( 매일 매일 말씀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 큐티 )
     
    일시 :  년 월 일

    성경본문적기:

    내용을 여러번 읽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적어내려 갑니다.

    1. 본문 내용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2. 나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신가?
     
    3. 죄악이 어떤것이라고 하셨는가?
     
    4.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약속하신 것은 무엇인가?
     
    5. 내가 똑같은 사건을 보는데 어떤 각도에서 보는가?(말씀조명후)
     
    6. 명령하신 것은 무엇인가?
     
    7. 말씀 통해서 어떤 방향을 알게 하시는가?
     
     
    *** (구주되신 주님과 교제를 통해 고백할 것들)

    ① 말씀을 읽으며 죄책감이 느껴지는 부분은 무엇인가?
     
    ② 말씀을 조명해서 감사할 부분은 무엇인가?
     
    ③ 기도 할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기
     
    ④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백을 구체적으로 적기.
     

    매일 매일 충실히 큐티를 하면 반드시 성령 하나님의
    터치를 받게 되시리라 확신합니다.

     

     

     

     
     
     

     

    질문, 많은 목사님들이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합니다
     
    안녕하세요.
    전 고신대학교를 다니는 학생입니다. 캘거리 카페를 통해 많은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눈으로만 보다가 이렇게 궁금한 것이 있어서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합니다. 그런데 개혁주의는 이것을 구분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것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구분하지 않는 것을 자신들은 체험을 강조하기 위해서 구분한 것 때문에 잘못된 것 같은데, 제 생각이 맞는지요?


    그리고 구분을 하는 것이 어떤 위험을 줄 수 있는지 자세히 알고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로고스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고 레마를 개인에게 감동과 감화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데, 말씀이 감동과 감화를 주는 것은 사실이라서 헷갈립니다.
     
    ==========================================================================================================================
     
    좋은 질문에 감사드립니다. (김동진교수)




    답글에서도 잠깐 언급하였듯이 솔직히 말씀드려서 님께서 하신 질문은 개인적으로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한 주제였습니다만, 질문해 주신 덕분에 자료들을 찾아 보던 중에,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님의 질문에 있어서 저의 관심은 우선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님의 지적과 같이 정말로 많은 목회자들이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여 설명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여 설명하려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두 단어를 구분하여 설명하는 데는 교파와 교단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가장 현저하게 강조하는 그룹은 은사주의를 표방하는 순복음이나 오순절 계통의 신학에 영향을 받은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니,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한국을 대표하는 보수 장로교회의 목사로부터 신정통주의를 부르짖는 또 다른 장로교단에 속한 목회자들과 성경 연구와 개인 묵상을 강조하는 일부 유명 선교 단체들, 그리고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것은 로마 가톨릭(천주교회)와 기독교 이단들 중에서도 매우 유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볼 때,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여 설명하는 일은, 적어도 한국교회에서는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며, 나아가 신앙적 내용과 배경이 전혀 달라야 할 천주교회와 이단에까지 공유되고 있는 보편적이며, 공통적인 성경 이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일반적인 현상을 확인한 이상, 저의 관심은 도대체 누가, 왜, 어떤 성경적 근거로서 이런 주장을 하게 된 것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다면, 자칫 현상만 나열하고, 그에 대한 성경적 대안을 찾을 수 없는 노릇이 되기 때문에, 후자의 관심을 정리하는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게 된 점을 양해해 주시리라 기대하며, 이제부터 님의 질문에 대해 구체적인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이들의 공통된 주장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사람들은 <로고스>와 <레마>는 ‘말씀’에 대한 두 가지 헬라어로 번역이라고 하면서, 의미면에서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로고스>는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레마>는 <로고스>되는 말씀이 청자의 구체적인 삶의 상황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즉 <로고스>는 객관적, 합리적, 이성적인 말씀인데 반해, <레마>는 주관적, 감정적, 개인적인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이 견해에 동조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고스>로서의 말씀의 기능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삶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는 <레마>로서의 말씀입니다. <로고스>의 말씀이 <레마>의 말씀으로 인간에게 임하게 될 때, 실제적으로 그에게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합니다. 이러한 <로고스>에서 <레마>로의 변화 과정에 적극적으로 요청되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한결같이 성령의 역사나 은사를 매우 강조합니다.




    2. 이들의 <로고스>와 <레마> 구분은 과연 성경적인가?


    우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사용된 두 단어의 용례와 구문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 신약 언어에 정통한 성경 사전만큼 도움이 되는 자료는 없습니다. 따라서 제가 소유하고 있는 두 가지 성경 사전(「킷텔 신약 원어 사전(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by Gerhard Kittel and Gerhard Friedrich)」, 「콜린 브라운 신약 사전(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by Colin Brown): 참고, 이 두 권의 사전은 신약 원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기술하는데 정평이 나 있는 좋은 사전임」의 내용을 꼼꼼하게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정당화 할만한 원어적 근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로고스>와 <레마>의 용법이 성경에서 전혀 차이가 없는 형태로 사용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로고스>의 경우, 헬라의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사용한 것과 또한 구약과 신약(그중에서도 요한복음서의 경우는 매우 특별함)에서 언급된 범례가 신학적으로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로고스>에 대한 일반적인 용례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로고스>와 <레마>를 전적으로 구분하여 하나는 기록된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경험되어진 말씀이라는 식의 해석은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한편 신약 성경의 헬라어 <로고스>와 <레마>는 구약 성경의 <다바르(rb'D'))>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 70인경(LXX)의 경우, <로고스>와 <레마>의 차이를 두지 않고서 상호 교환적으로 히브리어 <다바르>를 번역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예레미야 1:1,2에서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1절에서는 <레마>로, 2절에서는 <로고스>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러한 예는 성경에 부지기수입니다. <로고스>와 <레마>가 사용된 용례가 전혀 의미상의 차이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두 단어가 앞서 말씀드린 그러한 방식의 구분을 입증하는 사례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두 단어를 임의로 구분하여 설명하려는 시도는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성경의 본의를 왜곡하는 비신앙적 행위입니다.




    3. 그렇다면 누가, 왜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가?


    이미 앞서 ‘누가’에 해당하는 범주의 사람들을 말씀드렸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성경 해석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강조되고 있습니다. (1) 오순절식 성령 운동주의자(순복음 교회, 피터와그너 계열), (2) 로마 가톨릭 교회(천주교), (3) 워치만니 계열에속한 자(지방교회 혹은 형제교회), (4)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라>와 <알파 운동> 옹호론자(이단), (5) 칼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주창자


    혹자들 중에는 (5)의 예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정통주의의 내면을 알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정통신학의 창시자로 인정받는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자들의 세속적인 성경 이해에 맞서 하나님 말씀 중심의 신학을 강조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을 3가지 형태로, 즉 계시된 말씀, 기록된 말씀, 선포된 말씀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이런 성경 이해는 성경과 하나님 말씀과의 차별을 인정하게 되면서, 성경은 인간에게 말씀으로 다가올 경우에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희한한 주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과 말씀과의 구별 혹은 차별은 결국 성경이 개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지의 여부는 성경을 읽거나 혹은 성경을 통해 느끼거나 하는 체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배태하였습니다. 흔히 Q.T라고 불리는 <말씀 묵상>이라는 성경 이해 방식이 신정통주의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근거로 보편화되었다는 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하지만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신학 이론을 만든 사람이라면, 찰스 파라(Charles Farah, 1926-2001)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미국의 은사주의 신학의 요람인 오랄 로버츠 대학(Oral Roberts University)에서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고전적 은사주의 운동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 신앙 운동’(the Word Faith movement)의 주창자였습니다. 이 운동은 신학적으로 오순절적 은사 운동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내용면에서 훨씬 더 미신적이고 물질적인 세속적인 은사주의 운동입니다. 그런데 이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찰스 파라가 고안해 낸, <로고스>와 <레마>의 구별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즉 <로고스>의 법적 성격의 말씀이 삶의 체험과 경험(대부분이 초자연적인 은사나 세속적 번영과 축복과 관련된 것이지만)으로서 <레마>의 말씀으로 변화를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적 혹은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여기는 반면, 말씀은 오직 체험이라는 구호를 부르짖습니다. 그러한 영적 체험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의 주관화가 중요한데,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성령의 신비적 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신앙 내용으로 취급합니다. 이러한 자들의 행태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듯이, 오늘날 <로고스>와 <레마>를 구별짓고자 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체험중심, 물질중심, 세속중심의 신앙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당화하려는 수작일 따름입니다.




    4.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로고스>, <레마>나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군가가 그 능력을 체험했건 그렇지 않건 관계 없이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개인의 수준이나, 경험같은 어떤 조건에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영적 권위와 능력이 발휘되는 것은 오직 성령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개입에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아셔야 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해서 성도에게 역사하실때에는 성경을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은 질서없이 무분별하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 말은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아무렇게나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수단으로서 역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이 은혜를 끼치게 하시는 주체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은혜의 수단으로 삼으십니다. 그래서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고 완전한 ‘은혜의 방도’(메디아 그라티아에, media gratiae)라는 신학 용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정리한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서 입증하는데 신비적 경험이나 인간적 사색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성경을 은혜의 방도 삼으셔서 깨닫게 해 주실 때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뜻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간곡하게 부탁한 권면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4-17)


    따라서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지혜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여 바르게 배우며, 익히며, 깨달아 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영적으로 혼미한 세상에서 참된 구원의 도리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말씀으로 영적 분별력을 기르며, 말씀을 통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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