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상에서 "로고스(논리, 원칙, 이성)"와 "레마(대화하는 언어, 말씀)"를 구분하여 이렇게 설명하는 내용을 자주 읽게 됩니다. 로고스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 마태복음 18:15-16 누가복음 3:2 요한복음 12:48 사도행전 10:42-44 에베소서 6:16-19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레마)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로고스)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λόγ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056 1. 말하기. 2. 말. 3. ㉠ 너의 말
어원 / 3004에서 유래
ῥῆμα 스트롱번호 4487 1. 말하여진 것. 2. 예언. 3. 명령
어원 / 4483에서 유래
로고스(λόγος)와 레마(ῥῆμα) -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로고스(λόγος)와 레마(ῥῆμα)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물론 70번 나오는 레마 구절들을 읽다 보면 레마엔 로고스와는 다른 특별하고 비밀스러운 어떤 힘과 능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레마에 대해 연구하다 얻은 유익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6절엔 레마와 로고스가 같이 쓰였다는 것입니다. 레마만 특별한 계시의 말씀인 것처럼 인용되는 구절 중 하나는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레마)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2)” 라는 세례 요한에게 말씀이 임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인데
예수님이 시편을 인용하신 구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임한 말씀’을 오히려 로고스로 썼고, 세례 요한 부분은 레마로 쓰였습니다. 레마(ῥῆμα)와 로고스(λόγος)의 차이가 어떤 신비나 능력에 있지 않고 그저 상황에 맞게 쓰인 것뿐이란 걸 증명하는 좋은 방법은 아무래도 두 단어가 한 구절에 같은 용도로 쓰인 경우를 보는 걸 겁니다.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을(레마) 할 때에 성령이 말씀(로고스)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 10:42-44).” 이 구절에서 보면 오히려 레마는 베드로의 증언(발언)이었고 로고스는 그 내용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레마)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로고스)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 6:16-19).” 마지막 예로,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레마)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로고스)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히 12:18-19).” 이 구절에서도 레마와 로고스는 같은 의미지만 상황에 맞춰 쓰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레마가 로고스보다 한 수 아래다’란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God of Numbers:7(70)이란 숫자의 의미“3이란 숫자를 생각하니 베드로의 3번의 부인과 3번의 고백 사이에 예수님의 3개의 못자국도 생각하게 됩니다. 골고다 언덕엔 3개의 십자가만 있었던 게
아니라,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의 몸에도 3개의 못이 박혔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수이면서 안식과 영적 완전함과 완성을 뜻하는 7에 대해 적으려 합니다. 하나님은 6일간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7일째 되던 날 안식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숫자 7은 지난 글에 적었던 것처럼 숫자 3과 같이 일하는 경우를 꽤 발견하는데 숫자 10과도 그러합니다. 7은 또한 은혜의 수인 5와도 함께 일해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상징하는 12를 이루기도 합니다. 모세 5경에도 7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첫째로는 여호와의 7절기가 있습니다. 또한 7일마다 7번째 날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던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7년마다 땅에 안식년을 주어 씨를 뿌리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레25:4). 그리고 7번의 안식년, 즉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을 7번 계수해서 49년이 된 다음 해인 50년은 희년으로 거룩하게 하여 자유를 공포해야 했고 각자 자기 소유지와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했습니다(레25:8-10).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귀한 법은 모두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표하는 것들이기에 지켜졌어야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70년 바벨론의 포로기를 통해 땅이 그동안 도둑맞았었던 안식년을(7년마다 취해야 하는 안식년 70번은 490년의 불법의 세월에 해당합니다) 누리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대하 36:21). 7과 6의 관계도 하나님의 수와 인간의 수의 합계에서 오는 독특한 의미가 있습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의 첫 전투였던 여리고성을 하나님은 매일 한 번씩 6일을 돌되 7일째 날에는 7번을 돌고 함성을 지르라고 하십니다(수 6:3-4). 즉, 여리고 성은 7 제사장들이 7 나팔을 메고 총 ’13번’을 돌고 무너져내린 게 됩니다. 연약한 인간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승리의 역사를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1장의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 예수님의 계보는 14세대씩 3그룹으로 묶인 42대인데, 7과 6의 곱셈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42는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을 잘 나타내는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12 제자를 두셨는데, 주님까지 합치면 13이 되며 그중 한 제자가 배반합니다. 이처럼 13은 타락과 배반의 숫자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13이란 숫자가 처음 나오는 구절은 창세기 14장 4절인데, 12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던 5 나라가 13년째가 되었을 때 배반해서 4 나라와 전쟁을 일으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대적하는 도시의 상징인 바벨론의 시조는 니므롯인데, 함의 13대손입니다(창 10:9-10). 에스더가 여왕으로 있을 때 하만은 왕을 속여 첫째 달 13일에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라는 왕명에 서명하도록 했고 이를 시행할 날짜는 열두째 달 13일이었습니다(에3:12-13). 마가복음 7장 21-22절에 주님은 부패한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13가지의 죄악들을(악한 생각,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질투, 비방, 교만, 우매함) 열거하십니다. 솔로몬은 7년간(왕상 6:38) 성전을 지었고 일곱째 달 절기에 궤를 메어 선전의 내소인 지성소로 들였는데, 7일과 7일
도합 14일을 절기로 지켰습니다(왕상 8장). 성경엔 7과 2를 곱한 14란 수도 자주 발견되는데, 14는 구원과 속량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보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14대,
그리고 바벨론 이후 그리스도까지 14대로 총 3번의 14대가 나옵니다(마1:17). 마태복음의 기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하나님의 완벽한 구원 및 속량을 나타내는 14대로 3번 나눠 적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7년 전에 하나님이 사람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신 기록이 성경 전체에 정확히 7번 나온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을 2번씩
7번 부르셨기에 이름의 수로는 14번이 됩니다. 따라서 14는 성령의 증거 및 증언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7은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 중 성령의 일하심이 두드러지는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7영, 하나님의 7눈 등을 떠나서 특별히 성령의 기름 부음이 두드러지는 책은 7이란 숫자로 엮어져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개인적으로 에스겔, 요한복음, 요한계시록). 4 복음서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많은 기적을 담고 있지만, 특별히 요한복음은 7개의 기적을 다루고 있고 7에 대한 숨은 진리가 곳곳에 박혀 있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책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조명은 2018년에 올린 ‘7 I Am, 7 기적, 7 증인’이란 글에 있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에는 7이란 숫자가 36구절에 걸쳐(킹제임스 영어성경) 54번 나오는데, 등장하는 순서대로 적자면, ‘7교회, 7금촛대, 7별, 하나님의 7영, 7등불, 7봉인, 7뿔과 7눈(하나님의 7영)을 가진 죽임당한 양, 7천사, 7나팔, 7천둥, 7머리에 10뿔이 달렸는데 머리마다 7왕관을 쓴 용, 7머리에(그 여자가 앉은 7산과 7왕) 10뿔이(10왕) 달렸는데 뿔마다 10개의 왕관을 쓴 짐승, 7재앙, 하나님의 진노를 담은 7금대접입니다. 에스겔 같은 경우는 여호와의 말씀과 환상이 임한 후 7일간 충격 가운데 놀라 있었다고 나오고(겔3:15-16), 7년째 되던 해 다섯 번째 달 10일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에스겔에게로 나아왔다는 기록이 있으며(겔20:1), 천년왕국이 임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7년간 전쟁 무기들을 태우고 7개월 동안 전쟁으로 죽은 시체들을 묻어 땅을 정결케(깨끗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겔39:9, 12). 천년왕국의 기간에 세워질 에스겔의 성전엔 7계단, 7규빗과 70규빗의 측량이 나오고, 7일동안 매일 염소, 수소, 그리고 숫양의 피를 올려 7일 동안 제단을 정결케 하고 제사장들을 거룩히 구분하라고 합니다(겔 43:25-25). 스가랴에도 7눈을 가진 한 돌(슥 3:9)과 7등잔과 7 관(슥 4:2), 그리고 온 세상을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7눈(슥4:10)이 나옵니다. 욥에게는 7아들이 있었고, 고난을 받고 있던 그를 3친구가 방문했을 때 7낮과 7밤을 침묵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들은 속죄로 7숫양과 7수소를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나만 장군은 요단강에 7번 몸을 담은 후 나병이 나았는데 레위기 14장에 나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에 대한 규례를 보면, 새 2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고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7번 뿌린 후 놓아줍니다(레 14:2-7). 그 후 정결함을 받은 자는 자기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은 후 진영에 들어와 자기 장막 밖에 7일을 머문 후 7일째 되는 날에 온몸의 모든 털(머리털, 수염, 눈썹)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은 후 정결하게 됩니다(레14:8-9). 그리고 8일째 날에는(새로운 시작, 거듭남, 재생을 의미하는 8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흠 없는 어린 숫양 2마리와 1년 된 암양 1마리, 고운 가루 3/10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속건제와 속죄제로 드리는데, 제사장은 그 기름을 왼쪽 손바닥에 따른 후 오른쪽 손가락으로 찍어 여호와 앞에 7번 뿌립니다(레14:10-16). 이 외에도 집에 생기는 나병에 대한 규례와(레 14:34-57) 몸에 유출병이 생길 때의 규례도 숫자 7과 연관해서 비슷한 과정들을 거칩니다(레 15:13-28). 마태복음 13장에서 7개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왕국)를 설명하셨던 주님이 십자가 선상에서 말씀하신 횟수는 총 7번인데, 가상칠언으로 불립니다. 주님은 또한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7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막16:9). 이런 주님의 족보는 누가복음 3장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는데, 정확히 77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경 전체에서(영어 킹제임스 성경)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을 찾으면 총 77번 등장한다는 걸 발견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12사도를 뒀던 신약의 초대교회에는 7집사가 선출됩니다(행6: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한 말씀이며, 약속과 생명과 능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믿는다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복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라고 합니다.
이 ‘로고스’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이 말씀이 우리에게 특별히 주어지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특별히 말씀해 주시고 그 말씀에 의해서 믿음이 생길 때 들려옵니다.
이 믿음이 생기게 하는 말씀이 헬라어로 ‘레마’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어느 구절이 갑자기 마음에 와 닿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그 말씀이 곧 ‘레마’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레마’를 받게 되면 기적적인 믿음이 생겨나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읽지 말고 살아서 역사하시는 말씀인 ‘레마’를 받기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요 17:8 - 요 17:10
(8)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9)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저희’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자들이다.
아버지는 저희를 아들에게 주면서 저희들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게 하기 위해서 아들에게 말씀을 주었다.
아버지의 초점은 늘 ‘저희’에게 가 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받은 말씀을 저희에게 가르쳤는데 가르친 결과 저희들이
자신을 가르친 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하나님께로서 나온 자이며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영생이다. 이것이 거듭남이며 구원이 되는 것이다.
*영생의 구원에 수준이 있다.
죄 사함의 영생과 요1:12절의 영생이 있다.
요 3:15절과 요 3:16절의 영생이 있다.
이것이 구분되지 않으면 아버지의 것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흐레마; 라는 말씀이 필요하다.
우리의 생명력은 8절의 아버지가 주신 흐레마에 있다.
*말씀들을 4487 rJh'ma
4483에서 유래;‘말’(개인적으로, 집합적으로 혹은 특히), 함축적으로(특히 해설, 명령, 토론의)‘논제‘또는‘주제’<눅 1:65; 롬 10:8>중명. a word, message;
@말씀은 호 로고스가 되는데 이곳은 왜 로고스를 쓰지 않고 흐레마를 쓴 것일까?
말씀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생명의 근원지인 씨로서 호 로고스가 있고[종자]
에너지가 되는 것으로 나에게 이루어진 것으로 아버지가 직접 주시는 흐레마가 있다.[열매]
*레마는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요4: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4487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된다.
왜?
요 6: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4487 영이요 생명이라
--흐레마가 바로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생명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이것이 들리지 않고 깨달아지지 않으며 믿어지지 않는 자는 아버지가 보낸 자가 아니다
아버지가 보낸 자는 이것을 알아듣고 깨달아지므로 영생을 얻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되는 호 로고스는 흐레마를 들으면서 생겨지게 된다.
이것은 도적 같이 오므로 흐레마를 듣고 흘러 보내지 말아야 한다.
흐레마는 ‘흐레오; 인 ’흐르다; 에서 유래다 되어서 흘러가는 것이 흐레마 이다.
흐레마를 듣는 자는 생명을 얻어서 이 생명을 흘러 보내야 한다.
에덴동산에서 강이 흘러 나가는 것처럼 흘러가야 한다.
흘러 보내지 못하면 고여서 썩게 된다.
내가 생명을 가진 자인지 알려면 자녀를 낳았는가를 보면 안다.
생명 있는 자의 증거가 바로 자녀가 있는 가를 보면 안다.
그래서 구약은 그렇게 생명의 씨를 가진 아들을 원했으며
신약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모든 교회가 말씀을 증거 하지만 그곳에 정말 생명의 말씀이 있는 가를 알아서 들어서 한다. 인간의 혼을 달래주는 위로의 말이 아니라, 나에게 생명이 되고 에너지가 되는 영의 말을 들어야 한다.
*주님의 중보기도는 저희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지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
저희들은 복 받은 자들이다.
복의 개념을 생각하면 1.내 적인 복을 원하는 자가 있고 2. 외적인 복을 원하는 자가 있다.
나의 상태가 지금 어떤 것을 추구하고 있는가?
내적인 것은 영원한 것이지만 외적인 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세상의 외적인 복에 의해서 나의 행, 불행이 좌우된다면 나는 어떤 자인가?
나는 지금 가난한 자인데 무엇에 가난하다고 생각하는가?
물질이 없으므로 가난한가?
하나님이 없으므로 가난한가?
우리의 의식이 영원한 것을 찾는 의식이 되어야지 일시적인 것을 찾는 것에만 치우쳐 있으면 성장이 없다.[너는 돈 없어도 살 수 있어? 이런 의식 자체가 지금 어린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힘들어서 벌어야 할지라도 나의 의식은 일시적인 것에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 것 ‘소이; 와 내 것 ’모이;
저희는 주님에게 말씀을 듣지만 소속은 아버지의 것‘소이’ 것이었다.
과거에는 ‘소이; 것이었지만 지금은 주님의 것’모이; 것이 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과거에는 소이 것이 었는데
지금은 ‘모이; 것이 되어 가지고 살고 있지만 우리는 모두 ’소이;‘ 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나의 생명까지 모두 ‘소이;에게 넘겨주어야 하는데 이것이 산제사가 되며 이것이 헤렘제사이다. 이것은 하나가 되었기에 이런 현상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10)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내것은 아버지 것, 아버지 것은 내 것으로
처음에는 구분이 되었지만 조금 지나니 구분이 되지 않고 하나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는다.
반면에 주님은 저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므로 아버지가 영광을 받는다.
그렇다면
저희가 된 자들은 주님이 영광 받게 할려면 십자가에 죽어야 영광 받는다.
주님이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저희들이 십자가 죽음을 택해서 죽었다는 결론이다.
우리를, 나를 생각해 봅니다.
내가 주님의 십자가로 죄사함 받아서 아들로 칭의를 받았습니다.
이제 생명의 말씀을 듣고 그것이 들려지고 깨달아지므로 나에게도 호 로고스인 생명이 들어가 있습니다. 요 1:12
즉 십자가의 주님이 아니라 부활한 그리스도의 말슴인 보혜사 성령이 내 안에 내주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우리는 주님이 영광을 받게 해야 할 의무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십자가에 죽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소이’ 것이 ‘모이’ 것이 되었다가 다시 ‘소이’에게 돌려주는 것이 됩니다.
주인의 물건은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소이; 것을 ’모이; 것인줄 착각하고 가지고 있으면서 누리고 있습니까?
나의 생명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돌려주었다는 증거가 내가 믿음의 계대를 이어갈 자녀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흐레마;는 ’흐르다; 라는 단어에서 유래 되었으니 생명이 흘러가야 합니다.
그것을 흘려주기 위해 나는 ,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에게 구하며 긍훌의 은혜가 베풀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사랑의 편지다 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편지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 입니다.
성경은 적용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고 무조건 믿으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레마는 별다른 뜻이 없고 그저 "입의 말"이라는 뜻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로고스가(하나님) 레마(소리)로 말씀하신 것을 문자로 기록한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믿는 순간 예수님이 제자들의 귀에 말씀하신 것 같이 지금 내 귀에 대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믿는 순간 현재가 됩니다.
불안의 시대 혼돈의 시대를 능력 있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은
과연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1)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온다.
(2) 로고스는 기록된 말씀 전체며 여기서 내게 부딪쳐 오는
레마의 말씀이 주어진다. 이것이 신앙성장을 가져다 준다.
(3) 우리의 신앙 경험은 성경에 의해서 시인 혹은 시정된다.
(4) 가장 건전하고 건강한 신앙생활은 하나님 중심, 성경말씀 중심,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이다..
(5)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세상을 이길 수 있다.
기록된 로고스의 말씀을 읽을 때 성령님을 의지함으로,
그 로고스가 레마가 되어 믿음이 무럭무럭 자라나, 불안과 혼돈이
팽배한 이 시대에도 평강과 강한 확신을 가지고, 말씀의 약속을
붙잡고 언제나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자.
헬라어로고스(λόγος)와 레마(ρήμα)는 성경에서 ‘말씀’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이 두 단어의 의미상 차이는 모호하다.
일반적으로 로고스는 “성경말씀”이며, 레마는 “깨달아진 성경말씀”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이것은 출처불명의 견해이다.
헬라어원어사전을 보면, 로고스는 “생각의 표현”을 의미하며, 레마는 “말씀되어진 것, 또는 기록되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성경 상에서의 로고스와 레마의 의미상의 차이는 무엇인가?
먼저 로고스에 대해 살펴보자. 성경 상에 ‘말씀’이라고 번역되는 단어의 약 90% 이상은 로고스이다.
로고스라는 말의 의미는 헬라어 원어의 의미 그대로 “생각의 표현”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면 “하나님의 생각의 표현”이고, 예수님의 말씀(로고스)이면 “예수님의 생각의 표현”이며, 성령님의 말씀(로고스)이면 “성령님의 생각의 표현”이다.
즉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성령님이 당신의 생각을 말씀으로 표현한 것이 로고스이다.
레마 역시 헬라어의 원어적 의미와 연관하여 생각하면 좋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로고스)이 성경으로 기록되어 전해지는 말씀이 레마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다메섹으로 가는 바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말씀(로고스)이며, 그 말씀(로고스)이 성경에 기록되어 우리에게 전해지는 말씀은 레마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40일 금식 후에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마4:4)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말씀(로고스)이지만,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레마)를 사용한 것이며, 또한 본문에 나오는 “모든 말씀(레마)”은 예수님께서 레마로 주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상에서 로고스와 레마는 그 의미가 쉽게 구별되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성경해석 시에는 항상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1. 로고스와 포네와 레마는 모두 말씀이다. 하나님은 신이고 영이시고 말씀이다.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로서 신이며 초월적이고 제한받지 아니하는 영적존재이시고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시기 위해 말씀으로 나타나셨다.
신과 인간의 만남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영이신 조물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만남은 신과 인간의 상태로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는 방법으로 신이신 하나님이 제한 받지 아니하는 영이신 고로 말씀까지 될 수 있었다. 인간은 인간인 채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설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은 신과 인간의 만남에 있어서 피조물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하시지 않고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말씀이 되어 이 땅에까지 낯아져서인간을 만나러 오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두 존재가 서로 만나야 무엇을 주든지 받든지 하는 거래가 이루어진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지 아니하면 두 존재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날 수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고 받고 하는 일도 일어날 수 없으며 두 존재는 서로 상관이 없는 무관한 관계가 된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양보한 최선의 방법이 말씀이고 하나님이인간을 만나주는 최대한의 노력이 말씀이며 하나님이하나님을 인간에게 나타내는 최선의 수단이 말씀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노력과 양보는 왜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기 위한 오직 하나의 목적 때문이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들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이요 최선의 수단이고 최대의 기회이며 능력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서 예수 곧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말씀이 되셨다. 인간은 예수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예수를 주시기 위해 말씀으로 나아오시고 인간은 하나님에게 예수를 받기 위해 믿음으로 나아간다.
하나님과 인간은 예수를 주고 받기 위해 말씀으로 나아오시고 믿음으로 나아간다. 하나님과 인간은 예수를 가운데 두고 말씀과 믿음으로 만난다.
만약 예수가 없다면 아무리 인간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더라도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고 만약 예수가 없다면 아무리 인간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더라도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수가 없다.
인간이 예수를 전제로 하지 않고 성경말씀을 백번 통독하더라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으며 인간이 예수를 전제로 하지 않고 교회에 백년을 다니더라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을 주실 때 인간은 믿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 예수가 옮겨지고 예수의 거래가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예수 이름의 하나님과 예수이름을 영접하여 소유하게 된 인간이 동일한 예수 이름으로 화목하게 되고 기쁨으로 만나 한 가족이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천국가족이 되는 길이요 수단이다. 예수이름 외에는 천하인간에게 천국가족이 되는 다른 길이 없다(행4:12).
2. 말씀에서 로고스(Logos)와 포네(Phone)와 레마(Rhema)가 있다.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말씀이며 태초로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말씀이시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요1:1). 포네는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을 인간에게 전해주는 외치는 자의 소리(포네)에 의하여 인간에게 전달되고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을 인간이 적용되며 생명으로 나타나는 말씀이다.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포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말씀이며 아멘으로받아들여져 적용되는 말씀이다.
로고스와 포네와 레마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현실적인 육신적인 육신으로 나타나 인간이 소유하는 복이 되고 하늘의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요1:14,눅2:14).
포네의 소리는 선지자,종 또는 전도자들이 전한다.
로고스가 전기의 발전소이면 포네는 이를 운반하는 전선이고 레마는 전기가 빛으로 나타나는 전등이 된다. 태초에 계신 말씀 로고스(요1:1)를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포네로 전했고 (눅1:26-33)마리아가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로고스 말씀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나님의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되었다(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하나님을 외치는 소리가 있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1-3) 하며 전달하매 이를 명령으로 받아 수용하는 사람에게는 (요12:49-50, 요1:12)구원을 받아 영생하게 된다(요3:16).
3.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가 외치는 자의 소리 포네로 인간에게 전해졌을 때 이 말씀이 적용되는 레마 말씀으로 되려면 반드시 인간은 그 말씀을 명령으로 받아야 한다.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론이나 학문이나 지식등의 생각으로 분석하지 않고 이 말씀을 통째로 받아들여 자기의 이론과 생각으로 튼튼하게 세워진 인간의 견고한 진(고후10:3-6)을 파하며 말씀을 명령으로 받을 때(요12:50)
말씀이 영생이 된다(요6:68). 성경말씀은 진리(요17:17)인데 진리는 초자연적법칙은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 이해가 되지 아니한다. 자연 안에 있는 인간은 자연 밖으로부터 온 진리를 결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해가 안되고 납득이 안 되는 진리의 말씀은 인간이 따지지 않고 그대로 명령으로 받아야 된다.
이렇게 말씀을 명령으로 받으려면그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고 하나님은 무조건 옳고 선하다라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을 때 하나님의 말씀인 초자연적이고 이해가 안되는 진리의 말씀을 명령으로 받을 수가 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사흘을 있다가 나왔다든가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이 바다를육지같이 건넜다든가 사람이 기도하여 해를 중천에 붙들어 매었다든가 하나님이 친지를 창조하셨다는 등의 사실을 인간의 능력으로 어찌 이를 납득하고 이해할 수있겠는가 그러나 이는 사실이니 사람이 이를 믿음으로 받을 때 또한 이 모든 일들이 사실로 나타난다
이적중에 가장 큰 이적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셨으로 우리의 구세주예수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인간 예수가 인간의 그리스도 곧 메시야이심을 우리 인간의 생각이나 지식으로 어찌 믿을 수가 있겠는가. 도무지 인간의 능력이나 상상으로는 예수가 하나님이시고 인간의 구세주되심을 수용하고 받아들일수가 없는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를 명령으로 받아 믿어야 한다. 이를 믿어야 구원이 이루어지고 영생하게 된다. 이를 받지 아니하면 로고스 말씀이 레마 말씀으로 될수 없고 영생의 복을 소유할 수없다.
4. 한 율법사가 주님 앞에 나아와 어찌 하면 영생을 얻는지에 대하여 묻고 있는 말씀이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다(눅10:25-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에 율법사는 이웃이 누구인가를 물었고 예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 인을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는데 제사장과 레위인과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를 보고 피하여 가고 사마리아인은 그 불쌍히 여겨 도와 주었다.
율법박사인 율법사가 율법의 이웃을 묻고 있고 율법에 대하여 너무도 잘 알고 많이 읽고 많이 듣고 있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알고 있는 것을 행하지 않아 율법의 말씀이 저들에게 생명이 되지 못하였고 사마리아 인은 율법을 적게 알고 있었으나 이를 명령으로 받아 아는대로 행한고로 말씀이 생명이 된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말씀을 믿어 명령으로 받지 않고 세상의지식이나 학문과 같이 체세수단으로 받았지만 사마리아 인은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의 말씀을 명령으로 받았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듣고 가르치기만 하였고 믿음으로 받아 행하지 않았으므로 모두 멸망하였던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믿으면 나의 말을 믿을것이요 나의 말을 믿으면 이를 당연히 행하리라(요8:47)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니(약2:26) 하나님의 말씀은 영생인즉 말씀을 명령으로 받아 이를 행할 때 영생하느니라(요12:50) 아멘
일시 : 년 월 일
성경본문적기:
내용을 여러번 읽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적어내려 갑니다.
1. 본문 내용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2. 나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신가?
3. 죄악이 어떤것이라고 하셨는가?
4.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약속하신 것은 무엇인가?
5. 내가 똑같은 사건을 보는데 어떤 각도에서 보는가?(말씀조명후)
6. 명령하신 것은 무엇인가?
7. 말씀 통해서 어떤 방향을 알게 하시는가?
*** (구주되신 주님과 교제를 통해 고백할 것들)
① 말씀을 읽으며 죄책감이 느껴지는 부분은 무엇인가?
② 말씀을 조명해서 감사할 부분은 무엇인가?
③ 기도 할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기
④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백을 구체적으로 적기.
매일 매일 충실히 큐티를 하면 반드시 성령 하나님의
터치를 받게 되시리라 확신합니다.
전 고신대학교를 다니는 학생입니다. 캘거리 카페를 통해 많은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눈으로만 보다가 이렇게 궁금한 것이 있어서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합니다. 그런데 개혁주의는 이것을 구분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것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구분하지 않는 것을 자신들은 체험을 강조하기 위해서 구분한 것 때문에 잘못된 것 같은데, 제 생각이 맞는지요?
그리고 구분을 하는 것이 어떤 위험을 줄 수 있는지 자세히 알고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로고스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고 레마를 개인에게 감동과 감화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데, 말씀이 감동과 감화를 주는 것은 사실이라서 헷갈립니다.
==========================================================================================================================
좋은 질문에 감사드립니다. (김동진교수)
답글에서도 잠깐 언급하였듯이 솔직히 말씀드려서 님께서 하신 질문은 개인적으로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한 주제였습니다만, 질문해 주신 덕분에 자료들을 찾아 보던 중에,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님의 질문에 있어서 저의 관심은 우선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님의 지적과 같이 정말로 많은 목회자들이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여 설명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여 설명하려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두 단어를 구분하여 설명하는 데는 교파와 교단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가장 현저하게 강조하는 그룹은 은사주의를 표방하는 순복음이나 오순절 계통의 신학에 영향을 받은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니,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한국을 대표하는 보수 장로교회의 목사로부터 신정통주의를 부르짖는 또 다른 장로교단에 속한 목회자들과 성경 연구와 개인 묵상을 강조하는 일부 유명 선교 단체들, 그리고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것은 로마 가톨릭(천주교회)와 기독교 이단들 중에서도 매우 유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볼 때,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여 설명하는 일은, 적어도 한국교회에서는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며, 나아가 신앙적 내용과 배경이 전혀 달라야 할 천주교회와 이단에까지 공유되고 있는 보편적이며, 공통적인 성경 이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일반적인 현상을 확인한 이상, 저의 관심은 도대체 누가, 왜, 어떤 성경적 근거로서 이런 주장을 하게 된 것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다면, 자칫 현상만 나열하고, 그에 대한 성경적 대안을 찾을 수 없는 노릇이 되기 때문에, 후자의 관심을 정리하는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게 된 점을 양해해 주시리라 기대하며, 이제부터 님의 질문에 대해 구체적인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이들의 공통된 주장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사람들은 <로고스>와 <레마>는 ‘말씀’에 대한 두 가지 헬라어로 번역이라고 하면서, 의미면에서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로고스>는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레마>는 <로고스>되는 말씀이 청자의 구체적인 삶의 상황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즉 <로고스>는 객관적, 합리적, 이성적인 말씀인데 반해, <레마>는 주관적, 감정적, 개인적인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이 견해에 동조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고스>로서의 말씀의 기능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삶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는 <레마>로서의 말씀입니다. <로고스>의 말씀이 <레마>의 말씀으로 인간에게 임하게 될 때, 실제적으로 그에게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합니다. 이러한 <로고스>에서 <레마>로의 변화 과정에 적극적으로 요청되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한결같이 성령의 역사나 은사를 매우 강조합니다.
2. 이들의 <로고스>와 <레마> 구분은 과연 성경적인가?
우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사용된 두 단어의 용례와 구문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 신약 언어에 정통한 성경 사전만큼 도움이 되는 자료는 없습니다. 따라서 제가 소유하고 있는 두 가지 성경 사전(「킷텔 신약 원어 사전(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by Gerhard Kittel and Gerhard Friedrich)」, 「콜린 브라운 신약 사전(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by Colin Brown): 참고, 이 두 권의 사전은 신약 원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기술하는데 정평이 나 있는 좋은 사전임」의 내용을 꼼꼼하게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정당화 할만한 원어적 근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로고스>와 <레마>의 용법이 성경에서 전혀 차이가 없는 형태로 사용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로고스>의 경우, 헬라의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사용한 것과 또한 구약과 신약(그중에서도 요한복음서의 경우는 매우 특별함)에서 언급된 범례가 신학적으로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로고스>에 대한 일반적인 용례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로고스>와 <레마>를 전적으로 구분하여 하나는 기록된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경험되어진 말씀이라는 식의 해석은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한편 신약 성경의 헬라어 <로고스>와 <레마>는 구약 성경의 <다바르(rb'D'))>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 70인경(LXX)의 경우, <로고스>와 <레마>의 차이를 두지 않고서 상호 교환적으로 히브리어 <다바르>를 번역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예레미야 1:1,2에서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1절에서는 <레마>로, 2절에서는 <로고스>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러한 예는 성경에 부지기수입니다. <로고스>와 <레마>가 사용된 용례가 전혀 의미상의 차이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두 단어가 앞서 말씀드린 그러한 방식의 구분을 입증하는 사례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두 단어를 임의로 구분하여 설명하려는 시도는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성경의 본의를 왜곡하는 비신앙적 행위입니다.
3. 그렇다면 누가, 왜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가?
이미 앞서 ‘누가’에 해당하는 범주의 사람들을 말씀드렸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성경 해석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강조되고 있습니다. (1) 오순절식 성령 운동주의자(순복음 교회, 피터와그너 계열), (2) 로마 가톨릭 교회(천주교), (3) 워치만니 계열에속한 자(지방교회 혹은 형제교회), (4)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라>와 <알파 운동> 옹호론자(이단), (5) 칼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주창자
혹자들 중에는 (5)의 예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정통주의의 내면을 알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정통신학의 창시자로 인정받는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자들의 세속적인 성경 이해에 맞서 하나님 말씀 중심의 신학을 강조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을 3가지 형태로, 즉 계시된 말씀, 기록된 말씀, 선포된 말씀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이런 성경 이해는 성경과 하나님 말씀과의 차별을 인정하게 되면서, 성경은 인간에게 말씀으로 다가올 경우에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희한한 주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과 말씀과의 구별 혹은 차별은 결국 성경이 개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지의 여부는 성경을 읽거나 혹은 성경을 통해 느끼거나 하는 체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배태하였습니다. 흔히 Q.T라고 불리는 <말씀 묵상>이라는 성경 이해 방식이 신정통주의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근거로 보편화되었다는 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하지만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신학 이론을 만든 사람이라면, 찰스 파라(Charles Farah, 1926-2001)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미국의 은사주의 신학의 요람인 오랄 로버츠 대학(Oral Roberts University)에서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고전적 은사주의 운동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 신앙 운동’(the Word Faith movement)의 주창자였습니다. 이 운동은 신학적으로 오순절적 은사 운동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내용면에서 훨씬 더 미신적이고 물질적인 세속적인 은사주의 운동입니다. 그런데 이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찰스 파라가 고안해 낸, <로고스>와 <레마>의 구별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즉 <로고스>의 법적 성격의 말씀이 삶의 체험과 경험(대부분이 초자연적인 은사나 세속적 번영과 축복과 관련된 것이지만)으로서 <레마>의 말씀으로 변화를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적 혹은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여기는 반면, 말씀은 오직 체험이라는 구호를 부르짖습니다. 그러한 영적 체험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의 주관화가 중요한데,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성령의 신비적 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신앙 내용으로 취급합니다. 이러한 자들의 행태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듯이, 오늘날 <로고스>와 <레마>를 구별짓고자 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체험중심, 물질중심, 세속중심의 신앙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당화하려는 수작일 따름입니다.
4.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로고스>, <레마>나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군가가 그 능력을 체험했건 그렇지 않건 관계 없이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개인의 수준이나, 경험같은 어떤 조건에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영적 권위와 능력이 발휘되는 것은 오직 성령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개입에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아셔야 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해서 성도에게 역사하실때에는 성경을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은 질서없이 무분별하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 말은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아무렇게나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수단으로서 역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이 은혜를 끼치게 하시는 주체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은혜의 수단으로 삼으십니다. 그래서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고 완전한 ‘은혜의 방도’(메디아 그라티아에, media gratiae)라는 신학 용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정리한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서 입증하는데 신비적 경험이나 인간적 사색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성경을 은혜의 방도 삼으셔서 깨닫게 해 주실 때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뜻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간곡하게 부탁한 권면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4-17)
따라서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지혜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여 바르게 배우며, 익히며, 깨달아 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영적으로 혼미한 세상에서 참된 구원의 도리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말씀으로 영적 분별력을 기르며, 말씀을 통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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