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을 벗어 던진 사랑
키에르케고르의 글에 왕과 시골 처녀의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이 어느 날 왕궁을 떠나 민정 시찰을 했습니다.
이곳저곳 동네를 순회하다가 한 시골 아가씨를 만났는데, 그 아가씨가 그렇게 맑고 아름다웠습니다.
왕은 때 묻지 않은 그 시골 처녀에게 반해버렸습니다.
왕궁에 돌아와도 그 처녀의 생각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사랑하는 신복에게 고백합니다.
“아무래도 그 시골 처녀를 왕궁에 데리고 와서 결혼해야 할까봐.”
그러자 신하는 왕의 말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그 시골 처녀는 신분이 천하기 때문에 왕궁에 들어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또 고민했어요.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내가 가서 그 시골처녀와 결혼해서 데려오면 되지.”
그랬더니 또 신하가 반대합니다.
“왕은 지체가 높으신데 의전 상도 그렇고, 경호도 그렇고
시골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올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안 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왕이 이리저리 고민하다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어요.
“그러면 좋다! 내가 이렇게 하겠다.
내가 왕관을 벗어버리고 평민이 되어서 그 시골 처녀를 찾아가 결혼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지체 높은 왕이 왕관을 던져버리고 평민의 옷을 입고 시골 처녀와의 사랑을 성사시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영광스러운 보좌를 던져버리시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를 찾아오신 사건이 바로 성탄의 이야기입니다.
베들레헴 말구유 그 냄새나는 곳에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를 찾아오신 사건이 바로 성탄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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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마태복음 1:18-25)
'케이체프 노이드'라는 심리학자는 사람들마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들어가 사는 감옥이 여섯 개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제1감옥은 '자기 도취의 감옥'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공주병 같은 감옥입니다.
제2감옥은 '남의 단점 감옥'입니다.
사람들을 볼 때 좋은 점을 보지 못하고 나쁜 것만 보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들어가 있는 감옥입니다.
제3감옥은 '만사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감옥'이랍니다.
제4감옥은 '옛날만 생각하는 과거 지향적인 감옥'입니다.
제5감옥은 '남이 가진 것을 무조건 좋게 보고 자기 것을 초라하게 보는 열등감의 감옥'입니다.
항상 남의 떡이 커 보입니다.
제6감옥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감옥'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성탄절입니다.
만왕의 왕이 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이 땅에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신 목적입니다.
어느 왕이 나라를 여기 저기 돌아보았습니다.
시골에 들어갔을 때 아주 예쁜 처녀를 보았습니다.
왕은 그 처녀를 아내로 맞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대신에게 '저 처녀를 데리고 오라. 결혼하고 싶다'고 하자 그 대신이 한 마디로 거절했습니다.
'폐하! 안 됩니다.
왕의 신분으로 천민과 결혼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내가 시골로 내려 가서 거기서 결혼하고 싶다.'
신하가 또 말했습니다. '폐하! 그것도 안 됩니다. 왕의 신분으로 시골에 내려가서 살면 안 됩니다.'
왕은 너무도 그 여자가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습니다.
왕의 자리를 포기하고 천민의 신분이 되어 시골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처녀를 사랑하며 그 곳에서 살았답니다.
이 이야기는 '키에르케골'이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전하려고 쓴 '왕과 시골 처녀의
사랑'이라는 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에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육신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은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로마가 온 세계를 지배할
때, 장군들이 여기저기 나가 전쟁을 치르며 로마의 영토를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수많은 곳에 전쟁을 치르는 장군들을
지휘하는 일이 황제의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작전지시를 전달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전화가 없던 시대입니다.
사람이 전달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노예가 황제의 말씀을 가지고 가야합니다.
가다보면 적들에게 붙들려 죽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전략은 백일하에
들어나게 됩니다.
이런 중에 황제가 생각하여 낸 교묘한 말씀 전달 방법이 있었습니다.
노예의
머리를 모두 깎았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황제의 말씀을 바늘로 찔러서 쓰고 먹물을 뿌립니다.
그리고 조금 기다립니다.
머리가 어느
정도 자라게 됩니다.
그러면 장군에게 보냅니다.
가다가 적에게 붙잡혀도 비밀이 탄로 날 염려가 없었습니다.
황제가 보낸 노예가
장군에게 오면 장군은 노예의 머리를 다시 깎았습니다.
그리고 황제가 자기에게 주는 작전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준행했습니다.
노예가 장군에게 오면 사람들은 '노예가 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멀리서 노예가 올
때 군사들은 '이제 황제의 말씀이 온다'고 말하며 노예를 영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십니다.
말씀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말씀을 보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을 받으면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치유의 말씀을 받으면 치유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받으면
지혜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받으면 축복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을 받으면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명의 말씀을 받으면 사명의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말씀으로 보여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탄생에서부터 시작하여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이르기까지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본문은 주님의 탄생의 배경입니다.
주님의 탄생의 배경은 사복음서에 다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6절 하반절의 기록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나사렛 동네에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 왔습니다.
천사가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노라!'고 할
때, 마리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때 '무서워 말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말하자 마리아는
'내가 처녀의 몸으로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하자 천사가 대답하기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그러면서 더 확신 있는 말씀 한 마디는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이때 마리아가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 주옵소서'라고 순종하자 그 모습을 보고 천사가 떠나갔습니다.
과연 천사의 예언대로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는 창3:15절의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아기 예수의
탄생할 것을 예언한 예언의 성취의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그냥 오신 것이 아니고 구약의
예언대로 오신 것입니다.
①창3:15절의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②미가서 5:2절에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수많은 곳 가운데 하필이면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을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그 의미는 매우 심장 합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의미는 무엇일가요? 그 지명에서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⑴베들레헴은 죽음과 슬픔의 장소입니다. 지명마다 첫 인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백담사하면 전두환 대통령이 떠오릅니다. 부엉이
바위라는 지명을 들으면 금방 노무현의 자살이 생각납니다. 성경에서 베들레헴의 첫 인상은 죽음과 슬픔입니다. 그 곳에 예수님이
탄생하셔서 복음을 외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극복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이십니다. 부활을 전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죽음과 슬픔의 인상을 가지고 있는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
⑵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위에 앉아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었습니다(렘22;2-4) 요한은 예수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계3;7) 거지 소경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부를 때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불렀습니다.
⑶작은 것을 크게 들어 쓰심에 상징입니다. 베들레헴은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마2장에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입니다. 베들레헴은 작은 나라에서도 작은 동네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것을 들어 크게
사용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고전1:27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⑷예수님의
사역의 상징이 드러난 지역입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6:3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할/
③사7:14절에 '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주님 탄생하시기 800여 년 전에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인간의 타락 후 멀리 떠나셨던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다시 찾아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예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④사9:6-7절에 '그 어깨에 정사'를 메고 오셨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⑴정사: 통치자란 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분입니다.
⑵기묘자: 인간의 과학으로는 해석하지 못할 기묘자, 즉 신기하고 오묘하여 인간이 가히 해석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무엇이 기묘한 것일까요? 예수님의 예언이 기묘자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기묘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기묘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기묘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기묘자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이 기묘자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기묘자입니다. /할/
⑶모사: 계획하고 설계하시는 분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카운슬러' 즉 인생의 진로를 상단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할/
⑷전능하신 하나님: 한나가 고백한 하나님입니다. 삼상2:6-7절에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⑸영존하신 아버지: 여기 아버지란 말은 창조자 혹은 주관자라는 말로, 영원히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되시는 그분만이 영원할 수 있습니다.
⑹평강의 왕: 그 분이 다스리는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요14:27/시72:7).
⑤민24:17절에 '한 별로, '홀'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라고 한 예언인데 여기서 '별'이나 '홀'은 다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홀'은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지팡이입니다.
⑥사53:4-6절에 보면 인간의 모든 질고를 지신 분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⑦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산 자의 하나님으로 나타난 구체적인 사건
성경은 두 종류의 인간, 즉 산 자와 죽은 자를 말합니다. 죽은 자는 생리적으로 잉태하여 난자요, 산 자는 성령으로 잉태하여
난자입니다. 죽은 자는 육신의 정욕으로 난자요, 산 자는 믿음으로 난 하늘의 후사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곧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잉태는 산 자의 신비를
깨우는 진리입니다. 롬5:12절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렇습니다. 아담이 타락하므로 죄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잘못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습니다.
인류는 아담으로부터 육정으로 잉태된
자들의 죽음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산 자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의
후사가 된 아들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늙었고, 사라도 경수가 끊어져 생리적 생산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덤과 같은
사라의 태 속에 성령으로 역사하여 언약의 자식인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이삭은 약속의 자녀요, 성령을 따라 낳은
자식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 안에서만 이 사건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만 가능'합니다. 마19:26절에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본문을 차례대로 상고해 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①예수의 나심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나셨습니다(18).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기독교는 성령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잉태는 마리아에게 임한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두에게 성령으로 잉태되는 사건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현재 성령으로 잉태되는 사건이 없이는 모든 신앙의 죽은 신앙이요, 회칠한 무덤에 불과합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은 하늘의
생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새로운 새 생명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하십니다. 이것은 영접하는 자에게 오는 은총입니다. /믿/ 요1: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할/
지금도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될 때 믿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어서 끝나 버리면 안 됩니다. 오직 그 말씀을 마음
밭에 받아서 한 알의 밀 알로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심령 속에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와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약속의 말씀은 심령 속에 잉태시킬 수 있는 씨앗입니다.
벧전1: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 자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산 자의 신앙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온 신앙입니다. 이 신앙이 아니면 수십 년 믿어도 미지근합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모두
성령이 잉태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될 때 그 말씀을 레마의 말씀입니다.
오늘 마리아의 신앙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와서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할 때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레마)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여기 '말씀'은 헬라어의 '레마'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 레마는 '성령으로 잉태된 말씀이요 이 말씀이 임하는 곳에는 반드시 무슨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부르짖는 것도 중요하고 간절히 찾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 잉태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할 때는 성경을 읽고 기도해야 하며 또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죠지 물러'는 '기도의 비결은 전부 성경에 있다'고 했습니다. 죠지 물러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고아들이 길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것을 보자 저들에게 먹이고 입히고 신앙으로 길러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던 중 시편을 읽다가 말씀이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시68:5절에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이 말씀은 그의 가슴을 사랑으로 뜨겁게 하였고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오니
친히 고아원 원장이 되셔서 먹을 것, 입을 것, 책임져 주시고, 이 종은 청지기로 일하면 된다'고 하는 확신으로 고아원을
시작했습니다.
그 뒤 고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기도로 해결했습니다. 그의 후원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요, 그의 재산은 오직 믿음이었으며 그의 사업의 방법은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시81:10절에 말씀 중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는 말씀을 읽다가 입이 넓게 열림을 체험하게 되었고, 말씀대로 크게 구하였고, 그래서 그의 일생동안 구하는 대로 하나님이 후히 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2천 년 전 마리아의 몸에 잉태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 심령 속에 잉태하기를 원하십니다. /믿/ 지금 문을
두드리십시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열면 내가 그에게고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할/
▶성경에 보면 신앙의 위대한 인격자 요셉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정혼'이라는 말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의 결혼은 세 가지 절차가 있습니다.
⑴약혼: 약혼은 흔히 나이 어릴 때 합니다. 그것은 양친에 의해서가 아니면 직업적인 중매인에 의해서 성립됩니다. 그런데 흔히
당사자들이 맞선을 보는 일이 없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결혼은 너무도 신성한 것이기에 어린아이들보다는 인생과 세상을 잘 아는
부모들이 알아 판단하여 결정하는 것입니다.
⑵정혼: 남녀가 성숙하여 약혼한 사람들의 사이가 원만치 않으면 파기하고 원만하면 계속 약혼자로써 인정하되 정혼을 하는 것입니다. 정혼하면 결혼식을 올리지 않아도 부부와 같이 서로 남편과 아내로 불립니다.
정혼은 이미 맺은 약혼을 공식화하고 랍비 앞에 가서 서약을 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다 알도록 널리 공포를 합니다. 일단 정혼이 이루어지면 법적인 구속력을 가집니다. 이것은 이혼이 아니고서는 파기할 수가 없습니다.
정혼 기간은 1년으로서 이 기간 안에 남편이 죽으면 이 여자는 처녀 과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서로 부부관계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바로 정혼한 사이입니다.
⑶결혼: 일 년 간의 정혼 기간이 끝나게 되면 결혼이 성립됩니다. 그리고 결혼을 해야만 비로소 부부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 세상에 오실 때 인간의 몸을 구체적으로 입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죄진 아담의 유전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태만 빌려서 잉태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자연법에 의해 남자와 여자에 의해 잉태되어 탄생되었다면 인간의 원죄로 인한 타락성과 부패성을 그대로 받아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의학자 'm.b. 디한'은 '어머니 태 속에서 자라고 있는 태아는 한 방울의 피도 어머니 피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어머니는 태
속에 있는 그 작은 몸을 기르기 위해 그 태아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나 그 태아 속에 생기는 모든 피는 그 태아 자체 속에서
형성된다'고 했습니다. 잉태로부터 갓난아기의 탄생까지 단 한 방울의 피도 어머니로부터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공통적인
결론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피는 성령의 피, 하나님의 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신성을 말해주는 것과 동시에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서 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성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신성, 인성, 양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알지 못한 요셉은 자기와 정혼한 마리아가 아무런 육체적 관계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신한 사실을 알았을 때 요셉에게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요, 분노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 사회적 관습이나 율법에 의하면 처녀가 임신하였다는 것은 돌아 맞아 죽어야 할 중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으므로 저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생각했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이름의 뜻은 '승리자, 이긴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요셉의 인격은 한마디로 본문에서 밝힌 대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네 종류의 의인
1. 독선적 의인
독선적 의인은 자칭 자기가 의롭다고 믿는 것
자기의 생각은 다 완전하고 자기의 생활을 다 깨끗하고 다른 사람을 다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2. 위장 의인
한 마디로 그 마음속에 이리와 같은 심보를 품고 얼굴은 양의 가죽을 쓴 사람을 말합니다.
달콤한 말로
남을 이용하여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위장의인 가짜 의인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사기꾼이라고 합니다.
3. 타인에게 인정 받는 의인
이웃에게 인정받는 의인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믿을만해, 그 사람이라면 틀림없어!
그 분을 보니 예수 믿어야겠구나!'
내가 선전을 안 해도 다른 사람이 감화를 받고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생기는 그런 인정을 받을
만한 의인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이런 의인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인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도 귀하지만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정말 귀합니다.
'아브라함, 요셉, 에녹, 다윗' 같은 신앙의 위인들이 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의인들입니다.
의로운 사람 요셉(19-20절)
그의 인격을 배워야 합니다.
⑴분한 감정을 억제할 줄 아는 인격자입니다.
신22:20-21절의 모세의 법에 의하면 약혼한 처녀가 정조를 잃으면 돌로 쳐죽이게 되어있습니다. 법대로 처리하면 마리아는 돌로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를 공적인 재판에 넘기지 않았고 그의 불의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는 불의한 일들이 많습니다. '친구의 부정, 이웃의 부정, 정치인의 부정, 심지어 남편의 부정, 아내의 부정' 우리는 이런 분노를 만날 때 먼저 돌로 치고자 하는 생각부터 솟아나게 됩니다.
그러나 감정으로만 처리한다고 능사는 아닙니다. 요즘엔 자동차 사고가 빈번한데 차들이 충돌해서 정비공장에 맡기면 정비공장은 그
차를 일일이 분해하고 쭈그러진 곳을 폅니다. 울퉁불퉁한 곳은 산소 불로 빨갛게 달구어 함마로 치는데 만약 불로 달구지 않고 무조건
함마로 치면 오히려 더 망가진답니다.
마찬가지로 인격이 쭈그러지고 신앙이 쭈그러진 사람도
비슷합니다. 잘못된 사람은 무조건 윽박지르고 억지로 고치게 하면 더욱 삐뚤어질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마음에
뜨거운 사랑의 불을 쏟아 부으면 녹아져 버립니다.
요셉의 의는 용서와 인정을 겸한 의입니다. 잘못된 자를 꾸짖을 때도 용서와 인정을 겸한 사랑이 절대 필요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용서와 관용하는 삶을 사십시다. 사실 우리 모두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를 '복음에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빚은 무섭습니다. 자고 나면 이자가 막 늘어납니다. 그래서 빚은 빨리 갚아야 합니다. 복음의 빚도 빨리 갚아야
하늘에 상급이 쌓입니다, 이웃 사랑의 가장 큰사랑은 그 영혼을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⑵요셉은 손해를 혼자 당하고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인격자였습니다.
'가만히 끊고자 하여'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 주는 바다와 같은 넓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약혼한 처녀가 아기를 가졌다는 말을
듣고도 '못들은 채' 손해배상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가만히 끊고자 했다'는 말은 '나 혼자 손해보고 끝내자'는
속셈이었습니다.
사실 이 손해는 물질적인 손해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손해, 명예 적인 손해까지
미치는 치명적인 손해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이 모든 손해를 혼자 다 당하기로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시 처녀나 과부가 임신했다면
두말없이 돌로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요셉은 내가 물질적, 정신적, 명예 적으로 치명적인 손해를 봤다고 하더라도 남의
생명을 죽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긴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런 인격을 배워야 합니다.
⑶요셉은 신중히 생각하며 하나님께 의논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사람들은 큰일, 감격스러운 일, 어떤 불행한 일을 만나면 생각 없이 덤비기가 쉽습니다. 더욱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좌충우돌 감정을 폭발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먼저 조용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내
신앙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가?' 사람에게는 입을 봉하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그리고 또 깊이 생각해봅니다. 신앙은 자기를 뒤돌아보는 것이요, 조용히 하나님 앞에
묵상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이렇게 최선의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민하고 묵상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해서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니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우리도 조용히 묵상하며 주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할/
만약 하나님께서 이렇게 했다면 어땠을까요? 임신하기 전에 '요셉아, 이제 곧 네 아내가 임신할 텐데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미리 알려주었다면 얼마나 간단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실 때도 양을 준비해 놓았다고 미리 말씀하셨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도
한두 번쯤 돌면 구름이 끼고 다섯 번쯤 돌면 우르르 천둥소리가 나고 그래야 신나게 예수님을 믿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여섯
바퀴를 돌 때까지도 아무 기척이 없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으로 요단강을 일곱 번 들어가야 했을 때, 세 번째 쯤에 고름이 좀 터지고 다음에는 헌데가 벗겨지거나 무슨 몸의 흔적이 있어야 들어간 재미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드릴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당장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시고 믿음의 최선을 다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가장 정확한 때에 일하십니다.
/아멘!/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주님의 출생은 보통 방법이 아닌 특별한 방법으로 되어 진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성령으로, 성령에 의해서'잉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늘 외우며,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도 보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기독교의 신비가 있고, 독특성이 있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모두가 다 교주들이 자기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석가모니가 그랬고, 공자나 맹자가 그랬고, 마호메트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만은 타종교와 전혀 다르게
예수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잉태되어'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는 사람이
만들어 낸 인위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직접 지시해 주시고, 하나님이 직접 주도하셨고, 하나님이 직접 내려 주신
종교입니다. /믿/
또 말씀드립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냥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평범하게 태여
나섰더라면 인류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났다면 그도 역시 아담의 후예요, 가인의 후손이므로 죄인으로
태어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주님이 죄인된 몸이라면 죄인이 죄인인 인류를 구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인 마리아의 몸을 빌려 나셨기에,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태어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본래 하나님과 동등한 본체였지마는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원래 하나님과 똑같은 능력과 하나님과 똑같은
본체와 하나님과 똑같은 전지성과 지혜와 영원성 등 모두를 함께 가지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직접 마리아의 몸을 통해 나셔서 우리 인간의 형체를 입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성육신'(Incarnation) 또는 '도성인신'이라고 합니다.
③예수! 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십니다(21).
사람의 이름에는 그의 업적과 인격이 나타납니다. 4복음서에만도 예수라는 이름이 무려 600번이나 나옵니다. 존경의 의미로든지
멸시와 천대의 의미로든지 비방의 의미로든지 예수님의 이름은 지금까지 세상 사람들의 글과 입과 말과 마음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고
있는 이름입니다.
⑴예수님의 이름은 '친히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아주 간단한 이름입니다. 그러나 아주 멀리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⑵구세주란 뜻입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의 히브리말은 여호수아인데 그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 자'입니다. '구원자, 구주'란 뜻이며 '도와주시는 주'란 의미입니다. 특별히 신약적 의미의 구원은 '죄에서
자유, 사망에서의 해방,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분입니다.
무디와 함께 전도자로 활동했던 '헨리 워드 비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는 어떤 그림도 그린 적이 없다. 그러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품들은 거의가 예수에게서 받은
영감의 산물들이다. 예수는 단 한 줄의 시도 쓴 일이 없다. 그러나 단테, 밀턴 등 세계적인 시인들 역시 예수께 받은 영감으로
걸작을 남겼다. 예수는 단 한 곡의 음악도 작곡한 일이 없다. 그러나 하이든, 헨델, 베토벤, 바하, 멘델스존 같은 거장들의 작품
역시 예수를 찬송하는 작품들'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위대한 시인들과 음악가들과 미술가들과 조각가들과 소설가들은 예수를
알고 믿고 높였습니다.
④예수에 오심은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진 사건입니다(22).
⑤예수의 오심은 '임마누엘'로 즉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오셨습니다(23).
'임마누엘'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자이실 뿐 아니라 지금 이 시간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 형통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것이요,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33년 동안 임마누엘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떠날 때에도 말씀하시기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28:20). 어떻게 세상 끝 날까지 임마누엘 하십니까?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은 그의 제자들에게 오순절 때에 그의 제자들에게 임하셨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의 마음 속에 거처를
정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때까지 임마누엘 하십니다.
⑥요셉의 순종이 빛이 납니다(24-25).
⑴요셉은 즉시 순종하는 인격자였습니다.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신앙은 순종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런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할/
⑵요셉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요셉이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온
다음에 해산하기까지 아내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말은 그만큼 정욕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참 경건한 인격자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신앙의 인격입니다.
말썽꾸러기 아이가 있었는데, 성탄절에 싼타크로스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고 싶었습니다.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싼타크로스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되요?'
'착한 일을 많이 해야 된단다.'
아들은 엄마 말을 듣고 걱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착한 일을 해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은 싼타크로스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싼타크로스 할아버지!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했거든요'
그리고 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다시 썼습니다.
'싼타크로스 할아버지. 사실은 착한 일을 하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착한 일을 많이 할 테니
선물을 주세요'
그리고 보니 착한 일을 많이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물은 받고
싶었습니다.
아들은 편지 쓰기를 그만 두고 성당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 상을 훔쳐왔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다시
썼습니다.
'싼타크로스. 네 엄마를 인질로 잡아 왔다. 선물과 교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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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에게 크리스마스는 무엇이며 어떻게 축하합니까?
기독교인들에게 크리스마스란 무엇인가?
성경은 크리스마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다양한 기독교 교회에서 뒤따르는 전통적인
축제입니다.
성서에 예수의 탄생에 관한 정보가 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사건이 일어난 정확한 날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전통은 306년부터 337년까지 로마에서 집권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역사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교도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개종을 시작으로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로마의 박해를 종식시켰습니다.
325년에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교회의 지도자들과 함께 최초의 제국 회의를 대표하는 이른바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성경의 신학적 문제와 해석을 논의했습니다.
거기에서 25월 XNUMX일 크리스마스 축하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25월 XNUMX일의 크리스마스는 곧 유럽과 전 세계의 문화 표준이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그때부터 개혁이 도래하여 모든
사람이 성경을 접할 수 있게 되었고 개신교 개혁자들과 가톨릭 교회가 분리될 때까지 모든 기독교인들이 기념했습니다.
현재 가톨릭 교회와 다른 기독교 회중들은 계속해서 25월 XNUMX일을 예수 탄생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 기독교
교회들은 예수님이 그 날에 태어나셨기 때문에가 아니라 예수님이 계시다는 기쁜 소식을 가족들에게 전하는 시간으로 기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크리스마스에 무엇을 축하합니까?
가톨릭 교회를 포함한 세계의 일부 기독교 교회는 25월 XNUMX일에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축제에서 예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이 교회들에게 메시아가 태어난 날이 아니더라도 그 해에 메시아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을 갖는 것은 유익한 일입니다.
크리스마스에 이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인류의 구원을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념합니다. 일반적으로 연말까지 연장된 크리스마스 시즌은 가족, 친구 및 친척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좋은 소식입니다.
크리스마스 관습과 전통
기독교인들에게 크리스마스가 무엇인지 축하하기 위해 추가된 많은 관습과 전통이 있습니다. 일부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표현되고 다른 일부는 그것을 축하하는 국가에 따라 전통적인 관습입니다.
각 나라마다 25월 XNUMX일에 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식사를 위한 전형적인 요리가 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전통은 요리에 있어 다양한 경향이 있습니다. 또 다른 변형은 닫힌 공간과 열린 공간을 장식하는 스타일입니다. 예를 들어 일부 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날짜를 암시하는 조명 및 기타 물건으로 장식된 자연 또는 인공 나무를 배치합니다.
크리스마스에 가장 널리 퍼진 관습은 선물을 주고받는 것뿐만 아니라 평화, 번영 및 좋은 소원의 메시지를 나누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크리스마스가 무엇인지에 따라 원시 로마 달력에서 물려받은 달력에 따르면 연말과 새해 축하 행사도 있습니다.
이제 건전한 교리에 충실한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가족 및 친구들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삶에서 나타내시는 기쁨을 나누는 특별한 시간으로 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크리스마스를 축하해야 합니까?
이것은 일반적으로 세계의 기독교 교회들 사이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입니다. 가장 건전한 것은 일부 또는 다른 교회가 크리스마스 축하에 대해 생각하는 것 사이에 존중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경전이기 때문에 기독교 교리의 기초라면, 이를 바탕으로 기독교인들에게 크리스마스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는 성경이 말하는 바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탄절을 축하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답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지식에 달려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이교도의 휴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으며 존중되어야 합니다.
일부 기독교인이 크리스마스를 축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크리스마스의 기원과 그의 경전에서 하나님이 그러한 축하를 명령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반면에 다른 축제나 연례행사를 성스럽게 여길 경우를 고려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며 역사의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조사하는 것은 특히 각 그리스도인의 몫입니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진실을 알고 축하할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도록.
이 모든 것은 여러분이 진정으로 주님의 요구를 따르고 싶은지 사람이 정한 대로 따르기를 원하는지에 따라 다음과 같습니다.
에베소서 4:13-14(NBV): 13 이쪽모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연합하여우리가 거기에 도착할 때까지 그리스도와 같이 온전한 인성을 갖추게 하시고. 14 따라서 우리는 누군가가 다른 것을 이야기하거나 교활하게 그들의 거짓말을 사실로 보이게 할 때마다 자신의 신념을 바꾸는 어린이처럼 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크리스마스란 무엇인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는 라틴어 nativitas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는 차례로 인도 유럽어 단어 "nascor"에서
유래했으며, 그 해석이 태어날 예정입니다.
어원학에서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는 원래 아람어, 히브리어 및 그리스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제 탄생, 탄생 또는 탄생으로 해석될 수 있는 그 의미의 관점에서, 이 경우 주 예수의 경우에 성경은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구세주로 보내실 메시야로 선포됩니다.
성경의 신약에서는 선언된 약속이 성취되었으므로 예수의 탄생을 언급하는 여러 구절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6-7 (NIV): 6 그들이 거기 있을 때에 se le 시간이 다 되었다. 7 그래서 맏아들을 낳았다.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둘 곳이 없음이러라.
마태복음 1:18(NBV): 그렇게 된거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했습니다. 그러나 혼인하기 전에 성령께서 그녀를 잉태하게 하시니...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리라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1ㄱ(ESV):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의 마을 유대 지역,에 헤롯이 나라의 왕이었을 때.
이것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언급하는 신약성경의 성경 구절들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에서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있었는지, 그것이 어디에 있었는지, 몇시에 그것이 있었는지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으며 예수가 태어난 정확한 날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언제 태어나셨습니까?
성경은 예수가 태어난 정확한 날을 말하지 않고, 많은 기독교 학자들의 성경 연구에 따르면 출생에 가까운 사건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행 사이에서 읽을 수있는 다른 데이터에 대해 말합니다.
예수의 탄생은 유대인의 오두막 또는 초막절과 거의 확실히
일치했습니다.
Sukkot의 유대인 휴일은 23월이나 XNUMX월 사이에 떨어질 수 있는 히브리 달 Tishrei에 경축됩니다.
초실절
또는 초막절은 엄숙하거나 신성한 절기의 달력에 있는 레위기 XNUMX장에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축하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초막절의 관계
이 축하와 예수의 탄생과 관련된 몇 가지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초막절 축제에서 곡식의 첫 열매를 감사의 제물로 하나님께 바쳤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또 다른 예로 Sukkot는 오두막, 구유 또는 장막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이므로 초막절 또는 초막절이라고도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 축제를 기념하는 동안 녹색 가지로 만든 장막이나 구유에서 살았습니다.
애굽의 종살이를 마치고 광야 순례를 하던 때를 기념하기 위해 이렇게 하였다(출애굽기).
여기에서 우리는 세상을 죄의 종살이에서 건지시는 구주 예수께서 우연히 구유에서 태어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실존의 3단계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참 모습은 신 앞에 서는 단독자에 있다고 보고, 그의 실존을 종교적 단계에서 파악하였다.
종교적
실존이야말로 실존의 진정한 모습이며 최후의 도달점으로서, 심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의 서로 대립하는 양자의 관계(궁극적으로는
조화된다)에 의해 나타날 수 있다.
1. 심미적 실존(審美的 實存)
향락과 쾌락을 즐기는 삶의 단계로서 인생의 의의는 행복에 있고 이 행복은 쾌락의 최고 정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심미적
단계에서는 외면적이고 일시적 만족에 그치고, 내면적이고 깊은 정신적 만족은 이루지 못한다.
인간은 감성(感性)인 동시에
영성(靈性)이므로 심미적 실존으로서는 이 양자의 절대적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
이런 것을 깨닫는 순간, 심미적 실존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이고 아이러니컬한 태도를 갖게 된다.
이러한 양자 택일의 계기에서 양심의 입장에 서는 윤리적 실종의 단계가
시작된다.
2. 윤리적 실존(倫理的 實存)
양심의 입장에 서는 엄숙하고 진실되며 건전한 실존으로서 언제나 새로운 결의와 각오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회적이고 시민적 생활태도를
갖는 가장 온당하고 건전한 인생의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성실한 윤리적 실존에 들어가 양심적으로 되려 애쓸수록
자기의 부족과 무력과 유한성을 자각하고 깊은 회한을 느끼거나, 오히려 도저히 미치치 못한 도덕률을 무시하소 억지로 오만한 태도를
취하려 한다.
이리하여 자신이 단독자인 실존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반응에서 절대자를 연상하게 되고 그것에
귀의하고 싶은 새로운 욕망을 갖게 된다.
이에 제3의 실존인 종교적 실존이 우리 앞에 전개된다.
3. 종교적 실존(宗敎的 實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실존으로서 하나님과 대면하는 단독자로서의 삶이다.
종교적 인간은 자기의 모든 존재를 신에게 돌린다.
그는
신의 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받았으며 신의 도움으로 그 생명을 부지해 나가려는 것이다.
겉으로는 그는 미적 인간들처럼 생을
즐긴다.
윤리적 인간들처럼 책임을 진다.
그러나 종교적 인간들은 내면적으로 모든 것을 신에게 돌리고 그에 의지하여 살아간다.
바로, 신앙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기독인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 키에르케고르는 이처럼 향락적이며 무신론적 실존에서 시작하여 종교적 실존에로 나아가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자이다.
단독자(單獨者, the individual)에 관하여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빌자면, 단독자는 “모든 사람이 그것이며 또 그것일 수 있는 단독자이다.
…
이 이중성이 단독자의 변증법이다.
곧 단독자는 모든 사람 중의 ‘오직 한 사람’을 의미하는 동시에 ‘누구나’를 의미하는 것”
이며, 그 전형은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독자가 된다는 것은 지극히 고통에 찬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사람이
먼저 자기 발로 서야한다. 신앙한다는 것은 윤리적, 종교적으로 단독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단독자가 된다는 것은 무리에
대한 죄를 짓는 것이며, 무리에게 조소와 미움을 받아 죽임당하는 위험에 자기를 내맡기는 일이 될 것이다. (여기에 근거하여
키에르케고르는 단독자로서의 신앙을 갖지 못하는 현실의 기독교를 비판하게 된다.)
- 단독자는 그가 개별자로서 절대적인 것에 절대적으로 관계한다.
-----> “절대적인 것에 대하여 절대적인 의무를 지닌다.”
“신앙은 사고가 멈추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
: 키에르케고어가 찾은 윤리적, 보편적인 것을 넘어서는 단독자의 최고의 표현;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 → 그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행해야 했던 것은 윤리적 판단이 아닌, 절대적 결단이었다.
- “단독자는 그리스도교적으로 결정적인 범주이다”
: 낱낱의 사람은 그리스도교계의 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단독자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사람이 단독자가 된다는 것은 개별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과제이며, 위에서도 말했듯이 단독자의 전형이 그리스도인이므로, 개별 인간은 하나님과 절대적으로 교류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 한다.
- 단독자와 그리스도
: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사람’인 그리스도와의 동시성(同時性, samtidighed)을 이루어야 한다. 이것은 역사적,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와 동시대에 사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의한 실견으로서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사랑으로 죄의 용서를 받고, 그와 함께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그리스도와의 단독대면)
키에르케고르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
키에르케고르 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실존’에 관한 문제에서, 그가 심미적, 윤리적 그리고 종교적 실존을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보았다. 이것은 결국 크리스천으로서의 실존의 모습 즉 주체적으로, 죄의식을 통해 그리스도와 동시대적으로 사는 실존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따라서 기독교에 대한 비판점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주관을 배제하여 객관적으로 그 점을 주장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문헌들을 통해 나타난 키에르케고르의 기독교 비판은, 깊은 통찰력과 함께 기독교의 내부에서 ‘기독교인’의 시각에서 관찰한 새로운 관점으로 말미암아, 독창적이며 또 기독교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날카로운 지적들이다.
키에르케고르의 기독교에 대한 공격의 이면에는 언제나 기독교를 기독교계로 다시금 도입하려는 격렬한 노력이 숨어있다. 이것은 키에르케고르 자신이 기독교와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실제로는 이미 기독교가 아니고, 다만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된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다. 또한, ‘이 기독교 사회는 기독교를 기껏해야 장식품으로 밖에 보지 않았다.’ 는 그의 말을 통해, 우리는 키에르케고르가 당시의 기독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젊을 때 신학을 공부했으며 생애 후반에도 기독교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그 주위에 있는 순전히 이름뿐인 기독교에 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였고, 한편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에 관해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키에르케고르가 기독교에 대해 가장 우려하고 또 비판적으로 생각했던 점은, 형식에만 머물고 신과의 진정한 전인격적인 관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목회자들과, 신도들과, 기독교 자체의 안일한 자세였다. 따라서 기독교계에 대한 그의 비평은 기독교 내부적 비판으로, 기독교라는 칭호만 가진 사람들을 놀랍게 해서 그들의 안락에서 일깨우려는 목적을 언제나 추구한다.
먼저 신도들은 ‘나’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 뜨거운 열정으로 교회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습관에 젖어 일요일마다 ‘비천’과는 거리가 먼, 고귀하게 단장한 모습으로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다시 일상의 공간으로 돌아온다. 인습과 관습에 질식된 기독교 생활의 지루하고 무의미한 전 부랑성이 그 속에 들어있다. 심장이 마비된 일요 기독교도들은 여하한 종교적 긴장력도 전혀 모른다. 그리스도교는 이교(異敎)가 되어 버렸고, 그리스도교 세계에 있는 것이라고는 그리스도교가 지닌 찬란하고 더할 나위 없는 여러 진리에 관해서, 또 그 부드러운 위로에 관해서, 일요일마다 한없이 되풀이되는 수다뿐이다.
또 다른 책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신도들이 기독교를 믿게 되는 ‘동기’가 상당 부분 지극히 이기적이고 구복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비판했다. 종교를 가지지 않은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는 자기에게 불이익이 올까 우려해 종교적인 발언을 하는 것조차도 꺼려하던 사람이었다. 이제 그가 결혼을 하고 아버지가 되려 하자, 그는 모범적인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필요적인 이유’에서 종교를 갖게 되고 그 중에서도 기독교를 선택하게 된다. 이 예에서 키에르케고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사람들이 종교를 한갓 자신을 보호하고 이익을 줄만한 ‘장식품’ 정도로만 여긴다는 것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의 본질인, 그리스도의 고뇌와 죽음에 의한 은총을 헛되게 하는 시민적 그리스도교, 현세적 행복의 교회에 대하여 항의하고 싸운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신도들 뿐만 아니라 설교를 담당하고 있는 목회자들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난을 서슴치 않았다. 당시의 교회의 설교는 실존하는 일, 주체적으로 깊어지는 일의 의의를 강조하지 않으며, 그리하여 선포되는 말씀에 대한 주체의 실존적 관계가 문제되지 않는 빈말이요 설교자와 그의 실존 사이에 있는 불일치나 모순을 고려하지 않은 허망한 것이라는 비판이었다. 또한, 현대는, 설교를 듣는 사람이 설교를 단독자로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감각을 상실했다. 설교는 역설적 성격을 잃고 다만 그리스도교, 신앙, 신앙 생활에 대해서 객관적, 제 3자적으로 말하는 사상 강연, 윤리적 권면과 같은 미적인 것으로 전락되어버린 것을 키에르케고르는 한탄했다. 결국 키에르케고르는 당시의 설교가 신앙 생활에 본질적으로 따르는 ‘진리의 고난’을 말하지 않음을, 또 그리스도의 고난과 비천한 종의 모습을 눈물과 함께 감동적으로 말하지만 그를 본받아 몸소 고난받으며 뒤따르는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지 않음을 비판했다. 그는 당시의 설교를, 안이한 세속성, 행복주의, 심미성, 추상성, 상대성 등을 갖춘 ‘비본질적’인 것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지 않고 비본질적이며 형식적인 의식을 습관적으로 행하면서, 무엇인가를 얻으려고만 하는 구복(求福)적 성격을 근원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요구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에만 유언자의 유산을 취득할 권리를 갖는 어떤 사람이, 요구 조건을 행하지도 않고 은근히 그 유산을 취득하는 것만을 원하는 것’을 현 기독교의 모습에 비유시킴으로써, 풍자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간명하게 드러내었다.
키에르케고르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에 대한 대안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를 비판함과 동시에 허점을 메워 줄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그리스도와 ‘동시대성’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했다.
크리스천으로서 말하는 것과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엄격히 구별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동시대적으로 되어가는 것’이요, 그것은 곧 진리의 실천자로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또한
그는 주체로서 그리스도 앞에 서는 것과, 그리스도와 동시대적으로 되는 것을 동일하게 취급했다.
또한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에 대한 접근 방법에 있어서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에서의 접근’을 비난했다. 그는 기독교에 있어서 이성은 옆으로 자리를 비켜야 하고, 그 때에 개인은 제자가 되는 조건 즉 신앙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는다고 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성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라, 비이성적이고 인격적이며 영적인 관계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그리스도교가 마땅히 이성적 지식을 배척하고 체험적 신앙을 고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입으로만 성경에 관해 해석하고 논의하며, 머리로만 기독교와 예수님을 인식하는 기독교는, 예수의 삶이 옳다고 느낄 때, 과감히 그와 같이 살 수 있는 ‘진정한 동일시’의 자세로의 전환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키에르케고르의 기독교 비판은, 그의 확신과 신념에 의해 이루어진, 다시 말해 불이익이 올 것을 감수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그리스도교계의 1800년을 통하여서 나의 과업에 필적하는 것이나 그와 유사한 것은 전혀 없다. 나의 과업은 그리스도교계에 있어서 처음 있는 일이다.’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다른 학자들의 비판 및 발제자들의 비판
1. 학자들의 비판
가. 마르틴 부버(M. Buber)
“인간실존의 기본적인 사실은 인간이 인간과 함께 있다는 것이다.”
나. 막스 셀라(M. Sheler)
“모든 개인에게 있어서 의식의 본질적인 부분에 이미 사회라는 것이 내면화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은 사회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회는 관련 영역으로서 그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다. 하이데거(Heidegger)
“다른 인간이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고, 또한 다른 인간이 실재로는 지각되지 않을 때도 역시 공존이 존재론적으로는 현존을 결정한다. 독존은 다만 공존의 변태에 불과하다. 독존의 가능성은 공존의 증거이다.”
라. 킴발 융(Kimball Young)
“인간은 먼저 한 개인이고 다음으로 사회의 하나의 구성분자인 것이 아니고, 인간의 실존과 그의 성품들이 이미 이웃들과의 공동생활과 문화에서 참여를 통해서 이루어진 산물이다.”
⇒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개체성과 단독성만을 생각하여 개인의 사회성을 경시하고 있다.
마. 블랜샤드
“합리적 윤리학을 거부하는 불분명한 논증할 수 없는 주장이다.”
바. 해롤드 드월프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실재에 관한 신념체계의 내적 의미를 주장할 수 없다. 결국 비합리주의는 귀류법에 의해 논파당하게 될 자기 파괴적 철학이다.”
사. 매킨타이어(A.Macintyre)
“기준 없는 선택이 있느냐, 없느냐? 우리가 타당한 신념의 기준에 도달하는 것은 기준 없는 선택에 의한 것인가, 어떤가?”
⇒키에르케고르는 이성의 사용 필연성을 주지하지 못하여 비합리주의의 자기 파괴성을 간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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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란 무엇인가?
크리스마스는 매년 12월 25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기독교 전통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현대에는 종교를 넘어선 문화적 축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크리스마스라는 단어의 어원
‘크리스마스(Christmas)’라는 단어는 ‘Christ’s Mass’에서 유래되었습니다.
- Chris t: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
- Mass : 기독교의 미사나 예배를 뜻함.
즉, 크리스마스는 본래 "그리스도를 기리는 미사"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초기 크리스마스 축제의 기원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일을 명확히 알 수 없었기에 12월 25일을 선택했습니다.
이 날짜는 로마의 태양신 축제(Saturnalia)와 관련이 있습니다.
기독교 이전의 겨울 축제
기독교 이전에도 북유럽과 로마에서는 겨울철 동지(Winter Solstice)를 기념하는 다양한 축제가 열렸습니다.
- 로마의 Saturnalia : 태양신을 기리는 축제.
- 북유럽의 율(Yule) : 겨울 동지를 기념하며 오늘날의 크리스마스 전통에 영향을 미침.
로마 제국과 크리스마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자리 잡으면서, 크리스마스는 공식적인 기념일로 정착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화 정책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중세 유럽에서의 크리스마스
중세 시대의 크리스마스는 종교적 의식과 축제가 결합된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연극과 음악이 크리스마스 축제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현대적 크리스마스의 형성과 전파
19세기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를 거치며 현대적 크리스마스의 모습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시기에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이 크리스마스의 정신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산타클로스와 크리스마스의 연결
‘산타클로스’는 4세기경 소아시아의 성 니콜라스(St. Nicholas)의 전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의 자선 행위가 현대의 산타클로스 이미지를 형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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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의 유래와 역사 - 예수는 12월에 탄생하셨을까?
성탄절(聖誕節) 또는 크리스마스(Christmas)는
기독교의 최대 축제일로 알려져 있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Christ)와 가톨릭의 예배 의식인 미사(mass)의 합성어이다.
X-MAS라고 쓰는 경우도 있는데, X는 그리스어의 그리스도(크리스토스, XPIΣTOΣ)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노엘(Noël), 이탈리아에서는 나탈레(Natale), 독일에서는 바이나흐텐(Weihnachten)이라고 한다.
목차
1. 크리스마스는 성경에서 유래한 것일까?
2. 예수 탄생일에 대한 견해들
– 히폴리투스(Hippolytus)의 견해
– 동방 정교회의 견해
3. 왜 하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일까?
크리스마스는 성경에서 유래한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는 정말 12월 25일에 탄생하셨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요셉은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갔는데 그때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가 머물러 있는 동안 마리아는 ··· 첫아들을 낳았다. 여관에는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혔다. 그 근방 들에는 목자들이 밤을 새워가며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
(공동번역 누가복음 2:5~8)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정확한 날짜에 대해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 시기를 가늠할 수는 있다. 예수께서 탄생하신 무렵에, 이스라엘 목자들은 밤을 새워가며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 즉 방목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12월 날씨는 양들을 밤새도록 방목할 정도로 따뜻한 것일까?
이스라엘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를 보여 겨울철엔 우기다. 비가 자주오기 때문에 겨울엔 양을 밖에서 방목하지 않는다. ··· 실제 예수의 생일날은 12월25일보다 3개월 이상 당겨질 수도 있다는 것.
(아시아경제, 2016. 12. 22.)
(이스라엘은) 우기(雨期)에 해당하는 겨울철에는 비가 자주 내리고 기온이 많이 떨어져, 적어도 10월 이전에는 양떼를 우리 안으로 이동시켜 겨울을 나게 한다. 따라서 한겨울인 12월, 그것도 밤중에 밖에서 양을 돌보기는 힘든 일이다.
(조갑제닷컴, 2018. 12. 24.)
지중해와 아라비아 사막 사이에 있는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와 같은 위도상에 있다. 우리나라는 12월 엄동설한에 양을 방목하지 않는다. 대관령양떼목장의 정보에 의하면 양은 5월 중순에서 10월 말까지 방목되고, 겨울에는 축사 안에서 생활한다고 한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영국의 한 신학자는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양들이 방목되었다는 것은 아직 10월이 되지 않은 것”이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은 12월이 아니다”라고 얘기했다.
이처럼 성경의 기록, 전문가와 신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볼 때, 기독교의 최대 축제일로 알려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아닐뿐더러 성경에서 유래한 것도 아니다.
예수 탄생일에 대한 견해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날짜를 찾을 수 없자, 여기 저기서 예수 탄생일로 추정되는 날짜들이 거론되었다. 3세기 초까지는 1월, 3월, 5월, 11월 등 서로 다른 때에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했다.
히폴리투스(Hippolytus)의 견해
예수 탄생을 놓고 다양한 주장들이 난무하던 때, 최초로 12월 25일을 거론한 인물이 있다. 로마 가톨릭 교부였던 히폴리투스(Hippolytus)였다. 그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의 잉태를 알린 날이 3월 25일이었다”며 “이때로부터 아홉 달이 지난 12월 25일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주장은 인정받지 못했다. 성경적인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동방 정교회의 견해
동방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탄생일과 침례 받으신 날을 1월 초로 정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탄생하신 장소인 ‘베들레헴’과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신 ‘요단강’에서 예수님을 기념했다. 베들레헴과 요단강은 꽤 먼 곳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도 1월 6일, 이날만 되면 동방의 교인들은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두 곳을 하루 동안 오가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했다.
하루에, 그것도 서로 다른 장소를 순회하며 예수님을 기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교인들은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불만이 고조되자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던 키릴로스는 로마교회의 교황인 율리우스에게 ‘예수님의 실제 탄생일이 언제인지를 밝혀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율리우스 1세는 성경적 근거가 없어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히폴리투스의 의견대로 ‘12월 25일이 예수님의 탄생일로 본다’는 답장을 보냈다.
왜 하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일까?
12월 25일. 이 날짜는 고대 로마인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날이었다. 12월 25일은 로마 달력에서 1년 중 해가 가장 짧은 동지였고, 태양신 미트라의 탄생일이었다. 미트라는 274년 군인 출신인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에 의해 국가 수호신이 되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그해 12월 25일에 미트라를 섬기는 신전을 세우고 이날을 태양절로 선포했다. 이후 태양신 미트라를 국가의 수호신으로 섬기는 일은 로마 황제들의 전통이 되었다.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 콘스탄티누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321년 3월 7일에 일요일을 국가의 휴일로 정했을 때 이날을 ‘존경스런 태양의 날’이라고 선포한 것도 태양 숭배의 전통을 이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기독교대백과사전 참고).
그렇다면 태양신 미트라의 탄생일인 12월 25일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되었을까. 교회사에 따르면 고대 로마에는 12월에 세 가지 축제가 벌어졌다. 사투르날리아(Saturnalia), 시길라리아(Sigillalia), 브루말리아(Brumalia) 축제다.
사투르날리아는 12월 24일까지 열린 축제로, 로마신화에 나오는 농경신 사투르누스(Saturnus)를 기린 날이다. 이날만 되면 로마시 전체가 들썩이며 축제 기분에 젖었고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거리에 나와 환락에 취했다.
(교회사, 종교학대사전 참고)
시길라리아(Sigillalia)는 12월 하순에 열린 축제로, 이날 아이들에게 인형을 주어 즐기게 하였다.
(교회사 참고)
브루말리아(Brumalia)는 12월 25일로, 로마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태양신 ‘미트라’의 탄생을 축하하는 동지제(冬至祭)일이었다.
(교회사, 조갑제닷컴, 1%를 위한 상식백과 참고)
AD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로마의 국교로 격상된 로마교회는 기독교의 강적이던 미트라교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축제일을 이용해 로마인들을 기독교 안으로 끌어들이는 측면들을 고심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의하면 “당시 미트라 숭배가 매우 광범위하게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교회는 그 풍습을 억압하는 대신 동화시키는 방법을 선택했다”고 기록했다.
마침 성경은 그리스도를 ‘빛’으로 묘사했다. 즉 로마인들이 섬기던 빛의 신인 ‘미트라’와 빛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동일시하기에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로마교회는 대중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교도의 제일을 기회로 삼아, 여기에 기독교적 의미를 덧입혀 동화시켰다. 바로 12월 25일 태양신 탄생일과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동일하게 만들어 축하하는 것이었다.
한국사전연구사 『종교학대사전』에 의하면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는 <우리 주 예수가 탄생한 이 성스러운 날을 “태양의 탄생일”이라고 부르자>라고 하였다”고 기록했다. 제265대 교황인 베네딕토 16세는 그의 저서 『나사렛 예수의 유년기』에서 전 세계가 예수 탄생일로 지키는 크리스마스에 오류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에 앞서 한 가톨릭 신부도 “크리스마스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의 풍습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인정했다.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관습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도, 신약성경에 기원한 것도 아닌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고려해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크리스마스의 전통에 참여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이에 대한 답은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헛된 말과 거짓 철학에 속아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것들은 모두 사람의 생각에서 비롯되었으며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결코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므로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쉬운성경 골로새서 2:8)
당신은 크리스마스가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인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인지 여러 자료들을 통해서 확인했다. 크리스마스의 전통에 참여하느냐 안 하느냐의 선택은 당신의 몫이지만, 이에 따른 결과도 당신이 짊어져야 한다.
<참고자료>
- ‘크리스마스는 예수 탄생일 아니라 예수 탄생기념일’, 주간동아, 2018. 12. 24.
- ‘[성탄절의 진실]크리스마스는 원래 1월6일이었다고?’, 아시아경제, 2016. 12. 22.
- ’12월 25일은 그리스도 예수가 태어난 날이 아니다’, 조갑제닷컴, 2018.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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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의 유래
1. 어디에서 크리스마스의 유래를 찾을 수 있나요?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하더라”(겔 8:14~16)
담무스는 수메르, 메소포타미아, 수리아, 바벨론,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널리 숭배되던 생산(특히 봄 식물을 보호하는)을 주관하는 신이자, 들짐승들로부터 양 떼를 보호하는 신(겔 8:14)이었다. 담무스의 배우자는 아스다롯 여신이다. 제사 시에는 매우 음란한 의식이 수반되었다. 바벨론 사람들은 이 신이 당시의 달력으로 4월(지금의 태양력 6~7월로, 만물이 태양 열기로 시드는 계절)에 지하 세계로 내려갔다가 이듬해 봄에 소생하여 만물을 소성케 한다고 믿어 4월을 ‘담무스월’이라 불렀다. 그리고 담무스가 지하 세계로 내려가는 4월에는 이를 슬퍼하며 애곡하는 의식이 행해졌는데, 유다 말기에는 성전 문 앞에서 이런 우상 숭배가 이루어졌다(겔 8:14). ‘담무스월에 낮의 길이가 가장 긴 날인 하지(현대 태양력으로 6월 21, 22일)가 있으니까 태양이 세력의 절정을 찍고 쇠퇴하기 시작한 것이고, 반대로 12월 동지가 지나면서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태양신이 태어난 날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래서 담무스가 태어난 날이 12월 25일이라고 주장한다.
2. 예수님 탄생 이전에 12월 25일을 축제일로 지킨 일이 있나요?
12월 25일은 그리스도 탄생 이전에 태양신 미트라 숭배에서 비롯되었다. 고대 바벨론, 이집트, 헬라 시대를 거쳐 로마 시대에 이르러 오면서 이 축제가 이어져 왔다. 따라서 담무스와 미트라는 둘 다 태양 숭배와 관련돼 있다.
3. 정복할 수 없는 태양의 날에 관해 들어 보셨나요?
12월 25일에는 '정복할 수 없는 태양의 생일(The Birthday of the unconquerable Sun)'이라는 축제가 시작되었다. 고대 이교도들은 태양이 동지 기간 동안에는 죽어 있다가 동지가 끝나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하늘 높이 떠오르며 그것이 권세를 다시 얻는다고 믿었다. 12월 25일은 또한 정의의 태양이고 빛의 신이며 구원자인 페르샤(지금의 이란)의 신 미트라(Mithras)의 생일로 여겨지기도 했다. 태양신 미트라(Mithras)는 고대 로마 왕국의 유명한 신이었고, 그에 대한 숭배는 기원전 1세기 로마인들에게 강하게 전파되었다.
4. 왜 로마 가톨릭은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정했을까요?
바벨론의 하늘의 여왕의 아들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제가 이방인들 사이에 행해졌던 것을 왜 로마 가톨릭은 그대로 따랐을까요?
4세기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 이후에 로마 제국이 기독교화 되면서 이교도들이 교회에 대거 이입되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아마도 이방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그리고 명목상의 기독교인의 수를 늘리고, 태양신 숭배자들과 예수님의 성육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기독교인들 두 부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태양신을 위한 축제일을 예수 탄생일로 둔갑시켜 이교 문화를 기독교에 도입한 것이다.
요약하면 12월 25일은 그리스도 탄생 이전에 태양신 미트라 숭배에서 비롯되었다. 고대 바벨론, 이집트, 헬라 시대를 거쳐 로마 시대에 이르러 오면서 이 축제가 이어져 왔다. 기원후 4세기에 기독교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로마 가톨릭이 불멸의 태양신 탄생일을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던 것이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탄생하신 것은 온 우주가 경축할 일이지만 이날 12월 25일이 이교의 태양신 축일이란 사실 때문에 초기 기독교인들이나 순수한 신앙의 바통을 이어 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름만 바꾼 이방의 축제에 동참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동참한 분들을 정죄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순수하게 그리스도의 탄생만을 생각하면서 축일에 참가하는 분들도 있기 때문이다. 엘렌 G. 화잇은 우리에게 그날을 무시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날이 매우 유익한 목적에 활용될 수 있다.”(<재림신도의 가정>, 478)고 말한다. 그러면서 부모는 “자녀의 마음과 헌물을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사업과 영혼 구원으로 향하게 하라.”(<재림신도의 가정>, 478)고 촉구한다.
화잇은 이렇게 진술한다.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다. 모두 그날을 소중하게 보내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어른들은 마음과 영혼을 다해 자녀와 함께 건전한 즐거움과 레크리에이션을 즐기며, 예수님에게 예물과 헌물을 드리면서 참된 존경을 나타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각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의 사업은 그대들의 도움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흔히 서로 주고받는 선물들이 주님의 보고에 모이게 하라.”(Ellen G. White, in <Review and Herald>, Dec. 9, 1884)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역사적 내용을 살펴보려고 한다.
5. 기독교의 성탄절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기독교 성탄절의 유래는 태양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태양 탄생 축제 절기를 기독교에 유입한 것에서 시작된다.
매년 12월 22일 동지가 되면 태양은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가 동지가 지나면서 차츰 태양이 지배하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진다. 그래서 태양신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동지는 태양이 새롭게 탄생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으며, 매우 큰 제사 축제일이다. 기독교의 성탄절은 로마의 미트라신과 혼합되면서 시작되었다.
6. 세계적으로 태양신 관련 신화에 의하면, 태양신의 생일은 언제인가요?
세계적으로 태양신 관련 신화에 의하면, 태양신의 생일은 12월 25일이다. 니므롯의 아내 세미라미스가 자기 남편 니므롯(태양신)이 12월 22일 동지날에 죽었다가 12월 25일에 환생했다고 주장했다. 다시 태어난 니므롯의 생일이 12월 25일이 되었다.
로마의 미트라, 이집트의 오시리스, 가나안의 바알, 바벨론의 니므롯, 이런 신들의 생일이 12월 25일이라고 주장한다.
마지막 영웅 책 127쪽(부제 : 처음 영웅 니므롯에서 마지막 영웅 교황까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바벨론 니므롯 BC 2000년 이전 12월 25일 출생
이집트 호루스 BC 3000년 경 12월 25일 출생
인도 크리쉬나 BC 900년 경 12월 25일 출생
페르샤 미트라 BC 1200년 경 12월 25일 출생
프리기아 아티스 BC 1200년 경 12월 25일 출생
그리스 디오니소스 BC 500년 경 12월 25일 출생
이렇게 해서 12월 25일은 태양의 탄생일로 정해져, 태양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가장 크고 화려한 축제일이 된 것이다. 축제 방법은 카니발 형태로서 진탕만탕 먹고 즐기고 노는 것이다. 온갖 부도덕한 범죄들이 공공연하게 저질러 진다. 태양신 예배 자체가 음란한 것인데, 이 축제 기간 동안에는 그 예배와 축제가 절정에 이르게 된다. 로마에서는 거의 한 주일의 축제 기간을 보내게 된다.
7. 태양 탄생일이 성탄절로 바뀌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초기 기독교인들이 미트라(태양신)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지키는 태양 탄생일 축제를 보게 되었다. 그들이 거대한 축제를 즐기면서 선물을 나누고 흥겨워 하는 모습을 보고 그 제도를 교회에도 유입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 탄생일을 정하는 과정에서 그 당시 태양신 섬기는 사람들과 같은 날 축제를 갖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어 태양의 생일인 12월 25일을 그대로 도입하여 예수 탄생일로 정하게 되었다.
명칭은 크리스마스[Christ-Mass, 그리스도 미사] - 태양신 숭배자들이 태양 탄생일에 태양신에게 제사하듯이 기독교인들도 그리스도께 제사한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다.
이러한 제도는 4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5세기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게 되었다.
크리스마스의 양면성은 그리스도 탄생의 신성함과 타락성의 공존이다.
8. 예수님의 탄생 자체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눅 2:10, 개정)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 그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소식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즐거워해야 할 것은 예수님 탄생한 날이 아니라, 그 분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사실이다. 우리가 전해야 할 것은 크리스마스가 아니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기쁨의 소식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즉 굿뉴스, 가스펠, 복음이다.
9.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짜보다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만 하나요?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우리는 날짜보다는 죄인을 위해서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탄생 자체와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과 희생 그리고 우리의 소망이 되시기 위해 죽음을 정복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10.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일을 존중한다면 무엇을 고대해야만 하나요?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0~2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일을 존중한다면 다시 오실 왕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11. 재림교인이 크리스마스를 기념해도 되나요? 크리스마스에 선물교환을 해도 되나요?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가정이나 교회에 하면 죄가 되나요? 엘렌 화잇은 어떻게 답변했을까요?
2019년 12월 교회지남에 나온 기사를 소개한다.
마태복음 1장 연구 – 크리스마스를 기념해야 할까?
엘렌 화잇의 답변을 들으면 놀랄지도 모른다.
엘렌 화잇은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일에 대해 무엇이라고 권면하였을까? 예언의 은사를 받은 그녀가 크리스마스를 꺼렸으리라 예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가톨릭을 넘어 이교주의까지 거슬러 가며 12월 25일이라는 날짜와 갖가지 풍습도 거기서 말미암았다고 그들은 추적한다. 예수의 탄생을 준수할 성경적인 명령이나 사례도 없고 일상적인 크리스마스 기념이 주님을 드러내거나 드높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엘렌 화잇도 이런 염려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녀가 크리스마스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예수 탄생의 “정확한 시간에 대해 성경은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재림신도의 가정>, 477)
“12월 25일에는 어떤 신성함도 없다.”(Ellen G. White, in <Review and Herald>, Dec. 9, 1884)고 인정하면서도 우리에게 그날을 무시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날이 매우 유익한 목적에 활용될 수 있다.”(<재림신도의 가정>, 478)고 말한다. 그러면서 부모는 “자녀의 마음과 헌물을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사업과 영혼 구원으로 향하게 하라.”(<재림신도의 가정>, 478)고 촉구한다.
화잇은 이렇게 진술한다.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다. 모두 그날을 소중하게 보내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어른들은 마음과 영혼을 다해 자녀와 함께 건전한 즐거움과 레크리에이션을 즐기며, 예수님에게 예물과 헌물을 드리면서 참된 존경을 나타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각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의 사업은 그대들의 도움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흔히 서로 주고받는 선물들이 주님의 보고에 모이게 하라.”(Ellen G. White, in <Review and Herald>, Dec. 9, 1884)
선물 전달?
이 말은 서로 선물을 교환하지 말라는 말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형제자매들이여, 서로 선물 교환을 계획할 때는 하늘의 친구이신 분을 생각하고 그분의 요구를 도외시하지 말기 바란다. 우리가 그분을 잊지 않았다는 점을 드러내면 그분께서도 기뻐하시지 않겠는가?”
(<재림신도의 가정>, 480)
화잇은 두 가지 선물 모두에 목적이 있음을 보았다. 하나는 가족과 친구를 생각하고 또 하나는 우리 주님을 드높이는 것이다. “최고의 친구이신 하나님을 잊지만 않는다면 서로 사랑과 기억의 증표를 선사하는 일은 합당하다.”(<재림신도의 가정>, 479)
유용하고 유익한 선물을 주고받아야 한다. “우리의 선물이 받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거나 말씀의 교훈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키워 줄 책들을 추천하고 싶다.”(<재림신도의 가정>, 479) 그 밖에 신중히 고른 다른 선물들도 받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어야 한다.
기념일에 선물을 주는 일에 대한 엘렌 화잇의 견해는 분명 일반적 관행과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예수를 첫째로 둔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향으로 재정을 드리느라 서로 주고받는 선물의 규모가 작아지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하면서 더 강해지고 행복해진다. “형제자매여, 자녀와 함께 심지어 팔에 안긴 아기들과 함께 와서 힘닿는 대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 마음의 노래를 그분께 전하고 그대의 입술로 그분을 찬송하라.”(<재림신도의 가정>, 480)
자녀들을 가르치라
이런 식으로 변화를 주면 자녀들이 실망하지는 않을까? 지혜롭고 경험 많은 어머니인 엘렌 화잇은 이것에 대해 말한다. “아이들과 친척들에게 수시로 주는 불필요한 선물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도 운치 있게 가족 간에 예의를 차리며 행복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이 많다. 그대는 지금껏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녀들의 즐거움에 더 치중했음을 이야기하면서 아이들에게 선물 가격을 줄인 이유를 설명해 주고 교훈을 가르칠 수 있다. 하나님의 사업을 앞당기기보다 자신의 쾌락과 자녀들의 만족을 더 중시했고 세상 관습과 전통에 따라 사람들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선물을 주고 있었다고 아이들에게 말하라. 옛날의 동방 박사들처럼 그대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예물을 바칠 수 있고, 죄악 세상에 보내 주신 선물인 예수님에 대해 그분께 감사의 예물을 드릴 수 있다.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도록 아이들을 독려하면서 그 마음에 사심 없는 생각을 키워 주라.”(<재림신도의 가정>, 481)
크리스마스트리
엘렌 화잇은 크리스마스트리를 금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교회에 트리를 세워 특별하게 장식하라고 권했다. 교회 건물을 얻기 위해 애쓰고 있는 교인들에게 그녀는 이렇게 진술했다. “크리스마스 때 각 교회가 예배당을 위한 크고 작은 헌물을 걸어 둘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운다면 하나님은 매우 기뻐하실 것이다. …금과 은으로 된 자선의 열매를 그 가지들에 걸어 두어 하나님께 크리스마스 선물로 드리라. 그대들의 기부를 기도로 성결하게 하라.”(<재림신도의 가정>, 482)
주님의 사업 중 다른 분야, 가령 불우 이웃 돕기 등에도 같은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 “곤경에 빠진 이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및 신년 행사를 개최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 부양가족이 많은 이들을 돕기 위해 선물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재림신도의 가정>, 482)
‘나무를 잘라 금과 은으로 장식하는 것을 반대하는 예레미야 10장 1~5절에 따르면 크리스마스트리는 금지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3절에서 도끼를 들고 나무를 베러 가는 사람은 ‘기술공’이다. 기술공이란 히브리어로 장인, 조각가를 뜻한다. 이 구절에서는 우상 제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상은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옮겨 주어야만 하는, 사람이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물건이다(5절). 크리스마스트리가 아니라 거짓 신들에 대한 언급인 것이다.
어떻게 하면 크리스마스를 가장 잘 보낼 수 있을까? 우리 주님을 그 중심에 모시고 그분께 최고의 선물을 드리라고 엘렌 화잇은 제안한다. 그렇게 그날을 보내면 복이 올 것이다.
저자: 윌리엄 파갈
교회에서 31년간 신실하게 봉사한 뒤 엘렌 G. 화잇 유산관리소 부소장으로 은퇴했고 현재 시간제로 계속 근무 중이다.
어떻게 하면 크리스마스를 가장 잘 보낼 수 있을까? 우리 주님을 그 중심에 모시고 그분께 최고의 선물을 드리라고 엘렌 화잇은 제안한다.
출처: 재림신도의 가정 제 77장 크리스마스
“제 77 장 크리스마스
축일로서의 크리스마스 ―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는 말이 온 세계 동서남북에 걸쳐서 노래 가락과 같이 울려 퍼지고 있다. 청년들과 장년들과 심지어 노인들에게까지 크리스마스는 일반적으로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는 기간이다. 그러나 그토록 크게 이목을 끌게 하는 크리스마스란 무엇인가?
12월 25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로 여김을 받고 있으며 이 날을 지키는 것이 관습화되고 대중화되었다. 그러나 구주의 실제적인 탄일을 지키고 있다는 확실성은 아직 없다. 역사는 이에 대하여 우리에게 아무런 확실한 보증도 주지 아니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정확한 시간을 제시하여 주지 않는다. 만일 주께서 이 지식을 우리의 구원에 요긴한 것으로 여기셨다면 주께서는 우리가 그 문제에 대해서 모두 알 수 있도록 당신의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 성경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그 문제가 가장 현명한 목적이 있어서 우리에게서 숨겨진바 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명시하여 주는 것이다.
주께서는 당신의 슬기로우심으로 모세를 묻은 장소를 숨기셨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매장하시고 그를 부활시키셔서 하늘로 데려가셨다. 이것을 비밀에 부치신 것은 우상 숭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시었다. 모세가 적극적인 봉사를 하고 있을 때에 그에 대한 백성들의 반역, 인간으로서의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노를 일으키게 한 그들, 이런 일을 겪은 모세가 죽음으로 그들과 이별한 후에는 거의 하나님과 같이 경배를 받았다. 이와 똑같은 목적으로 주께서는 그리스도의 정확한 탄일을 감추시고 세상의 구속자 곧 당신에게 나오는 자들을 모두 완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자로서 받으셔야 하고 신뢰와 의지함을 받아야 하실 자이신 그리스도께 돌아가야 할 영예를 그 날이 받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사람의 경배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 돌려져야 한다. ― RH, 1884. 12. 9.
묵살하여서는 안 되는 날 ― 12월 25일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켜지는 까닭에, 또 자녀들은 이 날이 참으로 즐겁고 기쁜 날이라는 것을 교훈과 모본으로 가르침을 받아 왔기 때문에 이 기간을 아무런 관심도 나타내지 않고 지나쳐 버리기란 매우 어려운 일임을 그대도 알게 될 것이다. 이 날을 매우 유익한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할 수 있다.
청년들은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크리스마스날에 그들 스스로의 허황한 오락과 쾌락의 추구 즉 그들의 영성에 해가 될 오락을 찾도록 그들을 방임해 두어서는 안 된다. 부모는 그들의 자녀들의 마음과 헌물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업과 영혼의 구원에 향하도록 함으로써 이 문제를 조절할 수 있다.
오락에 대한 욕망을 억눌러 버리거나 독단적으로 억제하여 버리는 대신에 부모들 측에서 근실한 노력을 함으로써 그것을 조절하고 지도하여야 한다. 선물을 하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은 순결하고 거룩한 통로에로 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크고 방대한 사업에 쓰이는 재정을 공급함으로써 우리 동료 인간들에게 유익을 끼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아 부정과 희생이 주의 행하심의 특징이었다. 이것이 예수를 사랑한다고 공언하는 우리의 행동의 특징이 되게 하자. 이는 우리의 영생의 소망이 그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 상동.
애정의 표시로써의 선물 교환 ― 휴일의 계절이 선물 교환과 더불어 신속히 다가오고 있는데 노유를 막론하고 애정의 기념품으로 한결같이 무엇을 친구들에게 줄 수 있을까 연구하고 있다. 아무리 작은 선물이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자들에게서 선물을 받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것은 우리를 잊지 않고 있다는 보증이며 우리를 그들에게 조금 더 긴밀하게 묶어 매는 것처럼 보인다. …
피차에 사랑과 기념의 선물을 증정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이신 하나님을 이 점에 있어서 잊어버리지 않는 한 정당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물이 이를 받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거나 혹은 그 말씀의 교훈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증가시켜 줄 책들을 추천하고 싶다. 긴 겨울 밤 동안에 읽을 수 있는 것을 준비하라. ― RH, 1882. 12. 26.
자녀들을 위한 책들을 추천한다 ― 현대 진리에 관한 책과 간행물들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여기에 돈을 안전하게 투자할 수 있는 광대한 분야가 있다. 독서물을 마련해 주어야 할 어린이들의 수효는 매우 많다. ‘햇빛 총서’(The Sunshine Series), ‘황금 곡식 총서’(Golden Grains Series), ‘시’(Poems), ‘안식일에 읽을 책’(Sabbath Readings)* 등은 모두 소중한 책들이며 모든 가정에 소개하여도 안전하다고 생각된다. 흔히 과자와 소용없는 장난감에 쓰인 많은 금액을 이런 책들을 사는 데 모아 둘 수 있을 것이다.
자녀들과 손자들과 조카들에게 가치 있는 선물을 하기 원하는 자들은 그들을 위하여 위에 언급한 아동 서적들을 구하여 주라. 청년들에게는 ‘조셉 베이츠의 생애’가 요긴한 책이며 세 권으로 된 ‘예언의 신’*도 요긴한 책이다. 국내의 모든 가정마다 이 책을 소유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빛을 주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 책이 비치되지 않은 가정이 한 가정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대가 하는 선물이 하늘 가는 길에 빛 줄기를 비치는 그러한 종류의 선물이 되게 하라. ― RH, 1879. 12. 11.
예수를 잊어버리지 말 것 ― 형제 자매들이여, 그대들이 피차에 선물을 교환하고자 계획할 때에 그대들이 하나님의 요구를 도외시하는 일이 없도록 나는 그대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들의 친구를 상기시키고자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인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겠는가? 생명의 임금이신 예수께서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셨다. …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죽음까지 당하셨다.
우리가 모든 축복을 받아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힘입어 되는 일이다. … 하늘의 시여자께서 우리의 감사와 사랑의 선물을 함께 나누어 가지도록 하지 않겠는가? 형제 자매들이여 나아오라, 그대들의 자녀들과 함께 그대들의 팔에 안긴 어린 아기까지도 함께 나와서 그대들의 능력에 따라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라. 그대들의 마음으로 아름다운 가락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대들의 입술로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라. ― RH, 1882. 12. 26.
크리스마스-하나님을 존귀히 하는 때 ― 세상 사람들은 축제일을 부박과 사치와 탐식과 허영으로 보낸다. … 많은 돈이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와 새해에 쓸데없는 방종을 위하여 유해하게 낭비될 것이다. 그러나 이 타락한 시대의 습관과 행습에서 떠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며 다만 식욕의 만족이나 혹은 쓸데없는 장식품이나 옷감을 위하여 재정을 소비하는 대신에 우리는 오는 축일들을 하나님을 존귀히 하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 RH, 1879. 12. 11.
그리스도께서 지상(至上)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크리스마스를 지켜 온 것을 보면 하나님에게서 떠나서 죄 많고 결함 있는 품성 때문에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오시게 할 수밖에 없었던 썩을 인간에게로 영광이 돌려지고 있다.
하늘의 주재이시며 하늘의 왕이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왕위를 제쳐놓으시고 영광의 보좌와 그의 높은 지휘권도 버리시고 도덕력이 약해지고 죄로 부패된 타락한 인류에게 하늘의 도움을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부모들은 이것을 그들의 자녀들에게 명심시키고 선물과 헌물로써 피차에 공경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상호간의 의무를 이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의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면서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 ― RH, 1884. 12. 9.
자녀들의 생각을 새로운 통로에로 향하게 하라 ― 풍치 있게 계획할 수 있으면서도 그 비용은 우리 자녀들과 친척들에게 빈번히 증정하는 불필요한 선물보다 훨씬 덜 들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이같이 함으로써 예의를 차릴 수 있는 동시에 가정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그대는 이제까지 하나님의 영광보다 그들의 쾌락을 더 염려하여 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선물의 가치를 변경시킨 이유를 생각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한 교훈을 가르칠 수 있다. 하나님의 사업을 전진시키는 일보다 그대 자신의 쾌락과 자녀들의 만족을 더 생각하고 세상의 습관과 유전을 따르면서 그것이 요구되지도 않는 자들에게 선물을 하는 일을 더 생각하여 왔다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옛날의 동방박사들처럼 그대는 하나님께 그대의 가장 좋은 예물을 바칠 수 있을 것이며 그대의 허물로 죄많은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선물인 예수께 그대가 감사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자녀들로 하나님의 독생자를 선물로 주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헌물을 바치도록 격려함으로써 그들의 생각을 새롭고 이기심 없는 통로에로 달려가도록 하라. ― RH, 1894. 11. 13.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울 것인가?” ― 만일 크리스마스 날에 각 교회가 예배하는 집을 위하여 크고 작은 헌물들을 걸어 놓은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워 놓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실 것이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워도 좋을까요? 이것은 세상을 닮는 일이 아닐까요?” 라고 묻는 편지들이 우리에게 왔다. 우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만일 그대에게 세상과 같이 되고자 하는 성질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닮게 만들 수 있을 것이나 할 수만 있으면 세상과 닮지 않게 그것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향기 있는 상록수를 골라서 그것을 교회에 세워 두는 것은 무슨 특별한 죄가 아니다. 그러나 죄는 행동하게 한 그 동기와 나무 위에 둔 선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 나무의 크기와 그 가지들의 넓이를 그 경우에 가장 알맞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나뭇가지들에는 그대의 자비심에서 나온 금과 은의 열매가 열리게 하고 이것을 크리스마스의 선물로 그분께 바쳐라. 그대의 기증하는 것을 기도로써 성결하게 하라. ― RH, 1879. 12. 11.
크리스마스와 새해의 축하 의식은 무력한 자들을 위하여 개최할 수 있고 또 개최하여야 한다. 부양가족이 많은 자들을 돕기 위하여 선물을 줄 때에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 ― MS 13, 1896.
헌물이 달린 나무는 죄 되지 아니하다 ― 안식일학교 학생들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상록수를 교회에다 비치해 두는 것이 죄라는 입장을 부모들은 취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상록수는 큰 축복이 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자비심을 베풀 대상을 생각하게 하라. 이런 수집물의 목적이 단지 오락만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이런 기회를 부주의하며 경박한 시간으로 삼고 마음에 신령한 감화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의 마음과 품성에는 이 시기가 매우 유익할 것이다. 도덕을 문란하게 하는 많은 수집물을 깨끗한 대용품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을 나는 만족하게 생각한다. ― RH, 1884. 12. 9.
그 날을 위하여 깨끗한 즐거움을 준비하라 ― 나의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이여, 그대들은 일어나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의무를 시행할 태세를 갖추며 그리하여 이 날이 무미건조하게 되지 않고 하늘의 인을 받을 수 있는 깨끗한 즐거움으로 충만하게 하지 않겠는가? 나는 가난한 계급의 사람들이 이러한 제안에 응할 것을 알고 있다. 아무리 부한 자라할지라도 관심을 나타내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위탁하신 재물의 비례대로 선물과 헌물을 바쳐야 한다. 하나님의 사업을 받들고 그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바쳐질 기증물로 인하여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크리스마스가 하늘의 책에 기록되도록 하자. ― 상동.
”(가정, 476-483)
크리스마스의 유래
1. 어디에서 크리스마스의 유래를 찾을 수 있나요?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하더라”(겔 8:14~16)
담무스는 수메르, 메소포타미아, 수리아, 바벨론,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널리 숭배되던 생산(특히 봄 식물을 보호하는)을 주관하는 신이자, 들짐승들로부터 양 떼를 보호하는 신(겔 8:14)이었다. 담무스의 배우자는 아스다롯 여신이다. 제사 시에는 매우 음란한 의식이 수반되었다. 바벨론 사람들은 이 신이 당시의 달력으로 4월(지금의 태양력 6~7월로, 만물이 태양 열기로 시드는 계절)에 지하 세계로 내려갔다가 이듬해 봄에 소생하여 만물을 소성케 한다고 믿어 4월을 ‘담무스월’이라 불렀다. 그리고 담무스가 지하 세계로 내려가는 4월에는 이를 슬퍼하며 애곡하는 의식이 행해졌는데, 유다 말기에는 성전 문 앞에서 이런 우상 숭배가 이루어졌다(겔 8:14). ‘담무스월에 낮의 길이가 가장 긴 날인 하지(현대 태양력으로 6월 21, 22일)가 있으니까 태양이 세력의 절정을 찍고 쇠퇴하기 시작한 것이고, 반대로 12월 동지가 지나면서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태양신이 태어난 날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래서 담무스가 태어난 날이 12월 25일이라고 주장한다.
2. 예수님 탄생 이전에 12월 25일을 축제일로 지킨 일이 있나요?
12월 25일은 그리스도 탄생 이전에 태양신 미트라 숭배에서 비롯되었다. 고대 바벨론, 이집트, 헬라 시대를 거쳐 로마 시대에 이르러 오면서 이 축제가 이어져 왔다. 따라서 담무스와 미트라는 둘 다 태양 숭배와 관련돼 있다.
3. 정복할 수 없는 태양의 날에 관해 들어 보셨나요?
12월 25일에는 '정복할 수 없는 태양의 생일(The Birthday of the unconquerable Sun)'이라는 축제가 시작되었다. 고대 이교도들은 태양이 동지 기간 동안에는 죽어 있다가 동지가 끝나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하늘 높이 떠오르며 그것이 권세를 다시 얻는다고 믿었다. 12월 25일은 또한 정의의 태양이고 빛의 신이며 구원자인 페르샤(지금의 이란)의 신 미트라(Mithras)의 생일로 여겨지기도 했다. 태양신 미트라(Mithras)는 고대 로마 왕국의 유명한 신이었고, 그에 대한 숭배는 기원전 1세기 로마인들에게 강하게 전파되었다.
4. 왜 로마 가톨릭은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정했을까요?
바벨론의 하늘의 여왕의 아들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제가 이방인들 사이에 행해졌던 것을 왜 로마 가톨릭은 그대로 따랐을까요?
4세기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 이후에 로마 제국이 기독교화 되면서 이교도들이 교회에 대거 이입되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아마도 이방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그리고 명목상의 기독교인의 수를 늘리고, 태양신 숭배자들과 예수님의 성육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기독교인들 두 부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태양신을 위한 축제일을 예수 탄생일로 둔갑시켜 이교 문화를 기독교에 도입한 것이다.
요약하면 12월 25일은 그리스도 탄생 이전에 태양신 미트라 숭배에서 비롯되었다. 고대 바벨론, 이집트, 헬라 시대를 거쳐 로마 시대에 이르러 오면서 이 축제가 이어져 왔다. 기원후 4세기에 기독교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로마 가톨릭이 불멸의 태양신 탄생일을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던 것이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탄생하신 것은 온 우주가 경축할 일이지만 이날 12월 25일이 이교의 태양신 축일이란 사실 때문에 초기 기독교인들이나 순수한 신앙의 바통을 이어 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름만 바꾼 이방의 축제에 동참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동참한 분들을 정죄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순수하게 그리스도의 탄생만을 생각하면서 축일에 참가하는 분들도 있기 때문이다. 엘렌 G. 화잇은 우리에게 그날을 무시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날이 매우 유익한 목적에 활용될 수 있다.”(<재림신도의 가정>, 478)고 말한다. 그러면서 부모는 “자녀의 마음과 헌물을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사업과 영혼 구원으로 향하게 하라.”(<재림신도의 가정>, 478)고 촉구한다.
화잇은 이렇게 진술한다.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다. 모두 그날을 소중하게 보내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어른들은 마음과 영혼을 다해 자녀와 함께 건전한 즐거움과 레크리에이션을 즐기며, 예수님에게 예물과 헌물을 드리면서 참된 존경을 나타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각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의 사업은 그대들의 도움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흔히 서로 주고받는 선물들이 주님의 보고에 모이게 하라.”(Ellen G. White, in <Review and Herald>, Dec. 9, 1884)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역사적 내용을 살펴보려고 한다.
5. 기독교의 성탄절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기독교 성탄절의 유래는 태양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태양 탄생 축제 절기를 기독교에 유입한 것에서 시작된다.
매년 12월 22일 동지가 되면 태양은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가 동지가 지나면서 차츰 태양이 지배하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진다. 그래서 태양신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동지는 태양이 새롭게 탄생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으며, 매우 큰 제사 축제일이다. 기독교의 성탄절은 로마의 미트라신과 혼합되면서 시작되었다.
6. 세계적으로 태양신 관련 신화에 의하면, 태양신의 생일은 언제인가요?
세계적으로 태양신 관련 신화에 의하면, 태양신의 생일은 12월 25일이다. 니므롯의 아내 세미라미스가 자기 남편 니므롯(태양신)이 12월 22일 동지날에 죽었다가 12월 25일에 환생했다고 주장했다. 다시 태어난 니므롯의 생일이 12월 25일이 되었다.
로마의 미트라, 이집트의 오시리스, 가나안의 바알, 바벨론의 니므롯, 이런 신들의 생일이 12월 25일이라고 주장한다.
마지막 영웅 책 127쪽(부제 : 처음 영웅 니므롯에서 마지막 영웅 교황까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바벨론 니므롯 BC 2000년 이전 12월 25일 출생
이집트 호루스 BC 3000년 경 12월 25일 출생
인도 크리쉬나 BC 900년 경 12월 25일 출생
페르샤 미트라 BC 1200년 경 12월 25일 출생
프리기아 아티스 BC 1200년 경 12월 25일 출생
그리스 디오니소스 BC 500년 경 12월 25일 출생
이렇게 해서 12월 25일은 태양의 탄생일로 정해져, 태양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가장 크고 화려한 축제일이 된 것이다. 축제 방법은 카니발 형태로서 진탕만탕 먹고 즐기고 노는 것이다. 온갖 부도덕한 범죄들이 공공연하게 저질러 진다. 태양신 예배 자체가 음란한 것인데, 이 축제 기간 동안에는 그 예배와 축제가 절정에 이르게 된다. 로마에서는 거의 한 주일의 축제 기간을 보내게 된다.
7. 태양 탄생일이 성탄절로 바뀌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초기 기독교인들이 미트라(태양신)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지키는 태양 탄생일 축제를 보게 되었다. 그들이 거대한 축제를 즐기면서 선물을 나누고 흥겨워 하는 모습을 보고 그 제도를 교회에도 유입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 탄생일을 정하는 과정에서 그 당시 태양신 섬기는 사람들과 같은 날 축제를 갖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어 태양의 생일인 12월 25일을 그대로 도입하여 예수 탄생일로 정하게 되었다.
명칭은 크리스마스[Christ-Mass, 그리스도 미사] - 태양신 숭배자들이 태양 탄생일에 태양신에게 제사하듯이 기독교인들도 그리스도께 제사한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다.
이러한 제도는 4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5세기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게 되었다.
크리스마스의 양면성은 그리스도 탄생의 신성함과 타락성의 공존이다.
8. 예수님의 탄생 자체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눅 2:10, 개정)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 그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소식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즐거워해야 할 것은 예수님 탄생한 날이 아니라, 그 분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사실이다. 우리가 전해야 할 것은 크리스마스가 아니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기쁨의 소식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즉 굿뉴스, 가스펠, 복음이다.
9.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짜보다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만 하나요?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우리는 날짜보다는 죄인을 위해서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탄생 자체와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과 희생 그리고 우리의 소망이 되시기 위해 죽음을 정복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10.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일을 존중한다면 무엇을 고대해야만 하나요?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0~2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일을 존중한다면 다시 오실 왕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11. 재림교인이 크리스마스를 기념해도 되나요? 크리스마스에 선물교환을 해도 되나요?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가정이나 교회에 하면 죄가 되나요? 엘렌 화잇은 어떻게 답변했을까요?
2019년 12월 교회지남에 나온 기사를 소개한다.
마태복음 1장 연구 – 크리스마스를 기념해야 할까?
엘렌 화잇의 답변을 들으면 놀랄지도 모른다.
엘렌 화잇은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일에 대해 무엇이라고 권면하였을까? 예언의 은사를 받은 그녀가 크리스마스를 꺼렸으리라 예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가톨릭을 넘어 이교주의까지 거슬러 가며 12월 25일이라는 날짜와 갖가지 풍습도 거기서 말미암았다고 그들은 추적한다. 예수의 탄생을 준수할 성경적인 명령이나 사례도 없고 일상적인 크리스마스 기념이 주님을 드러내거나 드높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엘렌 화잇도 이런 염려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녀가 크리스마스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예수 탄생의 “정확한 시간에 대해 성경은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재림신도의 가정>, 477)
“12월 25일에는 어떤 신성함도 없다.”(Ellen G. White, in <Review and Herald>, Dec. 9, 1884)고 인정하면서도 우리에게 그날을 무시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날이 매우 유익한 목적에 활용될 수 있다.”(<재림신도의 가정>, 478)고 말한다. 그러면서 부모는 “자녀의 마음과 헌물을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사업과 영혼 구원으로 향하게 하라.”(<재림신도의 가정>, 478)고 촉구한다.
화잇은 이렇게 진술한다.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다. 모두 그날을 소중하게 보내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어른들은 마음과 영혼을 다해 자녀와 함께 건전한 즐거움과 레크리에이션을 즐기며, 예수님에게 예물과 헌물을 드리면서 참된 존경을 나타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각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의 사업은 그대들의 도움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흔히 서로 주고받는 선물들이 주님의 보고에 모이게 하라.”(Ellen G. White, in <Review and Herald>, Dec. 9, 1884)
선물 전달?
이 말은 서로 선물을 교환하지 말라는 말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형제자매들이여, 서로 선물 교환을 계획할 때는 하늘의 친구이신 분을 생각하고 그분의 요구를 도외시하지 말기 바란다. 우리가 그분을 잊지 않았다는 점을 드러내면 그분께서도 기뻐하시지 않겠는가?”
(<재림신도의 가정>, 480)
화잇은 두 가지 선물 모두에 목적이 있음을 보았다. 하나는 가족과 친구를 생각하고 또 하나는 우리 주님을 드높이는 것이다. “최고의 친구이신 하나님을 잊지만 않는다면 서로 사랑과 기억의 증표를 선사하는 일은 합당하다.”(<재림신도의 가정>, 479)
유용하고 유익한 선물을 주고받아야 한다. “우리의 선물이 받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거나 말씀의 교훈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키워 줄 책들을 추천하고 싶다.”(<재림신도의 가정>, 479) 그 밖에 신중히 고른 다른 선물들도 받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어야 한다.
기념일에 선물을 주는 일에 대한 엘렌 화잇의 견해는 분명 일반적 관행과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예수를 첫째로 둔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향으로 재정을 드리느라 서로 주고받는 선물의 규모가 작아지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하면서 더 강해지고 행복해진다. “형제자매여, 자녀와 함께 심지어 팔에 안긴 아기들과 함께 와서 힘닿는 대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 마음의 노래를 그분께 전하고 그대의 입술로 그분을 찬송하라.”(<재림신도의 가정>, 480)
자녀들을 가르치라
이런 식으로 변화를 주면 자녀들이 실망하지는 않을까? 지혜롭고 경험 많은 어머니인 엘렌 화잇은 이것에 대해 말한다. “아이들과 친척들에게 수시로 주는 불필요한 선물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도 운치 있게 가족 간에 예의를 차리며 행복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이 많다. 그대는 지금껏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녀들의 즐거움에 더 치중했음을 이야기하면서 아이들에게 선물 가격을 줄인 이유를 설명해 주고 교훈을 가르칠 수 있다. 하나님의 사업을 앞당기기보다 자신의 쾌락과 자녀들의 만족을 더 중시했고 세상 관습과 전통에 따라 사람들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선물을 주고 있었다고 아이들에게 말하라. 옛날의 동방 박사들처럼 그대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예물을 바칠 수 있고, 죄악 세상에 보내 주신 선물인 예수님에 대해 그분께 감사의 예물을 드릴 수 있다.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도록 아이들을 독려하면서 그 마음에 사심 없는 생각을 키워 주라.”(<재림신도의 가정>, 481)
크리스마스트리
엘렌 화잇은 크리스마스트리를 금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교회에 트리를 세워 특별하게 장식하라고 권했다. 교회 건물을 얻기 위해 애쓰고 있는 교인들에게 그녀는 이렇게 진술했다. “크리스마스 때 각 교회가 예배당을 위한 크고 작은 헌물을 걸어 둘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운다면 하나님은 매우 기뻐하실 것이다. …금과 은으로 된 자선의 열매를 그 가지들에 걸어 두어 하나님께 크리스마스 선물로 드리라. 그대들의 기부를 기도로 성결하게 하라.”(<재림신도의 가정>, 482)
주님의 사업 중 다른 분야, 가령 불우 이웃 돕기 등에도 같은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 “곤경에 빠진 이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및 신년 행사를 개최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 부양가족이 많은 이들을 돕기 위해 선물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재림신도의 가정>, 482)
‘나무를 잘라 금과 은으로 장식하는 것을 반대하는 예레미야 10장 1~5절에 따르면 크리스마스트리는 금지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3절에서 도끼를 들고 나무를 베러 가는 사람은 ‘기술공’이다. 기술공이란 히브리어로 장인, 조각가를 뜻한다. 이 구절에서는 우상 제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상은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옮겨 주어야만 하는, 사람이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물건이다(5절). 크리스마스트리가 아니라 거짓 신들에 대한 언급인 것이다.
어떻게 하면 크리스마스를 가장 잘 보낼 수 있을까? 우리 주님을 그 중심에 모시고 그분께 최고의 선물을 드리라고 엘렌 화잇은 제안한다. 그렇게 그날을 보내면 복이 올 것이다.
저자: 윌리엄 파갈
교회에서 31년간 신실하게 봉사한 뒤 엘렌 G. 화잇 유산관리소 부소장으로 은퇴했고 현재 시간제로 계속 근무 중이다.
어떻게 하면 크리스마스를 가장 잘 보낼 수 있을까? 우리 주님을 그 중심에 모시고 그분께 최고의 선물을 드리라고 엘렌 화잇은 제안한다.
출처: 재림신도의 가정 제 77장 크리스마스
“제 77 장 크리스마스
축일로서의 크리스마스 ―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는 말이 온 세계 동서남북에 걸쳐서 노래 가락과 같이 울려 퍼지고 있다. 청년들과 장년들과 심지어 노인들에게까지 크리스마스는 일반적으로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는 기간이다. 그러나 그토록 크게 이목을 끌게 하는 크리스마스란 무엇인가?
12월 25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로 여김을 받고 있으며 이 날을 지키는 것이 관습화되고 대중화되었다. 그러나 구주의 실제적인 탄일을 지키고 있다는 확실성은 아직 없다. 역사는 이에 대하여 우리에게 아무런 확실한 보증도 주지 아니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정확한 시간을 제시하여 주지 않는다. 만일 주께서 이 지식을 우리의 구원에 요긴한 것으로 여기셨다면 주께서는 우리가 그 문제에 대해서 모두 알 수 있도록 당신의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 성경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그 문제가 가장 현명한 목적이 있어서 우리에게서 숨겨진바 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명시하여 주는 것이다.
주께서는 당신의 슬기로우심으로 모세를 묻은 장소를 숨기셨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매장하시고 그를 부활시키셔서 하늘로 데려가셨다. 이것을 비밀에 부치신 것은 우상 숭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시었다. 모세가 적극적인 봉사를 하고 있을 때에 그에 대한 백성들의 반역, 인간으로서의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노를 일으키게 한 그들, 이런 일을 겪은 모세가 죽음으로 그들과 이별한 후에는 거의 하나님과 같이 경배를 받았다. 이와 똑같은 목적으로 주께서는 그리스도의 정확한 탄일을 감추시고 세상의 구속자 곧 당신에게 나오는 자들을 모두 완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자로서 받으셔야 하고 신뢰와 의지함을 받아야 하실 자이신 그리스도께 돌아가야 할 영예를 그 날이 받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사람의 경배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 돌려져야 한다. ― RH, 1884. 12. 9.
묵살하여서는 안 되는 날 ― 12월 25일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켜지는 까닭에, 또 자녀들은 이 날이 참으로 즐겁고 기쁜 날이라는 것을 교훈과 모본으로 가르침을 받아 왔기 때문에 이 기간을 아무런 관심도 나타내지 않고 지나쳐 버리기란 매우 어려운 일임을 그대도 알게 될 것이다. 이 날을 매우 유익한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할 수 있다.
청년들은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크리스마스날에 그들 스스로의 허황한 오락과 쾌락의 추구 즉 그들의 영성에 해가 될 오락을 찾도록 그들을 방임해 두어서는 안 된다. 부모는 그들의 자녀들의 마음과 헌물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업과 영혼의 구원에 향하도록 함으로써 이 문제를 조절할 수 있다.
오락에 대한 욕망을 억눌러 버리거나 독단적으로 억제하여 버리는 대신에 부모들 측에서 근실한 노력을 함으로써 그것을 조절하고 지도하여야 한다. 선물을 하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은 순결하고 거룩한 통로에로 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크고 방대한 사업에 쓰이는 재정을 공급함으로써 우리 동료 인간들에게 유익을 끼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아 부정과 희생이 주의 행하심의 특징이었다. 이것이 예수를 사랑한다고 공언하는 우리의 행동의 특징이 되게 하자. 이는 우리의 영생의 소망이 그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 상동.
애정의 표시로써의 선물 교환 ― 휴일의 계절이 선물 교환과 더불어 신속히 다가오고 있는데 노유를 막론하고 애정의 기념품으로 한결같이 무엇을 친구들에게 줄 수 있을까 연구하고 있다. 아무리 작은 선물이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자들에게서 선물을 받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것은 우리를 잊지 않고 있다는 보증이며 우리를 그들에게 조금 더 긴밀하게 묶어 매는 것처럼 보인다. …
피차에 사랑과 기념의 선물을 증정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이신 하나님을 이 점에 있어서 잊어버리지 않는 한 정당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물이 이를 받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거나 혹은 그 말씀의 교훈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증가시켜 줄 책들을 추천하고 싶다. 긴 겨울 밤 동안에 읽을 수 있는 것을 준비하라. ― RH, 1882. 12. 26.
자녀들을 위한 책들을 추천한다 ― 현대 진리에 관한 책과 간행물들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여기에 돈을 안전하게 투자할 수 있는 광대한 분야가 있다. 독서물을 마련해 주어야 할 어린이들의 수효는 매우 많다. ‘햇빛 총서’(The Sunshine Series), ‘황금 곡식 총서’(Golden Grains Series), ‘시’(Poems), ‘안식일에 읽을 책’(Sabbath Readings)* 등은 모두 소중한 책들이며 모든 가정에 소개하여도 안전하다고 생각된다. 흔히 과자와 소용없는 장난감에 쓰인 많은 금액을 이런 책들을 사는 데 모아 둘 수 있을 것이다.
자녀들과 손자들과 조카들에게 가치 있는 선물을 하기 원하는 자들은 그들을 위하여 위에 언급한 아동 서적들을 구하여 주라. 청년들에게는 ‘조셉 베이츠의 생애’가 요긴한 책이며 세 권으로 된 ‘예언의 신’*도 요긴한 책이다. 국내의 모든 가정마다 이 책을 소유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빛을 주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 책이 비치되지 않은 가정이 한 가정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대가 하는 선물이 하늘 가는 길에 빛 줄기를 비치는 그러한 종류의 선물이 되게 하라. ― RH, 1879. 12. 11.
예수를 잊어버리지 말 것 ― 형제 자매들이여, 그대들이 피차에 선물을 교환하고자 계획할 때에 그대들이 하나님의 요구를 도외시하는 일이 없도록 나는 그대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들의 친구를 상기시키고자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인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겠는가? 생명의 임금이신 예수께서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셨다. …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죽음까지 당하셨다.
우리가 모든 축복을 받아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힘입어 되는 일이다. … 하늘의 시여자께서 우리의 감사와 사랑의 선물을 함께 나누어 가지도록 하지 않겠는가? 형제 자매들이여 나아오라, 그대들의 자녀들과 함께 그대들의 팔에 안긴 어린 아기까지도 함께 나와서 그대들의 능력에 따라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라. 그대들의 마음으로 아름다운 가락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대들의 입술로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라. ― RH, 1882. 12. 26.
크리스마스-하나님을 존귀히 하는 때 ― 세상 사람들은 축제일을 부박과 사치와 탐식과 허영으로 보낸다. … 많은 돈이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와 새해에 쓸데없는 방종을 위하여 유해하게 낭비될 것이다. 그러나 이 타락한 시대의 습관과 행습에서 떠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며 다만 식욕의 만족이나 혹은 쓸데없는 장식품이나 옷감을 위하여 재정을 소비하는 대신에 우리는 오는 축일들을 하나님을 존귀히 하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 RH, 1879. 12. 11.
그리스도께서 지상(至上)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크리스마스를 지켜 온 것을 보면 하나님에게서 떠나서 죄 많고 결함 있는 품성 때문에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오시게 할 수밖에 없었던 썩을 인간에게로 영광이 돌려지고 있다.
하늘의 주재이시며 하늘의 왕이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왕위를 제쳐놓으시고 영광의 보좌와 그의 높은 지휘권도 버리시고 도덕력이 약해지고 죄로 부패된 타락한 인류에게 하늘의 도움을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부모들은 이것을 그들의 자녀들에게 명심시키고 선물과 헌물로써 피차에 공경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상호간의 의무를 이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의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면서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 ― RH, 1884. 12. 9.
자녀들의 생각을 새로운 통로에로 향하게 하라 ― 풍치 있게 계획할 수 있으면서도 그 비용은 우리 자녀들과 친척들에게 빈번히 증정하는 불필요한 선물보다 훨씬 덜 들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이같이 함으로써 예의를 차릴 수 있는 동시에 가정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그대는 이제까지 하나님의 영광보다 그들의 쾌락을 더 염려하여 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선물의 가치를 변경시킨 이유를 생각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한 교훈을 가르칠 수 있다. 하나님의 사업을 전진시키는 일보다 그대 자신의 쾌락과 자녀들의 만족을 더 생각하고 세상의 습관과 유전을 따르면서 그것이 요구되지도 않는 자들에게 선물을 하는 일을 더 생각하여 왔다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옛날의 동방박사들처럼 그대는 하나님께 그대의 가장 좋은 예물을 바칠 수 있을 것이며 그대의 허물로 죄많은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선물인 예수께 그대가 감사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자녀들로 하나님의 독생자를 선물로 주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헌물을 바치도록 격려함으로써 그들의 생각을 새롭고 이기심 없는 통로에로 달려가도록 하라. ― RH, 1894. 11. 13.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울 것인가?” ― 만일 크리스마스 날에 각 교회가 예배하는 집을 위하여 크고 작은 헌물들을 걸어 놓은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워 놓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실 것이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워도 좋을까요? 이것은 세상을 닮는 일이 아닐까요?” 라고 묻는 편지들이 우리에게 왔다. 우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만일 그대에게 세상과 같이 되고자 하는 성질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닮게 만들 수 있을 것이나 할 수만 있으면 세상과 닮지 않게 그것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향기 있는 상록수를 골라서 그것을 교회에 세워 두는 것은 무슨 특별한 죄가 아니다. 그러나 죄는 행동하게 한 그 동기와 나무 위에 둔 선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 나무의 크기와 그 가지들의 넓이를 그 경우에 가장 알맞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나뭇가지들에는 그대의 자비심에서 나온 금과 은의 열매가 열리게 하고 이것을 크리스마스의 선물로 그분께 바쳐라. 그대의 기증하는 것을 기도로써 성결하게 하라. ― RH, 1879. 12. 11.
크리스마스와 새해의 축하 의식은 무력한 자들을 위하여 개최할 수 있고 또 개최하여야 한다. 부양가족이 많은 자들을 돕기 위하여 선물을 줄 때에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 ― MS 13, 1896.
헌물이 달린 나무는 죄 되지 아니하다 ― 안식일학교 학생들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상록수를 교회에다 비치해 두는 것이 죄라는 입장을 부모들은 취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상록수는 큰 축복이 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자비심을 베풀 대상을 생각하게 하라. 이런 수집물의 목적이 단지 오락만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이런 기회를 부주의하며 경박한 시간으로 삼고 마음에 신령한 감화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의 마음과 품성에는 이 시기가 매우 유익할 것이다. 도덕을 문란하게 하는 많은 수집물을 깨끗한 대용품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을 나는 만족하게 생각한다. ― RH, 1884. 12. 9.
그 날을 위하여 깨끗한 즐거움을 준비하라 ― 나의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이여, 그대들은 일어나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의무를 시행할 태세를 갖추며 그리하여 이 날이 무미건조하게 되지 않고 하늘의 인을 받을 수 있는 깨끗한 즐거움으로 충만하게 하지 않겠는가? 나는 가난한 계급의 사람들이 이러한 제안에 응할 것을 알고 있다. 아무리 부한 자라할지라도 관심을 나타내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위탁하신 재물의 비례대로 선물과 헌물을 바쳐야 한다. 하나님의 사업을 받들고 그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바쳐질 기증물로 인하여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크리스마스가 하늘의 책에 기록되도록 하자. ― 상동.
크리스마스에 생각해 보는 종교란 무엇인가?
12월 25일은 크리스마스(Christmas, X-mas)다. 크리스마스란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축일로, 매년 12월 25일로 우리나라에서도 법정 공휴일이다.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성스러운 사람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절이라는 의미이다. 크리스마스(Christmas)란 라틴어 그리스도(Christus)와 모임(massa)의 합성어로,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모임을 의미한다.
■ 예수 그는 누구인가
예수는 2천여년 전, 지금의 이스라엘이라고 불리우는 나사렛이라는 마을의 말구유에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수는 사람의 몸으로 오셨지만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란 예수가 인간 엄마에게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아버지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즉 동정녀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를 낳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인 예수가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것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해서다.
신앙이 아닌 보통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예수는 하나님이지만 사람들의 죄를 사해주기 위해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이다. 기독교는 성부인 야훼(여호와)와 성자인 예수 그리고 하나님의 영(靈)인 성령이 한 몸(삼위일체)이다.
기독(基督)이란 그리스도(Christ) 예수를 일컫는 구세주(救世主)라는 뜻이다. 유태인의 유일신 창조주 예수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목수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 33년간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다 당시 로마법에 따라 인간이 만든 가장 잔인한 십자가의 형을 받고 처형당한다. 그는 죽은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 부활·승천한다.
■ 기독교의 구약과 신약 66권
유대인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는 구약성서는 율법책인 모세5경과 예언서인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 등 39권이다. 신약성서는 복음서 4권과 역사서, 바울서신, 공동서신, 예언서 등 27권이다. 구약성서의 약속, 메시아사상은 신약의 시대 예수를 통해 실현되고 예수는 인간의 법에 따라 십자가에 매달려 죽지만 반드시 다시 돌아와(재림) 악인을 심판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전지전능의 신, 무소불위, 무소부지의 하느님은 이렇게 원수까지 사랑하라 가르치고 재림을 약속하고 승천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다.
'기독교'라는 말은 대한민국에서 개신교(Protestant)만을 일컫는 말로 흔히 사용되나 '기독교'의 실제 의미는 주요 분파인 동방 정교회, 로마 가톨릭교회, 개신교회 등을 포함해 유일신 야훼를 믿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숭배하는 모든 종교단체들을 두루 뜻한다.
기독교의 교파는 개신교만 하더라도 무려 374개나 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동방 가톨릭교회·라틴 교회로 분류되고 개신교는
감리교·그리스도의 교회·루터교·복음주의·성결교·성공회·아르미니우스주의·오순절파·장로교·개혁교회·재림파·재세례파·침례교로, 동방
기독교는 동방 가톨릭교회·동방 정교회·러시아 정교회·오리엔트 정교회·아시리아 동방교회로... 등으로 교파가 분열되어 있다.
■ 우리나라 전체인구의 28%가 기독교인
세계 기독교 인구는 21억명이다. 대한민국의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의 약 28%인 1,340만명이라고 한다. 고든 콘웰대 연구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아프리카 인구의 49.3%, 아시아 9.2% 유럽 78.0%, 라틴아메리카 76.9%, 오세아니아 인구의 73.3%가 기독교인들이다. 기독교인이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은 2억 6천만명이 기독교인이요, 부라질은 1억 9000명, 중국이 3위인 1억 4천만명이나 된다. 종교별 분포를 보면 기독교(33.9%)에 이어 이슬람(23.9%), 불가지론자가 4위(8.9%) 힌두교(14%), 불교(7.1%) 순이다.
권력의 속성 때문일까? 스스로 권력이 된 종교는 부패하고 타락한다. 오늘날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는 권력과 손잡으면서(정교유착) 타락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이다. 기독교인들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는 로마서를 자구적으로 해석해 스스로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기독교의 정신은 사랑이요. 정의다. 기독교는 오늘날 이단의 문제가 아니라 타락의 문제다. 타락한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아전인수격으로 성경을 해석해 혹세무민하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아편이다. 이성을 잃은 종교인들을 보면 1천1백만 명을 학살한 아돌프 히틀러가 생각난다. 목적이 선하다고 과정의 악행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자신이 믿는 신을 위해 인류를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는 종교가 있는 한, 과학이 마무리 발달해도 인류에게 불안과 공포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본의 욕구,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수단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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