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의 능력을 부인 하는 것(딤후 3:5)


경건의 능력

자료 / https://m.blog.naver.com/josephclass/223048135541


경건(敬虔)하다 

경건(敬虔)은 ‘경건하다’의 어근이다. 

형용사 겅건하다의 뜻은 ‘공경하며 삼가고 엄숙하다’이다. 경건주의(敬虔主義)는 17세기 말 독일의 개신교가 교의(敎儀)와 형식에 치우치는 것에 반대하여 일어난 신앙 운동이다. 스페너(Spener, P. J.)가 창시한 운동이며, 성경을 중심으로 한 개인의 영적 생활의 체험과 실천을 중요시하여 경건한 생활을 하자고 주장하였다. 모습이란 ‘다른 것을 본뜨거나 본받음’을 말한다. 능력이란 ‘일을 감당해 낼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디모데후서 3장 5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와 디모데후서 3장 16절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말씀에서 경건의 모양과 능력에 대하여 묵상하려고 한다.

디모데전서 3장 2~4절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에서 경건하게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 ‘감독과 집사의 덕목’으로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다. 야고보서 1장 26~27절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에서 경건의 참 모습이 무엇이며 경건의 능력을 어떻게 기를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50년 이상한 사람으로서 경건의 모습과 능력이 얼마나 삶에서 나타나고 있는가를 돌아본다. 주일이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고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며 생활하고 있다. 나의 내면 모습이 과연 성경 말씀대로 변화하여 성장과 성숙의 길로 가고 있는가를 돌아보면서 허물과 흠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이 아니면 하루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음을 느끼고 있다. 밖으로 들어나는 모습에서 어느 정도 경건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내면의 성숙한 변화와 변혁이 없다면 근본적인 경건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혀에 재갈을 물리고 말의 절제가 있었는가 생각하며 말하기보다는 듣는 일에 치중하려고 다짐을 해본다. 내 양심을 속이면서 인간관계를 하였던 적도 있었음을 고백한다. 또한 경제적 이익을 취하려고 제도를 악용한 적도 있었다. 

형제자매와 이웃의 어려움을 보고도 보지 못한 척한 적이 있었다. 세상 쾌락을 찾으면서 세속에 물들어간 적도 있었다. 앞으로 겉으로 나타나는 경건의 모습보다 내면에서 나오는 경건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한다. 우리 모두 경건의 능력자로서 지역사회에 덕과 유익을 끼치면 좋겠다.
 



경건의 모양과 경건의 능력(디모데후서 3:1-9)

헬라어 원문에 의하면, 오늘 본문은 지시대명사 “이것을”(Τοῦτο)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 다음으로 접속사 “그러나”(δὲ)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접속사가 빠져 있지만, 헬라어 원문과 영어 성경에도 분명히 들어가 있습니다. 
제가 볼 때는 이 접속사가 중요하게 보이는데, 왜냐하면 이 단어 안에 사도의 안타까운 심정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앞 장에서 사도는 거역하자는 자들, 즉 거짓 교사 또는 이단자들을 온유함으로 대할 것을 디모데에게 권면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을 그렇게 온유한 태도로 대할지라도, 그들의 행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오늘 본문 1-9절에 걸쳐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을 온유함으로 대할지라도 그들이 얼마나 간교하고 회심하기 어려운 자들인지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디모데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여, 에베소 교회 안에 있는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을 온유함으로 훈계할 때 혹시 하나님이 그들을 돌이켜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시오. 그러나 그대는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간교하고 회심하기 어려운 자들인지를.

여하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러나 너는 이것을 알라”(Τοῦτο δὲ γίνωσκε)고 명령하며,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세’라 함은, 예수님의 재림이나 재림 직전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말세’라는 말을 종종 접하는데, 이것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말세’는 단수가 아니라 언제나 복수로 표현됩니다(행 2:17; 딤후 3:1; 약 5:3; 벧후 3:3). 
본문 1절에서도 “말세에”(ἐν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라는 말이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는데, 풀어서 번역하자면, “마지막 날들에”(in the last days) 또는 “마지막 기간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한 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여러 날들’ 또는 ‘특정한 기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말세는 어떤 기간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 요엘서를 인용한 사도 베드로의 증언에 따르면, 오순절 성령강림 때 말세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로부터 시간이 좀 지나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기록할 때도,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말세’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순절 성령강림 때처럼 하나님의 성령이 디모데가 목회하던 에베소 교회에도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증언대로,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시는 때가 곧 말세라고 했으니,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셨으므로 그때에도 여전히 말세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께서 그때와 동일한 방식으로 거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도 말세에 살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말세는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전까지 처하게 되는 ‘모든 현재’를 뜻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 보면, 이 본문은 2천 년 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말세에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2절)라고 말씀합니다. 말세의 뜻을 잘 몰라도 사도가 증언하는 내용만 봐도,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당시처럼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합니다.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지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얼짱’과 ‘몸짱’이 되기 위해 자기 얼굴과 몸을 뜯어 고치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 완전히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돈을 사랑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돈이라면 완전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험금을 노리고 자기 가족을 죽이기도 하고, ‘목사’를 사칭하는 사기꾼들이 헌금을 횡령하는 어처구니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랑하고 교만하며 남을 비방하는 일에 능숙합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물론,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한 삶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사람들이 절제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스마트 기기를 사용하면서 즉흥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소셜 미디어(Social Media) 문화’가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절제하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점점 사나워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육신적 쾌락에 빠져 급기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망각해 버립니다. 

사랑하는 청년(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바울 당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경고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똑같이 “말세에” 살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말세의 특징을 보면서 오늘 한국 교회와 우리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게다가 더욱 충격적인 사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은 일차적으로 불신자들에 대한 묘사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거짓 교사 또는 거짓 신자들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는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라는 5절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따라서 “경건의 모양” 따위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경고는 일차적으로 교회 공동체를 겨냥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로 치면, 한국 교회와 그 밖의 모든 기독 단체 및 캠퍼스 기독 동아리를 향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 교회도 결코 예외일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참 신자인 척하면서 그냥 ‘가라지’로 앉아 있는 교인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단 한 번도 예수님과 만남의 경험이 없이 부모 또는 친구의 권유로 마지못해 교회당에 출입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리스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반면에 과거에 거듭난 체험은 있지만, 세상 가운데 불신자 친구들의 틈바구니에 살면서,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거의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칭의(의롭다 하심)의 은혜에서 결코 떨어져 나가지는 않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는 불신자와 거의 다를 바가 없이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굴복시키려는 선한 의지를 거의 소멸한 채, 언제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보다 육신적 쾌락에 매몰되어 온갖 욕심에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제가 볼 때 오늘 본문에 언급되는 사람들은 방금 말씀드린, 교회 안의 두 부류에 모두 해당됩니다. 다시 말해, 애초부터 거듭나지도 않았으면서 어릴 적부터 부모나 친구의 권유로 마지못해 종교 생활하는 자들과, 그리고 예전에 분명하게 거듭난 체험은 있지만 현재 세상의 영에 미혹되어 일시적으로 거의 불신자처럼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는 당시 디모데가 목회하던 에베소 교회 안의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이 앞서 말한 그 두 부류 모두에 해당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없으면서 참 신자인 척하는 부류, 또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이단자들에게 미혹되어 일시적으로 진리를 대적하게 된 부류를 가리킵니다. 

아무튼 이 두 부류의 특징은 우선 “경건의 모양”(μόρφωσιν εὐσεβείας)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애초부터 거듭난 체험이 없는 사람도 오랜 기간 동안 교회의 예배행위나 여러 의식에 노출되다 보면, 참 신자와 거의 동일한 모습으로 “경건의 모양”을 무의식중에 습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경건의 모양을 보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닥쳐오면, 항상 자신의 욕망을 위해 무언가를 선택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마저도 자신의 양심을 평안하게 해 주는 수단 정도로 생각해 버립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주님의 십자가가 자기 위안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역시 경건의 모양은 갖추고 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경건의 모양이 어떤 것인지 알며, 한때 경건의 능력을 가지고자 노력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거짓 교사들, 즉 이단자들의 거짓 가르침에 미혹되어 일시적으로, (물론 그 기간이 언제까지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불신자의 영적 상태와 거의 다를 바가 없이 살아갑니다. 자기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채, 자신의 욕망에 따라 무언가를 선택합니다. 말씀을 향한 선한 의지가 조금 살아 있을 때에는 양심의 가책이라도 받는데, 그 선한 의지가 거의 소멸된 상태가 되면, 신앙적 양심의 가책도 거의 받지 않습니다. 참으로 자기 양심에 화인 맞은 것처럼 살아갑니다. 

아무튼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6절에 나오듯이,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그런 부류에 속한 자들입니다. 여기에서 “어리석은 여자”(γυναικάρια)란, 거짓 교사들에게 ‘잘 속아 넘어가는 여인들’(gullible women, NKJV)을 가리킵니다(Thomas D. Lea, NAC: 1,2 Timothy, Titus).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남편이 밖에 일하러 나간 사이에, 거짓 교사들이 집요하게 집으로 침투해서 여인들을 교묘하게 미혹하는 행태가 있었습니다(존 스토트, 『BST 시리즈: 디모데후서 강해』). 그들의 이런 은밀한 수법은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를 미혹했던 뱀의 수법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사탄에 사로잡힌 멸망의 자식들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여인들은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긴 하지만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6-7절). 그렇기 때문에 이런 어리석은 여자들도 (일시적이면 좋겠지만) 같은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8절에 나오는 얀네와 얌브레 같은 사람들도 동일한 부류에 속합니다. 모세를 대적한 그들의 이름이 구약성경에 나오진 않지만, 바울은 유대인의 전통 문서들을 통해 그들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John Calvin, William Hendricksen).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대적하고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며, 또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입니다(8절). 오늘날로 치면, ‘ㅅㅊㅈ’와 같은 사악한 이단들을 가리킵니다.

놀랍게도(?) 본문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나타낼 때는 특별한 외적 형식을 가지게 됩니다. 외적 형식과 참된 경건의 관계는 몸과 영혼의 관계와 비슷합니다(Charles H. Spurgeon). 다시 말해, 참된 경건은 외적인 형식이 없이 표현될 수 없으며, 외적인 형식만 있는 참된 경건도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청년(성도) 여러분, 우리는 ‘교회 개혁’이라는 명분 아래, 형식을 무조건 좋지 않은 것이라 하여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형식적’이라는 말 자체를 굉장히 부정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우리의 신앙에는 ‘형식’이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신앙의 형식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3장과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화 있을진저”라는 강한 어조로 질책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11:42). 

여기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이것도 행하고”, 즉 경건을 표현하는 외적 형식인 “십일조”도 행하고, 또한 “저것도”, 즉 그 외적 형식에 담긴 경건의 의미인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경건을 담아내는 외적 형식(경건의 모양)이 필요 없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본질’이라는 명분 아래 ‘형식’ 자체를 거부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교회 개혁’이라고 생각하면 완전히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물론 성경에도 없는 온갖 외적 형식으로 경건의 능력과 전혀 상관없는 것들은 당연히 없애 버려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경건에 유익이 되는 외적 형식들을 모두 없애 버리면 참으로 곤란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한번 적용해 봅시다. 사랑하는 청년(성도)들이여, 여러분은 과연 경건의 능력을 드러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 다시 한 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내 삶에 과연 “경건의 모양”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거짓 교사들과 거짓 신자들은 경건의 모양이라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여러 규례들을 지켰고, 온갖 율법 조항들을 만들어 내어 금욕주의적 삶을 살았으며, 외적으로 볼 때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종교적 행위들은 철저히 자신들의 의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도 그들이 갖추었던 외적 형식, 즉 “경건의 모양”이라도 갖추고 있는지부터 한번 살펴봐야 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5절)라는 사도의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경건의 모양은 필요 없고 경건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경건의 능력을 담아내는 최소한의 경건의 모양이 당연히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당시 사도가 보기에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누구나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 속에 몰래 침투한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도 참 성도들과 동일하게(?)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음을 그가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는 경건의 모양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생활’에 열중하는 모습입니다. 매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고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헌금생활도 열심히 하는데, 이것들은 그들에게 신앙이 아니라 종교일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런 행위들을 다른 사람에게 ‘신실하게’ 보여 줌으로써 존경과 좋은 평판을 얻으려는 데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

바울 당시에도 그랬겠지만, 오늘날에도 몰래 침투한 거짓 교사들은 보통 더 뜨겁게 교회생활을 합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 저희 학교에 ‘대학교회’가 세워졌는데, 이곳을 섬기려고 찾아온 두 명의 청년이 처음부터 굉장히 뜨겁게 교회를 섬겼습니다. 여느 청년들과는 달리 찬양 팀 멤버로서 참 헌신적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몰래 침투한 ㅅㅊㅈ 추수꾼이었습니다. 이들은 본문에서 사도의 증언대로, 경건의 모양을 뚜렷하게 갖추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참 신자들과 비교해 봐도 전혀 차이가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관심사는 경건의 모양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행위에만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엇비슷한 모양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의 관심은 경건의 모양을 드러내게 하는, 기저(基底)에 깔린 경건의 능력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계신 청년(성도)들에게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과연 경건의 능력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경건의 능력이라고 해서 뭔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칼빈의 말대로, 경건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이 하나로 결합된 것입니다. 따라서 경건의 능력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일상생활 가운데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도 겉보기에는 참 신자들과 동일한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증언대로, 사람은 외모를 보기 때문에(삼상16:7) 그런 자들의 중심을 정확히 꿰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자들에게 속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추수 때까지 많은 경우에 그런 가라지들이 교회당에 나오도록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마13:29).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결정적인 한 가지 증상이 나타납니다. 일단 참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 없는 증상이 나타납니다. 이런 성도들은 주일 성수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마치 어린아이가 밥을 굶은 것처럼 영적 결핍에 허덕이게 됩니다. 그런데 경건의 능력이 없는 거짓 교사와 거짓 신자들은 말씀을 듣지 않고 기도를 하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바른 말씀과 바른 교리와 참된 경건생활을 누리지 못하는데도 이들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증상을 보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안에서 결코 거듭난 적이 없기 때문에, 영적 양식을 공급 받지 못해도 자신이 굶어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항상 배우긴 하지만 자기 욕심대로 생활할 뿐이며,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처음부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이들은 우리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고 책망 받을 사악한 자들입니다.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계신 청년(성도)들이여, 여러분이 소유한 경건의 능력이 일상생활 가운데 더욱 드러나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날마다 살피며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또 자기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거짓 교사들처럼 경건의 능력을 부인한 채, 자기 욕심에 사로잡힌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청년(성도) 여러분, 내일이면 또 다른 한 주가 세상 가운데 시작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경건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지, 이번 한 주간에 또다시 판가름 나게 될 것입니다. 매주 교회당에 있을 때는 경건의 모양으로 서로를 대하지만, 세상 가운데 여러분이 살아갈 때는 경건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대할 것입니다. 본문 8-9절에 나오듯이, 믿음에 관하여 버림받은 자처럼 살다가 자신의 어리석음이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폭로되지 않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겸손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적인 경건의 모양과 함께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경건의 능력을 아울러 겸비(兼備)하시는 복된 청년(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경건의 모양과 능력(디모데후서 3:1-7)


여러분은 왜 예수를 믿으십니 까? 저는 제가 삶에 대하여 무지하 고 무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다른 피조 물에 비교하면 제법 아는 것도 많고 할 줄 아는 것도 많습니다. 그런면 에서 사실 우리 인간과 비교될 수 있는 피조물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 습니다. 인간 다음으로 똑똑하고 유 능한 피조물이 무엇인지 정확히 잘 모르지만 그것이 아무리 똑똑하고 유능하다고 하여도 우리 인간과는 정말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 인간은 아주 월등한 존재요 탁 월한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을 가리 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 말이 맞습 니다.

사람은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동물은 아니지만 자동자라는 것을 만들어 세상에서 가장 빨리 달 릴 수 있는 동물이 되었습니다. 사 람은 날지 못하는 동물이지만 비행 기를 만들어 세상의 그 어느새 보다 더 높이 더 멀리 그리고 더 빨리 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강과 바다를 헤엄치는데 있어서 강과 바 다의 그 어떤 물고기보다 무능하지 만 우리 사람들은 배와 잠수함을 만 들어 강과 바다의 그 어떤 물고기 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멀리 그리 고 더 많은 짐을 싣고 물위와 물속 을 다닐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 다.

정말 우리 인간들이 하는 일들과 만들 것들을 생각해보면 우 리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에 스스로 놀랄때가 많습니다. 우주를 날아 다니는 위성 들. 컴퓨터와 그 컴퓨터가 수행하는 여러 가지 기가막힌 일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전쟁 무기들과 그 무기들의 파괴력과 정확함만 생각하 여도 우리 인간의 능력이 얼마나 뛰 어난 것인가를 금방 알 수 있습니 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치명적이리만큼 무지하 고 무능합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가 구원이라고 부르는 생명과 그 생명 의 질 즉 다시 말해서 행복하고 만 족한 삶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능하 고 무지한 존재들입니다.

컴퓨터 대단한 물건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기쁨과 평 안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 엄청 난 기능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컴퓨 터가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는 것입 니다. 우주를 날아 다니는 여러 위 성들 참으로 대단한 것들이지만, 그 높은 곳에서 땅에 있는 개미까지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 만 그 또한 우리의 생명과 행복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고통을 받으며 불행하게 사는 이유 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다시한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 니하며 배반 하여 팔며 조급하 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 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 의 모 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격 게 되는 이유는 자기만 사랑하여 자 기를 사랑하기 위하여 남을 미워하 고 훼방하며, 돈을 사랑하여 돈 때 문에 나쁜 짓을 하고 그 때문에 다 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고, 교만 하여 남을 깔보아 다른 사람의 마음 에 깊은 상처를 입히며, 자기를 사 랑하여 모든 것을 희생한 부모에게 까지도 불순종하고 감사할 줄 모름 으로 사랑과 희생을 우스운 것으로 만들며, 거룩하지 못한 것을 좋아하 여 스스로의 삶을 돼지 우리의 돼지 보다 더 더럽히며, 무정하여 외로운 세상을 만들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 하여 언제나 지나친 복수로 불안한 세상을 만들며, 절제할 줄 모르는 끝없는 욕심으로 환경을 파괴하고 경제 질서를 어지럽히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악한 세상을 만들어 세상과 사람을 악의 노예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그와 같은 문제는 컴퓨터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하늘 높은 곳에 떠있는 위성으로도 해결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인간은 생 활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능력이 있 으나 보다 근본적인 생명에 대하여 는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입니다.

욥기 38장에 보면 욥에 대 한 하나님의 질문이 나옵니다. 퍼 부으시듯 여러 가지 질문을 욥에게 하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그 준승을 어디에 띄웠는 지 네가 아느냐?"

"까마귀 새끼가 배가 고파 오락 가락 할 때 네가 그에게 먹을 것을 주었느냐?"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 느냐?"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 같 이 넘쳐 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

이 모든 질문을 요약하면 질문은 크게 두가지 유형으로 구분 됩니다. 첫째는 '네가 할 수 있느 냐?'는 유형의 질문이고, 둘째는 ' 네가 아느냐?'는 유형의 질문입니 다. 그와 같으신 질문에 대하여 욥 과 우리가 하나님께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무지함과 무능함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무지함과 무능함을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그 와 같은 질문을 욥과 우리에게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질문을 하시는 도중 욥기 40장 14절에서 하나님은

"그리하다면 네 오른 손이 너를 구 원 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다면'의 뜻 이 무엇입니까? 네가 이 모든 것을 알고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면, 다시말해서 네가 모든 것을 알고 모 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라면 이라 는 뜻입니다. 네가 정말 그렇다면 네가 말하는대로 네 오른 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나도 인정해 주시 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컴퓨터와 위성과 비 행기와 자동차와 같은 것들을 만들 어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 들을 하면서 살아도 우리 인간은 여 전히 생명과 그 생명의 구원에 대하 여 전적으로 무지하고 무능한 존재 입니다. 저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저 는 제가 제 삶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능하고 무지한 존재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나와 우리 인간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나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항상 기뻐하 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사는 축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저는 이 세상이 절대로 우 연히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 습니다. 저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믿고 있습니 다. 이토록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살 아있는 것들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그리고 진화한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은 정말 마귀가 들리지 않고는 생 각할 수 없는 억지입니다.

저는 이 세상이 한 분 창조 주에 의하여 창조된 것임을 믿습니 다. 저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 주가 계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 렇지 않으면 이 세상을,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존재와 생 명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세상이 한 분 창조주에 의 하여 창조된 것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창조주가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로 시작되는 사도신경은 정말 저의 신 앙고백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 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습니 다.

나는 하나님께 능력이 있으 심을 믿습니다. 때문에 내가 하나님 을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면 비록 나 는 약해도 하나님의 강하신 능력이 나의 것이 되어 골리앗과 같은 세상 도 이겨내며 사망의 움침한 골짜기 와 같은 곳에서도 해 받음음을 두려 워하지 아니하고 푸른 초장의 양과 같이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믿습니다.

나는 생명이 주께 있음을 믿습니다. 나는 능력이 주께 있음을 믿습니다. 나는 나의 구원이 하나님 께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세상과 환경을 바꾸실 수 있는 능력 이 있으십니다. 때문에 나는 나의 세상과 나의 삶의 환경을 위해 하나 님께 기도합니다. 몸이 약할 때 건 강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나는 하나 님께 치유의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 다. 암과 같이 무서운 질병도 하나 님이 한 번만 손대 주시면 단번에 나을 줄을 저는 믿습니다. 저는 성 경에 예수님께서 귀머거리와 소경과 문둥병자와 그밖의 모든 병자들을 고쳐주셨다는 것을 믿으며 예수님께 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때문 에 저는 물질이 부족할 때 물질의 넉넉함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저는 저에게도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났 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저는 늘 가 난하고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 님께서 때마다 시마다 먹여주시고 입혀주시고 인도해 주셔서 오늘 여 기에 까지 이르를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세상과 환경 을 바꾸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 음을 믿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합니다. 미신적이라고 생각하실는지 모르나 저는 아이들이 수양회를 할 때 날씨를 위하여 기도 하고 길이 막혀서 중요한 약속 시간 에 늦게 될 경우는 시간에 늦지 않 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게 해달라 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 세상 과 환경 보다 더 중요한 사람을 바 꾸시고 변화시키시는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삭개오를 변화 시키시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변화 시키시는 능력이 주께 있음을 믿습니다. 다말과 라합과 룻 그리고 밧세바를 변화시켜 예수님의 족보에 오를 만큼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시 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바 로 능력이 나 같은 사람을 목사가 되게하여 하나님의 귀한 사역자가 되게하셨음을 저는 믿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어도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지 않습니 다. 하나님께는 십자가상의 강도를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하시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구원은, 기쁨과 감 격이 넘치는 천국의 생활은 환경이 바뀔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 리 사람이 거듭나고 변화할 때 이루 어지는 것입니다.

자기만 사랑하던 사람이 하 나님과 세상과 이웃을 사랑할 줄 아 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악 한 사람이 선하게 세상 욕심으로 무 절제한 생활을 하던 사람이 경건하 고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 바뀌 어 질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이 하나 님께 있으며 그와 같은 변화가 정말 우리의 삶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 꾸어 놓는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구원의 능력이 주께 있음을 저는 믿 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세상의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 상은 우리에게 재미와 편안함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에게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주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 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 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하나님의 능력은 믿음의 생 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 믿음의 생활을 오늘 본문은 경건 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 건한 믿음의 생활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경건한 생활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쉽게 기도와 말씀과 찬송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찾는 자에게게 찾게 하시고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문을 열어 주 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였습니 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능력을 간증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기도 에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찾을 수 있 습니다. 기도하면 세상의 그 어떤 문도 열 수 있습니다. 기도에 하나 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사람의 심령 골수를 쪼개 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은 이 우주 만물의 식입니다. 식을 세우면 답은 저절로 나옵니다. 길을 찾으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시 간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 들은 도를 닦고 철학을 하였던 것입 니다. 도를 닦음은 길을 찾음으로 철학을 함은 삶의 식을 찾고자 함이 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찾던 그 식과 길이 바로 말씀안에 있습니다. 말씀이 곧 길이고 말씀이 곧 식입니 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때로는 어렵고 힘들지만 그러나 말씀대로 살면 결국 모든 삶의 문제가 풀립니 다. 저는 말씀이 능력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씨름을 할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을 저는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사탄은 말씀대로 살다가믄 밥굶기 딱 좋다 고 우리를 속이지만 아닙니다. 그렇 지 않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 력은 말씀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기를 원하신다면 말씀 에 집착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속에서 길을 찾고 말씀 속에서 식을 찾을 실 수 있기를 바 랍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읽고 듣고 암송하고 묵상하며 공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 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에 감동 하며 감동할 때 그리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 때 천지를 창조하 신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줄을 저는 믿습니다.

찬송에 능력이 있습니다. 경건의 능력을 이야기할 때 찬송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찬송을 빼놓 고 경건의 능력을 이야기 한다는 것 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뜨겁고 은혜 스러운 찬양을 사모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한국 교회가 이 찬양을 통하여 다시 살아 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찬양 이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을 교회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저는 앞으로 전문목회를 하 려고 합니다. 내년부터 전문목회가 시작될 것입니다. 저는 목회에 은사 가 있는 여러분들과 함께 교회를 목 회하고 싶습니다. 제가 함께 동역하 려고 하는 목회자는 저에게 없는 은 사를 가진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기도의 은사가 있는 동역자 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교구 관리 와 심방에 은사가 있는 동역자가 있 었으면 좋겠습니다. 구제와 봉사에 은사가 있는 동역자도 필요하고 선 교에 은사가 있는 동역자도 필요합 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제가 간절 히 바라고 기도하는 동역자중에 하 나는 찬양에 은사를 받은 목회자입 니다. 찬양만 전문으로 하는 사역자 가 능력있는 교회를 위하여 절대적 으로 필요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 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 다. 비록 우리는 약하지만 그래서 이 강하고 무서운 세상에서 늘 넘어 지고 실패하는 존재들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모든 부족한 것 을 채우시고 모든 잃어 버린 것들을 찾게 하시며 모든 닫힌 문들을 열게 하시는 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경건한 생 활을 통하여 우리의 것으로 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생활을 통하여 말 씀의 생활을 통하여 찬양의 생활을 통하여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 나님의 능력에 접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와 같 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 고 세상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 저들이 당하는 고통을 그대로 당하 면서 사는 까닭이 무엇인줄 여러분 아십니까? 오늘 본문은 그것을 경건 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 어서 그렇다고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신앙이 너무 형식적이어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너무 건 성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씀입니 다.

하나님을 믿으십시다. 하나 님만 믿으십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좀더 진지해지고 정직해 지십 시다. 그리고 좀더 간절해 지십시다. 좀더 깊은 기도에 들어가십시다. 좀 더 깊은 말씀에 들어가십시다. 좀더 깊은 찬송에 들어가십니다. 경건의 모양만 갖추지 말고 경건의 능력을 경험하십시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면 모르나 그렇지 않다면 이왕 믿는 하나님께 인생을 걸고, 생명을 걸고 매달리십시다. 하 나님의 능력을 구하십시다. 사모하 십시다. 그리하여 경건의 모양만 있 는 교인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소유한 축복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 다. 그리하여 그 하나님의 능력의 증인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