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언약의 일군(고린도후서 3:6) 프뉴마(영) & 그람마(의문, 문자, 율법)




새 언약의 일군(고린도후서 3:6)

새번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πνεῦ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151

1. 불기.   2. 바람.  3. 숨 내쉬기
발음 [ pnĕnuma ]

어원  /  4154에서 유래
γράμ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1121

1. 알파벳의 글자.   2. 문서.  3. 편지
발음 [ gramma ] 
어원  /  1125에서 유래


새 언약의 일군 

- '돌비와 심비'의 대조(3절)가 '율법과 복음'의 대비를 나타낸다는 것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바울은 자신을 '새 언약의 일군'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옛 언약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적대자들과 자신을 뚜렷이 구별시키고 있다.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 '의문'(그람마)은 본래 알파벳의 '문자'를 나타내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점차 `기록된 것' 즉 '문서'나'책'을 의미하는 말로 발전되었다. 
이 말이 본문에서 뜻하는 바는 '율법'이라고 할 수있다. 
반면 '영'(*,프뉴마)은 썩어질 육과 대비되는 `영혼', 혹은 '생명'을 뜻하며 본문에서는 `복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바울은 본문에서 '의문'과 '영'이라는 상징적 개념을 통해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비시키고 있음을 알수 있다. 
우리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들을 다음과 같이 구체화 시킬 수 있다. 

(1) 적응 대상에 있어서. 
옛 언약은 육적 이스라엘(출 19:5, 6)에 적용됨로써 민족적 한계를 갖는 반면, 새 언약은 영적 이스라엘, 즉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됨으로써 민족적 한계를 넘어선다. 

(2) 언약의 성립 과정에 있어서. 
옛언약은 하나님께 대해 순종을 맹세하고 피의 희생제사를 드림으로써 성립된 반면, 새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의 제물이 되심으로써 성립되었다. 

(3) 언약을 수행하는 방법에 있어서. 
옛 언약은 행함으로 하나 새 언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한다(롬 10:9, 10;히 10:39). (4)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언약의 결과에 있어서. 
옛언약은 죽음을 낳지만 새 언약은 생명을 낳는다. 따라서 옛 언약에 대해 새 언약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히 시간적인 차이를 넘어 완전한 질적 차이를 가진다. 한편 혹자는 본문의 '의문'과 '영'을 '인간적인 것'과 '신적(神的)인 것'의 대비로 이해하기도 한다(Barrett). 전자는 삶의 중심을 인간에 둠으로 인해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되고 후자는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둠으로써 생명을 얻는것이다. 또한 칼빈(Calvin)은 '의문'이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외적인 설교'를 뜻하고, '영'이란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사람의 마음 속에 실제로 작용하는 '생명력있는 가르침'을 뜻한다고 본다.




고린도후서 3장 1–18절
중심 구절 : “우리가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함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라” (고후 3:5)

우리는 때때로
“나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자격이 있을까?”
“내가 과연 복음을 전하고, 누군가를 섬길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의 부담과 주저함을 느낍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자신이 어떤 증명서나 추천서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새 언약 안에서 역사하시는 증거로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떤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인지,
그리고 새 언약의 일꾼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1. 진정한 추천서는 사람의 편지가 아니라, 삶입니다 (1–3절)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너희에게 시작하겠느냐
혹은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붙이거나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1절)

바울은 자신을 의심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내 추천서는 바로 너희다.”

  • 바울의 사역이 남긴 가장 큰 증거는 변화된 성도들의 삶이었습니다.
  • 그들은 먹으로 쓴 글이 아니라,
    성령으로 새겨진 살아 있는 편지
    였습니다. (3절)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자격증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편지입니다.

2.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4–6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느니라.” (5절)

바울은 사역자로서의 자신감과 능력이 자기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분명히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정의합니다.

  • 옛 언약은 돌에 새겨졌고, 죽이는 역할을 했지만,
  • 새 언약은 성령으로 새겨져 사람을 살리는 사역입니다. (6절)

우리는 율법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생명을 전하고 변화시키는 복음의 일꾼입니다.

3. 영광이 더 큰 새 언약의 사역을 맡았습니다 (7–11절)

바울은 모세가 돌판을 들고 나왔을 때 그 얼굴에 나타났던 옛 언약의 영광을 언급합니다.
하지만 그 영광은 잠시였고, 사라질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즉 성령의 사역

  • 더 큰 영광을 가지며,
  • 점점 더 밝아지고,
  •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사역입니다.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나니…
이 영광은 더 넘치는 영광이라.”
(8–9절)

오늘 우리도
이 영광의 사역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비록 연약하지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러운 복음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4. 우리는 담대하게, 그리고 열린 얼굴로 주님을 바라보며 변화받는 자입니다 (12–18절)

“우리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2절)

  •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 율법의 그늘 아래 머물지도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난 뒤 자신의 얼굴에 수건을 썼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건 없이, 하나님을 직접 바라보며 변화되어 갑니다. (18절)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며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18절)

복음은 단지 ‘지식’이 아니라,
우리를 점점 더 예수님 닮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적용 /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 나는 사람에게 인정받는 추천서를 구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 나의 삶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편지가 되고 있는가?
  • 복음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전하고 있는가?
  • 성령의 역사로 날마다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을 보고 쓰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으로 세우십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새 언약의 일꾼이다.
이 사명은 내 힘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감당하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나의 부족함과 한계를 뛰어넘어 복음의 편지로 살아가고,  예수님의 형상으로 점점 변화되어 가는 새 언약의 일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님,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으로 세우시고 복음을 맡겨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나의 자격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가 되게 하옵소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날마다 주의 형상으로 변화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역사 이래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해왔습니다. 
과연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찰스 다윈은 인간을 가리켜 “고등한 존재이지만 본질적으로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고 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인간을 “경제적 동기에 의해 조작되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인간과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찰스 다윈의 주장은 인간을 동물과 같은 광기로 만들었고, 칼 마르크스의 주장은 인간을 물질로 전락시켰습니다.

다윗은 시편 8편에서 광대 불변한 자연 앞에 무력감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무엇이관대”(What is man)”, “인자가 무엇이관대(What is the son of man)”를 물었습니다. 
그는 인간이란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쉽게 더럽혀지고, 쉽게 상처받고, 쉽게 넘어지고,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성도를 어떤 존재로 보았습니까? 
바울은 성도를 그리스도의 편지,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새 언약의 직분의 영광스러움을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우리는 새 언약의 직분의 영광스러움을 알아 영광스러운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1.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1-5)

고린도교회에는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고 비방하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미혹하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습니다(고후 3:1). 그들은 어떤 추천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파 출신 교사들로(행 15:5),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추천서가 없는 바울을 비방하고 그가 전한 복음까지 의심을 품도록 했습니다(고후 2:17). ‘추천서(recommendation)’란 권위가 있는 기관이나 이름 있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으로 사람들에게 공인되고 보증하는 증표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도로서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믿음이 어린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과 구원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은 추천서를 보낼 필요도 없고 받을 필요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2-3)

바울 자신은 추천서가 없지만 너희가 우리의 편지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편지를 즐겨 쓰지 않지만 전에는 편지를 즐겨 썼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서 소식을 전하고 자신의 마음을 전달했습니다. 제 아내는 지금도 그러하지만 이전에는 선교사님들과 형제자매들에게 편지를 많이 썼습니다. 그 우편요금도 꽤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를 우리의 편지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성도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소식,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신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 것은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간 생명을 바쳐서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심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그들의 마음판에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심을 새겼습니다. 또한 바울의 마음판에 고린도교회의 개척사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이름과 기도 제목과 그들의 변화된 모습이 일일이 다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바울의 마음에 기록된 그 편지로 바울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추천서는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먹으로 종이나 돌판에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추천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마음판에 쓰여 있었습니다. 이 편지야말로 바울이 사도임을 확실하게 보증하는 추천서였습니다.

단체나 기관이나 사람이 써주는 추천서는 100% 믿고 신뢰할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가짜가 너무 많고 과장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가짜 신분증을 들고 다니며 사칭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돌판에 쓴 추천서는 세월이 흐르다보면 풍화작용에 의해 희미해지거나 사라지고 또 깨질 수도 있습니다. 모세의 십계명은 돌에 새겨졌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다시 시내 산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육의 마음판에 쓰인 편지는 성령으로 각 사람들의 마음판에 쓰인 것이기 때문에 깨지거나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추천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로마서 16장 1절을 보면 바울은 겐그리아에 있는 뵈뵈 자매를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보낼 때 추천서를 써서 보냈습니다. 때로는 추천서도 필요합니다. 선교사를 파송할 때 선교사 패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추천서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써 주신 살아있는 추천서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무는 속일 수 있지만, 그 열매는 속일 수 없습니다. 바울이 전한 구원의 열매가 바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선교사들은 추천서 문제로 무시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거의가 평신도 선교사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보다 추천서를 가지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1990년대 황돈연 선교사가 수교도 되기 전에 유학생 선교사로 파송 받아 러시아의 재원인 물리학과 레나 자매를 비롯하여 많은 모스크바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기숙사에서 2,30여명이 러시아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기관에서 파송된 목사는 황돈연 선교사를 꼭 황돈연씨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황선교사는 신학교를 나오지 않았고 또 목사 안수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선교사들의 추천서는 그들이 맺는 성령의 열매, 구원의 열매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함부로 추천서를 써주시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 받고 추천서를 써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헌금을 많이 낸다고 추천서를 써주시지 않습니다. 스팩이 좋다고 추천서를 써주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과 신앙의 인격과 삶을 보시고 써주십니다. 사람들이 써 주는 추천서는 조금만 노력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는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 받고 분명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추천서를 써주십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추천서라고 확신했습니다(고후 3:4-5). 바울은 그의 추천서가 자신의 능력과 자격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나의 능력과 자격, 그리고 사람이나 기관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면 사람이나 기관 앞에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기관이나 조직이 깨지게 되면 자격과 능력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확신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환경과 상황을 넘어서서 변함없이 주님께 충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격과 능력도 영원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아름다운 삶과 복음 증거를 통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너는 분명 예수님을 믿는 성도다.” “너는 주님께 진짜 헌신하는 집사다.” “너는 양무리를 돕는 정말 목사다.” “너는 진짜 선교사다”라는 그리스도의 편지요 주님의 추천서를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 새 언약의 일꾼(고후 3:6-18)

첫째, 새 언약(고후 3:6)

바울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새 언약의 일꾼으로 삼으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습니까?

“그가 또 우리를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후 3:6)

우리가 새 언약의 일꾼이 된 것은 율법 조문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인함입니다. ‘율법 조문’은 의식과 율법을 가리킵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입니다(갈 3:24). ‘초등교사’란 헬라 시대에 주인의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후견인으로서 책임을 맡았던 전문노예를 말합니다.

바울은 이 용어를 율법에 적용하여 율법의 역할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신령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이 연약하여 거룩한 율법을 지킬 힘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를 통해 한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선을 행하고자 하지만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절망의 늪에 빠져 ‘누가 나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의 순간에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감사 찬양이 나왔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7:24, 8:1-2)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나 생명을 주는 성령의 세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성령은 항상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나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새 언약의 기원은 예레미야 31장 31-34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달리 돌판에 기록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판에 기록합니다. 또한 새 언약을 믿을 때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게 됩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성만찬을 하실 때 포도주 잔을 그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하)

옛 언약에도 죄를 사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정결한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면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일시적이고 불완전하여서 죄를 지을 때마다 번거롭게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옛 언약의 제도는 구원역사의 모형으로서 장차 올 참된 것의 그림자였습니다.

새 언약은 짐승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피는 아무 죄가 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피이기 때문에 죄 사함의 효과가 완전하고 영원합니다(히 9:12). 베드로는 예수님의 피의 효력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이제 우리는 죄를 지을 때마다 번거롭게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를 지을 때마다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를 힘입어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죄를 진실하게 회개하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셨음을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새 언약은 십자가의 보혈의 피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가기만 하면 어떤 몹쓸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다 용서해 주십니다. 나의 지은 죄가 중하고 추하여서 내가 어느 정도 씻고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여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눈과 같이 양털 같이 희게 해주십니다(사 1:18).

둘째, 새 언약의 일꾼(고후 3:7-11)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새 언약의 일꾼의 영광이 어떠합니까?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후 3:7-9)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십계명을 들고 내려왔을 때에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이 영광은 곧 없어질 영광이었습니다. 모세의 직분은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이었습니다(출 34:29-30). 사람들은 이런 직분을 가진 모세를 감히 주목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물며 사람을 살리는 영의 직분은 얼마나 영광스럽겠는가를 감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하면 요즘 유명한 목사들처럼 존경을 한 몸으로 받으며 복음을 전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추천서가 없다고 사도로 인정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노예들이나 하는 천막을 만들며 복음을 전하는 무명의 전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내면에는 새 언약의 직분의 영광으로 인해 감사와 찬양이 흘러 넘쳤습니다.

바울은 이 직분이 영광스럽고 귀하기 때문에 이 직분을 감당하기 위하여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습니다(고전 4:13).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행 20:24). 이를 위해 몸을 던져 충성했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이 직분은 죽은 영혼을 살리고 영생을 얻게 하고 영원히 살게 하는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직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직분입니다.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고후 3:10-11)

세상에는 영광스러운 직분들이 많습니다. 한 나라를 통치하는 대통령의 직분도 영광스럽게 보입니다. 시장이나 구청장이나 국회의원의 직분도 영광스럽게 보입니다. 그리고 직장의 장도 영광스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이런 직분에 오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직분들은 죽어가는 사람의 영혼을 살리고 의롭게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직분들은 영광이 풀의 꽃과 같아서 얼마 못가서 시들고 맙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직분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치가 있고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새 언약은 사람을 살리고 의롭다 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새 언약으로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고 더 나아가 사람을 살리는 새 언약의 직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를 찬송가 저자는 천사도 흠모하는 귀한 직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새 언약의 일꾼의 복(고후 3:12-18)

일꾼이 누릴 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첫째는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자기 얼굴의 영광이 결국에는 사라져 없어질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도록 수건을 썼습니다. 이는 백성들이 율법의 한계를 알게 되면 율법을 순종하지 않게 될 위험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지금까지 이 사실은 알지 못하고 율법의 영광이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고 율법을 사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과 강박감, 또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으로 인한 죄의식에 늘 시달렸습니다. 이러한 율법에 대한 매임은 그리스도께로 돌아갈 때만이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고후 3:17).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죄와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십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율법의 수건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면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점점 변화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를 의미합니다. 성화의 절정은 영화입니다. 우리는 점점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예수님이 재림하실 최후의 날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광스러운 희망을 바라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 언약의 일군입니다. 
우리는 이 귀한 직분을 귀히 여기어 주님이 오시는 날에 영화롭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