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신자를 위한 카톡 성경 용어 정리



예배(禮拜)


1. 한문자의 의미
- 예절 예(禮), 절 배(拜)

예를 갖추어 절하는 것

2. 헬라어의 의미
- 라트레이아(Latreía, Λατρεία)

봉사(service, worship), 복무

λατρεία, ας, ἡ 2999 1. 섬김, 2. 예배,

요한복음 16:2

발음 / 라트레이아(latrĕia) 

어원 / 300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섬기는 일, 예식(요 16:2, 히 9:6), 예배(롬 9:4, 12:1), 섬기는 예법(히 9:1).
신약 성경 / 5회 사용
예배의 정의

예배(Worship)라는 말은 ‘가치(Worth)있는 지위’(신분, Ship)에게 적절한 영광과 존경을 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예배는 오직 창조주(創造主)시며 구속주(救贖主)되신 하나님께만 그 합당한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 찌어다.”(시 96:8)라고 하였다.
이를 기초로 레이번 교수는 “예배는 진실로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와 존귀와 찬송과 사랑과 복종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으로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려드리는 수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런즉 기독교의 예배는 타종교에서 행해지는 인간의 욕구 충족과 의식(儀式)적인 예배와는 다르다.
기독교는 예배의 대상이 확실하며 예배를 드려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

약속을 변개하고 식언(食言)하는 불완전(不完全)한 인간이나(민 23:19), 아무 이성 없는 짐승 또는 밝혀지지 않은 어떤 외계적(?) 존재가 결코 인간의 예배 대상이 될 수 없다.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빚으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 되신다. 모든 만물이 다 하나님께 예배하며 찬송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당연한 창조 질서(秩序)요 법칙(法則)이다. 그런즉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사람 된 그 존재적 의미를 바로 찾는 것이요, 창조주의 그 창조 목적을 바로 실현하는 일이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 지어다. 할렐루야!”(시 150:6)

성경적 예배 용어

성경에서 예배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표현에 차이가 조금씩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에는 거의 일맥상통하고 있다.

구약에 나타난 예배 용어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곁에 나타났을 때 아브라함이 “몸을 땅에 굽혀 영접한다.(창 18:2), 저희가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영접한다.(창 18:2), 욥이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욥 1:20) 등에 사용된 단어 ‘샤하이’(Shahai)는 ‘굴복하다’, ‘머리 숙이다’, ‘엎드린다’는 뜻으로 구약에만 120회 이상 나온다. 이는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행위를 나타냄으로써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순복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섬긴다는 뜻의 ‘아바드’(Abad)는 예배가 단순히 어떤 예식이 아닌 전(全) 생애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삶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렇듯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종(에베드)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곧 예배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뜻은 ‘봉사 한다’, ‘섬긴다’라는 말이며 이런 의미에서 유대인의 종교생활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일관되었다.

신약에 나타난 예배 용어

프로스퀴네오(Proskuneo)
– 신약에 약 60회 정도 나온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 받으실 때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고 하신 말씀과 또 예수께서 수가 성(城) 여인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라고 말씀하실 때에 사용된 단어이다. 그 뜻은 ‘무릎 꿇다’, ‘허리를 굽힌다’ 등의 존경을 표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라트레이아(Latreia) – 이는 예수께서 “다만 그 분만 섬기라.”고 말씀하시며 유혹하는 사단에게 최종 선언하실 때 사용하신 말이다. 이 말은 ‘종으로서 자신의 상전만을 섬겨야 할 신분’을 나타낸다.

레이투르기아(Leitourgia) – 일반적으로 예전(禮典) 또는 의식(儀式)과 관계되며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을 섬기고(빌 2:30), 예루살렘 교회에 연보로 섬기는 일(고후 9:12), 그리스도인의 구제(롬 15:16,27) 등이 바로 ‘레이투르기아’로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봉사(奉事)를 뜻한다.

호모로기아(Homologia) – 이는 죄의 고백과 찬양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 가운데 시인(是認, Confess)이 이에 해당된다.

교회적 예배 용어

워십(Worship)

이 말은 ‘존경과 존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자’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최고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의와 권위를 인정할 때 사용되는 이 말은 영국에서 시장(市長)을 호칭할 때 ‘Your Worship’, 미국에서 ‘Your Honour’등으로 쓰이는 것에서 그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이 말이 종교적 용어로 예배를 지칭할 때는 바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경의와 권위가 함축되는 것이다.

컬트(Cult)

라틴어에서 유래한 종교의식을 나타내는 용어로 “어떤 것을 숭배한다.”는 의미와 이교적 배경의 주술적 요소가 있다. 이 말이 기독교에서 는 거의 외형적 예배 의식을 나타내며 주로 로마 가톨릭의 형식적(形式的)이고 의식적(儀式的)인 면에 사용되고 있다. 한 마디로 제의(祭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전통적인 종교 의식뿐 아니라 심지어 이단 종파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워십’보다 ‘컬트’는 정형화된 어떤 예배의 틀과 형식을 생각하게 한다.

리터지(Liturgy)

예전적(禮典的) 의미를 가리키는 용어로 예전(禮典)을 나타내며 예배의 대부분이 미리 정해진 절차에 의해 드려져야 할 것임을 가리킨다.
세례식, 성찬식 등의 어떤 예식을 가리킬 때 이 용어를 사용하는데 보다 넓은 의미로는 예배의 모든 것을 의미할 때도 있다.

예배의 신학적 의미

기독교의 예배는 항상 하나님과 연관하여 이해되고 또 집행되어야만 한다. 예배가 곧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존경과 찬송을 드리는 것이므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 방법을 알지 못하고서는 바른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의 신학적 원리를 정립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미의 ‘코람 데오(Coram Deo)’가 종교개혁의 한 구호가 된 것은 바로 이 예배 신학적 원리를 적시한 말이다.

– 오직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신 여호와 하나님

선지자 이사야는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사 40:25)라고 하였다. 또 주님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0)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어떤 것으로든 제한될 수가 없다는 뜻으로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할 때에 오직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에 집중해야 함을 말한다. 이는 하나님만 바라고 기대하고 나아가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듣고 받아서 그대로 행하는 것으로 그 삶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즉 예배 의식이나 예배당은 마음을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향하게 하는 수단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창조주시며 구속주(救贖主) 되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신전(神前) 인격의 삶을 사는 것이다.

– 예배 자는 오직 구속함을 입은 백성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예배자의 요건을 말한다. 또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자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고 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인 예배 자가 믿음이 없이는 참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또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요 4:24)라고 할 때 이는 예배자로서 요건(要件)을 말한다. 곧 예배는 아무렇게 멋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하신 원칙(原則)을 따라 드려야 됨을 말한다. 이방인의 예배는 예배자의 필요와 감정이 기준이 되지만 기독교의 예배는 ‘하나님 중심’이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오직 구속(救贖)함을 입은 자들만이 드릴 수 있다. 곧 그 안에 하나님의 영(靈)이 있는 자(롬 8:9)들이 드리는 예배다. 예배자의 필수 요건은 대략 다음과 같다.

-믿음(히 11:6 롬 14:3)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고백(요일 1:9 눅 18:3) 하나님은 자기 죄를 고백하는 세리와 같은 자를 찾으신다.
-회개(막 1:15 시 51:17) 하나님이 구하시는 예배는 통회하는 심령의 예배이다.
-기도(엡 3:15 시 17:1) 하나님은 정직한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
-청종(약 1:21 마 8:8) 말씀을 듣는 것이 곧 예배의 중심이다.
-찬양(엡 5:19 시 51:15) 여호와를 찬양함이 예배의 처음이요 끝이다.
-감사(시 50:23 엡 5:20) 여호와의 구속과 섭리를 감사함이 예배의 기초이다.
-거룩(시 96:9 레 19:2)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예배자도 거룩해야만 한다.
-화목(마 5:23,24) 예배하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목해야만 한다.
-희생(고전 5:7 히 9:26) 그리스도의 희생이 없이는 예배가 성립될 수 없다.

-구속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는 예배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신령과 진정’은 ‘영’(in spirit)과 ‘진리’(in truth)라는 말이다. 사마리아 인들은 지식이 없이 마음으로만 드리는 예배를 드렸고, 유대인은 지식은 있었지만 신령이 없는 예배를 드렸다.(요 4:22) 참된 예배가 되려면 신령과 진리로 드려야 한다. 신령과 진리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였다. 기독교에 있어서 진리(眞理)란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 또 ‘신령(神靈)’은 그리스도의 영(靈, 하나님의 영, 성령)을 말한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靈)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 8:10)고 말씀하였다.

그런즉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from) 예수님을 통하여(through) 하나님께(unto) 드리는 예배이다. 예컨대 오직 예수의 영(성령)을 가진 자들만이 드릴 수 있는 예배가 바로 기독교의 예배인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는 말씀은 곧 예수를 통한 받으심 직한 예배를 지적함이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통한 예배 행위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의 대속의 죽으심, 부활, 승천, 재림을 통한 죄 사함과 영생 그리고 영원한 천국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며(信望愛) 그 말씀에 응답’하는 삶을 말한다.

 예배의 정의

이 같은 모든 의미를 종합해 볼 때 성경적 의미의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자존적(自存的) 자세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창조주만을 섬겨야 할 의존적(依存的) 존재라는 사실을 시인하고, 그 합당(合當)한 대상(對象)이신 하나님에게 경배와 복종의 생활이 자기 삶의 근본이 됨을 표시하는 것이다.

예배 신학자 깁스(Gibbs)는 예배를 정의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감사한 마음이 넘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영혼이 쉼을 누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훈(Paul Hoon)은 “기독교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람의 응답이다.”고 하였고 헉스터블(Huxtable)은 “예배는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의사소통이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알아 그 하나님께 감사(感謝)와 사랑(愛情)을 표시하며 자신을 하나님 앞에 헌신(獻身)하는 것이다.

즉 개혁교회의 예배는 “지존 무상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榮光)과 위엄(威嚴)과 존영(尊影)과 거룩의 본질적 가치 앞에 피조물이 엎드리고, 따르며, 섬기게 하고 그 말씀에 충성(忠誠)을 맹약(盟約)하며,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번 주간에는 "믿음"에 대한 주제로 소개합니다.
11월 8일(월) -

첫째, 믿음이란 무엇인가?

1. 한문자의 정의

한자로 믿음을 "믿을 신(信)"이라고 합니다.
"신(信)"이란 한자를 파자(破字)하면 "사람 인(人)"과 "말씀 언(言)"의 합성어 입니다.

믿음이란 "사람이 말씀과 결합된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말씀과 결합된 것을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에서 살펴봅니다.

좁은 의미는 "사람과 사람의 약속"을 말합니다.
이때 약속은 "언어(言語)"와 "문서(文書)"라는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넓은 의미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약속"을 말합니다.
이때 약속은 "하나님의 말씀(聖經)에 대한 사람의 동의(同意)"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16장 31절에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말씀을 믿는 것(同意)입니다.


2. 신약의 언어 헬라어의 정의

헬라어로 믿음이란 단어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피스티스(pistis. πίστις)"라고 합니다.
'피스티스'란 "믿음" "신실성" "엄숙한 약속"이란 뜻으로 성경에서 사용됩니다.

예를 들면 차를 몰고 어느 한적한 시골길을 가는데 마침 할머니 한 분이 머리에 짐을 짊어지고 걸어갑니다.
차를 멈추고 할머니에게 "어디로 가세요?" 물어봅니다.
마침 할머니가 가려는 목적지가 같은 방향이라며 차에 태웠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여전히 머리에 짐을 얹고 있습니다.
"왜 머리에 짐을 이고 계세요? 내려 놓으세요"
그러자 할머니는 "나 혼자 타고 가는 것도 미안한데 어떻게 짐까지 태웁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자동차에 올라탔으면 짐은 자연히 내려놓아야 하지만 자동차의 용도를 잘 모르면 이런 우스개 이야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나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3. 믿음의 생활화

세상은 믿음이 없으면 한 순간도 생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하철을 탈 때에도 지하철이 안전하게 운행 될 것을 믿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없이 이용합니다.
수도물을 사용할 때도 누군가 블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죽이려고 수원지에 독극물을 뿌렸다는 의심을 하면 수도물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비행기에 오를 때에도 비행기가 안전하게 운항 할 것을 믿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좌석에 앉아 그 긴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세상은 각자 맡은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안전하게 유지됩니다.
이런 세상을 좋은 사회라고 합니다.
반면에 나쁜 세상은 서로 믿을 수 없는 관계가 팽배할 때 나타는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경(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성실하고 정직해야 한다고 깨우칩니다.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언 11:1)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다니는 안개니라."(잠언 21:6)

"한결 같지 않은 저울 추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잠언 20:2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디모데후서 3:13)

(적용과 현실)


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세상으로부터 멸시를 받는가?
믿음을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마치 기도하면 성공하는 비결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믿음은 내가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성공하도록 돕는 것이다.

믿음이란 "신행일치(信行一致)" 라고 한다.
신행일치란 믿는 것과 행동하는 것 즉 믿는 것과 생활하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아주 오래 전 이야기라고 합니다.
뉴욕주와 카나다의 국경 근처에 유명한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지요.
독일의 유명한 서커스 단원 찰스 브론딘이란 사람이 폭포 위에 외줄을 걸어놓고 공중곡예를 보여준다고 하여 수 많은 군중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찰스 브론딘이란 공종 곡예사가 손에 긴 장대를 잡고 중심을 잡아가며 외줄을 건넜습니다.
수 많은 군중들이 환호하며 그의 곡예에 손벽을 치며 열광했다고 합니다.
그때 곡예사가 군중들에게 "이번에는 내가 사람을 업고 이 줄을 건너려고 합니다. 정말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군중들은 열렬히 환호하며 "당신을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다"며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곡예사는 맨 앞에서 할 수 있다며 소리치는 한 노인에게 "그러면 당신이 나와 함께 이 일을 해 봅시다" 라고 말하자 그 노인은 "나는 나이가 많아 중심을 잘 잡을 수 없다'고 하였답니다.
이번에는 젊은 사람에게 제안을 하였더니 그 젊은이도 "나는 아직 할일이 많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찾으라"고 합니다.
곡예사가 군중들에게 다시 묻기를 "여러분, 정말 내가 사람을 등에 업고 이 외줄을 건너갈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라고 질문하였을 때 모든 군중들은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하며 외쳤다고 합니다.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느 누구 한 사람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지요.
결국 곡예사는 그의 메니저에게 "이제 우리가 보여주어야 합니다. 내가 의자를 등에 묶고 당신을 앉힐터이니 당신은 내가 시키는대로만 하면 됩니다." 하고 그의 메니저와 함께 외줄타기를 마쳤다고 합니다.
모여 있던 군중들의 한결같은 환호성은 점점 더 커져만 갔습니다.

곡예사의 외줄타기를 보는 것은 좋아하면서도 맡겨야 할 때는 맡기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라고 하겠지요.
믿음이란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에는 목숨도 포함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목숨만은 하고 맡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목숨이 그만큼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소중한 목숨을 맡길 수 있을 때 그것을 온전한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주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을 주옵소서.
내가 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이 찾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11. 09. 2021(화)

두 종류의 무신론자

1. 신을 부정하고 믿지 않는 자
2.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자

세상은 신을 부정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이 없는 삶을 떳떳하게 살아가는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저런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면, 나는 차라리 예수를 믿지 않겠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믿음'은 장식품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적기 위한 신앙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의 방식을 당당하게 유지하는 것이 "믿음"이 아닐까요?

오늘도 믿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둘째, 믿음에 관한 동영상 자료

1. 믿음이란 무엇인가?


2. 믿음의 세 가지 요소
이승구교수
믿음의 세 가지 요소

첫째, 믿음의 내용(notitia)
  1. 사도신경
  2. 이신칭의(以信칭의)

둘째, 동의(assensus)
야고보서 2:19


셋째, 신뢰(fidusia)
복음 사건에 나를 던져 넣는 것

믿음은 역동적이다.
성경은 믿음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믿게 하므로 믿을 수 있다.




3.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는다고 착각하는 사람의 차이

유기성목사 / 예수님에게 입 맞추라
입을 맞추는 것은 아주 친밀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
죄 사함을 받았다!
이런 수준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입을 맞추는 것

무신론자
첫째,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
둘째,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자

믿는 사람의 표정

4.


5.


6.


7. 하나님은 존재하시는가?
보이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거들 / 공기,
하나님은 영적 존재이므로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