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칠언(架上七言)



가상칠언(架上七言) The Seven Words

A.D. 33년 4월 초순 금요일 일기 화창한 어떤 봄날 예루살렘성 밖으로 세 사람의 십자가의 죽음 행렬이 엄숙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목적지는 히브리말로 골고다요, 아람어로 된 말을 해석하면 해골이란 동산인데 여기까지 와서 각자가 메고 온 십자가에 이 세 사람을 달았습니다.
그 중에 중앙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본질에 대한 조직신학적 고찰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구속사 전체를 관통하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이는 단순한 형벌의 도구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언약적 구속의 정점이다.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십자가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 인간의 타락, 언약의 성취, 그리고 구속의 적용이라는 큰 구조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이 역사 가운데 실현된 사건이며, 교회는 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구원이 어떻게 만나는지를 해석해왔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단지 고난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자비가 충돌하며 완전하게 화해된 은혜의 자리이다.

1. 삼위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의 십자가

십자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이 영원 전에 계획하신 구속 사역의 중심에 있다. 에베소서 1장 4절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말씀한다. 이는 단지 인간의 반응에 따라 계획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작정된 영원한 언약(pactum salutis)에 따른 것이다. 이 언약 안에서 성부는 구속을 계획하시고, 성자는 구속을 성취하시며, 성령은 구속을 적용하신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성자의 독립적 고난이 아닌, 삼위 하나님의 연합된 사역의 성취이다.

특히 성자의 순종은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나뉘는데, 십자가는 그의 수동적 순종의 극치이다. 필립보서 2장 8절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선언한다. 이 복종은 단지 외적인 고난을 감내한 것이 아니라, 죄 없으신 분이 율법의 저주 아래 들어가신 사건이다. 성자는 인류의 대표로서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행하셨고, 그 결과로 십자가에서 모든 죄값을 단번에 치르셨다.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역할 분담 속에서 우리는 구속의 섭리가 하나님의 내적인 본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작정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십자가는 그 작정의 시간 속 실현이다. 창세 전부터 준비된 이 구속의 방식은 인간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으며, 인간의 지혜로는 결코 예측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은혜의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사랑과 공의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롭게 나타난 사건임을 증명한다.

2. 인간의 타락과 십자가의 필요성

조직신학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전제로 한다. 이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전 인류가 원죄 아래 있으며,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교리이다. 로마서 3장 10절 이하의 말씀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이러한 절망적 상황 속에서, 십자가는 유일한 구원의 길로 나타난다.

아담 안에서 인류 전체가 죄 가운데 빠졌으며, 이 죄는 단순한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 존재의 문제이다. 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시켰고,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존재는 외부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생명에 이를 수 없다. 여기서 구속의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이 되셔서, 그분이 마련하신 방법으로 구속을 이루시는 것이다.

십자가 없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될 수 없으며, 죄인은 결코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 죄에 대한 형벌은 반드시 집행되어야 하며, 그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하셨다는 사실은 십자가의 필연성을 말해준다. 이는 대속적 속죄(substitutionary atonement)의 교리이며,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핵심 진술이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실 수 있지만, 공의로운 방식으로만 그 용서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비가 단순히 감정적 동정심이 아니라, 공의의 기준을 만족시키며 나타난 사랑임을 드러낸다.

3. 십자가와 언약의 성취

구약 성경 전체는 메시아적 언약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하신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라고 증거한다. 이는 신명기 21장에서 말하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율법의 선언을 그리스도께서 친히 감당하신 것을 말한다.

언약의 성취로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도구이며, 동시에 그 약속의 성격을 규명하는 계시적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언약의 중보자로서 자신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셨다. 히브리서 9장 15절은 "이는 죽으심으로써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한다. 이처럼 십자가는 단순한 고난의 순간이 아니라, 구속사의 전환점이며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이 극대화된 지점이다.

언약적 배경에서 십자가는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닌, 영원한 언약의 실현이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쪼갠 짐승 사이를 홀로 지나가심으로 인간의 책임까지 자신이 짊어지셨던 장면은 십자가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와 언약의 신실함을 위하여, 친히 자신을 찢기게 하셨다. 이는 전 우주에서 단 한 번 일어난, 완전한 사랑과 공의의 표현이다.

4. 십자가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나타난 사건이다. 로마서 3장 26절은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죄를 단순히 용서하지 않으시고, 공의의 기준을 만족시키면서 죄인을 의롭다 하신다는 점이다.

이때 나타나는 것이 화목제물(hilastērion) 개념이다. 이는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는 희생 제사를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제물로 드려지셨다는 것이다. 헬라어 단어 hilastērion은 구약 성소의 속죄소와 동일한 단어로, 이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임재와 진노 사이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사건ㄴ임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에 죄를 무시할 수 없으나, 동시에 사랑이시기에 죄인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이 두 속성이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 장소가 바로 십자가이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이 십자가를 통해 계시되었음을 의미하며, 단순한 인간 중심의 구원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구속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 감상적인 차원을 넘어서, 희생적이며 철저히 거룩한 사랑으로 드러난다. 이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겁고도 실재적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동시에 드러낸다. 이 사랑은 단순한 허용이 아닌,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죄인을 품으시는 사랑이다.

5. 십자가의 적용과 성화의 근거

십자가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 신자의 삶에 실재하는 능력이다.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자에게 적용하신다. 이는 칭의와 더불어 성화를 이루는 근거가 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고백하며, 신자의 존재가 십자가와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신자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를 위하여 사는 삶으로 전환된다. 이 변화는 단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 자체의 변화이며, 이는 십자가와 연합함으로 가능하다. 십자가는 신자의 삶에서 자기 부인의 근거가 된다. 이는 단순히 감정적 헌신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옛 자아의 죽음을 포함한 존재적 변화이다.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참된 회개는 날마다의 죽음과 부활을 포함하며, 이는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또한 십자가는 고난 중에도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로마서 8장은 십자가에서 시작된 사랑이 어떤 것도 끊을 수 없음을 선포한다. 신자는 세상의 고난 속에서도 결코 버림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는 영광의 여정을 걷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결언(結言)

조직신학적으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서 이루어진 언약의 성취이며, 구속의 중심 사건이다.
이는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일치하는 지점이다.
십자가신자의 삶과 신앙,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기반이 된다.
신자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자신이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를 기억하고, 그 사랑에 응답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십자가는 삼위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성취된 구속의 중심이다.
이는 인간의 전적 타락에 대한 유일한 해결이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완전하게 만나는 자리이다.
신자는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고, 십자가를 따라 살아가며, 십자가 안에서 생명과 소망을 얻는다.


가상칠언(架上七言)

04-14-2025(월)

제1언 / 용서와 간구(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용서(容恕)라는 한문자의 의미를 소개합니다.
용서라는 한자의 훈(訓)은 “얼굴 용(容)”“용서할 서(恕)”라고 합니다.
얼굴이란 “담는다”는 의미이며, 용서는 “같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한문자의 용서는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고난주간 월요일을 지내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심으로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은 죄인이었던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고난주간 월요일의 기도
다섯 손가락 중에 엄지 손가락은 “으뜸”을 의미합니다.
음뜸이 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나라의 으뜸이 되는 대통령을 위하여!
국회의 으뜸이 되는 국회의장을 위하여!
법원의 으뜸이 되는 대법원장을 위하여!
행정부의 으뜸이 되는 국무총리를 위하여!
가정의 으뜸이 되는 가장을 위하여!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지만 지도자로 세워주신 목사를 위하여!
각자의 직장에 머리를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며 고난주간 월요일을 신앙적으로 맞이합시다.

04-15-2025(화)

제2언 / 구원의 선언(누가복음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Jesus answered him, "I tell you the truth,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두 강도가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두 강도의 이름을 외경에서 “디스마”와 “게스다”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어느 편 강도가 구원을 받았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오른편 강도가 구원을 받았다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마지막 때에 오른 편에 양의 무리들을 왼편에 염소의 무리들로 구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25:33).

용서의 선언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받은 삶을 고백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삶의 모습을 양과 염소의 습성에서 소개합니다.
더운 여름철이면 양들을 뿔뿔이 흩어져서 지내고 추운 겨울이 되면 모두 한몸이 되듯 밀착하여 긴 겨울밤을 보낸다고 합니다.
반면에 염소는 양들처럼 지내는 것이 좋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지만 상대방이 시원하고 상대방이 덥게 지내는 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여름에는 악착같이 달라붙고 겨울철에는 멀찍이서 지낸다고 합니다.

염소의 성질머리가 참 고약합니다.

죄를 용서받지 못한 인생은 염소와 같이 이기적인 삶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용서 받았기 때문에 양과 같이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삶을 좋아합니다.

구원받았다는 감격을 구원받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믿음으로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고난주간 둘째날 화요일을 맞이하여 두 번째 손가락 검지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검지는 무엇을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리켜야 할 거리의 교통 경찰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공의로운 판단으로 시시비비를 가리쳐야 할 법관들 판사와 검사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과 교수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교회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교사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가정에서 자녀들을 가르치는 부모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이렇게 기도하며 고난주간 둘째날 화요일을 즐겁게 살아봅시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가상칠언, 십자가상의 일곱 마디. ​
가상칠언 架上七言.  the Seven Words
예수께서 죽음 직전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

​1.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가상칠언 제1언 / 용서(容恕)와 간구(懇求)

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Jesus said, "Father, forgive them, for they do not know what they are doing." And they divided up his clothes by casting lots.

1. 용서의 사전적 의미

한자의 용서(容恕)에서 容은 얼굴 용(容)이란 훈으로 ‘담다’는 의미라고 하며, 恕는 용서 할 서(恕)라는 훈으로 ‘같은 마음’ 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용서의 한문자적 의미는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용서를 ‘놓아 줌,’ ‘죄를 면하여 줌,’ 또는 ‘꾸짖지 아니함’이라고 정의합니다.

2. forgive 의 어원적 의미

forgive에서 for 는 ‘전적으로(completely),’ give(고대 영어 giefan)는 ‘주다’를 뜻하여 forgive는 ‘전적 시여(全的 施與)' 또는 '완벽하게 주는 것’을 말합니다.

라틴어 “perdonare”, 독일어 "vergeben", 프랑스어 "pardonner"는 영어의 풀이와 같은 뜻을 갖습니다. 

따라서 용서의 의미는 ‘유보 없이 전적으로 주는 것(to give completely, without reservation),’ 즉 ‘벌주고자 하는 욕망도 힘도 포기한다’는 의미로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3. 논어에 나오는 서(恕)

공자의 여러 제자들의 모였을 때 "자공(子貢)"아 스승에게 질문하였지요.  
"선생님, 평생을 두고 마음에 담아 실천할 만한 좌우명 하나가 무엇인가요?"
자공의 질문에 공자님은 "그것은 바로 서(恕)니라"고 곧 대답하시면서 ‘상대방이 원치 않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子貢이 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잇가 子曰 其恕乎인저 己所不欲을 勿施於 人.

공자와 그의 제자 사이의 질문과 응답은 차원 높은 혜안적인 통찰이었지만 그러나 용서를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덧부친 말도 부정적 어휘가 사용되어 있어서 소극적이다.

4. 용서의 신학적 의미

(1) 아담 타락 이래 인간은 죄인으로 전락되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의인은 없나 니 하나도 없나니”(롬 3:11; 시 14: 1-2)에서 보듯이 인간에게는 죄인이라는 낙 인이 찍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용서의 길을 마련하셨다. 흔히 ‘잘못은 인 간이 저지르지만,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 (To err is human. to forgive, divine.)이라는 격언이 이를 압축하여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2) 히브리어에서 용서를 두고 세 개의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즉, 'kipper(덮다),' 'nasa(죄책을 짊어져 없이하다),' 'salah(용서하다)이다. ‘나사’는 하나님이나 인간 의 용서에 사용되었으나 나머지 두 개의 단어는 하나님의 용서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헬라어에서는 4 개의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곧, 'apolyein(ἀπολύω, 마 5;31; 눅 6:37), charizesthat(χαρίζομαι, 눅 7:21, 엡 4:32), paresis(πάρεσις, 롬 3:25 ‘간 과함), 및 aphesis 이다. 마지막 단어 aphesis(ἄφεσις)가 신약성경에서 가장 일반 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용서를 두고 사용되고 있다.

(2) 용서의 원천-엡 1:7

죄 용서를 주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고후 12:13; 골 2:13).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ἄφεσις)을 받았느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죄 용서는 그리스 도의 보배로운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온다(히 9:22, 26; 롬 4:25).

본문에서 ‘죄 사함 ἄφεσις’ 는 “해방, 면제, 용서”를 뜻한다.

하나님의 용서는 칭의 메시지이다. 엘렌 화잇 여사는 죄 용서를 ‘오로지 하나님 께서만 하시는 용서’로 진술하고 있다(SC 37; 9T 63). 이 하나님의 용서는 인류 모두에게 주어진 객관적, 보편적 칭의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는 인간 편의 죄의 자복, 회개라는 조건이 달려 있다(눅 17:3-4).

“죄인을 위하여는 한 길 밖에 없다. 신실한 회개와 죄의 고백, 깨끗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믿음이 용서를 가져달 줄 것이며”(2T 293).

용서의 조건성은 인간의 선택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3) 인간 사이의 용서- 엡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 안에서 너희 를 용서함 같이 하라.” -> “서로”에 비추어 용서는 상호적이어야 한다.

용서는 자기에게 잘못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태도, 물론 상대방의 죄된 행동을 정당화시켜 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정죄하는 태도를 버리고 잘못하였음에도 불구 하고 친절하게 대하여 주는 것이다.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 아니다. 이 용서는 공동체 내 안식, 관계 회복 및 치유를 일으킨다.

“용서라는 것은 피해자의 의도적인 노력이다. 그것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 다.”(안교 교재 제3기 제7과))

용서는 저지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다. 용서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계속해서 그 잘못을 저지르도록 묵인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란 우리의 억울함과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 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서로 용서하는 일을 랍비들의 3회에서 7회로 확대 제안하였지만, 그리스 도께서는 70번의 7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여 그 범위를 무제한으로 확대하셨다. 햇볕이나 비를 의인이나 악인에게 골고루 내려주시는 예를 제시하기도 하셨고, 심 지어는 원수까지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마 7:12). 이는 공자님의 부정적 언어로 제시한 己所不欲 勿 施於人을 넘어선 적극적이고 긍정적, 진취적이어서 유교 윤리를 뛰어 넘는 특성을 보여 주고 있다.

(4) 주기도문에 나오는 용서기도

마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 옵고”(6:12)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셨으니 우리도 형제의 죄를 용서하여야 한다.

“사하다”는 ἀφίημι (aphie-mi)는 “내보내다, 버려두다, 용서하다. 가게하다, 보 내버리다, 취소하다, 탕감하다, 용서하다”의 뜻이다.

누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 시고”(12:4 ).

(5) 주의 기도문의 용서기도에 있어서 선행성 이해

두 기도문의에서 하나님의 사죄와 인간의 사죄 중에 어떤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가?

㉠ 마 6:12 마태의 기록은 분명히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근거로써 제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용서에는 인간의 용서라는 선행적 조건성을 함축하고 있다.

㉡ 눅 12: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이 번역에는 마치 “우리가” 용서의 주체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 점이 있어 보여 2인층 단수 능동태인 αφες의 주어 “주께서” 또는 “당신께서”가 잘 안 보인다.

누가는 ἀφίημι의 2인층 단수 2aorist 능동태 명령법, αφες를 사용하고 있다. 따 라서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여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시역>

“우리에게 우리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그 때에 진실로 우리도 우리에게 죄를 지 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겠나이다.”

<원문>

και αφες ημιν τας αμαρτιας ημων και γαρ αυτοι αφιεμεν παντι οφειλοντι ημιν.

이 본문에 나오는 και γαρ를 ‘그리고 진실로’로 번역 이해가 가능하다. ‘γαρ’는 ‘then, indeed, since, for’를 뜻한다.

2인층 단수인 “주께서”가 주어가 되어 용서의 원천이 되고 인간 용서에 선행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용서의 선행성이 명확하여지기 때문이다.



일언은 '용서(容恕)와 간구(懇求)',
주님께서 십자가의 그 고통 중에서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군병과 인류의 죄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인류의 구원과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님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분입니다.
구약에는 아버지란 말이 없으나 예수님은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우리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주기도문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도는 아버지가 두 분이십니다.
육신의 아버지와 영혼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은 사랑의 인격적 참여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게 될 때 내 모든 문제는 해결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 번째 말씀은 용서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난 인간에 대한 심판의 집행인 동시에 용서인 것을 압니다. 구약 시대 사람이 죄를 지으면 자신의 죄를 대신할 제물을 성막에 가져갔습니다. 죄인은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각을 떠서 제사장에게 드립니다. 제사장은 더러운 것을 제하고 모두 제단 위에 올려놓고 번제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번제와 속죄제는 직접인 죄를 사하는 제사입니다. 소제는 감사, 화목제는 감사와 평화를 위한 제사입니다. 모든 제사들은 직접적으로 다른 목적을 갖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화평하고, 죄 용서에 대한 감사를 전제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처음 하신 말씀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중보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용서해 달라고 한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하고 따랐던 사람들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류를 말합니다. 자신을 배신한 제자들, 자신을 채찍질하고 모욕한 로마군사들, 지나가면서 조롱한 행인들과 구경꾼들가지 포함합니다. 심지어 자신을 십자가에 넘긴 유대관원들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한 빌라도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원수가 누구입니까? 그는 단순한 괴롭힘의 주체가 아닙니다. 존재의 부정과 멸망으로 이끌고 가는 모든 사람들과 환경까지 포함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용납은 아닙니다. 그들의 폭력과 비방을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죄성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죄는 대항하지만, 죄인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아버지라는 부름에도 유의해 봅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주기도문에서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는 친밀함과 아들됨의 표지입니다. 구하기 전에 먼저 준비되어야할 것은 관계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아들의 자격으로 죄인들을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용서에 대한 기도는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며, 기꺼이 용서하실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구하는 기도는 모두 응답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간구의 전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누가복음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Jesus answered him, I tell you the truth,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이언은 '구원', 오른편 강도에게, 십자가 위에서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한 오른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서도 주님께서는 영혼을 사랑하시고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영혼이 들어갑니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고백할 때에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었던 강도가 낙원을 허락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씀을 오해하여 구원이 똑 같은 구원이라고 생각하면 자신의 인생을 살면서 많은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 중 구원에 관한 말씀은 크게 초대 손님으로서 구원과 하나님의 신부로서 구원을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양쪽에 달린 두 강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양쪽에 십자가에 달리고서도 그 죄를 깨닫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림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절)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진심이면 얼마나 다행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에 보면 비방하였다고 했습니다.
객관적이요, 비판적이요, 야욕적인 말이었으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현재도 십자가를 신앙적으로, 주관적으로, 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강도처럼 비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지금도 강도처럼 죽어가면서도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비방하는 자가 많습니다.
고난과 십자가에서는 선한 말이 나오기 힘든 모양입니다만 중앙에 계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고 구세주임을 알았다면 구원을 호소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강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2언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눅 23:43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두 번째 말씀은 ‘약속’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낙원을 약속한 강도가 한 때 주님을 조롱했다는 것을 압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두 명의 강도 중 한 명이 도중에 비방하기를 멈추고 예수님을 변호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의탁했습니다. 주님은 강도를 용서하고, 낙원을 허락하십니다.

행악자(κακοῦργος)라고 표현된 헬라어 단어는 ‘범죄자’ ‘강도’ 등을 뜻하지만, 이들은 반란을 위해 살인한 자들입니다. 당시 로마는 극악무도(極惡無道)한 살인자와 국가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두 부류의 죄인들은 십자가형을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이유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의 왕이 아님을 빌라도에게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왕이기 때문에,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십자가형을 당한 것입니다.

행악자의 간청을 들어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그가 어떻게 ‘당신의 나라’라고 말했을까요? 제자들을 비롯한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한 ‘나라’는 육적인 나라이며, 로마의 압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회개한 행악자는 죽어가면서 ‘당신의 나라’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 새로운 영적인 세계를 발견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돌아섰습니다. 이 땅의 것들로부터 벗어나 바로 곁에서 죽어가는 예수님께로 돌아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발견입니까? 한 행악자는 아직도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비방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다른 사람은 구하면서 왜 너는 네 자신을 구하지 못하느냐?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합니다. 자연인의 관점입니다. 그들이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현실 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그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강도는 영적인 눈을 떴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즉각적으로 반응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게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천국은 지식적인 장소가 아니가 아닙니다. 거듭난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니고데모처럼 거듭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만 볼 수 있습니다.






3. "여자여 보소서 아들 이니이다 ··· 보라 네 어머니라"(요한복음 19:26~27)

  •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 When Jesus saw his mother there, and the disciple whom he loved standing nearby, he said to his mother, "Dear woman, here is your son,"
  • and to the disciple, "Here is your mother." From that time on, this disciple took her into his home.


  • 제3언은 "효도(孝道)"에 대한 외침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 중에서도 메시아로서 십자가 위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시는 아들의 고통을 바라보시는 어머니를 생각하시고 위로하시며 효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 사도에게 “내 어머니 네 어머니”라고 말씀 하시며 어머니를 요한 사도에게 모시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요한 사도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잘 모셨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들이 있었지만, 열 두 제자 중,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했었고, 사랑의 사도이었던 요한에게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시고 계시는 삼 언의 말씀이 확인하여 주십니다.
    즉 부모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과 같이 자녀로 살면서 보이는 육신의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을 인정하고, 알 수 있으며, 부모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만 하나님의 말씀에도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가운데 손가락 중지(middle finger) 기도를 합니다.



    세 번째 주님의 눈동자가 집중된 것은 여기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계신 곳입니다.
    25절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클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등 네 여인이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울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면서 부탁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격은 여인입니다.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게 되어 남편에게 송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제 예수님을 먼저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한없는 슬픔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3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27)

  •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 When Jesus saw his mother there, and the disciple whom he loved standing nearby, he said to his mother, "Dear woman, here is your son,"
  • and to the disciple, "Here is your mother." From that time on, this disciple took her into his home


  • 바울은 놀랍게도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약속이 있는 첫 계명’(엡 6:2)으로 말합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1-3)

    바울이 첫 계명이라 말한 것에는 사람과 관련된 첫 계명으로서 부모 공경을 말합니다. 십계명의 1-4 계명은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오직 하나님께만 향한 계명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계명은 하나님을 섬기라는 첫 계명에 종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구체적으로 구분한다면 다섯 번째 계명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첫 계명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부모에 대한 계명에 약속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근거를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한다’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문제는 간음과 살인, 탐욕의 계명보다 앞선다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만큼 부모에 대한 공경의 문제는 물러설 수 없는 중요한 문제로 보았습니다. 또한 다른 계명에 비해 약속을 더하심으로 의미를 가중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곁에 요한이 있는 것도 봅니다. 주님은 입을 열어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여자(Γύναι)란 단어는 결혼한 여자나 여성을 높여 부르는 존칭입니다. 여자라는 번역은 그리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쨌든 주님은 마라아를 부르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숨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인 시기에 어머니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아무 감정도 없는 그런 초월적 존재로만 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육신을 입었으며, 여자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체휼(體恤)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피곤하고, 배고프고, 슬픈 감정을 느끼십니다. 인간이 가진 아픔과 고통을 직접 체험하셨습니다. 또한 죽어가는 아들을 보며 고통스러워하는 육신의 어머니가 갖는 고통을 이해하십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낳아 할례를 받으러 갔을 때 시므이는 마리아에게 칼이 마음을 찌르듯 아플 것이라고 예언합니다.(눅 2:35) 예수의 육신적 어머니가 지고 가야 할 고통의 짐입니다. 주님은 이 모든 아픔을 아시며, 마리아를 위로하며 요한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부모 공경하기를 멈추지 않는 주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저는 가끔 야고보와 같은 동생들이 있는데 왜 요한일까? 궁금한 적이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직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동생 야고보보다는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했던 요한에게 마리아를 부탁한 것은 잘 한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맡은 것은 짐이지만 영광스러운 짐입니다. 우리는 종종 주의 일을 감당할 때 영광을 보지 못하고 무게만을 봅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을 들어 영광의 무게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친동생이지만 어머니를 맡길 수 없는 야고보인지, 마음 편하게 맡길 수 있는 요한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어떤 존재입니까?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 : 46, 마가복음 15:3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은 시편 22:1절을 인용하셨는데,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아람어로 예수님은 일상적인 언어로 아람어와 히브리어를 같이 사용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성경 전체에서 가장 신비로운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견디고 있었기 때문에 영원 전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성부의 사랑과 성부와의 교제에서 끊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편 22:1을 인용하시면서 아마도 승리의 외침으로 바뀌는 이 시편의 나머지 내용(시 22:21~31)도 염두에 두셨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믿음을 표현하며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왜 자신이 죽어 가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말할 수 없는 고뇌에서 비롯된 절규였습니다. 죄 없는 자가 정죄를 당하고 허물없는 자가 박해를 받으며 은혜 베푸는 자가 잔인하게 죽어가는 일이 역사상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홀로 지시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시는 순간 주님으로서는 매우 심각한 세 시간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주님은 세상에 대하여는 더 할 말씀이 없고 성경에 응하기 위한 말씀을 하실 뿐이었습니다. 이런 절규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


    4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 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About the ninth hour Jesus cried out in a loud voice, "Eloi, Eloi, lama sabachthani?"--which means,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주님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말씀하십니다.
    언뜻 보면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읽어 보십시오.
    입술로 되뇌어 보십시오.
    저도 한동안 이 말씀이 이해되지 않아 몇 번을 읊조려 보았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하고 나니,, 예수님의 음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 죽여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요?

    주님은 철저히 버림받았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겠다는 장담도 허공에 흩어져 버렸습니다.
    끝까지 주님을 지키겠다는 다짐도 아침이슬처럼 사그라졌습니다.
    자신들의 구차한 목숨을 위해 주님을 버린 것입니다.
    고독, 소외, 배신이 주님을 엄습했습니다.
    이 모든 모습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보고 계십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으며, 광대합니다.
    우리의 작은 마음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버렸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왜 나를 버리십니까?’
    ‘저를 버리실 만큼 죄인들이 가치가 있습니까?’
    그렇게 묻습니다.
    그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해 봅시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아들과 맞바꿀 만큼 제가 가치 있는 인간입니까?”

    이곳에서 마태는 아들을 버리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아버지의 역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버리고 죄인을 구하는 광인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신비이며, 아이러니입니다.
    아들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어야 한다며, 주님의 외침을 들을 때 우리는 영원한 침묵으로 일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커서, 내가 과연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야 합니다.

    1.예수님 날 위해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

    2.손과발 날 찢기셨네 왜 날 사랑하나?
    고난을 당하여 구원했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

    3.내 대신 고통을 당하셨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 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

    목요일 : 약지손가락(Ring finger) 기도, 속죄제의 삶

    약지는 손가락 중에서 힘이 가장 약한 손가락입니다.
    병든 분들, 여러 가지 일에 실패한 분들, 삶의 형편에 지쳐서 믿음이 연약해진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한 주간 살아오면서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일이 없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속죄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5. "내가 목마르다" ( 요한복음 19:28 )

    ​내가 목마르다 하심, 십자가 위에서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께서는 목이 타고 어지러우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목이 타도록 목이 마르셨기에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생명수를 먹게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2:1-2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입증하고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심은 곧 목마른 인생을 부르시는 뜻도 있습니다. 인생은 어디서 무슨 물을 마셔도 그 심한 갈증을 해소할 길 없으나 주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한 갈증을 해소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 : 1).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 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5언 내가 목마르다(요 19:28)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말씀입니다. 동일한 사건이지만, 마태복음에서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는 순간, 인간으로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만 생각하려 하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목마름은 당연한 것입니다. 채찍질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몸에서 피와 수분이 빠져나갔습니다. 주님의 목마름은 죽기보다 더한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고통을 당하셔야 합니까?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워하시기 위해 친히 육신을 입었고, 율법 아래에서 나셨습니다. 자기를 비하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주님의 피할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영지주의자들과 같은 이단들은 예수님은 인간과 같은 육신을 입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가현설이라는 주장을 통해 육신이 아닌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의 사랑의 하나님이 악한 육신을 입을 수 없다는 것들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이들의 주장은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먼저 참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대표하는 속죄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고통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의 고통은 가짜가 됩니다.

    정말 주님은 가짜 몸을 가지셨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실제로 목말랐습니다. 그 누구보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주님의 고통을 거짓으로 만들려는 악한 자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요한은 주님의 목마름을 강조하여 우리를 위하여 친히 고통당하셨다고 강조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며,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사 53:5) 주님의 고통은 우리의 고통이며, 주님의 아픔은 우리의 아픔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목마름을 묵상하면서 잊지 말아야한 진정한 목마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육신의 고통을 통해 우리의 고통을 대신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그 고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목마름은 그동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구속에 대한 목마름이었습니다. 주님의 목마름은 육신의 목마름을 넘어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죄인들이 주님 당신을 통해 구원되는 일이 일어나기를 갈망하고 기대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목마름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목마름입니다. 첫 사람들이 범죄 했을 때, 주님은 가죽옷으로 그들의 수치를 가리셨습니다. 또한 여인의 후손을 통해 뱀의 머리가 상하게 될 것을 예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목마름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영혼들이 구원 받기를 갈망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헤아릴 수 없는 목마름이셨습니다.


    6. "다 이루었다" ( 요한복음 19 : 30 )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고 율법을 십자가에 죽으시는 아가페 사랑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시고 인류를 죄와 사망과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해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가죽 채찍으로 서른 아홉 대의 매를 맞으셨습니다. 가죽 채찍 끝에는 다섯 갈래의 가지가 있고 그 가지마다 낚시와 같은 쇠고리가 달려 있어서 가죽 채찍이 살에 닿을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터져 엉켜 붙었습니다.

      또한, 가시관을 쓰신 머리와 대못에 박힌 양손과 양발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무지한 군병의 창에 옆구리를 찔리셔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의 옷은 군병들이 제비 뽑아서 나누어 가졌고, 벗기운 채로 주님은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계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죄도 없으시면서 가장 죄 많은 자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입니다. 그가 하실 일을 이제 다 이루신 것입니다.


    6언 다 이루었다(요 19:30)

    완전한 성공을 이룬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까요? 사람의 성공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살다 보면 실수하기도 하고,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죄를 짓기도 합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꾼 꿈을 완전히 이루기를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주님의 형편을 보십시오. 무엇을 이루었단 말입니까? 제자들은 배신하고 도망갔습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로마의 속국이며, 종노릇 합니다. 악은 여전히 강력한 힘과 권력을 가지고 세상을 지배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계십니다. 누가 봐도 실패한 인생이며, 어떻게 생각해도 제대로 성공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대체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갈 때 ‘영광을 얻을 때가 되었다’(요 12: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압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고난의 길이며, 죽음의 길입니다. 주님은 죽음을 향하여 하루하루 한 발자국 밟고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신 것, 그것은 대속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죽음은 저주 받은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으로 살리는 역설적 죽음입니다. 주님을 오래전 광야에서 들렸던 놋뱀을 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이 하늘에 닿아 하나님은 불뱀을 보냈습니다.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 속에 죽어갔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놋뱀을 만들어 높이 세 우라 하셨습니다. 놋뱀을 본 자마다 살아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놋뱀처럼 높이 들려졌습니다. 나무에 달려 모든 사람들이 보이는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 위에 달리셨습니다. 주님은 죄의 상징이자, 율법의 저주를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홀로 받으셨고, 죄인들이 받아야할 고통과 죽음을 친히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보는 자들은 살아날 것입니다.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의 성공은 사람들이 보기에 명백한 실패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은 언제나 생명을 멸함으로 받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관점으로 이해할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만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감추인 보화처럼 저주와 죽음 속에 자유와 생명이 숨겨져 있습니다. 주님은 실패로 향해 나아갔고, 죽음을 향해 전진했습니다. 모함을 피하지 않았고, 배신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의 광기를 그대로 받았습니다. 세상의 죄와 질병을 안고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든 것을 끝내셨습니다.


    요한복음 헬라어 성경말씀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성경 원어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대속해 주셨는데 특히 선택받은 백성의 죄를 구속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들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헬라어 성경 원문의 단어는 '테텔레스타이'입니다.
    이것은 아무 흠도 없는 것들을 말할 때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무 흠도 없고 죄도 없는 완전한 분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구속의 완성을 완전하게 이루셨습니다.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헬라어(5055, 텔레오) 끝내다 bring to an end, 끝나다 finish, 완성하다 complete, 수행하다 carry out, 성취하다 accomplish.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텔레오(Homer. 이래)는 헬라어 텔로스(5056)에서 유래했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텔레오는 ① 자신의 뜻이나 다른 자의 뜻을 '수행하다', 계획과 목적에 따라 '실행하다, 행하다',

    ② 말한 것을 '수행하다', 약속을 '이루다(성취하다)',

    ③ 가르치는 일을 '수행하다', 군사들의 명령을 '수행한다'를 의미한다. 입법자의 법령이나 하나님의 뜻, 기도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b) 텔레오는 '끝에 오다, 끝나다', 예를 들면 년 수에 대해 사용되었다.

    (c) 텔레오는 '의무를 이행하다'.

    (d) 텔레오는 종교 행위, 예를 들면 '실행하다'를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제사를 드리다', 제사장으로 '봉사하다'를 나타낸다. 다른 의미로는 마술을 '행하다'이다.

    2. 70인역본의 용법

    텔레오는 70인역본에서 약 30회 나오며, 8개의 히브리어 단어들 중 주로 칼라(끝나다, 끝내다, 성취하다)의 역어(7회)로 사용되었다(2:21; 3:18; 삼하 22:39 등). 이 동사는 수동태에서 종교적 술어로 '자신을 헌신하다'를 의미한다(예: 바알 예배에 대해, 25:3; 25:5; 105:28; 4:14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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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신약성경의 용법

    텔레오는 신약성경에서 2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바울 서신.

    고후 12:9에서 텔레오는 '완성에 이르다'를 의미한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실제적 능력인 그리스도의 능력은 약한데서 '완성에 이른다'. 이는 '참으로 효력 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5:16에서 성령의 반대되는 뜻을 텔레오, 즉 '실행하는 것'을 금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2:27에서 텔레오는 '목적이나 끝에 이른다'는 의미에서 '완수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율법을 완수하는 것):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딤후 4:7에서 자신의 행로를 완성하는 것을 나타낸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13:6에서 텔레오는 '세금을 바치다'는 뜻을 지닌다: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b) 공관복음들.

    ① 마태복음의 특징적인 점은 텔레오가 편집 구절들에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다"라는 마태의 공식적인 문구가 5개의 위대한 교훈적 강화들을 종결짓고 있다(7:28; 19:1; 26:1; 11:1; 13:53).

    10:23(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동네들의 끝에 이르기 전에 재림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다)과 12:50(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세례, 즉 자신의 고난[참조: 10:38]이 완성되기까지 큰 근심 중에 계신다)에서 텔레오는 '끝까지 견디다'는 의미를 지닌다.

    ③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텔레오가 수동태로 2회 사용되어 성경의 성취를(18:31; 22:37; 참조: 13:29) 나타내고 능동태로 1회 사용되어 율법의 이행을 나타낸다(2:39).

    (c) 요한의 기록들.

    19:30에서 텔레오는 예수께서 성취하여야 하는 아버지의 일들에 대하여 말하는 곳에서 사용된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그 일들이 완성되었다고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어졌다) 말씀하셨다.

    19:28에서 텔레오는 성경이 성취되는 것에 대해 사용된다: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참조: 22:18).

    (d) 요한계시록에서 텔레오는 '완료하다' 또는 (수동태로) '완료되다'라는 의미로 6회 사용된다. 11:7은 증거의 완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15:1은 하나님의 진노가 완성되는 세상의 7가지 마지막 재앙들을 알린다: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참조: 8절).

    20:3; 20:5; 20:7은 천년 왕국의 종말에 대해 3번 말하고 있다: "3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7 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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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717:17은 하나님의 비밀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됨을 다룬다: 10:7,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17: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전에 결정하신 바가 성취되는 것이다(참조: 18:31; 22:37).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RP Byzantine Majority Text 2005
    Ὅτε οὖν ἔλαβεν τὸ ὄξος ὁ Ἰησοῦς, εἴπεν, Tετέλεσται· καὶ κλίνας τὴν κεφαλήν, παρέδωκεν τὸ πνεῦμα.

    아래 테이어 사전을 보면 이 동사의 원형은 τελέω 텔레오 입니다.
    테텔레스타이완료분사 직설 중간수동태 3인칭 단수입니다.
    그래서 앞에 테 는 완료시제를 나타내는 접두어입니다.
    이미 완성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무언가가 이미 완성이 된 것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구속입니다.

    아래 사전과 같이 이 단어의 첫째 의미는 완성을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일을 끝마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작한 일을 완성한 것을 말합니다. 두번째 의미는 성취한 것을 의미합니다. 임무를 수행한 것을 의미합니다. 충족시킨 것을 의미합니다. 세번째 의미가 갚은 것을 의미합니다. 값을 치룬 것을 의미합니다.

    http://biblehub.com/text/john/19-30.htm

    Thayer's Greek Lexicon

    STRONGS NT 5055: τελέω

    τελέω, τέλω; 1 aorist ἐτελεσα (cf. Winer's Grammar, § 13, 3 c.); perfect τετέλεκα (2 Timothy 4:7); passive, present 3 person singular τελεῖται (2 Corinthians 12:9 L T Tr WH); perfect τετελεσμαι; 1 aorist ἐτελέσθην; 1 future τελεσθήσομαι; (τέλος); from Homer down;

    1. to bring to a close, to finish, to end: ἔτη, passive, passed, finished, Revelation 20:3, 5, 7 ((so from Homer and Hesiod down; Aristotle, h. a. 7, 1 at the beginning, p. 580{a}, 14 ἐν τοῖς ἔτεσι τος δίς ἑπτά τετελεσμενοις); τριῶν τελουμενων ἡμερῶν, Lucian, Alex. 38); τόν δρόμον (Homer, Iliad 23, 373, 768; Sophocles Electr. 726), 2 Timothy 4:7; τούς λόγους, Matthew 7:28 L T Tr WH; ; τάς παραβολάς, Matthew 13:53; (ἄχρι τελεσθῶσιν αἱ πληγαί, Revelation 15:8); a rare use is τέλειν τάς πόλεις, i. e. your flight or journey through the cities (R. V. ye shall not have gone through the cities, etc.), Matthew 10:23 (similar are ἀνύειν τούς τόπους, Polybius 5, 8, 1; τά ἕλη, 3, 79, 5; consummare Italiam, Flor. 1, (13) 18, 1; explere urbes, Tibull. 1, 4, 69; conficere aequor immensum, Vergil Georg. 2, 541; also xii., signorum orbem, Cicero, nat. deor. 2, 20, 52); with the participle of a verb (like ἄρχομαι, παύομαι, cf. Winers Grammar, § 45, 4 a.; Buttmann, § 144, 14), Matthew 11:1.

    2. to perform, execute, complete, fulfill (so that the thing done corresponds to what has been said, the order, command, etc.), i. e. α.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subject-matter, to carry out the contents of a command": τόν νόμον, Romans 2:27 (cf. Winer's Grammar, 134 (127)); James 2:8; τήν ἐπιθυμίαν (i. e. τό ἐπιθυμουμενον), Galatians 5:16. β. with reference also to the form, to do just as commanded, and generally involving a notion of time, to perform the last act which completes a process, to accomplish, fulfill: ἅπαντα (πάντα) τά κατά νόμον, Luke 2:39; τήν μαρτυρίαν, the duty of testifying, Revelation 11:7; τό μυστήριον, passive, Revelation 10:7 (cf. Winer's Grammar, 277 (260)); τό βάπτισμα, passive, Luke 12:50; πάντα, passive, John 19:28 (the distinction between τελέω and τελειόω may be seen in this verse); τούς λόγους (τά ῤήματα) τοῦ Θεοῦ, passive, Revelation 17:17; ἅπαντα (πάντα) τά γεγραμμένα, Acts 13:29; passive, Luke 18:31 (see γράφω, 2 c.); with ἐν ἐμοί (in me) added, in my experience, Luke 22:37; ἐν πληγαῖς, in the infliction of calamities, Revelation 15:1; τετέλεσται (A. V. it is finished) everything has been accomplished which by the appointment of the Father as revealed in the Scriptures I must do and bear, John 19:30. equivalent to τελειόω, 2, which see (made perfect): 2 Corinthians 12:9 L T Tr WH.

    3. to pay: τά δίδραχμα, Matthew 17:24; φόρους, Romans 13:6, (τόν φόρον, Plato, Alc. 1, p. 123 a.; τά τέλη, often in Attic writings). (Compare: ἀποτελέω, διατελέω, ἐκτελέω, ἐπιτελέω, συντελέω.)







    7.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누가복음 23:46 )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음, 생명, 영혼 모두를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우리도 생사화복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사언부터 칠언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모습을 말씀 하시고 계시는 것으로 인생을 살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과 같이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야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이전의 시기를 사는 인생이 버림받은 것과 같이 느껴지고, 갈증이 끝없이 느껴지는 시기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믿음 안에서 끝까지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을 순종적으로 산 사람은 후회 없는 삶을 살았기에 자신에게 맡겨진 삶을 모두 성취한 것이며, 이후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준비하시고, 정하신 때를 따라서 이루실 것을 믿는다고 선포하시고 계시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 생명, 영혼 모두를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생사화복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와 생명과 부활과 영생을 얻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뤄지고 하나님 나라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새 예루살렘과 새 하늘과 새 땅인 하나님 나라로 인도 하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열매를 찾으실 때 성령의 열매를 보여드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을 성령이 임하실 수 있도록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권능과 주님의 보혈로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하심으로 성결케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기도하시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사단과 이단과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구원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구원을 받아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인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란 말씀을 즐겨 사용하셨으니 산상설교 가운데서 17번, 유월절 다락방에서 45번(요 14, 16장), 요한복음 17장에서 6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에서 마지막 말씀을 아버지로 끝맺으셨습니다. 아버지란 명칭은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자신을 갖게 하는 이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들은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해도 아버지 손에 맡기고 부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체로부터 분리되려는 찰나에 있는 그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7언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가장 강하신 주님께서 가장 약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반항하지 않았고, 요동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를 구원할 물과 피를 흘리시고 운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마지막 운명하실 때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는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 손에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무력하고, 무능해 보이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 주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압니다. 병든 자를 치유하였고,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이셨으며, 말씀만으로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무덤을 향해 가던 관을 손을 얻자 과부의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돼지 속에 있던 군대 귀신을 쫓아냈고, 폭풍이 부는 물 위를 걸었고, 삼킬 듯이 공격하는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셨습니다. 주님의 행하신 기적은 셀 수도 없고, 다 기억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강하시고 위대하신 주님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무능은 사람의 어떤 능력보다 위대합니다. 주님의 약함은 인간의 강함보다 더 강력합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영혼을 절대 능력이신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보다 강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천사도, 죽음도, 높음도, 깊음도 그 어떤 것도 주님의 손에서 빼앗지 못합니다. 가장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가장 안전한 곳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함은 전 삶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으로의 성육신, 인간을 창조한 분이 인간을 섬기는 아들의 신분으로 살았습니다. 붙잡히기 하루 전에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발을 씻는 것은 노예들이 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선생으로서 이렇게 했으니 너희들도 그렇게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강함과 권력이 아닙니다. 도리어 종이 되고, 낮아지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약한 것들을 자랑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약할 때 주님의 은혜가 가장 강력하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강함과 지혜를 버리고 낮아지고 약하여짐으로 높음과 강함을 얻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높아지려합니다. 아담 이후 타락한 본성을 지닌 인간들은 자신이 신이 되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럴수록 고독해지고, 불행의 늪에 빠져 들어갑니다. 자신을 약점을 자랑하고, 자신의 허물에 긍지를 갖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려는 약함의 연습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훈련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순간, 하나님께 영혼을 의탁했습니다. 힘이 없어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방법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한 것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은 하나님께 의탁했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신뢰는 믿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고 영혼을 맡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은 위대한 일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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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서의 실천은 성도의 의무

    마태복음 6:14-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태복음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

    예수님은 타인을 용서하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시면서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필수적으로 타인에게 베풀어야할 용서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대교 안에서는 세 번이면 용서의 정신을 보여주기에 충분했고 따라서 베드로(일곱번)는 자신이 관용을 베풀었다고 생각합니다.

    ​참조 아모스 1: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다메섹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아모스 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그러나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횟수를 세지 말고(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야합니다.
    이는 창세기 4:23~24절에 나오는 라멕의 복수에 대한 자랑을 뒤집는 것입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십자가에서 완성됨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브리서 10:20-22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예수님은 대제사장인 동시에 '제물' 그 자체였지만 성령이 어떤 면에서 이 제물을 드리는데 있어서 그리스도를 도우시거나 능력을 부여하셨다고 밝힙니다.
    예수님은 '큰 제사장'이며 탁월한 제사장이십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피'에 힘입어 하나님이 계신 곳에 들어갈 수 있으므로 '담력'을 갖고 신실하게 행동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도들은 하나님께 '복종하고', '깨끗해지고',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야합니다.
    예수님의 속죄 사역은 성도들의 '속사람(영혼. 마음)'을 정결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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