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에 대한 약속
(이사야, 40-66〔1-39〕)
외울 성구 :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 7:14)
함께 읽을 성경 : 이사야, 40-66(1-39).
토의주제 :
1. 당신은 당신의 자녀들이 어떠한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십니까?
2. 자녀들을 징계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 있는가?
3. 만일 당신이 당신의 자녀에 대하여 그의 성품, 능력, 신앙, 학문적 지식 등에 있어서 부족함 점을 자세히 알고 계시다면, 당신은 그 자녀를 위해서 무엇을 예비하시겠습니까?
4. 당신이 마지막으로 자녀를 위하여 축복기도를 한다면, 어떠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시겠습니까?
5. 솔직히 부모의 은혜를 모르는 자녀에게도 사랑이 갑니까?
6. 당신의 신앙 속에 ‘내가 하나님과 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정직하과 성실하게 살아야지?’하는 결단에 내포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어려운 상황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기대하는 소망만 있습니까?
A. 예언의 총체로서의 이사야서
이사야서의 보고에 따르면, 예(대)언자, 이사야는 아모스Amos의 아들로서(사 1:1) 유다왕, 웃시야가 죽던 해에 소명을 받았습니다.(사 6:1) 그 후 이사야 예언자는 므낫세 왕까지 활동하였습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웃시야(Uzziah= 아샤랴Azariah, 783-742), 요담(Jotham, 742-735), 아하스(Ahaz 735-715), 히스기야(Hezekiah, 715-685/6), 므낫세(Manasseh, 687/6-642) 왕이 유다를 통치하던 시기에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왕하 21장 16절에 의하면, 므낫세 통치 기간 중에 순교하였습니다.
이렇듯 여러 왕을 걸치면서 대언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이사야서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도 다양합니다.
우선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이사야서를 3권으로 분권합니다.
첫째, 1-39장을
제1이사야,
둘째, 40-55장을 제2이사야,
셋째, 56-66장까지를 제3이사야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권에도 불구하고 이사야서에는 전체가 ‘종말론적 선포의 양식’을 띄고 있다는 점에서 한권의 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단지 그의 예언활동이 여러 왕들의 통치시기를 통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언의 내용이 한 가지에 국한되어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점은 그의 예언 활동의 시기의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배경과 관련 있는 것이지, 이사야서 자체의
진정성문제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사 7장 14절에 나타난 ‘임마누엘’에 대한 예언이 그 후 ‘고난의
종’에 관한 이야기나 61장 ‘여호와 은혜의 해’에 대한 선포가 그 내용면에서 ‘종말론적 구원’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사야 7장 14절에서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병행 사 8:10)고 선포한 말씀은 이사야 9장 1-7절에서 보다 자세히 ‘한 아이’의 임무와 그의 사역의 특성이 기술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임마누엘’이란 이름을 가진 자의 구원사역을 다시 이사야 43장 3상,5,15절에서는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사 43:3b);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사 43:5);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사 43:15)로 반복해서 증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사야 61장 1절 이하에서는 -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들고 읽으신 부분 -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사 61:1-2)로 바꾸어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사야 66장 9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예언서를 맺습니다. 이 말은 이사야 7장 14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이 기필코 성취될 것을 다시 한 번 더 확언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사야서를 예언의 총체적 집대성으로 이해하고 읽어야 한다는 카이저Kaiser의 말은 의미 있는 말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사야’서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읽어야 할 것인가?
우선
우리는 ‘이사야’ 서를 읽을 때, 다음과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입니다.
① 유다의 배은망덕(사 1:1-9)과 이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이스라엘 왕(국가)에 대한 심판과 포로생활에 대한 예고(사 5:1-30)를 읽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②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 ‘이사야’를 소명하시는지(사 6:1-13)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③ 그리고 난
다음에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로 표징 된 종말에 도래할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그와 더불어 ‘세상 왕국의 멸망’(사 10:5-12:6)에 대한 예언도 함께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꼭 질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즉 ④ 왜 이스라엘의 예언자, ‘이사야’가 예루살렘 함락은 물론이거니와, 세계 왕국에 대한
심판(사 13:1-23:18)까지도 예언하고 있는지를 자문自問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왜 ⑤ 이방 열국에 대한 최후
심판을 예언하면서(사 24:1-26:21), 상대적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사 27:1-13)을 함께 하고 있는지도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질문들을 통하여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들 통하여 선포된 말씀이 이방 민족에게는 ‘멸망의
선포’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선포’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⑥ 이스라엘의
불신자들에게 임한 심판도 선언되고 있다는(사 28:1-33:24) 사실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면 우리는 ⑦ 예루살렘의
보호(사 31:9-33:24)와 시온이 받을 구원과 축복(사 34:1-35:10)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사야의 선포 내용들이 역사적 사건으로 증명된 것이 바로 ⑧ 산헤립의 침략으로부터 유다를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사건(사 36:1-39:8)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⑨ 왜 예언자 이사야는 패망의 역사적 위기 속에서도 위로와
확신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고 있는가? 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이상 소위 제1이사야의 구조를 이해하고 소위 제2이사야의 구원의
메시지를 읽으면,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적인 의지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왜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야만
하는지를 명백히 이해할 것입니다. ⑩ 왜냐하면 ‘평강의 목적’(사 40:1-48:22), ‘평강의 왕’(49:1-57:21),
‘평강의 계획’(58:1-66:24)이 바로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B. 부모의 은혜를 모르는 패역한 자신, 이스라엘
사 1:1-5:30에서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책망합니다. 그런데 그 책망을 마치 부모가 자식을 헌신적으로 양육하였건만, ‘부모’의 뜻을 거역한 ‘자식’처럼(1:2), 혹은 포도원 ‘농부’와 ‘포도원’처럼(5:1-7) 유비적analogisch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2; 5:1-7) 여기서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 사이間의 필연적이고 존재론적 관계로, 혹은 ‘농부’와 ‘포도원’ 사이의 사회적 고용관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하여 이사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 더 자세히 말하면 모세 계약(특히 십계명의 제5계명)이 아직도 유효함을 다시금 천명합니다.(출 20:12; 신 5:16) 즉 자신을 낳아주신 부모나,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절대 불변의 하나님의 율법, 곧 천율律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를 지키는 것이 축복의 통로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참고 엡 6:1-2) 이러한 점에서 기독교는 가장 보편적인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의 유비적 관계로 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면서도(사 2:5-3:15; 5:8-30), 다른 한편 ‘자식’인 이스라엘 백성을 결코 영원히 멸하지 않고,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다시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을 선포합니다.(2:1-4; 4:2-6) 그러므로 이사야의 예언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잘 못을 회개하고 돌아와 여호와 하나님의 예비하신 축복된 미래의 평화의 나라,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촉구하는 것에 궁극적인 초점이 있었습니다.(사 2:1-4) 즉 이사야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 현재의 죄악을 회개하도록 촉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궁극적인 내용은 1-39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40-55장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사야 40-55장은 ‘구약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명명한 것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 궁극적인 목표’라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C. 신앙의 부패는 나라의 패망을 가져온다.
사 1:1-9에서 보고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배은망덕이나, 포도원 농부의 배은망덕, 곧 ‘들 포도를 맺은’ 이스라엘에 대한 죄악(사 5:1-7)은 결국 신앙의 부패, 곧 공의와 정의가 없는 형식적인 종교 행위을 의미합니다.(사 1:10-16) 그래서 이사야는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1:17)고 촉구합니다. 그러면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그러나)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겨지리라”(사 1:18-20)고 이사야는 회개에 따른 구원을 선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짓되고 형식적인 예배행위(사 1:11,15), 곧 공의와 정의가 없는 신앙행위와는 반대로 이사야는 참된 신앙행위, 곧 여러 스랍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드리는 예배행위를 이사야는 ‘환상Vision’ 속에서 목격합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소명기사입니다.(사 6:1-13) 이사야 소명기사에 의하면, 하나님은 ‘거룩한 분’(사 6:3)이시고, 인간은, 곧 이스라엘 백성은 ‘입술이 부정한 자’(6:5)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부정한 입술에 있는 ‘악’이 제거되어야 할 존재, 곧 ‘죄’를 회개하고 용서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사 6:7)
그런데 여기서 문제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사야가 위탁받은 선포의 내용입니다.(사 6:9-10) 즉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고대하시면서, 예언자를 파송하시면서는 “그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사 6:10) 염려하시는가? 그것은 ‘남은 자’, 곧 ‘거룩한 씨’(사 6:13; 스 9:2)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이사야처럼 ‘죄 사함을 받은 자’(사 6:7), 곧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인 ‘거룩한 씨’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도, 패역한 백성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기)”(사 6:9) 때문입니다. 즉 멸망하는 자는 구원의 복음을 만홀히 여기기 때문입니다.(참고. 고전 1:18) 그러므로 ‘공의로 파멸이 작정된 자’(사 10:22)는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상 중에서 끝까지 행하시리(니)”(사 10:23)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사 6:10)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유사하게 예수님께도 제자들이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마 13:10)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마 13:11)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여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3)고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과 순종은 인간의 이성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으로만 가능함을 증언한 것이다.(참고. 고전 2:7-14)
D. 구원의 총제적 ‘표징’으로서의 ‘임마누엘’
‘아하스’ 왕에게 주어진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란 이름을 가진 아이는 당대에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다 왕 ‘아하스’에게 주신 징조, 곧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는 예언은 존재적으로 ‘평화의 왕’, 곧 ‘메시야의 탄생과 그의 통치’로 바꾸어 예언되고 있습니다.(사 9:1-7) 뿐만 아니라,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는 징조는 ‘이새의 뿌리에 의한 의로운 자의 통치’, 곧 종말론적 ‘평화의 나라’로 표상되고 있습니다.(사 11:1-9) 그리고 ‘평화의 왕’의 구원과 통치로 건설되는 ‘평화의 나라’로 인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 바꾸어 말하면, ‘거룩한 씨’, 혹은 ‘남은 자’들은 ‘감사의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게 될 것이라고 이사야는 예언합니다.
“[2]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4]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5]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사 12:2-5)
그런데 ‘임마누엘’, 곧 메시야 탄생에 대한 예언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성취되었음을 복음서들은 증언하고 있습니다.(마 1:20-23, 비교 눅 2:1-7) 그리고 곧 ‘메시야의 탄생과 그의 통치’에 대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로 시작된 공생애로 성취되었습니다.(마 4:12-17) ‘이새의 뿌리’, 곧 다윗 왕의 계보에서 태어난 이스라엘의 의로운 왕이 통치하는 ‘평화의 나라’에 대한 예언은 종말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계 21:3-7) 그리고 끝으로 ‘거룩한 씨’들이 ‘평화의 왕’, 곧 신약의 표현에 의하면 대속의 죽음으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에게 드릴 ‘감사의 찬양’은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에 대한 찬양과 감사로 성취 될 것입니다.(계 5:9-13)
이상 살펴본 사실들에 근거해 볼 때, 예언자 ‘이사야’에게 있어서의 ‘임마누엘 징조’는 단지 처녀가 잉태할 ‘한 아이ein Kind’의 이름이 아니라, 그 아이로 인하여 실현될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한 ‘총체적인 표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임마누엘’은 존재적으로 보면, 도래할 ‘메시아’의 이름이며, 동시에 그가 행할 구원사건의 특징이며,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씨’, 곧 ‘남은 자’와 함께 건설한 ‘왕국’의 상태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로 인하여 받은 ‘구원받은 자들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소위 제2, 3이사야서(사 40:1-66:24)에 이러한 ‘임마누엘’의 표상을 구체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 나머지는 이어서 다음 번에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난의 종 메시아(이사야 40장 - 66장)
외울 성구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사 66:9)
함께 읽을 성경 : 이사야, 40-66(1-39).
토의주제 :
1. 인간들이 패망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2. 사람들은 어느 때 교만하여집니까?
3. 교만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4. 당신이 당신 자신을 생각해 보기에, 혹시 교만하지는 않으십니까?
5. 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시는가?
6. 당신의 하나님의 구원약속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당신의 삶은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까요?
7. 당신은 오늘의
‘외울 성구’(사 66:9)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습니까?
A. ‘교만’한 열방에 대한 심판 선언
이사야서의
전반부(1-39)에서는, ‘거룩한 씨’, 곧 ‘남은 자’ 이외의 열방들은 그들의 ‘교만’으로 인하여 멸망 받을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열방 ‘앗수르’는,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사 10:13)라고
자랑하였습니다.
‘바벨론’은 “네(= 바벨론)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같아지리라”(사 14:13-14)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네(= 바벨론)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사 14:15)고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이 밖에 ‘메데’,
‘모압’, ‘다메섹과 사마리아’, ‘애급’, ‘에돔’, ‘드단’, ‘두로’의 멸망을 이사야 대언자는 선포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23:9)
여기서 명백히 드러난 것은 열방이 멸망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거부하고 교만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심판과 멸망의 원칙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들이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호 7:10)
그래서 잠언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 16:18; 병행 18:12)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교만(Hochmut)’은
이스라엘 백성이건, 열방인건 패망의 원인이요, 심판의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자 이사야는 이스라엘 불신자들과 외식하는 자들에게 내릴 심판과 징계의 원인을 다음과 증언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사 29:13-14)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자신의 창조주하나님을 부인하였다: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사 29:16) 반면에 이사야는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마다 구원을 얻을 것’(사 30:18)이라고 증언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누구든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주어질 것이라고, 자신들을 낳게 해 주신 창조주 하나님은 부인하고 교만해 진자는 멸망할 것임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에게 기도할 것을 다음과 같이 권합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사 33:2) 이렇게 기도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을 히스기야 왕의 예를 들어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히스기야 왕이 산헤립의 침략을 받았을 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예루살렘 거민들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산헤립의 침략에 벗어난 유다’와 병에서 치유함을 받은 ‘히스기야’ 왕에 대한 역사적 보고를 첨부하고 있는 것입니다.(사 36:1-39:8) 왜냐하면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유다의 모든 성읍을 취하고, ‘랍사게’를 예루살렘에 보내어 성을 포위하고 협박하기를,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신뢰하게 하려는 것을 따르지 말라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시리니 이 성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할지라도 히스기의 말의 믿지 마라”(사 36:15)고 유혹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는 “혹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할지라도 속지 말라 열국의 신들 중에 자기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사 36:18)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도록 종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 왕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만국이 주主 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사 37:20)라고 기도하였고, 여호와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히스기야’ 왕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앗수르 왕에게 “대저 내가 나를 위하여,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사 37:35)고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히스기야’ 왕이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 그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여 여호와께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사 38:3)라고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은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사 38:5-6)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상 ‘멸망과 구원’과 관련하여 이사야서 1-39장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본 바와 같이, 열방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까지도 ‘교만’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거부하여,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지 않고, ‘거짓과 형식으로만’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을 받게 됩니다. 반면에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 - ‘히스기야’ 왕과 같이 위기의 순간에도 -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서 1-39장에 나타난 예언의 메시지였습니다. 이렇듯 이사야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교만’과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종교행위’를 패망의 원인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거룩한 씨’ 혹은 ‘남은 자’ -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섬기는 자 - 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구원을 받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 이사야는 이후 계속되는 증언에서는 - 소위 이사야 제2,3서에서는 -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원자로 임할 ‘메시야’가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죄 값을 대신 갚아 주실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도래할 메시야의 고난과 그 고난의 의미, 그리고 그 분이 누구인지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습니다.
B. ‘여호와의 종’, 곧 ‘메시아’을 통한 구원약속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존재양식에 상응하게 스랍들은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라고 3번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와 상응하게 이사야 대언자는 도래할 메시야, 곧 ‘임마누엘’을 첫째, ‘창조주’ 하나님으로(사 40:26) 둘째, 화해자 혹은 ‘구세주’ 하나님으로(사 41:10) 그리고 셋째, 보혜사 성령 하나님으로(사 41:14)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세 분의 ‘하나 되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참조 사 41:4, 비교 계1:17-18)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대한 증언을 이사야는 ‘임마누엘’이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 곧 ‘여호와의 종’의 사역은 ‘메시아적 사역’, 곧 ‘구원사역’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여호와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 [5]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1, 5-7)
그러므로 이사야는 아예 여호와 하나님을 ‘구원자 하나님’으로 선포합니다.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사 43:3a);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 43:11)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처음부터 구원자 하나님이심을 단호하게 선포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이밖에 43장 12절; 44장 17,20절; 45장8,15,17,20-22절; 46장 13절; 47장 4,13-15절; 49장 6,8,25-26절; 51장 5-6,8절; 52장7,10절; 56장:1절; 57장 13절; 59장 11,16-17절; 60장 16,18절; 61장 1,11절; 63장1,5,8-9절; 64장 5절에서 이사야는 줄기차게 ‘창조주 하나님’은 ‘구원자 하나님’, 곧 ‘메시아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40-66장에서만 여호와 하나님을 ‘구원자’로 대언한 것이 아니라, 이미 1-39장에서도 계속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구원자’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이밖에 사 17:10; 19:20; 25:9; 26:1,18; 31:5; 36:2,6,22; 37:11,20,35) 그래서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라”(사 38:20)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구속 לאג’이란 단어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구속’란 히브리어의 원뜻은 ‘친족법Sippenrecht’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자를 다시 사는 것Rückkauf’를 의미합니다. 침멀리W. Zimmerli에 의하면, “이 표현 속에는 야웨와 그의 백성이 본래부터 결합되었다는 사실과, 그 당시 이방권세 하에 예속된 이스라엘을 야웨가 ‘되샀다’는 사실이 모두 다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되샀다’라는 말 속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하여 준비한 대속물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그 대속물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을 의미합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사 42:1) 바꾸어 말하면, 고난 받는 ‘어린 양’을 의미합니다. “그(= 고난의 종)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사 53:7-9) 이 예언이 지시하는 바는, 더 자세히 말하면 ‘고난의 종에 대한 노래’(사 52:13-53:12)는 다름 아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사야의 증언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증언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어느 날 성전에 들어가셔서 자신의 이 땅에 오심 목적을 바로 이사야 61:1-3절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3, 눅 4;18-19에서 인용)
이러한 자기 증언에 상응하게,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이방의 빛’이 되시는 ‘평강의 왕’으로 구원사역을 펼치셨으며,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 받는 종’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보낸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쳐 떨어뜨렸을 때,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 26:53-54)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마 26:54)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C. ‘구원자’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
이사야
선지자는 ‘구원자 여호화 하나님’을 이 세상의 창조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를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증언’ 양식으로
선포합니다.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사 44:24)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증언(Selbsterweis)’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예언자들의 ‘찬미(Hymnus)’에서 다른 말로 바꾸어 증언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나는 빚도 ‘짓고 רצי’, 어두움도
‘창조하고 ארב’, 나는 평안도 ‘짓고 השׁע’, 환난도 ‘창조하나니 ארב’,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השׁע’ 자니라.(사 45:7)로 창조주 하나님의 ‘자기증언’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제 ‘창조주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하십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다)”(사 65:17-19).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 65:24-25, 비교 사 11:6-9)
이러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로 실현됩니다.
예수께서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사 9:1-2)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3-17)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선포는 비유를 통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로 일관됩니다.
예컨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 ”(참조 막 4:30, 이밖에 여러 곳)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선포하시고, 그리고 실제로 우리 인간을 대신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은 요한 계시록 21장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혹은 ‘하나님의 장막’으로 표징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임마누엘’로
새롭게 창조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드릴 경배와 찬양을 권면합니다.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내 앞에 나아와 예배하리라”(사 66:22-23)
이러한 이사야의 예언 속에 ‘임마누엘’ 사상, ‘새 하늘과 새 땅’
사상, ‘안식일’ 사상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 사상이 함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예언이 기필코 성취될 것을 다음과
같이 비유로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사 66:9)
이러한 의미에서 이사야서는 예언서의 형식을 가진 구약의 복음, 곧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라고 특징지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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