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3장


영혼(靈魂)의 수고(愁苦) 
the suffering of his soul

사람을 영과 혼과 육으로 구분하여 영혼을 육체에 담고 있다고 말합니다.
영혼(靈魂)은 스스로 활동(活動)하거나 움직일 수 없습니다.
반드시 영혼(靈魂)이 담겨 있는 육체(肉體)의 활동(活動)과 움직임에 따라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갖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사탄이 유다에게 제공한 것입니다(마가복음 14:10-11)
유다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제자(弟子)로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지만 이때는 이미 유다의 생각은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영혼은 사탄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영혼을 움직이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혼의 수고란 다른 말로 "영의 아버지 하나님의 수고"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이 영의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의 지배를 받을 때 그 사람의 영은 아버지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에스겔 18: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에스겔 18:20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 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고난의 종으로 세상에 오신 메시아이신 예수는 아버지의 영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다만 영으로만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은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을 바쳐야만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에 십자가의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서 속건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렇게 절규하셨습니다.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이 되셨던 그 과정을 영혼의 수고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죄인들의 영혼을 움직이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내가 죄인이라고 스스로 깨닫고 영의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 앞에 나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영혼을 움직여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내가 죄인이라고 깨닫지 못하면 강제적으로 그 사람의 영혼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것 즉 영혼의 속건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믿으면 영혼의 수고가 시작되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영혼의 속건제물과 영혼의 수고(이사야 53:10~11)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현대인의 성경)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그가 상처를 입고 고통을 당한 것은 내 뜻이었다. 그가 를 속하는 희생제물이 되면 그는 자손을 보게 될 것이며 그의 날이 장구할 것이니 그를 통해 내 뜻이 성취될 것이다.
그는 자기 영
혼이 고통을 당해 얻어진 결과를 보고 만족스럽게 여길 것이다. 나의 의로운 종은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그들의 를 담당할 것이다.

(공동번역 성경)
야훼께서 그를 때리고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이었다. 그 뜻을 따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다. 그리하여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오래 살리라. 그의 에서 야훼의 뜻이 이루어지리라.그 극심하던 고통이 말끔히 가시고 떠오르는 을 보리라. 나의 종은 많은 사람의 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이 떳떳한 시민으로 살게 될 줄을 알고 마음 흐뭇해 하리라.

(새번역 성경)
주님께서 그를 상하게 하고자 하셨다. 주님께서 그를 병들게 하셨다. 그가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여기면, 그는 자손을 볼 것이며, 오래오래 살 것이다. 주님께서 세우신 뜻을 그가 이루어 드릴 것이다.
"고난을 당하고 난 뒤에, 그는 생명을 보고 만족할 것이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자기가 짊어질 것이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한 것입니다.
성경을 증거한다고 하고서 예수를 증거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을 증거하고 자랑을 하는 것은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귀한 자들로 축복되시기를 원합니다.

세상에서 장관 하나만 알아도 허가내는 것이 참 쉽습니다.
세상에서 대통령만 알아도 하고자 하는 일이 아주 쉽게 이루어지는데 하물며 만왕의 왕이 되시고 온 우주의 주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면 얼마나 축복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보화를 얻은 것보다도 더 큰 축복이 될 줄 믿습니다.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기록된 말씀에서 “주여! 주여!”하는 자들은 행함이 없는 자들을 말합니다.
“주여! 주여!”하는 무리가 백이든 천이든 만이든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다만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 들어간다고 하였으므로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되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서 뜻대로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여러분의 책임이지만 목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는 책임 또한 적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했다는 것은 그릇되게 생각했다, 잘못 생각했다, 틀리게 생각했다, 본래의 뜻과 다르게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본의 아니게 다르게 생각하여 오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이 크게 오해 하고 있는 부분을 여러분들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될 것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믿지 못하고 자식이 부모를 믿지 못하는 세상이 오늘날 이 세상입니다. 친구라고 믿었다가 사기당하고 고통당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형제간에도 믿지 못해서 시기하고 다투고 싸움질하는데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神)을 믿는 자라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믿음 가진 자가 될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사랑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오해된 부분이 있으면 풀어야 됩니다. 풀지 않으면 평생 원수같이 지내게 되고 만나서 풀 때에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은혜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해된 부분이 많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를 많이 했는데도 “하나님 내 형편을 왜 이렇게 어렵게 해 주십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20년, 30년 동안 평생 오해했다가 죽을 때까지 오해하고 간다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마태복음 13장 34절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비유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잘못하면 많은 사람이 오해를 하게 될 소지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8: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숨어있는 비밀의 말씀이 풀어지면 많은 기독교인의 큰 오해가 풀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는 유대인이 사형 집행하는 법으로 정해 놓은 방법입니다.
그것도 아주 잔혹하고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방법으로 악한 자들을 심판 했습니다.
차라리 참수하여 1,2분 만에 죽게 하는 것이나 약을 먹고 죽는 것이 죽는 사람에게는 편할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긴 시간동안 고통 받으며 죽게 하는 것은 약을 먹는 고통보다도 더 심한 것입니다.

굵은 대못을 양 발과 양 손에 박으면 몸의 무게에 의해서 밑으로 쳐져서 뼈가 쓰린 아픔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 고통에서 순식간에 죽어 버리면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그래도 고통이 좀 덜하겠지만 그 조금씩 흘러내리는 피로 사람이 피말라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못을 박아 놓으면 저녁에 가도 죽지 않고 그 다음날 아침에 가도 죽지 않고 또 그 다음날 아침에 가도 죽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빨리 죽게 하기 위해서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서 피가 쏟아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날 운명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도 그 고통은 말할 수가 없는 고통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죄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 땅 위에서 살아 있을 동안에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아픈 자를 고쳐주고, 소경된 자를 눈 뜨게 해 주고, 문둥병자를 낫게 해 주고, 저는 자를 뛰게 해 주었습니다.

이 세상에 아픈 자를 낫게 해주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물질이나 아무 욕심도 없이 많은 사람에게 봉사를 하셨습니다. 그는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맨발로 다니면서 먹을 것이 없어 길가의 보리 이삭을 주워 그것을 구워 제자들과 나눠 먹기도 하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많은 사람을 위해 고기 두 마리 떡 다섯 덩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게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그 십자가의 흘리신 피로써 우리를 구원했다고 알고 있는 것이 기본 상식입니다. 또한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라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하나 그보다 앞서 우리 주님께서 행하셔야 될 일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만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양 옆에 강도도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 강도들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십자가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서 53장에 기록 되어 있는 말씀은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예언을 하신 말씀입니다.
약 팔백육십년 전에 예수님에 관해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받아서 예언해 놓은 말씀입니다.
약 천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후에 있을 예언을 하였는데 그 예언은 너무나 적중을 했고 또 빠짐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이사야 53장 10절을 읽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은 이사야 53장 1절부터 잘 기록이 되어 있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요한복음 12:36~40.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이 말씀의 내용은 이사야의 예언이 요한복음에 가서 이루어진 내용입니다.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냐’는 이사야의 예언에서 이 팔이 바로 예수님께 나타났습니다. 왜 예수님을 하나님의 팔이라고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대통령의 오른팔이다.” 성경은 이와 같이 비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팔로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면 예수님이 행하신 그 손의 능력은 하나님의 손의 능력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팔이 나타난 것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기를 연한 순 같고’ 라고 하였습니다. 연한 순 같이 조용하게 돋아난 새싹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세상에서도 임금의 집안에 아들이 태어나면 수많은 사람이 와서 찬양하고 대단하다고 떠들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올 때에는 들썩이지 않고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가 없었습니다.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렸던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은 그날 밤에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멀리서 동방 박사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별을 보고 찾아와서 경배를 했고 저 들판의 이름 없는 양 치던 목동들이 찾아와서 아기 예수께 경배를 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연한 순같이 소리 내지 않고 조용하게 오셨습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에 오셨습니다. 아무도 그의 탄생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모양이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라고 하였습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는 아주 가늘고 힘이 없습니다. 수분이 많은 곳은 살도 통통하게 찌고 새 순이 날 때에 보기 좋은데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으니까 예수님이 바싹 말라서 별 인물 없이 나신 것입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예수님은 아주 피부가 곱거나 얼굴이 예쁘거나 하지 않고 풍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진을 보면 특히 천주교에서는 살이 통통하게 찐 사진을 걸어 놓았습니다. 성경 상으로는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저 사람을 한 번 더 봤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 없고 사모해서 연애 한 번 해볼까 하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는 분이었던 것입니다.

사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 곁에는 사람들이 가지 않았습니다. 어디 공원에 놀러 갔다가 침을 질질 흘리고 때 묻은 거지가 앉아 있으면 그 옆에 앉는 것보다 차라리 다리가 아파도 서 있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연예인 같이 멋있게 생긴 남자라면 그 옆에 여자가 앉아 보고 싶고 미스월드같이 아름답게 생긴 여자라면 남자가 그 옆에 앉아 보고 싶겠지만, 예수님은 너무 못 생겨서 멸시를 받아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많은 고생과 생활의 어려움)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고생과 아픔)를 아는 자였습니다.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고 보지 않음을 받은 자 같이 멸시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천대 받도록 오셨습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육신적으로 잘 생긴 분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아주 못 생긴 분으로 오셨던 것을 알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잘 생긴 것 보고 좋아하다가 큰 일 납니다. 그 사람 속에 천사가 들어 있는지 이리가 들어 있는지 늑대가 들어 있는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비록 못 생긴 얼굴이지만 예수님 속에 하나님이 계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몰라서 예수님은 멸시와 천대를 받으신 것입니다.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자 “저것 봐라! 잘난 체하고 병 고치고 하나님의 아들인 체하더니 저 십자가에 달린 것 봐라! 죄인인 주제에 자기가 만왕의 왕 이라는 게 말이 되느냐!” 라며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비방하는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수제자 베드로도 “주여, 저는 죽어도 주님을 따라 가겠습니다.” 라고 해 놓고(요13:37) 재판 받는 도중에 조그만 계집 종 하나가 찾아와서 “당신이 예수님의 제자죠?” 라고 하자 베드로가 “아니다!” “내가 봤는데요” “아니다!” “베드로잖아요?” “아니다!” 하고서 예수를 안다는 그 자체를 부인했습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새벽을 알리는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한 그 말씀이 생각이 나서(요13:38) 그때서야 통곡하고 울었지만 뉘우침에 울어도 때는 늦은 것입니다(마26:69~75).

그렇게 사랑하는 제자들이 예수님 곁을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기사와 이적을 행하였지만 그때는 사람들이 파도같이 물밀 듯이 몰려오더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자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 세상이 그런 것입니다. 돈 있고 권세 있을 때는 개만 죽어도 손님이 문전성시로 모여 들어서 슬퍼 하지만 정작 그 사람이 죽으면 찾아오는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사와 이적과 표적을 행할 때에는 수 천 명이 몸을 용신할 수 없도록 모여 들었으나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수제자 베드로마저 배신한 상황에서 심지어는 강도로부터도 멸시와 천대를 받으신 것입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기록된 말씀에서 우리 주님의 고통은 자기를 위해서 당한 것이 아니라 우리 만민의 모든 허물과 죄를 인하여 예수님이 친히 질고를 당하신 것입니다. 그 덕분에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지구상에 이십 억이나 되는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게 되었습니다(롬9:27).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예수님이 설교를 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고 한 그 말씀대로(요12:24) 오늘날에 와서는 이십 억이나 되는 수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혼자였으나 오늘 이 세대는 이십 억이나 되는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기억하고 생각하고 주님을 믿고 그를 기다리는 마음은 참으로 간절하고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사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양은 순수하고 좋지만 시기, 질투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더운 여름에는 떨어져 자면 서로 시원할까봐 꼭 붙어서 자고 겨울에는 다른 양이 따뜻할까봐 서로 떨어져 잔다고 합니다. 순하긴 하지만 양들은 그렇게 시기와 질투가 많습니다.

털을 깎다가 살점이 베이면 염소는 들이받지만 양은 가만히 있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양은 앞에 가는 양을 따라가기를 잘해서 앞에 가던 양이 개울을 건너다가 돌에 발이 부딪쳐서 다리를 절뚝거리며 건너가면 성하고 멀쩡한 양도 따라 가다가 앞서 간 양이 돌에 발을 부딪힌 곳을 지날 때면 절뚝거리고 지나간다고 합니다.

이렇게 양은 순하고 착해서 남 따라가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좋은 방법의 시기와 질투로 발전하고 성장해야할 줄 믿습니다.

사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심으로서 천하 만민의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히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한 번의 십자가로서 우리를 구원시켜 주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었어도 죄 없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에서 담당이라는 말을 지금까지 잘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조시대 때에 양반의 아들이 죄를 지으면 매를 맞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양반집 아들이 잘못을 하여 곤장 20대, 태형 30대의 벌을 받게 되면 종이 아들을 대신해서 매를 맞으러 갑니다. 매를 대신 맞는 종은 보상으로 문전옥답(門前沃畓)을 댓가로 받기로 합니다. 그렇게 종이 양반 아들 대신에 매를 맞고 오면 양반의 아들은 매를 맞으러 갈 일이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 옛 조상들의 풍습 가운데 초상이 나면 가족 대신에 울어 줄 사람을 사 와서 가족을 대신하여 슬피 잘 울어주는 풍습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초상집에 가족을 ‘대신’하여 울음을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죄 값을 담당하셨습니다.

사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네가 예수냐? 하나님의 아들이냐?”라고 사람들이 온갖 욕을 하고 손가락질해도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눅23:35~38). 재판 할 때에는 재판관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하자 그때 가서 예수님이 “네가 말하였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너의 나라와 너의 권세는 땅에 있지만 나의 나라와 나의 권세는 하늘에 있느니라.” 고 하심으로 예수님은 하늘의 왕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을 당해도 고통의 소리를 내지 않고 참았습니다.

사53: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예수님이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만민의 죄를 위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를 죽이는 자에 대하여도 도리어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눅23:34).

이와 같이 예수님은 아무도 원망치 않고 인류를 죄에서 해방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보고 욕하고, 침 뱉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는 사람을 보고 “주여, 나를 찌르고 욕하고 창으로 찌르는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들은 나를 알지 못함이니이다.” 도리어 그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구세주였습니다.

사53: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예수님은 깡패 짓을 하거나 남에게 억울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을 하거나 남을 속이거나 자기의 유익을 위한 말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이 악인들이 묻히는 것 같이 부자들의 무덤에 묻히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예언이 팔백 년 후에 이루어져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부자의 무덤에 묻혔습니다. 성경의 예언은 빠짐없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사야 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원하셨습니다.
왜 원하셨는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것은 만세 전에 작정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2: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비밀한 가운데 있는 지혜의 비밀 중에 비밀입니다.

고린도전저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것은 만세 전에 정하신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6:24.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이렇게 예언되어 있고 우리 만민의 죄를 위해서 고난과 고통을 당할 것을 예언해 놓았는데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사야의 예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라고 하였습니다.

메시아 구세주는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예언하셨고(미5:2) 이렇게 고난당하실 것을 이사야서에 자세하게 예언하고(사53:6~8) 기록하였으며 다윗 선지자를 통해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신당할 것과(시41:9)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은 삼십 냥에 팔리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슥11:12).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빠짐없이 그대로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눅24:27). 본문 말씀을 보시면서 깊은 말씀 깨닫기를 원합니다.

이사야 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바꿀 속(贖), 허물 건(愆), 속건제물(贖愆祭物)이라는 것은 천하 만민의 허물을 십자가에 달리신 어린양 예수님을 제물로 바꾼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주고 물건을 살 때에 돈과 물건을 바꾸듯이 많은 인간의 허물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제물로 바꾼 줄 믿습니다.

그런데 속건제물이 예수님의 육체에 대한 속건제물로만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될 것은 지금까지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육체가 보배로운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 인간의 죄와 바꿔치기 한 것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기록된 예언은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이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영혼이 속건제물(贖愆祭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혼이 속건제물 된 것을 이천 년 동안 몰랐습니다. 영혼이 속건제물로 드린 것을 모르고 예수님의 육체가 속건제물로 드린 것으로만 알아 왔습니다.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릴 때에 육체는 따라간 것뿐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올 때 여러분의 마음을 주관하는 영혼이 교회에 갈 것을 생각하고 난 뒤에 육체가 정신의 영혼을 따라간 것이지 아무 생각 없이 오다 보니까 교회에 온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렸다는 것은 대단한 깨달음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생각에 생각을 다해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예수님이 친히 각오하시고 작정하셨을 때에 그 영혼이 벌써 하나님 앞에 속건제물로 드리신바 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며 큰 소리로 “아버지께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라고 부탁하면서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셨습니다.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는 과정에서도 조금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십자가를 당당하게 지시고 약하게 보이지 않으시고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그 동안에 그리스도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속건제물이 된 줄 믿습니다.

만약에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는 것만으로는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영혼의 속건제물이 없었다면 우리의 참 구원이 될 수가 없으며 아무런 값어치가 없습니다. 순교할 믿음과 신앙이 없는 자가 악인에 의하여 죽었다고 ‘순교자’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영혼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또한 육체도 못 박히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부모님이나 가족이나 친지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기도로써 영혼을 하나님 손에 부탁해야 됩니다.

벧전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은 자들의 영혼을 조물주에게 부탁하라고 하였습니다. 운명을 하기 직전에 계신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실 때에는 “하나님, 이 분의 영혼을 하나님 손에 부탁을 드립니다.” 하고서 기도를 해 주는 것이 가장 큰 은혜의 축복입니다.

더 큰 은혜의 축복을 하자면 주님께서 운명하실 때에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손에 부탁드린 것 같이 “하나님께 부탁드리오니 이 영혼을 하나님이 받아 주시고 천국 길을 인도하여 주소서(눅23:46)” 이렇게 짧게 기도해도 죽은 자들의 영혼을 위한 기도가 고인에게 큰 축복이 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면 그 결과로 무엇이 생기는가 하면 당연히 세상 만민의 죄를 대속하는 것입니다 (엡2:15~18, 히10:12).

사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우리가 지금까지 예수님이 속건제물 드린 것은 육체가 드린 십자가의 피만이 속건제물이 된 줄 알았지만 영혼이 먼저 속건제물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영혼을 육체와 함께 속건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십자가로 드림으로 말미암아 그(예수)가 그(예수)의 씨를 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식물이 다 자라고나서 씨가 되면 자기의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놓고 난 그 다음에 죽습니다. 모든 채소는 씨가 나왔다고 하면 본체는 다 죽는 것입니다. 채소들의 생명은 씨를 만들기 위해서 성장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마당 앞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솔방울이 많이 달렸습니다. 수분도 없고 빗물이 밑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죽을까 싶어서 씨라도 남겨야 되기 때문에 솔방울이 많이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솔방울이 많이 달린 나무는 “나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이와 같이 식물도 자기 새끼를 정말 사랑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명을 ‘씨’로 남기는 것이 식물의 본성입니다. 죽어가는 소나무에 물을 많이 주었더니 솔방울이 거의 다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수분이 많고 살기가 좋으면 솔방울이 없고 소나무가 죽을 때가 되면 솔방울이 많이 달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씨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사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예수님께서 속건제물을 드리면 그가 그 씨를 본다고 하였는데 그리스도의 씨가 누구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속건제물(贖愆祭物)로 나온 씨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나무에 달려서 우리의 죄를 또한 친히 담당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 끝날이 되면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릴 날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날은 사람의 씨로 뿌림을 받은 사람은 구원을 받고 짐승의 씨로 뿌림을 받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바로 마지막 때입니다. 이 말씀에 관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렘31:27~2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전복하며 멸하며 곤란케 하던 것같이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린다고 했는데 이 사람의 씨로 뿌려질 것은 어떤 것이며 짐승의 씨는 어떤 것인지 먼저 사람의 씨에 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행13: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예수님이 사람의 씨입니다. 사람의 씨를 뿌릴 날이 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씨앗이 뿌려질 날이 올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막4: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마13:37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예수님과 같은 구원 받을 하나님의 씨를 성경에는 사람의 씨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장 7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실 때에 맏아들로 오셨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눅2:5~7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하니까 형제도 없는 외아들 독자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나셨기 때문에 독생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이 이 땅 위에 맏아들로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땅 위에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아들들이 되게 하는 역사를 이루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많이 있어야(롬8:19~25) 예수님이 맏아들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초림 때에 맏아들로 오셨고(눅2:7) 재림하실 때 또한 맏아들로 오시게 됩니다.

히1:6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 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찌어다 말씀하시며

처음 태어나실 때 맏아들로 오셨으니까 재림하실 때에도 맏아들로 오실 줄 믿습니다. 맏아들은 많은 아들 중에서 맏이가 된 아들이 맏아들입니다.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이 땅 위에 맏아들로 오신 줄 믿습니다.

갈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많은 사람이 종의 반열에 있었다가 주님이 오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 될 줄 믿습니다. 이전까지는 종이었으나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들로 축복될 줄 믿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사람이 사람의 씨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짐승의 씨는 사단에 속한 이단자들로서 “내가 하나님이요, 내가 재림주요, 내가 감람나무요” 하고 나올 자들 전부가 다 짐승의 씨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딛1:12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그레데인들을 악한 짐승이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3장 1절에 뱀을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이라고 하였고 마태복음 23장 33절에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뱀들,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짐승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짐승입니다(계13:18).

기록된 말씀과 같이 거짓 선지자들을 따라가는 자들이 사람 짐승들인 줄 믿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가 뿌려질 때입니다. 예수님이 속건제물(贖愆祭物)로 드려지면 예수님이 그 씨를 본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의 속성된 사명자입니다.

사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예수님의 씨는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사명자로서 “그의 날은 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속건제물의 씨가 된)의 손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이후에 예수님의 씨로 나오는 사명자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큰 일을 행할 것이라는 것입니다(요14:12). 이 일은 그리스도 이후에 세상 끝날에 반드시 이루어질 예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마6:10)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계11:15, 계20:6).

이사야 53: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기록된 말씀에서 속건제물의 씨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함으로서 자기(예수) 영혼의 수고한 것을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혼의 수고한 것은 속건제물을 드려서 인류의 죄와 허물을 예수님의 제물과 바꾼 십자가의 승리를 말합니다.
영혼의 수고한 것을 만족히 여긴다는 것은 속건제물로 인한 “씨” 를 보게 됨으로서 씨의 손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 그리스도의 나라, 천년왕국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속건제물의 씨로 나온 사명자가 이 땅 위에 출현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하나님의 뜻대로 신앙하여 속건제물의 씨가 된 큰 구원을 유업 받는 귀한 자들로 축복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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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혼을 속건제물로(이사야 53:10)

한 젊은 병사가 모반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구형 선고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 갑자기 죄인의 형이 재판관 앞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는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양팔을 잃은 상이용사였습니다.
형은 동생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정중히 호소하였는데, 그 호소는 자기 동생이 세운 공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세운 공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제 동생은 분명 대역죄를 지었으니 죽어 마땅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을 꺼냈지만, 잘려 나가고도 남아 있는 그의 팔은 조국을 위해 희생한 그의 충성심을 설득력 있게 감동적으로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결국 형의 호소 덕분에 재판관은 죄를 지은 동생을 관대하게 처리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습니다.
그래서 그 죄로 인하여 죽음의 병에 걸린 자들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병에 걸렸다는 것은 결국은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일찍 메시아의 고난을 예언하면서 그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게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속건제(贖愆祭)란?

속건제는 레위기에 나타난 5대 제사 가운데 다섯 번째로 나타나는 제사입니다.
속건제는 고의적이든지 비고의적이든지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상해나 손실을 입혔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속건제라는 말은 ‘아샴’인데 성격상 변상을 해야하므로 배상제(reparation offering)라고도 합니다.

레위기에 나타난 속건제의 핵심은 소유권 침해라고 하는 범죄의 용서에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소유권에 대한 침해를 했을 경우(5:14-16)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그릇 범과 하였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합니까?
성물이란 하나님께 바쳐진 모든 예물을 의미합니다.
물건이 거룩한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구별한 성물로는 십일조가 있습니다.

레 27:30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레 27:31 사람이 그 십분 일을 속하려면 그것에 그 오분 일을 더할 것이요

레 27:32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레 27:33 그 우열을 교계하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속하지 못하리라

* 또한 첫 열매가 있습니다.

레 23:10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레 23: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레 23:12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레 23:13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이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를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힌 사분 일을 쓸 것이며

레 23:14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 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이와 같이 십일조나 첫 열매를 태만하여 바치지 않는 경우를 말합니다.
또한 제사장에 속한 일부분을 먹었을 경우를 말합니다.

‘범과함’이라는 말은 ‘마알’이라고 하는데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이나 그 분께 속한 바를 대적하여 범하여진 신성모독 행위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거룩함을 범한 불신 행위를 말합니다. 다른 사람(또는 하나님)에게 져야할 자신의 의무에 대해 부적합한 행위를 했거나 거부한 행위를 말합니다.

2. 이웃의 소유권에 대한 침해하였을 경우(레 6:1-7)

레 6:2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치 못하여 범죄 하되 곧 남의 물건을 맡거나 전당 잡거나 강도질하거나 늑봉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레 6:3 남의 잃은 물건을 얻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에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레 6:4 이는 죄를 범하였고 죄가 있는 자니 그 빼앗은 것이나 늑봉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얻은 유실물이나

레 6:5 무릇 그 거짓 맹세한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 물에 오분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이웃의 소유권을 왜 침해합니까? 그것은 여호와께 신실치 못하여 범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이웃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것은 단순히 인간대 인간의 범죄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남의 소유권을 침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범죄한 후에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서 이야기를 합니다.

“한 마을에 두 사람이 살고 있는데 하나는 부자요, 하나는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부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은 반면 가난한 사람은 작은 암 양 새끼 한 마리뿐이었습니다. 마치 자식처럼 기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자 집에 손님이 왔는데 자기 양과 소를 잡아서 대접하자니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가난한 사람이 기르는 암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손님을 대접하였습니다.”

다윗은 이 이야기를 듣고 크게 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였습니다.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다윗은 몇 배를 갚아 주어야 한다고 하였습니까?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속건제는 어떻게 드려야 합니까?

하나님의 소유권이나 이웃의 소유권을 침해하였을 경우 먼저 5분의 1을 더하여 배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속건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속건 제물은 자기 마음대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흠 없는 수양으로 드리되 제사장이 정한 성소의 세겔에 따라 흠 없는 수양을 떼 중에서 끌어다가 제물로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성소에서 사용하는 세겔은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세겔보다 몇 배의 값어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일반 제사와는 달리 제물의 액수를 상당하게 요구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성물에 대한 귀중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벨사살 왕이 성전의 금은 기명을 가져다가 술 파티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로 그 날밤 벨사살 왕은 죽임을 당하고 나라가 망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의식중에 여호와의 금령을 범할 경우, 즉 자기가 행한 바가 죄가 되는지 아니 되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하라고 하였습니까? 이 경우에는 다른 것은 같고 5분의 1을 더하여 드리는 배상의 과료가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속건 제물이 되게 하셨을까요?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것을 취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므로 모든 사람이 죄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신의 몸과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림으로 우리가 용서를 받게 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수많은 속건제를 드렸습니다. 분명히 자신이 손해 입힌 것에 5분의 1을 더하여 배상을 하고 속건제를 드림으로 용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이러한 속건제사는 완전한 제사는 아니었습니다. 계속해서 또 다른 제사가 요구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하나의 모형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몸과 영혼을 하나님의 제단에 바치셨습니다.

히 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염소나 송아지와 같은 제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짐승은 그 영혼이 없지만 예수님은 영혼까지 제물로 바쳤기 때문입니다.

속건 제물로 바친 결과

1. 그가 씨를 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속건 제물로 드린 결과 새로운 이스라엘이 태어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한 알의 밀 알이 되셨습니다. 그 밀 알이 썩어짐으로 말미암아 많은 결실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은 주님의 옆구리에서 탄생하는 주님의 신부인 교회를 말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된 교회는 이제 세계를 정복하는 놀라운 번식력을 나타내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2. 그 날은 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것을 끝내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주님이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제자들은 염려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시기를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3.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앞에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습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라고 맡겨주신 구속사역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거기에 덧붙일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구주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십니까?
우리의 죄는 그 어떤 배상으로도 용서받을 길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드리시렵니까?
여러분의 남은 생을 주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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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속건제물이 되어 주셨다(이사야 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우리 주님께서 불가사의한 일을 행하시는데 그 영혼을속건제물로 드리게 되면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라고 하셨다.
즉 자기 아들에게 세례방식으로 모든 세상 <죄를 넘겨서> 상함과 질고와 고통을 당케 해서 모든 죄에 대한 심판을단번에 받아 깨끗하게 해주셨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우리 인간들을 모든 죄에서 구원해 주기 위한 속건제물, 넉넉하게 값을 지불해 주는 제물로 자기 몸으로세례받고 피흘려 죄인을 구원하는희생의 제물로 삼았다.

성경에서의 일일치의 죄사함

성경에서는 하루 치 죄 사함이 있다.

하루 치 죄 사함은 이스라엘 백성이 한마리의 짐승을 데리고 와서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를 해서 이 사람이 1일 동안 지은 죄를 넘겨서 그 다음에 이 짐승의 목을 따 피를 받아서 번제단 뿔에 발라서 죄 사함을 받게 하였다.

인간이 죄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반드시 희생의 제물을 가지고 와야 했었다.
죄를 지은 사람이 그 짐승에게 반드시 안수를 해서죄를 넘기는 것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시었는데이것을 하나님 법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그 사람은 죄 사함을 받게 해주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은총의 약속이셨다.
하나님은 사람이 <연약하고> 신실치 못한 것을 아시고 1년동안 밀렸던 모든 죄들을 하루에 단번만에 넘기는 일을 매년 7월 10일로 정해 놓아 주시었다.
하나님은 사람이 마귀에게 속아서 매일 죄인으로 살게 될까봐 세상 죄를 단번에 사하셨다.
그 희생의 양에게 하나님 앞에만 죄를 없애 놓으시고죄의 값을 지불하면 그 다음에 사람이 알지 못하고 매일 죄의 빚쟁이로 속아 살까봐, 사단 마귀에게 종노릇할까봐 두군데 우리 마음과 하나님의 심판책에 기록된 죄를 다 사하신 것을기록해 두시었다.
성경에서의 일년치의 대속의 제사는 대제사장이구약의 사람들은 염소나 양을 두마리 가지고 와서 한마리는 하나님 앞에, 또 한마리는 사람들 앞에서 죄를 넘기는 일을 행하게 하였다.
친히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자를 한 사람 세우시었는데이것이 하나님 여호와의 지혜이었다.
대표원리는 바로 누구의 지혜이었냐면 하나님의 지혜이었다.
이스라엘 민족 대표자가 희생 제물의 머리에다가 손을 얹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다 넘기어서 손을 떼면 자기가 친히 목을 따고 피를 받아서 번제단 뿔에발라야만 되었다.
성막의 번제단 뿔은 하늘 나라 예수님 앞에 있는 <심판책>을 말씀하였다.
대제사장이 안수하고 죄를 넘겨서 희생의 제물의 피를번제단 뿔에 발랐다.
피는 사람의 생명이었다.
번제단 피를 발라서 하나님 앞에 1년 동안에 밀렸던 그 모든 죄값을 이 희생의 제물로 말미암아 지불하셨다.
하나님은 번제단 뿔에 발린 이 피를 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아! 이 사람들을 대신해서 값이 지불되어졌구나 희생을 당했구나 대신해서 죽었구나”라는 것을 아셨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값이 지불됐으면 도저히 심판할 수가 없다.
그 다음에 우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여있는 앞에 짐승을 한마리 가져와서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 아론이 안수를 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1년동안 지었던 <모든 불의와 모든 죄를 다 고하고 넘겨서> 이 짐승을 사람을 시켜서 광야에갖다버리는 일을 하게 하셨다.
그 광야로 끌려간 염소는 이스라엘 민족의 1년치 죄를 짊어지고 매~ 매~ 하고 가다가 광야에서 목이 말라서픽 쓰러져 죽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의 죄 사함의 방법이었다.>

인간들의 죄에 대한 심판을 인간들에게 내리지 아니하시고 희생의 제물에게 내려서 인간을 구원하신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었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래서 예수님 세례와 피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는 것이다.
일년치 속죄 제사로 사람의 모든 죄를 없애 주시겠다.
이렇게 약속하신 그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죄를 짊어지고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다” 라고 지혜로 궁리를 해내시었다.
인간이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안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죄를 자기 아들에게 짐 지우는 그 일을 해야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가 있으셨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죄를 단번만에 없애는 그 일을하나님 당신께서 <궁리해 내시고> 그것을 시행하시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1년동안 밀렸던 모든 죄가 7월 10일 대제사장(이스라엘 민족의 대표 한 사람)인 아론을 통해서 희생 제물에게 안수할 때 다 넘겨졌다.
안수라는 말은 ‘대속한다 넘어간다 전가된다 장사지낸다’ 라는 뜻이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
예수님이 행하신 <기묘한 일> <불가사의한 일>을 하루만에 자기 아들을 통해서 이 땅의 모든 죄를 한번만에 깨끗하게 없애서 이 세상에 평강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평화스럽게 살게 해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고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그래서 사람의 죄에 대한 구원의 완성을 이루시려고 우리 주님은 약속하시고 실질적으로 이 약속을 행하셨다.|

마 1:18-25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예수란 말은 구원자이고 그리스도란 말은 왕이란 말이다> 즉 메시야, 구원자란 말이다.
하나님이 처녀의 몸을 통해서 태어났는데(인간의 몸을 빌려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이신, 구원자이신 예수’ 구원자 이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도 하고 인간이시기도 하면서 죄는 없으시되 인간을 모든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구원자 예수님이시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마1:21-22) 하나님이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대로 주님께서 시행하시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평이 영원토록 보존될 것이다.
하나님이 공평하게 말씀하시고 그것을 행하시었다.
우리 하나님은 <기묘한> 정말 불가사의한 일을 했고 진정 우리에게 평강을 주었고 또 공평으로 정의롭게 행했고 정말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약속하신 그대로 다 이루어 구원해 주셨다.






고난의 종 예수 그리스도(이사야 53:1-12)

구약 성경은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약속과 예언을 담은 책입니다.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의 약속과 예언을 성취하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다시 오실 즉 재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책입니다.
이사야 53장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53장1절 누가 우리의 전하는 소식을 믿었는가?
누구에게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셨는가?

이사야 53장은 메시야 예수님에 대해 말씀한다.
메시야는 그리스도 혹은 구원자 라는 말이다.
이사야 53장은 모든 백성의 죄를 위하여 대신 고난 받으실 것을 예언한다.

영광의 왕이 아니라 겸손하고 볼품없는 고난받는 종 혹은 노예 혹은 종놈 혹은 머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예언이다. 유대인은 영광스런 왕의 모습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자가 메시야로 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종의 모습은 낮아지고 고난받고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종의 모습이다.
이것은 인간의 자존심이나 교만이나 세상적인 생각과 반대되는 것이다.
하나님깨서는 우리가 혹은 새람들이 기대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경우가 자주 있다.
메시야의 능력은 겸손과 고난과 긍휼로 나타난다.

53장2절 연하고 새파란 순처럼, 마르고 황폐한 땅속에서 뿌리에서 솟아나오는 것처럼 나의 종은 여호와 앞에서 자랐다. 그의 외모는 아름답지도 장엄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그에게 끌릴만한 것이 없었다.
   이 종의 육체적 외모는 아름답지 않았다. 위엄을 갖추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헐리우드 미남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 때문에 예수님의 모습이 잘못 그려졌다. 이사야 53장을 보면 못생기고 키가 작고 초라한 모습이다.
   이스라엘은 그 종의 중요성을 잘못 계산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평범한 사람으로 여겼다. 예수님의 육체적 외모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구원과 치유를 가져오신 분이다.
53장3절 그는 멸시받고 거절당했다. 슬픔의 사람이요 비통한 아픔을 겪었다. 우리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가 갈 때에 우리는 다른 길을 바라보았다. 그는 멸시당했다. 우리는 신경쓰지 않았다.
   이 슬픔의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거절당했다. 오늘날 현대인들도 예수님을 멸시하고 거절한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맞서서 그리스도 구주이심을 받아들이길 거절한다. 다른 이들은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그분의 용서의 큰 선물을 무시한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멸시합니까? 거절합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영접하십니까?
53장4절 그러나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셨다. 그가 감당하신 것은 우리의 슬픔이었다. 우리는 생각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그 자신의 죄 때문이다 라고.
53장5절 그러나 그는 우리의 죄 때문에 상처받고 상하셨다. 우리가 평강을 얻도록 그가 매를 맞으셨다. 그가 채찍을 맞으니 우리가 치유함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받으셨다. 구약 시대 백성은 어린 양을 죽여서 제물로 바쳤다. 하나님의 택하심 받은 종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어린양 이시다.
53장6절 우리 모두는 양과 같아서 방황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떠나서 우리 자신의 길을 갔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우리 모두의 범죄와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서 방황하는 모습을 돌아다니는 양에 비교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메시야 즉 목자를 보내시고 택한 백성을 다시 우리 안으로 모으고자 하셨다. 우리는 교회를 말한다. 택한 백성을 교회 안에 모으신다.
   요한복음 10장11-16절은 선한 목자 예수님을 소개한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삯군 즉 돈만 바라는 자는 목자도 아니고 양도 자기 양이 아니다. 이리가 오거나 위험한 일 혹은 손해나는 일에 있으면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 목자없는 양은 이리가 빼앗고 해치게 된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주님의 양을 안다. 양도 주님을 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신다. 예수님도 아버지 하나님을 안다. 목자 예수님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우리 즉 교회안에 들어오지 않은 택한 백성이 교회 밖에 있다. 그들을 예수님이 교회 안으로 인도하신다. 교회 밖에 있더라도 택한 백성은 즉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성령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과 저를 통하여 교회 밖의 택한 백성이 복음을 듣고 즉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53장7절 그는 압제받고 거칠게 다루어졌다. 그러나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린 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갔다. 털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처럼 그는 그의 입을 열지 않았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위하여 짐승을 제물로 바쳤다. 죄없는 여호와의 종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그분 자신을 바치신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드려진 어린양이시다.
   요한복음 1장29절에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계시록 5장 6절-14절에 어린 양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서 있다. 일찍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다. 성도들과 천사들이 어린 양을 찬양한다. 세상 나라 속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린 어린 양을 왕으로 찬양한다.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 부, 지혜, 힘, 존귀, 영광,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천천 만만 천사들이 어린 양을 찬양한다. 하늘, 땅, 바다, 땅아래 모든 피조물이 어린 양을 찬양한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아버지와 어린 양에게 찬송, 존귀, 영광,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메시야 어린 양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 우리의 죄를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으시게 하셨다. 인간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
53장 8절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다. 그러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죄없으신 예수님은 부당한 재판을 받으셨다. 사람들의 죄, 우리의 죄를 대신해 받을 형벌을 예수님이 받으셨다.
53장9절 그가 악인과 함께 무덤에, 그의 주검이 부자와 함께 있었다. 그는 포악을 행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 악독이 없었다.
악인과 부자를 나란히 말하는 것은 부자를 악인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일 수 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악한 짓을 많이 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모든 부자가 악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정당한 부는 인정해야 한다.
   마태복음 27장 57절-60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임을 당하신 후에 장사지내는 내용이 나온다.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도 예수님의 제자였다.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달라 해서 허락을 받았다. 요셉이 깨끗한 세마포로 예수님의 시신을 쌌다. 바위 속에 자기의 새 무덤을 준비했는데 거기에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했다. 그리고 큰 돌로 그 입구를 막았다.
그래서 이사야 53장 9절의 악인과 함께 무덤에, 주검이 부자와 함께 라는 말씀은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예수님은 죽음의 형틀, 무덤으로 가는 도구인 십자가에 강도들, 악인들과 함께 나란히 매달리셨다. 그리고 죽으신 후에 부자의 무덤에 장사되신 것을 미리 예언한 말씀으로 해석한다.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53장 10절 그러나 그를 상하게 하는 것, 고난을 받게 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었다. 여호와깨서 그의 생명을 속죄 제물로 삼으셨다. 그는 그의 후손을 볼 것이고 그의 날들은 길 것이다. 여호와의 선하신 즐거움이 그의 손 안에서 형통하리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적인 자손을 바닷가 모래알갱이 처럼 많이 보신다. 영원히 살아 계신다.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과 저도 육적 영적 자손을 많이 보고 이 땅에서도 천국에서도 영원히 사실 것을 바라보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출처: https://aretz.tistory.com/entry/고난의-종-예수-그리스도 [아레츠]



오늘의 말씀 요약

흠모할 만한 것 없어 보였던 하나님의 종은 멸시와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가 징계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우리 죄악을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그는 곤욕을 당해도 잠잠했고, 강포를 행하지 않았고 거짓이 없었습니다.

멸시받는 종 53:1~3

이사야서는 구약성경 중에서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가장 많이, 그리고 생생하게 다룹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구원의 능력이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을 예언합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는 사람들이 보기에 초라하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위엄과 존귀도 없고, 메시아로 인정받을 만한 모습을 전혀 갖추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에게 냉대와 멸시를 받고, 결국 버림받습니다.
무지한 사람들에게 무시와 모독, 배척과 배신을 당해 죽음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유대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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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하나님의 응답이 내 기대와 다른 경우에 나는 그 응답을 어떻게 받아들이나요?

고난받는 종 53:4~9

죄와 사망 아래서는 슬픔과 질고를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과 질고를 메시아에게 대신 지게 하십니다. 그는 하나님을 배반한 우리를 대신해 극한의 고난을 당합니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 뜻에 복종해 묵묵히 고난의 길을 갑니다. 하나님은 제 길로 행하는 양처럼 그릇 행하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켜 평화와 회복으로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땅히 자신이 받아야 할 하나님의 저주를 그가 대신 받은 것임을 도무지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와 사망을 대신 지시고 우리가 받을 저주를 다 받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에 우리의 죄 문제가 온전히 해결되었고,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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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대신 고통을 받으심으로 우리는 어떤 은혜를 입게 되었나요? 십자가 길을 걸으신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위해 나는 어떤 결단을 해야 할까요?

오늘의 기도

어리석고 무지한 양 같은 저를 대신해서 묵묵히 죽음의 자리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찔리심이, 상하심이, 죽으심이 헛되지 않도록 날마다 죄악에서 떠나 의의 길을 걸으며 거룩한 삶으로 주님을 높이게 하소서.


2000년 4월 16일
고난의 종 예수 그리스도
이사야 53:1-12

하나님의 아들이 동정녀의 몸을 빌어 인간으로 오셨고 그의 짧은 33년의 삶이 고난에 점철된 삶이었으며, 종국에는 범죄자 중 한 사람으로 취급받아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나 3일만에 부활하사 인류의 구주가 되셨다는 사실은 너무나 놀랍고 기이하여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2장 13절로부터 15절에 이 놀라운 사실을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예수님께서 이왕에는 얼굴이 얼마나 얻어맞아서 타인보다 상하여 형상을 알아 볼 수 없게 되었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여서 오는 사람마다 머리를 흔들고 혀를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그가 온 천하 만국을 놀라게 하고 온 백성들로 놀라게 할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라는 사실이 전파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일생에 관해서 주님 오시기 600년내지 700년 전에 너무나 밝히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예언의 말씀을 오늘 알아보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으며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예수님의 출생과 생애를 계시 받은 이사야는 너무나 놀라운 사실에 그는 큰 충격을 받고 그는 머리를 흔들며 말했습니다.

이 사실을 전한들 누가 믿어 주겠느냐!
여호와의 팔 즉,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기 전에는 아무리 외친 들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너무나 놀라운 사건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2절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출생과 신분을 그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53장 2절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사야가 환상 가운데 보니까 예수님이 자라나는 것은 연한 순 같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하늘과 땅과 세계와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이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의지할 것 없는 피덩어리 어린 아기로 여린 순같이 태어나는 것에 감탄해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또한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다.

예수님이 태어난 그 토양이 마른 땅 같다.
다시 말하면 그는 큰 부잣집에 태어난 것도 아니고 권세 있는 자의 집에 태어난 것도 아니고 제사장이나 지식인의 집에 태어난 것도 아니고 멸시받고 천대받는 나사렛의 가난한 한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으니 그 태어난 토양이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습니다. 부잣집 아들로서의 풍채도 없고 권세 있는 자의 자식으로서의 풍채도 없었습니다. 지식있는 자의 당당한 풍채도 없이 그는 태어났으나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아니하고 아무도 그 울음소리에 특별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 너무나 평범하고 비천한 자리에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보고 그를 귀하게 여기거나 흠모할 만한 아무 것이 없다고 여겨 이사야는 탄식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와같은 모습으로 태어났으니 누가 이 소식을 믿을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서 특별히 계시를 주지 않는 바에야 누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겠냐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53장 3절에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짧은 생애를 전반적으로 이사야는 개요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아서 싫어 버린 바 되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종교단체에서 완전히 이단으로 버림을 당하고
로마 정치권에서 완전히 경계 대상이 되고 버림을 당했으며 상층 사회 부자 지식인들에게는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에게 완전히 싫어 버림을 당한 그러한 일생을 살았습니다.
간난신고를 많이 당했습니다. 풍찬노숙을 하고 그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배고픔도 경험하고 추움도 경험하고 고통도 경험했습니다. 간난신고를 많이 겪고 그러나 질고를 아는 자였습니다. 병든 자는 주님께서 결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병든 자나 육체에 병든 자는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짐을 짊어지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치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아 멸시를 당했습니다. 어느 곳에 가나 예수님은 권세 있는 자나 부자나 지식인이나 상층인들에게는 완전히 얼굴을 가리움 받은 자 같아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어느 곳에 가나 버림받은 사람, 가난한 사람, 범죄자들, 세리들과 창녀의 친구가 되고 그들을 구원한 분이 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를 사람들은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인물이나 존귀한 인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요사이 말하면 신문 인터뷰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TV에 그 모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그를 보고 흠모하여 따라 다니는 것도 아니고 온전히 세상에서 그는 소외당하고 멸시 당하고 천대를 받고 인정을 받지 못한 삶을 살았었습니다.
이사야는 어떻게 그 손으로 저 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지으시고 그 손으로 깊은 바다를 파내시며 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을 지으신 그분이 이와같은 삶을 살았을까?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겠는가? 누구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서 이것을 믿게 하겠는가? 그는 탄식을 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이사야 53장 4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지신 예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로 예수님의 그 삶의 의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는 가짜가 아닙니다. 형식이 아니라 진짜로 우리의 질고를 걸머졌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병, 육체의 병, 주님께서는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습니다.
여러분 육체의 건강은 우리의 삶의 기본입니다. 사람이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입니다.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은 것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립니다. 건강 없이는 우리 존재가 없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건강에 대해서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짊어졌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 우리는 아담 하와 이후로 이 땅에 행인과 나그네로 살면서 기쁨의 날은 짧고 슬픔의 날은 깁니다.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언제나 슬픔의 쓴 연못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우리의 슬픔을 없애주기 위해서 우리의 슬픔을 주님 대신 당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일생은 고난의 일생이었으며 슬픔의 일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소리내어 웃었다는 말이 없습니
다. 왜냐하면 언제나 우리의 슬픔은 자기의 슬픔으로 깊이 영혼 속에 받아들이고 살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서 매를 맞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하나님이 사랑한다면 왜 하나님의 아들이 저렇게 소외되고 버림받고 헐벗고 굶주리며 고난의 종, 슬픔의 종이 되었을까? 이제는 하나님께 매 맞으며 버림받고 고난 당한다고 오해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대속의 슬픔과 고난을 당하고 있는 의미를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고 이사야는 탄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도 마태복음 8장 16절에로 17절에 보면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십자가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것
을 우리는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의 허물과 죄와 징계를 대신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전혀 그것을 알지 못하나 그리스도가 와서 이 땅에 사심은 그 깊은 대속의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그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혔습니다. 우리도 비디오에서 전에 보았지만 얼마나 쓰리고 아팠겠습니까? 그 찔림은 우리의 허물, 손으로 지은 허물, 행위로 지은 허물, 허물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우리의 허물은 예수님께서 그 손발로 찔림으로 다 짊어지시고 그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버림받고 얻어맞아서 상처를 입어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상실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영혼이 상처를 입은 것은 우리 죄악 때문입니다.
아담 하와 이후로 하나님을 거스르고 법을 거역한 우리의 죄악을 처음부터 끝까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다 주님께서 책임을 지셔서 그렇게 얻어맞은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쫓겨 났을 때에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는 항상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는 징계를 받아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시편 21편 1절로 2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버림당했습니다.

왜? 우리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
을 거역한 그 죄를 대신 짊어지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
님께로부터 징계를 받아 쫓겨났습니다. 버림받았습니다. 어
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
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나이까? 그가
그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하나님
과의 화목을 얻고 평화를 얻게 되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그가 빌라도의 뜰에서 로마 군인들에게 서른 아홉 차례
의 매를 맞고 등이 다 찢어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줄
기줄기 피를 흘렸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우연히 매
맞은 것이 아니라 그가 채찍에 맞아야 우리가 고침을 받는
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앓는 이 모든 병을 예수님께
서 대신 채찍으로 그가 고통을 당해야 그 대가로서 우리가
치료함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53장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
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 성
경은 분명히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양들은 자기가 좋은
풀밭을 찾아서 마음대로 흩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처럼 우
리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을 따라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가고 하나님은 생각에 두지도 아니
하고 하나님의 법은 다 짓밟아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머리의 죄악을 예수께 담당시켰습
니다. 네가 짊어져라 네가 맏아들로서 네가 다 짊어지고
네가 저 범죄를 다 청산하라.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세
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독생자
가 책임을 다 지고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에 있다고 말합니
까?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보내신 아들로 나타난 것입니
다. 그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변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나심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물질적으로 부요한 가정에 남편은 항상 돈 버는 데
에 몰두하여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늦게 집에 들어
왔습니다. 부인은 굉장히 성격이 다정다감한 부인이라 남
편과 대화하기를 원하고 웃고 울고 즐기길 원했으나 도무
지 남편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가고 저녁에 늦게 들어오며
피곤해서 잠자고... 대화의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남
편에 대한 상당한 불만족이 있고 마음이 우울했는데 그 부
인이 맹장염에 결려서 거기가 터져서 복막염이 되었습니
다. 빨리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았으나 병이 중하고 극도
의 빈혈에 걸려서 이제는 죽게 되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은 이 부인은 삶의 의혹을 잃어 버렸습니다. 이
젠 살 필요가 없다. 나는 사랑 받지도 않고 이 세상에 아
무 필요 없는 존재이니까 이젠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다고
삶의 의욕을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곳은 시골 병원이라
시설이 별로 없는데 수혈을 해야 하는데 그 남편의 혈액형
과 부인의 혈액형이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급하니까 남편
이 당장 부인 앞에 와서 팔을 걷었습니다. 그리고 주사 바
늘로 남편의 혈관에 주사를 꽂고 다른 주사기를 부인의 혈
관에 꽂았습니다. 부인이 삶의 의욕을 다 잃고 자기는 버
림받았다고 생각하고 희미한 기억을 가지고 보니까 남편의
그 팔에서 붉은 피가 자기의 혈관 속으로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 부인은 마음에 크게 감동
을 느꼈습니다. 여태까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출근하고
저녁에 늦게 들어와서 말없이 자고 자기를 버린 것 같았지
만 이제보니 자기가 오해했구나. 남편이 자기의 생명의 피
를 그냥 직접 꽂아서 부어주는 것을 보고 남편에 대한 사
랑을 깨닫고 살아야 되겠다는 삶의 의욕을 다시 갖고 그
병을 이기고 건강하게 되었다는 간증을 잃어 본 적이 있습
니다.
여러분 사랑은 말로써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을 말로
만 한 것이 아니라 증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켰다고 이사야는 외쳤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의 모습을 이사야는 우
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53장 7절에 보면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
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
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절대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 죽으러 오셨습니다.
그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가 네가 이 잔을 마시고 백성들을
위해서 대신 죽는 것이 나의 뜻이라 이렇게 아버지가 알려
준 이상 그가 잡혀갔을 때 이제는 살려고 변명하지 않았습
니다. 빌라도의 뜰에서 온갖 질문을 다하고 온갖 거짓 증
언을 다해서 그는 입을 다물고 대답을 안 했습니다. 살려
고 했다면 변명을 했겠지만 주님은 이미 죽기로 작정하신
분입니다. 죽기로 작정한 분이 그가 살겠다고 질문에 대답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므로 그는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주님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 8절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
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
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
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는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고 하나님이 제물이 되라고
하셨으므로 그는 인류를 위해서 속죄제물, 속건제물, 번제
물, 화목제물, 소제물이 되도록 자기를 내어놓았기 때문에
이제는 그를 위해서 스스로 살겠다고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혹독한 질문과 거짓말과 거짓 증언에 대해
서 주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장엄한 침묵을
지킨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죽음으로써 순
종하겠다고 결의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사야서 53장 8절에 보면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
이라 하였으리요"
그가 곤욕을 당하고 심문을 당하고 끌려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아무도 그가 산 자의 땅에서 저렇게 비
참하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이 땅에 있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
다. 이단과 사설을 주장하는 사람을 처형하는 줄 알았고
로마 정권에 저항하는 사람을 처형하는 줄 알았지. 그가
우리를 위한 대속 제물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 때 그 당시
에 누가 깨달았냐는 것입니다.
시편 22편 6절에서 8절에 보면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
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
지실 걸 하나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서 희생 제물이 되어서 자기를 불 가운데서 구원하러 오셨
는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비난하고 조롱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
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
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여
러분 무지가 사람을 죽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
한다고 말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
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모르면 멸망 당합니다. 오늘 예수
믿는 사람은 위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가지지 않은 위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
님이 계신 것을 아는 지식이요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우리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속 제물
이 되었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지식
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지식입니다. 이
여호와의 팔이 나타나서 계시해 주시지 않고는 이런 지식
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있으면서도 이 세상이 어떻게 될 줄 알고
있습니다. 오늘 정치인들도 모르고 학자들도 모르고 과학
자들도 모르지만 우리는 장차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을 환하
게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고함
과 하나님의 나팔로 하늘로 쫓아 강림하시리니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사람 남은 이들이 다 변화되어
하늘로 올라가서 주를 영접하고 그 때부터 칠년 환난이 이
세상에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
니다. 우리가 같은 이 위대한 이 지식을 이 세상 사람들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와같은 놀라운
지식을 준 것을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이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
어진 것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야
하였느냐? 이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너무나 탄
식스럽고 너무나 불쌍합니다.
이사야서 53장 9절에 보면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
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
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예수님은 주먹을
쓴 적도 없고 예수님께서는 폭력 행사를 한 적도 없고 예
수님은 깡패 두목이 된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는 사람을 속이고 등치고 간을 빼앗아 먹는 세속적인 비즈
니스맨같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가 십자가에 죽었을 때에 그 무덤은 악인들이 묻
히는 공동묘지에 그것도 한 부자가 파 놓은 묘실에 들어간
다고 예수님 오시기 600년 전에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7장 57절에서 60절에 보면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
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
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예수님은 악인들
과 같은 공동묘지에 갔지만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가 죽으
면 들어가려고 파 놓은 그 부자 요셉의 무덤에 주님이 들
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명명백백하게
이사야에게 예수님의 죽으심을 그 무덤까지 예언해 주셨습
니까? 이것을 보고 이사야는 너무나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 이 사실을 믿겠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와
서 죽어서 무덤에 들어 갈 것을 누가 믿겠는가? 여호와의
팔, 계시가 나타나기 전에는 누가 이 사실을 알겠는가 하
는 것입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꿈과 소원을 예수님은 이로써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사야서 53장 10절로 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로 상
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
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
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
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
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여
기에서 하나님의 꿈을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성취했다
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꿈은 하
나님께서 예수로 상함을 받기 원하사 우리의 질고를 당케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병이 낳아도 좋고 안 낳아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병 낳게 하시려고 하나님께
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처를 받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꿈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
이 병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
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질병을 당하
게 하셨으니 오늘 하나님이 얼마나 여러분이 병고침을 받
고 건강하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
다. 그 영혼이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영혼을 하나님 앞에 죄를 위한 속
죄제물, 속건제물이 되어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 바치게
되면 그 후손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생명의 씨앗이 되는 것입
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한다. 여러분의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한 것이 아버지의 뜻이요 소
원입니다. 이 아버지의 뜻과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
이 십자가에 올라가서 죄악을 담당하고 우리 질병을 담당
하고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하
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소원이 있습니다. 이
소원 성취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룬 것입
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사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으
셔서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예수님이 자기 십자가에 고난 당하고 수고한 그 결과로 예
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죄인이 용서받고 구원받고
귀신이 쫓겨나고 병 고침 받고 저주에서 해방 당하는 것을
보고 주님을 만족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고난 당하는
것 잘 했도다, 내가 고난 당하고 괴로운 그 결과로 이와
같은 은총이 백성들에게 임하는 것이 참 즐겁다. 나의 의
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
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셨다. 우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
고 많은 사람을 의롭게 만들었다.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사람처럼 만들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
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의 소원을 성취했
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소원만 성취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이 우리 속에 성취된다, 하나님의 소
원은 여러분이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며 강건하
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것이 하나님이 소원인 것입니
다. 이 소원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셨습니다. 예수
님이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할 때 나는 아버지
의 소원을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도 안에서
아버지의 소원을 여러분께서 성취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서 53장 12절은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심과 자
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얼마나 기
뻐하고 그리스도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여기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
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
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
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 세상의 흉악한 범죄자중 하나로
취급받아 우편 강도 좌편 강도 사이에서 하나의 범죄자로
취급받아 그가 십자가에 죽고 음부까지 내려갔으나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범죄자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죄
를 대신 짊어지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우리의 영혼
이 구원받기 위해서 기도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너무나
너무나 아름답게 여겨서 존귀한 자 즉 하나님과 함께 분깃
을 얻게 하고 강한 자 즉 전능한 하나님과 함께 탈취한 것
을 나누고 탈취한 것이 뭡니까? 이 죄악에 빠지고 마귀에
게 빼앗긴 영혼을 탈취해내서 이 백성들을 함께 다스리고
함께 누리겠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9절에서 11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
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
셨느니라"

이사야는 주전 600년내지 700년전에 하나님의 계시를 통
하여 예수님의 탄생과 고난과 부활과 승리를 일목요연하게
예언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언이 2000년전에 이미 역사
적으로 하나도 남김없이 다 이루어진 사실을 밝히 보고 감
격과 감사를 느낍니다.
여러분 이제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태어남과 삶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은 아버지의 소원을 이룬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성취한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뜻과 소원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며 강건하게 살다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오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인 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
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몸 찢고 피 흘려 고난
당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실 때에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의 자비와 긍휼을 깊이 감사하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일생을 던져서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처참하리만 큰 고난을 우리는 깊이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아버지 앞에 나아가 우리는 마귀에게 빼앗긴 모든 것을 탈취해야 할 것입니다. "세례 요한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 값 주고 사셨으니 용서와 의를 우리는 탈취해야 되고 천국과 성령충만을 탈취해야 하고 마음의 평안과 건강을 탈취해야 하고 우리는 아브라함의 축복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탈취해야 하고 부활과 영생을 믿음으로 빼앗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이 고난 당했는데 우리가 왜 그 고난을 무로 돌리게 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
유를 주셨은즉 그러므로 믿음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