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삼위일체


삼위일체(三位一體)

일체에서 ‘하나’의 의미는 숫자가 아니라 세 위격이 상호 내재 연합된 ‘공동체적 하나님’을 말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표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존재를 서술하는 신비이며, 인간의 언어와 사고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특별한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상식적인 사고로는 잘못된 이해에 빠지기 쉽고, 오히려 바른 이해가 어렵습니다.


삼위일체론의 두 방법


인간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연구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내적인 관계에 접근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기술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이해한 삼위일체에 대한 이론을 ‘내재적 삼위일체론’이라 부른다. 삼위 하나님을 반드시 ‘존재론’적으로 규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중요하다. 하지만 내재적 삼위일체는 삼위의 내적인 관계이며, 삼위가 존재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인식하기 어려운 한계를 가진다. 또 삼위일체를 존재론적으로만 논하면 사변적이 되어 공허해진다.


다른 하나는 삼위가 역사 속에서 행하신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인식하는 방법이다. 성경에는 성부, 성자, 성령의 행위에 대한 풍부한 기록이 있다. 이렇게 삼위의 역사 섭리를 통해 이해하는 방법을 ‘경세적 삼위일체론’이라 부른다. 성경은 모호하게 삼위에 대해 말하지 않고 구체적 행위에 근거해서 말한다. 하나님의 활동과 역사는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경험되고 인식된다. 이 점에서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장점이다. 그러나 경세적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의 ‘존재’에 근거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은 인간에게 경험되는 어떤 ‘기능’이나 ‘현상’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접근할 때는 경세적 삼위일체로 시작하고, 그에 근거해서 내재적 삼위일체를 함께 이해하는 방법이 좋다. 하나님의 활동은 반드시 그의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에 경륜과 내재는 분리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칼 라너는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내재적 삼위일체론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경세적 삼위일체론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했다.


일체는 숫자가 아니라 공동체


이제 삼위일체에 대한 적절한 개념과 표현을 보자.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숫자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아주 나쁜 접근방법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이 숫자적으로 ‘하나’의 본질이나 신성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다. 삼위일체론에서 한 분 하나님과 세 인격체(person)라는 표현을 할 때 한 하나님의 ‘하나’와 세 인격체의 ‘셋’을 같은 평면에서 다루면 안 된다. 즉 3과 1을 동일 평면에서 이해하면 셋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셋이 되는 모순에 빠진다. 인간의 이성으로 볼 때


‘3=1’이 될 수 없다. 이렇게 삼위와 일체를 숫자로 이해하면 삼위일체는 매우 비합리적이고 모순적 교리가 된다.


성부, 성자, 성령을 모두 신성이라고 인정한다면 결국 삼위일체론의 핵심은 ‘하나’를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관건이다. ‘하나’는 숫자가 아니고 세 위격이 함께 연합해서 가지는 공동체성을 의미한다. ‘일체’는 세 위격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상호 내재해 있는 ‘연합이며, 삼위의 의지와 구속 사업이 서로 상반되지 않고 통일을 이루는 ‘공동체’를 뜻한다.


최근에 삼위의 공동체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를 사용한다. 페리코레시스는 상호 내재적, 순환적, 침투적이라는 의미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페리코레시스’ 곧 상호통재(相互通在)를 통해서 일체되시는 ‘공동체적 하나님’을 형성하고 있다.


이 통일성 때문에 성부는 성자 안에 전적으로 계시고, 성령 안에 전적으로 계신다. 성자는 성부 안에 전적으로 계시고, 성령 안에 전적으로 계신다. 성령은 성부 안에 전적으로 계시고, 성자 안에 전적으로 계신다. 페리코레시스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계신 것이 아니고 상호 침투하셔서 성부는 성자 안에, 성자는 성부 안에, 성부와 성자는 성령 안에 거하시는 공동체라는 의미다.


삼위는 함께 역사


기독교 역사에서 오랫동안 성부, 성자, 성령이 가지는 고유한 속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부를 전능, 성자를 전지, 성령을 전선이라고 표현했다. 성부를 태초의 근원, 성자를 지혜, 성령을 덕성으로 부르는 것도 유사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최근 삼위의 속성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됐다. 삼위가 자신만의 고유한 속성을 가지면 결국은 삼위의 완전한 일치가 깨지고 삼위가 분리된다.


삼위의 역할과 경세도 마찬가지다. 만약 성부가 천지창조의 행위를 하고, 성자는 십자가에서 대속적 죽음으로 구원사업을 하고, 성령은 성화의 영으로 피조세계에 임한다고 생각하면 삼위는 각자 고유한 영역을 가지게 되고 결국 삼위의 공동체성이 훼손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신학계에서는 삼위가 함께 활동하신다는 표현이 더 좋다고 본다. 예를 들면 천지창조는 성부의 단독 행위가 아니라 성자와 성령이 함께 하신 사건으로 본다. 또 십자가의 구원도 예수님의 단독 행위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행위이고, 성령님의 성화도 성령 홀로가 아니라 삼위의 역사로 본다.


성경이 어떤 사건을 때로는 성부, 때로는 성자, 때로는 성령의 행위로 표현하지만 그 의미는 삼위가 함께 역사하신 것으로 보면 되겠다. 즉 십자가 사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성령을 ‘통해’ 행하신 구속사업인 것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삼위일체 르네상스 시대를 맞고 있다. 삼위의 온전한 사귐 안에서 인간사회의 자유와 평등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찾기도 하고, 삼위일체를 실천적이고 해방적 교리로 해석하기도 하며, 삼위의 섭리 형태를 생태계와 우주를 포함하는 사상으로 발전시키는 모티브로 삼기도 한다. 삼위 하나님에게 다가가려는 노력 속에서 온 피조세계가 하나님 안에 안길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를 기대한다.


김동건 교수 <영남신대 조직신학, 저자연락은 페이스북 facebook.com/dkkim222>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7031206



국 문 초 록 오늘날 한국교회는 엄청난 위기 가운데 서 있다. 안으로는 기독교정체성의 약화로 신앙이 흔들리고 있고, 밖으로는 공적신앙의 결여와 실천의 부족으로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정체성이 약화되면서 기독교 신앙을 갖는 이유가 '구원과 영생'이라는 종교적 이유에서 '마음의 평화와 안정'또는' 건강, 재물, 성공'과 같은 기복적 내용으로 바뀌고 있고, 청소년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회심하는 비율이 점차 낮아지고 있으며, 한국교회의 성장이 급기야는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교회학교는 급속도의 감소를 보이며 붕괴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공적신앙의 결여와 실천의 부족으로 한국교회가 선교초기부터 감당해 온 공적역할들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으며, 도덕적 윤리문제로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고, 신앙과 일상생활이 일치되지 않는 이원론적인 삶을 살고 있고, 한국을 대표하는 불교, 천주교, 기독교 중에서 가장 낮은 신뢰도를 갖고 있다. 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을까? 첫째로, 신학적으로 그 원인을 분석해 보면 사랑을 이야기하는 기독교가 신학적인 차이로 인해 분열하고 깨지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고, 참 진리를 말하는 기독교 안에 너무나 많은 이단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전적 모습을 보지 못하고 성부의 창조에만 집중하여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자유주의 신학, 성자의 구속에만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초월성만 강조한 근본주의 신학, 그리고 인격적인 성령 하나님의 모습을 개인적 체험과 경험으로 제한시키는 오순절 성령주의 운동의 통전성 상실에서 오는 파편화 현상이 한국교회의 이중적 위기를 초래하였다. 둘째, 철학적 관점에서 그 원인을 살펴보면, 포스트모던이 갖는 다원주의와 상대주의가 기독교정체성을 바로 정립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 교리가 이 시대 가운데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종교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또한 근대 객관주의 인식론의 영향으로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고, 객관적인 지식위주의 신앙은 아는 것을 실천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원론적 신앙을 양산하였다. 셋째,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그 원인을 분석하면,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전 세계가 일일생활권이 되고,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시청하는 세계화의 영향으로 기독교정체성이 혼란을 입게 되었다. 또한 지구적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종교적 세속화가 일어나고, 소통이 화두인 세계화 물결 속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게토화 되면서 더욱 위기 가운데 빠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교육적으로 원인들을 분석해 보면 이러한 한국교회의 이중적 위기의 외적요인으로는 가족구조의 변화와 저출산의 영향과 입시위주의 사회와 깨어진 가정으로 인해 고통받는 학생들의 문제임을 알 수 있고, 내적요인으로는 교회-가정-학교가 함께 신앙교육에 협력하지 못하고 교회에서만 신앙교육이 이루어지면서 신앙교육의 한계를 경험하게 되고, 제자직에 대한 교육은 많지만 공적신앙을 배양하는 신앙교육의 부족으로 공적의식과 실천이 약하고, 포스트모던 시대와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맞지 않는 교육방법으로 가르치면서 접촉점을 상실한 교육을 하는 문제로 인해 신앙교육이 교회 안에서 제대로 일어나고 있지 못하는 원인들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신학적 규범을 마련해야 하는데, 이 신학적 규범을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핵심인 '페리코레시스'안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삼위일체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되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다. 하지만,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온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헬라 철학적 영향을 받으면서 사변론적으로 흐르게 되고, 그 영향으로 이성이 지배하던 자유주의 시절을 지나면서 가치없는 것으로 신학의 변방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바로 그때 몰트만은 하나 됨에서 삼위의 위격을 찾는 서방교회 전통이 아니라, 삼위에서 하나 됨을 찾는 동방교회의 전통을 따라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주장하게 된다.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성경적 이야기를 중심으로 삼위 하나님께서 영원한 사랑 안에서 온전한 하나가 되시는 신적인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이고, 사회적 삼위일체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바로 삼위 하나님의 존재방식인 '페리코레시스'이다. 페리코레시스는 삼위 하나님께서 영원한 사랑 안에서 상호침투, 상호내주, 상호 교류하면서 온전한 하나를 이루신다는 것이다. 페리코레시스 개념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에서 발견할수 있는 것으로 '다양성과 일치,' '사랑의 관계성,' '목적지향의 연대성'의 원리이다. 둘째, 삼위 하나님의 관계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관계성,' '평등성,''개방성'이다. 셋째, 삼위일체 하나님의 프락시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페리코레시스 방식으로 성부의 창조, 성자의 구속, 성령의 영화 사역이 삼위 안에서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성부의 창조에서는 성부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성자와 성령이 함께 참여하시고, 성자의 구원에서는 성자가 주도권을 가지고 성부와 성령이 함께 참여하시고, 성령의 영화에서는 성령이 주도권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가 함께 참여하시는 원리이다. 이러한 '페리코레시스' 교육원리는 오늘날 발생되는 한국교회의 이중적 위기 해결에 대안이 될 수 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페리코레시스'기독교교육은 신학의 합리성 자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에 응용신학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실천신학이 되기 때문이다. 교육이 목적, 내용, 방법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속에서 발견되어진다. 두 번째 이유는, 포스트모던 시대와 세계화 시대에 맞는 후 인습적 자아의 모습과 새로운 교회의 모습이 정립되어야 하는데, 삼위 하나님의 관계성에서 발견되는 '페리코레시스' 원리인 '관계성,' '평등성,' '개방성'의 원리는 바로 후 인습적 자아의 모습과 이 시대 가운데 교회가 가져야할 교회의 바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유는, 교육방법에 있어 '페리코레시스'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다양성과 일치' 안에서 다양한 관점들을 통전적으로 잘 조화하여 하나 됨을 이루는 교육방법과 '목적지향적 연대'를 통해 거시적 관점에서는 총회-신학교-교회를 연계하고, 중시적 관점에서는 교회-가정-학교를 연계하고, 미시적 관점에서는 설교-성경공부-활동을 연계하는 교육을 펼치고, '사랑의 관계성'의 원리를 통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온전히 하나가 되도록 제자직과 시민직을 함께 가르쳐지고 통합되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페리코레시스'기독교교육 모델은 목회자나 교회의 프락시스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프락시스에 근거하여 기독교 프락시스를 실천함으로 하나니 나라라는 개념 안에서 기독교의 지평을 개인, 교회, 사회로 확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이러한 '페리코레시스'기독교교육 모델이 교회현장에 잘 접목되어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욱 잘 알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과 소명을 가지고, 교회가 내적으로는 기독교정체성을 굳건히 하고, 외적으로는 공적신앙과 실천을 가지고 세상과 소통하며, 선한영향력을 발휘함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한국교회가 되어 다시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여 다시 도약하는 한국교회가 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ABSTRACT Perichoresis Christian Education Model for the Korean Church: Focusing on the Double Crisis of Christian Identity and Public Faith Kim, Seong Su Major of Christian Education The Gratuate School Presbyterian University &Theological Seminary The Korean church today is in the midst of turmoil. Internally, due the weakness of Christian identity, its faith is shaken. And externally, due to the disinterest of the society from the lack of public faith and action thereafter. As the Christian identity weakens, the reason for Christian faith as 'salvation and eternal life' has changed to 'peace of mind and security,''health, material and success.' Statistically, there is a great decrease in number of adolescence coming to know Christ. Furthermore, the growth of Korean church has drastically decreased and the church school is showing rapid decline. Also, due to the lack of public faith and its action, the Korean church is unable to properly handle the public role which was handled as the mission of the church in the beginning. Moreover, the church is criticized for its ethical issues as well as the life of a believer not being consistent with one's faith, giving Christianity lowest credit in comparison to other religions such as Buddhism, and the Catholic church. Why do you suppose these issues arose? First, analyzing the issue from a theological perspective, the fragmentation from difference in theology exposed a negative Christian image. There was a great presence of cults within the Christian community, and the liberal theology unable to see the holistic view of the trinitarian God, focused on the creation of the Spirit and the pursuance of truth. On the other hand, the fundamental theology focused on the redemption and emphasis on God's transcendence; and the personal experience which the Pentecostal movement limited the personal experience of the personable presence of the Holy Spirit and the absence of the holistic theology lead to the fragmentation, causing dual crisis in the Korean church. Second, analyzing the issue from the philosophical perspective, the pluralism and the relativism in which the post modernism made a huge influence not only culturally but to the church goers making it difficult to maintain a firm Christian identity. In a pluralistic society, claiming Christianity as the true religion seemed selfish and an exclusive religion to the people in the world. Also, through the school's system of nurturing one's faith, the appearance of modern objectivism's abuse lead to subjectivism and the objectivism to be separated, and plagued the experiential Christians as knowledge driven faith seekers. Third, in analyzing from the sociological perspective, the global propagation of the western capitalist culture lead to religious secularization, and in the midst of globalization, in keeping true to the Christian identity, a wall between the society and the church was created. As combination of these issues made its way into Christian education, it made it difficult for the formation of Christian education; internally and externally. The external factors, such as globalization and post-modernism made it difficult for Christian education as it made its way into family dynamics; low birth rate, competitive education system, and the increase number of broken families. Not only that, but after the modernization everything became specialized and professionalized; the division of church, family and school not only caused noncooperation on children's faith education but a misconception that Church is the only place where children's faith education takes place. Moreover, the lack of education on public faith training with only discipleship training taking place in the church and the teaching method of the post modernism and the globalization era, the church lost its contact point creating disinterest of faith education. Moltmann criticizes the problem of philosophical and metaphysical fundamental issues of Catholic church's traditional sovereignty of monotheism, and based on the biblical narrative and following the Eastern Christianity tradition, emphasizes the social trinitarianism. Social trinitarinism is the triune God indwelling in eternal love fully becoming one, and the core principle of triune God fully becoming one is called 'perichoresis.' The principle of 'perichoresis' from the Christian Education perspective can be largely divided into three categories. First, triune God's perichoresis are based on 'unity in diversity,' 'relationship of love,' and 'purpose-oriented solidarity.' Second, in the relationship of triune God's perichoresis we can find relationship of love, mutual respect of equality, and the respected self image as one believe and follows God as an individual and as a community in the openness to the world. Third, the educational principle we can find in the triune God's perichoresis praxis are creation of the Father, redemption of the Son, glorious work of the Holy Spirit and the harmonious dialogue with the triune God, is as like fully becoming one; the principle of the Father's dialogue, the dialectical principle of the Son, the principle of the transformation of the Spirit becomes blended to form trinitarinism which result in the principle of the interdisciplinary dialogue. The 'perichoresis' Christian education can be a solution to the dual crisis the Korean church are facing today. First, information, human, and as the situation forms the educational trinitarianism, biblical centered Christian identity education, human relationship centered education, and the interpretation of scripture education, in the principle of 'perichoresis' completely fulfills one and can restore conductivity. Second, in speaking of conductivity, there is always a problem of shifting to one area. However, in the 'perichoesis' Christian education, because the 'diversity in unity' is the basic principle, the three elements are always connected, and the harmony within creates a true conductivity restoration. Finally, 'perichoresis' Christian education claims God's perichoresis praxis and because it pursues Christian education, it goes beyond the applied theology of Christian education. To go beyond the ministerial and Church's praxis, one experiencing the Christian praxis by experience God in the real world can be a education. My hope is 'perichoresis' Christian education to be a model in the church, to know more about the triune God, to take God's vision and call, establish a firm Christian identity in the church internal, communicating with the world through practice of public faith, overcoming the divided life of faith and daily lifestyle by achieving the Kingdom of God in our world so that the dual crisis which exist in the Korean church can be restored and the trust once lost can be rebuilt again within the society.

페리코레시스는 성경적인 개념인가?

전통적으로 삼위일체론에서 “삼위는 구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분리되지 않음의 근거로 페리코레시스가 제시됩니다.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는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를 뜻합니다.


역사적인 기원과 의미에 대하여서는 개혁교의학(유해무 저, p164)의 내용을 옮기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메섹 요한(670-750)은 삼위일체론에 공재(περιχώρησις :circumcessio, circumincessio)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요한복음 10:38, 14:9,11, 17:21을 근거로 이를 말한다. 물론 이 용어와는 관계없이 이 사상 자체는 이레네우스, 아타나시우스나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등 교대 교부들에게서도 발견된다. 기독론에서 Maximus the confessor(580-662)가 양성 연합에서 오는 사역의 단일성을 표현하려고 이 용어를 최초로 썼다. 신론에서는 Pseudo-cyril이 최초로 썼고, 이를 다메섹 요한이 계승했다. 이 말은 위격들의 대면적 공재와 상호 침투를 표현한다. "삼위 하나님은 상호 안에서 서로 뒤섞이지 않는 침투를 공유한다. … 성자는 성부와 성령 안에 계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계시며 성부는 성자와 성령 안에 계시나 뒤섞임이나 용해나 혼합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 공재는 본질의 단일성에 기초한다. 위격들은 동등한 본질이며 상존하고 있다. 상호 관계하며, 상호 개방적이고 상호 자기 수여적이다.”


페리코레시스와 관련하여 몇 가지 내용을 살핌으로 그 개념이 성경적인지를 살피고자 합니다.


성경적 근거의 문제
페리코레시스의 성경적 근거는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안에 있다”(요 10:38, 14:9,11, 17:21)는 표현입니다.

“안에 있다(계신다, 거한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는 상호공재를 지지하고 있는 듯하지만 잘 살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강림을 언급하시면서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요 14:20)고 말씀하셨습니다. 위의 논리를 따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각자 안에 상호공재하는 것이라고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제자들이 공재해 있고 제자들 안에 예수님이 공재해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지만 누구도 이러한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여기에서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공재하거나 침투한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6)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공재 또는 침투하는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 곧 새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새로운 피조물 곧 새 것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안에 있다”는 표현은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를 의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연합을 통한 하나됨, 한 생명을 공유하고 생명의 사귐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특히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전적인 의존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안에 있다”는 표현은 복이면서 사명의 요소를 동시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복이면서 동시에 그 복을 받은 사람 편에서 온전케 하여야 할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고 말씀합니다. 사도 요한이 그 글을 쓸 때에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은 단어나 문장에 대한 개념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과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일 때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로 하는데, 추가적인 설명이 전혀 없습니다. "품속에 있는"은 명백하게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아기 또는 유아기의 자녀가 부모 특히 엄마의 품속에 안겨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라는 것입니다. 독자들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렇게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그 말씀은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의 의미가 아니라 완전한 연합과 전적인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의 근거로 제시되는 성경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중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때의 ‘나’는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피와 살과 뼈를 가지고 계신 사람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들을 근거로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를 주장하면 피와 살과 뼈를 지니신 예수님께서 성부와 성령 안에 계신다는 것이 됩니다. 피와 살과 뼈를 지니신 한 존재가 성부와 성령 안에 계신다는 것은 넌센스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를 주장하는 신학자들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페리코레시스(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는 성경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논리의 문제

삼위의 독특성은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기원하지 않으시고 나시지도 않으며 나오시지도 않으나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라는 것입니다.


페리코레시스는 위의 설명과 분리될 수 없고 연관성을 가지고 성립되어야 합니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는데, 페리코레시스가 성립되려면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시면서 나신다는 것이든지 아니면 나시고서 성부 안에 들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시는데, 페리코레시스가 성립되려면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계시면서 나오신다고 하든지 아니면 나오시고서 성부와 성자 안에 들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성부는 성자를 낳으시고 성자 안에 들어가시든지 아니면 성부 자신을 성자 안에 두시고서 성자를 낳으신다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나오시면서 성부와 성자가 성령 안에 계시다고 하든지 나오신 성령 안으로 들어가신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성경적인 근거도 없고 수긍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경륜적인 관점에서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성자는 역사적인 한 시점에서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성자가 인성을 가지지 않으셨고 육신을 입으심으로 인성을 덧입으셨습니다. 페리코레시스를 따르면 성자가 육신을 입으신 이후에 성부와 성령 안에 공재하신 성자는 어떻게 된다는 것일까요? 성부와 성령 안에 공재하신 성자가 인성을 입은 신인이 되셨다는 것일까요?  이는 성부와 성령 안에 공재하신 성자가 성육신한 것은 아니기에 성립되지 않는 말입니다. 아니면 성부와 성령 안에 공재하신 성자는 성육신하지 않으셨기에 신성만을 지니시고 계신다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땅에 계신 예수님과 성부와 성령 안에 공재하신 성자는 다른 존재가 됩니다.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그에 대하여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취급하지 않는 사안이라는 것입니다. 언급해야 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언급할 사안 성경의 원리를 통하여 풀 수 없는 문제를 야기하는 페리코레시스는 성경적인 사안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협의의 현장과 관련한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삼위가 협의하시는 분이심을 알려줍니다(창 1:26). 그러한 협의의 현장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협의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성부 안에는 성자와 성령이 계시고 성자 안에는 성부와 성령이 계시며 성령 안에는 성부와 성자가 계십니다. 위격의 관점에서 보면 공재하지 않은 방식으로 계신 성부 한 분과 공재하시는 방식으로 계신 성부가 두 분이십니다. 성자와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위격의 관점에서는 총 아홉 분이 계시는 것이 됩니다. 전혀 성경적이지 않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분에 대한 성경적 이해

성경에서는 두 개체가 하나 되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부부로서 한몸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몸이란 육체적 결합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몸이란 단어가 전인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다르게는 한 영, 한 인격이라고 사용할 수도 있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몸(육)이란 육체성을 강조하는 전인을 가리킵니다. 영이란 성령님의 좌소를 강조하는 전인을 가리키고 혼이란 인격성(지정의)을 강조하는 전인을 가리킵니다. 부부에게는 성적관계를 통한 육체적 결합이 있기에 몸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각각의 인격체이지만 성경은 한 몸(분)이라고 말씀합니다. 각 개체가 상호공재 또는 상호침투한 것이 아니지만 한 몸(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 2:24)에서 둘(남자와 여자)은 구분을, 한 몸은 분리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은 전혀 하자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확증되어집니다. 예수님은 결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둘이 아니라 한 몸이기에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마 19:6)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누지 못한다는 것은 이혼하지 못한다는 것으로서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복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복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고 사명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음행한 연고 외에는 이혼할 수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 5:32)은 음행에 의해서는 이혼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는 복을 얻었다면 혼외정사인 음행으로 인해 분리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음행으로 인해 주어진 복을 저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사명을 따라 생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복과 사명의 온전한 결합을 추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의 모든 삶과 관련한 성경적 원리입니다.]

구분되는 두 개체에 대하여 한 분되는 것에 대한 성경에서의 표현 양식입니다. 숫자적인 1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연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경이 삼위이시면 한분이신 하나님을 말씀하실 때에 한분이 숫자적인 1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성경적인 근거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페리코레시스를 말한다고 하더라도 숫자적인 1이 되지 않는 것은 자명합니다. 성자와 성령이 페리코레시스하신 성부, 성부와 성령이 페리코레시스하신 성자, 성부와 성자가 페리코레시스하신 성령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한분이란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이 완전하게 연합하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을 가리키는 성경적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삼위일체에 대한 정의와 같이 “그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에 있어서 동일하시다”는 것입니다. 첨가하자면 그 뜻과 말씀과 행하심에 있어서 조금의 분리도 없으시기에 삼위이시지만 한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성경적 증거

바울 사도는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고후 5:6)라고 말씀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주와 따로 거한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하늘 보좌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늘 보좌 곧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계십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한다는 성경의 증거들과 모순되는 표현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주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그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와 동일하시고 그 뜻과 말씀과 행하심에 있어서 완전히 일치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내주하심으로 성경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성령님만 내주하시기에 주님이 이 땅에 거하는 우리와 따로 거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상호공재를 통한 분리되지 않음이 성경의 가르침이라면 결코 쓰일 수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이 성령님만이라고 하더라도 상호공재로 인하여 주님도 거하시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론

교의는 사고(논리)가 아니라 성경 본문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합니다. 한쪽으로 편향된 이해가 아니라 전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에 근거하여 형성되어야 합니다. 페리코레시스는 “안에 있다”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를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주장되었고 전 성경적인 이해와도 동떨어진 것입니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적인 요소는 '페리코레시스(순환)'를 강조하는 측면과 '필리오케(그리고 아들로부터)를 반대'하는 측면에서 잘 나타난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핵심교리이다. 삼위일체론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유대교, 회교와 구별되고, 고대 헬라 종교처럼 여러 신들을 섬기는 다신론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그런데 셋이면서 하나이며,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이 삼위일체론의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대체로 부정적인 용어로, 일반적인 상식과 경험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애매한 용어로 설명된다.

 삼위일체론을 설명할 때 자칫 잘못하면 군주신론(君主神論, 사벨리안주의)이나 양태론 혹은 단일신론으로 빠져버린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대체로 양태론적 경향을 띄고 있었다. '하나의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로 삼위일체론을 묘사한 아타나시우스 신조(420~∼450년)이래로 아퀴나스, 20세기에는 칼 바르트와 칼 라너라는 신구교의 신학의 거장들이 양태론적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성경적 삼위일체론과는 다른 오류에 빠져있었다.

 '삼위' 보다는 '일체'를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러한 모든 오류의 배후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어야 한다는 성경의 계시와는 관계없는 철학적인 대전제가 깔려 있었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일체' 보다는 '삼위'를 좀 더 강조하는 인상을 주는데, 사실은 모두를 균형있게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페리코레시스 개념을 통해서이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8세기 다마스커스(Damascus)의 요한이 사용한 이후 동서교회 양쪽에 걸쳐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었다(De Fide Orthodoxa).

 이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마치 우리 몸의 피가 각 기관을 순환하듯이,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여호와 하나님, 예수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각각 독립된 인격의 신들이지만 하나가 되는 것은 이 영원한 신적인 삶의 순환(페리코레시스) 때문이다. '신적인 삶의 순환'이란 '신적인 사랑의 순환' 혹은 '신적인 사랑의 뜨거운 피의 교환'같은 것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한 몸 속에 심장, 간, 폐가 각각 다른 기관이지만 뜨거운 피의 순환으로 서로 의존되어 있고, 하나의 삶을 이루듯이 삼위일체가 그와 같다는 것이다.

 이 용어는 사도 요한이 설명하고 있는 성부가 성자 안에 침투해서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침투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에 대한 성서적 표현(요 14:10∼11, 요 17:20∼23)에 상응하는 용어이다.

 이러한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이 다시 크게 빛을 보게 된 것은 몰트만 덕분이다(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는 페리코레시스 개념에 기초한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이 성경적으로 부합한다는 사실을 확언하고 과거 일신론적 경향을 깔고 있는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한편 성경적 삼위일체론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실천적 의미를 설파하였다.

즉 독재적이고 군주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라 삼위이면서 일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적 코이노니아 개념을 이해하고 배워서 그것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남 정 우前러시아선교사 / 서울여대교회 목사 <13〉 삼위일체론① '페리코레시스'

 '三位'와 '一體' 균형있게 강조

 "한 몸 속에 심장과 간, 폐 등이 각각 다른 기관이지만 뜨거운 피의 순환으로 서로 의존되어 있듯이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

 <사진설명〉 15세기 러시아 이콘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 작품. 창세기 18장에 아브라함을 찾아온 세 천사의 이야기를 근거로 삽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그렸다고 하여 구약의 삼위일체라고 부른다. (http://www.orthodox.or.kr/)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적인 요소는 '페리코레시스(순환)'를 강조하는 측면과 '필리오케(그리고 아들로부터)를 반대'하는 측면에서 잘 나타난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핵심교리이다. 삼위일체론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유대교, 회교와 구별되고, 고대 헬라 종교처럼 여러 신들을 섬기는 다신론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기독교 핵심 교리

 그런데 셋이면서 하나이며,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이 삼위일체론의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대체로 부정적인 용어로, 일반적인 상식과 경험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애매한 용어로 설명된다. 삼위일체론을 설명할 때 자칫 잘못하면 군주신론(君主神論, 사벨리안주의)이나 양태론 혹은 단일신론으로 빠져버린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대체로 양태론적 경향을 띄고 있었다. '하나의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로 삼위일체론을 묘사한 아타나시우스 신조(420~∼450년)이래로 아퀴나스, 20세기에는 칼 바르트와 칼 라너라는 신구교의 신학의 거장들이 양태론적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성경적 삼위일체론과는 다른 오류에 빠져있었다. '삼위' 보다는 '일체'를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러한 모든 오류의 배후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어야 한다는 성경의 계시와는 관계없는 철학적인 대전제가 깔려 있었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일체' 보다는 '삼위'를 좀 더 강조하는 인상을 주는데, 사실은 모두를 균형있게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페리코레시스 개념을 통해서이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8세기 다마스커스(Damascus)의 요한이 사용한 이후 동서교회 양쪽에 걸쳐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었다(De Fide Orthodoxa).

 이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마치 우리 몸의 피가 각 기관을 순환하듯이,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여호와 하나님, 예수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각각 독립된 인격의 신들이지만 하나가 되는 것은 이 영원한 신적인 삶의 순환(페리코레시스) 때문이다. '신적인 삶의 순환'이란 '신적인 사랑의 순환' 혹은 '신적인 사랑의 뜨거운 피의 교환'같은 것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한 몸 속에 심장, 간, 폐가 각각 다른 기관이지만 뜨거운 피의 순환으로 서로 의존되어 있고, 하나의 삶을 이루듯이 삼위일체가 그와 같다는 것이다.

 이 용어는 사도 요한이 설명하고 있는 성부가 성자 안에 침투해서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침투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에 대한 성서적 표현(요 14:10∼11, 요 17:20∼23)에 상응하는 용어이다.

 몰트만 "성경에 부합"

 이러한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이 다시 크게 빛을 보게 된 것은 몰트만 덕분이다(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는 페리코레시스 개념에 기초한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이 성경적으로 부합한다는 사실을 확언하고 과거 일신론적 경향을 깔고 있는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한편 성경적 삼위일체론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실천적 의미를 설파하였다.

 즉 독재적이고 군주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라 삼위이면서 일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적 코이노니아 개념을 이해하고 배워서 그것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남 정 우/ 前러시아선교사, 서울여대교회 목사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성적 의미


이정순 교수(목원대 신학과)


기독교 절기력으로 성령감림절이 지나면 바로 삼위일체주일을 지킨다. 물론 교회력을 중요시하지 않는 교회에서는 삼위일체 주일이 있는지 조차 모른다. 올해는 6월 16일이 바로 삼위일체주일이다. 삼위일체주일이 교회력에 들어 있는 것을 보면 삼위일체가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가 있다. 특히 삼위일체는 예배의 중요 전통으로 오랫 동안 내려오고 있다. 좋든 싫든 기독교인이라면 예배를 드릴 때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교백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도 없을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과 신앙인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많은 의문이 든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충분한 신학교육의 부재 때문이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역사적, 신학적 교육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어떤 목회자와 나눈 대회가 생각난다. 그는 삼위일체에 대해 신학교에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왜 삼위일체를 믿고 있는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삼위일체를 한 마디로 설명해 보라고 요구했다. 나는 최근의 해석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설명했는데, 그는 납득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5분에 걸친 설명으로 삼위일체가 다 설명될 수 있을까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이게 바로 우리 현실이다. 왜 우리는 유대교처럼 야훼나 엘로힘으로 계시된 한 분 하나님만을 믿지 않고,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일까?

현대신학자 폴 틸리히 교수가 하버드에서 강의할 때 어떤 학생이 왜 우리는 유니테리안(Unitarian, 단일신론자)이 아니고 삼위일체(Trinitarian)를 믿는 자들인가 하고 질문한 적이 있다. 이 물음에 틸리히는 유니테리안이나 유대교의 유일신론보다는 삼위일체가 더 역동적인 하나님을 보여준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즉 유니테리안이나 유대교의 유일신론은 하나님의 역사를 한 측면에서 보여주지만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역사를 여러 측면에서 보여주는 보다 역동적인 교리라는 말이다. 적어도 삼위일체에서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측면에서 역사하신다는 말이다. 매우 적절한 설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런 개략적인 설명으로는 삼위일체가 정확히 이해되지 않는다. 위에서 하나님의 역사의 역동성, 즉 세 가지 차원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너무 강조하게 되면 하나님이 세 가지 양태(mode)로 나타나셨다는 이른바 양태론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목회자들이 설교 시간에 가장 많이 삼위일체의 예로 들곤 하는 ‘아버지, 남편, 아들’, 또는 ‘기체, 액체, 고체’의 세 가지 형태라는 비유는 ‘양태론’의 오류를 그대로 드러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이나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를 초월해 계신 절대자요, 초월자이시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다. 또한 하나님이 성부시대와 성자시대에 역사하셨고 지금은 성령시대이므로 성령으로 역사하고 계시다는 주장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하나님이 마치 3분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삼신론(three Gods)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지 세 분 하나님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양태론과 삼신론은 목회자들이 가장 쉽게 빠지게 되는 삼위일체의 오해 또는 왜곡이다.


▶삼위일체의 예로 들곤 하는 ‘아버지, 남편, 아들’, 또는 ‘기체, 액체, 고체’는 '양태론'의 오류다


또 다른 오류를 지적하자면, 삼위일체 신앙이 정확히 성서에 근거해 있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혹자들은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는 구절부터 성령의 역사라고 해석하곤 한다. 또한 복음서와 서신서의 많은 구절들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되고(381) 신양성서 정경이 완성된 때(397)를 고려해보면 맞지 않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서에는 ‘하나님에 관한 삼중적인 형식’이 이곳 저곳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삼위일체라고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성서에는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후 성령의 체험으로 형성된 초대 교회에서는 하나님에 관한 삼중적인 형식이 예배에서 먼저 사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헬라 철학을 공부한 바울이 헬레니즘 세계 문명권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이제 기독교는 헬라철학의 도움을 받아 복잡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구약성서 시대나 역사적 예수 시대와는 매우 다른 양상이 전개된 것이다. 기독교가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로마의 종교로 인정된 후에 바로 콘스탄틴 황제는 325년에 니케야공의회를 열어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삼위일체 교리의 확립을 명령했다. 이때까지 곳곳에서 형성되기 시작했던 삼위일체의 교리가 이제 보편교회가 인정하고 사용할 수 있는 교리로 확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는 신학자들이나 초대 교부들이 함께 모여 충분한 토론을 걸쳐 형성된 교리가 아니라 콘스탄틴 황제의 통치를 위한 목적으로 삼위일체가 아타나시우스파 한쪽의 입장을 토대로 기본 교리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니케야 공의회에서는 삼위일체 교리의 토대가 형성되었을 뿐 완성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론에 관한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우여곡절을 통해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거쳐 그리스도론의 문제가 해결되었고, 이후에도 두 번에 걸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 683)에서도 삼위일체에 관한 문제들이 논의되었고, 정통으로 간주한 삼위일체 논리에 벗어난 이론들을 정죄했다. 또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된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나 신약성서가 정경으로 확립된 카르타고 공의회(397)를 생각해 보면 거의 400여 년간 기독교는 지금과 같은 삼위일체 교리도 없었고, 정경으로 간주된 성서도 없었다는 말이 된다. 물론 그래도 그 시대 기독교인들은 훌륭한 신앙을 대대로 전할 수 있었고 마침내 로마의 종교로까지 자신들의 종교를 승격시키기까지 했다. 교리를 절대화하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사뭇 궁금하다.


▶성서에서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삼위일체라고 언급한 구절은 어디인가?


어쨌든 삼위일체는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기독교 전통이 되었다. 삼위일체가 바울의 헬라화된 기독교의 부산물이라는 비판을 듣는다 하더라도, 삼위일체는 기독교 예배 안에 뿌리 내린 확고한 기독교 전통인 것이다. 이제 문제는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믿는가 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에서 미사 때 자주 쓰는 “이것은 신앙의 신비입니다”라는 말로 삼위일체를 얼버무려버릴 수만은 없다. 물론 삼위일체가 신앙의 신비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이성까지 다 포기해 버리고 설명 내지는 이해하려는 시도까지도 무시해 버릴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필자는 현대 삼위일체의 해석 중 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와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이 제시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 또는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이 매우 타당하며 의미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보프나 몰트만은 초대교회에서 사용되었던 헬라어 ‘단어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한다. 페리코레시스란 ‘상호순환’, ‘상호침투’, ‘상호내재’ 등으로 번역된다. 보프나 몰트만은 페리코레시스를 사용하여 한 위격에 두 위격들이 상호침투되어 있음을 표현하고자 한다. 이 용어가 언제부터 삼위일체에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헬라어 페리코레시스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다른 위격 안에 포함되고 내주하며 존재하는 어떤 상황이나 상태를 의미한다. 이 경우 페리코레시시는 상호순환의 뜻을 지닌다. 이 뜻을 삼위일체에 적용하면, 한 위격이 다른 두 위격들 안에 존재하고, 다른 두 위격들을 둘러싸며, 다른 두 위격들과 똑 같은 영역을 차지하고 다른 두 위격들을 채운다는 의미이다. 둘째, 페리코레시스는 활동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한 위격이 다른 두 위격들과 더불어, 동시에 다른 위격들 속으로 상호침투하거나 상호 얽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페리코레시스는 하나님의 세 위격들에 독특하게 적용되며, 세 위격의 살아 있고 영원한 관계를 적절하게 표현한다. 즉 하나님의 위격은 셋이지만 서로 동등한 상호 침투 내지 상호교류를 통해 하나라는 전체성을 늘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1+1=3이 아니라 1+1+1=1이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페리코레시스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적용해서 설명할 수도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신 적이 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요17:21). 인간 예수와 하나님이 하나라는 말인데,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은 아들의 인격 안에 공존하며 일치된다. 두 본성이 인격 안에서 너무도 깊이 하나가 되기 때문에 한 본성의 속성들은 다른 본성의 속성들과 상호 교환된다. 두 본성은 용해되거나 혼돈됨 없이 서로에게 상호 침투한다는 것이다. 즉 신성은 인성을 입고 신성과 인성 각각은 동일한 하나님의 본체의 전체성을 가짐으로써 진정한 페리코레시스를 완성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속성의 교류라고 부른다. 둘 같지만 속성의 교류를 통해 하나라는 전체성을 견지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미를 전통적으로 인격, 관계성, 신성, 발현 등으로 설명하는데, 이런 방식은 페리코레시스 모델에서 모두 설명가능하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세 위격의 연합과 상호침투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삼위의 일치는 상호침투와 연합의 일치인 것이다. 상호침투와 연합을 통한 한분 하나님이 되심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적 삼위일체론’ 또는 ‘공동체적 삼위일체론’


페리코레시스 모델은 삼위일체의 중요한 의미를 드러낸다. 즉 삼위일체는 피조세계를 포함해서 세 위격의 존재를 넘어 열려진 연합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라는 서로 동등한 위격들의 상호침투와 교류를 통한 일치는 그를 믿는 인간과 피조세계 역시 동등한 관계에 기초한 공동체 내지 사회를 우리에게 계시한다. 먼저, 그를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이룬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그런 모습을 띤 진정한 공동체, 어떤 위계질서나 차별이 없는 동등한 구조의 공동체를 구현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다. 더 나아가, 인간 사회 전체가 삼위일체로부터 영감을 받아 친교, 기회의 균등, 개인과 단체가 동등하게 중요시되는 사회를 형성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다. 역으로 말한다면, 모든 면에서 이루어지는 참여와 연합에 기초해 사회구조가 이루어진 자매와 형제의 사회만이 삼위일체의 형상과 모양을 가진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이런 사회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지배와 억압이 없이 전체적으로 하나를 이루는 기독교 공동체, 계급 지배와 독재의 억압이 없이 전체적으로 통일된 하나를 이루는 인간공동체만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존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삼위일체의 형상과 모양을 가진 사회는 인간의 권력이나 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로 특징되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야말로 교회와 사회를 위한 영감의 원천이다. 삼위일체야말로 기독교가 어떻게 존재해야하며, 또한 기독교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제시해 주는 지침이다. 삼위일체야말로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영성의 근거이다. 삼위일체를 고백하는 자들이라면 세 위격이 동등하게 서로 교류하며 침투함으로 일치를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며, 그런 신앙을 생활 속에서 구현해내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성적 의미이다.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17:11).


출처 : 익투스타임즈(http://www.x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