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 베소라(בְּשׂרָה ), Gospel / 복음의 비밀 / 복음의 삼덕(청빈, 정결, 순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진짜 복음과 가짜 복음

복음(福音) / 복(福), 소리 (音)

복음이란 "복된 소리"라는 뜻입니다.
1. 매우 반갑고 기쁜 소식(消息)
2. 그리스도(Kristos)에 의(依)한 인간(人間) 구원(救援)의 길.
   그리스도(Kristos)의 가르침. 복음서(福音書)

유앙게리온 / 그리스어로 “ευαγγελιον” 이라고 표기합니다.
"ευ"는 "기쁨" 이란 뜻이고 "αγγελιον" 은 "천사"라는 뜻입니다.
두 단어가 합하여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라는 의미가 됩니다.

“유앙겔리온“의 유래는 페르시아 B.C. 538년에 제국인 바벨론을 정복하고 세계 제국의 권좌에 오릅니다.
그동안 바벨론이 지배하였던 많은 나라들을 페르시아가 인수하고서 행정구역 개편, 납세부과 등 새로운 정책으로 통치를 확고히 합니다.
그후 페르시아는 지배영역을 더욱 넓히기 위하여 먼 지방까지 자주 원정을 나가기도 했는데 어느 날 백만 대군을 이끌고 아시아지역을 벗어나 마게도니아(유럽)로 진출하여 거기에서 그리스를 만나게 됩니다.

당시 그리스는 규모가 작은 나라였기 때문에 페르시아 대군을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남자들은 페르시아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죽기로 최종 결정하고 모두 전쟁터로 나가 맞섰습니다.
당시 전쟁에서 대항하지 않고 항복하면 민족이 멸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항하였다가 패하면 그 결과는 참혹한 멸망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개인들의 재산은 모조리 약탈당하고 건물들과 도시들은 불에 타 폐허가 됩니다.
모든 남자들은 칼에 죽을 것이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붙잡혀 죽거나 노예로 팔려갑니다.
전쟁에서 대항하였다가 패한 나라는 이처럼 비참하게 역사의 종말을 맞습니다.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대항하여 이길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이제 페르시아에 의하여 그리스의 종말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은 삶을 포기하고 무서운 죽음의 종말을 기다려야 했고 더러는 들이나 산속으로 피난하여 거기에서 죽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시작된지 한 달이 넘었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전쟁터의 소식은 감감하였고 그리스 주민들은 매일 불안과 두려움과 함께 마음을 조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전쟁터 쪽에서 멀리 한 군사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스 아테네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그 군인을 지켜보았습니다.
42킬로가 넘는 거리에서 달려온 그 병사는 죽을 힘을 다해 비틀거리며 가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포들 앞에 다가와서는 힘없이 쓰러지면서 “승리는 우리에게” 한마디를 외치고 그대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유앙겔리온”하며 외치기를 시작하였고 그들은 이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큰소리로 “유 앙겔리온”하며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이때의 전쟁을 역사에서는 필로폰네서스 전쟁이라 하는데 그 후 그리스 왕 알렉산더가 B.C. 331년에  페르시아를  정복함으로서 세계제국이 됩니다.  


“유앙겔리온”은 그리스어로 “ευαγγελιον”으로 표기하는데 ευ는 기쁨이란 뜻이고 αγγελιον 은 천사란 뜻으로 이 두 단어가 결합되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란 뜻이 됩니다.
이 단어는 그들이 그 때의 그 기쁜 소식을 전해준 그 병사를 생각하며 즐겨 사용했던 새로 만들어진 단어였습니다.


구약에서 복음 "베소라"

복음(베소라) [ besôwrâh ] בְּשׂרָה 스트롱번호 1309

1. 기쁜 소식. 2. 좋은 소식에 대한 보답
발음 [ besôwrâh ]
어원 / 1319에서 유래한 여성형
구약 성경  /  6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여성 기쁜 소식, 좋은 소식, 삼하 18:22, 25
2. 명사, 여성 좋은 소식에 대한 보답, 삼하 4:10.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소식(삼하 4:10, 18:27, 왕하 7:9).

* 1319
בָּשַׂר 스트롱번호1319

1. 기뻐하다.  2. 피엘형 בִּשַּׂר .       .
3. 기쁜 소식으로 즐겁게 하다
발음 [ bâsar ]
구약 성경 / 24회 사용


이사야 40:9
아름다운 소식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아름다운 소식을 히브리어로 "베소라(besora)" 라고 합니다.
베소라가 내포하는 의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입니다(창세기 1:31).
따라서 "좋다" "선하다"가 들어가 있는 것이 "베소라"입니다.

"베소라"는 모음 변화시키면 "바사르"가 됩니다.
바사르는 "살" "육체" "몸" "창조물" "생물"이라고 합니다.

בָּשָׂר 스트롱번호 1320

1. 살.  2. 살아있는 몸의 살. 3. 가축의 살코기 출 16:12
발음 [ bâsâr ]
어원  / 131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70회 사용
☞살(창 2:21, 시 27:2, 슥 14:12), 몸(창 2:24, 출 30:32, 레 14:9), 육체(레 17:11, 민 16:22), 혈육(창 6:12, 시 56:4), 생물(창 7:21, 민18:15), 고기(창9:4, 출12:8, 레16:27), 포피(창17:14, 레12:3), 하체(레6:10), 육신(창6:3, 신5:26, 대하32:8, 잠14:30), 전부(사10:18).



다시 "바사르"를 동사로 생각하면 "베소라"가 됩니다.
그래서 몸, 몸속에 있는육(肉)을 "바사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인 바사르가 되어 이 세상에 육신으로 오신 그 분이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곧 기쁜 소식입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으로 마지막 남은 예언은 재림입니다.

기쁜 소식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救援)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기쁨의 소식을 가리킨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역(使役)으로 말미암은 죄(罪) 사(赦)함의 은총을 의미하는 바, 인간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따라서 '복음(福音)'은 예수님의 가르침 또는 예수님에 의한 인간 구원(救援)의 길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원래 히브리어 '베소라'의 번역으로서 단순히 '좋은 소식'(삼무엘하 18:20, 열왕기하 7:9)
또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제공되는 보상'이란 의미로 쓰였다.
점차 신앙적 의미가 첨가되어 시편과 이사야서 후반부에서는 이 단어가 '바사르'라는 동사형으로 쓰여 장차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질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가리키게 되었다(시편 40:10, 이사야 41:27).

시편 40:10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I do not hide your righteousness in my heart; I speak of your faithfulness and salvation. I do not conceal your love and your truth from the great assembly.


이사야 41:27
내가 비로소 시온에 이르기를 너희는 보라 그들을 보라 하였노라 내가 기쁜 소식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리라.
I was the first to tell Zion, 'Look, here they are!' I gave to Jerusalem a messenger of good tidings.


신약 시대 초기에 이르러서는 헬라어 '유앙겔리온'이라는 용어로 쓰였으며,
이는 본래 전쟁에서의 '승리의 소식'을 의미하나 신약에서는 히브리어 '베소라'의 용례(用例)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 구약이 예언한 메시야(요한복음 4:25),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기쁘고 좋은 소식', 즉 죄인(罪人)을 살리는 구원의  메시지를 가리키게 되었다.

요한복음 4: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The woman said, "I know that Messiah" (called Christ) "is coming. When he comes, he will explain everything to us."


복음의 중심적 내용은

1. 구약 예언과 약속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의 도래(到來)(마태복음 1:16, 사도행전 2:16).
 
2. 예수님의  사역(使役)
 a. 십자가 사건(고린도전서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None of the rulers of this age understood it, for if they had, they would not have crucified the Lord of glory.

 b. 부활(復活)과 승천(昇天) 및 재림의 약속(골로새서 1:5-6)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the faith and love that spring from the hope that is stored up for you in heaven and that you have already heard about in the word of truth, the gospel.
  that has come to you. All over the world this gospel is bearing fruit and growing, just as it has been doing among you since the day you heard it and understood God's grace in all its truth.

이와 같은 내용은 사도 바울뿐 아니라 초대 사도들의 설교의 핵심이었다(사도행전 3:13-26).

복음에 대한 성경의 표현

1. 은혜의 경륜(에베소서 3: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Surely you have heard about the administration of God's grace that was given to me for you,

2. 천국복음(마태복음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And this gospel of the kingdom will be preached in the whole world as a testimony to all nations, and then the end will come.

3. 구원의 복음(에베소서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And you also were included in Christ when you heard the word of truth, the gospel of your salvation. Having believed, you were marked in him with a seal, the promised Holy Spirit,

4. 생명의 말씀(사도행전 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Go, stand in the temple courts," he said, "and tell the people the full message of this new life."


5. 비밀의 경륜(에베소서 3:9)
영원부터 만물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and to make plain to everyone the administration of this mystery, which for ages past was kept hidden in God, who created all things.


6. 십자가의 도(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For the message of the cross is foolishness to those who are perishing, but to us who are being saved it is the power of God.


7. 진리의 말씀(고린도후서 6: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in truthful speech and in the power of God; with weapons of righteousness in the right hand and in the left;



복음의 중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므로, 이 사실이 개인에게 전파(傳播)될 때 믿음과 불신(不信)에 따라 구원과 심판이 결정된다.
복음은 하나님을 떠나 죄의 노예가 된 인류에게 있어 참된 구원과 믿음(빌립보서 1:27), 평화(에베소서 6:15)를 얻게하는 유일한 길이자 토대(土臺)인 것이다(고린도전서 4:15, 베드로전서 1:23).

빌립보서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Whatever happens, conduct yourselves in a manner worthy of the gospel of Christ. Then, whether I come and see you or only hear about you in my absence, I will know that you stand firm in one spirit, contending as one man for the faith of the gospel.




에베소서 6: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and with your feet fitted with the readiness that comes from the gospel of peace.



고린도전서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Even though you have ten thousand guardians in Christ, you do not have many fathers, for in Christ Jesus I became your father through the gospel.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For you have been born again, not of perishable seed, but of imperishable, through the living and enduring word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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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복음삼덕(福音三德) - 청(淸) 정(淨) 순(順)

예수(Jesus)가 복음(福音)으로 지키기를 권고(勸告)하여 가르친 세 가지 덕행(德行).
곧 자원(資源)에 의(依)한 청빈(淸貧)과 평생(平生)의 정결(淨潔) 온전(穩全)한 순명(順命).

1. 청빈(청빈) / 맑을 淸, 가난할 貧

(1). 청백(淸白)하여 가난함.
(2). 성품(性品)이 깨끗하여 가난함.

마태복음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누가복음 9: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청부(淸富)인가? 청빈(淸貧)인가?

청부와 청빈의 개념

오늘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는 이슈는 다양하다.
남북한 정상의 만남으로 교류가 확대되고 금강산 관광과 경의선 연결로 통일이 성큼 다가서는 듯 싶다가, 북한 핵과 미국의 공화당 정권의 등장, 우리나라의 남남갈등, 보혁 갈등으로 남북관계는 전혀 새로운 국면에 처해지고 있다.

한때 이라크 파병과 대통령의 재신임 건, 행정수도 이전의 이슈가 현재는 국가보안법 개폐 등 서로 다른 입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최근 기독교계에서 제시된 또 다른 이슈 중의 하나가 바로 청부인가 청빈인가라는 주제가 아닌가 한다.

한자의 뜻대로 맑고 깨끗한 부와 또 맑고 깨끗한 가난을 의미한다.
청빈에 대한 생각과 예찬은 동서양에서 비슷한 전통을 갖고 있다. 청빈은 고양된 사상과 높은 학문과 실천의 경지를 나타내는 한 기준'로 이해되기도 했다.
공자는 논어에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가하다'고 했으며, 불사이군의 충성을 지키며 수양산에서 죽어간 백이숙제의 얘기는 부정한 부와 명예보다 맑고 높은 절개에 가치를 둔 청빈의 삶이라 할 수 있다.

간디는 "우리 사회는 필요를 위해선 충분하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부족하다"고 하였고,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는 말에서 보듯이 가난은 약간 불편한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고 인지되고 있었다.

불교는 청빈을 주요 가치로 여기고 있으며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강조하고 있고, 시인 서정주는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칼린 지브란은 "가난한 친구여, 가난을 즐겨라. 그대가 정의를 말해 줄 입이 되고 삶을 기록한 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친구여, 가난을 기꺼이 맞아들여라. 그래야 그대를 지배하는 사람들에게 미덕의 기준을 보여 줄 것이고, 그대를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성결한 푯대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가난은 우리를 맑고 깨끗하게 하며 고양시키며 최소한의 물질로도 충분히 살게 하며, 정신적이고 신앙적인 참 삶을 살게 한다.
이것이 청빈론의 요지다.
이러한 청빈론에 대해서는 그 정신은 존중하나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현대의 생활에 적절치 않은 부분이 있고 패배주의적인 신앙 아니냐는 비판도 존재한다.

한편 역사적으로나 세계적으로 부자로서 선행을 하고 사회에 많은 도움을 준 사람들이 허다하다.
여기에서 부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나 은사로서 자신의 재물을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청부론이 고개를 든다.
우리 사회는 아담 스미스가 말한 개인의 이윤 동기에 의해 생산되고 부와 자본이 축적되어 더 큰 생산성을 갖게 되는 자본주의 사회다.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의 능력 차이에서 오는 부의 차별성이 존재한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가장 큰 문제는 분배의 불균형에 있다.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수입을 보장한다는 원칙은 좋으나, 적절한 통제가 없으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부자는 부를 대물림하는 상황에 이른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삼박자 축복 또는 영육 간에 형통하는 축복과 기복이 핵심 복음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는 청부론이란 형태로 나타나며 깨끗하게 벌어서 깨끗하게 쓰면 그것이 복을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의 검소한 절약 생활을 통해 축적된 자본이 근대 자본주의를 가능케 했다는 막스 베버의 주장도 부를 긍정적 각도에서 접근한 중요한 시도였다.

근래 청부론의 주창자들은 교회 일에만 충성하면 무조건 만사형통하다고 말하지 않고, 바른 생활과 바른 신앙을 강조한다. 옳게 믿고 옳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자신의 수입에서 다른 사람의 몫을 반듯하게 떼라고 요구하며, 그렇게 하면 결국 물질적인 복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청부론이 기복주의와는 다르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청부론에 대해서도 비판이 제기된다. 청부론은 기복주의를 교묘히 포장한 것이며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과 다르다는 주장이다. 기복주의 신앙의 핵심은 신앙 목적을 하나님과의 관계나 존재의 변화에 두지 않고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데 두는 것이다. 청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나 '존재의 넉넉함'을 충분히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결론은 '소유의 넉넉함'으로 귀결되며, '풍요로운 삶을 얻기 위해 제대로 믿으라'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존재의 넉넉함'과 '소유의 넉넉함'을 모두 가지려는 욕심 즉 하나님과 돈을 함께 가지려는 욕심을 조장할 수 있다. 그들은 '우선순위'(priority)만 제대로 하면 된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우선순위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선택'(choice)을 말씀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의 부자와 가난함

성경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루어졌다.
예수님의 비유 중 많은 부분이 돈과 관련되어 있다.
구약의 족장시대 믿음의 선진들은 큰 부자들이 많았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모두 큰 부자였다.
동방의 의인이자 부자 욥, 사사시대의 사사들과 이후 왕들도 부자였다.
물론 가난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했던 의인들도 많이 있다.
모세, 아론,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등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이후의 많은 선지자들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신약에 오면 예수님과 제자들과 사도 바울과 많은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가난한 상태가 아니었나. 예수님께서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하시면서 가난을 말씀하셨다.
물론 신약시대에도 부자들이 있다.
아리마대 요셉과 세리장 삭개오는 부자였을 것 같고, 백부장 고넬료도 당시에는 부자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물론 성경 인물을 부의 정도를 가지고 빈부를 나누는 일은 어려운 일이며  비교의 기준도 일정하지 않아 쉽지 않음을 느낀다.

주님의 기도와 야베스의 기도

오늘 우리 주변에 야베스의 기도가 인기 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개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역대상 4:10)란 구약성경이 인기가 있다.
"지경을 넓히라"와 "복에 복을 더하사"란 구절은 많은 집회의 구호로 등장한다.
또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의 교육 훈련 프로그램 형식으로 개발되어 참여하기도 한다.

야베스의 기도는 주님의 기도와는 다르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하나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고 하나님 나라와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물질의 부요보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시며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신다.
오늘날 '주님의 기도' 대신 '야베스의 기도'가 더 사랑받는 현상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잘 먹고 잘 살기 원하는 사람에게 주님의 기도는 매력이 없을 지도 모른다.

빈부 격차의 심화와 구조화

자본주의 역사에서 빈부 격차는 오래고 깊다. 상대적으로 그 역사가 짧은 우리 사회는 아직도 빈부 격차에 대한 비판과 불공정한 부에 대한 멸시가 강하다. 그래서 졸부와 벼락부자에 대한 비판이 강하고 부동산 투기나 부정한 방법으로 번 돈에 대해 비판한다. 그런 사람은 국가의 고위직에 올라갈 수 없음을 지난 정권에서 보았다.

미국 사회를 비판하며 자연의 삶을 사는 스콧 니어링(Scott Neering)은 자본주의 원리를 '네가 일함으로 나는 논다'는 문장으로 요약한 바 있다.
미국식 자본주의에는 '놀고먹는 사람' '먹기 위해 일하는 사람' '일해도 먹기 어려운 사람'의 세 부류가 있다.
그래서 미국에는 천국과 지옥이 공존한다.
한 도시 안에서 특권층은 상상할 수 없는 사치와 향연을 벌이는 한편, 빈민들은 배고픔으로 잠을 못 이룬다.

소득과 부의 분배 정도를 나타내는 로렌츠 곡선을 보면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의 빈부의 격차가 더 심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경우에도 2002년 20월 <뉴욕타임스>에 실린 프린스턴 대학교 폴 크루그먼 교수(Paul Krugmann)의 보고에 의하면, 미국 100대 기업 CEO의 연봉은 70년도에 일반인의 39배였으나, 1999년에 이르러 1,046배가 되었다고 한다.

2002년 <이코노믹 저널>(Economic Journal)에 의하면 세계 인구 중 가장 부유한 1%(5천만 명)의 재산이 가장 가난한 60%(27억 명)의 재산보다 더 많다고 한다.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 2002년 8월 17일자)는 미국 상위 1%가 1981년에는 미국 자산의 25%를 소유했던 것에 비해 90년대 후반에는 그 비율이 38%로 증가했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빈부 격차는 정보의 격차와 지식의 격차에 의해 더 심화되고 구조화될 것이다.

달란트와 청지기

이런 청빈과 청부에 대한 논쟁의 해결을 위해 우리는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할까?

첫째, 재물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 겸손히 살아가라

먼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눅 18:25)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유명한 비유이지만 여기서 바늘귀는 유대 민족이 외부의 침략을 막고 적이 신속히 성안으로 침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약대나 말과 같은 큰 짐승이 쉽게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약대 바늘귀을 만들어 약대가 무릎을 꿇고 간신히 들어올 수 있도록 해 놓은 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약대의 등에 재물을 싣고 성안(천국·하나님 나라)에 맘대로 선 채로 들어 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재물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 겸허히 바늘귀를 통과할 때만 가능하다는 뜻이라고 본다.

둘째, 부와 가난은 그 자체가 성도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열심히 생활하고, 일하고, 전도하며, 이웃을 돕고, 선행을 행한 결과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부자가 되기를 목표하지 않고 가난해지기를 목표하지도 않지만, 성실하게 본분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욥처럼 시험하시기도 하고 다시 축복해 주시기도 한다는 점이다.

셋째, 달란트 비유(마 25:14~30)처럼 우리의 달란트가 5달란트인지, 2달란트인지, 1달란트인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서 일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칭찬하시고 축복하사 큰 복을 주신다는 점을 기억할 일이다.

특히 1달란트 받은 자라도 그가 열심히 일해 1달란트를 더 남겼더라면 5달란트 받은 자와 같이 똑같이 칭찬을 받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청지기에게는 소유권이 없지만 열심히 맡겨진 일을 감당할 때 하나님의 칭찬이 있다는 점이다. 월마트를 창시한 셈 월튼이나 코닥 필름의 창업자나 우리나라의 유한양행의 창설자 유일한 박사나 그들이 자기 기업을 일구어 많은 돈을 모았지만, 청지기로서 그것을 자신의 재물로 삼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고 이웃을 돕기 때문에 칭찬을 받는다. 자신의 재물로 생각하여 약대 등에 높이 싣지 않고 내려 무릎을 꿇고 이웃을 돕고 섬겨서 그들은 부자였으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고 믿는다.

미국 펜실베니아 허쉬 타운(Hershey Town)에는 밀튼 허쉬(Milton Hershey)가 세운 초콜릿 공장과 그 공장의 이익금으로 운영되는 밀튼 허쉬 학교(Milton Hershey School)가 있다.
이 학교는 허쉬 사장이 사재를 전부 투자하여 만든 고아 학교로 출발했으며 지금은 결손 가정 학생들을 위한 학교로서 최고급 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청부인가 청빈인가를 목표하는 것이 중요하다기보다, 선한 청지기로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성실하게 관리하고 일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결과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재물을 주어 부하게 하시기도 하고, 부보다는 영혼의 고아함과 풍요함을 주셔서 가난하게도 하실 것이 아닌가? 선한 청지기의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대로 믿음을 지키며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창조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청빈(淸貧)

회개하고 정직하고 겸손한 자리로

성직자들은 물론이려니와 신앙의 세계에 몸을 담아 수행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의 첫째가 청빈이다.
한국 종교계에는 각기 다른 종교를 신봉하였지만 청빈한 삶을 실천하며 후학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준 세 분 선배들이 있었다.
개신교에 한경직 목사(1902-2000)
가톨릭에 김수환 추기경(1922-2009)
불교에 성철 스님(1912-1993)

한경직 목사께서 남긴 유품은 오로지 세 가지였다.
휠체어, 지팡이, 겨울 털모자였다.
집도 통장도 남기지 않았다.
영락교회 장로들이 집을 사주면 어느 새 팔아서 고아원을 세우거나 모자원을 세우는데 사용하곤 하였다.

김수환 추기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가 남긴 유품은 신부복과 묵주 뿐이었다.

성철 스님 또한 깁고 기워 누더기가 된 두 벌 가사(袈娑)를 남겼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세 분 어른들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와 한국교회의 목사들은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다는 반성이 든다.
교회들은 너무 큰 교회, 부자 교회가 되려 하고 목사들은 유명한 목사, 성공한 목사가 되려고들 한다.
그래서 교회는 백성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되고 목사들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
이런 처지에서 벗어나 교회와 목사들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길은 무엇일까?
그 답은 간단하고 단순한다.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하여 청빈하고 정직하고 겸손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배우는 신앙정신

초대교회 때부터 시작된 수도원 운동은 2000년 교회역사에서 중단 없이 계속 된 경건운동이다. 수도원 운동은 세속생활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는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보다 경건하게 살려는 갈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수도원 운동의 모양은 다양했지만 시대를 무론하고 수도자들에게 공통된 서원은 청빈(淸貧), 순결(純潔), 순명(順命)이다.

이 청빈, 순결, 순명은 산상수훈을 중심으로 하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다. 종파를 초월하여 수도자들은 이 세 정신을 갈고 닦아 예수님의 삶을 닮는 것이 목표로 했다. 수도원과 수도사의 생활규칙을 만든 성 베내딕토 폰 누르시아(St. Benedictus von Nursia. 가톨릭의 베네딕토 수도회의 창설자. 480? ~ 550?)는 수도자들이 거룩한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자신을 개혁하는 수도정신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수도자의 요강(要綱) 중의 첫째가 청빈(淸貧)이다.

청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 그 자체이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외양간에서 나셨고, 30년을 목수로 사셨다. 당시의 목수는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노동자다. 예수님은 3년간 공생 사역 중에 자신의 삶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고 요약하신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근거지 없이 떠도는 유랑이었다. 주의 가르침의 강령이 되는 산상수훈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라고 시작하신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사회를 정화시킬 힘을 잃고, 오히려 세상의 질타를 받고, 세상 권력이 얕잡아 보는 것은 교회와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청빈의 신앙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도자들에 있어 순결(純潔)의 기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삶 자체이다. 33년에 걸친 예수 그리스도의 짧은 일생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티 하나 없는 순결 그 자체시다. 순결의 쉬운 말은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한 깨끗함이다.

요한1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깨끗하여야 할 이유에 대하여 말씀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1서 3:3)

믿음과 소망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깨끗하셨으니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깨끗하여야 한다는 주문이다. 깨끗함이 힘이다.

평생을 깨끗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은 복중의 복이다. 문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에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경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회개하면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진다고 약속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지난 날 깨끗하게 살지 못하였음을 후회만이 아니라 철저한 회개와 올곧은 믿음으로 깨끗하여지고, 깨끗한 삶 살기를 결단하는데서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순명(順命)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자기를 온전히 바치는 삶을 말한다. 순명의 모본도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께서 마지막 날 밤에 드린 기도가 순명의 모본이 된다.

"(예수께서)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하시니"(눅 22:41, 42)

주님의 이 기도에서처럼 자기가 원하는 것이나 자신의 뜻하는 바가 아니라, 나를 통하여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 그것에 자신의 삶을 반영하여 바치는 삶이 진정한 순명의 신앙이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 자기 뜻을 이루려 한다. 그러기에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듣고, 구하는 기도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참되고 바른 기도다. 그래서 기도는 Speaking(말하기)이 아니라 Listening(청취, 귀를 기울임, 경청)이다.

빌립보서 2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개하면서 진정한 순명의 삶을 교훈하신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2. 정결(淨潔) / 깨끗할 정, 깨끗할 결

(1). 정(淨)하고 깨끗함.

3. 순명(順命) / 순할 順, 목숨 命


(1). 명령(命令)에 복종(服從)함.
(2). 천명(天命)에 순종(順從)함.



마태복음 19:21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고린도후서 6:10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여 완덕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청빈과 정결과 순명의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청빈과 정결과 순명은 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생활모습이고 복음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권고하신 삶의 형태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복음삼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청빈한 생활의 모범

성서를 읽어보면 성모님은 가난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낳으실 때에도 여관에 방을 얻지 못하고 마구간에서 출산해야 하는 가난을  맛보았습니다.(누가 2:7)

    요셉과 마리아는 가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전에서 정결례의 제물을 봉헌할 때에도

    가난한 이들이 바치는 비둘기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성모님은 목수의 아내로서 손수 길쌈을 하여 옷을 만들고 음식을 준비하면서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를 꾸려 갔습니다.

    성모님은 현재의 우리들보다 더 가난한 생활을 하셨지만

    그날그날 주어지는 물질에 대하여  감사하며 사셨습니다.

    성모님은 세상 만물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고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대로 물질을 선용할 수 있었습니다.

    청빈이란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참된 청빈이란 물질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며

    하느님의 뜻대로  재물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도자들처럼 청빈을 실천하기 위하여

    물질에 대한 소유권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재물과 부채와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미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 봉헌했으므로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물질적으로 곤란한 생활을 하더라도

    2000년 전의 성가정보다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성모님과 예수님의 뜻대로 사용하고자 힘써야 합니다.

 정결한 생활의 모범

    원죄 없이 잉태되시고 평생 동정이신 성모님은 일생을 순결하게 사셨습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은 영육간의 모든 면에서 순결하신 분이셨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정결의 덕을 닦기 위하여 일생을 동정으로 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정결의 덕은 어떤 사람이든지 완덕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필요합니다.

    동정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정덕(貞德)은 동정(童貞)을 잘 지키는 것이고,

    기혼자들에게는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이성적인 관계를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결의 참된 의미는 사람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특히 이성간의 지나친 애착을 끊어버리고

    마음과 몸을 자신의 신분에 맞게 순결한 상태로 간직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모님께 봉헌된 사람으로서 성모님처럼 순결(정결)한 생활을 하려면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추한 생각들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좋지 않은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예수님!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나쁜 생각들을 끊어버립니다.”라고 말하면 좋습니다.

    때로는 좋지 않은 생각이 마귀의 유혹에 의하여 오는 경우도 있으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한다. 정욕의 마귀야, 물러가라.”라고 명령할 수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순결한 생활을 하려면 모든 유혹의 기회를 피해야 합니다.

    인간은 나약하여 유혹의 기회나 환경에 자신을 던지면 그 유혹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과신하지 말고 유혹의 함정에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그래야 후회의 쓴 잔을 마시지 않게 됩니다.

    죄를 지을 때 주어지는 한 순간의 쾌락보다는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서 치러야 할

    죄의 대가가 더 크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끝으로, 순결한 생활을 하려면 나태한 생활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대화를 멀리하고 영적 독서와 영적인 대화를 많이 하고자 힘쓰며

    깊은 기도 생활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정결한 생활을 할 수 없기에 자주 자신의 순결을

    성모님께 봉헌하며 도움을 청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순명의 모범

예수님이 출생할 당시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죄를 지은 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는 삶이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된 성모님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누가 1:38)

성모님은 마구간에서의 출산이나 출산 후의 피난살이나 장부인 요셉의 죽음 앞에서도

    오직 하느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네”하고 순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면서

    오직 하느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불평 없이 순명하셨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있어서 순명이란

    자신의 장상들을 통하여 나타난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어떤 신분에 있든지 성서의 말씀과 나의 환경과 웃어른들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에 늘 순명할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순명의 참된 의미는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순명의 덕을 실천하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다고 성서는 말합니다.(히브5,8)

    우리가 참으로 순명의 덕을 닦으려면 때로는 자기의 뜻에 맞지 않아도

     자기의 뜻을 버리고 웃어른과 환경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명의 덕은 자기 자신을 비우는 아픔과 이웃을 위하여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고통을 통하여 성장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마태7,21)

    청빈과 정결과 순명은 하늘나라를 효과적으로 건설하게 하는 성령의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음삼덕을 닦으려고 힘쓰는 동시에 이 은사를 풍성히 내려 주시도록

    간청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짝이시며 복음삼덕의 모범이신 성모님과 함께

    이 은사를 청하고 늘 성모님과 일치하여 생활하고자 한다면

    보다 빨리 덕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청빈과 정결과 순명은 소유물과 사람과 자신에 대한 애착의 끈을 끊어줌으로써

    하늘을 향하여 날아갈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는 율법을 복음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롭게 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복음이라고 믿었다.
그 결과 바울은 독신의 길을 걸으며 예수님의 삶을 살고자 몸부림을 쳤다.

고린도전서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린도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율법은 가짜 복음이다.
마치 율법을 지키므로 거룩하고 의롭게 되는 것처럼 살아간다.
예수를 율법처럼 믿으려고 한다.
착하고 선하게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한다.
이러한 것은 율법적 예수를 믿는 것으로 가짜 복음이라고 하겠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믿음도 가짜 복음이다.
왜 사람을 의식하는가?
복음은 오직 예수님만을 의식한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고, 금식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

마태복음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천국복음(하나님 나라의 복음)




마태복음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태복음 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태복음 24:14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누가복음 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하나님 나라 복음 즉 천국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천국 복음은 내가 천국의 삶을 살아가야만 전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0:1-4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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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교수(복음기도신학연구소)

이스라엘에서 구약을 전공하며 히브리어가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언어임을 깨닫고 현재 성경언어학교를 통해 믿음의 세대를 세우는 일에 전력하고 있다.


하나님은 창세전 꿈꾸시던 원형의 회복을 위해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복음이 우리 존재에 부딪혀지면 그 결과가 반드시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복음을 만났는데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복음이 내 안에 실제가 되었다면 반드시 변할 수밖에 없다.
당신은 변화되었는가?

복음에 대한 오해 없어야

우리가 함께 생활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오해가 일어난다.
이러한 오해는 서로 잘 몰라서 나타나기도 하고, 서로 잘 알아도 발생한다.
이런 오해는 마음에 좀 상처를 받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풀어지고 진의가 반드시 드러난다.
하지만, 복음에 대한 오해를 가진 채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베쇼라

복음은 히브리어로 (베쇼라, 참조: 삼하 18:20, 22, 25)
헬라어로 ‘εὐαγγέλιον’(유앙겔리온),
영어로 ‘기쁜 소식’(the gospel)이다.

사무엘하 18:20, 22, 25.

요압이 저에게 이르되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에 전할 것이니라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날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하고.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컨대 아무쪼록 나로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음질하게 하소서 요압이 가로되 내 아들아 왜 달음질하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인하여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

파숫군이 외쳐 왕께 고하매 왕이 가로되 저가 만일 혼자면 그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할 때에 저가 차차 가까이 오니라.

신약 성경이 기록된 헬라어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에는 ‘기쁜 소식이 가져오는 보상(reward)’이란 의미도 있지만 ‘고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 인생의 삶이나 미미한 사물에도 기쁨 너머에는 항상 고난이 동반된다.

욥기는 그런 우리의 인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욥의 고백을 들어보자.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여기서 ‘단련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바칸’인데 ‘고난 가운데 시험’(examine, prove, test)을 말한다.

바칸

원어에 나타난 복음의 속성

출애굽기 28:17-20에 보면 여러 보석들의 이름이 나온다.
그 중에 ‘홍마노’(백수정)라는 보석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다이아몬드(diamond)다.
히브리어로는(야할롬)으로 발음되는 이 단어에는 복음이란 의미가 전혀 없다.

야할롬은 “쇠망치(hammer)로 내려치다”는 뜻이다.
보석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순도 99.99%의 24K 순금이 되기 위해선 금을 정제하는 용광로에 24번을 들어갔다 나와야 한다.

야할롬

그래서 이렇게 만들어진 순금(진짜 금)은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와 같이 복음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아는 하나님의 참된 자녀는 결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συμπάσχω)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πάθημα)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6-18)”

그래서 복음은 속성상 환영을 받지 못한다.
복음이 기쁜 소식이니까 모두가 좋아하고 복음 앞으로 나아올 것 같지만 천만에 그렇지 않다.
태생적으로 자기 자아에 길들여진 인간은 ‘고난’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이 복음을 싫어한다.
우리가 말씀 앞에 서거나 복음이 우리의 삶을 깊숙이 파고들면 자아가 본색을 드러내며 복음 앞에 발악을 한다.

그래서 복음을 잘 이해하는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쳤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어찌하든지)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 1:14)”
다른 것이 아니라, ‘복음’ 만이 우리를 원형으로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 자료정리 / 03-06-2021(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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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그 용어의 유래

“복음”이라는 용어의 의미와 유래를 정리 해 봅니다.
“복음”을 영어성경에서는 Good news 또는 Godspel 이라 하는데 이는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란 뜻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어떤 좋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반가운 소식“의 의미를 내포한다고 합니다.
즉 죄로 인하여 형벌 받을 운명에 놓여 있었던 인간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죄를 사하시고 크신 복을 주시기 위하여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을 선지자들의 예언으로 알려주셨는데 그 예언이 이제 성취되어 이미 시작하였다는 내용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가 복음의 본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복음”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는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에 이에 적절한 용어를 찾다가 ”복음“(복된 소식)이라는 용어로 확정하였던 것입니다.

신약성경이 기록될 때 원어인 그리스어(헬라어)로는 “유 앙겔리온”이라 하였는데 이 말에는“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 그 자체가 가장 큰 기쁨이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기 때문에 세상의 일반적인 기쁨과는 구별하기 위하여 “유 앙겔리온“이라는 특별한 용어를 채택하여 사용하기로 했던 것 같습니다.

”유앙겔리온‘이라는 용어의 유래를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유앙겔리온“의 유래

페르시아는 B.C. 538년에 제국인 바벨론을 정복하고 세계제국의 권좌에 오릅니다.
그동안 바벨론이 지배하였던 많은 나라들을 페르시아가 인수하고서 행정구역 개편, 납세부과 등 새로운 정책으로 통치를 확고히 합니다.
그후 페르시아는 지배영역을 더욱 넓히기 위하여 먼 지방까지 자주 원정을 나가기도 했는데 어느 날 백만 대군을 이끌고 아시아지역을 벗어나 마게도니아(유럽)로 진출하여 거기에서 그리스를 만나게 됩니다.
당시 그리스는 규모가 작은 나라였기 때문에 페르시아 대군을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남자들은 페르시아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죽기로 최종 결정하고 모두 전쟁터로 나가 맞섰습니다.

당시 전쟁에서 대항하지 않고 항복하면 민족이 멸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항하였다가 패하면 그 결과는 참혹한 멸망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개인들의 재산은 모조리 약탈당하고 건물들과 도시들은 불에 타 폐허가 됩니다.
모든 남자들은 칼에 죽을 것이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붙잡혀 죽거나 노예로 팔려갑니다.
전쟁에서 대항하였다가 패한 나라는 이처럼 비참하게 역사의 종말을 맞습니다.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대항하여 이길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이제 페르시아에 의하여 그리스의 종말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은 삶을 포기하고 무서운 죽음의 종말을 기다려야 했고 더러는 들이나 산속으로 피난하여 거기에서 죽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시작된지 한 달이 넘었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전쟁터의 소식은 감감하였고 그리스 주민들은 매일 불안과 두려움과 함께 마음을 조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전쟁터 쪽에서 멀리 한 군사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스 아테네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그 군인을 지켜보았습니다.
42킬로가 넘는 거리에서 달려온 그 병사는 죽을 힘을 다해 비틀거리며 가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포들 앞에 다가와서는 힘없이 쓰러지면서 “승리는 우리에게” 한마디를 외치고 그대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유앙겔리온”하며 외치기를 시작하였고 그들은 이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큰소리로 “유 앙겔리온”하며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이때의 전쟁을 역사에서는 필로폰네서스 전쟁이라 하는데 그 후 그리스 왕 알렉산더가 B.C.331년에  페르시아를  정복함으로서 세계제국이 됩니다.  

“유앙겔리온”은 그리스어로“ευαγγελιον”으로 표기하는데 ευ는 기쁨이란 뜻이고 αγγελιον 은 천사란 뜻으로 이 두 단어를 합하니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란 뜻이 됩니다.
이 단어는 그들이 그 때의 그 기쁜 소식을 전해준 그 병사를 생각하며 즐겨 사용했던 새로 만들어진 단어였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쁨이 너무나 크고 위대하고 신비하기 때문에 세상의 일반적인 기쁨과는 구별하기 위하여 약 350년전 한때 그리스인들이 즐겨 사용하였던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를 도입하여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신비한 기독교 복음의 특성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특성

첫째,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기쁨을 제공하는 것

세상에서 경험되는 기쁨은 관계된 자들에게만 해당될 뿐 다른 사람에게는 무관하거나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운동 경기에서 승리한 쪽은 기쁨이 되지만 패한 쪽은 기쁘지 않습니다.
국회의원으로 선출 된 자는 기쁨이 되지만 선출 되지 못한 자에게는 그 반대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은 양쪽 모두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입니다.
즉 나에게도 기쁨이 되지만 너에게도 기쁨이 되고 그에게도 기쁨이 됩니다.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이웃나라나 먼 다른 나라 사람이나 남녀노소 귀천을 막론하고 한결같은 기쁨을 제공합니다.
이와 같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기쁨을 제공하는 것은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한결같은 기쁨을 제공하는 신비한 특성이 있습니다.  

둘째, 기쁨의 지속성

세상에서 얻는 기쁨은 그때 잠간이요 순간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물거품처럼 식어지고 사라집니다.
행복을 안겨 줄것 처럼 보였던 그 기쁨은 사라져 없어지고 허전함과 아쉬움만 남겨줍니다.
잠시 나타나 보였다가 사라져 없어지는 것들은 참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온통 쉽게 변하고 사라지고 부패해버리는 거짓된 것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참 기쁨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오래토록 지속하는 참 기쁨을 제공합니다.
어제도 기뻐했지만 오늘도 기쁘고 내일도 기쁨이 됩니다.
한 달이 되고 1년이 되어도 기쁨의 감정은 변하지 않고 여전합니다.
어려움과 가난과 고난이 닥쳐와도 변하지 않고 핍박이 와도 그 기쁨은 사라지지 않고 빼앗기지도 않습니다.
사라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은 참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참 기쁨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참 기쁨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거듭난 자들만이 변하지 않는 참 기쁨을 이해하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변하지 않는 참 기쁨을 제공합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신비한 복음의 특성입니다.

셋째, 큰 기쁨을 제공하는 것

이 세상이 제공하는 기쁨들은 순간적이면서도 극히 작은 것들 뿐 입니다.
사람들은 유치하고 저급하고 작은 기쁨에 매달려 좋아하고 즐거워합니다.
모두 다 허풍스럽고 사소한 것들입니다.
두더지가 땅위의 좋은 것을 모르고 땅속만을 파헤치면서 무엇을 찾으려 애쓰듯이 사람들은 정말 크고 좋은 참 기쁨을 알지 못한채 작은 것들을 붙잡으려고 수고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위대하고 놀라운 큰 기쁨을 제공합니다.
결코 작은 것이 아닌 큰 기쁨을 선물합니다.
충만한 기쁨, 넘치는 기쁨, 표현 할 수 없는 한 없는 기쁨을 제공합니다.
실로 기독교의 복음이 제공하는 큰 기쁨과 견줄만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인들 중에는 자기 일생에서 경험 해보지 못한 놀랍고 큰 기쁨을 복음에서 처음 체험했다 하며 지금도 그 기쁨을 누리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고 간증하며 증언하는 것을 쉽게 봅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은 기쁨을 증가시켜 줍니다.
그 진리를 자세히 그리고 깊이 알면 알수록 그 기쁨은 크게 증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처럼 복음의 신비스런 특성 때문에 세상의 일반적인 기쁨과는 차별을 두려고 “유앙겔리온“ 이라고 하는 특별한 단어를 도입하여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롬 1:16) 오늘날에도 복음이 바르게 전하여 지기만 한다면 그리고 듣는 자들이 그 내용을 바르게 듣고 이해하기만 한다면 참되고 크고 신비한 기쁨의 삶을 누구나 체험하며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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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소식(유앙겔리온)

약 2천여 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던 당시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어쩌면 모든 정치와 경제, 종교와 사회 등 저 밑바닥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도 로마와 자국의 권력자들의 지배에 의해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면서 할 말 못하며 살아가고 있었으리라.
이러한 상황에서 메시아, 예수님의 탄생은 만백성에게 “기쁜 소식” 혹은 “좋은 소식”(Good News)이었음에 틀림없다.

일반적으로 성경에 “복음”(福音)이라고 번역된 이 용어는 원래 기쁜 소식을 뜻하는 헬라어 “유앙겔리온" 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학에 가장 중요한 단어로 자리매김하게 된 이 용어는 ‘좋은’, ‘기쁜’, ‘반가운’을 의미하는 “eu;”와 ‘소식’, ‘기별’을 뜻하는 "aggelion"의 합성어로서 신약성경 전체에 76번 나타난다.

고대지중해 문화권에서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비롯하여 황제와 관련된 모든 사건들은 모두 좋은 소식이었다.
이를 테면 황제의 출생, 생일, 즉위식, 그리고 군사적·정치적 승전보 등이 모두 좋은 소식, 반가운 기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축제일이 되면 전령관(kerux. 케룩스)이 말을 타고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여기에 유앙겔리온이 있다”고 외치며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알렸던 것이다.
그 케룩스가 전하는 내용을 우리가 잘 아는 “케리그마”(Kerygma)라고 했던 것이다.

소아시아의 프리에네(priene)에서 이러한 쓰임새의 기원을 알게 해주는 기원전 9년의 고대 비문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기원전 63~기원후 14)의 탄생에 관해 “신의 생일은 세상을 위한 기쁜 소식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도미티아누스 황제(기원후 51~96)는 스스로 “신이요 황제”라고 자처하여 ‘유앙겔리온’을 외치면서, 자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했다. 곳곳에 황제 신전을 지어 참배하도록 하면서 말이다. 이처럼 황제의 근황들을 알리는 좋은 소식을 의미하는 용어가 바로 ‘eu;agge;lion’(유앙겔리온)이며, 이런 기쁜 소식들은 로마제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과 안정을 주는 희망의 용어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복음서 저자들과 사도 바울은 당시 황제에게만 적용되었던 이 개념을 차용하여 예수의 생애야 말로 바로 이 ‘유앙겔리온’이라고 온 지중해 세계에 선포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의 탄생, 생애, 죽음, 부활과 현현을 그리스도의 승리(승전보)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유앙겔리온”이라는 말 한마디를 통해서 1세기의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야말로 황제와 관련된 기쁜 소식 못지않게 반갑고도 좋은 기별이었으며, 그의 오심은 곧 세계가 동터오는 것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만백성의 구원자요, 화해자로 오셨다는 예언자적 목소리가 보다 더 강력하게 담겨야 할 것이다.

그는 진정 평화의 왕이요, 회복의 화신이자 우리 민족의 일치와 화합을 위해 오신 분임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연평도에서 죽어간 해병대 병사들과 주민들을 기억하고 그 유가족의 마음을 위로하는 일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북한의 도발에 맞선 전투의지를 주장하는 것도 일리 있지만 굶어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발터 카스퍼(W. Kasper)가 “예수의 메시지는 기쁜 소식이요, 하나님의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은총의 제공이다…. 예수의 설교는 위협의 설교가 아니라 기쁜 소식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 나라의 지도자들도 그러한 신앙자세로 이번 일을 잘 대처해준다면 백성들에게 뜻 깊은 선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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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내게 부르짖으라...응답하겠고

- 이는 미래의 모든 일을 주관하며 계시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뿐이므로, 그분께 간절히 매어달려야 함을 상기시킨다.
특히 '부르짖으라'의 히브리어 '카라'(*)는 '절규하다'는 의미로서, 심한 갈증속에서 물을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던 삼손의 모습이나 자식의 잉태를 위해 간구하던 한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삿 15:18. 삼상 1:10-16).


부르짖으라(카라) 7121.

קָרָא 스트롱번호7121

1. 부르다.  2. 삿 18:23.  3. 도움을 청하다
발음 [ qârâʼ ]
구약 성경 /  755회 사용



비밀(바차르) 1219.

בָּצַר 스트롱번호1219

1. 삭제하다.  2. 삼가다.3. 신 28:52
발음 [ bâtsar ]
구약 성경  / 38회 사용
☞거두다(레 25:5,11, 삿 9:27), 끊다(시 76:12), 견고하다(민 13:28, 왕하 18:13, 스 11:16), (성곽이 하늘에) 닿다(신 1:28, 9:1),
둘러 있다(신 3:5), 은밀한 일(렘 33:3), 금지하다(창 11:6), 무성하다(슥 11:2), 견고히 하다(렘 51:53).
[명] 포도 따는 자(렘6:9, 옵1:5), 거두는 자(렘49:9), 성벽(겔36:35), 성(호8:14).


* רָז 스트롱번호  7328

1. 비밀.  2. 복수형으로 רָזִן
발음 [ râz ]
어원 / ‘가늘게 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한 듯함
구약 성경  /  9회 사용

은밀한 일[것](단 2:18, 47,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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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에서의 비밀









신약에서 비밀이란 "신비"라는 뜻으로 28회 사용됩니다.

μυστήρι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3466

1. 비밀.  2. 마 13:11. 3. 신비
발음 [ müstēriŏn ]
어원  / μύω ‘입을 다물다’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비밀, 비밀 의례, 비밀 교훈, 신비.
  a. 마 13:11, 막 4:11, 눅 8:10.
  b. 비밀, 신비, 롬 11:25, 고전 15:51, 골 2:2.
  c. [계시록에서] 계 1:20, 10:7, 17:5 ,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비밀(마 13:11, 눅 8:10, 살후 2:7).

첫째,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골로새서 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


둘째, 복음의 비밀

고린도전서 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셋째, 천국의 비밀

마태복음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넷째,  이방인의 비밀

로마서 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다섯째, 종말에 관한 비밀

요한계시록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


여섯째, 영의 세계의 비밀

고린도전서 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