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야훼 - 엘로힘, 엘 샤다이 / 여호와 라파, 이레, 샬롬,


여호와 의미

여호와는 히브리어 יהוה (YHWH)에서 유래했으며, 뜻은 ‘독립적인 존재’ ‘스스로 있는 자’이다. 
이것을 자존이라 부른다. 
여호와는 자존자이시다. 
출애굽기 3:14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의 표현이 ‘야훼’이다.

  •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ויאמר אלהים אל־משה אהיה אשר אהיה ויאמר כה תאמר לבני ישראל אהיה שלחני אליכם׃
출 3:14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구약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름은 ‘엘’ 과 ‘엘로힘’이다. 
엘과 복수형인 ‘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능력과 위험을 나타낸다. 
하지만 여호와는 구원과 심판의 의미가 강하다. 
종종 ‘야훼 엘로힘’ 처럼 ‘여호와 하나님’으로 함께 나타날 때가 많다.

יהוה는 자음만 존재하다. 
원래 히브리어는 모음 없는 자음만 존재한다. 
2세기 이후 랍비들이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디아스포라 시대가 되면서 히브리음을 잊을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모음을 표기하여 지금이 이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정확한 발음인지도 사실 알지 못한다.

히브리어 자음 네 개로 이루어진 יהוה는 테트라그라마톤으로 불리며 신성시 되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주님이란 뜻으로 아도나이(אֲדֹנָי)로 표기하고 읽었다. 
יהוה를 야훼(Yahweh)로 발음할지, 여호와(Jehovih)로 발음할지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여호와는 이름인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의 하나가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름이 갖는 속성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에게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순간 신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위 ‘이름’이란 이름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 사사기 13장 18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 이사야 9장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표기를 하지만 그것은 대명사이지 고유명사가 아니다.

야훼(Yahweh), 여호와(Jehova)

‘야훼’ 또는 ‘여호와’의 뜻은 ‘스스로 있는 자’ ‘자존하는 자’이다. 출애굽기 3:15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라는 구절이 야훼이다. ‘나는 ~이다’는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께 ‘나는 ~’이다’를 사용하면 구약의 여호와를 예수 그리스도로 소개했다.

  • [개역 개정]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NIV] 출 3:14 God said to Moses, “I AM WHO I AM. This is what you are to say to the Israelites: ‘I AM has sent me to you.'”





엘로힘(אֱלֹהִים, Elohim)

엘로힘 (Elohim)은 성경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엘' (אל)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복수형으로, 그 뜻과 용법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2. 엘로힘의 뜻과 유래

  • '엘로힘'히브리어에서 '엘'(El, אל)과 복수형 어미 '힘'(im, ים)이 결합된 형태입니다.
  • '엘'은 '강한 자', '신', 또는 '하나님'을 의미하며, 주로 힘과 능력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고대 근동의 다른 민족들이 사용했던 신들의 이름에서도 발견됩니다.
  • 복수형 '힘'은 단순히 복수형의 뜻을 가지기보다는, 존경과 경외를 표현하는 복수형으로 사용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 위대함과 경외를 강조하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엘로힘강력하고 전능한 하나님을 의미하며, 그분이 가진 모든 능력과 신적 특성을 나타냅니다. 히브리어 문법에서 복수형은 하나님이 여러 면에서 능력이 무한하고, 전지전능하신 분임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3. 엘로힘의 용례

엘로힘은 구약 성경에서 매우 자주 등장하며, 하나님을 지칭할 때 주로 사용됩니다. 또한, 엘로힘은 하나님의 성품, 권능, 그리고 하나님과 관련된 다른 신학적 개념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3.1. 창세기 1:1 (하나님의 창조)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여기서 "하나님"은 엘로힘입니다. 이 구절에서 엘로힘은 창조주로서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고 전지전능한 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2. 창세기 1:26 (하나님의 형상)

  •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창 1:26)

이 구절에서도 엘로힘이 사용되며, 하나님의 다수성 또는 삼위일체적인 성격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내적 관계다양성을 강조하는 구절로 이해됩니다.

3.3. 시편 19:1 (하나님의 창조)

  •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 19:1)

여기서 엘로힘하늘과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와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 구절에서 엘로힘은 창조의 주체로서, 하나님이 만물에 드러난 능력과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3.4. 출애굽기 3:14 (하나님의 이름)

  •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출 3:14)

이 구절에서 하나님"I AM"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셨고, 이 "I AM"의 개념은 엘로힘자존적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로서 모든 것을 지배하고 주관하는 전능한 분임을 보여줍니다.

4. 엘로힘의 신학적 의미

엘로힘은 하나님을 지칭하는 이름 중에서 전능하고, 창조적인 힘을 강조하는 이름입니다. 특히, 구약 성경에서 엘로힘하나님의 창조자, 심판자, 그리고 전능한 통치자로서 나타납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이 창조의 주체로서, 모든 생명과 세계를 지배하시는 주권자임을 강조하며, 그분의 능력, 위대함, 거룩함을 묘사합니다.

4.1. 하나님의 전능성

엘로힘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을 상징하며, 그분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고 유지하시는 능력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엘로힘으로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며, 그들의 삶을 주관하십니다. 이 전능함은 하나님의 주권능력을 나타내는 중요한 신학적 개념입니다.

4.2. 삼위일체와의 관계

엘로힘의 복수형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본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라고 표현되는 부분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대화와 관계를 의미한다고 이해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26에서 "우리"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임을 암시합니다.

4.3. 창조와 심판

엘로힘은 창조주로서 만물의 근원이자 심판자로서도 등장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심판하시며 구속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엘로힘은 이 모든 과정에서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행하시며, 때로는 심판을 통해 죄를 처리하시고, 때로는 구속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5. 엘로힘의 결론적 의미

엘로힘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전능성, 창조적 힘, 주권을 표현하는 중요한 신학적 이름입니다. 엘로힘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주관하시며, 전능한 심판자로서 모든 일에 대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신 분임을 드러냅니다. 또한, 이 이름은 하나님의 본질적 능력을 나타내며,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내적 관계를 암시하는 중요한 신학적 요소로 작용합니다.

엘로힘은 단순히 "하나님"을 의미하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함, 창조의 주체로서의 신적 본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단어로,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위엄과 전능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엘로힘(Elohim)

엘의 복수형으로 창세기 1:1을 비롯하여 수많은 구약에서 사용되었으며, 창조적 능력을 소개하는 곳이나 능력과 위엄을 드러내실 때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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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샤다이(Elohim Shaddai)

‘엘샤다이’(Hebrew: אֵלוֹהִים שַׁדַּי, Elōhîm Shaddai)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표현 중 하나입니다. 이 이름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다양한 이름들 중 하나로, 하나님에 대한 심오한 신학적 이해를 제공하며 그 분의 성격과 속성을 나타냅니다. ‘엘샤다이’라는 이름은 여러 가지 신학적 의미와 상징을 내포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1. 엘샤다이의 히브리어 뜻

‘엘샤다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에서 엘과 샤다이 두 단어가 합성된 합성어입니다.

엘(El, אֵל): 이 단어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로, 일반적으로 모든 신성한 존재를 지칭할 때 사용됩니다. 이는 ‘능력 있는 존재’, ‘힘 있는 자’, 또는 ‘권능을 가진 자’를 의미하며, 고대 근동 문화에서 신을 표현할 때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엘’이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권위를 나타내는 핵심 단어로 등장합니다.

샤다이(Shaddai, שַׁדַּי): ‘샤다이’는 ‘전능한’, ‘모든 것을 충분히 공급하는’, 또는 ‘완전한 능력’을 의미하는 단어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단어는 원래 ‘젖을 먹이는 자’ 혹은 ‘영양을 공급하는 자’와 관련이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과 보호를 상징합니다. ‘샤다이’는 때때로 하나님의 보호자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며, 그 분이 온전한 능력으로 믿는 자들을 보살피고 인도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엘샤다이’는 "능력 있는 하나님", "전능한 하나님"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이는 하나님이 가진 무한한 능력과 전능함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2. 엘샤다이의 성경 용례

‘엘샤다이’라는 이름은 주로 구약 성경에서 등장합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방식에서 강력한 존재로 드러나며, 그 분의 전능함을 나타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엘샤다이의 이름은 전능함, 보호, 생명의 공급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하는 구절에 자주 나타납니다.

2.1. 창세기에서의 엘샤다이

‘엘샤다이’는 창세기에서 중요한 용례를 찾을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엘샤다이’로 소개하신 장면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창세기 17:1
    "아브라함이 구십 구 세 되던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엘샤다이)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엘샤다이로 소개하며, 그에게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엘샤다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축복의 근원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다면 그에게 이루어질 약속을 확신할 수 있다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어떻게 그들의 삶을 이끌어갈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2.2. 창세기 28:3에서의 엘샤다이

  • 창세기 28:3
    "그가 하늘의 하나님, 곧 전능하신 하나님(엘샤다이)이 너에게 복을 주사..."

이 구절에서 이삭은 야곱에게 엘샤다이의 축복을 구합니다. 여기서 엘샤다이복의 근원이자 능력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의 보호복을 주시는 능력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며, 전능한 능력으로 그들을 지키실 것임을 의미합니다.

2.3. 욥기에서의 엘샤다이

욥기에서도 ‘엘샤다이’라는 이름은 종종 등장합니다. 욥기에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심판의 능력을 강조하는 중요한 책입니다. 욥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엘샤다이로 부르면서 욥은 그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을 느끼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복하는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 욥기 5:17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전능자(엘샤다이)의 꾸짖음을 피하지 말라."

여기서 엘샤다이는 하나님의 전능함과 그 분의 주권적 심판을 나타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그분의 뜻에 맞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징계하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욥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엘샤다이의 상징과 신학적 의미

‘엘샤다이’는 단순히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하나님의 능력보호, 그리고 풍성한 공급자로서의 역할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이 이름을 통해 자신이 단순히 능력만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과 자비, 보호와 공급이 결합된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나타냅니다.

3.1. 전능하신 하나님

‘엘샤다이’의 핵심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권능을 나타냅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엘샤다이’로 소개하신 장면에서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삶에서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존재로 나타나십니다. 이 이름을 통해 신자들에게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일으킬 수 있는 변화약속을 이루시는 능력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고자 하셨습니다.

3.2. 공급자와 보호자

‘엘샤다이’는 또한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샤다이’라는 단어가 원래 젖을 먹이는 자, 즉 영양을 공급하는 자와 연결되는 것을 감안할 때, 하나님은 단지 능력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는 존재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이 이름을 통해 그 분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히 공급하시며, 그들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3.3. 믿음의 여정에서의 하나님

‘엘샤다이’는 또한 신자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신뢰믿음을 표현하는 중요한 이름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는 이 이름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순종의 기초가 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엘샤다이로서 우리의 삶을 능히 인도하시며,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결론

‘엘샤다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전능하시며, 그분의 능력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강력한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성경에서 이 이름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며,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능력을 강조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엘샤다이’는 단순한 힘의 표현이 아니라 사랑과 보호, 복의 공급자로서 하나님을 묘사하는 중요한 이름으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신뢰할 수 있는 성품을 이해하도록 돕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엘 샤다이(El Shaddai)

원어상으로는 모든 것을 충족시키시는 하나님이지만 문맥상 ‘강하고 능하신 하나님’으로 사용되었다. 번역할 때는 대부분 ‘전능하신 하나님(Almighty God)’을 사용한다. 대부분 ‘엘샤다이’로 사용되었지만 창 49:25처럼 샤다이로만 사용되면 ‘전능자’로 번역된다. 여기서도 역시 채우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미가 강하게 드러난다.

샤다이만 사용된 구절 : 민 24:4, 민 24:16, 룻 1:20, 룻 1:21, 욥 5:17, 욥6:14,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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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

신학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주제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이름이다. 보통 이름의 신학으로 불리는 이 주제는 교리와는 거리가 있고,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주제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엄밀하게 하나님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은 존재를 규명하고 속성을 한계 짓는 것이기에 하나님은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후에 따로 다루고 오늘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식 또는 이해하는 방식으로서의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자. 각각의 이름은 후에 더 자세히 다루고 여기서는 일반적인 의미 만을 소개한다.

하나님 이름의 구분

하나님의 이름은 크게 ‘엘’ 계통과 ‘여호와(야훼)’ 계통으로 나누어져 있다. 여기서 별칭으로 불리는 임마누엘이나 퀴리오스 등은 성부 하나님을 가르키는 동시에 성자 예수님의 별명이기도 하다.

엘 계통의 이름들

엘(El)

창조적 능력을 가진 이름입니다. 엘은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과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신’으로 부르는 단어와 비슷하다. 고대 레반트 문화권에서 엘이라는 단어는 매우 흔하다.

엘로힘(Elohim)

엘의 복수형으로 창세기 1:1을 비롯하여 수많은 구약에서 사용되었으며, 창조적 능력을 소개하는 곳이나 능력과 위엄을 드러내실 때 사용합니다.

엘 엘리욘 / 엘 엘룐 (El Elyon)

뜻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다. 강력한 하나님을 한 번 더 강조한 것으로 의미는 ‘더욱 강력한 하나님’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창 14:18, 민 24:16, 사 14:13-14

  • 창 14: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엘 로이(El Roi)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창세기 16:32에서 한 번 사용된 것으로 하갈이 도망갈 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그를 돕는다. 이때 하갈은 하나님을 향해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감찰하다는 ‘보다’는 뜻이다. 보다는 뜻의 로이는 성경에서 모두 다섯번 사용되었다. 창 16:13, 삼상 16:12, 욥 7:8, 욥 33:21, 나 3:6,

  • [개역 개정] 창 16: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NIV] 창 16:13 She gave this name to the LORD who spoke to her: “You are the God who sees me,” for she said, “I have now seen the One who sees me.”

엘 샤다이(El Shaddai)

원어상으로는 모든 것을 충족시키시는 하나님이지만 문맥상 ‘강하고 능하신 하나님’으로 사용되었다. 번역할 때는 대부분 ‘전능하신 하나님(Almighty God)’을 사용한다. 대부분 ‘엘샤다이’로 사용되었지만 창 49:25처럼 샤다이로만 사용되면 ‘전능자’로 번역된다. 여기서도 역시 채우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미가 강하게 드러난다.

샤다이만 사용된 구절 : 민 24:4, 민 24:16, 룻 1:20, 룻 1:21, 욥 5:17, 욥6:14, 그 외 다수

엘 올람(El Olam)

엘 올람의 뜻은 ‘영원하신 하나님’ 또는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다. 창세기 21장 33절과 이사야 40장 28절에서 사용되었다.

엘 엘로헤 이스라엘(El Elohe Israel)

엘 엘로헤 이스라엘의 뜻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야곱이 얍복강을 건넌 후 형 에서를 무사히 만난 후 홀로 남았을 때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그곳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로 붙인 것이다. 하나니님을 부르는 이름이지만 묘한 분위기를 느낀다. 이후 야곱은 디나의 강건 사건이 일어나고 벧엘로 올라가게 된다.

  • 창세기 33장 20절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여호와 의미

여호와는 히브리어 יהוה (YHWH)에서 유래했으며, 뜻은 ‘독립적인 존재’ ‘스스로 있는 자’이다. 
이것을 자존이라 부른다. 
여호와는 자존자이시다. 
출애굽기 3:14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의 표현이 ‘야훼’이다.

  •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ויאמר אלהים אל־משה אהיה אשר אהיה ויאמר כה תאמר לבני ישראל אהיה שלחני אליכם׃
출 3:14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구약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름은 ‘엘’ 과 ‘엘로힘’이다. 
엘과 복수형인 ‘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능력과 위험을 나타낸다. 
하지만 여호와는 구원과 심판의 의미가 강하다. 
종종 ‘야훼 엘로힘’ 처럼 ‘여호와 하나님’으로 함께 나타날 때가 많다.

יהוה는 자음만 존재하다. 
원래 히브리어는 모음 없는 자음만 존재한다. 
2세기 이후 랍비들이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디아스포라 시대가 되면서 히브리음을 잊을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모음을 표기하여 지금이 이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정확한 발음인지도 사실 알지 못한다.

히브리어 자음 네 개로 이루어진 יהוה는 테트라그라마톤으로 불리며 신성시 되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주님이란 뜻으로 아도나이(אֲדֹנָי)로 표기하고 읽었다. 
יהוה를 야훼(Yahweh)로 발음할지, 여호와(Jehovih)로 발음할지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여호와는 이름인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의 하나가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름이 갖는 속성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에게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순간 신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위 ‘이름’이란 이름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 사사기 13장 18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 이사야 9장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표기를 하지만 그것은 대명사이지 고유명사가 아니다. 
여호와 엘로힘 엘룐 등은 아버지 선생인 사장님이지 ‘김소똥’ ‘박개똥’이 아닌 것이다.



야훼 / 여호와

야훼(Yahweh), 여호와(Jehova)

‘야훼’ 또는 ‘여호와’의 뜻은 ‘스스로 있는 자’ ‘자존하는 자’이다. 출애굽기 3:15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라는 구절이 야훼이다. ‘나는 ~이다’는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께 ‘나는 ~’이다’를 사용하면 구약의 여호와를 예수 그리스도로 소개했다.

  • [개역 개정]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NIV] 출 3:14 God said to Moses, “I AM WHO I AM. This is what you are to say to the Israelites: ‘I AM has sent me to you.'”

여호와 이레(Yahweh Yireh)

여호와의 이레의 뜻은 ‘여호와께서 나타나신다’이다. 준비되신다는 의역된 것이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치면서 이삭을 대신해 숫염소를 드리면서 부르는 이름이다.

  • 창세기 22장 14절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 닛시(Yahweh Nissi)

여호와 닛시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시다’이다. 깃발은 승리를 하므로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출애굽시 17장에서 여호수아 아멜렉과 싸울 때 모세가 산에서 기도할 때 승리하였다. 후에 모세는 승리를 기념하여 제단을 쌓고 ‘여호와 닛시'(출 17:15)라 부른다.

  • 출애굽기 17장 15절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여호와 살롬(Yahweh Shalom)

여호와 살롬 또는 ‘여호와 샬롬’은 ‘여호와는 평화이시다’는 뜻이다. 사사기 6장 24에서 사용되었다.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죽지 않은 것을 보고 놀람과 감사함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을 보는 자는 모두 죽지만 자신이 죽지 않아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부분이다.

  • 사사기 6장 24절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여호와 사바오트(Yahweh Sabbaoth)

여호와 사바오트는 ‘만군의 여호와’라는 뜻이다. 만군은 수많은 군대, 이스라엘의 전체를 뜻한다. 이스라엘은 군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 출애굽기 7장 4절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여호와 마카데쉠(Yahweh Maccaddeshem)

여호와 라아(Yahweh Raah)

여호오 라아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뜻이며 시편 23편 1절에서 다윗이 고백한 표현이다. 하나님을 목자로 이스라엘을 양으로 비유하는 부분은 성경에 상당히 빈번하게 등장한다.

  • 시편 23장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 라파(Jehovah Rapha)

치료하시는 여호와이다. 출애굽기 15:26에서 사용된 표현이다. 마라의 쓴 물 사건(출 15:22-27)에서 나오는 호칭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을 치료하신다는 표현이다.

  • 출 15: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여호와 치드케누(Yahweh Tsidkenu)

여호와 치드케누는 ‘여호와는 우리의 의가 되신다’이다.

여호와 엘 게몰라(Yahweh El Gemola)

여호와 엘 게몰라는 ‘여호와 보복하시는 하나님’이다. 예레미야 51:56에서 사용된었다.

  • 렘 51:56 곧 멸망시키는 자가 바벨론에 이르렀음이라 그 용사들이 사로잡히고 그들의 활이 꺾이도다 여호와는 보복의 하나님이시니 반드시 보응하시리로다

보수 또는 보복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 로마서 12장19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하나님은 보복하신다. 보복은 악에 대한 징벌이다.

  • 신명기 32장 41절 내가 내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이 정의를 붙들고 내 대적들에게 복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할 것이라
  • 신명기 32장 35절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여호와 나케(Yahweh Nakeh)

치시는 여호와 겔 7:9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뜻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말씀에 대한 불순종, 곧 죄와 악에 대한 심판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 당한다.

  • 에스겔 7장 9절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때리는 이임을 네가 알리라

여호와 삼마(Yahweh Shamma)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는 거기 게시다’는 뜻이다. 에스겔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으시고 친히 그곳에 계신다 선언하신다. 여호와의 삼마가 의미하는 것은

  • 에스겔 48장 35절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여호와 라파(Yahweh Rapha)

치료하시는 여호와

  • 출애굽기 15장 26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여호와 엘로힘(Yahweh Elohim) 

그 외 이름 / 별명들

아도나이(Adonai)

아도나이는 히브리인들이 ‘여호와’를 입으로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신하여 사용된 호칭이다.

임마누엘(Emmanuel)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에 나오는 이 단어는 후에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과 연결한다. 성자 예수님은 성육신을 통하여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심으로영원히 함께 하시게 된다.

  •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크리스토스(Christos)

메시야의 헬라어가 크리스토스이다. 지금의 그리스도를 말한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1세기 에 태어난 갈릴리 청년이 구약에서 예언한 ‘그 메시아’라는 뜻이다.

  •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 마 27: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 행 5: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퀴리오스(Kurios)

퀴리오스는 헬라어 ‘주인’이란 뜻이다. 보편적 용어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주’로 종종 부르고 있다. 주인은 하나님께도 사용하고 있다.

  •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마 22: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 요 11: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소테르(Soter)

소테르는 헬라어로 ‘구주’라는 뜻이다.

데오스(Theos)

데오스는 헬라어이며, 구약의 엘로힘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 ‘하느님’ ‘하나님’이란 뜻이다.







창세기 1장과 예수 그리스도

성경을 해석하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는 예표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담긴 그리스도를 찾아 해석해 보려고 합니다. 창세기 1장은 천지 창조를 다루는 장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신약 성경과 연결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역할이 담겨 있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창세기 1장에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과 예표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의 주체이심

창세기 1:1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요한복음 1:1-3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구절은 창세기의 "태초에"와 연결됩니다.
  • 요한복음 1:3은 예수님이 창조의 도구(말씀)로 활동하셨음을 보여줍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 골로새서 1:16-17은 "그(예수님) 안에서 만물이 창조되었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에서 언급되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개념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직결됩니다. 예수님이 말씀(로고스)이시기 때문에 온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 성경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후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2. 빛의 상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창세기 1:3 -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 요한복음 8:12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 창세기의 빛은 물리적 빛만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질서를 가져오시는 하나님의 구속적 역할을 상징하며, 이는 예수님께서 영적 어둠을 몰아내시는 역할과 연결됩니다.
  • 고린도후서 4:6에서는 "빛을 비추셨느니라"는 구절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신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빛'으로 소개합니다. 빛은 진리이며 생명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빛은 피조물로 나타나지만 예수님은 창조되지 않은 빛 그 자체이십니다. 빛은 비추심으로 어둠을 몰아내고 모든 것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그래서 빛은 진리이며, 악(어둠)과 싸우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3.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창세기 1:11 -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 창조 이야기에서 씨앗과 생명체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의 생명 원리를 상징합니다.
  • 요한복음 1:4에서 예수님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묘사됩니다.
  • 요한복음 10:10은 예수님께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4. 하나님의 형상과 예수 그리스도

창세기 1:26 -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우리"라는 표현은 삼위일체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의 공동 활동을 암시합니다.
  •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소개됩니다(골로새서 1:15).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류와 교제하기 원하셨음을 보여줍니다. '형상'이란 히브리어 첼렘이나 데무쓰는 모두 형상과 이미지로 번역이 되는 단어들로 '닮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육체를 입으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드러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 요 14: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 요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요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 요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5. 안식과 예수 그리스도

창세기 2:2 -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시니라"

  • 창조의 완성과 안식은 장차 예수님을 통해 제공될 영원한 안식을 예표합니다.
  • 히브리서 4:9-10은 예수님을 통해 참된 안식이 성취됨을 설명합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말씀 "다 이루었다"는 창조의 완성에서 나타난 안식과 연결됩니다.

6. 성령과 함께 사역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창세기 1:2 -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 성령의 운행은 창조의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그분의 사역을 시작하십니다(누가복음 4:18).
  • 성령과 예수님의 협력은 창조와 구속에서 일관되게 나타납니다.

7.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구절은 창조의 핵심 도구로 "말씀"을 강조합니다.

  •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Logos)으로 소개되며, 이를 통해 창조와 구속이 이루어짐을 나타냅니다(요한복음 1:1).

결론:

창세기 1장은 창조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창조의 주체로서 빛, 생명, 말씀, 안식,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구속의 그림자를 드러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궁극적 구원 계획을 구약의 첫 장부터 우리에게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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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론과 예표론에 대하여

성경을 깊이 공부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접하게 되는 것이 모형론과 예표론입니다. 둘은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존재합니다. 모형론(Typology)예표론(Foretelling)은 성경 해석에서 매우 밀접한 개념이지만, 각각 고유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은 성경 해석의 방법인 모형론과 예표론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모형론(Typology)

  • 정의: 구약의 특정 인물, 사건, 제도, 또는 물건이 신약에서 성취될 영적 진리(특히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구속사적 사건)를 미리 보여주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 예를들면
    • 아담 → "둘째 아담"으로 불리는 예수님(로마서 5:14).
    • 모세 → 중재자로서 예수님의 역할을 예표(신명기 18:15-18).
    • 성막 → 하나님의 임재와 예수님의 성육신(요한복음 1:14).

모형론은 어떤 모형이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형론은 예표론에 비해 정적이며, 존재하는 어떤 형태의 물질과 연관이 깊습니다. 모형론(Typology)은 성경 해석에서 구약의 특정 인물, 사건, 제도, 또는 물건이 신약에서 성취될 영적 진리나 구속사적 사건의 "모형"(type)으로 이해되는 개념입니다. 모형은 실체를 예고하거나 그림자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며, 신약에서 그 실체(antitype)가 완전하게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아담은 “둘째 아담”인 예수님(로마서 5:14)의 모형으로, 아담이 인류의 죄의 원인이 된 것처럼 예수님은 인류를 의로 이끄는 새 창조의 시작을 상징합니다. 또 다른 예로, 구약의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모형으로,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를 보여줍니다(요한복음 1:14, 히브리서 9:11). 모형론은 구약과 신약 간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점진적으로 계시되었음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생각합시다. 모형이 있고, 그 모형은 실체를 반영한다고. 모형은 다양하지만 실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모형론은 그리스도적 성경 해석에 가깝습니다. 아마 아래의 글을 읽어 보시면 좀더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자, 이제 예표론으로 가 보겠습니다. 예표론은 말 그대로 구약의 어떤 사건들이 장차 이루어질 어떤 일에 대한 '예표'라고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표론은 동적이고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2. 예표론(Foretelling)

  • 정의: 구약 성경에서 예언적인 말씀이나 사건이 장차 이루어질 미래의 일을 명확히 지시하거나 상징하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 예를 들면
    • 이사야 53장 → 예수님의 고난과 속죄를 명시적으로 예언.
    • 미가 5:2 → 예수님의 탄생지가 베들레헴임을 예언.
    • 스가랴 9:9 →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것을 예언.

3. 공통점

이제 공통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모형론과 예표론의 공통점은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해석이라는 점은 거의 비슷합니다. 방식이 다를 뿐 비슷한 의미로 해석을 하기 때문입니다.

구속사적 관점

  • 둘 다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며,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보여줍니다.
  • 구약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드러낸다고 봅니다.

상징과 성취

  • 구약의 인물, 사건, 제도 등이 신약에서 성취되거나 설명됩니다.
  • 구약에서 불완전하거나 그림자처럼 보였던 것이 신약에서 온전한 실체로 드러남.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석

  •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전제(누가복음 24:27, 44)를 바탕으로 합니다.

이렇게 보면 모형론이든 예표론이든 과거의 모양이나 사건은 모두 실체가 아닌 모형과 예표이고,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또한 과거의 어떤 것들은 실체나 본체인 그리스도를 본떠 만들었거나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법은 구약의 율법이나 모형들은 임시적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현현 또는 강림하셨을 때 모든 것은 빛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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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vs 야훼

여호와와 야훼는 둘 다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로, 원어는 히브리어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들을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자음 4글자로만 이루어진 단어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그 단어를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고, 그렇게 수천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원래 그 4단어의 발음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와 야훼는 둘 다 그 4글자의 자음에 모음을 붙여서 읽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둘 다 그 4글자의 단어를 발음했는지 확실하지 않죠. 단지 신학자들은 여호와보다 야훼가 그 4글자의 발음에 더 가깝다고 추측할 뿐입니다. 결국 여호와와 야훼는 둘 다 하나님을 뜻하는 4글자를 추측해서 읽어낸 것으로, 둘 다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1장 7절-

예수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의 고대 그리스어 (헬라어) 이며, 히브리어로는 여호수와 라고 발음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태복음 1장 21절-



하나님이 가지신 각각의 많은 이름들은 하나님의 다면적인 특징들 중 각각 다른 측면을 보여줍니다. 성경에 나오는 잘 알려진 하나님의 이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엘 엘로하(EL, ELOAH): “강하고, 능하시고, 뛰어나신” 하나님 (창세기 7:1; 이사야 9:6) –어원학적으로 엘은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창세기 31:29)와 같이 “능력”을 의미하는 데 쓰입니다. 엘은 진실함 (민수기 23:19), 질투 (신명기 5:9), 긍휼 (느헤미야 9:31) 같은 다른 자질들과 연관되지만, 능력을 근본 개념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엘로힘 (ELOHIM): “창조주, 강하고 능하신” 하나님 (창세기 17:7; 예레미야 31:33) – 엘로하의 복수형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수용하는 이름입니다. 성경 첫 문장, 하나님(엘로힘)께서 세상이 있으라 말씀하실 때부터 하나님 능력의 우월성은 명백히 증거됩니다 (창세기 1:1).

엘 샤다이 (EL SHADDAI): “전능자 하나님”, “야곱의 전능자” (창세기 49:24; 시편 132:2, 5) – 모두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궁극적 권능에 대해 말합니다.

아도나이 (ADONAI): “주(Lord)” (창세기 15:2; 사사기 6:15) – 유대인들에 의해 죄 많은 인간이 입 밖으로 소리내기엔 너무도 신성한 이름이라고 여겨졌던 야훼 (YHWH)를 대신하여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야훼는 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다루실 때 사용되는 반면, 아도나이는 이방인들을 다루실 때 주로 사용됩니다.

야훼/여호와 (YHWH / YAHWEH / JEHOVAH): “하나님 (LORD)” (신명기 6:4; 다니엘 9:14) –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의 유일한 참된 이름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주(Lord), 아도나이와 구분하기 위해 “LORD” (모두 대문자)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 이름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출애굽기 3:14)로 처음 밝혀졌습니다. 이 이름은 구체적으로 즉각성, 현재성을 나타냅니다. 야훼는 구원과 (시편 107:13), 죄 사함 (시편 25:11), 인도하심 (시편 31:3)을 구하는 자들 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곳에, 지금, 계십니다.

여호와 이레 (YAHWEH-JIREH):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것이다” (창세기 22:14) –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 제물로 바칠 양을 준비해주셨을 때 아브라함이 기념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여호와 라파 (YAHWEH-RAPHA): “치료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15:26) – “나는 너희를 [영육 간에]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육적으로는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고 치료하시고, 영적으로는 부당함을 용서하십니다.

여호와 닛시 (YAHWEH-NISSI): “하나님 우리의 깃발” (출애굽기 17:15). 깃발은 전장에 세워지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 이름은 출애굽기 17장 아말렉과의 사막전 승리를 기념합니다.

여호와 마카데쉬 (YAHWEH-M'KADDESH): “성스럽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 (레위기 20:8; 에스겔 37:28) –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아니라, 오직 당신만이 당신의 백성을 정결하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여호와 샬롬 (YAHWEH-SHALOM): “하나님 우리의 평화” (사사기 6:24) – 기드온이 하나님의 천사로부터 그를 본 이후에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답을 듣고 나서 자신이 지은 제단에 붙인 이름입니다.

여호와 엘로힘 (YAHWEH-ELOHIM): “여호와 하나님” (창세기 2:4; 시편 59:5) – 하나님의 유일한 이름 여호와 (YHWH)와 포괄적인 “하나님”의 합성어로 여호와가 하나님 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여호와 트시드케누 (YAHWEH-TSIDKENU): “여호와 우리의 의” (예레미야 33:16) – 여호와 마카데쉬에서와 같이 하나님 한 분만이 사람에게 의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고 (고린도후서 5:21)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습니다.

여호와 로이 (YAHWEH-ROHI): “하나님 우리의 목자” (시편 23:1) – 다윗은 목자인 자신과 자기 양과 의 관계를 숙고한 이후에 하나님과 자기의 관계가 정확히 그것과 같다는 것을 깨닫고, “여호와 로이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선포합니다 (시편 23:1).

여호와 삼마 (YAHWEH-SHAMMAH):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다” (에스겔 48:35) – 예루살렘과 그곳에 있는 성전에 대해 주어진 이름으로, 한 때 떠났던 주님의 영광이 (에스겔 8-11장) 다시 돌아왔음을 나타냅니다 (에스겔 44:1-4).

여호와 사바오트 (YAHWEH-SABAOTH): “만군의 하나님” (이사야 1:24; 시편 46:7) – 만군은 천사와 사람의 “무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무리뿐만 아니라 지상의 거주자들에 대해서도 , 또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주인과 종 모두에게 하나님 되십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과 권위를 나타내며 하나님께서 하시기로 결정한 것은 무엇이든 성취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엘 엘룐 (EL ELYON): “지극히 높은” (신명기 26:19) – “위로 가다” 또는 “올라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근어에서 파생된 말로 함축 의미는 지극히 높은 것을 의미합니다. 엘 엘룐은 승격을 암시하며 군주의 절대적 권리를 일컫는 데 사용됩니다.

엘 로이 (EL ROI): “살피시는 하나님” (창세기 16:13) – 사라에 의해 광야로 쫓겨나 외롭고 절망적인 가운데서 하갈이 하나님께 붙여드린 이름입니다 (창세기 16:1-14). 하갈은 하나님의 천사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직접 현현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하갈은 자신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엘 로이가 자신을 살피셨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을 살피신다고 증언했습니다.

엘 오람 (EL-OLAM): “영원하신 하나님” (시편 90:1-3) – 하나님은 본래 시작도 끝도 없으시며, 시간의 제약으로부터도 자유로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안에 시간 그 자체의 원인을 가지고 계십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엘 깁보르 (EL-GIBHOR): “전능하신 하나님” (이사야 9:6) – 이사야의 예언 부분에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이름입니다. 강력하고 전능하신 전사, 전능하신 하나님 메시아가 하나님의 원수를 멸하시고 철장으로 다스리시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15).





엘로힘

엘로힘은 히브리어로 신을 가리키는 엘의 복수명사이며, 직역하면 신들, 성경 번역으로는 하나님 입니다. 여기서 엘로힘이라는 단어 자체는 복수명사지만, 엘로힘이 유일신인 하나님을 나타내는 경우, 단수명사로 취급합니다. 여기서 삼위일체 (세 분이지만 한 분이다) 가 나온 것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한편 엘로힘이 말 그대로 복수형으로 취급되기도 하는데, 이 때는 말 그대로 '신들' 이라는 뜻으로 유일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 (엘로힘 - 유일신 하나님) 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애굽기 3장 4절-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 (엘로힘 - 다른 신들) 을 네게 두지 말라"

-출애굽기 20장 7절-

엘샤다이

엘샤다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아브람이 99세 때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와 언약을 세우시며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실 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이 때 언약의 표징으로 남자는 모두 할례를 받을 것을 명하시기도 합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세기 17장 1절-

여디디야

여디디야는 여호와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 이라는 뜻으로, 선지자 나단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게 붙여 준 별명입니다.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사무엘하 12장 24~25절-

글로리아

글로리아는 '영광' 이라는 뜻으로, 종교개혁자 칼빈이 늘 묵상하던 시편 115편 1절 말씀에 등장하는 단어 입니다. 그래서 칼빈의 종교 개혁의 주축이 되는 구절이 바로 '솔리 데오 글로리아 (Soli Deo Gloria -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입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시편 115편 1절-

브니엘

브네엘은 '하나님의 얼굴' 이라는 뜻으로, 야곱이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그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하여 그 땅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창세기 32장 24~30절-






영생(永生, ETERNAL LIFE)




영생(永生, ETERNAL LIFE)

하나님과 더불어 온전하게 살아가는 것.





요한복음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Simon Peter answered him, "Lord, to whom shall we go? You have the words of eternal life.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영생(조에. zōē)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 I.  생명.
  • II.  [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 1.  [반] θάνατος, 롬8:38, 고전3:22, 빌1:20, [때]
      • a.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눅16:25, 행8:33, 약4:14.
      • b.  ἐν τῇ ζ. ταύτῃ: 이생에, 고전15:19.
      • c.  τέλος ζωῆς: 생의 마지막, 히7:3.
      •  d. ζωὴ κ. πνοή: 생명과 숨, 행17:25.

      • e.  πνεῦμα ζωῆς: 생기, 계11:11.
      • f.  ψυχὴ ζωῆς; 살아있는 것, 계16:3. ㉠ [하늘의 몸으로 옷 입은 사람에 대하여] 고후5:4.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하여] 롬5:10, 고후4:10.
    • 2.  생의 도구, 생계.
  • III.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초자연적인 생명에 대하여]
    • 1.  하나님과 그리스도.
      • a.  [하나님에 대하여] 요5:26, 12:50, 요일5:20.
      • b. [그리스도에 대하여] 요1:4, 5:26, 행3:15등, 요일5:11.
    • 2.
      • a.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ἐν καινότητι ζωῆς περιπατεῖν: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 롬6:4. ㉡ ἀπηλλοτριωμένοι τ. ζωῆς τ. θεοῦ: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 엡4:18. ㉢ ἡ ζωὴ τ. ἀνθρώπων [사랑의 생명, 구원과 영광의 생명에 대하여] 요6:68, 행5:20, 고후4:12, 빌2:16, 딤후1:1,10등.
      • b.  [종말의 축복된 시기에 있을 생명에 대하여] ㉠ ἐν τῷ αἰῶνι τῷ ἐρχομένῳ ζ. αἰ: 내세에서의 영생, 마19:29등, 막10:30, 눅18:30. ㉡ ζ. ἐκ νεκρῶν: 죽은 상태로부터 벗 어난 사람의 생명, 롬11:15, 갈6:8, 딤전1:16등.
  • 관련 성경 /  생명(마 7:14), 이 세상의 삶(고전 15:19), 생기(계 11:11).



  • 생각하는 바가 영에 속한즉 영원한 생이니라. 

  • 그때 너희는 영생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에 있나니. 

  • 그리스도를 믿고 끝까지 견디는 것이 영생임. 

  • 영생을 가진 그가 부자니라. 

  • 의로운 자는 이 세상에서는 평화를, 장차 올 세상에서는 영생을 받으리라. 

  • 끝까지 계속하는 자들은 영생의 면류관을 쓰게 되리라. 

  •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죽은 자로서 만일 머물기를 허락 받았더라면 그것을 받아들였을 자들은 해의 왕국의 상속자가 되리라. 

  • 사람에게 불멸과 영생을 가져다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영광이니라. 

  •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영생을 주심.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영생에 대해 말할 때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로마서 6:23) 나오는 하나님의 선물을 말합니다. 이 선물은 죄의 자연스러운 결과인 “죽음”과는 대조적입니다.

영생의 은사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1:25). 이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은 그것이 영원한 생명임을 나타냅니다. 이 생명은 끝이 없이 계속 이어지는 생명입니다.

그러나 영생을 단순히 끝없는 세월의 연장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말로 쓰이는 일반적인 신약 단어는 아이오노스이며, 이는 질과 양을 아울러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실, 영생은 시간과 무관하기 때문에 실제로 “햇수”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영생은 시간 안에서만이 아니라 밖에서도 작동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영생은 기독교인들의 현재 경험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영생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데, 이는 영생이 신자들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발휘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영생은 지금 우리 손 안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3:36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라고 합니다. 신자에게 이 생명이 “있고”(현재시제)라고 했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이 동사는 헬라어에서도 현재형입니다). 요한복음 5:24과 요한복음 6:47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재형 구조가

발견됩니다. 영생의 초점은 우리의 미래가 아니라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자리에 있습니다.

성경은 영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합니다. 요한복음 17:3은 이런 관점에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영생”을 하나님과 성자에 대한 지식과 동일시합니다. 아들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해서만 택하신 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7:6; 14:9).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이 생명의 지식은 학문적인 지식뿐만이 아닌 참되고 인격적인 지식을 뜻합니다.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었던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거짓 교사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복음 7:23). 사도 바울은 주님을 아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으며 그 지식을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연결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립보서 3:10-11).

새 예루살렘에서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은 것을 봅니다.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요한계시록 22:1-2). 에덴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거역해 생명 나무에게서 쫓겨났습니다(창세기 3:24).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가 생명 나무에 갈 수 있게 하십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이 생명 나무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요한복음 1:29).

모든 죄인은 그리스도를 알고 영생을 얻도록 초청을 받았습니다.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22:17).

자신이 영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먼저 우리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십시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주신 구세주를 영접하십시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로마서 10:13).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 복된 소식을 믿으십시오. 주 예수님을 당신의 구주로 믿으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구원받을 것입니다(사도행전 16:31; 로마서 10:9-10).

요한은 간단하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일서 5:11-12).


우리는 죽게 되는데 어떻게 영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줍니다(요한복음 3:16; 6:47; 요한일서 5:13). "영원"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영속적인, 영원한, 끝없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영속이라는 단어가 영생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일 것입니다. 
영생은 일단 시작되면 영원토록 계속되는 생명을 뜻합니다. 
이 말은 사람의 생명이 단순히 신체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참된 생명은 영적 생명이며, 신체적 생명이 끝나지만 영적 생명은 영원토록 지속됩니다. 
즉 영속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생명 나무와 함께 동산에 두셔서 이들이 신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영원토록 기쁜 마음으로 살기를 바라셨지만, 이들은 범죄하여 자신과 이후의 모든 세대에 신체적, 영적 죽음을 초래했습니다(로마서 5:12–14).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동산에서 내보내시고 그룹을 두셔서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당신의 자비로 인해 인간이 영원토록 죄의 무게에 짓눌려 사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이 용납하실 수 있는 유일한 형벌은 영원한 형벌뿐입니다(마가복음 9:43-48). 
그러나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완전한 제물로 보내셔서 인류가 죄에 대해 받을 형벌을 단번에 받게 하시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 나무로 가는 완전한 길을 제공해 주셨습니다(요한일서 5:12; 요한계시록 22:14).

우리는 자신의 공로에 대해서는 죽고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주와 구원자로 영접해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즉시 거듭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나게 됩니다. 
우리가 즉각적인 변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마음에는 중생이 일어나며(요한복음 3:6-7) 이제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는 결코 죽지 않으며 대신 우리 주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5:9-10). 
이후 우리가 신체적으로 사망하면 우리의 영혼은 즉시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며, 나중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님께서는 우리 몸을 부활시켜 하늘에서 주님을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재림 때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몸은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되어 신체적 사망조차 경험하지 않을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51-5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성경의 마지막 책을 쓰라고 지시하셨고 그 책에서 우리는 다시 생명 나무에 대해 읽게 됩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요한계시록 2:7).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생명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믿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영생을 확신하고 안식하게 됩니다(베드로전서 1:3-5). 생명과 죽음과 중생을 포함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한 분, 참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십니다(요한복음 1:14).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상태가 보장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한복음 11:25). 
당신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생을 가지고 있습니까?


영생이란 무엇인가?

1. ‘영생’이라는 말,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가요?

‘영생’이라고 하면 보통은 “죽은 후에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떠올립니다. 
맞는 말이지만, 조금 부족한 설명이에요. 
왜냐하면 성경은 영생을 단지 ‘시간적으로 영원한 삶’이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한 삶으로 설명하거든요. 
중요한 건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사느냐입니다.

2.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생’의 정의

성경에서 영생에 대해 가장 명확하게 정의한 구절은 요한복음 17장 3절이에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영생이란 곧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삶, 그분과 교제하며 사는 삶을 말하는 거죠.

3. 영생은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생은 죽은 후에나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영생이 이미 예수님을 믿는 자 안에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장 24절)

예수님을 믿고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이미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생명, 곧 영생을 누리기 시작한 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은 죽음을 이긴 이후의 삶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삶이기도 해요.

4. 영생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삶

영생은 또한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전히 누릴 삶을 의미합니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때때로 흔들리고, 죄와 고통, 죽음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는 슬픔도, 고통도, 죽음도 없는 완전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1장 4절).

그날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되고, 더 이상 믿음이 아니라 영광 가운데 그분과 함께 사는 영원한 삶, 그것이 바로 영생의 완성입니다.

5. 영생은 ‘삶의 방향’을 바꾸는 힘

영생이 단지 죽은 후에 누릴 어떤 상태라면, 오늘 우리의 삶과 큰 상관이 없을 수 있겠죠.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지금 우리의 삶을 바꾸는 능력입니다. 
영생을 가진 사람은 이 땅의 것들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인생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 것 같아도, 사실은 가장 귀한 생명을 이미 소유한 자로 살아가는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마태복음 16장 26절)

마무리 : 당신은 이미 영생의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은 죽은 뒤에만 시작되는 어떤 ‘미래’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시작되어, 영원까지 이어지는 생명의 이야기
예요.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풍성한 삶, 사랑과 평안과 소망이 넘치는 삶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이란?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은 단순히 끝이 없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누리는 영원한 삶을 뜻합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로, 죽음 이후에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의미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생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영생은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

영생은

단지 죽음 후에 얻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

영생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입니다.

3. 현재와 미래의 영생

영생은 믿음을 통해

현재의 삶에서부터 시작되며,

믿는 자들은 이미 영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 5:24).

동시에, 영생은 미래에 완성될 것이며,

죽음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요한계시록 21:3-4).

결론적으로,

성경에서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영원한 삶을 말하며,

이는 현재와 미래 모두에서 이루어집니다.




대한성서공회 영생 검색 결과 / 53구절

구약 - 7구절 

창세기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세기 21: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다니엘 4:34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다니엘 12:7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에 있는 자가 그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생하시는 자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반드시 한때 두때 반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까지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신약 - 46구절 

마태복음 18: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태복음 18: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태복음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태복음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태복음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가복음 9: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14. [마가복음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5. [마가복음 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16. [누가복음 10: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누가복음 18:18]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누가복음 18:30]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19. [요한복음 3: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20.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21. [요한복음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22. [요한복음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23. [요한복음 4: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24.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26. [요한복음 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27. [요한복음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28. [요한복음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29. [요한복음 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30. [요한복음 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31. [요한복음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32. [요한복음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33. [요한복음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34. [요한복음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35. [요한복음 12: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36. [요한복음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7.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38. [사도행전 13: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39. [사도행전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0. [로마서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41. [로마서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42. [로마서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43.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디모데전서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모데전서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디도서 1: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디도서 3: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일서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한일서 5: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요한일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한일서 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유다서 1: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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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永生)(요한복음 17:2-3)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永生)이란 무엇이며? 
또 어떠한 이가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영생은 지금도 우리가 경험하고 살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죽고 부활한 뒤에나 오는 것인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영생(永生)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그분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사람들은 영생하면, 대개 영원히 사는 것을 이야기해요. 영원히 사는 것! 오래 오래 사는 것! 이런 걸 인제 영생이라고 생각하는데, 부활과 영생을 함께 생각해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존재하는 것을, 영생으로 이해한다 말이에요.

하지만, 이런 이해는 문제가 있죠. 어떤 문제인가 하면, 현재와 영생을 별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현재는, 나중에 주어질 영생을 위해서, 예수를 믿어주는 과정으로만 여기게 된다 말입니다. 그렇게 영생을 정의하면!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영생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잘못된 것으로 말하고 있어요.

본문을 다시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해요.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영생은 영원히 죽지 않고 오래 오래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 안 한다 말입니다. 물론 신자(信者)는, 부활해서 영원히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원히 산다는 건, 신자에게만 주어지는 일이 아니에요. 세상 모든 자들이,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 보세요.

(요한복음 5:29)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뭐 하러? 영원히 살러 나온다는 거예요. 영원히 살기 위해 부활하는 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죠? 요한복음 6장 28절 공부할 때 우리 공부했잖아요? 그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해 주시잖아요?

그러면 악한 일은 뭐예요? 예수 안 믿는 거예요. 예수 안 믿는 자들은, 악인의, 심판의 부활로 나오고, 선한 일을 행한 자! 예수를 잘 믿은 자는, 이제 생명의 부활로 나온다는 것이죠. 영원히 살기 위해서! 아, 중요한 건, 선한 일을 한 사람! 악한 일을 한 사람! 둘 다 영원히 살기 위해 부활한다는 거예요. 사도행전 24장 15절 보세요.

(사도행전 24:15)

15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이 악인의 부활만 없어도, 진짜 한번 멋지게 살다가 가보겠는데…. 허허허 이 악인의 부활이 있어서, 맘대로 못살겠어요. 중요한 건 영원히 사는 게 아니라, ‘어떤 상태로 영원히 존재하느냐?’에, 있는 거예요. 부활은 부활이되, 생명의 부활이 있는 반면, 사망의 부활이 있어요. 때문에, 영생을 단지 시간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돼요.

그렇다면 영생이라는 것이 도대체 뭔가? 여러분! 혹시 영생복락(永生福樂)이라는 말 아세요? 여러분 좋아하시는 말이잖아요? 영생복락! ‘영생이라는 것이 바로 복(福)이고 즐거움(樂)이다.’라는 뜻이거든요. 영생복락! 도대체 영생이 뭐기에, 신자에게 복이 된다는 것인가? 복이라는 건, ‘바라크’라는 건, 하나님께서 창조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창조에 목적에 맞게, 성실하게 존재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력! 그것을 ‘바라크, 복’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게, 하나님의 뜻대로 존재하고 살아가는 피조물들에게, 충만하게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복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창조주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존재의 상태를, 영생이라고 하는 거예요. 영생은 오래 사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신학에서는, 영생을, 다가올 세대의 생명! 혹은 신적 생명이라고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영생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정의를 해도 맞죠? 예, 영생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목적대로, 그분의 뜻에 맞게,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삶! 그걸 ‘영생’이라고 그래요.

그 삶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우리가 그분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런 삶이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영생은, 하나님을 알고,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피조물 중, 도덕적 피조물인 천사들과 인간들 사이에서, 불순종의 반란이 일어났죠? 성경은 그것을 죄(罪)라고 불러요. ‘하마르티아!’

죄는, 영생의 삶을 파괴해 버렸어요. 영생은, 순종을 전제하는 삶인데, 불순종이라는 죄가 들어오면서, 도덕적 피조물에게 주어진 그 영생이, 파괴된 거예요. 영생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삶을, 영생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께 불순종을 해버렸단 말입니다. 죄가 들어왔어요. 그래서 영생이, 도덕적 피조물에게 주어진 영생이 파괴가 된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와 허물로 죽었다!’라고 선언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건, 영생을 소실(消失)했다는 뜻이에요. 그게 ‘죽었다’예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대신에,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하나님마저도 자신의 종으로 삼아 사는, 자아숭배의 삶을 택해버렸기 때문에, 영생은 더 이상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거예요. 그게 바로 죽음입니다. 그러한 자아 숭배의 삶! 불순종의 삶을 사는 죽은 자들에게, 다시, 생명! 그 영생을 허락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다시 한 번 확인할게요. 영생은 뭐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창조의 목적대로 사는 게, 영생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영생을 다시 돌려주러 오셨다는 건 뭐예요? 두들겨 패서라도, 순종하는 자로 다시 만들어내겠다는 거예요. 뭐 대단하게 좋은 거 주러 온 거 아닙니다. 여러분이 기대하는 그런 좋은 거 주러 오신 게 아니라, 두들겨 패서라도, 순종하는 자로 다시 만들어, 영생을 누리게 해주시러 오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 그렇게 하나님의 철장(鐵杖)이, 예수의 철장이 자주 경험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성도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전부 도말하시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의 삶! 그 영생의 삶을 완벽하게 살아내시고는, 이 세상에서도, 그 영생의 삶을 완전히 살아내신 거예요. 그분은요! 살아내시고는, 그 삶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은혜의 선물로 전가(轉嫁)를 시켜주신 것이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전가시켜주시고 가신 거예요.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죄 없는 삶! 순종하는 이의 삶인,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 된 거예요. 요한복음 6장 51절 볼까요?

(요한복음 6:51, 54)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54절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예수를 믿는 자들은 영생을 가졌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먹여 버리고 올라가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영생을 가졌어요. 거기까진 이해하시죠?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 영생을 얻은 자들이, 여전히 이 죄악의 세상에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일정기간을 살아내야 한다는 거예요. 그들은 이미 영적으로, 죄와 무관한 사람들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한 자들이 되어서,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육신의 몸과, 죄악의 세상의 영향 아래에서, 여기서 살아야 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불순종의 죄를 짓는단 말이에요. 이게 문제에요.

영생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순종의 삶을 완벽하게 살아내는 걸, 영생이라고 하는데, 영생을 얻었다고 하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죄악의 육신을 입고, 죄악의 세상에서, 여전히 불순종의 삶을 산단 말입니다. 이걸 어떻게 이해를 하실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생을 산다는 거예요? 못산다는 거예요? 영생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계속 불순종의 죄를 지어요. 어떻게 해결해야 돼요? 이걸 어떻게 화해시켜야 되죠? 이제부터 우리가 고민을 좀 한번 해보자고요.

영생은, 죄가 없는 상태고, 순종의 상태를 말해요. 영생은, 하나님의 성품이 투영된 신적 생명이며, 다가올 세대의 생명이에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영생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어요. 그리고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가셨대요.

그런데 현실에서 우리는, 영생의 삶과는 전혀 다른, 불순종과 죄악의 삶을 살아요. 순종의 삶보다는 불순종의 삶을 훨씬 더 많이 살잖아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을 좇아 살려고 하기는커녕, 하나님을 종으로 부리며, 우리의 뜻에 그분의 뜻을 맞추려고 하죠. 우리의 뜻을, 그분이 안 쫓아 주면, 우리는 밥을 굶어서라도, 우리의 뜻을 그분에게 관철(貫徹)시키려고 그래요. 아니면, 막 천일 새벽기도도 해버려! 흐흐흐. 내 뜻에 맞춰야 되니까! 그걸 순종이라고 하나요? 그건 순종이 아니잖아요? 순종의 범주를 벗어난 것은, 영생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 성도에게 영생을 살라고, 영생을 취하라고 요구해요. 반복적으로 요구를 해요. 한 군데만 볼까요? 디모데전서 6장 12절.

(디모데전서 6:12)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영생은 이미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하면서, 한 쪽에서는, 영생을 취하라고 강력하게 요구를 해요.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이를 악물고서라도, 순종의 삶을 살아 내라는 것입니까? 혀를 깨물면서라도, 죄를 멀리하라는 말인가요? 만일 그런 거라면, 어느 정도까지 살아내야, 영생을 취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땅에서, 완전 성화를 이룰 수 없어요. 그러니까 어느 정도, 커트라인이 있을 거 아니에요? 어느 정도까지 살아내어야, 우리가 영생을 취할 수 있는 거예요? 성경에 분명히, 하나님이 요구하는 커트라인이 나와요. 신명기 18장 13절 보세요.

(신명기 18:13)

1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이게 하나님의 커트라인입니다. 야고보서 2장 10절 볼까요?

(야고보서 2:10)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그러니까 하나라도 어기면 안 돼요.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라도 불순종하면 안 돼요. 우리가 한 90살을 산다고 해보자고요. 요즘 명도 길어져서, 하여튼 (허허허허) 90살을 사는데, 90년 동안 죽기 바로 전날까지, 모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다가, 죽기 바로 직전에 정신이 너무 없어서, 하나를 어겼어요. 그러면 그 앞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모든 삶이, 다 헛거가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그렇게 완벽해요. 철저해요. 그러면 영생을 취하라는 말이, 과연, 완전한 순종과, 완전과 율법지킴을 향하여, 분투하며 애를 쓰라는 말일까요? 아니겠죠?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거처럼,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영생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이 땅에 계시하러 내려오시는, 예수님을 아는 거예요. 영생은, 그분이 요구하시는 것을 살아내는 게, 영생이 아니라, 그분을 아는 거예요. 그분이 얼마나 크신 분이며, 그분이 왜 내려오셨으며, 나는 왜 그분의 은혜만을 의지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를, 알아드리는 걸, 영생이라 그래요. (아멘.)

쉬운 말로, 이 세상에서 죄 없는 자로, 순종한 자로, 영생을 살 수 있는 길은, 이렇게 불가능하고 무력한 나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내신 후에, 우리 성도들에게 무상으로 전가시켜 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성도가 이 땅에서, 영생을 사는 거예요. 그걸 존재 깊숙이 받아들여 버리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당신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라 칭한 곳이 또 있나요? 여기 말고! 지금 예수님이 당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어디 딴 데서 또 예수님이 또 이렇게 자기를 지칭하여, 예수 그리스도라고 자기 계시를 하신 적이 있어요? 여기 한 군데입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당신을 그리스도 메시아라고, 자기 계시를 하신 이유가 뭐겠어요? 영생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오심의 이유를 알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당신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라 칭하신 것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을 사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을 하신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 하나님 앞에, 자발적으로 자원하여 순종을 할 수 없어요.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 앞에서, 무한히 작은 나를 알아야,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살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거구나!’라는, 영생을 살 수 있는 거예요. 그걸 모르고는 절대 영생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는 거!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것을 영생이라고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영생은, 환경과 조건이 변하고, 그로 말미암아 행복과 평안이 오는 그런 것! 혹은 우리의 삶이 순결하게 업그레이드되어서, 경험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라, 불가능하고 무력한 자신의 삶을 폭로당하면서, 면목 없이 사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다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가 전부 사해졌다는 것을 믿는 것! 그리고 완전한 순종의 사람으로 하나님이 나를 여겨 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사는 삶을, 영생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뭔가 하나님 앞에서, 굉장히 훌륭한 자가 되어서, 그 하늘의 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선물 받아, 이 땅에서, 평안과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걸, 영생이라고 하지 않아요. 여러분이 얼마나 많이 고민하셨습니까? ‘나는 영생을 예수님으로부터 선물 받았다고 하는데, 왜 나는 내 삶 속에서, 영생을 이렇게 경험하지 못하며 살까?’ 얼마나 많이 고민했어요?

영생은, 그렇게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 속에서 경험하며 사는 걸, 영생이라고 하지 않아요. 나는 여전히 이렇게 불순종의 삶을 삶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를 도말하고, 나에게 영생의 삶! 그 의로운 삶을 살아서, 무상으로 전가해줬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그 약속! 그 언약을, 그냥 내가 확 받아들여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이런 모양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나에게 영생을 주셨기 때문에, 나는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이 면목 없음 속에서 꼭 붙드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영생을 허락하신 나의 삶 속에, 여전히 이렇게 내가 고통스러워하고, 내가 외로워하고, 우울해 할 수밖에 없는, 이런 일들을 허락하셨음에도, 나는 영생을 사는 자로서, 이런 일이 나에게 꼭 필요했기 때문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거기에 그냥 순종해 버리는 거예요. 순응해 버리는 거예요. 받아들여 버리는 거예요. 그걸 영생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영생은, 이 땅에서 그렇게, 행복 속에서, 안식 속에서, 그렇게 편안하게 가는 걸, 영생이라고 하지 않아요. 이 세상에서의 영생은, 세상이 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영생은, 여러분에게 고난과 고통으로 올 수 있어요. 하나님나라에서, 모든 죄가 다 제거된 하나님나라에서는, 그 영생의 삶!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삶이, 진짜 완전한 행복의 삶으로, 우리에게 체감이 됩니다.

그러나 이 땅은, 죄가 가득 차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 영생의 삶을 내어 놓을 때, 우리는 굉장히 힘들고, 어렵고, 고통을 겪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왜 나는 이렇게 영생의 삶을 경험하지 못할까? 영생의 삶을 체감하지 못할까?’ 그리로 가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냥 이렇게 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살아 계신 것 자체가, 영생을 살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철저한 자기부인 속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십자가 뒤로 꼭꼭 숨어 버리는 삶이, 바로 영생인 거예요. 우리는 천국에서, 이제 영원히 그렇게 사는 거예요. 하나님만 의지하며, 절대 타락할 수 없고, 타락하지도 않으며, 타락을 시도하지도 않는, 그냥 십자가만, 하나님의 은혜만 꼭 붙드는 그 삶을, 천국에서 살게 되는 거예요. 그 삶을 이 땅에서 훈련하고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그렇게 사셨잖아요? 하나님께 철저하게 순종했더니, 예수님의 삶이 고난과 수난과 십자가로 드러났잖아요? 여러분의 삶도, 그렇게 드러나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에게 안 주는 걸, 당신의 아들과 연합되어, 당신의 자녀로 양자가 된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뭘 그렇게 대단히 좋은 걸 허락하셨습니까? 이 땅에서? 안 줬습니다. 그냥 순종만 요구하셨어요. 여러분들에게도 하나님이 똑같은 걸 요구하세요. 여러분도 자녀이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도 이 땅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영생을 사는 이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철저한 자기 인식이 꼭 필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뭐 대단하게 이 세상에서 이루어 내려고 하지 마세요. 율법에 묶여서, 자신을 너무 비하(卑下)하지도 마세요. ‘왜 나는 아직도 이 모양이야?’ 예, 반성하는 건 좋아요. 그렇지만 ‘왜 나는 아직도 이 모양이야?’ 그 모양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영생을 거저 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꾸 예수를 아시란 말이에요. 예수를 배우시란 말이에요. 그게 영생을 사는 거라니깐요.

왜 호세아 선지자가,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며 지켜내려 애를 썼던, 이스라엘에게,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외쳤겠습니까? 율법으로는 너희들! 절대 구원의 도달 못한다는 거예요. 율법을 목숨 걸고 지키는 자들에게,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 너희는 그거 못 지킨다니까! 여호와를 알아야 돼!’ 왜 그렇게 외쳤겠어요? 율법으로는, 제사로는, 우리가 영생에, 생명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목숨을 걸고 행위를 의존하던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를 알아라! 힘써 여호와를 알아라!’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율법의 성격이 그러하듯, 성경은 우리에게 지키라고 준 게 아닙니다. 그 속에서 예수의 필연성을, 십자가의 필연성을 깨달아 알라고 주신 거예요. 그 깨달음이 감사로 드러나게 되고, 그 감사가 우리를 바꾸는 거지, 성경이 요구하는 율법들을 우리가 지켜내라고 주신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율법주의자들은, 유대주의자들은, 그걸 지켜서 구원에 이르려고 했다니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성경에서 영생을 얻으려 하지 말고, 즉 그것 지켜서 영생에 이르려 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계시하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에게 나와야지! 그걸 지켜서 너희들이 구원의 이르려고 하면, 큰 오산이라고 이야기하신 거예요. 요한복음 5장 39절 보세요.

(요한복음 5:39-40)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예수께 간다는 게 뭐죠? 예수의 공로! 예수의 은혜를 의지한다는 거예요. 예수의 은혜를 꼭 붙들어야 우리는 영생에 이를 수 있는데, 성경을 상고하고 묵상하고 연구하면서, 그걸 지켜서, 유대인들이 구원에, 영생에 이르려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건 안 된다는 거예요.

성경은, 예수의 필연성을 가르치시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 거기에 적힌 것대로 살아내어서, 구원의 이르라고 주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몇 가지 비유를 들어서, 영생의 본질에 대해 설명을 해 주셨는데, 그 중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영생의 본질을 확인해 보고, 오늘 공부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곡해를 하는 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이웃사랑’으로 해석을 하는 거예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웃사랑에 대한 메시지가 아니라, ‘영생의 본질’에 대한 설명입니다. 누가복음 10장으로 한번 가보세요. 25절.

(누가복음 10:25-29)

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자, 잘 보세요.)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자,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물어요. 예수님이 왜 율법사를 등장시키는지,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율법에 능통한, 그 율법사에게, ‘율법에서는 뭐라고 하더냐?’라고 다시 물으셨어요. 그랬더니 율법사가, 훌륭하게도, 신명기 6장의 그 쉐마로, 그 율법을 잘 정리하고 있었어요. 율법이 요구하는 바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아주 잘 대답을 했어요.

그랬더니 주님께서, ‘네 대답이 옳으니까, 가서 이를 행하라!’라고 이야기를 해요. 거기까지만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우리의 몫인 것처럼 보이죠? ‘그래, 그거 가서 해! 그러면 영생 얻을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 같잖아요? 끝까지 잘 보셔야 돼요.

이 이야기에는, 커다란 반전이 있어요. 그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즉 자신은 충분히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물어요. 누가 내 이웃입니까? 누가 이웃인지 말만 해주면, 다 사랑해 버리고 말겠다는 그런 기세에요. 그죠?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이웃을 스스로 규정하고 있었어요. 일단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은 절대 이웃이 될 수 없어요. 개니까!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도, 절대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불결하고 순결하지 못한 자들이에요. 유대인들의 이웃은, 자기들과 같은 민족! 혹은 자기들의 종교인 유대교를 믿고, 자기 민족으로 편입이 된 사람들에 한해, 이웃을 삼았어요.

그러니까 민족과 종교가 같고, 한 가지 뜻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그런 사람들만을, 이웃으로 규정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는 건 너무 쉬웠어요. 우리도 그렇잖아요? 그래서 율법사는 자신 있게, ‘누가 내 이웃입니까? 말만하세요. 내가 가서 죽도록 사랑해 버리겠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 사랑 누가 못해요?

그때 주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서, 영생의 본질을 설명해 주는 거예요. 30절 이하를 한번 볼게요.

(누가복음 10:30-37)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어떤 이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을 만치 맞았어요. 여기 ‘거반 죽은’이라고 번역이 된, ‘헤미따데스’라는 단어는, ‘거의 죽다. 완전히 기진하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그 강도만난 사람은, 숨만 겨우 쉬고 있는 상태! 거의 죽은 거예요. 완전히 자아 방어능력을 상실한 상태인 거예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당시에, 아주 유명한 강도의 출몰지역이었어요. 예루살렘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전! 이스라엘 성전이 있는 곳이에요. 율법의 메카죠, 그죠? 성전이 있는 곳이었고, 여리고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약 12,000명이 살고 있는, 성전 섬김이들의 집단 거주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노린 강도들이, 수시로 출몰을 해서,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이, 마차나 말 등에서 절대 내리는 일이 없었어요.

그리고 도보로 다니는 사람들도, 무리를 지어서 다니거나, 길에서 멈추어서는 일이 없어, 바삐 오가던 그런 길이었어요? 그리고 수시로 강도들의 미끼가 길에 던져져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길에 넘어져 있는 사람들을 만져서는 안 된다는 게, 불문율처럼 지켜지던 그런 곳이었어요. 강도들의 일행이, 강도를 만나 신음하고 있는 여자나 노약자로 가장을 해서, 길거리에 누워있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래요.

그래서 그들을 도와주러 잠깐 말에서 내리거나, 아니면 멈춰서면, 강도들이 와서 털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는 누가 신음을 하고 있어도, 거의 가짜니까, 그냥 도망가라!’ 이것이 불문율처럼 그들에게 있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길을 가던 사람들이, 길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을 보고서도, 그냥 바삐 지나가고 했던 거예요. 그러나 거기에 강도 만난 사람이 거의 죽어서, 누워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묻는 율법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라고 되물으세요. 다시 한 번,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묻는 율법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라고 물어요. 그러면 지금 예수님이 이 비유에서, 이 율법사를 누구로 비유하고 있는 거예요? 강도만난 자!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물었는데, ‘누가 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라고 되물으시잖아요? 그걸 잘 이해하셔야 돼요. 여러분!

자금 예수님은, 율법으로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굳게 믿고, 그렇게 실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율법사에게, ‘네가 지금 누구를 사랑할 수 있다고? ‘누가 내 이웃입니까? 말만하세요. 내가 그냥 가서 확 사랑해 버릴게요.’라고,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너는 누구를 사랑하고 도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네가 바로 은혜와 긍휼을 입어야 할, 강도 만난 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가서 그를 사랑해라!’가 아니라, ‘네가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너는 예수에게 사랑을 받아야 되는, 은혜와 긍휼을 받아야 되는 존재인데, 너는 마치 모든 율법사들이 그러는 것처럼, 유대주의와 율법주의가 그러한 것처럼, 인본주의가 그러한 것처럼, 네가 마치 영생에 뭔가를 기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구나! 네가 영생에 본질이 뭔지를 뭔지나 알고나 있는 거냐?’라고 되물으시는 거예요. 그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인 것입니다.

인본주의에 빠져서, 율법지킴을 구원의 방법으로 알고 있는 이들의 상태! 그게 강도 맞아 거반 죽은 자들의 상태라는 거예요.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상태에요. 그게! ‘죄와 허물로, 거반 죽어있는 너희들이, 도대체 뭘 할 수 있다고 나에게,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묻고 있느냐?’라고 묻는 거예요. 바로 우리 교회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무엇을 하여, 영생에 기여를 할 수 있어?’ 묻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강도 만난 자로 비유되고 있는 율법사는, 무엇을 강탈당한 상태일까? 그 강도 만난 자가,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율법주의! 유대주의! 인본주의에 빠져있는, 모든 죄인들을 상징하는 거라면, 그 강도 만난 자! 그 율법사는 무얼 강탈당한 거예요? 하나님을 빼앗긴 것입니다. 뱀이라는 강도에게, 마귀에게, 하나님을 빼앗긴 상태! 강도 맞은 상태!

여러분, 사람들이 자꾸 마귀가 우리의 돈이나 건강을 강탈해 갈 거라고 생각을 해요. 마귀는 오히려, 우리 성도에게 그런 거 줘서, 하나님을 향한 관심을 끊게 만들지요. 그런 걸 강탈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달려가게 만들지 않아요. 마귀는 그런 거 강탈하지 않아요. 하나님을 강탈합니다. 오히려 다른 걸 주어서, 하나님을 강탈해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지금, 하나님을 강도당한 거예요.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야 하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가, 뱀이라는 강도의 속임수에 속아,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죽어있는 상태가, 바로 유대주의! 율법주의! 인본주의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강탈당한 채 죽어있는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이 뻗쳐요. 구약의 율법과 제사를 상징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강도 만나 거반 죽은 자를 보고도, 그냥 지나가요. 손도 못 대는 거예요. 그건 율법과 제사로는, 하나님을 잃고 거반 죽어 있는 상태인, 강도 만난 자!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자를, 절대 도울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제사장하고 레위인이 그냥 지나쳤다고 해서, 그들의 매정함을, 무정함을 나무라는 데에만, 집중하면 안 돼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성전으로 제사를 지내러 가는 길 아니면, 제사를 지내고 집으로 내려가는 길이었을 거예요. 그들이 하는 일이 그거니까!

그리고 그 길은, 성전과 그들의 거주지를 연결하는 길이었잖아요? 그들은 절대 부정한 것을 만져서는 안 되는, 성전의 섬김이들이었고, 율법의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엉뚱한 걸 만지면 안 돼요. 율법을 잘 지켜야 되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나 마차에서 내리거나, 멈추어서 얼쩡거릴 수 없는 그런 위험한 길에 있었단 말이에요.

뿐만 이니라, 그 강도만난 사람은, 강도들의 미끼일 가능성이 농후한 곳이에요. 만약에 우리가 그 길을 지나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절대 미련하게, 그리고 섣불리, 그 미끼일지도 모르는, 그 사람을 돕기 위해 나서면, 안 되는 거예요. 잘 이해하세요. 또!

그런 상황에서, 그 길을 지나는 사람을 반응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는 건, 긍휼이라는 마음보다, 두려움이라는 마음이 더 커요. 그러한 상황에서는! 그래서 그 어떤 사람도, 그러한 상황 속에서, 쉽게 그렇게 강도만난 사람을 돕는, 반응과 행위를 행사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함부로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이, 겉으로는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사랑을 행하지 않는 그런 위선자들이었다라고, 이렇게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건, 거기에 초점이 있지 않아요.

성경이 초점을 두는 곳은, 율법과 제사! 즉 행위는, 절대 강도 만난 자!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율법주의! 유대주의! 인본주의를 도와, 그들을 영생으로, 생명으로 끌어 낼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사 강도 만나 거반 죽어 있는 그 자를, 제사장과 레위인이, 율법과 제사가 못 도와주는 것입니다. 행위는, 절대 인간을, 영생으로, 구원으로 인도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웃사랑이라는 건, 인간의 행위에서, 생산되어져 나올 수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레위인 제사장이, 이웃사랑이라는 행위를 못 내어 놓는 거예요. 율법과 제사를 대표하는, 인본주의를 대표하는 그들이, 진정한 이웃사랑이라는 걸 못 내놓고,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한 자에게, 사마리아인이 다가와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유대 땅이에요. 유대 땅 중에서도, 율법의 핵심! 율법주의, 유대주의의 핵심인 곳이에요. 거기에 사마리아인이 등장해요. 사마리아인은, 유대 땅에서 개취급도 못 받았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사마리아 사람들은, 남 유다 사람들의 원수였어요. 오죽하면 유대인들은 너무나 장사가 안 돼서, 굶어 죽기 일보 직전에도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물건을 팔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러한 위험한 땅에, 율법주의의 이방인이자, 유대주의의 원수인, 사마리아인이 등장한 거예요. 유대주의와 율법주의의, 이방인이며 원수인, 사마리아인이 등장한 거예요. 유대주의와 율법주의와 인본주의의 이방인이며 원수인, 이가 누굴까요? 예수님 한 분입니다. 그분이 등장하는 거예요.

세상이 개 취급도 안하는 말구유로 와서, 수난을 받다가 십자가에 죽어 버린 그런 나약한 예수! 나약한 메시아! 그런 이방인! 그런 세상의 원수가, 이 땅에 오셔서,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강도 맞아 하나님을 잃어 버려 거반 죽어있는, 그를 살려내는 거예요. 그게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영생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네가 지금 누구를 사랑하겠다고, 네가 사랑할 이웃을 나에게 가르쳐 달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네가 영생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나 있는 거야?’ 그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여러분! 지금 강도 만난 자가 누워있는 것은, 율법의 땅의 상징인 예루살렘과, 여리고를 잇는 유대 땅이에요. 그곳은 성전과 그 성전을 섬기는 제사장들의 거주지를 잇는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강도들의 땅이며, 원수들의 땅이에요. 사마리아인에게 있어서는! 사마리아인은 그곳에서 그 누구에게 붙들려도 죽어요. 강도에게 붙들려도 죽고, 유대인들에게 붙들려도 죽어요. 그 땅에, 자기 발로, 자발적으로 그가 온 것입니다. 그 율법의 땅! 강도들의 땅에, 그들과는 전혀 다른 이방인! 율법의 화신인 유대인들의 원수가, 사마리아인으로, 은혜를 들고, 긍휼을 들고, 등장을 한 거예요.

자기들의 안위와 유익을 위해서는, 거반 죽어가는 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 형식적인 율법과 제사의 땅에, 진짜 선한 이방인이, 세상의 이방인이, 원수들의 땅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리고는 그 위험을 무릎 쓰고, 목숨을 걸고, 원수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자기를 원수로 여기는 그 강도 만나 거반 죽어간 그 자를, 목숨을 걸고 살려내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영생이며, 그게 바로 구원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시는 거예요.

구원은, 죄인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이웃인 예수에 의해, 사랑을 받고, 섬김을 받아,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그 구원과 영생의 본질을 설명하는 거예요. 자신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믿는 인본주의의 땅! 죄인들의 땅! 율법의 땅에, 그들과는 전혀 다른 십자가의 삶! 은혜의 삶을 가지고, 원수인 강도 만난 자들을 구원하러 오신, 이 세상의 이방인인 선한 예수가, 바로, 그 사마리아인으로 비유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을 목숨 걸어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그건 요원한 일이에요. 우리는 우리의 선한 이웃으로 오신,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여, 면목 없는, 강도 만난 자의 모습으로, 영생으로 가야 하는 존재들인 거예요.

그런데 평생을 인본주의라는 뱀의 아가리 속에서 살아온 죄인들은, 예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분이 나쁜 거예요.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자신의 영생에 자기도 뭔가를 기여하고 싶어 해요. 그런 이들에게 오직 은혜만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처럼 낮선 거예요. 미운 것입니다. 아니, 원수처럼 여겨질 때도 있어요. ‘네가 뭔데, 나를 죽은 자로 여기고, 나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그래?’ 기분 나쁜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만일 강도를 만나, 예루살렘 길에 쓰러져 있던 그 사람이, 조금의 힘이라고 남아 있었다면,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았을까요? 절대 안 받습니다. 죽어도 안 받아요. 사마리아인이기 때문에! 개에게 왜 도움을 받습니까? 조금의 힘이라도 남아 있으면,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도망갔을 거예요.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왜 받아요?

그런데 거반 죽어서, 전혀 의식도 없는 상태예요. 그 상태에서 나는 완전히 무력하고 무기력해요. 나는 완전히 불가능한 존재예요. 그 상태가 되었을 때, 사마리아인이 붕대 붙이면, 가만히 붙이게 놔둬야 되고, ‘뒤집어!’ 그러면 뒤집어야 되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아직도 항복하지 않고 있는 성도들이, 바로 그 자리로 해체되어 가는 거예요. 그걸 자기부인이라 그래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할 때까지,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헤미따네스’ 거반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부인이에요.

거반 죽어야, 예수님의 도움에 자기 몸을 내 맡긴다니깐요. 아니면, 예수님이 반창고 붙여주면, ‘왜 이걸 여기다 붙이냐?’고 지랄들을 떨고, 또 그런다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거반 죽여 버리는 거예요. 철장을 들고, 백마를 타고!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자로 이 땅에서 완성되어져야 돼요. 완전 성화가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는 그 영생! 온전한 순종의 삶인 영생을, 하늘에서 영원히 살아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은혜를 거부하고, 거기에 우리의 힘을 보태려고 하는 그런 시도! ‘나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될 거야?’라는 그 시도가, 얼마나 패역하고, 무서운 일인지를, 이 땅에서 배우고 가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성도는, 이 땅에서 그렇게 거반 죽어서, 이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의지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만을 의지하여, 자신을 내 맡기는 자로 지어져가는 거예요. 그러한 이들에게, 내 뜻! 내 꿈! 내 비전! 내 야망! 내 소원! 내 의견! 내 주장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그런 것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계속 우리를,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헤미따네스’ 거반 죽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은혜만 붙들라고! 이 세상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십자가라는 하늘의 삶의 원리를 들고 이 땅에 오신, 세상에 이방인이신 예수를 붙들라고, 우리를 거반 죽이는 거예요.

왜? 죽은 자들이 죽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마치 산 자처럼, 강시처럼 통통 튀며 사냐는 거예요? 그 삶이 바로 하나님에 대하여 죽고, 세상에 대하여 산 삶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로, 티끌로 살아야, 진짜 하늘에 대하여 산 자! 영생을 소유한 자로 살게 되는 것이니까, 절대로 너희들은 나에게 항복해야 돼! 왜 자꾸 살아서 강시처럼 통통 튀고 있어? 죽어!’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이에요.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그냥 죽고 가는 거예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가는 거예요. 그거 거부하시면 안 되는 겁니다. 우리가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져주라고, 당해주라고, 섬겨주라고, 십자가를 지라고, 용서해 주라고 요구하시면서, 우리를 치유하고 계시는, 그 선한 사마리아인인, 예수의 말씀을 듣고도, ‘이 이방인이 왜 이렇게 낮선 나라말만 하고 있냐? 응 이 이방인이 왜 이렇게 낮선 나라말만 하고 있어?’ 그렇게 계속 거부하다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철장으로, 거반 죽이실 수밖에 없어요.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시키시는 예수님의 치료를, 순순히 받게 되는 거니깐요.

예수님이 강도 만난 자에게 지금 하늘의 생명! 하나님을 선물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받기 위해서는, 내 안에 나가 자꾸 해체 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안 죽었어요. 이게! 그래서 자꾸 사마리아인으로 오신, 그렇게 십자가의 모습으로, 당해주라고, 약한 모습으로 살라고, 섬기라고, 나에게 오는 그 선한 사마리아인을, 거부해 버리는 거예요. 이 인본주의! 유대주의! 율법주의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완전히 죽은 상태! 거반 죽은 상태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덮쳐 버리는 거예요. 선한 사마리아인인 예수가 덮쳐 버리는 거예요. 그때에 우리에게, 온전한 하나님나라의 생명이 주어져요. 그래서 이 가시적인 우리의 인생 속에서, 우리가 그 영생을 온전히 받을 수 있는 자로, 지금 무장해제가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으셔야 돼요. 자꾸 죽으셔야 돼요. 그러나 그 삶이 힘들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반드시 그리로 우리를 끌고 가셔야 돼요. 영생 주셔야 되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하나님의 의해 순종하는 자로 끌려가는 상태! 그게 이 땅에서의 성도의 영생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지금 영생 잘 살고 계시는 거예요. 목매달아 죽지 마세요. 그거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입니다. ‘난 절대 용납 못 해! 난 당신이 하나님이라도, 이런 상황 나에게 허락한 당신! 절대 용납 못해!’ 콱 목매달아 죽어 버리는 거, 반항인 거예요.

인정하세요. 받아드리세요. 순종하세요. 하나님께서 많이 주시면, 많이 주시는 상태에서 순종하세요. 많이 거두어 가셨으면, 그 상태에서, 순종하고 인정하세요. 그게 영생을 사는 거예요. 여러분! 마태복음 18장 8절 보세요. 마지막으로 한번 보죠.

(마태복음 18:8-9)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것 이외의, 그 어떤 것을 의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다 잘라내시겠다는 거예요. 그게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팔! 다리! 눈! 다 뽑아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에 들어가는데 방해가 되는 거라면, 우리가 거기에 조금이라도 마음을 두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고, 그분께 온전히 순종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게 있다면, 그게 팔 다리라 할지라도 잘라버리고, 그 상태로 끌고 들어가겠다는 거예요. 하물며, 재산! 돈! 가족! 건강! 이런 것이 여러분과 하나님의 관계를 방해한다면, 하나님이 잘라버려야 됩니다. 그게 복인 거예요. 여러분!

자,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이제! 예? 그러니까 예수를 힘써 배우세요. 하나님을 힘써 아세요.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티끌 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공로만을, 꼭 붙들어야 돼요. 그때 우리의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 우리를 변화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복음에 항복하세요. 그러면 행복합니다. 항복하면 행복해져요. 기도하겠습니다.




















헤세드, 제바흐


חֵסֵד 스트롱번호2617
1.

욕구

2.

열심

3.

인자함

발음 [ chêçêd ]
어원
2616에서 유래
구약 성경
246회 사용
  • I.
    명사 욕구, 바람, 열정, 열의
    • 1.
      명사 열의, 열심, 열정, 사랑, 친절.
      • a.
        명사 [사람들 사이에] 인자함, 친절함, 은혜, 자비, 창21:23, 24:49, 39:21,47:29, 수2:14, 삼상10:8, 삼하3:8,9:1,7, 10:2, 스7:28, 욥6:14, 슥7:9.
      • b.
        명사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건, 사57:1.
      • c.
        명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은총, 자비, 호의, 창24:12, 출20:6, 신5:10, 삼하2:6, 15:20, 시5:8(7),36:6(5), 48:10(9).
      • d.
        명사 [주]복수 חֲסָדִים: [하나님의] 자비, 은총, 시89:2(1),50(49), 107:43, 사55:3
    • 2.
      명사 질투, 시기, 시샘, 비난, 질책, 잠14:34, 레20:17.

참고 정보

문법설명

어미활용 חַסְדִּי, 복수 חֲסָדִיס, 복수 연계형 חַסְדֵי

연관 단어

  • 문법설명
    어미활용 חַסְדִּי, 복수 חֲסָדִיס, 복수 연계형 חַסְדֵי
    관련 성경
    ☞인자(창19:19, 민14:18, 시18:50), 은혜(창20:13, 삼하3:8, 렘32:18), 인애(창47:29, 신7:9, 렘2:2), 은총(창32:10, 삼하9:1, 호2:19), 성실(왕상3:6), 긍휼(느1:5, 시85:10), 아름다움(사40:6). [동] 영화롭게 하다(잠14:34), 선대하다(수2:12, 삿1:24, 룻1:8), 은혜를 베풀다(룻2:20), 인자하다(대상16:34, 대하7:3,시59:10), 자비하다(대상16:41, 대하5:13), 선하다(대하32:32, 느13:14), 긍휼히 여기다(스9:9, 시59:17), 불쌍히 여기다(욥6:14).


זֶבַח 스트롱번호2077
1.

살륙

2.

희생

3.

출10:25

발음 [ zebach ]
어원
2076에서 유래
구약 성경
162회 사용
  • 1.
    명사, 남성 살륙, 도살된 동물의 육체, 제사, 창31:54, 겔39:17, 잠17:1
  • 2.
    명사, 남성 희생, 제사, 제물.
    • a.
      명사, 남성 [속죄나 성체의 의도를 지님] 출10:25, 레3:1, 4:10, 17:8, 민15:5.
    • b.
      명사, 남성 [중요하고 엄숙한 제사의 뜻을 지님]삼상1:21, 20:6,29.

참고 정보

문법설명

어미활용 זִבְחִי, 복수 זְבָחִים, 복수 연계형 זְבָחוֹת ,זְבְחֵי[한 번만 사용됨, 호4:19]

연관 단어

  • 문법설명
    어미활용 זִבְחִי, 복수 זְבָחִים, 복수 연계형 זְבָחוֹת ,זְבְחֵי[한 번만 사용됨, 호4:19]
    관련 성경
    ☞제사(창31:54, 출12:27, 민15:5), 희생(창46:1, 레3:1, 신12:11), 제물(레19:6, 신18:3), 제육(祭肉)(잠17:1), 잔치(겔39:17,19), 제사를 드림(삼상10:8).




רַחוּם 스트롱번호7349
1.

인정 많은

2.

동정심이 많은

3.

신4:31

발음 [ rachûwm ]
어원
7355에서 유래
구약 성경
13회 사용
  • 1.
    형용사, 남성 인정 많은, 동정심이 많은[하나님께만 사용됨], 신4:31, 시86:1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자비로운(출34:6, 시103:8, 욘4:2), 자비한(신4:31, 시78:38, 145:8), 긍휼히 여기는(느9:17). [부] 긍휼히(느9:31). [명] 자비(대하30:9), 진실(시86:15).
רָחַם 스트롱번호7355
1.

사랑하다

2.

피엘형

3.

푸알형 ׃רֻחַם 자비를 얻다

발음 [ râcham ]
구약 성경
47회 사용
  • 1.
    원형 사랑하다, 귀여워하다, 시18:2(1).
    • a.
      원형 피엘형 ,רִחַם 미완료형 יְרַחֵם, 부정사형 ׃רַחֵם측은히 여기다, 사랑하다, 출33:19, 신13:18(17), 시103:13, 사49:15.
    • b.
      원형 푸알형 ׃רֻחַם 자비를 얻다, 잠28:13, 호14:4(3).

참고 정보

문법설명

미완료형 ׃יִרְחֹם

연관 단어

  • 문법설명
    미완료형 ׃יִרְחֹם
    관련 성경
    ☞사랑하다(시18:1), 긍휼히 여기다(신13:17,왕하13:23, 사49:10), 자비하다(시116:5), 불쌍히 여기다(왕상8:50, 시103:13, 사27:11).[명] 자비(렘6:23, 애3:32), 긍휼(겔39:25, 합3:2), 로루하마(호1:8), 루하마(호2:1).


고치소서(라파. râphâʼ)  רָפָא 스트롱번호 7495

1. 수선하다.   2. 고치다.  3. 신 32:39  
발음 [ râphâʼ ] 
구약 성경  /  67회 사용

  • 1. 원형 수선하다
  • 2. 원형 고치다, 치료하다, 욥5:18, 사19:22,전3:3, [분사로] 의사, 창50:2, 대하16:12.
  • 관련 성경  / 고치다(시107:20, 사19:22, 겔34:4), 고침받다(사6:10), 치료하다(창20:17, 왕하8:29, 렘33:6), 고쳐주다(민12:13, 렘6:14, 8:11), 낫게 하다(왕하20:8), 싸매다(호6:1), 낫다(레13:18, 삼상6:3, 렘51:9), 완전하다(렘9:11),되살아나다(겔47:9), 완치되다(출21:19), 수축(修築)하다(왕상18:30). [명] 의원(창50:2),의사(렘8:22)


구원하소서(야솨.  yâshaʽ) / יָשַׁע
스트롱번호 3467

1. 넓다.   2. 히필형 הוֹשִׁיעַ. 미완료형 יוֹשִׁיעַ
3. 해방하다 
발음 [ yâshaʽ ]

구약 성경 / 205회 사용
관련 성경 / ☞구원하다(민10:9, 삼하22:42, 렘17:14), 구원을 얻다(렘8:20, 삼하22:4, 렘4:14), 구하다(렘30:7), 돕다(삼하10:19, 대상19:12), 보복하다(삼상25:26,31), 건져내다(삿2:16), 이기게 하다(대상18:6), 보호하다(시36:6), 도와주다(신28:31). 
[명] 구원(사45:17, 신32:29, 습3:17), 구원자(삿3:9, 왕하13:5, 시106:21).



찬송 / 트힐라(tehillâh ) תְּהִלָּה 스트롱번호 8416

1. 찬양.   2. 열광.  3. 찬양 받을 자
발음 [ tehillâh ]
어원  /  1984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7회 사용
  • 1.  명사, 여성 찬양, 시22:26(25), 48:11(10), 51:17(16),찬송곡, 찬송가, 시22:4, 66:2, 145:1
  • 2.  명사, 여성 찬양, 열광, 시9:15(14), 사42:8.
  • 3.  명사, 여성 찬양 받을 자, 신10:21, 렘17:14.
  • 관련 성경 /  찬송(신10:21, 대하20:22, 시22:3), 칭찬(습3:19,20), 찬양(느9:5), 영예(시78:4, 102:21),명예(렘13:11). 
    [동] 찬송하다(출15:11, 느12:46, 시111:10), 찬양하다(대상16:35, 시149:1), 송축하다(느9:5, 시34:1, 145:21), 칭찬받다(렘51:41).


πειθώ 스트롱번호 3982

1. 확신을 가지게 하다.  2. 설복하다. 3. 끌어들이다
발음 [ pĕithō ]

  • 1.
    [현재완료, 과거완료 외의 능동태]
    • a.
      확신을 가지게 하다, 수긍시키다, 행18:4, 19:29.
    • b.
      설복하다, 호소하다, 애원하다, [나쁜 의미로] 감언으로 속이다, 그릇 인도하다, 고후5:11, 갈1:10.
    • c.
      끌어들이다, 기쁘게 하려고 애쓰다, 행12:20, 14:19, 갈1:10.
    • d.
      화해하게 하다, 만족시키다, 마28:14, 달래다, 요일3:19.
  • 2.
    [현재완료가 현재의 뜻을 가진다]
    • a.
      의뢰하다, 의지하다, 신뢰하다, 믿다, 눅11:22, 갈5:10, 빌1:14.
    • b.
      확신을 가지다, 확신하다, 롬2:19, 히13:18, 빌1:6.
  • 3.
    [수동완료형 이외의 수동태]
    • a.
      설복을 당하다, 확신을 가지다, 믿게 되다, 믿다, 행17:4.
    • b.
      복종하다, 따르다, 롬2:8, 갈3:1, 히13:17.
  • 4.
    [완료수동태 πέπεισμαι] 확신하다, 확실하다, 눅20:6, 롬8:38, 히6:9.

참고 정보

문법설명

[기본형] 미완료 ἔπειθον, 미래 πε- ίσω, 제1부정과거 ἔπεισα, 명령 πεῖ- σον, 완료 πέποιθα, 과거완료 ἐπεποί- θειν, 미완료 중간태 또는 수동태 ἐ- πειθόμην, 완료수동태 πέπεισμαι, 제 1부정과거 ἐπείσθην, 미래 πεισθήσο- μαι

연관 단어

  • 문법설명
    [기본형] 미완료 ἔπειθον, 미래 πε- ίσω, 제1부정과거 ἔπεισα, 명령 πεῖ- σον, 완료 πέποιθα, 과거완료 ἐπεποί- θειν, 미완료 중간태 또는 수동태 ἐ- πειθόμην, 완료수동태 πέπεισμαι, 제 1부정과거 ἐπείσθην, 미래 πεισθήσο- μαι 더보기
    관련 성경
    권하다(마27:20, 행13:43, 고후5:11), 신뢰 하다(마27:43, 빌1:14, 3:4), 믿다(눅11:22, 행26:26, 롬2:19), 인정하다(눅20:6), 따르다(행5:36,37, 롬2:8), 옳게 여기다(행5:40), 화목하다(행12:20), 권면하다(행18:4, 19:8), 권유하다(행19:26), 순종하다(히13:17), 확신하다(롬8:38, 고후2:3, 빌2:24), 의지하다(고후1:9, 히2:13).



προσέρχομαι 스트롱번호 4334

1. ~에게 오다.  2. 마 5:1.  3. 나아가다
발음 [ prŏsĕrchŏmai ]

어원 / 디포넌트. 미완료 προσηρ- χ όμην, 미래 προσελεύσομαι, 제2부정과거 προσῆλθον, 완료 προσελήλυ- θα, 4314와 2064에서 유래
  •  I.  ~에게 오다, 가다, 접근하다.
    •  1. [문자적으로] 마5:1, 눅23:52, 요12: 21, 행9:1.
    •  2. [비유적으로]
      •  a. 나아가다, 나아오다, 히4:16, 7:25, 벧전2:4.
      •  b. ~에 동의하다, ~에 종사하다, 딤전6:3.
  • 문법설명 / 중간태.
  • 관련 성경 /  나아오다(마4:3, 막14:45, 벧전2:4), 오다(마9:20, 눅7:14, 행28:9), 가다(마21:28, 눅23:52, 행22:26), 내려오다(마28:2), 나아가다(막1:31, 행8:29, 히7:25), 따르다(딤전6:3), 이르다(히12:22).







찬송(휨노스) ὕμνος



찬송(휨노스. hümnŏs)  ὕμνος, ου, ὁ   스트롱번호5215

1. 찬송.  2. 노래. 3. 엡 5:19
발음 [ hümnŏs ]
  • 1.  찬송, 노래, 엡 5:19, 골 3:16.

ὕδέω ‘찬양하다’의 축약형

  • 문법설명  /  ὕδέω ‘찬양하다’의 축약형
    관련 성경  찬송(엡5:19, 골3:16).


찬송(3034) 야다(yâdâh)  יָדָה   

1. 던지다.  2. 피엘형 : 미완료형  וַיַדּוּ
3. 히필형 미완료형 יְהוֹדֶה
발음 [ yâdâh ]
구약 성경  / 117회 사용
관련 성경  /  쏘다(렘 50:14), 떨어지다(슥 1:21), 던지다(애 3:53), 인정하다(왕상 8:33, 대하 6:24), 감사하다(시 75:1, 대상 16:4, 23:30, 느12:24), 찬송하다(창 29:35, 대하 7:6, 시 45:17), 자복하다(민 5:7, 시 32:5, 단 9:4), 찬양하다(시 43:4, 71:22, 사 38:18), 칭찬을 받다(시49:18), 아뢰다(레 16: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리스도인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있다면 단연 찬송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노래하기를 좋아한다.

그리스도인은 찬송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매주 예배에서 찬송을 몇 곡이나 부른다. 
무슨 모임을 시작하기 전과 중간에 수시로 노래를 부른다. 
기도회 때에도 찬송은 반드시 있다. 
가정예배에서도 찬송을 부른다. 개인적으로도 찬송을 수시로 부른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은 장례식에서도 찬송을 부른다.
불신자들이 볼 때 장례식의 노래는 경망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기독교 장례식은 그러려니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옥에서도 부르는 찬송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중 빌립보 감옥에 갇혔다. 
점치는 귀신들린 여자를 구해주었다는 것 때문에 억울하게 매를 맞고 쇠사슬에 묶였다. 
그런데 이런 암울하고 칙칙한 옥에서도 바울과 실라는 찬송을 불렀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바울은 또 다른 옥에서 찬송을 부른다. 
그것은 에베소서에서 잘 나타난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 기록한 편지다(기원후 60년 경, 엡 3:1; 4:1; 6:20). 
바울은 로마에 죄인의 신분으로 잡혀 있을 때 찬송을 한 것이다.

에베소서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그리스도인은 슬픔과 고통스런 환경 가운데서도 찬송을 하는 특별한 사람들이다. 그러면 찬송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이 자주 부르고 좋아하는 찬송은 무엇인가? 우리는 찬송이 좋아서 부르긴 하지만, 찬송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를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찬송의 의미를 살펴보자.

‘찬송’의 의미

     도대체 ‘찬송’이 무엇이기에 그리스도인은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노래할 수 있을까? 바울이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할 때 헬라어는 ‘유로게토스’(eulogetos)이다. ‘유로게토스’는 ‘좋은 것을 말하다’는 의미에서 온 단어이다. 한글로 번역하자면, ‘덕담’(德談) 같은 것이다. ‘유로게토스’에 해당되는 단어가 구약 히브리어에는 ‘바룩’(baruk)이다. 이 단어들이 하나님 편에서 사용될 때는 ‘복을 주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좋은 말을 하시는 것이니, 복을 주신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사람 편에게 하나님을 향해 사용될 때에는 ‘찬송하다’라는 뜻이 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좋은 것을 말하게 되니, 그것이 ‘찬양하다’라는 의미가 된다.

찬송은 감사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것이 뭐가 있을까? 인간은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 스스로 만든 뭔가를 드릴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드릴 뿐이다. 우리는 매 주일 모여 하나님께 예배한다. 그 때 우리가 드리는 것이 ‘찬송, 기도, 봉헌’이다. 그 가운데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이 드릴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여기 히브리서 13:15에 나오는 “찬송의 제사”는 레위기 7:11-15에 나오는 ‘화목 제사’와 ‘감사 제사’와 같은 말이다. ‘감사하다’는 ‘찬양하다’는 말이고, ‘찬양’은 ‘감사’이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감사와 찬양의 제사를 드렸을까?(레 7:11-15)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께 먼저 번제(희생 제사)를 드린다. 그 위에 감사제물의 일부를 태운다. 그러면서 감사제목을 말한다. 감사를 고백한다. 그렇게 희생 제사를 드릴 뿐만 아니라, 기름 섞은 무교병, 즉 이스트를 넣지 않은 딱딱한 빵도 드린다. 그리고 기름 바른 무교전병, 즉 이스트를 넣지 않고 기름을 발라 구운 맛있는 과자도 드린다. 마지막으로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구운 또 다른 종류의 과자를 함께 드린다(12절).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스트를 넣어 구운 빵도 감사 제사를 할 때 드린다(13절). 이 모든 것들을 ‘거제’로 하나님께 드린다. 곧 빵과 과자를 하나씩 좌우로 흔들어 하나님께 드린다. 그 후 그것을 제사장들에게 준다(14절). 이 맛난 것은 모두 제사장이 먹는다. 동시에 빠뜨리지 않고 했던 것이 있는데 그것은 ‘찬송을 부른 것’이다. 아마도 화목제사 가운데 감사 제사를 ‘찬양의 제사’라고 부른 것은 찬송이 포함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화목제사 가운데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송을 부른 것이 감사제사의 특징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통적으로 화목제사 가운데 감사 제사를 드릴 때 불렀던 찬양은 시편 42편 5절로 알려져 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또 한 편의 노래는 시편 100:4이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구약 시대의 ‘감사 제사’에서 잘 나타나고, 신약 시대에도 그런 의미를 살려 예배 가운데 실현하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 5:18-20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말씀에서 봐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의 증거로, 시와 찬송, 신령한 노래가 나타난다. ‘시’는 구약의 시편을 의미하고, ‘찬송’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새롭게 만들어 부른 노래인 것으로 보이며, ‘(신령한) 노래들’은 성경에 나오는 시편 이외의 여러 노래들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 세 가지는 모두 ‘찬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종합할 수 있다. 여하튼 그 찬양의 내용과 형식은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로 표현된다. 감사는 찬양이고, 찬양은 감사인 것이다. 그것은 구약의 감사 제사와도 연결되고 에베소서 5:20에 나타난 말씀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찬양은 삶으로

     그리스도인의 찬양은 베짱이처럼 일을 안 하고 노래만 부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일과 공부에는 게으르면서 노래하는 일은 좋아서 앞장서기도 한다. 노래를 인도하는 찬양 팀은 그런 점에서도 인기가 많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찬양은 단순히 노래를 즐긴다는 의미 이상이다. 물론 노래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하지만 칼빈이 ‘음악’을 ‘괴물’이라고까지 얘기할 정도로 위험한 요소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부르는 찬양은 온 회중이 함께 하는 것이어야 하고(엡 5:19), 또 교회의 찬양은 악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대상 16:6), 기교가 아니라 마음으로 노래해야 한다는 점을 종교 개혁가들은 분명히 했다.

     그러므로 찬양은 찬양 자체를 위한 것이면 안 된다. 찬양은 신앙인의 삶의 반영이며, 신앙과 삶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움이다. 찬양이 전체 삶과 연결되지 않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말 것이다. 찬양은 자연스럽게 삶으로 나아간다.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은 입술의 제사인 찬양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삶이 없는 찬양은 의미가 없다. 찬양은 감사와 복종과 순종으로 나아간다.



찬송의 정의 

1. 찬송이란 곡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또 곡이 찬송의 일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찬송 가사가 없는 곡만을 가지고는 찬송이라 할 수 없다. 
찬송가란 노래가 붙은 찬송일 뿐이지 찬송은 꼭 노래가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곡이 없는 찬송을 해본 일이 없고 찬송이라면 가사보다 곡을 중점적으로 생각해왔고 좋아하는 찬송이란 좋은 곡의 찬송이지 좋은 가사의 찬송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찬송이란 곡만 가지고서는 찬송인지 보통 노래인지를 구 분할 수가 없다. 
비록 찬송가책에 있는 어떤 것을 택하여 피아노나 다른 악기로 그 곡을 연주한다 하더라도, 아니 가사를 생각지 아니하고 곡만 허밍으로 부른 다해도 그 자체가 찬송이 될 수 없다. 
가사가 없이 곡만으로는 찬송이 존재할 수 없다. 
물론 어떤 이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한 곡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제 삼자가 이 곡만을 연주하거나 콧노래를 부른다고 해도 찬송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찬송가에 보면 명곡이나 민요나 국가에 찬송 가사를 붙여 놓고 찬송가책에 수록해 놓은 것들이 있다. 
그러므로 그 곡에 어떤 가사가 붙어 있느냐에 따라 명곡, 국가, 찬송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찬송가 79, 287, 245 참조)

2. 찬송이란 하나님의 속성(전능, 전지, 무소부재, 사랑, 자비)과 그가 하신 일(창조와 구원의 계획)을 알고 마음으로 부터 우러나온 감사와 찬양의 표현이다. 

그런 면에서 누구나 찬송 가사를 지을 수 있고, 찬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찬송가사란 특수인만이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 개인에 따라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지은 찬양의 가사를 마음으로 이해하고 공감하여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여 표현하므로 찬송이 될 수 있는 것 이다. 
즉 남이 지은 가사를 내가 그 뜻을 이해하고 마음으로 영으로 하나님을 향해 표현하므로 훌륭한 찬양이 가능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한 기도에 따라 아멘으로 동참하므로 다른 사람의 기도가 바로 내가 드린 기도가 될 수 있는 거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찬양이란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의 표현을 말하는 것으로 곡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즉 가사가 없는 찬송은 존재할 수 없지만 곡이 없는 찬양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3. 곡이란 전 교인이 함께 부를 수 있도록 하는 편의이고 필수는 아닌 것이다. 

혼자 부른다면 무곡이 가능하나 여러 명이 함께 부르기 위해 박자로, 또 쉼표를 통해 같은 템포로 시작하고 마칠 수 있는 약속이 주어진 것이다. 
같은 가사에 다른 곡을 붙여 더 느리게 부르거나 더 높게 불러도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으나 같은 곡이지만 가사를 바꾸어 준다면 전연 다른 내용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곡은 틀리게 부른다 해도 가사를 하나님께 전달하는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가사의 뜻을 이해 못하거나 가사를 틀리게 부른 다면 마음이 하나님께 전달되는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사는 성서적이어야 하고, 또 그 가사의 뜻을 명확히 이해하고 마음으로 불러야 하는 것이다. 곡이란 가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며 목적이 아닌 것이다. 곡이란 상품을 포장한 포장지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찬송가책 안에도 비 성서적인 가사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하고 비성서적인 가사는 고쳐 부르거나 피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하나님께는 음악적 요소가 전연 무시된 음치의 찬송이나 음악 전문가의 찬송이나 동질의 찬송으로 인정되어질 수 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4. 시, 찬미, 신령 란 노래(엡 5:19; 골 3:16), 찬송(약 5:13): 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글(시편이나 기타 시) 즉 곡이 붙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고, 찬미란 하나님을 찬양하는 글에 곡을 붙여 드려진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신령한 노래란 하나님을 찬양하는 글이 아닌 신앙적인 가사가 붙은 노래라고 구분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고전 14:26의 "찬송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로 위의 시(엡 5:19)과 동질의 것일 것이다.

5. 찬송에서의 사부 찬송의 의미는 남녀 그리고 높은 음과 낮음을 가진 성도들 각자가 노래하기 편한 음역에서 노래하도록 하는 편의이며, 또 자기의 목소리를 이웃 사람의 목소리 크기와 밸런스를 유지케 하므로 회중 예배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게 하여 주므로 좋은 점이 있다. 

통성 기도 시에 목소리 큰 자의 횡포를 생각하면 4부의 찬송의 장점이 많이 강조되리라 믿는다. 어떤 경우에도 사부의 찬송과 단음의 찬송이 찬송의 질을 구별해 주는 것은 아니다.

6. 성가대의 찬양과 중창, 독창자의 찬양이 위에서 언급한 정도의 수준이 된다면 찬송으로서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하겠으나 만일 합창이 곡을 중심해 있거나 사람의 귀를 위한 발표용(자랑)으로 된다면 찬송으로서의 수준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향한 기도와 찬송을 했던 거와 같은 수준으로 인간의 귀를 의식하지 말고 하는 찬양이어야 할 것이며, 악기의 도움을 전연 느끼지 않는 수준의 찬송을 할 수 있어야 하겠다.

7. 찬송은 가사에 있다고 강조한 대로 찬송에 있어서의 가사에 많은 사람들이 심혈을 기울여 가사 부문에 많은 진전이 있어야 마땅하며, 교계에서는 음악인 보다는 오히려 문인들이 더 존중 되어져야 마땅할 것 같으나 교회마다 음악인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문인들은 교회에서 전연 그들의 직무가 부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찬송은 바로 곡(음악)으로 오해 하고 있는 부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8. 기도를 문인들에게만 맡겨도 잘못이려니와 독창, 중창, 합창을 음악인들에게만 전담시키는 것은 찬송의 질을 점점 저하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며, 더욱 일반 성도들에게 넓게 보급 시켜야 할 찬송의 특권을 점점 빼앗고 목소리 나쁜 사람은 늘 찬송을 못한다고 사양케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결과를 낳게 할 것이다.

9. 교회 안에 음악이 치중되면 될수록 하나님이 받으실 몫은 줄어들고 인간들이 받을 양은 많아지게 될 가능성이 있어서 주님께서는 저희더러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실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10.훌륭한 반주자의 반주만으로는 본인이 입술로 또는 마음으로 가사를 생각하며 부를 수 없을 때는 찬송을 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일평생 반주자로 수고로운 봉사는 했지만 찬송면에 서는 게을리 한 결과가 될 것이다. 
지휘자도 훌륭한 합창을 창조해 냈다 하더라도 그 본인이 입술로 가사를 생각하며 부를 수 없었다면 성가대원에게는 찬송을 하도록 했을지 모르나 본인은 찬송을 했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는 모든 성도 각자에게 무엇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는데 가장 찬송을 위해 큰일을 한 지휘자나 반주자는 찬송을 개을리 했음을 시인하지 않으면 찬송의 의미도 모르고 찬양대를 이끌었다는 결론이 될 것이다. 
교회에서 흔히 듣게 되는 악기의 독주가 듣는 이의 마음에 와 닿았다 하더라도 곡조만 보고 곡만이 들려진 연주라면 찬양으로서는 가치가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수많은 지휘자, 반주자, 악기 연주가들이 음악에만 몰두해 있다고 한다면 찬송과는 거리가 먼 것이나 누가 그렇게 생각을 하겠는가? 
사실상 어려운 곡을 4부로 반주하는 반주자는 가사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 
성가대 지휘자는 사부 합창을 살리는 것이 목적이지 가사의 바른 이해와 바른 전달에 목적을 두고 있지 못 한다. 
합창에서는 부르는 이나 듣는 이가 화음이 잘 맞았으면 찬송을 잘 한 것으로 평가가 되고 혹시라도 화음에 차질이 났으면 잘못 했다고 평가를 받는 것이다. 
즉 찬송을 인간이 평가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찬송은 인간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임을 다시 강조한다.

성구

에베소서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 하며.

골로새서 3:16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고린도전서 14:15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히브리서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에베소서 1:5-6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 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로마서 15:11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야고보서 5: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 할지니라




알파벳 시 말씀 / 답관체(아크로스틱), 아합체



알파벳 시-예수님을 앙망하라(시 34:5)


시편 34편은 다윗의 시로서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알파벳 시입니다. 22절이 한 구절마다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5절은 히브리어 알파벳 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헤는 숨구멍을 상징하는 상형문자입니다. 다윗이 헤로 시작하는 의미를 살펴보면서 우리들도 하나님과 숨구멍이 열려서 교제가 일어나야 합니다. 영혼이 복음을 듣지 않으면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단절되어 영혼은 죽게 됩니다. 원죄의 죄인은 예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다윗은 예수님을 앙망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매일같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숨구멍이 열려서 항상 영혼이 숨을 쉬는 크리스천이 되어야 합니다.

알파벳 헤는 창문이라는 상형에서 온 글자입니다. 고대근동의 사람들은 장막을 짓고 살았기 때문에 숨구멍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장막의 꼭대기에 구멍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공기가 순환하여 장막 안에 공기를 정화시키는 작용을 했던 것입니다. 또한 이 헤라는 글자는 사람이 하늘을 향하여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모습을 하고 있는 글자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예배를 드려야 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헤는 죽었던 자들이 숨을 쉬고 살아나기 때문에 숨결, 호흡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난 자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계시하는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헤는 영원히 살아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나타내는 단어에 쓰이고 있습니다. (헤이칼 1964) 성전, 궁전,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곳인 성전도 헤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죄로 죽어서 숨을 쉬지 못했던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숨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시34:5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5절 히비투 엘라이브 베나하루 우페네헴 알 예흐파루

주를 앙망하라(5절)

♣명제: 주를 앙망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목적: 구원받은 백성들도 주님을 앙망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다윗은 주님의 십자가 문을 통과하여 들어와 안식을 누리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죄악의 두려움과 육체의 두려움에서 자신을 건져주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의 십자를 통과하면 죄악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이제 5절을 시작하면서 헤라는 알파벳으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 숨을 쉴 수가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주를 앙망하게 된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숨구멍이 열려 살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으로 인하여 영원히 죽었던 인생들이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호흡이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앙망하고’ (나바트 5027 VHACZP 동사, 히필, 완료, 공성, 3인칭, 복수) 보다, 바라보다, 우러러보다, 살펴보다, 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주변에 있었던 자들이 주를 앙망하면서 우러러보고 살펴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단어는 유심히 주목하여 보는 것을 나타낼 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심히 주목하여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민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 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원망 불평할 때에 불 뱀이 이들을 물어 죽이고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불 뱀을 달라고 명령하셨고 모세는 믿음으로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았습니다. 이 놋 뱀을 바라본 자들은 모두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쳐다본즉’ 이라는 단어가 (나바트)입니다. 이들은 놋 뱀을 유심히 관찰하여 쳐다봄으로 죽음에서 살아났습니다. 여기에서 놋 뱀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요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주를 앙망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게 하는 자가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구원은 아무나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들이 주님의 십자가 놋 뱀을 바라보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히필 사역 능동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라보게 한 자들만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광야에서 불 뱀에 물려 죽어가던 자들이 바라보았던 뱀도 히필형을 사용함으로 하나님께서 보게 한 자들이 놋 뱀을 바라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완료 시제를 사용함으로 이들은 확실하게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며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구원받은 자들이 주님을 앙망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숨구멍이 열린 자들이 숨을 쉬고 호흡하여 살아남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5절을 시작하면서 숨구멍의 상형에서 온 헤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원죄의 죽음에서 주님의 죽으심 때문에 숨구멍이 열려 주님을 앙망하면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들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자들로서 예수님을 모욕하고 핍박하게 됩니다.

‘광채를 내었으니’ (나하르 5102 VQACZP 동사, 칼, 완료, 공성, 3인칭, 복수) 모여 들다, 빛나다, 빛을 발하다, 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가 아닙니다. 또한 스스로 살아날 수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앙망하고 바라보는 자들은 주님의 빛이 임하여 빛을 발산하게 됩니다. 구원을 받아 영적으로 살아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을 발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빛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는 것입니다. 광채를 내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을 전할 때에 영혼이 죽었던 생명들이 빛을 보면서 몰려들게 되는 것입니다.

광채를 내는 자들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빛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에서도 빛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나오게 됩니다. 주님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전입니다. 성막에는 ‘메노라’라고 하는 금등대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성막의 기구입니다. 반면에 구원받은 백성들도 예표 하는 기구입니다. 이 등대는 올리브기름을 계속해서 공급받아야 만이 빛을 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름부음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공급받을 때에 계속해서 어둠을 밝히는 빛이 발산되는 것입니다.

금등대가 교만하여 자신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금 등대 자체로는 스스로 빛을 낼 수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기름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기름이 내 안에 공급되면 빛은 자연스럽게 발산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얼굴에서 광채가 날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도 두 번째 돌 판을 가슴에 품고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얼굴에서 빛이 났습니다. 두 번째 돌 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상징하고 있는 돌 판입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이 내 심비의 판에 새겨져 있으면 얼굴에서 빛이 나오는 것입니다.

‘부끄럽지’ (하페르 2659 VQIMZP 동사, 칼, 미완료, 남성, 3인칭, 복수) 무안을 당하다, 수치를 당하다, 낭패를 당하다, 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앙망하고 바라보는 자들은 얼굴에서 빛이 나와 무안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들은 사람이 많은 곳에서 실수를 하면 무안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창피를 당하여 수치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상태가 언제입니까? 죄악 가운데 있었을 때입니다.

롬10: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수치를 가져가셨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움을’ (카타이스퀴노 2617 VIFPS3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 단수, 3인칭) 모욕을 주다, 욕되게 하다, 부끄럽게 하다, 라는 뜻입니다. 원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사탄으로부터 정죄를 받아 모욕을 당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더 이상 모욕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모욕과 부끄러움을 십자가에서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확실히 예수님을 믿으면 부끄러움과 모욕받는 것이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직설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적 사건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믿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반드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믿었다면 앞으로 계속해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미래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내 힘으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 때문에 모욕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동태는 내 힘으로 부끄러운 수치를 씻을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지금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앙망하면 계속해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원죄의 고통과 부끄러움과 수치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을 통해서 숨을 쉬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마포 옷을 입어야 합니다. 어린양의 세마포 옷을 입은 자들은 더 이상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22:11-13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 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임금이 혼인잔치를 준비했는데 임금이 준비한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준비된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와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임금은 사환들에게 말하여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지옥의 불 못에 던져 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마포 옷을 입지 않은 자들은 이렇게 수치를 당하여 지옥의 불 못으로 던져지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숨구멍이 열려 호흡하는 자가 되었으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 주님만을 앙망하여 바라보아야 합니다. 호흡이 있는 자들은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계시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이제부터 주님과 호흡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답관체(踏冠體 acrostic/아크로스틱)

한국 이스라엘 학회/연구소
~2분

답관체(踏冠體 acrostic/아크로스틱)는 히브리 문학의 표현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답관체는 이렇습니다. 예로 우리나라의 글자순서는 ㄱ ㄴ ㄷ ㄹ라고 했을 때

가지 마세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싫어한다해도

내가있지 않습니까? 만일에 지금

당신이 나를 멀리 떠난다하면 우리가 날마다 보아왔던

라일락의 향기가 멀리 떠나버릴 것입니다.

글자순서대로 가(ㄱ), 내(ㄴ), 당(ㄷ), 라(ㄹ)처럼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대로 시편이 구성된 것입니다.

답관체는 히브리 문학의 표현 방법 중의 하나로서, 각 절의 첫 글자를 히브리 알파벳 순서를 따라 배열하는 형식을 말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우리 말로 표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절(ㄱ) 가장 높으신 주님을 찬양함이 마땅하도다!

2절(ㄴ)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찬양하리이다.

3절(ㄷ) 다함께 모여 성소에서 함께 주를 찬양하세!

.......

위의 경우 1절의 첫 글자는 우리 말 자음의 첫 글자인 (ㄱ)으로 시작하고 있으며(“가장”), 2절은 (ㄴ)으로 시작하고(“내가”), 3절은 (ㄷ)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다함께”). 이와 같이 히브리 알파벳 순서를 따라 시를 배열하는 것을 답관체 형식의 시라고 합니다.

이런 형식의 시편이 몇 편 있습니다. 25편 34편 37편 111편 112편 119편 145편 등입니다. 
히브리 시 중에는 이와 같이 각 절의 첫 글자를 히브리 알파벳 순서에 따라 배열한 시가 많이 있습니다. 시편 119편의 경우에는 각 알파벳 글자마다 8절씩 배열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8절)은 히브리 알파벳의 첫 글자인 “알렢”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9~16절)은 히브리 알파벳의 두 번째 글자인 “베트”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시를 배열하다 보니 시편 119편은 176절(22개의 알파벳 × 8절씩 = 총 176절)이나 되는 긴 시가 되었습니다.

시편 119편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마치 수를 놓는 사람이 색실로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한땀 한땀씩 수를 놓는 것처럼, 한 절 한 절을 매우 정교하고 신중하게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 형식은 시인이 표현하려는 내용을 보다 극적이고 효과적으로 만들어주며, 그 시의 의미를 더욱 깊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답관체”의 형식은 히브리어 알파벳을 가지고 썼기 때문에, 이것은 히브리 문학에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어나 한글 성경으로 번역할 경우에는 영어 알파벳이나 한글 자모음의 순서대로 시를 번역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의미만을 바꾸어 번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답관체 형식은 단지 첫 글자를 히브리 알파벳 순서대로 사용해서 쓰는 히브리 시의 형식이라고만 이해하면 됩니다. 여기에는 더 이상 깊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1장, 2장, 3장, 4장과 잠언 31장 “현숙한 여인”에 대한 말씀도 답관체(踏冠體 acrostic) 형식으로 기록된 문학적 표현입니다.

답관=머릿 장단을 맞추다  밟을 답, (장단을) 맞추다 답... 갓 관, 머리 관...그래서 머릿 장단을 맞추다...한글사전에 없어서요.


알파벳순으로 구성된 것들


  시111, 시112, 시119,  애1.2.3.4

  우리말에 가.나.다.라. 각행의 첫머리로 시작되는 시가 있다.

그런데 성경에도 알파벳 순서에 따라 각 행의 첫머리로 시작되는

답관체 시가 있다(단 히브리어 성경). 


   1.각 절의 첫 글자를 히브리 알파벳 순서를 따라 배열하는 형식을 답관체라 말한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우리 말로   표현해보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우리말에

   가-가난한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어도

   나-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서 이를 갈 것이라

   다-다른 복음에는 구원이 없나니

   라-라마에서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

   마-마른 땅과 같아 목말라 죽게 할 것이다. 등  이다.


1절(ㄱ) 가장 높으신 주님을 찬양함이 마땅하도다!
2절(ㄴ)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찬양하리이다.
3절(ㄷ) 다함께 모여 성소에서 함께 주를 찬양하세!


...........
위의 경우

1절의 첫 글자는 우리 말 자음의 첫 글자인 (ㄱ)으로 시작하고 있으며("가장"),

2절은 (ㄴ)으로 시작하고("내가),

3절은 (ㄷ)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다함께").

이와 같이 히브리 알파벳 순서를 따라 시를 배열하는 것을 답관체(踏冠體)

형식의 시라고 한다.


2. 그런데 성경가운데는  이와 같이 각 절의 첫 글자를 히브리 알파벳 순서에

따라 배열한 시가  답관체 형식으로 4권이 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시편에서 가장 긴 시편 119편이다.

시 119편의 경우에는 각 알파벳 글자마다 한연에 8절씩 배열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1-8절)은 히브리 알파벳의 첫 글자인 "알렢"(א)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9-16절)은 히브리 알파벳의 두 번째 글자인 "베트"(ב)로 시작하고

(17-24절)은 히브리 알파벳의 세 번째 글자인 "끼멜"(נ)로 시작하고있다.

이런 식으로 시를 배열하다 보니 시119편은 무려 176절 22연으로 되는 긴 시가 되었다.

시 119편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마치 수를 놓는 사람이 색실로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한땀 한땀씩 수를 놓는 것처럼, 한 절 한절을 매우 정교하고 신중하게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형식은 시인이 표현하려는 내용을 보다 극적이고 효과적으로 만들어주며,

그 시의 의미를 더욱 깊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예례미아 애가도 5장까지 됐는데 1장2장의 1절은 히브리어 알파벳 첫글자인 알렢(א)으로

시작하고 22절 끝절은 타우(ת)로 끝난다.

우리말 성경에는 평이하게 보일지라도 히브리어 원문에는 글자 하나하나에 자음하나하나에

까지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가 녹아있고 시적 표현과 음률이 잘 배합되어있는 것을 볼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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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벳순으로 구성된 시편  111편,  

112편,   119편,   애1.2.3.4

     시편 111편 내용

   הללו יה  

1  אודה יהוה בכל־לבב  A 알렢

       캅레     칼베   웨야       데오

   heart with-all-of Yahweh I-will-extol

     내가 전심으로 야웨를 높이리로다

          בסוד ישרים ועדה׃   B 뻬트 

       데에우      림사여      드소베

 and-assembly upright-ones in-council-of

   내가 정직한자의 회와 공회중에서

 2   גדלים מעשי יהוה  G 끼멜

       여호바     마아세   게도림

   Yahweh    works-of  great-ones

      여호와께서 하시는일이 크니

דרושים לכל־חפציהם׃  D 달렏

      헤페체헴    르칼      데루쉼

 delighters-of-them  by-all-of  

 ones-being-pondered

 이를 즐거워하는 모든자가 탐구하는구나

 3  הוד־והדר פעלו H헤

            로아포 달호여 드호

     deed-of him  and-majestic  glorious

          그 행사가 존귀하며 엄위하며

   וצדקתו עמדת לעד׃  W 와우

       드아라    트데메오  토카데치여

        to-forever  one-enduring  

        and-righteousness-of-him

     그의 의가 영원히 있도다.          

זכר עשה לנפלאתיו  Z 자인 

        우티로페니레  사아    켈제

for-deeds-being-wonders-of-him  

he-caused remembrance

그가 기이한 일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으니

    חנון ורחום יהוה׃  H 헤드 

    웨야     훔라여        눈한

Yahweh  and-compassionate  gracious

       야웨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도다.

5  טרף נתן ליראיו  T 테드

          우이아레리  탄나  프레테

  for-ones-fearing-him  he-provides  food

 야웨께서 자기를 경외하는자에게 양식을 주시며
  יזכר לעולם בריתו׃   Y 요드

   토리베     람오레      콜지이

covenant-of-him to-forever  he-remembers

        그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6  כח מעשיו הגיד    K 카프

        드닌히  우차아마  흐아코

    he-showed   works-of him   power-of

     그 행사의 능을 저희에게 보이셨도다.

לעמו לתת להם נחלת גוים׃   L 라멧

임고  트라하나  헴라  트테라      모암레

nations  land-of to-them to-give to-people-of him

       저가 자기 백성에게 열방을 기업으로 주사

מעשי ידיו אמת ומשפט M 멤

       트밧사미우  트멤에  우디야   쉐아마

    and-just   fathful   hands-of-him  works-of

         그 손의 행사는 진실과 공의이며 
       נאמנים כל־פקודיו׃    N 눈

         우이다쿠피   콜   님마에네

 precepts-of-him all-of ones-being-trustworthy

            그 법도는 다 확실하니

סמוכים לעד לעולם  S 싸멕

           람오레   드아레       킴무쎄

     to-forever for-ever one-being-steadfast

            영원  무궁히   정하신 바요
     עשוים באמת וישר׃  Y 아인

          살이여  트메에베    임수아

and-uprightness in-fathfulness one-being-done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פדות שלח לעמו   P 페

        모암레      라사   트두페

 for-people-of-him   he-provided  redemption

    야웨께서 그 백성에게 구속을 베푸시며
 צוה־לעולם בריתו   TS 차데

      토리베   람오레  아흐우치

covenant-of-him  to-forever  he-ordained

       그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קדוש ונורא שמ   Q 코프

     모세  라노여      쉬도카

 name-of-him  and-being-awesome holy

      그 이름이 거룩하시고 지존 하시도다

10 ראשית חכמה יראת יהו R 레쉬

        웨야   트아레이   마크호    트쉬레

  Yahweh  fear-of   wisdome    beginning-of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שכל טוב לכל־עשיהם S 신 

         헴쉐이  콜레  토브        켈쉐

ones-following-them  to-all-of   good  understading

    그 계명을 따르는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이                      

 תהלתו עמדת לעד׃  T 타우

드아라    트데메오  토라힐

to-eternity   one-enduring   praise-of-him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 

 

Psalms 119

אַשְׁרֵי תְמִימֵי־דָרֶךְ הַהֹלְכִים בְּתֹורַת יְהוָה׃

1

אַשְׁרֵי נֹצְרֵי עֵדֹתָיו בְּכָל־לֵב יִדְרְשׁוּהוּ׃

2

אַף לֹא־פָעֲלוּ עַוְלָה בִּדְרָכָיו הָלָכוּ׃

3

אַתָּה צִוִּיתָה פִקֻּדֶיךָ לִשְׁמֹר מְאֹד׃

4

אַחֲלַי יִכֹּנוּ דְרָכָי לִשְׁמֹר חֻקֶּיךָ׃

5

אָז לֹא־אֵבֹושׁ בְּהַבִּיטִי אֶל־כָּל־מִצְוֹתֶיךָ׃

6

אֹודְךָ בְּיֹשֶׁר לֵבָב בְּלָמְדִי מִשְׁפְּטֵי צִדְקֶךָ׃

7

אֶת־חֻקֶּיךָ אֶשְׁמֹר אַל־תַּעַזְבֵנִי עַד־מְאֹד׃

8

בַּמֶּה יְזַכֶּה־נַּעַר אֶת־אָרְחֹו לִשְׁמֹר כִּדְבָרֶךָ׃

9

בְּכָל־לִבִּי דְרַשְׁתִּיךָ אַל־תַּשְׁגֵּנִי מִמִּצְוֹתֶיךָ׃

10

בְּלִבִּי צָפַנְתִּי אִמְרָתֶךָ לְמַעַן לֹא אֶחֱטָא־לָךְ׃

11

בָּרוּךְ אַתָּה יְהוָה לַמְּדֵנִי חֻקֶּיךָ׃

12

בִּשְׂפָתַי סִפַּרְתִּי כֹּל מִשְׁפְּטֵי־פִיךָ׃

13

בְּדֶרֶךְ עֵדְוֹתֶיךָ שַׂשְׂתִּי כְּעַל כָּל־הֹון׃

14

בְּפִקֻּדֶיךָ אָשִׂיחָה וְאַבִּיטָה אֹרְחֹתֶיךָ׃

15

בְּחֻקֹּתֶיךָ אֶשְׁתַּעֲשָׁע לֹא אֶשְׁכַּח דְּבָרֶךָ׃

16

גְּמֹל עַל־עַבְדְּךָ אֶחְיֶה וְאֶשְׁמְרָה דְבָרֶךָ׃

17

גַּל־עֵינַי וְאַבִּיטָה נִפְלָאֹות מִתֹּורָתֶךָ׃

18

גֵּר אָנֹכִי בָאָרֶץ אַל־תַּסְתֵּר מִמֶּנִּי מִצְוֹתֶיךָ׃

19

גָּרְסָה נַפְשִׁי לְתַאֲבָה אֶל־מִשְׁפָּטֶיךָ בְכָל־עֵת׃

20

גָּעַרְתָּ זֵדִים אֲרוּרִים הַשֹּׁגִים מִמִּצְוֹתֶיךָ׃

21

גַּל מֵעָלַי חֶרְפָּה וָבוּז כִּי עֵדֹתֶיךָ נָצָרְתִּי׃

22

גַּם יָשְׁבוּ רִים בִּי נִדְבָּרוּ עַבְדְּךָ יָשִׂיחַ בְּחֻקֶּיךָ׃

23

גַּם־עֵדֹתֶיךָ שַׁעֲשֻׁעָי אַנְשֵׁי עֲצָתִי׃

24

דָּבְקָה לֶעָפָר נַפְשִׁי חַיֵּנִי כִּדְבָרֶךָ׃

25

דְּרָכַי סִפַּרְתִּי וַתַּעֲנֵנִי לַמְּדֵנִי חֻקֶּיךָ׃

26

דֶּרֶךְ־פִּקּוּדֶיךָ הֲבִינֵנִי וְאָשִׂיחָה בְּנִפְלְאֹותֶיךָ׃

27

דָּלְפָה נַפְשִׁי מִתּוּגָה קַיְּמֵנִי כִּדְבָרֶךָ׃

28

דֶּרֶךשְֶׁ־קֶר הָסֵר מִמֶּנִּי וְתֹורָתְךָ חָנֵּנִי׃

29

דֶּרֶךְ־אֱמוּנָה בָחָרְתִּי מִשְׁפָּטֶיךָ שִׁוִּיתִי׃

30

דָּבַקְתִּי בְעֵדְוֹתֶיךָ יְהוָה אַל־תְּבִישֵׁנִי׃

31

דֶּרֶךְ־מִצְוֹתֶיךָ אָרוּץ כִּי תַרְחִיב לִבִּי׃

32

הֹורֵנִי יְהוָה דֶּרֶךְ חֻקֶּיךָ וְאֶצְּרֶנָּה עֵקֶב׃

33

הֲבִינֵנִי וְאֶצְּרָה תֹורָתֶךָ וְאֶשְׁמְרֶנָּה בְכָל־לֵב׃

34

הַדְרִיכֵנִי בִּנְתִיב מִצְוֹתֶיךָ כִּי־בֹו חָפָצְתִּי׃

35

הַט־לִבִּי אֶל־עֵדְוֹתֶיךָ וְאַל אֶל־בָּצַע׃

36

הַעֲבֵר עֵינַי מֵרְאֹות שָׁוְא בִּדְרָכֶךָ חַיֵּנִי׃

37

הָקֵם לְעַבְדְּךָ אִמְרָתֶךָ אֲשֶׁר לְיִרְאָתֶךָ׃

38

הַעֲבֵר חֶרְפָּתִי אֲשֶׁר יָגֹרְתִּי כִּי מִשְׁפָּטֶיךָ טֹובִים׃

39

הִנֵּה תָּאַבְתִּי לְפִקֻּדֶיךָ בְּצִדְקָתְךָ חַיֵּנִי׃

40

וִיבֹאֻנִי חֲסָדֶךָ יְהוָה תְּשׁוּעָתְךָ כְּאִמְרָתֶךָ׃

41

וְאֶעֱנֶה חֹרְפִי דָבָר כִּי־בָטַחְתִּי בִּדְבָרֶךָ׃

42

וְאַל־תַּצֵּל מִפִּי דְבַר־אֱמֶת עַד־מְאֹד כִּי לְמִשְׁפָּטֶךָ יִחָלְתִּי׃

43

וְאֶשְׁמְרָה תֹורָתְךָ תָמִיד לְעֹולָם וָעֶד׃

44

וְאֶתְהַלְּכָה בָרְחָבָה כִּי פִקֻּדֶיךָ דָרָשְׁתִּי׃

45

וַאֲדַבְּרָה בְעֵדֹתֶיךָ נֶגֶד מְלָכִים וְלֹא אֵבֹושׁ׃

46

וְאֶשְׁתַּעֲשַׁע בְּמִצְוֹתֶיךָ אֲשֶׁר אָהָבְתִּי׃

47

וְאֶשָּׂא־כַפַּי אֶל־מִצְוֹתֶיךָ אֲשֶׁר אָהָבְתִּי וְאָשִׂיחָה בְחֻקֶּיךָ׃

48

זְכֹר־דָּבָר לְעַבְדֶּךָ עַל אֲשֶׁר יִחַלְתָּנִי׃

49

זֹאת נֶחָמָתִי בְעָנְיִי כִּי אִמְרָתְךָ חִיָּתְנִי׃

50

זֵדִים הֱלִיצֻנִי עַד־מְאֹד מִתֹּורָתְךָ לֹא נָטִיתִי׃

51

זָכַרְתִּי מִשְׁפָּטֶיךָ מֵעֹולָם ׀ יְהוָה וָאֶתְנֶחָם׃

52

זַלְעָפָה אֲחָזַתְנִי מֵרְשָׁעִים עֹזְבֵי תֹּורָתֶךָ׃

53

זְמִרֹות הָיוּ־לִי חֻקֶּיךָ בְּבֵית מְגוּרָי׃

54

זָכַרְתִּי בַלַּיְלָה שִׁמְךָ יְהוָה וָאֶשְׁמְרָה תֹּורָתֶךָ׃

55

זֹאת הָיְתָה־לִּי כִּי פִקֻּדֶיךָ נָצָרְתִּי׃

56

חֶלְקִי יְהוָה אָמַרְתִּי לִשְׁמֹר דְּבָרֶיךָ׃

57

חִלִּיתִי פָנֶיךָ בְכָל־לֵב חָנֵּנִי כְּאִמְרָתֶךָ׃

58

חִשַּׁבְתִּי דְרָכָי וָאָשִׁיבָה רַגְלַי אֶל־עֵדֹתֶיךָ׃

59

חַשְׁתִּי וְלֹא הִתְמַהְמָהְתִּי לִשְׁמֹר מִצְוֹתֶיךָ׃

60

חֶבְלֵי רְשָׁעִים עִוְּדֻנִי תֹּורָתְךָ לֹא שָׁכָחְתִּי׃

61

חֲצֹות־לַיְלָה אָקוּם לְהֹודֹות לָךְ עַל מִשְׁפְּטֵי צִדְקֶךָ׃

62

חָבֵר אָנִי לְכָל־אֲשֶׁר יְרֵאוּךָ וּלְשֹׁמְרֵי פִּקּוּדֶיךָ׃

63

חַסְדְּךָ יְהוָה מָלְאָה הָאָרֶץ חֻקֶּיךָ לַמְּדֵנִי׃

64

טֹוב עָשִׂיתָ עִם־עַבְדְּךָ יְהוָה כִּדְבָרֶךָ׃

65

טוּב טַעַם וָדַעַת לַמְּדֵנִי כִּי בְמִצְוֹתֶיךָ הֶאֱמָנְתִּי׃

66

טֶרֶם אֶעֱנֶה אֲנִי שֹׁגֵג וְעַתָּה אִמְרָתְךָ שָׁמָרְתִּי׃

67

טֹוב־אַתָּה וּמֵטִיב לַמְּדֵנִי חֻקֶּיךָ׃

68

טָפְלוּ עָלַי שֶׁקֶר זֵדִים אֲנִי בְּכָל־לֵב ׀ אֱצֹּר פִּקּוּדֶיךָ׃

69

טָפַשׁ כַּחֵלֶב לִבָּם אֲנִי תֹּורָתְךָ שִׁעֲשָׁעְתִּי׃

70

טֹוב־לִי כִי־עֻנֵּיתִי לְמַעַן אֶלְמַד חֻקֶּיךָ׃

71

טֹוב־לִי תֹורַת־פִּיךָ מֵאַלְפֵי זָהָב וָכָסֶף׃

72

יָדֶיךָ עָשׂוּנִי וַיְכֹונְנוּנִי הֲבִינֵנִי וְאֶלְמְדָה מִצְוֹתֶיךָ׃

73

יְרֵאֶיךָ יִרְאוּנִי וְיִשְׂמָחוּ כִּי לִדְבָרְךָ יִחָלְתִּי׃

74

יָדַעְתִּי יְהוָה כִּי־צֶדֶק מִשְׁפָּטֶיךָ וֶאֱמוּנָה עִנִּיתָנִי׃

75

יְהִי־נָא חַסְדְּךָ לְנַחֲמֵנִי כְּאִמְרָתְךָ לְעַבְדֶּךָ׃

76

יְבֹאוּנִי רַחֲמֶיךָ וְאֶחְיֶה כִּי־תֹורָתְךָ שַׁעֲשֻׁעָי׃

77

יֵבֹשׁוּ זֵדִים כִּי־שֶׁקֶר עִוְּתוּנִי אֲנִי אָשִׂיחַ בְּפִקּוּדֶיךָ׃

78

יָשׁוּבוּ לִי יְרֵאֶיךָ [וְיָדְעוּ כ] (וְיֹדְעֵי ק) עֵדֹתֶיךָ׃

79

יְהִי־לִבִּי תָמִים בְּחֻקֶּיךָ לְמַעַן לֹא אֵבֹושׁ׃

80

כָּלְתָה לִתְשׁוּעָתְךָ נַפְשִׁי לִדְבָרְךָ יִחָלְתִּי׃

81

כָּלוּ עֵינַי לְאִמְרָתֶךָ לֵאמֹר מָתַי תְּנַחֲמֵנִי׃

82

כִּי־הָיִיתִי כְּנֹאד בְּקִיטֹור חֻקֶּיךָ לֹא שָׁכָחְתִּי׃

83

כַּמָּה יְמֵי־עַבְדֶּךָ מָתַי תַּעֲשֶׂה בְרֹדְפַי מִשְׁפָּט׃

84

כָּרוּ־לִי זֵדִים שִׁיחֹות אֲשֶׁר לֹא כְתֹורָתֶךָ׃

85

כָּל־מִצְוֹתֶיךָ אֱמוּנָה שֶׁקֶר רְדָפוּנִי עָזְרֵנִי׃

86

כִּמְעַט כִּלּוּנִי בָאָרֶץ וַאֲנִי לֹא־עָזַבְתִּי פִקֻּודֶיךָ ׃

87

כְּחַסְדְּךָ חַיֵּנִי וְאֶשְׁמְרָה עֵדוּת פִּיךָ׃

88

לְעֹולָם יְהוָה דְּבָרְךָ נִצָּב בַּשָּׁמָיִם׃

89

לְדֹר וָדֹר אֱמוּנָתֶךָ כֹּונַנְתָּ אֶרֶץ וַתַּעֲמֹד׃

90

לְמִשְׁפָּטֶיךָ עָמְדוּ הַיֹּום כִּי הַכֹּל עֲבָדֶיךָ׃

91

לוּלֵי תֹורָתְךָ שַׁעֲשֻׁעָי אָז אָבַדְתִּי בְעָנְיִי׃

92

לְעֹולָם לֹא־אֶשְׁכַּח פִּקּוּדֶיךָ כִּי בָם חִיִּיתָנִי׃

93

לְךָ־אֲנִי הֹושִׁיעֵנִי כִּי פִקּוּדֶיךָ דָרָשְׁתִּי׃

94

לִי קִוּוּ רְשָׁעִים לְאַבְּדֵנִי עֵדֹתֶיךָ אֶתְבֹּונָן׃

95

לְכָל תִּכְלָה רָאִיתִי קֵץ רְחָבָה מִצְוָתְךָ מְאֹד׃

96

מָה־אָהַבְתִּי תֹורָתֶךָ כָּל־הַיֹּום הִיא שִׂיחָתִי׃

97

מֵאֹיְבַי תְּחַכְּמֵנִי מִצְוֹתֶךָ כִּי לְעֹולָם הִיא־לִי׃

98

מִכָּל־מְלַמְּדַי הִשְׂכַּלְתִּי כִּי עֵדְוֹתֶיךָ שִׂיחָה לִי׃

99

מִזְּקֵנִים אֶתְבֹּונָן כִּי פִקּוּדֶיךָ נָצָרְתִּי׃

100

מִכָּל־אֹרַח רָע כָּלִאתִי רַגְלָי לְמַעַן אֶשְׁמֹר דְּבָרֶךָ׃

101

מִמִּשְׁפָּטֶיךָ לֹא־סָרְתִּי כִּי־אַתָּה הֹורֵתָנִי׃

102

מַה־נִּמְלְצוּ לְחִכִּי אִמְרָתֶךָ מִדְּבַשׁ לְפִי׃

103

מִפִּקּוּדֶיךָ אֶתְבֹּונָן עַל־כֵּן שָׂנֵאתִי ׀ כָּל־אֹרַח שָׁקֶר׃

104

נֵר־לְרַגְלִי דְבָרֶךָ וְאֹור לִנְתִיבָתִי׃

105

נִשְׁבַּעְתִּי וָאֲקַיֵּמָה לִשְׁמֹר מִשְׁפְּטֵי צִדְקֶךָ׃

106

נַעֲנֵיתִי עַד־מְאֹד יְהוָה חַיֵּנִי כִדְבָרֶךָ׃

107

נִדְבֹות פִּי רְצֵה־נָא יְהוָה וּמִשְׁפָּטֶיךָ לַמְּדֵנִי׃

108

נַפְשִׁי בְכַפִּי תָמִיד וְתֹורָתְךָ לֹא שָׁכָחְתִּי׃

109

נָתְנוּ רְשָׁעִים פַּח לִי וּמִפִּקּוּדֶיךָ לֹא תָעִיתִי׃

110

נָחַלְתִּי עֵדְוֹתֶיךָ לְעֹולָם כִּי־שְׂשֹׂון לִבִּי הֵמָּה׃

111

נָטִיתִי לִבִּי לַעֲשֹׂות חֻקֶּיךָ לְעֹולָם עֵקֶב׃

112

סֵעֲפִים שָׂנֵאתִי וְתֹורָתְךָ אָהָבְתִּי׃

113

סִתְרִי וּמָגִנִּי אָתָּה לִדְבָרְךָ יִחָלְתִּי׃

114

סוּרוּ־מִמֶּנִּי מְרֵעִים וְאֶצְּרָה מִצְוֹת אֱלֹהָי׃

115

סָמְכֵנִי כְאִמְרָתְךָ וְאֶחְיֶה וְאַל־תְּבִישֵׁנִי מִשִּׂבְרִי׃

116

סְעָדֵנִי וְאִוָּשֵׁעָה וְאֶשְׁעָה בְחֻקֶּיךָ תָמִיד׃

117

סָלִיתָ כָּל־שֹׁוגִים מֵחֻקֶּיךָ כִּישֶׁ־קֶר תַּרְמִיתָם׃

118

סִגִים הִשְׁבַּתָּ כָל־רִשְׁעֵי־אָרֶץ לָכֵן אָהַבְתִּי עֵדֹתֶיךָ׃

119

סָמַר מִפַּחְדְּךָ בְשָׂרִי וּמִמִּשְׁפָּטֶיךָ יָרֵאתִי׃

120

עָשִׂיתִי מִשְׁפָּט וָצֶדֶק בַּל־תַּנִּיחֵנִי לְעֹשְׁקָי׃

121

עֲרֹב עַבְדְּךָ לְטֹוב אַל־יַעַשְׁקֻנִי זֵדִים׃

122

עֵינַי כָּלוּ לִישׁוּעָתֶךָ וּלְאִמְרַת צִדְקֶךָ׃

123

עֲשֵׂה עִם־עַבְדְּךָ כְחַסְדֶּךָ וְחֻקֶּיךָ לַמְּדֵנִי׃

124

עַבְדְּךָ־אָנִי הֲבִינֵנִי וְאֵדְעָה עֵדֹתֶיךָ׃

125

עֵת לַעֲשֹׂות לַיהוָה הֵפֵרוּ תֹּורָתֶךָ׃

126

עַל־כֵּן אָהַבְתִּי מִצְוֹתֶיךָ מִזָּהָב וּמִפָּז׃

127

עַל־כֵּן ׀ כָּל־פִּקּוּדֵי כֹל יִשָּׁרְתִּי כָּל־אֹרַח שֶׁקֶר שָׂנֵאתִי׃

128

פְּלָאֹות עֵדְוֹתֶיךָ עַל־כֵּן נְצָרָתַם נַפְשִׁי׃

129

פֵּתַח דְּבָרֶיךָ יָאִיר מֵבִין פְּתָיִים׃

130

פִּי־פָעַרְתִּי וָאֶשְׁאָפָה כִּי לְמִצְוֹתֶיךָ יָאָבְתִּי׃

131

פְּנֵה־אֵלַי וְחָנֵּנִי כְּמִשְׁפָּט לְאֹהֲבֵי שְׁמֶךָ׃

132

פְּעָמַי הָכֵן בְּאִמְרָתֶךָ וְאַל־תַּשְׁלֶט־בִּי כָל־אָוֶן׃

133

פְּדֵנִי מֵעֹשֶׁק אָדָם וְאֶשְׁמְרָה פִּקּוּדֶיךָ׃

134

פָּנֶיךָ הָאֵר בְּעַבְדֶּךָ וְלַמְּדֵנִי אֶת־חֻקֶּיךָ׃

135

פַּלְגֵי־מַיִם יָרְדוּ עֵינָי עַל לֹא־שָׁמְרוּ תֹורָתֶךָ׃

136

צַדִּיק אַתָּה יְהוָה וְיָשָׁר מִשְׁפָּטֶיךָ׃

137

צִוִּיתָ צֶדֶק עֵדֹתֶיךָ וֶאֱמוּנָה מְאֹד׃

138

צִמְּתַתְנִי קִנְאָתִי כִּי־שָׁכְחוּ דְבָרֶיךָ צָרָי׃

139

צְרוּפָה אִמְרָתְךָ מְאֹד וְעַבְדְּךָ אֲהֵבָהּ׃

140

צָעִיר אָנֹכִי וְנִבְזֶה פִּקֻּדֶיךָ לֹא שָׁכָחְתִּי׃

141

צִדְקָתְךָ צֶדֶק לְעֹולָם וְתֹורָתְךָ אֱמֶת׃

142

צַר־וּמָצֹוק מְצָאוּנִי מִצְוֹתֶיךָ שַׁעֲשֻׁעָי׃

143

צֶדֶק עֵדְוֹתֶיךָ לְעֹולָם הֲבִינֵנִי וְאֶחְיֶה׃

144

קָרָאתִי בְכָל־לֵב עֲנֵנִי יְהוָה חֻקֶּיךָ אֶצֹּרָה׃

145

קְרָאתִיךָ הֹושִׁיעֵנִי וְאֶשְׁמְרָה עֵדֹתֶיךָ׃

146

קִדַּמְתִּי בַנֶּשֶׁף וָאֲשַׁוֵּעָה [לִדְבָרֶיךָ כ] (לִדְבָרְךָ ק) יִחָלְתִּי׃

147

קִדְּמוּ עֵינַי אַשְׁמֻרֹות לָשִׂיחַ בְּאִמְרָתֶךָ׃

148

קֹולִי שִׁמְעָה כְחַסְדֶּךָ יְהוָה כְּמִשְׁפָּטֶךָ חַיֵּנִי׃

149

קָרְבוּ רֹדְפֵי זִמָּה מִתֹּורָתְךָ רָחָקוּ׃

150

קָרֹוב אַתָּה יְהוָה וְכָל־מִצְוֹתֶיךָ אֱמֶת׃

151

קֶדֶם יָדַעְתִּי מֵעֵדֹתֶיךָ כִּי לְעֹולָם יְסַדְתָּם׃

152

רְאֵה־עָנְיִי וְחַלְּצֵנִי כִּי־תֹורָתְךָ לֹא שָׁכָחְתִּי׃

153

רִיבָה רִיבִי וּגְאָלֵנִי לְאִמְרָתְךָ חַיֵּנִי׃

154

רָחֹוק מֵרְשָׁעִים יְשׁוּעָה כִּי־חֻקֶּיךָ לֹא דָרָשׁוּ׃

155

רַחֲמֶיךָ רַבִּים ׀ יְהוָה כְּמִשְׁפָּטֶיךָ חַיֵּנִי׃

156

רַבִּים רֹדְפַי וְצָרָי מֵעֵדְוֹתֶיךָ לֹא נָטִיתִי׃

157

רָאִיתִי בֹגְדִים וָאֶתְקֹוטָטָה אֲשֶׁר אִמְרָתְךָ לֹא שָׁמָרוּ׃

158

רְאֵה כִּי־פִקּוּדֶיךָ אָהָבְתִּי יְהוָה כְּחַסְדְּךָ חַיֵּנִי׃

159

רֹאשׁ־דְּבָרְךָ אֱמֶת וּלְעֹולָם כָּל־מִשְׁפַּט צִדְקֶךָ׃

160

רִים רְדָפוּנִי חִנָּם [וּמִדְּבָרֶיךָ כ] (וּמִדְּבָרְךָ ק) פָּחַד לִבִּי׃

161

שָׂשׂ אָנֹכִי עַל־אִמְרָתֶךָ כְּמֹוצֵא שָׁלָל רָב׃

162

שֶׁקֶר נֵאתִי וַאֲתַעֵבָה תֹּורָתְךָ אָהָבְתִּי׃

163

שֶׁבַע בַּיֹּום הִלַּלְתִּיךָ עַל מִשְׁפְּטֵי צִדְקֶךָ׃

164

שָׁלֹום רָב לְאֹהֲבֵי תֹורָתֶךָ וְאֵין־לָמֹו מִכְשֹׁול׃

165

שִׂבַּרְתִּי לִישׁוּעָתְךָ יְהוָה וּמִצְוֹתֶיךָ עָשִׂיתִי׃

166

שָׁמְרָה נַפְשִׁי עֵדֹתֶיךָ וָאֹהֲבֵם מְאֹד׃

167

שָׁמַרְתִּי פִקּוּדֶיךָ וְעֵדֹתֶיךָ כִּי כָל־דְּרָכַי נֶגְדֶּךָ׃

168

תִּקְרַב רִנָּתִי לְפָנֶיךָ יְהוָה כִּדְבָרְךָ הֲבִינֵנִי׃

169

תָּבֹוא תְּחִנָּתִי לְפָנֶיךָ כְּאִמְרָתְךָ הַצִּילֵנִי׃

170

תַּבַּעְנָה שְׂפָתַי תְּהִלָּה כִּי תְלַמְּדֵנִי חֻקֶּיךָ׃

171

תַּעַן לְשֹׁונִי אִמְרָתֶךָ כִּי כָל־מִצְוֹתֶיךָ צֶּדֶק׃

172

תְּהִי־יָדְךָ לְעָזְרֵנִי כִּי פִקּוּדֶיךָ בָחָרְתִּי׃

173

תָּאַבְתִּי לִישׁוּעָתְךָ יְהוָה וְתֹורָתְךָ שַׁעֲשֻׁעָי׃

174

תְּחִי־נַפְשִׁי וּתְהַלְלֶךָּ וּמִשְׁפָּטֶךָ יַעֲזְרֻנִי׃

175

תָּעִיתִי כְּשֶׂה אֹבֵד בַּקֵּשׁ עַבְדֶּךָ כִּי מִצְוֹתֶיךָ לֹא שָׁכָחְתִּי׃

176





이합체(離合體), 답관체(踏冠體), 알파벳 시

예레미야애가의 묵상을 시작하면서 많이 듣는 이야기가 이 책의 구조에 관한 것이다.

그 중에서 특히 Acrostics 구조는 히브리어를 모르는 나로서는 이런 구조를 알아채지 못하니 이렇게라도 찾아봄으로 시가서 형식의 글을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일명 알파벳 시라고도 하는 Acrostics는 구약 시가 지닌 또 다른 매혹적인 구조상의 특징으로 종종 사용된다는 점이다.
알파벳시란 하나의 시 안에 있는 연속되는 행들의 첫 글자가 모두 히브리어 알파벳의 순서대로 시작되는 시를 가리킨다.
구약에는 수많은 알파벳 시들이 존재한다. 시편 25, 34, 111, 112, 그리고 145편은 모두 알파벳 시다. 25편과 145편의 경우, 이 문학기법이 매 구절의 첫 글자에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이 두 시편은 모두 히브리어 알파벳의 22글자와 똑같이 22절로 되어 있다.
(실제로는 히브리어 알파벳은 23글자이지만, 알파벳 시의 경우 저자들은 "s"와 "sh"에 해당하는 글자를 한 글자로 결합시키고 있다.) 그러나 111편과 112편의 경우, 이 문학 기법은 매 행의 첫 글자에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이 두 시편 모두 22행으로 이루어진 알파벳 시형을 갖고 있는데, 각 행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연속적인 글자로 시작하고 있다.

아마도 구약에서 가장 흥미로운 알파벳 시는 시편 119편일 것이다.
처음 여덟 구절의 첫 단어는 모두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글자인 알렙(aleph)으로 시작된다. 마찬가지로 9절부터 16절까지는 모두 히브리어 알파벳의 둘째 글자인 베트(beth)로 시작된다. 이런 형태가 8행에 한 번씩 계속되어 119편 끝까지 그리고 히브리어 알파벳 끝 글자까지 이어진다. (성경해석/J.스코드 듀발; J.다니엘 헤이즈/성서유니온선교회 p571~572)

     예레미야애가의 경우 1장, 2장, 3장 그리고 4장은 알파벳 시이지만, 5장은 아니다.

애가의 Acrostics 구조는 이렇다.

1번시(22행시)                        2번시(22행시)                        3번시(22행시)                     4번시(22행시)

a........                                  a.........                                a..........                            a...........
  ........                                    ........                                a.........                                 .........
  ........                                    .........                               a..........                             b..........
b........                                  b........                                 b.........                                .........
  ........                                    .........                               b.........                              c..........
  ........                                    .........                               b..........                                .........   

애가에 있어서 Acrostics를 이룬 목적은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1) 암기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 시인은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기억을 Acrostics를 통하여 보존토록 하고 있다.
 (2) 시온의 멸망에 대한 애도의 완전한 표현을 전달한다. - 즉, "처음부터 끝까지" 정화(catharsis)의 효과를 가지게 한다.
 (3) Acrostics 형태의 엄격한 표현법은, 기교적 표현의 범위를 압축해 줌으로써 시인으로 하여금 해당 주제 혹은 제목에 보다 집
     중적이고 밀도 높은 표현을 하도록 해준다. (구약개론/앤드류 E.힐;존 H.월튼/은성 p479)